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여운 스파이-6화 (6/21)

마루는 여운이 약을 올려 평정심을 깨트리려는 심리전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절대 말려들지 않겠어.’    울화가 치밀어 올라 진짜 한 대 치고 싶었지만 마루는 어금니를 꽉 다물며 참았다.  마루는 생각했다. 기여운이라는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도무지가 측은하게 여길 수 없는 사람이라고.  가족 얘기를 하고 아프게 헤어진 첫사랑 얘기를 할 땐 정말 불쌍하다, 안됐다, 측은하다 등등 별별 안쓰러운 마음이 다 생겨나 일렁이는 마음을 다스리기 힘들었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기여운이라는 여자는 불쌍히 여겨 줄 필요도, 안쓰러워할 필요도, 측은해할 필요도 없는 진짜 지독하고 밉고 또 밉고 그저 밉기만 한 여간첩일 뿐이었다.    “밥도 다 먹었으니까 이제 정신이 차려져요?”  “정신은 아까부터 똑바로 차리고 있거든요?”  “잘됐군요. 그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자백해요.”  “됐고! 상 치우고 커피 부탁해요.”    여운은 마루를 약 올려 죽일 작정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커피?”    마루가 어금니를 악물고 묻자 여운이 고개를 까딱였다.    “배가 부르니까 살짝 졸리네요. 커피 한잔해야겠어요. 커피 주세요. 믹스 커피 곱빼기로.”    여운의 태도에 부글부글 속이 끓어올랐지만 마루는 꾸욱 내리누르며 상을 치운 후 여운이 요구한 믹스커피를 곱빼기로 대령했다.  믹스 커피를 후루룩후루룩 숭늉 마시듯 들이켜던 여운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잔을 내려놓고는 마루를 쳐다봤다.    “차마루 씨, 빨리 실토해요.”  “뭘 실토하란 말입니까?”    마루가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는 얼굴로 여운을 쳐다봤다.    “차마루 씨하고 국수방이 헛다리 짚었다는 거 실토하라구요. 지금 실토하면 용서해 줄게요.”    여운의 당당한 말에 마루는 혈압이 뻗쳐오르는 것을 느끼며 여운을 노려봤다.  정작 실토를 하고 자백할 사람은 기여운인데 간첩이 비밀 요원더러 실토를 하라니. 주객이 전도되다 못해 아주 웃기는 짓을 하고 있었다.    “장난치지 맙시다.”  “장난 아니에요. 난 지금 엄청 진지해요.”  “장난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장난 아니라구요. 그쪽이야말로 장난 그만 쳐요. 모르겠어요? 난 이미 감 잡았다고요.”  “뭘?”  “당신들이 삑사리 탄 거.”  “삑사리라니!”    버럭 소리치던 마루는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심호흡을 하며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우린 기여운 씨에 대해 모든 정보와 증거를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피차 힘 빼지 말고 슬기롭게 자백해요.”  “그러니까 슬기롭게 간첩이 아닌데 간첩이라고 자백하라구요? 그게 말이에요, 똥이에요?”  “기여운 씨!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말장난하는 겁니까? 여긴 국가수호방위국이에요! 당신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대한민국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남한 사회주의 혁명을 도모했어요. 기여운 당신은 형법상 내란 음모, 내란 선동,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됐습니다!”        6장        마루가 더는 못 참고 격분해서 소리쳤지만 여운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더욱 야무지게 치켜뜬 눈으로 마루를 노려봤다.    “미치거나 얼빠진 년 아닌 이상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끌려와서 말장난하고 싶겠어요? 오밤중에 마취를 당했는지 기절을 당했는지 모르게 납치가 돼서 어쩌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지도 모를 곳에 끌려와 있는데 차마루 씨 같으면 말장난이나 하고 싶겠냐고요! 차마루 씨가 지금 엄청 유식한 척 형법이 어쩌고 국가보안법이 어쩌고 했는데, 쉽게 말해서 나더러 빨갱이라는 거잖아요. 내가 대한민국이 싫고 북한이 좋고 수령님의 은혜가 좋아서 날뛰다 잡혔다는 건데, 어이없어 코 막히고 억울해서 기막히고 분해서 똥구멍 막혀 똥독 올라 죽게 생긴 상황에 내가 말장난하고 싶겠냐고요!”    여운이 열변을 토하듯 마루를 향해 맹렬하게 쏘아붙였다.    “우린 기여운 씨에 대해 모든 정보와 증거를 갖고 있어요.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없다는 말입니다!”  “흥! 국가수호방윈지 뭔지 하는 것 보니까 미국 CIA랑 비슷하게 흉내를 낸 모양인데, 내 정보를 다 갖고 있다고요? 그 말은 내 허락도 받지 않고 당신들이 민간인 사찰을 했다는 뜻이네요. 좋아요. 내놔요, 당신들이 갖고 있다는 내 정보와 증거. 당신들이 나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는지도 알아야겠고, 당신들이 나에 대해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증거를 날조를 했는지도 확인해야겠어요. 지금 당장 내놔요!”  “기여운 씨!”    마루가 책상을 탁 하고 내려쳤지만 여운은 눈썹 하나 움찔하지 않았다.    “2단계가 겁주기예요? 허!”    여운이 차갑게 비웃었다.    “나에 대해서 잘 안다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내가 겁준다고 겁먹을 것 같아요? 나도 이판사판이에요. 난 더 잃을 게 없는 사람이에요. 열다섯 살 때……, 겨우 중학교 2학년 때 고아가 됐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요? 내가 죽어도 흔적도 안 남을 만큼 기여운이라는 사람은 존재감이 없다는 뜻이에요. 울어 줄 사람도, 걱정할 사람도 없다는 뜻이에요. 울어 줄 가족도 없고, 남기고 갈 돈도 없고, 말 그대로 난 이 몸땡이 하나 남았어요. 늘씬한 내 몸이 좀 아깝긴 하지만……, 내가 죽어도 장례 치러 줄 사람 하나 없는 내가 너무 불쌍하지만! 이만하면 퍽 예쁜 내 미모가 좀 아깝긴 하지만, 어쨌거나 죽으면 그만인 사람인데 뭐가 겁나서 하지도 않은 간첩 짓을 했다고 거짓 자백을 하겠어요?”    지금 당장 죽어도 울어 줄 사람도 없고 걱정할 사람도 없다는, 따져 보면 참 슬픈 얘기를 하면서도 깨알 같은 자기 자랑을 놓치지 않는 여운의 말에 마루는 진짜 고단수 간첩이거나 주제 파악 못 하고 자뻑병에 걸렸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뭔 말인데요? 해요. 이제 와서 못 할 말이 뭐예요?”  “몸매하고 미모도 아까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객관적으로.”    마루의 말에 여운이 쭉 찢어질 듯 눈을 치켜뜨고 마루를 노려봤다.    “객관적으로 아까운 몸매고 아까운 미모거든요?”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그 주장은.”  “객관적이거든요? 내 주장은!”  “절대적으로 주관적인 자화자찬 더 들어 주기 괴로우니까 자백이나 하시죠.”    마루의 빈정거림에 여운이 약이 올라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절대적으로 객관적으로 매우, 아니 꽤 수려한 외모를 가진 사람으로서 말하는 건데요! 난 절대 간첩 아니에요!”  “간첩입니다!”  “아니에요!”  “맞아요!”    어느새 마루와 여운은 신문 중이라는 것을 잊고 어린아이들처럼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당신이 간첩 아니라는 증거를 대!”  “간첩이 아닌데 무슨 증거를 대라는 거예요? 차마루 씨야말로 내가 간첩이라는 증거를 대요!”  “당신이 다른 간첩들과 꾸준하게 정기적으로 접촉한 증거를 갖고 있고, 증인도 있어!”  “증인? 어떤 증인요? 뼈다귀 해장국집 단골손님요? 진짜 허술하고 띨띨한 증거고 증인이네요.”  “누가 띨띨하다는 거야?”  “누구긴 누구예요? 차마루 씨하고 국수방 사람들이죠!”  “이 여자가 정말 겁도 없이!”  “이 남자가 어따 대고 반말이에요!”  “당신은 용의자야!”  “용의자한테 반말해도 된다고 대한민국 헌법에 나와 있어요?”  “헌법은 무슨 얼어 죽을 헌법이야?”  “지금 대한민국 헌법을 얼어 죽으라고 욕한 거예요? 차마루 씨야말로 대한민국을 모독한 간첩이네요!”  “야! 기여운!”  “왜 불러! 차마루!”  “지금 나한테 반말했어?”  “당신이 먼저 반말했잖아!”  “넌 나보다 어리잖아!”  “나보다 나이가 많은지 어린지 어떻게 알아? 민증 까!”  “정말 한 대 맞을래?”  “허! 비밀 요원이 사람을 패려고? 좋아. 덤벼!”    여운이 두 주먹을 움켜쥐고 마루에게 겨눴다.    “진짜 이 여자가!”    마루 역시 주먹을 겨누며 여운에게 다가서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오 팀장이 들어섰다.    “차마루! 뭐 하는 짓이야!”    오 팀장이 고함을 지르자 마루가 여운에게 겨누었던 주먹을 서둘러 내리며 물러섰다.    “잘하는 짓이다.”  “……죄송합니다.”  “따라 나와!”    오 팀장이 버럭 소리치고 나가자 마루가 열이 받아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여운을 노려봤다.    “노려보지 말고 덤비라구!”  “당신, 기다려. 진짜 가만두지 않겠어.”  “흥!”    마루의 으름장에 여운이 호쾌하게 콧방귀를 날려 주자 마루는 혈압이 끝까지 치밀어 곧 쓰러질 듯 열 받은 얼굴로 밖으로 나와 버렸다.    “차마루, 너 국수방 요원 맞냐? 국수방 비밀 요원이 용의자하고 말싸움질이나 하고…… 제정신이냐?”    오 팀장이 한심하다는 듯 호통을 쳤다.    “너무 화가 나서……. 용의자하고 싸운 건 제가 잘못했습니다만, 저 여자 간첩 틀림없습니다. 진짜 고도의 심리전 훈련을 받은 최정예 간첩입니다.”  “너 국수방 때려치워야겠다.”  “예? 무슨 말씀입니까?”  “큰일 났어, 이 자식아!”  “무슨…….”  “기여운 JB 아니야. 헛발이야!”  “헛발이라니요?”    마루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있으니까 하는 소리잖아. 따라와!”    오 팀장이 마루를 상황실로 끌고 갔다.    “기여운이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왔습니까?”  “이필복이 자백했어. 잡히길 기다리고 있었대.”    이필복은 여운이 일했던 뼈다귀 해장국집의 단골손님이었다.  마루는 재빨리 이필복을 비추고 있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이필복은 겁을 먹은 듯하지만 꽤나 담담한 표정으로 신문에 응하고 있었다.    “잡히길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진작부터 발을 빼고 싶었는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이 보복을 당할까 봐 계속 끌려 다녔답니다.”    국수방 남자 요원 1이 오 팀장 대신 대답했다.    “이필복이 기여운을 보호하려고 거짓말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이필복과 접선했던 간첩은 기여운이 아니라 뼈다귀 해장국집 사장 오경환이었습니다. 이필복이 연행되던 순간 했던 첫마디가 ‘오경환부터 잡아라’였습니다.”  “기여운이 아니라 오경환요?”    마루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지만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팀장님, 기여운도 한편일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됩니다. 이필복과 오경환이 기여운을 빼돌리려고 작전을 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정민 집에 방문했지 않습니까.”  “알아. 그래서 우리도 1프로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는데 이필복은 기여운이라는 이름조차도 몰랐어. 우리가 사진을 보여 줬을 때야 배달 직원 이름이 기여운이라는 걸 알았어. 이필복의 진술이 기여운의 진술과 일치했어. 그저 거의 매일 배달을 해 주었을 뿐이었어.”  “붙잡혔을 때 똑같이 진술하기로 말을 맞췄을 수도 있습니다. 이필복 말을 어떻게 믿습니까? 조금 더 조사하면 분명히 자백할 겁니다.”  “이필복이 모든 정보를 다 넘겼어. 정말 잡히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요원들이 덮치는 순간 반항도 하지 않고 JB 중앙지부 정보가 담긴 서류들을 순순히 다 남겼어.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지만 현재까지 그 어디에도 기여운이 간첩이라는 증거는 없어.”  “팀장님은 기여운이 JB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 믿으십니까?”  “믿는 게 아니라 사실이야. 기여운은 JB가 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제비냐고 엉뚱한 소리를 했던 거야.”

오 팀장의 말에 마루가 믿고 싶지 않은 얼굴로 다른 요원들을 쳐다보자 요원들이 기여운은 간첩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상황실로 남자 요원 2가 박스를 들고 들어와 책상에 내려놓았다.    “기여운 씨 소지품을 다시 조사했는데 기여운 씨 책에서 이런 게 나왔습니다.”    남자 요원 2의 말에 마루가 재빨리 책상으로 가서 박스에 있던 물건들을 꺼내 살피기 시작했다.    “편지잖아.”  “예. 손 편집니다.”    마루는 정성스럽게 보관된 편지들을 꺼내 훑어봤다.    “누가 보낸 편지야?”  “남자 친구한테서 받은 편진 것 같습니다.”    남자 요원 2의 말에 마루가 낯을 찌푸렸다.    “날짜로 봐서는 8년 전부터 6년 전까지 받은 편지고 마지막 편지가…… 이 편집니다.”    남자 요원 2가 편지 하나를 찾아 마루에게 건넸다.  마루는 재빨리 편지를 봉투에서 꺼내 열었다.    【여운아.    지금 네가 읽고 있는 이 편지가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일 거야.  아니, 마지막 편지였으면 좋겠다.  너만큼은 지키고 싶었는데, 너 하나만큼은 지켜 줄 자신이 있었는데…….  결국 우리 사랑이 끝나 버렸다.  모두 내 책임이야…….  널 잊을 수 있을지, 널 잊고 살 수 있을지 자신 없다.  어쩌면 너를 잊을까 봐,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널 잊어버릴까 봐 그게 두려운 건지도 모르겠다.  어머닐 용서할 수 없겠지. 나 역시 용서할 수 없을 거다.  부끄럽고 미안해서 용서해 달라는 말 못 하겠다.  네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나 없이도 네가 행복하다면……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너만큼은 정말 행복하길 바란다.  미안해. 부끄럽고 또 부끄럽고…… 미안해.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세준.】    “전부 세준이라는 사람이 보낸 편지야?”    오 팀장이 물었다.    “예. 다른 사람 편지는 없었고, 헤어졌는데도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직도 손 편지를 주고받는 연인이 있다니…….”    오 팀장이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박스를 뒤적거리다가 사진 네 장을 꺼냈다.    “이건 무슨 사진이야?”    오 팀장이 사진을 들여다보자 마루도 곁으로 와서 사진을 들여다봤다.    “가족사진인 것 같습니다.”    남자 요원 2가 말했다.    “어? 이 꼬마가 기여운이네. 이야, 귀엽다. 예쁘네. 어릴 때부터 예뻤네.”    오 팀장의 설레발에 표정 감정 요원을 비롯한 모든 남자 요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사진을 들여다봤다.    “예쁘네요.”  “귀염귀염하네요.”  “기여운이 예쁘다고? 귀엽다고? 진짜?”    마루가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오 팀장과 요원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기여운 정도면 예쁜 거지.”  “말도 안 됩니다. 기여운 정도는 그냥저냥 보통이죠.”  “어떻게 기여운이 그냥저냥 보통이야? 일반인 중에서는 제법 예쁜 거지.”  “맞습니다. 제법 예쁘죠.”    다른 요원들도 오 팀장을 거들었다.    “예쁜 여자 못 봤어? 무슨 기여운이 예쁘다고…….”    마루가 어이없다는 듯 비웃는데 오 팀장을 비롯한 남자 요원들이 이해 못 할 표정으로 마루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너 눈 정말 나쁘다. 간첩이 아닌데 간첩이라 하질 않나, 저만하면 참 예쁜 여자를 보통이라 하질 않나. 솔직하게 말해 봐. 예쁘지만 간첩이 아니라니까 괜히 비꼬는 거지? 너 헛발질한 게 쪽팔려서 괜히 트집 잡는 거지?”  “저 눈 좋습니다. 그리고 헛발질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안과 가서 검사해 봐라. 녹내장 생긴 것 같다.”  “어, 이분이 기여운 어머니인 것 같아요. 많이 닮았네요.”    남자 요원의 말에 요원들이 사진 속에 있는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네. 엄마를 쏙 빼닮았네. 엄마가 미인이었네.”  “엄마 닮아서 예쁜 거네요.”    어느 요원의 말에 마루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을 비죽거렸다.    “비쩍 마르고 눈만 송아지만큼 크고 볼 것도 없는데 뭘 예쁘다고. 진짜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마루가 투덜거리자 오 팀장이 콧방귀를 뀌는데 갑자기 오싹하게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이해 못 할 일은 국수방 상황실에서 간첩 용의자가 예쁘냐, 안 예쁘냐를 따지고 있는 겁니다.”    오싹하도록 차가운 목소리에 모든 요원들이 기절할 듯 놀란 얼굴로 돌아보자 상황실 문 앞에 차연화가 서 있었다.  국수방의 최고 권력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차연화 국장.    “국장님 오셨습니까.”    오 팀장을 비롯한 요원들이 차연화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데 차연화가 형식적인 인사에는 관심 없다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중앙 테이블 앞으로 왔다.  차연화는 마치 송곳으로 찍듯이 오 팀장을 비롯한 요원들 한 사람 한 사람과 아이 콘택트를 한 후 모니터 앞으로 가서 여운을 감시하고 있는 모니터를 쳐다봤다.  모니터 속의 여운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으로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차연화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거두더니 테이블에 있던 여운의 가족사진을 들고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모두 네 장의 사진. 첫 번째 사진을 보던 그때 차연화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짧게 흔들렸지만 눈치챈 요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차연화는 한 장, 한 장, 신중한 표정으로 사진을 확인하다가 마지막 네 번째 사진에서 또다시 눈동자가 흔들렸다.    “보고하세요.”    차연화가 네 번째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현재 이필복, 오경환 등 JB 가담자 여섯 명을 차례로 연행해서 조사 중에 있습니다. 이필복은 모든 것을 자백했고 오경환 등 나머지는 예상대로 혐의에 대해 전면 부인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경환은 조금씩 심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게 감지가 되어서 조만간 자백을 할 것 같습니다.”    오 팀장이 농담을 하던 때와는 달리 정색을 하고 보고했다.    “오 팀장이 판단하기에 이필복의 진술이 진심인 것 같습니까?”  “이필복의 집과 오경환의 집에서 압수한 JB 관련 서류들을 분석 중에 있는데 분석이 완전히 끝나야 확실해지겠지만 지금까지 분석한 결과와 이필복의 진술을 비교했을 때 믿을 만합니다.”  “연행한 용의자들 중에…… 국수방 요원이 실수한 용의자가 있다던데.”    차연화가 사진에서 눈을 떼고 모니터 속의 여운을 바라보며 말하자 마루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기여운이라는 사람을 용의자로 보고 연행을 했습니다만 JB 중앙본부 명단에 기여운이라는 이름은 없었고 이필복, 오경환도 기여운이 JB라는 것을 일단은 부인했습니다.”    오 팀장이 마루를 대신해 설명했다.    “이필복과 오경환은 부인했지만 그것이 기여운이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는 못 됩니다. 기여운이 이필복과 오경환 등 JB 핵심들과 근접 거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마루가 굳은 얼굴로 반론을 제기했다.    “기여운이 JB 핵심들과 근접 거리에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기여운이 간첩이라는 증거로는 부족하지 않습니까?”    차연화가 지적했지만 마루는 물러서지 않았다.    “기여운은 제5그린벨트에서 활동하는 이정민과도 접촉했습니다.”  “이정민과 접촉했다……?”    차연화가 천천히 마루에게 다가오더니 그 어느 때보다 사나운 눈길로 마루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차마루 요원.”  “예, 국장님.”  “이정민과 기여운이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까?”  “그건…….”  “기여운이 이정민 집을 방문했을 당시에 차마루 요원의 이정민 감시 일지에는 이정민이 하루 전날부터 사흘간 집을 비운 것으로 나와 있는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리고 그 사흘 동안 이정민이 활동한 장소는 제주도라고 하던데 맞습니까, 오 팀장?”  “예, 맞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요원이 확인했습니다.”  “차마루 요원.”  “예, 국장님.”  “두 사람이 대화를 하거나, 연락을 주고받았거나,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접촉하는 걸 차마루 요원이 직접 목격했냐고 물었습니다.”    차연화가 얼음조각이 뚝뚝 떨어져 나올 듯 차가운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그건…… 아닙니다.”  “차마루 요원이 기여운과 이정민이 접촉했다고 믿는 이유는…… 기여운이 어떤 이유에서건 이정민의 집을 방문했고, 기여운을 연행하기 직전 기여운이 이정민의 집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전부 아닙니까?”  “……맞습니다.”    차연화가 마루를 노려보며 차근차근 따지자 마루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차마루 요원의 논리대로라면 이연우 순경도 JB여야 합니다. 기여운이 이연우와도 접촉했기 때문이죠. 이연우 순경을 JB에서 제외할 이유 있습니까?”  “…….”  “대답하세요. 이연우 순경 JB입니까, 아닙니까?”  “이연우는 JB가 아닙니다…….”    차연화의 날카로운 지적에 마루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차연화는 마루에게서 눈을 떼고 다시 중앙 테이블로 와서 기여운의 가족사진을 의미를 알 수 없는 눈길로 한참이나 바라봤다.    “내가 볼 때…… 기여운이 간첩일 확률은 0.001프로예요. 물론 0.001프로도 놓쳐서는 안 되죠. 하지만 보잘것없는 단 0.001프로 때문에 우리 국수방의 존재가 세상에 탄로 날 수도 있어요. 어떻게 해결할 겁니까?”    차연화가 소름 끼치도록 싸늘한 표정으로 오 팀장을 향해 물었다.    “빠른 시간 내에 기여운이 JB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해서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만에 하나…… 기여운이 사회로 복귀했다가 국수방에 대해 발설하면 어떻게, 누가 책임질 겁니까?”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마루가 나섰다.    “기여운이 JB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 제가 책임지고 기여운이 국수방에 대해 발설하지 않도록 조치하고 제가 실수한 부분에 대해 책임지고 국수방을 나가겠습니다.”    마루의 말에 차연화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얼굴로 마루를 노려봤다.    “국수방이 휴게소 화장실입니까? 시원하게 싸지르고 물도 안 내리고 도망치게?”  “…….”  “국수방 요원이 이따위로 가볍고 책임감이 없습니까?”  “…… 죄송합니다.”    마루가 죄송하다고 사죄했지만 차연화는 꼴도 보기 싫은 듯 시선을 외면해 버렸다.    “JB 검거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국수방의 존재를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오 팀장이 마루를 저쪽으로 밀어내고 재빨리 대답했다.    “죄 없는 사람 오래 잡아 둘수록 원한만 쌓이고 가십만 늘어날 뿐이에요. 신속하게 조사 끝내고 돌려보내세요.”  “예.”  “무슨 일이 있어도 국수방의 존재가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차연화가 소름 끼칠 만큼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여운의 입 철저하게 봉하세요. 국수방을 위해서.”  “알겠습니다.”    차연화는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오싹한 한기를 가득 남겨 두고 상황실을 나가 버렸다.    “후아! 역시 바토리…….”    차연화 국장이 상황실을 나가자마자 남자 요원 2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남자 요원 2가 중얼거린 ‘바토리’라는 말은 세기의 악녀 에르제베트 바토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아름다움과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처녀의 피를 마시고 처녀의 피를 짜내 목욕을 했다는 악녀.  국수방의 모든 요원들은 차연화 국장을 바토리로 불렀다.  차연화가 진짜 에르제베트 바토리처럼 처녀의 피를 마시고 처녀의 피로 목욕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연화가 떴다가 사라지면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긴장감과 함께 오싹한 한기가 감돌았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바토리로 불리게 된 것이다.    “차마루.”  “예.”  “네가 시작했으니까 네가 끝내. 기여운 말이야.”  “예…….”  “책임지고 기여운 입 봉해라.”  “예.”    마루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여운은 닷새 만에 다시 나타난 마루를 뚱한 얼굴로 쳐다봤다.  누가 봐도 과로에 시달린 듯 마루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마루만큼이나 여운 역시 지치고 불안한 모습이었다. 누가 더 지쳤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 버린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채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힘들었죠?”    길고 긴 침묵을 깨고 마루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차마루 씨도 힘들었던 모양이네요. 얼굴이 까칠해졌네요.”    여운이 기운 없는 얼굴로 말했다.    “사나흘 전부터…… 잘 안 먹었다고 하던데. 잠도 잘 안 자고……. 혹시…… 어디 아파요?”  “아뇨. 그냥…… 안 먹혀서요. 잠도 잘 안 오고……. 내가 아주 무서운 곳에 끌려왔다는 걸 실감하게 된 거죠.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난 여전히 간첩인 거예요?”  “뭐 좀 먹을래요?”    마루의 물음에 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되어 가는 거예요? 내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간첩인 거예요? 교수님이 나도 간첩이래요? 해장국집 사장님한테도 물어봤어요? 채 실장 못 잡았어요?”  “조사 결과…… 기여운 씨는 JB가 아니라는 게 확인됐습니다.”    마루의 말에 여운이 조금 놀란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무슨 말이에요? 제비가 아니라구요?”  “제비가 아니라…… 간첩이 아니라는 게 확인됐다…… 그 얘깁니다.”    간첩이 아니라는 게 확인됐다는 말에 여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치 정지 화면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마루를 쳐다봤다.  여운의 성격대로라면 이렇게 쳐다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부터 간첩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냐고 거세게 따지고, 더 나아가 온갖 쌍욕을 퍼부으며 행패를 부려도 열 번은 더 부려야 여운다운 반응이었다. 그래서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이라 예상하고 마음 단단히 먹고 여운을 만났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여운은 입을 꾹 다문 채 영혼이 없는 마네킹처럼 마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폭풍 전야일지도 몰라.’    그럴지도 몰랐다.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 무섭도록 고요하다는 바로 그 폭풍 전야.  하지만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도 기여운은 폭풍을 불러오지 않았다.  앉은 채로, 눈을 뜬 채로 죽어 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마루만 바라보고 있었다.    “기여운 씨?”    마루가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여운 씨.”  “잠깐만요……. 생각 좀 할게요.”    여운이 들릴 듯 말 듯 속삭이듯 말했고, 마루는 여운이 생각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주었다.  여운은 시선을 떨군 채 깊은 생각에 빠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너무 깊은 생각에 빠져서 숨 쉬는 것을 잊어버리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여운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루는 처음으로 찬찬히 여운을 바라봤다.  너무 길어서 그늘이 드리워질 만큼 짙고 까맣고 긴 속눈썹이 덮여 있는 커다란 두 눈. 높지도 낮지도 않은, 딱 좋게 오뚝한 코, 우습고 변태스럽게도 입맞춤 한번 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들 만큼 작지만 도톰한 입술이 있었다.  군데군데 잡티도 살짝 보이고 주근깨도 보이는 피부. 오히려 잡티와 주근깨가 있어서 귀엽게 느껴지는 피부였다.  오목조목 하나씩 따로 떼서 봐도 예쁘고, 모아서 봐도 예쁜 얼굴. 첫 만남에서 퍽 좋지 않은 이미지로 각인됐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여운은 간첩이라고 낙인을 찍어 놓은 바람에 무조건 예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마루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여운이라는 여자는 절대 예쁘지 않고, 예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갑자기 기여운은 참 예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졌다. 또 이연우 순경이 여운을 만났을 때 첫눈에 반한 것도 이해가 됐다. 정말 말도 안 되게 별안간에 말이다.  갑자기 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마루도 알 수 없었다. 갑자기라는 건 알겠는데, 갑자기 왜 기여운이라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자리가 변하기 시작했는지 그 이유는 마루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여운이 한참 만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기 붙잡혀 온 지 얼마나 됐죠?”  “열흘요.”  “열흘이나 됐군요.”    여운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내가 틀림없이 간첩이 아니라는 거죠?”    여운이 확답을 받으려고 묻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고생요? 진짜…… 고생했다고 생각해요? 진심으로 내가 고생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운의 목소리에 날이 섰다.    “우리로선 어쩔 수 없이 조국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어요.”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알 듯 말 듯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무리들을 색출하는 것이 우리 국수방의 임무고 의무예요.”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무리들을 색출하기 위해서 차마루 씨는 나 같은 힘없는 사람을 마구 짓밟는군요. 무참하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운은 낮지만 날이 선 목소리로 반격했다.    “짓밟으려는 게 아니라 기여운 씨가 이필복과 오경환 등 JB 사람들과 너무나 근접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변명 말고 사과를 할 수는 없어요?”    여운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냥 사과만 할 수는 없는 거냐구요?”    여운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마루를 노려봤다.    “여기 국수방인지 국숫집인지 이런 데서 일하는 사람들은 실수를 해도 절대 사과 같은 건 하지 말라고 교육하는 거예요? 나같이 힘없고 보잘것없는 것들한테는……, 나 같은 흙수저, 아니 똥수저한테는,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고 그래서 편들어 줄 사람 한 명도 없어서 지금 당장 죽어도 흔적도 안 남을 사람한테는 사과 따위는 절대 하지 말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차마루 씨는 그렇게 거만했던 거예요?”    여운이 너무 침착해서 무서울 정도로 차분하게 말했다. 사과를 하지 않고는 안 될 정도로 섬뜩함마저 느껴질 만큼 차분하게.    “실수했어요. 미안하게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는…….”    마루가 어정쩡하게 사과를 하는데 여운이 여지없이 잘라 버렸다.    “사과만 하라구요. 치사하고 졸렬하게 구차한 변명 같은 건 보태지 말고.”  “…….”  “사과만 하는 건 싫어요? 자존심 상해요? 다른 사람 자존심은 상해서 곰팡이가 나도 차마루 씨 자존심 상하는 건 싫은 거예요?”    차분했지만 여운은 눈빛을 번득이며 마루를 몰아세웠다.    “사과할게요. 미안합니다.”  “…….”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내가 오해했고 실수했어요. 진심으로 미안해요.”    마루는 최대한 진솔하려고 노력하며 사과했다.    “……그래요. 이제 됐어요.”    여운이 쿨하게가 아니라 어쩐지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순순히 사과를 받아들였다.  더욱 격식을 갖춰서 더욱 진심을 담아 사과하라고 따질 줄 알았는데 여운은 김이 샐 만큼 순순히 받아들였다.    “더 사과하길 바란다면…….”  “됐어요. 그거면 됐어요.”    여운은 더 이상의 사과는 바라지 않았다. 사과 따위 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칠 만큼 다치고 파일 만큼 파여 버렸는데 사과 따위 백번을 받은들 무엇이 달라질까.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여기서 나갈 수 있는 거예요?”  “나갈 수 있어요.”  “살아서?”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한숨을 내쉬었다.    “안전하게 내보내 줄게요. 내가 책임지고.”  “흣……. 책임지고…… 안전하게……. 안전하게 언제 나가요?”  “우선 읽어 봐요.”    마루가 A4 용지 다섯 장 분량을 묶은 파일을 여운에게 밀어 주었다.    “뭐예요?”  “읽어 봐요.”    읽어 보라는 마루의 말에 여운은 말없이 A4 다섯 장 분량의 파일, 아니 각서를 차근차근 읽었다.    “각서군요.”  “우리 국가수호방위국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진 조직입니다. 국수방의 존재가 밖으로 드러나면…….”  “허세 떨지 말아요. 협박도 하지 말고요.”    여운이 마루의 말을 중간에 잘라 버렸다.    “펜 줘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펜을 건네자 여운은 국수방에 대해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겠다는 각서에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고 사인했다.  여운이 사인을 끝내고 각서와 펜을 마루에게 돌려주자 마루가 조금 걱정스러운 낯으로 여운을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요? 내가 폭로할까 봐 겁나요?”  “아닙니다.”  “아니면 비밀을 지키는 대신 내가 돈이라도 달라고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돈 달라고 할 거예요?”  “아뇨. 돈 필요 없어요. 돈 따위 이제 필요 없어요.”    여운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필요하잖아요. 사기당해서 다 잃었잖아요.”  “다 잃어버려서 필요 없어요. 뭐라도 남아 있으면 욕심도 남아 있을 텐데 다 잃어버리니까 욕심도 없어지네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요.”  “없어요. 아무것도. 그냥 이제…… 난 어떻게 하면 돼요?”  “오늘 중으로 보내 줄게요.”  “보내 준다……. 볼일 끝났으니까 조용히 꺼져라 그 말이죠?”  “그런 게 아니라…….”  “꺼져 드릴게요, 조용히.”    여운이 씁쓸하게 웃었다.    “잠깐…… 같이 나가요.”  “어딜요?”  “기여운 씨 물건 돌려줄게요.”    마루는 여운을 데리고 지하 보관실로 갔다.  지하 보관실은 깜짝 놀랄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운동장만 하더라’라는 말이 딱 맞을 만큼 정말 운동장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지하 보관실이 아니라 지하 공장이라 해도 될 정도로 한없이 넓은 보관실.  운동장만큼 넓은 보관실에는 여운의 물건뿐 아니라 오만가지 물건들이 끝도 없이 보관돼 있었다. 너무 넓어서 여운의 물건을 찾으려면 코드표를 보고 한참 동안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여기 있는 거 다 중요한 거겠죠?”  “중요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내 물건은 이제 중요하지 않은 거죠?”  “기여운 씨한테 돌려주기 전까진 중요해요.”    코드표를 찾아 걷고 걸은 다음에야 자신의 물건들이 보관된 장소로 온 여운은 아무렇게가 아니라 그나마 정갈하게 보관되어 있는 것에 다행함을 느꼈다.    “고마워요.”    여운의 뜬금없는 인사에 마루가 여운을 쳐다봤다.    “뭐가 고맙다는 거예요?”  “시골 창고 앞에 부려져 있던 물건인데…… 깔끔하게 보관 잘해 줘서 고맙다구요.”    여운은 한 번 써 보지도 못한, 이사해서 쓰려고 준비했던 살림살이들을 쓰다듬다가 깨끗하게 정리돼 꽂혀 있는 책들을 바라봤다.    “잠깐 자리 좀 피해 줄래요?”    여운의 부탁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인 후 물러났다.  여운은 마루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멀어지자 책들을 꺼내 책 속에 보관했던 세준의 편지들을 하나씩 꺼내 모으기 시작했다. 하나씩 하나씩 세준의 편지를 모두 꺼내던 여운은 누군가 손을 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에겐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여운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비밀 추억인데 국수방 사람들은 여운의 소중한 비밀 추억마저도 다 꺼낸 본 것이다. 울컥 서러움이 치밀고 화가 치밀었다.  자기들이 뭔데! 네깟 것들이 뭔데 내 물건에 손을 대!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소리 지를 기운도,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여운은 편지를 모두 꺼내고 가족사진도 모두 찾아 꺼낸 후에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 놓고 편지들과 사진을 가슴에 안고 마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사진이랑 편지랑…… 자리가 달라졌네요. 내 책들도 다 조사한 거예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미안한 표정으로 여운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박스나…… 비밀봉투나…… 담을 만한 거 있을까요?”    여운의 부탁에 마루가 재빨리 빈 박스를 찾아왔다.  여운은 마루가 들고 있는 박스에 안고 있던 편지와 사진들을 넣으려다 와르르 바닥에 흘려버리고 말았다.  마루가 재빨리 박스를 바닥에 놓고 바닥에 떨어진 편지들과 사진을 담으려는데 여운이 마루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손대지 말아요.”    여운의 차가운 부탁에 마루가 한 걸음 물러서자 여운은 말없이 바닥에 떨어진 편지와 사진들을 박스에 담아 들고 일어섰다.    “물건들…… 어디로 옮겨 줄까요?”    마루의 질문에 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가져갈 수 없어요. 갈 곳이 없어서……. 태우든지, 팔든지…… 차마루 씨가 알아서 처분해 주세요. 난 그냥…… 이것만 가져갈게요.”    여운이 박스를 들고 걸어가기 시작하자 마루가 재빨리 여운을 뒤따라왔다.    “필요한 물건……, 중요한 물건 있을 것 아니에요.”  “…….”  “이삿짐을 보관할 다른 보관소를 알아봐 줄 수 있어요.”  “…….”  “기여운 씨…….”  “…….”  “그쪽 아니에요.”    여운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보관실 출입구도 아닌 곳으로 걸어가자 마루가 여운을 붙잡았다.    “보관소 알아봐 줄게요.”  “…….”  “당분간 지낼 만한 곳도 알아봐 줄 수 있어요.”  “…….”  “기여운 씨.”    여운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등을 보인 채 미동도 하지 않자 마루가 여운을 돌려세웠다. 그러다 움찔 놀라고 말았다. 여운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여운 씨…….”    기여운이 울고 있었다. 소리도 없이 들썩임도 없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난데없이 또 시작됐다. 심장의 이상 박동이. 그뿐 아니라 마음마저 울컥했다. 다른 말로는 도저히 위장할 수 없는, 가슴 한복판이 강하게 부대끼는 울컥함이었다. 강력한 울컥함과 이상 박동이 합쳐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여자의 눈물에 흔들리던 마루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들을 조사하고 신문한 마루였다. 국수방에 연행됐던 대부분의 여자들이 눈물을 흘리며 결백을 주장했었다. 때문에 여자의 눈물에는 굳은살이 단단히 박여 흔들리거나 울컥할 마루가 아니었다. 그런데 여운의 눈물에 울컥해 버린 것이다.  엉엉 소리 내서 울면 좋겠는데, 온갖 화풀이 다 해 대고 행패를 부리면 좋겠는데, 진짜 차라리 화를 내고 소리 지르고 욕을 하면 좋겠는데 여운은 마음이 점점 더 심하게 울컥거릴 만큼 소리도 없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서러워서 일그러진 얼굴. 일그러지는 바람에 못생겨진 얼굴인데, 일그러져서 못생겨진 얼굴마저도 아프게 와 닿을 만큼 굵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송아지처럼 커다란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박스 안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여운은 긴 속눈썹이 애교 살에 달라붙을 만큼 두 눈을 흠뻑 적시고 얼굴이 흠뻑 젖도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지 알 수가 없지만 마루는 여운을 안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아니라 정말 가슴에 안고 등을 쓰다듬고 토닥이며 울지 말라고 달래 주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혼자 쓸쓸하게 울지 말고 가슴에 안겨서 울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소리 내서 실컷 울게 해 주고 싶었다.  매력도 없고, 밉고, 시끄럽고, 좋은 구석은 단 한 가지도 없는 여잔데, 무시무시한 쌍욕을 아무렇지 않게 퍼붓고, 억세기론 둘째라면 서러울 만큼 여자로서의 매력은 절대적으로 꽝인, 마루가 꿈꾸는 이상형의 여자와는 전혀 반대, 정반대인 여잔데, 이상하게 가슴이 울컥거리고 울렁거려 와락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안으면 안 된다고, 싸구려 감상에 젖어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각성시키려 애썼지만 가슴 울렁거림과 숨이 막힐 듯한 부정맥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기여운의 본래 모습을 기억하라고, 기여운이 보여 줬던 진짜 모습. 가관도 아니었던 억세 빠진 모습을 기억하려고 애쓰며 무시하려고 고개도 돌려 봤지만 고개는 자꾸만 여운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눈동자는 여운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시릴 정도로 맑은 눈물만 바라보았다.    “여운 씨…….”  “…….”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안아 줄까요?”    마루가 여운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속삭였다.  마루가 여운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데 여운이 박스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물러섰다.    “내가…… 되게 없어 보이나 봐요……. 아무리 없어 보여도…… 그러는 거 아니에요. 사람 놀리는 거 아니라구요.”  “여운 씨가 없어 보여서가 아니라……, 놀리는 게 아니라…….”    없어 보여서 안아 주겠다는 게 아니라고, 우는 모습이 마음이 아파서 안아 주고 싶은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쩐지 쑥스럽고 민망해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필요한 물건, 중요한 물건 없어요…….”    모두 필요하고 모두 중요한 물건인데 여운은 필요한 것도 중요한 것도 없다고 말하며 낮게 흐느꼈다.    “보관소…… 알아봐 주지 않아도 돼요. 보관해도…… 어차피 금방 못 찾을 테니까…… 그냥 알아서 처분해 주세요. 가구나 가전제품은 전부 새거예요, 이사해서 쓰려고 새로 구입한 거라……. 여기서 필요한 물건 골라서 쓰든지……, 기부를 하든지……, 귀찮으면 그냥 태우든지……, 버려도 돼요…….”    여운이 눈물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꼭 깨물더니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지낼 만한 곳 알아봐 줄게요. 짐도 그쪽으로 옮겨서…….”  “아뇨. 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할게요.”  “당장 갈 곳이 없잖아요.”  “생각해 보니까…… 있어요.”  “있어요? 정말 있어요? 없잖아요.”  “있어요.”  “물건 가져갈 곳 없다면서요.”  “물건은 못 가져가고…… 그냥 나만…… 나만 갈 수 있는 곳 있어요.”  “어딘데요?”  “내가 갈 곳까지 차마루 씨한테 말해야 해요?”  “그런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래요.”  “차마루 씨가 날 걱정할 리가 없잖아요.”  “정말 걱정돼서 그래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래도…… 걱정된다고 말해 주니까…… 괜히 고맙네요. 고마워할 필요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런데 고맙네요.”    고맙다고 말하던 여운이 또다시 낮게 흐느꼈다.    “여운 씨…….”  “입맛이 없어서…… 며칠 굶었더니…… 기운이 달려서…… 그래서 우는 거예요. 여기선 울면 안 되는 거예요? 여기서 울면…… 간첩 되는 거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단지 난…… 너무 미안해서…….”  “사과했잖아요. 사과했으니까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냥 굶어서……, 어릴 때부터 잘 못 먹어서……, 먹을 게 없어서 굶고 그랬을 때 괜히 서럽더라구요. 지금도 그래서 그래요……. 굶어서…… .굶으니까 괜히 서러워서…….”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것을 마루는 알고 있었다.  굶은 게 서러워서 우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서러운 게 굶어서가 아니라 사기당해서, 죽도록 고생해서 모은 전 재산 다 날려 버리고 갈 곳이 없어서 발 동동 구르며 속 태우고 있을 때 난데없이 간첩으로 몰려 체포까지 되고 열흘 만에 겨우 혐의를 벗어 풀려나게 됐는데 풀려나도 막상 갈 곳이 없는 현실.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어닥치다 보니 감당할 수가 없어서 울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먹으러 갈까요? 여운 씨 좋아하는 거 내가 사 줄게요.”    마루는 배가 고파서 우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바보같이 그렇게 말했다. 바보 같은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정말 그냥 뭐라도 먹이고 싶었다. 아니, 뭐라도 먹이면서 조금이라도 같이 있어 주고 싶었다. 가족이 없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위로해 줄 사람도 없고 그래서 죽어도 흔적도 남지 않을 사람이니까.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가족이 없어서 위로해 줄 사람도 없고 죽어도 흔적도 남지 않을 사람이라는 게 갑자기 너무나 마음이 아팠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배고프지 않아요.”    여운이 고개를 저었다.    “같이 먹어요. 나하고 같이.”  “내가 우니까, 우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그렇죠? 아, 진짜…… 추접스럽게 울기 싫은데…….”    여운이 억지로 웃어 보였지만 울음과 섞인 웃음이 더욱 아프게 부딪쳐 왔다.  여운은 국수방에서 제공했던 체육복 소매로 눈물과 콧물을 닦아 낸 후 내려놓았던 박스를 똑바로 들었다.    “갈게요……. 빨리 가는 게 좋겠어요.”    여운이 다시 한 번 억지로 웃어 보이며 돌아섰다.    “너무 넓어서 나가는 길이 어딘지 잊어버렸어요. 어디로 가야 해요? 그냥 가다 보면 나가는 문이 나오는 거예요?”    여운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면서도 무작정 가려 할 때 마루가 여운을 뒤에서 끌어당겨 안았다.  마루가 여운을 안았다. 정말 안아 버렸다.  여운은 마루에게 안겨 있었다. 여운의 등에 마루의 넓은 가슴이 느껴졌다. 마루의 가슴에선 여운의 말라서 딱딱한 등이 느껴졌다. 마루의 긴 팔이 여운의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여운은 마루의 탄탄하고 듬직한 팔 안에 안겨 있었다.    “하지 말아요.”    여운이 마루를 밀어내려 했지만 마루는 여운을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 말라구요. 이제 안 울려고 하는데……. 그만 울고 싶은데…….”    여운이 재차 마루를 밀어내려 했지만 마루는 여운을 더욱 꼭 감싸 안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여운은 더 이상 마루를 밀어내지 않고 그의 팔에 안긴 채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가라앉던 감정이 폭발해 버렸고, 처음보다 더욱 서러운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한 것이다. 참 싫은 사람인데, 좋은 구석도, 좋아할 여지도 없는 진짜 싫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 품에 안겨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싫기만 한 사람인데도 그 가슴이 어찌나 포근한지, 어찌나 따뜻하고 살갑게 느껴지는지 이놈의 눈물샘이 완전히 터져 버린 듯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아 내고 있었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고 가슴을 떨며 흐느껴 울었다. 울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참고 또 참았던 30년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 울고 있었다. 하필 왜 마루일까 싶은데, 왜 하필이면 마루의 품에서일까 싶은데 또 한편으론 마루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싫든 좋든 청승 떨며 혼자 울게 하지 않고 마루라도 곁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위로받는 기분 느끼게 해 줘서 다행이다 싶었다.  마루는 여운이 실컷 울 수 있도록 말없이 품에 꼭 껴안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연약한 몸이었다. 작고 연약한 몸 때문에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제 됐어요. 됐어요.”    여운이 마루를 밀어내고 돌아서서 마루를 바라봤다.    “고마워요.”    여운이 마루를 향해 고마운 미소를 지었다.  한참을 울고 나자, 진짜 실컷 울고 나자 후련함이 느껴졌다.    “이제 갈게요. 진짜 갈게요.”    여운이 씩씩하게 말하며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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