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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LA 그룹 사장 비서실 직원들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갔다.
“한 비서님, 저… 오늘 월차 좀…….”
“안 됩니다.”
거절하는 한 비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어렵사리 운을 뗀 김 비서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저 오늘 집안 제삽니다! 안 가면 호적 파이는 집안인 거 아시잖아요.”
“제 호적은 이미 파였습니다. 그러니 월차 따윈 꿈도 꾸지 마세요.”
한 비서가 매달리는 김 비서를 매몰차게 떼어 내고 바삐 걸어갔다. 지금은 김 비서의 거짓말에 동정할 시간도 아까웠다. 지은성이 사장으로 온 후 모든 게 바뀌고 있었다.
한국 HLA 그룹은 근무환경이 자유로우며 복지가 좋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지금은 직원들의 살은 근무 시간이 되고, 뼈는 곱게 갈려 매출이 되었다. 매출이 오른 건 좋았지만 사장은 만족이란 걸 몰랐다. 아이 달래듯 미미하게 인상된 급여조차 지금은 즐길 새가 없었다.
갑자기 늘어난 업무량에 직원들이 피로를 호소해도 한 비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지은성은 미친 인간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안하무인. 그래서 급격한 매출 상승이 이뤄지고 있어도 직원들의 얼굴은 초췌하기만 했다.
똑똑.
“한 비서입니다.”
“들어오세요.”
결재서류를 들고 사장실로 들어가는 순간이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한 비서는 여전히 입이 바싹 말랐다.
“지난주 매출 보고서입니다.”
“이리 주세요.”
처음 은성이 왔을 때 사장실은 허허벌판이었다. 예전 사장은 회사에서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물론 사장실에 머물면서 결재서류에 사인은 했다. 그러나 그는 정·재계 인사들과 놀러 다니기 바빴고 그래서 회사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러다 HLA 그룹이 한국에서 완전히 발을 빼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찰나 그룹의 후계자가 바다 건너 날아왔다.
처음엔 다행이란 생각이었다. 그래도 오래 발붙인 회사가 망하진 않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운 사장은 해도 해도 너무했다.
“이 매출표, 이거 누가 작성했습니까?”
날카롭게 날아온 질문에 한 비서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니까, 그건….”
“아닙니다. 정식 공문 작성하세요. 이번 달까지 여기 써놓은 매출대로 성과 못 내면 모두 사표 제출하라고 말입니다.”
“네?”
무섭도록 시린 눈빛이 한 비서를 관통했다.
“한 비서님은 이 보고서 어떻게 보십니까?”
“어… 지난주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수치가… 어느 정도 달성된….”
“사실 저는 목표치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한 주 만에 달성이 됐네요. 한 비서님은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네? …그게….”
띄엄띄엄 입술을 달싹이던 한 비서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저는 사실… 사장님께서 너무 높은 수치를 요구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요?”
“열심히 한다면… 물론 그 수치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한 주 만에는 불가능…하다는 게 제 소견입니다….”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한 비서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닙니다.”
“네?”
“그럼 한 비서님은 이 보고서가 잘못되었다는 걸 아시겠군요. 말하자면 눈앞의 쓴소리를 피하기 위한 허위 보고서라는 걸 말이죠.”
은성의 눈빛이 따갑게 내리꽂혔다. 한 비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담당자가… 실수한 것 아닐까요……?”
은성은 미간을 짙게 구겼다.
“한 비서님은 그렇게 직원들을 편들고 싶습니까? 그게 올바르다고 생각합니까?”
“죄송합니다!”
“지금 이곳에 회사를 살릴 생각을 하는 사람은 몇 없습니다. 저는 그중 한 명이 한 비서님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태도로는 절대 회사를 회생시킬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삐―
한 비서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는 와중 비서실 연결음이 울렸다. 은성이 전화를 연결했다.
-사장님, 나 사장님께서 찾아오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나 사장님? 나시환 사장님 말씀입니까?”
-네.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차도 준비해 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은 은성이 한 비서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이건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네, 알겠습니다.”
“참.”
바로 나가려는 한 비서를 은성이 붙잡았다.
“네, 사장님. 말씀하십시오.”
은성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졌다.
“나 사장님께서 찾아오신 건 혹시라도 제 아내에겐 함구해 주십시오.”
“네? …네!”
한 비서는 잠깐 뜸을 들였지만 이내 재빠르게 대답하곤 집무실을 나갔다. 이어 시연의 아버지 나시환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은성이 즉시 일어나 다가가며 인사했다.
“말씀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장인어른.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정중한 안내에 시환이 밝은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내가 일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제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두 분 모두 잘 계시지요?”
은성이 시환의 맞은편에 앉으며 안부를 물었다.
“우리야 무슨 일이 있을 게 있나. 자네가 시연이와 결혼하겠다고 찾아온 게 일이라면 가장 큰 일이었지. 하하.”
“너무 갑작스러운 데다 일을 급하게 진행해 당황스러우셨을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앞으로 제가 잘하겠습니다.”
대화 사이 노크와 함께 비서가 들어와 차를 내려 주었다. 시환이 사장실을 둘러보며 차를 마셨다.
“많이 바쁘다고 들었네.”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닌가. 요새 회사 일으킨다고 고생이 많지? 자네라면 잘 해내리라 믿어.”
“과찬이십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의례적인 대화가 오가고 잠시 고요가 찾아들었다. 넓은 사장실에 찻잔 내려두는 소리와 함께 낮아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찾아올 생각은 없었네만….”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요새 내가 하는 일이 많이 어려워져서 말이야…. 허허. 자네에게 이런 말 하려니 부끄럽구먼.”
“아닙니다, 장인어른. 제가 미리 챙겼어야 하는데 제 불찰입니다.”
“아닐세! 그런 말 말게! 자네 아니었으면 어쩌면 회사가 사라졌을지도 모를 일인 것을….”
은성은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곧장 휴대전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환이 차를 마시며 그 모습을 은근슬쩍 지켜보았다.
“이 실장님, 접니다. 전에 말씀드렸던 그 계좌로 지금 바로 송금 부탁합니다.”
“흠, 흠….”
멋쩍은 듯 헛기침한 시환이 차를 내려놓고 환하게 웃었다.
“이렇게 움직임이 빨라서야, 허허, 이러니 자네가 HLA 그룹의 후계자가 될 수밖에!”
전화를 끊은 은성이 잠깐 고개를 수그렸다가 들었다.
“장모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집사람? 집사람은 항상 똑같지. 아니지, 참. 요즘은 아주 살판이 났다네. 전엔 기력 없다고 쇼핑도 안 하더니 요즘은 백화점을 아주 활보하고 다녀. 이게 다 자네 덕일세. 집에 경사가 나니 아주 활기가 돌아.”
“다행입니다.”
은성은 시환의 말에 맞장구쳤지만 그의 가려진 눈빛은 차가웠다. 하나 남은 딸이 시집을 갔는데 그간 누구에게서도 자식을 걱정하는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시연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보는 말도 한마디 듣지 못했다.
“차가 아주 맛있구먼.”
허허허, 웃는 시환에게 은성이 말했다.
“따님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우리 시연이는 너무 건강해서 탈이지. 난 그 애가 크면서 잔병치레하는 걸 본 적이 없어. 하하.”
시환의 말은 틀렸다. 시연은 알레르기가 있고 몸살도 자주 했다. 감기라도 걸리면 열이 펄펄 끓는 건 기본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앞으로 혹시 아프기라도 하면 제가 못한 탓이겠군요.”
“에이,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걱정하지 말게. 우리 시연인 내가 아주 잘 알아. 언니와는 달라서 건강할 거야.”
“예, 그래야지요. 제가 아프지 않도록 잘 챙기겠습니다.”
“고맙네. 나는 언제나 자네만 믿네.”
“네, 장인어른.”
대답하는 은성의 입 안이 한약이라도 먹은 듯 썼다.
* * *
시연은 오늘 아파트까지 가지 않고 근처 상점에서 버스를 내렸다. 은성은 차를 사 주겠다고 했지만 만류했다. 운전면허도 없을뿐더러 학교와 집이 멀지 않아 버스를 타는 게 더 편했다.
“안녕하세요.”
시연이 밝게 인사하며 가게로 들어섰다.
“어서 와요. 못 보던 얼굴이네?”
“얼마 전에 이사 왔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곱게 인사하는 모습에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아휴,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인사성도 엄청 좋네! 앞으로 자주 와요!”
“네, 그럴게요.”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따라 주인아주머니의 시선이 같이 흘렀다. 물건을 고르는 시연의 뒷모습에 중얼거림이 따라붙었다.
“어쩜 저렇게 고운 얼굴이 다 있지? 눈도 크고 참 선하게 생긴 학생이네. 내가 아들이 있었으면 며느리 삼으면 딱 좋겠어.”
시연은 장바구니에 달걀도 담고 콩나물도 담았다. 아직 해 본 적은 없지만 은성에게 밥을 얻어먹었으니 오늘은 자신이 해 줄 생각이었다.
“김도 사면 좋겠지? 오빠는 집에서 밥 먹는 걸 좋아하니까 필요할 거야.”
타인이 있으면 은성에 대한 호칭에 신경 썼지만 혼자일 때 시연은 오빠라는 단어를 편하게 썼다.
혼잣말하며 식재료를 고르는데 장바구니에 갑자기 귤 한 봉지가 쑥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주인아주머니가 살갑게 웃었다.
“대학생이지? 오늘은 첫날이니까 서비스.”
“아, 고맙습니다!”
시연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뭘 이까짓 걸로. 앞으로 우리 가게 자주 와요! 매일 보면 더 좋고.”
“네, 자주 올게요.”
시연은 동네에 인심 좋은 분이 산다고 생각하며 물건을 계산하고 나왔다. 주인아주머니가 가게 밖까지 나와 손을 흔들었다. 시연은 다시 한번 허리를 꾸벅 숙였다.
“뭐 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시연이 길가를 쳐다보았다. 은성이 비상등을 켜고 정차해 있었다. 그는 이내 차에서 내리더니 그녀에게서 봉지를 가져가 뒷좌석에 실었다.
“타.”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놀랐지만 시연은 침착하게 조수석에 올랐다.
“뭐 산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지 그랬어.”
“그냥, 조금 샀어요. 그런데 벌써 퇴근하신 거예요?”
“왜, 싫어?”
“아, 아뇨! 이렇게 일찍 퇴근하는 건 본 적이 없어서….”
“내가 앞으론 일찍 올 거라고 말했잖아.”
참, 그랬었다. 그땐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는 정말 말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많이 피곤하시죠?”
그와 단둘이 차를 탄 적이 별로 없어 시연은 어색함을 달래려 말을 걸었다.
“안 피곤해. 일찍 퇴근했잖아.”
“아, 맞다. 그랬지.”
그러나 대화는 금방 어색하게 끝났다. 조금 어두운 지하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시연은 은성을 슬쩍 훔쳐보았다. 그는 차에 둘만 있어도 조금도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화살처럼 날아온 질문에 시연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뇨! 저 오빠 안 봤는데요!”
급한 마음에 호칭을 틀린 것도 알지 못했다. 시연을 잠깐 쳐다본 그가 주차에 집중했다. 부드럽게 주차선 안에 들어간 차가 멈춰 섰다. 시연은 서둘러 차에서 내리려 했다.
“나시연.”
나지막한 목소리에 차 문에 닿은 그녀의 손이 멎었다. 시연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네?”
그는 시연의 눈망울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또 먼저 어색함을 느낀 시연이 시선을 회피하려 할 때 커다란 손이 넘어왔다.
그녀의 머리에 내려앉은 손이 길지 않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시연은 뻣뻣이 굳은 채 눈만 깜빡였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했….”
“그런 거 없어.”
은성은 그녀가 한 말실수를 알려 주지 않았다. 그걸 말하면 그녀는 앞으로 같은 실수를 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영문도 모른 채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는 시연은 정말 귀여웠다. 아니 이젠 마냥 귀엽기만 하진 않았다.
시연에게 친구는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있는 게 당연한데 그게 싫다는 걸 한국에 와서 확실히 깨달았다. 모두의 반대를 무릎 쓰고 이곳에 온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녀는 이제 귀여운 아이가 아니라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잠깐 난감해하던 시연이 결국 그의 손을 피했다.
“다 왔어요.”
은성이 먼저 내린 시연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짐을 꺼내는 그녀에게서 봉지를 가져가 앞서 걸었다.
시연은 그를 따라가며 몰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콩닥콩닥. 그가 만진 머리카락이 떨리기라도 했을까 걱정이었다. 그를 대하며 어린 티는 내기 싫었는데 작은 터치에도 심장은 요동부터 쳤다.
“후…….”
깊게 심호흡할 때 그가 뒤돌아보았다.
“빨리 와.”
“네!”
시연이 후다닥 뛰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보다 앞서 내렸다. 또 빨리 오란 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서둘러 현관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머리 꼭대기 위에서 낮은 타박이 내려왔다.
“아직 지문 등록 안 했어?”
“오, 오늘 하려고 했어요.”
그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에 장본 물건을 내려놓곤 침실로 갔다.
“가서 씻고 와.”
“네. 은성 씨도 씻으세요.”
짧게 대꾸한 시연이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후우…….”
그녀가 또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는 뜻 없이 한 말인데 대꾸하고 보니 어째 어감이 좀 이상한 것 같았다. 괜히 혼자 어색해 볼이 붉어졌다. 그러나 시연은 금세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갔다. 그가 씻을 동안 저녁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어?”
그런데 어느 틈에 그녀보다 먼저 옷을 갈아입은 은성이 부엌에 서 있었다. 그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안 씻어?”
“지금… 뭐 하세요?”
“보면 몰라? 정리하잖아.”
그녀가 서둘러 그와 싱크대 사이로 파고들었다.
“제가 할게요. 은성 씨는 가서 좀 쉬세요. 종일 일 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저녁 준비는 제가….”
“됐어. 넌 공부나 하라고 내가 전에 말했지?”
이번엔 그가 시연을 뒤로 잡아 뺐다. 하지만 시연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다시 은성을 옆으로 살짝 밀었다.
“공부는 알아서 잘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건 제가 사 온 거예요. 은성 씨가 해 준 음식 먹고 싶지 않아요.”
단지 급한 마음에 서둘러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순간 은성의 움직임이 멎었다. 시연은 자신이 말실수한 것을 깨닫곤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그러니까, 그게… 은성 씨가 해 준 음식이 싫은 게 아니라….”
“알아.”
“네?”
그가 큰 키로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해 주는 음식이 싫은 게 아니라, 나한테 미안한 거잖아.”
“…….”
까맣게 내려다보는 시선은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조금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가 양손으로 그녀를 싱크대에서 부드럽게 밀어냈다.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안다고. 그러니까 설명 안 해도 돼. 그리고 넌 지금 다른 할 일이 있어.”
“그게… 뭔데요?”
그의 기다란 검지 끝이 현관을 가리켰다.
“지문.”
딱딱한 음성이 그녀에게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시연은 곧 조그맣게 툴툴대며 현관으로 향했다.
“내가 사 온 건데… 내 맘을 자기가 어떻게 알아? 오빠가 내 맘을 그렇게 잘 알아요?”
“뭐라고? 잘 안 들려. 크게 말해!”
제법 소리 높인 목소리에 그녀가 움찔했다.
“아니에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시연은 그가 말꼬투리를 잡을까 봐 이어 큰 소리로 혼잣말했다.
“보자, 지문 등록 순서가…. 아하!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
실상은 헤매면서 잘 되어가는 척했다. 생각보다 설정이 잘되지 않자 어느덧 시연의 이마에서 땀이 솟았다. 그가 들으라고 하던 혼잣말은 점점 진짜 혼잣말이 되었다.
“이게… 여기서 이렇게 하면 된다는데, 아니 왜 안 되지?”
삐비비빅!
순간 고막을 울리는 도어록 소리에 시연이 깜짝 놀랐다. 흘깃 부엌 쪽을 보았지만 다행히 은성은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안도의 숨을 내쉰 그녀가 다시 도어록에 집중하려 할 때였다.
“비켜 봐.”
또 듣기 싫은 음성이 머리꼭지에서 떨어졌다. 시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쩔 수 없이 발은 뒤로 슬금슬금 물렸다. 역시나 그사이 어김없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잘 보면 간단한데, 넌 꼭 어림짐작으로 하니까 실수하는 거야. 내가 전부터 말했지? 순서를 똑바로 보라고.”
[너 문제 똑바로 읽었어? 아까 푼 문제랑 다를 게 하나도 없잖아. 이걸 대체 왜 못 풀어? 나시연, 너 어디로 도망쳐? 이리 안 와?]
그에게 과외를 받을 때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들었던 말이 있었다.
[똑바로 봐.]
시연은 항상 똑바로 보았다. 그런데 그사이 글자가 바뀐 것뿐이었다.
[똑바로 봤어요!]
대답처럼 항상 똑바로 보았다. 글자가 아니라 그의 얼굴을……. 사실 그건 그가 너무 잘생겨 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도망치지! 이리 안 와?”
곁눈으로 그를 피해 슬슬 뒷걸음질 치는데 문어발 같은 손이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손이 마치 찰거머리처럼 그녀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흡착해 끌어당겼다.
“도망 안 쳤어요! 제가 언제 도망을….”
“너 지금 도망치고 있었잖아. 빨리 이리 와!”
그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가 그의 품에 폭 안기듯이 끌려왔다. 시연은 마치 그에게 백허그를 당하는 듯한 자세에 숨을 쉬기도 곤란해졌다.
“손 이리 내.”
하지만 그는 그녀를 품 앞에 두고도 아무렇지 않게 도어록을 조작했다. 그녀의 손을 가져간 그가 센서에 지문을 등록했다. 시연이 할 땐 절대 되지 않던 잠금장치가 손쉽게 그녀를 받아들였다.
“봐, 쉽잖아.”
등록이 끝나자 시연은 후다닥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엌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저녁은 제가 할게요. 은성 씨는 좀 쉬세요.”
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은 제가 차리고 싶어요!”
그녀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지금은 그와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얼굴이 활활 타는 것 같았다. 비록 지문 등록을 못 해 어른스러운 모습을 전하는 덴 실패했지만, 그에게 흔들린 제 모습마저 들키고 싶진 않았다.
잠시 후 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씻고 올게.”
시연이 서둘러 싱크대 수전을 틀었다.
* * *
“요즘은 인터넷 방송에 자세히 나와서 요리하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것 같아요.”
시연은 일부러 음식 만드는 얘기로 수선을 떨었다. 그는 이따금 끄덕이며 그녀가 만든 음식을 얌전히 먹기만 했다.
“국은 못 했어요. 다음엔 국도 끓일게요. 오늘은 처음이니까….”
“나시연.”
“벌써 다 드신 거예요? 콩나물도 맛이 나쁘지 않은데….”
“아니야, 맛있게 잘 먹었어.”
“그래요? 그럼 밥 조금만 더 드실래요?”
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은성은 그런 그녀의 손목을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왜요?”
“내가 아니라 네가 거의 먹지 않고 있잖아.”
“제가요? 아니에요! 저 많이 먹었어요. 밥만 안 줄었다 뿐이지, 반찬은 이거저거 많이 먹은걸요.”
시연은 그에게 잡힌 손목이 불편해 자꾸 제 손을 쳐다보았다. 그걸 눈치챘는지 그가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네 말대로 처음치고 잘했어. 배부르게 먹었고. 그러니까 너도 어서 먹어.”
그가 먹으라는 말에도 그녀는 쉽사리 수저를 들 수 없었다. 먹으려 해도 목으로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실은 근래 계속 마음이 불편하고 그와 있으면 긴장되었다. 처음엔 그 이유를 몰랐는데 결혼 생활이 시작되고 은성과 부딪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 느낌은 심해졌다. 잘하고 싶었다. 그런데 부끄럽고 당황스러운 상황만 이어져 속상했다.
“음… 전 그만 먹을게요.”
“너 그렇게 자꾸 음식 남기면….”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또다시 어린애처럼 대하려는 은성의 모습에 말은 그렇게 터져 버렸다.
크게 나온 소리에 시연은 속으로 잠깐 놀랐다. 그러나 차라리 이 기회에 사과 대신 제 의사를 똑바로 전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그를 시연이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비록 계약이긴 하지만, 저 은성 씨 아내예요. 어린애 아니고요.”
“…….”
“물론 은성 씨가 보기엔 부족한 것도 많고 어리숙해 보이는 것도 많겠죠. 하지만 저도 이 결혼 생활을 잘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걸 지은성 씨가 통제하려고 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대꾸가 없어 너무 심하게 말했나, 생각하는데 은성이 조용히 입을 뗐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넌 내 아내고 우리는 6개월간 진짜 부부지.”
“네, 그러니까 말씀드린 대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지 않지만 어쩐지 위협적인 듯한 그의 모습에 시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거기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화, 나셨어요?”
호기롭게 떠들 땐 언제고 금방 어깨를 움츠린 그녀의 앞에 그가 똑바로 섰다. 은성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밥 다 먹었다고 했지?”
“네….”
“그럼 이리 와.”
그가 친절하게 그녀를 일으키며 귓가에 속삭였다.
“치우는 건 나중에 내가 할게. 우리, 신혼이잖아.”
“……네?”
시연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호흡이 가빠졌다.
“네 말대로 넌 어린애가 아니고, 우린 부부야. 그리고 난 지금 아내를 안고 싶은 남자고.”
검은빛을 발하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기도 힘들었다.
“나 때문에 신혼여행을 미뤄서 미안했어. 그래도 어디 여행이라도 가서 우리 처음을 시작하려 했는데, 네 말을 들으니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
“으, 은성 씨…….”
“이리 와.”
시연은 눈앞의 손을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그 앞에서 뭐든 하겠다고 한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닥치자, 그것도 이렇게 뜬금없이 이야기가 잠자리로 넘어가자 머리가 새하얗게 바랬다. 몸은 머리보다 더 빳빳하게 굳었다.
“저… 아, 아직 씻지도 않았는데…….”
“괜찮아. 내가 씻겨 줄게.”
“은성 씨는 이미 씻었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씻으면서도 하는걸.”
“네…?”
시연은 도무지 그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른스럽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붙잡을 수도 없을 만큼 멀리 날아가 버렸다.
대체 부부들은 결혼 첫날밤을 어떻게 보내는 걸까?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 했던 안일했던 생각은 짙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은성 앞에서 먼지처럼 흩어졌다.
“하, 하지만 우리는 아직 처음인 데다… 바, 방금 밥을 먹었고….”
더듬대며 밥 운운하는 그녀를 그가 허리를 숙여 양손으로 번쩍 안아 들었다.
“꺄!”
갑자기 허공으로 떠오른 몸에 시연이 비명을 질렀다. 은성이 시연을 안정적으로 안아 그가 사용하는 안방으로 걸어갔다.
“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내, 내려 줘요!”
“버둥거리면 다쳐. 팔로 내 목 감아.”
내려 달라면서도 시연은 후다닥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시선이 마주치는 게 힘들어 그의 어깨에 기대 눈을 꼭 감았다.
“어, 어서 내려 주세요! 이렇게 가고 싶지 않아요!”
“뜻밖인걸. 여자들은 이런 걸 기대할 줄 알았는데.”
그녀를 안고 걸으면서도 그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목소리 톤도 말 속도도 엉망인 건 안겨 가는 시연이었다.
“전 조,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서 내려 주세요.”
어느덧 그녀의 몸이 조금씩 하강했다. 폭신한 쿠션에 닿은 몸에 시연이 안도하며 눈을 떴다.
그런데 이번엔 그녀가 보는 앞에서 그가 제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꺄!”
시연은 또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피식, 억누른 웃음소리에도 눈을 뜨지 못했다. 잔뜩 고개를 돌린 채 그녀가 그를 타박했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은성 씨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인 사람이었어요?”
“이봐요, 나시연 씨. 지금 장난합니까?”
그런데 언제 웃었냐는 듯 정색하며 바뀐 목소리에 시연이 눈을 떴다. 그는 셔츠 단추를 풀다 말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은성 씨……?”
그가 또박또박 진지하게 말했다.
“먼저 우리가 결혼한 사이고, 모든 걸 다 하겠다고 한 건 나시연 씨입니다. 그런데 지금 날 치한 취급하는 겁니까?”
“…….”
시연은 어떤 말을 골라 해야 할지 쉽사리 결정하지 못했다. 그가 제게 존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어릴 때 그에게 혼이 나고 꾸지람을 들을 때보다 어쩐지 지금이 더 무서웠다.
“해? 말아요?”
다그치는 말에도 시연은 여전히 답을 고르지 못했다. 긍정하자니 닥칠 일이 두려웠고, 부정하자니 제가 한 말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그러니까… 저는…….”
그런데 갑자기 그가 그녀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넓고 하얀 침대 위에 시연의 갈색 머리카락이 꽃처럼 흐드러졌다.
“흣!”
작게 신음을 내뱉은 그녀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바로 코앞에서 그의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가 내려왔다.
“눈 떠. 나시연.”
시연은 자신을 덮친 은성을 천천히 눈을 떠 쳐다보았다. 오늘 제 모든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를 쳐다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일렁이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그녀를 그가 내리쬐는 햇볕처럼 뜨겁게 직시했다.
“대답해. 해, 말아.”
시연은 언제나처럼 그가 옳고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인정했으면 그게 뭐든 옳다고 생각한 대로 하는 게 제 방식이었다. 여전히 심하게 떨렸지만, 시연은 이번에도 그걸 실천에 옮겼다.
꽃 이파리처럼 떨리는 붉은 입술이 여리게 떨어졌다.
“해요.”
숨결 같은 대답에 은성은 머뭇거리지 않고 바로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읍!”
짧은 신음과 함께 커다란 방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식탁에서부터 이어진 다툼도, 잡다하게 이어지던 움직임도 마치 소리처럼 멈추었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머금고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입술을 벌려 시연의 윗입술을 빨아들이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으음….”
미약하게 들리는 신음 사이로 그가 그녀의 입술에 틈을 냈다. 혀로 입술 사이를 핥다가 한순간 떨리는 살을 가르고 들어갔다.
“……!”
시연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가 이내 다시 감겼다.
은성은 시연의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가 움직였다. 연약하고 보드라운 속살을 핥아 내고 가지런한 치아도 섬세하게 건드렸다. 그의 혀는 그녀의 입 속을 제 것인 듯 휘젓고 다녔다.
“으음…!”
그러다 시연이 숨이 막혀 괴로운 듯 신음하자 그가 입술을 뗐다. 그녀가 눈을 뜨려는 찰나 다시 방향을 틀어 깊숙이 침입했다.
“으읍!”
이번엔 아까보다 더 깊은 곳까지 찾아 그녀를 찔러 댔다. 구석에 숨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녀의 혀를 찾고는 휘감기 시작했다.
“으음, 읍…!”
시연은 처음 해 보는 프렌치 키스에 온몸이 떨렸다. 그를 막을 재간도 없었다. 그가 그녀의 혀를 휘감아 제게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혀를 입술로 물곤 조금 전 입술을 빨듯이 열렬히 빨아 댔다. 시연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르작거렸다.
쪽…. 쪼옥…….
달라붙은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서 야릇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흘렀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연신 핥고 진하게 빨아들였다. 어느덧 은성의 손이 시연의 옆구리를 타고 올라갔다. 입술은 한순간도 그녀를 놓지 못하고 입술 주변을 돌아다녔다.
“흣…!”
아찔한 신음이 시연의 입술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은성이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팔을 훑어 올라갔다. 다른 손은 이미 그녀의 손을 깍지 껴 도망가지 못하게 옭아맸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혀로 살결을 느끼며 푸딩처럼 말랑한 그녀를 빨아들였다.
“읏!”
움찔하는 그녀를 느끼며 은성이 심한 갈증에 허덕였다.
“하…….”
더운 탄식을 흘리며 그가 그녀의 가슴을 커다랗게 그러쥐었다.
딩동딩동.
순간 거실에 있는 인터폰이 환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정신이 번쩍 든 은성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가 그녀의 가슴에 올려진 제 손을 보았다. 시연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가 그녀의 위에서 단숨에 내려왔다.
딩동딩동.
또다시 벨이 울렸다.
“누가 왔나 보네.”
은성은 시연을 두고 그대로 거실로 나갔다. 시연은 그가 나가자 이불을 끌어와 제 몸을 덮었다. 그가 옷을 벗긴 건 아니지만 일어나지도 못할 만큼 부끄러웠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방으로 왔다.
“아파트 주민인데 잠깐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네…….”
시연은 겨우 그 말만 했다. 은성은 안방 문을 닫곤 곧 바깥으로 나갔다. 현관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에 시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조심스레 제 입술을 쓸었다. 그가 만졌던 목을 더듬고 제 손도 쳐다보았다.
“하아…….”
긴 숨이 흘렀다. 그가 준 열기가 전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모르겠지만 시연은 여태 단 한 순간도 그를 좋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그와는 결혼하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다.
그를 느낀 감각에 그녀가 조금씩 흐느꼈다. 덜덜 떨리는 움직임은 이젠 그가 남긴 뜨거움이 아니라 죄책감이 되어 자신을 공격했다.
“흑… 흐흑…….”
행여 그와 몸을 섞더라도 감정은 숨겨야 하는데 벌써 이 지경이었다. 과연 자신이 6개월을 무사히 보낼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은성은 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내맡겼다.
시연에게 한 말은 거짓이었다. 주민이 찾아온 건 맞지만 그는 인테리어 공사 동의서만 받아서 바로 돌아갔다. 바깥바람을 찾아온 건 제 의지였다.
밤에 비가 온다더니 벌써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은성은 바람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몸속 열기가 식지 않았다.
시연의 말에 발끈해 그녀를 위협하려던 목적은 달성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었다. 어차피 키스는 해 봤으니 거기까지만 할 생각이었다. 꽤 진하게 몰아붙이면 당황해 뒷걸음질 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얼마나 놀랐으면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 아래에서 비 맞은 새처럼 바들바들 떨던 모습을 생각하면 죄책감에 심장이 아렸다.
“젠장……!”
그가 차가운 시멘트벽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녀는 지금도 제 몸을 추스르지 못하고 떨고 있을 텐데 자신의 몸은 잠깐 맛본 환희에 여전히 활활 타올랐다.
그가 피맺힌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지은성, 정신 차려.”
그녀를 욕보이려고 결혼한 게 아니었다. 목적을 잊어선 안 됐다.
바람만 쐬고 금방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가 그대로 바깥으로 내달렸다. 그녀의 감각에 달아오른 몸을 다른 열기로 채워야 할 것 같았다.
탁탁탁.
내달리는 소리가 고요한 아파트에 낮게 깔렸다.
* * *
저벅저벅.
아침 회의를 끝내고 집무실로 돌아가는 은성의 걸음이 꽤 거칠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평소보다 저기압인 듯한 상사의 모습에 한 비서의 걸음도 빠르게 따라붙었다.
“매출 보고서는 다시 받았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인사이동에 대해선 약간의 소음이 있지만 대체로 따르는 분위기입니다.”
“다행이군요.”
한 비서는 이번에도 평소처럼 세세한 지시가 더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은성은 다른 생각에 무게를 둔 건지 한 비서의 말에 집중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갸웃 넘긴 한 비서가 한 가지를 더 언급했다.
“미국에선 아직 별다른 연락은 없었습니다.”
집무실 앞에서 은성이 잠깐 발을 멈추었다. 한 비서의 걸음도 따라 멈추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은성은 짧게 대답한 후 바로 사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사장실 앞에서 자리를 지키던 김 비서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오늘은 별일이 없네요. 매일 뭔가가 빵빵 터져서 긴장했는데 간만에 숨 좀 쉽니다.”
한 비서가 자리를 찾아가며 나직이 대꾸했다.
“전 어쩐지 그게 더 무섭습니다.”
“네?”
한 비서의 시선이 사장실 문을 향했다.
“뭔진 모르지만 가장 센 게 숨어 있는 느낌이랄까.”
“네?”
김 비서의 목소리가 커졌다. 한 비서가 음성을 낮추라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쳐다보았다. 김 비서가 재빨리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은성은 책상에 앉자마자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어쩐지 오늘은 회의 내내 넥타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자 그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가 의자에 앉아 창으로 몸을 틀었다. 하늘은 답답한 그의 마음과 달리 무척 맑았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워 보였다.
[으음…! 흣!]
은성의 머릿속에 어제 시연이 흘렸던 신음이 떠올랐다. 그가 미간을 구기며 눈을 감았다. 그녀와의 키스를 생각하자 또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시연이 이런 제 상태를 알면 뭐라고 할지 우스웠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그가 휴대전화를 들었다. 시계를 보니 다행히 시연의 수업이 없는 시간이었다.
<어젠 미안했어. 주말엔 방해하는 사람 없을 테니 기대해도 돼.>
메시지를 보낸 그가 전화기를 내려놓고 검토해야 할 서류를 펼쳤다. 메시지는 이번 역시 그녀에게 도망치라고 보낸 것이었다. 또다시 그녀와 직접 부딪히는 것보다는 말로 위협해 먼저 물러서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가 비서실을 연결했다.
“이 실장 도착했습니까?”
-네, 대기 중입니다. 사장님.
“그럼 바로 들어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 * *
<어젠 미안했어. 주말엔 방해하는 사람 없을 테니 기대해도 돼.>
학교에서 은성의 메시지를 확인한 시연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개졌다. 그녀가 후다닥 전화기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뭐야? 무슨 메시지인데 그래?”
나란히 걷던 보원이 의뭉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냐, 그냥!”
시연은 본능적으로 어제의 일을 숨겼다. 그가 어제 일로 메시지를 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어제 나갔다가 한참 후에야 들어왔고, 시연은 그에게 그 이유를 묻지 못했다. 그가 없을 때 후다닥 식탁을 치우고 방에 들어가 잠든 척했다.
보원이 앞서 걸으며 시연을 더욱 이상한 눈초리로 요리조리 쳐다보았다.
“너 얼굴이 왜 그래? 화났어?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야. 네가 뭘 잘못해?”
“그런데 왜 얼굴이 그렇게 빨개? 너 화나면 얼굴 빨개지잖아.”
시연은 손 부채질을 하며 서둘러 얼굴에 오른 열기를 식혔다.
“그냥, 더워서 그래. 날씨가 꽤 더워졌잖아.”
핑계를 댔지만 눈치 빠른 보원은 믿는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원은 상대가 숨기는 걸 굳이 캐묻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금방 시연의 옆자리를 찾아 나란히 걸었다.
“너,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알지? 나 네 편인 거.”
시연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이런 친구가 있기에 외로워도 견뎌 낼 수 있었다. 은성과의 결혼 기간만 잘 보내면 어쩌면 자신의 미래에도 환한 빛이 내리비칠지도 몰랐다.
“알아. 난 네가 있어서 정말 든든한걸. 너랑 승률이 아니었으면 어쩌면 난 피폐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혼자 앓지 말고 꼭 말해. 알았지? 혹시 내가 도움이 안 될 수도 있지만 말이라도 하면 낫다잖아.”
“응.”
시연은 보원의 말에 조금 고민하다 용기를 내기로 했다. 견딜 수 없이 부끄러운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친구의 말대로 문제를 나누면 제 생각과는 또 다른 방법이 생길 수도 있었다.
“있잖아, 보원아….”
“응.”
“저기… 그게… 내가 주말에 지은성 씨랑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여행? 단둘이?”
보원이 꽤 놀란 얼굴로 커다랗게 되물었다.
“그렇지. 아무래도 신혼여행도 못 갔으니까….”
“참, 그랬지.”
“응. 그래서 난 조금 걱정이 돼서……. 방금 메시지 온 게 은성 씨였거든.”
차근히 설명하는데 보원의 얼굴이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응?”
“걱정하지 마. 이럴 줄 알고 내가 다 생각해 놓은 게 있어! 일단 이번엔 아프다고 하자. 갈 때는 괜찮았는데 몸살이라고 해. 설마 아픈 사람한테 치근덕거리기야 하겠어?”
시연은 대꾸하지 못한 채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래도 오래 봐온 사람이니까 인정은 있을 거야. 그리고 너랑 나이 차이도 크게 나는데 짐승처럼 막 덤비고 그러진 않겠지.”
“그, 그렇겠지?”
사실 시연은 보원에게 첫날밤 조언을 구할 생각이었다. 결혼 전에 본의 아니게 은성을 밀어내려 한 잠자리 발언에 책임을 질 생각이었다. 갑작스럽게 그런 상황이 닥쳐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회피하는 건 싫었다. 그의 앞에선 더더욱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 어린애로 보이기 싫은 일종의 오기이기도 했다.
그래도 연애 한 번 안 해 본 자신보단 연애해 본 경험이 있는 보원이 나을 것 같았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도움받긴 어려울 듯했다.
“그래! 그러니까 이번엔 아픈 척해!”
“으, 응.”
보원과 승률에게 은성과의 인연은 얘기했지만 제 마음마저 털어놓진 않았다. 그건 세상 누구도 모르는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보원의 이런 반응을 보며 시연은 제 마음과 지금의 상황을 숨겨야겠다는 생각을 더 단단히 했다.
지이잉.
“잠깐만. 박 교수님 전화 왔어.”
시연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길지 않게 통화한 그녀가 보원에게 미안한 내색을 했다.
“어쩌지? 나 지금 박 교수님 뵈러 가야 할 것 같아.”
“너 전에 신청한 해외 구호 활동 때문에 그러는 거야?”
“응.”
“그래. 어쩔 수 없지. 잘 다녀와. 그럼 난 혼자 도서관 다녀와야겠네.”
“미안해.”
“대신 너 끝나면 바로 튀어 와야 한다.”
“응, 다녀올게!”
시연이 방향을 돌려 열심히 뛰었다. 한참을 뛴 그녀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나시연, 힘내. 할 수 있어.”
자신을 응원하는 말이 조용히 흘렀다. 이제 제 문제는 오롯이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그간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이 정도는 자신이 풀 수도 있었다.
그녀가 느려지는 걸음을 조금 더 재촉했다. 자꾸 나약해지려는 제 마음을 걸음처럼 다잡아 나아갔다.
* * *
“시연아, 네 뜻은 잘 알겠지만 이건 반드시 부모님과 상의해야 할 문제야. 게다가 넌 학과도 완전히 다르잖니. 나중에 부모님이 아시면 얼마나 놀라시겠어?”
사회복지학과 박 교수님은 이번에도 시연에게 부모님 동의를 요구했다.
“결정 나면 그때 말씀드리면 안 되나요?”
“그건 힘들어. 부모님께서 생각하시는 네 미래도 있을 텐데 상의해야지.”
부모님은 시연 혼자 해외에 나가는 걸 싫어했다. 예전에 티브이를 보며 구호 활동에 동참하고 싶다는 뜻을 비쳤을 때 돌아온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너 혼자 어딜 간다는 거니? 여기에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널렸어!]
[엄마 말이 맞다. 그런 건 더 커서 해도 돼.]
부모님의 뜻을 따라 미대를 갔지만 시연의 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 가족을 잃고 혼자가 돼 떠도는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말처럼 더 커서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 좋은 기회가 있어서 신청했다. 그런데 박 교수님은 한사코 부모님의 동의부터 말했다.
끝까지 부모님께 비밀로 할 생각은 아니라도 시연은 당장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참, 너 얼마 전에 결혼하지 않았니?”
“네, 했어요.”
“좀 놀라긴 했는데, 어쨌든 늦었지만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부모님이 안 되면 남편과 상의하는 건 어떠니? 어차피 네가 가려면 남편이 동의해야 하는 일이니 말이야.”
시연의 입이 달라붙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생각을 미처 못 했네. 그럼 잘 상의해서 다음 주까지 알려 줄 수 있지?”
“……네.”
시연은 한참 뜸을 들인 후 겨우 대답하고 나왔다. 교수실 문을 닫은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을 은성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반년 후엔 헤어질 텐데 알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가게 된다 하더라도 이혼 이후에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큰일이네…….”
그녀가 혼자 중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어? 미대 나시연 맞지?”
그런데 문득 누군가가 그녀를 아는 척했다. 얼굴을 확인했지만 시연은 모르는 남자였다.
“너 구호 활동 신청했다며?”
시연이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자 그제야 그가 머쓱한 듯 웃으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작년에 같은 수업 들었는데 기억 안 나?”
“죄송해요….”
“와, 조금 실망인데? 나 사복과 3학년 김환조야. 작년에 과대했고.”
“아, 맞다. 죄송합니다. 딴생각하느라 못 알아뵀어요.”
시연이 고개를 꾸벅 수그렸다.
“딴생각한 한 거 맞아?”
“네?”
“아니다. 그냥 네 말대로 딴생각한 거로 하자. 어쨌든 반갑다. 너 올해 우리 과 교양 신청 안 했더라? 계속 들을 줄 알았거든.”
“그게… 올해는 시간이 좀 부족해서….”
“나시연.”
대화 중 익숙한 음성이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시연이 시선을 들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은성이 둘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어…?”
“뭐야? 아는 사람이야?”
환조의 시선이 은성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은성은 일하다 온 건지 완벽한 슈트 차림이었다. 높다란 키에 구김 없는 재킷, 반듯하게 다려진 바지 아래로 검은 구두가 티끌 하나 없이 반짝였다. 언뜻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넥타이 또한 그를 학교와는 이질적으로 보이게 했다.
“교, 교수님인가…?”
환조의 목소리가 은성의 기에 눌린 듯 조금씩 기어들어 갔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시연은 혹시라도 그가 다른 볼일로 와 우연히 마주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 자신을 찾아왔다기엔 그 어떤 연결고리도 없었다.
“누구?”
은성의 짧은 질문에 시연이 황급히 환조를 소개했다. 어쩐지 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작년에 같은 수업 들었던 선배예요. 우연히 마주쳐서 인사 나누던 참이었어요.”
“인사만 나누기엔 꽤 한참 얘기하던데.”
시연의 눈동자가 핑계를 찾아 옆으로 도르르 굴렀다. 행여라도 그가 자신의 구호 활동 신청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그 사이 시연에게 환조는 앞에 선 남자가 누구냐는 시선을 계속 던졌다. 시연이 은성을 슬쩍 쳐다보자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왠지 식은땀이 나 시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쪽은….”
그녀가 그를 소개하려는 찰나였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나, 학생?”
“네? 아, 네….”
은성이 직접 환조를 상대했다.
“아무래도 학생은 사회 전반에 관한 관심을 좀 더 키워야 할 것 같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은성이 시연의 손을 잡았다. 시연과 환조의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남편이야. 나시연과 결혼한.”
“네?”
환조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시연의 얼굴이 당황해 붉어졌다.
“왜, 거짓말 같아?”
은성의 말에 환조의 눈동자가 시연을 향했다. 시연은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부정하지 않았다.
“하, 하… 조금 놀라셨죠? 남편 맞아요. 저 이 분과 결혼했어요.”
그녀의 설명에도 환조는 잠깐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다 허탈하게 웃곤 꾸벅 인사했다.
“시연이의 결혼과 제 사회 전반에 관한 관심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저는 그만 가 보겠습니다. 시연아, 나중에 또 보자.”
“네, 선배님. 안녕히 가세요.”
환조가 뒤를 흘깃거리며 조금씩 멀어졌다. 은성은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곤 방향을 틀었다.
“가.”
그에게 손을 잡힌 시연이 얼떨결에 따라 걸음을 뗐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고 멈춰 섰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이따금 두 사람을 흘깃거렸다.
“손 좀 놔 주세요.”
“왜?”
그녀를 잡은 손의 악력이 조금 더 세졌다. 시연이 불편한 듯 손을 움찔거렸다.
“갑자기 학교엔 무슨 일이세요? 지금 회사에 있으셔야 하지 않나요?”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건 맞는데, 볼일이 있으셔서 오신 듯한데 가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그가 그녀와 함께 다시 걸음을 뗐다.
“내 볼일이 너야. 점심 같이 먹으려고 왔어.”
“네……?”
걸음을 이으며 그가 불만스럽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싫어?”
“아, 아뇨! 싫은 게 아니라… 연락도 없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네가 전화를 안 받아서 친구한테 물었더니 이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다는 답을 들었어. 친구한텐 양해를 구했으니 걱정 안 해도 돼.”
그의 설명에 그제야 시연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되었다. 교수실에 들어가면서 혹시 몰라 전화기를 무음으로 해 두었다. 그때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친구라면 보원이 말씀이세요?”
“맞아.”
“그런데 보원이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어요?”
그가 그녀를 알 수 없는 눈길로 흘깃 쳐다보았다.
“넌 내가, 내 아내 친구 연락처도 모르는 멍청한 남편으로 보여?”
그는 이내 도착한 주차장에서 시연에게 차 문을 열어주었다. 주변에 주차된 차와 달리 유독 크고 고급스러운 세단에 그녀가 차분히 올랐다. 이어 그가 운전석에 올라 차에 시동을 걸었다.
“먹고 싶은 것 있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시연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저와 제 주변에 대해서 얼마나 아세요?”
출발하려다 말고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까 그놈보단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해.”
“그건….”
환조를 떠올린 그녀가 급히 아무 사이 아니라고 설명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그가 꽤 날카롭게 읊조렸다.
“넌 네 주변 남자들이 널 어떻게 본다고 생각해?”
“네?”
“설마 이신찬 같은 놈들처럼 너도 계약 결혼이라고 아무나 만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지은성 씨!”
시연이 정색하며 소리쳤다. 그가 시선을 돌려 곧장 차를 출발시켰다.
“그게 아니라면 앞으로 조심해. 네 주변에선 네가 유부녀라는 걸 아는 놈도 몇 없는 것 같으니까.”
그는 시간을 내 같이 점심을 먹으러 왔다는 남편답지 않게 화나 보였다. 시연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곳에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썰어준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시연이 와인을 한 모금 넘겼다.
“너무 많이 마시진 마. 오후에 전공 수업 남았잖아.”
고기를 집던 시연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녀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왜? 더 먹지 않고. 너 고기 잘 먹잖아.”
그의 말대로 그녀는 적당히 익힌 스테이크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마음대로 음식점에 들어갈 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안 드세요?”
그녀가 그의 접시를 쳐다보았다. 그는 집에서와는 달리 접시를 거의 비우지 않았다.
“난 됐어. 너 많이 먹어.”
“저도 다 먹은 것 같아요.”
“내가 너 그렇게 음식 남기지 말라고….”
“다음엔 꼭 먼저 연락 주세요.”
“뭐?”
시연은 그의 의도 같은 건 묻지 않기로 했다.
“같이 식사해서 좋았지만 그래도 전 친구와의 약속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요.”
그가 조금은 불만스럽지만 꽤 진중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제 친구의 연락처를 가지신 것도 이해할게요. 서로 필요할 때가 있을 테니까요.”
“…….”
“하지만 저를 정말 아내로 인정하신다면, 앞으로 최소한 약속은 미리 잡아주세요. 저는 그게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해요.”
“알았어.”
그는 뜻밖에 꽤 쉽게 그녀의 말을 수긍했다. 시연은 조금 더 용기를 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제 식사 운운하시기 전에 은성 씨 식사도 좀 더 챙겼으면 좋겠어요.”
그가 알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시연은 그 시선이 조금 불편해 다시 포크를 들었다.
“혹시 은성 씨도 제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하셔도 돼요.”
“나는.”
그의 대꾸에 그녀가 고기를 입에 넣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느리게 떨어지는 붉고 선명한 입술에 그녀의 동공이 맺혔다.
“너와 자고 싶어.”
쨍그랑. 시연의 손에서 포크가 떨어져 접시에 부딪혔다.
“매일. 지금도 널 여기 눕혀 놓고 안고 싶다는 생각을 해.”
“…….”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접시 위 포크를 애써 잡았다. 그녀가 시선을 피해도 그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
“뭐, 뭘요…….”
“하려면 제대로 하던지, 아니면 그냥 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던지.”
선하게 떨어진 시연의 눈썹이 중앙으로 모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가 고기를 썰며 조용히 응답했다.
“이분과 결혼했어요.”
“그게 무슨 말….”
“아까 그 어린놈한테 그렇게 말하던데.”
그녀가 신음하듯 나지막하게 ‘아…….’ 소리를 흘렸다. 그가 접시를 향한 고개에서 시선만 들어 그녀를 따갑게 쳐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나를 계속 남처럼 말할 거면 미리 얘기해. 그러면 나도 이렇게 찾아오는 일도 없고 네 친구에게 귀찮게 전화하는 일도 없을 테니까.”
어찌 보면 대수롭지 않게 듣고 흘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시연은 굳이 따지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죠?”
“말했을 텐데, 제대로 하라고.”
그가 그녀 대신 짚어 주듯 차근차근 설명했다.
“주말에 기대해도 된다고 메시지 보낸 거 봤어?”
시연의 볼이 조금 발그스레해졌다.
“네.”
“나도 기대해도 되겠어?”
시연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자신은 뭘 할 줄도 모르는데 기대해도 된다고 말해도 괜찮을까.
“……기대……하셔도 좋아요.”
“믿어도 된단 말이지.”
“네…….”
“그래, 그럼. 실은 오늘 근처에서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취소되는 바람에 들른 거야. 못 만나면 그냥 가려고 했는데 네 어정쩡한 태도가 좀 거슬렸어. 내 말이 심했다면 사과하지.”
“아니에요. 앞으론 제가 더 똑바로 할게요.”
그가 식사를 마친 듯 포크를 내려놓고 물을 마셨다. 손을 뻗어 고개 숙인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식사 마저 해.”
손에 쥐여 주는 포크에 시연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돌판 위의 고기는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었다. 꼭 그가 쳐다보는 눈빛 같았다.
시연은 음식을 남기지 않고 거의 다 먹었다. 그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마쳤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레스토랑을 나갔다. 여전히 어색했지만, 이래도 되는지 의문스러웠지만 시연에겐 이제 거절할 핑계가 없었다.
“타.”
그가 열어 주는 차 문에 시연은 잠깐 어릴 때가 떠올랐다.
그는 언니를 두고 시연에게 항상 가장 먼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가 타고 나면 그는 이후 언니에게 친절히 조수석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면 언니는 미소를 띠며 차에 올랐고 그는 뒤돌아 표정을 볼 수 없었다.
이젠 언니가 아닌 자신이 매번 그의 차 조수석에 앉았다. 시연은 보닛을 돌아오는 그의 표정을 보았다. 어쩐지 무뚝뚝해 보여 가슴 한편이 시렸다. 예전에 언니는 이 자리에 앉아서 자신처럼 그의 표정을 살폈을까. 그때 그는 언니를 향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조금 서두르면 수업 시간엔 늦지 않을 거야.”
“네.”
그는 바로 차를 출발했다. 시연은 그가 잡았던 제 손을 다른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 * *
시연을 데려다주고 회사로 돌아오는 은성의 표정은 계속 굳어 있었다.
점심 약속이 취소돼 그녀를 만나러 간 것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시연과 한 남학생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부터 틀어졌다.
“후…….”
엘리베이터에 오른 그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한심했다. 자신이 한심해 견딜 수 없었다.
어린애에게 질투하지 않기로 했는데 그건 시연이 눈앞에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시연과 다른 남자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기만 해도 화가 났다.
게다가 그녀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자신은 그냥 넘기지 못하고 타박을 했다. 만약 상대가 나시연이 아니었다면 제 속 좁은 행동을 그냥 보고 넘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은성의 등장에 비서실 비서들이 일제히 기립했다. 그중 한 비서가 은성의 빠른 걸음에 따라붙었다.
“저… 사장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있다가요. 10분 후에 듣겠습니다.”
“아, 네….”
그가 사장실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얼마 후 그가 마음을 진정했을 때 비서실에서 이 실장의 방문을 알렸다. 오전에 이 실장에게 갑자기 일이 생겨 보고를 미루었다.
이 실장이 사장실에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앉으세요.”
은성은 이 실장과 함께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오전엔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미국에서부터 함께 해 주어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실장이 잠깐 고개 숙인 후 서류를 꺼냈다. 서류를 건네받은 은성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벌써 이렇게 된 겁니까?”
“죄송합니다. 관리한다고 했는데 이번에 나 사장님께 들어간 자금이 조금 컸습니다.”
“그렇군요. 빨리 회사 매출을 일으키는 방법밖에 없겠군요.”
이 실장이 잠깐 뜸을 들인 후 묵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사장님,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꽤 진지한 얼굴에 은성이 곧은 태도로 집중했다.
“미국에서 사장님께서 이루신 일들도 그렇고, 저는 이곳에서도 사장님께서 반드시 바라는 바를 이루시리라 믿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함께 있었고, 끝까지 사장님을 보필하고 싶었습니다.”
은성의 대꾸가 잦아들었다.
“그런데 그런 뜻도 다 제 마음대로 되지는 않네요.”
“이해합니다.”
“이런 말씀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 실장님이 계셔서 제가 힘이 많이 됐습니다.”
은성이 이 실장의 손을 잡았다.
이 실장은 미국에서 은성과 함께 오래도록 HLA 그룹을 키워온 사람이었다. 은성이 한국행을 결정했을 때도 그는 군말 없이 동행을 자처했다.
가족이 모두 미국에 있어도 은성을 돕겠다고 했지만, 그 역시도 결국엔 아버지의 사람이었기에 끝까지 잡을 순 없었다. 이곳에 와 정착을 도운 것만 해도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다시 미국으로 가십니까?”
“예.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반듯하던 이 실장의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은성이 애써 입가를 당겼다.
“가족들 만나러 가시는데 웃으셔야지요.”
“죄송합니다, 사장님….”
“아닙니다. 그동안 제가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의지가 많이 됐습니다.”
“사장님…….”
이 실장을 보내고 은성은 이번에도 한 비서의 보고를 미루었다.
한국에서 홀로 정착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나 온 가족의 기대를 등지는 건 그로서도 쉽게 이겨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시연을 지키지 못하면, 평생을 후회할 것 같아 많은 것을 놓고 이곳에 왔다. 그녀에게 바라는 건 없었다. 단지 정말, 그녀가 웃으며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 평범한 걸 이루는데 왜 이리도 어려움이 따르는지 알지 못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은성은 다시 어깨를 폈다. 이 실장과 오래 함께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예상했다. 그 현실이 생각보다 조금 더 빨리 다가왔을 뿐이었다.
은성이 한 비서를 호출했다. 한 비서는 굼뜬 행동 없이 즉시 사장실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사장님.”
은성이 진지하게 한 비서를 직시했다.
“한 비서님.”
“예.”
“저를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예? 아, 네! 물론입니다, 사장님!”
“이런 부탁, 부담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랍에서 저장장치 하나를 꺼내 와 한 비서에게 내밀었다.
“우선 이것부터 보시고 말씀 나눴으면 합니다.”
여태 이 실장이 관리하던 개인 자금 관련 내용이었다. 한 비서가 조심스레 저장장치를 받아들었다.
“제가 한국에서 믿고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사장님.”
“말씀 감사합니다. 저와 오래 함께한 건 아니지만 저는 한 비서님이 충분히 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그에 대한 보상은 조금 늦어질 순 있어도 반드시 할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장님! 저는 사장님의 직원이고, 얼마든지 사장님을 도와드릴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사장님께서 시키시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급여는 이미 충분히 받고 있습니다!”
은성의 입술이 보일 듯 말 듯 가늘어졌다.
“우선 다른 비서님들껜 말씀하지 마시고, 자료를 파악한 후 다시 한번 말씀 나누면 좋겠습니다.”
“예, 빠르게 파악하겠습니다.”
한 비서를 내보낸 은성이 홀로 남아 무거운 숨을 뱉었다. 혈혈단신이 두렵진 않았다. 시연은 가족이 있으나 항상 혼자였다. 또한 그게 가슴 아파 지켜보던 시선을 끝내 거두지 못했을 때가 훨씬 두려웠다.
그녀를 떠올리자 은성의 표정이 다시 단단해졌다. 사람은 잃으면 다시 채우면 되고, 돈은 사라지면 그보다 더 벌면 되었다. 그러나 시연을 지킬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더군다나 그녀가 제 바로 곁에 있었다.
결혼으로, 아내로, 심장에 박아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으로.
단지 그 사실을 그녀가 모르게 해야 한다는 사실만이 이따금 가슴을 찌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