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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운 스파이-4화 (4/21)

“조용히 해요!”    마루가 고함을 치자 여운이 형택의 머리채를 잡은 채 마루를 쳐다봤다.    “경찰에 신고해 줄래요? 내가 오늘 밤 사고 칠 것 같거든요! 내가 오늘 드디어 사람 하나 죽일 것 같거든요!”    여운이 형택의 머리채를 잡고 흔들자 형택이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며 비명을 내질렀다.    “조용히 하라고요!”    마루가 다시 버럭 고함을 내지르자 즉시 비명 소리가 사라졌다. 메주의 짖음도 뚝 그쳤다.    “한 번만 더 시끄럽게 하면 두 사람 다 내쫓을 겁니다.”  “조용히 하면요?”    형택이 여운에게 머리채가 붙잡힌 채 물었다. 불쌍한 표정으로.    “두 사람 다 조용히 한 마디도 하지 말고 들어와서 자요.”    마루가 두 사람을 노려보며 이를 갈듯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  “한 마디도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고맙다고 인사하는 여운과 형택에게 마루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두 사람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여운은 재빨리 형택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툇마루로 달려갔다.    “휴대폰은요?”  “메주한테 달라고 해요.”    마루의 말에 여운은 즉시 메주에게 달려갔다.  메주는 잔뜩 경계한 낯으로 낮게 으르렁거리며 여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메주의 눈빛은 손만 대라, 손가락 꽉 깨물어 줄 테니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개시키 눈빛 보소.’    “메주야, 내 휴대폰……. 아, 예쁘다. 오구, 착하네…….”    달래듯이 웃는 낯으로 꼬시는데 메주가 허튼 수작 말라는 듯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바람에 여운은 깜짝 놀라며 물러섰다.    ‘개시키가 용맹하네.’    “메주야, 우리 메주 착하지? 그거 내 휴대폰 줄래? 오구오구 착하네, 우리 메주…….”    여운이 더욱 살갑게 달래며 다가섰지만 소용없었다. 메주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로 짖어댔기 때문이다.    “에이, 똥개시키가…….”    여운은 낮은 목소리로 욕을 한 다음 재빨리 마루에게 다시 달려갔다.    “메주가 안 줄 것 같은데요?”  “줄 때까지 기다리든가 메주 잘 때 찾아가든가 알아서 해요.”    마루가 무책임하게 말하고 들어가 버리자 여운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온 욕을 뱉으려다 가까스로 삼켰다.    “형택아.”  “응?”  “오늘 밤…… 저 개시키 잡는다.”    여운이 메주를 향해 무시무시하게 날 선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    별짓을 다 한 끝에야 가까스로 마루의 집에 입성한 여운과 형택은 완전히 지친 듯 대자로 드러누워 버렸다.    “기여운.”  “왜?”  “편의점 없겠지?”  “없어.”  “치킨집은?”  “없어.”  “피자집은?”  “없어. 족발집도 없고 분식집도 없고 기사식당도 없어.”  “그럼 먹을 것도 없지?”  “없어.”  “배고픈데…… 차마루 씨한테 부탁하면…….”  “절대 부탁하지 마. 절대 먹을 거 나눠 주는 사람 아니야. 겁나 쪼잔해. 그러니까 얻어먹을 생각 하지 마. 꿈도 꾸지 마. 그리고 지금도 없어 보이는데 먹을 것까지 구걸하면 진짜 없어 보이니까 무조건 참아.”  “치맥 하고 싶다.”    치맥이라는 단어에 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나도 치맥. 시원하게 생맥주 쫙 원샷하면서 닭 다리를 사정없이 물어뜯으면!”  “키야!”    여운과 형택이 마치 시원하게 생맥주 들이켜고 나서 닭 다리를 뜯은 것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천장을 보며 행복한 얼굴로 생맥주와 치킨을 그려 보고 있는데 형택이 묘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여운에게 다가와 누웠다.    “여운아.”  “왜?”  “이게 얼마 만이지?”  “뭐가 얼마 만이야?”  “우리 둘이 나란히 누워 있는 거.”  “30년.”  “30년?”  “우리 둘이 나란히 누워 있던 적 없었다는 뜻이야.”  “아, 그렇구나. 그런데 여운아.  “왜?”  “어쨌거나 결국…… 우리 둘이 누워 있네, 한방에. 마치 운명처럼…….”  “고형택.”  “왜?”  “넌 운명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고 쓰는 거니? 아무 데나 운명을 갖다 붙이고 지랄이니?”  “이게 운명이지 뭐가 운명이야? 너랑 나랑 이렇게 처음으로 한방에 나란히 누워 있는 건 분명히 운명이야.”    형택이 여운의 곁으로 더욱 바짝 다가와 누웠다.    “아무 데나 운명 갖다 붙이지 말라고 했지?”  “난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    형택이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여운이 형택을 노려봤다.    “경고하는데, 생각하지 마.”    여운의 경고에 잠깐 움찔했던 형택이 또다시 들이대기 시작했다.    “난 말이야, 갑자기 기분이…… 이상하네……. 가슴이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여운아, 넌…… 어때?”    형택의 목소리는 한층 더 끈적끈적해져 있었다.    “나도 이상해.”  “너도…… 이상해? 정말? 너도 느끼는구나……. 우리 사이에 흐르는 전류를…….”    형택이 느끼하면서도 엉큼하게 미소 지으며 입술을 쭉 내밀어 여운에게 입맞춤을 시도했다.        4장        형택이 자신의 입술이 여운의 입술에 닿을락 말락 가까워지자 스르륵 눈을 감은 그 순간, 여운이 그의 목을 콱 틀어잡은 채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형택의 몸을 타고 앉아 마구 누르기 시작했다.    “컥컥!”  “고형택……, 형제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알았냐?”    여운의 무시무시한 경고에 형택이 목이 졸려 컥컥거리며 알아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벌컥 문이 열리며 마루가 들어왔다.    “내 집에서 뭐 하는 짓입니까? 천박하게!”    마루가 여운을 향해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기여운이 날 덮치려고 해요!”    마루의 호통에 깜짝 놀란 여운이 움찔하는 틈에 형택이 재빨리 여운을 밀치고 일어났다.    “봤죠? 기여운이 이런 여잡니다. 남자를 치맥처럼 먹어 치우는 여자라고요.”    형택이 마치 겁탈을 당할 뻔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처럼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자 여운이 어이없는 얼굴로 형택을 노려봤다.    “별짓 다 해서 길바닥이 아니라 방바닥에서 자게 만들어 준 사람을 천박한 여자로 만들어? 고형택 이 개똥 같은 시키! 너란 놈은 정말 저질이다.”  “날 덮치려고 했잖아. 증인도 있어! 다 봤죠? 기여운이 날 덮치려고 한 거.”    형택이 큰소리 뻥 치고 마루에게 다가가는데 마루가 한 아름 들고 있던 이불을 형택에게 던져 버리자 형택이 이불을 덮어쓰며 발랑 나자빠져 버렸다.    “경고하는데 내 방에서 합방은 금집니다. 합방하는 순간! 쫓겨날 줄 알아요.”    마루가 엄포를 놓았다.    “남의 집 전기 함부로 쓰지 말고 불 끄고 빨리 자요!”    마루가 버럭 소리친 후 방문을 쾅 닫고 나가 버리자 이불을 내던진 마루 때문에 열 받은 형택이 이불을 헤치며 벌떡 일어서다가 여운의 불타는 시선에 움찔했다.    “눈 깔아!”    여운의 명령에 형택이 눈치를 보며 여운과 멀찍하게 떨어진 곳에 이불을 깔았다. 이불을 깔며 흘낏 여운을 쳐다봤던 형택은 시뻘건 불길이 뿜어져 나오는 여운의 눈을 보고 깜짝 놀라 재빨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불 꺼라.”    여운의 명령에 형택이 재빨리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불을 끈 후 다시 이불 속으로 숨어 버렸다.    “경고하는데 한 마디도 하지 말고 찌그러져 자라.”  “알겠어…….”  “대답도 하지 마!”    여운이 소리치자 형택은 그 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여운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죽은 척하고 있는 형택을 죽일까 밟을까 고민하고 있던 그때, 마루는 지하 벙커에 있었다.  마루는 컴퓨터 앞에 앉자마자 곧바로 국수방과 접속했다.    제5그린벨트 [국수방.]  국수방 [용건?]  제5그린벨트 [5그린벨트 수컷 멧돼지 출몰.]  국수방 [암컷 멧돼지는?]  제5그린벨트 [한 우리 안에 있음.]  국수방 [사냥꾼과의 접촉?]  제5그린벨트 [현재까지 없음.]  국수방 [수컷 멧돼지 신상 파악은?]  제5그린벨트 [파악 중.]  국수방 [신속하게 파악해서 보고 바람.]  제5그린벨트 [이상.]  국수방 [이상.]    마루는 국수방과의 접속을 끝내고 감시 모니터 책상으로 자리를 옮겨 가 여운과 형택이 있는 방을 살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형택이 보였고, 그런 형택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여운이 보였다.  마루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모니터 속의 여운을 쳐다보다가 생각난 듯 시간을 15분 전으로 돌려 녹화 분량을 살피기 시작했다.  여운과 형택이 방으로 들어오고 벌렁 드러눕는 장면까지 3배속으로 확인하던 마루는 형택이 여운에게 조금씩 다가가는 지점에서 속도를 늦추고 재빨리 헤드폰을 꼈다.  여운에게 슬금슬금 다가가 누웠던 형택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아, 그렇구나. 그런데 여운아.  - 왜?  - 어쨌거나 결국…… 우리 둘이 누워 있네, 한방에. 마치 운명처럼…….    두근, 두근, 쿵덕, 쿵덕.  형택의 느끼한 대사를 듣던 마루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 아무 데나 운명 갖다 붙이지 말라고 했지?    형택의 목소리는 끈적거렸고 여운의 목소리는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 난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됐어.    목소리가 더욱 끈적끈적해진 형택이 여운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 눕자 마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 난 말이야, 갑자기 기분이…… 이상하네……. 가슴이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여운아, 넌…… 어때?    형택의 목소리가 더욱 끈적해지자 마루는 뒤통수부터 목까지 뻣뻣해지며 슬슬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 나도 이상해.    퉁명스럽던 여운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상냥하고도 어쩐지 수줍음을 타는 듯한 목소리.  두근근, 두두두근, 두근두…… 두근.  여운의 목소리가 달라지자 빨라지긴 했지만 규칙적이던 마루의 심장 박동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 너도…… 이상해? 정말? 너도 느끼는구나……. 우리 사이에 흐르는 전류를…….    유치해서 들어 줄 수 없는 대사를 날리던 형택이 여운을 향해 두툼한 주둥이를 내밀자 못 볼 것을 본 듯 마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닿기 일보 직전 여운이 형택의 목을 틀어잡고 벌떡 일어나 깔고 앉더니 형택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 컥컥!  - 고형택……, 형제끼리 그러는 거 아니다. 알았냐?    여운이 목을 조르며 위협할 때 마루 자신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스톱 키를 누른 마루는 주먹을 움켜쥔 채 치밀어 오른 분노로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길게 내뱉었다.  두두두근…… 둑…… 근…….  불규칙한 심장 박동 때문에 답답함마저 느껴지자 가슴에 손을 대고 꾹 누르던 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고형택…… 개시키…….”    욕을 내뱉었을 만큼 화가 났다. 화가 날 이유가 없는데 화가 났다.    “감히 내 집에서…….”    하룻밤 얻어 자는 주제에 자신의 집에서 감히 저런 난잡한 짓거리를 시도했다는 것이 화가 났다. 하지만 마루는 알고 있었다. ‘내 집에서’라는 말은, 이유를 굳이 찾기 위해, 억지로라도 이유를 갖다 붙이기 위해 만든 말이라는 것을. ‘내 집에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마루는 알고 있었다. 다만, 정확하게 모를 뿐이었다.    “저질 같은 놈.”    마루가 목이 졸려 괴로워하는 형택의 얼굴을 노려보며 낮게 뇌까렸다.

깊은 밤이었다. 정말 깊은 밤 새벽 2시.  한 점의 불빛도 없이 칠흑보다 더 캄캄한 밤.  여운과 형택이 자고 있는 방의 방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검은 그림자가 인간 폭격기 두 대가 날아다니는 컴컴한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인간 폭격기는 다름 아닌 여운과 형택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코를 골고 입으로도 푸푸 불어 대는 통에 방 안은 전쟁이 난 듯 폭격기 두 대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작은 손전등을 켜 여운의 위치와 형택의 위치를 확인했다.  여운은 창문 아래에서, 형택은 반대편 벽 아래에서 문이 열린 것도, 검은 그림자가 침입했다는 것도 모른 채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손전등으로 형택을 비추며 조용히 다가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었다. 형택은 대자로 누운 채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는 조심조심 형택의 엉덩이 부분을 더듬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듯 손전등으로 형택이 자고 있는 이부자리 주변을 살폈다. 역시 원하는 것이 눈에 띄지 않자 잠시 주춤하던 검은 그림자는 이불을 다시 덮어 주고 돌아서다가 뭔가 눈치챈 듯 머리맡의 요를 살짝 걷었다. 손전등 불빛 아래 검은 그림자가 찾던 그것이 있었다. 바로 형택의 지갑이었다.  검은 그림자가 조심스럽고도 재빨리 형택의 지갑을 집어 들려는 그때 형택이 갑자기 커커컥하고 숨넘어갈 듯 코를 고는 바람에 하마터면 지갑을 떨어뜨릴 뻔했다. 다행히 지갑을 놓치지 않은 검은 그림자는 들어올 때처럼 소리도 없이 방을 빠져나와 곧바로 지하 벙커로 내려갔다.  검은 그림자는 마루였다.  마루가 형택의 지갑을 훔친 이유는 바로 신분증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마루는 지하 벙커로 내려와 형택의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 스캔한 후 국수방과 접속했다.    제5그린벨트 [국수방.]  국수방 [용건?]  제5그린벨트 [신상 파악 요청.]    마루는 스캔한 형택의 신분증을 국수방으로 전송했다.    국수방 [대기.]    국수방이 형택의 신상을 파악하는 동안 마루는 형택의 지갑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신용카드 두 장, 적립 카드 두 장, 영수증 몇 장, 현금 8만 4천 원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 찍었는지 모를 빛바랜 스티커 사진 몇 장과 부적도 들어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별다른 의문점을 찾지 못한 마루가 지갑을 뒤졌다는 것을 형택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꺼냈던 모든 것을 그대로 넣어 두고 지갑을 접는데 국수방에서 신호가 왔다.    국수방 [1차 신상 확인. 고형택 위치?]  제5그린벨트 [5그린벨트 안.]  국수방 [사냥꾼 접촉 여부?]  제5그린벨트 [현재까지 없음.]  국수방 [2차 신상 확인까지 주시할 것.]  제5그린벨트 [방생 여부?]  국수방 [방생 불가. 2차 신상 확인과 사냥꾼 접촉까지 사육.]  제5그린벨트 [이상.]  국수방 [이상.]    국수방과의 접촉을 마무리한 마루는 형택의 지갑을 챙겨 들고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형택의 지갑을 원래 있던 자리에 돌려놓으면 끝이었다. 벙커 계단을 올라와 문을 열기 직전 소등하고 벙커의 문을 열던 마루는 순간 멈칫했다. 벙커로 들어오려던 검은 그림자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마루와 마주친 검은 그림자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치자 마루가 재빨리 검은 그림자를 붙잡아 손쉽게 넘어뜨린 후 두 팔을 포박했다.    “누구냐.”    마루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 기, 기여운이에요…….”    여운이 배를 대고 바닥에 눌려 마루에게 두 팔을 포박당한 채 벌벌 떠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마루가 여운의 팔을 더욱 아프게 포박했다.    “으으윽……. 어깻죽지가…… 빠질 것 같아요…….”    여운이 발버둥 치며 아픔을 호소했지만 마루는 여운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마루가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자 여운이 즉시 입을 다물었다.    “뭐야?”  “…….”  “뭐냐고 묻잖아.”  “입 다물라면서요.”    여운이 마루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해. 뭘 하려던 거야?”  “뭐긴 뭐예요. 차마루 씨 찾으려 했죠.”    여운이 억울한 말투로 대답했다.    “날 찾으려고 했다고?”  “메주한테서 휴대폰 뺏으려면…… 차마루 씨 도움이 필요해서……. 아아……. 제발 놔줘요. 어깨가 빠질 것 같단 말이에요.”    여운이 발버둥 치며 쩔쩔맸지만 마루는 여운을 놓아주지 않았다.    “왜 하필 지하실이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왜 지하실로 날 찾으러 왔냐고.”  “이쪽 방에 아무도 없어서…… 그 방에 있는 줄 알았죠. 근데 거기가 지하실이었어요?”  “폭격기처럼 코 골고 자다가 휴대폰 찾으려고 이 밤중에 일어났다고?”  “메주 잘 때 알아서 찾아가라고 해서 형택이 휴대폰으로 알람 맞춰 놨었어요.”  “날 찾으려고 했다면서 왜 날 보자마자 도망치려 한 거야?”  “문을 열고 나올 거라고 전혀 생각도 못 했는데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면서 시커먼 게 나오는데 안 놀라요? 나 때문에 차마루 씨도 놀랐잖아요. 놀란 건 마찬가지면서……. 팔 좀 놔주라고요. 어깻죽지가 분리될 것 같다고요.”    여운이 못 견디겠다는 듯 몸을 비틀며 하소연했다. 쩔쩔매는 여운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마루가 여운의 팔을 놓아주자 여운이 어깨가 아파 몸을 감싸고 괴로워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사람 팔을 그렇게 꺾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여운이 분노와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원망을 퍼부었다.    “팔 꺾이기 싫었으면 오밤중에 돌아다니지 말았어야지.”    마루가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로 대꾸했다.    “차마루 씨는 정말 이상하고 정말 못돼먹은 사람이네요. 어떻게 이유도 물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여자를 막 넘어뜨리고 팔을 뒤로 꺾고……. 진짜 못됐어요. 진짜 못돼 빠졌어!”    여운이 씩씩거리며 원성을 퍼부었지만 마루는 그깟 원망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맞아요. 나 못됐어요.”    마루가 못돼먹은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듯 대꾸했고 그래서 여운은 더 열 받고 약 올랐다.    “그런데 밤 귀신처럼 소리도 없이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럼 이 밤중에 소리소리 지르며 다녀요?”  “불을 켰어야지.”  “남의 전기 막 쓰지 말라면서요!”    여운이 분해서 쏘아붙이자 마루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문 것이 아니라 여운의 정체에 대해 더욱 큰 의심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으휴, 진짜 서러워 못 살겠네. 감자 먹었다고 죽일 듯이 몰아세워, 밤중에 돌아다녔다고 개 잡듯이 잡아. 내가 서울역에서 노숙을 했으면 했지, 차마루 씨 집에서는 하루도 더 있기 싫어요. 메주한테서 휴대폰이나 뺏어 줘요.”  “흥. 알아서 찾아요.”  “저 개시키가 옆에만 가도 으르렁거린단 말이에요.”  “남의 강아지한테 지금 욕한 거예요?”  “개시키보고 개시키라 하지 소시키라 해요? 휴대폰 빼앗아 달라고요.”  “직접 뺏어요. 그리고 경고하는데 절대, 절대! 지하실엔 들어갈 생각 하지 말아요. 근처에 갈 생각도 하지 말아요. 알겠습니까?”  “대체 지하실에 뭐가 있는데 이래요?”  “그게 왜 궁금합니까?”  “별것 아닌 창고 같은 곳이라면 사람을 넘어뜨려서 무식하게 팔을 꺾고 절대,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난리 치진 않을 것 아니에요. 뭔데요? 뭐, 맛있는 거라도 숨겨 놓은 거예요? 아니면 불법적인 뭔가를 하는 거예요?”  “불법적인 뭔가라니?”  “예를 들면…… 도박?”  “허!”  “아니면…… 마약 제조?”  “미쳤습니까?”  “강한 부정은 긍정을 뜻한다고 했는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휴대폰 찾아서 당장 들어가요!”  “아니면 말구. 휴대폰 좀 뺏어 줘요.”  “알아서 뺏어요!”    마루가 콧방귀를 뀌고 들어가 버리자 여운이 약이 올라 부들부들 떨며 마루의 방을 노려봤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아요. 저 개시키 때려잡았다고 후회하지 말라구요.”    여운이 중문을 확 열고 툇마루로 나가 메주가 있는 개집을 노려봤다. 메주는 자고 있는지 관심이 없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주인이나 개시키나 똑같이 인정머리가 없어. 기다려라, 메주야.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따끔하게 고쳐 줄 테니까. 근데…… 너무 캄캄하네…….”    캄캄해도 너무 캄캄해서 움찔 무서움이 느껴졌다.    “해 뜨면 찾을까? 아니야……. 메주가 핥아서 침 때문에 고장 날지도 몰라. 벌써 고장 났으면 안 되는데…….”    무서움 탓에 계속 망설이던 여운은 결심한 듯 신발을 신기 위해 툇마루 아래로 발을 내려놓았다. 오른쪽 신발을 신고 왼쪽 발을 신발에 넣던 그때 여운은 뭔가 물컹하고 다리를 스치는 느낌에 그 자리에서 몸이 굳어 버렸다.    “뭐지……? 뭐였지?”    여운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귀신은…… 아닐 거야…….”    여운이 벌벌 떨며 왼쪽 발을 신발에서 꺼내고 오른쪽 신발도 벗으려고 하는데 또다시 물컹한 것이 다리를 스쳤다.    “으아아아악!”    여운이 목젖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격한 비명을 내지르며 집 안으로 뛰어들자 마루가 방에서 튀어나왔다.    “으아아악, 살려, 살려…….”    너무 놀란 나머지 살려 달라는 말도 제대로 못한 여운이 마루의 가슴팍에 뛰어들었다.    “왜 그래요?”  “발……, 발밑에……. 발…….”  “메주한테 물렸어요?  “아니……. 아니……, 발밑에…… 뭐가 있어요.”    여운이 마루의 가슴팍에 매달린 채 헐떡거리며 소리쳤다.    “물렸어요, 안 물렸어요?”  “안 물렸어요.”  “에이, 진짜…….”    마루가 성가시다는 듯 여운을 밀어냈다.    “툇마루 밑에 뭔가가 있어요. 뭔가가 있다구요.”  “압니다, 뭔가 있는 거. 메주예요.”  “메주라고요?”  “메주가 밤에는 툇마루 밑에 들어가서 자요.”  “메주라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메주라면 나 보고 짖어야 하는데 안 짖었단 말이에요.”  “메주가 기여운 씨를 아니까 안 짖은 거겠죠.”    마루가 귀찮다는 듯이 말한 후 불을 켜고 툇마루로 나갔다.    “메주야.”    마루가 부르자 툇마루 아래 있던 메주가 몸을 일으켜 마루를 쳐다봤다.    “기여운 때문에 귀찮아 죽겠다. 너도 귀찮지?”    마루가 메주의 목을 만지며 말하자 메주가 동의한다는 듯 낮게 짖었다.    “그냥 확 물어 버리지 그랬냐.”    메주의 목을 만지며 중얼거리던 마루가 둥 뒤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껴 돌아보자 중문 앞에서 여운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어찌나 독하게 이글거리는지 타 죽을 만큼 섬뜩했다.    ‘저 눈빛은…… 보통 사람의 눈빛이 아니야……. 틀림없이…… 멧돼지의 눈빛이야.’    마루는 심상치 않은 여운의 눈빛에서 여운의 정체가 더욱 확실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자라.”    마루는 메주를 놓아준 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정말 메주가 날 물길 바라는 거예요?”    여운이 씩씩거리며 물었다.

“농담입니다.”  “정말 농담이에요?”  “농담이지 진담이겠어요? 메주가 기여운 씰 물었으면 치료비 내가 내야 하고, 메주한테 물려서 기여운 씨가 개 인간이 되면 내가 살아남지 못할 것 아니에요.”  “개 인간이라뇨?”  “메주 광견병 주사 안 놔 줬어요. 그러니까 기여운 씨가 메주한테 물리면 광견 바이러스가 기여운 씨 신경과 혈액을 변이시켜서 개 인간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메주는 개니까 광견병 주사를 안 맞은 메주한테 물리면 내가 늑대 인간이 아니라 개 인간이 될 것이다 그 말이에요?”  “잘 알아들었네요.”  “알아듣긴 했는데 그 개 인간이라는 말이 정말…… 거시기하네.”  “또 할 얘기 있습니까?”  “없습니다!”  “메주는 툇마루 아래에 있으니까 지금 개집에서 휴대폰 꺼내 오는 게 어때요?”  “알겠어요!”    씩씩거리며 툇마루로 나가던 여운은 담 너머 창고가 있는 곳에서 얼핏 불빛이 어른거리자 멈칫했다.    “차마루 씨.”  “같이 안 가 줄 거니까 혼자 가져와요.”  “잠깐만 이리 와 봐요.”  “싫습니다.”  “저기 창고 쪽에…… 누가 있는 것 같아요……”  “또 도깨비가 나왔습니까?”  “도둑놈이 범행 현장에 다시 나타난 거야……. 잡아야 해!”    여운이 툇마루 아래로 뛰어 내려가 대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안 돼! 멈춰!”    마루가 여운을 향해 소리쳤다.  마루는 재빨리 손전등을 챙겨 들고 여운을 붙잡기 위해 달려갔다. 하지만 여운은 이미 대문을 열어젖히고 밖으로 튀어 나가고 있었다.    ‘누굴까?’    여운을 붙잡기 위해 달려가던 마루는 도무지 이 밤중에 창고에 나타난 사람이 누군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국수방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었기에 국수방에서 보낸 사람일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삿짐을 훔쳐 간 도둑이라는 뜻인데, 그것도 말이 안 됐다. 애초에 도둑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도둑은 있었다. 그러나 그 도둑은 국수방 사람들이었기에 도둑일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면 도둑이, 즉 국수방에서 보낸 사람이 이 시간에 나타날 리가 없었다.    “기다려!”    마루가 전력 질주로 여운을 뒤쫓았다. 하지만 무슨 여자가 이렇게나 빠른지 올림픽 육상선수로 뛰어도 될 만큼 한 달리기 하는 마루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마루가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메주까지 달려 나와 여운을 쫓았지만 메주조차도 여운을 붙잡지 못했다.    “야, 이 도둑놈아!”    창고로 뛰어 들어가며 외치는 여운의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메주의 짖는 소리도 격렬했다. 그때였다.    “으억! 으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 소리가 높게 울렸다.    ‘큰일 났다!’    마루는 메주가 여운을 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운이 도둑 혹은 그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자 앞뒤 상황을 파악할 능력이 없는 뇌를 가진 메주가 흥분해 버렸고 그래서 소리를 질러 대는 여운을 물어 버린 것이라 생각했다.  정말 겁도 더럽게 없는 여자였다.  주제에 무슨 수로 도둑을 잡겠다고 덤빈 것인지!  도둑이든 누구든 흉기라도 들고 있으면 어쩌려고!  결국은 메주한테 물리지 않았는가!  마루는 비명 소리에 온몸의 신경이 무섭게 긴장되는 것을 느끼며 창고를 향해 빛의 속도로 달려갔다. 하지만 마루는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는 것을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알았다.    “아악! 으윽! 어윽! 아, 안 돼!”    소름 끼친 비명의 주인공은 여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루가 손전등으로 비명과 신음을 뿜어내는 곳을 비춰 보자 웬 남자를 올라탄 여운이 보였다. 그리고 그 곁에서 메주가 으르렁거리며 여운에게 깔린 남자의 옆구리 옷자락을 물어뜯고 있었다.    “누굽니까?!”  “잡았어요! 도둑 잡았어요! 이 도둑놈아, 너 오늘 내 손에 죽는다! 창고에 사는 귀신들하고 씻나락 까먹을 준비 하고 있어!”    여운이 무엇인가를 꽉 틀어잡은 두 손을 마구 흔들어 대며 소리쳤다.    “으으윽!”    도둑의 괴로운 신음에 손전등으로 비춰 보자 여운이 틀어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났다. 바로 도둑의 머리채였다.  도대체 머리채 붙잡는 건 어디서 배운 것인지, 형택의 머리채도 잡고 흔들더니 여운은 도둑의 머리채까지 완벽 접수한 상태였다.    “아프지? 오늘 네놈을 대머리로 만들어 버리고 말겠어!”  “아악!”    여운이 도둑의 머리채를 더욱 격하게 잡아 뜯자 도둑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더욱 높게 울렸다.    “차마루 씨, 신고해 줘요! 연우 씨한테 빨리 신고해 줘요! 이 도둑놈 잡았다고 빨리 신고해요!”  “알았어요.”  “아니, 잠깐만……. 신고가 아이고…….”    여운에게 깔린 채 머리채를 쥐어뜯기던 도둑이 항의인지 사정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도둑의 목소리에 흥분한 메주가 격렬하게 짖자 물려 죽을까 두려운 것인지 도둑은 즉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빨리 신고해요!”    메주가 금방이라도 물어 버릴 태세로 격렬하게 짖어 대는 통에 도둑이 찍소리도 못 하고 여운에게 깔려 있는데 마루가 휴대전화로 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메주! 조용!”    마루가 메주에게 소리치자 메주가 짖음을 멈추고 도둑의 옷자락을 문 채로 낮게 으르렁거렸다.  도대체 저 덜떨어진 도둑놈은 누굴까? 얼마나 꺼벙하면 집도 아니고 창고에 숨어들었을까. 훔칠 것이 뭐가 있다고.  그때 여운의 엉덩이에 깔린 도둑의 옷 속에서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이연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도둑의 휴대전화가 울린다?    “전화벨이 울려요. 공범일 거예요. 야이, 이 치사한 도둑놈아!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훔칠 게 없어서 남의 살림을 다 훔쳐 간 거냐?”    여운은 한 손에는 도둑의 머리채를 잡은 채로 다른 한 손으로 도둑의 옷 속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꺼냈다.    “싹 다 잡아다 아작을 내 버리겠…….”    도둑의 휴대전화를 꺼내 액정을 쳐다보던 여운이 번개라도 맞은 듯 기겁을 했다.    “에구머니나……. 어떻게 이런 일이…….”  “누군데 그래요?”  “그게…… 지금 연우 씨한테 전화하고 있는 거죠?”  “자는지 안 받는데요?”  “자는 게 아니라…….”    여운이 쩔쩔매며 재빨리 잡고 있던 도둑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벌떡 일어났다.    “누구 전화예요?”  “그게요……. 연우 씨…….”    여운이 바닥에 엎드려 옴짝달싹 못하는 도둑을 향해 그렇게 불렀다. 연우 씨라고.    “뭐라고요?”    마루도 놀란 얼굴로 묻는데 여운이 연우의 휴대전화를 마루에게 건넸다.  시끄럽게 벨이 울리는 연우의 휴대전화 액정에 ‘차마루’라는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여운이 냅다 자빠뜨리고 깔고 앉으며 두 손 힘껏 머리채를 휘어잡고 흔들어 댔던 도둑은 바로 이연우 순경이었던 것이다.    “연우 씨…….”  “우째 내한테 이럴 수가…….”    억울한 듯 푸념하며 일어서던 연우는 메주가 물려는 듯이 으르렁거리자 잽싸게 바닥에 엎드리며 손을 들었다.    “저 개 좀 우째 해 보소.”    연우가 벌벌 떨며 부탁하자 마루가 메주를 혼내며 쫓아 버렸다.    “연우 씨……, 미안해요. 난 도둑인 줄 알고…….”    여운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연우가 몸을 일으켰다. 마루는 재빨리 손전등으로 연우의 얼굴을 비춰 봤다.  연우는 여운의 손에 죄 들쑤셔진 머리를 움켜쥔 채 맥반석 불판에서 구워지고 있는 오징어처럼 몸을 비비 꼬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또한 연우의 얼굴은 창피함과 분노가 뒤섞여 정말 못생기게 일그러져 있었다.    “연우 씨, 괜찮아요? 다친 데 없어요?”    여운이 미안해서 설설 기며 물었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도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 미안해요. 도둑인 줄 알았어요. 진짜, 진짜 미안해요…….”  “오해할 만합니더, 이 시간에 왔으니…….”    화가 나는데도 체면상 또 여운에 대한 감정 때문에 연우는 억지로 이해하는 척했다.    “이 시간에 왜 왔어요?”  “혹시나…….”    연우가 설명을 하려는데 마루가 훅 끼어들었다.    “그러게. 이 시간에 여긴 왜 온 겁니까? 이 순경이 이 시간에 여기 안 왔으면 이 난리가 안 났을 것 아닙니까.”    마루가 꾸짖듯 말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연우가 이 깊은 밤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여운이 연우의 머리채를 잡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루의 꾸짖음에 연우가 폭발하고 말았다.    “와 왔겠습니까? 도둑 잡으러 왔습니더. 여운 씨 이삿짐 말고도 농산물을 도둑맞은 집이 있어가 같은 놈일 것 같아 잠복 중이었습니더!”    연우가 버럭버럭 고함쳤다. 차마 여운에게는 화를 못 내고 엉뚱하게 마루에게 화풀이를 한 것이다.    “미안해요, 연우 씨. 나 때문에 잠복했던 건데 그것도 모르고…….”    여운이 울상으로 사과를 하는데 마루가 끼어들었다.  이럴 땐 가만히 있어 주면 좋을 텐데, 도둑으로 몰려 머리까지 뜯긴 연우의 기분을 고려해 주면 참 좋을 텐데 마루에겐 그따위 눈치는 없었다.    “미리 잠복할 거라고 보고했으면 좋았잖습니까!”    마루도 맞받아쳤다.  마루의 말이 맞았지만 여운은 연우에게 지은 죄가 있어 마루의 편을 들 수가 없었다.    “경찰이 잠복하는 걸 민간인한테 와 보고를 합니까!”  “맞아요. 연우 씨가 차마루 씨한테 보고할 이유는 없죠.”    여운이 잽싸게 연우의 편을 들었다.    “민간인한테도 필요에 따라선 보고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 그런가요?”    마루의 말도 맞는 듯해서 연우를 쳐다보자 연우의 얼굴이 화가 나서 곧 터질 듯 일그러져 있었다.    “당신이 경찰입니까? 내 상사냐고요! 내가 와 당신한테 보고를 합니까?”  “맞아요! 연우 씨가 차마루 씨한테 왜 보고를 해요?”    여운은 연우가 혈압 올라 죽기 전에 또다시 잽싸게 연우의 편을 들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두 남자 사람의 싸움이 유치찬란해지기 시작했다.    “보고 좀 하면 어때!”  “차마루, 당신 지금 반말했어?”  “반말했다, 어쩔래!”  “당신이 뭔데 내한테 보고를 하라 마라 하면서 반말을 해?”  “맞아요! 차마루 씨 왜 연우 씨한테 반말이에요?”    여운이 연우의 편을 들며 마루에게 따졌다.    “내가 누구긴! 민중이지! 민중은 반말해도 돼! 당신이야말로 민중의 지팡이가 민중한테 반말을 하면 안 되지!”  “그게 무슨 개떡 같은 논리예요?”    여운이 따졌지만 마루는 무시했다.    “내가 반말해도 이연우 당신은 반말하면 안 돼! 당신은 민중을 지키고 존중해야 하는 거야!”  “왜 반말하면 안 돼? 민중이 민중다워야 존중을 하지! 당신이 먼저 민중의 지팡이를 썩은 작대기 취급 했잖아!”  “그래! 말 잘했어! 썩은 작대기 맞네! 얼마나 흐리멍덩하면 경찰이 남자도 아니고 여자한테 머리채를 잡혀서 꼼짝을 못 하고 쩔쩔매냐!”  “당신 지금 말 다 했어?”    쪽팔린 부분을 제대로 찔린 연우가 분노가 폭발한 듯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다 했다. 어쩔래!”  “야, 인마!”    연우가 악을 쓰듯 고함을 내지르며 마루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연우의 주먹을 간단하게 피한 마루가 연우에게 주먹을 날렸다. 마루의 주먹을 용케 피한 연우가 다시 마루에게 주먹을 날렸다. 날리고 또 날리고. 서로 부지런히 헛방질만 주고받던 연우와 마루는 잠시 거리를 두며 떨어졌다.    ‘내 주먹을 피해? 이연우 저놈 보통 놈이 아니야.’  ‘차마루 저놈 평범한 놈이 아니야. 어떻게 몸이 저렇게 빠를 수가 있지?’

“연우 씨, 참아요. 다 내 잘못이니까 제발 참아요. 사과할게요. 진짜 미안해요.”    여운이 연우를 붙잡으며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못 참습니더. 내가 경찰을 때리치아 뿌는 한이 있어도 차마루는 용서할 수 없습니더.”  “참지 마! 나도 절대 그냥 못 넘어가!”  “차마루 씨라도 좀 가만히 있어요! 차마루 씨가 쓸데없는 소리 해서 연우 씨가 열 받은 거잖아요!”    여운이 마루에게 화를 내며 말리려 했지만 그 역시 소용없었다.    “기여운 씨하고 상관없는 일이니까 빠져요!”  “어떻게 나하고 상관이 없어요?”    여운이 발끈하며 마루에게 다가섰다.    “시끄러우니까 빠지라고요!”    마루도 욱하며 다가선 여운을 툭 밀쳤다.  연우의 눈이 번득하며 불을 뿜은 것은 그때였다.    “차마루! 니 지금 여운 씨 밀칬나?”  “밀쳤다, 어쩔래?”  “이런 무식한 놈!”  “놈? 이연우 지금 나한테 욕했어?”  “욕했다. 우짤래, 이 무식한 놈아!”    연우가 마루에게 선빵을 날렸다. 당연히 마루는 연우의 주먹을 피하며 연우에게 돌려차기를 했지만 연우 역시 마루의 돌려차기를 피하며 뒤돌려차기를 시도했다. 마루는 연우의 회축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뒤차기를 날렸다. 연우는 마루의 뒤차기를 간단하게 피하며 옆차기를 날렸다. 마루는 연우의 옆차기도 피해 냈다. 또다시 헛방질이 시작된 것이다.    ‘이연우 저놈 운동한 놈이야!’  ‘차마루 저놈 훈련받은 놈이야!’    이러다간 밤새도록 서로에게 한 방도 못 맞히고 계속해서 헛방질만 할 것 같던 마루와 연우가 서로 달라붙으며 멱살을 잡았다. 서로의 멱살을 잡은 채 제대로 포인트가 들어가지도 않을 자잘한 발길질을 하던 두 사람은 서로 얼싸안은 채 바닥에 넘어졌다. 넘어진 채로 서로 주먹을 뻗지 못하게 서로의 손을 틀어잡고서는 난리 블루스를 추고 있었다.  한 대도 때리진 못하면서 꼴에 사내랍시고 폼만 잔뜩 잡아 대는 꼴이 하도 우스워 여운이 나섰다. 이놈 저놈 싸움은 더럽게 못하면서 잘하는 척 물러서지도 않겠다면 제3자가 둘을 떼어 놓는 수밖엔 없었기 때문이다.  여운은 넘어진 채 서로 엉켜 있는 마루와 연우의 귀 한쪽씩을 붙잡은 채 있는 힘껏 잡아당겨 버렸다.    “아아악!”  “으으악!”    마루와 연우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떨어져요! 떨어지라고요!”    여운이 귀를 아예 잡아 뜯을 듯이 독하게 잡아당기며 소리치자 마루와 연우가 비명을 지르며 어영부영 떨어졌다.    “다 큰 어른들이 초딩들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에요!”    여운이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한 대 맞히지도 못하면서 주먹은 왜 휘두르고 발길질은 왜 하는 거예요? 진짜 싸움도 더럽게도 못하면서 개폼은 엄청 잡네요.”  “개폼? 이게 다 기여운 씨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 않습니까! 사기를 맞으려면 다른 데서 맞지 왜 하필 우리 마을에 와서 시끄럽게 하는 겁니까! 기여운 씨가 우리 마을에 안 나타났으면 내가 경찰하고 싸울 일도 없지 않습니까!”    마루가 여운에게 버럭버럭 화를 냈다.    “여운 씨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지요! 여운 씨가 사기당하고 싶어서 당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연우가 마루에게 화를 냈다.    “당신은 빠져!”  “못 빠져!”    마루와 연우가 2차전을 벌이려는데 여운이 꽥 소리쳤다.    “조용히 해요!”    여운이 소리친 후 마루를 노려봤다.    “그래요! 다 내 탓이에요! 내가 떠나면 될 것 아니에요!”    진짜 이놈의 마을 넌더리가 났다. 전 재산 날리고 살림도 도둑맞고 거기다가 아주 초특급으로 인정머리 없고 못돼 빠진 차마루 때문에 넌더리, 넌더리 아주 치가 떨렸다. 지금 당장 떠나겠다는 말은 욱해서 한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정말 단 1분도 더는 이놈의 마을에 발을 붙이고 있기 싫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고 싶었다. 두 번 다신 오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이 마을에 온 것부터 잘못이고 전부 내 탓이에요. 그런데 차마루 당신 정말 재수 없어요. 진짜, 진짜 재수 없어요. 그리고 이 빌어먹을 마을도 아주 넌더리가 나서 지금 당장 떠날 거니까 걱정 말아요!”    분노와 서러움이 북받쳐서 마루를 향해 부들부들 떨며 소리친 후 창고를 떠나려던 여운이 다시 돌아섰다. 고맙다는 말을 꼭 남기고 싶은 사람은 있었기 때문이다. 신발도 사 주고 기꺼이 자신의 집까지 내주려고 하고 여운에게 진심으로 친절했던 사람. 연우였다.    “연우 씨, 연우 씨한테는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요. 내가 여기 와서 유일하게 잘해 준 사람인데……. 진짜 고맙고 정말 미안해요.”  “여운 씨…….”  “다른 사람 아무한테도 미안하지 않은데 연우 씨한테는 정말 미안해요. 진심이에요.”  “여운 씨…….”  “건강하게 안녕히 계세요.”    여운은 연우에게 꾸벅 인사한 후 미련 없이 돌아서서 창고를 나와 마루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고 있는 형택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형택아, 일어나.”    여운이 형택을 흔들어 깨웠지만 꼬물꼬물 반응만 할 뿐 일어나지 않았다.    “일어나라고!”    여운이 형택을 더욱 세게 흔들었지만 형택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 지금 서울 갈 거야. 서울 갈 거니까 일어나라고!  “좀만 더 자고…….”    형택이 그제야 잠에 취해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잘 시간 없어. 차마루 꼴 보기 싫어서 지금 당장 이 집을 나갈 거니까 일어나라고! 차마루 재수 없어서 이 집 나갈 거라고!”    여운은 재빨리 뒤따라 돌아온 마루가 지하 벙커에서 모니터로 욕하는 것을 다 듣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마루의 욕을 했다.    “조금만 더 자자…….”  “일어나라고, 이 시키야!”  “좀만……. 1시간만 더 자고…….”    여운이 계속 흔들어 깨우는데도 어제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오느라 장시간 운전하고 도착하자마자 이런저런 일로 많이 고단한 형택은 좀체 눈을 뜨지 못했다.    “일어나라고! 서울 가자고! 지금 서울 안 가면 차마루 확 죽여 버릴 것 같으니까 당장 일어나라고!”    여운이 형택의 눈까풀을 뒤집어 까기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에이, 나쁜 시키. 난 갈 거니까 자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    여운이 버럭 소리친 후 벌떡 일어나 방을 나갔다.    *    여운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모니터로 관찰하고 있던 마루는 재빨리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겨 국수방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제5그린벨트 [멧돼지 우리 탈출 시도.]  국수방 [대기.]    국수방의 ‘대기’라는 답변에 마루는 다시 모니터 앞으로 와서 여운이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것을 초조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컴퓨터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컴퓨터에서 울리는 신호음은 국수방에서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울리는 긴급 신호음이었다.  마루는 재빨리 컴퓨터 앞으로 와서 모니터를 확인했다.    국수방 [5그린벨트.]  제5그린벨트 [지시 사항?]  국수방 [택배 차 출발, 택배 배송 요청.]  제5그린벨트 [배송 요망 물건?]  국수방 [멧돼지!]    멧돼지?  마루는 재빨리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 대문 앞에서 서성거리던 여운이 보이지 않았다. 집 안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에서 전송되는 화면 그 어디에도 여운이 잡히지 않았다.    국수방 [멧돼지와 승냥이 접촉 확인. 현재 암컷 멧돼지 위치?]  제5그린벨트 [2분 전 그린벨트 탈출.]  국수방 [생포!]  제5그린벨트 [택배 차 도착 예정 시간?]  국수방 [약 30분 후. 사살 금지! 생포!]    생포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마루는 재빨리 모니터를 확인했다. 집 곳곳을 비추는 모니터에서는 여전히 여운의 움직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건 여운이 마루의 집 밖으로 완전히 나갔다는 뜻이었다.    “제기랄!”    마루는 금고 비밀 번호를 눌러 금고 문을 연 후 권총을 꺼내 들고 재빨리 벙커를 나가서 여운을 뒤쫓았다. 일단 형택이 자고 있는 방문을 열어 보았다. 방에는 떡실신 상태로 자고 있는 형택밖에 없었다.  서둘러 집 밖으로 튀어나왔지만 여운은 마당에도, 대문 밖에도 없었다.  해가 뜨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아직 바깥은 매우 캄캄했다. 캄캄했기 때문에 여운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흔적을 찾기가 쉽지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마루는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여운이 집을 나간 것은 불과 5분여 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기에 금방 붙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루가 허겁지겁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르는 소리에 달리기를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마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소리가 난 쪽은 바로 ‘사냥꾼’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사냥꾼의 집에서 부스럭거리며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야!”  “당신은 누구야!”    목소리를 들어 보니 여운이었다.    “기여운?”  “차마루 씨?”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여운이 나타났다.    ‘역시. 내 촉이 정확했어!’    마루는 기여운이라는 사람의 정체를 의심했던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었다는 것에 묘한 환희와 함께 격한 긴장을 느꼈다.    “지금 거기서 뭘 한 겁니까?”  “숨어 있었어요.”  “그 집에 숨어 있었다고?”  “차마루 씨는 어딜 그렇게 급하게 달려가는 거예요?”  “서울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갈 거예요.”  “그런데 어째서 그 집에서 나오는 겁니까?”  “나온 게 아니라 너무 캄캄하니까 좀 무서워서 담 밑에 숨어 있었던 거예요. 날이 좀 밝으면 가려고요.”  “거기가 누구 집인지 몰라요?”  “어떻게 모르겠어요. 채 실장 놈이 나한테 사기 친 집인데!”  “일단 집으로 갑시다.”  “됐어요.”  “집으로 가자고요.”  “그건 됐고……. 내가 재수 없다고 욕한 사람한테 부탁하기 진짜 쪽팔리지만 저기 버스 정류장까지 같이 가 주면 안 될까요? 너무 캄캄하니까 솔직히 좀 무섭네요.”  “그냥 집으로 가요.”  “차마루 씨 집엔 안 간다구요.”  “지금 버스 정류장에 가 봤자 버스도 없어요.”  “택시 탈게요.”  “버스도 귀한 시골에 이 새벽에 택시가 다니겠습니까?”  “그건 그러네요……. 그래도 차마루 씨 집엔 안 갈 거예요. 이래 봬도 내가 자존심 있는 사람이거든요. 하여튼 데려다 줄 거예요, 말 거예요?”  “그래요. 갑시다.”    마루가 앞장서자 여운도 뒤따랐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곧 국수방에서 보낸 차가 도착할 텐데 시간을 끌다간 이정민의 집 앞에서 여운을 체포하게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정민의 집 앞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했다.  마루가 걸음을 빨리하자 여운도 거의 뛰다시피 뒤따랐다.    “그렇게 빨리 갈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지금은 버스도 없다면서요.”    여운이 따라오기 버거운 듯 항의했지만 마루로서는 걸음을 늦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이정민의 집에서 안전하게 멀어졌을 때에야 마루는 걸음을 조금씩 늦췄다.    “어휴, 무슨 걸음이 그렇게나 빨라요?”    여운이 숨을 헐떡이며 항의했다.  그때였다. 길 아래쪽에서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승합차의 헤드라이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20초 후 마루와 여운이 있는 위치에 도착할 수 있는 속도였다.

“차가…… 올라오네요. 이 이른 시간에…….”    여운이 이상하다는 듯이 승합차를 쳐다볼 때 마루는 등 쪽 바지 허리춤에 숨겨 둔 권총에 손을 올려놓고 승합차와 여운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차마루 씬 왜 따라온 거예요?”  “왜 왔겠습니까?”  “왜 왔는데요?”  “기여운 씨 잡으러 왔습니다.”  “날 잡으러 왔다구요? 찾으러 왔다고 할 것이지 잡으러 왔다니, 내가 무슨 범죄자도 아니고. 말도 정말 밉상스럽게 하네요.”    여운이 두덜거리는데 빛의 속도로 달려오던 승합차가 여운의 코앞에 멈춰 섰다. 여운의 얼굴 정면으로 헤드라이트를 강하게 비추면서.  여운이 눈이 부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을 찡그릴 때 승합차에서 세 명의 남자들이 내렸다. 마루가 재빨리 남자들을 향해 수신호로 조용히 할 것을 지시하자 남자들이 곧장 여운에게 달려와 우악스레 여운을 붙잡았다.    “누구, 무슨 짓…….”    깜짝 놀란 여운이 몸부림을 치며 소리를 지르려던 순간 승합차에서 내린 남자들 중 한 사람이 약물이 묻은 하얀 손수건으로 여운과 입과 코를 막아 버렸다. 3초 후 반항하던 여운이 축 늘어지며 의식을 잃자 승합차 남자들이 여운을 승합차에 태워 버렸다.  마루와 눈빛을 교환한 승합차 남자들은 재빨리 차에 올라 차를 돌린 후 마을을 떠났다.    *    “뭐라고요?”    형택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기여운 씨는 오늘 새벽에 서울로 떠났다고요.”    마루가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 서울로 갔단 말입니까?”  “기여운 씨가 고형택 씨를 계속 깨웠는데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더군요.”  “몇 시에 갔다고요?”  “4시쯤? 기여운 씨도 갔으니까 고형택 씨도 그만 가 주시죠.”  “아, 진짜 미치겠네…….”    형택이 답답한 듯 머리를 벅벅 긁다가 휴대전화로 여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운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네……. 여운이가 전화기 가져갔습니까?”  “아직 메주가 갖고 있어요.”  “전화기도 안 갖고 갔단 말입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 새벽에 여운이가 서울로 간 겁니까?”    형택이 마루에게 화를 냈다.    “새벽에 메주한테서 전화기 뺏으려고 수선을 피우다 창고에서 수상한 불빛이 보이니까 도둑인 줄 알고 달려가서 때려잡았습니다.”  “여운이가 도둑을 때려잡았다고요?”  “도둑인 줄 알고 때려잡았는데 이연우 순경이었습니다.”  “예? 도둑인 줄 알았는데 때려잡은 사람이 이연우 순경이었다고요? 그럼 여운이가 경찰을 때려잡았다는 거예요?”  “정말 엄청난 여자더군요.”  “엄청난 여자죠……. 그나저나 그래서요?”  “이연우 순경하고 나하고 한판 붙었었습니다.”  “차마루 씨하고 순경이 붙었다고요? 왜요?”  “왜긴요! 기여운 씨 때문이죠!”  “여운이가 싸움을 붙였어요?”  “싸움 붙이는 데는 타고났더군요.”  “맞아요. 여운이가 싸움 붙이는 데는 선수예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거든요.”    형택이 푼수처럼 지껄였다.    “대체 그렇게 억세고, 싸움 붙이는 데 선수고,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여자를 좋아하는 이유가 뭡니까?”  “억세고 오지랖 넓고 그렇지만 알고 보면 우리 여운이가 진짜 착하고 진짜 불쌍한 애거든요. 우리 여운이가 억세고 싶어서 억센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오지랖이 넓은 것도 아니고……. 나하고 여운이하고 다섯 살 때부터 친군데…… 어릴 때 부모님 돌아가시고 오빠까지 죽고…… 어린 게 혼자 살아 보겠다고 안 해 본 일 없이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우리 여운이가 어릴 때부터도 잘 못 먹었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때가 중학교 땐데 그때부터 굶기를 밥 먹듯이 했어요. 진짜 말로는 다 못 할 만큼 고생 엄청 했거든요. 진짜 불쌍한 애예요. 공부도 정말 잘했는데……. 그런데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슬슬 열 받네. 차마루 씨가 우리 여운일 얼마나 잘 안다고 억세니 뭐니, 우리 여운일 까는 겁니까?”    형택이 마루에게 눈을 부라리며 따졌다.    “아, 진짜 열 받아서 못 참겠네. 당신 이연우 순경하고 붙었다고 했지? 말하는 싸가지가 딱 보니까 우리 여운이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이연우 순경 열 받게 해서 붙은 거네. 이번엔 나하고 한판 붙어!”    형택이 허우적거리듯 마루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데 마루가 간단하게 형택의 팔을 붙잡아 뒤로 꺾어 버렸다.    “아아……, 아아! 잠깐만, 잠깐만요……. 어깨 빠져……. 내 팔…….”    형택이 바동거리며 죽는 소리를 했다.    “까불지 말고 조용히 떠나요. 알겠습니까?”    마루가 팔을 꺾은 채 경고했다.    “갈게요. 지금 당장……. 아아아, 팔, 팔……. 어깨, 아아아……. 간다고요. 간다고요!”    형택이 방정맞을 정도로 바동거리며 사정하자 마루가 형택의 팔을 놓아주었다.    “당장 가요!”  “가요, 가…….”    형택이 재빨리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으로 달려갔다.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던 형택이 대문을 열어젖혔다.    “차마루!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내가 봐준 거야! 앞으로 내 눈에 띄지 마라!”    형택이 소리쳤다.  형택의 영양가 없는 어깃장에 마루가 어처구니없는 듯 눈을 부라리며 한 발 내딛는데 형택이 화들짝 놀라며 쏜살같이 도망가 버렸다.  형택의 행동에 실소를 머금던 마루는 문자 메시지 도착음을 듣고 휴대전화를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국수방의 명령 메시지였다.    《복귀.》    *    국수방 요원들은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니터 속에 여운이 있었다. 여운은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국수방 요원들은 늘어지게 자고 있는 여운을 너무나 기가 차서 할 말을 잃은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한마디로 여운은 납치당한 여자였다. 납치 직전 비명 외침 등등의 소음을 차단하기 위해 마취제를 사용해 재우긴 했지만, 지금 여운의 모습은 누가 봐도 납치해서 강제로 재운 것이 아니라 제집 안방인 듯 천하태평이었다.    “몇 시간째냐?”    오 팀장이 옆에 있는 남자 요원 1에게 물었다.    “약 열 시간째입니다.”  “헐…….”    오 팀장이 어이없는 듯 고개를 저었다.    “여기가 여관방도 아니고. 깨워.”  “예.”    깨우라는 오 팀장의 명령과 동시에 여운이 자고 있는 방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여자 요원이 안으로 들어섰다. 여운은 여자 요원들이 방으로 들어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코를 골고 입으로도 푸푸 불어 대며 신나게 자고 있었다.    “기여운 씨. 기여운 씨.”    여자 요원들이 이름을 부르자 여운이 꼬무락거리기 시작했다.    “기여운 씨.”    여자 요원 1이 다시 이름을 불렀을 때 여운이 눈을 떴다.    “기여운 씨, 일어나요.”    여자 요원 2가 말했고 여운은 흐릿한 눈길로 요원들을 쳐다보다가 놀란 듯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누구세요?”  “기여운 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납니까?”  “무슨 일요? 뭐가 기억나냐고…….”    잠이 덜 깼는지 요원들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던 여운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둘러봤다.  낯선 방이었다. 창문 하나 없이 꽉 막힌 낯선 방.  사방이 꽉 막힌 낯선 방에 간이침대 하나, 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가 있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어제……, 아니 오늘……, 어젠지 오늘인지 누가 날 납치를 했는데…… 당신들 누구예요?”    여운이 여자 요원들을 경계하며 물었다.    “이곳은 국토수호방위국이고, 우리는 국수방 소속 요원입니다.”  “뭐라구요? 국수방요? 여기…… 국수 팔아요? 무슨 국수를 이렇게…… 폐쇄적으로 팔아요?”    여운의 맹한 질문에 여자 요원들이 묘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잠깐만……. 국수를 팔든 뭐든 내가 여기 왜 잡혀 온 거예요?”    여운은 음산함마저 느껴지는 폐쇄적인 방 안을 불안한 눈길로 둘러보며 물었다.    “기여운 씨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위협하는 이적 단체 활동을 한 혐의로 체포된 겁니다.”    여자 요원 1이 간결하지만 냉정한 어조로 설명했다.    “민주주의와 자유 평화를 위협하는…… 그리고 뭐라고 했죠?”  “이적 단체 활동을 한 혐의입니다.”  “이적 단체 활동을 한……. 잠깐만요!”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여운이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체포라고요? 체! 포? 지금 체포라고 했어요?”  “네, 당신은 간첩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여운이 멍하다 못해 가위 눌린 얼굴로 요원들을 쳐다봤다.    “간첩요? 내가요?”    여운은 앞에 있는 두 여자가 미쳤거나 자신이 가는귀가 먹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체포라니, 간첩이라니. 30년 동안 별놈의 소리를 다 들어 봤지만 지금 국숫집인지 뭔지 하는 곳의 요원이라는 여자의 입에서 나온 간첩이라는 단어가 제일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었다.    “간첩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똥 같은 말이에요? 내가 간첩이라구요?”    여운이 기절할 얼굴로 소리쳤다.    “네.”  “언제부터요? 내가 언제부터 간첩이었단 거예요?”    30년 평생 간첩 짓을 해 본 적도 없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던 사람에게 간첩이라니. 그러게 대체 언제부터 간첩이었다는 걸까?    “그건 기여운 씨가 더 잘 알고 있겠죠.”  “내가 안다구요? 모르거든요?”    여운이 기막힌 얼굴로 말했지만 요원들은 무시했다.    “일어나서 탈의해 주세요.”  “탈의라뇨? 옷을 벗으라고요? 왜요?”    이건 또 무슨 기절초풍할 소리인지.    “당신은 간첩 혐의를 받고 있고 그래서 우린 당신의 의류는 물론이고 당신의 몸을 수색할 겁니다.”  “수색?”    수색이라는 단어에 여운은 자신도 모르게 팔로 몸을 감쌌다. 옷을 벗으라니. 수색이라니.    “탈의하세요.”  “잠깐만요!”    여운이 바락 악을 썼다.    “무슨 권리로 날 수색한다는 거예요?”  “국수방에서는 당신을 수색할 권리가 있습니다. 속옷까지 모두 벗어 주세요. 수색 후에는 이 옷으로 갈아입으면 됩니다.”    여자 요원 2가 간이침대 옆 테이블에 놓여 있는 체육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속옷까지 벗으라고요? 발가벗으란 말이에요?”  “네.”    세상에나 만상에나 발가벗으라니. 홀딱 다 벗으라니.    “미쳤어요?”    여운이 펄쩍 뛰며 소리쳤다.    “난 간첩 절대 아니고, 옷도 절대 못 벗어요! 절대 못 벗어요! 안 벗어요!”    여운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강제로 벗기기 전에 순순히 협조하세요.”  “순순히 협조 못 해요!”    암, 그렇고말고. 발가벗으라는데 순순히는 얼어 죽을!    “마지막 경곱니다. 탈의하세요!”  “못 해요! 안 해요!”    여운이 바락 악을 쓰자 요원들이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  눈빛을 교환한 여자 요원 1이 출입구 오른쪽 벽 끝 모서리에 설치된 카메라 앞으로 걸어가더니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카메라 렌즈를 가렸다.    “스스로 탈의하시겠습니까, 강제로 벗길까요?”  “나란 여자, 탈탈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올 만큼 완벽하게 클린한 여지지만! 그래도 옷은 절대 못 벗어요! 당신들도 내 몸에 손댔다간 작살날 줄 알아요!”    여운이 방어를 지나 적대감을 드러내며 소리치는데 여자 요원 두 명이 여운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누구의 비명인지 알 수 없는, 소름 끼치게 기괴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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