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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은 그날 이후 은성과의 관계가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그와의 과거를 간단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그랬구나,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
먼저 시연의 언니 얘기를 들은 승률은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따뜻한 손이 시연의 어깨를 부담스럽지 않게 툭툭 다녀갔다.
“좋은 얘기가 아니라서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나도 정말 몰랐어.”
“모를 수밖에. 어떻게 예비 형부였던 사람이 남편 후보로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겠어?”
“잘한 일이겠지?”
“그 정도면 사람은 확실하지만 나도 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승률은 다시 한번 시연을 위로했다. 시연은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런데 보원이 많이 늦네.”
“또 어디로 샌 거 아니야?”
수업이 끝나면 함께 모여 술을 마시기로 했다. 그때 은성의 얘길 하려 했는데 보원을 기다리다 승률에게만 먼저 털어놓았다.
“그러진 않을 텐데…….”
“그냥 우리 먼저 가 있을까? 장소는 메시지 보내면 되니까.”
승률이 옷깃을 여미며 부르르 떨었다. 금방 만날 줄 알고 자주 합체하는 벤치에서 기다렸더니 한기가 든 모양이었다. 시연이 웃으며 먼저 일어났다.
“옷이라도 벗어 줄까? 넌 정말 추위를 심하게 타. 살이 좀 찌면 괜찮을 텐데.”
“아서라. 보원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이게 살찐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너 보면 딱 그래.”
승률이 따라 일어나며 시연의 마른 몸을 손가락질했다. 시연이 피식 웃었다.
“우리 오늘 살찌게 고기 안주만 시킬까? 치킨이랑 삼겹살, 족발….”
“그러다 보원이 구박을 얼마나 들으려고. 보원이 살 관리 엄청 하는 거 알면서.”
“넌 항상 다 보여.”
시연의 입가에 완연한 웃음이 번졌다. 승률이 의아한 듯 물었다.
“뭐가?”
“네가 좋아하는 사람.”
잠깐 멍해졌던 승률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야!”
다급히 주위를 둘러본 그가 시연의 입을 손으로 가로막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녀를 협박했다.
“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죽어. 우리 사이 깨지는 꼴 보고 싶으면 그 귀여운 조동아리 놀려라. 응?”
“웁…! 우웁……!”
시연이 막힌 입술에 버둥거렸다. 허약해 보이는 주제에 남자라고 사람 압박하는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빨리 대답 안 해?”
“대답을… 웁! 이렇게 어떻게… 웁, 웁!”
승률이 장난치며 키득키득 웃었다. 몸을 잡혀 어쩌지 못하는 동기의 모습에 즐거워했다. 시연이 그에게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분해할 때였다.
“그 손 놔.”
갑자기 날아든 목소리에 승률이 방향을 틀었다. 찌푸린 시연의 시선에 아는 얼굴이 들어왔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학생, 그 손 놔.”
시연의 눈이 커다래졌다. 승률은 여전히 시연을 잡은 채 뚱하게 물었다.
“누구세요? 우리 친구라서 그냥 장난치는 건데요.”
“장난치곤 심한 것 같은데.”
어쩐지 심각한 분위기에 시연이 서둘러 느슨해진 승률의 손을 잡아 내렸다. 자유로워진 몸을 추스르며 급히 끼어들었다.
“장난친 거예요! 승률이 제 친구예요!”
승률이 의아하게 시연을 쳐다보았다. 시연은 친한 사이를 알리려는 듯 승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 다음엔 내가 가만 안 둔다. 알았지? 각오해!”
“뭐야? 너 왜 그래? 저 사람 누군데?”
“남편.”
시연이 말하려는 순간 은성이 던진 말이었다. 승률의 놀란 눈이 은성과 마주치자 그의 입술에서 추가 설명이 흘러나왔다.
“될 남자.”
“…….”
시연은 황당한 설명에 잠시 놀랐다가 금세 정신을 차렸다.
“남편이 될 남자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여긴 어떻게 오셨고요?”
“너 만나러 왔어.”
은성이 차갑게 대꾸했다. 어쩐지 그는 매우 화가 난 것 같았다. 아니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대체로 화나 보였다.
“그럼 연락을 주시지 그러셨어요?”
“네가 내 명함만 받아 간 것 기억 안 나?”
“아…….”
그러고 보니 은성에게 제 연락처를 준 적이 없었다. 그날 호텔 카페에서도 그렇고 문득 나타나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다.
“죄송해요. 하지만 우리 얘긴 다 끝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나는 어떤 대답도 한 적이 없어.”
이번에도 시연은 대꾸를 놓쳤다. 상황을 지켜보던 승률이 조그맣게 물었다.
“그… 사람이야?”
시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친한가 보네. 내 얘기도 공유할 정도면.”
“죄송해요. 어쩌다 보니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게 됐어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진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알았으니까 이제 그 친구라는 놈한테서 떨어져서 이쪽으로 오지.”
거친 언사에 승률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다행히 나이가 한참 더 있어 보이는 은성의 차림에 대꾸는 참는 듯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요.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어요.”
“보아하니 그 친구 한 명만 양보하면 될 것 같은데, 아닌가?”
“한 명을 더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 연락처는 명함에 적힌 번호로 드릴게요. 오늘은….”
“어떤 볼일이신데요?”
갑자기 승률이 끼어들었다. 곱지 않은 은성의 눈이 승률을 직시했다.
“그걸 왜 내가 학생한테 말해야 하지?”
시연은 걱정 어린 눈빛이었지만 승률은 안심하라는 듯 짧게 웃어 주곤 은성에게 답했다.
“어차피 친구 한 명도 더 기다려야 하고, 짧은 용건이시라면 제가 잠깐 자리를 비켜 드릴게요. 두 분 말씀 나누고 가세요.”
당돌한 발언에 은성이 가만히 승률을 노려보았다. 시연은 조마조마한 분위기에 눈치를 살피며 그에 동조했다.
“그것도 괜찮겠네요. 잠깐이라면 승률이 말처럼 어차피 기다리던 중이었으니까요….”
은성은 무언갈 참는 표정이었지만 곧 그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 그렇게 하지.”
다만 이후의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은성이 슬며시 한쪽 입가를 끌어당겼다. 시연은 짧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학생 이름이 승률이었네. 오승률? 박승률? 아니면 장승률?”
마지막 추측에 승률과 시연의 동공이 흔들렸다. 은성의 미소가 짙어졌다.
“장승률 학생, 다음번엔 나와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승률이 괜히 더듬더듬 대답했다.
“왜, 왜요……?”
“글쎄, 왜일까? 그건 나도 그때 가 봐야 정확히 알 것 같은데.”
별말 아닌 듯도 했지만 승률과 시연은 동시에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다. 시연이 다급히 승률을 벤치에 앉혔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갔다 올게.”
“왜? 내가 피해 줄게.”
“아냐, 보원이도 기다려야 하잖아.”
“아, 맞다.”
“빨리 와.”
대화 중 은성이 시연을 재촉하며 멀어졌다. 시연이 승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은성을 쫓았다.
시연은 은성을 따라가다 승률이 너무 멀어지는 느낌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까지 가시는 거예요? 여기서 얘기해도 될 것 같은데요.”
은성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의 눈길이 한참 떨어진 승률을 흘깃 스쳤다.
“설마 기다린다는 친구도 남자는 아니겠지?”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에 시연은 황당함이 앞섰다.
“그 말씀 하려고 오신 건 아니죠?”
은성은 불만이 가득해 보였지만 다행히 본론으로 넘어갔다.
“전에 들은 말에 대한 답을 해 주려고 해.”
“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뭘요?”
“처음부터 말했잖아. 네 조건은 다 따라 준다고.”
“하지만 전 선생님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요. 전 이제 그 일로 더는 선생님과 말씀 나누고 싶지 않아요.”
“나시연, 네가 여전히 오해하는 게 있는데.”
그가 시연과의 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다가왔다. 시연은 굳이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물러서면 자신의 의지를 굽히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내가 한다면 해. 네게 선택권은 없어.”
그의 나른한 숨결이 느껴질 만큼 둘 사이 간격이 좁아졌다.
“전 애초에 선생님께 결혼 제안을 드린 적이 없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네?”
이젠 그를 올려다보는 것도 힘들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시연은 애써 침착한 척했다. 은성이 조금 발그레한 그녀의 볼을 손가락 등으로 쓸었다. 시연이 놀라 움찔했다.
“이건 너와 나 사이가 아니라, 나와 너희 부모님 사이의 정략결혼이야.”
시연의 턱을 붙잡은 손이 그녀의 시선을 그에게 단단히 옭아맸다.
“먼저 추가 계약서를 써 주는 건.”
느릿한 말투가 의식마저 침습해 그녀의 도망을 막았다.
“내가 네게 해 주는 배려야.”
그의 얼굴이 점차 그녀에게로 내려왔다. 마주친 시선이 어디로도 튀지 못하고 서로만을 응시했다.
그에게 붙잡힌 시연이 한순간 긴장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은성의 시선이 멀리서 둘을 지켜보는 승률에게 잠깐 날아갔다. 이후 그는 그대로 시연에게 입술을 겹쳤다.
“……!”
시연이 제 입술에 닿은 그의 감촉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부드럽게 허리를 끌어안는 손길에 자신도 모르게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가 그녀의 입술을 느리게 빨아들였다. 아랫입술을 머금고는 혀로 스윽 핥았다.
순간 자신이 뭘 하는지 깨달은 시연이 황급히 입술을 떼고 그를 밀어냈다. 얼굴을 잔뜩 붉히고는 한 손으로 제 입술을 가렸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에요!”
곁눈으로 벤치를 보자 승률이 절반쯤 다가온 채 머뭇대며 쳐다보았다. 시연이 다시 은성을 쏘아보았다.
“대체 제게 뭘 바라시는 거예요!”
은성이 그녀의 입술을 짓누르는 손을 천천히 잡아 내렸다.
“입술 부어.”
“놔요!”
시연은 은성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를 나무라는 눈빛이 거셌다.
“절 부끄럽게 하려고 오신 거예요? 어떻게 친구도 있는데 그런 행동을…….”
차마 말끝을 맺지 못한 시연이 고개를 돌렸다. 실은 그와의 키스에 너무 당황해 지금 상황을 정돈하기 힘들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아서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은성이 그녀의 양 팔목을 거머쥐었다. 그녀의 시선을 끌어 올리고 정신 차리라는 듯 으름장을 놓았다.
“부끄러워? 이게 뭐가 부끄러워? 길거리에서 입 맞추는 정도로 부끄러울 거면 사랑을 어떻게 하려고? 나와 섹스는 어떻게 하려고?”
“뭐…라고요?”
거세게 흔들리는 시연의 동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그녀를 더욱 압박했다.
“결혼하면 밤낮 가리지 않고 서로 살 맞대며 살 텐데, 왜, 직접 해 보니 부끄러워서 못 하겠어?”
“부끄럽지 않아요. 전 단지 동의도 없이 그런 행동을 한 걸…….”
“그래? 그럼 다행이네. 앞으론 누구 앞에서든, 뭐든, 할 수 있는 사이가 될 테니 말이야.”
“전 선생님과 결혼….”
“꽤 느끼는 거 같던데. 해 보니 키스 정도는 별거 아니지?”
순간 시연은 대꾸할 말을 잃었다. 그가 더 기세 좋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나는 안 되는 것처럼 말하더니 알아서 눈도 잘 감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부탁해. 모르는 건 내가 친절히 알려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얼어붙은 시연의 곁으로 승률이 다가왔다.
“나시연, 괜찮아?”
“방금 우리 못 봤어? 오랜만이라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데 좀 기다리지 그랬어. 학생.”
시연 대신 은성이 나서 승률을 나무랐다. 승률은 그를 잠깐 쳐다본 후 어색한 듯 머뭇거렸다. 은성이 지갑에서 명함과 지폐 몇 장을 꺼냈다.
“장승률 학생, 앞으로 내 예비 신부 잘 좀 부탁하지.”
그는 승률에게 저녁값을 쥐여 주며 시연을 넘겼다. 볼일이 끝난 듯 그대로 돌아서 멀어지는 은성을 승률이 잠깐 쳐다보았다.
“나시연, 정신 차려 봐!”
시연은 뒤늦게 숨을 크게 터트렸다. 그가 가고 난 뒤에야 전신을 옭아맨 줄이 풀린 느낌이었다. 부끄러움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은성에겐 아니라고 했지만 어딘가로 숨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괜찮아? 저 남자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시연은 풀린 다리가 무너지지 않게 애써 중심을 잡았다. 겨우겨우 방향을 돌려 천천히 길을 되돌아갔다.
“나 때문에 괜히, 미안해.”
“미안하긴. 그런데 너 진짜 괜찮아?”
멀리서 보원이 둘을 발견하곤 뛰어왔다.
“보원이 왔다. 일단 가자.”
시연은 보원을 핑계 대고 말을 미뤘다. 지금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던지고 간 말의 여파가 너무 커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들었다.
“뭐야? 나 빼고 가려던 거야?”
다가온 보원이 삐진 척했다.
“그런 거 아니야, 방금 시연이….”
“얘들아, 미안한데 나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아.”
시연이 승률의 말을 가로막았다.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얼마나 뛰어왔는데!”
“미안해. 내가 나중에 진짜 크게 한턱낼게. 미안, 정말 미안해.”
“그래. 급한 일 있으면 가 봐야지.”
승률은 금방 시연을 두둔했다. 보원의 노기가 승률에게로 옮겨 갔다.
“뭐? 야, 장승률!”
“이해해 줘서 고마워. 얘들아, 그럼 나 먼저 갈게. 미안해.”
따라나서려는 보원을 승률이 붙잡으며 소리쳤다.
“들어가서 일찍 좀 쉬어!”
시연의 뒤로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시연의 머릿속은 금세 은성과의 일로 가득 찼다.
[꽤 느끼는 거 같던데. 해 보니 키스 정도는 별거 아니지?]
[나는 안 되는 것처럼 말하더니 알아서 눈도 잘 감고.]
그녀가 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들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실이었다. 그가 분명 다가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자신은 그를 밀치지도, 막지도 못했다.
단지 말로 동의하지 않았다고 탓하는 자신보단 그의 말이 더 정확했다.
그의 입술은 녹을 것처럼 부드러웠고 감미로웠다. 잠깐이었지만 입술이 맞닿는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절대 안 된다고 말했던 자신의 몸은, 배덕하게도 그를 간절히 바랐다. 미쳤다. 그 마음을 들키면 안 됐는데, 다정하게 끌어당기는 그에게 단숨에 무너졌다. 승률이 보는 것도 잊고 그 순간엔 그 하나만 느껴졌다.
허탈하게 거리를 걷는 시연의 눈가로 어느덧 눈물이 고였다.
“언니… 미안해……. 흑….”
언니의 마음만큼은 배신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뚝……. 뚝…….
시연이 지나간 길 위로 짙은 자국이 번졌다.
* * *
7년 전.
“시연아, 어딨니? 이리 나와 봐.”
오랜만에 새엄마의 목소리가 매우 밝았다. 시연은 이럴 때 엄마에게 잘 보이기 위해 최대한 착한 표정을 짓고 천천히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집이 좀 누추하죠? 호호호. 가구들을 빨리 바꿨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이쪽에 앉아요.”
“네, 감사합니다.”
거실은 낯선 손님으로 시끌벅적했다. 가장 먼저 시연의 눈에 들어온 건 다른 때와는 달리 매우 화려하게 차려입은 언니였다. 소혜는 웬 낯선 남자와 조금 떨어져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와, 예쁘다…….’
가족을 향해 걸어가며 시연은 언니의 옷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 저기 오네요. 시연아, 이리로 와 인사해.”
평소와 달리 살갑게 대하는 어머니가 좋아 시연은 들뜬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인사해라, 언니 약혼자야.”
시연은 얼굴도 보지 않고 고개 먼저 숙였다.
“안녕하세요, 나시연입니다.”
속으로 그녀는 손님이 올 줄 알았다면 자신도 예쁜 옷을 골라 입을 걸, 생각했다. 매일같이 입는 민무늬 원피스가 부끄러웠다. 새엄마가 즐거운 듯 계속 웃었다.
“소혜와는 달리 아직 많이 어리고 철이 없어요. 호호호.”
“그런가요? 그렇게 철없어 보이지는 않는데.”
낮고 무게 있는 목소리였다. 시연은 자신에 대해 말하는 언니의 약혼자를 보았다. 그는 언니에게 어울리는 근사한 슈트 차림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와 마주쳤다.
“안녕, 난 지은성이라고 해. 스물둘이고. 넌 몇 살이야?”
“…….”
순간 시연은 그를 보고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는 옅게 웃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짧았다. 제 가족들과는 달리 짙고 검은 머리카락이 인상 깊었다. 사람을 마주하는 눈빛도 매우 섬세했다.
뭐랄까, 이러면 안 되지만 시연은 그를 본 순간 반했다.
“어머나, 얘가 왜 이렇게 예의가 없어? 나시연?”
새엄마가 시연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시연은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은 방금 본 언니의 약혼자 얼굴로 가득했다.
머리카락처럼 짙고 반듯한 눈썹에 군더더기는 없었다. 눈매도 날렵하고 콧날도 우아했다. 비스듬하게 말아 올린 입꼬리는 꼭 자신을 향한 것 같았다.
“시연아, 나시연?”
이번엔 아버지가 그녀를 재차 불렀다.
“괜찮습니다. 그냥 두십시오.”
“허허, 애가 좀 놀란 모양입니다. 우리 둘째 딸은 열넷입니다.”
“시연아, 언니 옆에 와.”
시연은 소혜의 음성에야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옆에 앉아 언니 뒤에 얼굴을 숨겼다.
“어머머? 쟤가 왜 저래?”
“그냥 두세요, 어머니. 시연이 좀 놀라서 그래요.”
새엄마의 핀잔 서린 말투에 소혜가 시연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시연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언니의 약혼자에게 심장이 뛰면 안 되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이 계속 떠올라 떨림이 잦아들지 않았다.
“이렇게 먼 곳까지 찾아와 줘서 고맙습니다.”
“말 낮추십시오, 나 사장님.”
“허허, 이거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네….”
“괜찮습니다.”
아버지와 대화하는 그의 정중한 목소리만 연이어 시연의 귀에 쏙쏙 박혀 들어왔다.
“이렇게 빨리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는데 제대하자마자 좀 미안하기도 하고….”
“저는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우리 소혜를 잘 봐줘서 정말 고맙네.”
“별말씀을요.”
대화 사이 새엄마가 부엌에서 직접 거대한 과일 쟁반을 들고 나왔다. 시연은 평소 보지도 못하던 과일들이 즐비했다.
“이것 좀 들면서 담소 나눠요. 평소 우리가 먹던 것들인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선경은 은근슬쩍 말을 낮추었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시연의 시선이 좋아하는 과일을 따라갔다. 친구네 집에서 우연히 한 번 먹어본 것인데 망고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비싼 종류였다.
“시연아, 너 이거 좋아하지? 자, 먹어.”
소혜가 내민 포크에 시연이 조심히 얼굴을 내밀었다. 다행히 언니의 약혼자는 아버지와 대화하느라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포크를 받아든 시연이 빙그레 웃으며 망고를 입에 쏙 넣었다.
달고 향긋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맛이었다.
“넌 이거 먹어.”
순간 다른 포크가 시연의 눈앞에 드리웠다. 새엄마의 손이었다. 새엄마가 내민 과일은 접시 가장자리를 장식한 바나나였다.
“너 이 바나나 못 먹어봤지? 평소 먹던 바나나 아니야. 이것도 네 입맛에 꼭 맞을 거야.”
시연은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인진 모르지만 바나나만 보면 체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연이 새엄마의 손에서 천천히 바나나를 받아 들었다.
“자, 소혜는 망고 먹어. 넌 어떻게 맨날 동생 챙긴다고 먹지를 않니? 우리 딸이 이렇게 착하다니까. 호호호.”
새엄마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시연은 손에 들린 바나나를 억지로 입에 욱여넣었다. 역시나 씹자마자 바로 토기가 일었다. 시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허리 숙여 인사한 그녀가 후다닥 2층으로 뛰었다.
“어머머!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새엄마의 타박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어 아버지, 언니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런, 시연이 오늘 많이 긴장한 모양이네.”
“제가 잠깐 가 볼게요.”
“주인공이 어딜 가? 놔둬. 나중에 한소리 해야겠어.”
시연은 바로 제 방 화장실로 뛰어가 문을 닫았다. 변기 뚜껑을 열자마자 목에 걸린 바나나가 올라왔다.
“욱, 우욱!”
어째서 바나나만 보며 목이 꽉 막히는지 그 이유는 몰랐다. 시연의 눈가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새엄마도 제 그런 증상을 모르지 않는데 이런 자리에서 바나나를 내민 게 이해되지 않았다.
“흑…….”
구역질은 금세 멈췄지만 시연의 눈에선 계속 눈물이 흘렀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마음과 얼굴을 정돈한 그녀가 화장실을 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발은 화장실 문 앞에서 멈추었다.
“아… 집을 좀 구경하다가 문이 열려 있어서…….”
시연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거울을 보고 나오긴 했지만 아직 눈과 코가 빨갰다. 그녀와 마주친 은성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괜찮아? 아까 안색이 안 좋아 보이던데.”
시연은 더 물러날 곳 없는 화장실 문에 바짝 붙었다.
“여, 여긴 제 방이에요.”
“그런 것 같네.”
뭐지? 시연은 제 방이라고 하면 그가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태연하게도 별것 없는 방을 둘러보며 조금씩 더 거리를 좁혔다.
“언니는… 어디 갔어요?”
“옷 갈아입으러.”
“아…….”
시연이 끄덕거리는 사이 그는 방향을 틀어 책상으로 걸어갔다.
“책을 좋아하나 봐.”
그녀가 조금씩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냥… 심심할 때 봐요.”
“그래? 그런 것치곤 재밌는 책들이 많네.”
시연은 그가 조금 이상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제 책상엔 재밌다고 할 만한 책들이 없었다. 교과서를 제외하곤 남들은 지루하다고, 혹은 나이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녀가 느리게 다가가는 사이 그가 갑자기 돌아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한참 응시했다.
“왜, 왜요?”
그의 고개가 미세하게 기울어졌다.
“너 좀 신기한 것 같아.”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시연의 눈동자가 주변을 한 바퀴 데구루루 굴렀다. 그가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성큼 다가왔다. 커다란 손이 위로 올라가더니 그녀의 머리 위에서 멈췄다.
“머리 쓰다듬어도 돼?”
시연은 여태 제게 그런 걸 물어본 사람이 없어 난감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히 내려앉은 손이 그녀를 따뜻하게 쓰다듬었다.
“언니와는 머리카락 색이 좀 다르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중얼거리듯 말하는 그에게서 시원한 향이 났다. 그가 제 머리를 쓰다듬는 느낌이 신기하게 기분 좋았다.
“오빠는 꼭 어른 같네요.”
“오빠?”
짧게 되묻는 말에 시연은 실수했나 싶어 머뭇거렸다. 그런데 머리 위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내가 어른 같아?”
시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머리로 전해지던 온기가 떠나는 게 아쉬웠다.
“어른이니까 약혼하는 거 아니에요?”
순간 그의 입술에 머물던 미소가 싹 사라졌다. 내내 온화하던 목소리도 어딘지 모르게 차가워졌다. 그의 시선이 그녀가 아닌 어딘가를 공허하게 떠돌았다.
“어른이니까 약혼하는 거 맞지. 어른이니까 약혼해야겠지.”
그녀는 확실히 자신이 무언가 실수한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연아?”
문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연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언니!”
그녀가 소혜에게 달려가 안겼다. 소혜가 시연을 안쓰럽게 내려다보며 은성의 손길이 닿았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속은 괜찮아? 언니가 바로 못 따라가서 미안해.”
“아니야, 금방 괜찮아졌어. 언니 옷 왜 갈아입었어? 그 옷 입으니까 언니 여왕처럼 예뻤는데.”
소혜가 수줍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랬어? 언니 예뻤어?”
“응! 엄청 예뻤어!”
“그럼 그 옷 우리 시연이 줄까?”
“정말? 근데 나한테 맞을까? 맞춤옷 같던데….”
“나소혜 씨, 그만 내려가죠.”
정다운 대화에 냉정한 음성이 툭 끼어들었다. 말갛던 소혜의 얼굴에 긴장이 스몄다.
“그럴까요?”
은성을 따라 소혜와 걸어가며 시연이 조그맣게 물었다.
“언니, 근데 언니는 오빠를 뭐라고 불러?”
“오빠?”
“응. 언니 약혼자 스물두 살이라며. 그럼 우리한테 오빠잖아.”
소혜가 또다시 따스하게 웃었다. 긴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살랑이는 것 같았다.
“우리 시연인 좋겠다. 지은성 씨 편하게 불러서.”
“응?”
“넌 계속 그렇게 불러.”
“그럼 언니는 뭐라고 부르는데?”
“글쎄…… 지금은 지은성 씨?”
“아…… 어른이 되면 그렇게 부르는구나.”
잔잔하게 웃는 소혜의 미소가 시연은 마냥 좋았다. 꼭 잡아주는 언니의 손도 좋았고 은성과 번갈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도 좋았다.
계단을 내려가며 시연은 언니를 물끄러미 보았다. 은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언니의 볼이 발그스레했다. 아마도 언니 역시 은성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긴 저렇게 잘생기고 멋있는 남자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시연이 폐 가득 숨을 욱여넣었다. 언니의 약혼자를 좋아할 순 없었다. 이제부턴 언니의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다.
* * *
친구들은 은성과 결혼하는 걸 반대했다. 언니의 약혼자는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하지만 시연이 예상했듯 그들의 반대완 상관없이 결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들도 결국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HLA 그룹은 사실 생각지도 못했는데…. 호호호!”
숨기지 못한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거실에 퍼졌다. 시연은 방으로 올라가며 들은 웃음을 모른 체했다.
“정말 다행이에요. 실은 HLA가 딱 우리 혼처였던 거지. 소혜가 살아서 지 사장 짝이 되었다면 훨씬 더 좋았겠지만 어쩌겠소. 먼저 간 자식은 가슴에 고이 묻어 두고, 남은 사람이라도 어떻게든 살아야지.”
아버지조차 시연과 은성의 결혼을 매우 흡족해했다.
“에휴, 불쌍한 우리 소혜. 소혜야, 미안하다. 엄마가 너한테 큰 죄를 짓고 마는구나….”
선경의 말과는 달리 목소리는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그만큼 소혜가 떠나고 시간이 흐른 데다 이젠 정말 집안을 생각할 때였기 때문이다.
선경이 음성을 높였다.
“사실 뭐, HLA에서도 잘된 거지. 시연이 핏줄이 보통 핏줄이에요? HLA하고 혼사 그렇게 되고 나서 우리가 얼마나 어려웠어요? 처음부터 이렇게 되는 게 맞지.”
“어쨌든, 지 사장이 마음을 돌려 시연이와 결혼한다니 이 얼마나 잘된 일이오?”
선경의 음성이 표독스러워졌다.
“당신, 어째 소혜 때보다 더 좋아하는 것 아니에요?”
“당신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지금 그런 거 따질 상황은 아니지 않소. 사실 다른 거 다 두고 나이 차만 보면 지 사장과 소혜가 더 낫긴 했지. 시연이는 아직 어리잖아요.”
“걔가 어리긴 뭐가 어려요? 나는 스물에 소혜 낳은 거 몰라요?”
“허허, 또 옛날얘기는 뭐 하러 꺼내요?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다 잘못했어요.”
언제나 똑같은 패턴으로 흐르는 부모님의 대화를 들으며 시연은 제 방문을 닫았다.
은성이 말한 대로 결혼은 자신이 하려 했던 계약 결혼이 아니라, 집안끼리 하고자 했던 정략결혼이었다.
“후우…….”
깊게 한숨을 내쉰 시연이 침대에 푹 주저앉았다. 부모님과 함께 은성을 만나고 오니 온몸의 진이 다 빠졌다.
[저는 결혼을 최대한 서두르고 싶습니다만.]
[어머나! 하긴, 지 사장은 이제 나이도 있으니 그렇겠네.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어.]
[결혼 준비는 제 쪽에서 다 알아서 할 테니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어? 그리고 우리도 챙길 건 또 빠짐없이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둘이 잘 사는 모습만 보면 좋겠어. 호호.]
조금 이상하다면 은성의 집안에선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본가가 미국에 있기에 그에 대해선 이해한다는 듯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지잉.
짧은 진동에 시연이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다음 주말에 시간 비워 둬.>
은성의 메시지였다. 시연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저 시연이에요.”
-지금 바빠. 메시지 남겨.
전화는 대꾸할 새도 없이 끊어졌다. 시연이 또 크게 한숨을 쉬었다.
지이잉. 지이이잉.
이번에 온 전화는 보원이었다.
“응, 보원아. 나야.”
-어떻게 됐어? 상견례는 끝났어?
“응.”
-와, 네가 진짜 시집을 가긴 가는구나!
보원이 이제 실감이 나는지 우는 내색을 했다. 시연은 이상하게 여태 아무렇지 않다가 보원의 우는 척에 코끝이 찡해졌다.
계약 결혼이든 정략결혼이든 결혼은 결혼이었다. 제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결혼. 그 결혼 앞에서 부모님은 시연의 마음이 어떨지는 생각해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직 시연이 어리다고 한 말이 다였다.
“네가 그러니까 나 진짜 결혼하는 것 같아.”
그녀가 먹먹함을 누르고 말했다.
-진짜 결혼이지, 그럼 이게 가짜 결혼이야?
“그래도 6개월만 버티면 되니까 참아 보려고.”
-그래. 나도 처음엔 너의 그 생각이 참 황당했는데, 네 상황 이렇게 흘러가는 것 보니까 잘했다 싶어. 안 그랬으면 원치도 않는 결혼에 평생을 저당 잡힐 뻔했잖아.
보원의 말대로였다. 그런 상황을 피하고 싶어 먼저 결혼할 사람을 구했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라면 그 상대가 하필 친구들도 반대한 지은성이라는 점이었다.
그녀 역시 가장 피하고 싶은 남자.
“결혼식에 올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해?
버럭 터지는 화에 시연이 짧게 웃었다.
“참, 보원아. 나 다음 주말에 시간 안 될 것 같아. 선생님이….”
-선생님?
“아, 이젠 정말 그렇게 부르면 안 되겠다. 지 사장님이….”
-지 사장님?
이번에도 되돌아온 호칭에 시연은 잠시 난감해졌다.
-너 결혼한 후에도 그렇게 부를 건 아니지?
“아니야. 나 지은성 씨라고 잘해. 아직 입에 안 붙어서 그런 것뿐이야.”
-그래. 이왕 하는 거 책잡히지 않게 잘해. 그래야 나중에 이혼도 순순히 해 줄 것 아니야. 계약서는 잘 받아 놨지?
“응. 사업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그런 건 철두철미하게 하더라고.”
-그나마 다행이다.
또 잠깐의 틈을 타 한숨이 오갔다. 시연은 애써 목소리 톤을 높였다.
“결혼하면 우리 집에서 같이 과제 하자.”
-정말? 그래도 돼?
“그럼! 은성 씨는 바빠서 아마 집에도 잘 안 들어올걸?”
-우와! 그럼 우리 집에서 막 야식 시키고 그럴까?
“그래, 그러자! 맛난 것 잔뜩 시켜 먹자.”
둘은 잠시 키득거렸으나 분위기는 또 금세 가라앉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한숨을 시연이 모른 체했다.
“내 부케, 넌 절대 잡지 마.”
-왜?
“너는 나처럼 일찍 결혼 안 했으면 좋겠어. 공부도 맘껏 하고, 연애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하고 싶은 것 전부 다 한 후에,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싶으면 그때 해.”
-…….
“알았지, 구보원?”
-알았어…….
“고마워.”
시연이 맑게 웃었다. 제 눈에 고인 눈물은 외면한 채 보원에게 당부하며 하하 웃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시린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 * *
은성은 정말 결혼을 서둘렀다. 말로는 여름이 지나면 회사 일이 바빠 시간을 내기 어렵다고 했다. 그래도 시연은 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은 몰랐다.
매미가 우는 여름 초입, 시연은 어느덧 갓 결혼한 신부가 되어 있었다. 신혼여행도 가지 못한 채, 새신랑은 얼굴 보기도 힘든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응. 아파트에서 조금 둘러 오긴 했는데, 그래도 잘 찾아왔어.”
시연의 귀갓길은 여느 때와 비슷했다.
-집 비밀번호 읊어봐.
보원과 통화하며 시연이 짧게 웃었다. 어제 비밀번호를 틀렸다고 했더니 보원이 그걸 짚었다.
“이제 안 틀려. 애도 아니고 그걸 계속 틀리면 학교 관둬야지.”
말한 대로 그녀는 본가와 다른 비밀번호를 차곡차곡 누르곤 문을 열었다. 신혼집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였다. 시연은 은성의 회사와 가까운 곳도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 네가 애가 아니니 결혼을 했지.
“그럼 우리 내일은 다들 별일 없으니까 꼭 뭉치는 거다.”
시연은 무심코 신을 벗고 집안으로 올라섰다. 제 일로 바빠서 친구들에게 한턱 산다는 약속을 여태 지키지 못했다.
-알았어. 몇 번을 말해? 내일은 점심때부터 쫄쫄 굶을 거니까 너 단단히 각오해야 할걸?
또 얕은 웃음이 시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연이 거실로 들어섰다. 걸음은 제 방이 아닌 창가로 향했다. 그녀가 빛을 가린 커튼을 죽 걷었다.
“하하, 알았어. 그럼 내일 봐.”
통화를 끊은 시연은 남은 커튼도 잡아 창가로 밀었다.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아침에 내가 커튼을 안 걷었나?”
저녁에 커튼을 치고 아침엔 활짝 걷어 놓았다.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뒤를 돌았다.
“내가 쳤어.”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시연이 움찔했다. 은성이 부엌에서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의 차림에 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방금 샤워한 것인지 하체에 수건 하나만 두른 채였다. 시연은 그대로 뒤를 돌았다.
“어, 어쩐 일이세요? 이 시간에?”
“옷 갈아입으러 왔어.”
“아, 네…….”
시연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가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솟았다.
결혼했지만 여태 은성과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결혼식 후 바로 회사로 직행했고 집에선 방을 따로 썼다. 은성은 집에 와도 몇 시간 머물지 않았다. 늦은 밤이나 새벽에 문소리가 들리면 그가 왔거나 나갔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잘 웃네?”
“네? 네…. 참, 커튼 다시 쳐 드릴게요!”
시연이 서둘러 커튼을 쳤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와중에 그녀의 시선은 부엌 근처도 가지 않았다.
“그럼 준비하세요. 전 제 방으로…….”
그녀가 시선을 잔뜩 내린 채 발길을 떼려는데 소리 없는 걸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매일 지금 들어와?”
“그, 그건 아니고… 오늘은 오후 수업이 어, 없는 날이라…….”
시연은 입이 좀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놀라고 어색해하는 티가 제 생각에도 너무 심할 정도로 났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만에 본 그가 제 앞에서 거의 벗다시피 하고 있으니 심장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빨리 뛰었다.
“그래?”
“네……. 그, 그런데 저… 오, 옷을 좀 입으셔야…….”
시연의 말에 은성이 피식 웃었다.
“알았어.”
그의 대답에 시연이 조그맣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옷 입고 나와서 잠깐 얘기 좀 해.”
“네?”
그대로 상황이 끝날 줄 알았던 시연이 뜻밖의 말에 놀라 시선을 들었다. 그러나 물기 맺힌 그의 맨 가슴을 보곤 금세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얼굴이 새빨개졌다.
“얘, 얘기요?”
“그래. 우리 결혼하고 그간 얼굴도 거의 못 봤잖아.”
“네! 알겠습니다.”
시연은 교수를 대하듯 뻣뻣하게 대답하곤 그대로 방으로 내달렸다. 쾅. 문을 닫은 그녀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가 완전히 풀렸다. 길에서 그가 키스했을 때보다 더 심했다. 그간 그가 무심하게 일만 해 너무 긴장이 풀려 있었다. 동거하면 이런 상황이 생길 줄 예상하고 대비했어야 했는데.
잠시 후 심장을 대충 추스른 시연이 조심히 거실로 나왔다. 부엌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과일이라도 있으면 깎을 생각이었다.
“거기서 뭐 해?”
그런데 또다시 들린 목소리에 그녀가 화들짝 몸을 떨었다. 급히 허리를 펴며 잡고 있던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런데 허둥대다 실수로 제 손가락을 끼이고 말았다.
“앗! 아파….”
손가락을 빼낸 시연이 다른 손으로 다친 손을 붙잡았다. 은성이 성큼 다가와 시연의 다친 손을 가져갔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꽤 크게 터진 음성에 시연이 그를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이리 와.”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곤 그녀를 제멋대로 끌고 갔다. 시연은 은성이 하는 대로 끌려가 소파에 얌전히 앉았다.
“손가락 움직여 봐.”
다친 손은 왼손 중지와 약지였다. 살짝 움직여보니 중지가 아팠다. 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많이 아파?”
“아, 아뇨. 중지가 약간 불편해서요.”
은성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구급약 상자를 꺼내왔다.
“약지는 괜찮은 거지?”
“그런 것 같아요….”
그는 그녀의 손을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뼈는 괜찮은 것 같다며 중지에만 붕대를 감았다. 치료를 마친 그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뭐 좀 마실래?”
“제가 가져올게요!”
“앉아 있어.”
그는 여전히 좀 화난 듯했지만 아까보단 나아 보였다. 사실 시연은 손을 다친 것보다 그가 화를 내 더 놀랐다. 예전에 그는 잔소리가 많았다면 지금은 화가 많았다. 아무래도 그와 지내는 동안은 제 몸이라도 부주의로 다치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냉장고에서 주스 한 잔을 따라 와 시연에게 내밀었다.
“왜 한 잔이에요?”
“난 됐어. 그런데 냉장고가 많이 비었네. 장을 좀 봐야 할 것 같아.”
“이따 제가 다녀올게요.”
“그 손으로 뭘 한다고. 오늘은 저녁에 일찍 올 거니까 같아 나가.”
“네?”
“왜? 어디 가?”
“아, 아뇨. 알겠습니다.”
시연은 그가 장을 같이 보자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지금처럼 그는 없는 듯 회사에 다니고 자신은 학교에 다니며 각자 생활만 할 줄 알았다.
잠시 어색함이 돌았다. 은성은 아까와 달리 셔츠에 바지 차림이었다. 아마도 곧 다시 회사에 갈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까 할 말이 있으시다고…….”
그녀의 질문에 그가 마주 앉아 빤히 쳐다보았다. 시연은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 괜한 생각을 했다.
“다음 주부턴 많이 늦진 않을 거야.”
“네….”
“그리고 이번 주말엔 어디 갈지 생각 좀 해 놔.”
“…네?”
“신혼여행은 여름휴가 시즌을 이용해서 갈 생각이야. 지금은 아쉽더라도 1박 2일 정도로 해.”
“…….”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은성은 곧장 눈썹을 구겼다. 시연은 정신을 다잡았다.
“그러니까 지금 말씀이… 이번 주말에 여행을 가자는 건가요? 그것도 1박 2일로?”
“1박이 못마땅하면 2박 정도는 어떻게든….”
“아,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세차게 내젓는 시연의 양손에 은성의 잘생긴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그런 말이 아니면?”
“방금 말씀은, 저와 여행을 가자는 건가요? ……단둘이?”
“그럼 부부 여행에 둘이 가지, 있지도 않은 애를 데리고 셋이 갈까?”
은성이 확실히 못마땅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녀가 대꾸하기도 전에 불만 담은 잔소리를 뱉었다.
“나시연, 지금 너와 나 결혼했어. 부부라고. 그리고 넌 전에 분명히 말했어. 결혼하면 보통의 부부가 하는 모든 걸 다 할 생각이라고.”
“……네.”
“나도 마찬가지야. 너와 모든 걸 할 생각이야. 그러니까 이제 그런 어리숙한 표정 그만 지어.”
시연의 동공이 잠깐 흔들리다 멈추었다.
“그러네요. 제가 계속 어리숙한 상태로 있었네요. 죄송해요. 정신 똑바로 차릴게요.”
“이제라도 알았으면 앞으론 내가 신경 쓰지 않게 조심해.”
“네. 은성 씨, 말 여러 번 하는 거 싫어하시죠. 주의할게요. 신경도 쓸 거고.”
알아들었다는 듯 시연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손 치료해 주신 건 감사해요. 이젠 이런 일도 없을 거예요. 여행지는 생각해 볼게요. 그럼 전 방에 있을 테니까 나가기 전에 혹시 필요한 것 있으면 부르세요.”
말을 마친 그녀가 소리 없이 방으로 걸어갔다. 시연이 들어가는 걸 확인한 은성이 고요히 한숨을 내뱉었다.
* *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시연은 그가 퇴근해 집에 올 때까지 무슨 정신으로 시간을 보냈는지 몰랐다.
결혼식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부지불식간에 지나갔고, 눈을 떠 보니 은성과 한집에서 살고 있었다. 처음에 위협적으로 보이던 그는 결혼 준비로 바빴는지 한동안 코빼기도 보기 힘들었고, 그래서 시연은 잠깐 긴장이 풀려 있었다.
그걸 그가 콕 집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실은 마지막에 감정적으로 대한 것까지 모두 자신의 실수였다.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인터폰에서 흐르는 기계적인 말에 시연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후… 잘하자. 잘할 수 있어.”
은성이 도착했다는 말에 또다시 그녀의 몸에 긴장이 깃들었지만 이제는 실수할 수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나시연.”
그래도 어쩌면 생판 모르는 남자보다 지은성이 남편이라 다행일 수도 있었다. 낮에 그의 벗은 몸을 보고 놀랐던 걸 생각하면……. 만약 다른 남자가 제 앞에 벗고 서 있었다면 비명을 질렀을지도 몰랐다.
“언니, 미안해. 딱 6개월만 눈감아줘….”
이젠 돌이킬 수도 없었다. 제 의지가 아니라 부모님의 의지로 하게 된 결혼, 그래도 6개월이란 기간을 달았으니 언니에게도 덜 미안할 수 있었다.
시연은 혼자 갖은 핑계를 대며 은성과의 부부생활을 합리화했다. 이제부턴 정말 실수 없이 본격적으로 잘해내고 싶었다.
드륵.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도 없이 현관문이 열리자 시연이 흠칫했다. 그러나 얼른 그에게 다가가 살갑게 손을 내밀었다.
“문은 어떻게 연 거예요?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안 들렸는데.”
그가 그녀의 빈손을 쳐다보았다.
“지문 등록 안 했어?”
“아, 지문.”
시연은 재킷을 받아들기 위해 그를 졸졸 따라갔다.
“금방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네, 그럴게요.”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가 문득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그 손은 뭐야?”
시연은 손을 조금 더 올렸다. 보지 못한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재킷 벗어 주세요.”
그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툭 내뱉었다.
“이상한 드라마 보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그러더니 곧장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혼자 남은 시연의 얼굴이 점차 빨개졌다. 그녀는 쪼르르 제 방으로 달려가 보원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너 내가 아침 드라마는 안 된다고 말했지!
친구를 탓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한숨을 푹 쉰 시연이 지갑과 겉옷을 챙겨 거실로 나갔다.
“손은 좀 괜찮아?”
그는 벌써 준비를 마치고 부엌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살 건 제가 적어 뒀어요.”
“그래? 손 계속 아프면 병원부터 들러.”
“아뇨, 아까보다 훨씬 나아요. 자고 나면 완전히 괜찮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아프면 바로 얘기해.”
“네.”
시연이 은성의 뒤를 따라 바삐 집을 나섰다.
그는 근처 대형 상점으로 차를 몰았다. 은성의 옆자리에 앉은 시연은 다잡은 마음에도 또다시 금세 어딘가가 불편해졌다. 은성과 함께 차를 타면 제 자리는 항상 뒷좌석이었다. 그의 옆자리엔 언니가 탔었다.
“왜? 아파? 병원 갈까?”
“아뇨. 괜찮아요.”
“괜찮은데 표정이 왜 그래?”
시연은 제 표정이 어떤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들으니 또 실수한 것 같았다.
“배고파서 그런가 봐요. 실은 점심을 걸렀거든요.”
그의 구겨지는 미간은 언제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예전에 그가 어른들과 함께 있을 때 매우 못마땅한 얼굴을 하는 걸 본 적 있었다. 시연은 그게 꽤 크게 뇌리에 남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얼굴을 찡그리면 부담스러웠다.
“앞으론 밥 거르지 마.”
“오늘은 속이 좀 안 편해서 그랬어요. 앞으론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시연은 무조건 그에게 소리 들을 일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제 몸 상태마저도 그렇게 조절할 생각이었다. 그에게서 싫은 소리는 이제 듣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에 적당히 대꾸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표정은 별달리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지금은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연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식료품을 사는데 그녀가 적어간 목록은 거의 의미 없었다. 시연은 시리얼과 우유, 과일, 주스 등을 사려 했는데 그는 식재료를 담기 바빴다.
“저… 은성 씨? 도우미 이모님은 아직 안 불렀….”
“내가 할 거야.”
그는 시연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손은 달걀에, 눈은 유통기한에 붙어 있었다.
“은성 씨가 밥을 한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가서 토마토나 가져와.”
“토마토?”
그의 지시에 그녀가 토끼 눈을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토마토는 아침 대용으로 종종 먹기에 나름대로 괜찮게 구해 왔다.
“잘 골라 왔어?”
“네!”
다행히 토마토는 그에게 합격 점수를 받았다.
상점을 나오며 시연이 또다시 빈손을 내밀었다.
“왜?”
“짐이 너무 많아요. 저도 같이 들게요.”
그는 물건을 고르는 것부터 계산, 포장까지 거의 혼자 하다시피 했다. 시연은 그의 곁을 빙빙 돌며 도울 걸 찾았지만 내내 거추장스러운 물건이 된 느낌이었다.
“됐어. 괜히 다친 손 덧나.”
“그래도 하나 정도는 괜찮아요.”
그녀가 그의 손에서 봉지 하나를 빼내려 할 때였다. 빵, 소리가 들리더니 그의 손에서 물건이 와르르 떨어졌다.
“위험해!”
시연의 시선은 떨어지는 물건에 있었지만 몸은 전혀 다르게 움직였다. 그가 양손 가득한 물건을 버리고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았다.
“꺅!”
그에게 끌려간 시연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끼이익!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자동차 한 대가 그들의 앞에서 멈춰 섰다. 은성의 품에 폭 파묻힌 시연이 두근두근 뛰는 심장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위험하잖아!”
멈춰선 차 안에서 운전자가 창을 내리고 고함을 쳤다. 은성은 시연의 머리를 다시 제 가슴에 눌러 파묻었다.
“당신, 속도 준수한 것 맞아?”
“뭐? 뭘 잘했다고 속도 지랄이야?”
그가 그녀에게 차 키를 건네며 작게 말했다.
“차에 가 있어.”
그러곤 운전자에게 다가갔다. 시연은 너무 떨려 그가 시키는 대로 얼른 차에 올랐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에 시선이 닿았지만 애써 회피했다.
은성이 뒤돌아 있어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대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운전자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차창을 올리고 가 버렸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차분히 정리했다. 시연은 얼른 차에서 내려 그에게 달려갔다.
“죄송해요. 제가 그만 부주의해서….”
“네가 뭘 죄송해.”
그가 물건 담던 손을 멈추고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네?”
“잘못은 차 운전자가 했는데 네가 왜 죄송하냐고.”
“…….”
은성은 이내 시선을 내리곤 물건을 마저 정리했다.
“앞으론 네가 잘못하지 않은 일에 다신 사과하지 마. 알겠어?”
그는 쓰지 못할 물건은 버리고 나머지만 정리해 차에 실었다. 시연은 집에 돌아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성은 집에 돌아가 괜찮은 식재료들로 저녁을 해 주었다. 이따금 부족한 반찬에 밥을 먹다 말고 미간을 찡그렸지만 대체로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시연에겐 놀랐을 텐데 들어가 쉬라고 말한 후 서재로 들어갔다. 이후 그녀가 차 한 잔을 타 서재 문을 두드렸지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그녀가 묵묵히 발길을 돌렸다.
“꽤 의왼걸? 정말 남편이 식재료를 사서 저녁을 해 줬단 말이야?”
시연의 말에 보원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시연의 표정도 보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연이 식판에 놓인 시금치를 젓가락으로 깨작거렸다.
“원래 스물아홉엔 반찬도 다 할 줄 아는 거야?”
“뭐?”
“어제 은성 씨가 시금치를 무쳐 줬거든. 솔직히 이것보다 훨씬 맛있었어.”
“…….”
계란말이를 집어 먹던 보원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시연은 멍하니 계속 어제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달걀은 거의 깨져서 살아남은 거로 프라이를 해 줬는데 그것도 엄청 맛있었어. 노른자가 살짝 반숙이었는데 따뜻할 때 먹어서 그런가? 왜 다른 것보다 더 맛있었을까?”
“나시연.”
보원이 부르는 말에도 시연은 젓가락으로 계속 계란말이만 쿡쿡 찔러 댔다.
“사랑해.”
“뭐?”
툭 튀어나온 말에 시연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 왔어?”
“방금. 그런데 시연이 표정이 왜 이래?”
보원의 질문에 대답하며 승률이 식판을 시연의 옆에 내려놓았다. 시연이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승률에게 물었다.
“수업 일찍 끝났나 봐?”
“응. 연강인데 교수님이 한 시간만 했어. 일찍 끝난 건 좋은데 다음에 보강할 거 생각하면 으……!”
보원은 승률이 가져온 식판에서 계란말이 한 개를 재빠르게 가져갔다.
“내 걸 왜 먹어! 보니까 시연인 입맛도 없어 보이는데 얘 거 가져가면 되잖아!”
보원이 이미 입에 밀어 넣은 계란말이를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했다.
“시연이 계란말이는 못 먹어. 하도 헤집어놔서 사람이 먹을 게 못 돼.”
절레절레 젓는 보원의 고개에 승률이 이내 수긍하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하긴, 멀리서 봐도 그래 보이더라. 나시연, 너 무슨 일 있어?”
제게 돌아온 초점에 시연이 얼른 밥을 한가득 입에 쑤셔 넣었다.
“이으 무스. 오느 바 마이네….”
“얘 뭐라는 거야?”
“몰라.”
승률과 보원이 마주 보며 구시렁거렸다. 그러다 승률이 국을 떠먹는 시연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해.”
“풉!”
순간 시연이 입 속에 가득한 밥풀을 사방으로 쏟아 냈다. 보원과 승률이 기겁하며 자리를 피했다.
“와, 밥풀 봐!”
“내 밥 못 먹을 뻔했어!”
둘이 밥풀을 털어 내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식탁을 정돈한 시연이 빨개진 얼굴로 승률을 탓했다.
“너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너 아까부터 꼭 사랑에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잖아.”
“뭐?”
승률의 설명에 보원이 시연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가?”
“맞아. 눈은 흐리멍덩하고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얘 눈 초점이 여기 없잖아. 평소랑 달리 뇌는 지금 딴 데 있다니까. 이를테면….”
설득력 있는 말에 보원이 집중해 말꼬리를 이었다.
“이를테면?”
승률은 천천히 시연을 쳐다보았다.
“이를테면…… 남편?”
“아니야!”
친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시연이 벌떡 일어나며 크게 소리쳤다. 주변에서 밥을 먹던 학생들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시연은 재빨리 자리에 앉았지만 재차 부정하기에 바빴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그 사람을 왜 사랑해?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긴 하지. 그런데 넌 장난을 왜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 정말 밥 한 끼에 무슨 감정이라도 생긴 거야?”
보원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장난…이라고…?”
그제야 승률이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시연아, 미안. 난 그냥 웃자고 해 본 말인데… 네가 이렇게 격하게 반응할 줄 몰랐어….”
“…….”
시연은 또 잠시 멍해졌다. 셋은 예전에도 비슷한 일로 이렇게 장난을 치곤 했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야. 내가 딴생각하느라… 내가 미안해.”
“아니야! 미안. 많이 놀랐지? 내가 물 떠다 줄게. 좀 앉아 있어.”
승률은 정말 미안했는지 벌떡 일어나 급수대로 뛰어갔다. 허둥지둥하는 승률의 뒷모습을 보며 시연은 친구들과의 자리에서도 조금은 긴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물!”
맞은편으로 옮겨 앉은 승률에게 시연이 식판을 밀어주었다.
“많이 먹어.”
“그래!”
밥숟가락을 입에 밀어 넣는 승률을 보며 시연이 옅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