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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
"바쁘냐?"
연수는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신지를 보았다.
"아니. 이것만 정리하면 끝나. 지희 오늘 휴가더라."
연수가 모니터에 시선을 두고 신지에게 말했다.
"어. 아줌마. 아저씨 올라오셨거든. 지금 집에 계신다."
"진짜? 이따가 전화해봐야겠다. 아줌마. 아저씨 진짜 오랜만에 뵙네."
"응. 안 그래도 너 궁금해하시더라 끝나고 전화한 번 해드려."
"응."
"근데 밖에 지금 눈 엄청나게 내린다. 하늘에 구멍이 난 거 같아. 너 우산은 가져왔냐?"
"응. 안 그래도 아침에 정수 언니가 챙겨줬어. 일기예보에서 눈 많이 온다고 했다더라."
"근데 연수야. 팀장님한테 무슨 일 있어?"
연수가 자신 앞에 서류를 정류하며 신지에게 물었다.
"팀장님? "
"어. 아까 출근 하는데 내가 불러도 못 듣고 급하게 뛰어가던데."
"그래. 뭐 딱히 들은 이야기는 없는데."
"그래. 그럼 회사 일인가 보네. 근데 너 팀장님 집으로 이사는 언제 하는 거야. 집들이 할거지. "
"이제 해야지. 그리고 집들이는 집주인 허락받고 알려줄게."
"허락은 무슨 그 집에 사는 사람 마음이지."
연수가 웃으며 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 이제 사무실 가봐야 해. 수고하고 나중에 보자."
"그래. 오늘 고생했다."
연수는 웃으며 신지에게 손을 흔들고는 사무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 * * *
연수는 퇴근 후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 있었다. 신지 말처럼 하늘 어딘가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눈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고 있었다. 3대의 버스가 지나가고 드디어 연수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다.
연수는 자리에 앉아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아까 신지의 말이 떠올라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휴대전화 안에서는 준호의 목소리 대신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멘트만 흘러나왔다.
연수는 많이 바쁘가보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창밖 풍경에 눈길을 돌렸다.
연수가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며 정수가 내민 코코아를 받아 한 모금 마시자. 정수도 연수의 앞에 앉아 자신의 코코아를 마시며 말했다.
"그래서 오늘 온종일 또 그 생각 했겠네. 너 그 생각 때문에 사고치고 온건 아니지.."
"응. 걱정하지 마. 근데 언니 나 아직도 진짜 뭔가 큰 거 하나 두고 온 느낌이야.."
"니가 미안해서 그런 거겠지. 너는 허락받고 그 언니는 못 받았으니까. 네가 좀 미안한 상황이긴 하다. 나 같음 축하가 뭐냐. 너 안보고 싶을거 같은데. 그 언니가 참 착하긴 한가보다."
"응. 많이 착한 거 같아. 그래서 더 미안하고."
"에고. 네가 미안할게 뭐 있어. 그리고 팀장님 어머니 너 허락해 주셨으니까 그 언니도 곧 허락해 주실 거야. 야.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잖아. 나봐 그 불같은 우리 아버지만 봐도 그렇잖아. 처음엔 죽일 거 같더니 지금은 가끔 괜찮으냐고 전화도 주신다."
연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렇겠지."
"그럼. 너무 걱정하지 마. 시간이 약이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좋게 풀려있을 거야. 가족이잖아."
연수가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정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수는 잠자리에 들기 전 온종일 통화가 안 되던 준호가 걱정되다 시 한번 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연결음만 들려오던 휴대전화 안에서 드디어 준호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연수야.]
[팀장님. 어디예요. 오늘 온종일 전화도 안 되고 무슨 일 있어요?]
[어. 미안. 전화하려고 했는데. 어..형]
그때였다. 휴대전화 안에서 우당탕 소리와 함께 준호의 외마디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휴대폰 안에서는 전화가 끊어진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놀란 연수는 전화를 내리지도 못하고 이미 끊어진 전화기를 한참이나 얼어붙은 듯 귀에 대고 있었다.
준호와 그렇게 전화가 끊어진 뒤 30분 정도 지난 후에야 준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팀장님. 내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연수야."
연수는 문득 힘없는 목소리의 준호가 걱정돼서 빠르게 대답했다.
"네. 도대체 팀장님 무슨 일이에요? 형이랑 같이 있는 거예요? 형한테 무슨 일 있는 거예요?"
잠시 아무 말이 없던 준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무슨 일 있어. 연수야."
정수는 거실에 앉아 따뜻한 우유를 손에 들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정수가 우유를 입에 댄 순간 잠이 든 줄 알았던 연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 소리에 놀란 정수가 우유를 이불 위에 흘리자 연수에게 한마디를 하려 고개를 돌리고는 코트를 입으며 방을 나서는 연수를 보고는 놀란 듯 물었다.
"너 어디가?"
"병원에."
"왜?"
"형수가 입원했대."
"야. 팀장님도 아니고 형수잖아. 내일 가 그리고 너 지금이 몇신줄은 아냐? 아홉 시 넘었어."
연수가 아무 말 없이 운동화에 발을 집어넣자 정수가 연수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밖에 깜깜하다고 눈이 내려서 길도 엄청나게 미끄럽다고."
"혼수상태래."
"뭐?"
"형수가 약을 먹었대. 우리 올라오고 그 날밤에 먹었대."
"연수야."
"그날 밤에 그래서 나한테 이야기 한 거였나 봐. 내가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아냐 뭔가 이상하긴 했어. 맞아. 이상했는데 내가. 내가 그냥 무시했던 거야. 내 잘못인 거 같아. 형수가 자고 가라고 계속 붙잡았는데.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그때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최연수 너 그 다음 날 새벽 출근이었잖아 그게 왜 네 잘못이야.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우선 들어와 이러고 어떻게 가니."
"봐야겠어. 내 눈으로 언니 숨을 쉬는 거 봐야 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연수를 정수가 급하게 붙잡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선 들어와 그럼 콜택시 부르자. 지금 택시 잡히지도 않아. 지금 택시 부를게 .얼른 들어오라고."
연수는 힘없이 정수의 손에 붙들려 집안으로 들어왔다. 힘없이 주저앉은 연수는 아무 말 없이 콜택시를 부르고 있는 정수를 바라보았다.
* * * * * * *
연수는 중환자실 의자에 힘없이 고개를 떨구고 앉아있는 준호를 발견하고는 천천히 걸어갔다. 연수가 준호앞에 멈춰 서자 준호가 고개를 들고 놀란 얼굴로 일어나 물었다.
"너.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걱정돼서요."
"야. 최연수 걱정돼도 내일 오라고 했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여길와."
"언니는요?"
준호가 중환자실을 바라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형은요?"
"싫다는 거 보호자 대기실에서 잠깐 쉬라고 들여보냈어."
"팀장님..이제...언니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준호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답답한 듯 마른세수를 하고는 힘없이 말했다.
"지켜봐야 한데.모르겠다...진짜 모르겠어. 도데체 왜 형수가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인지."
"미안해요. 팀장님."
"뭐?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양평 간 날 언니가 저한테 말했어요. 이제 아이 가질 수 없다고. 그래서 어머니한테 허락 받을 수가 없게 됐다고. 그리고 팀장님이랑 형이 주고받은 문자를 봤다고 우리 두 사람 허락받은 거 축하한다고. 그때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팀장님한테 이상하다고 말했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언니 저렇게 되는 거 막을 수 있었을텐데..미안해요. 팀장님. 미안해요."
준호가 한숨을 쉬며 일어나 연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최연수니 잘못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 하지 말고 집에나 가자 데려다줄게. 여기 있어 봐야 너 좋은 거 하나도 없어.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준호가 연수를 잡아 끌어당기자 연수가 안 가려 버텼다. 연수가 가지 않겠다는 듯 준호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언니 한 번만 보고 갈게요."
"지금 면회시간 끝나서 볼 수도 없어. 그리고 볼 수 있다 해도 형수 보는 거 내가 싫어 괜히 보고 너 우울해 지는 거 싫다고. "
연수가 잠시 중환자실 문을 바라보다 준호를 바라보다 물었다.
"팀장님."
"왜?"
"혹시... 혹시말예요. 언니. 위험한 거예요. 말해줘요. 팀장님. 언니 혹시 못 깨어날 수도 있느냐고요."
준호가 연수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고는 말했다.
"깨어날 거야. 형수 우리 형한테 미안해서라도 깨어날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꼭 깨어날 거야."
연수는 다리가 풀려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곤 멍한 얼굴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듯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식구들도 저 안에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팀장님하고 똑같이 말했었는데. 깨어날 거라고. 꼭 깨어날 거라고 그렇게 말했었는데…."
짐시후 연수의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중환자실 앞을 천천히 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