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든이 왈 - 1.재공 가능 2. 만든이 지우지마세요!
프롤로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툭 하고 건들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듯 낡고 낡아 괴기스럽기까지 한 빈집, 아니 폐가였다. 여운은 폐가만큼이나 툭 하고 건들면 와장창 내려앉을 듯 넋 나간 얼굴로 괴기스럽기 짝이 없는 폐가 앞마당에 무릎께까지 웃자란 잡초들을 뭉개고 앉아 있었다. 폐가 한쪽에는 여운이 바리바리 짊어지고 온, 아니 트럭에 싣고 온 살림살이들이 을씨년스럽게 부려져 있었다. “사기라고?” 사기라는 단어가 뇌 밖으로 튀어나와 눈앞에서 뱅글뱅글 바람개비처럼 돌고 있었다. “기획 부동산에 낚였다고? 내가? 나 기여운이?” 허허! 헛웃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서른. 딱 30년의 삶을 살면서 산전수전은 기본. 옵션으로 공중전에 사막전까지 흡사 대단 무시한 특수부대원 같은 험난하고 피 말리는 하루하루를 살았다. 그래서 온갖 위험과 수없는 위기를 넘기고 또 넘겨 가며 몸과 마음과 근육과 혈관까지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여운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기획 부동산 후레자식들한테 낚여 전 재산 1억 1천1백만 원을 홀라당 다 날려 버렸다. 전 재산 홀라당 다 날린 기여운에게 남은 것이라곤 무장해제되고 기진맥진한 비련의 여인네 몰골밖에 없었다. “내 돈……. 내 집…….” 여운은 좀비처럼 스마트폰을 터치해 채 실장에게 스물아홉 번째 전화를 걸었다. - 지금 거신 전화번호는……. 없는 번호란다. 어제 저녁까지 멀쩡하게 통화를 했던 번호인데 열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없는 번호란다. 귀신이 곡하다 사레들릴 일이다. 여운은 서른 번째 채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없는 번호라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왜? 왜 없는 번호야? 내 돈 들고 튄 자식인데…… 왜 없는 번호냐고!” 여운이 스마트폰에 대고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쳤다. “내 돈……. 내 돈 찾아야 돼……. 그게 어떤 돈인데…….” 여운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형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형택. 다섯 살 때부터 지금까지 여운의 무려 25년 지기 친구. 이쯤 되면 흔한 말로 불알친구라 할 만하지만 성별이 다름과 여운의 신체 조건상 붙이기 힘든, 하지만 불알친구나 다름없는 친구. 형택이라면 틀림없이 이 어처구니없는 난관을 헤치고 나갈 답을 줄 것 같았다. 형택이라면 기필코 채 실장을 잡아 줄 것 같았다. - 여보세요? 여운아! 이사 잘했어? 스마트폰에서 쩌렁쩌렁 언제 들어도 활기 넘치는 형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형택은 이토록 활기가 넘치는데 여운은 금방이라도 꼴까닥 숨을 거둘 지경으로 기운이 없었다. “형택아, 큰일 났어.” 여운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 큰일? 무슨 큰일? 이사 못 했어? 너 배고프냐? 당 떨어졌어? 목소리가 왜 그래? “이사했어……. 배도 고파……. 당도 떨어지고…… 혈압은 뻗치고…….” - 이사했는데 무슨 큰일이라는 거야? “나…… 사기 맞았어.” 여운이 처참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뭐? 싸대기를 맞았다고? 누구한테? 누구한테 싸대기를 맞았다는 거야? 사기 맞았다는데 싸대기를 맞았다니? 이런 사오정이 있나! “사기 맞았다고! 싸대기가 아니라 사기!” - 사기 맞았다고? 보통은 사기당했다고 하지 않냐? “그래, 잘났다! 사기를 맞든 당하든, 어쨌든 내 돈 다 털렸다고!” 여운이 바락바락 소리쳤다. - 그게 무슨 소리야? 이사 가자마자 무슨 사기를 당해? “채 실장 말이야.” 여운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채 실장…… 그놈 사기꾼이었어. 사기꾼!” - 도대체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해! “채 실장이 우리한테 보여 준 집 있잖아. 내가 산 집. 그거 다른 사람 집이야. 예술가 집이래. 주인 있는 집이었어. 사기당한 거야. 기획 부동산한테 털린 거야.” - 뭐라고? 기획 부동산? 형택의 목소리가 심각해졌다. - 그럴 리 없어. 우리가 직접 집도 보고 등기부 등본도 봤잖아. “등기부 등본도 조작된 거고…… 계약할 때 나왔던 집주인도 전부 가짜야. 다 한패거리였어. 완전히 속은 거였어.” - 그럴 리 없어! 형택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그럴 리 없어야 하는데 사실이야…….” 여운이 징징거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 너 우냐? “울 것 같아.” 여운이 울상인 얼굴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말했다. “형택아……, 나 거지 됐어. 몽땅 다 털리고 진짜 거지 됐어……. 나 어떻게 해……. 내 돈 어떻게 해?” - 징징 짜지 마! 형택이 고함을 내질렀다. 안 울 수가 없는 상황에서 울지 말라고 성질을 내자 여운은 서러움에 욱하고 화가 났다. “야! 안 짜게 생겼어? 10년 동안 죽어라 번 돈 하루아침에 사기꾼한테 다 털렸는데 안 울게 생겼냐고! 울고불고 미쳐 날뛰게 생겼단 말이야!” 여운도 소리쳤다. - 나 지금 채 실장 사무실로 가고 있어. 내가 사무실로 가면서 채 실장한테 전화할게. “없는 번호래.” - 없는 번호? “그래, 없는 번호. 채 실장 번호가 없어졌대.” - 채 실장 번호 다른 거 또 있어. 내가 해 볼게. “다른 번호 또 있어?” - 너 지금 어디 있어? “내가 산 집 앞에.” - 남의 집이라며? “진짜 주소로 왔는데…… 이상한 집이야.” - 이상한 집이라니? “너무 낡아서 막 귀신 나올 것 같은 집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상한 집이야. 폐가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금방 무너질 것 같아…….” 여운이 무너질 것 같은 폐가를 바라보며 울먹거렸다. - 징징 짜지 좀 말라고! “안 짜게 생겼냐고!” - 그럼 계속 징징 짜고 있어! 형택이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야! 고형택!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어? 전화를 그냥 끊으면 어떻게 해!” 여운은 이미 끊어진 스마트폰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치다가 울음 섞인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엄마……, 나 사기당했어…….” 여운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아빠……, 내 돈…… 다 털렸어……. 개 털리듯 털렸어…….” 여운이 긴 한숨을 내쉬며 울먹거렸다. 진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동공을 적시며 눈물이 차올랐다. “오빠……, 나 거지 됐어……. 거지 똥구멍…….” 굵은 눈물방울을 매단 채 불쌍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여운은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낄낄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1억 천백만 원을 10년 동안 미친년처럼 벌어서 한 달 만에 털렸어? 아하하하하하!” 여운의 정신 나간 웃음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하루에 한 끼, 이틀에 한 끼, 못 먹을 땐 사흘이나 쫄쫄 굶으며 악착 떨어 번 돈을 한 달 만에 홀라당 다 털렸다고? 으하하하하하!” 여운은 잡초들을 뭉개며 아예 드러누워 배를 잡고 웃고 또 웃었다. 웃는데, 배를 잡고 웃고 있는데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똑똑한 척 폼은 우라지게 잡아 놓고 한 달 만에 전 재산을 다 날리다니……. 이런 멍텅구리……. 아하하하하……. 이런 모지란 년……. 나란 년이 그렇지……. 으하하하하하…….”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딱 미친년처럼 웃어 대던 여운은 순식간에 웃음을 딱 그치며 이를 갈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놈의 채 실장 시키야.” 여운은 독기 가득한 두 눈을 치켜뜨고 벌떡 일어났다. “내 돈 처먹고 배 터져 뒈지기 전에 기필코 내 손으로 먼저 죽일 거야!” 여운의 두 눈동자가 새빨간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채 실장 이 잡놈아! 내 손에 집히기만 해! 기필코 네 모가지를!” 여운이 기다란 잡초를 한 움큼 휘어잡고는 굵은 잡초 가지를 힘차게 꺾자 우지직 소리와 함께 잡초 가지가 동강 날 듯 휘어졌다. “채 실장……, 네가 감히 내 돈을 들고 튀었어? 감히 나를 등쳐 먹어? 이 개 잡놈의 ××! 햇빛 쨍쨍한 날 벼락 맞아 뒈질 놈! 이 개 아들놈! 소똥에 코 박고 죽을 놈…….” 여운이 마치 연극배우가 복수의 화신이 되어 독백하듯 온몸으로 몸부림치며 알고 있는 욕을 죄 끌어다 뿜어내고 있는데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형택이었다. “형택아.” - 진짜 없는 번호네. “네가 알고 있는 번호도 없는 번호야?” - 없는 번호야. 사무실까지 뛰어왔는데…… 사무실도 비었어. 텅텅. “사무실도 비었어? 아무도, 아무것도 없어?” - 없어. 아무도, 아무것도. 하, 미치겠네……. 잔금은 안 줬지? “어제 줬어.” - 잔금을 왜 어제 줘?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없다고 해서 어젯밤에 줬어.” - 야! 너 등신이야? 형택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 잔금은 주지 말았어야지 이사도 가기 전에 잔금을 왜 줘? 이 등신 팔푼이!” “그래! 나 등신이고 팔푼이다! 그래서 다 털렸다! 됐냐!” - 아 진짜 미치겠네……. “내가 미치지 네가 왜 미쳐!” - 네가 사기당했는데 내가 안 미치냐? 당장 서울 와! “서울 가서 뭐 하라고?” - 채 실장 잡아야 할 것 아니야! “잡아야지……. 잡아야 돼. 그런데…… 지금 못 가.” - 왜 못 와? “이 집이라도 지켜야지. 나한테 남은 거 이 집 하난데…….” -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폐가 지켜서 뭐 하게? “무너지면 그냥 콱 파묻혀 죽어 버릴 거야.” - 너 죽고 싶어? “그래! 죽고 싶다!” - 당장 와! “안 가! 내가 채 실장 놈 잡아다 이 폐가에 묻어 버리기 전엔 절대 안 가!” - 채 실장을 잡아다 거기 묻으려면 서울에 와야 할 것 아니야! 서울로 와라, 절대 못 간다로 형택과 입씨름하던 여운은 결국 서울로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전화를 끊었다. “전 재산 다 털리고 귀신 나올 것 같은 폐가 하나 건졌는데…… 무너질 것 같은 이 폐가까지 버리고 서울로 간다고?”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폐가를 쳐다보던 여운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끼며 또다시 덜렁 누워 버렸다. 하늘이 보였다. 파랗던 하늘이 설익은 홍시 색깔로 물들고 있었다. 여운은 누운 채 노을 진 하늘을 노려보듯 올려다봤다. “박복한 년……. 엄마도 하늘나라 가고, 아빠도 하늘나라 가고, 오빠도 하늘나라 가고…… 재산도 공중분해 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하늘에 엄마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하다가 사라졌다. 보일 듯 말 듯 하다가 사라진 엄마 얼굴 자리에 아빠 얼굴이 보였다. 푸근하게 웃는 아빠 얼굴. 그리고 아빠 얼굴 옆에 오빠 얼굴이 보였다.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짓는 오빠 얼굴. “아빠……, 나 어떻게 해?” 여운이 묻자 아빠가 더욱 근심 어린 표정으로 여운을 바라봤다. “오빠……, 나 어떻게 되는 거야?” 여운의 물음에 오빠는 여전히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진짜 나 보고 있어? 진짜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야?” 여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보고 있냐고! 내 얘기 듣고 있냐고!” 여운이 하늘에 있는 아빠와 오빠를 향해 소리치는데 불쑥 시커먼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등장했다. “예, 듣고 있습니다. 매우 시끄럽군요.” 시커먼 그림자 차마루가 대꾸했다.
1장 시커먼 그림자 때문에 아빠와 오빠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여운은 갑자기 분위기 망치며 등장한 시커먼 그림자 때문에 눈을 찡그리며 재빨리 눈물을 닦아 내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를 향해 돌아서던 여운은 시커먼 그림자 뒤로 눈부시게 드리워진 붉은 노을 때문에 눈이 부셔 찡그리고 말았다. 붉은 노을 때문인지 그림자는 더욱 시커멓게 느껴졌고, 시커먼 그림자 때문에 노을은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제기랄. 전 재산 다 털렸는데 노을이 아름답다니. 지금 아름다운 노을 감상할 때인가. 그나저나 난데없이 나타나 분위기 망친 재수 없는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누구십니까?” 그림자가 물었다. ‘그러는 너란 놈은 누군데?’라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댁은 누구신데요?” “집주인입니다.” “집주인이라구요?” 이건 또 무슨 개똥 같은 소리인지. “여기, 저 다 쓰러져서 무너질 것 같은 집의 주인이라구요? 금방이라도 귀신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데 이 집 주인이라구요?” 여운이 따지듯 퍼붓듯 소리쳐 물으며 그림자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움찔했다. 처음엔 붉은 노을 때문에 그냥 시커먼 그림자로만 보였는데 홍채가 역광에 익숙해지자 시커먼 그림자의 실체가 제대로 보였기 때문이다.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 그림자의 실체는 놀랍도록 미끈했다. 훤칠하게 큰 키, 장작 백 개는 거뜬하게 팰 듯한 튼실한 체구. 무엇보다 매우 바람직하게 잘생긴, 정말 잘생긴 남자였다. 이 괴기스러운 집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을 만큼 무척 잘빠진 남자. “여긴 창고고 난 저 집 주인입니다.” 미끈하게 잘빠지고 정말 잘생긴 남자 차마루가 오른쪽 담벼락 너머에 있는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어쩜 손가락까지도 저리 미끈할까. 그나저나! “여기가…… 창고라구요? 집이 아니고 창고라구요?” “예.” “언제부터요?” “아마도 처음부터.” “그러니까 여기가…… 심지어 집이 아니라 처음부터 창고였다구요?” “예.” 미치고 팔짝 뛰겠는 여운과는 달리 마루는 참으로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이 창고 주인은 누군데요?” “없습니다. 오래전에 버려진 창고라서요.” “버려진 창고……. 그럼 그 빌어먹을 채 실장 놈이 나한테 집도 아닌 버려진 창고를 1억 천백만 원에 팔아먹은 거예요? 내가 그 패 죽일 채 실장 놈한테 집도 아닌 창고를 1억 천백만 원에 샀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여운이 기가 막혀서 기절할 얼굴로 따지듯 말하자 마루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이장님이 멍청하게 사기당해서 버려진 창고를 엄청나게 비싸게 산 서울 사람이 나타났다고 하더니, 그 사람이 당신이군요?” 마루가 딱 돌아가시게 생긴 여운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말 얄밉게 지껄였다. 이런 채 실장하고 한데 묶어 때려죽이고 싶은 놈이 있나! “그래요. 쑥대머리 한 귀신이 툭 나올 것 같은 창고를 엄청나게 비싸게 산 멍청한 사람이 나예요.” 여운이 독이 바짝 오른 눈길로 마루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기획 부동산에 속아서 집도 아닌 이따위 다 쓰러져 가는 창고를 1억 천백만 원에 산 사람이 바로 나라구요! 사기당해서 전 재산 몽땅 털리고 거지 됐다구요! 꼬라지 똥 됐다구요! 그게 나라구요!” 여운은 마치 옆집 남자 차마루가 자신에게 사기 친 채 실장이라도 되는 양 코뿔소처럼 머리통으로 마루의 면상을 받아 버릴 듯 들이대며 소리를 질러 댔다. “자랑입니까?” 마루가 콧방귀를 휭 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런 싹수없는 남자 좀 보소. “자랑이겠어요?” 여운이 으드득 이를 갈며 되물었다. “하긴, 자랑거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나 약 올리는 거예요? 안 그래도 미치고 팔짝 뛰겠는데 미친년 돼서 널뛰기하는 거 보려고 작정했어요?” 여운이 푸드덕푸드덕 주체를 못하고 펄펄 뛰어 댔지만 마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루는 애먼 사람에게 날뛰어 대는 여운의 행태를 보며 그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다 보니 정신이 획 나가 버린 광녀가 됐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거지가 됐든 꼬락서니가 똥이 됐든 그건 앞에 있는 여자의 팔자인 것을. “알겠습니다.” 마루는 흥분한 여운과는 달리 매우 무관심하고 무미건조한 억양으로 말했다. “수고하십시오.” 마루는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인사를 남기더니 미련 없이 돌아서서 가 버렸다. “뭐 저런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다 있어? 내가 거지가 됐다는데……, 전 재산 다 털렸다는데……,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뭔 수고를 하라고? 당신! 거기 서! 내 손에 아작 날 줄 알아!” 여운이 기가 막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창고 앞마당을 둘러친 썩은 돌 담벼락 밖으로 쫓아나갔는데, 멀리 가 버린 줄 알았던 마루가 불쑥 나타나 험악한 표정으로 여운을 노려봤다. 갑자기 마루가 나타나자 여운은 움찔 걸음을 멈추고 멍하게 마루를 쳐다봤다. “나보고 한 얘깁니까?” 마루가 미간을 구긴 채 위협적인 얼굴로 물었다. “무슨…… 얘기요?” 여운이 감쪽같이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 “아작 날 줄 알라면서요. 나한테 한 얘깁니까?” “아마도…… 아닐걸요?” 마루의 기세에 한풀 꺾인 여운이 어물어물 한발 물러섰다. “확실히 아닙니까?” “확실히…… 아닐걸요?” 여운이 고개까지 저으며 부인하자 마루가 수상하다는 듯 날 선 눈길로 노려봤다. “노을이 참…… 예쁘네요……. 시골이라 그런가…….” 여운은 마루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뜬금없이 노을 타령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저녁 맛있게 드시구요.” 여운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한 후 재빨리 몸을 돌려 썩은 돌 담벼락 안쪽으로 들어가는데 여운의 뒤통수에 또다시 밉살스러운 인사말이 날아들었다.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저놈의 빌어먹을 알겠습니다, 빌어먹을 수고 같으니라고!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대체 무엇을 알겠고 무슨 수고를 하라는 말일까. “너란 남자는 정말 눈치가 개똥만큼도 없는 남자야!” 한풀 꺾였던 분노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다 못해 온몸에서 에네르기파가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여운은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하면 머리채를 휘어잡든, 목을 조르든, 누르기를 하든, 꺾기를 하든, 깔고 앉아 면상을 두들기든, 네가 죽든 내가 죽든 물불 안 가리고 아작을 낼 기세였다. 그 정도로 눈에 뵈는 게 없는 여운에게 기껏 한다는 소리가,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뭘 안다는 건데? 당신이 뭘 안다는 거냐고! 당신이 내 마음을 알아? 개털 된 내 심정을 아냐고! 알거지 된 내 꼬라지를 아냐고! 무슨 수고를 하라는 거야? 발바닥에 땀나도록 사기 친 놈 잡으러 다녀야 하니까 수고하라는 거야? 누구 놀리는 거야!” 온몸으로 분노를 뿜어내며 소리를 질러 대던 여운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았다. 혹시나 또다시 옆집 남자가 나타날까 조마조마해하며 살금살금 길가로 나가 보자 다행히 옆집 남자 마루는 이미 한참 전에 옆집으로 사라져 흔적도 없었다. “진정해……. 성질을 가라앉혀. 남자하고 일대일로 붙어 봤자 나만 깨져.” 기세 좋게 소리를 질러 대던 여운은 금세 기운이 빠져 씩씩 거친 숨을 내쉬며 또다시 죄 없는 잡초들을 엉덩이로 깔아뭉개고 앉아 버렸다. “아, 미치겠다…….” 진짜 미칠 것 같았다. 미치고 또 미치고 또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확 미쳐 버렸으면 좋을 것 같았다. “엄마……, 나 어떻게 해? 아빠……, 창고래……. 오빠……, 내 돈…….” 엄마 아빠 오빠를 부르자 또다시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꼬로록. 꼬록꼬록……. 서러워서 눈물 날 것 같은데 갑자기 배도 고팠다. 이 와중에 배가 고프다니. 탈탈 다 털려서 앞으로 먹고살 일이 막막해 죽겠는데 배가 고프다니. 배가 고플 수가 있다니. “미친 거니? 어떻게 이런 상황에 배가 고플 수가 있어?” 여운은 괜스레 뱃가죽에 달라붙은 주린 위장을 탓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여운은 무릎을 모아 잡으며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떡해야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다. 꿈에 그리던 그림 같은 집을 천지신명이 돕고, 조상이 돕고, 부모 형제가 도와 싼값도 아닌 진짜 헐값에 산 줄 알았다. 부모 형제 없이, 기댈 곳 하나 없이 오롯이 혼자 남겨진 여운의 그 척박했던 세월을 보상해 주는 큰 선물인 줄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두말없이 계약하고 미련 없이 전 재산 탈탈 털어 주었었다. 그런데 믿어지지도 않고 어처구니없게도 여운이 자신의 집이라 믿은 그림 같은 집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다. 아주 유명한 예술가의 집이라나 뭐라나. “사기를 당했어……. 내가 사기를 당했다고……. 전 재산을 털렸다고…….” 같은 말을 만 번은 반복한 것 같았다. 만 번이 아니라 2만 번은 반복한 것 같았다. 2만 번을 반복하고 나자 아름답던 붉은 노을은 사라지고 밤의 여신이 온 세상에 어둑어둑 검은 먹물을 칠하고 있었다. 시골이라 가로등도 도시만큼 흔하지 않고 집들도 멀찌감치 뚝뚝 떨어져 있어 달리 빛을 얻을 만한 곳이 없어서인지 어둠이 일찍 찾아오는 듯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기괴한 집, 아니 창고와 무릎까지 웃자란 잡초들 위로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자 여운은 움찔 무섬증을 느꼈다. “서울 가야 하는데…….” 형택에게 서울로 가겠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저녁을 지나 밤이 돼 가고 있었다. “지금 출발하면 역까지 얼마나 걸릴까…….” 스마트폰을 켜서 시간을 확인하자 6시가 지나 있었다. 겨우 6시가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나 어둡다니. 스마트폰을 끄자 움찔 또다시 무서움이 느껴졌다. 흐린 스마트폰 불빛이 사라지자 아까보다 더 어둡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무서움이 느껴지자 난데없이 청각까지 예민해졌다. 여태 들리지 않던 시골스러운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와 정체불명의 뽀스락거리는 소리까지. 어둠침침한 시각적 배경에 풀벌레 소리와 정체불명의 효과음이 합체하는 순간 스산한 바람까지 휭휭 불어 대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자 오싹오싹 촉각마저 덩달아 민감해졌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귀신이 출몰하기 딱 좋은 전설의 고향이었다. “지금 서울에 가는 건 힘들고……. 모텔이나 펜션이 있으려나?” 있을 리가 없었다. “여인숙이나 민박이라도…….” 그 또한 허황된 희망이었다. 여운이 선택한 시골은 휴양지나 관광지가 아니라 논과 밭이 펼쳐진 깡촌을 겨우 면한 말 그대로 시골이었기 때문에 모텔, 펜션, 여인숙, 민박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어디 가서…… 하룻밤을…….” 여운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주변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스마트폰에 있는 보조 등을 켰다.
보조 등으로 발밑을 비추며 길가로 나온 여운은 이쪽과 저쪽 양 갈래로 길게 이어진 길을 바라봤다. 어쩜, 믿어지지 않을 만큼 어둡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나 사람이 없을 수가 있지?”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래로 하염없이 내려가다 보면 이장님 집과 마을 회관이 나올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혼자서 밤길을 하염없이 걸을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위로 올라가 볼 수도 없었다. 윗길에는 집이 몇 채가 있는지도 모르고, 역시나 혼자 밤길을 더듬어 올라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려갈까 올라갈까 반경 5미터 이내에서 왔다 갔다 서성이던 여운은 어쩔 수 없이 창고 앞으로 다시 돌아갔다. “무서워서…… 여기선 밤을 못 새울 것 같은데…….” 점점 더 크게 엄습해 오는 낯선 공간과 밤의 공포에 여운의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보조 등으로 여기저기 비춰 보며 잡초 사이를 오가던 여운은 돌로 쌓은 야트막한 담벼락 너머 옆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쳐다봤다. “아까 그 남자 집이지? 인정머리 없는 남자 집.” 입술을 비죽거리며 옆집을 노려보다가 아쉬운 마음에 살금살금 담벼락 근처로 다가갔다. 옆집 남자는 집 안에 있는지 마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룻밤 재워 달라면 재워 주려나?” 현재는 비벼 볼 유일한 상대가 옆집 남자였다. 하지만 남자의 인정머리 없는 태도를 더듬어 봤을 때 쉽게 재워 줄 것 같지 않았다. “저 남자한테는 씨도 안 먹힐지 모르지만, 어쩌면 다른 어른들이 허락할지도 몰라. 시골 인심은 도시랑 다르니까…….” 담벼락 너머로 마루의 집을 살피던 여운이 후회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성질내는 게 아닌데……. 성질내지 말고 통성명이라도 하는 건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엉뚱한 사람한테 화를 낸 것이 후회스러웠다. “어쩔 수 없어……. 내 코가 석 잔데 무조건 들이대야지.” 여운은 큰 결심을 한 듯 담벼락에 조금 더 다가갔다. 담벼락의 높이는 고작 골반께. 남자라면 손쉽게 훌쩍 뛰어넘기 좋은, 이렇게나 낮은 담벼락을 뭣하러 둘렀는지 의아할 정도로 낮았다. 어쨌든 낮은 담이었기에 여운이 넘어가기도 수월할 것 같았다. “담치기 몇 년 만이냐.” 여운이 담에 두 손을 짚고 한쪽 다리를 척 하고 걸치던 그때였다. “왈왈왈!” 난데없이 개가 귀청을 찢을 듯 짖어 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출몰한 개가 마을이 떠나가도록 짖어 대자 너무 놀란 나머지 여운은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다 그대로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왈왈왈왈!” 개가 목젖이 찢어져라 더욱 맹렬하게 짖어 대는데 개 짖는 소리에 섞여 옆집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다!” 마루가 근엄하게 꾸짖었지만 용맹한 개놈, 아니 개님은 여간해서 짖기를 멈추지 않았다. “으이그, 저 개시키!” 여운이 나자빠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어 아픈 엉덩이를 비비며 줄기차게 짖어 대는 개를 향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시끄럽다고 했지!” 마루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욱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여운은 창피한 꼴을 들키지 않기 위해 재빨리 널브러졌던 몸을 추슬러 얕은 담벼락 아래로 후닥닥 몸을 숨겼다. “시끄럽게 왜 짖는 거야? 쥐새끼는 짖지 말고 그냥 잡으라 했잖아!” 마루가 여전히 근엄한 목소리로 개를 나무랐다. “내가 쥐새끼란 말이야?” 여운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이는데 귀 밝은 개님이 또 왈왈 짖어 댔다. “짖지 말라고 했다!” 마루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꾸짖자 그제야 개님께서 낑낑 아양 떨어 대는 소리를 내며 짖기를 멈췄다. “개시키, 귀는 더럽게 밝네.” 여운이 개님을 향해 또다시 욕을 속삭였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입 속으로 삼킨 탓인지 귀 밟은 개님도 이번엔 짖지 않았다. “조용히 하고 이제 자. 또 짖으면 내일은 밥 안 줄 거야.” 혼내면서도 만져 주는지 개님이 온갖 해괴한, 아양 떠는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잠시 후 옆집 남자가 담 근처에서 멀어지는 듯한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숨을 고르던 여운은 마치 암전처럼 사방이 캄캄해진 것을 느끼며 팔로 몸을 감쌌다. 무서웠다. 진짜 귀신이 금방이라도 헝클어진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둥둥둥 나타날 것 같아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얼마나 무서운지 개님을 자극해 다시 짖어 대게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하지…….” 여운은 일단 한쪽에 부려 놓은 살림살이들에서 이불을 찾아 몸을 감싸기로 했다. 밤이 되자 기온이 낮보다 많이 떨어졌다. 또 어둠과 공포 때문인지 체감 온도는 더욱 낮게 느껴져 오싹함마저 느껴졌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보조 등에 의지해 살림살이를 쌓아 놓은 곳으로 간 여운은 보조 등의 반경이 너무 좁은 나머지 한참을 더듬거린 끝에 이불을 싸매 놓은 이불보를 찾아냈다. 꽁꽁 묶었던 매듭을 풀고 보들보들한 극세사 담요를 꺼내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 개시키 때문에 재워 달란 말도 못 하고……. 일단 담요 뒤집어쓰고 고민을 하자.” 꼬로록…… 꾸루루룩…… 뀌리리릭……. 으슬으슬 추운데 주린 배까지 난리였다. “지금 배고픈 게 문제가 아니거든? 이러다간 오밤중에 귀신한테 먹히게 생겼거든?” 여운이 개님이 짖을까 봐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담요를 어깨에 두르는데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 어디야? 서울로 출발했어? “아니. 시골이야.” - 서울로 오라고 했잖아. “못 갔어. 어쩌다보니 그냥 못 가게 됐어.” - 지금이라도 출발해. “못 가. 너무 캄캄해서 앞도 안 보이고 마을 입구까지 가려면 한 시간도 넘게 걸려. 여긴 사람도 없고, 버스도 없고, 가로등도 없어.” - 오늘 밤에 어디서 자려고? “모르겠어. 춥고 무섭고 배고파서…… 담요 꺼내 둘렀어.” - 지금 정확하게 어디 있는 거야? “정확하게…… 쓰러질 것 같은 캄캄한 창고 앞 캄캄한 마당에 무지막지하게 자란 잡초 사이에 숨어 있어.” - 왜 숨어 있어? “쪽팔려서.” - 사람 없다면서 뭐가 쪽팔려? “사기당해서 전 재산 털리고 나니까 무조건 쪽팔려. 쪽팔리고, 배고프고, 무서워…….” - 못 들어 주겠네. 형택이 속상한 마음을 툴툴거림으로 표현했다. - 근처에 다른 집도 없어? “집은 있는데…… 개시키가 짖어 대서 조용히 있어야 해.” 여운이 속삭이듯 말하는데 갑자기 희끄무레한 무엇인가가 오른쪽 옆으로 휘리릭 지나갔다. “으윽!” - 왜? 왜 그래? 형택이 소리쳐 묻는 동안 여운은 담요 자락을 꽉 여며 쥐며 재빨리 몸을 돌려 희끄무레한 것의 정체를 더듬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틀림없이 무엇인가가 휘리릭 지나갔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뭐였지?” - 뭔데? “갑자기 뭔가가 휙 지나갔어.” - 뭐가? “나도 모르겠어…….” 여운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칠흑처럼 검은 밤. 스산한 바람과 기묘한 풀벌레 소리. 그리고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희끄무레한 실루엣. 여운은 심장 박동이 격해지는 것을 느끼며 담요 자락을 더욱 꽉 여미고 보조 등으로 창고를 비롯해 여기저기 정신없이 비춰 보았다. 정말 감쪽같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사방이 전설의 고향이었다. “이상해……. 아무것도 없어.” - 아무것도 없는데 왜 소리 지르고 그래! “무서우니까 그러지!” 여운이 낮은 목소리로 소리친 후 살림살이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재빨리 담요를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귀신은 없어……. 귀신 따위는 없다고……. 절대 없어…….” 여운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자 형택이 “못 들어 주겠네” 하고 투덜거렸다. “귀신은 없어……. 귀신은 없다고……. 절대 귀신은 없어……. 정신 차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귀신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떨리는 목소리로 담요 속에 숨어 말도 안 되는 주문을 외우는데 어디선가 부스럭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 - 무슨 소리? “모르겠어……. 아니야. 아무 소리도 안 들려.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고.” - 기여운,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최면 거는 거야. 귀신은 없다…….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여운이 스마트폰을 붙잡고 최면을 걸듯 중얼거렸지만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귀신은 없어. 아무 소리도 안 들려……. 귀신은 없다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고…….” 정신없이 주문을 외우던 여운은 문득 정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 “거봐. 귀신은 없다고 했잖아……. 소리가 사라졌어…….” - 혼자 공포 영화 찍냐? “진짜 무섭단 말이야!” 여운이 쿵쾅쿵쾅 심장이 튀어나올 듯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슬그머니 담요 밖으로 얼굴을 빼내던 그때였다. 여운의 눈앞에서 커다랗고 시커먼 털로 뒤덮인 도깨비가 무시무시한 빛을 뿜어내며 여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지축을 뒤흔드는 비명 소리가 높게 높게 울렸다. 물론 여운의 비명 소리였다. 여운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도깨비를 온몸으로 밀치고 일어나 사력을 다해 담벼락을 향해 뛰었다. “으아아악! 살려 주세요!” 여운의 비명 소리에 개님이 미친 듯이 짖기 시작했지만 여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어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아가씨!”라고 외쳐 불렀지만, 그 역시 여운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살려 주세요! 살려 줘요!” 여운은 지축을 뒤흔들 만큼 어마어마한 목청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불도저처럼 담벼락으로 돌진해 뛰어넘었다. 개님이 물어 죽일 듯 짖어 댔지만 짖어 대다 목젖이 찢어지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뛰어넘다 중심을 잃은 여운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번개처럼 일어나 남의 집 마당을 질주했다. “살려 주세요! 살려 달라구요!” 악을 써 대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당을 질주한 여운은 전등이 매달려 있는, 툇마루 위로 허들 선수처럼 잽싸게 뛰어 올라갔다. 문이 벌컥 열렸다. 옆집 남자가 튀어나왔다. 여운은 구세주를 만난 듯 옆집 남자 마루의 널찍하고 탄탄한 가슴팍 안으로 냅다 뛰어들었다. 마루의 가슴에 와락 안겨든 여운은 그의 등에 팔을 둘러 옷자락을 꽉 움켜잡으며 끌어안았다. 그리고 마루는 자신의 가슴 가득 안겨든 여운을 자신도 모르게 감싸 안았다. 두근, 두두근, 두두근근, 두근근…… 심장이 이상했다. 여운이 자신의 가슴에 안겨 오던 그때, 여운이 가슴에 안겨 숨이 막히도록 끌어안던 그때 마루는 여운이 말 그대로 숨이 막히도록 너무 격하게 끌어안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여자가 품에 안겨들었기 때문인지 마치 부정맥을 앓는 듯 심장 박동이 제멋대로 불규칙해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가슴이…… 왜 이러지?’
“살, 살려 주세요! 귀, 귀신이 나타났어요!” 여운이 마루를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채 미친 듯이 소리쳤다.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귀신이 날……, 도깨비가…… 털 난 도깨비…… 잡아먹으려고 해요!” 여운이 울부짖듯이 소리쳤지만 마루는 개 짖는 소리가 너무 커서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라구요?” “귀신이……. 살려 주세요……. 잡아먹으려고……. 허옇게 불을 번쩍거리면서…….” “조용히 해!” 참다못한 마루가 버럭 고함을 치자 개님과 여운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메주! 너 짖지 마! 내일 밥 없다고 했어!” 마루가 개를 향해 소리쳤다. 개님의 이름은 메주였다. 세상에나 개 이름이 메주라니. 마루는 그제야 자신이 여운을 감싸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재빨리 여운을 안았던 팔을 풀고 여운을 밀어냈다. “이것 좀 놓으십시오!” 마루가 가슴팍을 억세게 부여잡고 머리통을 들이미는 여운의 어깨를 잡고 떼어 놓으려고 했지만 여운은 악착같이 달라붙으며 떨어지지 않았다. 두근, 두근두근, 두근근, 두두근……. 심장이 계속 이상했다. 이런 적이 없는데,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이상 증세라서 덜컥 겁이 날 지경이었다. “귀신이 나타났다구요!” “일단 좀 물러서라고요!” 갑작스레 부정맥 증상이 생긴 심장 때문에 예민해진 마루가 버럭 고함을 쳤다. “싫다구요! 무서워 죽겠다구요!” 여운이 좀체 떨어지지 않고 버티자 마루가 불편해 죽겠다는 얼굴로 낯을 찡그렸다. 하지만 여운은 마루의 가슴팍에 얼굴을 박고 버티느라 마루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틀림없이 귀신입니까?” “틀림없이 귀신이에요. 아니, 도깨비예요. 털보 도깨비.” 마루의 옷자락을 꼭 움켜잡은 여운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자기가 도깨비라고 했습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지만 여운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조차도 모를 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허연 게 빠스락거리며 휙 지나갔다가 갑자기 번쩍거리는 얼굴로 나를 노려봤어요.” 여운이 마루의 가슴팍을 꽉 부여잡은 채 고개를 들고 마루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루의 눈에 여운의 눈이 보였다. 송아지처럼 커다란 눈, 늪처럼 깊고 까만 눈동자. 마루는 심장의 이상 박동이 더욱 강하게 흐트러지는 것을 느끼며 심호흡을 했다. “도깨비가 빠스락거렸단 말입니까?” “그렇다니까요. 제발 살려 주세요…….” “못 살려 줍니다. 내가 무슨 수로 도깨비를 이깁니까?” 마루가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갑자기 비정상이 된 심장 박동 때문에 중심을 잃으려는 이성을 바로잡고 싶었기 때문이다. “뭐, 뭐라구요?” 여운이 기가 찬 얼굴로 마루를 노려봤다. 못 살려 줘? 무슨 수로 귀신을 이기냐고? 겁에 질려 있는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린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 거슬리기 짝이 없는 말인데 진짜 짜증 나게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일단은 겁에 질린 사람을 달래고 위로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하지 않을까?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이 사내는 어쩜 이리도 인심이 사나울까. “이상하군요.” “뭐가요?” “6개월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도깨비가 왜 하필 오늘, 지금 나타났을까요?” 마루가 따지듯 물었다. “그건…….” 귀신이 6개월 동안 잠잠하다가 오늘 갑자기 출몰한 이유를, 여운이라고 알 도리가 없었다. “말해 봐요. 왜 하필 오늘! 지금 그 귀신이라는 게 나타났느냔 말입니다.” “그거야……. 6개월 동안은…….” 슬슬 화가 치밀었다. 따질 걸 따져야지 이 상황에 그딴 코 같은 것을 따지고 있다니. “숨어서 귀신이랑 같이 씻나락 까먹느라 바빴던 모양이죠!” 여운이 발끈해서 소리치며 자신도 모르게 붙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는데 마루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여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지금 씻나락이라고 했습니까?” “네. 씻나락요.” “틀림없이 씻나락이라고 했습니까?” “그렇다구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다’ 할 때 그 씻나락요. 그게 왜요?” “당신……, 정체가 뭐야?” 마루가 여운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두 눈을 치켜뜨는데 어디선가 걸걸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보소, 차마루!” 여운과 마루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제삼자의 등장에 개님이 또 짖어 댔다. “시끄럽다, 이 강새이 새끼야!” 제삼자가 버럭 고함을 치자 놀랍게도 개님이 즉각 주둥이를 닥치고 꼬랑지를 내리더니 슬금슬금 개집 안으로 사라졌다. “보소! 차마루!” 개님을 단번에 제압한 제삼자가 마루를 외쳐 불렀다. “차마루가 뭐예요?” 여운이 묻는데 마루가 여운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툇마루 아래로 내려가며 여운도 끌어 내렸다. “이장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누군가 했더니 이장이었다. 낮에 여운에게 사기당했다는 걸 알려 주신 바로 그 이장님. 턱에 수북하게 털이 난 털보 이장님. 이장이 허리에 손을 짚고 꼭 뭐 마려운 사람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어왔다. “무슨 아가씨 힘이 그래 센교? 아이고야, 무시라. 소대가리도 아이고 우짤라고 사람을 대가리로 막 박아 제끼고 그라는교! 아이고, 허리야. 아이고, 우짜꼬, 내 허리……. 아가씨 때문에 내 허리가 마 다 뿌사진 거 같소.” 이장이 허리를 부여잡고 씩씩거리며 여운을 노려봤다. “도깨비가 나타나서요…….” 여운이 겁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는데 이장이 팽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도깨비는 무신 도깨비. 도깨비 똥 싸는 소리 하고 앉았네. 아가씨가 바락바락 괌을 질러 대서 도깨비가 나올라다 도망가삤겠구만.” “정말 나왔단 말이에요! 얼굴이 번쩍거리면서…… 시커멓게 털 난 도깨비가 이러고 나타났다구요!” 여운이 창고 앞에서 본 귀신의 표정을 흉내 내며 하소연하는데 이장이 또 콧방귀를 뀌었다. “시커멓게 털 난 도깨비? 얼굴이 번쩍거리? 이거 말인교?” 이장이 들고 있던 손전등을 턱 아래로 비추자 창고 앞에서 본 도깨비가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틀림없이 도깨비고 철석같이 귀신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장이었던 것이다. “이장님…… 이셨어요?” “보소! 지금 내보고 도깨비라 켔는교? 뭐? 시커멓게 털 난 도깨비? 내가 어딜 봐서 도깨빈교? 이리 멋진 도깨비 봤는교!” 멋지긴 개뿔. 여운이 자뻑 이장을 일그러진 얼굴로 쳐다봤다. “이사 오자마자 사기는 당했다 카제, 넋이 나가가 쌔바닥을 쭉 빼물고 팔짝팔짝 뛰 댕기지를 않나……. 서울로 가뿠는지 어데 처박힜는지 밥은 묵었는지 어데 잘 데는 정했는가 걱정이 되가 온 사람한테 소 새끼도 아이고 막 대가리로 들이받고 그래가 되겠는가 말이시더!” 이장님이 걸걸한 경상도 사투리로 마구 쏘아붙였다. “전 정말 귀신인 줄 알고……. 죄송해요……. 많이 다치셨어요?” 여운이 죄송한 마음에 이장 곁으로 다가가려는데 마루가 여운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았다. “놔요!” 여운이 마루의 손을 억지로 털어 내고 이장에게 다가가자 이장이 더 아픈 척하며 오만상을 다 찌푸렸다. “아이고아이고, 우짜고…… 내 허리……. 아이고, 궁디야…….” 이장은 허리와 엉덩이를 번갈아 어루만지며 엄살도 어지간히 과하게 떨어 댔다. “어디가 얼마나 아프신 거예요?” 여운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라 하자 이장이 슬그머니 화가 풀리는 낯으로 질질 다리를 끌고 툇마루로 다가가 걸터앉았다. “아이고아이고……, 허리……. 아이고, 궁디야…….” 이장이 툇마루에 걸터앉은 후에도 죽는소리를 해 대자 여운은 더욱 죄스러운 얼굴로 이장의 곁에 앉았다. “어떻게 해요……. 제가 좀 주물러 드릴까요?” 여운의 말에 깜짝 놀라 쳐다보던 이장의 얼굴에 슬그머니 엉큼한 미소가 깔렸다. “뭐…… 주물러 주기까지야……. 아이고, 허리가 마……. 와장창 뽀사짔는갑다……. 아이고, 내 궁디도…… 작살이 났는가…….” 이장이 자신의 허리와 엉덩이를 막 주물러 대며 엄살을 떨어 대자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마루와 여운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기 시작했다. “마…… 쪼매 주물러 줄라면 그라든가…….” 환갑을 코앞에 둔 듯한 이장이 분위기 싸해진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여운에게로 튼실하고 커다란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여가 억수로 아프네요…….” 이장이 엉덩이를 슬슬 문지르며 수작을 피우는데 보다 못한 마루가 나섰다. “이장님, 적당히 하십시오.” 마루가 정색을 하자 이장이 움찔하며 마루를 쳐다봤다. “내가 뭐 우쨌다고……. 내가 뭐라 켔다고 적당히 하라고…….” 이장이 코를 벌름거리며 여운에게 들이밀었던 엉덩이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마 됐니더. 뿌사진 내 허리하고 궁디는 내가 알아서 맞추든지 뿌사진 채로 살다 죽든지 하지 뭐……. 잘 데 없으마 우리 집에 데꼬 가까 했는데……. 풀떼기 깔고 자든가……, 여서 자든가…….” 툴툴거리며 일어나려던 이장은 아가씨의 손길을 포기하지 못하고 여운을 향해 엉큼하고 느끼한 눈길을 다시 한 번 던졌다. ‘이 아저씨가 정말! 좋았어. 제대로 한번 악 소리 나게 꺾어 주겠어!’ “잠깐만요, 이장님!” 여운이 이장을 붙잡았다. “이장님, 제가요, 경락 마사지를 할 줄 알거든요. 경락 아시죠?” “경락…… 알지요.” 이장이 침이 뚝 떨어질 듯 입을 벌리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엎드리세요. 이. 장. 님!” “엎드리? 엎드리라고요?” “네. 편하게 쭈욱 엎드리세요.” “편하게, 쭈욱? 그라마 한번 엎드리 보까요?” 이장이 툇마루에 엎드려 눕자 마루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다가서는데 여운이 손을 척 들어 마루를 막았다. “이장님, 내 손에 걸린 사람은…… 아니, 내가 주물러 준 사람은 아주 그냥 기운이 펄펄 나서 회춘을 하더라구요.” 여운이 웃는 얼굴로 이를 갈며 이장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회춘?” 여운이 아주 좋아 죽는 이장의 양손을 등 뒤에서 꽉 틀어잡자 이장은 천국에라도 간 듯 황홀한 표정으로 스르륵 눈까지 감았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마루가 눈 뜨고는 못 보겠는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타박하자 여운이 도끼눈을 뜨고 마루를 노려봤다. “경락 하잖아요!” 여운이 이 가는 소리로 대꾸한 후 이장의 양팔을 하늘을 향해 쭉 잡아당기는 동시에 오른쪽 무릎으로 이장의 허리를 야무지게 짓눌렀다. “아아악!” 몸이 거꾸로 휘어진 이장의 비명 소리가 시커먼 하늘을 향해 높게 울렸다.
이장이 마루와 여운을 향해 온갖 욕을 다 퍼부으며 마루의 집을 떠나고 나자 마루의 집에는 음산한 정적과 함께 폭발하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루는 불을 뿜을 듯한 눈길로 여운을 노려보고 있었고, 여운은 툇마루에 걸터앉은 채 죄인의 낯을 하고 있었다. “경락을 배웠다는 게 사실입니까?” “배우긴 배웠죠……, 어깨너머로……. 피부 체형 관리실에서 약 5개월 정도…… 일했거든요.” “어깨너머로 배운 경락 때문에 이장님 몸이 위아래로 분리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이장님이 나잇값 못하고 막 들이댔잖아요!” “당장 가서 사과하세요!” “못 해요! 안 해요!” “사과를 안 하겠다면 당장 내 집에서 나가요!” “사과를 안 할 거면 나가라구요? 이 밤중에?” “당장 나가요.” “진짜 나가라구요?” “진짜 당장 나가요!” 마루가 버럭 고함을 쳤고 여운은 오기가 뻗쳐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나가면 될 것 아니에요! 치사하게 집 있다고 생색은!” 치사하고 더러워서 여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루의 집을 나와 버렸다. 기세 좋게 큰소리 뻥뻥 치며 나왔는데 대문을 나서자마자 캄캄한 암흑에 파묻힌 전경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왜 이렇게 캄캄한 거야…….” 스마트폰 보조 등이라도 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머니를 뒤지던 여운은 또 한 번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재킷이며 바지 그 어디에도 스마트폰이 없었기 때문이다. 떨어뜨린 게 분명한데, 도깨비 이장 때문에 놀라서 도망치던 중에 떨어뜨린 것 같은데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떨어뜨린 기억도 없었다. “휴대전화도 없고…… 캄캄한데……. 어떻게 하지?” 여운이 마루의 집 대문 앞에서 쩔쩔매고 있는데 끼익하고 대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 돌아보자 마루가 대문을 닫고 있었다. “잠깐만요!” 여운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뛰어 들어갔는데 여운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마루가 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니까 여운의 몸이 딱 반만 안으로 들어갔는데 마루가 문을 콱 닫아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여운은 대문과 대문 사이에 정확하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반이 끼어 버렸다. 아주 쪽팔리는 모양새로. “으윽…….” 대문과 대문 사이에 끼면서 얼굴이 저절로 짓눌렸다. 뿐만 아니라 두꺼운 나무 대문이 얼굴과 뒤통수에 사정없이 부딪치며 조여 오는 통증으로 여운의 얼굴은 완전히 찌그러지고 말았다. 아프고 창피해서 여운이 어깨와 팔로 이마부터 코를 거쳐 턱까지 중앙선을 타고 짓누르는 대문을 밀어내려 했지만 대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마루가 커다란 몸과 완력으로 대문을 단단히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으윽……. 저기요……, 문 좀…… 열어 주실래요?” “나가요.” “잠깐만…….” 여운이 다시 한 번 대문을 밀어내려 했지만 어림없었다. “나가요!” “지금 내가 여기…… 머리가…….” “머리가 뭐요?” “대가리가 낑겼다구요! 코, 내 코……. 문을 열어 줘야 나가든 들어가든 할 것 아니에요!” 여운이 필사적으로 대문을 밀어내려 애쓰며 소리쳤다. 마루는 대문과 대문 사이에 여운을 끼워 죽이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굳센 완력으로 버티다가 한 걸음 물러났다. 마루가 한 걸음 물러나자 대문은 즉시 느슨해졌다. “아……. 아파…….” 여운이 코를 잡고 온몸을 비틀며 통증을 발산하는 동안 마루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엄살 그만 떨고 나가 주시죠.” 마루가 정중하지만 냉정하게 말했다. ‘나가라고? 이 인정머리 없는 놈아, 이 밤중에 어디로 가라는 거야!’ 여운은 너무 열 받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너무 열 받아서 마음 같아서는 차마루를 대문 사이에 끼워 놓고 아주 동강을 내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 아쉬운 자가 우물을 판다 하지 않았는가. 여운은 코를 꽉 틀어잡는 동시에 욱하고 올라오는 울화도 꾹 누르며 마루를 향해 돌아섰다. “저…… 내가…… 갈 데가 없거든요.” “그런데요?” “하룻밤만…… 재워 주시면 안 될까요?” 여운이 비굴하게 애원했다. “안 됩니다.” “하룻밤만 재워 주세요. 정말 갈 데가 없어요.” 여운이 한층 더 비굴하게, 마치 구원의 손길을 간절히 소원하는 듯 불쌍한 얼굴로 애걸복걸했다. “1억 천백만 원 주고 산 당신 창고로 가요.” “거긴……, 창고는 안 돼요……. 저기요, 나란 여자가 엄청 강해 보이겠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나란 여자가 전 재산을 다 털려서 가진 게 하나도 없지만 겁은 엄청 많거든요.” “듣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요!” 마루가 매정하게 거절하며 여운을 대문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지만 마루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한쪽에선 밀어내고, 한쪽에선 밀리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실랑이를 벌이다 대문 밖으로 몸의 반이 밀려 나온 여운이 허겁지겁 마루의 팔을 붙잡으며 소리쳤다. “창고에는 귀신들이 씻나락 까먹고 있단 말이에요!” 여운의 입에서 ‘씻나락’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마루의 표정이 돌변했다. 이장 때문에 깜빡 잊고 있었던 씻나락이라는 단어가 마루의 머릿속을 다시 환기시킨 것이다. “당신!” 마루가 여운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왜……, 왜 이래요?” 여운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돌변한 마루에게서 섬뜩함을 느끼며 쳐다보는데 마루가 여운을 대문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감금하듯 여운의 등 뒤로 두꺼운 나무 대문이 철커덩하고 굳게 닫혔다. 마루는 여운의 손목을 꽉 움켜잡은 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마당을 가로질렀다. “왜 이래요? 왜 사람을 질질 끌고 그래요?” 여운은 마루의 손에 질질 개 끌리듯 끌려 들어가며 외쳐 물었지만 마루는 아무런 대답 없이 여운을 집 안으로 끌고 갔다. 여운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온 마루는 문을 닫은 후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여운을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왜……, 왜 갑자기 사람을 막 끌고 들어온 거예요?” 여운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긴장한 얼굴로 물었지만 마루는 아무 대답 없이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이 남자…… 왜 이러지? 혹시……. 혹시…….’ 여운은 마루의 표정을 면밀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수상해도 너무 수상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팽팽한 긴장감으로 울룩불룩 마구 튀어나온 근육들, 한입에 후루룩 쩝쩝 집어삼킬 듯 게걸스럽게 보이는 입술까지. 남자였다. 그냥 남자가 아니라 욕망에 사로잡혀 헐떡이는 남자! ‘나를…… 노리는 거였어…….’ 마루에게서 풍겨 나오는 위험한 향기를 감지한 순간 여운의 온몸에 소름 꽃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무슨 수작이에요?” “재워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루가 이글이글 불타는 두 눈으로 여운을 훑어보며 되물었다. “안 재워 준다더니 왜 갑자기 재워 준다는 거예요?” “재워 달래서 재워 주겠다는 겁니다.” “절대 안 재워 줄 것처럼 나가라더니 왜 갑자기 재워 준다는 거냐구요.” “여기서 자기 싫습니까?” 마루가 여운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고, 여운은 마루가 다가온 만큼 한 걸음 물러섰다. “그건……. 그거야…….” “밖에서 자고 싶냐고요.” 마루가 여운에게 또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고, 여운은 또 한 걸음 물러섰다. “그건 아니지만…….” “당신이 내 집에서 자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나 혼자 사는 집에서 자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루가 여운에게 다시 한 걸음 다가서며 따졌고, 여운은 한 걸음 더 물러서다가 벽에 가로막혀 버리고 말았다. “혼자……, 혼자 사는 건 아니지 않나요?” “여기 나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마루가 또다시 한 걸음 다가서며 여운을 자신과 벽 사이에 가둬 버렸다. 마루와 여운 사이는 불과 5센티. 마루가 내쉬는 숨결이 여운의 콧잔등을 스쳤고, 여운의 숨결은 마루의 가슴팍을 뜨겁게 데우고 있었다. “여기…… 또 누가 있냐고.” “밖에…… 개시키……, 아니 메주도 있고…….” 여운은 심장이 벌렁벌렁 튀어나올 듯 격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미끈하게 잘생긴 남자의 욕망 가득한 거친 숨결이 콧잔등으로 사정없이 내리꽂혀서가 아니었다. 공포 때문이었다. 갑자기 욕망의 화신으로 돌변한 남자가 내뿜는 위험한 에너지에 자동적으로 발동한 공포. “당신은 내가 혼자 산다는 걸 알면서도 재워 달라고 한 거야. 이유가 뭐지? 뭘 원하는 거지?” “난 단지 무서워서…….” “무섭다고? 뭐가?” “뭐겠어요. 귀신이지.” “귀신이라…….” 마루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과연 그럴까?” “무슨 뜻이에요?” “귀신이 무서운 게 아니라 내 집에 들어오기 위한 연극 아니었어?” “연극?” “솔직하게 말해. 내 집에 들어오기 위해……, 내 옆에 오기 위한 연극 아니었냐고!” 마루가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내가…… 왜 그런 연극을 하겠어요? 내가 뭣 때문에 당신 옆에 오려고 쓸데없이 연극을 하겠냐구요.” “아니다?” “혹시…… 내가 그쪽을 꼬시려고 했다…… 뭐 그런 뜻이에요?” “어디 아니라고 말해 보시지.” 마루의 말에 여운이 어처구니없는 듯 실소를 흘렸다. “아, 진짜……. 자뻑남은 도시에나 있는 줄 알았더니 시골에도 있네……. 솔직히…… 그쪽이 좀 잘생기긴 했어요. 하지만! 그쪽 정도 얼굴은 서울에 아주 쫙 깔렸거든요? 시골에서는 먹어 줄지 몰라도 서울에서는 그냥 흔남이에요. 딱 흔남.” “흔남?” “흔한 남자. 겨우 딱 흔남인 얼굴에 가진 거라곤 시골 집 한 채와 밖에 있는 메주 개시키 하나밖에 없는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쪽을 꼬시겠어요. 내가 기획 부동산에 속아서 전 재산 다 털리긴 했지만 이래 봬도 나 서울 여자예요.” 여운이 이만하면 알아듣게 설명했다고 생각하며 마루를 올려다봤다. 엉뚱한 착각으로 김칫국을 시원하게 들이켠 것을 창피해할 것이라 기대하면서.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여운의 설명을 못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설명 한번 그럴싸하지만 뻥치지 말라는 것인지 알쏭달쏭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의기양양 여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좋아. 그렇다고 해 주지. 그런데 어쩌지?” “뭘 어째요?”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나는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거든?” 마루가 여운의 허리 근처로 손을 내려 만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등 뒤에서 문이 열렸고, 마루가 여운의 어깨를 가볍게 밀치자 여운은 자동적으로 열린 문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놓아줄 생각이 없다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날, 날 어쩌려는 거예요?” 여운이 와락 공포를 느끼며 두 팔로 가슴을 감쌌다. “어쩔 것 같아?” 마루가 욕망의 불씨가 활활 타오르는 눈길로 여운을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다가오지 말아요! 나한테 이러지 말라구요.” 여운이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오래 굶은 것 같은데……, 너무 오래 굶다 보니까 눈이 뒤집힌 것 같은데……, 제발 이성을 찾아요. 아무리 오래 굶었어도 이건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상도덕적으로도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에요!” 욕망에 사로잡힌 마루를 진정시키기 위해 여운이 아무 말이나 막 던져 댔지만 바로 코앞까지 마루가 다가오자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나란 여자가 꽤 섹시한 건 사실이지만……, 누가 봐도 매력이 철철 넘치지만……, 아무하고나 눈 맞아서 막 자는 그런 여자는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순결을 잃을 수는 없어요! 내가 30년 동안 얼마나 애지중지 사력을 다해 지켜 온 순결인데, 나란 여자 얼마나 눈이 높고 깐깐한데……. 당신은 아니에요. 수준 미달이라구요!” 애걸복걸 애원도 아닌 것이, 사정도 아닌 것이, 욕하는 것도 아닌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구 지껄여 대던 여운은 문득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 팔짱을 끼고 황당하다 못해 재수 없어 죽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마루가 보였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여운 하는 짓이 가관이라 터져 나오는 건 실소밖에 없었다. “당신 말대로 나란 남자도 눈 높고 나도 깐깐합니다. 내 눈엔 당신도 수준 미달이에요. 30년 동안 애지중지 사력을 다해 지켜 온 순결 앞으로 30년은 더 애지중지 사력을 다해 지킬 것 같으니까 잠이나 자요.” 마루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말한 후 미련 없이 방을 나가 버렸다.
마루가 나간 후 잠깐 동안 멍한 얼굴로 닫힌 방문을 바라보던 여운은 화끈화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손부채질을 시작했다. “뭐? 내가 수준 미달이라고? 허! 댁보다 내가 백배는 낫거든? 백배 나은데 왜 이렇게 창피하냐…….” 두 손으로 정신없이 손부채질을 하던 여운이 방문을 노려봤다. “뭐? 30년 동안 애지중지 사력을 다해 지켜 온 순결 앞으로 30년은 더 애지중지 사력을 다해 지킬 것 같다고? 환갑까지 날 원하는 남자가 없을 거라는 소리잖아. 나한테 욕한 거잖아! 시골 촌놈 주제에 감히 서울 여자를 떨이 취급 해!” 여운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벌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마당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 바깥도 살폈다. 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마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봐요. 집주인 씨! 차마루 씨!”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그새 어디로 간 거야? 내가 폭발해서 싸움 걸 줄 알고 도망갔나…….” 여운은 다시 한 번 기웃거리며 마루의 집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루도 없고 정말 별것 없었다. 시골 살림이 다 그렇겠지만, 더구나 남자 혼자 사는 집이니 더욱 그렇겠지만 단출해도 너무 단출했다. 거실 겸 부엌인 공간. 여운이 나온 방 맞은편에 두 개의 문이 있었고 부엌 싱크대 옆 끝자락에 또 다른 방문이 있었다. 여운이 나온 방과 맞은편 문 두 개 중 하나는 한지가 발라진 미닫이문이었고, 나머지 두 개의 문은 평범한 여닫이 문이었다. 아무래도 미닫이문이 달린 곳은 방이고 여닫이문이 달린 곳은 화장실이나 다른 용도의 공간인 것 같았다. 부엌 싱크대 옆 끝 쪽에 여닫이도 미닫이도 아닌 문은 창고가 아닐까 싶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남자 혼자 사는 시골집이라지만 21세기에 이렇게까지 없어도 너무 없다니. 시골은 물론이고 섬마을 집에도 무조건 있다는 흔한 텔레비전도 없고, 전화기도 보이지 않았다. 컴퓨터는 당연히 없었고. 가전제품은 눈을 씻고 봐도 없는데 가구마저도 별것 없었다. 어디서 주워 온 것 같은 아주 낡은 서랍장 두 개와 잡동사니들이 가득한 장식장처럼 보이는 찬장이 거실이라고 부를 만한 공간에 있을 뿐이었다. 부엌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20년은 족히 묵은 듯한 싱크대가 있었다. 싱크대 위 건조대에 몇 개의 그릇이 있었고. 이로써 끝이었다. 이걸 소탈하고 소박하다고 해야 할지, 없이 산다고 해야 할지.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하긴 좁은 공간에 짐이 많아 봤자 좋을 것도 없고,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살림살이가 가득한 것도 좀 우습긴 하다.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했다. 어쨌거나 집주인인 마루가 감쪽같이 숨어 버렸으니 싸움을 걸 수도 없고 별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려던 여운의 눈에 싱크대 한쪽 접시 위에 옹기종기 놓여 있는 찐 감자가 보였다. 꼬로로로록. 감자를 발견하자마자, 감자가 식량이라는 것을 뇌가 인지하자마자 하루 종일 굶주려 쪼그라진 위장이 피리를 불고 난리가 났다. “배가 고픈데…… 감자가 있고…….” 침이 꿀꺽 넘어갔다. “내 감자가 아니고……. 그런데 제발 먹어 달라고 감자가 나를 부르고…….” 어느새 여운은 슬금슬금 마치 감자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감자에게 다가가 있었다. 꿀꺽. 침이 한 바가지나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먹으면 안 되는 거고……. 이건 내 감자가 아닌 거고…….” 먹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내 감자가 아닌데 하면서도 여운은 감자의 유혹에 홀랑 넘어가 덥석 감자를 움켜잡고는 입이 찢어지도록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었던 감자 중에 지금 여운의 입 속에서 무지막지하게 씹히고 있는 감자가 제일 맛있었다. 여운은 입에 있는 감자를 삼키기도 전에 다른 손으로 또 하나의 감자를 움켜쥐었다. 목구멍 중간에 감자가 딱 걸린 듯 목이 멨지만 허기진 위장을 위해 감자 먹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남의 집 찐 감자를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소름이 쫙 끼치는 듯한 스산하고 싸늘한 기운. 전설의 고향의 그 음산한 기운. 주먹만 한 감자에 이를 박은 채 돌아서던 여운의 눈에 어이없는 듯 비웃는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마루의 얼굴이 보였다. “캑……. 캑캑……. 컥컥…….” 너무 놀란 나머지 식도로 내려가야 할 감자가 기도로 넘어갔고, 여운의 기도는 잘못 들어온 불청객 감자 조각을 쫓아내느라 격한 기침을 연발했다. “컥컥컥…… 캑캑캑…….” 천하장사는 물론이고 옥황상제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사레든 기침. 격렬한 기침 때문에 여운의 기도로 내려가던 감자 조각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뿐만 아니라 어금니 사이에서 잘게 뭉그러졌던 감자 조각들이 마치 팝콘 터지듯 투투투둑 파편이 되어 무더기로 터져 나왔다. “에이 씨! 에이, 드러!” 난데없이 씹힌 감자 폭탄을 맞은 마루가 토끼처럼 팔짝 뒷걸음치며 가슴에 튄 감자 파편들을 떨어내고 난리가 났다. “뭐 하는 짓입니까!” 마루가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지만 여운은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에이, 진짜!” “미안…… 미안해요…….” 가까스로 기침이 잦아든 여운이 미안하고 창피한 얼굴로 마루를 쳐다봤다. “종일 굶었더니 배가 고파서…….” 여운이 가련한 여인의 표정을 지었지만 마루에겐 전혀 통하지 않았다. “잠만 재워 달라더니 음식까지 훔쳐 먹는 겁니까?” 마루는 여운이 종일 굶어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든 말든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매우 꾸짖는 말투로 몰아붙였다. 고작 찐 감자였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훔쳐 먹은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여운은 절도에 무전취식 범이 된 죄로 찍소리도 못 했다. “아무것도 훔쳐 먹지 말고, 돌아다니지도 말고, 저 방에서 잠만 자고 내일 아침 일찍 나가 주십시오. 알겠습니까?” “네…….” 고개를 조아리고 방으로 가려던 여운이 곧바로 유턴해서 싱크대 앞으로 돌아왔다. “뭡니까?” “물 한 모금만…… 얻어 마실 수 있을까요?” 여운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부탁했다. 감자가 어찌나 파근파근한지 목이 멨다. 그뿐 아니라 식도 중간쯤에 감자 덩어리가 딱 걸려 물을 마셔 밀어내야 할 것 같았다. 여운의 낯부끄러운 구걸에 마루는 어떻게 하면 저토록 낯짝이 두꺼울 수 있는지 황당한 얼굴로 여운을 노려봤다. “물 달라는 말이 나옵니까?” “목이 메어서……. 여기 딱 걸려서…… 감자가 심하게 파근파근하더라고요.” 여운은 창피했지만 다시 한 번 낮은 자세로 임하며 사정하듯 말했다. “어떻게 하면 그 정도로 체면이 없어지는 겁니까? 체면 따위는 무시하고 본능적으로만 행동하며 살도록 타고난 겁니까, 아니면 최소한의 상식과 교양 교육을 받은 적 없는 겁니까?” 물 한 잔 청했을 뿐인데, 목젖이 들러붙도록 목이 말라서 한 모금의 물을 구걸했을 뿐인데! 마루의 인신공격, 인격 비하적 발언에 여운의 눈초리가 사납게 찢어지기 시작했다. “물 한 잔이 그렇게 아까워요?” “물 한 잔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뭐가 문제예요? 체면 차리고, 상식 찾고, 교양 찾으려다 차마루 씨 집에서 감자 먹다 목이 메어 죽은 여자 시체가 나오길 바라는 거예요?” 여운이 따지기 시작하자 마루는 예상치 못한 반격에 움찔 당황했다. “뭐라구요?” “체면 무시하고 본능적으로 행동하며 살도록 타고난 거냐고 물은 걸 보니 나란 사람은 당신과 똑같은 사람이 아니라 밖에 있는 메주와 동급으로 평가절하된 것 같네요. 차마루라는 사람의 인격도 메주와 다를 바 없네요. 고작 감자 몇 알과 물 한 모금으로 사람을 동물 취급 했으니까.” 여운이 오지게 몰아붙였다. “뭘 잘했다고…….” “말 안 끝났으니까 다 듣고 반박해요!” 여운이 중간에 끼어드는 마루의 말을 당당하게 잘라 버렸다. “물 한 모금 구걸하는 사람한테 감자 몇 알 훔쳐 먹었다고 고작 물 한 모금 주기 싫어서! 체면, 상식, 교양 운운하는 차마루 씨야말로 품위, 품격 따져 가며 도움을 줄지 말지 결정하라고 교육받았어요? 껍데기는 예의바르되 뼛속 깊이 무례함으로 중무장해서 사람을 등급별로 구분할 줄 아는 촉을 갈고닦아야 한다고 거만에 찌든 교육을 시킨 곳이 어디예요? 학교예요? 아니면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집안 내력이에요? 설마 그런 인정머리 없고 비인간적인 교육을 돈 주고 받은 건 아니겠죠?” 여운이 맹렬하게 따져 물었다. 마루는 적반하장 격 공격에 예측을 못한 상태에서 난데없이 따귀를 얻어맞은 것처럼 화가 났다. 한편으론 왠지 모를 부끄러움이 느껴져 활화산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여운을 물어뜯을 듯 노려봤다. “난 체면도 없고 본능적으로만 행동하는 사람이니까 물 한 모금도 대놓고 훔쳐 마실게요.” 여운은 당당하게 싱크대 선반에서 밥그릇을 꺼내 들고 수돗물을 가득 받아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갖고 있던 잔돈 5,500원 중 1,500원을 싱크대 위에 내려놓았다. “감자하고 물 값이에요. 식당에서도 후불이니까 차마루 씨도 후불로 받아요. 잘 먹었습니다.” 여운이 한껏 빈정거리고는 마루를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아니, 닫기 직전에 일부러 마루 들으라는 듯이 몇 마디의 빈정거림을 더 보탰다. “이놈의 나라는 학교에서 뭘 가르치는 거야? 수학 공식보다 더 중요한 게 인성 교육인데 남의 나라 언어보다 더 중요한 인성 교육을 개무시하니까 사람이 사람한테 사기를 치지 않나, 사람을 동물 취급 하질 않나…….” 여운은 마루가 더욱 사납게 노려보는 것을 알면서도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도대체 이놈의 나라는 무슨 생각으로 바른 생활, 슬기로운 생활을 초등학교 2학년까지만 가르치는 거야? 초등학교 3학년부터는 바르지도 말고 슬기롭지도 말라는 거야? 기본을 안 가르치니 애나 어른이나 이 모양 이 꼴이지. 이놈의 나라를 떠야지…….” 여운은 잔뜩 비꼬아 준 후 방문을 닫아 버렸다. 마루는 여운의 마지막 말에 정신이 번쩍 들다 못해 온몸이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이놈의 나라는……. 이놈의 나라를 떠야지…….’ “틀림없어.” 마루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후 방문을 태울 듯 노려보다가 집 안을 소등하고 조용히 지하 벙커로 내려갔다. 지하 벙커는 지상의 집과는 비교도, 매치도,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최첨단 기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법 널찍한 직사각형 벙커 전면에는 커다란 메인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메인 모니터를 기준으로 오른쪽 벽면에는 20인치 모니터 스무 개가 가로세로로 배치되어 있었고, 마을 입구를 시작으로 마을 곳곳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가 전송하는 화면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마루의 집 앞, 마당 곳곳, 집 안 거실도 마찬가지였다. 감시용 모니터 앞에 컴퓨터 한 대와 이름 모를 기계가 잔뜩 쌓여 있었다. 메인 모니터 앞쪽으로 길고 튼튼한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 두 대의 컴퓨터와 도청 장치 두 대, 전화,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첨단 기계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마루가 감시용 모니터 앞 컴퓨터를 조작하자 스무 개의 감시용 모니터 화면에 순차적으로 장면이 바뀌며 다른 장소가 전송됐다. 그중 한 개의 모니터에 여운이 있는 방 안 상황이 전송되기 시작했다. 마루는 모니터를 통해 전송되는 여운의 행동을 번쩍이는 눈으로 감시하기 시작했다. 화가 풀리지 않은 듯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방 안을 왔다 갔다 서성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끄럽게 떠드는 듯했다. 마루가 재빨리 헤드폰을 끼고 음량 전원을 켠 순간 여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졸렬한 자식! 개똥 같은 자식! 세상에서 제일 나쁜 자시이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