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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
"아까 저녁도 안 먹었는데 괜찮아?"
"응. 한 끼 굶는다고 안 죽는다. 걱정하지 마. 팀장님 기다리겠다. 빨리 가봐."
"감기는 어때?"
"야. 나 팀장님한테 욕먹기 싫다. 얼른 나가 봐 나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그냥 팀장님 차 타고 가자 집까지 데려다준다니까."
"됐어. 팀장님 나 보면 총 쏠지도 몰라 올라오고 나서 며칠째 나 때문에 같이 있지도 못했는데 내 얼굴 보기도 싫을걸."
정수가 힘없이 웃으며 연수에게 어서 가라는 손짓을 해보며 뒤돌아 걸어가자 연수는 정수의 힘없는 뒷모습을 잔뜩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다 겨우 준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연수가 차에 타자 읽고 있던 서류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준호가 웃으며 연수를 반겼다.
"왜 이렇게 늦었어?"
"과장님이 잠깐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요."
"근데 오늘 힘들었어. 얼굴이 힘들어 보인다?"
"아닌데. 괜찮은데."
준호가 연수의 머리를 귀에 꽂아 주며 장난스럽게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럼 너 배고파서 그런 거지. 좋아. 내가 오늘 맛있는 거 쏜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말만 해 다 사줄게"
"치 모은 돈보다 빚이 더 많은 팀장님이 맨날 사준데 됐거든요. 사양할래요. 그런데 팀장님 우리 오늘 약속 취소하고 다음에 만나면 안 될까요?"
"뭐? 왜?"
"정수 언니요. 언니가 아직도 아픈데 혼자 두기 그래서요."
"정수 아직도 아파 근데 준혁이 있잖아. 이 자식은 지 애인이 아픈데 뭐 하는 거야?"
준호가 준혁에게 전화를 하려는지 핸드폰을 들자 연수가 입을 삐죽이며 준호의 손을 잡았다.
"팀장님. 준혁 오빠랑 친구 맞아요?"
준호가 무슨 소리냐는 듯 연수를 바라보자 연수가 준호를 노려보며 말했다.
"준혁 오빠 파리 디자인 박람회에 갔거든요."
"아 그래..."
"친구 맞아요?"
준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응 맞는데 연락 안 한 지 오래야 내 핸드폰은 너한테 밖에 사용 안 하거든 그 녀석들 번호 버린 지 오래 됐거든."
연수가 느끼하다며 소리치자. 준호가 연수의 볼에 뽀뽀를 빠르게 하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가자. 우리 착한 연수가 원한다면 들어줘야지."
"죄송해요. 그대신 나 수요일에 쉬니까 그때 놀아요."
준호가 자유로운 한 손을 뻗어 연수의 손을 꽉 맞잡았다.
"수요일 저녁에 어머니 친구분 부탁으로 볼일이 있어 그대신 일찍 끝나고 집으로 갈게 준비하고 있어 오랜만에 데이트다운 데이트 좀 해보자."
"그럼 너무 늦잖아요. 나야 다음날 쉬는 날 이지만 팀장님은 출근하잖아요. 그럼 팀장님 피곤 하니까 볼일 편하게 보고 다음에 데이트해요."
"괜찮아. 하나도 힘들지 않아 그리고 힘들면 집에서 데이트할 거니까 그런 걱정하지 마. 나야 집에서 하는 데이트가 좋긴 하지만."
"그럼 집에서 놀아요. 오랜만에 우리 시원한 맥주 사서 영화 봐요."
"그래. 그러자. 그리고."
그 다음 말이 끊어지자 연수는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뭐요?"
준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날도 짝짝이로 입고와도 된다고."
"뭐…. 뭘요?"
"속옷"
연수가 귀까지 붉어진 채 입술을 깨물자 준호가 웃으며 연수에게 말했다.
"나 그날 감동 먹었어. 이름 모를 비행기가 그려진 하늘색 팬티와 레이스가 왕창 달린 하얀 브래지어의 조화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지 몰랐다니까. 아주 예뻤어. "
"팀장님. 놀리지 않기로 했잖아요."
"놀린 거 아닌데. 진짜 예뻤다니까 특히 비행기 그림이 그려있던 하늘색 팬티는 완전 내 취향 이였다고."
"팀장님."
연수의 고함 소리와 준호의 웃는 소리가 끊어질 때쯤 차는 연수의 집 앞에 도착했다.
"정수 너무 아프면 병원에 가게 전화해 밤늦어도 상관없어. 둘이 밤늦게 택시 잡으려고 하지 말고 전화해. 알았지."
"네. 그럴게요. 오늘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요."
"괜찮아. 어서 들어가."
"네."
연수는 집에 도착해 정수를 찾았지만, 정수는 보이지 않았다. 연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전화했지만 끝내 정수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연수는 불안한 마음에 다시 한 번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길게 이어지던 신호음이 끝 어진 때쯤 정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또 전화하고 그러냐. 걱정 마라니까 나 죽 먹고 씻고 나서 잘려고 누웠어.]
[집이야?]
[그래.]
[내가 지금 집인데 준혁 오빠는 파리에 있을 테고 언니 나 몰래 두 집 살림 차렸니? 어디야?]
잠시 침묵이 흐르던 핸드폰 안에서 정수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집앞에 공원.]
연수는 전화를 끊고 빠르게 공원을 향해 달렸다. 벤치에 힘없이 고개를 파묻고 있는 정수가 보였다. 연수가 다가오자 정수가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은 정수의 눈이 보였다.
"언니 왜 그래 말을 해야 알지. 요 며칠 왜 그러는데? 무슨 문제있어? 혹시 준혁 오빠 문제야?"
"연수야."
"응."
"나 어떡하니."
"뭔데? 뭐가 문젠데?"
"나…. 임신 했나 봐."
"임신. 그게 뭔데 …뭐 ?.. 임신 ?"
연수의 놀란 소리에 정수의 울음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연수는 축하해야 하는 것인지 위로를 해야 하는 것인지 당황한 나머지 멍하니 울고 있는 정수의 어깨만 두드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