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16)

11

시연이 눈을 떴을 땐 곁에 은성 혼자였다. 그녀가 눈을 뜨자 은성은 난생처음 보는 놀란 얼굴로 의료진부터 호출했다. 그가 새카만 눈썹을 보기 흉하게 일그러뜨렸다. 시연은 그의 눈썹을 반듯하게 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시연아…….”

그는 어떤 심정인지 모르겠지만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어릴 때 자신이 다치기라도 하면 엄마가 그렇게 불러주곤 했다. 시연은 그게 신기하고 기분 좋았다.

“은……성 씨…….”

“나 보여? 내 얼굴 똑바로 보여?”

시연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은성이 미간을 펴며 커다랗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곧 또 엉망이 된 얼굴이 시연을 나무랐다.

“너 정말……!”

때마침 의사가 들어와 시연은 은성의 훈계를 피했다. 다행이었다. 선생님처럼 혼내는 은성은 그다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의사는 시연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한 후 긍정적인 말을 남겼다.

“다리는 무리만 안 하고 잘 치료하면 젊으시니 금방 나을 거고요, 뇌진탕은 당분간은 주기적으로 체크하는 게 좋습니다.”

시연은 귓가로 흘러드는 말을 들으며 자신이 다시 한번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자신은 금방 나을 테고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다.

그녀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눈을 감는데 의료진이 나가고 은성이 다시 돌아왔다. 시연은 그래도 괜찮다는 한마디는 해 주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눈을 떴다.

“나시연.”

그런데 그가 따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걱정은 온데간데없고 혼날 각오하라는 매서운 눈초리만 있었다.

걱정 다음이 훈계인 건 시연도 잘 알고 있었다. 시연이 눈가를 찌푸렸다.

“아… 머리 아파…….”

살짝 고개를 돌리며 아픈 척하자 한숨이 들렸다. 다행이었다. 연기가 먹혔다.

“많이 아파?”

“조금요. 잠깐만 더 자고 나면… 완전히 괜찮아질 것 같아요.”

시연은 그래도 자신이 거의 괜찮다고 둘러 전달했다. 이 정도면 꾸지람도 피하고 의도도 전할 수 있었다. 그녀가 속으로 만족해하며 잠을 청하려는데 또 부름이 들려왔다.

“나시연.”

이번엔 좀 더 낮고 거부할 수 없는 압박이 든 목소리였다. 은성이 이렇게 부르면 시연은 학생 때도 꼼짝하지 못하고 발을 묶였다.

그녀가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슬쩍 눈을 떴다. 머리가 조금 아팠지만 참을 만했기에 미간만 찡그린 채 그를 보았다.

은성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또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연은 속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번엔 꾸지람을 피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표정이 애매했다.

어딘지 모르게 복잡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힘든 표정이었다. 시연은 되레 미안해졌다.

“죄송……해요.”

은성이 작전을 바꾼 걸까. 그렇다면 잘 먹혔다. 그녀의 입에서 바로 잘못했다는 인정이 나왔으니까.

그가 또다시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도 같고 없는 것도 같았다. 어쩌면 답답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은성…… 씨……?”

그녀가 조심스럽게 불러도 은성은 쉽사리 대꾸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곧 완전히 등을 돌렸다.

시연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혹시 자신이 너무 큰 잘못을 해서 죄송하다는 말로는 그의 마음을 풀 수 없는 걸까.

“정희서 씨랑… 지 이사님은…… 괜찮으신 거죠?”

지금 이 질문을 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시연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그가 돌아선 채 짧게 답했다.

“괜찮아.”

“다행이다.”

천천히 돌아선 은성이 붉어진 눈매로 시연을 향해 입가를 당겼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려는 것 같았다.

“다른 데 아픈 덴 없어?”

“제 다리는… 부러졌나요?”

깁스했는지 왼쪽 다리가 무겁고 불편했다.

“부러졌다고 봐야지. 다행히 어긋나거나 으스러진 것 없이 깨끗해서 깁스 잘하고 있으면 금방 붙을 거라고 하셨어.”

“그래요? 그것도 다행이네요….”

시연이 짧게 웃었다. 사실 차에 부딪힐 때의 고통만 생각하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 정도면 정말 다행이었다.

“다행?”

“그게, 그나마 다행이라고요.”

곧장 날아오는 타박에 시연은 말을 바꾸었다. 은성은 지금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었다. 시연의 눈엔 그게 보였다. 그래도 크게 꾸짖지 않고 지금은 기다려 줘서 고마웠다.

사실 거의 괜찮긴 했지만 몸이 여기저기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타박상이 많아. 당분간은 누워서 꼼짝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네… 그렇게 할게요.”

“불편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해. 참지 말고.”

“네.”

대답하는 시연의 눈이 무거워졌다. 아직은 잠이 더 필요한 듯했다.

그가 따스하게 말했다.

“더 자.”

“네…….”

자신을 걱정하는 눈동자가 조금씩 흐려졌다. 시연은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 * *

다음번 눈을 떴을 때 보인 사람은 보원과 승률이었다. 보원이 글썽글썽한 눈으로 시연을 끌어안았다.

“시연아……! 흐엉……!”

보원은 울고 그녀의 옆에서 승률은 걱정 넘치는 표정으로 시연을 내려다보았다. 시연은 처음보다 손쉽게 입가를 말았다.

“나 괜찮아. 보원이 날 좀 놓아주면 더 괜찮을 것 같고 말이야.”

시연의 말에 보원이 화들짝 놀라며 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시연을 걱정했다.

“내가 너 어떻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미안, 그날은 내가 너한테 정말 고맙고 미안해.”

“뭐가 미안해? 미안한 거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어서 다 나아서 일어나기나 해!”

울먹이며 소리치는 보원을 시연이 다독였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승률이 시연에게 말했다.

“너 누구 간 떨어지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랬냐? 나 살면서 그렇게 무서웠던 순간은 처음이었어.”

“하하, 미안. 내가 정말 잘못했어.”

“너 탓하려고 한 말은 아니야. 그냥 그랬다고. 나 정말 놀랐어.”

사과는 했지만 시연은 승률이 그때 있었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차에 부딪히고 의식을 잃기 전 승률이 보원의 옆에 서 있었다. 시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런데 승률아, 넌 그때 어떻게 거기 있었어?”

“그건 차차 이야기하자. 어쨌든 너 크게 다친 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이렇게 웃는 거 보니까 조금 안심이야.”

“그래. 차차 얘기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친구들이 다녀가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시연의 병실을 찾았다. 시환의 모습은 예전과는 좀 달랐다. 젊을 때와 달리 나이가 들었어도 항상 말끔하고 단정하게 다녔는데 지금은 흐트러진 모습을 다듬지도 못했다.

시연이 의아한 듯 쳐다볼 때에야 시환은 제 꼴을 의식하곤 뒤늦게 손으로 머리카락을 다듬었다.

“시연아… 괜찮니?”

질문하는 목소리는 작았고 외모처럼 흐트러졌다.

“네, 전 괜찮아요. 죄송해요, 걱정 끼쳐 드려서.”

“아니다. 네가 뭘 죄송해. 잘못한 건 나지. 다 내가 못나서 이 상황이 된 거지. 아비가 너한테 정말 몹쓸 짓을 했구나…….”

시환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머뭇머뭇하다가 손을 뻗어 시연의 얼굴만 쓸더니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

“내가 정말 미안하구나…….”

옆에서 지켜보던 은성이 그런 시환을 다독여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곧 돌아온 은성이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너 더 좋아지면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장모님이 여러 가지 일로 구금되신 상태야. 장인어른은 그 일로 좀 바쁘시고. 네 옆을 지키기 힘들어서 내게 널 부탁하셨어.”

그제야 시연은 아버지가 친구들보다 늦은 이유와 그토록 미안해하는 게 이해되었다. 안타까워하는 시연을 은성이 다독였다.

“일단 너는 다른 생각하지 말고 회복에만 집중해. 너 좀 더 나으면 경찰이 조사하러 올 거야.”

“네…….”

그러고 보면 이 일은 저 하나의 희생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어릴 때는 엄마의 죽음이 사고라는 말만 들었고, 기억을 잃어 당시 상황을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달랐다. 자신이 앞서 질주하려는 차를 막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상황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는 잘못했고, 잘못한 사람은 처벌받아야 했다.

“사실 나도 너한테 묻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건 나중에 하자. 일단 너 다 나으면 그때 천천히 얘기해.”

“네….”

당시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손을 잡고 당황해하던 건 지금 생각해 보니 은성이었다. 굵직한 목소리였고 또한 자신을 그렇게 걱정할 만한 사람은 그나마 그뿐이었다. 그가 현장에 있었다는 건 그도 어머니의 계획을 알았다는 말인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승률이는 어쩌다 현장에 있었을까.

모든 게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시연은 은성의 말처럼 먼저 회복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신이 회복해야 은성에게 혼도 나고 그때 일을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을 테니까.

시연이 조그맣게 물었다.

“그런데 출근은… 안 하세요?”

날카로운 눈초리가 날아들었다.

“내가 알아서 해.”

“네.”

시연은 또다시 눈을 감았다. 슬슬 배가 고팠지만 지금 그런 말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꼬르륵. 막지 못한 배꼽시계 소리에 은성이 나지막이 웃더니 얼마 후 밥을 가져왔다.

* * *

시연이 은율을 만난 건 며칠이 지난 뒤였다. 이젠 병실에만 있기엔 좀이 쑤셔 목발을 짚고 병원 여기저기를 쏘다닐 즈음 그녀가 병실을 찾아왔다.

은율은 시연을 마주하고도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가 사 온 음료수를 천천히 정리하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다른 음료를 꺼낼 때에야 처음 입을 뗐다.

“너 바보야?”

예상치 못하게 날아든 구박에 시연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음료수가 맘에 안 드시면 다른 종류로 드릴까요?”

“지금 그런 말이 아니잖아.”

“그럼 제가 왜 바보예요?”

은율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 제정신이야? 어떻게 달리는 차를 막아설 생각을 해? 네 몸이 무슨 강철로 만들어진 줄 알아?”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거예요. 그러니 그 이야긴 그만하시면 안 돼요? 안 그래도 저 은성 씨한테 혼날 거 밀렸어요. 지금도 눈치 보느라 밥 넘기기도 힘들어요.”

은율이 또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분노를 참는 듯하던 은율은 결국 성질을 냈다.

“쭉 지켜봤는데 너 이제 말짱한 거 같아. 다리 부러진 거야 시간 지나면 낫는 거고, 이제 더는 못 참겠다.”

시연은 침대에 앉아 일부러 뭉그적거리며 음료를 따 마셨다. 들으나 마나 같은 소리일 게 뻔했다. 입을 축이며 고개를 살짝 내리깔고 은율을 쳐다보았다.

은율은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치더니 눈을 부릅떴다.

“너 거기 어떻게 알고 간 거야?”

“그게…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오래전에 거기 간 적 있거든요.”

은율은 잠깐 대화를 멈추었다. 시연이 어느 정도 회복되기를 기다리면서 조사도 받고 여러 정황 설명을 들었다. 그중에 예전 시연의 친모가 사고를 당한 장소가 리모델링 전 그곳이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를 잃고 스스로 기억까지 지운 애가 그 무서운 곳에 제 발로 뛰어들었다고?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너 혹시 숨기던 정신질환 있어?”

“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무슨 생각으로 거기에 가서 차를 가로막을 생각을 했느냐 말이야. 설마… 나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

은율은 마지막 말까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나시연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애인지 궁금했다. 사고가 나는 순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연이 뛰어들지 않았다면 그 차는 자신을 향했을 거란 사실을.

시연이 쭈뼛쭈뼛 마시던 음료수를 내려놓았다.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이사님이 다칠까 봐 그랬다고 하면… 더 혼내실 거죠?”

시연은 마치 사고 치고 혼날까 봐 걱정하는 어린애 같았다. 은율은 기가 막혔다. 설마 정말 자신 때문에 그랬다고? 제 몸이 다칠 걸 알면서?

“그럼 혼나야지. 혼 안 날 줄 알았어?”

제법 높은 음성에 시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반면 은율은 이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시연이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시연은 거짓말을 모르는 애 같았다. 하지만 그 집안 가족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의심하고 몰아붙였다. 그런데 사고 치고 혼날 게 걱정돼 순진하게 눈을 감는 여자애는, 이제 혼내기는 힘들었다.

“나 때문이라고…….”

시연이 슬며시 눈을 떴다.

“사실 못 믿으셔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건 단지 제 마음 편하려고 그런 거기도 해서요.”

“친모 사망사고 얘기는 나도 들었어. 설마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여긴 거야?”

“어리석게 들리시겠지만 그 순간엔 그랬어요. 어쩌면 그건 순전히 제 불안일 수 있지만, 그래도 그땐 어쩔 수 없었어요. 몸이 먼저 움직일 땐 도리가 없잖아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하는 시연에 은율은 막힌 숨을 탁 터트렸다.

허탈했다. 그토록 그 집안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시연은 그 다짐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은율이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시연을 찾은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저 혹시 정희서 씨는… 지금 괜찮은가요?”

그래, 희서. 나시연이 희서를 위해 2차 검사를 받았다는 얘길 들었다. 희서는 시연의 사고 충격으로 한동안 심하게 앓았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고 여전히 이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괜찮아.”

“아, 다행이다. 은성 씨에게 괜찮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사실은 걱정됐거든요.”

은율이 시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연은 괜스레 민망해 제 볼을 쓸었다.

“너 바보 맞지?”

대화가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신을 아끼는 마음이 그렇게 없어?”

“사고 얘기는 말씀드렸지만….”

“됐어.”

은율은 대답을 잘랐다. 대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여태 친모 기억을 잃고 지낸 것 같던데, 이제 완전히 기억난 거야?”

엄마 얘기에 시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기억이 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괜찮아진 건 아니었다. 새로 기억난 지금, 그간 잊은 시간만큼 엄마의 사고와 부재가 못 견디게 아팠다. 다만 당장은 그런 제 심정을 드러낼 때가 아니라 감추었다.

“그런 것… 같아요.”

“……힘들겠네.”

시연이 은율을 보았다. 목소리가 어쩐지 위로하는 것 같았다. 감정을 일으킬 생각 없는데 미약한 위로에도 시연의 설움은 금세 목을 타고 올라왔다. 아마도 여태 그런 위로를 받아본 적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괜찮…….”

시연은 언제나처럼 괜찮다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지 않아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저 아파요. 너무 아파요.’라고 응어리를 쏟아 내고 싶었다.

묵직한 그림자가 시연에게 가까워졌다. 곧 은율이 시연을 가볍게 감싸 안았다.

“안 괜찮겠지. 어린애가 엄마가 죽는 걸 봤는데 어떻게 괜찮아.”

시연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은율의 품에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흑, 흐흑…….”

그간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다.

“엄마… 엄마…….”

항상 부르지 못했던 그 이름을 간절히 불렀다. 은율이 시연을 토닥토닥 다독였다. 그녀답지 않게 축축해지는 눈가를 몰래 털어 냈다.

* * *

은율은 시연과 한참 대화한 후 병실을 나왔다. 행여 무슨 일이 생길까, 은성이 근처에서 서성였다. 은율이 방해하지 말라고 성화여서 어쩔 수 없이 밖에서 기다린 참이었다.

드르륵. 문이 열리자 은성이 눈에 날을 세우고 은율에게 다가갔다. 흘깃, 시연의 상태를 살피곤 곧 인상을 찌푸렸다.

애를 왜 울려!

[공금☞☜] 

낮게 말했지만 그 목소리엔 위협이 가득했다.

조용히 하고 따라와.

은율은 시연이 들을세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은성을 대면했다.

네 어린 아내한테 희서 얘기는 하지 마.

사실은 희서의 수술 일정이 잡혔다.

그런 거 말할 정도로 안 한가해.

“이제 보니 관리해야 할 사람은 네 아내가 아니라 역시 너였어. 말본새 하고는.”

“그래서 시연이에게 대체 뭐라고 한 거야?”

“별말 안 했으니까 그만 다그쳐.”

“별말 안 했는데 애가 울어?”

은성의 눈길이 연신 병실 앞으로 흘렀다. 그런 은성을 보며 은율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빨리 말해.”

귀찮다는 듯 대꾸하는 은성을 은율이 한번 노려보곤 말했다.

“언제부터 나시연 맘에 둔 거야? 너 나시연 성격 다 알고 있었지?”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나소혜는 왜 못 걸렀어?”

“그건…!”

은성은 말하려다 한숨만 쉬고 말았다. 그건 제 실수였다. 어린 나시연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제 실수.

“됐다. 더 할 말 없으면 그만 가. 가서 정희서나 잘 챙겨.”

돌아서려던 은성이 지나치듯 말을 덧붙였다.

“혹시 내 도움 필요하면 말하고. 그래도 한국에선 내가 좀 더 나을 테니까.”

은율이 피식 웃으며 걸음을 뗐다.

당당히 치켜든 고개엔 오랜만에 편안함이 깃들었다. 오해와 위기가 있었지만 그건 이제 다 과거가 되었다. 희서는 곧 수술을 받고 좋아질 테고 나시연 가족에 대한 관리는 더는 필요 없을 듯했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 바르기만 했던 나시연은 지은성의 짝으로 손색이 없었다. 물론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는 혈통이란 것도 이어받았고 말이다. 혈통 따위 따지는 게 불만인 그녀로선 모든 게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서로 좋아하는 남녀가 결혼했으니 그거로 됐다고 결론지었다.

아버지에게 보낼 보고는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될 것 같았다.

은율이 흘깃 뒤를 보았다. 한 가지 찜찜하다면 나시연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점이었다. 신세는 꼭 갚아야 하는 성격이라 좋아하지 않는데 역시나 마음이 매우 불편했다.

“몰라.”

그녀가 불편한 마음을 외면하겠다는 듯 분주히 나아갔다. 그러나 머릿속에선 이 찜찜함을 어떻게 빨리 털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바삐 돌아갔다.

* * *

뇌진탕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음 진료 예약을 잡은 후 은성이 시연을 차에 태웠다.

“조심해.”

사고 후 은성은 시연을 아이 대하듯 했다. 결혼하고 점점 다정해지기는 했지만 시연은 지금 예전 쌀쌀맞던 모습이 조금 그리울 정도였다. 그땐 그래도 자신을 어른으로 보아주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화장실 갈 때도 문 앞까지 따라와 민망했다.

“저 이제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래도 말 들어. 조심해서 나쁠 것 없어.”

은성은 단호했다. 시연이 깁스한 발로 앞 좌석을 툭 찼다. 대번에 훈계가 날아왔다.

“조심하라고 했지!”

“네….”

불만스레 대답한 시연이 고개를 팩 돌렸다. 은성은 시연의 옆에 앉아 가는 내내 서류만 보았다. 그는 시연이 입원한 동안 회사 일을 병실에서 했다. 때로는 그에게 병실을 따로 잡아 일하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곳이 병원인지 회사인지 헷갈렸다. 회사 직원과 비서들도 틈만 나면 찾아왔다. 그는 직원들에게 맨날 조용히 하라고 눈치를 주었지만 가장 시끄러운 건 은성이었다.

하지만 은성과 함께 있으면서 알게 된 것도 있었다. 회사의 성장이 어마어마했다.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규모라, 자신이 병원에 있는 게 미안할 정도였다.

은성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사고가 일어날 걸 미리 아셨어요?”

여태 그가 바빠 보여 미뤘는데 이젠 물어봐야 했다. 퇴원하기도 했고 또 지금은 구치소에 있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그가 서류에 시선을 묻은 채 대답했다.

“이런 말 미안하지만 난 장모님 처음부터 안 믿었어.”

그는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미안해진 건 되레 그녀였다. 병원에 있으면서 어머니가 어떤 의도로 무슨 일을 벌이려고 했는지 들었다. 조사관들은 시연이 다쳤다고 해서 봐주지 않았다. 은성의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미수에 그쳤는데도 처벌이 강할까요?”

시연은 그런 어머니가 무서웠지만 걱정도 되었다. 죄는 지었지만 너무 큰 처벌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은성이 고개를 들어 시연을 보았다.

“자꾸 미안하다고 해서 그런데, 누님이라면 아마 쉽게 용서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어느 정도의 형량은 생각해야지.”

“어머니가 정말 사람을 해치려 했다니 믿기 힘들어요.”

시연은 그날 사고를 예견해 차를 막아섰으면서도 현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땐 본능으로 움직였고 지금은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정말 괜찮으시겠죠?”

“정황상 협력한 어떤 증거도 없으니 크게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네….”

시연은 더는 은성을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사고 후 항상 제 옆에 있었지만 그래서 더 바빠 보였다. 그런 그에게 실은 자신은 괜찮으니 회사로 가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연은 그러지 않았다. 작게나마 욕심을 부렸다.

그녀가 백미러로 은성을 훔쳐보았다. 지금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이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갔다.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방학이 그렇게 끝나갔다.

은성은 구치소 앞에 와서도 급한 일이 있다는 말로 시간을 끌었다.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아무래도 어머니와 대면하는 걸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시연이 먼저 차에서 내리자 그도 서류를 내려놓고 따라 내렸다.

“저 혼자 다녀올게요. 그럴 수 있어요.”

“아니야. 함께 가.”

“아니에요, 저 정말 혼자 갈 수 있어요. 은성 씨는 여기서 기다리면서 일해요.”

둘이 가볍게 밀고 당길 때였다. 인근에 차 한 대가 멈춰 서더니 시환이 바삐 내려 뛰어왔다.

“아버지?”

“늦어 미안하구나. 내가 병원으로 갔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장인어른.”

“자네는 여기에 있게. 내가 시연이 데리고 갔다 오겠네.”

시환이 시연의 손을 잡았다. 시연은 아버지에게 잡힌 손이 어색해 머뭇거렸다. 그러나 은성이 그러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시연은 걸으면서 커다란 손에 잡힌 제 손이 신경 쓰였다. 시환도 어색해하는 듯했지만 놓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시연아.”

그가 나지막이 불렀다.

“네, 아버지.”

“아버지가 많이 미안하다.”

“…….”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는 듯 잠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래도 네가 지 사장과 결혼해서 나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일 겪으면서 보니 알겠더구나. 지 사장이 널 얼마나 아끼는지.”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잘해 주는 것에 대해선 그녀도 고맙게 생각 중이었다.

“이렇게 엉망으로 살아온 아비를 떠나서 이젠 네가 지 사장과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구나.”

선뜻 대답하기 힘든 바람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행복하게 살게요.”

그녀는 그 말만 했다. 이혼하더라도 행복하게 살 자신은 있었다. 그토록 원하던 독립이었으니까. 시환이 시연을 보며 웃었다.

“그래. 넌 그래야지. 꼭 그래야지.”

짧게나마 시환과 진심을 담은 대화를 나눈 것까진 괜찮았다. 그러나 폭풍우 같은 시간은 금세 부녀를 뒤덮었다.

선경은 부녀를 보자마자 한이라도 맺힌 듯 제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다.

“아이고! 나 억울해서 어떡해! 이 집에 시집와서 딸도 잃고 이젠 나도 죽게 생겼네! 아이고, 이를 어째! 소혜야, 내 딸 소혜야……!”

반성은 않고 억울함만 토로하는 아내 앞에서 시환은 기가 차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더는 들어주지 못하겠다는 투로 툭 내뱉었다.

“그만 좀 해요! 사람이 잘못했으면 반성을 해야지, 지금 이게 무슨 태도요? 거기에 갇혀서도 지금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선경이 고래고래 지르던 고함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그 눈에 여태 보지 못했던 살기가 가득했다.

“뭐라고? 네가 지금 나한테 그게 할 소리야?”

“뭐, 뭐요?”

시환은 짐짓 당황한 모습이었다. 시연이 나서 두 사람을 말렸다.

“두 분 그만하세요. 지금 이런 얘기 하려고 온 거 아니잖아요.”

선경의 매서운 시선이 시연을 향했다.

“그래, 너 말 잘했다. 안 그래도 내가 너 오면 할 말이 있었어.”

“네, 어머니.”

“어머니?”

비꼬는 선경의 목소리가 음험했다. 옆에 앉은 시환이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였다. 선경의 가시 같은 눈초리가 시환과 시연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너, 똑바로 말해 봐. 여태 네 엄마 사고 기억 잃은 척한 거, 그거 연기였지?”

“네?”

“당신 무슨 그런 소릴…!”

“당신은 입 닥치고 있어! 네가 나한테 결혼하자고 매달리지만 않았어도 소혜랑 내가 이렇게 되진 않았어!”

“아, 아니 뭐라고……!”

시환은 이번엔 꽤 크게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산 아내가 이런 말들을 하리라곤 전혀 짐작지 못한 것 같았다. 시연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그렇게 오해하실 수도 있지만 그건 아니에요. 그때 문득 떠올랐어요. 정말이에요!”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마지막엔 힘 있게 강조했다. 다행히 선경의 눈초리가 그녀에게 돌아왔다.

“네가 이실직고하지 않을 거라곤 예상했어.”

“그렇지 않아요, 어머니!”

“그 어머니란 소리 안 치워?”

고함에 시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쩐지 정나미가 떨어진 모습이었다. 시연이 어렵사리 선경의 비위를 맞추었다.

“조심할게요.”

선경의 목소리가 조금 차분해졌다.

“그래도 그간 난 너 소혜랑 같이 내 친딸처럼 키웠다. 그런데 넌 정말 너무하는구나. 경찰한테 뭐 어쩌고 어째?”

“그건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순 없었어요. 어머니의 의도 같은 건 잘 알지도 못하고 할 말도 없어서 모른다고 했어요. 전 그냥 어쩐지 예전과 같은 사고가 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차를 막아섰다고만 말했어요.”

“그게 그 말이잖아!”

선경은 시연의 설명에도 또다시 분이 가시지 않는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넌 널 키워준 날 살인자 취급했어. 그게 나한테 얼마나 불리한지 알면서도!”

“그게 왜 시연이 탓이오!”

시환이 끼어들었지만 선경은 더욱 분노했다.

“둘 다 똑같아! 너희들 다 알고 온 거지? 다 듣고서 나 열 받게 하려고 찾아왔지? 뒤늦게 소혜가 그래, 멍청한 네 딸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 작정하고 엿 먹이려고 왔지? 어?”

선경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순간 시환과 시연은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멍해졌다. 보호관이 선경을 억지로 진정시키고서야 시환이 힘겹게 입을 뗐다.

“당신…… 방금 그거… 무슨 말이오.”

선경이 씩씩거리며 대꾸했다.

“무슨 말이긴 무슨 말이야! 경찰이 다 일렀을 거 아니야!”

“소혜가… 내 딸이 아니라고……?”

놀란 시환의 모습에도 선경은 코웃음만 쳤다.

“연기하러 왔냐? 왔어? 이제 와서? 억울한 척하지 마. 미치고 팔짝 뛸 사람은 나야. 죽은 내 딸이랑 나라고!”

시연과 시환은 더는 선경과 대화하지 못하고 면회를 끝내야 했다. 선경에게 들은 말이 너무나 충격적인 데다 선경이 억울하다고 발악을 하는 통에 접견이 강제 종료되었다.

멍한 상태로 접견장을 나온 두 사람을 은성이 급하게 부축해 인근 벤치로 이끌었다. 시환이 털썩 주저앉았다.

“이게… 무슨 일이냐…….”

혼잣말이었지만 은성은 이미 아는 듯 안타까운 표정만 지었다. 시연이 의자에 앉아 은성에게 물었다.

“혹시 은성 씨는… 알고 있었어요?”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제야 시연은 은성이 도착해서도 망설였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기는 힘들었다. 그건 제 가족 일이었고 그로선 경찰을 통해 미리 들었다 한들 전하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그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다 지나간 일이니 너무 오래 심려치는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환이 넋 나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 지나간 일이라고…… 그래, 지나간 일이지. 지나간 일……. 하지만 난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조사가 완전히 끝나면 경찰이 얘기하겠지만, 아무도 장모님께 오래된 조력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력자라고?”

“예. 이복동생이라고 들었는데 유전자 검사 회사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이번 사건과 예전 사고가 전혀 무관하지 않아 조사하던 중 밝혀낸 것으로 들었습니다. 현재는 그 이복동생도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그럼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정말 사실이라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제야 이해가 돼. 예전에 소혜를 시연이 친모 딸이라고 어떻게 속였는지 궁금했는데, 이제 알 것 같아…….”

“확실한 건 조사가 끝나 봐야겠지만 아무래도 당시에 소혜 씨 관련해서 조작이 몇 번 있었던 듯합니다.”

은성의 설명에 시환이 더욱 좌절했다.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시연이 급히 부축했다.

“안 되겠어요. 일단 아버지부터 집으로 모셔야겠어요.”

은성이 기사를 불러 시환을 차에 태웠다.

“저희는 뒤에서 따라가겠습니다.”

“아닐세. 내 지금 자네 볼 면목이 없네. 난 괜찮으니 자네는 자네 일 보게. 안 그래도 바쁜 사람인데…….”

시환은 거의 제정신이 아닌 듯했지만 지금은 말을 거스르기도 힘들었다. 혼자 진정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은성이 마지못한 듯 인사했다.

시환의 차는 금세 멀어졌다. 시연은 은성과 함께 차에 올랐다. 아버지 때문에 내색은 못 했지만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시연이 그를 쳐다보았으나 이내 고개가 떨어졌다.

“솔직히 믿기… 힘들어요.”

“난 그 말에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해. 장인어른은 좀 다르겠지만 넌….”

은성은 조금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네겐 가족이었잖아.”

그에게 가족은 큰 의미 없었으나 시연은 아니었다. 특히나 친모를 잃고 그녀는 소혜를 크게 의지했다. 뒤늦게 혈연관계가 없다는 걸 알았다고 한들 시연에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은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혈연관계가 있어도 남인 채 사는데, 부부도 생판 모르는 남에서 가족이 되는데 그까짓 유전자가 무슨 대수라고.

시연이 은성을 물끄러미 보았다. 입술이 절로 떨어졌다.

“맞아요.”

언니는 그녀에게 기댈 등이자 산이었다. 의지할 곳 없는 집에서 소혜는 그녀에게 유일한 가족이었다. 그런 언니를 남들이 이제 와 피가 섞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무슨 상관일까. 제게는 여전히 그립고 고마운 언니일 뿐이었다.

시연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은성이 그런 시연을 따뜻하게 감싸 안았다.

후드득, 눈물이 흘렀다.

* * *

윤선경의 죄는 차츰 밝혀졌다. 그간의 동선과 통화 내용 등을 통해 대부분 알아낸 것으로 들었다.

그녀는 예전부터 소혜를 이용해 부잣집에 들어갈 궁리를 했다. 그녀를 도운 건 은성에게 들은 대로 이복동생이었다. 이번 사고로 큰 대가를 받기로 한 운전자 또한 흘러가는 분위기에 윤선경의 사주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녀의 추가 범죄 여부는 앞으로도 계속 조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시연은 다음 학기를 쉬기로 했다. 깁스한 다리를 내보이자 은성은 별달리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사실 다리는 문제가 아니었고 그녀는 은성과의 상의하에 당분간 본가에서 지내기로 했다.

시환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회사는 다른 임원들에게 맡기고 거의 집에서 지냈다. 선경과는 이혼하기로 했다. 애초에 사기 결혼이었기에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시연은 집에서 혼자 짐을 쌌다. 은성은 요즘 집에 늦게 오거나 회사에서 잘 때도 있었다. 그녀로서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것에 대해 크게 언급하지 않았다.

현관 벨 소리에 시연이 가방 싸던 일을 멈추고 달려갔다.

“시연아…!”

“잘 지냈어?”

문을 열자마자 보원과 승률이 차례로 들어왔다. 친구들이 오자 썰렁하던 집이 단숨에 시끌벅적해졌다.

“와, 너희 집 정말 좋다! 이게 다 뭐야?”

보원은 선물이라고 사 온 각 티슈를 내려놓곤 집부터 구경했다. 거실 창가에 붙어선 입을 쩍 벌렸다.

“이런 게 전망이구나. 정말 최고다, 최고!”

시연이 웃으며 준비해 놓았던 커피를 내렸다.

“둘 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 거지?”

“응.”

“응!”

두 명 모두 지금은 그런 것엔 관심 없고 집 구경 하기 바빴다. 안방 쪽으로 가던 승률이 조심스레 발을 돌렸다.

“사장님은 회사에 계시지?”

“…사장님?”

돌연 돌아온 시연의 질문에 승률이 참, 하는 표정으로 머쓱해했다. 보원이 시연에게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져가며 끼어들었다.

“넌 잘 모르지? 얘 그동안 어쩌고 지냈는지.”

승률에게도 커피를 건네주며 시연이 궁금한 듯 물었다.

“응. 그동안 일이 좀 많아서 신경 못 썼어. 미안해.”

“미안은 뭘. 네 상황이 좀 그랬냐. 우린 너 이렇게 다시 멀쩡하게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승률아, 보원아.”

잠깐 차분해졌던 분위기는 보원의 고성으로 금방 밝게 회복되었다.

“시연아, 그거 알아? 얘 완전 우리 뒤통수 쳤어!”

“뒤통수라니, 난 나대로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설명했잖아!”

승률이 반박했지만 보원은 그간의 마음고생에 대해 보복이라도 하듯 공격을 이어갔다.

“얘 방금 네 남편을 사장님이라고 불렀잖아. 그게 다 이유가 있었어. 내가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네가 날 걱정했다고?”

“그럼 애가 연락도 안 되고 안 보이는데 걱정을 안 해?”

시연이 끼어들 틈은 거의 없었다. 두 사람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분히 설명을 듣고 싶다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대화 사이 어떻게 그간의 상황은 알아들었다.

승률이 한동안 부모님 말씀만 들으며 지낸 건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심부름 때문에 호텔 뒤편 쇼핑몰에 갔는데 거기서 윤선경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해 인사라도 하려고 다가갔는데 선경은 그 길로 지하로 내려갔다고 했다. 조금 쫓아가던 승률은 이내 윤선경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알았고 그때 예전에 받은 명함으로 은성에게 연락했다.

“그때는 부모님이 친구들에게 연락할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해서 시연이 너한테 전화 못 했어. 자칫 들키면 정말 휴학할 수도 있었거든.”

“괜찮아. 그래서 어떻게 됐어?”

보원이 끼어들어 설명했다.

“어떻게 되긴, 사고 때 봤다시피 너희 남편이랑 같이 밀착 감시했대. 그때 이후로 승률이 네 남편을 사장님이라고 부르게 된 거지.”

“그랬구나…. 승률아, 정말 고마워. 그리고 고생했어.”

“고생은 뭐. 난 그냥 네가 거의 다 나아서 다행이라고만 생각해.”

“응. 앞으로 더 조심할게.”

대답 후 시연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넌 부모님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부모님께서 뭣 때문에 화가 나셨어?”

시연의 질문에 보원도 여태 궁금했다는 듯 팔짱을 끼며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다른 건 술술 말하던 승률이 이번 질문엔 머뭇거렸다.

“뭐, 좀 그런 일이 있었어.”

“얘, 내가 아무리 물어도 말을 안 해. 내가 혹시 방 쓴 거 때문인가 싶어서 물어도 아니라고만 하고 말이야.”

“그런 일이 있었다니까!”

승률은 이후에도 그것에 관해선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다행인 건 그사이 보원의 오빠가 출국했다고 했다.

“시연이 네가 학교에 없어서 조금 미흡하긴 하지만, 그래도 난 이제야 뭔가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아 기뻐.”

보원의 말에 셋이 함께 웃었다. 그렇게 시연은 오랜만에 친구들과 즐겁게 회포를 풀었다.

더 오래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었지만 시연의 본가 일정 때문에 그들은 그렇게 점심만 먹고 헤어졌다.

* * *

시환은 걱정한 대로 많이 야위어 있었다. 그나마 박 실장이 챙겨 하루 한 끼 정도 겨우 먹었다고 했다.

시연이 안방을 두드려서야 시환이 느릿느릿 문을 열고 나왔다.

“오지 마라니까 뭐 하러 왔어.”

그는 타박했지만 싫어하는 내색은 아니었다. 커다란 집에 사람 소리가 들려 좋다며 박 실장이 바삐 부엌으로 갔다. 시연은 아버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예전에 자신의 자리는 항상 맨 끝이었는데 이젠 아버지 사이에 앉을 사람이 누구도 없었다.

“실장님께 여쭤보니 오늘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드셨다면서요?”

“먹어서 뭐 해. 인생 헛살았다. 헛살았어…….”

“이럴 때일수록 잘 챙겨 드시고 기운을 내셔야죠.”

시연을 바라보는 눈길이 촉촉했다.

“시연아,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곁에 지 사장이 있으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새겨들어. 남 말 함부로 믿지 마.”

시연은 대꾸하기보다는 아버지의 한탄 같은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시환은 처음엔 말을 아꼈지만 곧 억울한 듯 얕게 흐느끼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딱 한 번 실수였다. 먼발치서 네 엄마만 바라보다가 속상한 마음에 술 먹고 실수했어. 난 정말 소혜가 그때 생긴 내 딸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다니, 지금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구나……. 으흑…….”

“아버지…….”

억울함보다는 슬픔을 토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시연은 입술만 달싹였다.

“…네 엄마 그리 가고 뒤늦게 핏줄인 걸 안 게 미안해서 더 정을 많이 줬어. 윤선경 그 사람이 소혜 편만 들어도 말리지 못했다.”

“…….”

“그런데 그게 전부 거짓이었다니……. 내가 내 딸을 두고 그 천인공노할 여자 딸만 아꼈다니……. 윽.”

힘겨운 마음에도 시연은 애써 밝게 말했다.

“아버지, 은성 씨가 그러더라고요. 핏줄이 무슨 상관이냐고. 그냥 가족이었으면 그거로 된 거 아니냐고. …우리 그냥 그런 거 다 잊고 언니와 좋았던 기억만 간직해요. 어머니는 어쩔 수 없지만 언니는 죄가 없잖아요.”

시환이 바닥으로 떨구었던 시선을 들었다. 축축해진 눈가가 시연을 애틋하게 쓸었다.

“너는 정말 네 엄마를 많이 닮았다. 내가 그래서 네 엄마를 그렇게 사랑했지.”

말을 마친 시환은 다시 애환이 끓는지 흐느꼈다. 시연은 아버지에게 잠시 시간을 주기로 했다. 다과 쟁반을 들고 머뭇거리는 박 실장과 함께 부엌 한구석으로 갔다.

“그동안 아버지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뭘요. 제 일인 걸요. 그래도 따님이 와서 조금 안심이에요.”

안쓰러운 시연의 시선이 한동안 시환의 그림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 * *

스치듯 지나갈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시연은 이번 가을이 유독 짧게 느껴졌다. 시환이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결혼 기간을 본가에서 보낸 것도 그 이유였다.

그녀는 추후 아버지가 제 이혼 소식을 접하게 될 걸 예상해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기다렸다.

슬슬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돌았다.

“단풍이 예쁘게 들었네.”

시연이 정원에 떨어진 낙엽을 주워들었다. 한 해 중 가장 곱게 이파리를 물들이고서도 그 빛을 얼마 자랑하지 못하는 낙엽이 쓸쓸해 보였다.

문득 제 일생 중 가장 고운 때는 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곁에 있을 때는 싱그러운 연둣빛이었을 테고, 언니가 있을 때는 짙은 초록빛이었다면 붉은 때는 지금일까. 자신도 낙엽처럼 곧 어여쁜 기간을 다하고 떨어질까.

“뭐 해?”

문득 들린 따스한 목소리에 시연이 돌아보았다.

“은성 씨?”

오늘 은성이 들른다는 얘기는 없었다. 시연은 손에서 낙엽을 떨어뜨리며 다소곳이 다가갔다. 그 낙엽에 은성의 눈길이 따라 흘렀다.

“갑자기 말도 없이 무슨 일이에요?”

그녀의 걸음을 따라 은성이 정원을 거닐었다.

“오늘은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약속이요?”

“전에 내가 말했잖아. 어머님 뵈러 매주 가자고.”

시연이 가을 햇살 속에서 옅게 웃었다.

“설마 그동안은 제 다리 때문에 안 간 거예요?”

“맞아.”

시연은 장난으로 해 본 말에 돌아온 대답에 조금 놀랐다. 그러나 이젠 그 앞에서 놀란 표정을 짓기보다는 발을 멈추고 그를 향해 그윽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요. 은성 씨 덕분에 혼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너 혼자 아니야.”

“알아요.”

그래, 아직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곧 혼자가 되겠지. 시연은 다시 돌아서 천천히 걸음을 뗐다. 대답은 했지만 입 안이 썼다.

결혼을 준비할 땐 혼자가 될 시간만 기다렸는데, 이제는 혼자가 되는 시간이 두려워졌다. 그와 나란히 걷는 지금도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지내면서 마음을 단속했지만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언니의 약혼자일 때도 거둬지지 않던 마음이, 그의 바로 곁에 있는 지금 수그러들 리 없었다.

“곧 겨울이 오겠죠?”

“겨울이 싫으면 멈춰줄까?”

뜬금없는 말에 시연이 그를 의뭉스럽게 보았다.

“은성 씨도 농담을 다 하네요.”

“농담 아니야.”

농담으로 치부하려던 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와 가까이 지내다 보니 별말을 다 들었다. 이것도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 될 것 같아 시연은 혼자 빙그레 웃었다.

“가을 좋아하는 줄 몰랐네.”

“전 여름이 좋아요.”

“그래?”

시연은 더는 대꾸하지 않았다. 왜 여름이 좋아졌는지 말하기 싫어졌다. 덥고 땀나는 여름은 그녀가 좋아하는 계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젠 추억만 가득한 따스한 기억이 모조리 그 계절에 담겼다.

“아프리카는 매일 덥겠죠?”

“가끔은 추울지도 모르지.”

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하고 쳐다보자 은성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상기온 현상이 거기라고 비껴가기만 하겠어?”

이번에 시연은 어쩔 수 없이 소리 내 웃었다. 그러다 곧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은성이 하는 농담이라 그런지 정말 웃겼다.

“하하……!”

예쁘게 웃음을 흘리는 그녀를 은성이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먹먹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 *

집에 돌아와도 시연은 또 금방 긴 여행준비를 해야 했다. 어른들껜 두 사람의 이혼 사실을 조금 늦게 알리기로 했다.

윤선경의 일이 없었다면 성격 차이라며 둘의 이혼을 알릴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충격을 막 털고 일어난 시환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자는 게 은성의 의견이었다.

시연은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정해진 구호 활동 기간을 채우고 돌아와 알려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예전과 달리 물건을 하나둘 챙기는 시연의 움직임이 더뎠다. 은성은 오늘도 아침 일찍 출근하며 늦는다고 말했다. 그녀가 커다란 가방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흑…….”

몇 달 전 그 큰일도 씩씩하게 다 지나왔는데, 그때도 눈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너무 속상했다. 그녀가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파묻었다.

“이게 뭐야…….”

이혼을 앞에 두면 정말 행복할 줄 알았다. 세상의 자유가 제 것일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그 시간을 앞에 두자 두려움과 슬픔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매일 일만 하고……. 흑.”

결국 집에 돌아와서도 얼굴 보기 힘든 은성을 탓하고 말았다. 홀로 있는 집에서 그녀가 숨죽여 슬픔을 감추었다. 하지만 감정은 휘몰아치기만 했다.

이제 와서 그에게 이혼 안 해도 괜찮다고 하면 미친 애 같을까. 그렇게 말하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나 곧 시연은 머리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이제 오롯한 제 시간을 앞두니 별생각이 다 드는 것 같았다.

그녀가 흐느낌을 감추고 고개를 들었다.

“정신 차려, 나시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일어설 때였다. 소리도 없이 고요히 현관문이 열렸다. 시연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은성… 씨…?”

은성은 시연의 의문에 대꾸하지 않았다. 현관에 가만히 서서 시연을 잠시 쳐다보더니 어쩐지 화난 사람처럼 무서운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단숨에 시연의 입술을 삼켰다.

“읍!”

시연은 영문도 모른 채 그에게 입술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던 입맞춤은 곧 짙게 얽혀들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세차게 빨았다. 한 번에 그녀를 가르고 안으로 들어가 말캉한 혀를 잡아챘다. 시연의 부드러운 혀를 빨아 대는 소리가 질척했다.

“읍… 흡……!”

당황해 뒷걸음치면서도 시연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그라도 실은 없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가 여린 입술을 빨아들이며 그녀를 침실로 밀어붙였다. 시연의 등이 그녀의 방 문가에 부딪혔다. 충격에 잠깐 입술을 뗐던 그가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이번엔 한 번 빨아들이고 아래로 내려가 목덜미를 지독하게 물었다.

“읏…!”

통증에 시연이 신음했지만 이번에도 밀어내는 힘은 없었다. 그녀의 어깨 안쪽에 잇자국을 낸 그가 그곳을 다시 혀로 긁듯이 핥았다.

시연은 통증과 함께 몰려온 짜릿한 쾌감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번에도 평소와 달리 살을 쥐는 악력이 거칠었다. 브래지어가 아니었다면 손자국이 남았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

시연이 연신 뜨거운 숨을 터트리며 걸음을 물렸다. 그가 그녀를 안은 채 침대로 넘어졌다. 넓은 매트리스가 뒤엉킨 남녀의 무게에 크게 출렁였다.

은성은 시연을 내려다보며 성급히 옷을 벗었다. 넥타이도 풀고 재킷과 셔츠는 거의 내던지다시피 벗어 바닥에 던졌다.

시연은 가슴이 두근거려 그를 마주 보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눈을 감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안는 그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가슴에 새기고 싶었다.

바지와 드로어즈마저 벗어 내던지자 그녀의 시선에 배꼽까지 단단히 올려 붙은 거대한 성기가 보였다. 그가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물었다.

은성의 혀가 맞물린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저급하게 드나들었다. 타액도 입술 사이를 오갔다. 그러면서 그는 시연의 티셔츠를 브래지어와 동시에 위로 벗겨 냈다. 손끝에 걸린 옷을 그가 빙글 감아 내리눌렀다.

옷에 손이 감긴 시연이 꿈틀대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빠?”

자연스럽게 그를 불렀지만 그는 시연의 눈을 한 번 마주친 후 바로 젖가슴을 물었다.

“흐읏!”

시연의 등허리가 활처럼 솟았다. 은성은 시연을 결박한 채 그녀의 가슴을 뜨겁게 빨아냈다. 핑크빛 젖꼭지를 세게 물고서 쭙 빨아 당기고 짐승처럼 아래에서 위로 마구 핥았다.

“하읏……. 흐읏! 하… 오빠…!”

반대쪽 가슴은 손아귀 가득 쥐고 쥐어짰다. 굵고 기다란 손가락 사이로 피가 몰린 유두가 톡 도드라졌다. 그가 그 새빨간 것을 앞니로 물고 비틀었다.

“아읏!”

시연이 쾌감에 몸을 뒤틀었다. 순간 그녀를 결박한 티셔츠에서 손이 빠져나왔다. 자유로워진 그녀가 은성을 끌어안았다. 손가락을 그의 머리카락 깊숙이 파묻었다.

“허리 들어!”

거친 명령에 시연이 가슴을 빨리며 허리를 살짝 들었다. 그러자 바지와 브리프가 동시에 벗겨져 나갔다. 침대 밖에 그들의 옷이 엉망으로 쌓였다.

그는 시연을 알몸으로 만든 즉시 새하얀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이미 눅눅해진 음부가 활짝 벌어졌다. 그가 배꼽에 올려 붙은 페니스를 잡아 시연의 질구에 맞추었다. 질척한 서로의 액을 둥글게 비벼 뒤섞더니 곧장 힘을 주었다. 팽창할 대로 팽창한 귀두가 그녀의 질 주름을 벌리고 푹 들어갔다.

“하읏!”

시연이 또다시 허리를 틀었지만 은성은 그대로 그녀를 힘줘 안았다. 조금 들어간 페니스를 시연의 안으로 끝까지 밀어 넣었다.

푸욱!

“꺄읏…!”

엄청난 쾌감이 그녀를 뒤덮었다. 이젠 그의 페니스를 바라게 된 질 내벽이 반가이 그를 물고 조여들었다. 그가 또다시 허리를 힘껏 치받았다. 퍽, 하는 강한 타격음과 함께 질척이는 애액을 묻힌 페니스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모조리 박혀 들어갔다.

푹, 푹!

은성은 그 상태로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거칠게 시연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비좁게 맞물린 통로를 제 것으로 찢어 벌리고 내벽 주름을 저돌적으로 긁었다.

“아흑! 아아…! 하윽……!”

거친 피스톤질에 시연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울부짖었다. 벌어진 다리가 세찬 반동에 흔들렸다. 그가 그녀의 다리를 제 허리에 감았다. 그의 성기를 에워싼 질 내벽이 더욱 힘 있게 기둥을 물었다.

퍽!

“학!”

그가 강하게 그녀의 질을 파고들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와의 헤어짐이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 그녀 곁에 머물기 힘들었다.

잡고 싶었다. 매달리고 싶었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녀를 보면 참지 못하고 가지 말란 말을 해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본가에서 여태 고생했을 그녀를 또 혼자 내버려 두었다. 눈이 마주치면 이혼만은 하지 말자는 말이 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 했다. 그걸 간신히 참고 매번 집을 나섰다.

그런데 오늘은 도저히 참아지지 않았다. 아무리 일에 집중하려고 애를 써도 심장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쳤다.

한 비서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으로 달려오면서 어떤 말도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오직 섹스에 미친놈처럼 몸만 덮치자, 그렇게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그녀를 보자 말자 수십 번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몸은 절로 그녀만을 향했다. 어떤 말도 하지 말자는 다짐 따위 쓸모없었다. 굶주린 듯이 저절로 몸이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자신은 어쩌면 시연의 마음 따위 상관없이 정말 몸만 필요로 하는 몹쓸 놈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도 상관없었다.

오직 시연의 몸속 깊이 자신을 박아 넣고 새기는 것 외엔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고, 생각하기도 싫었다.

그가 그녀의 질 통로 끝까지 페니스를 욱여넣었다. 자궁에 닿아 비벼지는 귀두로 더 깊이 들어가려 그녀를 쑤시고 찔렀다.

“하윽…! 하아…! 아, 오빠……!”

시연이 그의 등을 붙잡고 손톱을 세웠다. 붉은 자국이 땀방울과 함께 그의 등에 새겨졌다.

퍽, 퍽!

서로의 음부가 틈도 없이 맞물렸다. 질 내벽을 뚫고 배 속을 차지한 기둥이 안쪽 내장마저 엉망으로 찔러 댔다.

“그만… 아윽, 그만해요……!”

결국 시연은 오늘도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그 눈물을 핥아 마신 그가 그녀의 다리를 잡고 허리를 세웠다. 시연의 허리 밑에 베게 두 개를 받치고서 또다시 조그마한 구멍 안으로 제 것을 쑤셔 넣었다.

퍽, 퍽, 퍽!

다리를 찢기듯 벌린 시연이 몸을 강타하고 들어오는 페니스에 경악했다. 그가 들어오는 느낌이 너무나 강렬해 눈앞이 바랬다. 배출하지 못한 뜨거움이 몸속에 가득 찼다. 음부가 달아오르고 그가 긁어 대는 질 내벽이 못 견디게 가려웠다.

“아아……. 하아…!”

퍽, 퍽!

둘이 함께 흘린 애액과 쿠퍼액이 맞부딪히는 음부 사이로 튀었다. 그가 단단히 잡은 시연의 허벅지가 손아귀 힘에 붉게 물들었다.

“나시연…!”

그가 울부짖듯이 그녀를 불렀다. 비대해진 귀두가 그녀의 몸 밖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가 오므라드는 구멍을 단숨에 꿰차고 들어갔다.

퍽!

“학!”

귀두 끝이 그녀의 자극점을 정통으로 찧었다. 시연의 몸이 벌벌 떨렸다. 그가 그녀의 안으로 강하게 들고났다. 시뻘게진 페니스 기둥이 그녀의 음부를 벌리고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가 드러내길 반복했다.

그러다 은성은 한순간 욕망을 토해 냈다. 그녀의 몸속 깊숙이 제 성기를 박아 놓고선 그곳에 제 체액을 쏟아 냈다.

처음 실수한 이후론 단 한 번도 피임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지금은 목숨을 내놓는다고 해도 빼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자궁 속까지 헤치고 들어가 그 속에 제 것을 심어놓고 싶었다. 그러면 헤어져서도 조금은 그녀와 함께하는 느낌이 들까.

미친 생각을 하며 그가 그녀의 질 속에 정액을 뿌렸다. 한참을 그녀의 속을 드나들던 그가 쭉 허리를 빼냈다. 시연은 엄청난 절정에 이미 늘어져 있었다.

그가 그녀의 허리에서 베개를 빼내고 다리 사이에 입술을 묻었다. 축 늘어져 뱃가죽만 들썩이는 그녀의 음부를 세차게 빨기 시작했다.

“쭙!”

“하읏!”

또다시 시연의 몸이 들썩였다. 은성은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제 체액이 질질 흐르는 질구부터 시작해 파들거리는 클리토리스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입 속에 빨아 삼켰다.

“하아, 아, 오빠…!”

시연이 다리를 벌린 채 그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머리카락을 쥐는 힘이 강해져도 그는 그녀를 놓지 않고 질구 밖으로 흐르는 정액을 빨아 먹고 음순 사이사이 부드러운 속살 전부를 강하게 빨아냈다.

“아하……. 아……!”

어느덧 시연은 이어지는 잔혹한 쾌감에 거의 울고 있었다. 깨끗해진 음부 사이 빨간 질구에서 정액이 질금질금 새어 나왔다. 그가 그 안에 혀를 푹 찔러넣어 주름 사이를 휘저었다. 시연의 몸이 또다시 비틀렸다.

욕망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과함에 시연이 숨을 헐떡였다. 그가 제 아래를 빨고 혀로 질 속을 찔러 대도 막을 재간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제 속에 파정하는 걸 느낄 때부터 막을 생각이 사라졌는지도 몰랐다.

“하아… 더… 더 해 줘요!”

어느덧 시연의 입에선 더한 것을 요구하는 말이 흘렀다. 은성의 눈빛이 짙어졌다. 그가 흐느적거리는 그녀를 일으켜 앉혔다. 제 정액을 질질 흘리는 여자를 배 위로 뒤돌려 앉혔다. 가득 벌어진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정액이 뚝 떨어졌다.

그가 그녀의 구멍 안으로 손가락을 푹 찔러 넣었다.

“핫!”

그녀가 몸을 떨었지만 그는 이내 손을 빼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그녀의 손가락과 그의 손가락이 동시에 그녀의 질을 뚫고 들어갔다.

푹, 푹!

“하아, 아흣……!”

그의 몸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시연은 제 손으로 자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보다 더 지독하게 야한 건 제 몸속에서 얽혀 있는 그의 손가락이었다. 서로의 체액에 엉망이 된 두 손가락이 쩍쩍 붙었다가 떨어졌다. 그러곤 또다시 들러붙어서 짙게 엉킨 채 질 내벽 곳곳을 찔렀다.

수치심과 쾌감을 견디지 못한 시연이 그에게로 무너졌다. 은성은 그녀의 유방을 거머쥐고는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비틀었다. 핑크빛 유두가 붉어지며 터질 것처럼 짜부라졌다.

“하응… 아항……!”

시연이 가느다란 교성을 흘리고 은성은 그대로 그녀의 질구 안에 제 페니스를 밀어 넣었다. 그녀를 제 성기에 꽂은 채로 그가 허리를 흔들었다. 탐스럽게 부푼 양쪽 가슴을 힘 있게 부여잡고 거칠게 허리를 퉁겨 올렸다.

시연이 그에게 꿰인 채 계속 울었다. 그의 페니스가 주는 쾌감이 전신을 때렸다. 짜릿하고 저릿한 감각이 그녀의 눈물을 일구었다.

퍽, 퍽!

그가 그녀의 안으로 주저 없이 들어갔다. 뒤에서 목덜미를 빨아들이며 그녀의 안에 영원히 박혀들 것처럼 폭력적으로 제 성기를 박았다.

“하읏! 하아……!”

시연이 은성에게 안겨 쉼 없이 울었다. 두 사람의 거친 호흡과 교성이 조용하던 집안을 꽤 오래 메웠다.

* * *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를 줄은 몰랐다. 공항에서 가방을 내려 주는 한 비서에게 시연이 인사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여기서부턴 저 혼자 갈게요.”

“아닙니다. 금방 주차하고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설마 제가 일행도 못 찾겠어요? 바쁘실 텐데 이만 들어가세요.”

은성과의 이혼 사실은 한 비서도 모르는 듯했다. 시연은 다소곳이 고개만 숙였다. 찜찜한 듯 바라보는 한 비서의 시선을 뒤로하고 시연은 커다란 가방을 끌고 묵묵히 공항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혼자가 되자마자 참았던 서글픔은 물밀듯이 몰려왔다. 둘의 관계가 끝나서인지 은성은 오늘 시연이 출국하는 데에도 나오지 않았다.

“바쁘잖아…. 바쁜 걸 어떻게 하겠어…….”

자위하는 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려 봐도 슬픈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머릿속 어딘가 애써 밀어 두었던 대화도 지금 다시 생각났다.

[이혼 서류는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에 그는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대꾸했다.

[혼인 신고 안 했어. 6개월짜리 결혼에 서류까지 얽히면 서로 번거롭잖아.]

[하지만 지난번엔 가족 관계 증명 서류도 가져오셨잖아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경이 요구해 그가 들고 왔었다.

[공공 기관에 제출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간단하게 만든 거야.]

그제야 시연은 은성과 자신이 서류상으론 단 한 번도 가족이었던 적 없다는 걸 알았다. 그는 현명했고 당시 시연은 자신 혼자만 복잡하게 생각했다고 여겼다.

그러나 정작 먼 타지로 가려는 지금, 시연은 그 사실이 뼈아팠다. 마치 지난 6개월이 꿈같았다. 잠깐 다디단 꿈에 취했던 자신은 이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예전엔 그토록 바라던 현실을 코앞에 두었는데 가슴은 왜 아프고 시릴까.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시연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병원 가자.]

[병원이요?]

한낮의 폭풍우 같았던 섹스 후 그는 사후피임약을 처방받기 위해 병원행을 권했다. 곧 생리 예정일이라 괜찮다고 말해도 그는 끝까지 시연을 병원에 데려갔다.

당시 시연은 그것 또한 못내 서글펐다. 행여 그는 실수로라도 아이가 생기는 게 끔찍하게 싫은 것 같았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약을 먹었지만 마음은 먹먹했다. 그를 이해하면서도 왠지 섭섭한 마음은 어쩌지 못했다.

“시연 씨…….”

시연이 생각에 젖을 때 문득 아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 정희서 씨……?”

서둘러 눈가의 습기를 감춘 시연이 입가를 늘였다. 한달음에 희서에게 다가가 친근하게 물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이식 수술 받으셨다는 얘긴 들었어요. 퇴원하신 거예요?”

쏟아지는 질문에 희서가 차분하게 마주 웃었다.

“덕분에 전 잘 지냈어요. 퇴원도 했고 지금은 주기적으로 병원 진료만 받고 있고요.”

“와아, 정말 잘 됐다!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이게 다 시연 씨 덕분이에요.”

“제 덕이라니요. 정희서 씨가 의지를 갖고 회복한 덕이죠. 정말 축하드려요.”

훈훈한 인사가 오갔다. 희서가 조금 떨어진 곳에 모여 있는 일행을 흘깃 쳐다보았다.

“시간 많이 뺏지 않을게요. 오늘은 시연 씨에게 꼭 인사하고 싶어서 나왔어요. 좋은 일 하러 간다고 들었어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그래도 꼭 한번 참여하고 싶었어요. 건강히 잘 다녀오겠습니다.”

씩씩한 모습에 희서가 흐뭇한 듯 더 밝게 웃었다.

“시연 씨는 나이만 보면 어린데 마음 쓰는 건 한참 어른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 반성 많이 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부끄러워요.”

시연의 말에도 희서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날 위해 많이 애써 줬다고 들었어요. 생판 남인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지 전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꼭 하고 싶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시연은 이번엔 거부하기보단 그녀처럼 다소곳이 입술만 당겼다.

오래 고국을 떠나는 시간에, 그래도 이렇게 마중 나와서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 주는 사람이 있어 고마웠다. 이혼 사실을 모르는 시환과는 어제 인사를 나눴고 보원과 승률도 중요한 일정이 있어 미리 인사한 참이었다.

가볍게 떠나려 했던 오늘, 반가운 이의 인사를 받으니 마음은 뜻밖에 따뜻해졌다.

“항상 건강하세요.”

마음처럼 따뜻하게 대화를 마무리한 시연이 발길을 재촉했다. 그 길에 또 잠깐 은성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속으로 머리를 털었다. 이젠 어쩌면 다시는 보지 못할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에서 가슴에 잔뜩 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어 행복했다.

시연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제게는 너무나 큰 욕심인 남자. 그 남자를 이젠 훌훌 보내 줄 때였다.

“나시연,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해요. 가방이 차에서 안 빠져서.”

“하하, 그렇지? 나도 그랬어!”

시연이 새로운 곳으로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이젠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보낼 시간에 그녀가 애써 들뜬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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