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여운 스파이-3화 (3/21)

“어떻게 순경님처럼 잘생긴 분이 모태 솔로일 수가 있죠?”    여운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많이 놀란 척하며 묻자 연우가 수줍은 소녀처럼 살짝 얼굴을 붉혔다가 이내 두 눈을 번쩍거렸다.    “그건…… 인연을 몬 만나서…….”    연우가 다시 한 번 강렬한 눈빛을 발사하며 대답했다. 그런 연우를 여운은 너무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봤고, 마루는 ‘아주 지랄을 해요’ 하는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처음 뵙는 분 댁에서 자겠어요. 그건 말이 안 되죠.”    여운이 그건 정말 상식에 맞지도 않고 도리에도 맞지 않는 일이기에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연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요, 민중의 지팡이 경찰입니더. 민중이 곤란함에 처해 있다면 당여히 경찰인 내가 제일 먼저 나서가 지팡이가 돼 드리야지요. 당여히 여운 씨께 기꺼이 잠자리를 제공해 드려야 하고, 그거는 민중의 지팡이인 제 의뭅니더.”    연우가 그럴듯하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자 마루가 지팡이를 별 시답지 않은 곳에 쓴다는 듯 썩은 미소를 던졌다.    “순경님은 모든 민중에게 잠자리를 제공하시나요?”    여운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연우가 움찔 당황했다.    “그거는 절대로 아입니더! 지금까지 마을에서 잠자리가 없어가 곤란했던 분은 없었거든요.”  “그렇군요……. 그런데 내가 순경님 집에서 지내면 순경님은 어디서 지내시려구요?”  “내는 파출소 숙직실에서 자면 됩니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순 없어요.”    여운이 아무래도 무리라는 듯 고개를 젓자 연우가 바짝 몸이 달아 더욱 들이댔다.    “폐라니요. 절대로 아입니더. 참 좋은 마을인데 이렇게 좋은 마을에 오자마자 큰일 당하셔서…… 제 마음이 억수로 아픕니더. 부담 갖지 마시소.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 드리겠습니더.”    도둑 잡는 일이 아닌 연애 활동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연우에게 마루가 찬물을 끼얹으며 나섰다.    “내 집에서 지내요.”    마루의 말에 이번엔 연우와 여운이 마루를 쳐다봤다. 여운은 내심 정말 잘됐다는 표정이었고, 연우는 경계심과 질투심으로 똘똘 뭉쳐진 표정이었다.    “모든 사건의 현장은 이 마을이니까 읍내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마을에서 지내는 것이 편리하고 합리적이잖아요.”    마루의 말에 여운이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데 연우가 반박하듯 나섰다.    “파출소 가까운 곳에서 지내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하고 합리적일 수도 있습니더.”  “범인은 반드시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마을에서 지내는 것이 더 유리하죠. 범인이 다시 나타났을 때 빨리 대처할 수 있으니까요. 신고를 하든, 때려잡든.”    마루가 재반박하자 연우가 분하다는 얼굴로 턱을 실룩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자분이니까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곳에서 지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 말은 내 집이 위험하다는 뜻입니까?”  “남자 혼자 사는 집이니까 아무래도 완저이 안전할 수는 없지요.”  “이연우 순경님 집은 안전하고요?”  “당연하지요. 내가 파출소에서 지내면 여운 씨는 혼자 지낼 수 있으니까요.”  “여자 혼자 낯선 집에서 지내는 것도 결코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죠.”  “낯선 남자와 함께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혼자 지내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합니더.”    마루와 연우가 마치 쟁탈전을 벌이듯 여운을 두고 으르렁거리자 여운은 남자 두 명이 자신을 두고 쌈질하는 것이 은근히 재밌어서 흥미로운 표정으로 즐겼다.    “무슨 근거로 내가 기여운 씨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겁니까?”    마루의 질문에 여운이 즉시 고개를 돌려 연우를 쳐다봤다.    “나도 남자, 차마루 씨도 남자. 남자라면 다 알지 않습니까,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남자가 어떻게 본능적으로 행동하는지?”    연우의 대답에 여운이 감동한 듯 미소를 짓는데 마루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살다 살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소리는 처음 듣는다는 듯.    “그건 전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내 눈에는 전혀 아름답지 않고 비쩍 마르고 키만 멀대처럼 큰 여자 사람에 불과하니까.”    마루의 말에 여운의 두 눈이 관자놀이까지 쭉 찢어졌다. 더불어 연우의 표정은 마치 자신이 몹쓸 쌍욕을 들은 듯 불쾌함으로 완전히 찌그러졌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고 무례한 말을 막 하는 겁니까!”    여운을 대신해 연우가 따졌다.    “완벽하게 말 되는 소리고, 이미 기여운 씨한테도 내 취향의 여자가 아니라는 걸 밝혔으니 무례할 이유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기여운 씨?”    마루가 여운에게 물었고 여운은 관자놀이까지 쭉 찢어진 눈으로 죽일 듯이 마루를 노려봤다.    “걱정 마세요, 이연우 순경님. 저 역시 허우대만 떡 벌어지고 광발, 턱발, 각진 남자 사람은 질색이니까.”    여운이 잘근잘근 씹듯이 받아치자 마루의 눈초리도 사나워졌다.    “아무래도 차마루 씨 집이 불편하신 듯하니까 내가 이장님이나 다른 마을 어른들께 부탁드려 볼게요.”  “이장님은 절대 안 돼요.”    마루와 여운이 동시에 말했다.    “와요?”  “그게…… 어젯밤에 이장님을 도깨비로 착각해서 도망치다가 이장님을 넘어뜨렸거든요. 그래서 이장님이 허리랑 엉덩이를 다치셔서…… 너무 죄송해서 마사지를 해 드리려고 하는데…… 이장님이 갑자기 막 들이대서…….”  “이장님이 들이댔다꼬요? 어떻게요?”  “진짜 막 들이댔어요. 음탕한 눈으로 날 보면서…… 엉덩이를 막 들이대고……. 내 말이 맞죠, 차마루 씨?”    여운이 마루에게 동의를 구하듯 묻자 마루가 그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수컷의 본능을 여과 없이 드러내셨죠.”    마루의 대답에 연우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아무리 마흔이 넘었어도 이장님도 남자라…….”    연우가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리는데 여운이 기함할 얼굴로 연우를 쳐다봤다.    “이장님이 겨우 마흔 넘었다고요? 환갑에 가까운 게 아니라요?”  “마흔둘이십니더. 홀어머니 모시고 사는 노총각입니더.”  “어딜 봐서 그분이 마흔둘이에요?”  “털 때문에 나이가 좀 들어 보이긴 하지요.”  “좀 들어 보이는 게 아니라 팍 들어 보여요.”  “어쨌건 이장님 댁도 절대 안 되겠네요. 다른 마을 어르신들께 부탁드려 보겠습니더. 내하고 같이 가입시더. 내가 부탁드리면 재워 주실 겁니더.”    연우가 여운을 데리고 가려는데 마루가 여운의 앞을 막아섰다.    “내 집에 있어요.”  “차마루 씨 집에요? 하지만…….”    여운이 망설이자 연우가 나섰다.    “저 아래 김씨 할머니가 재워 주실 겁니더.”  “김씨 할머니 지난주에 무릎 수술 받으러 대구 가시고 없습니다.”    마루가 초를 쳤다.    “그럼 원씨 할머니께서 재워 주실 겁니더.”  “원씨 할머니 이혼한 둘째 아들네 손자 셋 봐 주느라 등골이 빠져서 객식구 들일 여력 없습니다.”  “그럼 전씨 할머니 댁으로 가면 됩니더.”  “전씨 할머니는 할아버지께서 읍내 장미 다방 오 마담하고 꽃놀이 간 거 들통 나서 앓아누우셨습니다. 그냥 내 집에 있어요.”    마루가 여운의 손목을 움켜잡자 연우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럼 내 집으로 가입시더!”    연우도 여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두 남자가 양쪽에서 손을 잡아당기며 내 집으로 오라, 내 집으로 가자 법석을 떨어 대자 여운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듯 두 남자의 소유욕을 정리했다.    “차마루 씨 집에 있을게요!”    여운의 결정에 마루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번졌고, 연우의 얼굴은 똥 먹은 뭣처럼 일그러졌다.    “휴대전화도 찾아봐야 하고 감사하지만 순경님 오늘 처음 뵀는데 초면에 신세 지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무래도 여기 있는 게 도둑 잡기 더 쉬울 것 같아요. 차마루 씨 집에 있을게요. 며칠이나 재워 줄 거예요?”  “하루!”  “얼마든지!”    연우와 마루가 동시에 외쳤다. 당연히 하루를 외친 사람은 연우였고, 얼마든지를 외친 사람은 마루였다.    “사흘만 있을게요. 꼭 사흘만 신세지고 서울로 갈게요.”    여운의 결정에 연우는 서운하고 분해서 견딜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라마 일단 같이 파출소로 가시지요. 정식으로 도난 신고도 해야 하고 도난 품목도 작성해야 하니까요.”  “네.”    연우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 걸어가던 여운이 재빨리 마루에게 다가왔다.    “미안한데 장화 한 켤레 다 빌려 주면 안 돼요? 이러고 읍내 가기가 쪽팔려서요.”    여운은 그때까지도 한 짝은 운동화, 한 짝은 장화를 신고 있었다.    “알았어요. 빌려 줄게요.”    마루의 흔쾌한 대답에 여운은 연우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재빨리 마루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 운동화를 벗고 툇마루 아래에 있던 장화로 갈아 신었다. 너무 큰 탓에 신고 다니기보다는 터덜터덜 끌고 다녀야겠지만 짝짝이로 신는 것보다는 한결 보기 좋았다.  여운이 장화로 갈아 신고 연우에게 가려는데 언제 쫓아왔는지 마루가 여운의 앞을 막아섰다.    “내 장화 들고 튀지 말고 반드시 돌아와요.”  “흥, 이깟 장화 얼마나 한다고 들고 튀겠어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여운이 마루를 지나쳐 가려는데 마루가 또다시 여운을 막아섰다.    “반드시 돌아와요. 반드시.”    마루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여운을 바라보며 말했다.    “반드시 와야 해, 내 집으로.”        3장        “반드시 돌아와서 내 집에서 자요.”    마루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강력하게 말했다.    “어젠 감자 몇 개 집어먹었다고 세상에서 제일 싸가지 없는 사람 취급 하더니 오늘은 왜 갑자기 그렇게 강력하게 재워 준다는 거예요? 비쩍 마르고 멀대처럼 키만 커서 절대 차마루 씨 취향 아니라더니……. 설마, 갑작스럽게 나한테 남다른 감정이 생긴 건 아니겠죠?”    여운이 비아냥거리듯 묻자 마루가 개꿈도 야무지게 꾼다는 얼굴로 여운을 흘겨봤다.    “헛소리가 취밉니까? 김칫국 작작 마셔요.”    마루가 대놓고 비웃으며 여운의 속을 긁었다.    “아니면 왜 악착같이 붙잡는 거냐고요!”    여운이 두 눈을 늦가을 독 오른 뱀처럼 치켜뜨고 소리쳤다.    “사기꾼한테 전 재산 홀랑 털린 것도 부족해서 이삿짐까지 도둑맞은 칠칠치 못한 여자가 어제는 이 남자 집, 오늘은 저 남자 집, 혼자 사는 남자 집만 골라서 잠자리 구걸한다고 칠칠하다 못해 헤픈 여자라고 소문날까 봐 그럽니다. 도시에서 소문 퍼지는 속도가 2G라면 시골에서는 LTE 광속이에요. 알아듣겠어요?”    마루의 말에 여운이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헤픈 여자로 소문날까 봐 재워 준다구요? 차마루 씨가 내 걱정을 한다구요? 헐. 메주가 웃겠네요.”    여운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만약 내가 어제는 이 남자, 오늘은 저 남자, 혼자 사는 남자 집만 골라서 잠자리 구걸하는 헤픈 여자라는 소문이 LTE 광속으로 난다면 그 소문을 퍼뜨린 범인은 틀림없이 차마루 씨일 거예요.”    여운의 말에 마루는 순간 정곡을 찔린 듯 코를 실룩였다.

“콧구멍만 실룩거리고 반박을 못하는 것 보니 엄청 찔리나 봐요.”  “찔리는 거 없습니다!”  “무슨 남자가 솔직하질 못하고……. 대체 뭐예요?”  “뭐가 뭐예요?”  “날 악착같이 차마루 씨 집에서 재우려는 이유 말이에요.”  “지금 설명했잖아요.”  “그런 말 안 되는 이유 말고 진짜 이유가 뭐냐고요.”  “억 소리 나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사기당하고 도둑맞아서 개털 된 불쌍한 사람 남자 밝히는 헤픈 여자까지는 만들지 말자, 큰마음 먹고 며칠 묵을 잠자리 기부하겠다는데 진짜 이유, 가짜 이유, 그런 게 왜 필요합니까?”    마루가 참 답답하고 한심한 여자라는 투로 말했다.    “잠자리 기부해 주셔서 차암 감사하네요. 도움받으면서도 전혀 안 고맙고 불쾌하기도 처음이네요.”    여운은 차마루라는 인간은 고마워할 일도 전혀 고맙지 않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며 마루를 획 지나쳐 대문으로 향했다.    “늦게 오면 대문 걸어 잠글 거니까 해 지기 전에 돌아와요.”  “그냥 기다리지 말아요! 이연우 순경님한테 신세 지는 게 속 편할 것 같으니까.”  “어림없어요! 내 장화 꼭 가져와요!”    마루가 여운을 쫓아오며 소리쳤다.    “이깟 장화 가지고 쪼잔하게. 금테라도 두른 장화래요? 내일 꼭 갖다줄 테니까 걱정 말아요!”  “오늘 갖고 와요. 오늘!”  “흥!”    여운은 콧방귀를 시원하게 날려 주고 대문을 나서 연우에게 다가갔다.  여운이 다가오자 연우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오토바이 안전모를 여운에게 건넸다.    “이거 쓰이소. 쪼매 크겠지만 쓰는 게 안전합니더.”  “내가 쓰면 순경님은요?”  “난 경찰이니까 잡을 사람 없어요.”    연우가 순박하게 씩 웃었다.    “경찰이 법 어겨도 돼요?”  “오늘만 어길게요. 여운 씨를 위해서.”    다정한 목소리로 “여운 씨를 위해서”라고 말하는 연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 여운이 못 이긴 척 안전모를 쓰자 연우가 안전모 끈을 조여 주었다. 아주 다정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가 먼저 탈 테니까 뒤에 앉으세요.”  “네.”    연우가 먼저 오토바이에 타고 여운가 연우 뒷자리에 올라타자 연우는 심장이 더욱 벅차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소리 없이 긴 숨을 내쉬었다.    “시동 겁니데이.”  “네.”    여운이 이렇게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은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부르릉 오토바이 시동이 걸렸다.    “달릴 때 위험하니까…… 내 허리 잡으이소.”    연우가 말했고 여운은 수줍은 듯 연우의 허리춤 옷자락을 소극적으로 잡았다.    “꽉 잡아야 됩니더.”  “꽉 잡았어요.”    여운은 연우의 옷자락을 조금 더 세게 붙잡았다.    “출발합니데이.”  “네.”    연우가 오토바이를 출발시키는 순간 반동으로 몸이 뒤로 젖혀진 여운이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허겁지겁 자신도 모르게 연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여운이 허리를 껴안으며 등에 찰싹 달라붙자 연우는 심장이 멎을 듯한 황홀함을 느끼며 오토바이 핸들을 꽉 틀어잡았다.    “오늘 꼭 장화 갖고 와요!”    대문 앞에서 연우와 여운의 썸 타는 짓거리를 노려보던 마루가 버럭 소리쳤지만 여운과 연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달립니다. 꽉 잡으이소!”    연우가 소리치며 속도를 올리자 두 사람을 태운 오토바이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오늘 장화 안 갖고 오면 신고할 거예요! 장화 훔쳐 갔다고!”    마루가 다시 한 번 소리쳤지만 연우와 여운을 태운 오토바이는 벌써 저만치 도망치듯 달려가 버렸다.  두 사람을 태운 오토바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노려보다가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돌아서던 마루는 낯을 찡그리며 가슴에 손을 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근, 두두근…….  또 시작이었다. 이놈의 심장이 실성을 했는지 또다시 부정맥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왜 이러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 징후가 느껴지자 그것도 심장에서 느껴지자 덜컥 겁이 났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면 국수방에서 계속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괜찮아지겠지. 스트레스가 쌓여서…… 일시적인 거야…….”    마루는 애써 걱정을 털어 내며 곧장 지하 벙커로 내려갔다.  마루는 주머니에 숨겼던 여운의 휴대전화를 충전하기 위해 컴퓨터에 연결된 잭에 끼운 후 국수방 사이트에 접속해 비밀 대화창에서 채팅을 시작했다.    제5그린벨트 [국수방.]    5초 후.    국수방 [용건.]  제5그린벨트 [5그린벨트에 출몰한 멧돼지 짝짓기 시도 중.]  국수방 [상대는?]  제5그린벨트 [5그린벨트 관할 잎사귀 두 개.]  국수방 [다시 확인 바람.]  제5그린벨트 [5그린벨트 관할 잎사귀 두 개.]  국수방 [확실?]  제5그린벨트 [확실.]  국수방 [잎사귀 신상.]  제5그린벨트 [××군 ×× 파출소 이연우.]  국수방 [대기.]    1분 후.    국수방 [잎사귀 확인. 사냥꾼 접촉?]  제5그린벨트 [없음. 지시 사항?]  국수방 [일단 주시.]  제5그린벨트 [5그린벨트 멧돼지 배설물 수거. 충전 중.]  국수방 [배설물 내용 파악되면 즉시 보고 바람.]  제5그린벨트 [이상.]  국수방 [이상.]    마루는 휴대전화 배터리가 10퍼센트까지 충전되자 곧바로 전원을 켰다. 하지만 패턴 잠금이 되어 있어 내용을 확인하려면 패턴 잠금부터 풀어야 했다.  마루는 곧바로 비밀 대화방 창을 띄워 접속을 시작했다.    제5그린벨트 [국수방.]  국수방 [용건?]  제5그린벨트 [5그린벨트 멧돼지 배설물 내용 확인 위한 잠금 해체 요청.]  국수방 [배설물 스캔.]    마루가 국수방의 지시대로 여운의 휴대전화를 스캐너 위에 뒤집어 내려놓고 작동 버튼을 누르자 2초 만에 스캔이 끝났다.    제5그린벨트 [스캔 완료. 대기.]    2분 후.    국수방 [제5그린벨트. 추정 패턴 전송.]  제5그린벨트 [대기.]    마루는 국수방에서 스캔한 휴대전화 액정 화면의 얼룩으로 추정한 열한 개의 가능 패턴으로 여운의 휴대전화 잠금 해제를 시도했다. 다행이었다. 다섯 번 만에 잠금이 해제됐다.    제5그린벨트 [잠금 해제. 배설물 내용 확인 가능.]  국수방 [원격.]    원격이라는 대답과 동시에 원격을 허락하라는 팝업창이 떴고, 마루가 OK 버튼을 클릭하는 동시에 마루의 컴퓨터를 상대방이 마음대로 조종하기 시작했다.    국수방[배설물 조사 중.]    5분 후.    국수방 [배설물 내용 복사 완료. 감시 앱 설치. 배설물 내용 5그린벨트로 전송 중. 원격 해제 요청.]    원격 해제 요청 팝업창이 뜨고 마루가 OK 버튼을 클릭하자 곧 원격 조정이 해제됐다.    제5그린벨트 [이상.]  국수방 [이상.]    비밀 대화를 끝낸 마루는 컴퓨터 잭에 연결해 충전 중이던 휴대전화를 분리한 후 감시 모니터를 살펴봤다. 집 주변은 물론이고 마을 곳곳에 설치해 둔 감시 카메라에는 특별히 눈에 띄거나 특이한 상황이 잡히지 않았다.  마루는 시간을 확인한 후 여운의 휴대전화를 면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다.    *    여운은 도난 신고서를 작성하고 나서 연우는 물론이고 모든 경찰관들한테 도둑을 꼭 잡아 달라고, 도둑을 못 잡으면 도둑맞은 살림이라도 꼭 찾아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했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가능하다면 도둑도 때려잡고 살림살이도 되찾고 싶었다. 하지만 한 방에 일거양득이 불가능하다면 도둑보다는 살림을 찾고 싶었다. 만약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망할 놈의 도둑이 이미 다 팔아먹었다면 그것마저도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은 꼭 찾고 싶었다. 책만큼은 꼭 찾고 싶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꼭 찾아 주세요. 대한민국 경찰의 힘을! 보여 주세요.”    여운이 사정과 애원에 격려를 빙자한 협박까지 하고 파출소를 나서는데 연우가 따라 나오며 여운을 붙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집에서 지내는 게 안 낫겠습니까? 아까 보니까 차마루 씨 불친절해서 여운 씨 마음이 안 편할 것 같던데.”  “솔직히 생색도 많이 내고, 허락 안 받고 감자 몇 개 먹었다고 구박하고, 인신공격도 해서 마음이 불편하긴 해요.”    여운이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다.    “감자 먹었다고 구박을 했다꼬요? 인신공격을 했다니 무슨 말입니꺼?”  “감자 훔쳐 먹었다고 체면도 없고, 상식도 없고, 교양도 없는 여자라고……. 어제 사기당한 걸 알고 너무 놀라고 속이 상해서 종일 굶었거든요. 너무 배고파서 감자를 몇 개 먹었는데……. 허락받지 않고 먹은 내 잘못이죠.”  “힘든 일 당한 여운 씨한테 그런 막말까지 했단 말입니꺼?”  “맞죠? 그거 막말이죠?”  “막말이지요. 아주 몹쓸 막말이지요. 차마루 씨 그렇게 안 비드마…… 진짜 나쁜 사람이네요. 그러니까 내 집에서 주무시지요. 난 진짜로 괜찮으니까.”    연우가 열의를 다해 여운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순경님한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막말 듣고 구박을 당하더라도 한 사람한테 폐를 끼쳐야지, 순경님한테까지 폐를 끼칠 순 없어요.”  “폐 끼치는 거 아니에요.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그래요.”    연우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장화도 돌려줘야 해요.”  “내가 갖다주께요.”  “아니에요. 순경님이 왜 그런 심부름까지 하세요. 내가 뭐라고…….”  “여운 씨가 뭐긴요……. 예쁘고 착한 분이지요.”    연우의 대답에 여운이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너무…… 대놓고 막…… 예쁘다고 하니까 놀리는 것 같아요.”  “놀리는 거 아입니더. 진심입니더.”    연우가 정색을 하고 말했고, 여운은 또다시 수줍게 미소 지었다.    “예쁘다는 말…… 많이 못 들어 봤는데……. 평생 들을 걸 오늘 다 들은 것 같아요.”  “내가 진심으로 걱정돼가 그러니까 내 집에서 지내세요.”  “그냥 눈 딱 감고 순경님 집으로 갈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안 좋은 소문이 날 것 같아서요.”  “안 좋은 소문요?”  “차마루 씨가 그러는데 어제는 이 남자, 오늘은 저 남자, 혼자 사는 남자만 골라서 잠자리 구걸하면 헤픈 여자로 찍힌다고……, 시골은 도시보다 소문이 더 빨리 난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한 사람한테 신세 지는 게 좋다고…….”  “차마루 씨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 했단 말입니까?”    연우가 버럭 화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닌 것 같아요. 내가 처음부터 여기 살던 사람이 아니라 낯선 이방인이라 다들 색안경 끼고 보는 것 같아요.”  “누가 여운 씨를 색안경을 끼고 봐요. 그런 사람 없어요.”  “있어요. 많아요.”  “어디 있어요? 어디요? 아무도 없는데.”  “저기요.”    여운이 손가락으로 파출소 문을 가리키자 고개를 돌려 여운의 손가락 끝을 쳐다보던 연우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졌다.  파출소 안에서 파출소장님은 물론이고 경찰들이 불나방처럼 유리문에 달라붙어 열정적으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냥 차마루 씨한테 신세 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순경님 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것 같아요.”  “상관없습니더. 내가 다 막아 주께요.”    연우가 무슨 일이 있어도 굳건하게 지켜 주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으로 말하자 여운이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순경님…… 되게 멋진 거 아세요?”  “예? 내가요?…… 멋지다꼬요?”    기쁨을 참지 못한 연우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기 시작했다.    “진짜…… 되게 멋져요, 지금.”    여운의 말에 연우가 쑥스러운 듯 웃으며 괜스레 머리를 긁적였다.    “내하고 잠깐 어디 좀 가지요.”  “어디요?”  “가 보면 알아요. 가면서 생각해 보이소, 내 집에서 지내는 거에 대해서.”    연우가 먼저 앞장서자 여운은 못 이긴 척 연우의 뒤를 따랐다. 연우를 뒤따라가며 슬쩍 고개를 돌려 보자 파출소 경찰들이 그때까지 유리문에 달라붙어 쳐다보고 있었다.

연우가 여운을 데려간 곳은 시장이었다.    “오늘 5일장 서는 날입니더.”  “아……. 그런데 시장에 왜 왔어요? 장 보려고요?”  “저녁 묵을 때잖아요. 여운 씨한테 맛있는 저녁 대접하고 싶어서요……. 할 일도 있고.”  “무슨 할 일요?”  “비밀입니더. 그란데 뭐 좋아하십니까? 음식요.”  “아무거나 잘 먹어요. 가리는 거 없어요. 특히 시장에서 파는 건 다 맛있지 않아요?”  “다 맛있죠. 혹시 국밥 좋아해요?”  “네. 좋아해요. 얼큰한 국밥.”  “나도 얼큰한 국밥 좋아하는데…….”    연우는 이렇게 입맛까지 잘 맞는 것을 보면 천생연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설레는 미소를 지었다.    “맛있는 국밥집 아세요?”  “압니더. 맛있다고 소문난 집.”    연우가 여운을 데려간 국밥집은 정말 맛있다고 소문난 국밥집이었다. 그러니까 국밥집 상호가 아예 ‘맛있다고 소문난 국밥’이었던 것이다.  연우는 국밥 두 개를 주문한 후 곧바로 일어났다.    “여 잠깐만 계세요. 금방 오께요.”  “어디 가는데요?”  “금방 옵니더.”    연우는 서둘러 국밥집을 나섰다가 다행히 국밥이 상에 차려지고 난 직후 까만 봉지를 들고 금방 돌아왔다.    “어디 갔다 왔어요?”  “이거 신어 보이소.”    연우가 까만 봉지에서 빨간 슬립온 신발을 꺼내 여운의 발아래 놓아 주었다.    “신발 사러 갔었어요?”  “정화가 커서 걷는 게 불편해 보여서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는데…….”  “마음에 들어요. 예뻐요. 진짜 받아도 돼요?”  “여운 씨 신으라고 산 건데 당연하죠.”    여운은 감동받은 얼굴로 연우를 쳐다보다가 장화를 벗고 빨간 슬립온을 신었다. 놀랍게도 꼭 맞았다.    “내 발 사이즈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조서 꾸밀 때 도둑맞은 품목에 신발도 있었잖아요. 그때 발 사이즈 기재한 것 보고 알았어요.”    연우의 말에 여운이 정말 탐나는 남자라는 시선으로 하염없이 연우를 바라봤다. 이렇게 잘생기고 다정다감하기까지 한 사람이 남자 친구라면 얼마나 좋을까, 더 나아가 남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와 그래 봅니까?”  “그냥…… 고맙고…… 이상하게 감동적이어서요.”  “감동적요?”  “이런 친절…… 받아 본 적이 별로 없거든요. 문득 이 순경님하고 사귀는 여자는 정말 행복하겠다……, 결혼하면…… 사랑받는 남편이 되겠다, 그런 생각도 들고. 정말 다정하고 배려심도 깊고……. 하여튼 너무 감사해요, 이연우 순경님.”  “순경님이라고 하지 말고…… 이름 불러 주면 안 될까요?”  “이름요?”  “연우 씨라든가…….”    연우가 꽈배기처럼 당장 몸이라고 배배 꼬아 댈 듯한 시늉을 하며 잔뜩 부끄럼 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우…… 씨요?”    여운도 불쑥 부끄럼을 타며 얼굴을 붉히자 연우가 아주 귀여워 깨물고 싶은 듯한 눈빛으로 여운을 바라봤다.    “그럴…… 까요?”    여운이 수줍은 미소를 날려 주자 연우는 헤벌쭉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잘 신을게요. 고마워요, 연우…… 씨.”  “마음에 들어서 다행입니더, 여운 씨…….”    연우와 여운이 국밥이 식는 줄도 모르고 몸을 비꼬며 썸을 타느라 정신이 없는데 갑자기 연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 아름다운 국밥집 로맨스를 망쳐 놓는 빌어먹을 훼방꾼이 누굴까 생각하며 발신자를 확인하던 연우의 얼굴이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훼방꾼은 다름 아닌 차마루였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 이연우 씨?  “예, 그렇습니다.”  - 차마룹니다. 기여운 씨 바꿔 주세요.    연우는 못마땅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여운에게 건넸다.  여운은 전화를 왜 바꿔 줄까 의아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건네받았다.    “누군데요?”  “차마루 씨요.”    연우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여보세요?”  - 왜 아직도 안 오는 겁니까!    마루가 다짜고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여운도 소리쳤다.    - 당장 와요. 좋은 말 할 때 당장 오라고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민 듯, 아니 미친개한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루가 휴대전화가 터져 나가도록 소리를 질러 댔다.    “좋은 말 할 때? 이게 좋은 말이에요? 악다구니 쓰는 거지? 안 가요! 절대 안 가요! 난 이연우 순경님 집에서 지낼 거예요!”  - 내 장화 갖고 오라고 했잖아요!  “이놈의 장화, 파출소에 맡겨 놓을 거니까 알아서 찾아가요!”    여운은 마루가 뭐라고 또 소리를 지르는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진짜 무식하고 예의도 없고…….”    진심 육성으로 욕을 토해 내고 싶었지만 차마 연우 앞에서 쌍욕의 향연을 벌일 수는 없기에 여운은 혀끝에 매달려 있던 욕을 꿀꺽 삼켰다.    “진짜 정 떨어져.”    여운은 연우 때문에 한창 좋았던 기분이 차마루로 인해 순식간에 팍 상해 버리자 화가 나서 씩씩거렸다.    “차마루 씨는 정말…… 같은 남자로서 할 말이 없게 만드는 사람입니더.”    연우가 같은 남자라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연우 씨. 괜히 나 때문에 입맛 달아났죠?”  “여운 씨 때문이 아니지요. 명백하게 차마루 씨 때문이지요. 다 들렸어요.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가.”  “기분 나빠 죽겠어요.”    여운이 속상하다는 듯 입술을 실룩거리자 연우가 요리조리 실룩거리는 여운의 입술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도 불쾌해요. 하지만 마음 풀어요. 차마루 씨 앞으론 안 만나면 되니까.”    연우의 말에 여운이 억지로 웃었다.    “정말 너무너무 기분 나쁘지만…… 앞으로는 안 만나면 되니까 맛있다고 소문난 국밥 먹을래요. 연우 씨랑 맛있게.”  “그래요. 같이 맛있게 먹어요.”    연우가 해맑게 웃었고, 여운은 해맑은 연우의 웃음을 보며 같이 웃었다.  맛있는 국밥을 정말 맛있게 먹고 시장을 나서는데 연우가 여운을 붙잡았다.    “내 집에서 잘 거지요?”  “네?”  “아까 차마루 씨한테 내 집에서 잘 거라고 했잖아요.”  “그게…… 아깐 너무 화가 나서 그렇게 말했는데, 연우 씨 집에서 자는 건 잘못하는 것 같아요. 초면이잖아요. 잘 알지도 못하고.”    여운이 난처한 얼굴로 거절의 뜻을 전하자 연우의 속이 타기 시작했다.    “말했잖아요, 내는 민중의 지팡이라고. 절대로 잘못하는 거 아입니다. 그라고 잘 알지도 몬하는 건 아니지요. 같이 밥도 먹었는데.”  “같이 밥을 먹긴 했지만 그렇다고 잘 아는 건 아니죠. 그리고 민중의 지팡이를 너무 우습게 쓰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 좋아요.”    여운이 다시 한 번 거절의 뜻을 내비쳤지만 연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시골에 오자마자 험한 일을 당해서 몸과 마음이 너무나 괴로운 여운 씨한테 아주 작은 도움을 주는 긴데 우습다니요. 절대로 아입니더.”  “연우 씨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너무 감사한데……, 연우 씨한테 폐 끼치기 싫고, 틀림없이 이상한 소문이 날 것 같고…….”  “내 믿지요?”    연우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수컷의 듬직함을 드러내며 물었다.    “믿, 믿다뇨? 뭘요?”    그러게, 믿다니. 뭘? 언제 봤다고?    “내가 그 어떤 소문에도 여운 씨를 지켜 줄 거라는 거.”    연우가 필요 이상으로 진지를 떨며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그건…….”    ‘왜 이렇게 오버하실까.’    “내가 지키 줄 테니까 내만 믿으이소. 내만 믿고 따라오마 됩니더.”    “하지만…….”    여운이 이건 믿고 안 믿고 차원의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연우가 여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여운 씨는 내만 믿으면 됩니더.”    연우가 결의에 찬 얼굴로 말했다.  여운은 어떻게든 연우의 집으로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폐를 끼치는 게 싫다, 민중의 지팡이를 독점으로 쓰는 것도 싫다, 어쨌거나 아직은 많이 낯선데 낯선 사람의 집에서 자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짓이다 등등 별소리를 다 해 가며 피해 보려 했지만 결론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가 돼 버렸다. 결국 연우의 집으로 가게 됐다는 뜻이다.  연우는 시장을 한 바퀴 돌며 여운이 먹을 간식거리까지 챙겼다.  과일, 뻥튀기, 세면도구까지 깔맞춤한 후에 끝까지 망설이는 여운을 거의 끌다시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혼자 사는 남자 순경 이연우의 집은 깔끔함 그 자체였다.  혼자 사는 여자보다 혼자 사는 남자의 집이 의외로 훨씬 더 깔끔할 수 있다는 속설은 사실인 것 같았다.  정리 정돈에는 영 젬병인 여운이었다. 핑계를 대자면 하루하루 먹고살기 너무 바빠 치울 시간도 없었다. 또 치우나 안 치우나 크게 표가 나지 않는 콧구멍만 한 집이어서 타의 반, 자의 반 청소와는 거리가 멀었었다. 그런 여운에 비해 연우의 집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고 깨끗했다.    “부담스럽거나 불편해하지 말고 편하게 계시소.”  “집이 굉장히 깔끔하네요.”  “내가 은근히 정리가 취미라서…….”    꽃미남 외모만큼 취미도 참 정갈하고 꽃처럼 예뻤다.    “파출소하고 5분 거리니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면 됩니더.”    연우가 거실장 텔레비전 옆에 있는 전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화장실은 여깁니더.”    연우가 화장실 문을 열어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여서 자면 됩니다.”    연우가 방문을 열며 말했고 여운은 조심스럽게 방문 앞에서 방을 들여다봤다.  방 또한 깨끗하고 깔끔했다.  장롱과 침대 서랍장 끝.  다른 가구가 더 있을 필요도 없고, 있을 자리도 없고 딱 좋았다.    “여긴 연우 씨 침실 아니에요?”  “맞아요.”  “연우 씨 침실에서 자는 건 너무 미안하니까…… 거실에서 잘게요.”    여운이 돌아서려고 하는데 연우가 여운을 붙잡았다.    “그럴 수는 없지요. 와 방을 놔뚜고 거실에서 잡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거실에서 자는 건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요. 여기서 자요.”  “하지만…….”  “괜찮다니까요.”    연우가 여운을 억지로 방으로 밀어 넣었다.    “침대 바꾼 지 얼마 안 돼가 편할 깁니다. 요번에 쪼매 비싼 걸로 바깠거든요.”    연우가 깨알자랑을 했고 여운은 그런 연우가 은근히 귀엽다고 생각했다.    “너무 미안해서요…….”  “미안해할 필요 없다니까요. 구박하는 차마루 씨 집으로 간다고 해서 마음이 억수로 불편했는데 여운 씨가 내 집에 와 줘서 진짜 안심입니더. 와 줘서 고마워요.”  “나야말로 재워 줘서 너무 감사하죠.”  “아무 걱정 하지 말고 마음 푹 놓고 지내시소. 언제까지든 여운 씨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됩니더. 그냥 여기서 계속 살아도 됩니더.”    ‘어머머, 계속 살라고?’    “어머, 살다니요. 그럴 순 없죠. 그러다 연우 씨 장가 못 가면 어쩌려구요.”  “못 가면 마…… 누군가가 책임지겠지요.”    ‘누군가? 나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장가 못 가면 안 되죠, 이렇게 멋진 분이.”    여운이 교태 아닌 교태를 떨자 연우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자꾸 멋있다 하니까 부끄럽네요.”  “진짜 멋져서 멋지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여기 오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연우 씨를 계속 파출소 숙직실에서 지내게 할 수는 없어요. 도둑 잡으면 서울로 돌아가야죠. 그러니까 도둑을 빨리 잡아 주세요.”  “여운 씨 서울 보내기 싫어서 도둑을 천천히 잡아야겠는데요?”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인데…….”    주거니 받거니 또다시 꽁냥질이 시작되려는데 여운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휘청거렸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발을 움켜잡고 휘청거리는 여운을 붙잡으려던 연우가 그만 중심을 잃었고, 그 바람에 두 사람은 껴안은 상태에서 침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 아파…….”    혀라도 깨문 듯 낯을 찡그린 채 발을 잡고 있던 여운과 여운을 껴안은 채 침대에 쓰러진 연우는 잠깐 동안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라며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섰다.    “미안해요……. 여운 씨가 비명을 질러서 나도 모르게…….”  “내가 미안해요. 뭘 밟았는데 너무 아파서…….”    여운이 발을 들어 발바닥을 들여다보자 발바닥에 소주병 뚜껑이 콱 찍혀서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런!”    연우가 안절부절 어떨 줄 몰라 하며 여운의 발바닥에 달라붙어 있는 소주병 뚜껑을 쳐다봤다.  여운이 마치 순간접착제로 붙여 놓은 듯 발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소주병 뚜껑을 떼어 내는데 침대 다리 옆에 다소곳하게 놓여 있는 빈 소주병이 보였다.    “소주병 뚜껑이네요. 혼술 하시나 봐요. 요즘 혼술이 트렌드라던데.”  “이게 와 여기에……. 가끔 잠이 안 올 때 마시는데…… 치우는 걸 깜빡했네요. 발 괜찮아요? 다친 거 아니에요? 좀 보입시더.”  “괜찮아요.”    완벽한 연우에게도 허술한 면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실망하기보다는 반가웠다. 허술함투성이인 여운에게 너무 완벽한 연우보다는 덜 완벽한 연우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발 좀 보입시더. 다쳤으면 병원 가게요.”  “병원은 무슨……. 괜찮아요.”  “내가 봐야겠어요.”  “괜찮다니까요.”    여운이 괜찮다고 하는데도 연우는 부득부득 바닥에 무릎까지 꿇고 앉더니 여운의 오른쪽 발을 치켜들었다.    “괜찮아요. 정말 괜찮아요…….”    연우가 한쪽 발을 들고 있는 통에 여운이 중심이 안 잡혀 흔들거리며 말하는데 연우가 발을 조금 더 높게 치켜들었다. 그런데 너무 강하게 치켜드는 바람에 흔들거리던 여운이 침대에 발랑 드러누워 버렸다.    “어머머…….”  “앗! 미안해요, 여운 씨!”    연우가 여운의 발을 움켜잡은 채 미안해하고 여운이 괜찮다고 말하며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어디선가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야! 너 여기서 뭐 하는 짓이야!”    지축을 울리는 고함 소리에 여운과 연우가 벼락이 떨어진 줄 알고 깜짝 놀라 쳐다보자 놀랍게도 방문 앞에 격한 분노로 눈알이 튀어나올 듯한 형택이 서 있었다.  앞서 말했던 바로 고형택 말이다. 여운과 25년 지기 불알친구나 마찬가지라는 그 녀석. 다섯 살 때 주인집 친구로 만나 같은 병설 유치원을 다니고 같은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동창. 그뿐인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무려 12년 동안 같은 학교를 다닌 것으로도 모자라 심지어 12년 동안 같은 반. 병설 유치원 새싹반까지 치면 무려 15년 같은 반이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같은 반일 땐 그럴 수도 있겠다 했었다. 그런데 중학교까지 3년 내리 같은 반이 되자 살짝 지겨우면서도 한편 희한하다 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3년까지도 같은 반이 되자 희한함을 지나쳐 괴기스럽게까지 느껴졌던 친구. 그렇게 붙어 다니다 보니 이성으로서 정이 들기보단 여자 남자 성별마저 무색해져 거의 동성으로까지 느껴지는 친구 놈. 그 친구 놈이 눈알이 툭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 눈을 치켜뜨고 노려보고 있었다. 형택뿐만 아니라 몹시 찜찜한 표정의 마루와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의 파출소장님도 있었다.    “형택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며칠 만에 바람을 피울 수가 있어? 며칠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바람을 피우냐고!”    형택이 반은 미친놈처럼 오지게 고함을 질렀다.  형택의 고함에 여운을 비롯해 연우와 파출소장은 어이가 없다 못해 뒷목 잡을 표정으로 쳐다봤으며 오직 마루만이 시큰둥한 얼굴로 형택을 쳐다봤다.    “내가 너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어떻게 며칠 만에 바람을 피울 수가 있냐꼬요?”    여운과 연우가 순차적으로 물었다.    “그래!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며칠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바람을 피우냐고! 당신, 이 여자하고 무슨 짓 한 거야!”    형택이 이유 불문, 민중의 지팡이 연우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거 노소! 뭐 하는 짓입니까?”    연우가 형택의 손을 뿌리쳤지만 형택은 아귀처럼 달라붙어 놓아주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냐고? 당신이 경찰이면 다야? 경찰이 할 짓이 없어서 간통을 해!”    형택이 막무가내로 큰소리를 쳤다.    “뭐, 뭐…… 간통? 미쳤어!”    여운이 달려들어 연우의 멱살을 잡고 있는 형택의 손을 떼어 냈다.    “너 지금 누구한테 행패야? 미쳤어? 간통? 돌았어!”  “내가 행패 안 부리게 생겼어?”  “그러니까 네가 왜 행패를 부리냐고! 네가 뭔데 연우 씨한테 행패를 부리냐고!”  “네가 바람났으니까 행패를 부리지!”    형택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너 돌았다. 너 돌았어. 너 눈 뜨고 자고 있니? 꿈꿔? 약발 떨어졌어? 바람이라니? 어디서 자다가 남의 다리 꼬집는 헛소리야?”  “내가 무슨 헛소리를 했다는 거야?”  “보소, 보소!”    보다 못한 파출소장이 나섰다.    “아, 진짜 시끄러바 죽겠네. 보소. 두 사람 관계가 어떻게 되는교? 부부 맞는교?”    파출소장이 짜증 난 얼굴로 물었다.    “이분이 저분의 남편이랍니다.”    마루가 형택과 여운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설명하는 순간 여운과 연우, 그리고 파출소장이 동시에 경악했다.    “야, 이 순경! 니 지금 남편 있는 여자를…… 유부녀를 꼬시가 짜빠뜨릴라 켔는 기가? 정신 나간 놈 아이가!”    파출소장이 얼빠진 얼굴로 서 있는 연우를 향해 소리쳤다.    “보소! 와 유부녀가 새파란 총각한테 꼬랑지를 살랑거리가 신세를 망칠라 카는교! 여자가 어디서 몬뗀 것만 배워 갖고 부끄러븐지도 모르고 바람이나 피우고 댕기고 그래가 되겠소! 바람을 피울라면 곱게 피우든가 어디서 총각한테 들러붙어 갖고 이기 할 짓이오!”    파출소장이 일장연설, 아니 일장훈계를 하며 여운에게 소리쳤다.    “아니, 그게 아니구요……. 절대 그런 거 아니구요. 야! 고형택! 네가 왜 내 남편이야? 언제부터 내 남편이야?”    여운이 형택에게 소리쳤다.    “언제부터는 언제부터야! 내가 네 보호자가 되던 그 순간부터 남편이지!”    형택이 큰소리 뻥뻥 쳤다.    “내 보호자? 언제부터 네가 내 보호잔데?”  “언젠지 몰라서 물어?”  “네가 내 남편이면 그동안 널 거쳐 갔던 수도 없이 많은 여자들은 다 첩이냐!”    여운이 소리치자 형택이 움찔했다가 다시 큰소리쳤다.    “지나간 얘긴 꺼낼 필요 없잖아! 사기당했다 하고 서울로 오기로 한 사람이 안 와서 내가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알아? 전화를 백 통은 넘게 했는데 죽자고 안 받고. 오늘 새벽부터는 전화기가 아예 꺼져 있고. 너 잘못된 줄 알고 미친 듯이 달려왔더니 순경 꼬셔서 침대에서 뭐 하는 거야?”    형택의 외침에 여운의 두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어젯밤에 이장 도깨비 때문에 놀라서 휴대전화 떨어뜨렸는데 도둑놈들이 이삿짐 훔쳐 가면서 내 휴대전화까지 훔쳐 갔는지 잃어버렸고! 순경님 꼬신 적 없고! 차마루 씨가 감자 몇 개 먹었다고 더럽게 구박하고! 차마루 씨네 개시키가 내 신발 다 물어뜯었고! 그래서 이연우 순경님 집에서 하룻밤 신세 지려고 왔을 뿐이고! 소주병 뚜껑 밟아서 아파 죽겠다 하니까 이연우 순경님은 발 다쳤을까 봐 살펴보려고 했을 뿐이고!”    여운이 형택과 차마루를 죽일 듯 노려보며 소리치다가 파출소장 앞으로 갔다.    “난 고형택하고 결혼한 적도 없고요! 그래서 저 자식은 내 남편이 아니고요! 유부녀가 새파란 총각 순경님한테 꼬랑지 살랑거리면서 신세 망치려고 한 적 없고요! 이 순경님이 날 자빠뜨리려고 한 적도 없어요!”    여운이 대가리를 들이밀며 바락바락 소리치자 파출소장이 깜짝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너!”    여운이 잡아먹을 듯한 얼굴로 형택에게 다가섰다.    “당장 연우 씨한테 사과해.”  “연우 씨? 너 벌써 연우 씨라고 불러?”  “시끄럽고! 당장 사과하라고!”  “사과 못 해!”    형택이 당당하게 버텼다.    “왜 못 해?”  “결혼할 거니까 남편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러니까 사과 못 해. 안 해!”    형택이 상황 파악 못 하고 또다시 당당하게 버텼지만 얼마 버티지 못했다. 여운이 더는 못 참고 형택의 머리채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아! 아! 내 머리……. 놔! 머리 놓고 말하라고!”    형택이 쩔쩔매며 소리쳤지만 여운은 형택의 머리채를 더욱 꽉 움켜잡았다.    “누구 마음대로 결혼을 해? 이 세상에서 제일 팔자 세고, 지독하게 드세고, 아들까지 잡아먹을까 봐 다른 여잔 다 돼도 내가 며느리가 되는 건 절대 싫다던 네 엄마 때문에 다른 사람은 다 돼도 고형택 너하고는 절대 결혼 안 한다고 했어, 안 했어?”  “그, 그건…….”  “내가 아랍 족장의 열다섯 번째 부인이 될망정 너하고는 절대 결혼 안 할 거라고 했어, 안 했어!”  “아랍 족장 열다섯 번째 부인이 되느니 나하고 결혼하자고 했잖아.”  “싫다고! 넌 절대 싫다고!”    여운이 형택의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데 마루와 연우가 동시에 나섰다.    “결혼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남편입니까, 아닙니까?”    마루와 연우의 물음에 형택이 쭈뼛거리자 여운이 형택의 머리를 뜯을 듯 잡아당겼다.    “똑바로 대답해.”  “아, 아아아, 아파……. 결혼 안 했어요……. 남편 아니에요…….”    형택의 대답에 연우는 천만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마루는 뭔가 수상하다는 표정을, 파출소장은 아주 웃기고 앉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과해. 당장 연우 씨한테 사과해!”  “……실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형택이 사과를 하자 여운은 그제야 팽개치듯 형택의 머리채를 놓아주고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고, 시끄러바레이. 서울에서 귀신 따까리들이 내리왔는갑다. 귀도 시끄랍고, 속도 시끄랍고 정신이 하나도 없네.”    파출소장이 못마땅해 죽겠다는 듯 혀를 찼다.    “알았으니까 어쨌거나 서울 가자.”

분위기가 엉망진창이 돼 버리자 형택은 이 싸한 분위기에서 도망치기 위해 여운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끌고 나갔다.    “놔!”  “서울 가자고!”    형택이 여운을 억지로 끌고 나가는데 연우가 쫓아 나와 막아섰다.    “이삿짐 도난 사건 조사 중입니더. 며칠은 여기 계시기로 했습니더.”  “전 재산도 털렸는데 이삿짐 그까짓 걸 꼭 찾아야 해?”    형택이 여운에게 짜증스레 물었다.    “전 재산 털렸으니까 이삿짐이라도 찾아야지. 전부 새거란 말이야.”    여운이 버럭 소리쳤다.    “채 실장 그놈 먼저 찾아야지.”  “채 실장도 찾아야 하지만 지금은 여기 있잖아. 이삿짐부터 찾을 거야.”  “이삿짐이 아니라 이 순경 때문에 여기 있겠다는 거 아니야?”    형택이 눈을 부라렸다.    “내가 뭣 때문에 여기 있든 신경 꺼!”    여운의 대꾸에 형택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반발했다간 또 머리채를 쥐어 뜯길까 봐 참았다.    “며칠이나 있을 건데?”  “사흘.”  “사흘 만에 도둑이 잡힌대? 우리나라 경찰이 언제부터 그렇게 도둑을 잘 잡았냐?”    형택의 눈치 없는 소리에 파출소장과 연우가 때려잡을 듯 형택을 노려보자 형택이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벌써 다 팔아먹었을 거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더 재수 없을 게 있냐?”    형택의 칠칠치 못한 대꾸에 여운이 노려보자 형택이 독침에 찔린 듯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하여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집에서 자는 건 아니야. 근처에 여관 찾아보자.”  “여관 찾으면?”  “나하고 같이 자자.”    형택이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말했으나 연우의 얼굴에선 핏기가 가셨다.    “너하고 같이 자자고?”  “나하고 있는 게 젤 안전하잖아.”  “네가 젤 무섭거든?”    여운의 말에 형택이 콧방귀를 뀌었다.    “나도 무섭거든?”  “네가 왜 무서워?”  “네가 나한테 무슨 짓 할지 몰라서 무섭다.”  “뭐? 내가 널 덮치기라도 한다는 거야?”  “덮치는 게 왜 무섭냐? 대환영이지.”    형택의 대답에 연우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럼 뭐가 무서운데?”  “머리털 다 뽑아서 대머리 만들까 무섭고, 대머리 만든 다음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까 봐 무서워.”    형택의 대답에 여운이 또다시 머리채를 쥐어뜯을 기세로 노려보자 형택이 또 시선을 피했다.    “고형택 씨는 여관에서 주무시고 여운 씨는 내 집에서 자요.”    연우가 가장 명확하게 정리를 하자 형택이 경계하는 눈빛으로 연우를 쳐다봤다.    “두 분이 어떤 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결혼하지도 않았는데 결혼했다고 거짓말하고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막 쳐들어온 것으로 봐선 믿을 만한 분은 못 되는 것 같습니다.”    연우의 말에 형택이 어이없다는 듯 연우를 쳐다봤다.    “파출소장님이 문을 열어 주신 겁니다, 쳐들어간 게 아니라.”    형택의 말에 연우가 파출소장을 쳐다보자 파출소장이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얼굴로 연우를 쳐다봤다.    “우짜겠노. 니가 남의 마누라 업고 토낐다고 생 난리를 지기는데.”  “소장님, 제가 그럴 놈입니까? 섭섭합니다, 소장님.”    연우가 파출소장에게 섭섭함을 토로하는데 이 난리 통을 벗어나기 위해 형택이 여운을 잡아끌었다.    “됐고. 당장 서울 가자. 밤새 달려가서 채 실장 잡자.”  “채 실장 잡기 전에 도둑 잡아야지.”  “도둑은 경찰이 잡지 네가 잡냐?”  “채 실장도 경찰이 잡지 네가 잡니?”  “그거야…….”  “지금 당장 서울 가도 난 갈 곳도 없어.”  “우리 집에 있으면 될 것 아니야.”  “너희 집엔 절대 안 간다고!”    형택이 여운을 억지로 끌고 가는 것을 연우가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는데 파출소장이 그런 연우를 쳐다봤다.    “안 잡을 끼가?”  “…….”  “결혼 안 했는다는데? 안 잡을 끼가?”  “…….”    아무 말도 못 하고 연우가 한숨만 푹 내쉬자 파출소장이 혀를 찼다.    “우리 이 순경이 좋다 말았데이. 하여튼 서울 가시나는 상종을 말아야지……. 우리 이 순경 가슴만 벌렁거리게 만들어 놓고……. 문디 가시나…….”    아무도 붙잡지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는데 마루가 나섰다.    “내 집으로 갑시다!”    마루의 외침에 형택과 여운이 걸음을 멈추고 마루를 돌아보며 동시에 소리쳤다.    “거긴 안 가요!”    여운과 형택이 소리쳤지만 마루는 콧방귀를 뀌며 천천히 다가왔다.    “가는 게 좋을걸요?”  “하나도 안 좋거든요? 콧구멍만큼도 안 좋거든요? 이 순경님 집에 장화 있으니까 갖고 가세요.”  “군말 말고 따라오는 게 좋은 텐데…….”  “안 따라갈 거예요. 군말이 아니라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며 안 따라간다고요.”    빈정거리듯 말하는 마루에게 여운 역시 빈정거리며 대꾸했다.    “기여운 씨도 마찬가지고 고형택 씨의 무례함 때문에 절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안 재워 주려고 결심했지만!”  “무례함? 너 혹시 차마루 씨한테 무례한 짓 했니?”    여운이 형택에게 묻자 형택이 고개를 저었다.    “별짓 안 했는데…….”  “별짓 안 했다고요?”    마루가 형택을 노려봤다.    “형택이가 차마루 씨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요?”  “기획 부동산 채 실장하고 같은 편 아니냐, 둘이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니냐부터 시작해서 이삿짐 훔쳐 간 도둑놈 아니냐, 이삿짐 훔치면서 기여운도 훔친 것 아니냐, 기여운도 훔쳐서 섬에 팔아먹은 것 아니냐고 사기꾼에 도둑놈에 인신매매범으로 매도해 놓고 별짓 안 했다고요?”    마루의 닦달에 여운이 낯 뜨거워서 어쩔 줄 몰라 하며 형택을 노려봤다.    “너 정말 그랬어?”  “찾으러 왔는데 넌 없고…… 시골에 산다면서 서울말 쓰는…… 시골 촌놈 같지 않은 사람이 네가 자기 집에서 하룻밤 잤다고 하지……, 갑자기 눈이 확 돌아서…….”  “으이그……. 감자 몇 개 갖고도 좀생이처럼 난리 친 사람인데 사기꾼 도둑놈 인신매매…… 너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살겠다.”  “뭐? 좀생이요?”    마루가 버럭 따졌지만 여운은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무례한 사람들이니까 우린 그만 사라져 드릴게요.”  “그러세요. 메주가 휴대폰을 죄 물어뜯든지 말든지 안녕히 사라지십시오.”    마루가 양껏 비웃어 주고 가 버리는데 휴대폰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여운이 마루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차마루 씨!”  “기여운!”  “여운 씨!”    여운이 차마루에게 달려가자 형택과 연우는 여운을 붙잡기 위해 달려갔다.    “차마루 씨.”    여운이 허겁지겁 마루를 붙잡았다.    “내 휴대폰 찾았어요?”  “메주가 찾았더군요.”  “메주한테서 뺏었어요?”  “아뇨.”  “왜요? 메주가 내 신발처럼 휴대폰까지 물어뜯으면 어쩌려고요!”  “메주한테서 뺏으려고 하는데 고형택 씨가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사기꾼 도둑놈 인신매매범으로 몰아붙여서 열 받아서 안 뺏었습니다.”    마루의 말에 여운이 형택을 노려봤다.    “미안해요. 내가 형택이 대신 사과할게요. 하룻밤만 재워 주세요.”    여운이 즉시 사과하며 잠자리를 구걸했다.    “야! 넌 여자가 자존심도 없냐? 쪽팔리지도 않아?”    형택이 소리쳤다.    “여운 씨, 차마루 씨한테 그렇게 구박을 당하고 또 잠자리를 구걸하다니……. 그냥 내 집에서 자요.”    연우도 뜯어말렸다.    “나도 쪽팔려요. 하지만 자존심은 어제 감자 훔쳐 먹고 개무시당한 후에 이미 버렸어요. 욕해도 좋아요. 그 욕 먹을게요. 욕 먹더라도 난 아직 18개월이나 할부가 남아 있는 휴대폰 꼭 찾아야 해요.”    여운이 형택과 연우에게 말했다.    “고형택, 난 차마루 씨한테 비굴하게 빌붙을 거니까 넌 너 알아서 해. 서울 가든지, 여관방에 가든지, 너도 비굴하게 차마루 씨한테 빌붙든지.”    마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운이 잽싸게 마루를 따라갔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더니…….”    연우가 실연당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형택이 갑자기 굽실거리는 표정으로 연우를 쳐다봤다.    “저, 이 순경님, 나를 여운이라 생각하고 하룻밤 재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더.”    연우가 단칼에 거절하자 형택이 한숨을 내쉬었다.    “별수 없이 나도 비굴하게 차마루 씨한테 빌붙어야겠네요. 여운아! 같이 가자!”    형택이 여운을 향해 허겁지겁 달려갔다.    *    “고형택 씨는 안 됩니다.”    마루가 대문 앞에서 형택의 거부하자 여운과 형택의 표정이 난감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봤다.    “하룻밤만…….”  “안 됩니다.”    형택이 정말 비굴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어쩌지?”    형택이 여운에게 도움을 요청하듯 물었다.    “뭘 어떻게 해. 서울로 가든지, 여관을 잡든지 해.”    여운이 어깨로 가라는 듯 형택을 툭툭 밀치자 형택이 서운한 얼굴로 여운을 노려봤다.    “치사하게 그럴 거야? 어떻게 좀 해 봐.”    형택도 어깨로 툭툭 밀치며 도와 달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여운은 어깨로 맞받아치며 도움의 신호를 무시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집주인이 싫다는데.”  “기여운 씨만 들어오고 고형택 씨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마루가 냉정한 얼굴로 말하고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여운이 냉큼 따라 들어가는데 형택이 여운을 붙들었다.    “너만 들어가면 어떻게 해?”  “나만 들어오라잖아.”  “난 어쩌라고?”  “나도 모르지.”    여운이 형택의 손을 털어 내고 대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자 형택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대문을 쳐다봤다.    “와, 진짜 나쁜 년……. 와, 뭐 저런 게 다 있냐? 기여운 이 나쁜…….”    형택이 ‘년’ 자를 외치려던 그때 여운이 툭 튀어나오더니 형택의 멱살을 잡았다.    “너 지금 나한테 나쁜 년이라 했냐, 이 나쁜 놈아?”  “그래, 나쁜 년이라 했다. 그럼 혼자 살겠다고 이 밤중에 친구를 길바닥에 내팽개친 년이 좋은 년이냐?”  “죽고 싶어?”  “죽여라, 죽여!”  “그래, 죽여 줄게!”    여운이 형택의 멱살을 잡고 대문 안으로 끌고 들어간 후 발로 대문을 차서 닫아 버렸다.  여운이 형택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 메주가 이를 드러내고 맹렬하게 짖기 시작했다.    “계속 행패 부려. 빨리.”    여운이 낮게 속삭였다.    “왜!”    멍청한 형택이 알아듣지 못하고 반항을 했다.    “닥치고 행패 부리라고. 그래야 빌붙을 것 아니야, 이 밥통아!”    여운이 형택에게 눈짓을 하며 낮게 꾸짖자 형택이 그제야 알아들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에라이, 나쁜 년! 이 밤중에 친구를 버리는 사람도 아닌 년!”    형택이 눈치를 살피며 소리를 치자 여운이 숨통이 막히도록 형택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어째 욕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고형택.”    여운이 눈을 부라리자 형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심 절대 아니야. 에이, 치사한 년! 나쁜 년!”  “닥쳐라, 고형택!”  “빌붙으려면 행패 부리라며. 밤중에 친구를 버리는 사람도 아닌 년…… 아악!”    진심이 꽉 담긴 형택의 욕설을 더는 들어 줄 수 없을 만큼 화가 난 여운이 형택의 머리채를 거머잡았다.    “치사한 년? 사람도 아닌 년? 그래! 치사하고 나쁘고 사람도 아닌 년한테 죽도록 뜯겨 봐라!”  “아아아악! 내 머리털! 아악!”    여운이 형택의 머리채를 잡아 흔들고 형택이 비명을 내지르며 쩔쩔매는데 집 안에 있던 마루가 툇마루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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