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지 사장, 미안하네. 내 며칠만 묵고 금방 가겠네.”
어머니 선경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주말이라 은성과 장을 보고 저녁을 해 먹으려던 시연은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선경에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어, 어머니…….”
선경이 커다란 가방을 밀고 거실로 들어오더니 여러 방문을 살폈다.
“저기가 네가 쓰는 방이지?”
그러곤 시연의 방을 찾아 단숨에 안으로 들어갔다. 시연이 후다닥 따라 들어갔다.
“어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보면 모르겠니? 네 아버지랑 다퉜다. 며칠 호텔에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내 딸 집 두고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더라. 오래 있진 않을 테니 너무 염려 마.”
선경은 이따금 은성을 쳐다보며 점점 높아지는 목소리를 눌렀다.
“네 물건은 하나도 안 건드려. 그래도 내가 편하게 씻을 욕실은 있어야 할 것 아니니. 넌 옷만 좀 챙겨서 안방에서 지내. 난 거기 근처도 안 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너 지내던 대로 생활해.”
시연은 제 방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다. 선경이 마지막에 문을 닫으며 은성에게 말했다.
“자네, 이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지? 친정 엄마잖아, 내가.”
쾅. 거칠게 닫힌 문에 시연이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선경이 쥐여 준 제 속옷을 보곤 화들짝 놀라 손을 뒤로 감추었다. 그녀의 등 뒤로 브래지어 끈이 길게 늘어졌다.
“죄, 죄송해요…….”
“네 잘못 아니야.”
시연은 이번엔 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은성은 다시 만났을 때부터 줄곧 같은 말을 해 왔다. ‘네 잘못이 아닌 것에 사과하지 마.’ 더불어 그런 말도 했다. ‘넌 그럴 자격 있어.’
그 말에 대해 자세히 물은 적은 없었다. 단지 다독여 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같이 생활할수록 어쩐지 그런 말들이 점점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하지 말라는 사과에 자신이 계속 똑같이 행동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적어도 그의 옆에 있을 땐 이유는 잘 몰라도 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아버지께 전화해 볼게요.”
“아니야, 내가 할 테니 넌 옷 갖다놔.”
은성의 말에 시연은 늘어진 제 속옷을 다시금 재빨리 추슬렀다. 빨개진 얼굴과 속옷을 감추려 서둘러 뒤돌았다.
그의 방으로 가면서 시연은 그나마 어머니가 각방에 대해 딱히 언급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활 습관의 이유로 어머니도 아버지와 각방을 쓰는 게 그 이유인 것 같았다.
옷장 구석에 옷을 정리하는데 은성이 방으로 들어왔다.
“부족한 건 사 줄 테니 걱정하지 마.”
시연은 속옷이 보일세라 후다닥 옷장 문을 닫았다.
“조심해!”
순간 은성이 뛰어와 문을 잡았다. 영문을 모르는 시연이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은성이 불만스레 눈썹을 잔뜩 모았다.
“볼 거 다 본 사이에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다칠 뻔했잖아.”
그가 문틈에서 그녀의 손가락을 빼냈다. 그제야 시연이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속옷을 감추는 데에만 몰두해 제 손이 어디 있는 줄도 몰랐다.
“고마워요….”
그녀는 죄송하다는 말 대신 고맙다는 말을 선택했다. 일순 은성의 노한 움직임이 멎었다. 한숨 섞인 말이 나왔다.
“네 사이즈 대충은 아는데 혹시 모르니까 정확히 알려 줘.”
“그, 그건 그냥 제가 알아서 할게요.”
“안 그래도 이거저거 좀 살 생각이었어. 그러니까 그만 부끄러워하고 이젠 너와 나 부부인 거 인정해.”
“우리가 부부인 건 저도…!”
시연이 발끈했지만 이은 그의 말에 남은 말이 쏙 들어갔다.
“안 그러면 오늘 밤에 내 식대로 확인할 테니까.”
“네?”
그의 시선이 널따란 침대로 흘렀다.
“오늘부터 우리 같이 자잖아? 아무리 부부라도 속옷 뒤지는 건 취미가 아니라서.”
시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갑작스러운 선경의 등장은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점차 멀어졌다. 눈앞의 위협적인 남자가 더 큰 문제로 느껴졌다.
그녀의 심장이 시끄럽게 고동쳤다. 이럴 때가 아닌데 자꾸 그가 더 남자로 느껴졌다. 애써 꾹꾹 누르는 마음이 어딘가의 틈으로 새어 올라왔다.
“나갈 준비해. 장모님 지금은 안 나오실 것 같으니까.”
그가 선경에게 노크 후 외출을 알렸다. 시연의 방에서 짧게 다녀오란 말이 들렸다.
* * *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시환은 굳이 시연을 찾아왔다. 다만 집엔 들어가지 않고 근처 카페에서 시연 부부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을 토로했다.
“내가 자네 볼 면목이 없네.”
“아닙니다, 장인어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며칠 지나면 마음이 풀리실 테니 그때 잘 말씀드려서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시연아, 아버지가 정말 미안하다.”
“전 괜찮아요. 그런데 어머니는 무슨 일로 그렇게 화가 나신 거예요?”
시연의 질문에 시환은 다시 분노가 치미는지 얼음이 가득한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무슨 일은. 사람이 함께 지내다 보면 다투기도 하고 그런 거지.”
그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사람은 어떻게 갓 결혼한 딸 신혼집엘 갈 수가 있어!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마음 가라앉히세요. 저희는 정말 괜찮습니다.”
은성의 만류에도 그는 내내 분노만 품어 냈다. 다툰 이유는 설명하지 않고 쉴 새 없이 한숨만 쉬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은 고요했다. 시연은 계약 결혼한 그에게 이런 폐를 끼치게 된 게 너무 미안했다. 생각해 보니 그가 자신과 결혼해 득이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왜 저랑 결혼하셨어요?”
그는 정략결혼이라고 했지만, 다시 묻고 싶었다. 그는 굳이 왜 한국까지 와서 자신과 결혼했을까. 그것도 겨우 6개월짜리 결혼을.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데.”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묵직하게 되물었다.
“이 결혼으로 은성 씨에게 남는 건 없잖아요.”
“있어.”
“전 은성 씨에게 뭐가 이득인지 모르겠어요. 지금만 해도 저희 부모님 때문에 안 해도 될 불편을 겪고 있잖아요.”
“난 결혼이든 뭐든, 득이 없는 일은 안 해. 오늘 같은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 넌 네 생활만 해나가면 돼.”
시연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서렸다.
“우리 부부 아닌가요?”
화난 듯한 말투에 그가 잠깐 쳐다보았다.
“부부 맞아. 부부지만 난 사업가고 넌 학생이지. 그러니 내가 널 배려하는 건 당연….”
“싫어요.”
단호한 어투에 그가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잠시 신호에 걸려 정차한 차 안에서 대치가 일었다.
“처한 상황이 다르다고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배려하는 건 전 싫다고요.”
“나시연. 그건….”
“제게 미안해할 권리를 줘요. 은성 씨도 불편한 건 충분히 내색하고요. 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하고 풀어야 신뢰가 더 깊어지고 사이도 좋아지지 않겠어요?”
어느덧 은성의 시선이 은밀히 깊어졌다. 그가 신호를 받아 차를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이제 완전히 앞으로 돌아가 있었다. 차들이 내달리는 소리 속 적막을 그가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럼 뭐 하나만 묻지.”
“네, 말씀하세요.”
시연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그가 어떤 불만을 이야기하든 다 들을 생각이었다. 충분히 미안해하고 싶었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호텔엔 왜 갔어?”
그녀를 질책하는 말투가 꽤 날카로웠다. 시연은 조금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다.
“네?”
“전에 QG호텔 갔었잖아. 그때 물으려다 참았는데 거기 왜 갔었느냐고.”
잠깐 생각을 정돈한 그녀가 차근차근 해명했다.
“그땐 제가 놓쳤지만 충분히 오해하실 만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상한 이유로 간 건 절대 아니에요.”
“이상한 이유?”
“친구 한 명에게 문제가 좀 생겼어요. 당분간 호텔에서 지내게 됐는데 그래서 같이 간 거였어요. 결혼식에도 왔던 친군데 집에 있기가 어려워졌거든요.”
“혹시 전에 봤던 그 남자 친구….”
“남자 아니에요!”
그가 도로 상황을 살피며 핸들을 꺾었다. 시연은 집에서 멀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은 설명하기 바빠 묻지 못했다.
“여자 친구예요. 물론 친구 중에 그 사실을 아는 남자, 친, 구도 있지만, 그래서 같이 방에 들어간 남자, 친, 구는 있지만 절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이상한 건 아니에요! 믿어주시면 좋겠어요.”
시연은 승률이 방을 내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쩐지 설명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 같았다. 아무리 순수한 우정이라 말한들 상황으로만 보면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많았다.
“친구가 집을 나와서 호텔에 있고, 그래서 그날 호텔에 있었던 거다?”
“네, 맞아요!”
다행히 은성이 오해하지 않은 듯해 안심하며 시연은 그제야 달라진 방향을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아까 집 앞이었는데.”
“하고 싶어졌어.”
“뭐가요?”
“섹스.”
시연은 일순 대답을 놓쳤다.
“집에 장모님 계시잖아. 빨리 가시라고 종용하는 건 도리가 아니고,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하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문득 훅 치고 들어온 말에 당황했지만 이제는 그것도 조금 적응이 되었다. 물론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려는 마음도 그에 작용했다. 또한 지금은 바라는 마음도 수줍게 더해졌다.
이제 시연은 처음과 달랐다. 그걸 드러내진 않겠지만 떨리는 마음 깊은 곳에선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어디로… 가실 거예요?”
“QG호텔. 거기가 가장 가까워.”
거긴 승률의 부모님이 하시는 호텔이라 꺼려졌지만 거절하지 못했다. 시연이 애써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부부니까 어디를 가도 상관없다고, 승률이나 보원을 만날 일도 없을 거라고.
“친구 있어서 불편해?”
“아뇨, 전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불편을 감수하는 사람에게 제 불편마저 얹어 주기도 싫었다. 시연이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애써 앞을 응시했다.
* * *
다행히 그녀의 바람처럼 친구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당혹스러움은 다른 상황에서 일었다.
객실 문을 연 은성이 그녀를 다급하게 벽으로 몰아붙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객실까지 걸어온 게 무색하게 그는 둘만의 은밀한 공간으로 들어가자 솟구친 욕망을 드러냈다.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깊숙이 입을 맞추었다. 막무가내로 밀려드는 살덩이를 거부할 재간은 없었다. 현관에서 그녀의 옷이 벗겨졌다. 단추가 풀리고 지퍼가 내려갔다. 브래지어째 가슴이 만져지고 입술을 모조리 빼앗겼다.
쫍, 쪼옥…….
질척한 소음이 시연의 흥분을 돋웠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입술과 혀를 빨면서 실내의 불을 환하게 켰다.
시연은 달아오르는 숨을 흩뿌리며 그가 주는 열기에 빠져들었다. 그가 시연을 들어 올려 식탁에 앉혔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브리프째 음부를 만지작거렸다.
“으읏… 흣…!”
신음하는 그녀의 입술을 뜨겁게 빨면서 브래지어를 밀어 올렸다. 탐스러운 유방이 출렁이며 공기 중에 드러났다. 그는 시연을 식탁에 밀어 눕혔다. 방만하게 벌어진 음부에 중심부를 비비며 그녀의 가슴을 입에 물었다.
단숨에 유륜까지 통째로 입에 물고선 저질스럽게 빨았다. 쭙, 쭈웁 소리와 시연의 거친 숨이 빠르게 섞였다.
부풀어 오른 젖꼭지를 탐욕스럽게 빨아낸 그가 그녀의 옷을 모두 벗겨 내던졌다. 알몸이 된 그녀에게 키스하며 또다시 장소를 바꾸었다. 이번엔 소파에 그녀를 눕히고 다리를 벌렸다. 이미 축축하게 젖어 애액을 흘리는 질구를 보더니 한쪽 입가를 비스듬히 말았다. 시연의 얼굴이 열기와 부끄러움으로 새빨개졌다.
그가 바지를 풀고 드로어즈를 밀어 내렸다. 어디에 있던 것인지 콘돔을 가져오더니 단숨에 껍질을 찢었다. 콘돔을 페니스에 씌운 그가 그녀에게 몸을 드리우며 귀두로 그녀의 음부를 문질렀다. 돌처럼 단단해진 기둥이 그녀의 음순을 벌리며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가 짙은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애액이 흘러내리는 구멍에 귀두를 맞추고 쿡 찔렀다. 굵은 선단이 단번에 그녀의 살을 파헤치고 안으로 쑥 들어갔다.
“으읏……!”
“하, 너, 뜨거워.”
겨우 눈을 뜬 시연이 그에게 요구했다.
“…넣어 줘요.”
검은 눈동자에서 탁한 빛이 흩어졌다. 그가 허리를 세차게 쳐올렸다. 시연에게 박힌 페니스가 단숨에 질 내벽을 뚫고 안쪽에 박혔다. 시연은 교성을 흘리며 허리를 틀었다.
그가 시연의 안쪽에 제 것을 들이밀었다. 고환까지 밀어 넣을 기세로 페니스를 세차게 박아 넣었다. 시연의 몸이 연신 밀려 올라가며 금세 소파 끝에 닿았다.
퍽, 퍽!
“아흣! 흐으흣…!”
교합된 구멍에서 연신 질척한 물이 흘러 떨어졌다. 그가 그녀의 유방을 손아귀에 힘껏 쥐었다. 잘록한 허리도 쓸어 만지고 새빨간 입술 안에 손가락도 밀어 넣었다. 조그마한 혀를 만지며 신음하는 그녀를 더욱 괴롭혔다.
퍽, 퍼억!
더욱 크기를 부풀리는 페니스가 그녀의 질 속 주름을 팽팽하게 벌렸다. 안쪽에서 흘린 애액이 그의 페니스에 달라붙어 따라 나왔다. 그녀의 머리가 소파 끝에서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은성은 그녀를 제게 꿰어놓은 채 흔들리는 몸을 안아 일으켰다. 페니스가 빠지지 않게 더 깊숙하게 밀어 넣고선 그녀를 안아 일어섰다.
“하윽……!”
몸속에 깊숙이 밀고 들어와 비틀리는 페니스에 시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녀의 팔을 제 목에 감았다.
“잡아.”
시연은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의 목에 힘껏 매달렸다. 그가 몇 걸음을 옮기자 배 속에 들어찬 기둥이 그녀를 엉망으로 휘저었다.
“그만… 그만요!”
그녀가 그만하라고 했지만 은성은 되레 그녀를 안은 채 허리를 힘껏 쳐올렸다. 시연의 몸이 들썩이며 합체된 구멍에서 페니스가 잠깐 빠졌다가 다시 그녀의 몸을 꿰뚫었다.
“으흑…!”
가느다란 비명을 들으며 그가 시연을 뒤돌려 소파 등받이에 걸치듯 내려놓았다. 길게 뽑아낸 페니스에서 걸쭉한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그가 시연의 축축한 질구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흣!”
쫀쫀하게 달라붙는 주름 사이를 손가락으로 펴 벌리며 그녀의 안쪽 감각을 긁어 일으켰다. 지독한 쾌감이 시연의 뇌리를 타격했다.
“안 돼……. 아흐흑……!”
질 안을 휘젓자 그의 손에 흥건한 물이 고였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본 그가 시연의 한쪽 다리를 잡아 등받이에 걸쳤다. 시연은 자신이 소파를 축축하게 적시는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못했다. 흉측하게 벌어진 다리 사이로 또다시 은성의 페니스가 구멍을 쑤시고 들어왔다.
“아흣…!”
단숨에 몸을 꿰찬 기둥이 그녀를 또다시 극한으로 몰아갔다.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세차게 쥐곤 자극적으로 허리를 흔들었다. 페니스가 시뻘건 구멍 사이로 들어갔다가 물을 줄줄 흘리며 밖으로 나왔다.
은성의 욕망이 끝없이 타올랐다. 어린 신부를 음란한 자세로 벌려 놓고 조그마한 구멍에 제 것을 끊임없이 박았다.
곧 콘돔 안에 희뿌연 탁액이 가득 모였다. 은성은 콘돔을 벗겨 휴지통에 버리곤 다시 그녀를 안아 침실로 들어갔다. 화장대에 밀어 엎드리게 만든 후 새 콘돔을 씌우고 이번에도 뒤에서 구멍을 벌려 들이박았다.
푹, 푸욱!
그의 성기가 끝도 없이 그녀의 안으로 밀려들었다. 은성의 페니스를 품은 시연이 쉼 없이 신음하며 울었다. 화장대에서 그녀를 절정으로 몰아붙인 그는 또다시 시연을 안고 거실로 나왔다.
소파 테이블에 눕혀서 박고, 기어 도망치는 여체를 붙잡아 러그 위에서 다리를 찢어 벌렸다. 더는 못하겠다고, 못 견디겠다고 우는 여자의 허리를 붙잡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제 어깨에 양다리를 걸치곤 퉁퉁 부은 시연의 음부를 탐욕스럽게 빨아 먹었다.
“아흑… 으흐흣……! 오빠, 이제 그만요……!”
그녀가 부르는 오빠 소리에 흥분을 돋우며 그녀에게 페니스를 박아 넣었다. 자신 때문에 자꾸만 요염해지고 진짜 여자가 되어가는 시연의 안으로 그가 욕망을 밀어 넣었다.
커다란 창문에 손자국이 찍혔다. 시연의 손이 창문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밖은 들어올 때와는 달리 새카맸다. 욕망 외엔 무엇도 남지 않은 듯한 은성의 눈동자와도 비슷했다.
그가 흐느적거리는 시연의 몸을 번쩍 들어 안았다. 차가운 창에 그녀를 밀어 세우곤 몇 번째인지 모를 콘돔을 갈아 끼웠다. 시연의 몸이 자꾸만 힘없이 무너졌다.
“힘들어…….”
“버텨. 난 멀었으니까.”
시연이 늘어진 팔을 억지로 들어 그의 목을 감았다. 그녀의 입술이며 목, 가슴, 엉덩이 어느 한 군데 색이 멀쩡한 곳이 없었다. 그중 가장 시뻘건 음부를 가르고 그의 페니스가 밀려들었다.
“으흣……!”
힘들다는 말과는 달리 처음 할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뜨겁고 조이는 질 안으로 그가 들어갔다.
푹!
그녀에게 박혀 드는 감각을 몸에 새기며 그가 세차게 허리 짓을 했다. 그에게 박힌 시연의 몸이 계속해서 흔들렸다.
* * *
“몸은 이제 좀 괜찮아? 너 며칠 동안 비실거렸잖아.”
보원의 말대로 시연은 며칠 기력이 달려 수업만 겨우 들었다. 보원이 지내는 방에도 오랜만에 들른 참이었다.
“내가 많이 소원했지? 미안.”
“소원은 무슨, 너 지금 집에 어머니 와 계신 거 다 아는데. 그나저나 어머니는 언제 가셔? 화해 안 하신대?”
“그러게, 좀 오래가네.”
시연은 어머니에 대한 말을 아꼈다. 가족사를 안 친구들이 이따금 궁금해하는 내색을 해도 말을 돌려 피했다. 보원이 책을 펼치며 시연의 눈치를 살폈다.
“어쩐지 우리 오빠랑 너희 어머니랑 똑같이 철이 없어 봬. 기분 나빴으면 미안.”
보원의 말에 시연이 피식 웃었다. 보원의 옆에 노트를 펼치곤 나란히 앉았다. 달리 듣는 사람도 없는데 낮게 속삭였다.
“실은 나도 가끔 그렇게 생각해.”
키득키득. 둘이 함께 조용히 웃었다. 삶이 팍팍하긴 해도 이렇게 친구와 농담하고 있으면 잠깐이나마 기분이 나아졌다.
시연은 대학생활이 좋았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 때면 자신도 여느 평범한 사람들과 똑같은 것 같았다. 마음 한구석에 부는 시린 바람도 그때는 잠깐 멈추었다. 거기다 요즘은 기간 한정이지만 은성도 곁에 있었다. 마음은 숨겨도 함께 하는 시간은 어쩔 수 없이 좋은 게 사실이었다.
“난 어릴 때 부모님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어. 똑같은 배로 낳은 자식인데 아니 왜 성별이 다르다고 차별해?”
“그럼 내가 조금 나은 건가?”
어느새 공부는 뒷전이 되고 창밖을 구경하며 둘은 공통된 주제로 수다를 떨었다.
“뭐가 말이야?”
“그래도 난 엄마가 다르잖아. 그래서 그땐 차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난 그게 더 서러운 것 같아! 잘해 주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결혼하니까 딸 집이니 뭐니 하며 방 차지하고 말이야.”
시연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보원이 대신하자 조금 난감해졌다. 보원이 제 심정을 이렇게나 꼭 집어 말할 줄은 몰랐다.
“고마워.”
“응? 뭐가?”
“네가 내 친구라서.”
“아이, 뭐야. 나도 너 좋아. 하하.”
둘이 킥킥거리며 장난치는 사이 승률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누가 편의점으로 좀 와! 짐이 너무 많아.>
“내가 갈게.”
“아니야, 내가 다녀올게!”
보원이 시연을 앉히고 후다닥 일어났다. 아이스크림도 사야겠다고 흥얼거리며 방을 나섰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보원을 보자 시연은 호텔로 오길 잘한 것 같았다. 어쩐지 요즘은 어머니 일이 있는데도 전보다 행복한 느낌이었다. 언니를 잃은 후 요즘 같은 적은 없었는데 신기했다.
“안 되겠다. 나도 가야지.”
그녀가 일어나 지갑을 챙겼다. 조금 들뜬 얼굴에 잔 미소가 계속 머물렀다.
시연은 위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확인했다. 친구들과 엇갈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곧 시연 앞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으로 그녀가 후다닥 들어갔다. 안엔 그녀 외에 다른 한 명이 먼저 타고 있었다.
로비 층 버튼엔 이미 불이 들어와 있었다. 천천히 엘리베이터가 하강했다.
엘리베이터 안은 처음엔 조용했다. 그런데 곧 먼저 탄 손님에게서 앓는 소리가 났다. 시연이 흘깃 돌아보니 그녀는 서 있는 것도 힘이 드는지 곧 쓰러질 기세였다. 자세히 보니 이마에 땀도 흥건했다.
“저기… 괜찮으세요?”
“난 괜찮…….”
그녀가 바닥으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시연이 놀라 그녀를 빠르게 부축했다.
“많이 아프신 것 같아요! 아무래도 병원을….”
시연을 붙잡은 그녀가 힘겹게 카드키를 내밀었다.
“내 방에… 좀 부탁…해요.”
시연은 잠깐 고민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도착지를 그녀의 방으로 바꾸었다.
여자를 부축해 가며 시연은 그녀의 얼굴이 어쩐지 은율과 조금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비우고는 부축하는 데 집중했다.
“고마워요…….”
침대에 그녀를 눕혔지만 시연은 이대로 두어도 되는지 고민되었다. 드넓은 스위트룸엔 그녀 외에 누군가 함께 사용하는 듯한 생활감이 있었다.
“저 혹시… 같이 계시는 분께 연락이라도 해 드릴까요?”
“괜찮아요……. 곧… 올 거예요….”
“그럼 오실 때까지만 있을게요. 금방 오신다니까.”
올 거라니 다행이긴 했지만 여전히 혼자 두고 가긴 걱정되었다. 여자의 힘없는 얼굴에 웃음기가 감돌았다.
“혹시 드시는 약 같은 건….”
“왜 전화를 안 받아?”
시연이 약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 객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시연이 당황해 얼어붙었다. 바삐 들어오던 은율이 시연을 발견하곤 눈매를 매섭게 접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말투를 보니 은율도 이젠 시연이 누군지 아는 모양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전 이 방에 머무시는 분이 아파 보여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방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셔서 왔어요…….”
은율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녀가 시연을 밀치곤 침실로 뛰어갔다.
“희서야! 정희서, 정신 차려 봐!”
“어, 언니… 나 괜찮아…….”
“안 되겠다. 당장 병원 가자!”
“아니야… 언니, 저분… 나무라지 마. 나…… 도와주셨어.”
희서의 말에 은율이 시연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은율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아니 더 가시 돋치고 따가워졌다.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시연의 인사에도 은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희서야, 말하지 마. 기운 빠져.”
은율은 희서에게만 온 신경을 쏟았다. 그 모습을 보며 시연이 서둘러 방을 나왔다.
* * *
시연은 친구들과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헤어졌다. 은율이 제게 왜 그런 눈빛을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다. 뒤늦게 은성의 가족은 어째서 아무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은성의 말대로 단지 정말 시간이 맞지 않아서일까.
<어디야?>
버스를 기다리는데 은성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막 답장하려는데 이번엔 전화가 걸려 왔다.
“답장 보내려던 참이었어요.”
-저녁은?
“아직 안 먹었어요.”
-그럼 같이 먹어. 내가 데리러 갈….
“혹시 제가 회사로 가면 안 돼요?”
재빨리 끼어든 말에 은성이 잠시 후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해. 기다리고 있을게.
“네.”
시연은 방향을 바꾸어 그의 회사로 향했다. 가슴에서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은성은 은율이 그녀를 만나러 왔다고 했지만 만날 때마다 태도는 차갑기만 했다.
은율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언니가 아니라 자신이 그와 결혼해 못마땅했을까. 환대받길 바라진 않았지만 막상 쌀쌀한 태도를 마주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이제 그의 회사에 가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한두 명은 모를 법도 한데 신기하게도 마주친 모든 이가 시연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그래도 다행히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가끔 들은 한 비서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였다.
사장 비서실 역시도 남은 이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은성과 커플처럼 붙어 다니는 한 비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똑똑.
고요한 공간에 시연의 방문만이 그녀를 기다리는 이에게 전달되었다. 대답은 없었지만 시연은 조심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은성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저 왔어요.”
이번에도 대답이 없자 시연은 조금 더 조심스럽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혹시… 제가 귀찮게 했나요?”
“그래 보여?”
“잘 모르겠어요.”
“배고프겠네. 뭐 먹을래?”
이제야 그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시연은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를 따라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다가 환한 빛 속에 선 그를 올려다보자 눈이 부셨다.
“저 혹시… 배 많이 고프세요?”
“왜?”
“조금 참을 수 있으면…….”
“있으면?”
시연은 꾸역꾸역 용기를 냈다. 이곳까지 오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먼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지금은 달라졌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서 오면서 말하지 말까도 고민했지만 그를 만나니 마음은 확고해졌다. 지금 그녀에겐 은성이 필요했다.
“사장실에… 누가 오나요?”
“안 와.”
“그럼, 은성 씨가 절 좀 안아 주시면 안 돼요?”
지금 그녀에게 매달릴 수 있는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에게 안기는 순간엔 사랑받는 느낌이었다. 쾌감으로 숨이 막혀도, 억눌린 호흡을 커다랗게 내뱉고 나면 또 어딘지 모르게 시원했다.
그가 그녀를 직시했다. 이제 그의 눈빛이 보였다. 다행히 경멸하는 시선이 아니라 조금 안도하려는 찰나 시연의 몸이 들려 올라갔다.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책상 위에 앉혔다. 오늘 회사에 윤선경이 다녀갔다. 목적은 언제나 그렇듯 돈이었다. 시연이 그녀 주변 이들을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한국에 오지 않았을 텐데. 이 깨끗한 눈동자가 다른 이들처럼 현실적인 욕구에 매달렸다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아니, 사랑하더라도 끊어 낼 수 있었을 텐데.
은성은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시연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그녀가 원하면 그게 뭐든 전부 해 주고 싶었다. 요부처럼 회사에서 옷을 벗겠다는 그녀를 만류할 수도 없었다.
“얼마든지.”
탁한 음성이 시연의 숨결과 섞여들었다. 두 사람의 입술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짙게 얽혔다. 은성이 단숨에 시연의 옷을 벗겼다. 보기 좋게 올려 붙은 가슴을 손아귀 가득 쥐며 그녀의 바지를 벗겨 내렸다.
시연이 그에게 매달렸다. 그의 책상에 다리를 벌려 앉고 끈적한 물을 흘렸다. 황당한 요구에도 거침없이 응해 주는 그가 고마워 달게 신음했다.
돌처럼 단단해진 페니스가 그녀의 조그마한 질구를 한달음에 꿰차고 들어왔다.
“흐읏…!”
달콤한 교성을 흘리는 시연의 입술을 그가 세차게 빨아들였다. 환한 불빛 속 두 남녀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감각을 나누었다.
* * *
막 시험이 끝난 시연이 기지개를 켜며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예기치 못한 결혼과 여러 일에도 시험은 나름대로 잘 본 것 같았다.
“시연아!”
기다리고 있던 것인지 승률이 뛰어오며 그녀를 불렀다.
“승률아! 기다리고 있었어?”
“당연하지! 오늘 보원이도 시험 끝나잖아. 이대로 헤어질 수 없지!”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보원인 몇 시에 끝나?”
“아마 곧 끝날 것 같은데 같이 가서 기다릴래?”
“그럴까? 어, 그런데 너 안경 어디 갔어?”
승률인 여태 보원의 끊임없는 권유에도 안경을 고수해 왔다.
“시험 끝나고 시간 때울 겸 렌즈 맞춰 봤지.”
“와, 장승률! 사람이 달라졌는데? 보원이 말이 맞았어. 진즉 이러고 다니지. 너 너무 멋있어!”
시연이 승률 앞에서 거꾸로 걸으며 그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자꾸 가까워지는 얼굴에 승률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피했다.
“그만해, 너까지 왜 그래?”
“하하, 너무 잘생겨서 그러지. 안경 하나에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구나! 꺄아, 근사해!”
시연이 과장하며 승률을 놀렸다. 그 모습을 나무 뒤에 숨은 누군가가 카메라에 열심히 담았다.
같은 시각 은성의 표정이 사뭇 일그러졌다. 요즘 은율은 시연의 일상에 점점 더 첨예하게 파고들었다. 시연에게 붙인 사람 수는 말할 것도 없고 낮에 학교에까지 은밀한 눈이 따라붙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얼마 전 시연이 회사에 다녀간 것까지 아는 느낌이었다.
<어려서 재미는 있어 보이니 좀 더 기다려 줄게.>
시연의 부모와 소혜가 벌인 일에 시연은 아무 상관 없다고 말한들 먹히지 않았다. 그게 통했으면 미국에서 반대에 부딪히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가 한 비서를 호출했다.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QG호텔에 가야겠습니다.”
“예, 바로 약속 잡겠습니다!”
* * *
은성은 은율이 내민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집에서와 달리 학교에서 시연은 매우 밝고 대부분 웃고 있었다. 개중 승률과 시시덕거리는 사진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마저도 시연이 해맑게 웃고 있어 노기는 사그라들었다.
은율이 입가를 삐딱하게 당겼다.
“집안 핏줄 어디 가겠니? 난 네가 그 집안과 다시 엮이겠다고 한 그때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
은율은 시연의 부모님을 극도로 싫어했다. 물론 그럴 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미친 결정을 내린 건 자신이었다.
“이 사진들은 가져가라고 준 거죠?”
“뭐? 넌 그것들을 내가 너 주려고 보여 준 것 같아?”
“어쨌든 이건 다 불법적으로 찍은 사진들이니 내가 가져가는 게 맞습니다.”
사진을 쓸어 담는 그를 보며 은율이 비웃었다.
“넌 내가 너 좋은 일 하려고 여기 온 것 같지?”
“설마, 본사 임원 자리 비워놓고 온 누님께서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알고 있어 다행이네.”
은성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다행이라는 사람치고는 표정이 어두운데? 이런 사진이나 찍고 있으면 지난번처럼 웃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정곡을 찌른 지적에 은율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은율이 내려놓았던 모자를 푹 눌러썼다. 잘 보면 겉으론 전과 똑같아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걸 가리려는 은율에게 은성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동생을 못 찾은 모양이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는 짓 그만두라고 말하러 왔지만 보아하니 누님 사정도 녹록지 않아 보이니 오늘은 그냥 가겠습니다. 하지만 시연에게 사람 붙이는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럼 나도 계속은 못 넘어가니까.”
“네가 내 말을 들으면 몰라도, 내가 네 말대로 할 수는 없지.”
은성이 한숨을 쉬었다.
“원하면 한국에 있는 내 인맥을 동원해 동생을 찾아줄 수도 있어요. 그러니 잘 생각하십시오.”
은율이 받아들이리라 생각지 않았지만 역시나 쇠된 고함이 날아왔다. 미국에선 보지 못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남 신경 쓸 시간 있으면 네 아내 단속이나 잘해! 넌 속고 있는 거야. 곧 실체가 전부 드러날 거라고!”
“이사님께서 그 실체를 드러낼 시간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찾는 분이나 잘 만나고 돌아가십시오.”
“지은성!”
뾰족한 고함에 은성의 걸음이 멈추었다. 뒤통수로 분노의 말들이 쏟아졌다.
“내가 그 집안을 그냥 둘 것 같아? 행여 그 애가 상관없더라도 난 이대론 못 넘어가. 너 내 말 똑바로 알아들어!”
“대표님도 제 말 새겨들으시길 바랍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십시오.”
은성은 그 말을 남기고 밀실을 나섰다. 실은 오늘 은율에게 제대로 제 의사를 전달하려 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미국에서 자유분방하고도 당당함으로 유명했던 은율은 오늘 많이 달라 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무너진 모습 같달까.
은율에게 제 가족 외 또 다른 여동생이 있는 건 알고 있었다. 입양되었다던 여동생이 최근 한국에 있다는 걸 알았고 은율이 제 결혼과 더불어 들어올 줄은 예상했다. 그런데 은율은 생각보다 더 날카로웠다. 시연 일도 그렇지만 은율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 할 듯했다.
* * *
“너 청소는 이게 뭐야? 내가 집에 있다고 그러는 거니?”
선경이 거실 한가운데 시연을 세워놓고 손가락질했다. 장작 30여 분이 넘도록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시연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예전보다 무덤덤했다.
“냉장고도 엉망이고, 주방은 아예 손을 놨구나? 넌 대체 이 나이가 되도록 뭐 한 거니? 네 언니는 얼마나 야무졌는데 넌 이게 뭐야? 어쭈, 자세 똑바로 안 해?”
쩌렁쩌렁 울리는 고함에 시연이 느슨해져 가던 긴장을 바짝 세웠다. 어머니의 고함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예전과 장소가 달라 그런지, 아니면 시험 때문에 며칠 잠이 부족해서인지 자꾸만 눈이 무거워졌다.
“한다고 하긴 했는데 아직 좀 부족했나 봐요. 저 이제 시험 끝나서 오늘부턴 더 열심히 청소할게요.”
“넌 당연한 말을 왜 이렇게 길게 해? 그리고 그게 끝이야? 다른 말은?”
시연은 자신을 노려보는 선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아니면… 도우미 이모님을… 잠깐 부를까요? 아무래도 그게 저보단 어머니 마음에 훨씬 들 테니까….”
“나시연!”
시연은 선정의 고함에도 자신이 어떤 말을 빼먹었는지 깨닫지 못했다. 반응을 보면 분명 무언가 해야 할 말이 있는 듯한데 선뜻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분노가 폭발한 선정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 손이 어디로 날아갈지 파악도 하기 전에 짝, 소리가 차지게 터졌다.
시연은 난생처음 얻어맞은 볼에 눈앞이 하얘졌다.
“어, 어머니…….”
“그래. 너 말 잘했다. 오늘 내가 딸 교육 좀 제대로 해야겠어! 너! 예전에는 입에 달고 살더니, 이제 결혼했다고 콧대가 아주 높아졌다? 잘못했단 말이 안 나오지?”
순간 시연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죄송하다는 말을 하지 않은 걸 깨달았다. 그런데 이상한 건 뺨을 맞고서도 그 말이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낮엔 필기시험을 준비하고, 집에 와선 실기에 매진했다. 은성에게 맛있는 집밥도 해 주려 장을 보고 요리도 했다. 그 과정에도 시간은 꽤 소요되었다. 청소에 조금 미흡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자신으로선 최선을 다했다.
은성은 그만 욕심부리고 도우미를 고용하라고 했다. 그러나 곧 방학이기에 미뤄 왔다. 어차피 반년밖에 안 되는 기간이었기에 잠을 줄여서라도 자신이 하고 싶었다. 그런데 청소 조금 부족하다고 왜 잘못했다는 말을 해야 할까. 노력한다는 말로는 안 되는 걸까.
“저… 하루 세 시간도 못 잔 날 많아요…….”
“그래서? 지금 네가 잘했다는 거니?”
“그건 아니지만….”
“내가 너 그리 가르쳤니? 지 사장이 이런 널 보면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넌 왜 소혜 반의반도 못 따라가? 응?”
“어머니…….”
시연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선경이 그 눈물을 고깝다는 듯 흘겨보았다.
“어휴, 나만 죄인이지! 딸 먼저 보낸 내가 결국 죄인이야!”
선경은 시연을 내버려 두고 가슴을 치며 방으로 들어갔다. 쾅 소리를 내며 닫힌 방문을 시연이 물끄러미 보았다. 억울했다. 언니는 죽어서도 칭찬을 받는데 자신은 죽기 살기로 해도 여전히 꾸지람을 들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혼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선경은 매번 시연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망부석처럼 우두커니 선 시연이 서글픈 눈물만 주르륵 떨어뜨렸다.
시연에게 화풀이하고서도 선경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 결혼하더니 시연의 태도가 묘하게 변했다. 예전엔 고분고분하고 제 잘못이 아니어도 죄송하다는 말부터 하기 바빴다. 그래서 시연의 잘못이 아닌 것도 덮어씌우기 좋았다. 그런데 이젠 뭔가 달라졌다.
“어휴, 답답해!”
시환은 자신이 집을 나와도 돈을 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 나가 있으면 될 줄 알았던 외출이 점점 돌아가기 힘든 가출이 되었다.
은성을 찾아가 당분간 쓸 돈은 받았지만 그거론 성에 차지 않았다. 은성이 주는 돈도 생각보단 적어 불만이 앞섰다.
“돈을 어디서 당기지?”
아무리 생각해도 큰돈 나올 구멍은 시환이 가진 금고밖에 없었다. 금고 안에 들었을 통장을 생각하니 입맛이 돌았다. 이제 소혜도 없는 마당에 만족할 정도의 여유를 누리고 살려면 일단은 기를 좀 죽여야 할 것 같았다.
“아우, 짜증 나!”
그래도 이럴 때 시연에게 쏟아붓고 나면 좀 나았는데 이젠 그것도 예전만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남자 알아볼 걸 그랬어. 아휴, 소혜야… 소혜야… 너 없어서 엄마가 지금 이렇게 고달프다…….”
선경의 머릿속에 젊을 때 만났던 몇몇 남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엔 개중에 시환이 가장 나았는데 이 집에 들어와 괜한 딸만 잃었다. 선경의 날카로운 시선이 문밖 시연을 향했다.
“아주 미워 죽겠어!”
* * *
새하얀 국화가 시연의 붉은 볼과 대조되었다. 시연은 국화 다발을 들고 엄마를 찾아왔다. 그래도 올해는 시험이 끝난 뒤라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어떨 땐 엄마에게 인사만 하고 바로 돌아가야 할 때도 있었다.
날씨도 좋았다. 장마가 겹쳐진 해엔 마음이 더 서글펐는데 오늘은 그래도 해가 쨍쨍했다.
“엄마, 시연이 왔어요.”
엄마는 오늘도 시연을 보며 따스하게 웃어 주었다. 시연은 그게 참 좋았다. 울고 싶어 미칠 것 같다가도 엄마의 미소를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풀렸다. 한참이나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술을 뗐다.
“엄마, 나는 언니한테 딱 하나 부러운 게 있었어요. 엄마가 있었잖아요, 언니는. 다른 건 하나도 안 부러운데 그거 하나만큼은 질투 나게 부러웠어.”
그러나 아무리 말을 걸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걸 잘 알지만 시연은 지금 또 쓰게 웃었다.
그런데 그때 묵직한 걸음 소리가 다가오더니 이젠 누구보다 익숙한 음성이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왜 혼자 왔어.”
시연이 돌아보자 은성이 가지런히 다듬은 꽃 한 다발을 들고 곁으로 걸어왔다.
“은성 씨…….”
“오늘 어머님 기일인 거 알고 있었어. 같이 가자고 미리 말하려고 했는데 못 했네. 미안해.”
“아니, 아니에요!”
“일단 어머님께 인사 먼저 드릴게.”
그는 시연의 어머니 앞에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시연은 매번 혼자 엄마 기일을 챙겨왔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몹시 낯설고 어색했다. 그러나 결코 기분 나쁘진 않았다. 아니 뛸 듯이 기뻤다. 그가 친엄마 기일까지 신경 쓸 줄은 정말 몰랐다.
“더 일찍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어머니.”
자신 외에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가 있는 게 신기했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시연의 질문에도 그는 그녀의 얼굴만 한참 내려다보았다. 따스한 손이 그녀의 볼을 조심히 감쌌다.
“어젠 자고 있어서 못 물어봤는데 얼굴이 왜 이래?”
그의 질문에 시연은 부은 볼을 깨닫곤 그의 손에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좀 부딪혔어요.”
“정말이야?”
“네. 그런데 회사 일 많이 바쁘시지 않아요?”
시연은 재빨리 말을 돌렸다. 선경에게 맞았다는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아무리 속상해도 은성에겐 숨기고 싶었다. 제 삶이 뼛속까지 엉망인 걸 그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바빠. 어젯밤에도 집에 왔다가 깜빡한 게 있어서 다시 나갔어. 피치 못하게 외박했네.”
외박이란 말에 시연이 옅게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를 보는 은성의 표정은 차가웠다.
시연과 선경의 일은 어제 이미 회사에서 보았다. 선경이 집에 온 후 이사할 때 설치했던 실내 CCTV를 가동했다. 자신이 없을 때 무슨 일이 생겨도 시연은 말하지 않을 걸 알고 있었다.
결혼했지만 시연은 여전히 어두운 그늘 안에 있었다. 집에 와 잠든 시연의 얼굴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선경을 쫓아낼 뻔했다. 이대로 예전 일을 터트려서 은율처럼 그 집안을 무너뜨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똑같이 시연의 얼굴을 보고 분노를 억눌렀다. 시연이 그 일을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었고, 또한 응징하면 시연까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래도 어제의 분노는 참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곁에 있지 못하고 다시 회사로 갔다. 그렇게 시연에겐 함께 어머님을 뵈러 가자는 말도 하지 못했다.
“역시 넌 어머님을 많이 닮았네.”
그의 시선을 따라 시연의 눈길이 엄마 사진에 닿았다.
“어릴 땐 아버지도 가끔 그런 말을 했었어요. 크면서는 들은 적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뵈니 어머님이 너보다 훨씬 더 고우신 건 알겠다.”
핀잔에 시연이 대꾸는 못 하고 그를 잠깐 흘겼다. 그녀의 표정이 곧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맞아요. 저희 엄마는 정말 미인이셨대요. 그래서 남자들이 가만 놔두질 않았다고 했어요.”
“어머니 얘긴 하지도 않더니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어?”
시연이 새초롬하게 웃었다.
“있어요. 그런 거. 나만 아는 거라 알려 주진 않을 거예요.”
잔망스러운 표정이 귀여워 은성의 입가에도 미소가 스몄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머리카락 끝에 닿았다. 어깨를 스치는 감각에 시연이 움찔했다.
“애처럼 꽃잎은 왜 달고 있어? 또 예뻐 보이고 싶어서 그래?”
그의 손끝에 하얀 꽃잎 하나가 걸려 나왔다. 시연이 재빨리 손으로 머리카락을 털었다.
“그게 언제 거기 붙었지? 그리고 오늘은 예뻐 보이고 싶은 생각 없었거든요?”
“왜? 내가 별로야?”
“그런 게 아니라… 이곳엔 저 외에 다른 사람이 온 적 없으니까요.”
은성은 시연 모르게 잠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적어도 나 사장은 시연과 함께 이곳을 찾았어야 했다. 하긴 그럴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딸을 이용하는 데만 신경을 쏟진 않았겠지.
시연을 생각하면 그녀의 집안에 분노가 치밀고, 또 아이러니하게 시연을 생각해서 그 집안의 잘못을 덮고 있었다. 은율이 여동생 문제와 더불어 한국에 와 그들을 예의주시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은성이 시연의 손을 잡곤 당겼다.
“네?”
“나 피곤해. 가자.”
“하지만 온 지 얼마 안 됐…!”
“다음 주에 다시 오자. 그다음 주에도, 또 그다음 주에도 오면 되지.”
“뭐라고요?”
그에게 끌려가며 시연이 물었다. 은성이 앞으로 걸어가며 대꾸했다.
“앞으로 매주 올 테니까 지금은 가서 좀 쉬자. 나 졸려.”
은성은 정말 피곤한 듯 차에 타더니 등받이를 뒤로 기울였다. 시연이 조수석에 앉아 어색하게 쳐다보자 상체를 일으키더니 그녀의 의자마저 비스듬하게 눕혔다. 그가 그녀와 함께 차 안에 누웠다. 언제인지 모르게 그녀의 손도 그에게 꼭 잡혀 있었다.
“잠깐이면 돼. 이대로 운전하면 사고 낼 것 같아서 그래.”
“네…….”
당황하긴 했지만 시연은 그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조금 전 그가 했던 말이 빙빙 돌았다.
[다음 주에 다시 오자. 그다음 주에도, 또 그다음 주에도.]
정말일까. 그는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녀가 그를 살며시 쳐다보았다. 그는 말처럼 피곤했는지 벌써 고른 숨을 내쉬었다. 시연은 그에게 잡힌 손을 보았다. 잠든 것 같은데도 꼭 잡은 손의 악력은 똑같았다.
시연이 반듯이 누워 눈을 감았다. 담요 하나 덮지 않았는데 전신이 따듯한 것 같았다. 얼어 죽을 것 같은 겨울날에도 은성의 손만 있으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아무도 몰래 호선을 그렸다.
* * *
거실 소파에 엎드려 책을 읽는 승률을 향해 보원이 혀를 쯧쯧 찼다.
“뭘 잘하는 남자? 너 그런 책은 어디서 났니? 방학이라고 공부는 아예 손을 놨구나? 집에 안가?”
이어지는 잔소리에도 승률은 낄낄거리며 책에 집중했다. 시연이 커피 두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이리 와서 커피 마셔.”
“시연이 네 건? 넌 안 마셔?”
“난 마시고 왔어.”
“그래?”
커피를 마신 보원이 승률의 뒤통수를 한 대 때렸다.
“아! 왜 때려?”
“이상한 책 그만 보고 시연이 타 준 커피나 마셔!”
“이거 네 책이거든? 키스 잘하는 남자! 아까 쓰레기통 치우면서 발견한 거야.”
“뭐라고?”
보원이 화들짝 놀라며 승률의 손에서 책을 뺏었다. 시연은 언제나처럼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며 혼자 웃었다.
“얘들아, 나 잠깐 나갔다 올게.”
“야, 남의 책을 허락도 없이 왜 봐?”
“쓰레기인지 확인하려고 봤지. 그게 아니면 내가 네 걸 왜 보겠어?”
“그래도 그렇지! 넌 매너가 똥이냐?”
“나만큼 예의 바른 남자가 어딨다고 그런 소릴 해?”
시연의 말에도 둘은 다투기 여념 없었다. 시연은 그냥 나가기로 했다. 저러다 조용해지면 전화하려니 싶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한숨이 빠져나왔다. 요즘은 셋이 주로 보원이 지내는 호텔 방에서 만났다. 오늘은 이곳에 오는 김에 스위트룸을 들를 마음을 먹고 왔다. 단단히 마음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발길을 떼자 대번에 긴장부터 몰려왔다.
그래도 걸음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씩씩한 걸음을 내디뎠다.
벨을 눌렀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은성에게 물으니 은율은 아직 한국에 머무는 중이라고 했다. 숙소를 바꾸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시연이 마지막으로 벨을 눌렀다. 이번에도 반응이 없으면 돌아갈 생각이었다.
“……누구세요.”
안에서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시연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안녕하세요. 저 지난번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사람인데요….”
“아….”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미약한 음성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희서가 밝은 얼굴로 시연을 맞았다.
“안 그래도 꼭 한번 뵙고 싶었어요….”
“절 만나고 싶으셨다고요? 참, 건강은 좀 어떠세요?”
“일단 잠깐 들어오세요. 제가 기력이 좀 달려서요….”
희서의 상태는 이전보단 확실히 나아 보였다. 그러나 몸이 약한 탓인지 걸음을 내디디는 것도 남들보단 더뎠다.
“이쪽에 좀 앉으세요. 지난번엔 고맙다는 인사도 못 하고 미안했어요. 그때 덕분에 살았어요….”
“아니에요.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시연은 희서가 권하는 소파에 앉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은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희서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왔다.
“지금은 혼자 있어요…. 언니는 오늘 좀 늦을 거예요.”
얼굴에 연신 은근한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선해 보였다.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희서의 호의를 받은 시연이 얼마 후 본론을 꺼냈다.
“그 이후로 병원은 가 보신 거예요?”
“제 병은 제가 잘 알아요. 신장 이식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맘처럼 쉽지 않거든요…. 아무리 언니라 해도 기증 순서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라서…….”
설명하던 희서가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제 이름은 정희서예요. 그쪽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전 나시연이라고 합니다. 아직 학생이에요.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아파서인지 약해 보여도 희서는 확실히 시연보단 나이가 많아 보였다. 희서가 해사하게 웃었다.
“그럼 그럴까? 사실 난 친구가 별로 없거든…. 그래서 언니가 걱정이 많아.”
은율 얘기를 꺼내곤 희서가 하하 웃었다. 밝아 보이는 모습에 시연이 조금 더 안심했다.
“사실 희서 씨 걱정도 됐지만, 실은 언니라고 부르시는 그분을 만나고 싶어서 온 것도 있어요.”
“은율 언니를?”
“네. 제겐 시댁 어른이시거든요.”
“뭐……?”
희서가 놀란 눈으로 눈을 끔뻑끔뻑했다. 그러더니 곧 당황한 얼굴로 소파에서 주섬주섬 일어났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네?”
시연의 말에도 희서는 소파에서 멀어지기 바빴다. 거친 걸음에 그녀의 몸이 자꾸만 비틀거렸다.
“제, 제가 갑자기… 다른 볼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 주시면 좋겠어요. 죄송합니다…….”
“희서 씨…?”
“죄송해요, 그만 가 주세요…!”
그러다 결국 제 발에 걸린 그녀의 몸이 기울어졌다. 시연이 그녀에게로 뛰어갔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괜찮아요!”
희서가 시연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희서의 호흡이 점차 빨라져서 시연은 또다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침대까지만 함께 갈게요. 제발 뿌리치지 마세요….”
희서는 싫다는 데에도 부탁까지 하며 부축하길 바라는 시연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시연은 끝까지 그녀를 놓지 않았다. 침대에 잘 눕혀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하아… 하아…….”
그 와중에 희서의 호흡은 더욱 흐트러졌다. 시연의 머릿속엔 은율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정은율 이사님 어디 있어요? 번호를 알려 주시면 제가 연락할게요!”
“하, 하아…. 안 돼… 언니 계속 신경 쓰게 할 수 없…. 하아…!”
희서의 안색마저 점점 나빠졌다. 이대로는 무슨 일이 날 것 같았다.
“그럼 구급차를 부를게요!”
“안 돼…! 언니 걱정…할…….”
내내 은율 걱정만 하던 희서의 손이 툭 떨어졌다. 희서의 의식이 흩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정희서 씨? 정희서 씨…!”
시연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가 서둘러 전화기를 찾아 들었다. 무작정 119를 누르고 빨리 와 달라고 소리쳤다.
“QG호텔 스위트룸이에요! 제발 빨리 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일분일초가 너무나 더디게 느껴졌다.
* * *
시연이 차분히 검사실에서 나왔다. 간호사가 누르라고 준 솜으로 바늘 자국을 꾹 눌렀다. 그때 은율이 응급실로 뛰어 들어왔다. 은율의 눈가는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희서야, 어딨어? 너 어딨어!”
허둥대는 은율을 발견한 시연이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시연은 응급실에 도착해 수속을 마친 후 은성에게 연락했다. 은율에게 연락한 건 은성일 터였다.
“안녕이라고? 넌 이 상황에 그런 말이 나와?”
“정희서 씨는 괜찮아요. 이쪽으로 오세요.”
차분한 시연의 모습에 은율이 눈썹을 휘어 당기며 따라나섰다. 시연이 커튼을 걷자 침대에 누워 편안히 잠들어 있는 희서가 보였다.
“희서야…!”
“의사 선생님께서 깨어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시연의 설명에 은율이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가 뭔데 걱정을 하라 마라야? 네가 얘가 얼마나 아픈지 알기나 해?”
은율은 시연이 절대 모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인 게 당연했다. 제 잇속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는 부류. 우연히 아플 때 발견해 응급실로 데려오는 정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었다.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들었어요.”
은율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의사가 그것까지 말해?”
“아니요. 정희서 씨가 말씀해 주셨어요.”
“뭐? 희서가? 거짓말하지 마. 희서가 너한테 그런 말을 왜 해!”
“그것까진 잘 모르겠지만 호텔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시연을 잠깐 노려본 은율이 이내 희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희서의 볼을 쓰다듬으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딱 가족의 그것이었다.
“희서야… 희서야…….”
잠든 희서를 보며 눈물을 떨구는 은율을 시연이 물끄러미 보았다. 가슴 한편이 시큰거렸다. 자신은 언니가 숨을 거둘 때 곁에 있지도 못했다. 머나먼 곳에서 사고로 죽었다는 말을 들은 게 다였다. 제게 항상 온기를 전해 주던 언니에게 무엇도 해 주지 못했다. 큰 건 아니더라도 언니가 아파할 때 은율처럼 작게나마 걱정할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문득 은율이 시연을 날카롭게 보았다.
“너, 호텔에 갔었어?”
“…네.”
“잠깐 이리로 나와.”
은율은 침상의 커튼을 조심스레 치고는 바깥으로 나갔다. 시연이 그녀의 뒤를 얌전히 따랐다.
시연의 걸음이 멈추자마자 따가운 타박이 쏟아졌다.
“너 내가 누군지 몰라? 희서한텐 왜 간 거야? 네가 희서를 이렇게 만들었어? 왜! 무슨 말을 했어!”
독하게 날아오는 질문들에 시연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은율을 만나기 위해 방을 찾았다. 시연이 천천히 할 말을 추슬렀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희서 씨가 쓰러진 건 저 때문이 맞는 것 같아요.”
“뭐!”
은율의 외마디가 바늘처럼 시연의 심장을 푹 찔렀다. 시연이 옷깃을 부여잡았다.
“처음엔 좋아 보이셨어요. 절 만나고 싶었다고 하셨고 안부 얘기를 나누었어요. 그런데 제가 대표님 얘기를 꺼냈을 때 갑자기 희서 씨 상태가 안 좋아졌어요.”
은율의 동공이 불어오는 밤바람처럼 흔들렸다.
“설마…… 너와 내 관곌 얘기한 거야?”
“그게… 하면 안 되는 말인 줄 몰랐어요.”
“너어어!”
낮은 비명에 가까웠다. 시연은 은율이 이렇게 화를 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단지 희서를 위해서라도 방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은 상상을 넘어섰다.
“나시연… 너……!”
시뻘게진 눈으로 눈물을 뚝 흘리며 은율이 시연을 삿대질했다. 뾰족이 선 손끝이 분노에 벌벌 떨렸다. 은율의 거친 행동과 목소리에 사람들이 둘을 보며 웅성거렸다.
시연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반응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그 순간 그들 사이로 끼어든 건 은성이었다.
은성이 은율의 손을 잡아 내렸다.
“치워!”
“사람들 눈 많아.”
“그게 왜! 역시 내가 생각한 그대로였어. 넌 우리 집안에 독사를 들였어.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는 은율의 폭언을 상대하며 시연의 손을 잡고 그녀를 제 뒤로 숨겼다. 시연은 그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따가 차에 가서 얘기해. 여기 병원이야. 이러려고 병원에 온 건 아니잖아.”
병원이란 말에 은율의 눈빛이 조금 돌아왔다. 그녀가 은성을 비껴 시연을 노려보았다. 시연은 시선을 떨군 채 떨고만 있었다.
“꼴답잖게 여린 척하는 것도 똑같네. 그래, 어디 잘해 봐. 내가 너희들이 한 짓 전부 되돌려 줄 테니까!”
가시 돋친 말을 남긴 채 은율이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은성은 시연을 데리고 차로 갔다. 에어컨을 틀어야 하는 계절이지만 그는 자판기에서 따뜻한 캔 음료를 뽑아 와 덜덜 떨리는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잠깐만 기다려 줘. 안에 상황만 보고 올게.”
시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머릿속에서 은율에게 들었던 말이 뱅뱅 돌았다. 무슨 말일까. 독사라니, 두 번이라니. 너희들이 한 짓이라는 건 대체 뭘까.
반응을 보니 은성도 모르지 않는 것 같았는데 그는 제겐 왜 말하지 않았을까.
얼마 시간이 흐르지도 않은 것 같은데 곧 은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운전석에 오르더니 시연을 쳐다보았다. 한숨이 에어컨이 내뿜는 차가운 공기에 섞여들었다.
은성이 차를 세운 곳은 한강 공원이었다. 날이 더워지며 사람들이 북적였지만 둘이 탄 실내의 공기는 겨울처럼 싸늘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잘 대처했어. 네 덕에 환자 상태가 금방 호전됐어.”
“지 이사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꽤 첨예한 말이 은성에게 되돌아갔다. 시연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저 때문에 정희서 씨가 그렇게 된 거예요.”
“아니야. 정희서는 원래 지병이 있었어. 언제 어디서든 그런 상황이 될 수 있었고.”
“그렇다 하더라도 오늘 쓰러진 건 저 때문이에요. 그건 부정할 수 없어요.”
올곧은 눈빛이 은성을 향했다.
“말씀해 주세요. 지 이사님이 왜 절 싫어하시는지.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은성은 뜻밖에 터진 사고에 착잡했다. 그토록 막고 싶었던 얘기였다. 적어도 지금 그 얘기가 시연의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이혼 후에 그녀가 머나먼 타지에 있을 땐 그래도 충격이 덜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 이런 상황이 되어 숨기기 힘들게 되었다. 그가 또다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이건 너와 전혀 관련이 없는 얘기라는 걸 잘 알아둬.”
“명심할게요.”
그가 시연이 마시지 않은 음료를 따서 마셨다. 시연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평소 같지 않게 잘게 흔들렸다.
<2권에 계속>
[공금☞☜]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