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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비
"연수야."
준호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울고 있는 연수의 머리를 쓸어주며 자신도 떨리는 목소리로 연수의 이름을 불렀다.
"나 진짜 죽일 놈이다. 맨날 너 아프게만 하고 근데. 연수야 형수는 말이야…. 너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 자꾸 미안해지게 이러지 마. 너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거 보는 게 나는 참 힘들다. 연수야. 나 말이야. 형 힘들게 하고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워있는 형수가 막 미워지는데…. 너까지 형수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면 나 진짜 형수 용서 못할 거 같은데. 나. 자꾸 형수한테 화가 나는데 어쩌지. 연수야."
연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넘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빨개진 눈으로 입을 꽉 깨물고 있는 준호를 보았다.
"팀장님."
연수가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그제야 희미하게 웃으며 준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니 잘못이 아니야. 연수야. 제발 내 마음 찢어질 거 같으니까 그런 말 더는 하지 마. 그런 생각도 하지 말고. 제발.."
연수가 잠시 울먹이는 얼굴로 준호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가 힘없이 웃으며 연수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말했다.
"가자. 데려다줄게.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하잖아."
준호에게 끌리다시피 일어서던 연수가 준호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잠깐만. 팀장님. 형수는? 형수 혹시 깨어날지도 모르고 또 형..."
준호가 갑자기 행동을 멈추고 연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 연수야. 좋은 일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 네가 있는 거 나 싫어. 나 때문에 더는 너 우는 거 보기 싫다고 그러니까 넌 이번일 관심도 갖지 말고 신경도 쓰지 마. 그러니까 제발 집에 가자."
말을 마치고 다시 연수를 끌어당긴 준호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연수가 다급하게 다시 준호의 팔을 붙잡았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어떻게 관심을 안 가져 팀장님이...."
그때였다. 준호는 연수의 잡고 있던 팔을 거칠게 놓아주더니 연수에게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해. 그만 하라고. 네가 왜 형수 때문에 여기 있으려고 하는데.이건 내 일이라고. 그러니까 너는 신경을 쓰지 말라고. 내가 알아서 한다고. 형수가 죽든 살든 너랑 상관없으니까 신경을 쓰지 말라고. 그러니까 가라고. 제발 부탁인데 가자고. 제발."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잠시 후 난감한 얼굴로 준호가 연수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하지만 연수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손에서 준호의 손을 떼며 말했다.
"알았어요. 팀장님이 그러라면 그래야죠. 팀장님 말대로 이제부터 아무것도 안 하고 생각도 하지 않을게요. 괜히 나까지 보태서 죄송했어요. 그리고 나 택시 타고 가면 되니까 안 데려다주셔도 돼요. 그럼 가볼게요."
연수가 준호에게 인사를 하고 준호를 스쳐 지나갈 때였다. 준호가 연수의 팔을 붙잡았다.
"데려다 줄께..."
연수가 웃으며 준호의 말을 자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도착하면 잘 도착했다고 문자 보낼게요. 그럼 진짜 가볼게요."
연수가 준호의 팔을 떼어내고 준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병원을 나와 한참을 걷던 연수는 문득 벨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길을 걷고 있었다. 연수는 끊이지 않고 울려대는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준 호였다.
[네. 팀장님.]
[어디야. 나 금방 너 쫓아 나왔는데. 너 안 보여. 대체 어디 있는 거야? 택시 탄 거야?]
[음. 어딘지 말해줄 수 없어요.]
[뭐? 연수야. 너 화난 거 알아. 내가 잘….]
[진짜 말해줄 수 없어요.]
[연수야….]
[진짜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말해 줄 수가 없다니까요. 무작정 걷다가 길을 잃어버렸어요.]
[뭐?]
[팀장님. 나 데리러 와요. 나 정말 길 잃었어요.]
* * * * * *
잠시 후 준호가 연수를 찾아와 두 사람은 각자의 손에 캔 커피를 들고 병원 앞 벤치에 아무 말 없이 앉아있었다. 긴 침묵을 먼저 깬 건 준 호였다.
준호는 연수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괜히 커피만 돌려대며 말했다.
"화…. 많이났지. 미안해.."
"아니요..나. 화 안나고. 그 대신 반성 했어요."
"반성?"
연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나도 팀장님한테 내 일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한 적 있잖아요. 그때 내 말 때문에 팀장님이 얼마나 슬펐을까 그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까 마음이 아주 아팠거든요."
"미안하다."
연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살며시 미소 지으며 준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냐. 팀장님. 우리 각자 한 번씩 사고 쳤으니까 이번일은 잊기로 해요. 어때요?"
준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발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연수가 준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형수님.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팀장님. 난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리고 그런 결정을 내릴 때까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생각하면 너무 힘드셨을 거 같아요."
"아니.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그리고 그렇게 죽을 만큼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면 형한테 말했어야 했어. 의논했어야 했다고. 저렇게 누워 있는 건 형수 때문에 자신의 꿈도 가족도 그 모든 것을 자신 때문에 다 놓아버린 형에 대한 배신이야. 자기만 저렇게 훌쩍 떠나면 다 끝나는 거야. 아니잖아 이건 남은 형 그리고 어머니 우리 모두 죄인처럼 살아가라는 거랑 똑같은 거라고. 자기만 생각한 아주 비열한 짓이였어. 형수가 한 짓은."
"팀장님. 형수님…. 얼마나 위험한 거예요?"
"최연수.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네가 이 상황에.."
연수가 준호의 팔을 붙잡고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알고 싶어요. 알려 주세요."
준호가 한숨을 크게 쉬더니 포기한 듯 연수에게 말했다.
"너무 늦게 발견됐어. 손쓰기에는 너무 늦었대. 마음의 준비를 하래."
연수는 준호의 말에 놀라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연수는 힘든 듯 얼굴을 감싸고 있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팀장님. 부모님께 말씀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알아. 아는데…. 뭘 어떻게 설명하고 말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연수가 준호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팀장님. 일어나요."
"뭐?"
"시간이 없다며. 고비라며. 그럼 어머니도 시간이 없다고요. 두 분이 영원히 화해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얼른 일어나요."
"연수야."
"팀장님. 집에 가요. 집에 가서 말씀드려요. 만약에 팀장님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만 혹시라도 이대로 형수님 못 일어나시면 어머니 자신 잘못도 아닌데 팀장님 말대로 죄인처럼 사셔야 할지도 모른 다구요. 그러니까 집으로 가요. 얼른요. 조금 더 있다간 정말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고요."
잠시 망설이던 준호가 벤치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곧 준호의 차는 빠르게 병원을 빠져나왔다.
* * * * *
시끄럽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잠옷 차림의 혜자와 동욱이 안방의 문을 열고 나왔다.
"이 밤에 누구지?"
동욱은 인터폰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누구십니까?"
"저예요. 준호."
"여보. 지금 준호라고 한 거 맞죠?"
열림 버튼을 누르는 동욱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혜자가 물었다. 동욱역시 놀란 표정으로 혜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급하게 현관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잠시 놀란 듯 자신들을 바라보는 혜자와 동욱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혜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잔뜩 긴장해서 예전 버릇처럼 긴장하면 저린 팔을 주무르는 연수에게 다가가 연수의 팔을 잡아 주물러주며 연수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한준호 연수 왜 이래? 네가 말해봐. 둘이 싸웠어?"
"아버지. 어머니..."
준호가 차마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자 혜자가 답답한 듯 여전히 연수의 팔을 주물러주며 연수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연수야. 무슨 일이야?"
그 순간 연수가 혜자를 와락 안아버렸다. 그리곤 흐느끼기 시작했다. 혜자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준호에게 소리쳤다.
"너. 도대체 연수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얘가 이러는 거야? 무슨 일 인 데 그러냐고...."
그때 연수의 작은 목소리가 혜자에게 들려왔다.
"형수...아파..요."
혜자가 울고 있는 연수의 등을 쓸어주며 다시 물었다.
"응? 뭐라고 그래 말해봐. 내가 다 들어줄 테니 말해봐. 연수야."
"어머니."
"응. 그래."
"어머니. 형수님이 아파요. 지금 병원에 계세요."
"뭐? 뭐라구? 누구? 형수? 연수야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구나."
혜자가 준호를 바라보며 말하자. 준호가 혜자를 빨개진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형수님이 병원에 계세요."
동욱이 놀라 준호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좀 자세하게 말해봐. 이놈아."
"약을 드셨어요. 오늘. 내일이 고비래요."
동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약을 먹었다고? 그러니까 네 형수가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는 거냐?"
"네."
혜자는 준호의 대답에 간신히 서 있던 다리가 풀리고 말았다. 연수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이를 악물며 떨고 있는 혜자의 팔을 붙잡았다. 혜자는 그렇게 떨리는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