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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준호의 차가 막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올 때였다. 준호의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준호는 주차를 마칠 때까지 무시하고 있던 아직도 끈질기게 울려대는 휴대전화를 내리기 직전 주머니에서 꺼내 보았다. 우진이 였다. 준호는 잠시 고민 하다가 잔뜩 찌푸린 얼굴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
[너는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했는데 왜 가 뭐냐?]
[무슨 일인데 얼른말해 나 바빠.]
[회사야?]
[아니 집.]
[집인데 뭐가 바빠?]
[연수 와 있어. 무슨 일인데?]
[아니. 애들 모였는데 너 얼른 오라고 난리야. 오늘도 오지 않으면 제명 시켜 버린대 잠깐 와라.]
[제명시켜.]
[뭐?]
[제명 시키라고. 그리고 다시 전화 하지 마라. 끊는다.]
전화를 끊기 전 휴대전화 안에서 들리는 우진의 육두문자를 들으며 살며시 웃고는 휴대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고는 엘리베이터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현관문을 열자 센서 등이 켜지고 준호는 어두운 아파트 안을 보고는 잠시 당황하고는 현관 앞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연수의 운동화를 보고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살며시 미소 짓고는 연수의 운동화 옆에 자신의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는 곧바로 옷방의 방문을 살며시 열어 보았다.
준호의 생각처럼 옷 정리를 하다가 잠이 들었는지 옷방 역시 어두웠다. 어둠이 눈에 익숙해지자 옷 속에 파묻혀 쪼구려 자는 연수가 보였다.
준호가 방의 불을 켜자 깨끗하게 정리된 여러 개의 박스와 가방이 보였다. 준호가 연수를 살며시 흔들어 깨웠다. 연수가 힘겹게 눈을 떠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듯하더니 자신 앞에 있는 준호를 보고 놀란 듯 물었다.
"팀장님이..퇴근 한 거예요? 지금 몇 신데요?"
"8시 23분."
잔뜩 찡그린 얼굴로 연수가 주변의 옷들을 정리하며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8시요. 뭐야. 언제 잠들었지. 아 라면을 먹는 게 아니었어. 아. 배고파도 그냥 참을걸. 오늘 하루 다 가버렸네. 아직 책 볼 것도 많은데.."
준호가 웃으며 연수의 손을 잡고는 연수의 이름을 불렀다.
"연수야."
"네."
"이제 그만해. 이따 저녁 먹고 나머지는 내가 할게."
"이것들만 정리하면 다 끝나요."
"벌써 다 했다고."
연수가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네. 천천히 하면 팀장님이 계속 시킬 거 같아서 오늘 열심히 다 끝냈어요. 나 잘했죠."
준호가 크게 웃으며 연수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매만져주며 대답했다.
"어. 잘했네. 근데 라면은 몇 시에 먹은 거야?"
"아까 4시쯤이요."
"그럼 지금 배고프겠네. 나가자. 밥 먹으러."
준호가 연수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자 연수가 일어서며 준호에게 물었다.
"이 시간까지 밥 안 먹었어요?"
"어. 당연하지. 너랑 먹으려고 안 먹었지."
"나 배 안 고픈데. 라면을 먹고 바로 잠들었더니 아직 배가 안 꺼졌어요."
"최연수 나는 배고프다. 그리고 너 또 먹을 수 있잖아. 안 그래?"
연수가 준호의 말에 진지한 얼굴로 준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그렇긴 하죠."
준호가 진지한 연수의 얼굴과 대답에 예뻐죽겠다는 듯 연수의 볼을 마구 잡아당겼다. 연수가 아프다고 소리치자 볼에서 손을 뗀 준호가 빠르게 연수의 입술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나 옷 갈아입어야 하는데 여기서 갈아입을까?"
당황한 연수가 준호에게 말했다.
"왜 여기서 갈아입어요? 딴 방가서 갈아입어요."
"여기가 옷 방이고 옷이 여기에 있거든."
준호가 빠르게 허리띠에 손을 올려놓고 연수를 보며 능글맞게 웃으며 벨트를 풀려 하자 연수가 빠르게 방문을 열고 나왔다. 방안에서 크게 웃는 준호의 웃음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왔다.
잠시 후에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준호가 나오자 연수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물었다. 연수가 가리킨 것은 현관 한쪽에 세워져 있던 자전거였다.
"저 자전거는 타는 거 맞아요? 나 팀장님이 자전거 타는 거 한 번도 못 본 거 같은데. 저거 새것 맞죠. 비싼 거 같은데 타지도 않을 거면서 뭐하러 산 거예요? 자전거 진짜 아깝다."
준호가 연수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말했다.
"너 때문에 산거거든."
"나 때문에요?"
"그래. 예전에 네가 정수 뒤에 태우고 출근하는걸 본적이 있거든 그날 퇴근 하는데 나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사 버렸어. 그리고 언젠가는 너랑 꼭 타러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도 깜박 잊고 있었네."
"아. 여름쯤에."
"아마 그럴걸."
"그럼 그때 사서 한 번도 탄 적 없어요?"
"어."
"아. 진짜 돈 아깝다."
준호가 연수를 바라보다 웃으며 갑자기 생각난 듯 연수에게 말했다.
"그럼 저거 타고 밥 먹으러 갈까?"
"지금요? 지금 타기에는 좀 춥지 않을까요?"
"뭐 어때. 뒤에 탈 건데."
"네?"
"아냐. 얼른 가자. 나 진짜 배고프다."
"아. 네."
두 사람은 자전거를 가지고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파트 정문에 도착한 준호는 자전거를 가리키며 연수에게 말했다.
"타."
"팀장님 먼저 타야죠. 그래야 내가 뒤에 타죠."
"네가 뒤에 타려고?"
"그럼 누가 뒤에 타요?"
"나."
"팀장님이요? 그럼 내가 팀장님을 태우고 가라는 거예요?"
"어."
"어가 뭐예요. 팀장님이 나보다 더 키도 크고 몸무게도 더 나가는데 내가 어떻게 팀장님을 태우고 가요."
"내가 그날 두 눈을 뜨고 똑똑히 봤는데 딴소리하네 그때 정수는 잘도 태우고 출근하더구먼 정수도 너보다 키가 크고 정수가 너보다 더 통통하잖아. 근데 정수는 되고 나는 안된다는 건 무척 실망스럽다. 연수야."
"그게 말이 돼 요. 정수 언니가 나보다 길지만 정수 언니는 여자고 팀장님은 남자잖아요."
"너 방금 시대착오적인 성차별 발언했다."
"이게 무슨 성차별이에요."
"네가 방금 그랬잖아. 정수는 여자고 나는 남자라고."
연수는 팔짱을 끼고 당당히 서 있는 준호를 바라보다 무언가 결심한 듯 준호에게 말했다.
"그럼 떡볶이집까지 오래 걸린다고 뭐라고 하지 마요."
"그래."
"뒤에서 막 위험하게 장난치기 없어요."
"알겠다니까."
"중간에 멈추라고 하기 없어요. 출발하면 팀장님 힘들다고 해도 절대 안 내려 줄 거예요."
"알았어. 나 배고파 죽겠어. 진짜 나 죽기 전에 제발 출발 좀 하자 "
연수는 비장한 얼굴로 앞자리에 타고는 역시나 비리로 준호에게 말했다.
"팀장님 타요."
준호가 뒷자리에 털썩 앉자 자전거가 잠시 심하게 흔들리더니 곧 연수가 똑바로 세우고는 페달을 밟자 자전거가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준호는 힘겹게 자전거를 끌고 있는 연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연수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쏙 집어넣었다. 그리곤 연수의 등에 살며시 기대었다. 자전거가 잠시 흔들렸지만, 다시 출발하자. 준호는 연수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연수야."
연수가 힘겹게 대답했다."
"네."
"너 말이야 나보다 어린놈들이 막 들이대고 꼬셔도 넘어가면 안 된다. 막 밥 사준다고 그러고 차 태워준다고 그래도 따라가지 말고 남자친구 있다고 딱 잘라 말하라고 알았어."
"네."
준호는 연수가 건성으로 대답하자 연수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었다. 연수가 당황하자 다시 한 번 자전거가 심하게 흔들렸다.
"팀장님. 하지 마요. 장난 하지 않기로 했잖아."
"장난 아니거든 확실히 대답 안 하니까 그러지. 그러니까 대답 확실히 하라고 이 세상에 남자는 나 빼고 다 도둑놈 이야. 그러니까 도둑놈들한테 넘어가지 말라고 알겠느냐고."
연수는 대답을 늦게 하면 또 준호가 장난칠 거 같아서 얼른 큰 목소리로 힘주어 대답했다.
"네. 팀장님 빼고는 이 세상 다른 남자들은 다 도둑이다 꼭 기억하고 있을게요."
준호는 연수의 대답에 그제야 만족한 듯 연수의 등에 얼굴을 다시 묻고는 눈을 감았다. 연수의 따뜻한 등에 온도가 준호의 차가운 볼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