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6)

10

방을 찾은 은율이 선경의 손에서 미끄러지는 와인잔을 능숙하게 피했다. 그녀가 깨진 유리 조각을 밟으며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시선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초반 선경의 기세는 드높았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다만 실수인 척 와인을 쏟으려는 시도가 실패한 건 은율의 눈에도 아쉬워하는 게 보였다. 은율은 거실 중앙에 똑바로 서서 팔짱을 끼었다.

“이쯤 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참 어리석네요.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찾아와?”

수비적인 기세 없이 깔끔한 태도가 도도했다.

“뭐? 사돈처녀라고 예를 차려 줬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은율의 눈빛이 창처럼 날카롭게 선경을 찔렀다. 그 예리함에 선경이 쏘아붙이고도 움찔했다. 은율이 선경의 차림을 죽 훑었다.

“하나 있는 자식 먼저 보내면 이젠 안 그럴 줄 알았더니, 여전히 변한 게 없으시네. 지 사장이 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니 아주 좋았겠습니다?”

“어른들께선 사돈처녀가 지금 이따위로 구는 거 알고 계신가?”

선경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제 의도완 달리 은율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저보다 더 기세 좋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에 조급함이 일었다.

은율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흘겨보는 눈매가 독사처럼 매서웠다.

“회장님이 직접 이곳에 오시는 날엔 그쪽 가족 모두 살아날 생각 접어야 할 겁니다.”

“뭐, 뭐라고……?”

“조금 더 상세히 알려 드리자면, 그쪽은 뭐 신경 쓸지 모르겠지만 나시연도 어떻게 될지 장담 못 해요.”

은율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선경은 그제야 은율을 불러낼 때의 단순한 생각관 달리 뭔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녀가 바쁘게 지난 상황을 돌이켜 생각했다.

기억을 떠올려 보니 실은 맨 처음 은성이 본사를 벗어나 겨우 한국 사장이나 하려고 혼자 온 것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그때 선경 부부는 상황이 점점 어려워질 때라 은성의 제안이 반갑기만 했다.

깊은 생각은 미뤄두고 회장 내외는 추후 인사하러 올 줄로만 여겼다. 식장에 가족이 나타나지 않아도 우선은 결혼시키는 것에 급급해 마음 넓은 척했다.

“우,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래요?”

선경이 목소리를 높였다. 은율의 몇 마디에 분위기는 금방 넘어갔다. 은율이 선경에게 위협적으로 한 발짝 다가갔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똑 부러졌다.

“다 망해 가던 참에 동아줄 잡은 것 같았어요? 동아줄 잡았으면 욕심은 거기서 끝냈어야지. 하긴, 당신들이 어떤 인간인데 거기서 끝낼 리가 없지. 그래서 내가 온 거예요. 어리석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후계자라 뒤처리하려고. 그게 내 일이니까.”

은율의 마지막 말은 어쩐지 조금 씁쓸하게 들렸다. 그러나 선경에게 그런 건 지금 중요치 않았다.

“뭐, 뭘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우린 잘못한 거 없어. 알다시피 지 사장이 결혼을 제의했고 우린 그걸 받아들인 것뿐이라고!”

은율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걸 관리하려고 왔다고 하잖아요. 당신네가 어디까지 요구할지 모르니까 그거 막으려고.”

“예전 일이라면 말 끝났잖아요. 왜 이제 와서 이래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이번 결혼으로 우린 크게 득 본 것도 없다고!”

물러서곤 있었지만 그래도 선경은 끝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방금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은성에게서 처음 예상보다 큰 지원은 받지 못했다. 물론 자신은 추후 그것도 커지리라 생각했지만.

“망할 회사에 돈 처발라 준 거로 모자라요? 모자라서 틈만 나면 지 사장 찾아가서 손 벌렸어?”

“그, 그건… 그냥…….”

순간 선경은 이번에 은성에게서 돈을 받지 못한 걸 생각해 냈다. 그녀가 커다랗게 소리쳤다.

“그건 그냥 잠깐 빌린 거였어요! 알아봐! 이번에 내가 또 언제 돈을 받았는지. 지 사장 찾아가서 물어보면 될 거 아니야!”

지난번에 받은 건 여길 나가자마자 은성에게 전화해 입을 맞춰 두면 될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위인데 그거 하나 못 해 줄까.

선경의 어깨엔 힘이 다시 들어갔지만 은율의 비난 가득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그제야 선경은 은율이 그 돈을 막았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자신이 이곳을 찾아온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쯧쯧…….”

은율이 머리를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선경은 제 실수를 깨닫곤 머리를 굴렸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했다. 은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머리로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질렀지.”

“어, 어쨌든 예전 일은 이미 끝났어요. 더는 그 얘기는 안 했으면 합니다.”

“누구 맘대로 끝내. 그때 끝났으면 끝이었겠지만 당신들은 다시 시작했지. 감히 우릴 멍청한 호구로 본 거야. 웃기지도 않게!”

은율이 조소했다. 선경은 분했지만 지금은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분명히 말했지만 이 결혼은 지 사장이 먼저 제의했고 우린 그걸 받아들였을 뿐이에요. 빌린 돈은 곧 갚을 거고 앞으로 서로 만날 일도 없다고.”

“만날 일이 없다라…….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나시연이 얽혀 있는데?”

“둘이 좋아서 결혼한 걸 나더러 어쩌라는 거예요? 그리고 사돈처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위치가 있는데 말이 너무 험한 거 아닌가?”

선경은 일단 자리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대로 부딪히는 건 불리했다. 예상치 못하게 닥친 상황이라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은율이 너그러이 말투를 늘였다.

“아, 마음이 너무 상하셨나요? 이거 큰일이네요. 앞으론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절 여기까지 불러내셨나요?”

끊이지 않는 조롱에 선경이 입술을 씹었다.

“작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해요. 바쁘신 분인데.”

은율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굳이 부르지 않아도 곧 볼 날이 있을 테니 기다리고 계세요. 그땐 아마 오늘처럼 인사하며 헤어지진 못 할 겁니다. 아마도.”

은율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고 난 후 선경이 악에 찬 고함을 질렀다.

제 삶을 바쳐 공들인 모든 게 한순간에 엉망이 되었다. 이런 수모를 당하려고 마음에도 없는 시환을 속여 결혼하고, 시연을 결혼시킨 게 아니었다. 이 전부가 망할 HLA 그룹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 집안과 엮이지만 않았어도 딸들을 비싸게 시집보내고 자신은 부를 누리며 살 수 있었다.

HLA 그룹을 만나기 전까진 순탄했는데, 그 집과 엮인 후 소혜가 미국에서 죽고 지금 자신은 돈 몇 푼에 이런 꼴을 당했다.

“아아악!”

그녀가 악을 썼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왠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선경이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제 인생을 망가뜨린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았다.

“가만 안 둬…….”

입술을 씹은 잇새로 피가 맺혔다. 그녀가 말아 쥔 두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내가 너희들 절대 가만 안 둬. 난 딸을 잃었다고……!”

허공을 향한 눈빛에 살기가 가득했다.

* * *

은성이 방에 도착했을 땐 이미 아무도 없었다. 청소하려는지 룸메이드만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었다. 은성이 안으로 들어가자 룸메이드가 깜짝 놀라며 나왔다.

“아, 전 가신 줄 알고…….”

“잠깐 뭘 좀 놓고 간 것 같아서요. 죄송합니다.”

은성의 말에 직원은 금방 카트를 밀고 방을 비워 주었다. 은성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딱히 사용한 흔적은 많지 않았다. 다만 카펫을 적신 와인과 주변에 깨진 유리 조각이 시선을 끌었다.

그의 이마가 구겨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딩동. 그가 막 전화기를 꺼내려는데 벨이 울렸다. 은성은 단숨에 문을 열었다.

“깜짝이야…!”

시연이 급하게 열린 문에 화들짝 놀랐다. 놀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여긴 왜….”

“은성 씨는 여길 어떻게…….”

그는 잠깐 당황했지만 곧 시연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녀의 몸이 스르르 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활짝 걷힌 커튼 사이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살이 직접 닿는 건 아니었으나 여름이라 근처만 가도 볕이 느껴졌다.

“너 여긴 무슨 일이야? 어떻게 알고 왔어?”

“아버지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장인어른께서?”

“네. 실은 일전에 아버지께 부탁드린 일이 좀 있었어요. 아무래도 어머니가 걱정돼서 당부를 드렸는데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어머니가 지 이사님을 만나러 간 것 같다고….”

은성은 그제야 이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가 아까보단 낫지만 여전히 펴지지 않은 얼굴로 시연의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모양을 한 걸 보니 급하게 왔나 보네.”

그녀가 뒤늦게 머리카락을 다듬으며 시선을 피했다. 아버지에게 연락을 받고 어머니보단 은율에게 앞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선뜻 장소를 알려 주었다. 급하게 온다고 오긴 했는데 제 모습이 어떤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게다가 은성을 마주칠 줄도 몰라 흐트러진 제 모습이 부끄러웠다.

“죄송해요. 또 이런 일이 생기게 해서.”

멀리 떨어진 시연의 시선을 그가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시연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나한테 먼저 말해. 혼자 이렇게 달려오지 말고.”

“네, 그럴게요.”

“내가 왔을 땐 이미 아무도 없었어.”

시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처연해 보여 은성은 안타까웠다.

시연의 잘못은 애초에 무엇도 없었다. 소혜와의 거짓으로 점철된 약혼도, 부모의 잘못도 그녀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그런데 미안해하고 사과하는 사람은 시연이었다. 은성은 미안해하는 시연을 보자 그게 화가 났다. 눈앞의 창백한 얼굴에 억울함이 치밀었다.

“미안해.”

“네?”

그녀가 뜻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와중에도 그는 환한 빛 속에서 어여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가 참 예뻤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시연은 화려한 빛 속에 있었다. 수많은 사람 중 그녀는 제 시선을 사로잡았다. 수줍어하는 얼굴, 호기심 어린 시선, 맑은 얼굴빛과 선해 보이는 눈매에 이끌렸다.

지금 상황은 그때와 달랐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자신의 마음은 똑같았다. 그녀를 전혀 모르던 그때도, 서글픈 마음으로 제 앞에 선 그녀에게도. 은성은 여전히 가슴이 뛰고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닿고 싶었다.

그가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미안한 마음을 시선으로 전달했다.

‘괜히 나 때문에, 내 욕심에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

그녀는 지금 미안한 얼굴로 제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자신이 그녀 곁에 있으려 하다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입으론 다른 말을 뱉었다.

“네?”

그녀는 여전히 고운 얼굴로 같은 말만 흘렸다. 은성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시연은 놀랐지만, 지금 상황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딸기처럼 말캉하고 솜사탕처럼 달콤한 입술을 빨아들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잔잔히 섞여들었다.

낯설고도 갑작스러운 키스 후 은성은 시연을 곧장 집으로 데리고 갔다.

“쉬어. 그러는 게 좋겠어. 너 안색이 별로야.”

하지만 쉬라는 은성에게 시연은 다른 부탁을 했다. 아무래도 오늘 일을 모른 척 그냥 들어가기엔 마음이 불편했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실 거예요. 본가에 잠깐만 다녀올게요.”

아버지 얘기에 은성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그냥 인사만 하고 와.”

분위기상 은성은 다음에 함께 인사하기로 했다. 회사를 오래 비우기 힘든 이유도 있었다. 요즘 급변하는 회사 상황에 그가 필요한 자리가 많았다.

“그렇게 할 거예요. 아버지 안심만 시켜드리고 바로 집으로 갈게요.”

은성은 시연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지켜본 후 출발했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시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은성에겐 괜찮은 척했지만 실은 그렇지 못했다. 요즘 스트레스 때문인지 컨디션이 나쁜 이유도 있었다.

“저 왔어요.”

그런데 짧은 인사에 돌아온 건 아버지가 아니라 날이 잔뜩 선 어머니의 음성이었다.

“나시연! 너 이리와!”

영문도 모른 채 시연이 선경에게 팔목을 잡혀 끌려가다시피 안방으로 갔다.

“아버지는요?”

“나갔다!”

대답하는 목소리는 역시나 날카로웠다. 방으로 가며 슬쩍 보니 전에 계시던 실장님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집엔 어머니와 그녀뿐인 것 같았다.

선경이 문을 잠그고 커튼마저 단단히 쳤다. 마치 작은 소리라도 새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어, 어머니……?”

손을 놓고 노려보는 눈초리가 사나웠다. 선경은 뜸 들이지 않고 바로 그녀를 다그쳤다.

“너, 대체 네 아버지와 나 사이를 어떻게 만든 거니?”

“네? 그게 무슨 말….”

“지금 네 아버지가 일하러 나간 것 같아? 집을 나갔다! 당분간 회사에서 지내겠다고 하더구나!”

“네?”

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에 선경이 코웃음을 쳤다.

“넌 네가 그런 짓을 하고도 우리가 괜찮을 줄 알았니? 감히 아버지한테 내 단속을 맡겨?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그런 짓을 해!”

비난의 수위는 단숨에 높아졌다. 시연은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가슴만 자꾸 답답해졌다.

“둘밖에 없으니 우리 허심탄회하게 한번 말해 보자. 실은 그간 너 나랑 소혜 미워했지? 그래서 매번 바나나 토하고, 사람 많은 곳은 무서운 척했지? 나 골탕 먹이려고, 어!”

“어머니, 대체 그게 무슨….”

“모르는 척하지 마! 애초에 네가 지 사장 좋아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너 그래서 이번 결혼도 선뜻 수락한 거잖아. 작년엔 그렇게 결혼하라고 해도 싫다더니 지은성이 나타나니까 넙죽 네! 한 거잖아!”

“오, 오해에요. 어머니 그건…!”

해명하려는 시연의 손짓을 선경이 탁 치며 가로막았다.

“됐다. 계모 팔자가 그렇지 뭐. 그래도 난 너 시집 잘 보내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넌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시연은 점점 더 꼬여가는 상황에 당황했다. 어머니는 지금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 지금 화가 나셔서 그러신 것 같은데 우선 진정하시고요…….”

다가가려는 시연을 선경은 이번에도 매몰차게 쳐냈다. 노려보는 눈길이 한층 더 사나워졌다.

“이미 결혼한 거 물릴 수도 없고, 내가 너한테 얘기하자고 한 건 앞으로 다시는 내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해서다.”

“간섭이라니요…. 제가 감히 어떻게 어머니께….”

“인연 끊을 거다!”

“어머니…….”

시연은 머리가 지끈 아팠다. 연속된 충격 때문인지 눈앞이 어지러웠다.

“흥, 어머니 좋아하네. 내가 못할 것 같니? 어차피 넌 날 엄마로 여기지도 않잖아! 그러니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일에 참견하면 부모와 자식 간의 연을 끊을 거다. 내가 네 아버지와 이혼하길 바라지 않는다면 새겨들어!”

선경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 쾅! 거칠게 닫는 문소리에 시연의 머리가 크게 울렸다.

시연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신이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걸까. 이 와중에도 다행이라면 지난번 은성이 막아선 일 때문인지 선경은 시연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지이잉, 지이잉.

그녀의 전화기가 울렸다. 아버지였다. 그러나 시연은 지금 전화를 받을 기력이 없었다. 그녀의 눈가에 습기가 차올랐다.

은성과 결혼하고 6개월만 지나면 독립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일은 꼬이기만 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의도치 않은 오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까.

바닥을 짚은 그녀의 손이 잘게 떨렸다. 하얗게 말아 쥔 손등 위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녀의 전화기가 계속해서 울렸다.

시연의 머릿속엔 한 사람만 떠올랐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조금 전 은성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어쩌나. 시연은 이제 이 결혼이 후회되었다. 아무리 부모님이, 그가 하자고 해도 애초에 하지 않는 게 맞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그를 원하는 욕심을 끝까지 감췄어야 했다. 시연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다정한 그의 곁을 잠시나마 바란 자신을 책망했다.

“흑…….”

탄식 섞인 슬픔이 한줄기 눈물로 떨어질 때 그녀의 전화기가 짧게 울렸다.

<나시연 씨 2차 검사는 예약 부탁합니다. ―H 병원>

그녀가 눈물을 닦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이잉. 그런데 이번엔 화장대 위에서 전화기 진동음이 들렸다. 어머니가 전화기를 두고 간 것 같았다.

시연이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어머니가 전화기를 찾으러 금방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러다 울고 있는 걸 들키면 또 어떤 소리를 들을지 몰라서 그녀가 서둘러 문고리를 잡았다.

* * *

한 비서의 움직임이 더할 나위 없이 분주했다. 사장님의 고군분투로 회사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공 성장 중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바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미국에서 온 메일은 정리했습니까?”

이미 밤이 깊었지만 은성의 목소리에 지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낮보다 한 비서와 둘이 있는 지금 그의 눈빛이 더 선명히 빛났다.

“네, 낮에 끝냈습니다! 그리고 자금 담당은 내일부터 교체하기로 했습니다. 교육은 이미 끝났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은성이 짧게 턱을 당겼다. 그간 지은율뿐 아니라 미국 상황까지 모조리 살펴 왔다. 애초에 이 결혼과 관련해 아버지와는 약속이 있었다. 그 약속을 지키고 결혼을 인정받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왔다.

그 때문에 시연에게 더 신경을 쏟지 못한 건 안타까웠지만 그건 감수해야 했다. 시연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마음도 있었기에 후회는 없었다.

“이대로면 기한 안에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물론입니다! 이 분위기만 놓치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한 비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지만 은성은 긴장을 놓지 않았다. 그간은 지은율과 윤선경을 한 발 떨어져 적당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나 이젠 긴장의 끈을 바짝 조일 때였다.

흘러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은율이 입국할 때 별일 없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 또 하필이면 정희서의 수술 시기마저 당겨져 지은율의 신경이 최고조로 곤두서 있었다.

“윤선경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겁니다. 그 일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요. 이번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앞으로 시연의 여행 일정이 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시연의 휴가만큼은 보장해 주고 싶은데 그게 맘처럼 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반면 은성은 차라리 시연이 이곳에 없을 때 그간 곪았던 일이 터지는 게 낫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게 마무리된 후 그녀가 제자리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했다.

“윤선경이 제발 더는 일을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조금은 덜 힘들게 지나갈 수 있을 텐데…….”

은성은 한 비서를 의식해 말 중간에 시연이란 말을 뺐다.

반면 한 비서는 탄식처럼 흘리는 은성의 말에 그다지 동조하지 않았다. 은성의 일을 깊이 도우며 세상에 이렇게 나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나시연은 안타깝지만 윤선경만큼은 이번에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처벌받기를 바랐다.

“그럼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고 저는 사모님께 가 보겠습니다. 사장님께선 곧장 약속 장소로 출발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은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근래 시연의 안색이 나빠 오늘 병원에서 링거를 맞기로 했다. 하필이면 그가 반드시 가야 하는 약속이 있어 한 비서만 보내기로 했다.

“잘 부탁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든든한 대답에 은성의 표정이 그나마 조금 나아졌다.

* * *

“시연아, 갑자기 병원이라니 이게 무슨 일이야?”

보원의 호들갑에 시연은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링거만 금방 맞고 가려고 했는데 보원과 통화하는 와중 갑자기 응급환자가 들어오는 바람에 병원인 걸 들켰다.

침대에서 내려가며 시연이 잠깐 휘청했다. 보원이 깜짝 놀라 후다닥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너 왜 이래? 퇴원해도 되는 거 맞아?”

시연은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

“정말? 잠 안 깨서 그런 거 맞아? 나 너까지 이러니까 불안해.”

“승률이는 아직도 연락이 안 돼?”

승률이 얘기에 보원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응. 아무래도 내가 한 번 찾아가 볼까 봐. 그리고 나 실은 오늘 방 뺐어.”

“뭐?”

“승률이도 없는데 계속 있을 수 없잖아. 그리고 누가 봤다던데 HLA 건물 앞에서 승률이를 봤대.”

“승률이를?”

“응. 모자를 써서 처음엔 아닌 줄 알았는데 확실하대.”

승률이 그곳엔 무슨 일로 갔을까. 시연은 잠깐 생각에 잠겼지만 곧 보원의 거처부터 걱정했다.

“그럼 넌 지금 집에 들어간 거야?”

이번엔 보원에게서 대답이 사라졌다. 먹먹한 표정으로 보아 집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간 보원이 호텔에서 이렇게 오래 지내는 게 조금 무리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보원은 집에 들어가는 걸 정말 싫어했다. 어떨 땐 부모님이 친부모가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런 보원이 오빠의 구박마저 받으며 지낼 걸 생각하자 서글퍼졌다. 대답하지 못하는 친구를 대신해 시연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너도 함께 구호 활동 가면 좋을 텐데….”

“난 어서 졸업해서 취직해야지.”

애써 씩씩하게 말하는 보원에게 시연이 웃어 주었다. 친구가 힘을 내니 자신도 힘을 내야 할 것 같았다. 아니, 마주 보며 웃자 벌써 제법 힘이 났다.

잘 생각해 보면 그래도 자신은 현실에서 잠시 도피라도 할 수 있지만 보원은 그마저도 힘들었다. 세상엔 어쩌면 자신보다 힘겨운 현실을 헤쳐 나가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었다.

“씩씩하네, 내 친구. 본받아야겠다.”

“그래. 일단 그러려면 아프지 말아야지.”

“응. 그래서 나 오늘 링거 맞았어!”

시연은 보란 듯이 주사 자국을 내밀었다. 동물 그림이 그려진 동그란 밴드가 귀여웠다. 둘이 함께 웃었다.

꼬르륵.

웃음에 섞여든 배꼽시계 소리에 보원이 겸연쩍게 입술을 당겼다.

“우리, 승률이도 그렇고 이런저런 얘기할 겸 맛있는 거 먹고 들어갈까?”

시연의 제의에 보원은 아닌 척 배를 문질렀다.

“지금 먹으면 살찔 텐데……. 하지만 내 친구 건강이 먼저니까 일단, 먹을까?”

결국 두 사람의 걸음은 분식집으로 향했다. 바삐 내딛는 걸음이 오랜만에 조금 활기찼다.

한편 막 주차장에 주차한 한 비서는 급히 응급실로 뛰어갔다. 오는 길에 앞쪽에 사고가 나 돌아오는 바람에 조금 늦었다. 사장님이 알면 걱정할 게 뻔해 시연을 찾는 걸음이 바빴다.

“어디에 계시지……?”

두리번거리는 눈길이 걸음처럼 바삐 사방을 오갈 때였다. 막 빈 듯한 침상에서 한 간호사가 뒤돌며 중얼거렸다.

“나시연 씨 벌써 가셨나?”

나시연이란 이름에 한 비서가 급히 간호사를 붙잡았다.

“나시연 씨 보호자입니다. 혹시 나시연 씨 가셨습니까?”

“아, 네.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잠깐 볼일이 있었는데 엄청 빨리 가셨네요.”

“네에, 그런데 그 볼 일이란 게 뭔지…?”

간호사가 그래도 다행이란 얼굴로 기록철을 확인했다.

“이번 검사 결과 말인데요, 아마 좀 더 빨리 나올 것 같아요.”

“검사…라고요?”

“네. 오늘 하고 가신 2차 검사요.”

“아 참, 네.”

한 비서는 서둘러 아는 척 간호사의 말에 집중했다.

“밀린 게 많아서 오래 걸린다고 말씀드렸는데 좀 당겨질 것 같아요. 변경 사항 있으면 꼭 알려 달라고 아까 부탁하셔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간호사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빠르게 다음 일을 찾아갔다. 한 비서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기를 들었다. 은성은 시연의 검사를 모르는 것 같았는데 조금 걱정이었다.

* * *

주말 아침, 아직 잠이 덜 깬 시연이 고소한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잠도 체력이 있어야 잘 잔다더니 링거를 맞아서 그런지 병원을 다녀온 후로 잠이 늘었다.

“으응… 더 자고 싶은데…….”

오랜만에 옛날 꿈을 꾸었다. 흐릿하지만 꿈속에서 엄마를 본 것도 같았다. 엄마는 백화점처럼 사람이 많은 곳에서 시연을 향해 활짝 웃었다.

[시연아, 우리 딸. 내 전부.]

자신을 사랑스럽게 부르는 그 목소리가 꿈에서 깬 지금도 들리는 것 같았다. 행복하고 뭉클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눈을 감고 있기 힘들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연이 화들짝 일어나 앉았다. 어젠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했는데 은성이 벌써 일어나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 서 있었다. 한 손엔 뒤집개가 들려 있었다. 시연은 눈을 비볐다.

“은성 씨……?”

“대체 언제 일어나려는 거야?”

날아오는 타박에 그녀가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슬리퍼를 신고 문가로 갔지만 그는 불만이라는 듯 길을 내어 주지 않았다. 시연이 배에 힘을 주고 작은 틈으로 비스듬히 빠져나갔다.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그가 기분 좋아 보여 시연의 기분이 조금 더 좋아졌다.

“이게 무슨 냄새예요?”

그녀의 발은 절로 부엌으로 향했다. 은성이 그녀의 뒤를 따르며 대꾸했다.

“힘들었어. 처음 해 본 게 많아서.”

은성은 때때로 그녀에게 요리를 해 주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제대로 된 한 상을 차려 준 건 처음이었다. 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식탁에 깔끔히 차려진 반찬 수가 엄청났다.

“이게 다 뭐예요?”

“뭐긴 뭐야, 밥이지. 어서 앉아. 너 기다리느라 내 뱃가죽이 등에 붙었어.”

시연은 식탁에 앉으면서도 신기했다. 그와 함께 산지 수개월이 되었지만 이런 건 여전히 어색했다. 특히 그가 요리할 때가 가장 신선했다. 그가 해 준 밥을 먹을 때면 마치 현실과는 동떨어진, 마치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기분이었다.

“이건 오리고기고, 소고기 장조림은 샀어요?”

“내가 했어.”

“정말요? 말도 안 돼!”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시연이 젓가락으로 장조림을 집어 먹었다. 그녀의 입가가 가늘게 늘어졌다.

“와, 질기지도 않고 맛있어!”

“그것만 맛있는 줄 알아? 이게 오늘의 메인이라고.”

시원한 조개가 잔뜩 들어간 해물탕에 시연의 눈이 메추리알처럼 커졌다. 은성의 입술이 잘난 척 바짝 끌려 올라갔다.

좋은 꿈을 꾸고 일어난 시연은 오늘이 마치 예전 제 생일 같았다. 아침을 거하게 차려 준 은성은 시연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직접 운전해 도착한 곳은 야외의 한적한 카페였다.

날씨는 화창했고 은성은 쨍쨍한 햇빛에 실내를 권했으나 시연은 아이스커피를 들고 야외를 거닐었다.

“정원이 정말 예뻐요.”

“덥지 않아?”

“전혀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산들산들 흔들리는 들꽃을 살피는 시연을 은성이 흐뭇하게 보았다.

한 비서에게 시연이 정희서를 위해 2차 검사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처음엔 또 혼자 결정한 것에 화가 났지만 그건 차차 다른 감정으로 바뀌었다.

정희서는 실상 제 핏줄이었다. 얼마 전까진 자신은 단 한 번도 보지도 못했던 핏줄뿐인 가족. 그런데 시연은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 가족을 위해 위험을 무릎 쓰려 했다.

시연이 그러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주위 반대에도 그렇게 결정했다면 답은 하나였다. 나소혜.

시연은 어릴 때부터 가족을 유독 사랑했다.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차가운 이해관계로 얽힌 가족은 단지 회사를 함께 이끌어가는 인맥일 뿐이었다. 그런데 시연은 달랐다. 어쩌면 그래서 그녀에게 더 호기심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시연은 소혜를 무척 따랐다. 소혜의 죽음에 시연은 부모보다도 더 오열했고 깊이, 오래도록 슬퍼했다. 그건 한동안 연락을 끊었던 시연이 소혜가 죽은 뒤 제게 얼마나 자주 연락해 왔는지를 떠올리면 알 수 있었다.

시연은 소혜의 죽음에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을 자책했다. 소혜가 많이 아프게 간 건 아니냐고 울며 하던 질문엔 그마저도 마음이 먹먹해졌다.

시연은 은율이 희서를 잃지 않도록 애쓰고 있었다. 단지 그 마음뿐일 아이였다. 제 아내인 나시연은 어쩌면 그녀를 힘들게 할지도 모를 지은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일 터였다.

시연을 지켜보는 은성의 눈빛이 무거워졌다. 자신은 이렇게 착하고 여린 제 아내를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 자신이 하려는 일 때문에 그녀가 더 아파하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이리와.”

“네?”

시연이 꽃향기를 맡으며 돌아보았다. 꽃을 옆에 둔 그녀는 사랑스럽기 짝이 없었다. 더위에 발그레해진 볼과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이 꽃잎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더워, 그만 들어가자.”

시연은 곧 불만 서린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 닿은 건 그녀의 손이 아니라 그녀가 마시던 커피였다.

“이것 좀 갖고 가 주세요. 전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게요.”

시연이 웃으며 흩날리는 꽃잎처럼 멀어졌다. 화사하게 웃으며 장난임을 과시하는 그녀가 어여뻐 은성의 가슴에 통증이 일었다.

결국 은성은 들어가지 못했다. 벌이 향기로운 꽃을 쫓아다니듯 그는 제게서 도망가는 여자를 계속해서 따라갔다.

“그렇게 더우면 제 커피 마셔도 좋아요.”

그녀가 커피를 허락했다. 은성은 시연이 빨아 먹던 빨대에 그대로 입술을 갖다 댔다. 남들이 할 땐 더럽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어째서 연인들이 음료를 나눠 먹는지 알 것 같았다.

시연이 입을 대고 먹었던 빨대, 마시던 커피, 공유하는 걸음 모든 게 좋고 벅찼다. 그가 또다시 그녀가 멀어질세라 새로운 걸음을 내디뎠다.

시연은 그와 함께한 하루가 믿기지 않았다. 은성은 그녀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산책을 즐겼고 오후엔 쇼핑도 했다. 차에 실어온 쇼핑백 개수가 엄청났다. 그러다 노곤해져 차에서 그와 함께 낮잠도 한숨 잤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까지 먹고 들어온 시연은 꿈같은 하루가 흘러간 것에 신기했다.

“예전엔 은성 씨와 함께 차 타는 것도 어색했는데 참 신기해요.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요.”

시연은 들떴던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만큼 은성이 그녀를 편안하게 해 주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시연은 지금만큼은 이런저런 고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내일이면 꿈처럼 깰 오늘이었다. 그러니 잠깐만, 오늘 하루만은 끝까지 행복한 기분을 만끽해도 되지 않을까.

“나도 즐거웠어.”

“정말요? 아까 백화점에선 좀 힘들어 보였는데, 내가 잘못 봤나?”

집으로 먼저 들어가며 시연이 새침하게 그를 놀렸다. 은성은 어쩔 수 없이 피식 웃으며 인정했다.

“그래도 가끔은 같이 쇼핑할 수 있어.”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사실 백화점에서 힘든 건 저였어요. 그만 사고 싶은데 자꾸 이 옷 저 옷 입어보라고 해서 힘들었어요.”

그가 그녀의 손에서 쇼핑백을 가져가 내려놓았다. 시연은 왜 그러나 싶어 돌아보았다. 은성이 그녀를 그윽하게 내려다보았다.

“매일 오늘처럼 지낼 수 있어.”

“정말 그럴까요?”

“남들은 항상 이렇게 지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잔뜩 쌓인 쇼핑백에 닿은 그녀의 시선에 은성은 이번에도 잠깐 웃었다.

“넌 좀 그래도 돼.”

“알았어요.”

시연은 그대로 돌아서려 했다. 그러나 은성은 그녀를 잡아채 제게로 끌어당겼다. 달라붙은 몸의 체온이 서서히 올라갔다.

“내 방으로 가.”

시연은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았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실은 점점 짙어지는 시선에 그의 욕망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녀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은성의 시선과 얼굴이 차츰 아래로 떨어졌다. 입술이 맞붙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바짝 감아 안고 시연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휘어진 등줄기를 자유로이 오르내렸다.

가느다란 여체의 굴곡을 오롯이 느끼며 은성이 그녀를 차츰 제 방으로 이끌었다. 그에게 입술을 빼앗긴 채 시연의 걸음이 조금씩 방 안으로 밀려들었다.

“하아…….”

“흐음…….”

서로의 숨결이 짙게 섞여들고, 상대를 탐하는 손길이 자유로이 오갔다. 그가 시연의 원피스 지퍼를 주욱 내렸다. 순식간에 속옷 차림이 된 여자를 침대에 눕혔다. 더운 숨을 쏟으며 올려다보는 여자의 위를 그가 단숨에 차지했다.

툭, 툭. 셔츠 단추를 푸는 손길에 그녀의 시선이 닿았다. 시연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단추를 풀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이마에, 눈에, 입술에 차례로 제 입술을 눌렀다.

시연의 손에 마지막 단추가 풀어지자 그가 거칠게 셔츠를 벗어 침대 아래로 던졌다. 탄탄한 복근과 거칠어진 호흡에 오르내리는 가슴을 그녀가 살살 쓰다듬었다.

은성은 그녀의 손을 잡아 제 가슴을 꾹 눌렀다. 쿵쿵 뛰어 대는 심장 위에 그녀의 손을 대고 아프지 않게 눌러 문질렀다. 손바닥에 짓눌린 젖꼭지가 비틀리고 굴려졌다.

잘생긴 미간이 아찔하게 모여들었다. 그가 짧은 숨을 내뱉었다.

“다음은 어딘지 알지?”

시연은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슴 다음은 하체 중심부였다. 시연은 그가 다시 키스해 올 때 단단한 몸을 매만지며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렸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열렬히 삼켰다. 시연은 그를 가득 끌어안으며 등을 쓸어내렸다. 매끈하고 단단한 근육에 흥분이 솟구쳤다.

그녀가 그의 단단해진 엉덩이를 붙잡았다. 그러곤 조금씩 옆으로 손을 내려 제 하체를 압박하는 중심부를 찾아 손을 밀어 넣었다.

그는 그녀가 바지를 벗기기 쉽게 허리를 조금 들어주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의 브래지어는 착실히 벗겨져 나갔다. 시선을 사로잡는 탐스러운 유방을 그가 입 속 가득 물었다.

“핫!”

시연이 신음하며 그의 입술이 주는 자극을 견뎌 냈다. 바지 버클이 풀리고 지퍼가 내려갔다. 은성은 상체를 들어 드로어즈와 바지를 한 번에 벗어 내던졌다. 그러곤 그녀의 브리프마저 끌어 내렸다.

알몸이 된 두 사람이 마치 한 덩어리처럼 얽혔다. 그의 다리가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잔뜩 부풀어 오른 가슴을 그득 그러쥔 그가 핑크빛으로 곤두선 유두를 입술에 물었다.

시연이 허리를 휘며 가슴에서 번지는 쾌락에 신음했다. 다리 사이에선 촉촉한 물기가 배어났다. 그 사이로 은성의 굵은 손가락이 밀려들었다.

은성은 시연의 가슴을 주무르며 혀로 젖꼭지를 굴렸다. 입술로 빨아내고 혀끝으로 긁었다. 이를 세워 살짝 씹었다가 다시 죽죽 빨았다.

“하아……!”

시연의 허리가 연신 쾌감에 들썩였다. 눅눅한 물이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 시트를 적셨다. 음핵을 찾아낸 그의 손가락이 조그마한 돌기를 꾹 눌렀다. 좌우로 힘을 가해 압박하자 하얀 여체가 비명을 질렀다.

“꺄으…! 아흣……!”

은성의 입술이 그녀의 가슴을 물고 손은 클리토리스를 굴려댔다. 잔뜩 헤집자 찐득한 꿀물이 그의 손에 잔뜩 묻어났다. 은성은 손바닥 전체로 그녀의 음부를 꾹 눌러 빙글빙글 돌렸다. 질구에서 새어 나온 물이 그의 손에, 그녀의 허벅지에, 사방에 묻었다.

시연의 음부를 돌리는 은성의 손길이 빨라졌다. 젖꼭지를 깨물고 잡아당기는 행동에 가슴이 뾰족하게 솟아올랐다. 시연은 자극적으로 치솟는 쾌감에 손톱으로 그의 등을 죽 긁었다.

참기가 힘들었다. 가슴이 빨리고 물렸다. 음핵이 만져지고 음부가 벌려져 잔뜩 범해졌다. 민망하지만 그였기에, 은성이었기에 눈물을 머금으며 부끄러운 행위들을 견뎌 냈다.

푸욱.

기다란 손가락이 그녀의 질구를 뚫고 깊숙이 들어왔다.

“아흣!”

시연이 허리를 뒤틀었다. 그가 그녀의 위에서 내려왔다. 두 사람은 마주한 채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가 되었다. 은성이 그녀의 목덜미를 물었다. 핥고 빨아들이며 그녀의 체향을 잔뜩 삼켰다.

질퍽질퍽. 시연의 다리 사이로 드나드는 손가락에 물이 흥건했다. 그 손가락은 하나에서 곧 두 개가 되고 세 개가 되었다. 그녀의 한쪽 다리를 제 허리에 감은 은성이 잔뜩 벌어진 그녀의 음부를 퍽퍽 쳐댔다.

“아흣! 아으……. 핫!”

그의 손가락 세 개가 동시에 그녀의 질 내벽을 파헤치며 드나들 때마다 시연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쾌감에 신음했다.

그녀를 드나드는 손의 속도가 빨라졌다. 은성은 그녀의 허벅지에 페니스를 비비며 시연을 마지막까지 내몰았다. 손을 적시는 물기가 엄청났다. 푹푹, 쑤걱쑤걱. 마치 질구를 뚫어 버릴 것처럼 손을 세차게 몰아치는 순간 시연이 진한 교성을 쏟았다.

“하아아……!”

그 순간에 은성이 손을 빼내고 그녀의 질 속에 제 페니스를 박았다. 퍽! 강하게 밀고 들어가자 절정을 맞이하던 시연이 더 세차게 파닥였다.

그가 그녀의 아래를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갓처럼 부푼 기둥 선단이 그녀의 내벽을 힘 있게 긁었다. 쿵, 안쪽 끝까지 박았다가 달라붙는 내벽 주름을 단숨에 뜯어내고 페니스를 빼냈다. 귀두가 입구에 걸려 빠듯하게 그녀를 압박했다.

푹, 푹!

은성의 페니스가 시연의 질을 최대치로 벌렸다. 성기가 합쳐진 구멍이 뻑뻑해 피스톤질이 잘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가 다시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다리를 접어 누르고선 허벅지를 좌우로 넓게 벌렸다. 제 페니스가 뚫고 들어간 구멍이 벌름대는 모습이 전부 보였다.

그는 제 몸무게를 실어 그녀의 구멍을 더욱 벌리고 페니스를 욱여넣었다. 시연이 빠듯한 감각에 좌우로 머리를 저었다. 퍽! 마지막엔 힘을 실어 페니스 뿌리까지 모조리 그녀 안에 집어넣었다.

“하윽…!”

시연이 경련하듯 떨었다. 은성은 그대로 폭주했다. 가장 안쪽에 닿은 귀두가 뜨거워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가 격렬하게 허리를 털었다. 시연의 질구를 강타하고 그 안의 살점을 모조리 긁어 댔다.

잔인한 쾌감이 번졌다. 시연은 절정에 이은 엄청난 쾌감에 전신이 바르르 떨렸다. 그와 격하게 몸을 섞은 게 처음도 아닌데 오늘따라 감각이 이전을 넘어섰다.

그가 자신을 뚫고 들어올 때마다 격정적인 불꽃이 시야를 덮쳤다. 다리가 벌어지고 아래가 가격당하는 데도 수치심보다는 쾌락이 앞섰다.

푹, 푹! 퍽!

길고 굵은 기둥이 시연의 음부를 벌겋게 물들였다. 작고 아담한 구멍을 잔혹하게 벌리고 그 안을 속속들이 헤집었다. 주름이 벌어지고 내벽이 꿀렁거렸다. 축축한 내벽 깊숙한 곳이 그의 페니스를 물고 늘어졌다.

척, 척! 찌걱!

시연의 질 안에 박힌 페니스가 몸통을 더욱 부풀렸다. 가장 깊은 곳에 박힌 귀두가 시뻘게지며 더욱 단단해졌다. 핏줄이 곤두선 페니스가 질구를 벌리고 들어와 자궁을 타격했다.

“하읏! 아아……!”

쾌락에 울부짖는 여자 안에서 은성이 제 것을 폭발했다. 입구를 빠져나온 귀두 구멍에서 눅눅한 정액이 세차게 쏟아져 나왔다. 그가 그녀의 배에 제 체액을 잔뜩 쏟아 냈다. 희멀건 정액이 끝도 없이 그녀의 배를 타고 흘렀다.

“하아……!”

쾌감의 탄식을 쏟아 내며 그가 시연의 위에서 욕망을 분출했다. 시연의 사위가 새하얗게 변해갔다. 은성의 뜨거운 신음과 욕망이 그녀의 배를 타고 흘러내렸다.

어쩐지 다신 없을 것 같은 행복감이 그녀를 가득 메웠다. 식지 않은 그의 체온이 그녀를 또다시 뜨겁게 감싸 왔다.

* * *

은성이 출근한 평일 아침, 시연은 설거지를 마치고 차분히 식탁에 앉았다. 그녀의 앞엔 하얀 종이 한 장과 시원한 커피가 놓여 있었다.

시연은 한참 고민에 빠졌다. 눈앞의 깨끗한 종이에 뭐라고 써야 좋을까.

“후우…….”

그녀가 긴 숨을 조용히 내쉬었다.

은성에겐 하고픈 말이 참 많았다. 그러나 그건 가슴 깊이 숨겨둔 마음처럼 아마 영원히 하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녀가 지금 그에게 전하려는 말은 그로선 어쩌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얘기였다.

또 한숨이 내려앉았다. 기어이 쓰려고 마음은 먹었지만 어쩐지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을 먹은 듯 결국 시연의 손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은성 씨에게…….>

또박또박 편지를 쓰는 시연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집을 잘 정돈한 후 그녀의 발길이 향한 곳은 본가였다. 시연은 일전에 어머니 휴대전화에서 본 메시지를 떠올렸다.

<정희서 낚시 성공. 날짜와 시각은…….>

그때 어머니에게 예상치 못한 비난을 들은 후 시연은 곧장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문고리를 잡는 순간 묘한 느낌이 발목을 붙잡았다.

시연은 난생처음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남의 휴대전화를, 그것도 어머니에게 온 메시지를 훔쳐보는 것은 그녀의 기준에선 절대 해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발은 화장대로 향했다.

방금 도착한 메시지라 앞쪽 일부가 보였다. 그 글자 몇 개에 시연의 시선이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그때 메시지를 보고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어머니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시각은 모르지만 날짜는 보았다. 그간 어머니의 경고가 두려워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하지만 시일이 임박하자 발은 또 이상하게 절로 움직였다. 그때 본 날짜가 바로 내일이었다.

시연의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녀가 대문 앞에 서서 잠시 호흡을 진정할 때였다. 그녀의 전화기가 세차게 울렸다. 보원이었다.

“응, 보원아. 나야.”

-시연아, 나 지금 QG호텔 앞인데 방금 승률이 봤어!

흥분했는지 보원의 음성이 높았다.

“뭐? 승률이를? 얘기는 좀 해 봤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정확히는 QG호텔 근처 쇼핑몰에서 봤는데 어쩐지 급한 일이 있는 것 같아서 못 쫓아갔어.

“그랬구나….”

이 일이 정리되고 나면 승률이부터 만나 봐야 할 것 같았다. 제 일이 급하다는 핑계로 친구의 일을 마냥 두고 보기가 미안했다.

-혹시 모르니까 근처에서 좀 기다리려고. 볼일 보고 나올 수도 있잖아?

“그래, 고생스럽겠지만 잠깐 기다려보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내가 같이 못 있어 줘서 미안해.”

-미안은 무슨, 나도 우연히 본 건데. 어? 그런데 저 빨간 머리 여자 전에 공항에서 본 그 사람이네…. 어딜 저렇게 급하게 가지?

그런데 통화하면서 보원은 또 안면 있는 누군가를 본 듯했다. 시연은 더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만 전화를 끊으려 했다.

“보원아, 나 잠깐 볼일이 있어서 전화….”

그때 시연의 머리에 보원이 한 말 중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빨간 머리 여자.

-그래, 내가 나중에 또….

“보원아!”

시연이 보원을 다급히 불렀다.

“혹시 방금 네가 말한 그 빨간 머리 여자 외모 좀 자세히 알려 줄 수 있어?”

-빨간 머리?

“응.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해서.”

-이미 가 버렸는데 어쩌지? 그런데 그 여자는 전에 하도 인상 깊게 봐서 안 보고도 기억이 나.

보원이 빨간 머리 여자의 인상착의를 자세히 읊었다. 보원의 설명을 들으며 시연은 심장이 쿵쿵 뛰었다. 설마 은율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명을 들을수록 그녀가 확실했다.

-옷차림도 공항에서 봤을 때랑 비슷하네. 화려한 건 둘째 치고 구두 색깔이 정말 튀어.

“…….”

-시연아? 듣고 있어?

“응? 아, 미안. 그런데 거기가 어디라고?”

시연의 걸음이 방향을 바꾸었다. 이상하게 불안했다. 보원은 은율이 무슨 일이 있는 것처럼 급하게 뛰어갔다고 했다.

그녀가 통화하며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그간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 일을 오늘까지 미뤄선 안 되었다. 어머니의 경고가 무서워도 이런 건 좀 더 빨리 서둘러야 했다.

-여기? QG호텔…. 뭐야, 너 설마 지금 여기 오려고?

“보원아, 정말 미안한데 방금 그 여자 좀 따라갈 수 있어? 혹시 붙잡을 수 있으면 내가 갈 때까지만 붙잡아 줄래?”

-뭐라고?

“부탁할게!”

시연은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황당해하는 보원에게 부탁한 후 정신없이 뛰었다. 불길했다. 어머니의 전화기에서 정희서의 이름을 보았을 때 걱정되는 건 정희서가 아니라 지은율이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드는 줄은 모르지만 불안한 마음을 접을 수 없었다.

“가면 안 돼요. 가면 안 돼…….”

설마 어머니가 정말 나쁜 짓을 저지를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감정은 미친 듯이 달음박질쳤다. 제 가슴이 왜 이렇게 아프고도 먹먹하게 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꼭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제발 멈춰요……!”

시연이 뛰어가며 간절히 혼잣말했다. 은율은 자신보다 현명하니 부디 미끼에 걸리지 않기를 바랐다.

같은 시각 한 비서의 움직임이 기만했다. 표정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일단 들키지 않게 바짝 따라붙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은성이 급하게 차에 올랐다. 이어 한 비서가 운전대를 잡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막는 게 최우선입니다.”

“네!”

은성의 말에 한 비서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또한 그들의 계획 전부를 반드시 잡아내야 합니다.”

“네, 사장님!”

한 비서가 힘 있게 액셀을 밟았다.

* * *

은율은 휴대전화로 도착한 메시지에 눈이 확 돌았다.

<정희서 씨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오전에 잠깐 나갔다 온 사이 희서가 사라졌다. 희서는 금방 돌아온다고 메시지를 남겼지만 얼마 후 날아온 건 협박이었다. 은율은 그렇게 생각했다. 윤선경이 정희서를 제 약점으로 생각하고 협박하려는 것이라고.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대처하는데 하필 시기가 좋지 않았다. 희서는 한동안 괜찮아 보였지만 금방 나빠지길 반복했다. 그렇게 약한 사람을 윤선경은 대체 어떤 말로 꼬드겨 끌어낸 걸까.

희서를 찾아 뛰는 은율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다. 윤선경이 뭐라고 하든 지금은 희서의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일단 희서를 돌려받고 대응은 추후 생각하기로 했다.

“죽여 버릴 거야.”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표정이 살벌했다. 은율이 사방을 돌아보며 정신없이 뛰었다.

오래된 철문을 밀자 어두컴컴한 복도가 나왔다. 은율이 새까만 길을 다급히 뛰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오직 정희서 하나만 존재했다.

지저분한 주차장 한구석에서 선경이 주위를 살폈다.

“올 때가 됐는데…….”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이곳에 지은율이 나타나면 오래전 그날처럼 사람 한 명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비명횡사해도 상관없었고 머리를 다쳐 반병신이 되어도 좋았다.

자신은 이 일과는 무관했다. 이건 단지 지독히도 운 나쁜 사고일 뿐이었다. 아픈 몸으로 싸돌아다니는 동생을 보호자에게 돌려주려 했을 뿐이었다.

섬뜩한 미소가 선경의 입술에 걸렸다.

“이곳엔 다신 안 올 줄 알았더니…….”

그 옛날, 지금은 남편인 나시환 집에서 가사 일을 할 때였다. 철없는 여섯 살 꼬맹이 시연이 길을 잃고 돌아다니는 걸 겨우 찾아서 백화점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애가 사라져 정신이 나가 버린 나시연 엄마는 가까워지는 차도 보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엄마를 발견하고 뛰어나간 시연과, 그 모습에 차에 뛰어든 그 여자는 둘 다 똑같이 어리석었다. 그냥 기다렸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죽어 버린 나시환 아내와 그날의 기억을 잃은 딸은 자신과는 무관했다. 그건 그냥 진짜 사고였다.

그리고 지금 이것 또한 사고일 뿐이었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운 나쁜 사고.

“정희서 데려와.”

선경의 말에 한 남자가 건물 안쪽에서 희서를 데려왔다. 희서의 입에서 뿜어나오는 숨이 심상치 않았다.

“언니가… 하, 여기로 온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요.”

처음보다 창백해진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선경이 혀를 찼다. 희서는 대꾸 없이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여긴… 어디예요?”

“호텔 근처잖아요. 그것도 몰라요?”

선경이 귀찮다는 투로 대꾸했다. 타박에 희서는 그저 묵묵히 은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호텔에 도착한 시연이 보원을 향해 달려갔다.

“지 이사님은?”

택시를 타고 오며 보원에게 그녀가 누군지 간략히 설명했다.

“미안, 놓쳤어. 분명 호텔로 들어갔는데 갑자기 안 보이더라고.”

“보원아, 미안한데 일단 나 먼저 갈게.”

“어딜?”

시연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뛰었다. 호텔로 들어서자 급한 마음에도 갑갑함이 몰려왔다. 시야가 흐려지며 머릿속이 안개에 휩싸인 듯 어지러웠다.

그녀가 고개를 털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주위를 돌아본 그녀가 어느 한 곳을 향해 다시 뛰었다. 달려가면서도 시연은 자신이 왜 이 길을 선택했는지 알지 못했다. 무작정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마지막까지 내려가선 잘 사용하지 않는 철문을 밀었다.

그녀가 철문 안쪽 새까만 길을 내달렸다. 서둘러야 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달리는 시연의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 하나밖에 없었다.

‘더 서둘러야 해!’

* * *

차내는 고요했다. 한 비서와 은성의 시선이 감시카메라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 은성은 선경을 감시하다 그녀가 일을 꾸미는 것을 포착했다. 분명 보복성 화풀이일 텐데 그건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확인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이번 일만 잘 잡으면 증거물을 빌미로 앞으로 선경의 그릇된 행동을 관리할 수 있었다.

꿀꺽. 한 비서의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흠, 죄송합니다.”

한 비서가 사과했지만 은성은 신경 쓰지 않았다. 대기한 사람들이 적절한 때 계획한 대로 잘 움직여 주기만을 바랐다.

“지은율 이사님이 오셨네요…!”

그런데 그때 여러 대 설치한 카메라 중 한 대에 지은율의 모습이 잡혔다.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사장님께서 예상하신 그대로입니다.”

한 비서의 말에도 은성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화면 속에서 희서가 은율을 발견하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 모습을 발견한 은율이 주차장을 가로질러 황급히 뛰어가려 했다. 그리고 동시에 맨 구석 모니터에 시연의 모습이 잡혔다. 시연이 있는 곳은 코너를 돈 차가 막 직진을 시작하는 길이었다.

은성의 동공이 벌어질 때 화면 속 모든 사람의 시선이 시연이 있는 곳으로 모였다. 코너에서 차 한 대가 튀어나왔다.

“안 돼. …당장 멈춰!”

은성이 다급히 외쳤다. 그러나 차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차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사장님!”

놀란 한 비서가 한발 늦게 대기팀에 시연을 보호하라고 지시한 후 은성을 쫓아나갔다. 그러나 텅 빈 차 안, 그들이 보던 모니터에서는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곧 경악해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보원이 나타나 비명을 지르고 여기저기에서 남자들이 뛰어나와 쓰러진 희서와 놀란 은율을 부축했다. 그 중엔 승률의 모습도 있었다.

선경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차가 멈춰선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화면 속에 은성이 나타났다.

* * *

“시연아!”

시연은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절규하듯 외치며 자신을 부르는데 앞이 흐릿했다.

따뜻한 물기가 머리를 타고 흘렀다. 눈을 비비자 그제야 앞이 조금 보였다.

“나시여언……!”

제 손을 잡은 온기가 참 따스했다.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한 은율이었다. 시연이 ‘하아…….’ 숨을 내쉬었다. 은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은율은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도 시연은 웃었다. 툭 떨어지는 손을 누군가가 재빨리 받아 주었다.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다행……이에요…….”

시연은 자신이 어떻게 됐는지 잘 몰랐다.

이곳으로 뛰어오면서 그동안 어떻게 잊고 지냈는지 모를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때였다. 백화점엔 사람들이 정말 많았고 엄마는 시연에게 미니바나나를 사 주었다. 그건 시연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었다.

[시연아, 맛있어?]

[응! 엄청 달아요!]

엄마가 사 준 바나나는 사탕보다 더 달았다. 그 바나나를 먹으며 엄마가 화장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문득 요의가 들어 엄마를 찾아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때 길이 엇갈려 엄마를 잃어버렸다.

한참 후 어둡고 고요한 어딘가에서 아는 얼굴을 만났다. 윤선경은 그곳에서 엄마를 만날 거라고 했다. 그래서 기다렸다. 얼마 후 정말 엄마가 나타났고 기쁜 마음에 뛰어나가는데 엄마가 차에 치였다.

엄마가 죽은 건 자신 때문이었다. 자신이 기다리지 않고 길을 잃어서이고, 엄마를 만난 게 기뻐 뛰어나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은 여태 그 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이 까만 통로를 뛰어가며 생각났다. 그때 엄마를 친 차는 코너를 돌아 나타나 달려왔고, 시연은 코너 앞에서 막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문을 박차고 나가자 눈앞에 차가 보였다. 지금 막아야 했다. 그래야 은율을 구할 수 있었다.

자신이 다칠 거라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오직 차만 막으면 그때와 같은 불행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시연은 차디찬 바닥에 쓰러지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막았다. 이번엔 내가 막았구나.

그땐 엄마를 죽게 했는데 이번엔 누군가를 불행에서 구했구나.

“구급차! 빨리 구급차 좀 불러!”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멀어졌다. 그 사람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난 괜찮아요. 울지 마, 난 정말 괜찮아…….’

은율의 멍한 얼굴이 멀어지고, 사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눈을 뜨고 싶은데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왔다.

“흑, 시연아……!”

마지막으로 보원과 승률의 얼굴이 들어왔다. 시연이 아주 잠깐 입술을 늘였다. 그리고 시야가 까마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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