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채주호는 잠시 이 상황이 우스워 그대로 서있었다. 뭔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한 모양인데 어느 손을 먼저 갈무리해야 할지 모를 만큼 무안했다. 눈은 꽤 자주 마주쳤으나 매번 여러 사람들 틈에 끼어있어 혼자일 때 마주친 지금이야말로 좋은 타이밍이었는데.
하지만 아무리 무안하고 황당해도 맡은 바가 있어 윤설이 헤매게 둘 수는 없었다. 가려거든 온 방향으로 가지 하필 더 깊이 들어가 버려 어느 방 누구와 섞였는지 찾을 길이 깜깜하다. 여기서부터는 채주호의 손 밖인 중개상이나 끄나풀들도 껴있을 터라 괜히 찜찜했다.
어느덧 땀이 나나 싶게 바삐 돌아다닌 것이 삼십 분쯤 됐다. 방마다 고개 디밀고 슬슬 아무 일 없는 척하며 곁눈질하고 다녔더니 눈알이 다 뻑뻑한 느낌이다.
채주호는 품을 뒤져 손수건을 찾다 포기하고 전화를 걸었다.
“나다. 최훈.”
─어.
“제수씨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다니?”
다 늦은 시각에 난데없는 소리냐 할 법도 한데 받은 사람이 침착해서 더 심란스러웠다.
“얌전하기는 개뿔, 망아지가 따로 없고만.”
─무슨 일인데 그래.
“없어졌어.”
─…….
“미안하다. 없어, 이 건물 안에.”
─형, 그러니까 내가.
“미안해. 애들 좀 보내줘라. 여기 카메라 없어.”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지는 걸 보면 동요한 상태인데 잠깐 텀을 두고 알았다는 답뿐이다.
채주호, 최훈은 엉뚱하게도 뒷주머니에서 나온 손수건으로 땀 닦는 시늉을 하며 일을 벌일 만한 조직을 손에 꼽았다. 청람을 포함해 부쩍 약을 많이 대고 있는 놈들이나 그 사주를 받아서 몇 다리 건너 낀 업자들… 헤아리자니 또 답답스러웠다.
최윤의 말에 따르면 윤설은 ‘다소 고집스러운 면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차분하고 순한 성격이었다. 모나게 굴거나 관심을 끌고 싶어 안달 내지도 않고 오히려 잔걱정이 많다. 이유를 납득하면 상대의 말을 잘 따르는 편이다. 최훈은 이를 감시 보호하기 쉬운 대상이라는 말로 알아들었다.
여태 귀여운 막냇동생 부탁도 들어줄 겸, 돈 냄새 나는 건수도 잡고 이리저리 휘젓고 다닐 핑계도 생긴 겸 윤설과 주변인이 참석하는 자리에 빠짐없이 나타났다. 마당발 친구를 몇 사귀더니 소문에 밝아진 듯 최훈을 알아보면서도 처음부터 시선이 곱지 않았다. 표정 관리가 익숙할 연예인치고도 떨떠름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것이 억울할 판이었다.
그래, 어디 회장 어르신 부부가 질색하고 여자 형제들은 은근히 마음에 들어 하는 듯한 막내 애인 행실이 어떤가 보자. 탐탁잖으면 특기를 살려 바람 실컷 넣어줄 작정이었다.
예쁘고 훤칠한 거야 당연하고 사람들이 꼬이는 것도 남자라면 어깨에 힘 좀 주고 감당할 만하다. 그런데 어쩐지 안심할라치면 샛길에 빠져있고 누가 슬슬 꾀면 조심성을 놓아버리는 바람에 자칫 위험할 뻔한 일이 꼭 생겨있다.
처음 생각과 달리 널널하게 꿩 먹고 알 먹기는커녕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공부 머리 따로, 일 머리 따로, 사람 보는 눈 다 따로라 묘하게 나사가 빠진 종자들이 있기 마련인데 윤설이 그런 과인가 싶었다.
최윤의 취향이 그런 타입이었던가?
애정 문제는 반평생 같이 자란 형제들이라 해도 속속들이 안다 자신할 게 아니었지만, 가끔 애매하게 껄적지근한 느낌이 최훈의 어깨를 근질거리게 만들었다.
그건가? 성숙한 외모에 귀여운 매력?
“채 사장님. 여기 좀 보셔야겠습니다.”
“어어. 뭣 좀 찾았어?”
젖은 빨래를 뭉쳐 놓은 것마냥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파티광들을 몰아내고 약쟁이들, 빠져나가지 못한 얼뜨기 판매책들을 붙잡아 흐리멍덩한 머리를 강제로라도 깨우라 들들 볶을 때였다. 베이스가 무겁게 둥둥거리던 음악들도 사라진 새벽의 클럽은 수해가 휩쓸고 간 현장처럼 어수선하고 을씨년스럽다. 그중 사용한 흔적이 없는 방으로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주사기입니다.”
“약쟁이들 거 아니고?”
“이 방은 깔끔합니다. 병 꽂힌 채로 버려져 있었습니다.”
지문 따위가 남았을 리도 없지만, 직원이 장갑을 낀 채 양손으로 받쳐 든 앰플 병이 조악한 마약 공급용과는 달리 멀끔했다. 어디 병원 납품용을 빼돌린 낌새가 났다. 대놓고 여봐란 듯 약 올리고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걸 보면 또 아직 어린 막내 성질이 확 오르지 않을까. 일단 비닐 백에 곱게 넣은 뒤 목격자 안 나왔냐 채근하며 다른 조직 들어가 있는 정보원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차례로 도착하는 ‘답이 현재까지는 파악된 바 없음’, 그뿐이다.
“얼굴 팔린 내가 저를 잡아먹어, 뭘 하겠어. 왜 하필. 아, 진짜.”
상대로부터 요구 사항이 도착할 때까지는 미심쩍은 쪽을 다 주시할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겠다. 최훈은 결국 두 손으로 뒤통수를 감싸고 괴성을 질렀다. 직원들이 다 놀라 돌아보았으나 금세 표정이 유들유들한 채 사장으로 돌아와 박수를 짝짝 친다.
최 대표 직접 오기 전에 하나라도 더 건집시다.
* * *
윤설은 수개월 전 어느 새벽처럼 흔들리는 차 안에서 구겨진 채 눈을 떴다. 손이 뒤로 묶여있어 팔이 뻐근한 점을 빼면 그때에 비해 정신이 또렷했다.
차츰 맑아지는 머릿속에 직전의 상황이 기다렸다는 듯 재생됨과 동시에 주변 소리를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윤 배우! 어디 가요?!’
수상한 채 사장을 피해 무작정 불규칙하게 뚫린 클럽 룸 복도로 뛰어들었다. 정신없이 취해 웃고 춤추는 무리를 헤치고, 누군가 붙잡고 매달리면 힘주어 떨어내며 방 몇 개를 건넜다.
어디까지 들어갔나 싶을 때, 마침내 엉망진창으로 매캐한 담배 냄새며 카펫 위로 엎어진 칵테일 얼룩이 지지 않은 곳까지 다다라 한숨을 돌렸다. 훅훅한 열기를 필사적으로 비집고 나와 짧은 시간 사이에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윤설 씨?’
그리고 드문드문 연예인 윤설을 알아보고 부르던 몽롱함 없이 불길하고 선명한 발음으로 이름이 불렸다. 양팔을 옭아맨 사내들 사이에 붙잡혀 팔 안쪽으로 찔러 넣는 주사를 보자마자 몸에 밴 무력감에 바짝 굳었다.
윤설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입 안을 깨물었다.
바보같이.
그나마 이들은 윤설의 체질을 간과했는지 겁을 먹었는지 알파나 오메가에게 쓰는 것보다 약효가 미미해 다행이었다. 적어도 2차 성별자를 사냥하는 전문가들은 아니라는 소리다.
운전자나 조수석에 앉은 사람이나 누구도 윤설이 깨어날 거란 생각을 안 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다면 역시 자신이 최윤의 약점, 그의 짐이 된 상황이겠지 싶어 한편으로는 아프지도 않은 가슴이 죄어든다.
이런 걸 바라서 보란 듯이 모자란 나를 내보이고 다녔다.
최윤의 판단이 틀려서, 그의 그늘 밖으로 내보낸 윤설은 편히 살 수 없고 번번이 어딘가에 걸려 넘어질 거라고. 아주 몰랐으면 모르되 손을 타고 어설프게나마 타인의 애정 섞인 태도가 무엇인지 구분해 낼 수 있게 돼버려서 바람대로 훌훌 털고 잘 살지는 못할 거라고.
그럼에도 막상 예상보다 큰일이 벌어지고 자신 때문에 최윤이 일을 그르칠까 싶으니 울적해지는 것 또한 제 마음이었다. 어디로 가는지 비포장도로에 걸려 한 번씩 덜컹이며 차체가 흔들릴 때마다 최윤이 마음을 돌려주었으면, 아니, 나 때문에 심지를 꺾지 말았으면 수십 번 다른 소원을 빌었다.
“아직이지?”
“그럼. 해 떠야 깰까 말까랬다.”
“와서 들어라. 사내새끼라고 무게 좀 나간다.”
“그거라고 하지 않았냐?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차를 운전해 온 자들이 윤설을 끄집어내는 동안에도 뒤이어 다른 차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차바퀴에 작은 돌과 모래가 깔려 자박대는 소음이 익숙한 종류였다. 빈 공사장이나 교외 컨테이너만 세운 공지에 대충 띠를 둘러 사유지 표시만 해둔 곳들의 땅이 대개 이랬다. 두 대는 더 들어온 것 같다.
사내들이 투덜대며 윤설을 옮기다 한눈을 팔 때마다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영락없이 약 때문에 잠든 사람처럼 늘어져 있기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알파고 오메가고 뭐가 다른 거래? 모르겠는데.”
“성교육 시간에 뭐 했냐? 페로몬이 어쩌고 하잖아.”
“그거야 향수나 마찬가지고 증거가 어딨어? 말로 때우면 그런가 보다 하지.”
“거, 말 많네. 그렇게 궁금하면 까봐.”
“입 닥치란다.”
“예에. 예.”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비하면 편한 건지도 모른다. 줄곧 우성 알파 획득을 목적으로 윤설을 노린 사냥꾼들은 어쨌든 귀한 유전자를 제대로 뽑아내지 못할까 봐 몸을 험하게 다루지는 않았는데, 협박을 위해 납치를 감행했다면 가늠이 안 된다.
윤설은 출연했던 수사물을 떠올렸다. 현실이 더할지 덜할지, 꼼짝없이 묶여 굶고 맞는 것쯤은 예사로 각오해야 하지 않을까. 최윤을 꺾고 조건을 제시할 만큼 충격적인 연출이어야 한다. 윤설 하나를 재료 삼아서.
이상하게도 그런 고생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늘 과대평가하지 말라 혼났지만 어쨌든 윤설의 몸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튼튼하고 질긴 건 헛된 자신감이 아닌 사실이다.
형질 제거를 시도하면서 회복력은 많이 떨어졌을 거라고 했나.
…얼굴에는 흉이 남지 않으면 좋겠다. 두고두고 보기 좋은 것이고 싶다.
배우 생활도 계속하고 싶은 꿈이고, 또.
끊임없이 생각하려니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약 기운과는 다른, 순수하게 긴장한 탓이었다.
윤설을 납치해 온 이들은 쿰쿰한 냄새가 나는 어느 실내 시멘트 바닥에 몸을 내려놓았다. 묶인 손목을 들어 한 지점에 못 박아두는지 다시 한번 거친 끈이 둘렸다. 케이블 타이 정도면 뭐라도 시도해 볼 텐데 어렵게 됐다.
그러고는 계속 투박하고 정돈되지 않은 움직임들로 어수선했다. 집중해 듣지 않아도 온갖 소음과 군소리가 귀를 스쳤다. 몇몇이 피곤해 차에서 눈을 붙인다 하고 나갔어도 윤설의 곁에서는 계속 신경 거슬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자두는 편이 나을까. 지금쯤이면 경호원을 비롯해 윤설의 행방을 알아야 하는 모두가 상황을 파악했을 텐데.
최윤 쪽에서 상대를 특정하고 있어 빠르게 찾아낸대도 일단은 지난한 밀고 당기기와 협상, 협박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그래. 아무도 건드리지 않을 때 자두자. 나중에는 잠을 재우지 않을지도 모르고……. 이왕이면 꿈까지 꾸어 보고 싶은 사람이나 실컷 보면 좋겠다.
천천히 모든 긴장을 놓고 호흡마저 천천히, 더 느리게 내쉬는 마지막까지 하나만 생각한 덕인지 윤설의 바람이 이루어졌다. 가장 최근 함께 참석한 대외 행사일에 보았던 최윤의 모습이 윤설의 무의식과 섞여 달콤하기 그지없는 꿈이었다.
* * *
당사자인 최윤은 형식적인 자리를 무척 귀찮아했지만 따라나선 윤설은 그 자리가 내심 좋았다.
공식적인 직함을 달고 모이는 자선 파티, 경매, 기업 모임에 한결 부드러운 분위기를 위해 연인이나 가족 동반이 허용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행원만 달고 나타나는 사람도 있고, 누가 봐도 정부 같은 이를 데리고 쉬쉬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사람도 있는 가운데 최윤의 곁에는 윤설이 있었다. 타인의 시선으로야 ‘그래봤자 결혼까지는 안 갈 한때의 애인’으로 폄하당하더라도 매번 함께 가서 소개받는 일이 윤설을 위로했다.
최윤은 그다지 사교적이지 않으면서도 방실방실 잘만 웃고 있는 윤설을 보고 지극히 약속에 충실한, 프로 배우다운 노련함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혼자 남겨지지 않게 잘 데리고 다녔고 자신도 미처 모르는 습관처럼 한 입 거리인 간식이나 디저트를 꾸준히 내밀었다.
한동안은 가짓수만큼 맛볼 때까지 계속 입 안에 뭘 넣고 있어 누가 알은척하면 겨우 고개나 까닥여 인사하는 모양을 기꺼워하는 게 표정으로 보였다. 부러 쌀쌀맞게 구는 사람이 애써서 적당히 매너에 맞을 정도로만 다정함을 꺼내려 하는 행동들이 서운했다, 어여뻤다 하다 보면 아쉽게 끝나는 자리다.
윤설이 그답지 않은 기행으로 제안한 새로운 거래를 아예 잊어버린 듯한 태도로 일관하며 친밀한 접촉을 피하는 한편 온통 모르는 이들 뿐인 곳에서 팔짱을 끼고 매달릴 때 손을 쥐었다 놓아주는 모순을 사랑한다.
달리 말로 더할 방법을 모른 채로 감정만 울컥울컥 치밀 때면 시선들에서 비껴 난 자리로 이끌어 깊이 입 맞추고 싶었다. 꿈에서는 기어코 그렇게 해서 뿌듯했다.
“…….”
하지만 꿈은 끝나기 마련이라, 눈을 뜨니 곧장 차가운 벽에 볼이 눌리고 뻑뻑하게 굳은 어깨 관절이 비명을 지르는 이곳이 윤설의 현실이다.
저들끼리 쬐던 전기스토브의 붉은빛도 꺼졌고 깡통 안에 이따금 던져 넣던 담뱃불의 희미함도 사라진 어둑한 공간에서 눈만 깜박였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도 딱히 구분해서 볼 만한 사물이 없는 곳 같았다.
손가락을 한껏 구부려 손목을 감싼 매듭을 걸고 늘어진 밧줄의 끝이 어디에 있을까 가늠할 뿐이다. 줄이라도 끊을 수 있다면 중심을 잡고 걷거나 뛰어볼 텐데. 제힘으로 탈출할 셈까지는 없어도 만약의 상황을 가정하는 버릇이 남아 윤설을 부추겼다.
납치범들은 윤설에게 약이 아주 잘 들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멍하니 굳어있는 줄로만 알았다. 다만 그들은 윤설을 매우 얕보면서도 쉽게 전등을 켜거나 실내를 파악할 만한 단서를 주지는 않았다. 이런 일이 익숙하거나 명령한 자가 단단히 일러둔 모양이었다.
그들은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윤설을 보러 와 예측하기 어렵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윤설을 다루었다. 가끔 라이터의 빛으로, 금방 꺼지고 마는 랜턴의 반대편에 선 그림자로 몇 번째 다른 사람인지 헤아렸으나 큰 의미가 있을지는 모른다.
어떤 이는 점잖은 말씨로 윤설을 살피며 목을 축이게 했다. 그다음 시시껄렁한 주변 잡기니 윤설은 볼 수도 없는 바깥 날씨를 늘어놓다 문득 연락하고 싶은 사람이 있냐 물었다. 윤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후회할 만큼 충분히 내버려 둔 뒤 들어온 어떤 이는 다짜고짜 늘어진 몸을 걷어차고 거칠게 윽박질렀다.
네가 왜 여기 와있는지 알 것 아니야?
윤설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이제 은성의 막대한 유산도 뭣도 없다는 동문서답을 꿈꾸는 듯 중얼거려 또 한 번 차인 뒤로 정신을 잃은 것처럼 눈 감았다.
열두 시간쯤 지났을 때, 잠시 졸고 나니 옷소매에 가려진 시계도 벗겨 가고 없었다. 점차 시간 감각이 둔해질 터다. 더 쉽게 지칠 자신도 걱정이었지만 그보다 솔직한 마음은 매 순간 한 가지 의문만을 떠올린다.
실종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최윤도 초조할까?
“고개 들지 말고 그대로 있어요.”
“…….”
코앞에서 강한 빛이 번쩍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다 붙잡혀 눈을 질끈 감는 게 최선이었다.
되도록 잠들지 않으려 했는데. 지난한 시간을 견딜 방법으로 유일한 것이 자는 일뿐이라 그런지 생각이 둔해지면 깜박 의식과 수면의 경계를 오가고는 했다.
낯선 목소리들이 불쑥 끼어들어 윤설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내면 끌려 나오고 버려두면 천천히 상황을 곱씹다 피로에 절어 딱딱하게 굳은 몸을 가눈다. 이번에는 누가 무슨 짓으로 끼어들었나.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뒤에서 다른 누군가 랜턴을 들고 있었다. 역광은 윤설만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남자의 얼굴은 어둠에 가린다.
남자는 윤설을 꼼꼼히 훑어보며 가끔 더럽혀진 옷이나 생채기에 이르러 혀를 차고는 했다. 안타깝다거나 일이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조롱이리라.
“최 대표가 생각보다 잘해줬나 봐.”
약도 안 한 것 같고 몸도 깨끗하더라고?
마치 윤설의 옷 아래 모든 표면을 살핀 듯 확신에 찬 어조였다. 비아냥이기도 했고 투덜거림이기도 했다. 윤설은 중첩된 유감들 사이에서 흥분을 읽었다.
“그래서 사진을 매일 찍어보려고 해.”
“…….”
“물 마신 지 오래됐나? 내가 물어볼 게 있어서.”
손만 뒤로 내민 남자의 손에 작은 생수병이 올라온다. 윤설에게 본론을 말할 수 있는 직급이 되는 사람이었다. 딱딱 손가락 부딪는 소리를 내며 윤설의 집중을 유도하고, 묻는 말이 전부 약물 사업의 핵심에 대한 것들이었다.
최 대표가 새로 들여온 약 수입이지? 자기 같은 얼굴마담이 제조법까지 알 거란 기대는 나도 안 해. 그런 무리한 거 안 물어볼 거야.
언뜻 달래는 듯한 문장들에 최대한 봐준다는 듯한 오만함이 깔려있다.
랜턴 방향이 조금 아래로 내려갈 때 겨우 남자를 마주했다. 그늘 속에서도 눈이 물기 어린 듯 번들거리는 꺼림칙한 인상에 이를 꾹 무는 윤설의 턱을 쥐고 물병을 대준다. 이성적으로나 본능적으로나 물을 마셔둬야 맞는데 선뜻 입이 열리지 않는다.
“마셔, 마셔야 말을 하지. 말해야 할 게 많은데…….”
입을 다문 채 흔들면 흔드는 대로 맥없이 따라가자 아예 얼굴 위로 물을 쏟는다. 물이 흘러내리기를 기다렸다 고갯짓으로 털어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윤설을 기다려주지 않고 곧바로 목덜미를 잡아 올린 남자가 코앞에서 윤설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본다. 행여나 숨기는 기색이 없는지, 어디까지 거짓인지 알아야겠다는 집요함이 가득했다.
윤설은 저런 눈을 알고 있다. 탐욕의 상한선이 정해지지 않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의 눈이고 한때는 윤설을 쫓아 영원히 추격전을 벌일 것만 같던 눈이다.
“대표님은… 그런 이야기는 남에게 안 해.”
“최 대표 의심 많지. 알아. 그런데 우리 윤 배우가 남인가? 응?”
하필이면 고른 말이 ‘남’이라 윤설은 그만 웃어버렸다. 피가 돌지 않는 마당에 얼굴이라고 마음대로 될 리가 없어 딱딱하고 비틀린 모양이었을지 몰라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최윤이 남으로 살라고, 정 떼게 하려고 무진 애쓰는 현실에 들으니 실없이 우스웠다. 동시에 최윤이 윤설의 내일을 아낄 만큼 가까이 둔 것도 사실이라 더더욱.
“기운 있을 때 많이 말하는 게 서로 좋으니 잘 생각하자고.”
“…소용없어요.”
“너랑 최 대표 중에 누구 입이 더 빨리 열리는지 두고 봐.”
남자가 희끄무레하게 인화된 사진을 흔들며 나간 뒤에도 어둠 속에서 얄궂은 말들이 날아들었다.
생각해 봐. 개중 오래 끼고 있는 애인에 전 국민이 얼굴 다 아니까 이 정도지, 아니었으면 그냥 손가락부터 잘렸어. 안 그래? 최 대표가 손해 볼 작자인가? 손바닥 뒤집으면 우리가 널 어떻게 해야겠어?
생각해. 남자고 여자고 반반한 것들은 갈아치우면 그만인데 너 하나 어떻게 될까 봐 상상도 못 할 돈줄을 놓겠어? 그냥 뭐라도 아는 거 불고 좋게 나가는 편이 낫잖아. 우리도 유명한 사람 죽여서 아무 데나 버리기 애매해. 실종 길어지고 고만고만한 처지면 다 신변 비관이니 뭐니 해서 금방 치워지는데, 하필 유―우명한 배우잖아. 사람들이 얼마나 떠들겠어? 최 대표도 그거 알아서 손 놓고 기다리는 거야.
생각해. 너도 살아야지.
생각해. ‘리본’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해.
생각해. 그를 배신하고 자유로워져야지.
생각해. 그를 밀고하고 살아 나가야지.
윤설은 기나긴 채근과 협박에 몸을 말고 누워 아무것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물론 생각하고 있다. 윤설은 제 신변을 구속한 자들이 아닌 최윤을 의식하고 있었다. 최윤이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지, 어떤 지시를 내렸을지, 최윤이 무슨 요구를 들어 어떻게 판단할지, 더 이상 건강한 유전자가 필요 없으니 굶주리고 상처 입고 만 듯한 모습이 두드러진 사진을 받았을지, 그래서 윤설을 안타까워하며 윤설이 알고 있는 표정을 한 채 감정을 억눌렀을지.
윤설이 어떤 답을 한다면 그것은 이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최윤을 향한 화살일 것이다. 지금 윤설은 납치범에게 무지나 의리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최윤에게 배신하지 않는 맹목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니 너는 눈속임으로 이용당하다 버려질 거라는 속살거림에 조금도 흠집 나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하게 식은 이성을 유지한 채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다 생각했다. 단지 헤아릴 도리가 없어 며칠 밤낮이 지난 듯 길게 느껴질 뿐이다.
목이 타들어 가 헛기침이나 끓는 소리가 잦아지면 아무나 내키는 만큼 물을 주었다. 방법도 제각각이라 누구는 부족한 양이나마 평범하게 입가에 대주었고 누구는 넘치는 양을 젖힌 목구멍으로 때리듯 쏟아부었다.
심심해 몸이 비틀릴 지경인 누군가는 야트막한 술 사발에 물을 따라 멀리 두고 개 부르듯 손짓했다. 윤설은 무릎으로 기어가 낄낄대는 웃음 속에 모가지를 숙여 핥아 마시거나, 그마저도 뺏어 가버리면 모로 누워 색색 숨만 쉬었다.
윤설을 감시하는 이들은 때때로 윤설이 아주 체념하고 절망해 정신을 놓거나 상해버릴까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더 잔악하게 굴지도 않고 대충 입막음해 풀어주지도 않는 걸로 보아 최윤이 무언가 반응을 해준 모양이다.
숨죽여 참고 또 기다렸다. 어느 날 외진 새벽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묶인 몸을 부딪혀 가며 끌려가느니 더 큰 사고를 내고자 목숨을 걸었고 그다음에는 최윤을 찾아 운명을 걸었듯이. 이번에도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할 중요한 것을 최윤에게 걸고 있다.
그 모든 의심과 따르는 많은 이들, 무수한 가능성과 이익에 얼마쯤 눈감고 한 번만 더 내게 와준다면.
그러기만 한다면.
* * *
가끔씩 늦은 밤이나 새벽에 날아드는 소소한 사건 사고에도 익숙해진 참이다. 바로 보지 않아도 되는 걸 알람이 울릴 때마다 깨서 흘긋 보고 뒤채다 잠드는 날이 심심찮게 있었다.
남들 다 할 때 못 한 경험을 뒤늦게 하려니 우여곡절이 많은 모양이지.
늦바람도 겪을 만큼 겪어야 조용해지는 건 마찬가지라 한동안 계속될 듯싶었다. 최윤은 그런저런 소동들을 반겼다. 걱정했던 것보다 잘하고 있고 간혹 섞여든 질 나쁜 무리는 지켜보다 솎아주면 되겠거니 했다.
─나다. 최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작은형까지 붙여 봐달라고 했으니 남은 시간 멀어지는 모습을 조금 아까워하면 될 거라고.
헛헛함이 들어 아직도 무거운 이불에 푹 묻혀서 잠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 날이었던가 보다. 다음 연락을 기다리기 전 뛰쳐나간 늦은 새벽의 클럽에는 어설픈 일에 휘말린 윤설, 약간 취해있는 윤설 대신 나뒹구는 파티의 잔해와 빈 주사기뿐이었다. 심장이 추를 달고 있는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더 나올 것이 없는 현장을 두고 옮긴 자리에서 발신자 미상의 첫 연락을 받는다. 낯설고 특징 없는 목소리가 읊는 전언이 유 이사나 할 법한 문장으로 짜여있다.
어쩌면 최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헛고생이면 뒤처리만 더 귀찮게 됐다 그런 군소리를 붙이고도 요구에 거침이 없었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탐욕. 마구잡이로 찔러 보는 수작. 고작 그런 일에 고꾸라져서.
퀵서비스로 날아든 갈색 서류 봉투 안에 성의 없이 끼워진 윤설의 사진을 발견한다. 그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뱃속이 타버렸다.
나라고 어느 것 하나 쉬웠던 적은 없는데.
최윤은 전방위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이상의 결단을 바라는 면면들 앞에서 돌연 사라졌다. 문을 닫고 혼자 침잠하는 늪에 반신을 담그고, 흘러드는 흙덩이를 걷어내듯 날뛰는 감정과 최악을 가정하는 망상을 죽이는 데 시간을 써야만 했다.
사람은 완전히 벗어났다고 여긴 공포를 다시 마주쳤을 때 더 괴로워한다.
윤설은 묶인 팔다리와 어둠 속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가치 있는 인질로 명명했음에도 굶주리고 목마를까.
최윤과의 시간 속에 알게 된 기밀이 있는지 들쑤셔 보겠다고 흐린 이성을 헤집을까.
“…….”
배신. 아무것이나 입에 올려 그 자리를 모면할 궁리쯤은 해내지 않을까.
설령 윤설이 보고 들은 진짜를 말해주고 벗어난대도 그를 향한 분노는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럴 리 없다는 걸 아는 자신이 싫어진다. 일생에 다시 없을 바람이었다.
* * *
최훈은 아직 채 사장으로 불리며 최윤을 거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어수선한 마당에 굳이 호칭 정정해 봐야 최씨들 사이에서 헤맬 일밖에 더 있나.
단순 경고성 납치극이라기에는 연이어 날아온 봉투들의 내용물이 흉흉했다. 처음에 봉투를 받아 내용을 확인한 놈이 하도 벌벌 떨기에 누구 귀라도 들어있냐고 물었는데, 지금 꼴을 보니 차라리 그 편이 나았겠다.
아무도 들어갈 생각을 않는 사무실 문을 건성으로 두드리고 상체만 들이밀자 몇 시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앉은 최윤이 보였다. 대충 현장에서 찍어낸 손바닥만 한 사진 서너 장 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줄곧 그것만 보고 있다. 시선 돌려봐야 천장, 담뱃갑 아니면 이렇게 끼어드는 제 형이 전부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부른다.
윤아.
“좀 자라. 해야 할 건 다 했고, 그래서 머리가 굴러가겠냐.”
“자고 나면 사람이 관대해져서 못써.”
“약 먹지 말고. 그거 각성제 아냐?”
“어.”
잘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대답은 잘했다. 서른 넘어가도 막내라 그런지 제대로 눈 붙이지도 못하고 속 태우느라 거칠한 얼굴을 보니 안쓰러웠다.
기실 대담하게 시내 한복판에서,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얼굴 알려진 인질을 덥석 집어 갈 정도의 일을 벌였으면 예상되는 요구도 뻔한 것이었다. 신약의 공식을 달라거나, 물량 일부를 할당해 달라거나. 터무니없는 요구이기도 했다.
만약 잡혀간 인질이 운조 일가 식구들 중 하나였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거절했을 일이다. 특히나 운조 회장 부부였다면 칠순 넘어 찬 바닥에 구르고 있더라도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주고 풀려나느니 자식들 머리를 깨놓았을 게 분명했다.
거느리는 직원은 건사하는 식구나 마찬가지라지만, 그들이 충성을 약속하는 만큼 우두머리가 쉽게 전체의 이익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오히려 결정이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윤설은 다른 범주 안에 있는 사람이다. 운조의 이익과 관련 없다. 그럴 의무를 지지도 않았고 혜택을 입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을 구제하기 위해 시작했던 계약 때문에, 명목상 관계가 최윤의 연인이고 드러난 모습이 정다웠기 때문에 말려들었다.
이런 일 생길까 봐 각자의 삶을 살자고 했던 건데.
최윤으로는 처음으로 갖고 싶어도 놓는다고 했다. 못 해서도 아니고 안 된다는 말로 그랬다. 한때의 정열보다 남은 삶이 길다는 걸 너무 잘 알아서 그랬다.
그조차 틀린 걸까. 더 나은 최선이 뭐가 있었을까.
현재와 미래를 두고 치열하게 더 나은 선택지를 고민하는 중에도 후회가 가슴에서 목으로 타고 올라왔다. 후회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감정이라 덩굴 식물처럼 최윤을 휘감고 오르다 마지막에는 두 눈을 가릴 것만 같았다.
해서 되도록 잠들지 않고 버티며 새로운 보고가 있을 때마다 미세하게 변수를 조정하고 쓸 수 있는 수와 버릴 부분을 따지다가, 담배 필터를 문 채로 머리를 싸쥐고 신음했다.
“봉투…가 또 왔습니다.”
“다른 내용 있나?”
“사진입니다.”
“…안 보는 걸로 하지.”
“이리 내. 내가 보면 되지.”
꼴을 보고도 최훈은 이 사업의 책임자가 최윤임을 존중해 참견하지 않았다. 다만 성가시게 굴면서 입에 뭘 좀 넣어라, 잠 좀 자라 요란을 떨 뿐이다. 온통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뿐인 최윤을 두고 너는 누가 챙기겠냐며 제 새끼 함함하다 하는 고슴도치 아비 시늉을 대신 했다. 그만큼 최윤이 심하게 흔들린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날로 상태가 안 좋아지는, 혹은 거짓으로라도 그렇게 꾸몄을 누군가의 사진을 받을 때마다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어디까지 수용해야 윤설이 안전할지 재는 것 자체가 리더로는 실격이었다. 동시에 마땅히 세상에 하나뿐인 연인으로 가져야 할 마음조차 기준 미달이다.
헌신도 희생도 모른다고. 그래서 안 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미 벌어진 일로 윤설이 입은 피해는 어디서 보상할 수 있나?
최윤의 세상이 처음 빚어지는 것처럼 위아래로 거꾸러지며 서로가 우선이라고 아득바득 외치고 있는 사이 사진을 빼 든 최훈이 애매한 탄성을 냈다.
으음.
“달릴 거 다 달렸다. 걱정하지 마.”
“말이라고.”
“솔직히 너도 알고 나도 알고 걔들도 알아. 신인도 아니고 다 아는 연예인을 여기서 더 어떻게 해?”
아예 죽여서 실종자로 내면 몰라도.
뒷말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럼에도 부채감이 무거운 이유라고 하면, 그러지 않아도 될 사람이 신물 나는 과거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다쳐도 어지간해서는 흉조차 남지 않는 몸인 줄 알지만 그래서 그게 괜찮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회복력도 윤설이 알파였기 때문이니 지금에 와서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이 짓을 새벽 해가 떠서 한낮으로 타오르고 기울 때까지 반복하고 있다. 길어질수록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는 시간 끌기인 줄 알면서 서로 먼저 굴복하라 신경전을 벌이는 지금. 최윤은 담뱃갑을 열었다가 텅 빈 안을 확인하고 차가운 탁상 위에 이마를 댔다.
“아이고, 이러다 우리 막내도 잡겠네.”
“형.”
“그래. 어쩌게?”
“경검에 찌릅시다. 경찰에 윤설 실종 신고, 장기 수사 담당한테 건수 있다고 해요.”
“야, 그거는.”
“남 좋은 일 하느니 같이 뒈지자는 게 유 이사 스타일인 것 같으니까 맞추자고.”
“그거는 좀, 그렇다야.”
뭐든 들어줄 것 같던 최훈이 죽는 소리를 냈다. 짜증이기도 했고, 말도 안 되는 수는 아니어서 반대도 못 하는 울화를 뱉다 말다 난리도 아니다.
최윤도 호시탐탐 일망타진 노리는 공권력의 손을 빌리고 싶겠는가. 하지만 가장 빠르고 요란하게 일을 확대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 그 방법이 가장 좋았다.
“리본 샘플 그쪽도 확보했을 테니까 미성년 유통책 이런 거는 물고 늘어지면 검경만 좋은 장사고.”
“뭐 줄까. 밀수? 제조?”
“윗선 엮이는 건 안 하려고 들 테니 깔끔하게 떨어지는 건으로 걸어봐야죠.”
아마 받아들여질 공산이 컸다. 유명인 납치 사건에 범죄 조직 타진, 그 조직이 수사 난항으로 알고도 못 넣은 일에 연루돼 있으면 당장 운조 하나 엮기 위해 놓치기 아깝다. 예측되는 손해들이 줄을 잇는데 당장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 * *
최윤은 공식적으로는 공익 신고자 및 피해자의 보호자 신분으로 특수대와 동행했다. 내막을 아는 몇몇 인사들은 현장을 같이하면서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다 합의가 됐고 표면적인 수사명과 검거 타깃이 나온 이상 그대로 이행해야 했다.
유 이사가 기획한 일이지만 청람 전체에 혐의를 씌울 수는 없어 실물 증거를 입수한 지사 및 중역을 도려내고, 하청받은 지방 출신 조직을 엮어 그림을 만들기로 한다. 뻔히 아는 장사 하는 동종업계 조직 찔러 넣고 증거도 갖다줬다. 없던 원수도 질 일이야 그쪽에서 먼저였다지만 두고두고 빌미가 되고 성가실 터다. 이렇게까지 하고도 후환을 아주 자르지 못해 벌써 목덜미가 저리지만, 사람 목숨이 다급해 덮어놓고 감수하기로 했다.
윤설은 도교로 연결된 섬에 있었다. 어찌저찌 천운이 따라 탈출해도 길이 하나뿐이라 이동 경로가 다 보이는 곳이다.
관광 개발 목적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토지 매매, 가건물만 듬성하게 올려진 흙먼지 가득한 땅에서 꼬박 일주일이었다. 납치 현장 수습부터 시작해 청람으로부터 협박에 가까운 제안을 받고, 그럴듯한 시늉을 하면서 뒤로 돌아오기까지 일주일.
그때는 숨이 턱 끝에 차게 긴박했다고 여겼는데 막상 낯선 땅을 밟고 보니 더 빨랐어야 했다는 생각뿐이다. 억지로 틀어막아 놓았던 불길한 상상이 허물어진 둑을 밀어내며 머리 위까지 넘쳤다.
아무것도 논리 정연하게 설명할 수 없다.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도 윤설을 무사히 빼내기 위해서라는 말 외에는, 왜 그만은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완벽하게 무사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목표가 아닌 결과를 정해놓고 움직였다.
그래서 여러 건물을 동시에 에워싸고 진입 준비를 하는 특수대와 다른 방향으로 뛰었다.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가장 새것인 그대로 쇠줄이 감긴 철문을 양손으로 부여잡기까지 한달음이었다.
“…윤설.”
지키는 이 없이 고요했다. 빛이라곤 없어 최윤이 밀고 들어온 문틈으로 직선을 그리며 따라온 햇빛이 전부였다. 적막함이 그렇게 소름 끼친 적도 없었다. 바깥은 가까워지는 특수대원들의 외침과 먼 총소리로 시끄러운데 발 들인 경계 안은 인기척도 무엇도 없다.
“윤설.”
깊이 들어가 거의 안쪽 벽 끝에 이르러서야 발에 둔하게 걸리는 물체가 있다. 놀라 뒤집어 보았으나 섬뜩한 가정처럼 얼굴을 아는 시신 따위는 아니었다. 감시역인 듯했고 아직 흘린 피가 더웠다.
“…님…….”
“윤설 씨, 여기.”
정신을 잃은 감시자의 다리가 뻗어 가는 자리 끝에 윤설이 땅을 짚고 엎드려있었다. 당장 안아 들어 빛이 가까운 문가로 옮기고 싶었다. 밝은 빛 아래 상한 곳이 없는지, 어디가 어떤지 남김없이 살펴야 했다.
그러나 최윤은 무엇에 발목 잡힌 사람처럼 비척비척 걸어가 무릎을 꿇고 나서야 겨우 윤설을 제 몸에 기대게 했다.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내는데 점점이 묻어 끈적하게 긴 자국을 남기는 것이…….
“다쳤습니까.”
“…조금요. 몸싸움이 있었어요.”
“어디가 아파요?”
“어깨요.”
피.
피는 얼굴에 묻어있는데 어깨가 아프다고 한다. 최윤은 어깨부터 상완과 손목까지를 조심스레 눌러보았다. 특별히 탈골되거나 외상이 심한 곳은 없었다.
“업혀요.”
“…대표님.”
“네.”
“보고 싶었어요.”
“…….”
힘 있게 목을 그러안고 나서야 차츰 늘어지는 걸 보면 심각한 부상은 없는 것이다.
없는데.
걸음걸음 하는 말이 다 성에 차지 않고 괜스레 방향 없는 화가 튀었다.
얼마나 됐어요?
두서없는 물음에 일주일째라고 하니 그냥 그런가 하는 것이나 무서웠다고 하지 않는 것이나. 전부 마음에 안 들고 괴로웠다.
“대표님.”
“네.”
“아직 나가면 안 되나요?”
“…조금 기다리는 게 좋겠어요.”
바깥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고 윤설의 위치만 확인되면 응급 구조 인력이 들어올 테니 정말 잠시뿐이다.
무서우면 빨리 나갈까요.
혹시 지금을 견디기 힘든 자기 생각뿐이었나 싶어 황급히 덧붙였다. 윤설은 대답 대신 질문을 속삭였다.
“저 때문에 일이 잘못되지는 않았어요?”
“이 마당에 그런 걸 왜 물어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어떻게 절 찾으셨어요?”
“검찰에 내부 거래 걸고 도움 좀 받았습니다.”
“…그럼 대표님도 잘못되는 거 아니에요?”
“당분간 참고인이니 뭐니 불려 다니겠죠.”
“리본은…….”
“당분간 장사 뜸할 수밖에요. 정말 아픈 데 없어요?”
“모르겠어요. 저, 대표님.”
“나갈까요.”
“우세요?”
“아니요.”
최윤은 부정과 동시에 걸음을 옮겼다. 열린 문이 가까워진다.
한 번 고쳐 업고 더는 느리지도 않게, 빨리 어두운 폐건물에서 빠져나갈 생각뿐인 사람처럼 걷는 몸에 윤설이 힘주어 매달렸다. 고집스레 손을 뻗어 차갑게 식은 손으로 최윤의 턱, 볼, 눈썹 뼈 도드라진 곳을 헛짚다가 더듬어 내려갔다.
“저 때문에 우세요.”
“미안해요.”
“다 대표님 때문이에요.”
“압니다. 내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할 테니까.”
“…책임지셔야 하고요.”
“…….”
윤설은 최윤이 해주었던 것처럼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러 물기를 쉼 없이 닦아주었다. 뻣뻣하니 피가 안 도는 손으로도 사뭇 다정한 움직임과 달리 갈라진 목소리가 단호했다.
“전부 대표님이 제게 준 것들 때문이니까, 저를…….”
기한이 있는 약속 아래 있으면서 필요 이상으로 다정했고, 어느 정도가 공평한 맞바꿈인지 모르는 사람을 상대로도 함부로 앗아 가는 것 없이 주고받는 관계를 가르쳤고, 나 스스로 당신에게 매인다면 아무도 탓하지 못할 일을 두고 자신의 삶은 자신을 위해서만 아끼라고, 감히 어느 한 군데도 낭비하거나 후회하지 않게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이렇게 묶이지 않았냐 탓했다. 그중 한 순간만 나쁘게 굴었어도 이러지 않았을 거라고.
“그리고 저는 이미 대표님이랑 떨어지면 더 아프게 됐으니까.”
탓하는 말 위에, 윤설은 최윤이 사심을 아프게 깎아가며 보였던 관대함보다도 먼저 배운 욕심과 약간의 거짓말을 꽂고 마저 못질했다.
이미 당신을 사랑하느라 형질 제거에도 실패했다. 불온전한 성공이요 평생을 함께할 후유증은 멀어질수록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고통을 줄 것이다.
최윤의 어깨 위에 덜어낼 엄두조차 못 낼 짐을 얹는다.
“저를 책임지셔야 해요.”
“윤설 씨, 나는…….”
“책임져야 하는 게 끔찍하더라도.”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처음으로 희생하셨고, 저 때문에 울고 계세요.”
아직 좋아하기 때문이다. 좋아한다는 말 이상이기 때문이다. 윤설은 금세 멎은 눈물로도 만족했다. 다시 목을 안고 기대는데 심장이 거세게 뛰어 최윤이 알까 두려울 정도였다. 최윤이 사랑보다 죄스러움을 먼저 입에 담는 사람이기 때문에 윤설이 대신 이름을 붙였다.
최윤은,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 그래서 그럴 수 있었다.
“제가 생각하는 사랑 그대로니까. 우리는 이제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가요.”
“네. 대표님, 집에 가면… 반지 새로 맞춰요.”
마침내 밝은 빛에 드러난 손을 보니 손바닥에는 검은 그을음, 손등에는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 엉망이었다. 그래도 익히 아는 모양대로 온전했다.
“없어졌어요. 대표님도 그건 버리셔도 되니까.”
“그래요. 그럽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들것 위로 누인 윤설에게 끼고 있던 반지를 빼 넘겨주었다. 사이즈가 묘하게 달라 그런지 최윤의 반지는 윤설의 손가락 마디에서 조금 힘겹게 넘어갔다.
“대표님 집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요.”
“몸이 괜찮아지면 제 집에 가는 거 말고.”
“그래요.”
“…같이요.”
해야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인지 점점 앞뒤 없이 뱉다 흐려지는 단어들, 의미 없는 중얼거림들을 두고 최윤은 계속 답해주었다.
감긴 눈 창백한 얼굴을 살피느라 다가온 의료진들 사이에 손을 잡힌 채로 구겨 앉아 먼지가 뿌옇게 이는 차바퀴 아래를 보다가, 차 문이 닫힐 때 밝은 하늘을 일별하고 다시 윤설의 얼굴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다행히 고통스러운 기색 없이 잠들었을 뿐인 얼굴의 보며 어느새 습관처럼 엉긴 속눈썹을 올올이 세고 있다.
시끄럽던 머릿속에 아무런 의문도, 설명도 남지 않았다. 커다란 공백처럼 어디로 가야 한다는 의식도 없이 현재에, 단 한 사람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어떤 것과도 연결 지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언젠가 최윤이 단언했듯 사랑은 이성과 멀리 있는 감정이라 그저 존재함으로 전부였다.
최윤은 그간의 괴로움과 두려움을 기억해야 한다. 무사함을 확인하고 안도하던 순간과 그리워했다는 말에 내려앉던 가슴 아픈 애틋함을 안아야 한다. 윤설이 그랬듯 자신이 사랑에게 남긴 영원한 흔적과 상처를 감당해야 한다. 그를 행복하게 하는 삶이 무엇인지, 최윤이 아는 세상과 달리 생각해야 한다.
어제까지의 삶과 다른 법칙을 세우는 존재를 데리고 가기 때문에 최윤이 미리 헤아릴 수도 없고 수백 개의 실을 던져 끊기지 않는 하나만 따를 수도 없는 평생의 과제를 이고 돌아가는 것이다. 무척 피곤하고 고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잠든 이가 깨어나 또다시 보고 싶었노라 말할 것을 기다리며 생각하매
그 모든 게 나쁘지 않았다.
(거짓말의 거짓말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