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보원의 방을 찾아가는 시연의 걸음이 바빴다. 친구들은 좋은 휴가지를 찾았다며 빨리 오라고 성화였다. 호텔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녀가 밭은 숨을 내쉬었다.
지이잉, 지이잉.
연속해서 울리는 전화에 시연이 서둘러 발신자를 확인했다. 그런데 친구일 거라 생각했던 그녀의 동공이 조금 벌어졌다. 은율과 함께 다니는 문 실장이었다. 그의 번호는 지난번 응급실에서 명함을 받아 알고 있었다.
“네, 나시연입니다.”
-대표님께서 지금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그의 용건은 명료했다. 시연은 조금 고민했지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시연의 전화기로 곧장 만날 장소가 날아왔다. 시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고 다시 로비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이어 보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원아, 나 잠깐 어디 좀 들렀다가 갈게. 미안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지금 어딘데?
“갑자기 누가 좀 만나자고 해서 그래.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게.”
친구들에겐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은율을 만나는 일이 더 시급했다. 보원은 섭섭해 하긴 해도 곧 알았다고 대답했다.
-대신에 너, 볼일 끝나면 꼭 바로 전화해!
“알았어. 금방 다녀올게!”
은율이 오라는 곳은 QG호텔에서 멀지 않은 호텔 카페였다. 약속 장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은율의 이름을 대니 직원이 그녀를 공손히 안내했다.
시연은 직원을 따라 꽤 오래 걸어 들어갔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을 지나 룸 형식으로 된 곳을 안내받았다.
그녀는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물을 마시며 은율을 기다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창 외에는 모두 막혀 있었다. 공간이 좁은 건 아니지만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고 은밀해 보였다.
카페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신기한 건 카페인데도 낮은 음악 소리조차 없이 매우 고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시간을 확인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마음의 준비를 못 해서인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같은 시각 은성은 은율의 연락에 꽤 불편한 참이었다.
[나시연 얘기니까 나오는 게 좋을 거야.]
은율의 입에서 시연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자리였다. 그가 카페 직원을 따라 차분히 걸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은율은 평소보다 더욱 은밀한 자리를 잡았다.
“이쪽입니다.”
직원은 은성을 안내하곤 이내 사라졌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은율이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았다.
“좀 늦었네?”
“갑자기 시연이 얘기라니, 무슨 소리야?”
은율에게 내내 존대하던 은성의 말투가 꽤 거칠었다.
“일단 앉아. 급하게 온 듯한데 물도 좀 마시고.”
자리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푼 그가 물로 입을 적셨다. 그러곤 또 즉시 은율을 다그쳤다.
“빨리 말해. 나 시간 없으니까.”
“네가 언제 한가했던 적이 있던가? 이렇게 불러내지 않으면 사실 얼굴 보기도 힘들잖아? 우리 가족인데.”
은성이 짙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녀의 가족이라는 말이 왠지 거슬렸다.
“할 말이 뭐야?”
“나시연, 지난번 응급실 갔을 때 피검사 한 거 알아?”
“피검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모르는구나. 네 새 가족도 별거 없네. 난 또 이쪽 가족 다 버리고 갔으니 그쪽 가족은 좀 다를 줄 알았더니.”
“비꼬지 말고 말해. 시연이 피검사를 했다니?”
조급한 은성과 달리 은율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시선이 은성의 뒤쪽 얇은 벽 너머를 슬쩍 스쳤다. 그러곤 이내 커피를 내려놓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설마, 너 그 어린애 벌써 임신시켰니?”
“뭐라고?”
짧은 순간 은성의 표정이 황망해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날카롭게 날을 세우곤 쏘아붙였다.
“그따위 소리하려고 불렀어? 내 가족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러니 누님은 누님 가족이나 잘 챙겨.”
그는 더는 있을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율이 나지막이, 그러나 꼭 누구 들으란 듯이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아, 나시연은 네 가족이라서 부모까지 그렇게 살뜰히 살피는구나. 나시환 사장이 사업 자금 없다고 손 벌리면 한 몫 주고, 윤선경이 카드 터진 거 막아 달라면 막아 주고.”
돌아오는 눈초리가 따갑다 못해 은율을 꿰뚫을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한겨울 한파처럼 매서웠다.
“지 이사님,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바뀌었던 호칭이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너는 가족이 아니라고 단정 짓는 듯한 말투에 은율이 비릿하게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가 있겠어? 내가 한국에 들어온 이유 잘 알잖아.”
“그럼 그 일에나 신경 쓰십시오. 남의 가정사엔 신경 거두고.”
“그러고 싶었는데 나에게까지 자꾸 흙이 튀니 도리가 있나.”
돌아서려던 은성이 위협적이게 말했다.
“흙 같은 소리 집어치워. 내 결혼으로 집안에 해가 되는 일은 조금도 없을 거야. 그러니 쓸데없는 말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고 정희서나 잘 챙겨. 지난번처럼 시연이한테 흙물 튀게 하지 말고.”
되돌아간 비난에 은율의 표정이 굳었다. 은성은 더 말을 섞지 않고 그 즉시 자리를 떠났다. 은율이 분한 듯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은율보다 더 굳은 표정으로 시연이 문 실장을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않아.”
차디찬 어투에 시연이 흔들리는 걸음을 겨우 옮겨 은성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은율의 눈매가 표독스러웠다.
“잘 들었지?”
시연은 건너편에서 들리는 은율과 은성의 대화에 무척 놀랐다. 그런데 진정할 새도 없이 기막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은성은 은율의 돈 관련한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건 수긍한다는 소리였다.
은율이 식어가는 커피를 들어 마셨다.
“뭘 그렇게 까무러칠 것 같은 얼굴을 해? 너 그런 애 아니잖아?”
“저도…… 커피 좀 마실 수 있을까요?”
은율이 문 실장을 통해 직원을 불렀다. 곧 시연 앞에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가 놓였다. 시연은 뜨거운 잔을 양손으로 붙잡고 잠시 마음을 진정했다. 여름이었지만 넘치는 냉방으로 실내가 몹시 추웠다. 아니 어쩌면 제 마음이 몹시 추워서 그리 느끼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제 우리 대화 좀 해 볼까?”
시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뜻하지 않게 충격적인 얘기를 들었지만 그녀도 할 말은 있었다.
“이런 방식, 생각지 못했는데 뜻밖이에요.”
“왜? 너만 머리 굴릴 수 있을 줄 알았어? 너 똑똑하잖아. 공부도 꽤 잘한다며?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구질구질한 짓을 벌였는지는 생각 못 해?”
“타인을 통하지 않고 직접 말씀하셨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말씀이었어요.”
당돌한 말에 은율이 가볍게 탄성을 터트렸다.
“그래. 네가 쉽게 털어놓진 않을 거라고 예상했어. 너희 집안 사람들 다 그렇잖아.”
“부모님 얘기라면 전 은성 씨가 돈을 주고 있는지 몰랐어요. 그건 제가 한 번 알아볼게요. 잠깐 빌리셨을 수도 있고….”
“하!”
이번엔 크게 웃은 은율이 곧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따위 연기는 그만해. 그런 거 보자고 너 부른 거 아니니까.”
“연기라니… 전…!”
반박하려던 시연의 머릿속에 문득 은성에게 들은 언니 얘기가 떠올랐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이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예전 언니 일로 기분 상해 있으신 걸 깜빡했어요. 죄송합니다.”
“이제 와 그 일이 네 사과 한마디에 없던 일이 된다던? 내가 널 부른 이유는 네게 뒤통수 맞기 전에 내가 너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야.”
“그런 생각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부모님과 은성 씨의 돈거래가 사실이라면 그 또한 대표님의 분노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맞아. 그래서 넌 또 다른 대비책을 세웠겠지.”
은율의 분노가 상당했다. 시연은 은율을 만나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지만 어쩌면 이 관계는 그녀의 말처럼 사과 한마디로 풀릴 관계가 아닐 수도 있었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차가운 시선에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네가 계획하는 일 당장 때려치워!”
무슨 말일까? 자신이 계획하는 일이라고……?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시면….”
“내가 다 안다고 말했지!”
순간 쏟아진 고성에 시연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은율은 마시던 커피를 말릴 새도 없이 시연의 얼굴에 그대로 끼얹었다. 까만 물기가 그녀의 얼굴을 적시고 깨끗한 블라우스마저 어둡게 물들였다.
시연은 너무 놀라 커피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얼굴 아래로 떨어지는 커피를 망연자실 쳐다보기만 했다.
“뭐? 병원에서 피검사를 해? 내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따위 짓을 벌이면, 내가 속아줄 줄 알았어?”
“그, 그게 무슨 말씀…….”
겨우 얼굴만 추스른 시연이 물으려 했으나 그보다 앞서 또다시 은율의 비난이 쏟아졌다.
“대체 무슨 짓을 해서 1차 검사 적합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런 말에 흔들릴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1차 검사 적합이라고요……?”
“모르는 척하지 마. 난 네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어. 더는 우리 집안을 두고 쥐락펴락하는 꼴을 두고 보지 않아. 은성이와도 이혼하게 할 거야. 내가 못 할 줄 알아?”
분노에 휩싸여 어떤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은율을 시연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네가 무슨 수작을 부려 은성일 꼬드겼는지는 몰라도 더는 네 맘대로 안 돼. 물론 앞으로는 돈도 더 뜯어내지 못할 거야.”
은율은 확실히 오해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어긋났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단순히 사과로 마음이 풀릴 줄 알았다니 어리석었다.
시연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래. 이제야 수긍할 생각이 든 모양이네.”
그러나 이제 은성의 말처럼 자신이 하지 않은 잘못에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예전 일은 가족으로서 백번 사과할 수 있었지만, 자신을 향한 은율의 비난은 아니었다. 시연이 고개를 반듯하게 들었다.
“말씀드렸지만, 가족의 일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은율이 고까운 듯 팔짱을 끼곤 노려보았다. 시연은 은율의 자극에 발끈하던 은성이 잠시 떠올랐다. 어째서 그가 제 가족을 위해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와 함께 하는 길에 서고 싶었다. 그의 뜻에 동참하고 싶었다. 아직은 둘이 부부였으니까.
“그 일은 두고두고 사과드리겠습니다. 바라시는 바가 있다면 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선 뭐든 하겠습니다. 하지만.”
정중하던 시연의 어투가 단호해졌다. 은율의 동공이 선명해졌다.
“이사님 생각엔 오해가 있습니다. 저는 이 결혼으로 어떤 금전적인 이득을 취하려 계획한 적 없습니다.”
“그럼 네가 은성이와 정말 사랑이라도 해서 결혼했다는 말이니?”
은율은 바로 비웃었다. 반면 시연은 사랑이라는 말에 흠칫했다. 지금 자신은 은율 앞에서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실 그대로를 말하자면 계약 결혼도 밝혀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까지 말하는 건 무리였다. 지금 그 사실을 말하면 자칫 은율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을 수 있었다. 그럼 뭐라고 답해야 할까.
잠시 후 생각을 정리한 시연이 입술을 뗐다.
“네. 사랑해요. 전 은성 씨를 진심으로 사랑해요.”
“뭐? 하하하!”
진실과 진심을 전한 말에 돌아온 건 커다란 웃음이었다. 신나게 웃은 은율이 같잖다는 듯 한쪽 입가를 말았다.
“그 소린 죽은 네 언니도 했다고 들었지.”
언니 얘기에 시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런 것엔 아랑곳하지 않은 은율이 이어 말했다.
“너도 이제 성인인데 나이를 그쯤 먹었으면 사랑 타령은 딴 데 가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우리 세계에서 사랑 운운하면 뭐가 바뀌디?”
“물으셨잖아요. 은성 씨를 사랑하느냐고. 그래서 전 그렇다고 대답한 것뿐이에요.”
은율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녀는 대화하는 내내 반듯한 태도를 보이는 시연이 불편했다. 이쯤 자극하면 보통은 제 요구사항을 읊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시연은 이상했다. 제가 하는 비난에 사과하면서도 꼿꼿한 태도를 풀지 않았다.
마치 정말 잘못이 없다는 모습 같았다. 그런데 그게 미운 게 아니라 꼭 진실 같아 헷갈렸다. 그래서 은율은 시연을 더 몰아붙였다. 그런데 몰아붙이면 붙일수록 할 말이 없어지는 건 제 쪽이었다.
“됐고. 그래서 2차 검사는 언제 받을 거야?”
차라리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듯했다. 시연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걱정이 묻은 것 같기도 했다.
“혈액형이 같아서 한번 해 봤는데 정말 적합할 줄은 몰랐어요.”
그럼 그렇지. 누구나 대충 타인을 생각하는 척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막상 하라고 하면 물러서는 게 보통 인간이었다.
시연의 맑은 눈동자가 은율을 똑바로 마주했다.
“한시가 급하니 내일이라도 받을게요.”
뭐?
“그런데 제겐 왜 연락이 안 왔을까요? 연락처를 남겼었는데. 아, 수혜자 보호자 쪽으로 연락이 간 모양이네요.”
어리둥절해진 은율의 표정은 모른 채 시연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근처에 서 있던 문 실장이 시연에게 조심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시연이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런 문 실장을 은율이 잠깐 노려보았다.
“그래서, 정말 신장 이식이라도 해 줄 참이야?”
은율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정말 시연의 신장이 적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줄 수 있다면 기꺼이요. 하지만 남은 검사에서 안 되는 경우도 많다는 설명을 들었어요. 지금은 아직 뭐라 말할 단계는 아닌 것 같아요.”
시연의 말에 은율의 심장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래, 역시 그렇지. 이렇게 한 발 빼는 게 정상이지. 은율은 또다시 잠시나마 기대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자신을 비웃은 은율이 시연은 입도 대지 않은 커피를 가져가 마셨다.
“그래서 바라는 게 뭐야? 너도 돈이야?”
“돈…….”
조용히 말을 따라 읊는 시연을 은율이 한번 흘겼다.
“네가 희서한테 신장을 주면 회장님이 널 받아 주기라도 할 것 같아?”
“신장을 나눠 주면 정희서 씨가 건강히 살 수 있잖아요.”
당연한 투로 하는 말에 커피를 마시던 은율의 움직임이 멎었다.
“사실 조금 무섭긴 하지만 검사 신청할 때 큰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단지 가능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시도라도 해 보자는 마음이었어요.”
커피잔이 찻잔 위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그런데 적합하다니 좀 얼떨떨해요. 그래도 기쁘긴 해요. 희서 씨도 이 얘길 아나요? 알면 조금이라도 표정이 더 나아지려나. 절 싫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
은율은 대꾸하지 않고 이젠 옅은 미소까지 머금은 시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서두르는 게 좋겠죠? 전 방학이니까 언제든 괜찮아요. 검사 날짜 잡고 연락 주셔도 되고, 제가 예약해도 좋고요.”
“너 바보야?”
“네?”
“신장 떼 주는 일이 그리 쉬운 줄 알아? 은성인 네가 신장 떼 주려고 하는 거 알아?”
“그건….”
“그게 네 뜻 하나로만 되는 일인 줄 알아? 이 멍청이야!”
차분히 말하던 은율이 마지막에 시연을 나무랐다. 은성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는지 그제야 시연은 잘못을 인지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은율이 그런 시연을 더 거칠게 몰았다.
“너 결혼했어. 남편 있는 여자라고. 그런데 뭐? 살릴 수도 있으니 그냥 검사해 봤다고? 넌 행여 네가 잘못될 거란 생각은 안 해? 네 미래는? 네 가족은? 다른 건 생각도 안 하고 그런 단순한 생각에 검사했어?”
따가운 질책에 시연의 고개가 말려들어 갔다. 은율이 테이블을 거칠게 짚고 일어났다. 한심하다는 듯 시연을 향해 혀를 찼다.
“너나 지은성이나 멍청한 건 똑같아. 자신 하나만 생각하지. 주변 사정은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이야.”
커피로 젖은 테이블 위에 수표 몇 장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거로 세탁하든 옷을 사 입든 맘대로 해. 너희 집안 사람들 돈 좋아하잖아.”
은율이 문을 열었다. 룸을 나서기 전 시연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네가 벌이려고 한 짓 남편에게 직접 말해. 알아들었어?”
은율이 나가고 혼자가 된 시연이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너 결혼했어. 남편 있는 여자라고.]
[네 미래는? 네 가족은?]
은율이 던지고 간 말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희서를 걱정하는 간호사의 말에 검사를 신청할 땐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혈액형이 맞아 혹시 모르니 검사라도 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게 그렇게 단순한 생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네가 잘못될 거란 생각은 안 해?]
자신이 잘못될 거란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지금도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어차피 이식받는 사람도 똑같았다. 아니 더 열악했다. 그런데도 그 신장 하나 받으려고 사력을 다했다.
[은성인 네가 신장 떼 주려고 하는 거 알아?]
은율의 비난에 충격을 받은 건 은성의 이름이 나왔을 때였다.
“내가 또 잘못했어…….”
좋은 마음이었다고 해도 혼자 결정해선 안 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은성이 곁에 있는 데도, 그를 사랑한다 말하면서도 결국엔 제 문제를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했다.
그녀가 나직이 남은 결혼 기간을 세었다.
여름은 쏜살같이 지나갈 테고, 가을은 스치듯 지나갈 테고. 그러고 찬바람이 불면 은성과는 헤어진다. 아마도 영원히.
“어떡해…….”
그녀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여전히 머리카락을 타고 흐르는 커피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나뒹구는 수표가 커피에 점점 젖어가듯 그녀의 숨은 숨결도 차츰 젖어갔다.
“진짜 결혼과 똑같이 하겠다고 했으면서…….”
아무리 자책해도 심장을 찌르는 통증이 가시질 않았다. 은성에게 너무 미안했다. 아까 은율에게 말할 땐 당당히 그가 가는 길에 함께 서겠다고 생각했으면서 여전히 그러지 못했다.
“흑…….”
결국 시연은 새어 나오는 흐느낌을 막지 못했다. 그에게 미안하면서도 실은 다른 이유로 눈물이 났다.
여태 깨닫지 못했는데 남은 결혼 기간을 세면서 그와의 헤어짐이 두려워졌다. 곁에 누군가 함께 있는 게 좋아서, 그가 제 곁에 있는 게 행복해서 남은 시간이 짧은 게 무서웠다.
“나 미쳤나 봐……. 흑.”
그녀가 뒤늦게 이율배반적인 그 마음을 탓했다. 지금 헤어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슬퍼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또한 결국 남은 건 제 실수였다.
시연이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발개진 눈가를 정돈하고 테이블 위 커피에 젖은 수표를 조심히 챙겼다.
“힘내. 이게 뭐라고….”
룸을 나서는 시연이 조그맣게 자신을 응원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혼자였고 또 혼자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 틈에 자신을 따뜻이 감싸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할 일이었다.
“보원아. 나 이제 바로 갈게.”
보원에게 전화한 그녀가 화장실에 들렀다. 머리와 얼굴만 대충 씻은 후 씩씩하게 호텔을 나섰다.
* * *
“넌 직원이 커피 쏟은 걸 그냥 넘어갔어?”
카페 직원의 실수에 옷을 버렸다는 말은 그럭저럭 잘 통했다. 보원은 제 옷을 꺼내며 길길이 화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커피가 굳어 옷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난 빨면 될 줄 알았지.”
시연의 안일한 태도에 보원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어서 가서 옷이나 갈아입어. 아니, 그 직원은 손님이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이 지경으로 그냥 보내냐? 거기 어디야?”
보원의 잔소리를 피하려 시연이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무겁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은율이 남긴 질타가 사라진 커피 자국과 함께 숨은 이유였다.
“보원아, 그런데 너 살쪘니?”
시연이 헐렁한 티셔츠를 살피며 욕실에서 나왔다. 보원이 입에 과자를 물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글쎄, 왜? 많이 커? 너랑 나랑 치수 같잖아.”
“네가 아니면 내가 빠진 건가?”
“그런가 보다. 그런데 승률이 얜 금방 갔다 온다더니 왜 이렇게 안 와?”
승률이는 부모님 호출이 있어서 잠깐 갔다고 했다. 보원이 과자를 내밀며 여름휴가지를 들이밀었다.
“내가 좋은 친구들 덕에 호강한다. 기간은 경비도 그렇고 그냥 1박 2일로 하자고 했어. 너 이번 방학에 신혼여행도 가잖아.”
신혼여행 소리에 과자로 향하던 시연의 손이 되돌아갔다. 입 안이 썼다. 결혼할 땐 단순히 방학에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애매했다. 곧 헤어질 텐데 굳이 신혼여행을 가야 할까.
“안 먹어?”
“응. 난 물이나 좀 마실래.”
보원은 편안하게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랐다. 이젠 호텔을 제집처럼 이용하는 보원의 모습에 시연이 가볍게 웃었다.
“왜 웃어?”
“너 좋아 보여서.”
“좋지. 여긴 천국이야. 승률이 이렇게 써먹을 데가 있을 줄이야. 역시 친구는 잘 사귀어야 해. 안 그래?”
보원이 물을 건네주며 키득거렸다. 시연도 함께 웃었다.
“참, 아까 누가 너 찾아왔었어. 모르는 사람이 벨 눌러서 순간 얼마나 놀랐던지.”
“나를? 네가 아니라 날 말이야?”
시연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응. 너! 승률이가 번호 받아 놨는데, 오면 주라고 할게.”
“그래.”
“승률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나 혼자 있었으면 아마 없는 척했을걸? 호텔은 그게 좀 불편한 것 같아.”
가볍게 웃은 시연이 조금 진지하게 물었다.
“보원아, 그런데 호텔엔 언제까지 있을 생각이야? 부모님은 뭐라 안 하셔?”
금세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우물쭈물하던 보원이 나직이 대꾸했다.
“하지. 그런데 버티고 있어. 오빠만 다시 나가면 바로 들어갈 텐데.”
“오빠는 이대로 학교 그만두는 거야?”
일전에 보원은 아무래도 오빠가 학교를 관둘 것 같다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 앞날이 심히 고민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럴 것 같아. 미친 거지. 그걸 또 받아 주는 부모님도 난 이해가 안 돼. 내가 하루빨리 독립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아.”
거실에 한숨이 내려앉았다. 시연의 사정도 그렇지만 보원도 사는 게 만만치 않았다.
잠시 곰곰이 생각에 빠졌던 보원이 말했다.
“나 방학 지나고 휴학할까?”
“뭐?”
“일해서 원룸이라도 얻는 거지. 이대로 계속 지낼 수는 없잖아.”
“생활비 들어가는 거도 만만치 않을 텐데, 어떻게든 학교부터 졸업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가…….”
고민이 깊어지려 할 때였다. 벨 소리에 보원이 기쁜 내색을 하며 재빨리 문을 열었다.
“너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 좀 그렇게 됐어.”
승률이 들어오며 사과했다. 그런데 어쩐지 승률의 표정이 좀 어두워 보였다.
“뭐야? 빈손이야?”
보원은 평소와 달리 빈손인 승률에 실망한 내색을 했다.
“미안.”
“미안은 무슨. 네가 맨날 나갔다 오면 뭘 한가득 들고 오니까 내가 이렇게 잘못 길든 거지. 괜찮아.”
승률을 다독인 보원이 그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시연은 어쩐지 둘의 모습이 묘하게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간 다른 일로 바빠 잘 몰랐는데 분명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변했다. 보원이 승률에게 의지하는 느낌이라 그럴까.
“그런데 승률아, 너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참, 이거.”
시연의 질문에 승률은 대답 대신 찾아왔었다는 사람의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고마워.”
“뭘.”
잠깐 침묵이 내려앉았다. 뒤늦게 보원이 승률을 향해 눈을 가늘게 늘였다.
“시연이 말대로 분명 일이 있는 얼굴인데, 장승률 너 왜 그래?”
따지는 듯한 말투에 승률이 보원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그런데 그 시선이 조금 이상했다. 멋쩍어진 보원이 장난이었다는 듯 먼저 시선을 피했다.
“뭐야, 얘 진짜 이상하네. 왜? 부모님이 휴가 못 보내 주시겠대?”
보원은 그냥 할 말이 없어 해 본 말이었다.
“어.”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툭 돌아왔다.
“뭐?”
“뭐라고? 승률아, 너 정말 무슨 일 있어?”
놀라 다른 말을 떼지 못하는 보원 대신 시연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제야 승률이 먼 바닥으로 시선을 떨궜다.
“아마 여행은 너희 둘이서 가야 할 것 같아. 난 이번 방학에 좀 바쁠 듯해.”
“……그래?”
한참 후에야 보원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시연은 승률에게도 뭔가 선뜻 말하기 힘든 일이 생긴 걸 직감했다.
실내에 싸늘한 공기가 감돌았다. 테이블엔 과자와 휴가지가 나뒹굴었지만 지금 그걸 즐기는 사람은 없었다.
“과자 안 먹을 거지?”
보원이 먹던 과자를 정리했다. 시연의 시선에 점점 더 표정이 어두워지는 승률이 보였다.
* * *
옷이 가벼워지는 만큼 사람들의 마음도 가벼워지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시연의 마음은 요즘처럼 무거웠던 때가 없는 듯했다.
승률에게 받은 연락처의 주인은 희서였다. 전화를 걸자 희서는 밝은 목소리로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약속을 잡았겠지만 시연은 은율 생각에 선뜻 그러지 못했다.
“후우…….”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고민 있어?”
은성이 서재에서 나오며 물었다. 식탁 의자에 앉아 있던 시연이 벌떡 일어났다. 주말이었지만 그는 오전에 일이 있다며 방에서 나오지 않던 참이었다.
“끝나셨어요?”
“점심 나가서 먹을래?”
“네, 전 상관없어요.”
평소와 달리 어떤 의지도 없어 보이는 시연을 그가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무슨 고민이야? 말해 봐.”
시연은 은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그때 카페에서 이후로 제게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그런 그가 시연은 한참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자신 같았으면 당장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말이다.
“지 이사님 동생분 말인데요…….”
“정희서 신장 이식 얘기라면 넌 이제 신경 안 써도 돼.”
역시 그는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시연은 자신이 더욱 어리게만 느껴졌다. 뒤늦게 그 앞에서 어리지 않다고 소리쳤던 지난 일이 부끄러워졌다.
“혹시… 지 이사님께서 뭐라고 말씀 안 하셨어요?”
조심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그는 이제야 할 말이 있다는 듯 눈매에 날을 세웠다.
“너는 왜 나한테 말도 없이 그런 검사를 했어.”
역시나 날아오는 질책에 시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눈 떠. 나시연. 사고 치고 지금 도망가려는 거야?”
그녀가 커다란 눈을 번쩍 떴다.
“도망이라니요! 저 그런 거 안 해요. 그냥 좀 미안해서 그런 거예요.”
“나한테 미안하긴 해?”
“그럼요. 안 그래도 이사님께 많이 혼났어요. 남편 상의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시연의 목소리가 다시 기어들어갔다. 반면 은성은 조금 놀란 기색을 하더니 이내 차분히 대꾸했다.
“알았으면 됐어. 그리고 네 의도는 알겠는데 어쨌든 이 일에서 너는 그만 빠져. 응급실 일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앞으론 더는 그쪽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마.”
단호한 말에 시연은 미안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조금 화가 났다. 그래도 시가 일인데 왜 그는 신경을 끄라는 걸까. 물론 인정받지 못한 관계긴 해도 기분이 좋진 않았다.
“허락하시면 2차 검사는 받으면 안 돼요? 혹시 모르잖아요. 정희서 씨 상황이 갑자기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잠깐이지만 그때 보니 조그마한 자극에도 쉽게 안색이 나빠지더라고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은성이 갑자기 화를 냈다. 시연은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내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 화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가자, 배고프다.”
차 키를 집어 드는 그를 보며 시연은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로에게 예민한 문제라 단숨에 해결하긴 힘들 것 같았다. 그녀가 조심히 대꾸했다.
“말 안 들어서 죄송해요. 옷만 금방 갈아입고 나올게요.”
* * *
시연은 부러 화제를 다른 쪽으로 이끌며 은성의 눈치를 살폈다. 친구들과의 휴가 얘기를 꺼냈다. 승률인 못 간다고 했지만 혹시 바뀔 수도 있으니 일단은 진행 중인 것으로 말했다.
“친구들은 제 신혼여행 때문에 짧게 가자고 하더라고요. 괜히 미안했어요.”
그가 무심하게 포크에 스파게티를 말며 대꾸했다.
“어쩔 수 없잖아. 휴가지 아직 안 정했으면 부산은 어때? 해변 보이는 호텔 정도는 잡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요? 그런데 해변 보이는 곳이면 시즌이라 엄청 비쌀 텐데. 그래도 친구들이 이 얘기 들으면 좋아할 것 같긴 해요.”
시연은 좋은 소식이라 스파게티를 먹다 말고 보원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 모습을 은성이 가만히 보았다.
친구들과 가는 여행이라 조금 길게 보내 줄 수도 있었지만 아무리 친구라도 남자가 있는 게 거슬렸다. 자신이 관리할 수 있는 곳이라면 방을 여러 개 잡아서라도 시연과 친구들을 떼놓을 수 있었다. 우연히 동선이 마주친 척 시연에게 들를 수도 있고 말이다.
“마음에 든대요!”
시연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럼 한 비서 통해서 바로 일정 잡으라고 하지.”
“고마워요.”
시연은 정말 기쁜 얼굴로 감사를 전했다. 승률의 말에 우울해 하던 보원의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
은성이 그런 그녀의 얼굴을 피하지 않고 계속 마주했다. 그러자 시연은 조금 어색한지 곧 볼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그녀가 서둘러 포크를 집었다. 왜인지 허둥대면서 스파게티를 마는 모습이 귀여웠다.
“제가 너무 호들갑이었죠? 사실은 친구들과 이렇게 여행 간다는 게 믿기지 않거든요. 예전엔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런데 결혼하니까 이런 것도 할 수 있고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시연이 수줍은 시선을 들어 그에게 미소 지었다.
“정말 고마워요. ……오빠.”
시연은 이 고마움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가 빤히 쳐다봐서 부끄럽긴 했지만 그래도 진심은 전하고 싶었다.
마지막에 오빠라고 부른 건 모험이었다. 그는 섹스할 때만 오빠라는 호칭을 허락했다.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모험까지 하는 게 무리수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시연은 어쩐지 지금은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그를 다시 만나고 실수가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 호칭을 부른 건 처음이었다. 그가 부디 예전처럼 그 호칭을 받아 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은성은 오빠라는 부름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흔들렸다. 무언가를 기대하듯 바라보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웠다.
그녀의 입술에서 나온 오빠라는 호칭은 달콤했다. 섹스할 땐 자신이 그렇게 부르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불편했다.
심장이 모조리 녹아서 흘러내릴 것처럼 그 한 마디가 달았다. 시연의 수줍은 시선과 다디단 목소리가 자신을 뼛속부터 흔들었다. 심장이 거칠게 내달렸다. 제어할 수도 없을 정도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떨떠름하게 굳은 은성의 표정에 시연은 놀라 이내 시선을 푹 내렸다. 스파게티를 빙빙 마는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죄, 죄송해요. 실수였어요.”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다행히 호칭에 관한 대화는 그걸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둘 사이 이렇다 할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시연은 한동안 스파게티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어쩐지 마음이 착잡했다. 자신은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그런 말을 했을까. 은성은 자신을 또 얼마나 한심하게 봤을까.
우울한 표정으로 스파게티면 한 가닥을 입으로 욱여넣는 시연을 보며 은성은 제 미련한 모습을 탓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제게 손을 내밀었다. 호기로 섹스하자고 한 그녀보다 지금의 그 한마디가 자신을 더욱 흔들었다.
지금도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시연이 제게 다가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까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단지 6개월만 그녀를 잘 지키다 보내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자꾸 흔들렸다. 붙잡고 싶었다. 어차피 결혼한 거, 네가 원하는 모든 걸 하게 해 줄 테니 이혼 안 하면 안 되겠냐고. 구호 활동을 가서 얼마를 있어도 좋으니 영원히 내 아내면 안 되겠냐고.
자신은 그런 마음에 시달리는데 제게 다가온 여린 손짓에 도망쳤다. 예상치 못해 무방비 그 자체였다. 자신은 그녀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 허락할 수 있는지 가늠되지 않았다.
혹시 지금 네가 내민 손을 잡는다면, 우리는 미래를 함께할 수도 있는 거니?
“내가 아까 일로 좀 과민했던 것 같아.”
“네?”
식사하던 시연이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살짝 치떴다. 은성은 자신만을 담은 그 깨끗한 눈동자를 보며 작은 용기를 냈다.
“좀 전에 네가 했던 말 말인데….”
“어떤 말…….”
“그러니까 그 호칭….”
지이잉. 테이블에 놓인 은성의 휴대전화가 대화를 방해했다.
“잠깐만.”
흘깃 본 시연의 눈에 들어온 발신자는 윤선경이었다. 은성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를 향한 시연의 시선이 이지러졌다.
“네, 장모님. 시연이와 식사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통화하는 은성의 표정도 제법 구겨졌다. 시연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냐고요?”
어머니는 왜 은성을 찾는 걸까. 주말이면 어머니도 친구분들과 어울리느라 항상 바빴는데 또 갑자기 무슨 일일까?
얼마 후 의문을 품은 시연의 시선이 은성에게서 차츰 떨어졌다. 그녀의 두 동공에 씩씩대며 다가오는 선경이 들어왔다. 은성이 이내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시연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은성이 선경을 발견하곤 차분히 일어났다. 탁! 선경의 악어가죽 가방이 거칠게 테이블을 때렸다. 선경이 은성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지 사장,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장모님….”
“장모님이면 장모답게 대우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은성의 대꾸를 끊은 선경의 언성이 높았다. 인근에서 식사 중이던 손님들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일단 좀 앉으십시오.”
“왜? 내가 부끄러운가?”
“어머니….”
“넌 빠져!”
시연을 향한 질타가 화풀이인 양 거칠었다. 은성의 눈매가 더 짙게 일그러졌다. 그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앉기 싫으시면 다른 손님들 식사 중이니 나가서 말씀하시죠.”
“하, 아주 이래라저래라 하겠다?”
은성은 선경의 대꾸에 상관없이 계산 후 시연과 함께 레스토랑을 나갔다. 그 모습을 기가 막힌 듯 쳐다본 선경이 이후 바쁘게 따라나섰다.
다행히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라 주차장에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은성이 걸음을 멈추고 선경을 마주하는데 급히 차 한 대가 들어와 멈추었다. 그 차에서 한 비서가 허둥지둥 내려 뛰어왔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안 알려 주면 바로 회사로 가겠다고 하셔서 그만…….”
“괜찮습니다.”
새파랗게 안색이 질려 다가오는 한 비서를 은성이 제지했다. 한 비서는 곧장 은성과 시연의 곁으로 와 한 편인 듯 무리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선경이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선경의 화려하게 다듬은 엄지 끝이 한 비서를 정확히 가리켰다.
“쟤부터 잘라.”
한 비서가 놀라 움찔했다. 시연이 나서려 했지만 한 비서는 그러지 말라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은성이 선경의 팔을 조심스레 눌러 내렸다.
“제 직원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대꾸하는 선경의 목소리가 독이 서린 듯 앙칼졌다.
“저런 직원을 데리고 있으니 회사가 그 모양이지. 저 비서, 이전부터 있던 놈 맞지? 내가 충고하는데 저 비서 안 자르면 후회할 거야.”
“그 말씀 하려고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내가 고작 저딴 놈 하나 자르자고 여기까지 왔겠어?”
선경의 말투가 점점 저급해졌다. 시연은 제 집안일이라 나서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한 비서가 은성의 뒤에서 한사코 말렸다.
“많이 노하신 것 같은데 그럼 무슨 일로….”
“저 새끼가 내 신용을 엉망으로 만들었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차근차근 설명을….”
“야!”
삿대질이 이번에도 한 비서를 향해 날아갔다. 한 비서가 은성의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떨고 있는 그 눈을 향해 선경이 거친 비난을 쏟아 냈다.
“너 숨지 말고 똑바로 나와서 말 안 해? 어디 감히 사장 지시를 맘대로 어겨? 지 사장이 내 카드 결제 대금 처리하란 지시 했잖아! 그런데 왜 결제 막아? 왜 내 카드 다 정지 먹였냐고!”
시연은 어머니가 방금 한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다.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어머니의 행태가 너무 몰상식했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 그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살려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한 비서의 대답에 은성이 뒤돌아 물었다.
“한 비서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방금 장모님께서 하신 말씀이 사실입니까?”
“네…… 죄송합니다…….”
은성이 머리가 아픈 듯 눈가를 찡그렸다. 그러곤 곧장 지시를 내렸다.
“카드 바로 풀어 드리세요. 아니 어쩌자고 그렇게 한 겁니까?”
“그게… 지은율 이사님께서 그렇게 안 하면 본사 차원에서 절 잘라 버린다고……. 사장님께도 말씀드리지 말라고 하셔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제야 은성은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했다. 그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말을 하셨어야죠.”
“죄송합니다, 사장님…….”
시연은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자괴감에 빠졌다. 일전 카페에서 은율에게 돈 관련한 얘기를 듣고 아직 그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결정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어른들의 일이라 자신은 끼어들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아버지에게는 찾아뵙고 무슨 연유로 그런 건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전에 또 문제가 터졌다.
“어머니…….”
고개를 잔뜩 떨군 채 중얼거리듯 뱉은 말에도 선경은 잘도 알아듣고 시연을 고깝게 쳐다보았다.
“너도 이 정도는 내가 귀찮지 않게 알아서 챙길 수 있지 않았어?”
시연은 처음으로 쥐구멍에 숨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른들 일이라 좀 더 기다려보자고 생각했던 안일한 마음이 부끄러웠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선경을 이렇게 반듯하게 보는 일이 처음인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선경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입술을 삐뚤게 말았다.
시연의 목소리가 잘게 떨려 나왔다.
“어머니, 언니 약혼 때에도 혹시 HLA 가에서 이런 식으로 돈 받으셨나요?”
“어머머, 얘가 미쳤나? 너 그 눈빛 뭐야?”
“언니도…… 그걸 알고 있었어요?”
“뭐라고, 너 정말…!”
시연은 어디서 이런 용기가 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더는 물러서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머니는 부끄럽지 않으세요? 예전 일은 다 잊으신 거예요? 어떻게 은성 씨에게 또 이런 부탁을 할 수가 있어요……?”
선경의 얼굴이 이기지 못한 분노에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지금 상황을 믿기 힘들다는 눈이었다.
“너… 너……!”
시연도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쥐구멍이 있다면 머리만이라도 밀어 넣어서 다신 바깥으로 나오고 싶지 않은 심정이었다.
“대답해 주세요. 결혼은 제가 했는데, 왜 어머니와 아버지가 은성 씨를 따로 만나는지. 이 사람이 왜 부모님께 돈을 주는지!”
다음 순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분노에 미쳐버린 선경이 다 보는 앞에서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굳세게 펼쳐진 손바닥이 강한 힘으로 시연의 얼굴을 내리쳤다. 시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
그런데 분명 어마어마한 고통과 함께 짝 소리가 나야 하는데 시연의 몸엔 무엇도 닿지 않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자 선경을 가로막고 선 은성이 보였다.
선경이 은성에게 팔을 붙잡힌 채 부들부들 떨었다.
“자, 자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시연은 은성이 돌아서 있어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무척 화났다는 것만 알았다. 대꾸하는 음성에 억누른 분노가 어마어마했다.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의 말은 대답이 아니라 방금 선경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 말의 무게는 완벽히 달랐다. 무서울 정도로 낮은 음성을 쏟아 낸 그를 향한 선경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 아파. 이거 어서 못 놔?”
그는 곧 악력을 조절하는 듯했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선경이 그에게서 팔을 빼려 버둥거렸다.
“잘 들으십시오, 장모님.”
“뭐라고? 이거 어서 놓으라니까…!”
“한 번만 더 내 아내에게 손을 대면.”
제 말에 집중하라는 듯 선경을 놓아준 은성이 핏기가 사라지도록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선경의 시선이 마치 올무에라도 걸린 듯 그에게로 끌려갔다.
“처가고 뭐고 가만있지 않습니다.”
“뭐… 뭐라고? 자네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그가 새기라는 듯 말을 가로챘다.
“윤선경 씨. 반드시 기억하셔야만 할 겁니다. 방금 내가 한 말을.”
“……!”
“……!”
순간 선경뿐만이 아니라 한 비서, 시연 모두 주변에서 소리가 사라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은성의 말이 너무 단호해 끼어들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잠시 멍하니 섰던 선경만 조금씩 걸음을 물렸다.
“자, 자네… 그간 일에 치여서… 정신이 어떻게… 된…….”
멍한 표정으로 말도 똑바로 하지 못하는 선경을 한 비서가 나서서 빠르게 부축했다. 서둘러 그녀를 차로 데려가 운전석에 태웠다. 문을 닫아준 한 비서가 꾸벅 인사한 후 은성과 시연에게 뛰어왔다.
“사장님과 사모님도 그만 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한 비서의 권유에 은성은 시연을 데리고 곧장 차로 갔다. 그러나 은성은 차에 오르기 전 한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장모님께 이번 카드 대금은 드릴 수 없다고 전하십시오. 지난번 집에서의 폭행 합의금이라고 말씀드리면 알아들으실 겁니다.”
한 비서는 처음엔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한 비서의 시선이 여전히 시동도 걸지 않은 선경의 차를 향했다.
“아무래도 전 윤선경 씨를 댁으로 모셔다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운전은 무리인 듯해 보이시네요….”
차 문을 닫아주는 한 비서를 향해 시연이 조그맣게 고맙다고 덧붙였다. 탁, 문이 닫히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시연은 한 비서가 선경과 자리를 바꾸고 주차장을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만감이 교차했다.
“하아…….”
그녀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은성이 시연을 돌아보았다.
“괜찮아?”
“그건 제가 할 말 같은데, 괜찮으세요?”
시연도 많이 놀랐지만 아까 은성은 그녀보다 더한 것 같았다. 얼굴을 보진 못했어도 얼어붙은 선경의 표정이나 그의 뒷모습만으로도 짐작하고 남았다.
그가 분노를 삭이려는 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시연은 그에게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웠다.
“저희 부모님께 금전적인 도움을 드린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부모님께 먼저 여쭤볼 생각이었는데….”
“넌 신경 안 써도 돼.”
이번에도 은성은 시연에게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만 했다. 그러나 시연은 오늘 일로 더는 자신이 모른 척 빠져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저도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닌 것 같아요.”
“어차피 네 의사완 상관없이 이뤄진 결혼이야. 내가 네 부모님과 어떤 거래를 했든 그건 너완 상관없는 일이란 말이야.”
“어떻게 그래요? 애초에 이 결혼은 제가 원했기에 한 일인데. 제가 끝까지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면 은성 씨가 한국에 오지도 않았을 거잖아요. 그래서 지 이사님과 마음 상하실 일도 없었을 거잖아요.”
은성이 답답한 듯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내가 전에 말했지? 이 결혼은 정략결혼이라고. 그 정략결혼을 내가 선택한 거라고. 그러니 넌 돈 문제에 관해선 빠져. 어차피 그리 큰돈도 아니니까.”
그가 더는 말할 필요 없다는 듯 시동을 걸었다. 서서히 출발하는 차 안에서 시연은 갑갑함을 느꼈다.
그는 확실히 그 문제에 관해선 더는 답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그러면 물어볼 사람은 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차도를 달리는 고요한 차내에서 시연이 잠잠히 입술을 열었다.
“아깐 고마웠어요.”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운전대를 잡은 손아귀에 잠시 핏줄이 돋았다. 지나간 분노가 다시 떠오른 듯했다.
돈 문제는 미안했지만 시연은 그의 분노가 고마웠다. 지은성이라는 그늘이 참 따뜻해서 시간이 많이 흐른 어느 날에도 문득 생각날 것 같았다.
그래서 시연은 가슴이 아렸다. 그와 헤어지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게 되면 어쩌나, 자꾸 걱정이 커졌다.
* * *
시환은 시연을 집에 들이면서도 그리 반가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말로는 안부를 묻고 잘 왔다고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걱정이 많아 보였다.
“집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네 엄마가 이거저거 자꾸 사들였어. 쓸데없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구나.”
“원래 쇼핑하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이젠 좀 줄일 때도 됐건만….”
쯧쯧, 혀 차는 소리에 답답함이 묻어났다. 시환이 정장을 차려입은 박 실장을 불렀다.
“이번에 집에 새로 오신 분이란다. 여긴 얼마 전에 시집간 딸입니다.”
“안녕하세요, 결혼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저희 부모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인사 후 박 실장은 곧장 부엌으로 갔다. 시연은 박 실장도 그렇고 이전과 달라진 집안 분위기를 살피다 본론을 꺼냈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나 봐요?”
“그러게 말이다. 요즘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지.”
아무래도 아버지의 근심이 역시나 선경 때문인 듯해 시연은 말을 꺼내기 힘들었다. 그래도 더 미룰 수 없었기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런 질문 죄송하지만 꼭 대답해 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요.”
“그래. 질문이라니 뭔지 한 번 들어보자.”
시연은 그간 있었던 일을 힘들게 꺼냈다. 은율의 이야기도 숨기지 않았다. 얼마 전 선경이 레스토랑으로 찾아왔던 일도 모두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 정도는 알고 있을 줄 알았던 아버지의 표정이 이상했다.
처음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가 차츰 확연히 굳어졌다. 시연은 자신이 실수했나 싶을 정도로 가라앉은 분위기에 몸 둘 바를 잃었다.
“그 사람이 그러고 있었단 말이냐…….”
“아버지도 모르시는 줄은 몰랐어요. 전 어떻게 된 일인지 여쭤보려고…….”
머리를 짚은 시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박 실장이 간단히 먹을 걸 내왔지만 손대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 은성 씨와는 어떤 조건으로 결혼을 수락하신 거예요? 사실 정략결혼이라는 게 서로 간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런 것까지 물을 줄은 몰랐다는 얼굴로 시환이 바닥에 떨어졌던 시선을 들었다. 그러나 이내 시연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차근차근 답하기 시작했다.
“너도 알 거다. 너희 엄마 핏줄 말이다.”
시연은 신중히 그의 말에 집중했다.
“넌 잘 모르겠지만 네가 가진 그 핏줄을 사려는 사람은 많단다. 그래서 우리 집안과 연을 맺으려면 맨입으론 불가능한 게 현실이지. 한때 인기가 떨어졌다 해도 지 사장은 결국 우리 집안을 인정한 거고, 그래서 날 도와주기로 했어.”
설명을 듣자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또한 어차피 협의된 사항이라 문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앞으로 또 얼마의 자금이 은성에게서 나갈지 몰라 그것만 언급하고 싶었다.
“말씀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은성 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전 아닌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단다. 그래서 요즘 회사 일에 더욱 신중한 것도 있고. 그런데 네 엄마가 그러고 다니는 줄은 몰랐구나. 나한테서 돈이 안 나오니 그쪽으로 갔을 줄이야…….”
시연은 자신이 아버지와 대화하면서 예전과 참 달라졌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제 편이 아니었던 아버지였기에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이젠 해야만 했다. 그래야 은성에게 더는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 부탁이 있어요.”
“그래, 말해 보거라.”
“어머니 좀 잘 부탁드려요.”
“뭐?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까지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다지만, 앞으론 어머니께서 은성 씨를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만 그걸 내가 막는다고 그렇게 할 사람이더냐?”
시연의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버지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조금만 적극적으로 나서 줄 수는 없을까. 왜 한 발 떨어져서 방관만 할까.
“그래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말은 해 보겠다만 솔직히 나도….”
“아뇨. 아버지께서 막아 주셔야 해요.”
“뭐라고……?”
시환은 딸이 이렇게 나올 줄 조금도 예상 못 한 모습이었다. 찻잔으로 향하던 손길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시연은 떨렸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 이 결혼 유지 못 해요.”
“나시연?”
“저 은성 씨에게 피해 주려고 결혼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어머닐 꼭 막아 주세요.”
“…….”
대꾸조차 못 하는 시환에게 시연은 꾸벅 머리를 조아렸다. 여태 제게는 못 했지만 이번만큼은 들어 달라는 마음을 전했다.
“죄송해요.”
시연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버릇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어른이 되니 하기 싫어도, 어려워도 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 처음이 결혼이었고, 지금은 은성을 지키는 게 그것이었다. 이런다고 그가 지켜지지는 않겠지만, 그에겐 티도 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뭐라도 하고 싶었다.
자신을 결혼이란 압박에서 구해 주고, 보살펴 주고, 때론 무뚝뚝하지만 실은 따스하게 안아 주는 그에게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항상 건강 살피시고요.”
당황한 아버지 곁에 더는 있을 수 없어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따라나서는 박 실장에게 시연이 아버지를 한 번 더 당부했다.
“아버지 식사 거르시지 않게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다행히 박 실장의 표정이 부드러워 조금 안심이 되었다.
본가를 나선 시연이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시선은 왜인지 은성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회사를 향했다. 그러나 시연은 고개를 돌렸다.
“보원아, 난데 지금 그리로 갈게.”
문제는 친구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었다. 아무리 가족 문제가 우선이어도 친구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걸음을 서둘렀다. 들뜬 얼굴로 여행 얘기를 하던 모습은 이제 그녀에게서 완전히 사라졌다.
* * *
“그런 일이 있었으면 가장 먼저 저한테 말씀을 하셨어야죠.”
평소답지 않게 은성의 목소리가 조금 높았다. 한 비서는 선경과 은율에 관련한 자신의 잘못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본사라 해도 내가 월급 주는 직원 한 명 못 지키진 않습니다.”
“네…….”
집무 책상에서 일어난 은성이 창밖을 보았다. 하지만 어두운 심경에도 그는 금방 화제를 바꾸었다.
“부산 쪽 호텔은 예약했습니까?”
이번 질문엔 한 비서의 목소리가 조금 밝아졌다.
“예! 말씀하신 대로 넉넉하게 잡았습니다. 성별 구분해 입실할 수 있도록 예약 완료했고, 추가로 사장님과 사모님께서 함께 이용하실 방도 가장 좋은 위치로 예약했습니다!”
금세 되살아난 목소리에 은성이 한 비서를 흘깃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 비서의 고개가 다시 수그러들었다. 작게 한숨을 흘린 은성이 돌아보았다.
“그쪽 동태는 어떻습니까?”
이번에도 대답은 즉각 나왔다.
“지은율 이사님께선 지금은 별 움직임 없이 조용하십니다. 아무래도 정희서 씨 건강 문제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비서님께서 여태 잘해 주시긴 했지만 앞으로는 작은 움직임도 놓치면 안 됩니다. 특히 윤선경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한 번만 더 믿어 주십시오!”
씩씩한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은성의 얼굴이 조금 펴질 때 한 비서의 전화기가 울렸다. 은성의 받으라는 눈짓에 한 비서가 서둘러 통화했다. 그런데 통화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예. 예? 윤선경 씨가 직접이요?”
서둘러 통화를 끝낸 한 비서의 얼굴이 어두웠다.
“사장님, 아무래도 지금 좀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를요?”
“윤선경 씨가 지은율 이사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은성은 망설임 없이 재킷을 꿰입었다. 그를 따르는 한 비서의 걸음이 조급했다.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한 비서님은 남아서 회사 일을 마무리해 주십시오.”
“하지만 사장님 혼자서 괜찮으시겠….”
계속 따라나서는 한 비서를 은성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류했다.
“개인사도 급하지만 지금은 회사도 중요한 시점입니다. 한 비서님마저 자리를 비우면 안심이 안 됩니다. 부탁합니다.”
그의 당부에 한 비서가 책임감 가득한 얼굴로 고개 숙였다.
“네, 사장님! 다녀오십시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은성의 얼굴이 빠르게 사라졌다.
* * *
선경의 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선경은 은성에게 손을 붙잡히고 한동안은 멍했었다. 그가 자신에게 한 말을 곰곰이 되짚었다. 그러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차차 가닥이 잡혔다.
은성의 비서 놈은 지은율이 제 돈을 막았다고 했다. 지은율은 소혜 약혼 관련으로 예전에 만난 적 있었다.
선경의 말아 쥔 손아귀에서 화려한 손톱이 살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룹 후계자도 아닌 게 감히 내 돈을 막아?”
소혜의 약혼은 이미 예전에 끝난 일이었다. 은성이 시연과 결혼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선경의 머리에 이미 그 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뒤늦게 지은성 결혼과는 관련도 없는 게 찾아와서 사람을 엉망으로 망가뜨렸다.
시연 앞에서 은성에게 그 망신을 당한 걸 생각하면 분노가 머리꼭지까지 타고 올랐다. 모든 시발점이 그 여자였다. 지금 선경의 분노는 전부 지은율을 향했다.
서울에 있는 지은율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것도 못 했으면 오래전 버러지 같은 생활에서 지금까지 올라오지도 못했다.
선경이 뒤따르는 남자에게 방 키 하나를 넘겼다. 이번에 지은율을 찾아냈고, 또 예전부터 잔일을 해 주던 사람이었다.
“지은율에게 이거 전해 주고 바로 오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선경은 은율이 머무는 곳 인근에 방을 잡았다. 은율이 오면 어떻게 맞이해 줄까 고민에 빠졌다.
은율은 귀찮게 울려대는 전화에 미간을 찡그렸다. 모르는 번호라 받지 않았는데 줄기차게 울려대 받았다.
“여보세요, 누구신데…!”
“나 윤선경이에요. 그쪽으로 곧 사람이 갈 거예요. 시끄러운 걸 원하지 않는다면 따라나서는 게 좋을 겁니다.”
마치 협박과도 같은 말이었지만 은율의 시선은 이내 희서에게 닿았다.
“언니, 왜?”
은율은 곧장 전화를 끊었다.
“아니야, 잘못 걸린 전화야. 참, 희서야. 언니 잠깐 다녀올 곳이 생각났는데, 넌 어디 가지 말고 쉬고 있어. 알았지?”
지금은 아픈 동생을 자극하지 않는 게 최우선이었다. 다행히 희서는 한숨 잔다며 곧장 침대로 향했다.
외출 준비를 마친 은율이 방을 나섰다. 몇 걸음 앞에서 한 남자가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스쳐 지나간 남자는 은율의 손에 카드키를 쥐여 주었다.
“지금 바로 가시면 됩니다.”
낮은 음성이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은율의 표정이 사납게 구겨졌다. 감히 희서를 미끼로 자신을 불러내다니 선경의 용기가 가상했다. 반면 그녀는 드디어 그쪽에서 뭔가가 터진 것을 직감했다.
은율이 차가운 시선으로 반짝이는 구둣발을 빠르게 내디뎠다.
* * *
어쩐 일로 보원은 제 방이 아닌 카페로 시연을 불러냈다. 통화하는 목소리가 가라앉은 듯해 시연은 카페로 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가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근래 소화가 잘 안 되는 것 같더니 또 그랬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구석 자리에 보원이 홀로 앉아 있었다. 시연이 얼른 보원의 곁으로 갔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나도 이제 왔어. 뭐 마실래?”
“난 됐어.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시연은 보원의 표정부터 살폈다. 역시 통화할 때도 그렇더니 얼굴이 영 별로였다. 망설이는 보원에게 시연은 걱정스레 다시 물었다.
“부모님께서 빨리 들어 오라셔?”
보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슬픈 눈으로 시연을 빤히 쳐다보았다. 까만 동공이 흔들리더니 곧 눈가가 습해졌다.
“보원아, 왜 그래?”
“시연아… 흑, 어쩌지?”
“대체 왜 그러는데? 무슨 일인데 그래?”
눈가를 훔친 보원은 곧 시선을 떨어뜨렸다. 다물린 입술이 겨우겨우 떨어졌다.
“승률이… 승률이가……. 흑. 학교 관둘지도 모른대.”
“뭐?”
말을 마친 보원은 곧장 테이블에 엎드려 버렸다. 시연은 더 묻지도 못하고 답답한 마음에 승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을 거야. …전화기 뺏겼대.”
겨우 목소리를 추스른 보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시연은 무슨 일인지 몰라 답답했다.
“승률이가 전화기를 뺏겼다고?”
“승률이 부모님이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아. 우리 나이가 있으니 오래는 아니겠지만 그런 분위기야.”
시연은 갑갑한 마음에 보원이 손도 대지 않은 음료를 조금 마셨다. 차가운 게 들어가자 잠시 정신이 돌아왔다.
“나 없을 때 무슨 일 있었어? 갑자기 승률이 부모님은 왜 화나신 거야?”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난 평소처럼 방에서 책 읽고 있었는데 승률이가 오더니 그러더라고. 자기 당분간 연락 잘 안 될 거라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데 학교 얘기는 뭐야?”
또다시 보원의 눈가가 붉어졌다. 보원이 우는 이유가 그 때문인 듯했다.
“승률이 태도가 좀 이상해서… 가려는 거 내가 붙잡고 물었더니……. 흑.”
이따금 눈물을 훔치며 마음을 추스르는 보원을 시연은 차분히 기다렸다. 보원이 곧 길게 숨을 내뱉고 말을 이었다.
“내가 끝까지 안 놔주고 물었거든. 그러니까 잠깐 방에 들어오더니 그러는 거야. 자기 어쩌면 학교 관둘 수도 있다고, 이번 여행은 못 간다고 미안하다고 말이야.”
“이런 상황에 여행이 뭐가 중요해?”
“응. 나도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승률이 어딘지 모르게 눈치 보는 것 같더니 그러곤 곧 가 버렸어.”
보원이 또다시 훌쩍였다. 시연은 여전히 받지 않는 전화만 답답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연락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요즘 사방에서 왜 이렇게 답답한 일만 생기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또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보원이 계속 훌쩍거렸다.
“후우…….”
시연이 깊게 심호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