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16)

1

시연의 어깨를 스치던 머리카락이 날아올랐다. 꽃샘추위의 냉기를 머금은 바람이 한순간에 그녀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덮쳤다.

“읏, 추워…!”

-도착했다며? 빨리 들어가!

전화기 너머에서 친구인 보원이 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시연은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린 후 인적이 드문 곳에서 음성을 낮추었다.

“네 말대로 이신찬과는 완전히 끝냈어. 겉으론 점잖아 보이더니 고작 6개월짜리 결혼을 하기도 전에 바람은 너무 심했잖아.”

-정말? 잘했어! 증거는 제대로 확보해서 보낸 거지?

“응. 계약도 전부 없던 거로 하자고 전했어.”

-후유, 고생했어. 그래도 어쩌겠니? 우리 조금만 더 힘내자!

“그래. 네가 있어서 정말 든든해.”

보원이 짧게 웃었다.

-끝나면 바로 전화해!

“응.”

시연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주위를 살폈다. 호텔 카페라 그런지 공간도 넓고 사람도 많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썩 좋아하지 않는데 상대가 고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시연은 둘러보다 빈자리를 찾아 걸었다. 마침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를 확인한 시연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이제 우리 통화할 일 없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이거 불법 촬영이라고!

대번에 욕설부터 들렸다. 이신찬의 커다란 목소리에 시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걸음을 늦추었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잘못을 저지른 건 그쪽인데 왜 피해자인 나한테 화를 내요?”

-너 어디야? 지금 만나.

“그쪽이랑은 끝났고, 나도 상황이 급하니 얼른 다른 계약자를 구해야 하지 않겠어요?”

-뭐라고? 지금 어디야? 당장 말 안 해?

말이 통하지 않자 시연은 잠깐 고민했다. 상대와 대화도 끝내지 않고 전화를 끊는 건 거의 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것에 집중할 때였다. 잘못을 저질러 이미 끝난 자와 왈가왈부하는 건 나중에 해도 늦지 않았다.

“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

그래도 바로 끊지는 못하고 끊는다는 말을 전할 때였다.

-씨발! 너 내가 그냥 둘 것 같아?

이신찬은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괴성을 내질렀다. 저급한 말이 커다랗게 울려 퍼질 때 전화기가 그녀의 손에서 쑥 빠져나갔다.

“미친 새끼야, 입조심해.”

묵직하고도 힘 있는 저음이 전화기를 관통해 이신찬에게 전달되었다. 시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화기를 가져간 이가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HLA 그룹에 찍혀서 회사 말아먹고 호적 파이고 싶지 않으면 아가리 닥쳐.”

-……너… 누구야?

놀란 음성이 조그맣게 새어 나왔다. 은성이 시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지은성.”

“…….”

시연은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잠시 헷갈렸다. 어떻게 은성이 눈앞에 있을 수 있을까. 그는 몇 년째 외국에 나가 있었다. 들어온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다. 물론 그가 제게 그 사실을 알릴 이유는 없지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랐다.

그가 전화를 끊어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시연은 전화기를 받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욕…….”

몇 년 만에 본 그에게 처음 건넨 말이었다. 은성은 대번에 색이 짙은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알아.”

그러곤 이어 예전에 선생님일 때처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너 내가 말했었지? 상대가 욕을 하면 가만히 듣고만 있지 말고 더 세게 나가라고. 더 세게 못 하겠으면 최소한 그렇게 얌전히 상대하지 말라고 했지?”

시연은 묵직하게 길어지는 말을 들으며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은성은 키가 더 큰 것 같았다. 188cm에 달하는 그는 지금도 예전처럼 멋있었다.

짙고 반듯하게 뻗은 눈썹이 모인 게 보기 좋았고, 그림자가 지는 오뚝한 콧날은 키처럼 조금 더 높아진 느낌이었다. 날카롭게 쏘아보는 눈빛도 그대로였고, 여자처럼 잡티 없는 피부도 똑같았다. 굳이 달라진 점을 찾자면 눈매가 더 가늘어졌고 턱선이 칼로 자른 듯 날렵하다는 정도였다.

“넌 공부는 배운 대로 잘하는 애가 어떻게 이렇게 여전히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사람을 불안하게 해? 너 이제 성인이야. 예전처럼 청소년기 학생이 아니라고.”

가만히 그의 음성을 듣던 시연이 대꾸했다.

“다음엔 저도 꼭 욕할게요.”

은성은 할 말이 남아 보였지만 다행히 그대로 입술을 닫았다. 그 틈을 타 시연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넌 오랜만에 봤는데 할 말이 그것뿐이야?”

그의 지적에 그녀가 기억난 듯 서둘러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생님이란 호칭에 은성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구겼다. 그녀가 쓰던 호칭이 맞는데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이젠 달갑지 않았다.

시연은 최대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이젠 됐겠지, 하는 생각으로 허리를 폈는데 어쩐지 그의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어 보였다. 시연은 자신이 또 뭘 잘못했을까 고민하다 화들짝 놀랐다.

“아 참! 선생님 도와주신 건 감사한데 나중에 다시 얘기 나누면 안 될까요? 사실 제가 여기 약속이 있어서요….”

은성은 참 예의 바른 시연을 지켜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눈매를 더 늘어뜨리며 느릿하게 팔짱을 꼈다.

“그래, 그렇겠지. 나도 마찬가지니까.”

“선생님도 그러셨구나! 혹시 볼일 끝나시고 시간 괜찮으시면 그때 다시….”

“그럴 필요 없어.”

“네?”

그는 또렷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는 시연을 내려 보았다. 의문을 품고 고개를 살며시 기울이는 시연에게 대답했다.

“네 약속 상대, 나니까.”

“네?”

시연은 그 앞에서 실수하지 않으려 집중했지만 이번에도 단번에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

“그 선생님 소리 좀 그만해. 네 선생 그만둔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소리야?”

“아, 네. 죄송합니다….”

멍하니 사과하는 시연의 손목을 그가 단단히 붙들었다.

“일단 이쪽으로 와. 앉아서 얘기해.”

“네? 네….”

그녀가 그의 힘에 딸려 가 걸었다.

시연은 자리에 앉아서도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사이 카페 직원이 다가와 주문서를 받아 갔다.

“이제 나시연도 커피를 마시네.”

“네, 저도 성인이니까요. 처음엔 써서 좀 힘들었는데 익숙해지니 선생님 말씀처럼 계속 찾게 되더라고요.”

“그 선생 소리 좀 하지 말라고 했지?”

은성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조금 높였다. 시연이 흠칫하며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시연은 차분히 대꾸하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 만나기로 한 상대자를 찾는 눈치였다.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그녀의 눈이 안도의 빛을 띠었다.

“저… 은성 오빠, 그런데 한국엔 언제 들어오신 거예요? 곧 다시 나가는 거죠?”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은성의 미간이 또다시 좁아졌다. 시연은 긴장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넌 내가 다시 나가면 좋겠어?”

“네?”

“자꾸 되묻지 말고 나시연, 지금 상황 똑바로 인지해.”

은성은 제법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지금 자신은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 있는데, 그녀는 자신을 선생님, 오빠, 다시 나갈 사람으로만 생각하는 게 화가 났다. 그녀의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마음이 그랬다.

시연은 날카로운 꾸지람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런 후 다시 지금 상황을 천천히 살폈다.

이신찬 때문에 잠깐 마음이 가라앉긴 했지만 그건 금세 잊혔다. 지나간 일은 빨리 잊으려고 노력하는 성격이 이럴 땐 큰 도움이 되었다. 남편감을 물색하러 나온 자리에서 지은성을 만났다. 그 지은성이 지금 제 눈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한때는 과외 선생님이었고, 한때는 언니의 약혼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말에 따르면 제 남편 후보로 마주 앉아 있었다.

서서히 시연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상황이 인지되자 그 옛날 숨겨 놓았던 감정이 다시금 퐁퐁 솟아올랐다.

“혹시 정말, 제… 약속 상대자가 맞으세요?”

시연은 남편 지원자라고 말하려다 바꾸었다. 감히 그의 앞에서 제 남편 운운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확실하게 대꾸했다.

“내가 너와 장난칠 정도로 한가하다고 생각해?”

느긋하게 다리를 꼬는 행동에 시연은 허리를 곧추세웠다. 놀라 벌어진 입술을 그녀가 양손으로 가렸다.

“아, 아뇨. 어떻게 오빠가 저와 장난을 치겠어요. 단지 믿기 힘들어서…….”

은성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듯한 시연의 모습에 잠시 시간을 주었다. 자신이 시연의 소식을 들었을 때 어땠는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 있었다.

처음 그녀의 부모님이 시연을 결혼시키려 한다는 소식엔 조금 화가 났다. 집안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는 했지만 아직 시연은 너무 어렸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선을 봐야 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와 만나야 하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그런데 시연이 직접 은밀히 남편을 구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점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이 선택을 내리기까지 흘려보낸 시간이 반년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시연은 스물한 살이 되었다.

시연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지막으로 제 남편 지원자를 찾는 듯했다.

“나시연.”

짧게 부르자 그녀가 곧장 그를 쳐다보았다.

“네!”

“내가 허튼소리 안 하는 거 알지?”

“네!”

“나 네 남편 되려고 여기 온 거 맞아. 그러니까 그만 두리번거려.”

시연은 그제야 인정하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소파로 푹 가라앉았다. 빼빼 마른 몸이 힘없이 주저앉자 은성은 마치 열네 살의 어린 나시연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직 이런 어린애가 결혼해야 한다니. 게다가 그런 어린애의 남편이 되려는 게 자신이라니.

“난 네가 이렇게 세상을 모를 줄은 몰랐다.”

불만이 쌓인 목소리가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새초롬한 시선이 달라붙었지만 은성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세상 남자들이 얼마나 나쁜지, 아버지나 자신 외에는 그녀를 진심으로 대해 줄 남자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운이 좋다면, 혹은 그녀가 약아서 세상살이에 익숙하다면 어느 정도 괜찮은 남자를 고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나 그녀가 찾은 남자는 모두 이신찬과 똑같은 생각을 한 놈들뿐이었고, 시연은 그들에게 철저히 농락당할 처지였다.

“오빠 보시기엔 제가 아직 어린애 같은 거 알아요. 사실 오빠 나이에 비하면 한참 어린 것도 사실이고요.”

그래도 이젠 제법 제 할 말을 하는 게 예전과 조금 달라졌을까.

“하지만 저도 생각이 있어서 한 행동이에요. 오빠가 어디서 어떻게 제 얘길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그렇게 세상모르지 않아요. 이젠 그래도 조금은 알아서 이러는 거예요.”

“많이 컸다, 나시연.”

또박또박 받아치는 말에 은성은 큰 뜻 없이 대꾸했다. 그런데 시연의 볼이 발그스레해졌다. 시연은 어릴 때부터 화가 나면 얼굴이 빨개졌다. 제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은성은 이번에도 말을 주워 담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크지 않았다면 자신이 여기 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은성은 자세를 정돈하고 태도를 진지하게 바꾸었다.

“나와 결혼해.”

똑바로 바라보는 시연의 눈동자가 경멸하듯 흔들렸다.

“너, 네 남편 누구라도 상관없잖아? 그러니까 그 남편 짓 내가 해 준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나도 처음엔 안 될 줄 알았는데, 너 또 이신찬 같은 새끼 만나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세상에 이신찬 같은 남자만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여럿 만나 보는 중이고요. 오빠가 절 걱정해 주신 건 고맙지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요.”

이 정도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법도 한데 착한 나시연은 얼굴을 붉히고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그녀를 가만히 보던 그가 다시 소파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꽂혀 있었다.

“오늘 네가 만나려고 했던 남자, 약 하는 건 알아?”

그녀의 시선이 또다시 흔들렸다. 투명하면서도 발그스름한 입술 새로 혀가 나와 마른 피부를 적셨다.

“그 새끼 오늘도 약 한다고 못 나온 거야.”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제가 만나려고 한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잖아요.”

“넌 내가 경쟁자도 모른다고 생각해?”

이번엔 누구라도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시선이 흐트러졌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빛이 차츰 돌아왔다. 가만히 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자 이제야 제대로 된 생각이 돌아가는 듯했다.

은성은 한국을 떠나 있던 시간을 가만히 되짚었다. 시연이 제 성격을 잊은 듯, 자신도 그간 한국의 많은 것을 잊고 지냈다. 그녀와의 첫 만남, 어긋난 약혼, 믿었던 이에 대한 배신과 사고. 그에 대한 갈등과 고통까지.

이곳에 돌아오겠다고 마음먹기까지 시간도 꽤 걸렸다. 사실 제 성격대로면 있지 않을 일이기도 했다.

그만큼 시연과 자신 사이엔 서로를 잊을 만큼의 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또 한편 자신은 지금 그 길었던 시간을 믿고 그녀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되기 위해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잠깐이나마,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해서…….

“죄송해요. 오빠를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제가 실수했어요.”

“괜찮아.”

카페 직원이 내려다 주고 간 커피 두 잔이 낯설었다. 예전 두 사람 사이엔 항상 커피 한 잔과 과일 음료가 있었다. 커피 두 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던 건 시연의 언니 소혜였다.

“마셔. 바리스타가 바뀌지 않았다면 여기 커피 괜찮으니까.”

은성은 시연에게 커피를 권했다. 그녀가 이 쓴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녀가 커피를 마시면 자신이 나쁜 놈이라는 기분이 조금 덜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시연은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오빠가 말 함부로 내뱉는 사람 아닌 건 잘 알아요. 하지만 방금 오빠가 한 말들, 전부 안 되는 것도 잘 아시죠?”

은성은 입에 머금지도 않은 커피를 내려놓았다.

“넌 소혜와는 정말 달라.”

그녀의 말끔하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맞아요. 전 언니완 달라요. 언니는 한없이 다정하고, 한없이 착하지만 전 아니에요. 그리고 전 언니의 약혼자였던 오빠와 결혼할 생각도 없고요.”

“어차피 6개월짜리 계약 결혼 아니었어? 이거저거 따질 형편이 아닐 텐데.”

“이거저거 따질 형편은 아니지만 천륜마저 거스를 정도로 급하지도 않아요.”

그의 입가가 비웃듯 비스듬히 끌려 올라갔다.

시연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은성을 이렇게 오래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전에 그에게 수업을 받을 때도 시간이 바삐 흘러가기만을 기다렸다. 그와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건 그녀에게 무척 힘든 일이었다. 마음을 숨기는 일만큼 그녀에게 힘든 건 없었다.

“너와 나 사이에 지켜야 할 천륜이 있었던가….”

그가 지은 웃음의 의미를 생각하며 시연이 간결히 대꾸했다.

“선생님, 예비 형부 등이겠죠.”

은성의 입술이 아까보다 조금 더 의미심장하게 늘어졌다. 그런데 시연은 그게 웃음인지 다른 것인지 잘 판단되지 않았다. 다만 어쩐지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아 잠깐 시선을 피했다.

은성이 표정을 정돈하고 곧장 정색했다.

“나시연, 잘 들어.”

시연은 어쩐지 대꾸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에 조금 얼었다.

“그래. 네가 원한다면 앞으로 날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어. 하지만 너와 내가 결혼할 거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 네가 계약 결혼 상대로 제시한 조건은 모두 받아들일 거야. 6개월 후에 이혼도 해 주지. 하지만 앞으로 내 앞에서 형부 따위의 소리를 꺼낸다면 그건 용납 못 해.”

“선생님…….”

놀란 마음에 시연이 또다시 실수했다. 그러나 그는 말처럼 이번엔 화내지 않았다.

“날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불러.”

그가 커피는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일어났다.

“계약서는 제대로 작성해 보내 주지. 물론 너와 나 사이 둘만의 은밀한 계약도 세세히 정리해서 말이야.”

그는 그대로 자리를 떠 버렸다. 시연은 멍한 상태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만나기로 한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은성은 정말 허튼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있었던 일은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녀가 후들거리는 다리를 힘겹게 일으켰다. 가방 속에서 전화기가 울렸지만 받지 못했다. 지금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텅 빈 집에 들어선 시연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언니, 나 왔어.”

예전엔 이렇게 말하면 소혜가 튀어나와 안아 주었다. 집에서 시연을 반겨 주는 사람은 소혜가 유일했다. 소혜는 시연이 초등학생이 되던 해 처음 만났다.

남들은 이복 자매의 우애를 우습게 여겼지만 시연에겐 너무나 좋기만 한 언니였다. 비록 아버지의 오래된 실수를 어린 나이에 알게 된 건 힘들었지만 소혜는 정말 따뜻했다.

시연이 이젠 반겨 주는 이 없는 집 안을 걸었다. 이제 이 층엔 시연 혼자만 지냈다.

밤늦게 집에 오는 아버지는 얼굴 볼 일이 잘 없었다. 소혜를 데리고 들어와 어머니가 된 윤선경도 얼굴을 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고요히 이 층 계단을 올랐다. 반은 텅 빈 복도를 지나 제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은 그녀가 서랍에 넣어 둔 사진을 꺼냈다. 몇 해 전 집 정원에서 언니와 정답게 찍은 사진이었다.

시연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사진만 들고 침대 안으로 파고들었다.

“언니, 나 오늘 지은성 선생님 만났어. 언니는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선생님 만나려다 영영 돌아오지 못했는데…….”

시연과 조금도 닮지 않은 언니는 키도 작은 편에 속했고 성격도 단정하고 야무졌다. 그들 자매를 잘 모르는 이들은 둘의 성격이 닮았다고도 했지만 시연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은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인데 언니는 그렇지 않았다. 잘 모르는 것 같아도 전부 알았고, 알아도 티 내지 않았다. 시연은 그런 언니를 닮고 싶었다.

그런데 닮기도 전에 언니는 세상을 떠나 버렸다. 언니가 절대 숨기지 못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건 은성을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언니… 흑. 나 어떻게 하지……?”

그러나 은성을 좋아한 건 소혜뿐만이 아니었다. 시연은 다른 건 다 제대로 숨기지 못했지만 한 가지만은 꼭꼭 숨겼다.

“언니…… 나, 선생님이랑 결혼하면 안 되는 거잖아…….”

여태 마음을 숨겼지만, 행여 결혼하더라도 제 마음 같은 건 절대 드러내지 않겠지만. 은성이 하고자 한다면 어쩌면 결혼이 진행될 수도 있었다. 그의 말은 이상하게 항상, 예언처럼 들어맞았으니까. 언니와 결혼한다는 말을 제외하곤 말이다.

사진을 쓰다듬는 시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곧 베개 속으로 스며든 눈물은 점점 더 넓은 자국을 만들었다.

시연은 한참 동안 언니의 사진을 보며 울었다. 이젠 자신이 그 예전 언니가 약혼하던 그 나이가 됐는데, 마음은 여전히 어린 시절 그대로였다.

시연은 언니가 떠나 버린 후로 마음이 성장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언니… 보고 싶어…….”

아직도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이렇게 언니를 찾는 습관도 버리지 못했다. 그녀가 소혜의 사진을 꼭 끌어안고 이불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 * *

은성은 출근 첫날 오전부터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집무 책상 옆에 서 있던 비서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 갔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꽉 쥐인 펜이 서류에 연이은 점을 찍었다.

“여기 이 수치들, 이걸 여태 이렇게 뒀다는 걸 믿을 수가 없네요.”

“국내 시장 상황이 어려웠다는 건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다들 노력하셨지만….”

“한 비서.”

갑자기 단호히 떨어진 호명에 한 비서가 몸을 바짝 세웠다. 그를 노려보는 은성의 시선이 지독히도 차가웠다.

“네! 사, 사장님!”

“내가 지금 그런 변명이나 듣자고 한 비서를 불렀다고 생각합니까?”

“아,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불렀을 것 같습니까?”

“그, 그게… 그러니까… 한국 판매율이 저조해서….”

“그런데 지금 내 앞에서, 상황을 이따위로 만든 임원들을 두둔하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한 비서는 새로 부임한 사장 앞에 허리를 꾸벅 숙였다. 미국에서 HLA 그룹 후계자가 사장으로 온다더니 보자마자 날벼락이 떨어졌다.

“한 시간 내로 책임자들 전부 대기시키세요.”

“저, 전부요? 미팅 가신 분들도 계신데…….”

“안 온 사람들은 모두 대기 발령 낼 테니 똑바로 전달하십시오.”

“네?”

한 비서는 방금 듣고도 너무 놀라 되물었다. 은성이 매서운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한 비서님.”

나지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한 비서의 등으로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네!”

“앞으로 제가 재차 말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한 비서님 보직도 변경될 수 있습니다.”

“네? ……네! 주의하겠습니다!”

뒤늦게 말뜻을 알아들은 한 비서가 커다랗게 외쳤다.

한 비서가 나간 후 은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 상황이 이렇게 나쁠 줄 몰랐다. 초반부터 제대로 분위기를 잡지 않으면 매출 곡선을 꺾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은성이 다른 파일을 펼치며 비서실을 연결했다.

-네, 사장님.

“나시환 사장님 내외와의 식사 약속은 어떻게 됐습니까?”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비서에게 그것부터 지시했다.

-아, 그게… 제가 지시받은 내용이 아니라… 물어보겠….

“비서실 소통 안 합니까? 일 이따위로 하실 겁니까?”

단숨에 매섭게 날아든 호통에 비서의 음성이 사라졌다. 잠시 후 딸꾹질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건너왔다. 은성은 미간을 잔뜩 좁혔다.

“비서실 직원 모두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네…!”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비서의 음성을 들으며 은성이 연결을 끊었다. 시연과 결혼하기 위해 한국행을 자처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회사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꽤 고생할 것 같았다.

똑똑. 조그마한 노크 소리에 은성이 자세를 가다듬고 표정을 굳혔다.

“들어오세요.”

미국에선 어느 정도 융통성 있게 움직였는데 당분간은 고자세를 풀기 어려울 듯했다.

* * *

시연이 화구통을 메고 터덜터덜 걸었다. 오늘 학교에서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보원에게 이제야 전화로 은성에 관해 얘기하는 중이었다.

코앞이 집이지만 그녀의 걸음은 조금씩 더 느려졌다.

“키는 승률이보다 좀 더 크고 HLA 그룹 다녀.”

-승률이보다 더 크다고? 게다가 HLA 그룹?

승률이는 시연과 보원의 친한 남자 동기였다. 승률이는 법대, 보원이는 사회학과였지만 봉사 동아리에서 만나 친해졌다.

“너 HLA 그룹 알아?”

-당연히 알지! 미국에서 엄청 성장한 회사잖아. 한국에선 뭐, 그냥 그렇지만……. 그럼 직급은 뭐래? 팀장? 부장?

시연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글쎄…….”

-글쎄?

보원과 승률에게 피치 못하게 계약 결혼에 관련한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은성 얘기는 한 적 없는 데다 시연은 그가 미국에서 어떤 직급으로 일하는지, 한국에 얼마나 있을 생각인지 전혀 몰랐다.

-그런 것도 말 안 해 줬어?

“한 20여 분 정도 같이 앉아 있었나? 사실 원래 만나려고 했던 사람은 안 나왔어. 몰랐는데 약을 먹나 봐.”

-약이라고?

보원이 경악한 듯 소리쳤다. 잠시 뜸을 들인 보원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계약 결혼 이거, 위험한 거 아니야? 계속 진행해도 되는 거 맞을까?

시연은 홀로 잠깐 생각했다. 친구의 걱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따르긴 어려웠다.

요즘 어머니의 재촉이 점점 심해졌다. 어쩌다 얼굴이 마주칠 때면 이마를 보기 싫을 정도로 심하게 찌푸리곤 짜증부터 냈다. 며칠 전에도 올해는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어머니가 정한 결혼을 하는 것보단 잘못된 선택이라 하더라도 6개월짜리 계약 결혼이 나았다.

“보원아,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나, 붙임 머리 해 볼까?”

-갑자기 얘기가 왜 그리로 튀어?

“남자들이 아무래도 너처럼 긴 머리를 더 선호하니까…. 그러면 후보군도 더 넓어지지 않을까 해서…….”

이신찬도, 그 전에 만난 남자도 모두 긴 머리 여자가 취향이라고 했다. 시연은 어릴 때부터 유독 머리카락 자라는 속도가 더뎠다. 기르다가 다듬으면 그 자리, 또 기르다가 다듬으면 머리카락 길이가 항상 지금 정도였다.

-야! 그런다고 똥이 밥 되겠냐? 애초에 이건 결혼 자체가……!

“보원아, 미안한데 우리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

말을 돌리려다 잔소리만 더 듣게 생긴 시연이 급히 전화를 끊었다. 일부러 끊은 건 맞지만 실은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발견한 것도 사실이었다.

항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던 현관에 두 켤레의 신발이 헝클어져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구두였다.

시연은 전화를 끊곤 부모님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했다. 그러곤 그 옆에 제 신도 벗어 나란히 놓았다. 신발만 보면 참 화목한 가족이 사는 집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그녀는 서재로 가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들리더니 곧 서재 안에서 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시연이 왔구나.”

“네, 아버지. 언제 오셨어요?”

“조금 전에 왔다.”

“어머니도 계신 것 같던데….”

“뭣 좀 사러 갔다. 잠깐 이리로 와서 좀 앉아 봐라.”

집에 있어도 대체로 부르는 적이 없던 아버지였기에 시연은 조금 놀랐다. 하지만 차분히 걸어가 기다란 소파 끝에 앉았다. 잘 이용하진 않지만 언젠가부터 소파에선 제 자리가 된 곳이었다.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앉아? 가까이 와서 앉아.”

시연은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 앉자 시환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도 요즘 우리 집안 사정이 썩 좋지 않은 건 잘 알 거다.”

“네.”

“예전에 네 언니 일만 그리되지 않았어도 달랐겠지만…….”

“…….”

소혜 얘기에 시연은 입을 다물었다. 시환이 조금 더 고민하는 투로 말했다.

“네 엄마가 결혼을 재촉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이번에도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족 내력에 대해선 그녀도 알고 있었다. 현대 문명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 나가는 시대에도, 역으로 미신이나 전통을 믿고 고집하는 사람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녀의 집안이었다.

모계 혈통이 집안을 성공으로 이끈다는 이야기는 겉으로 듣기엔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재벌들의 눈길이 이어지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게 딸들의 조기 결혼으로 이어지는 건 딱히 반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시연은 언니의 결혼에 다른 생각은 넣지 않았다. 서로 좋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자면 언니는 그 혈통이라는 것에 비껴갔지만 그런 건 어른들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네 언니 결혼만 잘됐어도 여유가 있었겠지만 지금 우리가 좀 힘들잖니.”

시연은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나을 거다.”

“네…….”

시연은 이제 더는 미루기 힘들다는 걸 느꼈다. 아버지마저 이렇게 말하면 그녀로선 어머니 제안을 거절하기 더욱 힘들었다.

아버지는 건장한 외모와 달리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루더라도 끝엔 항상 어머니의 말을 따랐고, 아버지가 이렇게 나올 때는 미루는 데에 한계가 왔다는 뜻이었다.

“시연이 왔니?”

현관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 오셨어요?”

“그래. 시연이 너 이리로 와서 과일 좀 깎아라. 오늘 아주머니 쉬는 날이잖니.”

시연은 대꾸 없이 어머니 선경에게 다가가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선경은 그대로 소파로 걸어가 힘든 듯 쿠션에 몸을 파묻었다.

“요즘 과일 하나 사 먹기도 힘드네요. 무슨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고생했어요.”

“참, 요즘 회사는 어때요? 또 그 전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건 아니죠?”

시연은 부모님의 대화를 들으며 부엌에서 과일을 씻었다.

“박 전무가 일 하나는 그래도 꽤 쓸 만하게 하잖아요. 나도 다 생각해 보고 하는 일이니….”

“생각은 무슨! 또 박 전무 좋은 일만 시키려고! 아니, 당신은 왜 사람이 줏대가 없어? 분명 전에 내가 말한 대로 하기로 했잖아요!”

사각사각 과일 깎는 소리에 집중하며 시연은 쟁반과 포크를 챙겼다.

“당신 말한 것도 참고하고….”

“또 참고 소리! 참고만 하지 말라고 했죠? 안 되겠어. 내일은 내가 회의에 참석해야지!”

“여보…….”

“과일 드세요.”

부부의 다툼 사이에 시연이 작게 끼어들었다. 선경이 씩씩대며 가장 먼저 과일을 집어 먹었다. 시연은 가져온 포크로 과일을 집어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이거 봐요! 얘 또 나 계모라고 무시하는 거. 항상 지 아빠만 챙기지. 어휴, 우리 소혜가 있었어야 했는데…. 어휴, 우리 딸. 아휴, 불쌍한 내 딸…!”

갑작스레 가슴을 치는 선경 앞에서 시환과 시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먼저 간 사람 얘기에 다른 말을 섞긴 쉽지 않았다.

“어머니… 제가 더 잘할게요. 죄송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넌 맨날 말만 죄송하지? 어째,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니? 잘한다고 말을 하질 말든가. 말을 했으면 뭘 어떻게 잘해 보든가! 응?”

시연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시환이 회피하듯 시선을 돌리고 헛기침했다.

시연은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덤덤하게 고개 숙인 채 눈만 껌뻑였다. 다만 시환의 모르쇠만큼은 이번에도 조금 가슴 아렸다. 어째서인지 아버지의 외면은 적응되지 않고 늘 어딘가를 콕콕 찔렀다.

“당신, 이번엔 꼭 내 의견 따라 줘야 해요. 알겠어요?”

“알았다니까요….”

시연은 어서 빨리 제 방으로 가고 싶었다. 날카로운 어머니의 음성이 오늘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마음대로 자리를 뜨면 그는 그것대로 또 꾸지람을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오늘은 두 분 모두 집에 계세요? 오랜만에 뵀더니 제가 적응을 잘 못 했나 봐요.”

화제 전환에 아버지가 반갑게 대꾸했다.

“그렇지? 아무리 바빠도 내가 이런 시간을 좀 더 만들었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저도 앞으론 정말 더 신경 쓸게요.”

선경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다른 잔소리는 붙이지 않았다. 한숨 돌린 시연이 이번엔 포크로 찍은 과일을 선경에게 내밀었다.

“드세요, 어머니.”

“됐다. 다 먹었어.”

툭 치며 거절한 손에 시연이 든 포크에서 과일이 떨어졌다. 선경은 테이블에 나뒹구는 과일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이어 말했다.

“그래. 이젠 본론 얘기를 좀 해야지.”

떨어진 과일을 정돈한 시연이 자세를 바로 했다. 마음 한구석에 또 생채기가 난 건 외면했다.

“오늘 HLA 그룹 사장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시연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다들 그간 내가 시연이 혼처를 물색하고 다니느라 바빴다는 건 잘 알 거예요.”

“나 대신 고생했어요.”

시환이 말에 선경은 좀 더 으스대듯이 설명했다.

“사람이 노력하면 살 궁리가 생긴다고, 난 사실 HLA 그룹은 그간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연락받고 마음을 좀 넓게 가지기로 했어요.”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지 시환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소혜 정혼자였던 남자라 거절하는 게 맞지만, 그쪽에서 만나자고 조르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설마 선생님이 직접 연락하셨어요?”

대번에 선경이 밉게 눈살을 찌푸렸다.

“넌 여태 선생님이 뭐니? 예전에도 그러더니 아직도 그 버릇을 못 고쳤네. 그리고 어른 말씀하시는데 끼어드는 건 무슨 버릇이야?”

“……죄송해요.”

“하여튼, 난 이번에 온 제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성사시켰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냅다 받는 행색은 좀 곤란하고, 고민하는 척하면서 잘 마무리하면 우리 집안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시환은 여전히 고개만 주억거렸다. 시연은 제 결혼 얘기에도 뭐라 끼어들기가 힘들었다. 이미 은성을 만났다는 얘기를 하기도 곤란했고, 더군다나 지금 어머니의 의견에 반하는 말을 꺼내는 건 무리였다.

선경이 배려하는 얼굴로 시연에게 물었다.

“넌 언니 일도 그렇고 생각이 좀 많겠지만, 내가 찾아보니 그만한 혼처도 없어. 그러니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해 주길 바란다.”

“……생각해 볼게요.”

시연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놀라 피곤한 기색을 하며 그녀가 조심스레 자리를 빠져나왔다. 은성과 결혼할 마음은 없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말할 자신도, 그렇게 만들 자신도 없었다.

그녀가 허탈한 숨을 내뱉으며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 * *

HLA 그룹 본사를 찾은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릴 때 언니를 따라 두어 번 와 본 게 다였다. 아버지의 회사와는 규모에서부터 차이가 나는 건물 앞에서 시연은 잠깐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걸음에 힘을 싣고 안내대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좀 뵈러 왔는데요.”

어리숙한 표정과 직장인답지 않은 옷차림에 직원은 잠깐 그녀를 훑어보았다.

“약속은 하고 오셨나요?”

“아, 아뇨. 약속해야 하는 건 아는데, 전화번호를 몰라서요.”

“그러시면 죄송하지만 만나시긴 힘듭니다. 다음에 약속하시고 오세요.”

“그럼 명함 한 장만 주시면 안 될까요?”

처음부터 목적은 명함이었다. 운이 좋으면 은성을 만날 수도 있었고.

이번엔 직원의 얼굴이 처음보다 더 험해졌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을 유지하며 직원이 낮게 을렀다.

“이봐요, 학생. 이런 데 처음인 것 같은데, 사장님 명함은 함부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알겠어요? 가서 공부나 더 열심히 하세요.”

말투는 친절했지만 표정이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시연의 이마를 검지로 밀어낸 직원이 팔짱을 끼곤 씨익 웃었다. 비웃음이 확실했다.

“저… 어려운 건 아는데요….”

그래도 이렇게 물러나긴 힘들었다. 중요한 수업도 놓치고 힘들게 걸음 했다.

“알면 아는 대로 행동해요.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저기,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부탁드릴 데가 없어서요….”

시연이 구질구질하게 더 달라붙을 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에 안내대 직원의 얼굴이 빳빳하게 굳었다. 시연은 익숙한 목소리에 급히 뒤돌았다.

“선생님…!”

운이 좋았다. 만에 하나 이런 상황을 기대한 건 맞지만 정말 제게 일어날 줄은 몰랐는데 그녀의 눈앞에 은성이 떡하니 서 있었다.

“사장님!”

은성은 안내대 직원과 시연의 부름 사이에서 시연을 선택해 주었다. 부드럽지 않은 시선이 시연을 아래위로 훑었다. 시연은 백팩 가방끈을 힘줘 잡았다.

“학교에 있을 시간 아니야?”

은성의 나무라는 말투도 시연은 지금 상관없었다. 우연히 그를 만나 좋은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밝게 웃었다.

“네, 맞아요!”

그의 반듯한 이마에 금이 갔다. 시연이 좀 더 입술을 길게 당겼다.

“저 선생님 만나러 왔어요.”

주변 시선이 둘 사이를 의아한 눈초리로 살폈다. 시연은 여태 아무렇지 않았는데 정장 차림의 사람들 속에 둘러싸이자 그제야 조금 부끄러워졌다. 가방끈에서 손을 떼 괜히 청바지를 매만졌다.

은성의 시선이 안내대 직원을 향했다.

“약속도 없이 찾아오셨다고 해서 안내하던 중이었습니다!”

“다음에 찾아오면 바로 올려 보내요.”

“네! 알겠습니다!”

은성의 조치에 시연의 얼굴에 안도가 서렸다. 은성은 이어 뒤따르던 사람들에게도 각자 자리로 돌아갈 것을 지시했다.

“따라와.”

시연은 그가 밟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조곤조곤 걸었다. 곧 불만 서린 음성이 그녀의 머리꼭지로 날아들었다.

“빨리 걸어.”

“네…!”

은성을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사장실 앞 비서들이 줄지어 일어났다.

“하던 일 하시고 안에 차 두 잔만 부탁합니다.”

“네!”

맨 앞에 있던 비서가 대답했다. 시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은성의 시선을 놓쳤다.

“뭐 해?”

또다시 날아온 타박에 그녀가 후다닥 뛰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와중에 비서들에게 하는 인사에 은성의 미간이 또 확 구겨졌다.

시연은 은성의 표정은 보지 못하고 드넓은 사장실에 눈만 휘둥그레 떴다. 예전에 언니를 따라 왔을 때 은성은 사장이 아니었다.

“와… 이런 곳에서 일하시는군요…….”

“앉아.”

은성은 재킷을 벗어 걸곤 곧장 소파 상석에 앉았다. 기다란 소파 끝에 잔뜩 움츠려 앉은 시연의 모습에 또다시 그의 얼굴이 화난 듯 굳었다.

“말단 사원이야?”

“네?”

그가 당겨 앉으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제야 그의 말뜻을 알아챈 시연이 후다닥 다가가 앉았다.

“죄송해요.”

“죄송한 사람치곤 꽤 용감한데. 무슨 일이야? 계약서 때문이라면 기다리라고 말했을 텐데.”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만 하려면 그만 가 보고. 네 말대로 내가 좀 바빠.”

냉정한 말에 고개를 수그렸던 시연이 꽤 단단한 표정을 지었다. 맑고 반짝이는 눈망울이 그를 올곧이 담았다.

“저희 부모님께 저와의 결혼 제의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아직 결혼 제의를 드리진 않았어. 정식으로 결혼 제의를 드리기 전 1차로 너와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지.”

“아…….”

그가 느릿하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왜? 나와 빨리 결혼하고 싶어?”

“아니요!”

똑똑.

커다랗게 대답하는 찰나 들려온 노크 소리에 시연이 움찔했다. 반면 은성은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며 짧게 답했다.

“들어오세요.”

비서가 차를 가져와 두 사람 앞에 내려 주었다.

“사장님, 회의를 미룰까요?”

“그럴 것 없습니다. 시간에 맞춰 준비하라고 하세요.”

“하지만 그러면 손님과의 시간이 거의 없는….”

매서운 은성의 눈초리에 비서의 뒷말이 사라졌다. 비서가 경직된 태도로 외쳤다.

“알겠습니다!”

비서는 쏜살같이 사라졌지만 그가 남기고 간 여운은 꽤 컸다. 마치 한순간에 한겨울이 찾아온 느낌이었다. 괜히 시연마저 바짝 얼어 시선을 흐트러뜨렸다.

슬쩍 말려 올라가는 은성의 입술이 느리게 떨어졌다.

“말해. 어떻게 하면 네가 나와 결혼해 줄 건지.”

그는 그녀에게 우선권이 있는 듯 말했지만 분위기는 반대였다. 시연이 더듬더듬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저는… 그 결혼을 안 했으면…….”

“뭐라고?”

은성이 눈을 찡그리고 묻자 조심스레 말하던 시연의 입술이 꽉 달라붙었다. 지독히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에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저는, …와 결혼하려 했던… 나, 남자와… 결혼할 생각이….”

“이제야 내가 형부가 아닌, 남자로 보이는 모양이지?”

깔끔한 음성이었다. 어지럽던 시연의 머릿속을 단숨에 깨끗하게 만들어 줄 만큼. 시연은 순간 예전 일이 떠올랐다.

[그런 눈빛 하지 마. 난 네가 아니라 네 언니에게 남자인 사람이야.]

자신을 가르치는 그를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다 들은 말이었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언니와 결혼할 거라는 사실을. 욕심내 본 적도 없었다. 그녀가 본 누구보다 다정하고 친절했던 남자를, 선생님을.

단지 자신도 모르게 쳐다보고 있을 때 뒤통수를 맞듯 날아든 말이었다.

[나시연, 정신 똑바로 차려. 난 네 형부가 될 남자고, 널 가르치는 선생님이야.]

바라지도 않은 제게 모질게 선을 그은 건 그였다. 그런데 이제 와 형부가 아니라 남자라고?

시연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눈빛은 차가워졌다.

“아뇨. 전 지은성 씨가 조금도 남자로 보이지 않아요. 아저씨라면 모를까. 그간 옛 인연을 생각해 지은성 씨를 존중해 드린 걸 오해하진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의 동공이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을 발했다. 미간이 반듯한 걸 보면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갑자기 찾아와 시간을 뺏은 건 정말 죄송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도 그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까딱였다.

“저는 지은성 씨와 결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시연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왜?”

간결한 질문이 자리를 뜨려는 그녀의 발을 붙잡았다.

“싫다는 데 다른 이유가 필요한가요?”

그가 일어나 눈높이를 맞추었다. 아니, 언제나 그렇듯 그가 일어나면 시연이 한참 위를 올려다보게 되었다. 감당하기 힘든 눈길이 그녀를 에워쌌다.

“부모님 생각은 다를 것 같은데.”

“그래서 제가 먼저 뵙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저희 부모님께 결혼 얘기는 꺼내지 말아 달라고요.”

“싫다면?”

시연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을 돌리기 쉽지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정작 그런 그를 마주하자 곤혹스러웠다.

“왜 저여야 하나요?”

“그러는 넌 아까 그 꼴을 당하면서까지 왜 이곳을 찾아와 날 막으려는 건데?”

“선생님께선 언니 얘길 꺼내지 말라고 했지만, 전 그게 이유예요. 언니를 사랑했던 사람을 어떻게 제가 또 사랑하나요?”

시연은 자신이 말해 놓고도 우스웠다. 그와의 사이에 감히 사랑이라니. 불가능하다는 뜻일지라도 그 단어를 내뱉자 크나큰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가 어쩐지 고압적인 태도로 한 걸음 다가왔다.

똑똑.

“회의 가실 시간입니다.”

밖에선 비서가 그를 재촉했다. 그에 조급해진 건 시연뿐이었다.

“어서 가 보셔야….”

“딴 데 보지 마.”

“네?”

“사랑? 넌 6개월짜리 가짜 결혼에 사랑까지 할 생각이었어?”

“그건….”

“바람둥이나 약쟁이와 사랑까지 할 생각이었느냐고.”

“…….”

낯선 은성의 모습에 시연은 어떤 대꾸도 찾지 못했다. 그가 다가오는 만큼 시연의 걸음이 뒤로 물러났다. 툭, 단단한 벽에 등이 부딪쳤을 때에야 그도 위협적인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둘 사이는 이미 닿을 듯 가까워진 후였다.

극도로 낮지만 또렷한 음성이 그녀의 온 신경을 긁었다.

“내가 널 사랑할 거라고 생각했어?”

“서, 선생님이 아니라 제… 얘기였어요. 물론 선생님께서도 그럴 리 없으시겠지만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우리 사이에 그따위 건 없어. 그러니 안심해. 너와 사는 6개월 동안 사랑이라는 단어는 존재치 않을 테니.”

똑똑.

“저기… 사장님…? 회의를… 어떻게 할까요?”

눈앞에선 은성이 그녀를 압박하고 문밖에선 비서가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단순히 부모님을 설득하긴 어려우니 은성에게 말이라도 해 보자는 심정으로 찾아왔다. 그가 화를 낼 줄도, 이런 상황에 닥칠 줄도 몰랐다.

눈을 힘껏 감았다가 뜬 시연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그의 가슴을 손으로 밀었다. 그의 몸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숨 쉴 공간을 얻은 시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랑은 없겠지만 결혼한 부부들이 하는 모든 걸 할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안 된다는 거였고요.”

이런 말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어떻게든 그를 단념시켜야 했다. 설마 그가 자신과 잠자리까지 하진 않으리라 여겼다.

뜻밖의 결연함에 은성은 잠깐 흔들렸다.

“뭐라고?”

그녀는 이번에도 단호하게 대답했다.

“모든 걸, 할 생각이었다고요. 잠자리까지도요.”

“……!”

은성은 이번엔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시연이 6개월짜리 남편을 구한다는 얘길 들었다. 처음엔 웃었고 그다음엔 신경이 쓰였다. 조금 알아보니 그녀는 들은 대로 남편감을 모집해 선을 보고 있었다. 집안에선 모르게 은밀히 움직였다. 그건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여태 나시연이 부모님 뜻에 반하는 모습을 본 적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가짜 결혼에 잠자리까지 걸었다고?

똑똑똑!

“사장님? 저… 사장님….”

“회의 미뤄!”

거친 말이 문밖 비서에게 전달되었다. 시연의 눈매가 떨리며 더욱 크게 벌어졌다.

은성은 여태 그녀가 결혼 시늉만 하는 줄 알았다. 상대야 어떤 생각이든 적어도 그녀는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잠자리라는 말을 듣자 뒷목이 뻐근해졌다.

“잠자리라….”

“네… 잠자리요.”

싸늘한 분위기에도 시연은 꿋꿋이 답했다.

“생각 못 하셨을 수도 있어요. 그 이야긴 항상 직접 만나서야 하곤 했으니까요.”

늘어나는 거짓말에 시연이 속으로 쓰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은성은 전혀 예상 못 했다. 그래서 지금 심하게 허를 찔렸다.

“반응을 보니 힘드신 것 같네요. 거기서 이야기가 틀어진 적이 많아서 충분히 이해해요.”

“…….”

“우리 사이에 나눴던 말들은 당연히 모두 비밀로 할 거예요. 그때 카페에서의 대화 내용과 오늘 대화 내용 모두 메일로 전달드릴게요.”

“그게 무슨…?”

시연은 별스럽지 않은 태도로 대꾸했다.

“이것도 모르셨을 거예요. 저는 상대자와의 합의로 둘이 나눈 모든 대화를 녹음해 왔어요. 그리고 그걸 나눠 가졌고, 그래서 그걸 빌미로 성사되지 않은 계약은 모두 비밀에 부쳐 왔어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이신찬과의 계약도 무리 없이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욕을 먹긴 했지만.

“그게 지켜질 거라고 생각해?”

“둘이 은밀한 내용을 나눠 가졌으니 가능하지 않을까요?”

똑똑히 눈을 치켜뜨고 대답하는 시연은 이제 정말 예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마냥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소녀가 아니었다.

“오늘 일만 해도 이게 세상 밖으로 나간다면 상대적으로 더 큰 피해를 보는 건 제가 아니에요.”

“…….”

“그렇지 않나요?”

은성은 시연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천천히 걸음을 물렸다. 굳은 표정을 풀며 돌아서는 얼굴은 시연은 보지 못했지만 희미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래?”

말투도 처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어쨌든 오늘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명함은 비서님께 받아 갈게요.”

은성이 다른 말을 하지 않아 시연은 이것으로 결혼 얘기를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다. 사장실 문을 닫고 나올 때에도 그녀를 잡는 목소리는 없었다.

“여기… 사장님께서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비서 한 명이 시연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차는 마시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시연은 꾸벅 인사를 하고 명함을 가방에 잘 챙겼다.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 그녀의 걸음이 어쩐지 목적을 이룬 것관 달리 꽤 무거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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