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여운 스파이-5화 (5/21)

5장        “야아아아악! 안 돼!”  “으으으윽!”  “이이이익!”    문밖에서 지키고 있던 남자 요원 두 명은 방 안에서 터져 나오는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에 움찔하며 서로를 쳐다봤다.    “아, 진짜, 용의자 구타하지 말라니까.”    남자 요원 2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데 우당탕 소리와 함께 또다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놔아아아아!”  “아아아아윽!”  “꺄아아악!”  “여자 요원들이 용의자를 반 죽이는 거 아니야?”  “하여튼 여자들이 더 독해요.”    그때였다. 비명보다 더욱 격렬한 쌍욕이 무자비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 된다고! 놔, 이 쌍×들아! 놓으라고 이 × 같은 ×들아! 너 죽고 나 죽자, 이 ×××들아!”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와 함께 무지막지한 쌍욕이 팡팡 터뜨려지자 남자 요원들이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용의자를 아주 아작을 내나 보다. 얼마나 거칠게 패면 피의자가 쌍욕까지 하겠냐.”  “용의자 심문 한두 번 하나……. 여자 요원들 징계 위원회에 회부해야 하는 거 아니야? 용의자 정식으로 기소했을 때 구타 때문에 허위 자백했다고 하면 어떻게 하려고 저따위야?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댄데!”  “꺄아아악! 놔! 놔, 놔!”  “으아아악. 아파!”    어찌나 찢어지게 비명을 내지르는지 밖에서 듣고 있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안 되겠어. 들어가서 말려.”    여자 요원들이 피의자인 여운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남자 요원들이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벌컥 문이 열리더니 여자 요원들이 밖으로 나왔다.  남자 요원들은 밖으로 나오는 여자 요원들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서야 했다. 여자 요원들의 꼴이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듯, 아니 좀비에게 습격당한 듯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굴 여기저기 피멍울이 맺힌 생채기에, 슈트 어깨가 뜯어져 있질 않나, 셔츠 단추도 떨어져 있고 깔끔하게 빗어 질끈 묶어 놓았던 머리카락은 수컷 사자의 갈퀴처럼 아주 쑥대밭이 돼 있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여자 요원 둘 다 꼬락서니가 엉망진창이었다.    “뭡니까? 용의자한테 맞았습니까?”    남자 요원 2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저렇게 억센 여잔 처음 봅니다.”    여자 요원 2가 화를 꾹꾹 참으며 대답했다.    “용의자 한 명한테 두 사람이 당했단 말입니까? 고도의 훈련을 받은 최정예 요원인데?”    다른 남자 요원이 비꼬듯 묻자 여자 요원들이 남자 요원을 태울 듯 노려봤다.    “가까이 가지 말아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여자 요원들은 아주 기진맥진한 얼굴로 여운에게서 벗겨 낸 옷을 들고 휘청거리며 가 버렸다.  남자 요원들은 여자 요원들의 말을 인정도 하기 싫고 이해도 하기 싫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흠칫하며 멈춰 섰다.  체육복으로 갈아입은 여운이 여자 요원들만큼이나 쑥대밭처럼 헝클어진 머리채를 하고 양 손 가득 머리카락을 뭉텅이로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운은 금방이라도 두 눈에서 저주의 레이저라도 뿜어낼 듯 검은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섭게 두 눈을 치켜뜨고 남자 요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방 안에 있던 의자도 다 뒤집어져 있었다. 도대체 방 안에서 세 여자가 어떻게 제압을 하고 제압당하지 않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이 지경이 됐는지 알고 싶었지만 감시 카메라를 가린 탓에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남자 요원들이 씩씩거리며 노려보고 있는 여운을 애써 무시하며 뒤집힌 의자들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있는데 파일을 든 오 팀장이 방으로 들어섰다.  오 팀장은 진격의 살쾡이처럼 씩씩거리는 여운을 쳐다보다가 카메라 렌즈를 가린 손수건을 치운 후 심문 테이블 의자에 먼저 앉았다.    “기여운 씨.”    오 팀장이 부르자 여운이 고개를 돌려 오 팀장을 노려봤다.    “이리 와서 앉아요. 얘기 좀 합시다.”  “무슨 얘기요?”  “우리 요원들한테 기여운 씨가 어떤 이유로 체포가 됐는지 들었죠?”  “간첩이라면서요. 내가 간첩이라면서요. 간첩이라면서 강제로 옷까지 다 벗겼잖아요! 이 변태 같은 인간들아!”    여운이 귀청이 찢어질 듯 소리를 질렀다.    “아닙니까?”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쩌죠? 우린 기여운 씨가 간첩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갖고 있는데.”  “확실한 증거요? 어떻게 확실한 증거요?”  “보여 줄 테니까 이리 와서 앉아요.”    오 팀장의 말에 오 팀장을 노려보던 여운이 맞은편 의자로 와서 앉았다. 의자에 앉은 여운이 꽉 쥐고 있던 손을 펴자 여운의 두 손에 무자비하게 쥐어뜯긴 머리카락 뭉치들이 책상 위에 쏟아지듯 내려앉았다.  오 팀장은 머리카락 뭉텅이를 쳐다보다가 파일로 툭 쳐서 바닥에 떨어뜨렸고, 여운은 오 팀장의 행동을 두 눈 치켜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여차하면 오 팀장의 머리카락도 오지게 쥐어 뜯어 주겠다는 듯이.  오 팀장은 남자 요원들을 밖으로 내보낸 후 들고 온 파일을 열어 사진 한 장을 테이블에 놓고 여운의 앞쪽으로 밀어 주었다.  여운은 오 팀장을 조금 더 째려보다가 사진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누군지 알죠?”  “알죠.”  “솔직하게 말해 주니 고맙군요. 모른다고 할 줄 알았는데.”  “모르긴요. 우리 가게 단골손님인데.”  “단골손님이다?”  “1주일에 두 번, 많을 땐 세 번, 가게에서 저녁을 배달해 드시는 분이에요. 주로 내가 배달해 드렸구요.”  “음식을 배달했다?”  “내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일했거든요. 원래는 포장은 해 주지만 배달은 안 하는데, 이 손님은 워낙 단골이시고 또 엄청 팔아 주시기 때문에 사장님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손님은 꼭 배달해 드려야 한다고 해서 주문하면 무조건 배달해 드렸어요. 이분 교수님이에요.”  “허…….”    오 팀장이 장난치냐는 듯 웃었다.    “왜 웃어요? 못 믿는 거예요? 진짜예요! 가게 사장님한테 물어보세요!”    여운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인지 알죠?”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그냥 교수님이라는 것만 알아요. 사장님이 교수님이라 불렀거든요. 그런데 이분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우리…… 질질 시간 끌지 맙시다. 우린 기여운 씨와 이 사람의 관계 다 알고 있고, 증거도 다 확보했어요.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피차 시간 낭비하지 말고 자백해요.”  “뭘 자백하라는 거예요?”    여운이 못 알아들은 얼굴로 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 팀장이 말한 얘기들은 여운으로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JB.”  “제비요? 교수님 제비였어요?”    기여운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JB를 제비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여운의 엉뚱한 반응에 오 팀장이 실소를 터뜨렸다.    “제비가 아니라……, 기여운 씨의 정체를 자백하라고요.”  “내 정체요? 아니, 왜 이렇게 내 정체를 밝히라는 사람이 많지? 도대체 나에 대해서 왜 이렇게 알고 싶어 하는 거야?”  “서로 좋게 좋게 합시다.”  “그러니까 내 정체를 밝히라는 건 내가 누군지 말하라는 거죠?”  “맞아요.”  “알겠어요. 지금부터 자세히 다 말씀드릴 테니까 메모하세요. 정확하게.”  “녹화되니까 걱정 말고 말해요.”    오 팀장이 카메라를 가리키자 여운이 카메라를 쳐다보다가 아예 카메라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이름은 기여운이구요…….”    이름을 말하던 여운이 흘낏 오 팀장을 쳐다봤다.    “인사해야 하나요?”    여운의 물음에 오 팀장이 어이없지만 친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운은 다시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긴장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름은 기여운입니다. 주민번호는 ×××××××-×××××××구요. 어……, 키는 161에서 162. 키 재는 기계마다 조금씩 다르게 나와요. 솔직히 조금 더 클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한창 잘 먹어야 할 때 너무 못 얻어먹어서 그것밖에 못 컸어요. 또 몸무게는 43 정도? 생리 땐 2킬로그램 정도 더 나가구요. 생리통도 좀 심한 편이고…….”    여운은 나름대로 매우 성실하게 기여운이라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오 팀장의 표정은 점점 더 갑갑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 발 사이즈는 235인데 좀 작게 나온 신발은 240도 신구요. 발볼이 조금 넓은 편이고……, 쓸데없이 둘째 발가락이 길어서 그래서 235나 240 신는 거예요. 옛날 고전 문학에 ‘발가락이 닮았다’라는 작품 있잖아요. 아무리 봐도 닮은 구석이 없어서 아내가 불륜을 저질러서 다른 남자의 아이가 아닐까 의심스러운데 그럼에도 발가락이 닮았다고 우기는 불쌍한 남자……. 하여튼 나도 우리 아버지 닮아서 둘째 발가락이 길다 그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아, 옷은 보통 55사이즈인데 요즘은 옷이 더럽게 작게 나와서 66을 입을 때도 있어요. 그리고 집 주소는…… 서울시 신림동……. 아 참.”    여운이 재빨리 오 팀장을 쳐다봤다.    “전에 살았던 집 주소 말해도 되나요? 지금은 안 살긴 하지만 현재 주소를 댈 만한 집이 없어서……. 내가 최근에 기획 부동산에 사기를 맞아서 전 재산을 다 털렸거든요. 전 재산 다 털려서 시골에 집을 샀는데…… 알고 보니까 집이 아니라 창고를 샀더라구요. 전에 살던 집 주소도 괜찮을까요?”  “기여운 씨, 이럴 겁니까?”  “뭘요?”  “정체를 밝히라 했잖아요.”  “밝히고 있잖아요! 지금까지 말한 거 다 진짜예요!”  “기여운 씨!”    오 팀장이 책상을 내리치자 여운이 움찔했다.    “솔직히, 나란 여자가 대체로 솔직하지만 키…… 한 2센티…… 속였어요. 하지만 몸무게는 진짜예요.”    여운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한 후 다시 카메라를 쳐다봤다.    “학교는…… ××초등학교 나왔구요,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했어요. 그리고 ○○대학교 합격했는데…….”  “기여운 씨!”  “아직 말 다 안 끝났으니까 중간에 끊지 좀 마세요!”    기여운이 오 팀장을 향해 버럭 소리친 후 다시 카메라를 쳐다봤다.    “틀림없이 ○○대학교 합격했어요. 국문학과. 등록 못 했지만 합격한 건 사실이고 증명할 수 있어요. 합격했는데 왜 등록을 못 했냐면요……, 돈이 없었거든요. 돈이…… 없었어요. 내가 진짜 징그럽게 가난했거든요. 왜 가난했냐 하면…… 우리 엄마는 내가 태어나고 나서 3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왜 돌아가셨는지 자세히는 몰라요. 그냥…… 나를 낳고…… 하혈이 안 멈춰서 돌아가셨대요. 그래서 나는 엄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분명히 본 적 있을 텐데…… 기억할 수가 없어요. 태어나서 3일 만에 돌아가셨으니까……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 해요. 하여튼 그래서 아빠가 오빠랑 나를 혼자 키우셨거든요? 재혼도 안 하시고, 온갖 궂은일 다 하시면서 키우셨는데……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건지,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던 건지, 아니면…… 너무 외롭고 힘들었기 때문인지…… 간이 망가졌어요. 간이 망가져서 아빠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간 이식밖에 없었고 그래서 오빠가 아빠한테 간을 줬어요……. 아빠를 살리려구요. 왜냐면 우리 아빠고…… 아빠까지 돌아가시면 오빠랑 나한테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간 이식 수술을 하려고 했는데 수술비가 너무 비싸서……. 정말 너무 비쌌어요. 도저히 우리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요. 그래서 포기했는데…… 다행히 ○○교회하고 어떤 기부 단체에서 도와줘서 수술을 받을 수 있었어요. 정말 고마운 분들이죠. 진짜 고마운 분들이에요. 그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오빠가 아빠한테 간을 줬어요……. 아빠한테 간을 주고 아빠는 오빠 간을 받으려고 같이 수술실에 들어갔는데…….”    여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말을 잇지 못했다.

“기여운 씨?”    오 팀장이 부르자 여운이 깊은 한숨을 내쉰 후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오빤……, 우리 오빠가 깨어나지 못했어요. 겨우 스무 살이었는데……. 수술 도중에 갑자기 심장이 멎었는데…… 심장이 다시 뛰게 하려고 그렇게 애를 썼다는데…… 안 살아났대요. 우리 오빠가…… 수술실에서…… 죽었어요.”    여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런 얘기 진짜 하기 싫은데…….”    여운이 울음을 참으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두 눈에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 큼지막한 눈물방울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오빠가 죽었다는 걸…… 오빠 간을 아빠한테 이식해 주고 나서야 알았어요. 그런데 아빠한테 말 못 했어요. 그냥 회복하고 있다고 말했고, 아빤 믿었어요. 그러다가 우리 아빠도…….”    여운이 목이 메자 잠깐 말을 끊고 입술을 꼭 다물었다. 입술을 꼭 다물 때 굵은 눈물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 진짜…… 칙칙하게…… 우는 것 싫어하는데…….”    여운이 푸념하듯 중얼거린 후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아빠…… 오빠 간 이식받고…… 5일 만에 돌아가셨어요. 수술이 잘됐다고 했는데……, 잘됐는데…… 수술하고 사흘 동안 정말 좋았는데……. 나하고 얘기도 했는데……. 나한테 웃어 줬는데…….”    이미 눈물을 멈출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운은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바람에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거부반응이 일어났고 쇼크가 와서 혼수상태가 됐어요. 그리고 너무 빨리…… 돌아가셨어요.”    여운의 목소리에 흐느낌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열다섯 살이었어요. 우리 오빠랑 우리 아빠랑 하늘나라 가 버렸을 때 난 열다섯 살이었어요.”    너무나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여운의 눈에서 뜨겁고 서러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아무것도…….”    여운이 고개를 숙이고 흐느껴 우는데 오 팀장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수건을 건넸다.  오 팀장은 여운이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없는 얘기를 잘도 만들어 내고, 게다가 저 정도로 실감나게 운다면 연기 대상은 휩쓸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수건을 건넸지만 무덤덤하다 못해 따분한 표정으로 여운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운은 오 팀장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재빨리 흐르는 눈물을 닦았지만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아빠랑 오빠가 죽었는데…… 난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그래서 담임선생님께 얘기했어요. 도와 달라구요……. 담임선생님하고 학교 선생님들이 친척들에게 연락을 하고 장례식 준비를 하고…….”    여운이 말을 잇기 힘든 듯 또다시 소리 없이 흐느끼다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장례식에…… 친척분들이 왔는데……, 할머니랑 삼촌들이랑 왔는데…… 우리 담임선생님이 친척들한테 나를 좀 맡아 주길 그렇게 부탁드렸거든요. 정말 우리 엄마처럼 우리 선생님이 사정사정했거든요. 그런데 다 싫다고 했어요. 애미 잡아먹고 애비 잡아먹고 오빠까지 잡아먹은 년이라고…….”    여운의 어깨와 가슴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단순하게 흐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누가 잡고 흔드는 것처럼 무섭게 떨리기 시작했다.    “죽으려면 저년이 죽지 왜 아까운 내 아들하고 손자를 죽였냐고……. 저년이 또 누굴 잡아먹을지 모르니 절대 맡아줄 수 없다고…….”    부들부들 떨며 설명하던 여운이 갑자기 가슴이 답답한 듯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내가 잡아먹은 거 아닌데……. 그게 아닌데…….”  “기여운 씨?”    오 팀장은 여전히 연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조용히 여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여운은 오 팀장이 부르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금방이라도 숨이 멎어 버릴 듯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오 팀장은 여운이 가슴을 움켜쥐고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을 때에야 응급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벌떡 일어나 여운에게 달려갔다.    “기여운 씨! 기여운 씨!”    오 팀장이 여운을 붙잡고 등을 두드리며 달래 보려 했지만 달랜다고 해결될 상태는 이미 지나 있었다.    “기여운 씨, 호흡을 해요! 숨을 쉬어요!”  “숨이……. 살려 주세…….”    여운이 오 팀장의 옷자락을 붙잡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중얼거렸다.    “정신 차려요! 호흡을 천천히 해요, 천천히!”    오 팀장이 고함을 질렀지만 소용없었다.    “숨이……. 숨이…….”    입술이 새파랗게 타들어 가는 여운이 몸을 떨기 시작하자 오 팀장이 고함을 내질렀다.    “의료진! 의료진!”    오 팀장이 다급하게 고함을 내질렀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국수방 요원들과 의료진이 뛰어 들어왔다.    *    “진실입니다.”    여운이 진술 혹은 고백을 하는 표정을 모니터로 면밀하게 살피던 국수방 소속 표정 분석 전문 요원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진실이라고?”  “의심할 점이 없습니다. 표정으로는 진술 내용 모두 진실입니다.”  “연기가 아니란 말이야?”  “예.”    그때 상황실로 여자 요원 2가 들어왔다.    “기여운 씨 진술 확인됐습니다. 졸업한 학교도 맞고, ○○대학교 합격도 사실입니다.”    여자 요원 2가 합격증을 오 팀장에게 건넸다.  오팀장은 합격증을 자세하게 들여다봤다.    “위조한 건 아니야?”  “아닙니다. 10년이 지난 거지만 진짜 합격증입니다. 대학교 측에도 확인했습니다. 기여운 씨 브래지어 속에 있었습니다.”  “뭐? 합격증을 브래지어 속에 감췄다고? 10년 동안이나?”  “감췄다기보다…… 보관했던 것 같습니다.”  “뭣 때문에?”  “글쎄, 등록금이 없어서 포기했지만 합격한 것만큼은 사실이니까 합격증이라도 보면서 위안을 얻으려고 보관했던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왜 속옷에 보관했냐 그 말이야.”  “잃어버릴 확률이 제일 적다고 생각했겠죠.”    여자 요원 2의 설명에 오 팀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기여운 씨 말입니다.”    여자 요원 2가 모니터 속 여운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 갔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전국 5퍼센트 안에 들었을 만큼 성적이 엄청나게 좋았습니다.”  “전국 5프로? 수재였다고?”  “네. ○○대학교에 합격한 게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 때 선생님 모두 정말 공부도 잘하고 성실하고…… 불쌍한 제자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불쌍한 제자?”  “선생님들 진술 역시 기여운 씨 진술과 일치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도…… 장례식장에서 친척들이 기여운 씨가 말한 이유로 양육을 거부했다는 것을 확인해 주셨고 그래서…… 오갈 데가 없는 기여운 씨를 보살피려고 학교 선생님들께서 십시일반 모금도 하고…… 여러 단체에 도움을 청해서 기부도 받고……. 정말 불쌍한 10대를 보냈더라구요.”    여자 요원 2가 측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선생님 말씀으론 대학에 꼭 가려고 했던 이유가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남다르게 영특했던 터라 기여운 씨 아버지께서 대학은 꼭 보내 주겠다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대학은 꼭 보내 준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퇴원하면 일 열심히 해서 대학은 꼭 보내 준다고……. 기여운 씨 오빠는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에 진학을 못 했지만 기여운 씨 아버지와 오빠는 기여운 씨만큼은 대학에 보내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학비가 없어서 입학을 못 하는 걸 알면서도 시험을 봤던 것 같고요. 학교 측에서도 기여운 씨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고 입학이 가능했다는데 기여운 씨가 거부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성인이니까 이제 스스로 살아야 한다고요. 아마도 더 이상의 도움은 받고 싶지 않았겠죠. 등록금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요.”    여자 요원 2의 설명에 상황실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가족 관계는?”  “아버지와 오빠는 진술처럼 안타깝게 사망한 게 맞았습니다. 확인했습니다.”  “정말 기여운이 열다섯 살 때 아버지와 오빠가 다 죽었단 말이야?”  “네. 간경화로 이식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고 간 적출 수술 도중 오빠는 사망, 아버지 역시 이식 수술 5일 후 거부반응과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오 팀장의 낯이 씁쓸하게 일그러졌다.    “그런데 한 가지, 어머니의 사망 부분이 애매합니다.”  “애매하다니?”  “기여운 씨가 태어나고 사흘 후 가출 신고가 됐다가 두 달 후 실종 처리 됐습니다.”  “기여운의 어머니가 기여운을 낳고 사흘 만에 가출을 했다고?”  “처음엔 가출한 줄 알고 가출 신고를 했는데 두 달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니 실종 처리 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고요.”    요원의 설명을 들은 오 팀장이 낮은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어디엔가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가능하죠.”  “어쨌거나 말이야, 뭐가 이렇게 불쌍하냐…….”    오 팀장이 찝찝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삶이 힘들어서 이 나라가 싫었던 모양이군. 그래서 북쪽을 찬양했던 거야.”    오 팀장의 말에 다른 요원들이 일리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필구는?”  “체포 후 국수방으로 이송 중이라고 연락 왔습니다.”  “기여운의 간첩 혐의를 인정하게 하려면 이필구와 기여운, 두 사람을 동시에 족치는 수밖엔 없겠군.”    오 팀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여운이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심문실로 마루가 들어섰다. 마루는 조용히 여운에게 다가가 의자에 앉아 여운을 내려다봤다.  이상하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여운이 간첩이냐, 간첩이 아니냐를 떠나 여운의 진술이 모두 사실로 확인되자 불쌍해도 너무 불쌍했다.  중학교 2학년이라면 겨우 열다섯 살. 얼마나 중2병이 지독하면 북한 김정은이 무서워서 전쟁도 일으키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긴 바로 그 진격의 중2 때 여운은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된 것이다. 친척들에게도 거부당하고 도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힘겨운 삶이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렇게 억세졌구나 싶었다. 원래는 참 착했을 사람인데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억척을 떨다 보니 절로 드세질 수밖에 없었구나 싶었다.  그때, 가슴이 이상했다. 심장이 이상했다. 또다시 조이는 듯 갑갑해지더니 일정했던 박동이 제멋대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갑자기 시작된 이상 증상이었다. 하루 온종일 이상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이유 없이, 난데없이 시작되는 이상 증상. 이유 없이, 난데없이 시작됐다가 별 이유 없이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가 있는 이상 증상.  아무래도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손으로 심장이 있는 가슴을 꾹 누르며 심호흡을 해 봤다. 하지만 한번 흐트러진 박동은 좀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루가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측은하고 무거운 표정으로 여운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운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까풀이 무거운 듯 스르륵 이내 눈을 감았던 여운은 다시 눈을 떴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여운은 인기척을 느낀 듯 고개를 돌리더니 마루를 쳐다봤다. 가만히 한참 동안 마루를 쳐다보던 여운이 불에 덴 듯 깜짝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차마루 씨!”  “괜찮습니까?”  “괜찮다니요. 완전 엉망이에요.”    여운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어떤 사람이…… 아저씨였어요. 좀 못생긴…….”    여운이 오 팀장에 대해 좀 못생겼다고 말할 때 마루는 하마터면 푹 웃을 뻔했다.    “그 아저씨가 나에 대해서 전부 다 말하라고 해서 저기 저 카메라를 보면서 말하다가 갑자기 숨 쉬는 게 힘들어서…… 기절했던 것 같아요.”    여운이 출입문 옆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다 어디 갔어요? 혹시 저 카메라로 보고 있는 거예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까 그 아저씨도 보고 있을까요?”  “틀림없이.”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찔린 듯 눈치를 봤다.    “내가…… 못생겼다고 한 말 들었을까요?”    여운이 속삭여 물었고 마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운이 미안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흘낏거렸다.    “그나저나 차마루 씨도 체포됐어요?”  “…….”  “어떤 여자들이 막 들어와서 체포된 거라고 하더니…… 옷을 벗기더라구요. 수색을 해야 한다고……. 차마루 씨도 홀딱 벗었어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대답을 못 하자 여운이 혀를 찼다.    “차마루 씨도 당했군요. 난 그냥 당하진 않았어요. 홀딱 벗기려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죠. 그래서 싸웠어요. 일대일이었으면 진짜 몇 군데 부러뜨려 놨을 건데 치사하게 두 명이 한꺼번에 덤벼드는 바람에 겨우 머리카락 몇 가닥밖에 못 뽑았어요.”  “몇 가닥?”    여운에게 머리채가 잡힌 여자 요원 두 명 모두 두피가 상해 피부과에 달려갔을 만큼 뭉텅이로 잡아 뜯겼는데 겨우 몇 가닥이라니.    “어쨌거나…… 내가 체포됐대요. 나더러 간첩이래요. 이게 말이 돼요?”    여운이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내가 진짜 간첩이라면 이 출중한 미모로 뼈다귀 해장국 파는 식당에서 일했겠어요? 있는 대로 쫙 뻗쳐 입고 미인계를 활용해서 권력 있는 남자들을 후렸겠지.”    여운의 자화자찬 비슷한 말에 마루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운의 자화자찬은 멈출 줄을 몰랐다.    “진짜 농담 아니라 내가 제대로 뻗쳐 입고 다녔으면 여러 남자 후렸을 텐데……. 자랑은 아니지만 나 좋다고 따라다닌 사람 제법 많았거든요. 물론 받아 준 사람은 한 사람이지만.”    여운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스물두 살 때부터 2년 동안 만난 사람인데 나보다 네 살 많아요. 궁합 너무 좋아서 사주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 진짜, 진짜 좋은 사람이에요. 잘생기고 친절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여운의 얼굴을 바라보던 마루는 숨이 꽉 막혀 오는 것을 느꼈다. 아주 조금 나아졌다 싶던 맥박도 다시 나빠졌다.    “그 사람하고 마을에서 같이 살려고 했어요?”    마루가 여운의 표정을 살피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아뇨.”    행복한 미소를 짓던 여운이 갑자기 시무룩해지더니 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헤어졌어요.”  “왜 헤어졌어요? 좋은 사람이라면서.”  “그게……. 쪽팔려서 말하기 싫어요.”  “쪽팔린다는 건…… 까였어요?”  “아니거든요!”    여운이 발끈했다.    “까인 게 아니면 쪽팔릴 이유가 없잖아요.”  “까인 거 아니라구요! 그냥……. 그냥…….”  “까였네요.”  “아니라구요!”    강력하게 반발하던 여운이 갑자기 시무룩해지더니 순순히 인정했다. 까였다고.    “그 사람 어머니가 날 싫어하셨어요……. 그러니까 결국 까인 거네요.”  “그 사람 어머니가 왜 싫어했어요?”  “팔자가 세다고요…….”    여운이 시무룩하다 못해 슬픈 얼굴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런 게 있어요. 내 팔자가 좀 그렇거든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있어요?”    마루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그냥 화가 났다. 갑자기 그냥 막 화가 났다.    “말 되는 소리예요.”  “뭐가 말이 된다는 겁니까? 팔자가 세서 싫다니? 무슨 팔자가 세다는 거예요?”    마루가 정말 화가 난 목소리로 따져 묻자 여운이 별꼴이야 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왜 화를 내요? 내가 내 팔자 세다고 했지, 차마루 씨 팔자 세다고 했어요? 왜 나한테 화를 내고 난리예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21세기에 팔자 어쩌고 하는 건 지극히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이고 그래서 완전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그 말입니다.”    마루가 자신도 모르게 잃었던 평정심을 재빨리 되찾으며 담담하면서도 냉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이지만 말은 돼요. 그 사람 어머니가 그랬어요. 부모도 형제도 없는 게 싫대요. 부모 형제가 어릴 때 다 돌아가신 게 너무너무 싫대요. 부모도 형제도 어릴 때 다 돌아가신 건 팔자가 센 증거라고, 그래서 무조건 싫다고……. 그냥 무조건 덮어 놓고 나의 모든 게 다 싫대요. 그 사람이 절대 헤어질 수 없다고 하니까 그 사람 어머니가 찾아오셨더라구요. 내가…… 당신 아들까지 잡아먹을까 봐 무섭다고. 그러니까 제발 놓아 달라고…….”    여운의 얼굴이 가슴이 아플 만큼 슬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사람 어머니 말씀이 맞아요. 나한테……, 내 팔자에 사람 잡아먹는 살이 껴 있어서 그래서 엄마도 아빠도 오빠도…… 다 죽었을지도 몰라요. 나 때문에……, 내 팔자가 너무 세서…….”    여운이 물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인 후 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결심했어요. 그 사람하고 헤어지고 나서…… 결심했어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다 죽어 버리니까…….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는 게 싫으니까…….”    처량한 표정의 여운을 바라보던 마루는 측은한 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흔들리려 해서 일부러 더욱 고집스럽게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간 옛사랑의 아픔 때문에 한참 동안 상념에 젖어 있던 여운이 문득 생각난 듯 마루를 쳐다봤다.    “아 참! 설마 차마루 씨도 간첩으로 체포된 거예요?”  “…….”  “혹시…… 차마루 씨가…….”    여운이 쉽게 말을 하지 못하고 마루의 눈치를 봤다.    “아니죠?”  “뭐가요?”  “차마루 씨가…… 간첩인 거 아니죠? 그래서 나까지 잡혀 온 거 아니죠?”  “…….”    마루가 대답을 하지 않자 여운은 마루가 간첩이라고 지레짐작하며 화들짝 놀랐다.    “간첩이에요? 차마루 씨가 간첩이었어요?”    여운은 움찔 겁을 먹으며 마루와 거리를 두기 위해 슬금슬금 물러났다.    “왜 그랬어요……. 기숙이 얘기 들어 보니까 북한은 살 곳이 못 되던데……. 정말 왜 그런 짓을 했어요…….”    여운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혀를 찼다.    “어쩌다 간첩이 됐어요……. 찾아보면 다른 일자리도 많은데……. 정 할 일이 없으면 내가 일하던 뼈다귀 해장국집에라도 오지…….”    여운이 안쓰럽고 안타깝지만 한편으론 한심함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인물에 그 덩치에 할 일이 얼마나 많았을 텐데 뭐가 아쉬워서……. 어머!”    혼자 열심히 북 치고 장구 치던 여운이 갑자기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루를 쳐다봤다.    “설마 미남계 쓰는 간첩이에요? 그 인물로 돈 많고 권력 가진 남편을 둔 아줌마들 막 후리는 미남계 간첩?”  “뭐라고요?”    마루가 순간 평정심을 잃고 욱했다.    “아니면…… 설마 게이 간첩은 아니죠?”  “기여운 씨!”    마루가 버럭 화를 내자 여운이 움찔 입을 다물었다.    “게이 간첩은 취소할게요. 하여튼 미남계 쓴 건 맞죠?”  “사람을 뭐로 보고 그 따위 소리를 해요?”  “인물이 좋으니까…….”  “아니라구요!”  “아니면 말구요……. 하여튼 국가수호 뭐라고 했는데……. 아! 국수방! 국수방인지 국숫집인지 여기 사람들이 나더러 간첩이라는데…… 내가 차마루 씨하고 한편인 줄 착각하는 것 같아요. 차마루 씨도 알다시피 난 아니잖아요. 차마루 씨가 아니라고 말 좀 해 줘요. 난 절대 간첩 아니라고. 네?”    여운이 사정하듯 부탁했다.    “내가…… 나 혼자 살자고 이러는 거 치사하게 보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억울하게 싸잡아 당할 순 없잖아요. 간첩 짓은 차마루 씨 혼자 했으니까 난 빼 줘요. 하룻밤, 아니 이틀 밤 차마루 씨 집에서 잤다고 간첩으로 싸잡히는 건 진짜 억울하거든요.”  “기여운 씨.”  “말 좀 해 줘요. 나 간첩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러니까…… 차마루 씨가 양심적으로 솔직하게 실토하고 나는 아니라고 말 좀 해 줘요.”  “당신을 체포한 건 바로 나예요.”  “뭐라구요?”    여운이 멍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차마루 씨가 날 체포했다니요?”  “난…… 국가수호방위국 소속 비밀 요원입니다.”    마루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밀 요원…….”    여운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저기 경상도 시골 마을에서 혼자 늙어 가는 인정머리 없는 시골 총각인 줄 알았는데 국가수호방위국 소속 비밀 요원이라니.  미남계를 쓰는 간첩인 줄 알았는데 비밀 요원이라고? 비밀 요원 같은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비밀 요원이라고?  그러고 보니 양복을 차려입은 모양새가 훤칠하고 멋들어진 것이 비밀 요원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여운을 체포한 사람이 다름 아닌 시골 총각인 줄 알았던 비밀 요원 차마루라고?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에 똥침당하는 소린지.  여운은 꿈을 꾸거나 몰래카메라에 당했거나 하여튼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고 보니 머릿속이 하얗게 타 버려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국가수호방위국이라고 했던가?  대한민국에 그런 단체 혹은 조직이 있다는 것도 전혀 몰랐고, 그런 조직에서 활동하는 비밀 요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아니, 관심도 없었다. 먹고살기 바빠서 다른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까.  그런데 단 며칠 만에 전 재산을 날리고 살림살이를 도둑맞은 것도 기가 찬데 별안간에 간첩이라니. 쉬지 않고 지지고 볶으며 싸웠던 시골 촌놈이 국가수호방위국의 비밀 요원이라니. 전 재산 사기 친 채 실장 놈을 어디 가서 잡을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앞길이 막막했는데 간첩으로 몰려 붙잡혀 와 있다? 무슨 이런 일이 있으며 스토리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어쩐지 시골에 사는 촌놈치고는 너무 잘 빠졌다 싶었다. 촌놈이 촌놈다워야 하는데 어째 너무 차도남 같다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비밀 요원이라니. 간첩이라니!  이해도 납득도 할 수 없고 하기도 싫은, 하루아침에 이상한 나라에 끌려온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차마루 씨가 날 체포했다고요?”  “그래요.”  “그럼 차마루 씨가 날 간첩으로 찍은 거예요?”  “맞아요.”  “언제부터요?”  “기여운 씨가 이정민의 집에 나타났던 날부터.”  “누구요? 누구 집요?”  “이정민.”  “이정민의 집에 나타났던 날요? 이정민이 누군데요?”  “이정민이 누군지 기여운 씨가 더 잘 알 것 아니에요.”    이건 또 무슨 허무맹랑한 소린지.    “내가 더 잘 안다니요? 이정민이라는 이름을 지금 처음 듣는데 내가 뭘 더 잘 안다는 거예요?”    여운의 완전히 못 알아듣는 듯한 물음에 마루가 연기 한번 기똥차게 잘하네 하는 듯한 얼굴로 픽 웃었다. 하지만 이런 연기에 속을 마루가 아니었다. 연기 잘하는 간첩 한두 번 취조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자, 그럼 하나하나 차근차근 기여운 씨가 왜 간첩인지, 무슨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 대화해 봅시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내가 왜 간첩인지, 내가 한 짓에 대해서 대화를 하자구요? 대체 내가 왜 간첩이고 내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예요?”    여운은 마루의 말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여운으로선 살면서 단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다른 세상의 언어를 쓰는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 기여운 씨가 더 잘 알 것 아니에요.”  “다들 나더러 더 잘 알 거다, 알고 있지 않냐, 알 것 아니냐 그러는데 난 내가 간첩 짓을 한 게 없어요. 간첩 짓을 한 게 없는데 뭘 더 잘 안다는 거예요?”  “이 나라가 싫다고 했던 말……, 종간나 새끼라고 했던 말……, 기억 안 나요?”  “이 나라가 싫다? 나 그 말 종종 해요. 짜증 날 때, 속상할 때, 비참할 때, 화날 때마다 해요. 종간나 새끼? 그 말이 왜요? 기숙이한테 배웠어요. 내 친구 이기숙요. 열세 살 때 가족이랑 탈북해서 죽을 고비 네 번 넘겨 겨우겨우 우리나라에 왔대요. 봉사 단체에서 만났어요. 진짜 착한 친구거든요. 그 친구도 착하고 나도 착하고. 서로 착하다고 칭찬하면서 친해졌어요. 기숙이하고 같이 봉사하는 사람들, 종간나 새끼라는 말 재미삼아 다 해요. 종간나 말고 북한 말 더 많이 알아요.”    억울함에 하소연하던 여운이 움찔 겁을 먹었다.    “혹시…… 이 나라가 싫다고 말하고 종간나 새끼라고 말하면 무조건 간첩이 되는 거예요? 몰랐어요. 진짜 몰랐어요. 그건 그럼 내가 잘못했어요. 좀 봐주면 안 돼요? 앞으론 절대 그런 말 안 할게요.”    여운이 마루에게 빌었지만 마루의 표정은 꽁꽁 얼어붙은 북극처럼 차갑기만 했다.    “그뿐이 아닙니다.”  “뭐가 또 있는데요? 단골손님한테 뼈다귀 해장국 배달해서 간첩이라구요? 그건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간첩한테 해장국 배달했다고 간첩이라 우기면 뼈다귀 해장국이 웃을 거예요.”  “내가 ○○마을에 내려가서 잠복근무한 지 8개월째예요. 그 마을에 간첩이 상주하고 있다는 첨보를 입수하자마자 마을에서 잠복했어요. 물론 그 마을에는 지금도 여전히 간첩이 살고 있어요. 우리 국수방 레이더망에 걸려든 몇몇 용의자들이 마을에 살고 있는 간첩과 정기적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마루의 말에 여운이 멍한 얼굴로 쳐다만 보자 마루가 답답하다는 듯 낯을 찡그렸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습니까?”  “대충 알아들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차마루 씨 얘기는 내가 간첩을 잡기 위해 잠복근무하고 있던 차마루 씨 레이더망에 걸린 또 다른 간첩이다, 그 말이에요?”  “알아들었군요, 정확하게.”    마루가 다소 비아냥거림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여운은 마루의 말투가 상당히 거슬려서 약이 올랐지만 일단 그건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은 사소한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국수방 요원들은 현재 마을에 상주하고 있는 간첩과 수월하게 접선하기 위해 또 다른 간첩이 마을로 이주할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기여운 씨는 우리가 만들어 둔 여러 가정 중 하나를 이유로 들며 마을로 이주하려고 시도했던 거고.”  “내가 거기 살고 있는 간첩하고 수월하게 접선하기 위해서 그 마을로 이주를 시도했다구요?”    여운이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한 듯, 아니 알아들었지만 안 알아들은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좋아요. 당신들이 만들어 뒀다는 여러 가정 중에 내가 딱 걸려든 건 대체 무슨 핑곈데요?”  “부동산 사기.”  “뭐라구요?”    여운은 맹랑하다 못해 속이 확 뒤집어진 듯한 표정으로 마루를 노려봤다.    “내가 10년 동안 죽기 살기로 번 내 전 재산을 탈탈 털어 가면서 간첩하고 접선하려고 했다고요? 아니, 대체 어떤 간첩이 그렇게나 많은 생돈을 퍼부어 가면서까지 간첩과 접선을 하려고 한대요? 간첩이 그렇게나 갑부래요?”    여운의 말에 마루가 별 대응을 하지 않자 여운은 마루가 말문이 막힌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깔보는 듯 비웃었다.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호응을 하죠. 갖다 붙여도 어떻게 그렇게 말도 안 되게 갖다 붙여요? 똥인지 된장인지 꼭 먹어 봐야 아는 거예요? 전 재산 다 털린 것도 열 받아 죽겠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요? 간첩하고 접선하려고 미친년처럼 굶어 가면서 번 돈을 다 꼬라박는다고요?”    여운은 침착함을 잃고 방방 뜨기 시작했다.    “차마루 씨, 차마루 씨도 그렇고, 아까 내 옷 벗기던 여자들도 그렇고, 못생긴 아저씨도 그렇고, 당신들 비밀 요원이라는 거 뻥이죠?”  “뻥?”  “어딜 봐서 댁들이 비밀 요원이에요?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내든가. 무슨 비밀 요원들이 하나 같이 띨띨하기만 하고……. 뭐? 부동산 사기? 진짜 한심하고 식상하고 막장스럽네.”    여운이 양껏 비웃자 마루가 두 눈을 부릅떴다.    “기여운 씨! 말조심해요!”    마루가 큰소리로 호통을 쳤지만 겁먹을 여운이 아니었다.    “차마루 씨나 말조심해요! 뭐? 간첩? 내가 당신 고소할 거야!”    여운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마루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꼴 보기 싫어서 한 대 후려갈기고 싶으니까 비웃지 말고 말이나 해 봐요.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는 그 간첩 놈이 누군지.”  “알고 있잖아요.”  “모른다구요!”    여운이 짜증 나서 버럭 소리쳤다.    “기여운 씨가 체포되기 직전에 나와 마주친 곳! 기여운 씨가 사기당했다고 말한 바로 그 집! 기여운 당신은 그 집을 방문하기도 했잖아!”    마루가 소리치자 여운이 기절할 듯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체포되기 직전에 마주친 곳……. 채 실장이 나한테 사기 친 그 집에…… 간첩이 산다구요? 예술가 집이라던데, 그럼 그 사람이 간첩이라는 거예요?”  “발연기 하지 마! 당신은 간첩과 접선하다가 나온 거였잖아!”    마루가 또다시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똥에 밥 말아 먹는 소리예요! 발연기? 이게 발연기면 난 지금 당장 칸에 입성해야 해요! 그리고 그따위로 눈 치켜뜨면서 위협하면 내가 겁먹을 것 같죠? 난 절대 겁 안 먹고 차마루 씨 눈알만 빠질 듯 아플 테니 눈이나 곱게 뜨세요. 그리고 난 거기가 간첩이 사는 집인 줄도 몰랐고, 접선을 한 적도 없어요. 채 실장 놈이 집 구경시켜 줘서 구경한 것뿐이라구요! 집을 사려는 사람이 집 안 보고 사요? 당연히 집을 보고 사야죠! 내가 살 집 보러 갔던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자다가 남의 다리 벅벅 긁다 때 밀리는 소리 그만해요!”    여운이 마루보다 더 무섭게 두 눈을 부릅뜨고 바락바락 소리친 후 분함과 흥분 때문에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다가 문득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아까 뭐라고 했죠? 그 사람……. 아, 이정민! 이정민이라고 했죠? 그 집 주인이 이정민이에요? 예술 한다는 사람이 이정민이에요? 그 사람 빨리 잡아요. 지금 당장 잡아요. 내가 집 구경 갔을 때 그 사람 있었어요. 계약서에는 이정민이 아니라…… 아! 조영준이었어요. 계약서……. 내 가방에 계약서 있어요. 계약서 확인하면 이름 나올 거예요. 잠깐, 조영준이라는 이름도 사기 친 건가? 어쩌면 채 실장도 간첩일지 몰라. 채 실장도 잡아야 해요. 그 놈들 지금 다 잡아야 해요. 그놈들만 잡으면 내가 간첩이 아니라는 게 밝혀진다구요. 그러니까 빨리, 당장 잡아요!”    여운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마루는 헛소리라고 생각하며 비웃기만 했다.    “내 말 안 들려요?”  “연기 그만하고 자리에 앉아요.”  “연기 아니라구요! 제발 믿어 줘요!”    여운이 미칠 것 같은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자세히 설명할게요. 그날, 그러니까 내가 조영준 집에 갔을 때, 아니 그 이정민이라는 사람 집에 갔을 때 채 실장하고 김정훈 대리하고 같이 갔거든요…….”    여운은 채 실장 그리고 김정훈과 함께 조영준, 아니 이정민의 집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    <조영준 작가님이 정말 유명한 예술가시거든요.>  <아, 그래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곧 프랑스로 이주하실 계획이라서 집을 급하게 내놓느라 이렇게 싸게 내놓으신 거예요. 완전히 거저죠, 거저. 아, 진짜 이런 집은 내가 잡아야 하는데! 집을 보면 알겠지만 기여운 씨는 완전 횡재한 거예요.>    채 실장이 침까지 튀겨 가며 아까워했다.    <로또보다 더 큰 횡재죠.>    김정훈도 채 실장을 거들었다.    <정말요? 그 정도로 싸게 잡는 거예요?>  <그렇다니까, 여운 씨. 내가 말했지? 그 마을을 끼고 제2의 정선 카지노가 들어설 거라고. 결정 났다니까. 확실하다니까. 5년만 딱 갖고 있어요. 5년 후에는 열 배, 아니 스무 배가 될 거니까. 나만 믿으면 된다니까. 여운 씨 진짜 나한테 크게 한턱 쏴야 해요. 아, 진짜 그 집은 내가 사야 하는데 아까워 죽겠네. 솔직히 내가 잡으려다가 여운 씨한테 양보한 거야. 여운 씨같이 열심히 산 사람이 진짜 성공해야 공평한 세상이니까 말이야.>  <너무 감사해요. 계약하고 진짜 한턱 쏠게요.>    여운이 들뜬 얼굴로 큰소리 뻥 쳤었다.  그날 서울에서 마을로 달려오는 동안 여운은 채 실장의 끝이 없고 그럴듯한 허풍에 진짜 횡재하는 줄 알고 완전히 속아 넘어갔었다. 이제야 인생이 피려는 모양이라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오빠가 하늘에서 도와줘서 이런 횡재가 자신한테 뚝 떨어진 것이라고 얼마나 감사해했는지 모른다.  이정민의 집에 도착했을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대문을 열어 준 사람은 예술가 조영준이 아니라 조영준의 개인 비서라는 사람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 전시회 때문에 프랑스에 계십니다. 선생님께서 저한테 모든 것을 일임하셔서 저하고 얘기하시면 됩니다.>    집주인은 프랑스에 있다는 비서의 말을 여운은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 버렸다.  조영준, 아니 이정민의 비서는 여운에게 집을 구경시켜 주었고 여운은 예술가의 예쁘고 넓고 환상적인 전원주택을 둘러보며 완전히 반하고 말았었다.  넓고 잘 손질된 정원, 이국적인 집 건물, 아기자기 딱 예술가 집이다 싶은 실내. 혼자 살기엔 차고 넘치는 2층집. 정말 꿈에 그리던 전원주택이었다.

다소 후다닥 몇 분 만에 둘러본 후 나와야 했던 것이 조금 아쉽긴 했다. 하지만 그땐 계약하기 전이라 남의 집을 너무 오래 구경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단 5분 만에 집 구경을 끝내고 나와야 했다.  집을 나오는 순간부터 채 실장과 김정훈 그리고 조영준의 비서라는 사람이 지금 당장 계약하지 않으면 이 으리번쩍한 예술가의 집이 다른 사람 소유가 될 것이라며 여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계약을 하자구요?>    여운이 약간 망설이자 채 실장이 여운을 들들 볶았다.    <계약하고 다른 사람이 한 시간 후에 돈 싸들고 온다잖아, 여운 씨. 이 집 놓칠 거예요?>  <놓칠 순 없죠. 하지만 한 번 보고 계약하기엔 좀 그래서요. 친구랑 한 번 더 보고 결정하고 싶은데…….>  <그럴 시간 없다니까. 한 시간 후에 계약하자고 돈 싸들고 온다잖아요. 생각하다간 늦어. 친구랑 한 번 더 보고 싶으면 계약하고 보면 되지.>  <계약하고 또 볼 수 있어요?>  <그럼, 그럼. 가능하죠?>    채 실장이 조영준의 비서에게 묻자 비서가 어려울 것 없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여운은 덜컥 계약해 버리고 말았었다.  놓치긴 너무나 아까운 집이었고, 계약 후에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채 실장과 비서의 말을 믿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 것이 간첩으로 몰리는 화근이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    “그렇게 된 거예요. 내가 조영준이라는 사람 검색해 봤는데, 실제로 그런 예술가가 있어요. 내가 집 보러 갔을 때 조영준이라는 사람이 진짜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아, 맞다! 추상화로 유명한 화가였어요.”  “그 비서라는 사람의 이름은 뭡니까?”  “그 사람 이름이 대리인 이름으로 계약서에 있는데…… 권우진이었던가? 계약서에 다 나와 있어요. 계약서 내 가방에 있어요. 계약서를 보고 그 사람들 다 잡아요.”  “계약서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어요. 이름도 얼마든지 가명으로 쓸 수 있고.”  “물론 위조할 수 있고 가명도 쓸 수 있겠지만……. 잠깐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위조했다는 거예요?”    여운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따져 물었다.    “내가 미친 것도 아니고 나한테 사기 친 사람들하고 짜고 다 위조하고 가명을 쓴다는 거예요?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왜! 뭣 때문에 내 전 재산을 다 날려 가면서 그런 위조된 계약서를 만들겠어요? 내가 왜! 대체 뭣 때문에! 다른 놈들 다 가명을 만들어 주고 나는 본명을 쓰겠냐구요! 정말 미치고 팔짝 뛰겠네. 의심만 하지 말고 계약서를 보라구요, 제발!”    여운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억울해서 뇌가 터져 버릴 듯한 얼굴로 소리쳤다.    “정말 말이 안 통하네요.”  “그건 내가 할 소립니다.”  “그래요! 진짜 말이 안 통하니까 빠릿빠릿하게 말 통하는 다른 사람 불러 주고 차마루 씨 당신은 제발 나가요! 나가면서 국수나 한 그릇 시켜 줘요!”  “기여운 씨, 지금 한가하게 장난치자고 체포한 것 아닙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장난질입니까?”  “장난은 무슨, 국숫집이라면서요.”  “국숫집이 아니라 국수방이라고! 국가수호방위국!”    마루가 미치고 팔딱 뛸 얼굴로 소리쳤다.    “국수 없으면 라면이라도 줘요, 배고파 죽겠으니까. 밥은 먹여 가면서 수색을 하든 조사를 하든 해야 할 것 아니에요. 나도 당신네들하고 싸우려면 정신을 차려야 하니까 밥 줘요!”    마루가 소리를 치든 협박을 하든 여운은 더 큰 소리를 치며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운으로선 이판사판이었다. 꼼짝없이 간첩으로 몰린 판인데 마루가 하는 짓을 보니 빌고 사정해 봤자 소용없을 것 같았다. 빌고 사정하는 게 소용없다? 그렇다면 당당하고 씩씩하게 부딪치는 수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다른 사람 불러 주고 국수든 뭐든 먹을 것 달라구요!”    여운이 바락 소리쳤다.  진짜 한 대 갈기고 싶은데 갈길 수는 없고 부글부글 속이 끓어오르는 걸 간신히 참으며 밖으로 나온 마루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잽을 날렸다. 여운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허공을 향해 미친 승냥이처럼 잽을 날리는데 신문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남자 3요원이 마루를 말렸다.    “진정해.”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어. 보통 간첩이 아니야. 고도의 심리전을 훈련받은 지독한 간첩이야. 까딱하면 말려들겠어……. 이런 상황에 밥을 달라니…….”    마루가 이를 악물고 씩씩거렸다.    “밥 달래?”  “굶겨. 절대 밥 주지 마. 아주 쫄쫄 굶겨서, 배가 고파 눈이 획 돌아가도록 굶겨서 실토하게 만들 거야.”    마루가 이를 갈며 중얼거리는데 오 팀장이 나타났다.    “굶기긴 뭘 굶겨? 밥 줘.”  “굶겨야 합니다, 팀장님!”  “기여운 말 맞아. 먹여 가면서 조사해. 피의자라도 굶길 순 없어.”  “얼마나 지독한지 보시고도 밥을 주란 말씀입니까?”  “차마루, 넌 국수방 요원이야. 국수방 요원이 피의자 심리 교란 작전에 그렇게 쉽게 말려들면 어떻게 해?”    오 팀장의 일침에 마루가 무안한 듯 입을 다물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평정심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 몰라?”  “죄송합니다…….”  “여자 요원들은 머리채를 쥐어뜯기질 않나, 차마루는 교란 작전에 말려들어서 버럭버럭 화를 내질 않나……. 쪽팔리게…….”    오 팀장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살인범이나 폭행범 다루는 게 아니라 간첩이야, 간첩. 심리전이라고!”  “예.”  “기여운이 말한 계약서는 찾아서 조사하는 중이다. 결과가 나오면 기여운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밝혀질 거야. 기여운 밥 먹을 동안 평정심 찾고 제대로 까고 제대로 파. 알겠어?”  “예.”    오 팀장의 지시를 받은 마루는 여운이 깜짝 놀랄 만큼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주었다.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줬다고 해서 진짜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는 아니고 7첩 반상이었다. 하지만 7첩이라면 여운에게는 진짜 상다리 부러질 정도의 진수성찬이었다.  지금까지 여운의 밥상은 밥에 국이나 찌개, 김치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가끔 김이나 계란 프라이를 보태 먹을 때도 있었지만 그건 진짜 가끔. 불고기까지 올라온 7첩 반상을 보자 저절로 침이 한 바가지씩 넘어갔다.    “정말 먹어요?”    여운이 쉽게 수저를 들지 못하며 물었다.    “배고프다 했잖아요. 어서 먹어요.”    마루는 평정심을 찾은 듯 어쩐지 수상할 정도로 친절함 돋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럼 뭐…… 잘 먹을게요.”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수저를 들고 갓 지은 듯한 뜨거운 밥 한 숟갈을 뜨던 여운이 움찔하며 마루를 쳐다봤다.    “혹시…….”  “뭡니까?”  “밥에…… 야비하게 약 탄 건 아니죠?”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평정심을 잃을 듯 눈빛이 사나워졌지만 다행히 재빨리 평온을 되찾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되면 내가 기미해 줘요?”  “기미까지야. 내가 수라상 받는 임금님도 아니고. 믿고 먹을게요. 약 탔더라도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여운이 무서운 얘기를 전혀 안 무서운 듯이 말하더니 허겁지겁 밥을 먹기 시작했다.    “진짜 맛있네요.”    여운은 맛있는 밥과 반찬들을 입 안을 꾸역꾸역 밀어 넣으며 해맑게 말했다.    “천천히 먹어요. 체하겠어요.”  “괜찮아요. 워낙 단련이 된 밥통이라 사흘 굶어도 거뜬하고 무쇠를 씹어 먹어도 거뜬해요.”    여운은 자신의 튼튼한 위장과 소화력을 자랑하며 한편으론 게걸스럽게 한편으론 참 복스럽게 먹어 댔다.    “그런데…… 혹시 내 살림살이 훔쳐 간 사람 차마루 씨나 국수방이에요?”  “맞아요.”    맞는다는 마루의 대답에 여운이 눈을 치켜떴다.    “감쪽같이 모른 척하더니…… 이연우 씨만 고생시켰네요. 설마, 이연우 씨도 국수방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그 사람은 그냥 경찰이에요.”  “이연우 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차마루 씨의 정체를?”  “당연히.”  “그렇구나……. 그나저나 내 살림살이 그대로 다 있는 거예요?”    여운의 물음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가구랑 가전제품 전부 새건데 그대로 다 있는 거죠?”  “있어요.”  “누가 막 쓰고 바꿔치기하고 그런 거 아니죠? 내가 딱 보면 알아요. 완전 새거니까 바꿔치기할 생각 하지 말아요.”    여운의 경고에 마루는 비웃으려고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붙잡아 제자리에 뒀다.    “내 책도 있죠? 책 엄청 많은데 한 권도 빠짐없이 그대로 다 있죠?”  “있어요.”  “몇 권인지 내가 다 세어 뒀으니까 내 책 훔쳐 갈 생각도 하지 말아요. 진짜 중요한 거예요. 나한테 제일 중요한 물건이 책이니까 고스란히 다 돌려줘야 해요.”  “책이 왜 제일 중요한 물건이에요?”  “그건…… 비밀이에요.”    여운이 비밀이라고 대답하던 그때 상황실에 있던 오 팀장이 요원들에게 여운의 책을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한동안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정신없이 밥을 먹던 여운이 퍼뜩 뭔가 떠오른 듯 마루를 쳐다봤다.    “차마루 씨, 할 얘기 있어요.”  “말해요.”  “솔직히 말해 줘요.”  “뭘 말입니까?”  “채 실장……, 그놈 여기 국수방 요원이죠?”  “채 실장? 채 실장……. 기여운 씨가 부동산 사기꾼이라 했던 그 사람 말입니까?”  “모른 척하지 말아요. 다 알면서 뭘 모른 척이에요?”  “뭐라고요?”  “아무 죄 없는 사람 간첩으로 잡아넣으려고 일부러 채 실장 시켜서 나한테 접근한 거죠? 일부러 나한테 부동산 업자인 척 접근해서 내 돈 다 빨아먹고 간첩 취급 하는 거죠? 틀림없어. 채 실장 그 사람도 국숫집 요원일 거야.”  “국숫집이 아니라 국수방이라고!”  “집이든 방이든 여기 요원 맞잖아요! 어쩐지 말발이 장난 아니다 싶더니만. 여기선 이빨 잘 까는 방법도 가르치나 봐요? 가르칠 게 없어서 그딴 걸 가르치나?”    여운의 빈정거림에 부글부글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마루는 꾹 참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요.”    심리전에 말려들어서도 안 되고 또 맞상대할 가치도 없는 것 같아 마루가 점잖게 타이르듯 말했다.    “먼저 말 안 되는 소리 한 건 차마루 씨하고 당신들이에요. 차마루 씨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내 돈 내놔요. 채 실장도 당장 데려오고.”  “채 실장은 국수방하고 아무 상관 없어요. 오해하지 말아요.”  “과연 오해일까요?”    여운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마루를 쳐다봤다.    “돌아가는 것 보니까 국수방 사람들 간첩은 잡아야겠는데 잡을 간첩은 없고 어떻게든 실적은 올려야겠고, 그래서 나 같은 사람, 힘도 없고 백도 없고 제일 만만한 나 같은 사람 콕 찍어서 억지로라도 간첩 누명 씌워 쪽수 맞추자 이렇게 합의를 본 것 같은데요. 헛다리 짚었어요. 사람 잘못 골랐다구요. 난 간첩 아니고, 누명도 안 쓸 거예요. 그러니까 채 실장 데려오구요, 내 돈도 돌려줘요.”    여운이 마루를 노려보며 야무지게 따지고 요구하자 마루가 허무맹랑한 소리에 그저 웃었다.    “슬슬 배가 차니까 졸립니까? 헛소리 참 잘하네요.”  “헛소리는 그쪽이 더 잘하고 있거든요?”  “채 실장은 국수방과 아무 상관 없고, 그래서 채 실장이라는 사람한테 뺏긴 돈 우리가 되찾아 줄 의무 없어요. 알겠습니까, 기여운 씨?”  “채 실장이 국수방과 아무 상관 없다면, 그렇다면 채 실장 그놈은 정말 간첩이에요. 난 절대 아니구요.”  “헛소리 그만해요.”  “헛소리는 차마루 씨가 더 많이 했거든요?”  “헛소리 그만하라는 말 안 들려요?”  “안 들리거든요? 흥!”    여운이 손으로 귀를 막고 안 들리는 척 콧방귀까지 뀌고 약을 올린 후 남은 밥을 먹어 치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