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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들이 그렇지 뭐.>
명료한 어조의 음성이 컴퓨터에서 흘러나왔다. 은성은 한 비서가 건네준 파일을 들은 후 그 자리에서 지웠다.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보고한 파일은 남김없이 지우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사장님. 저 그런데…….”
“말씀하세요.”
“이 붉은 머리 여자분은 누구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은성이 한 비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한 비서는 자신이 뭔가 잘못했나 싶어 눈동자를 굴렸다.
“모릅니까?”
“네? 아, 그럼 제가 아는 분이었습니까?”
“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아, 저, 그게…….”
난감해하는 한 비서를 두고 은성은 무심하게 책상 위를 정리했다.
실은 한 비서 덕에 이 실장 없이도 회사 일과 개인적인 일 모두 어렵지 않게 처리 중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잘하는 한 비서도 가끔은 맹할 때가 있었다.
“그럼 다음 주까지 이 여성이 누군지 알아 오시면 되겠네요.”
“네?”
“그럼 오늘은 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의자를 넣고 퇴근 준비를 하는 은성의 뒤를 한 비서가 졸졸 따랐다.
“벌써요?”
“가끔은 정시에 퇴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한 비서님도 다른 일 없으시면 바로 퇴근하시죠.”
“정말요?”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한 비서를 두고 은성이 뒤돌아 가볍게 입가를 당겼다. 한국에 들어와 일을 처리하는데 어려움이 뒤따를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회사 안팎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꽤 빨리 늘어났다. 직원들의 불만도 생각보다 빨리 사그라들었다. 자금 여유가 아직 부족하긴 하지만 지금쯤 한 번 포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탁탁탁. 뒤에서 빠르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비서가 어느새 그의 옆으로 바짝 붙었다.
“사장님, 할 일도 없는데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저는 괜찮습….”
“아닙니다! 저 운전 잘하는 것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럼 출발하시죠!”
한 비서가 그에게 따로 맡긴 키를 당당히 내보였다. 은성이 얼결에 뒷좌석에 앉았다.
“안전하게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은성의 머릿속에서 포상하겠다는 생각이 흐려졌다.
“사랑하시는 사모님 곁으로 지금, 가겠습니다!”
지금도 열정이 넘치는데, 포상했다간 그 열정이 얼마나 더 튈지 조금 걱정되었다. 자신을 믿고 열심히 일해 주는 건 고맙지만 때론 혼자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상사의 마음도 모른 채 한 비서가 피로 하나 없는 얼굴로 운전에 집중했다. 맹수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도심 속 차들 사이를 비집고 들었다.
* * *
현관문을 열자 찌개 끓는 냄새가 은성의 코를 자극했다. 부엌으로 가자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레인지 위에서 홀로 끓고 있는 김치찌개가 보였다. 시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왔어요?”
시연이 끙끙거리며 부엌 베란다에서 나왔다. 그녀의 손엔 무거운 김치 통이 들려 있었다. 은성이 다가가 그녀에게서 김치 통을 받아 옮겼다.
“고마워요.”
“뭐 하는 거야?”
“묵은 김치로 찌개를 다 끓여 버려서 새 김치 좀 꺼내려고 했어요.”
“이런 건 통을 들고 오지 말고 그릇을 가져가서 꺼내 와. 아니면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든지.”
“네, 다음엔 그렇게 할게요. 어서 가서 씻고 오세요.”
시연의 관심은 금방 레인지 위의 김치찌개로 옮겨갔다. 은성은 침실로 들어가면서도 부엌에서 부산스레 움직이는 그녀가 신경 쓰였다. 그냥 사람을 쓰면 될 텐데 왜 굳이 자신이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
서둘러 씻은 그가 샤워가운을 걸치고 바삐 부엌으로 갔다. 혼자 분주할 시연 생각에 머리 물기도 다 닦지 못했다. 그가 수건으로 머리 물기를 닦으며 그녀 옆으로 다가갔다. 시연은 여전히 식탁 차리는 것에 몰두 중이었다.
“다 됐어?”
“깜짝이야!”
그의 기척을 듣지 못했는지 시연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았다. 그런데 그녀가 들고 있던 기다란 요리 숟가락이 그의 가슴을 스쳤다. 붉은 국물이 갓 씻고 나온 그의 가슴과 가운에 그대로 묻었다.
“어맛! 죄송해요!”
후다닥 요리 숟가락을 내려놓은 시연이 그의 손에서 수건을 가져가 국물을 닦았다. 그러나 샤워가운에 묻은 국물은 닦으면 닦을수록 더욱 크게 번지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시연이 이번엔 샤워가운을 벌려 그의 가슴팍을 닦았다. 보드라운 천 자락이 이따금 그의 유두를 스쳤다.
“됐어.”
그가 그녀에게서 수건을 빼앗아 가져갔다. 엉망이 된 수건을 식탁 의자에 대충 걸어 두고 어지러운 부엌과 식탁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시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정말 죄송해요….”
“저녁은 다 된 거야?”
잔뜩 화가 나 보이는 그의 눈치를 보며 그녀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네. 밥만 푸면 돼요. 은성 씨는 가서 옷 갈아입고 오세요. 제가 다 차려놓을….”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가 밥그릇과 주걱을 들고 밥솥으로 걸어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솥에서 밥 두 공기를 뜨고는 식탁에 내려놓았다.
“와서 앉아.”
“네? 네….”
시연은 자신의 잘못에 곧장 그의 말을 따랐다. 그녀의 눈길이 연신 그의 얼룩덜룩한 가슴팍을 다녀갔다.
“어차피 금방 벗을 옷이야. 그러니까 신경 그만 쓰고 밥 먹어.”
그가 숟가락을 들어 찌개를 떠먹었다. 시연의 떨리는 시선이 그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은성은 맛깔스러운 찌개 맛에 잠시 얼떨떨했다. 만들기 어렵지 않은 음식이라곤 하지만 그간 요리는 해 본 적 없을 텐데 깊은 맛을 낸 솜씨에 꽤 놀랐다.
“잘했네.”
짧은 칭찬에 그제야 시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가 얼른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떠먹었다. 제 입에도 맛이 괜찮은지 그윽한 미소가 잔뜩 올라왔다. 그 모습을 은성이 가만히 쳐다보았다.
부엌의 열기 때문인지, 미안함 때문인지 그녀의 볼이 발그레했다. 예전에 그녀는 화가 나서 얼굴이 붉어졌는데 요즘은 다른 이유로 자주 복숭아 같은 얼굴을 했다.
은성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게 좋으면서도 불편했다.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흐르는 감정을 그때마다 막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중적인 감정을 한심해 하고 있을 때였다.
수줍은 눈길이 그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흘깃흘깃 다녀갔다.
“왜 그래? 무슨 할 말 있어?”
“아, 저 그게….”
“박 교수님 얘기라면 내가 잘 말씀드렸어.”
“네?”
시연의 눈매가 둥그레졌다. 반면 그는 그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밥을 먹으며 했다.
“그 얘기 하려던 거 아니야?”
“박 교수님은 어떻게 아세요?”
“교수님이 말씀 안 하셨나? 어제 전화가 왔던데, 너 구호 활동 가는 거 꽤 길어질 텐데 동의할 수 있느냐고.”
시연의 얼굴이 미안함과 당황으로 잔뜩 얼룩졌다. 그런 모습을 그가 그녀 모르게 제 시선에 차곡차곡 담았다.
“기간이 어차피 이혼한 후라 동의한다고 했어.”
무뚝뚝한 목소리가 기적과도 같은 내용을 전했다. 고개 숙인 시연의 동공이 이지러졌다.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동의하셨다고요?”
“그래. 뭐 잘못됐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표정처럼 흔들림 하나 없이 말끔했다. 시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저, 정말이에요?”
“그래. 그런데 너 밥은 안 먹어?”
“전 요리하면서 이거저거 많이 집어먹었더니 배가 안 고파요.”
쯧쯧, 혀 차는 소리도 시연은 싫지 않았다. 그가 혀를 차면 무시당하는 느낌이라 항상 싫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다.
“밥 계속 똑바로 안 먹으면 너….”
“사랑해요!”
잔소리하려던 은성의 얼굴 근육이 시간이라도 멈춘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 시연이 벌떡 일어나 은성에게 달려갔다. 뻣뻣하게 굳은 은성의 상반신을 껴안고 연신 고맙다고 소리쳤다.
“진심이에요! 전 항상 은성 씨를 존경해 왔어요!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게 가르쳐 주신 분인데 어떻게 제가 안 그러겠어요!”
시연은 어린애처럼 좋아했지만 은성은 지금의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 안 그래도 아까 시연의 터치로 하체 중심부가 저릿했다. 그런데 또 그녀가 스킨십을 해 왔다. 그녀에겐 인사와도 같은 접촉이 그에겐 심각한 독이 되었다.
“비켜.”
그가 딱딱한 어조로 낮게 말했다. 그제야 시연이 또 화들짝 놀라더니 그에게서 떨어졌다.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기뻐서 그만….”
“됐으니까, 앞으론 이러지 마.”
그녀를 나무라면서도 은성은 이번 역시 혼란에 빠졌다. 어릴 때 봤던 그녀의 모습은 대체로 어둡고 무거웠다. 슬퍼 보였고 맑았지만 항상 흐려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일까, 그녀는 혼자가 되는 게 그토록 좋을까.
자신은 이렇게 지내다 혼자가 되는 게 무섭도록 싫은데…….
“저… 식사 다 하셨으면 제가 어깨를 좀 주물러 드리려고 하는데요….”
“괜찮으니까 너나 배 안 고파도 좀 더 먹어 둬.”
그가 수저를 놓고 일어섰다. 시연이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아니에요! 전 신경 쓰지 마세요. 다 드셨으면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오늘따라 그녀는 왜 이러는 걸까. 그가 그녀에게 끌리듯 걸어가 소파에 앉았다. 어느새 소파 뒤로 돌아간 그녀가 은성의 어깨를 주물렀다.
“됐다니까.”
“요리하면서 제가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알면 깜짝 놀라실 걸요? 그러니까 은성 씨 오늘도 고생하셨을 텐데 잠깐만 편안히 계세요.”
그녀의 고집에 은성은 하는 수 없이 몸에 힘을 풀었다. 간지럽히듯 살랑거리는 움직임에도 피로는 조금씩 풀려 갔다. 은성의 긴장도 그를 따라 조금씩 흐트러졌다.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전 그런 것까지 은성 씨에게 부탁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이렇게 흔쾌히 도와주실 줄 몰랐어요.”
종알종알하는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달았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단지 알고 있을까. 추후 그런 그녀의 음성을 매일 듣고 살 게 될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는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잠시 휴식에 빠졌다. 시연의 손이 그의 뒷목을 열심히 오르내리고 어깨와 팔도 조물거렸다. 그녀의 손이 닿는 곳곳이 하나같이 흐물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은성은 아래가 달아오르는 감각에 미간을 좁혔다. 긴장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그녀의 터치에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제게 닿을 때마다 매몰차게 떼어 내 진정시킨 흥분이 단전을 빙빙 돌다 한군데로 모였다.
“됐어. 그만해.”
그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더는 힘들었다. 안 그랬다간 지난번처럼 또다시 뜻하지 않게 그녀를 안게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제 그런 나쁜 마음은 조금도 모를 텐데 말이다.
매몰차게 떨어진 손에 시연은 잠깐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침실로 향하는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피로는 어때요? 좀 풀렸어요?”
“그래, 덕분에.”
그의 말투는 여전히 쌀쌀했다. 시연은 끈덕지게 그를 따라붙었다. 그가 침실로 들어가자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쫓아가 대꾸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회사는 어때요? 많이 힘들지 않아요?”
“괜찮아. 그런데 너.”
또다시 입을 여는 그녀를 그가 단호한 표정으로 가로막았다. 어설프게 그의 샤워가운에 닿으려는 그녀의 손목도 움켜쥐었다. 허공에서 둘의 시선이 짙게 얽혔다.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가 서서히 분주함을 멈추었다.
“옷이 더러우니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좀 해!”
차디찬 말에 시연의 호흡이 멈추었다. 은성은 이번엔 지난번보다 좀 더 확실히 하기로 했다. 함께 지내면서 시연이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했다. 실수는 한 번이면 충분했다.
“너 이러는 거, 내가 아닌 다른 남자들한텐 유혹이야. 알아?”
“유혹…….”
“그래, 그러니까 우리 사이 선은 명확히 지켜. 네가 남자를 아직 모르는 것 같으니까 해 주는 말이야.”
은성은 이만하면 그녀가 알아들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저녁 내내 따뜻하게 구는 그녀를 냉정히 떼어 냈다. 그러면 아무리 몰라도 자신이 다른 관계를 거부한다는 정도는 알아들어야 했다.
그가 뒤돌아 욕실 문을 열었다.
“나가줘. 다시 씻어야겠어.”
“제가 뭘 잘못했나요?”
그런데 당찬 대꾸가 들려왔다. 그가 다시 그녀를 마주했다.
“뭐?”
표정엔 겁이 실렸지만 시선만은 또렷했다.
“절 안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남자들 본능인 건 알아요. 그런데 이젠 그 마음이 바뀌신 거예요?”
‘하.’ 그가 커다랗게 한숨을 터트렸다.
“확실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전엔 안고 싶었는데 그날 이후로 마음이 바뀌었어. 넌 전혀 내 취향이 아니야.”
“그러면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거예요?”
그녀의 눈길이 그의 중심부로 내려갔다. 은성은 샤워가운을 높이 밀어낸 제 하체를 내려다보았다. 점점 더 아프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곤두선 줄은 몰랐다. 시연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내내 보고 있었을까.
“이건… 너 때문이 아니야.”
“제가 잘 못하면 알려 준다고 하셨잖아요.”
“나시연.”
“제가 그쪽으론 공부했는데도 아직 서툴러요. 그러니까 예전처럼 알려 주시면 열심히 배워서 잘할게요.”
은성은 황당해 입을 다물기 힘들었다.
“너,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 그런데 가만히 둬도 되는 것을 굳이 왜 나서서 해결하려고 해?”
시연은 이런 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정말 많이 노력했다. 처음엔 그와의 결혼이 싫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자신이 어리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진짜는 아니라도 버젓이 그의 아내였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제 학교 문제마저도 단숨에 해결했다. 혼자선 무엇도 하지 못한 채 끙끙대던 일이 그를 만나고 쉽사리 풀리고 있었다. 그 단적인 결과로 그와의 결혼 후 엄마의 잔소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시연은 요즘 같은 평온이 또 언제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지난 여행에서 자신을 안고 싶다는 말에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을 누르고 끝을 견뎠다.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알아서 피임도 했다. 그가 잠자리를 요구하면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어른처럼 보란 듯이 해낼 생각이었다. 이번엔 좀 더 잘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동영상을 보며 음식도 배우고 다른 것도 배웠다.
“저도 여자예요.”
“알아. 너 남자 아니고 여자인….”
“어린애가 아니라 본능도 있는 여자라고요!”
그가 짙은 눈썹을 잔뜩 구기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은성 씨에겐 아직도 여전히 애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기도 하고 성욕도 느끼는 여자라고요.”
“……알아.”
“제가 부족한 건 잘 알아요. 그래서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니 조금만 너그럽게 봐주시면 안 돼요?”
쏟아지는 토로에 그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왜 저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해야 해요? 다른 건 몰라도 이런 부분에선 저 말고 다른 누구라도 경험이 없으면 배워야 하는 거잖아요. 왜 오빠는 항상 내게만 그래요? 언니에겐 다정했으면서 어째서 내게만 항상 혹독하냐고요!”
은성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기 힘들었다. 자신이 어떤 여자를 보고 웃었다면 그건 맹세코 나시연이 유일했다.
“그런 적 없어.”
“오빠는 항상 그렇게 말했죠. 하지만 내가 느끼는 건 달랐어요. 지금도 난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 오빠는 화만 내고! 나더러 뭘 더 어쩌라는…!”
은성은 더는 본능을 가로막지 못하고 그녀를 끌어안아 버렸다. 그녀가 상처에 베어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었다. 그것이 비록 자신이 낸 것이라 할지라도, 앞으로도 또 그래야 한다 하더라도. 지금은 울먹이며 아픔을 말하는 그녀를 밀어낼 수 없었다.
“놔… 놔요!”
그의 품 안에서 그녀가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눈가엔 눈물을 매달고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
“울지 마.”
“누가 날 울렸는데!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그녀가 이렇게 우는 게 싫어서 미국에서 날아왔다. 그런데 그녀를 지키려면, 그녀에게서 자신을 방어하려면 지금은 그녀에게 상처를 줘야 했다. 그게 은성은 못내 화가 났다.
그녀가 결국 그에게서 벗어나 쏘아붙였다.
“나는 이제 병 주고 약 주면 화를 푸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난 이제 이런 독한 약 안 받을래요!”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뭐라고요?”
“그래. 너 때문에 발기한 거 맞아. 그러면 넌 내가 이럴 때마다 풀어줄래? 넌 내가 얼마나 자주 이러는지 알기나 해?”
그녀의 시선이 그의 아랫도리에 닿았다가 어색하게 흐트러졌다.
“어, 얼마나 자주… 그러는데요?”
“매일.”
“네?”
“아침에도, 밤에도, 때론 회사에서 일하다가도! 그런데 그때마다 네가 어떻게 해결할 건데? 그래, 네 말대로 네가 노력할 수 있게 해 줄게. 자, 넌 이제 어떡할래?”
시연은 이제 제게 넘어온 바통에 잠시 머뭇거렸다. 주 1회 정도는 예상했었다. 그런데 뭐, 매일? 게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라고?
“아침엔… 남자들 원래 그런 거라고….”
“그럼 아침은 빼고.”
“회, 회사는….”
“그것도 빼고.”
단숨에 날아드는 대꾸에 시연의 입에서 가느다란 숨이 비틀려 나왔다.
“매, 매일…….”
“그래, 매일 밤.”
“그런데 은성 씨는 보통 너무 늦게 오는…….”
“너 자고 있으면 깨울까?”
“그건 좀……. 다음 날 학교도 가야 하고… 사실 생각보다 체력을 요구하기도 하고….”
그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 봐. 이러니까 내가 알아서 한다는 거야. 네 노력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서로 상황이 안 맞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거라고!”
“오늘은 아니잖아요.”
단단한 목소리가 틈새를 파고들었다. 점차 반듯해져 가던 은성의 이마가 다시 구겨졌다.
“오늘 가르쳐 주세요.”
“너…….”
“이렇게 서로 시간이 맞으면 그땐 같이 해결해요. 아까처럼 제가 어깨를 주물러줄 수도 있고 섹……스를 할 수도 있고요.”
시연은 조금 부끄러워하면서도 그를 끝까지 똑바로 보았다.
“열심히 배워서 빨리 잘할게요.”
은성은 이제 할 말이 완벽히 사라졌다. 시간만 대충 흘려보내도 되는데 시연은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려 할까.
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꺼낸 숨을 내뱉었다.
“그래.”
시연의 얼굴이 확연히 밝아졌다. 그 모습에 은성의 마음은 몸과는 달리 걱정으로 휩싸였다. 어떤 기대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시연의 얼굴이 조금씩 발그레해졌다.
* * *
텅 빈 집무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좁은 틈으로 비죽 들어온 얼굴은 선경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그녀가 빠르게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불도 똑바로 안 끄고 퇴근해?”
누가 들을세라 한껏 낮춘 음성이 날카로웠다. 그녀가 조심히 책장으로 걸어갔다. 뾰족한 구두 대신 비서실에서 대충 갈아 신은 슬리퍼가 화려한 옷차림과 이질적이었다.
선경은 서둘러 책장 사이를 살폈다.
“여기 어디였던 것 같은데…….”
그녀의 눈과 손이 바삐 움직일 때였다.
“……여보?”
예기치 못하게 들린 음성에 선경이 뒤를 홱 돌아보았다.
“여, 여보…?”
“당신이 지금 여기에 왜 있어? 그건 그렇고 거기서 뭐 해요?”
선경은 난감한 낯빛으로 주섬주섬 완전히 몸을 돌렸다. 등 뒤에 숨긴 손이 무언가를 꼭 쥐고 꼼지락거렸다.
“어, 어디 있었어요? 나, 난…… 당신 늦길래 와 봤는데… 아무도 없는 줄 알고…….”
“피곤해서 안쪽 휴게실에서 잠깐 눈 좀 붙였는데…. 그런데 당신 뒤에 그거 뭐예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휴게실에 있었구나!”
우물쭈물하는 선경에게로 시환이 한달음에 다가왔다. 선경을 의뭉스러운 눈초리로 살피다 뒤쪽 책장을 흘깃 보았다. 그 눈길에 선경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렸다.
“책장은 왜 살피고 있었소?”
“그, 그야… 당연히 책을 보려고…!”
순간 시환이 선경을 뒤돌려 그녀의 손에서 작은 종이 하나를 빼앗아 갔다. 선경은 그에게서 다시 종이를 빼앗으려 버둥거렸다. 시환이 종이를 높이 치켜들고 그 속에 적힌 숫자를 읽었다.
“이건……!”
“아, 아니에요! 오, 오다가 비서실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난 뭔지도 모르고 쓰레긴 줄 알고 주워 왔을 뿐이에요!”
시환의 눈초리가 더욱 사나워졌다. 그가 선경을 밀치고 책장으로 갔다. 비밀 장소를 가린 책들을 후드득 밀어 떨어뜨리고 비밀번호를 눌러 금고를 열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그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그의 표정은 다시 사나워졌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아, 아니라고 했잖아요!”
“뭐가 아니요! 나 몰래 사무실에 들어와 금고를 털려고 했던 거잖소! 이게 어떤 돈인지 몰라서 이런 짓을 벌인 거요!”
시환의 음성이 잦아들지 않았다. 선경의 낯빛은 정상으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버럭 화를 냈다.
“당신! 지금 내 말을 못 믿는 거예요? 내가 대체 뭘 했다고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오?”
“그럼 내가 못 할 말이 뭐가 있어요? 소혜랑 버림받고 살다가 뒤늦게 결혼한 것도 억울한데, 아마 전 부인이 안 죽었으면 나랑 소혜는 평생 골방에서 썩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런데 소혜마저 잃은 내게 당신이 이렇게 다그칠….”
“소혜 얘기 좀 그만 우려먹어!”
시환답지 않게 높게 터진 고성에 선경이 화들짝 놀라 눈을 치떴다.
“뭐… 뭐라고요……?”
시환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겠다.
“이제 죽은 애 얘기는 그만 좀 하라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숨을 고르는 그는 정말 인내심이 바닥나 보였다. 평소 보지 못하던 남편의 모습에 선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다, 당신… 어떻게 소혜를 그런 식으로…….”
“소혜만 딸이고 시연인 딸도 아니오? 아무리 시연이 당신 친딸이 아니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 있소? 집안 살리려고 그 어린 나이에 시집간 시연이 불쌍하지도 않소?”
선경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HLA 그룹 맏며느리로 들어간 애가 뭐가 불쌍해요? 우리 소혜는 그렇게 오래 기다리고도 갖지 못한 자리인데.”
“뭐요?”
“그래요. 내가 당신 딸 팔아서 받은 돈 좀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뭐요? 처음부터 잘못한 건 당신이었잖아요! 항상 날 못 믿어서 감추고 숨기고. 혹시 나 말고 다른 데서 낳은 애가 또 있는 건 아니에요?”
“여보!”
선경이 매몰차게 돌아섰다.
“당신 말대로 딸 팔아서 받은 돈, 처음부터 공평하게 반씩 나눴으면 됐잖아요. 당신 혼자 숨겨 놓고 있으니 이 지경이 된 거라고요.”
“그 돈은 회사를 살리려고….”
“그러니까 그 돈 지분의 절반은 내게 있단 그 말이에요.”
당장에라도 나가려는 듯 문고리를 잡은 손가락이 가득 찬 힘으로 하얬다.
“당신이 그 돈을 전부 쥐고 있는 건 결국, 시연인 내 딸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나 같아요!”
“여보!”
삐그덕, 쾅! 힘으로 당긴 문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가 세게 닫혔다. 선경이 나가고 난 후 시환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이 쏟아졌다. 곧 집무실 밖에서 세찬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시환이 책장을 붙잡으며 이마를 짚었다.
* * *
쏴아아.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시연이 침대 끝에 앉아 손을 꼼지락거렸다.
[금방 씻고 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
그는 시연을 두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시연은 은성이 오기 전에 행여나 싶어 모든 준비를 마쳐 놓은 자신이 후회되었다. 안 그랬으면 자신도 씻으러 간다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침실에 앉아 씻고 있는 은성을 기다리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쩐지 음란한 짓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여자가 된 것 같았다.
“하긴, 다를 게 뭐야. 사실 내가 조르듯이 말했잖아.”
그녀가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거절하는 그를 잡아 이 상황을 만든 게 본인이라 한 말이었다.
“뭘 졸라?”
툭 터진 대꾸에 시연이 흠칫하며 시선을 들었다. 그는 허리에 수건 하나만을 두른 모습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대번에 그녀의 시선이 둘 곳을 잃고 흐트러졌다.
“빠, 빨리 씻으셨…!”
겨우 찾은 말을 뱉을 새도 없이 그가 성큼 다가와 그녀를 일으키더니 곧장 입술을 겹쳤다.
“흡!”
시원한 향이 나는 입술이 정신없이 그녀를 탐했다. 맞붙은 입술을 가르고 밀려드는 살덩이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시연은 갑작스레 돌변한 상황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뜨겁게 입 안을 헤집었다. 타액이 섞이는 소리가 상스러웠다. 시연은 조금씩 긴장을 풀며 그의 키스에 젖어 들었다.
은성이 그녀의 혀를 얽어 제 안으로 끌어당겼다. 자꾸만 수줍게 말려드는 혀를 끝까지 쫓아가 제게로 빨아냈다. 욕심껏 입술을 빨고 혀도 놓아주지 않고 뒤섞었다. 달라붙은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뒤엉킨 혀가 들고나길 반복했다.
“읏… 흐읍…….”
얕은 신음을 들으며 그가 그녀의 옷을 벗겼다. 천에 가려진 부드러운 살결을 쓰다듬고 제게 닿아오는 가녀린 여체를 탐미했다. 침대 아래로 시연이 입었던 옷이 하나둘 떨어졌다. 어느덧 속옷만 남은 그녀를 그가 침대 위로 밀어 눕히려던 찰나였다.
“잠깐만요.”
그를 만류한 시연이 어지러운 호흡을 내뱉으며 속삭였다.
“왜….”
허스키한 목소리가 은성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의 구겨진 얼굴에도 시연은 꿋꿋이 일어나 그를 침대에 밀어 앉혔다.
“잠깐만 그대로 있어 보세요.”
은성은 그녀가 제 옆에 가지런히 앉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속옷만 입은 채 제 곁에 있는 그녀가 믿기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몸을 섞었지만 그는 그녀의 속살을 보는 게 영 어색했다. 한참이나 나이가 많은 자신이 그녀에게 이런 짓을 해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녀가 기다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다가왔다. 감미롭게 눈꺼풀을 내리며 서로의 호흡이 섞이는 지점까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다 살짝 벌어진 입술이 그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성의 눈꺼풀이 놀란 듯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시연이 그의 어깨를 붙잡고 그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살며시 입술을 가르고 제 혀를 밀어 넣곤 그를 찾아 이곳저곳을 헤맸다.
은성은 정신이 혼미했다. 그의 혀를 찾아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에 아랫도리가 단숨에 단단해졌다. 솟구쳐 오르는 통증을 무시하며 그는 그녀가 감아오는 혀를 제 뇌리에, 신경에 새겼다.
아릴 정도로 달콤하고 흥분되었다. 그가 시연의 움직임을 세세히 좇고 있을 때 시연이 조금씩 그의 몸을 더듬었다. 어깨를 짚었던 손을 등으로 밀어 넘기고 다른 손은 팔을 쓸었다. 아쉽게도 입술이 조금씩 내려갔다.
은성은 눈을 감고 그녀가 주는 감각을 느꼈다. 등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에 심장이 저렸다. 가슴을 어루만지는 손엔 숨이 턱 막혔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쓰러뜨리고 싶은 감정을 꾹 누르며 제 아랫도리를 달랬다.
스윽. 그녀의 손끝이 그의 유두를 스치는 순간 페니스가 울컥거렸다. 시연은 이제 그의 목덜미를 빨며 그를 흥분시켰다. 은성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들어 탁한 숨을 흘려보냈다. 당장 그녀를 어떻게든 하고 싶었다.
“괜찮나요…?”
낮게 묻는 말에 은성이 끙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녀는 움찔했지만 금세 그를 애무하는 데 집중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젖꼭지에 닿았다. 은성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힘줘 잡았다.
“아…!”
짧은 신음에 놀란 그가 손을 놓았다. 시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번에도 그의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혀로 할짝거리는 감각에 은성은 숨을 쉬기가 곤란해졌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그녀를 말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순간 페니스에 닿은 시원한 감촉에 그가 흠칫했다. 언제 풀렸는지 모르게 수건은 그의 하체를 감추지 못하고 펼쳐져 있었다. 시연이 그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너 뭐 하려는……!”
그녀는 그에게 말을 끝낼 시간을 주지 않았다. 손안에 갇힌 페니스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읏…!”
막지 못한 신음이 그에게서 터져 나왔다. 시연은 울컥거리며 계속 부푸는 그의 페니스를 양손으로 붙잡고 조심스레 아래위로 움직였다. 귀두에서 말간 물이 쪼르륵 흘렀다. 은성이 시연의 어깨를 꽉 잡았다.
“한번 해 볼게요.”
“나시연……!”
설마 그녀가 그럴 줄은 정말 몰랐다. 그녀가 이렇게 하도록 놓아둘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 그녀의 행동은 놀랍도록 민첩했다. 단숨에 페니스가 그녀의 고운 입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
은성은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밑동을 잡은 그녀가 기둥 앞부분을 꽤 힘껏 빨아냈다. 다른 손은 음낭까지 조물거렸다. 페니스를 문 입 속에선 키스할 때처럼 혀도 제법 움직였다. 바짝 곤두선 핏줄을 핥아 올라간 혀가 뭉툭한 귀두를 뜨겁게 빨아냈다.
은성은 신경이 뚝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미치게 좋아서 가슴이 폭발할 것 같았다. 그러나 제 성기를 빠는 시연을 계속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가 그녀를 제게서 떼어 냈다. 말도 못하게 구겨진 얼굴을 하고는 시연을 노려보았다. 놀라 벌어진 눈과 말간 액체를 묻힌 그녀의 입술에 눈살이 더욱 구겨졌다. 여태 그는 지금처럼 선정적인 장면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조금만 더 할…!”
그녀의 말을 무시한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화장대 위에 앉혔다. ‘꺅!’ 소리가 터지는 입술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그가 그녀를 끌어안아 미친 듯이 입술을 빨았다. 그녀의 목구멍 안으로 혀를 깊숙이 쑤셔 박았다.
“흡, 읍…!”
그녀가 곤혹스러워해도 부서질 것 같은 몸을 강하게 안고 온 욕심을 끄집어내 그녀를 제 안으로 빨아냈다. 저질스럽게 섞이고 부대끼는 혀 사이로 타액이 뚝 떨어졌다.
쭙!
마지막으로 강하게 입술을 빨아낸 그가 그녀의 브래지어를 풀었다. 브리프도 단숨에 벗겨 내 화장대 아래 아무렇게나 던졌다.
얼굴이 시뻘게진 시연이 울 것 같은 표정을 했지만 은성의 눈에 이젠 그런 것도 모두 욕정의 대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탐스럽게 솟구친 유방을 그가 욕심껏 그러쥐었다.
“아…!”
옅은 신음이 터지는 소리에 성기를 부풀리며 젖꼭지를 입 속에 머금었다. 반대쪽도 힘껏 그러쥐곤 마음대로 주물렀다. 손아귀에 잡히는 여린 유두를 짜듯이 비틀었다. 입으론 그녀의 유륜을 통째로 빨아내면서 유독 단단히 분노하는 젖꼭지를 이로 잘근 씹었다.
“흐읏… 읏!”
그녀가 놀라 고개를 젖혔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제게로 더욱 힘껏 끌어당겼다. 풍만한 가슴골에 얼굴을 묻고 시연의 가슴 냄새를 폐부 가득 들이켰다. 그녀의 엉덩이를 화장대 끝에 걸쳐놓고 다리를 벌려 여린 살에 페니스를 문댔다.
찐득거리는 살 사이로 파고드는 성기의 감촉에 모든 이성이 날아갔다. 그가 그녀의 아래로 얼굴을 내렸다. 양손으로 그녀의 다리를 혹독하도록 찢어 벌리고는 제 냄새를 묻힌 음부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혀끝을 단단히 세워 음핵을 굴리다가 살 전체를 세게 머금어 빨아냈다.
“하읏……!”
그녀가 그의 머리와 어깨를 붙잡고 바들바들 떨었다. 질구에 맞닿은 턱에 습기가 느껴졌다. 은성은 터지는 본능을 자제치 못했다. 그녀가 제 페니스를 머금는 순간 그는 오직 성적 욕망만 남은 남자일 뿐이었다.
쭈웁, 쭈우우웁!
작고 말랑거리는 살덩어리를 혀와 입술로 세차게 빨아냈다. 코를 음순 사이에 파묻어 좌우로 비볐다. 그녀의 보지 물이 제 얼굴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쿠퍼액이 아닌 정액이 요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가 손끝으로 클리토리스를 잡고 비틀었다. 혀는 음순을 벌려 핥아 내려가며 질에 닿아선 바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으흣…!”
그녀가 크게 발작했다. 하얀 다리가 그의 머리를 붙잡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그녀의 질벽을 더 깊게 헤집고 들어갔다. 혀를 푹 찔러 넣어 내벽을 엉망으로 휘둘렀다. ‘아아… 하아, 아읏……!’ 그녀의 신음이 그를 더욱 폭력적으로 만들었다.
욕망이 제어되지 않았다. 그는 이제 본능대로만 날뛰었다.
찔꺽, 찌걱.
질 안을 헤집는 소리와 그녀의 신음이 그의 흥분을 더욱 부추겼다. 클리토리스를 꼬집어 당기며 그가 그녀의 질 입구를 세차게 빨아냈다. 주르륵 떨어지는 애액을 받아 마신 그가 몸을 일으켰다.
흐느적거리는 시연을 끌어안은 그가 질구에 페니스를 맞추고 단숨에 힘 있게 밀어 넣었다. 푸욱! 이미 혀로 벌려놓은 질벽은 거대한 기둥의 침입에 거부 없이 벌어졌다. 절반쯤 밀어 넣은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세게 움켜쥐고는 허리를 힘 있게 쳐올렸다.
퍽!
“하악!”
소리를 내지르는 그녀를 꽉 안고 그가 완벽히 맞붙은 음부를 또다시 퍽 찧었다. 반쯤 빠졌던 페니스가 붉은 질 주름을 가혹하게 벌리며 끝까지 들어가 속을 퍽 쑤셨다.
“하윽…!”
그녀의 입에서 연신 신음이 쏟아졌다.
퍽, 퍽, 퍼퍽!
그가 그녀의 질을 사정없이 타격했다. 검붉은 핏줄이 얼기설기 얽혀 올라간 거대한 기둥이 질척한 물을 흘리며 좁은 구멍으로 계속 사라졌다.
은성은 지금 자신이 누구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 잊었다. 이성이 끊어진 그는 여태 억누른 본능을 전부 쏟아 내기라도 하듯이 그녀 안에 자신을 뜨겁게 쏟아 넣었다.
퍽, 퍽, 푹!
질에 꽂혀 들어간 기둥이 본모습을 완전히 숨겼다. 그가 털이 수북한 제 음부를 그녀의 음부에 강하게 비볐다. 하얗기만 하던 시연의 아랫도리 살에 빨간 생채기가 났다.
항상 또렷하기만 하던 시연의 눈빛은 이미 힘을 잃고 흐려져 있었다. 그는 시연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아까완 달리 도망가지도 못하는 혀를 뽑을 것처럼 강하게 빨아내며 다시 페니스로 그녀의 질벽을 거칠게 갈랐다.
푸욱!
“웁…!”
키스에 막힌 그녀의 입술에서 탁한 신음이 샜다. 그녀의 입술을 빨며 젖가슴을 주무르며 그가 그녀의 성기에 제 성기를 막무가내로 박았다. 질 내벽이 갈라졌다가 페니스 살갗을 잡아 뜯는 감촉에 그의 정신이 더욱더 멀어졌다.
그가 그녀의 질 속에 페니스를 박아 놓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땀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요도를 타고 정액이 올라왔다. 펄펄 끓는 욕망이 멈추지 못하고 그대로 분출했다.
귀두 구멍에서 솟구친 정액이 화장대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그녀의 음모와 음순, 성기 곳곳에도 그가 뿌린 정액이 희뿌옇게 묻었다.
시연은 그에게 안겨 거의 실신하다시피 뻗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쏟아부은 은성은 여전히 목말랐다.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에 눕혔다. 허벅지를 잡아 제 정액으로 엉망이 된 그녀의 음부를 펼쳤다. 새하얀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다리 힘 빼!”
험악한 말이 튀어나왔다. 시연이 깜짝 놀라 움찔했다. 은성은 시연의 표정도 보지 않고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힘이 꽉 들어간 질구를 그가 빨았다. 입술을 세게 모아 주름 사이에 고인 애액을 빨아내고 혀로 제 정액을 핥아 먹었다. 음순 사이 끈적한 골을 핥아 안쪽에 고인 물까지 모조리 목구멍으로 넘겼다.
“으흣…! 하, 하지 마……!”
뒤늦게 거부하는 그녀의 저항은 그에게 무의미했다. 그는 그녀의 음부에 묻은 정액 전부를 남김없이 다시 거둬들였다. 손으로 소음순을 펼쳐 벌린 그가 확인이라도 하듯 혀로 속살을 싹싹 핥았다.
시연은 저릿저릿한 감각에 신음을 쏟으며 눈물을 떨궜다. 좀 전엔 그가 너무 갑작스레 들이닥쳐 정신없이 받아 내기만 했다. 거친 몸짓에도 한 번 받아들였던 몸은 금방 욕망에 젖어 눅진해졌다.
그가 주는 쾌락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음란함에 물든 여자처럼 그의 입술을 느끼고 쾌감을 즐겼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부끄러웠다. 은성이 제 가장 수치스러운 곳을 펼쳐 환히 들여다보고 빨고 있다는 생각에 자꾸 질구가 조여들었다. 그 모습을 들킬까 봐 숨이 막혔다. 클리토리스와 음순을 핥는 입술에 막지 못한 쾌감이 밀려들었다.
“앗… 흐읏… 읏…!”
자칫 이런 행위를 즐기는 여자로 비치는 건 싫은데 입에선 멋대로 교성이 튀어나왔다. 그가 차츰 그녀의 위로 핥아 올라왔다. 음모를 혀로 헤집어 입술에 물더니 배꼽에선 이를 세워 살을 긁었다.
“으응…….”
그의 입술이 닿는 모든 곳이 홧홧이 달아올랐다. 유방을 빨고 젖꼭지를 핥아 올라온 그가 결국 그녀의 입술에까지 키스했다. 쪽, 짧게 입을 맞춘 그가 협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꺼냈다.
그는 입술에 문 콘돔을 쭉 찢었다. 그녀를 날카롭게 내려다보며 콘돔을 찢는 그에 시연의 호흡이 콱 막혔다.
“그, 그건 왜…….”
허리를 세워 페니스에 콘돔을 끼우며 그가 그녀를 흘리듯 보았다.
“앞으로 피임은 내가 해. 약 끊어.”
단숨에 그가 그녀를 뒤돌려 동물처럼 허리를 세워 올렸다. 그녀의 위로 단단한 몸이 겹쳐 왔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이물감이 느껴지는 그의 페니스가 밀려들었다. 그가 그녀의 귓불을 입에 머금고 속삭였다.
“대신에 할 땐 막지 말고 제대로 벌려.”
마른침을 삼키는 그녀의 질벽이 쩌벅쩌벅 갈라졌다. 그의 굵은 페니스가 또다시 그녀를 가르고 주름 사이를 꿰차며 들어왔다.
푹!
그녀를 꿰뚫은 그가 뜨겁게 들이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가슴을 움켜쥐고 허리를 내리치며 입술을 먹어 치웠다.
시연은 배 속으로 깊숙이 꽂혀 들어오는 페니스에 쾌감이 들끓었다. 질벽이 조여들고 심장이 조였다. 그가 빠는 입술이 아릿하고 짜이는 가슴이 저렸다.
그가 단순히 본능에 하는 행위에도 감각은 정제되지 않고 솟구쳤다. 자신이 이렇게 저급한 여잔 줄 몰랐는데 결혼하며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박혀 들고 질을 찔러 대는 게 좋았다. 그에게 꿰뚫려 있으면 잠깐이나마 사랑받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꾸만 그런 감정에 휩싸이면 안 되는데, 혼란스러워졌다.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꿈같은 순간이 계속 이어지길 바랐다.
푹, 푹!
“하윽, 아읏…… 오빠…!”
탁한 신음 같은 대꾸가 그녀의 귓등을 데웠다.
“하아, 시연아…….”
어지러운 숨결이 부부의 침실을 에워쌌다. 성기가 꽂히는 소리와 여자의 신음이 멈추지 않았다. 진득하고 습한 공기가 침실을 가득 메웠다.
* * *
어지러웠던 밤이 지나가고 시연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친 차림이었다. 실눈을 뜨고 주변을 살피는 그녀에게 그가 재킷을 입으며 차갑게 툭 내뱉었다.
“다음엔 그러지 마. 또 그러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게 무슨….”
대꾸하려 했지만 방금 일어난 시연의 목소리가 막혔다.
“식탁에 간단히 아침 차려 놨으니까 먹고 가.”
그는 그대로 방을 나가 버렸다. 혼자가 된 시연은 잠시 후 몸을 추슬러 일어나 앉았다. 어제 그와 두 번이나 몸을 섞은 것까진 기억이 났다. 그런데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보아하니 자신은 그대로 그의 침대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럼 그는? 그는 제 옆에서 잤을까? 옆자리를 보았지만 정돈한 것인지 자신이 누웠던 자리 외에는 말끔했다.
시연이 후다닥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가 입혔는지 자신이 입었는지 알 수 없는 속옷이 제 몸에 걸려 있었다.
“화장대!”
순간 급박했던 첫 정사가 떠오른 그녀가 화장대를 보았다. 어제 그곳에서 느낀 수치심과 쾌감이 또다시 그녀의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혼자지만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급히 화장대 주변을 살폈다. 그녀의 옷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화장대 위도 아래도 깨끗했다.
시연이 울상을 지었다.
어제 그곳에서 자신이 쏟았던 액과 신음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미쳤어…….”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부끄러운 동영상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런데 그걸 해 보기도 전에 자신은 그가 주는 쾌락에 울부짖었다.
“너 정말 왜 이러니…….”
자신을 탓하는 말이 연신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녀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은성의 방을 나섰다. 방문을 나서기 전 그가 갔는지 한 번 더 살핀 후 빠르게 제 방으로 튀어 갔다.
시연은 욕실에서 제 몸을 보고 또 한 번 좌절에 빠졌다. 기억도 나지 않는 흔적이 몸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입술은 퉁퉁 부었고 목덜미는 흡사 흡혈귀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멍이 들어 있었다. 가슴 곳곳은 손자국이 선명했고 유두는 입술처럼 부풀어 있었다. 아랫도리를 내려다본 그녀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엔 그러지 마. 또 그러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그 말을 들을 땐 무슨 의미인지 몰랐는데 제 몸을 보니 조금 알 것 같았다.
“대체 이런 게 언제 생겼지?”
그런데 신기한 건 이렇게 멍이 들 정도인데 아팠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깔려 자신이 상스럽게 울었던 것만 생각났다.
그녀가 울상이 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이러고 학교엘 어떻게 가…….”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제 몸을 가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씻기 위해 얼른 물을 틀었다. 물소리인지 부끄러움의 흐느낌인지 구분하기 힘든 소리가 마구 뒤섞여 흘렀다.
* * *
“뜨거운 찌개를 계속 맛보다가 데여서 이렇게 됐다고?”
보원이 연신 시연의 얼굴을 살피며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시연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응! 나도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렇더라고.”
“흠…… 그런데 갑자기 웬 스카프야? 너 이런 거 잘 안 하고 다녔잖아.”
이번엔 보원의 눈길이 목덜미를 가린 스카프에 닿았다.
“가, 감기가 좀 걸렸나 봐! 이러고 있으면 금방 낫는다고 들은 것 같아서….”
“여름 감기는 멍멍이도 안 걸린다는데 너 요즘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혹시 남편이 늦게 들어와서 막 밥 차려 달라고 그래?”
“아, 아니야! 안 그래! 우리 서로 얼굴 마주칠 일도 잘 없는걸!”
절절매며 변명하기 바쁠 때 시연의 전화기가 울렸다. 시연은 반가운 눈초리로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시연이 통화하는 사이 보원은 벤치에 앉아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이따가 찾아뵈려고 했었어요. 왜 말씀 안 하셨어요?”
따뜻한 웃음이 전화기를 넘어왔다.
-그런 건 남편이 말해 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둘이 잘 얘기했지?
박 교수는 시연에게 미안하다면서도 전혀 미안하지 않은 투로 말했다.
“네, 제가 얼마나 놀랐다고요.”
-그래, 그래. 그나저나 신혼이라 보내 주기 싫을 텐데 남편도 마음이 참 넓다. 나는 너 일찍 결혼해서 사실 걱정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어.
박 교수의 말에 시연은 몰래 쓴웃음을 지었다. 조목조목 다 맞는 말이라 그녀의 가슴이 더 저렸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제가 찾아뵐게요.”
-그럴 필요 없어. 너 전공 수업도 바쁠 텐데 중간중간 필요한 건 메시지로 공지하니까 그거나 빠트리지 말고 잘 챙겨. 시연이 넌 워낙 꼼꼼해서 걱정 안 하지만.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통화를 끊은 시연이 평소와 다른 보원의 가방을 살피며 벤치에 앉았다. 오늘 만났을 때부터 무거워 보이는 가방에 신경이 쓰였다. 보원이 먼저 통화 내용을 물었다.
“무슨 내용인데 놀랐대?”
“참, 나 구호 활동 갈 수 있게 됐어.”
“뭐? 어떻게?”
“남편이 동의해 줬어.”
“정말이야?”
“응.”
보원은 시연의 설명을 듣곤 제 일처럼 기뻐했다. 그러더니 곧 슬픈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집도 나오고 너도 가면 난 이제 혼자 어떻게 지내지?”
“집을 나와? 너 결국…!”
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드디어 사고를 쳤어. 설마 이제 와서 승률이 방을 못 내준다느니 하진 않겠지?”
때마침 승률이 저 멀리서 헐레벌떡 뛰어왔다. 두 여자 사이에 놓인 가방을 보더니 단번에 인상을 구겼다.
“봐, 쟤 표정. 나 이제 어쩌지? 시연아, 정말 미안한데 혹시 나 너희 집에 며칠만…!”
“집 나왔어?”
승률이 보원의 말을 가로막고 커다랗게 물었다. 보원이 눈을 표독스레 떴다.
“그래! 나 너 아니어도 갈 데 있…!”
“내가 시연이 집은 안 된다고 했지?”
“…어?”
“넌 애가 왜 기억을 못 해?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방은 걱정하지 말라고.”
“그, 그랬지. 그래도 나는 행여나… 해서… 좀 미안하기도 하고….”
승률이 보원의 가방을 낚아채 어깨에 멨다. 보원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뭐 하는 거야?”
“가.”
“어딜?”
“그냥 나 따라와.”
보원과 시연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한 번 마주친 후 승률을 따라나섰다. 그녀들 사이에 있던 커다란 가방이 승률의 어깨에선 유독 가벼워 보였다.
* * *
버스에서 내린 호텔 앞에서 보원과 시연은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아니, 휘황찬란하고 끝이 보이지 않는 높다란 건물에서 그들의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희들 왜 그래? 입 좀 다물어. 쪽팔려.”
“야, 너 여기 맞아? 저기, 저쪽 아니고?”
승률의 타박에 보원이 반대쪽 낮은 건물을 가리켰다.
“분명 작은 호텔이라며? 그럼 여기가 아니라 저쪽으로 가야지!”
“저건 여관 아니냐?”
“네 눈엔 저게 여관으로 보여?”
소리를 친 보원이 국내에서 손꼽히는 유명 호텔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걸음에 승률이 보원의 등을 멈춰 세웠다.
“어디 가?”
“여긴 아닌 것 같아. 나 같은 서민이 가는 곳이 아니야. 민폐인 건 알지만 난 아무래도 시연이네….”
“이미 말해 놔서 안 돼!”
“뭐?”
보원의 말을 무시한 승률이 가방을 고쳐 메고 두 여자를 떠밀었다. 얼결에 보원과 시연이 호텔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승률은 프런트에서 능숙하게 키를 받아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그런 승률의 모습을 보원이 흘깃거리며 시연의 귀에 속삭였다.
“여기서 보니까 쟤 좀 달라 보이지 않아?”
“응. 뭔가 어른 같아.”
“그렇지? 나만 그렇게 보이는 거 아니지?”
“여기야. 들어와.”
익숙하게 문을 연 승률이 방에 카드키 한 장을 꽂았다. 다른 한 장은 시연에게 내밀었다.
“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
“내가?”
“응. 난 와서 벨 누르면 되니까 네가 갖고 있어.”
“고마워.”
그사이 보원은 서울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창가로 가 탄성을 흘렸다. 승률과 시연이 그 옆에 나란히 섰다.
“내가 정말 여길 써도 돼?”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방이었다. 티브이에서 봤던 스위트룸은 아니지만 층이나 전망을 봐도 아무 방이나 준 건 아니었다.
“그래, 편하게 써. 그렇다고 너무 오래 있을 생각 하진 말고.”
보원이 갑자기 승률을 홱 돌아보았다.
“너 부모님껜 뭐라고 말했어? 정말 인사도 안 드려도 돼? 그리고 너 내가 집 나온 건 어떻게 알았어? 난 시연이에게만 말했는데.”
“우리 부모님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만 해. 지금도 괜찮고. 그리고 너 집 나온다고 했었잖아. 이렇게 커다란 가방 들고 있는데 어떻게 그걸 몰라?”
“하긴… 그런가?”
“그래. 그리고 어쩔래? 지금 다 같이 인사하러 갈까? 부모님이 너 불편할까 봐 일부러 생각해서 그러신 건데 네가 원한다면 뭐 난 상관없어.”
보원이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난 괜찮아. 부모님께 정말 감사하다고 말만 전해 줘.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겠다는 말도 함께.”
그제야 보원의 입술에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시연이 승률에게 미소 지었다.
“승률아, 고마워.”
“네가 뭘 고마워?”
“그래도. 아무리 친구라도 쉽지 않은 일인데.”
“됐어.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럼 둘이 잠깐 둘러보고 있어. 난 가서 필요한 것 좀 더 챙겨올게.”
“응, 고마워!”
대답하는 보원의 목소리가 한층 밝았다. 시연은 지갑을 꺼내 가진 돈을 모아 건넸다.
“얼마 되진 않지만 보태 써.”
“아니야! 나 사실은 이런 날을 위해서 모으고 있던 돈이 있어. 그거 털어서 나왔거든. 걱정하지 마.”
보원은 밝게 웃었지만 시연은 걱정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래도 혼자 지내다 보면 돈 들어갈 일이 생각 외로 많아. 그러니까 받아 둬.”
꾸역꾸역 내미는 손길에 보원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미안한 얼굴로 돈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시연아. 난 이럴 때 보면 네가 참 신기해. 어떻게 집을 그렇게 쉽게 나오느냐고 묻지도 않고, 다 이해한다는 얼굴을 하고 말이야.”
“아니야, 누구나 완전히 털어놓을 수 없는 일이 있잖아. 그리고 우리가 어린애도 아니고 이젠 마음먹으면 독립도 할 수 있는 나이니까. 난 너 응원해. 행여 지금이 틀린 결정이라 하더라도 한 번쯤은 일탈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시연은 제 마음에 부는 바람을 보원에게 빗대 말했다. 어쩌면 자신이 하지 못했던 것을 보원이 대신 하기를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염려는 하지만 응원한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따뜻하게 짓는 웃음에 보원이 눈물을 글썽였다.
“왜 울어. 씩씩하게 지내면 되지.”
“응.”
시연은 잠시 친구를 다독인 후 함께 필요한 물건을 사러 나갔다. 그러나 보원이 지갑을 두고 나와 엘리베이터에서 헤어졌다.
“금방 갈게! 먼저 가 있어!”
뛰어가는 보원을 쳐다보며 시연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활기를 찾아 다행이었다. 시연이 홀로 탄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하강했다.
* * *
QG호텔에 도착한 은성이 빠르게 차에서 내렸다.
“한 비서님은 바로 회사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아닙니다, 기다렸다가 모시고 함께 가도 괜찮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은율에게서 전화가 왔다. 은율의 상황은 보고 받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연락할 줄은 몰랐다.
“들어가 일 보세요.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한 비서를 보내고 은성은 군더더기 없는 걸음으로 곧장 라운지로 향했다. 힘들었던 미팅의 피로를 지울 새도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런 일은 부지기수로 있었다.
은성이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문이 닫혔을 때였다. 맞은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시연이 내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쪽으로 가면 되나?”
조심스레 떼는 발걸음엔 불편함이 가득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땐 몰랐는데 혼자 있으니 화려한 주변과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괜스레 제 방 옷장 구석에 있는 원피스가 생각났다. 예전에 언니가 한 번 입곤 가지라며 준 옷이었다. 은성과 처음 만났을 때 언니가 입었던 옷이기도 했다.
그녀가 머리를 젓자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스치며 나부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은성과 결혼한 지금 언니 생각이 나면 죄책감부터 밀려들었다. 머릿속을 환기한 그녀가 시선을 또렷이 했다.
“편의점은 이쪽이 맞는 것 같은데…….”
또각또각, 또각또각. 그때 유독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시연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시연의 시선에 유려하게 차려입은 한 여자가 보였다. 늘씬한 몸매가 드러난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붉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시연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뾰족한 힐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그 울림이 시연에게까지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은색 반짝이는 구두를 신은 여성이 지나가자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시연도 잠깐 그녀를 쳐다봤으나 이내 눈길은 다른 것에 머물렀다.
“어… 귀걸이…….”
시연이 허리를 숙여 귀걸이 한 짝을 집어 들었다. 잘은 모르지만 값비싼 보석이 박혀 아무나 할 법한 액세서리는 아니었다. 시연은 혹시나 싶어 붉은 머리 여성을 뒤쫓았다.
“저 혹시 이거…….”
시연의 말에 그녀가 돌아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귀걸이에 여성 옆에 선 남자의 얼굴이 먼저 구겨졌다.
“이거 어디서 났습니까?”
“네?”
어쩐지 추궁하는 듯한 말투에 시연이 놀라 되물었다. 남자가 시연의 손에서 귀걸이를 뺏듯이 가져갔다.
“이거 어디서 났느냐고요!”
“이 보세요. 전 지금 이걸 주워서….”
“됐어요.”
간결한 말투가 남자와 시연의 승강이를 뚝 잘랐다. 여성의 시선이 시연의 얼굴과 차림을 한 번 훑었다.
“주웠으면 그쪽 해요.”
“네?”
그녀는 이내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남자 또한 조금 매서운 눈치지만 추궁을 멈추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시연이 그들을 붙잡으려 했으나 엘리베이터는 사람들을 태우고 곧장 상승해 버렸다.
“뭐야…….”
허탈한 심정만 토로하며 시연은 일단 귀걸이를 가방에 넣고 발길을 돌렸다.
* * *
은율의 등장에 은성이 자리에서 잠깐 일어났다가 함께 앉았다. 문 실장은 은성에게 짧게 인사만 한 후 자리를 비켜 주었다.
“잘 지냈어?”
“언제 들어오셨습니까?”
딱딱한 은성의 말투에 은율이 얼굴을 찡그렸다.
“꼭 그렇게 말해야겠니?”
“본사 이사님이신데 예의를 차리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연을 끊은 건 너야. 우리가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존중해야죠.”
풀리지 않는 은성의 태도에 은율이 혀를 찼다.
“결혼 생활은 어때? 어린애 데리고 사니 좋아?”
“그런 걸 물으려고 미국에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은율이 테이블에 팔을 괴고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헤어스타일부터 표정, 꼿꼿이 세운 자세를 훑어 내려가는 시선이 예리했다.
“살이 좀 붙었나? 애기가 음식을 꽤 하나 보네. 입맛 까다로운 널 살찌울 정도면. 지금 보기 좋아.”
“전 다른 할 말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왔습니다만.”
입술을 삐딱하게 끌어당긴 은율이 자세를 바로 했다. 가방에서 귀걸이 한 짝을 꺼냈다.
“이거 알지? 아버지가 내 생일에 사 주신 귀걸이. 내가 이걸 얼마나 아끼는지도 말이야. 이걸 한 짝 잃어버렸어.”
“언제 어디서 잃어버린 건지 말씀해 주신다면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누가 가지고 있는 줄은 알아. 아까 걔가 그걸 가지고 가는 모습을 봤거든. 그런데 못 불렀어.”
“준 것이로군요.”
“아니, 내가 아는 애라서.”
“한국에 그걸 줄 만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을 줄 알았는데 있더라고. 나시연이라고. 너도 잘 알지?”
은율이 들릴 듯 말 듯 웃곤 종업원이 내려 주는 커피 향을 맡았다. 은성의 표정이 굳은 것과 대조되게 그녀의 행동은 가볍기만 했다.
“커피 마셔. 나 여기 커피 마음에 들더라.”
“시연일 만나셨습니까?”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만났어. 난 처음엔 걔가 아닌 줄 알았어. 벌써 이런 델 드나들 줄은 몰랐거든.”
은율의 행동은 평소완 달리 시종일관 새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은성은 예상치 못한 말에 애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이사님 그렇게 가볍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네요.”
달깍, 컵 받침에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요란했다. 은율이 태도를 바꿔 딱딱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온 가족의 반대를 무릎 쓰고 한 결혼이 얼마나 잘 흘러가는지 구경은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런 구경 하러 바다 건너오시고, 요즘 회사 한가한가 봅니다.”
은율의 날카로운 손톱이 주먹 쥔 살을 파고들었다.
“때론 회사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법이니까, 동생아.”
“바쁜 사람 불러내서 시답잖은 소리나 할 거면 오랜만에 온 서울 구경이나 하다 돌아가십시오.”
은성이 더 할 말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율의 가라앉은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인사 후 발을 떼려던 은성이 깜빡 잊었다는 듯 말했다.
“한 짝뿐인 귀걸이는 필요 없으니 곧 돌려 드리겠습니다.”
* * *
씻고 나온 시연이 서둘러 옷장으로 뛰었다. 집에 오자마자 낮에 흘린 땀부터 씻을 생각에 그만 속옷을 깜빡했다. 평소엔 제 방이라도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브리프와 브래지어를 입은 시연이 편한 티셔츠를 꺼내려 옷장을 뒤적였다. 그런데 똑똑 소리와 동시에 방문이 열렸다.
“나시연.”
은성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꺄!”
시연은 너무 놀라 아무 옷이나 꺼내 몸을 가렸다. 그러나 다 펴지지 않은 옷은 그녀의 가슴만 겨우 가렸을 뿐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은성이 당황해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시연의 물기 머금은 하얀 살결에 잠시 머물렀다.
“그, 금방 나갈게요…!”
“거실에서 기다릴게.”
시연의 말에야 그는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방문을 닫고 나온 은성이 소파로 향하던 걸음을 돌려 냉장고로 향했다. 차가운 물을 들이켜고야 다시 거실로 걸어갔다.
시연은 옷을 다 입었지만 방을 나서며 머뭇거렸다. 그와 두 번이나 몸을 섞었는데도 속옷 차림으로 마주치자 어쩔 줄 몰랐다. 같이 사는 동안엔 이런 일이 언제든 생길 수 있는데 그럴 때마다 소리를 지르는 건 무례였다.
그녀가 조심스레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신 줄 몰랐어요. 일찍 온다고 말씀해 주셨으면 소리는 안 질렀을 텐데…….”
“괜찮아. 내 실수였어.”
“그런데 무슨 할 말 있으세요?”
은성이 입을 떼려다 잠깐 뜸을 들였다. 해야 할 말 대신 무슨 일로 호텔에 갔느냐는 질문이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 했다.
“낮에 혹시 QG호텔 갔었어?”
“그건 어떻게 아세요?”
“거기서 40대 여성과 마주쳤어?”
“40대 여성……이면 누굴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골똘히 생각하던 시연의 머릿속에 귀걸이를 주었던 붉은 머리의 여성이 떠올랐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있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40대까진 생각지 못했기에 머리를 저었다.
“붉은 머리에 화려한 옷차림인데 기억 안 나?”
붉은 머리라는 말에야 시연이 눈을 크게 떴다.
“만났어요! 그런데 은성 씨가 그걸 어떻게 아세요?”
“너 기억 안 나?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을 텐데. 왜, 파티에서 소혜와….”
말을 하던 은성이 입을 다물었다. 결혼 생활 동안 소혜 얘기는 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언니와 함께……라고요?”
“아니야. 잠깐만 기다려 봐.”
은성은 예전 얘기를 꺼내는 대신 휴대전화를 꺼내 은율의 사진을 찾아 보여 주었다.
“맞아요. 이 분 만났어요. 그런데 40대라니 생각보다 꽤 나이가 많으시…….”
이번에 시연은 무언가 생각난 듯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은성이 묻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낮에 마주친 여성은 은성의 가족이었다. 소혜와의 약혼 관계로 시연은 가족과 함께 관련 파티에 참석한 적 있었다.
은율은 은성보다 나이가 꽤 많았다. 그때 열세 살 차이라고 들었으니 지금은 40대가 맞을 터였다.
“제가 미처 못 알아뵀네요…….”
자신을 탓하는 말부터 튀어나왔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래도 기억했어야 했는데….”
“혹시 누님이 너한테 무슨 말 했어?”
“무슨 말이라뇨?”
문득 귀걸이를 떠올린 시연이 벌떡 일어났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곤 서둘러 방으로 가 귀걸이를 가져 왔다.
“이걸 떨어뜨리셨는데 가지라고 주셨어요.”
귀걸이는 은율의 것이 맞았다. 시연은 다시 방으로 가 깨끗한 손수건을 가지고 나오더니 귀걸이를 잘 담아 내밀었다.
“주시긴 했는데 저한텐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한 짝이라 돌려 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은성이 귀걸이를 받아 들었다.
“그것 외 다른 말은 없었어?”
“네. 알았으면 인사라도 똑바로 했을 텐데 죄송해요.”
“됐어. 예전에도 제대로 인사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기억해?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뜸을 들였다. 실은 은율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말이 계속 입 안에 맴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이 호텔에 갈 일이 없는데 거긴 왜 갔을까. 누굴 만나러 간 걸까. 집에 오기까지 은율보단 그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시연이 깨끗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혹시… 절 만나러 오신…….”
“뭐?”
딴생각에 빠져 있던 은성은 시연의 말뜻을 금방 알아채지 못했다.
“그분께서… 그러니까 호칭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데… 은성 씨 누님이요…. 혹시 절 만나서 오신 건가 해서…….”
더듬더듬 어렵게 말하는 시연을 보자 그제야 은성은 정신이 들었다. 자책의 탄식이 새어 나왔다.
“시간 봐서 자리 만들게.”
그제야 시연은 긴장하면서도 조금 안도한 기색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런 그녀를 보며 은성이 듣지 못하게 한숨을 쉬곤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가 귀걸이를 손아귀에 쥐고 서둘러 제 방으로 들어갔다.
시연을 보며 가능하면 딴생각은 품지 않으려 했는데 힘들었다. 막 씻고 나온 발그레한 얼굴과 그녀만의 향기가 자꾸 본능을 자극했다. 해야 할 말이 있는 데도 시선은 나쁜 곳으로 먼저 흘렀다.
그가 옷을 거칠게 벗곤 욕실로 들어갔다. 밖에서나 안에서나 머릿속을 채운 시연의 모습을 물줄기에 씻어 내렸다. 가슴에서 감추지 못한 감정이 자꾸만 솟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