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두 번의 결혼식 (14/15)

3. 두 번의 결혼식

“한 번을 안 보여주더니 이제야 제대로 보네!”

아침에 바삐 쓸어냈을 텐데 다시 눈이 소복이 쌓인 정원석을 밟자마자 들리는 말이 매섭다. 천천히 들어가며 동행인에게 정원 구경이라도 시켰으면 했던 최윤이 입 안으로 혀를 찼다.

윤기가 자르르한 코트를 걸친 최진이 혼자 뛰쳐나와 윤설을 반겼다. 멀대 같은 동생은 있거나 말거나 안 보이는 모양이다.

깊은 사이가 되도록 윤설을 제대로 소개한 적 없는 건 사실이라 누나가 신나게 그 외모를 칭찬하고 귀여워하는 동안 한 발 뒤에서 턱이나 긁고 있어야 했다.

하여간 다들 외모 밝혀.

그중 가장 심한 게 자신이라 입 밖으로 낼 입장은 아니지만, 잘 입혀서 데려온 윤설에 홀딱 넘어간 누나를 보며 드는 생각은 어쩔 수 없었다.

어느새 가볍게 팔짱까지 끼고 앞서 걷는 두 사람 뒤를 따르며 스스로 아직도 이 그림이 비현실적이라는 감상에 빠진다. 도중에 윤설이 고개를 돌려 도와달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곧 마주할 일을 생각하면 최진이라도 한껏 기분이 좋아서 말을 보태주는 편이 이득이다.

연에 몇 번 오는 본가는 크게 달라진 데가 없었다. 계절 따라 커튼이 바뀌고 더우면 대자리 추우면 바닥이 뜨거운 차이 정도가 다지 싶다. 최윤과 형제들에게는 닳도록 보았던 풍경이고 그냥 그 장소 자체라 어지간해서는 뭔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을 일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처럼 어수선한 분위기는 기억을 더듬어야 겨우 비슷한 때가 있었나 할 정도로 드물다. 공기마저 다르다는 말도 허풍 섞인 과장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하면서도 동작 하나 놓치지 않을 듯 이목이 쏠리는 분위기가 따끔한지 윤설의 등이 출발 전보다 더 굳어 보인다.

아침까지는 잘 보이고 싶다며 옷을 한참 고르고 단장에 열심이었는데. 실없이 웃으려다가 헛기침으로 삼키고 가족이 모인 방까지 쭉 뒤를 지키며 걸었다.

막연히 이런 날이 오겠지 했으면서도 막상 코앞으로 다가오니 계면쩍기 그지없다. 윤설을 구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존재하던 선을 넘었고, 태생이 같다 할 조직들의 주요 정보를 땅 위의 공권력에 팔아 공공의 적 비슷한 존재로 낙인찍혔고, 관련자로 검찰 참고 발언을 하느라 오가다 보니 자연히 유통업에 얹으려던 리본은 공급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만 조용히 움직여야 했다.

당연히 운조 회장 부부 눈에 안 찰 일이었다. 나이 서른 넘어 정신이 나갔다고 고래고래 지르는 노성에 이번에는 정말로 머리를 깬다며 성화라 찢어진 살이 이제 겨우 희미한 자국만 남은 참이다. 머리를 넘기면 훤한 상처 아무는 동안 윤설에게 어리광을 실컷 부릴 수 있어 좋기는 했다.

방으로 들어서며 보란 듯이 맞은 자리를 문지르는 최윤의 작태에 부친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최윤은 시치미를 떼며 윤설을 앉히고 옆에 앉았다.

“누님은 놔요, 이제.”

“왜. 거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된다고.”

“다 왔으니까 놔요. 닳아.”

“엄마, 얘 좀 봐.”

시작부터 시끄럽다. 그래도 사람 불러다 놓고 절간처럼 입 닫은 것보다 나아 적당히 장단을 맞추었다.

윤설도 그 덕에 한결 긴장이 풀린 듯하다. 인터뷰 영상에 나오는 단정하고 차분한 낯으로 돌아왔다.

“아시겠지만 여기, 잘 만나고 있는 윤서리 씨.”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랑 형, 누나들입니다. 큰누님이랑 작은형은 예전에 얼굴 본 적 있죠.”

일단 최윤을 두고 모인 사이라 최윤이 가운데에서 정석적인 멘트로 양측을 소개해 주어야 했다. 각자 사전 조사니 들은 이야기니 해서 알 만큼 알더라도 전혀 모르는 척 오늘 처음 마주하는 자리니까.

형제들은 이 자리를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아 지방방송이 간간이 섞여들었다. ‘누가 들으면 건전하게 데이트만 하는 줄 알겠네.’, ‘같이 살고 있잖아.’ 등등 군소리를 제쳐두고 짧게 통성명을 하고 나니 다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겨울이라고 뜨끈한 찻물에 풀린 꽃잎이 동동 떠다니는 모습만 보고들 있다.

흘끔 옆을 보니 윤설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은 그대로 정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저러다 자리 파하면 얼굴 당길까 걱정이다.

“그래. 얼굴은 한번 봐야지.”

누가 운을 띄우나 했더니 첫째 최산이었다. 최윤은 약간 실망했다. 저 형은 과묵하기 그지없어 말을 해도 거기서 끝인데.

노부부는 딱히 흠잡을 데 없이 예쁘게 잘생긴 윤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고, 이것저것 궁금해하는 쪽은 형 누나들뿐이다.

“집은 계속 거기서 살 거고?”

“신혼집 새로 구해도 좋지.”

불쑥 집 얘기를 꺼내는 둘째, 최영 옆에서 최훈이 맞장구를 쳤다.

최윤도 집 구할 생각을 안 했던 건 아니다. 지겹다는 기분이 든 적은 없어도 유학을 가기 전이나 돌아온 후나 내도록 그 집 한곳에 머물렀으니까.

그때 윤설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는 지금도 좋습니다.”

“나쁠 건 없는데 거기 순 막내 취향밖에 없잖아. 같이 꾸미는 재미 아니야?”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조금 더 정 붙이고 싶어요.”

카메라 앞에 선 듯 방글방글 웃기만 하더니 할 말은 또 제법 또렷하게 잘한다.

최윤은 윤설이 좋다면 집은 천천히 알아봐도 좋겠다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당장의 일거리가 하나 줄었다.

“그럼 식은?”

“아, 결혼식?”

“해야지.”

“해야지, 그럼.”

이번에는 바로 손위 누나인 최진이 눈을 반짝이며 결혼식을 외쳤다. 집 얘기에는 이렇든 저렇든 하던 형제들이 갑자기 앞다투어 결혼식의 필요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올 것이 왔구나.

최윤은 어느새 탁자 위에 상체를 기대고 가벼운 한숨을 푸, 뱉고 있었다. 그리고 슬쩍 맞은편의 회장 부부 눈치를 살폈다. 여기서 또 대뜸 뭐 던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연치 높아지면서 욱하는 일이 잦아졌다.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남의 집 자식 데리고 살면서 대충 넘어가는 거 아니다.”

“오오.”

“오, 엄마 이제 마음 정리된 거예요?”

“직접 보니까 다르지? 참하지?”

“시끄럽다.”

누가 한마디 하면 와르르 달라붙는 형제들의 말 사이에서 그간의 사정이 보인다. 어쨌거나 형, 누나들은 막내가 마음 붙이고 산다는데, 그리고 상대가 딱히 흠도 없이 멀끔한데 괜히 들쑤셔서 서로 고집으로 집 뒤집어 놓지 말고 잘 살아보라고 하자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했을 것이고 인정을 했든 포기를 했든 눈감기로 한 모친은 이제 그 나이대 어르신다운 형식적 절차를 따지는 단계까지 왔다.

썩 표정이 좋지는 않은 회장 부부 앞에서 윤설이 민망할까 싶었던지 형제들이 계속 능글능글 바람을 잡아댔다.

“다행이지, 뭐. 곧 죽어도 혼자 살 상이었는데 갑자기 같은 집 살아도 되겠다는 사람도 생기고.”

“객관적으로 봐도 윤설 씨 괜찮아. 윤이한테 나쁠 거 하나 없어.”

“그래요. 내가 윤설 씨 유산도 받았고, 나 때문에 몸 불편한 일도 생겨서 책임져야 옳습니다.”

“쯧, 자랑이다.”

이럴 줄 알았지.

회장 부부는 자식 성질머리가 마음에 안 들어 벼르고 있었는데 최윤이 입을 다물고 빙글빙글 웃기만 하니 퍽 얄미웠던 모양이다. 부친이 뭐라 하는 소리가 형제들 웃음소리에 묻혔는데 아무래도 욕설이었지 싶다.

“아무튼 결혼식 말인데.”

“예.”

“식구들 다 참석해야 하지 않겠냐.”

“식구들은… 그렇지요.”

“평생 운조에 딸려있던 아들이나 너 데리고 있는 애들 다 와야지.”

“아.”

“어어.”

당연하다는 듯한 회장 부부의 말에 최악의 그림이 떠오른다. 가족들 모두가 말을 잃은 최윤을 보고 있다.

‘식구들 다 오는 결혼식’의 함의가 그냥 얼마 안 되는 운조 회장 부부, 부부의 가까운 친척, 형제들 따위를 일컫는 게 아닌 줄 안다. 운조라는 이름 아래 몸 바쳐온 직원 모두 회장 일가 한 번뿐인 결혼식은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그러면 북새통 같은 식장에 시꺼먼 까마귀 떼가 줄을 잇겠지.

최윤의 상상에서는 어떤 경우의 수를 봐도 아름답지 못할 그림이었다.

“아, 싫어요.”

“뭐?!”

“에에, 아부지, 어머니 참으시고.”

“아, 진짜 싫다고.”

체면이고 나발이고 어릴 때처럼 다짜고짜 싫다며 드러눕는 최윤의 대답에 회장 부부 목소리가 약간 커졌다.

형제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보태지 않고 중립 자세를 취했다. 어쨌거나 최윤이 자라는 동안 많은 운조 직원들의 손을 거치고 그들의 수행을 받은 과거는 사실이고, 지금도 최윤을 구시대적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직원들이 왕왕 있지 않은가. 눈물의 결혼식장이 되더라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머리로는 최윤도 아는 이유였지만 역시 싫었다.

“아니, 내 결혼이잖습니까. 시꺼먼 놈들만 다글다글하고 이 사람은 식전에 녹초가 될 텐데.”

“하긴 윤이가 친구가 있냐, 뭐가 있냐.”

“형.”

“윤설 씨 쪽에서 오는 사람들도 많을 것 아니야? 회사 식구들이든 누구든.”

“그러니까 그림이 더 이상하다고요.”

보기 드물게 펄펄 뛰던 최윤이 곁에 앉은 윤설의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윤설은 몇 번 입을 벙긋댄다 싶더니 ‘좋아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왜 좋지?

“아니, 자기야.”

“가족분들이나 면식 있는 분들 다… 많은 분들이 축하해 주시면 좋습니다.”

“윤이 큰일 났네.”

최윤은 느슨하다 못해 아주 탁자 위에 엎어져 끙 앓는 소리만 내었다. 누군가 너 하고 싶은 건 뭐냐고 묻기에 막연하게나마 당연했던 그림을 떠올린다.

한적한 곳에 빼놓을 수 없이 가까운 이들만 모아두고 꽃을 많이 놓아 아름답게 꾸민 가운데 윤설이 웃었으면 싶다. 조용하고 느긋한 분위기 속에서 행사라기보다는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지금 굴러가는 대로라면 아무리 돈 들이고 정성을 쏟은들 의례적인 순서 밟기 바쁜 모두의 ‘일’이 될 뿐이다. 통 일어날 생각을 않는 최윤의 머리 위로 큰누나, 최영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정 그러면 두 번 하면 될 것 아니야. 운조가 돈이 없니. 윤설 씨한테 무리인가?”

“아닙니다.”

말이 두 번이지 그게 어디 쉬운가.

최윤은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려다 가까스로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최영의 실례를 지적했다. 정식으로는 처음 보는 사이에 통장 사정 궁하냐니.

고개만 돌려 반대편 뺨을 차가운 탁자에 눌리면서도 윤설의 낯을 살폈다. 그러나 윤설은 전혀 괘념치 않는 듯 발그레한 볼에 눈동자가 초롱하게 야무진 빛을 띠고 있었다.

최윤은 이 표정을 안다. 윤설의 연애에서 결혼까지 이르는 무수한 과정과 사이사이 챙겨야 하는 요소들은 오로지 그만의 세상, 다른 나라에 기준을 두고 있어 때때로 최윤이 짐작하지 못한 순간에 엉뚱한 이벤트나 간절함이라는 형태를 입고 건너오고는 했다. 이제 보니 두 번의 결혼식도 윤설이 가진 사랑의 나라에 합법적으로 존재하는 모양이다.

“당신 내년에 드라마나 영화 들어가야지요.”

“그래도 결혼은 할 수 있어요.”

“그럼 윤설 씨는 언제쯤이 괜찮아?”

“지금부터 준비하면 봄에 하나는 치를 수 있지 않을까?”

“순서는 본인들 좋은 대로 하라고 하지.”

당사자가 우는소리를 내거나 말거나, 꽤 구체적인 논의가 최윤의 정수리를 지나 탁자 위로 테니스 볼처럼 오고 갔다. 걱정하던 대로 첫 대면부터 회장 부부 불편한 심기에 온 가족이 끝까지 어색해하다 끝나는 것보다는 나았으나 어쩐지 착잡했다.

조근조근 자기 의견을 얹어 두 번의 결혼식이라는 얼토당토않은 계획에 적극 협조하고 있는 애인이 야속할 지경이다. 옆에 앉은 최진이 등을 쿡쿡 찌르며 뭐라고 놀려서 아프다 짜증 냈더니 바로 손을 뻗어 토닥여 주기는 했다.

볼일 다 봤다는 듯 식사 준비되면 밥이나 먹고 가라는 말로 자리를 떠난 회장 부부며 남아서 한결 편안해진 투로 최윤을 놀리고 있는 형제들까지 가족이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들이었다.

“피곤하죠.”

“아니요. 재미있었어요.”

해가 지고 나서야 불 밝힌 정원에 둘만 나왔다. 피우지도 않을 담배 한 대 태우고 온다 하니 따라나선 윤설만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걸고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최윤은 그저 찬 공기를 깊이 들이쉬며 탈탈 털린 듯한 기분을 걷어낼 뿐이었다.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태를 한 윤설의 입술 새로 입김인 듯 연기가 흘러나왔다.

안 지는 좀 됐는데도 볼 때마다 묘하게 낯설다. 정작 담배 피우고 싶게 만들었다는 장본인은 골치 아픈 일이 줄면서 다시 끊다시피 했는데.

나쁜 것만 가르쳤지.

언젠가 지나가듯 꺼낸 한탄에 윤설이 심드렁하게 답했다. 이것도 해보지 않았던 경험에 포함될 거라고. 사랑받아 뻔뻔해진 것이라면, 그래도 좋았다.

“저는 뭐라도 증명해야 할 줄 알고 왔는데.”

“…….”

“아니면 내게는 당신이 있어야 한다고 빌어야 하나 했었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 가족에게는 당신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그런가요.”

“이제는 주말 연속극에도 안 나오지만 아드님을 주십시오, 같은 거 있잖아요?”

“하하하.”

잠시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느라 파였던 볼이 한숨처럼 긴 구름을 그리고 살짝 부풀었다. 의미 없는, 멋쩍은 듯한 행동이었다.

“걱정보다 편하게 대해주셔서 좋았어요.”

“다행이네요.”

“가족들 틈에 끼어있는 기분 잘 기억도 안 났으니까, 잘 흉내 낼 수 있을지 어떨지.”

“앞으로 나랑 지내는 시간이 기준으로 남을 겁니다.”

“좋아요, 여보.”

하여간 그 호칭만큼은 찰싹 달라붙은 듯 잘도 말한다.

연신 생글대는 윤설을 흘기는 척하다가도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관계에 이름을 짓고 공적인 서류로 남기고 남들 앞에 알려도 결국 가족이라는 덩어리 안에 어설프게 걸린 위화감이나 소외감을 느낄까 걱정했었다. 최윤의 가족이 그런 부분까지 세심하게 아우를 수 있는 인물들도 아니었고 일방적으로 요구할 수 없는 부분이라 더욱 그랬다.

시작이 이만하면 나쁘지 않으니 두고 볼 일이고… 한시름 놓아도 되겠다. 그러면서도 최윤은 기가 쪽 빠져 윤설에게 운전대를 넘겨야 했다.

* * *

본디 결혼 생각이 없었던 두 사람이 결혼의 현실을 깨닫고 난 뒤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결혼식을 한다고 결정하고 머리를 맞댄 후에 가족 행사는 봄, 둘을 위한 식은 가을 안에 끝내기로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두루뭉술하게 웨딩 슈트니 하객의 범위니 순서 없이 해야 할 일을 주워섬기다, 정식으로 플래너가 붙은 순간부터 스케일이 그 정도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결혼 준비는 남들이 자주 말하는 좋은 부분, 혹은 가장 고생스러웠던 부분 등 아주 단편적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잘하는 데 예산 한도를 정해주고 맡기면 되지 않을까 했던 부유한 커플은 쉴 새 없이 울리는 연락과 직접 선택해야 하는 옵션 수에 치여 골머리를 앓기 시작했다.

물론 전부 착석할 수는 없겠지만 예상 하객 수가 잡혀야 홀 규모가 나오고, 어림잡아 식사 준비도 할 수 있고, 그 식사도 어느 수준으로 할 건지, 주류 제공 여부, 제공 시 몇 가지의 무엇을 내놓을 것인지…….

적당히 알아서 해달라고 하기에는 ‘가족’이나 대외적으로 친분이 있는 하객들 사이에 오르내릴 소리나 운조의 체면이 걸렸다. 전문 업체나 플래너가 팀 단위로 붙어 나름의 선택안을 간추려 왔다 해도 결국은 최윤과 윤설의 의견대로 진행되는 일이기도 하니 상상 이상으로 시간이 많이 들어갔다.

최윤은 출근해서도 종종 패드를 들여다보거나 전화를 받으면서 불쑥 끼어들어 오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뭐는 언제까지 결정해야 미리 발주가 되고, 예약 수량을 빼놓고 등등 각각의 데드라인도 있으니 무조건 미룰 수만은 없었다.

결혼식은 모르겠으나 결혼 준비 과정은 흡사 억지로 참여한 마라톤 같았다.

“식장 세팅은 그래도 거의 다 한 거래요.”

“…그나마 반가운 소리네요.”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자기가 급한 것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이거요.”

퇴근 후 시간을 보내다가도 자기 전 침대에 나란히 앉아 상의하는 매일이다. 최윤이 문득 일찍 온 이유를 떠올리자, 윤설이 협탁 위 팸플릿 아래에 깔려있던 봉투를 찾아 보여주었다. 흔한 갈색 서류 봉투 안에서 두께도 얼마 안 되는 종이가 미끄러져 나왔다.

[혼인 신고서]

두 사람 사이를 증명하고자 할 때 식보다 더 중요한 절차였다.

잊은 적은 없지만 등장한 시기가 엉뚱해 윤설을 보고만 있자니 오늘 본 얼굴 중 가장 신이 나 보인다. 기대하며 기꺼이 두 번이나 하겠다고 나선 결혼식 준비에는 시름시름 해놓고.

“언제 넣으려고요?”

“내일 바로요.”

“자기는 참. 생각도 못 한 걸로 놀라게 하는 거 알아요?”

“…이러다 너무 미뤄질까 봐요.”

웃고는 있지만 윤설이 여기까지 잘 참을 수 있게 된 데에도 나름의 우여곡절이 많았다. 최윤이 사랑을 입에 올리고 스스로를 꺾은 뒤에도 당장 손에 쥐어야 안심하는 듯하던 순간들이 여럿이었다. 동거를 시작할 때, 쉽게 익숙하고 지겨워질까 두려워 마음이 앞서가던 날들, 그런 사건들을 통해 한 발짝 물러나는 법을 익히고도 왈칵 치미는 감정이 급했다.

이 서류 한 장을 쓰고 싶어 진작부터 들고 있었던 기색이 역력하다. 함께 보며 빈칸을 채우는 글씨도 한 자 한 자 공들여 쓰느라 시간이 걸렸다.

“실은 처음에 이것부터 쓰고 싶었어요.”

“이 집에 왔을 때요?”

“네. 여기서 살 거라고 했을 때부터.”

“내가 쫓아내기라도 해요?”

“안 그러겠지만, 법적으로 배우자가 되는 거잖아요.”

“음.”

반은 알고 반은 모르겠다는 듯한 모호한 소리에 윤설이 빙그레 웃었다. 아마 당신은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처럼.

“저랑 헤어지는 게 귀찮고 힘들었으면 좋겠고.”

“…….”

“그것보다는 혹시 모를 일들마다 가장 먼저 부를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윤설은 병원에 입원한 그의 보호자명에 최윤이라고 적힌 카드를 보며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면 윤설의 가까운 가족이 불려 왔어야 하는데 일가친척도 없고 서류로 관계가 증명될 만한 사람은 고용주인 박 대표, 매니저 정도였다.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연인이라 수월하게 보호자 등록이 가능했을 것을 감안해 하루빨리 법적 혼인 관계로 등록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반대의 상황에 윤설이 나설 수 있으려면, 어떤 급한 상황에서 기꺼이 최윤을 대신하려면. 너무 급하고 초조하게 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던 ‘적당한 때’가 왔다는 사실에 기뻤다. 자칫 획 하나 잘못 나가 서류를 망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마저 든다.

“도장 찍을까요? 서명도 가능하지만 중요한 거니까.”

최윤은 지난 속앓이나 고뇌를 묻지 않고 이불 속을 벗어나 옆방을 다녀왔다. 출퇴근마다 들고 다니는 가방 속에 항상 있어 다행이라며 가죽 케이스 끈을 잡고 흔들어 보인다.

윤설은 도장을 받아 서명란에 꾹 눌러 찍었다. 누가 뺏어 가기라도 할 것처럼 틀어쥐고 날인이 끝난 뒤에도 제 것과 함께 양손에서 놓지 않아 최윤이 간지럼을 태워야 했다.

“누구한테 맡길 겁니까.”

“제가 갈 거예요.”

“다른 일 없으면 점심에 들러줘요.”

“회사 근처에서 점심 먹나요?”

“괜찮은 데 있다고들 하니 그럴까 해요.”

“혹시 회사 사람들 보기에 안 좋으면…….”

“뭐 어때요. 내일이면 유부남인데.”

최윤이 왼손을 펼쳐 보이며 스르르 미끄러져 누웠다. 오늘의 회의는 여기서 끝내자는 신호였다.

손을 겹쳐 깍지를 끼고 반지가 걸리는 자리를 살살 매만져 보았다. 윤설의 욕심을 보태 남들 같았으면 예물로 주고받았을 반지를 건넨 보람이 있었다.

이마저도 곧 커플링이 아닌 결혼반지로 바뀌겠지.

그동안 주변에서 말 걸기도 부담스럽게 하는 존재감만으로 역할을 다한 것이니 아쉬움이 없었다.

* * *

배우자가 내내 들떠있어 비교적 조용하게 집안 행사를 준비 중이던 최윤이 다시 불퉁하게 굴기 시작했다. 신혼부부 준비 과정 중 그나마 제일 재미라 할 만한 슈트 맞추는 일 때문이었다.

새삼스레 성에 안 차는 디자인만 여럿 두고 뭐가 더 낫다, 아니다 고르는 데 울컥한 듯 군소리나 조건이 많아졌다. 일찍이 최윤의 미적 기준에 익숙해져 있던 윤설이야 연하 애인의 보기 드문 투정이라 여기는 모양인지 성의껏 들어주며 달랬지만, 준비하는 입장은 달라서 부티크 직원들이 호들갑도 못 떨었다.

보통 이래서 뭐가 더 잘 어울리고 저래서 옵션이 어떻게 붙고 하면서 기분을 맞춰주는 게 영업 방식인데 애초부터 ‘전부 별로지만 어쩔 수 없이 하나 고르겠다’는 고객 앞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만 말하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옷은 맞춤으로 해서 구입하는 거지요?”

“그렇지요.”

“사이즈 바뀔 일은 없을 테니까 가을 옷도 지금 해요.”

“그때 더 괜찮은 게 나올 수도 있는데.”

“여름에 이 고생을 또 하면 힘들잖아요.”

결국 윤설이 나서서 지친 최윤에게 단감을 던져주었다. 못 이기는 척하면서도 어두운 빛 일색인 원단을 놓고 고르던 때보다 관심 있게 보는 눈치인 최윤을 보니 금방 풀릴 듯했다.

대외적 행사라 몸에 알맞게 제작하고 자재를 고가품만 사용해도 좋게 말하면 클래식, 최윤의 표현대로라면 까마귀 떼 위에 또 까마귀로 보이는 디자인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검정은 둘 다 잘 어울리나 무거웠고 회색은 자칫 옷이 예뻐도 둘 중 하나는 낯빛이 죽는 경우가 많았다. 밝은 크림색이나 아이보리는 윤설의 몸을 감싸면 퍽 아름다웠으나 최윤에게는 어색했다. 흑과 백으로 한 쌍을 맞추면 까마귀 떼 하객들 사이 윤설만 동그마니……. 무슨 짓을 해도 까마귀 둥지로 돌아오는 지난한 과정에 최윤이 질려버릴 만도 했다.

권하는 것마다 입고 나오면 다 예쁜 건 예쁜 거고 전체적인 그림은 별개의 이야기라며 눈앞의 윤설에만 흡족해했지 제 옷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윤설은 그런 최윤의 무릎에 산뜻한 디자인이 주인 카탈로그를 펼쳐놓고 이런 색에 무슨 꽃이 많으면 참 멋지겠다 속살거렸다. 남들이 뭐라건 좋고 싫음에 대해서는 보기보다 단순한 면이 있어 금세 열중하는 옆얼굴을 훔쳐보며 웃었다.

둘 다 노란 기가 적은 색이 좋겠고, 채도를 살짝 낮춘 그레이시 블루나 정석의 스리피스 슈트를 벗어난 디자인이라면 모노톤을 이어가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잠깐 옆길로 샌 대화에서 둘만 생각해 꾸릴 가을의 풍경이 연상된다. 늘 최윤이 윤설의 말에서 뜻을 쉽게 읽어냈듯 윤설도 최윤의 말버릇 사이에 숨겨진 꿈들을 헤아릴 수 있다.

“지금보다 더 마르지 않게 조심하기만 하면 되겠다. 그렇죠?”

“당신이야말로 작품 들어가면 먹고 자는 게 여의찮아서 걱정이에요.”

“저는 ‘약간’ 무거워져서 빠져도 큰 차이 안 날걸요.”

“…시간은 있으니까요. 네.”

“마지막이에요. 그것만 입어보고 가요.”

언젠가 제 몸 위에 엎드린 윤설을 부둥켜안고 있던 최윤이 무심결에 무게감이 달라졌다 말한 적이 있다. 근육이 빨리 붙어 부럽다는 둥 긍정적 의미였으나 온몸으로 안겨드는 때마다 그 말이 떠올라 주저하게 되는 바람에 가끔 섭섭한 척 콕 집어 상기시키곤 했다.

대번에 말을 돌리는 최윤에게 한참을 눈길 한 번 못 받고 외로이 걸려있던 마지막 후보를 들려 탈의실 안으로 보냈다. 직접 따라가서 거들까 싶기도 했지만, 지금의 최윤이라면 때아닌 응석 시늉이라도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전문가에게 맡긴다고 맡긴 건데도 하나부터 열까지 손이 안 가는 일이 없다. 잠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아이스커피를 약처럼 쭉 들이켠 윤설에게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별생각 없이 확인하는데 뜻밖의 내용에 점점 표정이 굳기 시작해 최윤이 옷을 입고 나왔는데도 어정쩡한 미소만 걸고 있었다.

“피곤하죠. 지금 보니 얼굴이 안 좋다.”

“…저, 있잖아요.”

“네.”

“방금 연락이 왔는데 문제가 좀 있대요.”

처음부터 가장 선택할 사항이 많았던 식사 문제였다. 주요 식자재 일부가 수입 차질로 식을 치를 때쯤 충분히 납품될지 확실하지 않다며 대안을 구하는 연락이 온 것이다.

아직 대처할 시간은 있지만, 기껏 열심히 맞춰놓은 구성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한숨을 푹 쉬고 서로 어깨와 머리를 기댄 채 진저리 쳤다. 이런 일이 한 번뿐이면 좋을 텐데.

사실, 다가오는 봄의 일만 놓고 보면 더 분주한 쪽은 윤설이다. 최윤의 회사 사정이 연말과 연초에 끼어 가만히 있어도 늘 일이 많았던 데다, 자타가 인정하기를 인내가 강한 최윤이라 해도 이번 일은 영 마음도 손도 안 가는지 스트레스가 심해 보였다. 누가 맡긴 적은 없다지만 자연스레 윤설이 주도하게 된 셈이다.

게다가 아직은 대본을 추려놓기만 하고 드문드문 오디션과 면담뿐이라 비교적 시간도 넉넉하니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실제로도 식장 꾸미는 것이나 기본적인 요소는 점차 구체적인 부분까지 틀이 잡혀 누가 물으면 쉽게 설명해 줄 수 있을 만큼 꿰고 있었다. 그러나 청첩장 제작에 앞서 예비 하객 명단을 받은 최윤이 한 번 더 폭발하고―비즈니스 관계나 혈연을 감안해도 용납하기 어려운 이름이 더러 있었다― 본가와 그 명단을 가지고 실랑이를 하는 동안 어느새 차기작이 결정돼 예상치 못한 스케줄이 자고 일어나면 죽순 자라듯 몰라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덩달아 정신없고 지친 상태에서 몇 차례 변동을 겪다 보니 처음의 설렘보다는 의무감과 피로가 차곡차곡 쌓였다.

와중에 찬 겨울을 건너며 조금 얼굴 살이 내린 듯한 배우자는 안쓰럽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해 어쩔 줄을 모르겠다. 아무래도 의지하고 응석 부리던 게 버릇이 됐나 보다.

의식적으로 최윤을 보살피려 하고 그도 기댈 곳이 필요한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 시간이 무색하게도 어쩐지 속이 허했다. 최윤에게 걱정 말라 했었음에도 막상 혼자 예기치 못한 상황에 부딪히거나 종일 매달리다 보니 든든한 지원군 없이 혼자 나선 기분이 든다.

“자기 약이요. 식탁 위에 있어서 가져왔는데.”

“아. 고마워요.”

최윤이 무심해졌다거나 덜한 점은 하나도 없었지만, 괜스레 섭섭한 듯한 생각이 비집고 올라와 도로 밀어 넣기를 몇 번이다. 원래도 서류나 의례적인 식에 큰 관심이 없었으니까. 의미를 무겁게 두는 사람이 윤설 자신이라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이는 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알고 있지만.

윤설은 작은 알약 두어 개를 미지근한 물에 삼키고 빈손을 최윤에게 보여주었다. 수술 실패로 꼬박꼬박 약을 먹기는 해도 전처럼 생활이 불편한 정도는 아닌데 워낙 걱정해 종종 눈앞에서 먹고는 했다.

가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골몰하는 자신을 생각하면 다 빌어먹을 알파 때문인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확실하고 구속력 있는 관계에 대한 집착, 염원과도 같은 바람. 알 만큼 아는데도 끊임없이 최윤은 내 것이라고 주지시켜야 할 듯한, 무어라 해야 맞을까, 불안은 아니다. 다만 이유에 앞서 그렇게 해야 한다는 명제가 우선한다.

“몸 불편한 데는 없고요?”

“네. 당신이랑 있잖아요.”

“달리 해야 할 건 없습니까?”

“그럼요.”

“매번 같은 답인데 그 부분은 안심이 안 돼서요.”

각인 상대란 그런 존재니까.

절대적이다. 각인이 어떤 효과를 낳는지는 정보도, 사례도 희박해 최윤은 그저 윤설에게 자주 물을 뿐이었다. 윤설에게는 최윤의 잦은 걱정과 애틋함이 달가워 이따금 스스로를 깊은 굴로 몰아넣는 원인이 알파 인자라 해도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조금 비겁하고 끔찍한 자신을 스스로 감당하고 나머지는 최윤에게 짐 지워주었으니.

갑자기 쌓였던 서운함이 녹은 자리를 부끄러움이 대신했다. 고작 몇 달 처음 하는 일이 바빴다고 서운하니 마니 가당치도 않다.

앉은 채로 팔을 벌리자 최윤이 성큼 다가와 꼭 안아주었다. 체격이 비슷해 빠듯하지만 품에 들어차게 안기면 폭 감싼 듯 안락하고 따뜻해 좋았다.

“이렇게 안아주면 돼요.”

“또?”

“등도 쓸어주세요.”

“그래요.”

“그리고, 자기 전에 청첩장 같이 골라야 해요.”

“아아.”

최윤은 내키지 않고 일이 복잡하다 해서 자신을 뒤로 미룰 사람이 아니다. 알면서 뒷걸음하지 말고 계속 해 나가면 된다.

새삼 앞만 보고 달리듯 다급하게 이것저것 안겨주고 근사한 추억을 선물하려 안달이었던 자신이 떠올라 폭소하자 최윤이 간지럼 탔냐 물었다. 그때는 하루치라 이런 고생을 모르고 더 큰 것, 더 보기 좋은 것 하려고 난리였구나 하는 깨달음에 민망해 웃음소리가 커진 탓이다.

* * *

이번에야말로 둘뿐인 크리스마스와 더 많은 사람이 초대해 주는 연말을 지나 최윤의 가족들과 새해를 맞았다. 얼굴 서너 번 보고 사무적인 일로 통화를 했다 해서 스스럼없이 편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한결 우호적인 분위기, 회장 부부 눈치가 덜하자마자 멋대로 굴기 시작하는 손위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최윤의 가족으로 무사히 편입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왠지 결혼을 앞둔 사람이 아니라 가족을 결혼으로 떠나보내는 사람처럼 자주 눈시울이 젖는 윤설 때문에 최윤이 자기 가족 탓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윤설이 보기에는 사랑 넘치는, 가족다운 가족이었으나 본인 생각에는 평범하지 않아 대하기 사나운 줄 안다며 훌쩍 앞서가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억울할 뻔했다.

정작 최윤의 가족들은 혼주석이고 가족사진이고 텅텅 비어있을 것에 생각이 미치자마자 자기가 윤설 쪽에 앉겠다고 난리들이었다. 그나마 부모 세대에 가까운 둘째까지는 좋은 대안을 찾아보자는 식이었는데 나이 헛으로 먹은 것처럼 구는 작은형, 작은누나는 어차피 다 가족인데 바글바글 한쪽에만 앉을 필요 있냐며 대놓고 윤설 쪽 혼주석을 기대했다.

“당신 따로 모시고 싶은 분들이 없다면 박 대표는 어떻습니까.”

“…박 대표님이 부담스러워하시지 않을까요?”

“좋아할 겁니다. 경우에 맞을지는 몰라도 나 다음으로 윤설 씨를 보호해야 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고요.”

“…….”

“거기다 모자란 형, 누나 넣고 김우형 씨까지 넣으면 양쪽 수가 딱 맞겠네요.”

최윤은 상당히 멋쩍은 듯했으나 윤설은 이 태연함이 기꺼웠다. 혈혈단신을 자처하고도 편들어 줄 사람이 여럿 생기지 않았나.

지난해 바로 그 운조 일가 별장에서 새해 아침 돋아 오는 첫 해가 보이는 자리에 서서 최윤과 무사 안녕을 빌었다. 그의 어릴 적 친구로 믿음을 저버릴 줄 몰랐다는 커다란 개가 묻힌 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눈부심에 찡그리는 찰나의 살갗 위 구겨짐과 그림자와 가슴 깊은 곳에서 뽑아낸 고백을 오래오래 기억하겠다 다짐한다.

“이래서 절대라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들 하나 봐요.”

“세상일은 모르니까요.”

“네. 누구랑 같이 살 생각도, 그게 너무 당연할 줄도 몰랐습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셨어요?”

“자주 그랬었죠.”

“그 점은 제가 책임질게요.”

“마음 넓은 배우자를 얻어 다행이네요. 잘 부탁해요.”

단 한 번도 최윤의 욕망이 닿은 적 없던 일을 바라게 했으니 후회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으로 돌려준다.

마음속으로는 윤설이 믿지 않은 신들과 앞으로의 삶을 빌려 맹세하였다. 다만 최윤이 지나친 맹목을 걱정하기 때문에 입속말로 그쳤다.

그해 봄, 4월 말의 결혼식은 날이 좋았고 순조롭게 시작해 예상한 대로 끝났다. 보고 싶은 사람은 모두 있었고, 싫은 사람을 억지로 피하지 않은 최윤을 보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단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한 쌍의 예복은 나란히 선 부부가 빼어나게 훌륭한 몸이라 최윤이 질색하는 검은 양복들 사이에서 눈에 띄었다. 여러 번 속 썩인 만큼 식사는 훌륭했고 결혼할 이도 없는 이들이 한 쌍의 부케를 받고 싶어 풀쩍풀쩍 뛰었다.

인사치레는 수도 없어 목이 자주 타고 뒷목이 뻣뻣해진 채로 지쳐서도 내도록 웃고 있다가, 하나둘 떠나는 하객들과 가족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재킷을 벗고 아무렇게나 앉아 담배를 나눠 피웠다. 윤설이 상상한 대로의 첫 번째 결혼식이었다.

이제야 끝이라며 다리를 하나씩 길게 펴는 배우자에게 놀리듯 우리 곧 가을 식을 준비해야 할 텐데요, 운을 떼자 대답도 없이 품에 머리를 기대고 늘어진다. 앞으로 또 수개월, 수차례 함께 해결해야 할 일이 많겠다.

“다음에도 잘될 거예요.”

우리는 함께, 남은 삶 내내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불편한 하객들 앞에서 하지 못한 진한 키스와 닮아버린 말버릇을 덧붙여 본다.

그러면 됐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