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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보
혜자를 침대에 눕히고 나온 동욱은 아직도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준호에게 다가갔다.
"일어나거라. 오늘은 이쯤해서 끝내는게 좋겠구나."
준호는 힘없이 일어서며 소파에 두었던 가방과 코트를 챙겼다. 현관을 나서려던 준호를 동욱이 준호의 이름을 불렀다.
"준호야."
"네."
"엄마 미워하지 마라. 너까지 등 돌리면 네 엄마 진짜 잘못될지도 모른다. 네 말대로 정말 괜찮은 아가씨면 엄마 마음도 돌아설 거다. 시간을 두고 설득해 보자꾸나."
준호는 동욱에게 인사를 하고 현관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탔다.
* * * *
아파트에 도착해 차의 시동을 끄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준호는 차 문을 열고 나와 아파트가 아닌 근처의 포장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자리에 앉은 준호는 소주 한잔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답답한 마음을 해결할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준호는 연수에게 미안한 마음에 한잔 혜자가 미워지는 마음에 한잔 연수가 보고 싶은 마음에 한잔 그렇게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연수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거실로 나온 연수는 넘어져 있는 준호를 발견하고는 놀라 달려갔다.
"팀장님. 어떻게 된 거예요?"
준호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은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연수를 보았다. 그리곤 연수를 알아봤는지 연수를 꽉 안아 버렸다.
"우리 연수. 우리 연수다. 우리 예쁜 연수다."
연수는 자신에게 볼을 비벼대는 준호를 간신히 밀쳐내고는 팔을 잡아 일으켰다.
"일. 일어나봐요. 팀장님. 다리에 힘 좀 줘봐요 나 힘들단 말이야. 이게뭐야? 어디서 이렇게 마신 거예요?"
힘겹게 준호를 소파까지 이끌어 가던 연수는 준호가 연수 쪽으로 기대는 바람에 소파까지 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나뒹굴고 말았다. 준호밑에 깔린 연수가 겨우 빠져나와 준호가 편하게 누울 수 있게 코트와 슈트를 벗기고 이불을 가지고 나오려 일어설 때 였다.
준호가 연수의 팔을 붙잡고 주저 안쳤다.
"연수야."
"네."
"연수야."
"네. 왜요? 물 가져다 드릴까요?"
"연수야."
연수는 술에 취한 준호가 술주정 하는 거라 생각해 팔을 빼내고 일어나려 할 때였다.
"우리 부모님 만나지 말까?"
연수가 대짜로 뻗어 눈을 감고 있는 준호를 보았다.
"그냥 너도 부모님 안 계시니까 나도 그냥 안 보고 살까? 난 할 수 있는데 너만 있으면 다 안 보고 살 수 있는데. 아니다. 연수야 우리 아기 만들까? 이쁜 아기 하나 만들어서 그래서 허락 받을까? 그럼 허락해 주실까? 나는 왜 이렇게 못났니 너한테 상처를 줄 일만 만들고 진짜 나 바보 멍청이 개자식이다. 연수야…. 연수야 니가 보고 싶다."
연수는 잠시 후 거실에 준호의 숨소리만 들리자 방으로 들어가 이불과 베개를 꺼내와 준호를 덮어 주었다.
"팀장님…. 팀장님. 한팀장님."
준호는 연수의 고함에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왜?"
준호는 연수가 내미는 물잔을 받아 단숨에 비워냈다.
"얼른 씻고 준비해야 할걸요. 안 그러면 늦을 거예요."
준호는 시계를 확인하고 욕실로 걸어갔다. 샤워를 마친 준호가 나오자 식탁에는 라면이 끓여져 있었다. 준호가 의자에 앉자 연수가 미안한 듯 라면을 준호앞으로 밀어주었다.
"죄송해요. 제가 해장국을 끓일지 몰라서 가끔 정수 언니랑 라면으로 해장해서 힘드시면 면은 안 드셔도 되니까 국물이라도 드셔 보세요."
준호가 웃으며 라면 한 그릇을 뚝딱 비워내고 속이 풀리는 듯 연수에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어제 혹시 내가 실수한 거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서 말이야."
"엄청나게 많았어요."
준호의 표정이 굳어지자 연수가 빙긋 웃으며 준호에게 말했다.
"나보고 아기 만들자던 데요?"
"뭐?"
"아기 만들면 부모님이 허락하실지 모른다고 만들자고 했어요."
준호가 당황한 듯 머리를 쓸어올리며 난처한 얼굴로 연수에게 말했다.
"연수야. 저기…. 그게."
"팀장님. 난 말예요. 반대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팀장님한테 내 조건이 많이 떨어지는 건 맞잖아요. 그러니까 반대 하지 않으시면 그게 이상한 거죠. 안 그래요."
준호가 말없이 연수를 바라보았다.
"근데 팀장님. 아기 갖고 그런 건 제가 싫어요. 그렇게는 하지 마요. 그냥 노력해 봐요. 부모님 마음 움직이실때까지 노력해 봐요. 물론 팀장님도 나도 상처도 받겠지만 그래도 노력해요. 우리."
"그러다. 끝까지 반대하시면 그때는 어떡할래?"
"노력할 만큼 해봐도 제가 안 된다면 전 그냥 팀장님 버릴래요."
"최 연수 장난 하지 마."
"장난 아닌데. 팀장님이 뭐 지금은 소설이나 영화처럼 나만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진짜 잠시 뿐일 거 같아요. 가족을 안보고 산다는건 엄청 불행한 일이라구요. 제가 그건 잘 알잖아요. 그리고 앞으로 제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부모님 힘들게 하면서까지 내 욕심에 팀장님하고 결혼은 못할 거 같아요."
"넌 참 쉽게도 이야기한다."
"쉬운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안될 거라는 그런 무서운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해볼 수 있는데 까지는 우리 같이 해봐요. 팀장님."
준호는 속상 할만도 한데 자기를 위해 그래도 힘내서 웃어주는 연수를 보며 더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 *
준호는 점심시간에 잠시 시간을 내 혜자를 찾아왔다. 혜자의 무뚝뚝한 얼굴에도 준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혜자에게 말했다.
"무슨일이니?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어?"
"저 밥 좀 주세요. 점심시간에 잠깐 나온 거라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혜자는 잠시 준호를 바라보다 주방으로 걸어갔다. 준호도 혜자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가 식탁에 앉았다. 식사를 준비하는 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준호가 혜자에게 말했다.
"어제는 죄송했어요."
주방에는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릴 뿐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어제 연수가 어머니가 반대하는걸 알았어요. 근데 그 어린 녀석이 속상해하지도 않고 저보다 더 씩씩하더라고요. 반대 하는 게 당연하데요. 그리고는 어머니가 끝까지 허락하지 않으면 결혼 하는 것도 만나는 것도 하지 않겠대요. "
혜자는 준호에게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말했다.
"그래서 지금 허락 해주지 않으면 형처럼 죽는다 어쩐다 협박하러 왔니?"
"아니요. 연수가 노력해 본다고 해서요. 어머니 마음 돌릴 수 있게 노력해 본다고 해서 저도 노력해 보려고요. 어머니가 연수 받아주실때까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려고요."
두 사람 사이에 또다시 긴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을 깬 건 혜자였다.
"미안하다. 내가 지금 밥 차릴 힘이 없구나. 오늘은 그냥 가는 게 좋을 거 같다."
준호가 일어나 여전히 등을 보이는 혜자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반대를 하든 찬성하든 연수는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다음 주 금요일에 연수 집으로 데리고 올게요. 저녁 준비 하시는 거 힘드시면 식당 예약 할게요. 전화 주세요. 그럼 연수랑 다음 주에 올게요. 쉬세요."
혜자는 준호의 통보에 힘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