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방을 떠나기 위해 밖에서도 차 안이 보이지 않고 안에서도 바깥이 보이지 않게 새까맣게 선팅이 된 승합차에 오르자 마루가 여운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여운 씨 휴대폰이에요.” “혹시 내 휴대폰 처음부터 차마루 씨가 훔쳐간 거예요?” “그건 아니에요. 여운 씨가 떨어뜨린 걸 메주가 갖고 갔고 메주한테서 뺏은 거예요.” “조사하려구요?” “맞아요.” “내 휴대폰에…… 별것 없는데.” “정말 별것 없었어요. 내 번호 입력해 뒀으니까 언제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전화해요.” 여운은 마루가 내민 휴대전화를 가만히 쳐다보다 받아 들었다. “혹시 내가 밖으로 나가서 국수방에 대해 떠벌릴까 봐 걱정돼서 감시하려고 돌려주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여운 씨 거라서 돌려주는 거예요.” 마루에 말에 여운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도.” 마루가 여운의 대학 합격증도 돌려주었다. 합격증을 받아 든 여운은 머릿속이 복잡한 듯한 표정으로 합격증을 바라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눈 가릴 거예요.” “새까맣게 선팅해서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눈 가려요?” “미안하지만 가려야 해요. 민간인이 국수방의 위치를 알고 있으면 안 되거든요.” “알았어요.” 여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루가 검은 안대로 여운의 눈을 가렸다. 여운의 눈이 가려지자 승합차가 곧바로 출발했다. “자정이 넘었어요.” “그렇게 늦은 시간이었어요? 창문 없는 방에 갇혀 있어서 밤인지 낮인지도 몰랐네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미안한 얼굴로 바라봤지만 여운은 마루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호텔에 내려 줄게요. 사흘 동안 묵을 수 있게 숙박료는 이미 지불했으니까 걱정 말고 사용해요.” “큰돈 썼네요.” “손 벌려 봐요.” 마루가 시키는 대로 여운이 손을 벌리자 그가 카드를 손에 쥐여 주었다. “뭐예요?” “카드예요. 현금 카드. 평생 걱정 없이 지내게 해 주고 싶은데……. 이 카드면 한 달은 넉넉하게 지낼 수 있을 거예요.” “진짜 큰돈 썼네요.”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고맙다고 해야 하죠?” “안 해도 돼요.” “그럼…… 안 할래요.” “그래요. 하지 말아요.” 그때부터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루는 안대를 하고 있는 여운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운은 안대 때문에 캄캄한 암흑 속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드디어 승합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서자 마루가 낮은 목소리가 도착했다고 말했다. “안대 풀어 줄게요.” 마루가 안대를 풀어 주자 여운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생했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사과는 이미 했잖아요. 내릴게요.” 여운이 움직이자 마루가 승합차 문을 열어 주었다. 마루가 먼저 내리고 여운이 박스를 들고 따라 내린 후 저만치 보이는 호텔을 바라봤다. “호텔까지 데려다줄게요.” “아뇨. 싫어요. 혼자 갈게요.” “데려다줄게요.” “혼자 가고 싶어요.” 여운이 정색을 하고 거절하자 마루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한 일이 생기거나, 힘든 일이 생기거나, 기쁜 일이 생기거나……,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꼭 전화해요.” “그런 일…… 없을 거예요. 갈게요.” 여운이 돌아서려는데 마루가 붙잡았다. “잘 지내요. 진심이에요.” “……차마루 씨도요. 진심이에요.” 여운이 어쩐지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은 후 돌아서서 호텔을 향해 떠났다. 조금씩 멀어지는 여운을 바라보던 마루는 또다시 가슴이 울컥거리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끝났는데,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렸는데 이상하게 또다시 가슴 한복판이 부대끼며 울컥거렸다. 여운이 모퉁이를 돌면서 시야에서 사라지자 울컥거리는 가슴에 서늘한 외풍마저 스며들었다. 마루는 지금껏 느껴 보지 못한 낯설고 어색한 감정에 사로잡혀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다가 운전을 맡은 남자 요원 1의 재촉을 받고서야 조수석에 올라탔다. 국수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루의 가슴은 여전히 울컥거리고 시렸다. 저렇게 불쌍할 수도 있을까 싶을 만큼 정말 불쌍하고 참 불쌍하고 그저 불쌍하기만 한 사람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이 너무나 미안해서 가슴이 무겁고 욱신욱신 아팠다. 무거운 가슴으로 국수방으로 돌아와 국수방 비밀 통로로 들어가려는데 남자 요원 1이 마루를 불렀다. “이거 네 거냐?” 남자 요원 1의 물음에 마루는 남자 요원 1이 뒷좌석에서 챙겨 나온 물건들을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휴대전화와 카드였기 때문이다. 분명 마루가 여운에게 준 것들이었다. 그때 마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오 팀장이었다. “여보세요?” - 어디야? “국수방 주차장입니다.” - 비상이다! 당장 올라와! 비상이라는 말에 마루는 여운의 휴대전화와 카드를 챙겨 들고 남자 요원 1과 함께 상황실로 달려갔다. “무슨 일입니까?” “만에 하나 생길지도 모르는 기여운의 돌발 행동을 감시하기 위해서 붙여 놓은 요원들로부터 보고가 들어왔다. 기여운이 체크인을 하지 않았어.” “체크인을 하지 않았다고요?” “호텔에 들어가지 않고 다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 “다른 곳이라면…….” “잡혔습니다!” 감시 카메라 전담 요원이 큰 소리로 말하자 오 팀장을 비롯한 요원들이 모니터 앞으로 달려갔다. “기여운 씹니다. ○○호텔에서 300미터 떨어진 ○○빌딩 앞 인돕니다.” 감시 카메라 전담 요원 말대로 여운은 박스를 든 채 호텔에서 멀지 않은 인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인적이 드는 밤거리를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오 팀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뭐? 건물? 어떤 건물? ○○동 ○○로 42번길 오피스텔? 거기서 뭐 하는데?” 오 팀장이 대략의 주소를 말하자 감시 카메라 전담 요원이 재빨리 자판을 두드려 주소 안에 있는 모든 감시 카메라에 접속해 여운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 있습니다.” 오 팀장에게 전화로 보고를 한 요원의 말처럼 여운은 큰길에서 벗어나 오피스텔이 밀집되어 있는 동네 어느 오피스텔 건물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찾았다. 계속 감시해.” 오 팀장이 전화를 끊은 후 모니터 속의 여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저 오피스텔 입주민 중에 기여운과 연고가 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봐.” 오 팀장의 지시에 여자 요원 1이 재빨리 컴퓨터를 조작하며 조사를 시작했다. “저기서 뭘 하는 거지?” 오 팀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운이 오피스텔 안으로 사라졌다. 여운이 오피스텔 안으로 사라지는 그때 또다시 오 팀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알아. 우리도 확인했어……. 눈치채지 못하게 따라 들어가. 어디로 누굴 만나러 가는지.” 전화를 끊고 여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모니터를 바라보던 오 팀장이 낯을 찡그렸다. “수상하다.” 오 팀장의 의미심장한 말에 마루가 긴장한 얼굴로 오 팀장을 쳐다봤다. “어쩌면…… 기여운을 JB로 오인한 게 아니라 풀어 준 게 실수일지도 모르겠다.” 오 팀장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마루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을 느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편히 쉬라고 마련해 준 특급 호텔을 마다하고 이 밤에 혼자 겁도 없이 움직이는 건 말이 안 돼.” “기여운 씨가 휴대폰과 카드를 차에 놓고 내렸습니다.” 마루가 여운이 놓고 간 것들을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보고하자 오 팀장의 미간에 두 줄의 굵은 주름이 잡혔다. “휴대폰과 카드를 놓고 갔다? 이건 추적을 당하지 않겠다는 거잖아. 실수야. 실수였어. 기여운을 풀어 준 게 실수였어!” 오 팀장이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치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세요. 기여운 체포해. 지금 당장 체포해!” 체포하라고 소리치던 오 팀장이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마루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기여운이 옥상으로 올라갔다니……. 뭐? 투신을 하려는 것 같다고?” 오 팀장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을 때 마루는 여운에게 달려가기 위해 상황실을 뛰쳐나갔다. 7장 여운은 10층짜리 오피스텔 건물 옥상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계속 생각해 봤는데…… 국수방에 잡혀 있는 동안 정말 많이 생각했거든? 너무 많이 생각하느라고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어. 아니……,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먹힐 정도로 진짜 생각 많이 하고 진짜, 진짜 신중하게 고민한 거야.” 여운이 하늘을 바라보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욱해서 결정한 거라고 오해하지 마. 정말 많이 생각했어.” 여운은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 오빠……, 엄마……, 이제 우리가 만날 때가 된 것 같지 않아?” 여운이 대답을 들으려는 듯 하늘을 더욱 열심히 바라봤다. “우리가 만날 때가 된 것 같아.” 여운은 다시 한 번 하늘을 향해 말했다. 제발 대답해 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여운은 옥상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박스에서 세준의 편지를 꺼냈다. 봉투에서 편지지를 꺼내 펼쳤지만 어두운 바람에 글자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글자가 보이지 않아도, 굳이 읽지 않아도 어떤 내용인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여운이라는 사람을 한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있다는 말이 쓰여 있는 편지. 너무나 사랑해서 기여운을 생각하느라 잠 못 이루고 기여운 때문에 사는 게 행복하고 기여운 때문에 인생이 즐겁다는 편지. 최고의 연인이 돼 주고 완벽한 보호자가 돼 주고 헌신적인 남편이 돼 주겠다던 편지. 가족 외에 유일하게 여운을 한없이 사랑해 주었던 너무나 고마웠던 옛 연인의 편지. 여운은 더없이 사랑스럽고 감사한 편지를 바라보다가 어금니를 꽉 틀어 물고 찢기 시작했다. 마음이 아팠다. 찢어질 듯 아팠다. 너무너무 아파서 한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소중한 편지를 세상에 남겨 두고 떠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헤어진 연인의 편지를 여태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고리타분한 집착일지도 모른다. 이별을 통보한 사람은 여운이었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여운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이별이었기 때문이다. 헤어질 수 없다고, 헤어지고 싶지 않다고 매달리는 세준을 끝까지 받아 주지 않고 끝내 이별했었다. 그럼에도 세준의 편지들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아직도 세준을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여전히 그를 향한 사랑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세준 씨도 보내 줄게.” 여운은 박스 안에 있던 편지들을 모두 찢어 버렸다. 가슴 무너지고 또 무너져서 손이 떨리고 몸이 떨리고 서러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지만 여운은 마지막 한 통까지 남김없이 찢어 버렸다.
여운이 세준의 마지막 편지까지 찢어 버렸을 때 오피스텔 앞에 마루가 도착했다. 마루가 차에서 내리자 오피스텔 주변을 감시하던 남자 요원 3이 다가왔다. “아직 옥상에 있어?” “예. 옥상에서 편지를 찢고 있다고 합니다.” “편지?” 그때 마루의 이어폰으로 오 팀장의 지시가 들려왔다. - 일단 무조건 살린다. 무조건. 오 팀장의 지시에 마루가 긴장된 숨을 내쉬었다. - 단! 가장 중요한 건 국수방의 존재가 드러나서는 안 된다는 거다. 기여운이 만에 하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유언을 남기는 척하면서 국수방의 존재를 발설하면 그래서 아래쪽에 지나가는 시민들이 듣게 된다면 그땐 몹시 곤란해진다. 그땐 테이저 건을 써서…… 추락시켜라. 국수방 시신 처리반 곧 현장 도착한다. 추락시키라는 지시에 마루의 얼굴이 돌처럼 굳는데 남자 요원 3이 테이저 건을 마루에게 건넸다. “팀장님! 추락시키라니요? 그건 기여운을 죽게 내버려 두란 말이지 않습니까?” - 국수방이 노출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겠나. 그건 오 팀장의 말이 맞았다. 비밀 작전 기관인 국수방의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여운이 국수방에 대해 떠들기 전에 추락시켜서 사망하게 하는 것이 안전했다. 하지만 마루는 그럴 수 없었다. 여운이 스스로 투신하는 것도 절대 용납할 수 없었고 여운을 추락하게 만드는 것은 더더욱 용납할 수 없었다. - 일단 최선을 다해 살린다. 하지만 국수방의 ‘국’ 자라도 꺼내면…… 추락시켜라. 알겠냐, 차마루? 이어폰을 통해 오 팀장의 명령이 들려왔다. “예……. 지금 올라갑니다.” 마루가 테이저 건을 들고 오피스텔로 들어가 옥상을 향해 달려 올라갈 때 여운은 가족사진과 합격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여운에게 남은 것은 가족사진 한 장과 합격증뿐이었다. 여운은 가족사진과 합격증을 손에 꼭 쥔 채 일어나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빠, 엄마, 오빠, 사진이랑 합격증은 갖고 갈게. 갖고 가서 보여 줄게. 나…… 약속 지켰어. 꼭 대학에 가기로 했던 약속.” 여운에 손에 쥔 사진과 합격증을 가슴에 댔다. “진짜 열심히 살았다는 거 알지?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나 진짜 열심히 살았거든……. 진짜,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것도 없어. 이젠…… 열심히 사는 거 그만할래. 열심히 사는 거…… 지긋지긋해. 너무 힘들어서…… 못 하겠어. 이제 안 하고 싶어……. 정말 너무 힘들었거든……. 그러니까 나 야단치지 말아 줘.” 여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제 아빠랑 엄마랑 오빠 있는 곳에 가서 편하게 살래. 나도 이제 편하게 살고 싶어. 반갑게 맞이해 줄 거지? 나 안아 줄 거지?” 여운이 흐느껴 울며 물었다. 여운이 아래를 내려다보자 여운의 눈물이 아주 먼 저기 아래로 떨어지며 사라졌다. 여운은 눈물이 떨어진 10층 아래 바닥을 내려다봤다.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까마득하게 먼 바닥. 너무나 캄캄하고 까마득해서 지옥 괴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여운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보고 싶어…….” 여운이 서럽게 흐느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심장이 아프도록 흐느껴 울며 보고 싶다고 말하던 여운이 큰 숨을 몰아쉰 후 결심한 듯 옥상 난간 위로 올라갔다. “이제 곧 만나……. 우리 다 같이 행복하게 살자…….” 여운이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인 후 눈을 감던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루의 떨리는 목소리가. “여운 씨…….” 마루의 목소리에 여운이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자 마루가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 긴장과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서 있었다. “여운 씨, 우리 얘기 좀 해요. 나하고 잠깐만 얘기해요.” 마루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여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깐만…… 얘기 좀 해요.” “…….” “할 얘기가 있어요.” “그냥…… 가요.” 여운이 슬픈 얼굴로 속삭였다. “잠깐만, 잠깐만요.” 마루가 다급하게 한 걸음 다가섰다. “5분만 얘기해요. 딱 5분만.” “그냥 가라구요.” “내 얘기 좀 들어줘요.” “들을 얘기 없어요……. 더 이상 할 얘기도 없고…….” “여운 씨가 그런 방법으로 만나러 가면 반가워하지 않을 거예요. 부모님도, 오빠도. 그런 방법은 결코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 “언젠가는 만날 것 아니에요. 언젠가는 만나고 싶지 않아도 만나게 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지금 서두를 필요 없어요. 제발 서두르지 말아요.” 마루의 말에 여운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나중에, 진짜 나중에 만나야 반가워할 거예요. 한참 후에 만나야 반가워할 거예요.” “나중에…… 한참 후에는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해요. 기다리는 거 지쳤단 말이에요. 난 지금도 충분히 기다렸어요…….” 여운이 억울한 듯, 내가 얼마나 힘겨웠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지친 거 알아요. 앞으로 또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게 너무 힘들 거라는 것도 알아요. 그래도…… 여운 씨 가족들은 여운 씨가 조금만 더 기다려 주길 바라실 거예요. 여운 씨가 힘든 거 알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참아 주길 바라실 거예요.” 마루의 말에 여운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차마루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내가 지치고 힘들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우리 가족이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만나고 싶어 할 거라는 걸 차마루 씨가 어떻게 아냐구요. 가족을 잃어 본 적 있어요? 아무도 없이 혼자 살아 보려고 미친 듯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쳐 본 적 있냐구요!” “알아요. 나도 알아요. 가족을 잃어 봤으니까.”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고개를 돌려 마루를 바라봤다. 그때 이어폰에서 오 팀장의 지시가 들려왔다. - 오피스텔 아래 일반인 두 명 이동 중이다. 옥상 올려다보기 전에 빨리 내려오게 해. 투신하려는 걸 사람들이 눈치채면 경찰서와 119에 구조 요청할 거야. 경찰이든 119든 다른 조직에서 개입하게 되면 국수방 요원들은 무조건 철수해야 해. 시간이 없다. 서둘러. 오 팀장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었기에 마루는 초조함에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여운 씨, 내려와요. 말해 줄게요. 내가 어떻게 아는지……, 여운 씨 마음을 어떻게 아는지 말해 줄게요.” 여운은 마루의 표정에서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어쩌면 마루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이런 방법으로 만나러 가는 걸 가족이 반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 힘들고 지쳤더라도 조금만 더 버티고 기다렸다가 만나길 바란다는 말. 더는 버틸 힘도 없고 버텨야 할 이유도 없어서, 이젠 정말 걱정도 없고 두려움도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가족들에게 가려 했던 것인데, 생각해 보니 가족들은 자신의 선택을 칭찬해 줄 것 같지 않았다. - 일반인 한 명 오피스텔 앞 지나가고 있다. 오 팀장이 또다시 오피스텔 아래 상황을 알려 주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오밤중에 잠이나 잘 것이지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마루로선 지금 이 순간 그저 야속하기만 했다. “여운 씨,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운 씨 가족이 지금 여운 씨 곁에서 여운 씨를 지켜보고 있을 거예요. 제발 내려가라고 애원하고 있을 거예요. 느껴 봐요. 귀를 기울여 봐요. 가족이 느껴질 거예요. 여운 씨가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가슴 졸이며 외치고 있을 거예요. 제발 참으라고, 제발…….” 마루가 통증이 느껴질 만큼 가슴이 조여 오는 것을 느끼며 간절하게 말했다. - 차마루. 오 팀장의 목소리가 이어폰으로 들려왔다. - 설득이 힘들면……, 도저히 힘들면…… 추락시켜라. “……!” 마루가 흠칫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꽉 다물었다. - 듣고 있나? 도저히 여의치 않으면 테이저 건을 써. 기여운이 아래로 떨어지면 시신은 우리가 처리한다. 시신 처리반 도착했다. 오 팀장의 명령을 들은 마루는 팀장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다는 듯 이어폰을 귀에서 빼 버렸다. 그래서 요원들이 주고받는 대화도, 차연화 국장이 오 팀장에게 다급하게 내린 엄격한 명령도 듣지 못했다. - 7요원 이어폰 제거했습니다.” 7요원은 마루였다. - 뭐? 이어폰을 제거하다니? 젠장……. 다른 요원 준비해! 오 팀장이 소리치는데 서늘한 여인의 음성이 국수방 요원들의 이어폰을 통해 일제히 들려왔다. - 차연홥니다. 테이저 건 불허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생존시키세요. - 하지만 국장님……. - 테이저 건 불허! 반드시 생존시키세요! 차연화가 소리쳤다. * “여운 씨, 날 봐요. 날 보라고요.” 마루의 말에, 아니 애원에 여운이 마루를 바라봤다. “이렇게 가지 말아요. 이렇게 가 버리기엔 기여운이라는 사람 너무 아까운 사람이에요. 이렇게 포기하지 말아요.” “내가요? 내가 아깝다구요?” “아까워요. 너무 많이 아까워요.” 아깝다는 마루의 말에 여운이 실소를 흘렸다. “나 같은 게 아깝다구요? 진심이에요?” “진심이에요.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이에요.” 마루가 진심으로 말했고 여운의 가슴에 마루의 진심이 고스란히 날아와 꽂혔다. 마루가 뒤춤에 숨겨 두었던 테이저 건을 꺼내 여운에게 보여 주었다. 그때 마루가 빼 버린 이어폰을 통해 요원들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7요원 테이저 건을 노출시켰습니다! - 7요원 추락시키려고 준비하는 것 같습니다! - 테이저 건 불허라고 했잖아! - 7요원 이어폰 제거해서 국장님 명령을 듣지 못했습니다. - 미치겠네! 내가 올라간다! 오 팀장이 소리칠 때 마루가 테이저 건을 쥔 채 여운을 바라봤다. “내가 받은 명령이 뭔 줄 알아요? 기여운 씨를 추락시키라는 거예요. 여운 씨가 거기서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국수방에 붙잡혀 갔었다는 걸 발설하면 국수방이 세상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국수방에 노출되는 걸 막기 위해서 테이저 건으로 기여운 씨를 추락시키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국수방은 절대 노출이 되면 안 되는 조직이기 때문에…… 난 어쩔 수 없이 테이저 건을 써야 하고 그렇게 되면 여운 씨는 아래로 추락할 거예요. 난 여운 씨를…… 죽여야 해요. 그런데…… 죽이고 싶지 않아요. 내 손으로 여운 씨를 죽이고 싶지 않아요. 살아 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죽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살아 달라는 게 아니라……, 여운 씨는 지금 죽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라서 살아 달라는 거예요.” 마루가 간절하게 애원했다. “여운 씨, 제발 부탁이에요. 이렇게 포기하지 말아요.” “정말…… 내가 살길 바라는군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발…… 살아 줘요. 이렇게 가진 말아요.” “난, 난…….” 여운이 솔직히 말하면 너무 무서워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마루 덕분에 다시 살고 싶어졌다고, 그러니까 손 좀 잡아 달라고 말하려 하는데 갑자기 오 팀장이 옥상으로 뛰어 올라왔다.
“기여운 씨!” 오 팀장이 마루가 있는 곳까지 재빨리 다가오더니 마루가 쥐고 있던 테이저 건을 재빨리 빼앗은 후 심각한 얼굴로 여운을 바라봤다. “기여운 씨한테 부동산 사기 친 채정호라는 놈 책임지고 잡아 줄 테니까 내려와요.” 오 팀장의 말에 마루와 여운이 놀란 얼굴로 오 팀장을 쳐다봤다. “내가 책임지고 채정호 잡아서 기여운 씨 앞에 무릎 꿇리고 털어 간 돈도 모조리 다 찾아 줄게요.” “팀장님…….” 마루가 왜 갑자기 나타나서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나 싶어 오 팀장을 막으려는데 오 팀장은 막무가내였다. “빈말 아니에요. 우리 국수방은 간첩 잡으러 다니는 조직이지 사기꾼 잡으러 다니는 조직이 아니에요. 알죠? 하지만 기여운 씨를 살릴 수만 있다면 안 하던 짓까지 하겠다는 거예요. 채정호도 잡아 주고, 돈도 싹 찾아 주고, 원하면 채정호 직접 죽이게 해 줄게요.” “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기여운 씨, 내 말 들었죠? 그러니까 내려와요. 내려와서 우리와 대화를 합시다. 예?” 오 팀장이 여운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손을 내밀었다. 여운은 순간 좀 어처구니없고 황당했지만 한편으로는 속물스럽게도 이게 웬 횡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루의 진심 어린 말에 위로를 받아 투신하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살아 보기로 결심하던 참인데 갑자기 나타나더니 뜬금없이 사기꾼을 잡아다 주겠다니. 돈도 찾아 주겠다니. 게다가 원하면 채정호도 직접 죽이게 해 주겠다니. 어처구니없고 속물스럽더라도 이건 횡재임이 분명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국수방 요원들이 사기꾼을 잡겠다고 나선다면 틀림없이 채정호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채정호를 잡아서 뜯긴 돈을 몽땅 되찾을 수만 있다면 죽지 않고 다시 힘내서 살아가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생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직접 죽이는 것까지는 절대 못 하겠지만 싸대기 몇 대 때리고 머리털은 반드시 쥐어뜯을 작정이었다. “그, 그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 없어요.” 채정호 잡아다 주겠다고 한다고 대번에 ‘오케이, 좋아요!’ 하고 넙죽 받아들인 다음 언제 죽으려 했나 싶게 쪼르르 내려가기는 조금 쪽팔렸다. 그래서 횡재임을 알면서도 미안해하는 티는 조금 내자 싶어 한 말인데 오 팀장은 전혀 다르게 해석해 버렸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요?” 충분하고 말고였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무조건 생큐였다. “부족해요? 채정호 잡아 주겠다는데 부족해요?” 하지만 오 팀장은 여운이 더욱 큰 보상을 원한다고 오해를 하고 말았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좋아요! 이렇게 합시다. 그럼 기여운 씨가 국가를 위해 일해 줘요.” 엥? 이건 또 무슨 해괴한 말씀이신지? 여운과 마루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오 팀장을 쳐다봤다. 놀랍게도 오 팀장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팀장님, 대체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마루가 조용히 물어봤지만 오 팀장은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을 들어 마루를 막았다. “국가를 위해 일하라니요?” 여운이 물었다. “우리 국수방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일해 달라는 말입니다.” 오 팀장의 말에 마루와 여운이 경악하는데 차연화의 섬뜩한 목소리가 이어폰을 통해 들려왔다. - 오 팀장, 당신 뭐 하는 짓이야? 차연화의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했지만 이미 뱉은 말 도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어때요? 대한민국 비밀 조직에서 일하자는 제안이?” - 오 팀장! 당신 미쳤어? 차연화가 불같이 소리쳤지만 오 팀장은 작정한 듯 이어폰을 귀에서 분리해 버렸다. “저기요, 아저씨, 제정신이세요?” 차연화만큼이나 여운도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대한민국을 위해 비밀 조직에서 일하라고? “제정신이겠어요? 미친 짓이라는 거 알면서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기여운 씨를 살리려고 하는 짓이잖아요. 난 기여운 씨를 살리지 못해도 국수방을 떠나야 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했기 때문에 기여운 씨를 살려도 국수방을 떠나야 해요. 그러니까 내 제안 받아들이고 내려와요.” 오 팀장의 하소연인지 제안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에 당황한 사람은 오히려 여운이었다. ‘저 아저씨가 정말 미쳤나 봐……. 어쩌지?’ 오 팀장이 막 던진 말을 곰곰이 새겨 보던 여운은 점점 더 속물스러운 욕심과 함께 열흘 동안 죽으려고 작정할 정도로 힘들었던 시간을 보상받고 싶은 보상심리도 보글보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오 팀장을 노려봤다. 쉽게 말해 나를 죽고 싶게 만들 만큼 괴롭혔으니 당신네 속도 새까맣게 타 보라, 그런 식이었다. “그러니까…… 한밤중에 잡아다가 멀쩡한 사람 간첩 만들고 내 신상 탈탈 털었는데 간첩이 아니더라. 간첩으로 몰린 게 분하고 억울해서 죽어 버리려고 하니까 그제야 아이쿠, 큰일 났다 싶어서 사기꾼도 잡아 주고 국가를 위해 일도 하라구요? 일은 당신들이 저질러 놓고 왜 아무 죄 없는 국가를 팔아요?” 여운이 당당하고도 매몰차게 따지자 오 팀장이 당황한 듯 버벅거렸다. “아니……, 내가 국가를 파는 게 아니라……, 내 말은 어떻게든 기여운 씨를 살리고 싶다, 기여운 씨가 살았으면 좋겠다…… 그 얘긴데…… 또 그렇게 오해를 하시네. 사람 참 억울하게 말이야.” “댁들이나 국가를 위해 제대로 일하세요. 엉뚱한 사람 잡아다 간첩 만들고 수습이 안 되니까 나라나 팔아먹고. 진짜 나쁜 사람들이네요.” “나쁜 사람이 아니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기여운 씨를 위해서 사기꾼도 잡아 주고 돈도 찾아 주고 그럴 테니까 국가를 위해서 일하라 그 말이잖아!” 여운의 훈계에 약이 오른 오 팀장이 버럭 짜증을 내자 여운이 기막힌 듯 눈을 부릅뜨고 오 팀장을 노려봤다. “헐, 정말 어이없네요. 이걸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자니 골치 아프고, 어쨌거나 답답한 건 그쪽인데 일을 해 달라고 부탁을 해야지 어디서 명령이에요! 내가 지금 명령받을 기분인 줄 알아요? 나도 이판사판이거든요!” 여운이 버럭 맞받아치자 오 팀장이 혈압이 올라 벌게진 얼굴로 돌아서서 낮은 목소리로 마루에게 속삭였다. “조금 전까지 죽으려고 하던 여자가 이젠 제대로 갑질을 하네……. 저걸 그냥 확 사살해 버릴까?” “사살하라고 하시더니 왜 갑자기 올라오셔서 회유를 하시는 겁니까?” “바토르가…… 사살 불허해서.” “국장님이 사살을 불허하셨어요?” “아……, 혈압 올라. 성질대로라면 그냥 확…….” “성질 죽이세요. 여기서 기여운 사살하면…… 팀장님은 바토르한테 사살당합니다.” 마루의 경고에 오 팀장이 정신을 번쩍 차리며 여운을 향해 돌아섰다. “기여운 씨.” 오 팀장이 갑자기 상냥하게 여운을 불렀다. “내가…… 순간 욱했는데 정말 미안해요. 사과할게요. 명령이 아니라 부탁하는 거예요.” 오 팀장이 전혀 어울리지 않게 갑자기 징그러울 만큼 친절한 목소리와 얼굴로 여운을 달래기 시작하자 마루와 여운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가 기여운 씨를 위해서 사기꾼을 잡아서 잃어버린 돈 되찾아 줄게요. 우리가 진짜 순수한 마음으로, 실수한 거 수습하려는 게 절대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불우이웃을 돕고자 하는 순수하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기여운 씨를 위해서 사기꾼을 잡아 줄 테니까 기여운 씨도 시간이 좀 남으면 국가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조금만 일을 해 달라……, 응? 바로 그 말이에요.” 오 팀장의 횡설수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마루가 찌푸린 얼굴로 쳐다보자 오 팀장도 자신이 한 말이 어처구니없는 말인 줄 알기에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오 팀장이 말도 안 되게 친절하게 굴자 좀 징그럽긴 했지만 여운도 슬그머니 화를 한풀 꺾었다. “내가 국수방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요?” “아주 중요한 일을 하게 될 거예요. 국가수호방위국의 조직원으로서.” “국가수호방위국의 조직원……. 그 말은…… 스파이가 되라는 거예요?” 여운이 번개를 맞은 듯 놀란 얼굴로 외쳐 물었다. “스파이는 아니고…….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스파이 아니라구요?” 여운이 실망하자 오 팀장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잠깐만! 스파이에요. 좋은 게 좋다고, 그래, 스파이라 합시다.” “스파이……. 틀림없이 스파이 맞아요?” “맞아요, 스파이.” “내가 스파이가 돼서 무슨 일을 하는 건데요?” 여운은 스파이가 된다는 사실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뛰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어, 무슨 일을 하냐면요……. 그러니까 그게……. 안전가옥으로 내려가요. 차마루하고.” 오 팀장의 말에 마루가 기겁을 하며 쳐다봤다. “팀장님!” “안전가옥요? 거기가 어딘데요?” “기여운 씨 살림 도둑맞은 곳 말이에요.” “살림 도둑맞은 곳……. 창고 말이에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창고?” “차마루 집이 창고 옆에 있지 않던가?” “차마루 집이 안전가옥이었어요?” “맞아요.” “팀장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마루가 오 팀장을 뜯어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다 뱉어 버린 걸 어쩌겠는가. “어때요? 이 정도면 진짜 최상의 제안이에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어. 안 그래요, 기여운 씨?” 오 팀장의 말에 여운이 마루를 쳐다봤다. 마루는 거절하라는 듯 손으로 자신의 목을 치는 시늉을 했지만 여운은 마루의 사인을 깡그리 무시했다. “결심했어요.” 여운의 심각한 대답에 오 팀장과 마루가 긴장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무슨…… 결심?” “할게요. 스퐈이.” 여운이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여운의 말에 마루는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가는 것을 느끼며 오 팀장을 째려보았다. 그러자 오 팀장 역시 허탈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난 망했다, 마루야.” “진짜 망했어요.” 마루가 미쳐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씩씩거리다가 여운에게 다가갔다. “내려와요.” 마루가 툴툴거리듯이 말하자 여운이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실룩거렸다. “내려오라고요.” 마루가 명령하듯 말하자 여운이 마루를 노려보며 난간에서 내려왔다. “뭐예요? 아깐 제발 죽지 말고 살아 달라 하더니 이젠 죽어 줬으면 하는 그 얼굴은?” “됐고. 갑시다.” 마루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여운의 손을 비틀어 버릴 듯 꽉 움켜잡고 확 잡아당겼다. * 국수방은 초상집이 돼 버렸는데 유일하게 여운만 한껏 신이 나 있었다. 오 팀장을 비롯한 요원들이 바토르 차연화 국장에게 죽이 되도록 욕을 처먹든 말든 여운은 천진무구하게도 암호명을 고민하고 있었다. 차연화 국장에게 달달 볶이고 차이고 양껏, 힘껏 밟힌 후 초주검이 된 오 팀장과 마루를 다시 만났을 때에도 여운은 흥분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할수록 멋져요. 정말 꿈만 같아요. 내가 스파이라니……. 스퐈이라니! 우와, 사람 팔자가 이렇게 바뀌네요. 스퐈이라니, 스뽜이라니!”
오 팀장과 마루가 옥상이든 어디든 확 뛰어내리고 싶을 만큼 기분이 개죽 같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여운이 흥분해서 신나게 떠들었다. “그럼 내 암호명은 뭐예요?” “암호 뭐? 암호명?” “스퐈이는 암호명이 있잖아요. 007 줴임스 본드……, 즈에이슨 본……, 니키탈……, 기탈 등등.” 여운이 되지도 않게 혀를 양껏 굴려 발음했다. “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 오 팀장이 기가 찬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래, 암호명 뭐 하고 싶은데?” 오 팀장이 찌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난…… 일단 있어 보여야 하니까……, 음……, 니키탈? 디파티드? 츄리플 엑스? 다찌마와 리?”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오 팀장이 마루에게만 들리게 속삭여 물었다. “영화 제목인 것 같습니다.” 마루 역시 오 팀장에게만 들리게 속삭여 대답했다. “어디서 저런 이상한 여자를 간첩이라고 오인을 해서……. 다 너 때문이야.” 오 팀장이 마루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지만 당하고 있을 마루가 아니었다. “스파이 시켜 주겠다고 한 사람은 팀장님입니다.” “네가 간첩이라고 오인만 하지 않았어도 내가 실수할 일은 없었잖아.” “5그린벨트로 멧돼지 생포하라고 명령을 내린 분은 오 팀장님입니다. “잘못된 정보를 준 놈은 너잖아.” “옥상에서 팀장님이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계셨으면 쉽게 끝났을 겁니다.” 마루와 오 팀장이 서로 남의 탓으로 돌리며 싸우든 말든 여운은 있어 보이는 암호명을 개발하기 위해 뇌를 풀가동하고 있었다. “아웅, 어떡해. 진짜 잘 지어야 하는데……. 겁나 있어 보이는 걸로 겁나 멋지게 지어야 하는데…….” 여운이 겁나 있어 보이고 겁나 멋진 암호명이 생각나지 않아 어울리지 않게 앙탈까지 부리며 발을 동동 구르자 오 팀장과 마루가 때리고 싶은 얼굴로 여운을 노려봤다. “그냥…… 죽일까?” “그럴까요?” “예쁜 여자를 죽이고 싶긴 처음이다.” 오 팀장이 마루만 들을 수 있게 속삭이자 마루가 “예쁘진 않습니다” 하고 속삭였다. “안 되겠어요. 천천히 신중하게 고민을 할게요. 그나저나 나도 총 쏘는 거 배워야 하죠? 호신술 이런 것도 교육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운의 말에 오 팀장과 마루가 넋 나간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총 쏘는 걸 배우겠다고?” “당연하죠! 스파이가 총을 못 쏜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팡팡! 팡팡팡! 다다다다다!” 여운이 전혀 멋지지도 않고 완전히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총 쏘는 시늉을 하자 오 팀장과 마루가 분노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 혹시 정신과 치료 받은 적 있는지 조사해 봐. 망상장애, 정신분열…… 조울증 뭐 이런 거 말이야. 요만한 거라도 걸리면 곧바로 정신병원에 처넣어 버려.” “알겠습니다.” 오 팀장과 마루가 서로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여 대화하는데 여운이 과장되게 놀라며 오 팀장과 마루를 바라봤다. “헉! 두 사람 그거죠? 그거!” “그거라니?” “지금 두 사람 복화술한 거죠? 우와, 완전 멋지다. 진짜 겁나 멋져요! 나도 복화술 배우는 거예요?” 여운의 어처구니없다 못해 개념 탈출한 소리에 오 팀장이 자신의 소원을 마루에게 복화술로 전달했다. “진짜 조용히 묻어 버리자. 흔적도 없이.” “이미 늦었습니다.” 마루 역시 복화술로 대답했다. “이제 알려 주세요. 내가, 이 기여운 스퐈이가 차마루 씨 안전가옥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이 뭔지.” 의욕이 넘치다 못해 주제 파악을 전혀 못 하고 있는 여운 때문에 오 팀장은 연신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차마루하고 부부로 위장해서 간첩 검거하는 일을 도우면 돼.” “지금…… 간첩 검거라고 했죠?” 여운의 확인 물음에 오 팀장이 포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 와우! 대박!” 여운이 좋아 죽겠는 감정을 감추지 못하고 불끈 쥔 두 주먹을 흔들며 기쁨의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냥 쏴 버리는 건데…….” 오 팀장이 발등을 천 번을 찍어 버리고 싶은 기분으로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여운이 심각한 얼굴로 오 팀장을 쳐다봤다. “잠깐만요. 차마루 씨하고 부부로 위장하라고요?” “맞아요.” “어, 오, 그건 아니에요.” 여운이 검지를 세워 흔들었다. “아니라니?” “한 가지 요구할 게 있어요.” “요구? 무슨 요구!” 오 팀장이 버럭 소리쳤다. “왜 갑자기 성질을 내고 그러세요?” “스파이 시켜 줬으면 됐지 요구는 또 무슨 요구야? 주제 파악을 해야지! 지금 기여운 당신이 스파이 하겠다 하는 바람에 우리 국수방이 엉망진창이 됐단 말이야!” “내가 스파이 시켜 달라고 했어요? 아저씨가 스파이 하라고 했잖아요!” 여운도 지지 않고 버럭 소리쳤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아저씨라니! 나 국수방 팀장이야!” “칫. 알겠습니다, 팀장님! 하여튼 다른 남자로 바꿔 주세요!” “다른 남자는 왜?” “차마루 씨는 내 타입 아니에요.” 여운의 말에 오 팀장은 황당하다는 듯이, 마루는 어이없다 못해 기분 나빠 죽겠다는 얼굴로 여운을 노려봤다. “타입이 아니야?” “내 타입 아니에요. 부부로 위장할 건데 이왕이면 내 스따일의 남자하고 부부로 위장하고 싶어요.” “이 친구가 어때서? 이 친구 국수방 최고 미남이야.” “차마루 씨가 국수방 최고 미남이라구요? 조직에 남자가 얼마나 없으면 아무나 최고 미남이 막 되고……. 진짜 조직 후지다. 어쨌거나 다른 남자로 바꿔 주세요.” “기여운 씨, 지금 말 다 했어요?” 마루가 욱해서 소리쳤지만 여운은 눈썹 하나 움찔하지 않고 무시했다. “바꿔 주세요.” “차마루가 국수방 최고 스페셜 요원이라니까!” “최고 스페셜 요원은 무슨. 간첩이 아닌 나를 간첩으로 오인했는데도 스페셜 요원이에요? 아무나 스페셜 시키고……. 이래서야 국수방이 얼마나 가려는지…….” “시끄러워!” 그렇게 소리친 사람은 마루가 아니라 오 팀장이었다. “우리 국수방과 차마루 특수 요원이 실수를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말을 가려서 해야지! 여기가 어딘지 몰라? 대한민국 비밀 수사 조직 국가수호방위국이야! 국가수호방위국에 아무나 들어오는 줄 알아? 특수 요원들 중에서도 특, 특, 특! 특별한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특별하고 특수한 사람들 중에서도 특별히 특수한 요원들만 들어올 수 있는 조직이라고! 차마루 요원이 어떤 요원인지 모르지? 태권도 5단! 유도 3단! 검도 3단! 복싱 2년! 쥬쥬쓰 2년! 합 15단! 그게 전부가 아니야. 온갖 총기를 자유자재로 다루고 잠입, 잠수, 폭탄 해체까지! 한마디로 인간 병기란 말이야! 이런 훌륭한 특수 요원을 우습게 알고 이런 훌륭한 특수 요원들이 활동하는 우리 국가수호방위국을 무시하다니!” 오 팀장이 목젖이 찢어지도록 흥분해서 버럭버럭 소리를 쳤다. 마루는 흥분해서 펄쩍 뛰어 대는 오 팀장 곁에서 으쓱한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듯이. 하지만 여운은 가볍게 콧방귀로 응대했다. “겨우 15단요?” “겨우?” “업소 전문 청소 2.5단, 치킨·도시락·야식·뼈다귀 해장국 배달 6단, 나이트클럽 주방 보조 1단, 식당 설거지 2단, 각종 서빙 5단, 전단지 붙이기 및 돌리기 2단, 신문·우유·야쿠르트 배달 2단, 도배 2.5단, 이삿짐 2단, 택배 1단! 합 26단! 이게 전부가 아니거든요? 온갖 욕지거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굶기, 숨기, 노숙까지! 나야말로 특별한 고생 중에서도 특별하게 고생했고 특수한 고생 중에서도 특수하게 오지도록 고생한, 산전수전으로 특수하게 단련된 인간 병기거든요! 나만큼 고생해 보지 않았다면 말을 하지 마세요! 아무나 특별이고 아무 데나 특수야. 흥.” 여운의 당당한 외침에 오 팀장은 너무나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아, 열 받아. 와, 열 받아. 잘났습니다. 잘났다고요!” 마루가 소리치자 여운이 다시 한 번 콧방귀를 날려 주며 마루를 노려봤다. “그래요. 알고 있어요. 나 잘난 거.” “누군 기여운 씨하고 부부로 위장하고 싶은 줄 알아요? 기여운 씨도 내 타입 아닙니다!” 마루가 열 받아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쳤지만 여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잘됐네요. 서로 타입 아니니까 바꾸자구요. 차마루 씨는 내 스타일도 아니고 겁나 까칠하고 그래서 같이 있어 봤자 24시간 싸우기만 할 거니까 갈라서자구요.” “갈라서? 언제는 붙어 있었습니까? 그리고 뭐? 내가 까칠하다고? 기여운 씨보다는 덜 까칠 하거든요?” “흥! 내가 차마루 씨보다 훨씬 더 부드럽거든요?” “부드러워? 부드러워서 혼자 여자 요원 둘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어요?” “가끔 나도 모르게 초인적인 힘이 샘솟거든요.” “와, 진짜…… 그냥 뛰어내리게 놔두는 건데.” 마루가 화를 참지 못하고 막말을 내뱉자 여운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그럴 줄 알았어. 진심으로 나를 살리고 싶었던 게 아니라 말썽 생기는 게 싫어서 진심인 척 연기했던 거야. 봤죠? 저런 사람하고는, 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연기만 하는 사람하고는 같이 일하기 싫어요. 못 해요! 겁나 재수 없는 사람이에요.” 여운이 씩씩거리며 쏘아붙이자 마루는 화가 치미는 한편 억울함도 느껴져 여운을 노려봤다. 진심이었는데,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살리려 했던 건데 막말 한마디로 진심이 거짓말이 돼 버리자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다. “연기라니, 무슨 근거로 연기라는 겁니까!” 마루가 분함과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치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오 팀장과 마루는 문이 열리는 순간 싸늘하게 끼쳐 오는 불길한 공기에 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과연 슬픈 예감은, 아니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피의 악녀 바토르, 차연화 국장이었다. 오 팀장과 마루가 벌떡 일어나자 차연화가 천천히 신문실로 들어와 여운을 노려봤다. 차연화 특유의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눈동자로. “바토르.” 차연화가 여운을 향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기여운 씨 암호명이야.” “바토르요?” “국수방 요원들이 나한테 붙여 준 별명인데 기여운 씨한테 양보할게.” 차연화의 말에 오 팀장과 마루가 기겁한 얼굴로 서로 눈치를 봤다. 오로지 요원들끼리만 알고 있던 차연화의 별명인데 바토르라는 별명을 차연화가 알고 있었다는 게 너무 놀랍고 살이 떨렸기 때문이다. “됐지?” 차연화가 더 이상 토를 달지 말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운이 감히, 겁도 없이 반기를 들었다. “아뇨. 싫어요.” 싫다는 여운의 대답에 놀란 사람은 차연화가 아니라 오 팀장과 마루였다. “싫어?” “싫어요. 난 처녀 피로 목욕 안 하거든요.” 여운의 대답에 오 팀장과 마루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여운이 바토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있었다. 1대 바토리 차연화가 화를 내지 않고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토리를 알고 있네?” “책 좀 읽는 사람이거든요.” 여운이 시건방지게 대답했다.
“좋아. 바토리는 계속 내 별명으로 갖고 있을게. 하지만 기여운 씨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서 파트너를 바꿔 줄 수는 없어. 차마루 요원은 JB 용의자를 잡기 위해서 무려 6개월이나 잠입해 있었고, 차마루 요원만큼 그 마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어. 또 그 좁은 마을에서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 JB 용의자가 눈치챌 거야. 난 국장으로서 기여운 씨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게 놔두지 않을 거야. 또 기여운 씨가 또다시 아케론에 뛰어들어도 절대 건져 주지 않을 거고. 그러니까 더 이상 주제넘게 까불지 말고 시키는 대로 차마루 요원과 안전가옥으로 내려가.” 차연화가 극도로 차가운 어조로 명령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여운은 전혀 기가 죽지 않았다. “주제넘게 까부는 꼴 보기 싫으면 죽게 놔두지 그랬어요.” 여운의 대꾸에 차연화의 얼굴에 살기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앞으론 건져 주지 마세요. 카론의 배를 얻어 타면 되니까.” 여운의 얼굴에도 차연화처럼 살기가 스쳤다가 사라졌다. “아케론은 뭐고 카론은 뭐냐?” 오 팀장이 복화술로 마루에게 물었다. 하지만 마루도 전혀 모르는 영역이라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에게 필요 이상의 살기를 드러내기 시작한 여운과 차연화의 팽팽한 눈싸움 기 싸움이 시작됐다. 이 세상에서 차연화보다 더 눈싸움 잘하고 기 싸움 잘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웬걸, 막상막하였다. 둘 중 누가 먼저 나가떨어지는지 겨뤄 보자는 듯, 눈알이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듯 두 사람은 동공이 튀어나올 듯 오지게도 독하게 노려봤다. “그만하시죠, 국장님.” “기여운 씨, 그만해요.” 오 팀장과 마루가 각각 한 명씩 맡아서 두 사람의 눈싸움 기 싸움을 끝내려고 했지만 두 사람은 죽기 살기로 버텼다. 세상에 차연화만큼 독한 여자가 또 있구나 싶은 그때, 차연화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렸다. 차연화의 눈까풀이 떨리자 여운은 더욱 시뻘건 독기를 품은 레이저 눈빛을 차연화를 향해 마구 쏘아 댔다. 여운의 눈빛이 독해지자 차연화의 눈까풀이 더욱 심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기절초풍하게도 차연화가 눈을 꼭 감으며 먼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눈 감았죠? 눈 감은 거 맞죠?” 여운이 차연화가 눈 감은 것을 확인해 달라는 듯 오 팀장과 마루에게 물었지만 오 팀장과 마루는 못 들은 척 외면했다. “이겼어!” 차연화를 편드느라 오 팀장과 마루가 외면하거나 말거나 여운이 주먹을 움켜쥐며 승리를 자축하는데 오 팀장과 마루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차연화의 눈치를 살폈다. “차마루 요원.” “예.” “지금 당장…… 안전가옥으로 떠나요. 지금 당장!” “예, 알겠습니다.” 차연화는 겨우 기여운 따위에게 기 싸움에서 졌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도무지 분석할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여운을 바라보다가 나가 버렸다. “저분이 누군지 알아요?” “모르죠.” “국장님이에요, 국장님. 국수방 국장님이라고요!” 마루가 어디서 감히 국장님께 까불었냐는 듯 나무랐다. “그래서 어쩌라구요?” 여운은 잘못이 전혀 없다는 듯 어깨만 으쓱하는데 갑자기 차연화가 되돌아왔다. “오 팀장, 나 좀 봅시다.” 차연화가 오 팀장을 호출했고 오 팀장은 여운을 죽일 듯 노려보다가 처형장에 끌려가는 표정으로 차연화를 쫓아갔다. “죄송합니다, 국장님. 어떤 처분을 내리셔도 달게 받겠습니다.” 오 팀장이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를 구했지만 차연화는 아무 말 없이 어디론가 향했다. 오 팀장과 함께 국수방 증거 자료 보관실로 향한 차연화는 보관실에 보관되어 있던 아주 오래된 기밀 서류 파일을 찾아 펼쳤다. 차연화는 몇 분 동안 서류를 훑어본 후 무거워진 표정으로 서류를 오 팀장에게 건넸다. “무슨 파일입니까?” “오 팀장이 알아야 하는 내용이에요.” 차연화의 말에 오 팀장이 기밀 서류를 펼쳤다. “윤소정?” 윤소정은 오 팀장이 펼친 파일의 주인이었다. 윤소정의 파일을 읽기 시작한 오 팀장의 표정이 덤덤 더 심각해졌고, 파일을 덮었을 때는 오 팀장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기여운에게는…… 끝까지 비밀로 해야겠지요?” “당연히…… 그래야죠. 엄마가 살해당했다는 것……, 기여운에겐 끝까지 비밀이에요. 다른 요원들에게도 마찬가지고.” 차연화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채 실장 일당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요. 무조건!” * 여운이 마루의 시골집에 도착한 시간은 새벽 3시였다. 국수방 사람들은 국수방 승합차에 여운이 챙긴 몇 개의 짐 가방과 함께 짐짝 취급하며 여운을 차에 태우더니 역시나 짐짝 부려 놓듯 마루의 집 대문 앞에 여운을 부려 놓고 훌쩍 떠나 버렸다. 밤중에 서울을 떠나 마루의 시골집으로 달려오는 동안 단 한 번도 휴게실에 들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식사고 간식이고 음료수고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쫄쫄 굶은 채로 뚝 떨어진 것이다. 여운이 국수방을 떠날 때 마루는 없었다. 마루에 대해 물었지만 누구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한마디로 기여운이라는 사람은 국수방 사람들에게 성가시고 보기 싫고 얼른 어디로 보내 버리고 싶은 눈엣가시 같은 사람일 뿐인 것이다. 국수방 사람들이 캄캄한 밤에 버리듯 내려놓고 가 버리자 여운은 황망함과 서운함에 멀어져 가는 승합차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 있었다. 버림받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여운 혼자 버려진 기분이었다. 죽을 때까지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는, 그래서 죽어도 아무도 모를 곳에 버려진 기분. 어쩜 사람들이 이렇게 매정할 수 있을까. 어쩜 사람들이 똥 누러 들어갈 때와 똥 누고 나올 때가 이렇게나 다를 수 있을까. 죽어 버리려던 사람 별별 소리로 꼬셔 살려 놓을 땐 언제고 막상 안 죽고 살아남자 180도로 돌변해서 대놓고 구박을 해 댔다. 솔직히 죽어 버리기로 결심했을 때, 가족들이 기다리는 그곳에 가기로 결심하고 실행하려 했을 때 간절하게 살아 달라 애원하는 마루에게서 가슴 뭉클해지는 감동을 받았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때 그 순간 차마루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만큼 뭉클했었다. 내가 죽지 않길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감동스러웠고,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다시 한 번 살아 보려고 죽음의 문턱에서 마음을 돌렸던 것이다. 스파이 시켜 주겠다는 말에 혹해서 마음을 돌렸던 것이 아니었다. 스파이가 아니라 마루 때문이었다. 마루의 절절한 한 마디, 한 마디가 여운의 가슴을 흔들며 무한한 위로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본색을 드러내서 역시 차마루는 재수 없는 사람일 뿐이었다고 첫 만남에서의 곱지 않았던 첫인상을 회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때 옥상에서의 마루는 사랑하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여운은 아무도 없는 캄캄한 시골 마을 마루 집 대문 앞에 버려져 있었다. 캄캄한 밤에 내려놓으면서도 누구 하나 걱정해 주지도 않고, 누구 하나 신경 써 주지도 않았다. 그저 구박댕이 기여운만 있을 뿐이었다. 어느새 승합차는 그림자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정적이 감돌자 한기와 함께 움찔움찔 소름 끼치는 두려움이 느껴졌다. 날이 새도록 밖에 있을 수 없어 서둘러 커다란 시골 나무 대문을 두드리려던 여운의 손이 오그라들었다. 국수방 사람들 전체가 자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마루라고 다르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밤중에 대문을 두드리면 귀 밝은 메주가 먼저 짖어 댈 것이 틀림없었다. 메주 짖어 대는 소리에 마루가 깰 것이고, 보나 마나 오밤중에 떨궈 놓은 국수방을 탓하지 않고 여운을 탓할 것 또한 틀림없었다. 어떻게 하든 꼬투리를 잡는 사람이고 덮어 놓고 무조건 여운을 싫어하는 사람이니까. 죽겠다고 죽겠다고 하는데도, 살라고 살라고 머리끄덩이 붙잡고 늘어지더니 다 같이 왕따나 시키고. ‘두 얼굴의 사나이……, 아니 두 얼굴의 시키…….’ 여운은 문 두드리기를 포기하고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버렸다. 사방에서 밤 귀신들이 날아와 덮칠 것 같은 무서움에 오돌오돌 몸이 떨렸지만 지금은 귀신보다 차마루의 잔소리가 더 무서웠다. “그냥…… 죽어버릴걸.” 아무리 꼬여도 넘어가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이래도 밉상 취급 받고 저래도 미움받는 팔자라면 그냥 차라리 그때 떠나 버릴 걸 후회하며 한숨을 푹 내쉬는데 대문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대문이 열렸다. 여운이 고개를 돌리자 마루가 서 있었다. 마루의 다리 사이로 메주가 톡 튀어나오더니 꼬리를 흔들며 여운의 신발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며 알은척을 했다. “내 신발 노리지 마라!” 여주가 메주에게 으름장을 놓았지만 메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갑다고 꼬랑지를 흔들었다. “메주야, 나 기억하는 거야?” 으름장을 놓는데도 알은척해 주는 메주 때문에 괜스레 울컥한 여운이 메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메주가 더욱 열심히 꼬리를 흔들며 여운을 반겨 주었다. “메주가…… 날 알아보네요.” “왜 여기 있어요?” “안 잤어요?” “왔으면 들어와야지 왜 그러고 있어요?” “문 잠겨 있는 것 같아서요.” “두드리면 나왔을 것 아니에요.” “자는 사람 깨우면 성질낼 것 같아서……” “다른 사람 성질내는 거 신경 안 쓰는 사람이잖아요.” 마루의 말에 여운이 화를 내지 않고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쳇, 그 정도로 몰상식한 사람 아니거든요?” 발끈할 기운도 없는 듯 여운이 축 처진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한숨까지 내쉬었다. “뭡니까?” “뭐가요?” “왜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약한 척이에요?” “내가 약해 보여요?” 여운이 또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구박당해서 그런가 봐요.” “구박을 당했다고? 누구한테?” “국수방 사람들한테요. 차마루 씨가 갑자기 사라지고 여기 도착할 때까지……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을 당했거든요. 완전히 똘똘 뭉쳐서 왕따시키더라구요. 알은척해 주는 사람도 없고, 말 붙여 주는 사람도 없고…….” 여운이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투명 인간 취급 당하고 따당하고 그러다 보니까 아빠랑 오빠 돌아가셨을 때 애비 애미 오빠까지 잡아먹은 년이라고 할머니랑 친척들이 나를 무슨 사람 잡아먹는 악귀 취급 하면서 거부했을 때가 생각나더라구요. 그래서 기가 죽었나 봐요. 그런데 잘해 주지도 않고 개시키라고 욕만 했는데 메주가 알은척을 해 주니까…… 감동이네요.” 여운이 고마움이 가득 담긴 손길로 메주를 어루만지자 메주도 좋은 듯 더욱 살갑게 꼬리를 흔들었다. “구박한다고 꺾이는 사람 아니잖아요.” “나도 꺾여요. 안 꺾이는 척할 뿐이지.” 여운이 시무룩한 얼굴로 말하자 마루가 여운을 쳐다보다가 짐 가방을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들어와요.” 마루가 가방을 들고 먼저 들어갔고, 여운은 그제야 일어나 남은 가방을 챙겨 들고 마루를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마루는 여운의 짐 가방을 처음 여운이 마루의 집에서 묵었던 방까지 들어다 준 다음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여운의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버린 줄 알았더니 여태 갖고 있었네요. 고마워요.” “피곤할 테니까 어서 자요.” “나 때문에 안 자고 있었던 거예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루 씨도 피곤하겠네요. 어서 자요.” “필요한 거 없어요?” “물…… 마셔도 돼요?” 마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운이 얼른 밖으로 나가서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목이 말라 마시는 물이 아니라 배를 채우기 위해 마시는 물이었기 때문에 여운은 물 한통을 그 자리에서 다 마셔 버렸다. 싱크대에 있는 고구마를 몇 번이나 흘낏거리면서. “무슨 물을 그렇게 많이 마셔요?” “목이 많이 말랐어요.” “배고파요?” “아니, 아니, 아니에요.” 여운이 아니라고 손을 저었지만 고구마를 흘낏거리는 눈빛이 몹시 허기져 보였다. “5시에 저녁 먹고 밤 11시에 출발해서 휴게실에 들르지 않고 곧장 왔죠?” “네.” “출출하겠네요. 먹어요.” 마루가 고구마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아니, 괜찮아요.” 여운은 고구마를 간절하게 바라보면서도 끝내 거절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마루에게 추접스럽고 구차한 꼴은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번 감자 사건도 있고. “차마루 씨는 언제 왔어요?” “이틀 전에요.” “그랬군요. 그럼…… 난 잘게요. 잘 자요.” 여운은 고구마의 유혹을 물리치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여운이 방으로 들어가자 마루는 거실 불을 끈 후 지하 벙커로 내려가 감시 모니터를 조작해 메인 모니터에 여운의 방을 띄웠다. 여운은 옷을 입은 채로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여운은 마치 정지 화면처럼 한참 동안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이불도 펴지 않고 벽을 보고 웅크리고 누웠다. 마루가 한 시간 후 지하 벙커에서 올라와 여운의 방문을 열었을 때 여운은 벽을 보고 웅크리고 누운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이불도 깔지 않고 덮지도 않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낮에는 더워도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봄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도 불을 피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불을 떼지 않아 바닥은 차가웠다. 그래서 꼭 요를 깔고 이불을 덮어야 감기에 걸리지 않는데, 여운은 차가운 맨바닥에서 이불도 덮지 않고 자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요를 깔고 이불을 덮을 기운이 없어서 그냥 자는 건 아니었다. 눕기 전까지 여운이 쪼그리고 앉은 채 슬픈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봤으니까 말이다.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우중충해서 생각에 잠겨 있다가 피곤해서 누운 것 같은데 잠깐 눕는다는 게 그대로 잠이 들어 버린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불을 끄고 나가려던 마루는 다시 여운에게 돌아왔다. 아무래도 그냥 내버려 뒀다간 감기에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먼저 요를 깔아 놓은 후 여운을 깨우기 위해 살며시 어깨를 흔드는 순간 여운이 질겁하듯 벌떡 일어나더니 다짜고짜 마루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하지 마. 하지 마!” “왜, 왜 이래요? 나예요.” “누구야! 죽여 버릴 거야!” “나라고! 정신 차려!” 마루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여운이 놀란 얼굴로 마루를 쳐다보다가 재빨리 멱살을 놓아주었다. “아, 아……, 미, 미안해요……. 미안해요.” 놀랐던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지만 많이 놀랐던 탓인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왜 그래요? 꿈꿨어요?” “네? 네……. 그런 것 같아요. 미안해요.” “맨바닥에서 자면 감기 걸려요. 이불 위로 올라가요.” 마루의 말에 여운이 아무 대답 없이 마루를 쳐다보다가 요 위로 올라가 앉았다. “이불도 꼭 덮고 자요. 여긴 서울하고 달라서 병원도 멀고 약국도 멀어요. 그래서 아프면 곤란해요.” “네, 알았어요.” 마루가 이불을 건네자 여운이 이불을 끌어당겨 덮었다. 마루가 눕지 않고 앉아 있는 여운을 쳐다보다가 방을 나가 문을 닫으려는데 여운이 “잠깐만요” 하고 마루를 불렀다. “불…… 켜 놓으면 안 될까요?” 여운이 간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만요.” 마루가 얼른 허락을 하지 않자 여운이 다시 한 번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았어요.” 마루가 불을 켜 주자 여운이 고맙다고 인사한 후 조금은 안도한 표정으로 누웠다. 여운의 방을 나온 마루는 이상한 감정이 가슴 한복판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떤 감정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 “차마루 씨! 차마루 씨, 어디 있어요?” 집 안에서 큰 소리로 불러 보고 마당에서 큰 소리로 불러 보고 마루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큰 소리로 불렀지만 대답은 메주의 짖는 소리밖에 없었다. “메주야. 너희 주인 어디 갔니?” 묻는다고 대답할 메주가 아니었다. “한집에 사는데도 만나기 진짜 어렵다. 밥해 놨는데 어디 간 거야…….” 큰마음 먹고 솜씨 발휘를 했는데 어디 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하실에 있나?” 여운이 지하 벙커 문을 쳐다봤다. 마루가 보이지 않아 어디 갔을까 궁금해하다 보면 늘 지하실에서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하실엔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는데…….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말라고 했는데…….” 마루가 강력하게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지만 여운은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지하실 앞으로 다가가 살며시 문을 두드렸다. “차마루 씨, 여기 있어요? 차마루 씨.” 문을 두드리며 몇 번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여기에도 없나?” 아무래도 지하실에도 없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포기하고 차려 놓은 밥상 앞에 앉아 수저를 들던 여운은 다시 한 번 흘낏 지하실을 쳐다봤다. “지하실에 없다……. 집에도 없다……. 마당에도 없다……. 고로 차마루는 현재 없다…….” 대체 저 지하실에 뭐가 있는지 너무너무 궁금했다. 지하실에는 절대, 절대 가지 말라고,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더욱 궁금하고 강렬하게 반항하고 싶었다. 출입 금지 구역일수록 더욱 출입하고 싶고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적힌 곳일수록 더욱 끌리는 심리. 저항을 받으면 더욱 강한 반발을 일으킨다는 리액턴스 효과, 우리말로 청개구리 심리 뭐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 리액턴스이건 청개구리건 여운은 어느새 지하실 문을 열고 있었다. 어두웠다.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지만 따로 전등을 설치해 놓지 않았는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꽤 어두웠다. 여운은 한 계단 두 계단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 계단째 내려갔을 때 탁 하고 자동으로 불이 켜지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고 말았다. “깜짝이야. 무슨 불이 계단 내려오고서야 켜져. 아고, 놀라라…….” 계단은 꽤 깊었다. 그러니까 지하실이 꽤 깊은 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시골집에 지하실을 왜 만든 거지?” 여운은 덜덜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일어나 한 계단 한 계단 끝까지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또 다른 문이 있었다. 평범한 나무문이 아닌 강철로 만든 문이었다. 강철 문에는 전자식 키가 달려 있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버튼이 없었다. “버튼도 없는데 어떻게 여는 거지?” 여운이 참 신기한 키라고 생각하며 카메라 렌즈처럼 생긴 것을 손가락으로 만지려던 그때 갑자기 뭉툭하고 커다란 손이 뒤에서 쑥 튀어나오더니 여운의 손을 콱 움켜잡았다. “어맛!” 여운이 기절할 듯이 놀라며 돌아보자 마루가 이글이글 태워 죽일 듯한 눈길로 여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차마루 씨 찾으려고……. 언제 온 거예요?” “내가 여기 오지 말라고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했, 했죠.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당장 따라와요!” 마루가 여운의 손목을 잡고 질질 끌며 계단을 올라가더니 지하실 계단에서 여운을 끌어낸 후 문이 부서지도록 닫아 버렸다. “하지 말라면 하지 말 것이지, 왜 말을 안 듣는 겁니까?” “어디 가면 갈 거라고 말을 하든지, 부르면 대답을 해 주든지 했으면 나도 안 그랬을 것 아니에요.” “내가 왜 내 동선을 기여운 씨한테 보고를 합니까?” “누가 보고하라고 했어요? 알려 달라는 거지.” “내가 왜 일일이 기여운 씨한테 알려 줘야 합니까?” “간첩 잡기 위해서 부부로 위장해서 온 거잖아요. 부부 위장 스파이. 그게 우리 임무잖아요. 진짜 부부는 아니지만 부부처럼 행동하기로 했으니까 그럼 차마루 씨는 남편인 거고 난 아내고. 그럼 아내가 남편이 어딜 가는지 알아야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어딜 간다고 말을 해야 하는 거고, 아내가 부르면 남편이 대답을 해야 하고 그런 것 아니에요?” “부부 위장 스파이?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요?” “머리가 안 돌아가다뇨?” “국수방에서 기여운 씨한테 진짜 스파이 임무를 줬다고 생각합니까?” “진짜가 아니면요?” “기여운 씨 죽지 않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던진 미끼였어요. 기여운 씨가 죽으면 국수방의 존재가 탄로가 날 수 있으니까 국수방을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입막음용으로 던져 준 사탕이라고요.” “그러니까 사탕이나 빨아먹고 닥치고 있으라는 거예요? 그런 거였어요?” “몰랐어요? 설마 그 정도로 머리 나쁘고 그 정도로 얼뜨기였어요?” “몰랐네요. 진짜 머리 나쁘고 진짜 얼뜨기였네요.” 여운이 돌처럼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잘 들어요. 여기서 기여운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국수방이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민간인에게 특수 요원 임무를 줄 일은 절대 없어요. 그러니까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누굴 만나든 궁금해하지 말아요. 주제넘은 짓 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마루가 정색을 하고 말했고 여운은 모멸감에 빠진 얼굴로 마루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난 스파이도 요원도 아니라는 거죠?” “맞아요. 기여운 씨는 그냥 민간인일 뿐이에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민간인인 내가 여기 왜 온 거예요?” “오갈 데 없는 기여운 씨를 위한 배려일 뿐이에요.” “그런 거였군요.” 여운이 창피함에 마루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그럼 내가 여길 떠나도 상관없는 거네요?” “갈 곳이 있다면 떠나도 상관없어요. 단! 국수방에 대해서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그랬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진짜 머리 나쁘고 진짜 얼뜨기처럼 믿었네요.” “불쾌하겠지만…….” “아니에요. 내가 그렇죠, 뭐. 어딜 가나 투명 인간 신세…….” 여운이 창피한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상에 차려 두었던 밥과 찌개와 반찬들을 다 치워 버린 후 집을 나섰다. “어디 가는 겁니까?” 마루가 물었지만 여운은 아무런 대답 없이 대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