소설리스트

기여운 스파이-8화 (8/21)

8장        여운은 딱히 갈 곳을 정해 두지 않은 채 걷고 또 걸었고, 걷다 보니 마을을 벗어나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왔다. 버스를 타고 어디로든 가고 싶었지만 빈손으로 나오는 바람에 차비가 없어서 버스를 탈 수도 없었다.  어딘지도 모르는데 계속 걸을 수도 없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여운은 버스 정류장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내가 그렇지, 뭐…….”    계속 그 말만 나왔다.  이래도 재수 없고 저래도 재수 없고, 진짜 존재감도 없는, 있으나 마나 한 투명 인간 같은 기여운.    “그래, 내가 그렇지, 뭐…….”    또다시 한숨 섞인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마루는 벙커에서 모니터에 띄워진 세 장의 사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장의 사진은 모두 인물 사진이었다. 그런데 사진 속의 세 인물은 죽은 사람들. 부검대 위에서 찍힌 망자의 사진이었다.  이 세 장의 사진은 조금 전 국수방에서 보내 온 사진이었다.  사진과 함께 국수방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로는 모니터에 있는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제주도 바다에서 죽은 채 발견됐고, 나머지 두 사람은 강원도 정선에서 역시 목뼈가 부러진 채 시체로 발견됐다고 했다. 정밀 부검을 해야 사인이 더욱 명확해지지만 부검의의 1차 소견은 전문가에 의한 타살이었다.  국수방에서 쫓고 있던 인물들이 모두 목뼈가 부러져 시체로 발견됐다?  그때 국수방으로부터 또 다른 파일 첨부 메시지가 도착했다. 마루가 메시지에 첨부된 파일을 클릭하자 또 다른 세 장의 사진이 모니터에 띄워졌다.  죽은 사람들의 생전 사진.    국수방 [기여운에게 사망자 신원 확인할 것.]  제5그린벨트 [확인 후 보고.]    마루는 망자들의 생전 사진을 출력한 후 사진을 들고 벙커를 나갔다.    *    한 시간에 한 번씩 지나가는 버스가 두 대가 지나갔으니 두 시간쯤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두 시간 동안 이곳을 떠나 갈 만한 곳이 없을까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 편하게 자신을 받아 줄 만한 곳이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지만 형택의 집에서 신세를 지는 것은 싫었다.  시골로 오기 직전까지 일했던 뼈다귀 해장국집으로 돌아가면 쪽방에서 재워 주며 일도 시켜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웬만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주방일, 홀 서빙, 배달 등등 더 이상 힘든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다. 큰돈 모아 드디어 집을 샀다고 식당 가족들에게 밥에 술에 한턱 제대로 쏘고 떠나왔는데 며칠 만에 다 털렸다고 돌아가려 하니 너무 창피했기 때문이다.  여운은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이 돼 있는 사람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대부분 친하다고 생각해서 저장을 해 둔 번호인데 어떻게 된 노릇인지 마음 편하게 부탁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인생 잘못 살았네…….”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여운은 형택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다 참았다.  형택이라면 여운의 부탁을 들어주고도 남을 친구였지만 형택에게만큼은 더 이상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동안 어디서 뭘 하느라 연락이 되지 않았느냐, 어디서 잠수를 탔느냐고 꼬치꼬치 물어볼 텐데 지금 기분으로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할 자신이 없었다.    “갈 곳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고……. 휴…….”    한숨을 내쉬던 여운은 픽 웃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한심하고 불필요한 신세타령이었기 때문이다.  갈 곳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다……. 이 불행한 상황은 지금 갑자기 여운의 인생에 밀어 닥친 해일이 아니었다. 이미 15년 전에 여운을 덮친 불행이었고, 조금 과장해서 처음부터 갈 곳도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는 신세였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갈 곳 없다 해서 서럽거나 의지할 사람 없어서 슬퍼할 것도 없었다. 물론 가슴 깊숙한 곳에 쌓인 외로움과 그리움은 무슨 짓을 해도 씻어 내지 못할 상처지만 그렇다고 지금 새삼스레 또 슬퍼하고 서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서러울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혼자 치료하며 이겨 냈던 여운이었다. 몸이 아프건 마음이 아프건 아픈 것도 혼자 참고 이겨 냈던 여운이었다.  솔직히 난 왜 이럴까, 내가 이렇지, 내 팔자는 왜 이렇게 박복할까, 왜 나를 낳았을까 따위의 신세 한탄 지겹도록 했던 여운이었다. 지겹도록 했음에도 불구하고 힘든 일에 부딪히면 어김없이 박복한 팔자에 대해 한탄이 절로 터져 나왔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결국 또 혼자 이겨 내야 하는 것을.    “그래……, 언젠 안 그랬어?”    그래, 언젠 안 그랬는가. 언제든 그랬고, 늘 그랬지만 독하게 다시 일어섰었다.    “죽으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결국 살았고, 살았으니 어쩌겠어. 또 살아 봐야지.”    어쩌겠는가. 진짜, 다시 살아봐야지.    “서울에 가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서울에 가서 다시 살아 보자.”    애써 기운을 내 보려고 했지만 좀체 기운이 나지 않고 마음은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    “서울에 가면 돼……. 여기 떠나면…… 기운이 날 거야.”    여운이 기운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버스 세 대가 지나가고 또 세 대가 지나가고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배도 고프고 무료하고 서럽고 하지만 차마루의 집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으로 운동화 두 짝이 쑥 들어왔다.  여운이 고개를 들자 마루가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합니까?”  “멍 때리고 있어요.”    여운이 진짜 멍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침에 나가서 계속 여기서 멍 때리고 있었습니까?”  “빈손으로 나와서…… 버스도 못 탔어요.”  “버스 탔으면 어딜 가려고 했는데요?”  “어디든 가려고 했죠. 여기만 벗어나면 되니까.”  “집에 갑시다.”  “나한테 집이 있나요.”  “내 집에 갑시다.”    마루의 말에 여운이 씁쓸하게 웃었다.    “차마루 씨 집엔 안 가려구요.”  “내 집 안 가면 계속 여기서 멍 때리고 있을 겁니까? 한밤중까지?”  “한밤중까지 멍 때리고 있을 순 없고, 저기…… 돈 좀…… 빌려 줄래요?”  “돈은 왜요?”  “서울 가게요.”  “서울 가서 뭐하게요?”  “먹고살아야죠. 다시 시작해야죠.”  “뭘 다시 시작할 건데요?”  “식당이든 어디든 일자리를 구해서 돈을 벌고, 안 쓰고 안 먹고 모아서 방 한 칸이라도 마련을 해야죠.”  “정말 그렇게 할 겁니까? 지난번처럼 죽으려고 하지 않고?”  “걱정 말아요. 안 죽을 거고……, 죽는다 하더라도 국수방하고는 전혀 상관없게 죽을 테니까. 그리고 국수방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을 거예요. 맹세할 수 있어요. 각서 썼잖아요. 아니, 각서 다시 쓰고 도장 찍으라면 또 쓰고 찍을게요. 백 장이라도 쓸게요. 나중에 내가 진짜 미치거나 환장을 해서 국수방에 대해서 발설을 할 것 같으면 그냥 죽여도 돼요. 그러니까 돈 좀 빌려 줘요. 빨리는 못 갚겠지만.”    여운이 아주 진지하게 하지만 강경하게 부탁을 하자 마루가 가만히 여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가요, 빌려 줄 테니까. 지갑 안 갖고 나왔어요.”  “정말 빌려 줄 거예요?”  “빌려 줄 테니까 갑시다.”    여운은 선뜻 돈을 빌려 주겠다는 마루의 말에 서운함을 느꼈다. 어서 떠나라는 듯, 제발 떠나 달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운은 서운함에 울컥 한 소리 질러 주고 싶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일어나 마루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배 안 고파요?”  “괜찮아요.”  “하루 종일 굶었잖아요.”  “굶는 거 단련돼서 하루 굶는 건 일도 아니에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여운을 흘낏 쳐다봤다.    “아깐…… 내가 말이 심했어요. 조금 더 순화된 말로 할 수도 있었는데.”    마루가 미안해하는 어투로 말했다.    “아니에요. 머리도 나쁘고 얼뜨기한테는 직설법이 가장 알아듣기 좋고 이해도 빠르죠.”    좋게 받아들이는 척 말했지만 알고 보면 비꼬는 말이었다.    “고형택 씨하고 연락했어요?”  “아뇨.”  “아니면…… 서울에 가서 누굴 만나려고요?”  “그냥 가는 거예요.”  “잠자리는 구했어요?”  “아무 데서나 자면 되죠.”  “아무 데서나라니?”  “아무 데서나요. 나 이래 봬도 노숙도 해 봤던 사람이에요. 지하철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도 자 보고, 공원 풀숲에서도 자 보고, 아무 건물이건 옥상에 문 열려 있으면 거기서도 신문지 같은 거 덮고 자고. 물론 오래전이긴 하지만.”  “집이…… 없었어요?”  “얘기가 좀 긴데…… 다 생략하고 월세를 못 내서 나와야 했어요.”  “쫓겨났어요?”  “쫓겨난 건 아니죠. 돈도 못 내면서 버티는 게 쪽팔리고 죄송해서 내가 나온 거죠.”  “그래서 노숙을 한 거예요? 여자가?”  “어쩌겠어요, 당장 갈 곳이 없는데.”  “몇 살 때요?”  “스물한 살 때요.”    여운이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우유 배달하고 요구르트 배달하고 그랬거든요. 그때 스리잡 포잡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아는 분 소개로 여기저기 아파트 단지 돌아다니면서 장사하는 업체에 들어가서 장사하는 걸 배웠어요. 몇 달 간격으로 돌아가면서 채소도 팔고 과일도 팔고 생선도 팔고 그러면서요. 겨우 1년 배우면서 장사했는데 다 배운 줄 알고 장에서 머리핀이나 머리끈, 모자, 이런 거 파는 사장님한테 냉큼 장사를 넘겨받은 거예요. 가족이랑 살던 집 전세금 빼서 월세로 옮기고 남은 돈으로 보증금이랑 권리금 물고 말이에요. 그런데 석 달 만에 홀랑 다 까먹었어요. 진짜 갑부가 될 줄 알았는데 멋모르고 덤볐다가 거지가 된 거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우리나라 최고 대학에 합격까지 했는데…… 장사하러 다니는 거 힘들지 않았어요?”  “창피하지 않았냐고 묻는 거죠?”    여운의 되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창피하고 힘든 게 문제가 아니었어요. 당장 먹고살아야 하니까. 죽지 않으려면 뭐든 했어야 하니까. 최고 대학에 합격하면 뭐해요. 결국 입학도 못 했고 입학했다 하더라도 끝까지 다니지 못할 게 뻔했는데……. 내세울 게 없으면 창피할 것도 없어요. 구길 체면 자체가 없으니까.”    여운이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지만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시무룩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남자 친구…… 어떻게 만났어요?”  “도시락 배달하다가요. 도시락 전문집에서 일했거든요. 그 사람은 회사원이었고 나는 점심시간 저녁 시간 야식 시간에 도시락 배달하는 사람이고. 한 번 배달하고 두 번 배달하고 열 번 배달했을 즈음 날 알아보고 먼저 인사해 주고, 스무 번 배달했을 즈음 서로 웃으며 인사하고, 서른 번 배달했을 즈음엔 내가 혼자서 벅차게 들고 온 도시락 가방들을 대신 들어 주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러다가 그 사람이 데이트를 신청했어요. 그날은 목요일이었어요.”

여운이 도시락 열 개씩 든 비닐봉지를 양손에 들고 빌딩 쪽문 앞에 나타나자마자 세준이 잠겼던 문을 열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왜 내려오셨어요?.>  <내가 들어 줄게요.>    세준이 여운의 양손에 든 비닐봉지를 빼앗듯 받아 들었다.    <안 그러셔도 돼요. 이리 주세요. 사장님 아시면 저 혼나요.>  <사장님한테 말 안 하면 되죠.>    세준이 앞장서서 빌딩 안으로 들어갔고 여운은 종종걸음으로 세준을 쫓으며 도시락 봉지를 빼앗으려 했지만 세준은 절대 뺏기지 않았다. 결국 엘리베이터까지 함께 타게 됐는데, 23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여운이 사정해도 세준은 도시락 가방을 주지 않았다.    <사장님 아시면 저 정말 혼나요.>  <절대 말 안 할 테니까 걱정 말아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에 주세요. 다른 직원분들이 보고 사장님한테 말할지도 몰라요.>  <알았어요. 도착하면 줄게요. 그런데…… 이렇게 무거운 걸 어떻게 혼자 들고 왔어요?>  <배달 직원들 다 배달 나갔어요. 야근하는 회사가 많아서요.>  <남자 친구 있어요?>  <네?>    배달 직원 얘기 하다가 갑자기 세준이 남자 친구 얘기를 꺼내자 여운이 잘못 들은 줄 알고 세준을 쳐다봤다.    <남자 친구 있냐고요.>  <아뇨.>  <진짜 없어요?>  <네. 없어요.>  <이상하네요.>  <뭐가요?>  <이렇게 예쁜 아가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다는 게 말이 돼요?>    세준의 물음에 여운이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빤히 쳐다보자 세준이 제법 심각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여운 씨한테 남자 친구가 없다는 건 한강에 고래 떼가 나타났다는 것만큼이나 말이 안 되는 소리잖아요.>    세준이 농담을 진지하게 말했고, 세준의 진지한 농담 때문에 여운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웃으니까 더 예쁘네요.>    예쁘다는 말에 여운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웃음을 멈췄다.    <토요일에 뭐 해요?>  <일해요.>  <회사 다 쉬는데 식당 안 쉬어요?>  <토요일에 근무하는 회사도 있어서 배달이 제법 들어오거든요.>  <그럼 일요일엔 뭐 해요?>  <일요일도 일해요. 근처 아파트에서 주문이 들어와서.>  <쉬는 날 없어요? 하루도 안 쉬어요?>  <화요일이 쉬는 날이에요.>  <아, 그럼 화요일 저녁에 만날까요?>  <네? 무슨…….>  <화요일에 쉰다면서요. 그러니까 화요일에 만나자고요.>  <만나자고요? 나를요?>    여운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  <왜…… 만나자고 하세요?>  <데이트하고 싶어서요.>    세준이 말했고 여운은 심장이 터질 듯이 폭주하는 것을 느끼며 세준을 바라봤다.    <저하고…… 데이트를요?>  <다음 주 화요일 6시. 어때요?>  <왜 저하고 데이트를 하려고 하세요?>  <왜겠어요. 여운 씨가 좋으니까 그러죠.>    세준의 말에 여운이 깜짝 놀란 눈으로 세준을 쳐다봤다.    <몰랐어요?>  <뭘요?>  <진짜 티 많이 냈는데 눈치 못 챘어요?>  <무슨 티를요?>  <여운 씨 좋아하는 티 많이 냈는데, 전혀 몰랐어요?>    여운은 심장이 미친 듯이 폭주하다가 급정거를 한 듯 숨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좋고 설레서.    <여운 씨 처음 만나고 난 후로 매일 도시락 시켜 먹었는데……, 여운 씨 보고 싶어서. 저녁때도 집에 가면 어머니가 해 주신 저녁밥이 기다리는데도 일부러 도시락 포장하러 가고 그랬는데, 여운 씨 보고 싶어서. 쉬는 날인데도 회사 나와서 도시락 배달시키고 그랬는데. 여운 씨가 보고 싶어서……. 정말 몰랐어요?>  <전…… 몰랐어요.>    여운은 갑작스러운 고백에 너무 떨리고 수줍어서 새빨개진 얼굴로 세준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여운 씨도 나한테 관심 있는 줄 알았는데……. 나만 좋아하는구나.>  <좋아한다구요? 나를요?>  <예.>  <날 왜…… 좋아하세요?>  <왜라니요?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거에는…… 이유가 없어요. 그냥 좋은 거지.>    세준이 여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고, 여운은 보고 있기 안쓰러울 정도로 새빨개진 얼굴로 숨마저 멈추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내가 여운 씨 좋아하는 걸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고, 이제 알았으니까 데이트합시다.>  <저 그게…….>    여운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데 엘리베이터가 23층에 멈춰 섰고 곧 문이 열렸다. 세준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는데 여운이 재빨리 세준을 붙잡았다.    <도시락…… 주세요.>  <사무실까지 들어 줄게요.>  <아니, 안 돼요. 주세요.>    여운이 봉지를 끌어당기자 세준이 어쩔 수 없이 여운의 손에 도시락 봉지를 쥐여 줬다.    <사무실까지 들어 주고 싶은데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다음 주 화요일 6시예요.>    세준이 일방적으로 정한 데이트 날짜와 시간을 말하더니 사무실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 버렸다.  여운은 얼떨떨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세준을 바라보다가 세준이 일하는 사무실로 도시락을 들고 들어갔다.    <도시락 배달 왔습니다.>  <아! 거기 테이블에 세팅 좀 해 줘요.>    누군가 쳐다보지도 않고 지시했다. 늘 있었던 일이라 고분고분 테이블에 도시락을 세팅을 하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세준이 여운을 돕기 시작했다.    <안 도와주셔도 돼요.>    여운이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말했지만 세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운을 도왔다.    <큰일 났어요.>    세준이 속삭였다.    <뭐, 뭐가요?>  <내일 점심때까지 어떻게 기다릴지. 여운 씨 보고 싶어서요.>    세준이 속삭였고 여운은 수줍음에 아무 말도 못 했다.    *    세준이 처음 데이트 신청했던 날을 지금까지 생생하게 가슴에 담고 있었던 여운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첫사랑이었어요?”  “네. 그랬어요. 첫사랑.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그 첫사랑.”    여운이 담담하지만 어쩐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    집으로 돌아온 여운이 방에서 꼭 챙겨야 할 것들만 골라서 짐을 싸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마루가 방으로 들어왔다.    “벌써 짐 싸는 거예요?”  “내친김에 실행에 옮기려구요. 그런데 다 들고 갈 수가 없어서 몇 개는 맡겨야 할 것 같은데, 맡아 줄 수 있어요?”  “문제가 생겼어요.”  “문제라니요?”  “먼저 이것부터 확인해 봐요.”    마루가 여운에게 세 장의 사진을 내밀었다.    “이 사람들 맞아요?”    사진을 받아서 확인하던 여운이 “맞아요!” 하고 소리쳤다.    “이 사람이 채 실장, 이 사람이 김정훈, 이 사람은 예술가 조수라던 권우진인가? 그 사람이에요. 잡았어요?”  “곧 잡을 것 같아요.”  “꼭 잡아 줘요. 꼭 잡아서 내 앞에 끌고 와 줘요.”  “국수방에서 명령이 내려왔어요.”  “무슨 명령요?”  “기여운 씨를 보내지 말라고요.”    순 거짓말이었다. 국수방에서는 마루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마루가 여운이 떠나려 한다는 것을 아예 국수방에 보고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순전히 마루의 결정이었다.  처음부터 보낼 생각은 아예 없었다.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한 것도 집으로 데려오기 위한 얕은 수였을 뿐이다.  아침에 지하 벙커에 들어가려 했던 것 때문에 너무 심한 말로 몰아세웠었는데 사실 여운이 아침도 먹지 않고 집을 나가고 난 직후부터 후회했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 지나고 저녁때가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찾아 나선 것도 후회 때문이고 미안함 때문이었다.  감시 카메라를 샅샅이 살펴 마을을 나서는 것까지는 확인을 했는데 마을을 나선 후의 흔적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아 솔직히 속을 태우고 있었다. 맨몸으로 나갔으니 멀리 가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 지난번처럼 나쁜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긴 것은 아닌지 불길한 생각만 들어 속이 안 탈 수가 없었다.  속을 태우던 끝에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여운을 발견했고, 그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반가운 표현을 할 줄도 모르고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무덤덤하게 쳐다봤지만 진심으로 반갑고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빌려 달라는 돈 빌려 주고 이쯤에서 완전히 기여운과의 인연을 끝내는 것이 옳다는 생각도 5퍼센트쯤 하긴 했었다. 하지만 나머지 95프로가 이대로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 95프로도 집에 도착했을 땐 100프로가 돼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운이 들려준, 마루로선 상상도 되지 않는 여운의 험난했던 시간들 때문이었다.  가여웠다. 애처롭고 딱했다. 가엽고 애처롭고 딱하기 때문인지 갑자기 잘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잘해 줄 것인가는 마루도 몰랐다. 그냥 따뜻한 집에서 재우고 따뜻한 밥을 먹이고 싶었다. 다른 사심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라도 잘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여운을 어떻게 하면 떠나지 못하게 붙잡을까. 어떻게 하면 주저앉힐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대놓고 가지 말라고 붙잡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자존심도 상하지 않고 그럴듯한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아주 마땅하고 뾰족한 수가 떠올랐는데 그것이 바로 국수방이었다. 그리고 국수방의 핑계는 아주 잘 먹혔다.    “왜 보내지 말라고 명령을 한 거예요?”  “이 사람들 잡으면 증언도 해야 하고 돈도 돌려받아야 하잖아요.”  “증언……. 잡은 후에 연락해요. 그때 증언하면 되잖아요.”  “이 사람들 잡으면 그때 보내 줄게요. 이 사람들이 해코지할 수도 있으니까.”  “이 사람들이 날 해코지한다구요? 내 돈 사기 친 놈들인데 내가 해코지를 했으면 했지, 지놈들이 왜 나한테 해코지를 해요?”  “사기꾼들 중에는 질이 아주 나쁜 놈들이 많거든요. 그리고 국수방에서는 아직 여운 씨를 보내 주기엔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니요?”  “국수방의 존재를 언제든 폭로할 수 있다고 염려하고 있어요.”  “각서 쓴다 했잖아요. 백 장이라도 써 준다구요. 폭로 안 해요. 말할 곳도 없어요. 맹세코 비밀 지킬 거예요. 그러니까 보내 줘요.”  “미안해요. 나로선 국수방의 명령을 어기고 여운 씰 보내 줄 권한이 없어요.”  “여기 있는 게 너무 불편해요. 차마루 씨가 나를 싫어하는 걸 아는데 알면서도 버티는 거 너무 힘들어요. 눈치 보면서 버티는 거 진짜 힘들고 쪽팔린다구요.”  “싫어하는 거 아니에요. 아까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건 인정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여운 씨가 여기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말고 쪽팔려하지도 말아요.”    마루가 진심으로 말했지만 여운은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싫어하는 거 알아요. 처음부터 싫어했던 거 알고 있어요. 싫어한다고 원망하는 거 아니에요. 싫어할 만해요. 누구라도 성가셔했을 거예요. 불청객이니까. 재수 없게 떠맡게 돼서 차마루 씨도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불편할 거예요. 내가 이렇게 불편한데 오죽하겠어요. 그러니까 서로 불편해하지 말고 제발 보내 줘요.”    여운이 사정하듯, 아니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애원하듯 부탁했다.

마루는 여운이 진심을 다해 부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보내 줄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내 권한 밖이에요.”  “내가 국수방 아저씨, 아니 팀장님한테 직접 부탁할까요?”  “소용없어요. 국장님 명령이니까.”  “그때 그 여자분요? 내가 국장님한테 직접 부탁할게요.”  “국장님……, 기여운 씨 상대 안 해 줄 거예요.”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여기 있어야 해요? 정말 난 아무 데도 못 가는 거예요?”    여운이 상심한 얼굴로 물었고 마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 안 빌려 줄 거예요?”  “미안해요. 빌려 줄 수 없어요.”  “투명 인간인데…… 아무 데도 못 가는 투명 인간이네요. 결국 감옥에 갇힌 거네요.”    여운이 처연한 얼굴로 중얼거렸고 마루는 국수방까지 팔며 못 간다고 못을 박은 터라 더는 해 줄 말이 없어서 여운의 방을 나오고 말았다.  서울에 간다 하더라도 의지할 곳이 없고 그래서 노숙할 것이 뻔했기에 거짓말까지 하면서 붙잡았는데, 붙잡고 보니 또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더는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붙잡은 것인데, 앞으론 조금이라도 잘해 주려고 붙잡은 것인데 결론적으로는 잘해 준 것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하 벙커에서 어떻게 하면 여운의 구겨진 기분을 풀어 줄까 고민하던 마루는 좋은 생각이 나자 재빨리 벙커에서 올라와 여운의 방문을 두드렸다.    “네.”    여운의 대답 소리가 들리자 마루는 방문을 열었다.  여운은 꾸리다 만 짐 가방 사이에 앉은 채 외롭고 적적한 표정으로 마루를 쳐다봤다. 여운의 표정이 어찌나 외로워 보이는지 어디선가 서늘한 외풍이 이는 듯했다.    “나 잠깐 외출해요.”    마루의 말에 여운이 이번엔 뚱한 얼굴이 됐다.    “왜 말해요? 왜 일일이 보고해야 하냐고 아침에 난리를 치더니.”  “보고가 아니라 알려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왜 알려 주냐구요. 일일이 알려고 하지도 말고 던져 준 사탕이나 빨아먹으며 닥치고 있으라더니.”  “내가 그렇게까지 험하게 말한 적은 없는데.”  “결국 그 뜻이었잖아요.”  “한 시간 내로 돌아올 거예요. 집 잘 보고 있어요.”    마루는 대답 없이 비죽거리는 여운을 두고 재빨리 차를 몰고 집을 떠났다가 40분 후 돌아왔다. 돌아온 마루의 양손에는 치킨과 맥주가 들려 있었다.    “한잔합시다.”      여운은 마루가 차려 놓은 치맥 상을 시큰둥한 얼굴로 본체만체했다.  치킨이 양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고소한 기름 냄새로 악마처럼 여운을 유혹했지만 여운은 쉽게 유혹당하지 않았다. 한가롭게 치킨 뜯으며 맥주 마실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든 감사히 잘 먹고 변죽도 좋은 여운이었지만 지금은 센티해진 기분이 요만큼도 좋아지질 않아 치킨도 맥주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치킨 싫어해요?”    여운이 먹어 주길 기다리다 못한 마루가 물었다.    “무슨 수로 치킨을 싫어하겠어요. 하지만 감옥살이하는 주제에 치킨 맥주라니, 난 됐으니까 혼자 뜯고 씹고 맛보고 즐기세요.”    여운이 쌔무룩한 낯으로 비꼬듯이 말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마루가 꽉 잡아 눌러 앉혔다.    “특식이에요.”    특식이라는 말에 여운은 치킨 다리는 물론이고 치킨 다리를 쥐고 있는 마루의 손까지 화르르 태울 듯이 노려봤다.    “황송해서 못 먹겠네요.”    여운이 치킨 다리로 마루의 콧잔등을 후려치고 싶은 얼굴로 말하자 갑자기 마루가 튼실한 치킨 다리를 여운의 코앞에 쑥 들이댔다.    “절대 안 먹을 거예요!”    여운이 주먹까지 불끈 쥐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하지만 코끝을 강하게 후려치는 감칠맛 넘치는 기름 냄새에 경기 난 콧구멍의 벌렁거림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먹고 싶잖아.”  “아니거든요!”  “같이 먹으려고 사 왔는데 안 먹으면 내가 무안하거든?”    마루가 더욱 가까이 닭 다리를 들이대자 여운은 결국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풍부하고 은혜로운 기름 냄새가 콧구멍 깊숙하게 파고들어 쏜살같이 온 신경을 장악하며 진격하더니 어느새 뇌를 마비시키며 온몸의 감각을 오로지 치킨을 향해 경배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콧구멍은 흡사 팔랑개비처럼 벌렁거려지고 악마의 유혹에 영혼을 팔아 버린 침샘은 화산처럼 폭발해 버려 꼴깍꼴깍 침이 한 바가지씩 넘어갔다.    “콧구멍 벌렁거리지 말고 빨리 먹어.”    마루가 정곡을 찌르며 마치 닭 다리를 콧구멍 안으로 쑤셔 넣을 듯 더욱 가까이 들이대자 여운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닭 다리를 확 낚아챘다.    “내가 먹고 싶어서 먹는 게 아니라 차마루 씨 무안하지 말라고 먹어 주는 거예요. 진짜 억지로 먹어 주는 거라구요.”    진짜 억지로 먹는 거라고 말했지만 여운은 튼실한 치킨 다리를 이미 신나게 뜯어 발기고 있었다.    “치킨에 맥주는 기본이고.”    마루가 캔 맥주 꼭지를 따서 건넸지만 여운이 맥주는 사양했다.    “치킨은 뜯으면서 맥주는 왜 사양해?”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체질이라서요. 말하자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수준이라고 할까.”  “술을 잘 마신다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수준으로?”  “허풍 아니고 진짜예요. 맥주는 그냥 음료수예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어디다 대고 술고래인 척하냐는 듯 픽 비웃었다.  마루는 대한민국에서 상대가 없다 할 만큼의 주당이었다. 술 좀 한다고 떠벌리는 사람과 술판을 벌여서 속된 말로 뻗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주당 중의 주당이었다. 뻗기는커녕 혀 풀림도 없는 매머드급 술고래였다. 그런 마루 앞에서 맥주는 음료수라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수준이라고?  마루는 쓸데없이 승부욕이 발동하는 것을 애써 누르지 않고 제대로 겨뤄 보기로, 아니 겨루어 주기로 결심했다. 여운이 ‘어맛, 뜨거워!’ 하며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하도록 납작 눌러 줄 작정이었다.    “맥주가 진짜 음료수인지 아닌지 한번 붙어 보자고.”  “허. 후회할 텐데.”    여운이 살살 마루의 약을 올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고.”  “맥주 떨어지면 대체할 술 있어요?”  “술 걱정은 하지 말고 붙자고.”  “그냥 붙으면 재미없잖아요.”  “그럼?”  “뭐라도 걸어야죠.”  “내기를 하자?”  “겁나요?”  “천만에.”    마루가 호기롭게 대꾸했다.    “그런데 차마루 씨, 왜 은근슬쩍 말이 짧아져요?”  “친한 척하려고.”    친해지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친한 척하려 한다는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황당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뭐하러 친한 척해요?”  “어쩔 수 없이 부부로 위장하기로 했는데 천하의 원수처럼 지낼 순 없잖아. 간첩 잡기 전까지는 친한 척을 해야 간첩도 동네 사람들도 속아 넘어갈 것 아니야.”    마루의 말에 여운이 어이가 없어 턱이 빠질 듯한 얼굴로 마루를 째려봤다.    “난 스파이도 요원도 아니라면서요. 그냥 민간인이라면서요. 부부 스파이 위장은 다 뻥이라면서요.”  “엄밀하게 말하면 뻥이지.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1프로만 도와줘. 딱 1프로만.”  “딱 1프로가 뭔데요?”    아주 중요한 역할이라는 말에 여운이 솔깃한 얼굴로 마루를 바라봤다.    “친한 척하기.”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김이 팍 샌 얼굴로 마루를 째려봤다.    “헐, 메주가 방언 터지는 소리도 아니고 어이가 없어서. 부부로 위장해서 친한 척하는 게 딱 1프로라구요? 부부로 위장하는 게 어떻게 딱 1프로예요? 50프로는 되겠구만.”    여운이 기가 찬 듯 맥주를 주욱 들이켰다.    “50프로는 아니거든? 1프로든 50프로든 다른 역할을 줄 수도 없어. 기여운은 어떤 훈련도 받은 적 없는 민간인이고 민간인이 수행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작전이거든.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을 만큼.”    마루의 말에 여운이 뜨끔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국수방에서, 아니 내가 기여운을 간첩으로 오인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어. 그래서 죽게 놔둘 수가 없었어. 내 잘못으로 인해 죽는다면…… 죄책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거든. 기여운에게 스파이를 제안한 건 오 팀장님의 즉흥적인 결정이었어.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민간인을 특수 요원 곁에 두는 것 말이야.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이지. 하지만 오 팀장님은 어쩔 수 없이 그런 제안을 하셨을 거야. 국수방도 보호해야 하고, 나도 보호해야 하고 그리고 기여운도 보호해야 하니까. 그래서 기여운을 다시 이곳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어떤 역할도 줄 수가 없는 거야. 너무 위험하니까. 난 간첩을 잡아야 해.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임무는 기여운을 보호하는 일이야. 내 목숨을 걸고.”    마루의 설명에 여운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마루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최선을 다해서 차마루 씨가 나 때문에 목숨을 걸 일은 없도록 할게요.”    여운이 꽤 똘똘한 말을 하자 마루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내가 차마루 씨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여운은 그냥 내뱉은 말이었지만 마루의 귀에는 이상하게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 해.”  “그거야 모르는 거죠. 민간인이 특수 요원을 위해 목숨을 건다. 헐, 진짜 멋진 것 같지 않아요?”  “1도 안 멋져!”  “흥, 멋진 건 자기가 다 하려고. 하여튼! 과연 우리가 친한 척할 수 있을까요?”  “노력하자고.”  “친한 척 발연기 하다가 정말 친해지면요?”  “그럴 일 없도록 해야지. 간첩만 잡으면 헤어질 거니까.”  “그렇죠. 헤어질 거니까. 깨끗하게. 간첩만 잡으면 차마루 씨가 목숨을 걸고 날 보호할 일도 없어지는 거죠?”  “당연하지.”  “간첩을 빨리 잡았으면 좋겠어요. 난 나 때문에 누군가 목숨 거는 거……, 나 때문에 누가 또 죽는 거 진짜 싫거든요.”  “내가 기여운 때문에 목숨 거는 게 싫으면 그냥 조용히 가만히 친한 척만 하면 돼.”  “좋아요. 그까짓 거야 뭐 우습죠. 간첩 잡을 때까지 친한 척 잘해 보자구요. 파이팅!”    여운이 하이파이브 하자는 듯 손을 들자 마루가 픽 웃으며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런데 부부로 위장하는 거 말고 다른 방법 없어요?”  “왜? 내가 기여운 취향이 아니어서?”  “것도 그렇고 차마루 씨도 내가 취향이 아니라고 했고, 그러니까 서로 취향이 아닌 사람들끼리 난데없이 부부로 위장한다는 거 너무 작위적이잖아요. 누가 믿겠어요? 사기당해서 여기 온 순간부터 내내 뜯어먹을 듯 싸웠는데 그런 사람들이 며칠 만에 부부가 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좀 그럴듯한 다른 방법 없어요?”  “난 없으니까 기여운이 찾아, 그럴듯한 다른 방법.”  “특수 요원이 그런 것 하나도 딱딱 못 찾아내고. 쯧쯧.”  “특수 요원은 그런 거 찾아내는 사람 아니거든?”

마루가 버럭버럭했지만 여운은 마루의 버럭쯤에는 이미 무뎌진 지 오래였다.    “알았어요. 딱 1프로만큼만 도와줄게요. 1프로만큼만 친한 척한다는 말이에요.”  “알았어. 딱 1프로만 친한 척해.”  “그건 해결됐고! 그럼 뭘 걸까요?”  “걸긴 뭘 걸어?”  “내기 걸어야죠.”  “원하는 걸 말해.”  “내가 이기면 그러니까 차마루 씨가 먼저 떡이 돼서 쓰러지면 저기.”    여운이 손가락으로 지하 벙커 문을 가리켰다.    “저기 구경시켜 줘요.”    여운의 조건에 마루가 움찔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보며 머리를 굴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여운보다 먼저 뻗을 일은 절대 없었기 때문이다. 여운에게 술내기에서 질 확률이 0퍼센트. 그렇다면 지하 벙커를 보여 줄 확률도 0퍼센트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좋아요. 차마루 씬 뭘 걸래요?”  “기여운 씨가 먼저 떡이 돼서 쓰러지면 내일부터 삼시 세끼 밥 책임지고, 청소 설거지 책임지고, 메주 밥도 책임지고.”  “완전 무수리가 되란 말이군요.”    여운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마루를 쏘아봤다.    “내기니까.”  “그렇다면 나도 조건을 조금 수정해야겠네요. 내가 이기면 지하실 구경시켜 주고 차마루 씨가 삼시 세끼 밥 다 하고, 청소하고 설거지도 하고, 메주 밥도 줘요. 그리고 또, 밤에 불 켜 놓고 자게 해 줘요.”    여운이 수정된 조건을 제시하자 마루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은 왜 켜 놓고 자겠다는 거야?”  “그냥, 귀신이…… 좀 무서워서요.”  “기여운이 더 무섭거든?”  “하여튼, 내기할 거예요, 말 거예요?”    잠깐 고민하던 마루가 강한 눈빛을 뿜으며 여운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좋아.”  “나중에 곡소리 내지 말고 신중하게 결정해요.”  “무수리 걱정이나 하시지.”    그렇게 마루와 여운의 술 겨루기가 시작했다.  마루가 사 온 캔 맥주는 열 캔. 사이좋게 다섯 캔씩 나눠서 마시기 시작했다.  서로를 향해 자신만만한 시선을 던지며 한 손에는 치킨 조각을, 한 손에는 캔 맥주를 들고 열심히 뜯고 마시던 중 마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사람하고는 연락 전혀 안 해?”  “누구요?”  “첫사랑.”    마루의 말에 치킨 맛 떨어지게 뜬금없이 첫사랑 얘길 왜 꺼내냐는 듯 여운이 마루를 흘겨봤다.    “안 해요.”  “생각나지 않아?”  “…….”  “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어 하지 않으려고요.”  “왜?”  “보고 싶어 한다고 다시 내 남자가 되는 것도 아닌데 뭐……. 이미…… 다른 여자의 사람이에요. 그 사람 결혼했어요, 작년에.”    여운이 아릿한 아픔이 느껴지는 미소를 지은 채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휴대폰에 저장돼 있는 사진…… 그 사람이야?”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못 지웠어요. 바보 같죠?”    여운이 씁쓸하고 민망한 미소를 지었다.    “형택 씨가 그러던데, 기여운한테 휴대폰은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 그 사람 사진 때문이었어?”  “한심하죠?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된 남자를 아직도 못 잊고 사진 갖고 있는 거.”  “첫사랑은 애틋한 거니까.”  “이해해 주는 척해 줘서 고마워요.”  “맞아. 이해해 주는 척만 하는 거야.”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피식 웃었다.    “차마루 씬 여자 친구 있어요?”  “없어.”  “있었어요?”  “오래전에.”  “왜 헤어졌어요?”  “뭐, 그냥…… 별로 극적이지 않게 흐지부지 끝났지.”  “극적이지 않게 흐지부지 어떻게 끝났는데요?”  “국수방에서 일하게 되면서…… 특수한 일을 하다 보니까 여자 친구한테도 숨겨야 되는 게 점점 더 많아지고, 연락하는 것도 어려워지고, 데이트 횟수도 줄어들고 그러다 보니 그 친구가 많이 힘들어했어.”  “국수방에서 일하는 걸 여자 친구한테 말하지 그랬어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누구에게도 국수방에 대해서 발설하지 않기로 서약을 했기 때문에 말할 수 없었어.”  “그놈의 서약. 여자 친구와 헤어질 판인데 서약 때문에 말을 못 했다구요?”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고 맹세했으니까.”  “누가 헤어지자고 한 거예요? 차마루 씨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아니, 그 친구가.”  “그래서 그냥 알았다고 하면서 헤어진 거예요? 마치 헤어지자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여운이 뭐 이따위로 차갑고 책임감 없는 사랑이 다 있냐는 듯이 따져 묻자 마루가 피식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붙잡았지만…… 그땐 너무 늦었더라고.”  “사생결단 붙잡은 게 아니라 설렁설렁 붙잡는 척만 했겠죠.”  “사생결단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설렁설렁 붙잡는 척한 것도 아니었어. 내가 국수방을 그만두더라도 이 여잔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오……!”    여운이 ‘멋진데?’ 하는 뜻으로 추임새를 넣었다.    “그런데 뭐가 늦었더라는 거예요?”  “나한테 헤어지자고 했을 땐 이미 맞선을 보고 결혼 결심을 굳힌 남자를 만난 후였어.”    마루의 설명에 여운이 뜨악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뭐라구요? 차마루 씨하고 완전히 헤어진 것도 아닌데 맞선을 봤다구요? 그러니까 차마루 씨하고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고 이도 저도 아닌 관계가 되어 갈 때쯤 그래도 헤어진 건 아닌데 여자 친구가 맞선을 봤다는 거잖아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게 말하면 뒤통수 친 거고 좋게 말하면 실속파네요. 어쨌든 뭐 얼마나 대단한 남자하고 맞선을 봤기에 차마루 씨를 찬 거예요?”  “검사.”    마루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오……, 세네.”    여운은 즉시 수긍했다.    “세지.”    마루도 즉각 동의했다.    “차일 만했네요.”  “차인 게 아니라 헤어진 거라고.”  “차인 거예요. 명백하게.”    여운은 명확하게 지적해 준 다음 세 캔째 맥주를 시원하게 비웠다.    “아 참, 그런데 내가 채 실장 놈한테 사기당한 집,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정말 간첩이에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채 실장이 간첩 집을 나한테 사기 친 거네요?”  “그렇지.”  “와, 겁도 없이 간첩을 건드리다니.”  “간첩 집인 줄 몰랐을 테니까.”  “간첩은 어떻게 생겼어요? 못생겼어요? 잘생겼어요? 얼굴 보면 나 간첩님 이러고 딱 티 나요?”  “평범해. 간첩 티 나지 않게.”  “하긴 좀 무식한 질문이었네요. 그런데 간첩인 줄 알면서 왜 안 잡아요?”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왜요? 난 무늬만 스파이여서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픽 웃었다.    “칫, 보나 마나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못 잡는 거겠죠.”    여운이 삐친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는데 마루는 속으로 좀 놀랐다. 마을에 사는 간첩을 아직 검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여러 이유 중 한 가지에 증거 불충분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생각해?”  “왜겠어요. 날 간첩으로 오인했을 정도인데 국수방 수준이 뻔하죠. 국수방 능력으론 간첩 몇 명이나 잡겠어요?”    여운이 노골적으로 국수방의 능력을 깎아내리자 마루는 굴욕감을 느끼는 동시에 반발심이 치밀어 올라 여운을 노려봤다. 하지만 여운은 마루의 눈빛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째려볼 것 없어요. 내가 없는 말 한 것도 아니고.”  “우리 국수방을 뭐로 보고…….”  “됐고!”    여운은 반박하려는 마루의 말을 깡똥 잘라 내 버렸다.    “요즘 간첩 잡으면 포상금 얼마예요?”    여운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포상금은 왜?”  “왜겠어요. 간첩 잡은 포상금으로 다시 한 번 살아 보려고 그러죠.”  “어떻게 간첩을 잡을 건데?”  “그거야 이판사판 물불 안 가리고…… 미모로?”    여운의 대꾸에 마루가 기차 기적 소리만큼이나 커다랗게 콧방귀를 뀌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낭비는 없어.”    마루의 비아냥거림에 이번엔 여운이 45톤 덤프트럭 경적만큼 커다랗게 콧방귀를 뀌었다.    “체 게바라라는 아저씨가 이런 말을 했어요. Be a realist, but have an unrealistic dream in your heart. 이게 뭔 말이냐면,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간첩 눈에는 내가 절세미인일 수도 있어요.”  “간첩 잡으려다 잡아먹히지 말고 그냥 리얼리스트나 돼. 기여운 때문에 내가 목숨 거는 거 싫다면서.”    마루의 일침에 여운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돈이 1원도 없으니까 하도 궁해서 간첩이라도 잡을까 하는 거예요. 알지도 못하면서. 채 실장 잡아 준다고 했던 말 꼭 지켜요.”  “잡아도 돈을 돌려받긴 힘들 거야. 이미 다 썼거나 뺏기지 않게 숨겨 버렸을 테니까.”  “에이, 나쁜 시키. 돈 못 돌려받아도 꼭 잡아 줘요. 잡아서 한 30년쯤 콩밥 먹게 해 줘요.”  “30년은 힘들 거야.”  “그럼 29년!”  “작전 끝나면 일자리 알아봐 줄게.”    마루의 말에 여운이 반색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정말이죠? 약속할 수 있어요?”  “약속할게.”    약속한다는 마루의 말에 여운이 기분 좋은 듯 씩 웃었다.    “그런데 솔직히 좀 오싹하네요.”  “뭐가?”  “차마루 씨 말대로 내가 간첩을 잡는 게 아니라 잡아먹힐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왠지 간첩은 귀신이랑 동급인 것 같아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픽 웃자 여운도 따라서 픽 웃었다.    “이 마을에 간첩이 살고 있다는 걸 절대 발설해서는 안 돼. 알았지?”  “메주한테는 말해도 되죠?”    여운의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마루가 여운을 노려봤다.    “메주도 알고 있어.”    마루의 더욱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여운이 개집에서 대가리만 내밀고 있는 메주를 째려봤다.    “개시키도 스파이라니.”    “간첩 얘긴 됐고, 헤어지고 나서 만난 적 없어, 첫사랑?”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뜯어먹으려던 치킨 조각을 내려놓으며 가시에 찔린 듯 낯을 찡그렸다.    “쪽팔린 얘긴데 뭘 자꾸 물어요?”  “쪽팔린 거 털어놓고 나면 덜 쪽팔리거든. 쪽팔린다는 거 보니까 헤어지고 나서 만난 적 있는 거네.”  “있죠. 그래서 쪽팔린다는 거예요.”    여운이 창피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안 만나려고 했었죠. 안 만나려고 도시락 가게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일자리 옮기고 혹시나 찾아올까 봐 월세집도 옮기고. 내 딴에는 진짜 최선을 다해서 안 만나려고 했었죠. 그런데 만나지더라구요.”    최선을 다해 안 만나려고 했지만 만나졌던 그때가 떠오르자 갑자기 울컥하고 서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여운은 서러움을 씻어 내려는 듯 급하게 네 캔째 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진짜 잔인하고…… 진짜 쪽팔렸어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서럽고 창피한 듯 여운의 얼굴이 비통하게 일그러졌다.

“지난번에 이장님 허리 꺾어 버렸을 때 아주 잠깐 마사지 숍에서 일한 적 있다고 했었죠? 청담동에 있는 굉장히 유명한 숍이었어요. 마사지하는 법도 배우고 나중엔 자격증도 딸 생각이었어요. 어쨌든 처음엔 그냥 예약 전화나 받고 손님들 접대하는 그런 허드렛일을 했는데, 어느 날 그 사람 어머니와 그 사람하고 결혼할 사람이 나란히 사이좋게 마사지를 받으러 왔더라구요. 나도 그 사람 어머니도 당황했죠. 당황했지만 열심히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사람 어머니가 나 들으라는 듯이 원장님께 말하더군요. 곧 우리 아들과 결혼할 예비 며느리라고. 그러니까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그날 그 사람을 다시 만났어요. 헤어지고 1년 정도 됐을 때인데……, 헤어진 지 겨우 1년인데……, 두 번 다시는 사랑 같은 건 못 할 것처럼 울더니…… 결혼할 사람이 있더라구요. 진짜 신경질 나고 기죽을 만큼 예쁜 여자였어요. 세련되고 멋지고 진짜 예쁜 여자……. 어찌나 창피하고 비참하고……. 아, 쪽팔려.”    그때의 그 창피함과 비참함이 생생하게 떠오르자 여운은 얼굴에서 후끈후끈 열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잠깐 말없이 달아오른 열을 식히던 여운이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어머니와 결혼할 사람을 데리러 왔더라고요. 나하고 마주친 그 사람은…… 그냥 돌이 돼 버렸어요. 얼어붙어 버린 거죠. 그리고 난, 난…… 울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어요.”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여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맥주 캔을 들고 있는 여운의 손도 파르르 떨렸다.    “마사지를 받고 나온 그 사람 어머니가 나한테 교양 넘치게 부탁하셨어요, 음료수 부탁한다고. 난 아무렇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음료수를 대접했어요. 물론 내가 음료수를 가지러 간 사이에 그 사람은 먼저 나가 버렸지만요. 그 사람이 먼저 나가 버렸기 때문인지 그 사람 어머니와 결혼할 사람도 마시는 둥 마는 둥 숍을 떠났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완전히 마지막…….”    여운은 마당 어디쯤 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 한동안 가만히 한곳을 응시하다가 네 번째 캔 맥주도 깨끗하게 비워 버렸다.    “정말 괴로웠던 게 뭐냐면…… 그 사람은 그대로였다는 거.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변함없이…… 참 멋지더라구요. 그 사람이 나빠지거나 못나지길 바란 적 없는데도 그 사람이 여전히 멋지고 훌륭한 게…… 그냥 괴롭더라구요. 나 혼자 아팠던 건가……. 나 혼자 힘들었던 건가…….”    여운은 씁쓸하게 미소 짓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못 잊었어?”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듯 피식 웃었다.    “기억 상실증에 걸리거나 죽어야 잊지 그냥 까맣게 잊는 건 불가능해요. 기억이라는 게 시간이 갈수록 흐려지긴 하지만 완전히 지워지는 건 아니니까. 특히 사랑 기억은 더더욱.”    여운의 말이 맞았다. 마루 역시 가끔씩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쑥불쑥 헤어진 연인이 생각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생각이 덜 나길 바랄 뿐이에요. 그렇게 조금씩 생각이 덜 나다가 언젠가부터는 생각이 나도 조금도 안 아프길……, 그냥 한 번 씩 웃을 수 있길 바랄 뿐이죠.”  “아직…… 아파?”    마루가 조심스레 물었고 여운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아파요.”    여운이 아직 아프다고 대답하던 그때 마루의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원해서 끝난 사랑이 아니어서 그런가 봐요. 차마루 씬 어때요? 아직 아파요?”    여운이 물었고 마루도 여운처럼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다행이네요, 아프지 않아서. 진짜…… 못할 짓이거든요.”    여운이 다섯 번째 캔 맥주를 따서 마루에게 건배하자는 듯 들어 보이자 마루가 자신의 캔 맥주를 가볍게 부딪쳤다.    “그런데…… 가끔 여기가 이상해.”    마루의 말에 여운이 마루를 바라보자 마루가 주먹으로 심장이 있는 가슴 쪽을 툭툭 쳤다.    “가슴, 심장요?”  “음.”  “어떤데요?”  “갑자기 심장이 막 두근거리면서 심할 땐 박동이 불규칙해져.”  “헤어진 여자가 생각날 때요? 그럼 아직 못 잊은 거네요.”  “아니. 헤어진 여자가 생각날 때 심장이 이상한 게 아니야.”  “그럼 어떨 때 이상한데요?”  “그게…… 잘 모르겠어. 그냥 갑자기 이유 없이 그래.”  “혹시 지병 있어요?”  “전혀. 병 있으면 국수방에서 일 못 해.”  “언제부터 그래요?”  “얼마 전부터.”  “지병이 없고 얼마 전부터 이유 없이 심장이 막 두근거리고 심할 땐 박동이 불규칙해진다구요? 그 두근거린다는 게…… 막 설레고 그런 거예요?”  “음…….”    마루가 찬찬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뭣 때문에 설레고 불규칙해질까……. 정말 아무 이유 없이 그래요?”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그래. 그러다가 갑자기 또 괜찮아지고.”  “아무 이유 없이라면…… 그렇다면 그건…….”    여운이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마루의 심장이 있는 가슴을 노려봤다.    “그건 뭐?”  “그거 아니에요?”  “그거가 뭔데?”  “심근경색, 협심증, 부정맥!”    여운이 눈을 과장되게 치켜뜨고 마루의 가슴을 노려보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자 마루가 “에이 씨!” 하며 성질을 냈다.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났군.”  “농담 아니에요. 병원 가 봐요. 진짜 탈이 났을 수도 있으니까.”  “서울 갔을 때 검사했는데 아무 이상 없다고 했어. 아무 이상 없다고 했는데 한 번씩 심장이 이상하단 말이야.”  “지금도 그래요?”  “지금 그래.”    지금 그렇다는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가만히 마루를 쳐다보다가 살짝 낯을 찌푸렸다.    “술 마셔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니야. 술 마시고 이런 적 없으니까.”  “그럼 혹시…… 나 때문에 그래요?”    여운의 낯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기여운 때문에? 무슨 뜻이야?”    마루가 기여운이 좋아서 심장이 두근거린다는 그런 쓸데없는 김칫국 따윈 절대 마시지 말라는 듯 철벽을 친 표정으로 여운을 노려봤다. 그러자 여운이 네놈이야말로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당장 내쫓고 싶은데 국수방 명령 때문에 내쫓지는 못하고 목숨 걸고 보호해야 하니까 스트레스받아서 그런 것 아니냐구요.”  “일리 있는 말이네.”    마루의 대꾸에 여운이 치킨 살을 말린 문어 다리 씹듯 잘근잘근 씹으며 마루를 노려보다가 들고 있던 치킨과 맥주를 내려놓았다.    “내가 딱 얘기하는데 목숨까지 걸면서 나를 보호하진 말아요. 그냥 대충 보호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닥쳤을 때, 차마루 씨나 내 목숨이 위태롭다 싶은 그때가 되면 절대적으로 내가 아니라 차마루 씨 스스로를 보호해요. 전에 말했듯이 난 죽어도 울어 줄 사람 없는 그런 존재감 없는 사람이니까. 알았죠?”  “정말 그래도 되겠어?”    마루가 놀리는 듯이 물었지만 여운은 진지했다.    “정말, 반드시, 기필코 그렇게 해요. 내가 아니라 차마루 씨를 구해요.”    여운의 진지한 말에 마루는 이상하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냥 왠지 그랬다. 왠지 그냥 먹먹했다.    “얼마 전부터 갑자기 이상하다고 했죠? 그럼 그 얼마 전부터가…… 내가 여기 왔을 때부터예요?”    여운의 질문에 마루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그런 것 같아” 하고 대답하자 여운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잠깐 내가 좀 봐야겠어요.”    여운이 갑자기 마루의 곁으로 불쑥 다가왔다.    “뭘 봐? 왜 이래?”    마루가 약간 놀라며 지나치게 바짝 다가앉은 여운에게서 물러나 앉으려는데 여운이 다짜고짜 마루의 가슴팍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뭐 하는 짓이야?”    마루가 깜짝 놀라며 여운의 얼굴을 밀어내려는데 여운이 마루의 손을 탁 쳐냈다.    “가만히 있어요, 좀! 심장 소리 들어 보게.”    여운이 야단치듯 말한 후 마루의 가슴에 한쪽 귀와 얼굴을 찰싹 붙인 채 눈을 감고 마루의 심장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두근, 두근, 두두근. 두두두근, 두두두두근, 두두두두두근!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었다. 마치 심장에 발동기를 달아 놓은 듯 빨라도 너무 빨랐다. 어찌나 심장이 빨리 뛰는지 이러다 갑자기 멎어 버리거나 반대로 폭발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여운은 마루의 심장 소리를 더욱 정확하게 듣기 위해 마치 마루의 가슴을 뚫고 들어갈 기세로 귀를 더욱 바짝 들이댔다.  두두두두두두근, 두두두두근, 두두두두두두근, 팔짝, 펄쩍, 두두두두두두두근!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2백 미터 달리기를 10초에 주파할 기세로, 불가능한 속도로 심장이 뛰고 있었던 것이다. 중간중간 해괴하게 건너뛰는 박동도 있고, 한마디로 아주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차마루 씨.”    여운이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119 불러야 할 것 같아요.”  “왜?”  “차마루 씨 심장이…… 우사인 볼트예요!”    여운이 마루의 가슴에서 떨어지며 급하게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어디 전화하는 거야?”  “119요!”    여운이 119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마루가 여운의 휴대전화를 획 낚아채 버렸다.    “됐어!”  “되긴 뭐가 돼요? 그러다가 한 방에 훅 가요!”  “뭘 훅 가!”    마루가 버럭 소리친 후 여운이 119에 전화하지 못하도록 여운의 휴대전화를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맥주 캔을 집어 드는데 여운이 마루의 맥주 캔을 빼앗아 버렸다.    “지금 술 마실 때가 아니에요. 차마루 씨 심장이 정상이 아니란 말이에요.”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내가 다 마실 거니까 차마루 씨는 마시지 말아요.”  “내기했잖아!”    마루가 버럭 소리치자 여운이 뭐 이런 칠푼이 철딱서니 없는 놈이 다 있나 하는 얼굴로 마루를 노려봤다.    “심장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데 내기가 문제예요?”  “안 터지거든? 과장하지 마.”  “과장 아니에요. 그냥 차마루 씨가 졌다고 해요.”  “어림없어!”  “에이, 쪼잔하게. 그러니까 심장이 탈이 나지.”    여운이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해하자 마루가 발끈했다.    “쪼잔하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알았어요! 내가 졌어요. 내가 져 줄 테니까 차마루 씨는 술 마시지 말아요.”  “허! 이길 자신 없으면 없다고 해. 어디서 수작이야?”  “수작은 무슨. 더 이상 나 때문에 사람 죽어 나가는 거 싫어서 그래요.”    여운이 남의 속도 모르면서 마음대로 말하지 말라는 듯 서운한 눈길로 흘기자 마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기여운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간다니? 무슨 말이야?”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뭔데?”  “내 옆에 있으면…… 다 죽어요.”    여운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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