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일상
넥타이를 대충 목에 걸고 소매를 걷어 시계부터 차던 참이었다. 더 자겠거니 싶었던 사람이 느린 걸음 소리를 내며 들어오다 문간에 멈춰서 최윤을 불렀다.
더 자지 그랬어요?
대충 그런 말을 흘리며 돌아보는데 갑자기 윤설이 뛰듯 속도를 내 다가왔다.
“제가 할게요.”
양손으로 타이 끝을 잡고 진지하게 말하는 통에 웃지도 못한다. 선착순 경품도 아닌데 대수인가.
그래도 번번이 사양하지 않는 것은 윤설이 챙겨준답시고 하는 일이 제법 기분 좋았고, 아무래도 결과물이 더 깔끔했기 때문이다. 정장도 많이 입어본 사람 손이 빨랐다.
“윤설 씨.”
“…네.”
“자기?”
“네?”
“너무 당기면 아파요.”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아직도 최윤은 정장이 답답하고 매일같이 출근해 자리를 지키는 일이 몸에 익지 않았다. 사실 습관은 다 자리 잡았는데 활동량이나 성질상 좀이 쑤셔 그랬다. 목을 감싸는 넥타이도 약간은 느슨하게 해야 숨을 크게 쉬기 좋다.
윤설은 잠기운을 떨쳐내고 최윤의 편의에 맞게 다시 매듭을 지었다.
“매일 해주고 싶어서요.”
“쉴 때나 늦잠 자는 건데.”
“쉴 때나 할 수 있기도 하고요.”
윤설의 말로는 매일 아침 차림새를 봐주고 배웅했다가 돌아올 때 맞아주는 일들이 함께하는 일상의 상징 같단다. 새삼스럽지만 최윤도 그럴 때면 동거하는 연인이 있고 가족 비슷한 생활의 공유자가 생겼다는 기분이 들고는 했다.
적응하는 사람의 어색함조차 없이 제집 한복판에서 부산스러운 윤설이나, 누가 와도 모르고 늘어져 자는 윤설이 희한한 광경이라 가끔은 집주인인 최윤이 망설이기도 했다.
“오늘은 어떻게 인사해 줄 건가요.”
“어제랑, 똑같겠지요.”
“잘 다녀와요?”
“네. 그거요.”
“그리고?”
“…….”
윤설이 입을 벙긋대다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이번에는 둘 다 웃고 말았다. 퇴원할 때 행여나 도로 제 집에 데려다 놓을까 아침부터 잠도 안 자고 버텨 최윤의 집으로 몸부터 밀고 들어온 사람치고는, 전보다 의사 표현이 분명해진 사람치고는 별스러운 부분이었다.
짐을 옮기면 어떻게 정리할지 상의하며 간식거리 깨작대던 테이블 위로 문득 이제 우리 사이에 대표님은 너무 딱딱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떨어졌다.
옆으로 샌 화제지만 연인 사이에서 당장 고민하기에는 짐 정리보다 달콤해서 여러 가지를 꼽았었다. 최윤은 종종 능청맞게 구는 성정답게 이름도 불러보고 자기라고도 했는데, 의외로 윤설이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어물거린 게 꽤 오래갔다.
이름이 외자라 윤이라 하면 너무 간지럽고. 최윤처럼 자기야, 해보니 참을 수 없이 간질거리는 느낌이고.
좋다는 말인 듯한데 이유가 많았다. 그래서 아직도 서로를 들쭉날쭉 때마다 다르게 부르고 있다.
“…잘 다녀와요, 여보. 그거 괜찮았어요.”
“아직 이르다면서요.”
“음. 그거는.”
둘뿐인 집인데 코앞에서 나지막이 주고받다 보니 누가 들을까 걱정하는 은밀한 대화인 양 작은 소리가 되어있다. 그 핑계로 아랫입술을 물어 대답을 피했다.
윤설은 그를 놓치지 않고 따라와 응했다. 입술로 입술을 물고 간질이다 서슴없이 입 안까지.
얕은 신음과 함께 열중하다 보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리에 손을 감고 있다. 윤설의 손은 자연스레 최윤의 엉덩이를 쥐고 있었고, 최윤의 손은 윤설의 가슴 위에 있었다. 각자 좋아하는 곳을 잘도 챙긴 모양새였다.
“그거야 밖에서 갑자기 그럴 줄 몰랐을 때 한 소리죠.”
“좀 앞서갔죠.”
“그래도 그건 덜 부끄러운 것 같던데요.”
“네. 왠지는 몰라도, 읏.”
잠옷에는 파고들 틈이 많아 곧장 손을 넣어 같은 자리를 어루만졌다. 컨디션이 안정되고 좋으나 싫으나 운동도 꼬박꼬박 하니 약간 더 탄력이 붙은 느낌이다.
어떻게든 손안 가득 움키고 엄지손가락으로 유륜 주변에 원을 그리자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한참 전에는 아무 느낌도 없다고 했었는데 요즘은 그래도 꽤.
반응이 만족스러워 유두 가운데를 손톱으로 슬쩍 누르자 아픔 때문인지 성감 때문인지 모를 신음이 돌아온다. 흥분하면 색색 숨을 쉬는 줄 알고 있어 씩 웃어주니, 윤설의 눈에 무엇인가 스치고 지나갔다. 오기? 흥분? 그게 무엇이었든 자극이 됐는지 최윤을 꽉 안은 채 움직여 장애물들을 피해 카펫이 깔린 곳에 이르렀다.
이름, 애칭, 자기에서 한참 더 나간 ‘여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온 사건을 떠올린다.
여느 때보다 조금 규모가 있는 공식 행사 뒤풀이에 어김없이 동반 참석 했던 날이었다. 한바탕 사건 사고가 지나고 수습에 바쁜 시기라 고초를 겪은 윤설보다도 최윤이 더 정신 사납다 툴툴대던 날이기도 했다.
영 따분해 보이는데 참을성 있게 표정 관리는 하고 있는 최윤을 대신해 윤설이 그럭저럭 대화를 괜찮게 끌어줘서 분위기가 한결 나은 편이었다.
‘마실 것 갖다줄게요. 말도 많이 했는데 술만 마시면 목 탑니다.’
‘여기 있을게요.’
적당히 한 시간쯤 더 있다가 사라지면 누가 잡지도 않겠지.
그런 계산이나 굴리며 연신 샴페인과 와인을 나르기 바쁜 서버들 사이, 비교적 한가해 보이는 일반 음료 쪽으로 다가갔다. 냉수 한 잔 그 자리에서 마셔버리고 윤설의 몫으로 물과 가벼운 냉차를 집어 드는데 누군가 불쑥 최윤을 불렀다.
얼굴 이름은 알아두고 지내는 협력 업체 대표와 그 가족들이었다. 부인은 따로 환담을 나누기 바빠 버려졌다며 고만고만한 자식들, 조카들이나 단속하고 있다는데 어찌 보면 속이 빤했다. 누구의 자식과 누구네 일가족끼리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나와서 나중에 자리 만들어볼 만한 상대인지 바삐 곁눈질하는 거대한 결혼 시장 분위기가 만연했으니 이 사람만 별난 건 아니다.
어쨌든 최윤은 무관한 입장이라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개중에 순수하게 사업에 관심 있는 듯한 동년배 일행과는 생산적인 질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바쁘지 않으시면 저희랑 같이…….’
‘여기 있었네요. 여보.’
‘…….’
예기치 않게 다가와 그들 사이로 또렷한 문장을 던지는 윤설의 목소리에 대화가 끊겼다.
순식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굴러가는 눈만 여럿 보았다. 둘이 그렇게까지 진지한 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중에 없었을 테니 마땅한 반응이 뭔지 쉽게 판단할 수 없었으리라.
일단 최윤은 눈에 힘이 들어간 윤설에게 맞추어 웃었다.
‘금방 간다는 게 잠깐 인사 나누느라 늦었습니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방금은 너무 습관이 돼서 그런 거니까… 실례했습니다.’
‘아, 어, 아닙니다.’
그제야 어색한 웃음이 사람들 사이를 한 바퀴 돌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소문은 날 듯했다.
소문이야 상관없지만 당장 표정 관리가 힘겨웠던 최윤이 빠르게 작별 인사를 하고 연회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윤설은 무어라 말도 없이 잠자코 그를 따라 나올 뿐이었다.
‘화났어요?’
‘아니요.’
아무도 지나지 않는 복도 모퉁이를 돌자마자 최윤이 돌연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윤설이 들어본 것 중 가장 채신머리없이, 크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뒤늦게 상의 없이 내질러서 화났을까, 눈치를 살피다가도 괜찮은가 할 만큼 한참을 웃었다.
‘그게 그렇게 웃겼나요?’
‘흐, 큽, 아니요.’
‘저랑 결혼은 안 하실 생각이었습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최윤이 하도 웃는 바람에 윤설은 곁에서 걱정하다 못해 슬그머니 불안해졌다. 좀 전처럼 눈썹을 찌푸리고 따지기 시작했다.
너무 말도 안 되고 황당한 소리라 웃는 건가. 관계에 대한 정의도, 미래에 대한 가정도 다 끝나 서로 말이 엇나간 부분이라고는 없는 줄 알았는데.
최윤은 정색하는 물음에 다시 일어나 목을 가다듬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난 그냥, 윤설 씨가 남들 앞에서 그렇게 적극적이고, 음.’
‘…뻔뻔할 줄 모르셨다고요.’
‘…아무래도 그렇죠.’
결국은 뜻밖의 행동이 신선하고 귀여웠다, 요는 그런 내용이었다.
오해할 뻔한 순간을 지나 일상을 보내면서도 가끔씩 나오는 호칭은 그 어떤 것보다 가깝고 사적인 어감이었는데, 마치 그날로 허가가 떨어진 듯 윤설에게 자연스러워졌다. 윤설이 간지럽다 몸서리치는 자기야, 따위가 최윤에게 적당하고 달콤한 것처럼.
“제 말 들으셨어요?”
“…놓쳤습니다. 뭐라고 했어요?”
“오늘은 회사 말고 다른 일 없냐고요.”
“없기는 한데.”
정신 차리고 보니 카펫 위에 눕혀져 있었다. 윤설이 그의 이마 가장자리에 난 상처를 살피다 잘게 입 맞춰주었다.
기껏 매준 타이는 풀렸고, 무언가 급해졌는지 하의도 물 흐르듯 자연스레 끌어 내리고 있는 손에 망설임이 없다.
당연한 게 많아진 사이지.
적극성이 더해진 윤설도 보기 좋았다.
“이게 뭐예요?”
“어떤 거?”
“이런 걸 왜, 찼는지…….”
열 오른 손바닥이 따뜻해서 좋던 참에 올려다본 윤설의 표정이 심상찮아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훤히 드러난 허벅지를 쥔 윤설의 눈이 한곳에 머물러있다.
난 또 뭐라고.
김이 샌 최윤이 다시 뒤로 드러눕는다. 피차 취향 아는 사이에 엉뚱한 생각이라도 하나 싶어 차분히 덧붙였다.
내가 움직임이 많은 편이라 셔츠가 자꾸 흐트러지더라고요.
가터벨트도 아니고 셔츠 고정해 놓은 걸 보면 금방 알아차릴 법한데 막상 보니 당황스러운가 보다.
“이상한 생각 하고 있죠.”
“아니요? 제가 왜. 아니요.”
“얼굴 터질 것 같아요.”
“…….”
“자기 취향?”
시각적으로야 자극적일 수 있겠다. 최윤은 간만에 새빨개진 볼을 보고 한술 더 떠 다리를 감싸고 있는 끈에 손가락을 걸었다. 움직일 정도의 신축성이 있어 잡아당기면 얼마쯤 늘어났다.
“아닙니다. 저도 뭔지 알아요, 이거.”
“화보 같은 거 찍을 때 해봤어요?”
“아이돌 하는 친구가 보여줬…….”
“뭘 보여줘요?”
“아!”
적당히 놀릴 생각이었는데 뜻밖의 소리에 급히 몸을 일으켰다 멍하니 있던 윤설과 이마를 부딪혔다. 둘 다 피하니 마니 할 겨를 없이 벌어진 일이라 보통 아픈 게 아니었다.
뼈대 튼튼한 건 알아줘야겠다고 웃어넘기려다가도 아파서 인상을 쓰게 된다. 이제 윤설은 볼에 이어 이마도 벌겠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떤 발칙하게 까진 놈이 뭘 보여줘?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윤설이 뒤늦게 두서없는 대답을 늘어놓았다.
“당연히 이렇게 보여준 건 아니에요. 춤출 때 한다고 검색해서 보여준 건데…….”
“난 또.”
다시 뒤로 벌렁 드러누우려는 최윤의 등을 윤설이 받쳐 안았다. 그대로 무게를 싣고 늘어져도 내려줄 기미가 안 보이고 가까이에서 홍시 같은 빨강에 색색대는 숨소리만 자랑한다.
“나 늦어요.”
“조금만요.”
“아아, 안 되는데.”
“조심해서 할게요. 조금만, 네?”
“봐주지 그래요, 형.”
맹세코 도발하려고 한 소리가 아니었다. 이제 웬만큼 알지만서도, 윤설 취향은 좀 별난 듯하다. 뭐에 흥분하는지 가끔 엄살 부리려고 형이라고 할 때마다 침을 꼴깍 삼키는 게 귀엽기도 한 데다 정말 시간이 꽤 흘러서 옆구리 찌른다고 한 짓이 잘못이었다.
하의는 진작 저 아래 허물처럼 내팽개쳐진 꼴이고 셔츠 끝단을 고정해 둔 보람도 없이 배 위로 걷어 올렸다. 단추를 풀면서 헛손질을 하길래 하나쯤 버려도 된다고 했더니 사방으로 단추가 튄다.
씩씩대고 달려드는… 송아지, 양, 그런 동물처럼 앞만 보고 있는 듯했다.
이런 게 귀여운 거지 연상을 지칭하는 단어에 특별히 귀염성을 느낀 적은 없다. 최윤의 성장 환경에는 언제나 형들이 지나치게 많아 징글징글하다는 느낌마저 있었다. 하필 그걸 또 좋아하니 어쩐다 싶으면서도 몸을 착실하게 움직여 윤설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밖에다 쌀게요.”
“그래요.”
들썩이는 윤설의 가슴팍 위로 잠옷을 걷고 배를 맞대며 목을 둘러 안았다. 좀 늦어도 출근해서 검토할 양을 다 채우면 된다는 쪽으로 타협을 마친 상태였다.
등을 받치지 않아도 되자 손이 자유로워진 윤설이 바빠졌다. 제 목에 걸린 옷을 아예 벗어 던지고 허리 움직임이 허락하는 최대한 너른 면적을 뭉근하게 비비는 최윤을 다시 붙잡는다. 허리가 뜨게 들어 올렸다가 꺼낸 자지 위로 앉혀주는 손이며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근육이 선다.
최윤은 그저 허리나 엉덩이에 손자국 날 수도 있겠다는 짐작으로 웃고 있었다. 자신이야 어떻든 상관없는데 같이 씻고 자고 하는 윤설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할 터다.
“으음, 읏.”
“급해요?”
“괜, 찮아요.”
“자기가 그러니까 나도 흥분돼요.”
그래도 급하다고 나무라거나 천천히 하라며 붙잡을 엄두가 안 나게 달구어진 몸이다. 엉덩이 아래 비벼지는 자지는 크기도 크기지만 제대로 된 애무 한 번 없이도 미끈거렸다.
그냥 받아도 괜찮을까. 마지막 섹스가 사흘 전이었나. 더 전이었는데.
앉은 윤설의 허리를 감은 다리 탓에 무게는 순전히 허리나 엉덩이로 받는다고 봐야 했다. 약간 무리 같다 생각하면서도 잠깐 무릎으로 버틴 채 몸을 세우려 했다.
“그냥 있어요. 제가 할게요.”
“풀기에는 이 자세가 낫지 않겠어요?”
“그래도요.”
끙끙대며 허리를 안고 배에 머리를 비벼대는 윤설을 보니 자꾸 오냐오냐 다 들어주게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최윤의 애정에 확신이 생긴 덕에 부쩍 자주 써먹는 듯해도 모르는 척 넘어간 순간 그른 일이다.
스스로 풀려던 손을 거두고 어깨를 짚자, 미끈한 좆이 회음을 툭 건드리고는 엉덩이 골 사이로 주욱 파고들었다.
“아, 이거…….”
“걱정, 마세요. 바로 안 넣을, 흣.”
벌린 둔부 사이로 길을 내듯 느리게 왕복한다. 뜨끈한 살덩이가 좁은 틈을 굳이 비집고 들어와 질척한 액체를 펴 바르듯 같은 자리를 계속 문지르고, 구멍에 가까워져서는 귀두 끝으로 둔하게 누르며 지나갔다.
안쪽으로 손가락을 넣어 넓히는 것도 아닌데 흥분 섞인 기대감으로 움찔대는 입구 가장자리가 녹고 있는 듯 착각이 인다. 계속되는 마찰에 그곳으로만 피가 돌고 감각이 쏠린 것처럼 열감이 집중되고 있었다. 안으로 길 내는 행위를 대신하듯, 그러다 자연스레 미끄러져 쑥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거란 묘한 확신에 최윤이 손을 뒤로 뻗었다.
“아, 흑, 흐으.”
“가만히 있, 어요.”
입구에 끄트머리를 뭉개던 자지를 잡고 빠듯하게 밀어 넣자, 윤설이 숨을 들이켠 채 굳었다. 반대로 최윤은 느리게 숨을 내쉬어 가며 두툼하게 걸리는 부분이 모두 지날 때까지 살살 허리를 뒤로 빼고 삽입을 유도했다.
후욱, 다시 숨을 고르고 주저앉듯 힘을 풀자 나머지 기둥이 빨려 들어가듯 따라 들어와 배 속을 채웠다. 한계까지 참은 만큼 삽입하고 나면 몰아칠 거란 예상과 달리 굼실대며 허리를 잘게 움직이는 윤설에게 나머지를 맡기며 품에 기댄다.
윤설의 배에 발기한 것이 붙어 움직일 때마다 비벼지고, 체중까지 더해 깊게 파고든 안에서 자잘한 쾌감이 끊기지 않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앞뒤로 연달아 쉴 틈 없이 넘실대는 자극이 알맞은 정도로 이어졌다. 너무 강해서 당장 끝까지 몰아쳐야 할 아찔함도 아니고, 감질나게 얕은 불쾌함도 아니다. 딱 좋았다.
어느새 한 손을 맞잡고 깍지를 낀 채로 서로 입술을 쫓고, 아래에서 쳐올리면 위에서 뭉근하게 돌리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아랫배며 구멍 주위가 흥건해 둘 다 사정한 줄도 모르고 계속 붙어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윤설 씨, 나 곧.”
“잠깐만요, 잠깐만.”
잘 버티지 않으면 같이 쓰러질까 싶게 꽉 안고 몸을 붙였다. 내내 품고 있던 자지가 단번에 빠져나가는 느낌에 최윤이 신음하며 윤설의 배에 하반신을 치대는데, 좀처럼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너무 가까워 맞닿은 배 사이에 낀 채로 억지로 비비는 모양이나 마찬가지였다.
들썩이는 최윤의 허리를 끌어 내린 윤설도 운신이 아주 자유롭지는 못했으나 엉덩이 위로 사정 직전의 좆을 마구 문질러댔다.
“아아, 흑, 흐…….”
“하, 으… 읏, 응.”
열기를 남김없이 분출해 내고도 숨 막히게 안은 채로 떨리는 몸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카펫이고 가슴팍이고 배고 엉망진창으로 젖었다.
최윤은 멍하니 이마와 눈가에 입맞춤을 퍼붓는 윤설을 보며 확실히 물이 많은 편이라고 생각했으나 말하지는 않았다. 본인은 좀 쑥스러워하는 것 같다.
하지만 너무 격렬한 행위가 아니라 여유 있는 참에 한 가지는 말해봐야겠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네.”
“그것도 취향이겠죠.”
금방 또 목 어디쯤에 코를 박고 좋아라 하는 행동이, 가만 보니 습관이다. 평소에 입으로 하는 애무를 좋아하는 성향이야 그렇다 쳐도 어딘지 모르게 그게 다가 아닌 듯 늘어진 몸 곳곳에 고개를 묻었다 하면 쉽사리 떨어지지 않고 대단히 만족하는 눈치였다. 신체 부위에 대한 페티시라고 하기에는 일관성이 없고 최윤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방향이 잘못됐다.
순수하게 의문이 담긴 최윤의 눈을 마주친 윤설이 바로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얼굴을 붉힌다. 본인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게…….”
“네. 괜찮아요.”
“좋은 냄새가 나요. 그래서.”
“잘 모르겠지만 그냥 좋아서 계속 정수리만 보여줬다는 거라면, 뭐.”
다음에 나올 말은 뻔하다.
싫으세요?
최윤은 그저 은근히 별난 취미가 꽤 있어서 재미있다는 말로 답했다.
나른해진 몸을 추스르며 입맞춤에 응하고 예쁜 콧대를 살짝 물었다 놓으며 갑작스러운 정사가 끝났다. 벗어놓은 옷이라도 들어 뒤를 닦아주려는 윤설의 손길 따라 누운 최윤이 게으르게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가기 싫다고.
“내 카드 좀 쓰고 다녀요. 일할 생각 들게.”
“하루 덜 쓰고 집에 계시는 편이 좋으면요.”
“그래서야 되나요.”
윤설도 능청 떠는 수가 제법 늘었다. 하는 수 없이 드러난 이마의 상처를 가리키자 금방 입매가 처진다. 연애 한번 요란하게 하면서 자기 일에 스스로 흠집 낸 아들에게 기어이 뭘 집어 던지고 만 운조 회장의 솜씨였다. 기다려보자고 했지만 윤설이 보기에는 흉이 남을 것도 같아 조마조마한 크기였다.
요즘은 기술도 좋고 몸에 더불어 얼굴에 흉 좀 남는다 해도 제 눈에 잘생기기만 하겠지만 볼 때마다 아깝고 안타깝다. 내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감히 마음대로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적 없는 사람인데, 낳고 기른 부모라면 납득해야 하는 걸까. 윤설의 모난 상식으로는 불만스럽기만 했다.
“또 흰 눈 하네요.”
“제가요?”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은근히 다르거든요.”
“저도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아직 짐승다운 습성이 남아있는 알파이기도 하다.
윤설은 적당히 티 내는 걸로 만족하고 젖은 몸을 마저 닦아주었다. 제대로 몸을 풀고 씻으면 더 좋겠지만 한참 늦었다기에 새 옷을 골라 입히고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셔츠 가터에 아랫단을 팽팽하게 당겨 고정하는 일까지 손수 도왔다.
자신이 최윤을 돌보는 순간이 얼마나 뿌듯한지 그가 알까 모르겠다. 보통 손 가는 쪽은 윤설이었지만 이제는 반대의 상황도 쉽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또.”
“네?”
“얼굴 빨개지는데요. 혹시 러트 문제입니까?”
“아니요. 아니에요.”
이마를 툭 건드리며 짚는 손바닥이 아직 따끈하다. 윤설은 오늘 아침 처음으로 했던 일 그대로 넥타이 매듭을 묶으며 최윤의 손바닥에 이마를 살살 문질렀다.
“됐어요. 이제 다녀오세요.”
“고마워요. 참, 그리고.”
“네.”
“그러고 보니 당신 페로몬은 무슨 향인가요?”
물어도 된다면.
2차 성별자들 사이에서는 큰 실례라고 들었는데 둘은 말마따나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이고 윤설이 체향에 민감한 행동을 보이자 문득 떠올랐다.
윤설은 어쩐지 당황하기보다는 굉장히 반가운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이 활짝 피었다. 곧바로 설명할 길이 없다며 실망하기는 했으나 최윤이 궁금해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쁜 모양이었다.
우성이든 열성이든 간에 페로몬을 인식할 길이 없는 최윤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비슷한 향수가 있으면 선물해 줘요.”
“그래도 돼요?”
“시간 들여서 커스텀 주문을 넣거나… 고민해 봐요.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정사의 열기가 희미하게 남아 나른한 얼굴에 차례로 조금 민망한 듯 미소 짓다 볼에 입 맞추고, 마지막으로 손을 잡고 있다 스르르 놓으며 긴 배웅이 끝났다.
윤설은 혼자 돌아와 남은 흔적을 치우려다 그대로 카펫 위에 쓰러져 소리 없이 두어 번 굴렀다. 문득 이렇게 벅차고 들어줄 이 없는 환호성을 지르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침의 일 전부 좋은 것들뿐이었던 데다 뜻밖에도 모를 수밖에 없는 점까지 알고 싶다는 말을 듣지 않았나. 행복을 느끼는 데 익숙해진 가슴으로도 낯선 설렘이라 느낄 만큼 기쁘다. 그렇게 버리려고 노력한 성질인데 막상 배우자로 생각한 사람이 제 페로몬에 관심을 가져주니 의미를 알고 한 것도 아닌데 좋아서.
운동은 아직도 싫지만 이유가 생긴 이상 해야 하고, 마치고 할 일이 생겼으니 좋아하는 옷을 입고 외출하는 기분으로 다녀와야겠다. 이런 걸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던가 하나하나 떠올려보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 * *
한낮의 백화점에 남자 둘이 서성이며 눈길 가는 대로 매대를 거들떠보고 있었다. 특별히 목적이 없어 보이는 한가함도 눈에 띄는 데다 일행임에도 판이하게 다른 외양의 조합이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전자 기기 코너를 심드렁하게 지나다 진열 중인 패드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보고 멈춰 무어라 이야기가 길었다.
“또 새로 나왔나 본데.”
“그러네요. 집에 있는 거랑 같은 건가.”
“제수씨 보기보다 얼리어답터인가 봐?”
“아뇨. 패드 말고.”
집중해서 영상을 바라보던 윤설이 문득 옆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했다. 뒤늦게 게임 이야기인 줄 알아챈 채 사장이 느물대며 시치미를 뗀다.
말을 말아야지.
긴가민가하다가 마지막으로 뜬 타이틀을 찍어놓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채 사장은 한참 어린 윤설을 두고 제수씨, 제수씨, 잘도 불러댔다.
“같이 가, 제수씨.”
“그 호칭 좀 어떻게 해주세요.”
“그럼 내가 뭐라고 해. 윤 서방? 자기 은근 그런 데서 꽉 막혔단 말이야.”
“…자기도 빼고요.”
“하, 참 어렵네. 아직도 나한테 화났어요?”
알잖아. 나는 막내가, 윤이가 부탁해서 무슨 일 있나 없나 따라다닌 죄밖에 없다니까. 오해받아서 섭섭한 건 오히려 나인데.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채 사장에 대한 인상은 별반 나아진 구석이 없다. 여전히 그 집안사람들에 비해 경박하고, 그러면서도 속내는 따로 있는 음험함이 있고, 뭣보다 지나치게 친하게 구는 태도가 대하기 사나웠다. 어쩌다 마주쳐서 아직까지 졸졸 따라다니는데 최윤의 가족이라 아주 내치지도 못하고 백화점 두 층을 함께 돌았다.
“그래서어, 제수씨한테 잘 보일 겸 오늘 쇼핑 내가 결제한다니까. 뭘 사려고 그렇게 한참 들었다 놨다만 해? 골라줄까?”
“혼자 할 수 있습니다.”
“가족끼리 정 없기는.”
또 굳이 이유를 보태자면, 윤설을 스스럼없이 가족으로 칭하는 바람에 마음이 누그러진 탓이다.
운조 회장 부부는 아직도 윤설에 대해 따로 말이 없다. 같이 산다는 사실은 일찍이 귀에 들어갔을 텐데 하다못해 반대하는 연락도 만나자는 전갈도 없었다.
멀다면 먼 일일 수도 있지만 최윤과 결혼해 서류에 이름까지 써야 비로소 마음이 놓일 것 같은데, 이대로 괜찮을까 싶기도 하다. 최윤이라면 양친의 반대 때문에 윤설에게 덮어놓고 참아달라 할 사람이 아닌 줄 알지만 일가 사람들이 다 저를 애매한 거리에서 상황에 맞게 대해야 하는 분위기가 싫은데.
“나 뭐 묻었나?”
“아닙니다. 잠깐 쉬었다 갈까요.”
“좋지.”
그런저런 사정을 생각해 보니 채 사장이라도 친한 체하는 편이 낫나 싶었다. 최윤과도 사이가 괜찮은 것 같고. 그냥 꺼려지는 이유는 너무나도 다른 종류의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구라도 실컷 살 줄 알았는데 겨우 이불 두 채야. 원래 뭐 잘 안 사지?”
“그도 그렇고 집에 다 있어서요.”
“그거야 다 막내 취향이지.”
“그러니까요.”
“…….”
채 사장은 윤설을 이해할 수 없는 별종 보듯 황망한 표정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아무리 별나봐야 저보다 더하겠나 싶다.
일전에 최윤도 마음에 드는 방 몇 개는 윤설 편의대로 꾸며도 좋겠다 말한 적은 있다. 윤설은 생각해 본다는 말만 하고 흘려버렸다.
온통 최윤의 취향에 최윤이 쓰던 것들만 있는 집인데 굳이 왜 바꿔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마음대로 하라는 허락이 기쁜 거지, 실제로 뭘 바꿀 생각은 아직 요만큼도 들지 않는다. 윤설 자신까지 포함해 완벽하게 최윤의 취향을 대변하는 공간이라니 그저 좋기만 했다.
“제수씨도 참……. 우리 막내 어디가 그렇게 좋아?”
“다정하셔요.”
“으응. 걔가 합리적인 편이긴 해.”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 자들 특유의 몽글몽글함에 더해 열정적으로 종교에 취한 듯한 신도의 눈빛이 드러난다. 채 사장은 그런 윤설의 얼굴을 보고 미지근하게 동의했다.
집에서 봐도 잘 키웠고, 잘났고, 흠 없는 남자 맞다. 최윤의 다정함에 대해서도 그럭저럭 온건하고 합당한 방향으로 성장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윤설은 거기에 콩깍지까지 두꺼워 보이니 동생 칭찬이래도 더 듣기는 싫었다.
“비뚤어지기 좋은 환경일 수도 있었는데 꽤 상식적인 기준에서 사람 거두는 놈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해, 우리도.”
“많이 사랑받고 자랐다고 하시던걸요.”
“그러니까. 부자에 폭력도 익숙하고 험한 꼴 많이 본 놈들이 귀하게 크면 쫌, 상종 못 할 변태 새끼 되기도 하거든.”
“…그런가요.”
“옛날에 아버지 밑에서 일한 사람들은 뭐, 멀쩡한 가정이니 사랑이니 잘 안 된 인간들 천지라.”
자기들도 몰라.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니고. 변명이 될 수는 없으니까 약간 고장 난 사람이 되고 제 딴에 사랑이다 싶은 짓을 하고는 사는데 밖에서 보면 그게 아닌 경우도 많고. 안정적으로 오래 그런 거 자꾸 실패하고. 여자고 남자고 지 새끼고 같이 불행해져도 새사람 되는 인간 몇이나 되겠어.
채 사장은 끌끌 혀를 차면서도 산뜻하게 말했다. 불행이지만 동정할 뿐 이해해야 할 인간 군상들은 아니라고. 최윤이 그런 괴팍하고 폭압적인 애정으로 삶의 빈자리를 채우는 성인이 되지 않아 다행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합리적인 온정이 얼마나 어려우냐 혼잣말처럼 정리했다.
“제수씨는 어때?”
“…저는 최 대표님처럼 건강하지 못합니다.”
“그치? 성질이 보통은 아니야.”
“네. 그나마 잘 참고 끈질기기는 하죠.”
그렇게 보면 윤설은 어딘가 고장 난 채로 성장한 쪽에 가깝다. 의심 많은 최윤, 사람의 무게를 화폐로 다는 데 익숙한 그의 누나, 한데 발붙인 적 없는 듯한 눈앞의 최훈보다 어쩌면 더 깊이 곪은 데가 있을 터였다. 그런 자신에게조차 관대한 최윤을 위해서라면 원하는 대로 할 자신은 있다.
“잘해봐. 난 좋다고 생각해.”
“감사합니다.”
“근데 제수씨.”
“네?”
“나 조카도 생길 수 있나?”
“저는 오메가가 아니라서 안 생겨요.”
“그럼 말고.”
채 사장은 언제 진지했었냐는 듯 실없는 질문을 툭툭 던졌다. 윤설이 오메가였어도 일반인과 결실을 보기는 힘들었을 테니 둘 사이에 2세는 아예 가망이 없는 이야기다.
“대표님이 원하시면 입양이라도 생각해 보겠지만요.”
“애 별로 안 좋아해. 아마.”
그리고 최윤이 원하지 않으면 본인도 고려조차 안 할 일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어릴 적 예뻤다던 최윤을 닮은 아이가 살아 움직인다면 외면하지 못하고 사랑스럽게 여기겠으나 그 시간과 정성마저 아깝다. 다소 음습한 집착일지라도 가눌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만약 생길 수 있다고 하면 저어기 저런 거 권해보려고 했지. 화끈한 이벤트 한 번씩 해서 장작 넣어야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채 사장의 턱짓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커피 테이블이 늘어선 휴식 공간과 좀 떨어진 구역의 란제리 코너가 보였다.
하여간 방심할라치면 헛소리로 튄다. 인간이 저질이다.
“왜? 막내 취향이 섹스의 정석, 이런 거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옛날에 나쁜 걸 알려준 사람은 뭐든 채 사장님이 처음이라고 한 것 같네요.”
“…학교에서 안 가르쳐주는 세계에 대해서 살짝 보여주기만 했지. 내가 설마 추잡스럽고 범죄 수준인 뭘 보여줬겠어? 걔가 또 얼마나 깔끔떠는데?”
“네에.”
“저 정도는 신혼부부들도 한다니까. 농담하기 무섭네.”
“채 사장님이 아시는 대표님 취향은 어떻습니까.”
“뭐어…….”
* * *
“왔어요?”
“제가 늦었나 봐요.”
“일찍 퇴근했어요.”
최윤의 퇴근 시간 전에 집에 와 있는다고 서둘렀는데 어쩐 일로 그가 먼저 거실에 앉아있었다. 카펫 위에 앉아 게임기를 쥐고 있는 모양을 보면 온 지 꽤 된 것 같다.
윤설은 거실로 가는 길에 겉옷을 벗어두고 최윤의 곁에 다다르자마자 무릎 위로 머리를 얹었다. TV 화면에 연동된 게임 화면이 멈추어진 걸 보고 나서 편하게 위를 보게끔 눕자 최윤이 이마를 쓸어준다.
게임기를 쥐여주길래 익숙하게 받아 들고 큰 고민 없이 마음에 드는 상자를 골랐다. 최윤이 게임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구경만 하면 가끔 갈림길이나 수상한 상자들 중 선택하는 일을 맡겨주곤 한다.
화면 속에서 빛무리가 터지며 상자가 열렸는데 좋은 아이템이 나온 듯했다. 사실 쓸모없는 게 나오면 최윤이 앓는 소리와 함께 게임을 접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좋았다.
“약은 먹었어요?”
“그럼요.”
“형이랑 만났다면서요. 맛있는 거 사달라 하지.”
“맛있는 것보다 더 좋은 거 받았어요.”
“어떤 거? 배송되는 겁니까?”
빈손에 가까운 윤설의 소지품을 흘끗 본 최윤이 모처럼 호기심 가득한 얼굴을 한다. 손위 형제가 윤설에게 저를 대하듯 살갑게 구는 것에 반해 윤설은 새치름하니 데면데면하게 굴어 둘 사이에 심심찮게 입씨름이 벌어지는 상황을 재미있어하던 참이다. 윤설 성격에 대단한 걸 뜯어냈겠나 하면서도 엄살 부리며 카드를 내놓았을 형이 웃기는 그림이라 궁금했다.
“차요.”
“웬 차. 너무 약한데요.”
“곧 면허 나오니까요.”
“아, 그 차.”
그래도 그렇지 의외였다. 그래봐야 몇백짜리 아닐까 짐작했던 바와 딴판이라 픽픽 웃음이 나왔다. 분명 호기롭게 다 사준다고 큰소리쳤을 형이 조금쯤 딱하게 느껴진다. 못해도 몇천, 쩨쩨하게 굴기 싫다고 할 양이면 억 단위로 값을 치렀어야 할 텐데.
“어떤 걸로 골랐어요? 예쁜 게 있던가요.”
“승차감 좋고 넓은 걸로 추천받아서 색만 봤어요.”
“기대되네요. 조수석에 태워줄 거죠?”
“네. 같이 드라이브도 가요.”
자동차 극장이니 드라이브니 차에 관련된 로망도 있는지 말이 많아지는 윤설을 보다 최윤도 소파에 등을 기댔다. 보험도 넉넉하게 들었으니 걱정 말라고 기어코 한번 놀리고 나서 부지런함을 실컷 칭찬했다.
세상일이 뜻하던 대로 되지 않아 윤설은 아직도 몸이 조금 불편하고, 결국은 최윤과 함께 위험을 나눠 지지만 한편으로는 생각보다 더 빨리 새로운 일에 적응하고 있었다. 웬 놈팡이 같은 치들은 떨어져 나가며 정리돼 가는 친구들이나 다소 뻔한 위장을 하고 스스럼없이 아침에 먹을 빵을 사러 가는 것 따위의 일상, 미처 엄두를 내지 못한 사소한 요령을 습득하는 과정.
걱정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씻고 와야죠.”
“네.”
“말만.”
“조금만 더요.”
“다녀와서 등허리 좀 만져주면 좋겠어요.”
“…아침 일 때문에요?”
“조금요. 나머지는 엄살이고.”
큰일들이 일단락되고 피로에 시달리는 사람은 윤설보다 자신이었다. 그것도 뒤늦게 윤설에게 기대면서 알았다. 돌아오면 맞아주면서 힘든 일이 있지 않았는지 물어 오는 통에 되짚어 보니 정말 그런 듯해서.
제 눈에 안경이라고 너무 걱정이 심한가 하다가도 못 이기는 척 어깨에 머리를 대고 어여삐 여기는 소리를 듣다 보면 참을 만했던 불편함이나 근육통 등이 몰려왔다. 점점 버릇이 나빠져 탈이다.
누구와 같이하는 삶을 꿈꾸는 이들은 다 이런 날들을 그렸던 걸까.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최윤 자신 대신 윤설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놓으면 어찌저찌 탈 없이 지내겠거니, 방만한 생각으로 미적대는 윤설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름다운 연인은 싫은 소리는커녕 볼에 입술을 꾹 누르고 바삐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