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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자.
준호는 간신히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어제 먹은 술 때문에 아직도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준호는 피식 웃었다. 대학 때 이후로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마신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준호가 냉장고로 가 생수를 들이킬 때 였다.
비밀번호 해제 음이 들리고 곧 문이 열렸다.
"어? 너. 왜 이 시간에 집에 있어?"
"몸이 안 좋아서요."
혜자는 준호에게 다가왔다. 그러다 코를 막으며 준호의 등을 세게 내리쳤다.
"아프긴. 이 자식 아휴. 술 냄새 이럴 거면 집으로 들어와. 얼마나 퍼 마신 거야 온 집안이 술 냄새로 가득하네."
혜자는 거실의 창문을 활짝 열며 말했다.
"술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마셔 대는지 네 아빠나 너나 어쩜 그렇게 술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니. 회사도 못 갈 정도로 마시는 게 말이 되는 거야. 회사에는 전화 한 거야?"
준호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혜자의 잔소리를 피해 슬금슬금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어머니. 저 어린애 아닙니다. 제 일은 제가 잘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게 잘하고 있는 거야?"
"어머니. 저 조금만 누울게요."
방으로 들어가는 준호의 등에 대고 혜자가 외쳤다.
"밥은 먹은 거야?"
준호는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이나 밖에서 들리는 혜자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준호는 자신의 등을 때리는 아픔에 눈을 떴다.
"일어나. 밥 먹어."
준호가 힘들게 식탁으로 걸어갔다. 혜자가 국을 퍼 준호의 앞에 놓아 주었다. 준호의 앞에 앉아 혜자가 반찬을 밀어주며 말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래?"
"이게 어때서요 문제 없이 잘만 살고 있는데."
"이 녀석아 내가 말하는 게 무슨 뜻인지 알면서 자꾸 말 돌리지 마라."
"모르겠는데요?"
"선 봐. 아버지가 좋은 자리 알아오셨어."
"싫어요."
"왜? 도대체 사지 멀쩡한 놈이 왜 결혼할 생각을 안 해 선보라고 해도 보지도 않고. 언제까지 이러고.."
"결혼할 사람 있어요. 곧 보여 드릴게요."
혜자가 마시던 커피를 잘못 삼켜 기침을 하며 말했다.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또 피할 생각이면 각오해라."
"진짠데. 안 믿으시면 어쩔 수 없고요."
"언…. 언제 보여 줄건대?"
"조만 간요."
혜자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준호를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준호가 북엇국을 한 숟갈 떠먹으며 혜자에게 말했다.
"어머니?"
혜자가 고개를 들어 준호를 바라보았다.
"형은 언제까지 저렇게 안보실 건데요?"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어서 밥이나 먹어. 그 아가씨 이야기나 해봐."
준호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혜자를 바라보았다.
"어머니. 저는 저 때문에 그리고 내 가족들 때문에 그 아이가 상처 받는 거 원하지 않아요."
혜자가 식탁에 기대었던 몸을 세우고 팔짱을 끼고 의자에 똑바로 앉아 준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제가 원해서 붙잡고 있는 아이예요. 결혼도 그 아이는 생각도 안 하고 있어요. 아직은 저 혼자 생각이고요."
혜자가 싸늘한 얼굴로 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니 말이 나한테는 아가씨가 내가 반길 만큼 괜찮은 조건이 아니라는 소리로 들리는구나. 그것도 그쪽은 싫다는데 너 혼자 이러고 있는 거고."
준호가 대답도 하지 않고 혜자를 바라보았다. 혜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벗어나 거실에 놓아둔 가방과 가디건을 집어 들었다.
혜자가 현관으로 나가기 전 의자에 앉아 밥그릇에 고개를 박고 있는 준호에게 말했다.
"조만간 아버지 있을 때 집으로 와. 그리고 얼마나 가관인지 그 아가씨 얼굴이나 좀 보자."
준호는 움직이지도 않고 혜자가 나가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더 이상 밥은 먹을 수 없었다. 텅 빈 거실에 준호의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호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연수였다. 준호는 연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금까지 안 좋았던 기분이 눈 녹듯 사라지는거 같았다. 준호의 입가에는 어느새 행복한 미소가 가득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