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그 남자의 로맨스 (13/15)

2. 그 남자의 로맨스

최윤은 연인 흉내를 굉장히 잘 내는 사람이었다. 매너는 배워서 익었고 미적 감각이나 센스가 형편없는 쪽도 아니어서 불시에 건네는 선물은 거진 성공했다.

무엇보다 상대도, 최윤도 늘 가벼운 마음으로 임해 각자의 역할에 만족했다. 가끔은 물질적인 대가에 겸해 잠자리만으로도 충분한 관계라 심란스러울 일이 없었다. 간혹 진심의 경계에서 넘어지려는 사람이 있어 일으켜 세우고 이별하는 경우가 성가신 일의 전부였다.

그런 그도 진지한 연애는 처음이다. 윤설은 모르겠지만 반응이 아니라 속내까지 신경 써가며 하는 연애다운 연애는 이제서야 처음이었다.

그래도 특별히 무얼 해야 한다기보다는 그저 원하는 대로 잘해줘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윤설은 생각이 좀 다른 듯했다.

‘도시락 싸드릴까요?’

윤설은 처음이자 마지막일 연애에 아주 충실한 데다 지난 세월 억눌려있던 크고 작은 소망들까지 더해 열심이었다. 돈이 없고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덜컥 어디 잡혀갈까, 어울리는 상대가 해코지당할까 무서워 못 한 일이 한둘이 아니고 하나하나 다 한이 된 것처럼.

친구들 사이 유행하는 거라면 다 하고 싶은 애들 보는 기분도 들고 하고 싶은 게 많은 건 좋은 변화라 생각해 마냥 귀여워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피곤하잖아요.’

‘그래도 촬영 시작하면 못 하니까.’

‘나 버릇 나빠지는데요.’

출근길에 도시락 싸준다는 것도 그런 맥락으로 웃으며 받았다. 사내 식당도 괜찮은 편이고 주변에 먹을 데도 많은데 굳이 수고할 것까지야. 한두 번 이벤트로 족하다. 영화가 잘돼서 시나리오도 장편 드라마도 대본이 쏟아지다시피 하는데 그것도 다 읽어봐야 하고, 윤설 나름 집에서 분주할 터다.

“오늘도 따로 먹을게요. 신경 쓰지 말고 다녀들 오세요.”

“커피 생각나면 전화 주세요!”

한데 매일 이단 찬합 들려준 게 벌써 이 주가 다 됐다.

최윤은 비서실 팀원들이 기웃대는데 더 둘러댈 말도 없어 카드를 주며 등을 떠밀었다. 먹고 싶은 거 먹고 오라고. 후식을 먹어도 좋고.

그러고 나서 반찬 담은 모양까지 정갈한 도시락을 눈싸움하듯 바라보았다. 오늘도 맛있다. 입맛에도 맞고 다 좋은데 어쩐지 점점 말려야 하지 않나 싶어진다.

하고 싶어서 한다는 것 두었더니 뭘 했더라. 아침마다 옷매무새도 제 손으로 봐줘야 하고, 진하게 입 맞추는 배웅도 하고 싶고, 안 그래도 되는데 퇴근 시간에 꼭 집에 있으려 하고.

이상하리만치 약속이 없다 싶더니 나갔다가도 중간에 자리를 파하고 와버린 거였다. 그러다 기껏 사귄 친구들 다 멀어지려고.

지켜보는 최윤의 머릿속에서 각기 다른 목소리가 실랑이를 벌였다.

얼마나 했다고 그러나. 실컷 하고 나면 본인이 알아서 줄이겠지.

아니, 윤설 성격에 한번 꽂히면 오래갈지 모르는데 너무 애인 중심으로 생활하게 두는 건 안 좋지 않나?

귀엽잖아.

물론 하는 짓이 귀엽지.

으음.

아무도 없다고 앓는 소리가 쉽게 나온다.

턱을 괴고 곰곰 생각해 보니 윤설이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은 잘고, 귀엽고, 때로는 유치하기도 했다. 원래 편한 실내복 대충 입고 자던 최윤에게 짝이 맞는 커플 파자마가 생겼다. 결혼반지도 아닌데 잘랑잘랑 잡은 손 흔들며 같이 보러 간 부티크는 남들 본식 반지 맞추는 수준이었고 그 결과 지금 최윤의 왼손은 누가 봐도 유부남 반지 낀 손으로 보인다.

가뭄에 콩 나듯 매니저가 찍어준 사진이나 공식 홍보물 정도 올리던 윤설의 하나 있는 SNS에 가끔 최윤의 뒷모습이나 같이 있을 때 저도 모르게 찍힌 사진이 올라가기도 한다는 걸 알았을 때는 조금… 웃음이 나오지 않았으나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 있지. 원래 티 내는 거나 이벤트를 좋아할 수도 있지. 다른 건 다 달라도 연애만큼은 그럴 수도 있지.

“대표님, 자주 드시던 걸로 사 왔어요. 잘 먹었습니다.”

“아, 네. 잘 마실게요.”

“그리고 저, 대표님 앞으로 온 건데요.”

“뭐가 왔습니까?”

그러나 얼굴이 펴서 돌아온 직원 몇이 평소와 다른 미소를 지으며 들고 온 꽃바구니를 보고는 일순 평정심이 무너졌다.

“좋은 날인가 봐요!”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윤설이나 최윤의 기준으로도 한 아름일 크기였다. 신나서 바구니를 들고 온 직원이 여성이라 얼굴 대신 정수리만 보일 지경이었다.

최윤은 얼른 나서서 바구니를 넘겨받고 호들갑 반 부러움 반으로 한마디씩 꺼내는 직원들을 내보냈다.

꽃.

예쁘다. 당연하다는 듯 최윤이 꺼리는 향은 다 피해서 색감의 조화가 아름다운 것들을 골라 꾸린 모양이 튀지도 않고 보기 흐뭇했다.

“…….”

분명 좋은 일인데 다시 고민스러워진다. 자신이 무던하고 무뚝뚝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건만 윤설이 쏟아내는 이벤트를 겪고 있노라면 문득 너무 심심한가 싶어진다.

아니면 옆에서 바람 넣는 친구라도 있나. 좀 어린 친구들도 있는 것 같던데.

참고한답시고 한두 마디씩 주워들은 걸 다 해보는지도 모른다.

개중 큼직한 꽃잎을 손가락으로 살살 건드리며 묘하게 근심스러운 기분을 다스렸다. 같이 있으면 좋을 뿐 대단한 걸 바란 적도 없다.

예쁘니까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은 애정은 마찬가지일 테니까 군말 없이 받아야겠지.

점심시간이 지나는 것도 금방이라 늦기 전에 문자를 남겨두었다.

[꽃 잘 받았어요. 고마워요.]

커다란 꽃바구니를 사무실에 남기고 가면서 그냥 가기는 허전해 회사 근처에서 초콜릿을 샀다. 한 입도 안 되면서 갖은 모양을 하고 리본 묶인 상자 안에 알알이 늘어선 것들. 윤설이 최윤만큼 군것질을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휴식기기도 하고 기분이나 좋으라고 골랐다.

한 손에는 빈 도시락, 한 손에는 초콜릿 상자가 든 쇼핑백을 든 채 들어서는 지금처럼 하루를 마치면 집 어디에서든 윤설이 고개를 내밀고 나와 맞아주었다.

“나 왔어요.”

오늘은 이 층에 있나. 혹 잠들었을까.

부러 소리 내며 들어오는데 집 안이 조용했다.

“자기?”

윤설이 들을 때마다 간지러워하는 애칭을 부르며 거실에서 계단, 이 층의 서재와 침실을 돌고 다시 내려왔다.

주로 거기 있었는데.

오늘 달리 하는 일이 있었나 싶어 전화를 거니 거실 너머 테라스 쪽에서 벨 소리가 들려왔다.

“…….”

끊기지 않는 소리를 따라 간 테라스에 사람은 없고 테이블 위에 뚜껑 덮인 접시가 여럿 놓여있었다. 살짝 열어보니 훈김이 필 정도로 놓은 지 얼마 안 된 음식이다.

아직 불을 켜지 않은 캔들과 회사로 보낸 것과 같은 꽃으로 만들어진 센터피스, 와인 잔. 윤설을 구할 때 벌인 일 때문에 위험해질 수 있다고 몇 번이나 일러둔 터라 등골 위로 불안이 기어오르는 기분이 든다. 별로 안 좋아하는 운동도 그 때문에 시작했었다.

최윤은 계속 홀로 우는 윤설의 핸드폰까지 주머니에 넣고 주방으로 갔다. 채 정리되지 않은 조리의 흔적이 흩어져 있고 설거짓거리가 개수대에 놓여있다.

일 층의 방은 동선 안에서 최대한 다 열어보고 욕실마다 불이 꺼진 채 비어있는 것까지 확인한 뒤 바깥으로 나섰다. 정원 곁으로 돌아 와인 셀러 쪽으로 내려가는 층계의 조명을 켜고 소리 없이 내려갔다.

만약에, 혹시나. 불안한 가정을 놓지 않은 채로.

“윤설 씨.”

희미한 불안이 습관으로 남은 것은 윤설도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최윤은 지하 셀러들을 지나 카펫 위에 나동그라진 채로도 한 손에 권총을 쥐고 있는 윤설을 발견했다. 자기 입으로는 이전만 못하다고 하지만 한번 배우면 잘 잊지 않아 다행이다.

“지금 오셨어요?”

“네. 다쳤어요?”

“괜찮아요. 막 일어나려는데 누가 오는 것 같아서.”

“직원들 다 어디 보내고 혼자 있어요.”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떨어질까 봐 바짝 쳐들고 있는 와인병을 받아 안전한 곳에 세워두었다. 그제야 윤설이 최윤의 손을 맞잡고 몸을 일으켰다. 어쩐지 민망스러워하는 듯하면서도 해쓱한 얼굴에 발목이라도 삐었나 싶다.

“잠시만.”

“아니에요. 안 다쳤어요.”

“이렇게 잡아도 안 아파요?”

“네.”

기어코 잡아서 조심스레 눌러보았다. 윤설은 내도록 비슷하게 침울한 기색일 뿐 특정 부위에서 눈을 찌푸리거나 신음하지 않았다.

사람 놀라게 하기는.

여기는 와인 보관하는 장소 특성상 온도가 낮으니 이만 나가자는데 골라놓은 와인을 들고도 미적대고만 있다.

“저녁 준비해 놨던데요. 식겠어요.”

“…보셨어요?”

“네. 핸드폰이 거기 있더라고요.”

“시간 맞춰서 준비하고 싶었는데.”

“잘 맞춘 거나 다름없죠. 얼른 가요.”

“실은, 이것 말고도 와인을 하나 더 골라뒀었어요.”

“응. 그랬어요?”

허리에 팔을 감으니 미적대면서도 순순히 이끌려 온다 싶었는데 대뜸 제풀에 아쉬워하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최윤은 윤설을 달래며 난처함을 느낀다. 오늘이 누군가의 생일, 어떤 기념일이었더라도 꼭 깜짝 놀랄 만한 무언가를 준비할 필요는 없다. 자기나 윤설이나 감동은 받을지언정 그다지 놀랄 성격도 아닌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이벤트에 진심인 모양이다.

아무튼 나는 좋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살살 달래며 계단을 오르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조금 늦은 거야 아무것도 아니고 아직 식사를 시작한 것도 아닌데, 왜 벌써 엉망진창이 됐다고 생각하지?

“…그게 더 잘 어울리는데 아까 주방에서 병을 놓쳐서 하나도 안 남았어요.”

“아아.”

“여기에도 하나밖에 없고, 둘만 있고 싶어서 다른 분들도 다 퇴근하시라고 했고, 당장 구할 수도 없었어요.”

“속상했겠네. 걱정 마요. 지금 고른 것도 충분히 좋아요.”

“그래도요.”

이유를 듣고 나니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스스로 생각한 완벽한 저녁 시간이 시작도 전부터 틀어졌다는 실망감, 수습하기 전에 애인에게 들킨 창피함이 섞여 굉장히 서러운 티가 났다. 남이 봤으면 그냥 울적해 보인다 했을 정도인데 같이 살아서 때로는 상대가 감추려고 애쓰는 것도 너무나 잘 보인다.

하여간 애 같은 구석이 있어요. 말은 안 하는데 따지고 보면 기껏해야 일 년 좀 넘는 차이라 해도 연상인 사람이 그러니까 되게 귀엽고.

별걸 다 귀엽다 하니 자신도 유난은 마찬가지라 이 난처함도 적당히 넘긴다. 댓 발 나올 것 같은 입에 초콜릿을 하나 넣어주고 나서야 분위기가 풀렸다.

일찍이 서로를 감당하겠노라 결심했을 때 각자 한 다짐이 있었을 것이다. 윤설은 최윤의 감정이 저보다 커 보이지 않았을 텐데도 어떤 이유에선지 제 사랑 안에 최윤의 방식을 포용했고, 최윤도 자신이 윤설의 삶에 끼치는 손해까지 책임으로 알겠다는 각오를 했었다.

그때는 갓 연애를 시작한 연인이나 다름없어 그런 비장한 각오보다 사소한 행복으로 비명 지르게 될 줄 몰랐다.

보더콜리를 키우는 사람들이 하는 말로 보더콜리의 영리함과 활동량에 맞는 놀이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면 견주나 개나 힘들다는―자랑 섞인― 하소연이 있는데, 지금의 최윤이 그 모양이었다.

윤설은 최윤이 알아온 것보다 혹은 짐작한 것보다 더 다정스레 굴고 더 열렬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운동을 바짝 해서 체력이 받쳐주자 아침부터 좋아라 달려드는 것 하며, 끝없는 이벤트와 새로운 놀이는 어디서 자꾸 튀어나오는지 최윤을 종종 갓 성견 된 강아지 성화에 시달리는 견주의 시련에 들게 했다.

한마디로 벅찼다. 자존심 상하는 소리지만 그랬다. 묘하게 다른 방향으로 열정적이라 대체로 신나게 돈 쓰며 나다니거나 끈덕진 잠자리로 경험이 편중된 최윤에게는 낯선 영역인 셈이다.

이걸 말해야 할지 어떨지. 혹 둘 다 처음이라 하면 더 불이 붙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안 나온다.

[정시 퇴근이에요?]

[아직까지 특별한 일 없는 걸 보면 그럴 것 같네요.]

[퇴근 시간에 회사 앞으로 갈게요.]

오늘도, 이것 봐.

지난주에 막 면허가 나왔는데 벌써 데리러 온단다. 최윤은 퇴근 후 데이트 계획 때문에 차도 두고 나왔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야 하기도 하고 최윤의 차를 끄는 것보다는 자기 몫의 새 차 운전하는 게 재미겠지 싶었다.

심지어 그 차도 최윤의 형에게 대뜸 사내라고 한 것 아닌가. 최윤은 형이 오해도 풀 겸, 그래도 막내랑 사는 애인이 예쁘다고 뭐 하나 해주러 갔다가 뜻밖의 지출에 옆구리가 휑해졌다며 우는소리 한참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막냇동생 연애에 참견이던 사람이 조용하다. 어디서 차값만큼 벌 궁리를 하나 짐작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잘 있었어요?”

“네. 보고 싶었어요.”

“나도 생각 많이 했습니다. 우리 오늘 어디 가나요?”

조금 걱정했는데 차 대놓은 모양이 썩 훌륭했다. 조수석에 타는 것도 오랜만이라 벨트 찾을 때 헛손질을 했더니 윤설이 몸을 기울여 대신 매주었다. 익숙지 않은 호사다.

윤설이 내비게이션에 설정한 목적지는 자동차 극장이었다. 그간 굳이 갈 필요도 없었고 특별히 선호할 만한 분위기도 아니어서 방문한 기억이 까마득했다.

“언제 갔었나 싶어요. 요즘은 뭐가 다른지 궁금하네.”

“잘됐네요. 상영하는 영화 수가 적긴 한데… 같이 가고 싶었어요.”

아마 이것도 윤설의 위시 리스트에 한자리 차지한 데이트 로망이었나 보다.

퇴근 후 식사까지 마쳤을 법한 시간대는 아니라 그런지 시야가 좋은 자리를 빼고는 듬성듬성 비었다. 차들이 빽빽한 것보다야 오히려 낫다. 최윤의 기억 속 야외 상영회 같던 극장과 비교도 안 되게 멀끔해 거슬림도, 불편함도 없었다.

둘은 작은 사이즈의 팝콘과 맥주만 사서 끼워놓고 의자를 적당히 뒤로 젖혔다. 일전에 딱히 갖고 싶은 차종이 있었던 건 아니라 넓고 편했으면 좋겠다는 기준으로 추천받았다더니 정말 승차감이 괜찮았다.

어두웠다가 밝아지는 정면 스크린을 홀린 듯 바라보는 옆얼굴을 보니 새삼스레 보기에 어여쁘다. 최윤은 시선을 느낀 윤설이 돌아볼 때까지 모르는 척 있었다. 이따 윤설이 영화에 집중하거든 또 얼굴이나 봐야겠다 생각하며 맥주를 마신다.

원래 이런 데서 상영하는 영화는 현재 상영작 중 가장 인기작이 아닌 한에야 분위기 잡기 좋은 것들뿐인데. 가끔 심야 테마로 공포 영화 정도가 다를까. 윤설이 몇 안 되는 상영작과 시간대를 두고 어떻게 골랐을지 상상해 봐도 잘 짐작이 안 간다.

“…윤.”

“…….”

“자요?”

“아.”

아니나 다를까, 영화는 마니아층이 꽤 있었던 인디 영화로 내용보다는 분위기로 밀고 가는 식이었다. 본 적 없는 영화라 다행이다, 연출이 흥미롭네, 하다가 금방 윤설의 얼굴을 보기 바빴다.

그랬는데.

어느새 윤설이 살풋 찡그린 채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영화는 진작 초반부를 지났는지 주인공 커플이 진지한 대화를 하며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최윤은 잠시 눈 주변을 꾹꾹 누르고 윤설에게 사과했다. 밖에서 조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며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구는 애인의 어깨를 안아 가볍게 볼이며 입술에 입 맞추고 고개를 젓는다. 가볍게 손을 쥐고 손등을 가만가만 문질러주다 아까의 설렘은 어디 갔나 싶게 가라앉은 윤설을 알아챘다. 머릿속이 무슨 생각으로 바쁜 모양인데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

“…영화에 이런 신 나오는 거 알았어요?”

“네? 아니요. 그냥 어쩌다 보니…….”

“이런 데서 상영하는 영화가 보통 애정 신이 진하기는 해요.”

“…아.”

“아까 들어온 차들 다 선팅 짙지 않았어요?”

“그렇, 네요.”

평소처럼 유들유들하게 장난 거는 시늉을 하니 비로소 울적한 기색 대신 홍조가 피어오른다.

손등 위를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손바닥 안을 파고들어 살살 긁자 되레 억울한 듯한 눈을 하고 최윤을 마주 본다. 정말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자신은 결백하다고 주장하는 눈이다.

윤설은 영화 속 애정 행각이 짙어질수록 화면을 보지 못하고 잡은 손만 쥐었다 놓았다 하더니 끝내는 김빠진 맥주를 쭉 들이켰다. 여간해서는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던 사람이 이번에도 망했다고 웅얼거리는 소리에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조금 피로하긴 하지만 그런 데이트도 정말 괜찮았다. 어차피 뭘 한들 이제 와서 신선하고 놀라운 경험일 만한 건 얼마 없고 결국은 윤설이 궁리 끝에 짠 계획, 윤설이 하는 행동을 곁에서 지켜보는 재미였으니까.

둘 다 생각 없이 맥주를 두어 잔씩은 마셔서 대리운전을 불렀다. 돌아가는 사이 창밖을 보다 긴장이 풀린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는 모습에 그에게도 즐거운 시간이었기를 바랐다.

“금방 올게요.”

“몸 좀 담그고 있다 오세요.”

“나요?”

“오늘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요. 물 받아줄까요?”

“아니, 자기도 씻어야지. 봐서 할게요.”

당신도 생각 있으면 들어오고요.

마지막까지 농담으로 실컷 간질여 놓고 몸을 닦으니 오히려 개운했다. 혼자 살 때도 그리 자주 쓴 적은 없는 욕조를 보며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물을 채우는 대신 수건을 집어 들고 가운을 걸쳤다.

최근 사랑 많은 애인이 하도 어린애 챙기듯 해 그렇지, 심신이 못 견딜 것까지는 아니었다. 둘 다 출출할 시간인데 식사까지는 그렇고 뭐로 배를 채울까 정도의 고민이나 하며 침실로 갔다. 윤설도 물기에 말개진 낯을 하고 얌전히 앉아있다.

기분이 좀 나아졌을까. 빠듯한 연애 페이스에 대해 언젠가 이야기를 해야지, 해야지, 했었는데 오늘이 적당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나하나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고.

곁에 앉아 곧게 뻗은 윤설의 다리 하나를 허벅지 위에 올리고 무릎 아래 종아리를 지그시 눌렀다. 뭉친 근육 푸는 것보다 힘을 약하게 줘서 부드럽게 주물러주면 금방 잠이 온다고 누워서 그렇지 꽤 좋아했었다. 적당히 조절해도 이따금 아픈지 발가락을 오므리거나 하면 놀릴 구실이 돼서 최윤도 좋다.

“힘 빼요.”

“오늘은 괜찮아요.”

“왜요, 자기.”

그런데 윤설은 시작부터 발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있더니 아예 발을 빼려 들었다. 대신 최윤의 다리를 부둥켜안다시피 해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장난인가 싶어 힘줘서 내리면 자기 다리는 쏙 빼고 남의 다리를 잡아다 곱게 올리는 실랑이가 이어졌다.

웃어도 되는 분위기인가. 요즘 최윤에게 윤설은 알기 어려운 강아지, 망아지, 그런 존재라 함부로 웃기도 조심스럽다.

이러다 힘겨루기로 번질 판이라 최윤이 윤설의 무릎 위에 두 다리를 얌전히 내주는 것으로 일단락 지었다. 당신 뜻대로 하라고 아예 등 뒤를 짚고 느슨한 자세를 취하니 서툰 손길이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나한테 잘해주고 있으면서 왜 울상이에요.”

“그냥요. 하고 싶은 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다.”

“뭐가 마음에 걸려요?”

“저도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어요.”

“괜찮아요. 알 수 있을 때 말해요.”

고개를 끄덕이는 윤설의 손은 숫제 마사지보다는 정서적 안정을 얻으려 인형을 만지작대는 애들 같았다. 최윤은 뒤로 기댔던 몸을 바로 세우며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도 됩니까?”

“…그럼요.”

“윤설 씨가 나랑 하려는 일들 말인데요.”

“네.”

“늘 완벽하지 않아도 돼요. 알잖아요.”

“하지만.”

“아니면 내가 섹스할 때 빼고는 심심한 애인이라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거예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네.”

“반대예요.”

너무 직설적으로 물었나. 얼굴이 허예지는 듯해 후회가 밀려온다. 윤설은 최윤의 무릎뼈 도드라진 자리만 문지르며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저야말로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신기할 것도 없는데 매번 제 뜻에 따라주고… 그러니까 뭐든 뻔하고 실망스러울 것 같아요. 당신이 그러려고 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잖아요.”

“그래서 기분 안 내킬 때도 무리한 적 있어요?”

“그런 건 아니에요. 다 같이 하고 싶었던 일은 맞는데 할수록 엉망이고 괜히 피곤하게만 하는 것 같아요.”

“내가 자기한테 금방 질릴 거라 생각해요?”

“아뇨.”

그럴 리가 없어요.

별안간 화를 내는 듯 번뜩이는 눈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도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과 널을 뛰는 감정에도 최윤은 덩달아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몸에 남은 흉이 오래 남듯이 윤설의 과거가 쉽게 그림자를 걷고 씻은 듯한 평온으로 가게 두지 않는다는 것쯤 알고 있고, 그로 인한 흔들림 역시 책임의 영역 안에 있다. 다소 불편한 자세가 돼버렸지만 상체를 낮추고 윤설의 두 손을 끌어 잡았다.

“어떤 마음인지 압니다.”

“어떻게…요?”

“나도 이런 건 처음이니까요.”

“…거짓말이죠.”

“어어? 아닌데.”

앵돌아진 투로 달래려 하는 말이냐 묻지만 그래도 윤설의 떨리는 목소리가 누그러진다. 최윤도 윤설이 그러했듯 멋쩍은 손짓만 반복하게 된다.

서로의 완벽하지 못한 면을 고백하는 시간이 끔찍하게 싫어도 언제까지 모르는 척 물 아래서 죽어라 물장구만 칠 수는 없으니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나 모든 순간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바는 마찬가지여도 그게 목표는 아니었다.

“나도 이렇게 마음 쓰는 사이는 처음이라 가끔 따라가기 힘들어해요.”

“…….”

“윤설 씨가 실수했을 때 내가 다 알아서 그 시간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 될 때가 많거든요.”

“…몰랐어요.”

“우리는 같이 살기로 했으니 한번 잘 안 풀린 일 다시 할 기회는 충분해요. 그때 충실했는데 어떻게 해도 안 풀리는 날은 서로 봐주는 걸로 해요.”

“맞는 말이에요. 다 맞는데 내가 가끔, 아니, 너무 자주 속상한 건.”

“너무 좋아해서 그렇죠.”

그렇게 말해줄래요?

토끼 눈이 된 윤설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반복했다. 실은 이미 최윤이 생각했던 시간보다 더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다고.

만나고 헤어지는, 자신의 공간이 따로 있는 연애와 동거는 별개의 일이라 오래 사귀고 결혼한 사람들도 옥신각신 싸우며 맞춰가는 시기가 있지 않나. 딴에는 마음의 준비도 했었는데 여럿 남는 방 거들떠보지도 않고 최윤의 방에 살림을 꾸리고, 제풀에 실망한 날이든 각자의 기분이 어떻든 꼬박꼬박 한 침대로 들어오는 행동이 뜻밖이라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렸던 것도 있다.

최윤이 윤설을 찾기 위해 타 조직 정보를 넘긴 행동이 튀어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농담 섞어 가볍게 말했는데 그 말 한마디로 꺼리던 훈련도 자처했고, 또.

윤설이 모르는 사이 최윤에게 해준 일들을 망설임도 막힘도 없이 말해주었다.

“…그러니까 당신이 속상할 정도로 급하게 생각할 건 하나도 없어요.”

“네.”

“당신이 너무 빠르면 내가 따라가기 힘들다는 말도 이번만 할 거니까 나를 좀 봐주고요.”

“…네.”

“그래도 계속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사랑해요.”

너무 좋아요. 너무. 좋아해요.

비슷하고도 다른 말이 입맞춤과 함께 쏟아졌다. 윤설이 돌연 붙잡은 손을 풀고 와락 안으며 무게를 싣는 바람에 몸이 반쯤 접힐 뻔한 최윤이 아쉬울 때만 나오는 형 소리를 하며 엄살을 부렸다.

겨우 다리를 펴고 아무렇게나 겹쳤던 몸이 길게 누워 익숙한 자세로 얽히는 내내 젖은 입술이 닿는 물기 어린 소리와 구겨진 이불 바스락대는 소리가 요란했다. 한바탕 지나고도 고인 빗방울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떨어지듯 쪽, 쪽, 뜸하게 이어진다.

“실수나 실패나 뭘 해도 잘되는 날 다 둘이 겪을 테니까…….”

다 괜찮을 거예요.

그래서 오늘의 연애는 성공적으로 끝난다.

“…그래도 마사지는 배울래요.”

“그래요.”

“여름에 바닷가 리조트도…….”

“…예약해 놨네. 맞죠?”

“…….”

“…….”

잘 자요.

목까지 덮은 이불 속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꿈꾸듯 말하고 이내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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