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시연>
눈을 뜬 시연은 문득 자신이 꿈을 꾸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분명 얼마 전까지 자신은 한국에서의 과거는 잊고 애써 땀을 흘리며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 그 일은 몇 개월 더 이어질 예정이었고 그게 자신의 일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눈을 뜨면 새하얗고 폭신한 침대 위였다. 고개를 틀면 자신을 끌어안은 채 잠든 은성이 보였다.
시연은 조심스럽게 몸을 돌려 은성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그새 조금 그을리긴 했지만 잘생긴 얼굴은 여전했다. 이 반듯한 얼굴과 짙은 눈썹, 선명한 동공에 반해 가당치도 않은 마음을 품었었다.
“어쩜 이렇게 잘생겼지? 이러니 현실 같지가 않잖아….”
그가 깨지 않게 나직이 속삭이며 시연은 검지로 그의 콧잔등을 쓸었다. 높게 솟구친 콧날이 날카로웠다. 길게 뻗은 눈매 사이론 속눈썹도 꽤 길게 드리워 있었다.
“눈이 여자보다 더 고우면 어쩌란 거야. 질투 나게.”
속눈썹을 건드리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연은 눈을 감고 얼른 자는 척했다.
은성이 조심스레 몸을 뒤척였다. 그건 요 며칠 사이 생긴 습관이었다. 밤마다 자신이 괴롭혀 시연은 매번 늦잠을 잤다. 그런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는 행동은 눈을 뜨자마자 무의식처럼 작동했다.
그가 제 품에서 고이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젯밤에도 그녀의 안에 몇 번이고 파정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예전엔 그녀와의 결혼도 예상치 못했고, 이렇게 몸을 섞게 될 줄도 몰랐다. 이제 시연은 가끔 그를 도발하기도 했다. 그러곤 곧 몰아친 후폭풍에 후회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시연아….”
나직이 부르는 이름이 지금도 낯설었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녀가 제게 왔을까. 품에 안고,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나시연…….”
그 고운 이름 석 자를 부르며 그가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시연이 간지러운지 움찔거렸다. 그녀를 잠깐 바라보기만 하다 먼저 일어나려 했던 그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가 그녀를 깨우지 않기 위해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시연은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도저히 자는 척하기 힘들어 천천히 눈을 떴다. 깨어 있을 그를 상상했던 그녀의 눈매가 동그래졌다.
그는 분명 잠에서 깨 제 이름도 부르고 귀도 만졌는데 지금은 자고 있었다. 아니 자는 척하고 있었다. 시연의 입술에 미소가 맺혔다.
시연이 흠, 목을 가다듬었다. 혼잣말인 척 조용히 읊조렸다.
“은성 오빠…….”
그를 부르자 귀가 쫑긋했다. 시연이 애써 웃음을 참고 속살거렸다.
“나는 있잖아요… 오빠를 항상 오빠라고 부르고 싶었어요. 오빠를 처음 만났던 날을 잊을 수 없었거든요…….”
은성은 잔잔한 그녀의 고백에 눈이 간질거렸다. 이런 건 바른 정신으로 듣고 가슴에 새겨야 하는데 지금 눈을 뜨자니 좀 곤란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고백은 이어졌다.
“제게 가족은 특별한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오빠가 앞으로 가족이 된다잖아요. 비록 형부라는 자리긴 하지만 그래도 전 좋았어요. 어쩐지 오빠가 가족이 되는 게 참 좋았어요.”
은성은 더는 참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그녀의 또렷한 시선이 단숨에 그의 눈동자에 담겼다. 시연은 그가 깨어 있었던 걸 아는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백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그를 품었다.
“오빠가 비록 반년뿐이지만 남편이 되는 것도 좋았어요……. 두근거렸어요. 그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어요. 개중에서 오빤 잘 모르겠지만 ‘은성 씨.’라고 부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그가 느리게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너무 잘 감춰서 전혀 몰랐어.”
허스키한 음성에 시연의 심장 박동이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빨라졌다. 그를 보고 있으면 언제나 그렇듯, 그건 그녀의 무조건 반사와도 같은 것이었다.
“오빨 내 마음에서 밀어내려고 애썼어요.”
“이젠 그러지 마.”
애달픈 시선이 그녀를 온통 쓰다듬었다.
“안 그래요. 이젠 오빠를 항상 오빠라고 부를 거야.”
그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솜털 가득한 귓가에 입술을 묻었다.
“그렇게 해. 내가 백발노인이 되어도 꼭 그렇게 불러.”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사랑스러웠다.
“할머니가 오빠, 오빠 하면 정말 웃기겠다.”
“무슨 상관이야. 우리만 좋으면 됐지.”
“나중에 무르기 없기에요.”
은성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가 한 가지를 털어놓았으니 자신도 한 가지를 고백해야 했다.
“난 널 지켜보면서, 항상 나쁜 상상을 했어.”
그녀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를 은성은 보란 듯이 배신했다. 매끄럽게 끌려 올라가는 한쪽 입매가 그의 말처럼 꽤 나빠 보였다.
“널 안고 싶었어. 키스하고 싶었고, 옷을 벗기고 싶었어. 결국엔 네 하얀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자위했지. 넌 상상도 못 할 만큼 나쁜 놈이었어.”
시연이 놀란 듯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그 손을 그가 치우곤 그녀 위에 올라탔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길이 아까완 달리 제법 위험해 보였다.
“설마 내가 미성년자일 때 그런 건 아니….”
그가 엄지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쓸어 만졌다. 벌어진 입술 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어 그녀의 혀를 농락했다.
“언제부터였을 것 같아?”
그는 곧 그녀의 혀를 만졌던 손을 제 입술로 가져가 쪽 빨았다. 시연은 숨이 턱 막혔다.
“언제부터……였는데요?”
그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졌다.
“지금부터 나시연이 잘 협조하면 알려 줄게.”
말이 끝난 동시에 더는 말이 필요 없다는 듯 입술이 겹쳐졌다. 시연이 밀어낼 틈은 없었다. 은성은 이제 그녀의 약점을 너무 잘 알았다. 다리 사이 은밀한 어딘가와 가슴 어딘가, 귓불과 입 속 예민한 곳이 차례차례 점령당하자 그녀가 더운 숨을 토하며 흐트러졌다.
은성의 머리가 이불 속으로 사라졌다. 시연이 허둥대며 신음했다.
“하, 오빠… 은성 오빠……!”
“더, 더 크게 불러 봐!”
이후 그의 목소리는 한동안 들을 수 없었다. 이불 밖에서도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처박힌 그의 머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꺄으으…!”
시연이 교성을 내지르며 눈물을 떨궜다. 어제 세차게 빨려 아직 붓기도 다 가라앉지 않은 여린 살이 또다시 그의 입 속에서 녹아내렸다.
“아아, 제발… 그만요! …협조할게요!”
입술에 그녀의 애액을 잔뜩 묻힌 그가 이불 밖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씩 웃는 입매가 야살스러웠다.
“그래.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적극적인 협조 부탁해.”
대답도 하지 못한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시연이 은성의 욕망에 계속해서 잠식해 갔다.
지이잉. 지이잉.
침대 사정은 알지도 못한 채 은성과 시연의 전화기가 차례로 울었다. 며칠째 무관심 속에 버려진 전화기 화면이 방금 도착한 메시지로 잠깐 밝아졌다.
<지은성 사장님, 대체 지금 어디야! 부모님 한국 오신다는데 빨리 전화 안 받아?>
은율이었다. 은율의 메시지는 이어 하나 더 도착했다.
<참, 나시연한테 전해. 이번에 결연 맺은 아이 사진 부모님이 궁금해하시니 잘 보관하라고. 어머니가 이번에 참여한 구호 활동 중에 아마도 그 아이와 관련해 나시연을 우연히 함께 만나신 것 같아.>
그 뒤를 이어 한 비서의 메시지도 도착했다.
<사장님, 제발 빨리 좀 오시면 안 될까요? 한국 매출 규모가 믿기 힘들 정도로 커진 건 좋은데 회장님께서 오시는 건 무섭습니다. 제발요, 저 사장님 안 계시면 안 됩니다아아!>
징징대는 소리는 전화기 한정이었다. 지금 은성의 머리는 다른 행복으로 꽉 차 다른 건 담을 틈이 없었다.
“하아… 은성 오빠! 하으읏! …제발요!”
시연이 자지러지는 중 이어 그녀의 전화기로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친구야, 넌 날 잊은 거니? 그런 게 분명해. 난 너 없이 이렇게 쓸쓸한데…….>
보원이었다. 연이어 승률의 메시지도 그녀의 전화기를 밝혔다.
<비행기 타고 오는 것 맞아? 참, 너희 아버님 요즘 좋아 보이시더라. 얼마 전에 지나가다 우리 호텔에서 한 번 뵀는데 하시는 일이 잘되는지 얼굴이 무척 밝으셨어. 다음엔 너와 함께 봉사도 나가고 싶다고 하셨어. 도착하면 바로 전화해. 이러다 우리 보원이 목 늘어난다.>
전화기 주인이 확인은 안 했지만 사실 메시지 내용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문제는 망망대해 크루즈 안 객실에서 벌어지는 중이었다.
“하… 시연아, 좀 더 협조해야지?”
“꺄아! 오빠, 설마 변태였어요?”
“남편한테 변태라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꺄, 꺄아! 아읏…!”
“이제부터 더 자세히 알려 줄 테니까, 잘 새겨. 알았지?”
“아응! 하, 읏, 그, 그만……! 으흐읏!”
아무도 몰랐던 은성의 계획은 착실히 이행되고 있었다. 둘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헤어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엉겨들었다.
시연이 받아 주지 않았으면 없었을 시간이 그렇게 바다 위에서 한가로이 흘러갔다. 시연은 자신이 품었던 마음에 대한 대가를 착실히 치르고 있었다. 식지 않는 뜨거움으로, 받아 내기 힘들 만큼의 커다란 사랑으로.
“시연아… 사랑한다.”
* * *
<한국 HLA 그룹 사장실>
“이걸 또다시 하란 말씀이십니까?”
한 비서가 한숨을 푹 내쉬며 어려움을 토했다. 집무 책상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앉은 은율이 눈을 고깝게 치켜들었다.
“내가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고 안 했던가요?”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한 비서가 들리지 않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아닙니다! 곧장 전달하겠습니다!”
“참, 그리고 커피 맛이 변했던데. 어떻게 된 거죠?”
돌아서려던 한 비서가 애써 미소를 띠었다.
“바리스타가 그만뒀다고 하네요. 그것도 입에 맞으시는 곳으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문 실장이었으면 내가 이런 소리 할 일도 없었을 텐데……. 쯧.”
문고리를 잡은 한 비서의 귀로 짜증 섞인 한탄이 들려왔다. 한 비서는 솟구치는 분노를 꾹 누르고 사장실을 나왔다.
“후우…….”
한숨을 내쉰 한 비서가 김 비서의 책상 위에 반려된 서류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 보고서 새로 해서 올리랍니다.”
“네에? 그거 어제 밤새워서 한 건데요?”
“아니면 그건 내가 할 테니, 김 비서가 오늘부터 지은율 이사님 보좌하시겠어요?”
김 비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 비서가 서둘러 서류를 펼쳤다.
“아이고, 이게 여기가 잘못됐구나. 이번엔 더 꼼꼼히 봐야겠네요….”
김 비서를 한 번 노려본 한 비서가 재킷을 집어 들었다.
“커피 전문점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십시오!”
엘리베이터에 오른 한 비서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번에도 은율에 대한 불만은 여지없이 튀어나왔다.
“다 맛있기만 하던데 아무거나 좀 먹으면 안 되나? 이런 것도 우리 사장님이 훨씬 나아. 훨씬!”
불만을 토로하던 한 비서의 휴대전화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체로 구겨져 있는 한 비서의 얼굴이 오래간만에 환해졌다.
<한 비서님, 저희는 열심히 가는 중입니다. 선물도 꼭 사 갈 테니 은성 오빠 연락 없다고 너무 욕하지 마시고 너그러이 봐주세요. 저도 더 늦지 않도록 오빠를 열심히 설득하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요즘 은성을 대신해 그의 아내인 시연이 종종 연락을 해 왔다. 예전 일을 생각하면 애틋하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메시지를 받으면 그저 웃음만 났다.
시연이 행복해 보여서 오지 않는 은성을 탓하기도 힘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생각하면 더 오래 여행하다가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 내가 좀만 더 참으면 되지 뭐. 힘내자, 한성임!”
물론 그건 대체로 아주 찰나일 뿐이었지만.
지이잉.
<커피, 언제 옵니까?>
또 은율이었다. 한 비서의 표정이 처음처럼 짜증으로 뒤덮였다.
“어우, 참자. 참아! 내가 진짜 그 일만 아니었어도…….”
사실 그간 한 비서에게도 은율과 지내며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를 회사에 남아 있도록 붙잡는 일이 있었다.
[이건 절대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은율은 예전처럼 한 비서에게 또 비밀을 만들었다.
[왜요? 저 사장님께 보고 안 드리면 이번엔 정말 잘립니다!]
[지금 사장 대리는 접니다. 이걸 보고하면 제가 그날로 잘라 드리죠.]
은율과 은성은 서로 싫어하는 듯하면서도 때론 몰래 챙겼다. 은성은 은율 모르게 희서를 신경 써 달라고 한 비서에게 부탁했고, 은율은 또 은성 모르게 그를 돕기도 했다.
시연을 보낸 후 무너져 가는 은성을 일으킨 게 은율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한 줄은 모르지만 한 비서의 부탁에 거절 없이 와 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시연의 구호 활동 지역에 본사 사모님을 보냈다. 정확히는 장소와 일정을 겹치게 해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도록 했다. 은율의 의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일로 시연에 대한 회장님 내외의 첫인상이 좋아진 건 확실했다.
“조금만 더 참자. 조금만……. 곧 배가 도착할 거야…!”
그래도 은율이 함께 일하기 어려운 상대인 건 변함없었기에 한 비서가 이를 악물고 뛰었다. 땀방울이 그의 이마에서 흩어졌다.
<은성>
스물둘 파티.
은성은 파티 따위를 썩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싫었고 친구들이 이 여자 저 여자 찝쩍이며 평을 하는 것도 듣기 귀찮았다.
그러나 때론 참석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는 때가 있었다. 오늘이 그날이었다.
[사람들 만나기 귀찮으면 구석에 얌전히 처박혀서 술이라도 마셔라.]
아버지의 엄포가 떨어졌다.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은성을 잘 알기에 하는 말이었다.
은성은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그래도 파티장에 가면 평소엔 잘 볼 수 없던 다양한 술을 맛볼 수 있었다.
“와, 물 좋네!”
“난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역시나 친구라고 하는 놈들은 벌써 여자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며 이러쿵저러쿵 소리를 늘어놓았다.
“지은성, 넌 안 가냐?”
“귀찮아. 너나 가.”
친구들은 은성을 두고 여기저기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어느덧 파티 분위기도 무르익고 어른들도 삼삼오오 모여 은밀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야, 봤냐? 저렇게 참신한 애가 있었어?”
“왜? 누군데? 어디?”
친구들의 시선이 유독 한 곳에 쏠렸다. 은성은 여전히 술만 홀짝이며 의미 없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저기, 저기! 안 보여?”
“아, 쟤? 나 쟤 알아. 지은성, 너도 나소혜 알지?”
친구 한 놈이 은성의 어깨를 툭 쳤다. 갑작스러운 가격에 은성이 들고 있던 술이 흔들려 쏟아졌다. 눈썹을 모은 그가 친구에게로 시선을 돌릴 때 친구들의 탄성이 쏟아졌다.
“와아…!”
“와우, 예쁜데?”
“쟤 오늘 내가 찍었다.”
갑자기 친구들 사이에서 소혜라는 여자를 두고 다툼이 일었다. 은성은 술을 쏟은 친구에게 한소리 하려다 한숨을 쉬고 치웠다. 그런데 친구 놈은 또다시 은성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지은성, 넌 어때? 네 눈에도 확실히 괜찮지?”
“괜찮긴 뭐가 괜찮…….”
짜증을 내던 은성에게 그 일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났다. 친구 때문에 강제로 소혜라는 여자를 봐야만 했던 시간, 그건 은성에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다.
“비켜, 비켜! 지은성 네가 말해 봐. 난 네 의견이 항상 궁금했어.”
그녀를 두고 친구들이 썰물처럼 양 갈래로 비켜났다. 그 끝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밀려나는 썰물이 신기한 듯 그 길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여리고 맑아 보이는 눈빛이 검은 하늘 중앙에서 하얗게 빛나는 달처럼 깨끗했다.
친구들의 말소리가 윙윙거리며 귀에서 멀어졌다.
“어? 어디 갔지? 방금까지 있었는데.”
“저쪽에 있잖아!”
“아, 저기로 갔네. 야, 은성아. 그쪽 아니고 저쪽.”
친구들이 은성의 시야를 흐트러뜨렸지만 그런 건 이미 상관없었다. 은성은 그게 무엇이든 마음을 사로잡으면 한동안 그것에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는 습관이 있었다. 누가 잡아끌어도 움직이지 않고,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다.
오직 눈에 들어온 그 사물만을 각인하듯 뇌리에 밀어 넣었다.
“뭐야, 얘 또 뭐에 꽂혔네.”
“됐다, 됐어. 저 자식 의견이 뭐라고. 그럼 나 먼저…!”
“야! 그런 게 어딨어!”
드디어 친구들이 떨어져 나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친구들은 처음부터 은성에게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었는지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맛있어 보이는데 조금만 먹어 볼까?”
달처럼 깨끗하고 순진해 보이는 여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흥미로운 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녀의 가는 눈썹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아으, 쓰다.”
말로는 쓰다면서 얼굴은 여전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곳이 지겹고 또 지겨운데 그녀는 뭐가 저렇게 흥미로울까.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넌 뭐가 그렇게 재밌어?
“응? 언니는 어디 갔지?”
그녀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그는 여태 그녀의 입술 모양을 보며 말을 읽어 냈다. 가까이 가서 들어보고픈 욕구가 일었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다 그를 보았다.
“……!”
은성은 그때 자신이 왜 나아가지 않고 얼어붙은 듯 멍청히 서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여태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가슴에서 휘몰아치는 걸 느꼈을 뿐이었다.
눈썹처럼 가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동그란 어깨 위에서 사르르 날아다녔다. 선명하고 투명한 눈동자는 그를 담았다. 여태 그렇게 마무리가 깨끗한 눈매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오늘 참석하는 이는 눈여겨봐. 모두 나이가 찬 애들이니 개중에 네 상대가 있을 거다.]
어머니가 한 말이었다. 주요 인사들이 많이 참석한 파티이고 그들의 자제가 공식적으로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했던 말은 금세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오직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만이 또다시 그의 뇌리를 온통 메웠다.
“언니, 어디 다녀왔어?”
벌어졌다가 다물어지는 입술이 달콤한 과실처럼 붉었다. 문득 그 입술을 맛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를 보고 키스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이내 일행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언니, 나랑 저쪽에 가 보지 않을래? 저기 책장에 어떤 책이 있는지 궁금해.”
자꾸 그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하는 게 싫었다. 좀 더 자신을 보고 궁금해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곧장 뒤를 돌았다.
“와, 좀 까칠한데?”
“너 까였어!”
은성에게도 곧 친구들이 몰려와 깔깔거렸다. 은성은 흐트러지는 집중에 미간을 구겼다.
“야, 지은성. 이번엔 네가 한번 가 봐.”
친구는 그녀를 가리키며 은성을 떠밀었다. 은성은 이번엔 거절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제대로 자신을 각인시키고 싶었다. 친구들이 그녀를 가로채기 전에 자신이 가질 생각이었다.
은성은 술잔을 완전히 내려놓고 벗어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가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진짜 가는데?”
“그러게, 저 자식이 웬일이야?”
그때 아버지의 비서가 나타나 그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버지의 호출이 없었다면 그녀와 만나 인사하고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았을까.
비서를 따라가면서도 은성은 돌아와 그녀부터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방에는 부모님과 함께 처음 보는 어른 두 분이 함께 있었다. 은성은 그들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어머니의 표정이 다른 때보다 더 부드러워 보였다.
“은성아, 소개할 아가씨가 있단다.”
“자네가 은성이로구먼. 과연 들은 대로 훌륭한 청년일세.”
어머니에 이어 다른 어른이 그를 칭찬했다.
“은성아, 이쪽은 나시환 사장님이시란다. 오늘 나 사장님과 좋은 말이 오갔어.”
그때 이어 나소혜라는 이름을 듣지 않았다면, 아니 처음부터 친구들이 말하는 이가 누군지 정확히 새겨들었더라면 은성은 그 만남을 그 자리에서 동의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친구들에게서 어렴풋이 들은 그 이름이 분명 그녀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다시 만나고자 하는 성급한 바람이 어긋난 만남으로 이어질 거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후 시연을 만나고 좌절하리란 사실도 알지 못했다. 나이 어린 그녀를 마음에서 버리지 못하고 언니와의 약혼을 선택하리란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녀 때문에, 자신이 평소 하지 않던 실수를 연거푸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 때문에, 영원히 흔들리게 될 줄도 전혀 몰랐다.
은성은 그녀와의 만남을 약속하고 들떴다. 그녀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그녀가 소개하는 이름은 어떤 느낌일까. 어떤 책을 좋아할까. 좋아하는 음식은 뭘까. 혹 자신처럼 술을 즐길까.
그녀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할까…….
처음으로 옷을 고르는 것에 고민이 되었다. 처음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차림으로 거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신발을 고르는 것도 고민하는 제 모습이 한심해 피식 웃었다.
그러나 정작 그녀를 만나러 나가는 길은 떨려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그날만 생각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그 시간, 그 순간을.
그녀는 자신을 기억할까. 당연히 기억하겠지? 그래도 그렇게나 오래 서로를 쳐다봤는데.
그때 시연은 단지 그 너머의 책에 꽂혔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그 시간이 불과 2, 3초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도 모른 채, 그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누르고 출발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든 시간이었다. 자꾸만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입가에 떠돌았다. 그가 계속 헛기침하며 내달리는 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궁금해….]
자꾸만 그녀가 자신을 보며 중얼거리던 말이 생각났다.
[가까이 가고 싶은데…….]
이런 자만이 우습긴 하지만 한껏 멋을 냈으니 그녀가 자신을 보면 실망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의 입가에 그녀를 닮은 미소가 배어났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선명한 눈동자와 붉은 입술이 둥둥 떠다녔다.
“예뻐. 딱 내 취향이야.”
그가 뒤늦게 그날 친구들의 질문에 대꾸했다.
“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기사가 듣곤 물었다. 은성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