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어떤 날의 난데없는 고백과 이어진 현실 직시의 시간 후로 윤설이 화내고 있다. 당사자도 모를 그저 그런 변화였고, 제삼자가 보기에는 여전히 단정하고 온화한 사람인데 어쩐지 멈춰서 되짚게 하는 행동이 늘었다.
하긴 눌려 지내서 그렇지, 고집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그럴 수 있지. 거절에는 애고 어른이고 속상한 법인데.
가볍게 넘기고 있지만 꽤 오래갔다. 놀랍게도 영화 촬영차 건너와 가장 친한 매니저 우형을 비롯해 스태프들이 몽땅 한 호텔에 묵는데 줄창 최윤의 호텔로 돌아오고, 가끔 답답해 깰 정도로 으스러져라 안고 잤다.
언뜻 불안, 자세히 보면 오기와도 같다. 이렇게 자면서도 힘쓸 거면 차라리 때리지.
덕분에 타지에 와서도 느긋하게 늦잠 자기는커녕 새벽같이 일어나 요란하게 몸을 풀어야 하루가 시작된다. 갈비뼈 아래를 문지르고 있으면 원흉인 남자는 민망한 기색도 없이 아침 인사를 건네고 게으름 피우는 일도 없이 세수며 단장을 하러 쌩 사라져버렸다.
허리가 1인치쯤 줄어들겠는데요.
혹 아프세요?
금방 괜찮아집니다.
다행이네요.
언제는 최윤이 다칠까 무서워서 발발 떨더니, 안 다치는 거 알아서 이렇게 막 다루나 싶었다. 연기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였단 듯 무던한 얼굴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고 있으면 기가 차고 괘씸하기까지 했다.
일부러 보이는 곳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시위한다고. 꼭 옆을 비집고 자면서 더운 몸 한번 달아오르는 일 없나 두고 보자는 것처럼.
그러나 다 정 떼는 과정이려니 하면 이해할 만하다.
끝내기로 한 사람을 계속 옆에 붙여본 적 없는 최윤으로서는 조금 성가시기도 했지만, 윤설이 보이는 하루 일과에 손바닥 가득 올린 약을 두어 번이면 다 삼키는 시간도 포함돼 있으니 등 떠밀기도 그랬다.
아니지. 그렇게 컨디션 난조를 겪는다면서 요 며칠 얼굴이 달처럼 보얗고 혈색도 도는 걸 보면 추위도 뭣도 아니라 맘껏 성질부리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최윤이 태워대는 궐련 양은 한국에 있을 때랑 비슷했다. 줄이거나 가벼운 필터담배로 넘어가려던 생각은 건너가고 자꾸 입에 뭐라도 물어 자근자근 짓이겼다.
“오늘 회식 있다고요.”
“네. 조금 일찍 만나서 구경 다닌다는데 같이 가시겠어요?”
“아뇨. 실례일 테니까요. 크리스마스 시즌 쇼핑 가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것도 같아요. 너무 이르지 않나 싶은데, 시즌 시작돼 있을 거라고들 했어요.”
“여기는 거의 한 달 내내 그 분위기예요. 남의 생일 핑계로 다 같이 즐겁고 좋죠.”
밖에 일 보러 가야 하는 날도 아니고 호텔 부대시설이나 누리고 있을까 하던 참이다. 윤설이 이른 점심부터 사람들과 어울린다 하니 은근히 반가웠다. 타국에서 계절을 넘기고 축제나 연휴를 겪는 기분도 색다르니 좋은 선택이었다. 다만 이미 친할 대로 친해졌을 무리에 불쑥 끼어드는 불청객이 되고 싶지도 않고, 다들 알 만큼 알아서 무진 눈치 볼 게 뻔해 자기 대신 카드를 넘겼다.
“윤설 씨 계획 외에도 필요한 것 있으면 써요. 식사 정도 사도 좋고요.”
“아닙니다. 식사는 어차피 제가 살 생각이었어요. 다들 너무 고생해서…….”
“그래도요.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지 못하니까.”
“…네.”
언뜻 드러난 눈빛이 또 샐쭉하거나 희미한 원망이 섞였다고 생각한다. 꽤 자주라 착각이 아닐까, 제풀에 어쭙잖은 죄책감이라도 느끼나 했지만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친 한에야 부정하기 어렵다.
예정보다 빨리 정리하고 와서 계획보다 오래 머무는 줄 알았으니 당연히 12월 하순을 넘기기 전에 돌아갈 걸 알았을 텐데.
그래도 지지부진하게 끌었으면 이마저도 못 누렸을 것 아닌가. 타국에서 찍고 싶은 영화 찍으면서 새로 사귄 사람들의 관심 속에 파티, 쇼핑, 또 파티, 운이 좋으면 누군가의 가정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하는 긴 연휴.
“대표님은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쉽니다.”
“일찍 올게요.”
이것도 윤설의 처음일 텐데 내일도 볼 사람 있고 지겨운 장소로 돌아온다는 말에 힘까지 준다.
신경 쓰지 말고 놀다 오라는 배려의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할 것 같아 대충 고개만 끄덕였다. 통 숨길 생각이 없는지 윤설의 눈빛이 시시각각 변하고는 하는 모습을 며칠이나 보지 않았나.
얄미워 죽겠다가 돌연 섭섭해지고, 잠자코 있으면 불안하게 따라오는 시선들을 알았다. 하도 죄어서 자다 보니 자기 전에 약간 긴장하게 된 최윤의 감은 눈 위로도 시선이 따르고 한참 지나면 무거운 한숨이 가슴을 두드려주었다.
어느 날 눈을 뜨면 부서져라 휘감은 팔 대신 머리맡에 우두커니 앉아 애증 섞인 얼굴로 내려다보는 형상을 마주할지도 모르겠다. 의식하면서도 꿋꿋하게 잠을 청하고 모르는 척 무시했다.
시간 앞에 깎이지 않는 사념은 드물다. 최윤이 아는 종류로는 대개 부정적인 것들만 늘어서 있는 목록이다.
복수심, 증오, 탐욕, 집착, 아집……. 선의나 애정은 타고나서가 아니라 무던히 자신을 죽이는 자가 어렵게 획득하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도 무지하고 순진해서 가지는 맹목이거나.
윤설처럼 심신이 오래 시달린 사람이 더 자신을 마모시키며 기쁨을 구하다니 어불성설이다.
[연애하니까 좋냐?]
[너 주려고 일하는 거 맞지만 짜증 난다.]
[언제 올 건데?]
말은 논다 했으면서 습관적으로 메신저를 열었다가 쌓인 양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특히 땅따먹기의 주요 진행자인 최진의 불만이 컸다.
백여 개에 달하는 메시지. 앞으로 진짜 대표 노릇 할 거면 재수 없어 하든 말든 자리마다 다니면서 직접 하라는 둥 사정 알면서 괜히 하는 말들이었지만 누님 목소리로 생생하게 재생되는 듯했다.
최윤이야말로 바로 신약 깔고 들어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빠지기 시작했는데 이제 슬슬 떡고물과 박수나 챙기며 쉬어보려던 참에 애인 본다고 튀어버렸다는 죄가 있어 대꾸도 안 했다.
박 대표는 윤설도 신경 써서 챙김은 물론이고 은근히 소속 배우들 캐스팅 소식이나 흥행 성적을 자랑했다. 아직도 미연 씨인 배우자를 위해 한번 꺾인 자리라고 말들이 많았는데 역시 사람 키우는 일이 적성인 아저씨답다.
그러니 고집 센 어린아이부터 바람 잘 날 없던 십 대의 최윤을 키웠으려니. 돌아보면 그랬다.
굳이 운조 이름 빌리지 않고도 잘 굴러가는 엔터 쪽과 달리 약 돌리는 일은 가끔 소란을 일으킨단다. 청람과의 충돌 후 잠정적 합의가 있었다지만 양측이 계약서를 썼을 리도 없고 어디까지나 구두 합의다.
말단에서 중개인, 일개 중독자까지 몇 단계 거쳐 새거 나왔다는 소문내는데 다 아는 놈들이 전혀 모르는 척 건드려본다는 것이다. 지금은 방해할 의도는 없고 반응 보면서 샘플을 모으려는 수작일 터였다.
“정도를 몰라. 정도를.”
유 이사란 놈이 호기심과 욕심으로 회까닥 돌 만한 작자라 귀찮다. 처음에는 제 밥그릇, 암거래 줄 잡고 잔챙이 조직들 휘두르는 맛 지킨다고 과하게 날뛰는 줄 알았는데 약이면 이성 잃는 중독자들 행태랑 묘하게 비슷한 습성이다.
[누님.]
[크리스마스 전에 갑니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걸 말이라고 한다???]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나름 가장 친한 형제라고 답 보냈는데, 괴상하게 생긴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하고많은 것 중에 용케 저런 걸 뒤져서 쓴다.
[그 아기도 오니?]
[영이 언니가 잘났다 하면 보장된 미남 아니야?]
[밤 되기 전에 꺼질게. 밥만 사줄게.]
그 아기라 함은 윤설이겠다.
생각보다 가족들 관심이 크건만 회장 부부가 아무 말도 안 했나 보다. 일 끝나면 정리되는 사이라고 해도 거리낄 것 없는데 왠지 찜찜하다. 혼자 빨리 가겠다 하니 아쉬워했지만, 대표 취임 스케줄에 군말 없이 따른다고 말을 돌렸다.
역시 여기 있는 동안 실컷 게으름 피워야겠다.
유학과 휴양은 엄연히 다른 법이다. 최윤은 간만에 수영도 하고 마사지도 받았다. 호텔 로비에 천장까지 닿을 듯 높다란 트리가 꾸며지는 모습을 잠시 구경하기도 했다.
그 무렵이면 투숙객이 꽉 차있어 이런 여유를 느끼기는 힘들겠지.
“대표님.”
“어디 안 좋으세요?”
집에서 하던 버릇처럼 느긋한 시간을 즐기고 기분 좋은 노곤함에 취해있었다. 까무룩 잠들었던지 소파 위에 대충 누운 최윤이 가물거리는 눈을 겨우 떴다.
“왜 벌써…….”
잠깐 졸았대도 이 시간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차가운 손을 내밀다 어정쩡하게 멈춰있다. 시계를 봐도 이른 때였다.
지금이 이브 파티도 아니고 하니 적당한 시간인가. 가늠이 안 된다.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터무니없는 이유였다.
“그래요. 재미있었어요?”
“네. 식사는 하셨죠.”
“간단히 먹었습니다. 뭘 샀는지 자랑 좀 해줘요.”
윤설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다. 최윤이 일어나 앉자 그제야 저도 앉았다. 겨울이 생각보다 춥게 느껴져 겹쳐 입을 옷을 사고 박 대표의 선물을 샀으니 전해달라는 이야기가 매끄러웠다.
단것을 좋아하는 스태프가 몇 있어 들어간 초콜릿 가게에서 샀다며 봉봉을 꺼내 하나 까 주기도 한다. 자연스레 입가에 가져다주기에 피하지 않고 받아먹었다.
“맛있네요.”
“…대표님.”
줄곧 아무 일 없던 듯 잔잔했던 눈동자가 일렁인다. 최윤은 이 순간을 알고 있다.
속눈썹이 느리게 너울대고 곧 아주 가까워져 헤아릴 수도 없는 거리. 기울어진 코의 모양과 간혹 부딪혀 엇갈리는 콧잔등의 감촉. 입술이 맞물리면 가볍게 물거나 잘게 빨면서 서로를 침범하는 과정.
그 어디쯤에서 눈이 마주치고 멈추었다.
“괜찮겠어요?”
“네. 자주 한걸요.”
물론 그랬다. 그런 사이를 전제로 하고 주입하듯 성애를 배운 윤설에게 새삼 물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않았던 이유가 최윤에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다.
윤설은 곧 실그러진 눈매와 붉어진 귀로 답했다. 목소리가 젖기 시작했다.
“아니…요. 안 괜찮습니다.”
“이해해요. 익숙해질 겁니다.”
“아니에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모두 윤설이 처음 겪는 일들투성이인 세상을 맞아 그렇다. 최윤은 그가 울게 두었다. 무리하게 달래려 해봤자 윤설이 믿는 이유는 최윤이라 설움만 북돋을 게 뻔하다.
차가운 손으로 얼굴을 몇 번 닦다가 포기하고 눈물만 뚝뚝 떨구기에 봉봉을 하나 까서 입에 넣어주었다. 울면서도 들이미니 받아먹고 단것을 씹으면서 또 빨갛게 된 얼굴을 잔뜩 구겼다. 보는 사람이 다 설웠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최윤은 종교조차 믿지 않음에도 이따금 기억에 남는 말은 달게 삼켰다. 그렇게 회피할 수 없는 숱한 고통에 비해 실연의 상실감은 과연 그 문구대로일 거라 생각한다. 생각을 넘어 많이 보았다.
입으로는 읊지 못해도 고요한 침묵으로 대신하는 시간 동안 윤설을 향해 말해주었다. 처음은 다 강렬하고 어렵지만 한 몸처럼 살다가도 시시한 이유로 멀리 지내게 되면 습관을 잊게 되고 점차 상대가 내 일상이 아니게 된다고. 그 사람이 없어도 일상이 텅 비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며 심신이 바쁘면 하루 종일 한 번이나 생각날까 싶은 때가 찾아오고 사랑을 의심하거나, 끝을 예감하거나, 이 고비를 어떻게 끝맺어야 지저분하지 않을지 고민하게 된다고.
가볍게는 최윤와 어울렸던 파트너들이 쉽게 멀어졌고 유학 시절 죽고 못 살던 젊은이들이 몇 달이나 술에 절어 울다가도 잘 살아나갔다. 비장한 이유로 애틋하게 멀어진 연인, 부부, 부모와 자식이 그렇게 소원해지고 어색하게 나머지를 이어 붙였다.
사랑은 늘 이성을 비웃듯 예상 밖으로 도니 당신의 첫 이별도 이해하기 전에 끝나있을 것이다.
여유가 더 생기면 스스로도 묻겠지. 상황과 몸정에 둘러싸여, 보호자에게 의존하고 난생처음 맺은 사적 친밀함에 이끌려 너무 쉽게 끌린 것 아닌가 하고. 쉽게 인생을 내거는 스스로가 얼마나 무모했던가, 돌아보며 안도하리라.
소리 내어 말하지 않기를 잘했다 싶을 정도로 흐느낌이 길었다. 어째 한번 울지도 재차 따지지도 않고 태연스레 곁을 지킨다 했다.
“일어나요. 아주 씻는 게 좋겠어요.”
더 두고 보다가는 울다 지쳐 잠들까 싶어 일으켜 세웠다. 겉옷을 벗겨 아무렇게나 걸어두고 손을 씻겨주고 있으니 미약한 술 냄새가 났다. 초콜릿 봉봉에 들어있던 것보다 진하고 끈덕졌다.
수온을 적당히 따뜻한 쪽에 맞춰주고 더 건드리지 않은 채 문을 닫았다. 기꺼이 씻겨주기에는 두 사람이 조금 멀어졌다. 그러기를 바랐다.
* * *
멀리 한국에서 만나러 와놓고 컵라면을 주다니 생뚱맞다 한 적이 있다. 윤설은 잘 찾지도 않던 음식이라 하필 라면일까 하던 때가 무색하게 두 개를 다 먹어버리고 한인 슈퍼까지 알아뒀다.
하나는 볼썽사납게 펑펑 울고 난 다음 날 스튜를 깨작대다 눈에 띄어 먹었고, 그다음은 최윤을 배웅하고 온 날 지나 먹었다. 혼자서 룸서비스로 시킨 와인이 몇 병인지 보고 기절할 뻔했다. 청승도 그런 청승이 없었던 데다 윤설로는 처음으로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신 날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간은 무탈하게 흘러 촬영은 일정대로 잘 진행되었다. 연말 연초에 휴식을 가지고 다시 재개되니 윤설의 수술 일자에도 걸릴 게 없다.
카메라 밖에서는 온 도시 안 가본 곳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적극적인 일행들 덕에 울적함과 별개로 많이 쏘다녔다. 주요 관광지와 접근성이 괜찮은 맛집은 대강 다 가보았고, 이브에는 감독의 집에 초대받아 왁자지껄한 파티가 있을 예정이다. 한 주 지난 연말 낀 때에는 뮤지컬을 보기로 했다. 가만히 있어도 불려 다니다 보면 훅 시간이 지나가 새해가 될 것 같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꾸만 지나친 상상을 하고 불안해하는 가운데 그중 하나쯤은 결국 사실이 되고 마는 그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껏 섞여들어 온갖 생소한 처음에 부딪히다 보면 한바탕 놀이 기구를 탄 것처럼 어지럽기도 했다.
즐거웠다. 우형이 가끔 사연 그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주접을 떨 만큼 간절했었다.
그러나 컷 사인이 지나간 후처럼, 스케줄 끝나고 집에 남아 덩그러니 시간을 채우려 하면 막막했던 날처럼 가져온 행복을 온전히 품고 있지 못하고 최윤의 그림자 아래 주저앉았다.
그는 머무는 마지막 날까지 무던하게 굴었다. 윤설이 마음을 채 숨기지 못해도 전처럼 대해주었다.
곁에 있으면 이끌어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 스스럼없이 기대는 행동에 나중에는 고백한 걸 후회하기도 했다. 더 늦게 말했더라면 선을 긋지 않고 실컷 흔들어놓던 그대로이지 않았을까. 불현듯 치미는 생각이 다 미련이었다.
끝을 막연히 인지하고는 있지만 ‘어쩌면’이라는 희망을 가진 채로 입 맞추고, 잠결에 맨 등이나 허리를 쓰다듬고, 심심찮게 서로에게 몸을 내주어 뜨거운 열기와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를 느꼈을 텐데. 괜한 실수로 그마저도 놓친 기분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섹스가 아니면 운동량으로라도 성질을 풀던 최윤이 끝까지 농담도 않고 조용했다. 공동의 목적을 의논하는 대화 외에는 맞부딪는 살갗이야말로 가장 잦은 교감이었는데. 돌연 사라진 행위에서 최윤이 그은 선을 느꼈다.
분명히 좋아는 한다고 그랬었는데. 부담스럽게 굴어서 적당히 좋아하고, 윤설에게 그를 만족시킬 기회도 거둬버리기로 한 걸까.
비약인 줄 알았지만 꼬리가 길어지는 생각을 끊을 길이 없었다.
“우형아, 내가.”
급기야는 창피함을 무릅쓰고 우형에게 어물어물 돌려서 운을 뗐다가 순식간에 간파당했다. 이야기가 답답하다며 술을 마시기 시작해 한 잔, 두 잔 하던 것이 나중에는 윤설이 마시는 양이 병으로 늘었다. 컵라면 여섯 개들이 박스가 터무니없이 비싸다면서도 하나씩 사 들고 나올 일이 진작 있었던 것이다.
“야, 나는 그 사람이 그래도 양심은 있구나 싶어.”
“왜?”
“그 사람이 그냥 도와준 건 아니잖아. 솔직히 자기 거 다 챙겼고.”
“그야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어어. 그렇기는 한데 거래는 거래고, 어? 어물쩍 네가 좋다 그런다고 냉큼 사귀기에는 쫌.”
“뭐가 다른데?”
“인생 경험할 거 다 해본 사람이 갓 대학 들어간 애 사귀면서 결혼 이야기 하는 거 있잖아. 뭔가 불공평하고 나쁜 것 같고.”
우형은 뜻밖에도 최윤과 비슷한 뉘앙스로 말했다. 최윤이 말할 때는 너무나 엄숙하고 진지한 언어로 당신 자유를 함부로 내주지 말라 하여 느끼지 못했던 의미가 이런 것이었을까.
윤설은 더듬더듬 주워섬기면서도 최대한 설명하려 애쓰는 우형을 멀거니 바라보며 술만 홀짝였다. 순식간에 반박할 만한 말들이 목 끝으로 차올랐다.
윤설은 삼십 대는 되었고, 사회생활을 못 한 것도 아니고, 최윤을 선택함으로 인해 일을 포기하게 되는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 여럿 만나볼 기회를 놓치는 것도… 애초에 원하지도 않는다. 자란 환경이 달라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최윤에 비해서는 물정을 모르는 줄 알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린애 취급은 너무했다.
“…아무튼 그 사람이 평범하지는 않잖아?”
“그게 왜.”
“너나 나나 굿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심란한 일에 이골이 났는데 굳이 그런… 일에 얽힌 사람 만나면 걱정되지.”
“그래?”
“그래.”
신변에 관련된 걱정을 해준 거라면 또 기분이 괜찮은 듯했다. 그러다가도 한잔 마시고 우형에게 감정을 토로할라치면 걱정한다는 점까지 서운할 거리가 된다.
내가 못 미더운가. 취기가 올라옴에 따라 어지러운 생각들이 푹 젖어 둥둥 떠다녔다.
우형의 말도 조금 더 부드럽고 다정한 위로다 뿐이지 결론은 같다. 윤설이 후회하게 될 거라고. 이미 이십 대가 통째로 묶여있었던 윤설이 또 다른 젊은 날을 아까이 허비했다며 슬퍼할지 모른다고. 최윤이 그렇게 나쁜 선택지라고.
고개를 주억거렸으면서도 제대로 납득되지는 않았다. 패가망신도 남의 이야기지 자신은 아닐 거라 여기는 도박꾼들 모르냐며 한숨 폭폭 쉬는 우형이 잠깐 미웠다.
* * *
윤설은 가끔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을 부러워했다. 그의 사랑은 두 시간 남짓한 영화 속에서도 해피 엔딩을 그리며 끝난다.
처음 그를 연기하기 시작했을 때는 비슷한 미래를 희망했기에 자연히 기쁨이 녹아났다. 한참 촬영에 물이 올랐을 시기에는 그의 슬픔을 빙자해 매일 괴는 설움을 눈물로 흘렸다.
모두가 윤설의 첫 로맨스 연기를 칭찬했다. 감독은 훌륭한 연기를 마법 같은 이야기로 바꾸어 선보일 생각에 들떠있었고, 자연히 현장 분위기도 좋았다. ‘때 되면 잊게 될 일’ 하나로 슬픈 사람은 윤설뿐이었다.
크리스마스와 연말 사이의 어수선하고 들썩이는 분위기 가운데, 한국 언론에 은성의 향방을 발표하는 기사가 나왔다. 한 해 내내 뉴스에서 빠진 적이 없던 때가 언제인가 싶게 능청맞은 등장이었다.
원래 그러기로 정해져 있었다는 듯 ‘비리와 부도덕한 행태를 일삼던 경영진 일가의 전원 사퇴 후’ 새로운 대표와 새로운 수뇌부가 클로즈업된 사진이 함께였다. ‘실무진은 대체로 변동 없이 유지되며…….’ 다음 줄은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언뜻 보이는 사진마다 최윤의 손에 자리한 반지가 위안이었다. 다시 한번 원하는 것을 거머쥔 그의 얼굴에 여유와 자신감이 비친다. 어쩐지 조금쯤 더 훤해 보이는 인물에 호감을 표하는 사람도 많겠지.
일 년 내내 열애를 떠들었어도 업계 뒤에서 들리는 소문은 그런 거 다 소용없더라는 경우가 꽤 있었다. 차라리 반쯤 유부남처럼 기사 나는 편이 그나마 덜할 것 같아서, 그의 말대로 다음 여름까지는 함께할 거라는 말만큼은 그대로인 것 같아서 한숨 돌렸다.
[한국에서 쉬었다 다시 나간다고 했었죠. 마음 바뀌면 말해줘요.]
[출입국과 관계없이 윤설 씨와 동행한 직원들은 한번 바뀔 겁니다. 내내 가족을 못 봤으니 연초 휴가로 대체할 겸.]
[수술 전에 가려야 하는 약물이나 음식 있으면 미리 알려주고요.]
간간이 주고받은 메시지로도 가까운 일정을 계속 상의했다. 윤설을 향한 직접적인 농담은 거짓말처럼 덜어냈다지만 크리스마스에 가족 모임이라 무척 지루했다는 엄살 등이 짤막하게 덧붙기도 했다. 지금은 주에 몇 번이지만 새해부터는 꼬박 출근해야 하는데 옷차림이 거북해 붙어있겠냐는 불평 따위도 흘러들어 왔다.
윤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게 좋았다가 싫었다가 변덕 끓는 감정을 가누지 못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도 ‘어떻게든’이라는 답이 전부일 자신이 답답했다.
내내 방문하던 클리닉에서도 난색을 표했다. 실의에 빠진 채 겪는 감정 기복이 원인인지 결과인지 페로몬이 요동쳤다. 그래프로 치자면 횡보하다 뚝 떨어지고 지지부진하게 잔물결만 보이며 주주들 발목을 잡아끄는 주가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을 변화의 연속이다.
“…수술을 미루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도 있어요.”
“미룬다면 얼마나요?”
“최소 반년 정도요. 어떤 방향으로든 일정한 범위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지금 같은 상태에서는 위험합니까?”
“결과를 장담할 수 없어요. 진행은 가능한데 가장 무난한 조건에서도 후유증이 남는 수술인걸요.”
반년이면 요란한 착각이 한풀 꺾여있든 외사랑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든 결론이 나있어 차라리 부정적인 수치나마 변동 폭은 작을 테니 미뤄보자는 뜻이었다. 이제 와 미루기에는 너무 비참한 이유였다.
몇 번 설득해 보려던 의사에게 돌려줄 답이 없다. 당장은 수술 전이니 약을 조금 줄이면서 안정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할 거라는 말이 더 무거웠다.
[한국에서 쉬다가 수술받겠습니다.]
아예 최윤에게 제 결심을 알려 번복하지 않기로 한다. 비행 편이며 교체될 경호 팀이며 다 윤설의 일정에 따라 움직일 테니, 그즈음에는 달리 뭘 하지 않아도 물 흐르듯 현지 기관에 가게 될 터였다. 여기서 그랬듯 타성으로 휩쓸리다 보면 다 끝나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본다.
[새해에 만나요.]
[한국이 더 춥습니다. 올 때 조심해요.]
몸이 불편해 잠들었다 새벽에 깨서 다시 잠 못 이루는 날마다 어둠 속 빛나는 액정 속 새 메시지를 보고 멍하니 앉아있는 일이 서너 번, 아니 더.
깨어나 두꺼운 커튼을 비집고 들어오는 빛에 낮인가 밤인가 하노라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굳은 얼굴의 명오일 때도 있었고 우형일 때도 있었다. 갑자기 식당에 내려오는 것도 뜸해지고 혼자 외출하지도 않으면서 두문불출인 윤설을 걱정하는 말들이 오갔다.
잘 어울렸던 스태프들과도 간신히 인사만 하고 차례차례 귀국길에 오르는 뒷모습을 보았다. 그마저도 다는 기억이 안 났다.
“뭘 좀 먹어야 약도 먹지.”
“그거 다 먹으면 안 돼.”
“애가 반쪽이 되게 생겼는데 있는 것도 못 먹어?”
“수술 더 미룰 수는 없잖아.”
윤설의 곁에서 오래 챙겨주며 어지간한 사람보다 2차 성별자에 해박해진 우형도 원인을 몰라 우물쭈물했다.
약이 안 맞아서 시름시름 할 때와도 다르고 러트 억제 타이밍이 아슬아슬해서 조금은 앓아야 하는 상황도 아닌데 늘 미열이 있었다. 크게 잘못되지는 않았는데 어딘지 불안하고 고생스러운 증상들이 덕지덕지 붙어 퍽 답답해 보여 병원을 같이 가기도 했는데, 그놈의 수술 전까지는 다 참아야 한단다.
갑자기 이렇게 안 좋아질 이유가 뭐가 있냐며 들들 볶아도 윤설이나 의사나 수술 가능한 상태를 위해 기존에 먹던 약을 줄여야 했다, 다소 안 맞는 약을 먹어서라도 형질 제거가 쉬워지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애매하게 설명할 뿐이다. 우성 인자인 만큼 쉽지 않다 하면 일견 납득이 되기도 하는데 둘만 아는 윤설의 실연 탓도 있을 게 분명했다.
“너 되게 변태 예술 영화 만드는 놈들이 환장할 것 같아, 지금.”
“…그게 뭐야.”
“웃냐? 낯빛 안 좋고, 불우한 사연 있고, 생활은 방탕한 주인공의 냄새가 난다.”
“김우형 웃긴다, 진짜.”
꼭 웃기려고, 기운 차리게 하려고 뻥튀기한 농담은 아니었다. 생김도 그대로고 살이 갑자기 빠진 것도 아닌데 사람이 그늘져 얼굴에도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영화 잘 찍어놓고 여행 신나게 했으면서 막판에 중요한 일 앞두고 이게 뭔가.
“너 그러고 한국 들어가?”
“…….”
“최 대표 만나기는 할 거 아니야. 그 얼굴로 봐?”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다가 최윤 운운하자 바지런 떠는 모습에 혀를 끌끌 차면서도 안쓰러웠다. 저리 시름시름 앓으면서도 잘 보이고 싶은가 보다. 우형에게는 당장은 그 편이 더 나아서 등짝이나 두들기고 싶은 걸 모르는 척 입히고 먹였다.
* * *
걱정이 무색하게도 새해 한국 땅을 밟는 자리에 최윤이 마중 나와있었다. 교대할 경호 팀과 자연스럽게 차를 바꿔 타면서 소개는 어디든 도착하면 하자는 말로 시작해 그간의 안부를 묻는다.
윤설은 예상보다 더 매서운 칼바람에 차가워진 얼굴을 문지르며 이미 알고 있을 이야기를 처음처럼 말했다.
“새벽까지 놀고먹는 것도 생각보다 괜찮죠?”
“…네. 다들 맨날 피곤하다 했는데 며칠을 그러더라고요.”
“피곤해도 놀면서 피곤한 건 기분이 다르니까요. 잘했네요.”
최윤은 그다지 변한 곳이 없어 보였다. 별로 내키지 않다던 출근 복장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기로 했는지 재킷 대신 스웨터를 겹쳐 입고, 느슨하게 넘긴 머리에 피어싱을 제법 많이 뺐다.
그뿐이었다. 한 해를 넘겼다고 더 어른다운 태가 난다 소리를 듣다 온 윤설이 그의 몫까지 수심을 덮어쓴 듯하다. 다행히 최윤의 눈에는 전보다 덜한 데가 없는지 에둘러 컨디션을 묻는 말은 없었다.
“윤설 씨 집으로 갑니다.”
“사무실은 안 가봐도 됩니까?”
“어느 쪽이요. 나 말입니까?”
“그것도 그렇고 박 대표님도 뵌 지 오래돼서요.”
“비행시간 길었으니 적어도 내일요. 회사에서는 그런 거 따지던가요?”
“아닙니다. 편하게 해주세요.”
“그럼 됐습니다. 나도 오늘은 다시 안 들어갈 생각으로 나왔고요.”
적어도 하루는 같이 있겠구나. 그 생각부터 들었다.
전에도 우형을 통해서 집안 관리를 맡기는 업체가 있었지만 윤설과 우형, 둘 다 자리를 비운 지 몇 달인데 멀끔하게 정리가 돼 있을지 걱정이다. 아무리 잘해놓은 집이라도 사람 안 살면 금방 생활감이 사라지고 살풍경해진다던데. 이런 계절에는 난방도 꾸준히 해야 발바닥 얼어붙는 불상사를 면할 것이다.
급한 대로 연락해서 환기랑 난방만이라도 부탁해 볼까 하며 핸드폰을 뒤지고 있자 최윤이 빤히 바라보았다.
“별건 아니고 집을 오래 비워서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그거요. 업체가 매주 뭘 보낸다고는 하던데요.”
“손님들 있다 가실 텐데 춥지 않으면 좋겠네요.”
“손님? 직원들이요? 초면이니까 손님으로 칩시다.”
윤설의 걱정을 듣고는 새삼스레 별걸 다 신경 쓴다는 듯 얼떨떨한 기색이다. 그러더니 말 나온 김에, 하고 운을 띄워 그 집은 보안에 집중해야 하는 형편 따라 구했지만 외진 곳에 있지 않나 한다.
이참에 새로 알아보면 어떻겠냐고 바람을 넣었다. 동네 조용한 거야 다른 곳도 얼마든지 있고 적당히 주민들 편의 시설이며 공원, 카페 늘어선 프리미엄 붙은 단지나 단독 주택 밀집 구역에 연예인들 많이 산다 들었다. 차로 소속사 가기도 훨씬 편할 거라는 등 차분한 조로 말하지만 내용만 듣자면 중개업자같이 매끄러웠다.
“생각해 봐요. 어려우면 같이 골라줄게요.”
그런 장점들이야 어디든 적당히 비싸고 남들이 좋다는 데면 마찬가지겠거니 하면서도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좋은 기억이 있는 집도 아니었다. 무사히 잠을 청할 수 있으면 다행이던 날들이 어딘가에 쌓여있겠지. 불안을 갉아먹던 환청, 끝을 모르고 최악만을 가정하던 찰나들이 곰팡이처럼 슬어있을 거라 믿었다.
‘그런 집’이어도 막상 도착해 발들이고 보니 돌아온 기분이 들기는 했다. 짐을 대신 옮겨준다고 장정 몇이 뒤로 선 가운데 가장 먼저 들어서면서 무서울 일이 없어 그런지도 모른다. 우형을 다른 차로 바래다준다는데 군말 없이 간 것도 달라진 점이다.
따뜻하다고는 못 해도 그럭저럭 온기가 남은 바닥에 슬리퍼를 있는 대로 찾아 내주고 물을 올렸다. 간간이 짐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세탁이 필요한지 묻는 말에 손사래 치며 찬장에서 뜯은 적 없는 차를 찾았다. 최윤은 막 집에 온 사람이 무슨 인사치레에 바쁘냐며 한마디 했지만 윤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그래서 그들은 따뜻한 차를 테이블 가득 올려두고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명오 대신 낯선 얼굴이 팀장인 조였다.
전처럼 밀착 경호가 필요할까 의문이었는데 답은 ‘그렇다’였다. 짧게는 수술 후 회복 기간까지, 길게는 예정된 육 개월에 마침표를 찍기까지. 이전 사람들이 그랬듯 말수 적은 이들이 운 좋으면 해외 촬영지도 따라가 보겠다고 가벼운 농담을 해 대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같은 층의 집도 여전히 최윤의 소유라 언제든 최소 인원 이상 가까이 있을 테니 염려 마시라는 당부와 함께 빈 찻잔을 차례로 개수대에 넣은 뒤 사라지는 뒷모습이 더 희한한 광경이었다.
“이번 달 출국에는 내가 챙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연말 연초가 바쁘니까요.”
“네. 심란하게 하는 사람은 없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둘만 남아 너른 집 안에 앉아있다. 이때를 기다린 것도, 미루고 싶었던 것도 같다. 시종일관 친절을 베풀면서 자신이 없는 편이 낫지 않을까 툭 뱉는 사람을 보고 싶어 하고 만나고 나서는 무슨 말을 할까 무섭고. 마음이 쉽게 흔들리듯 페로몬도 멋대로였다.
의사가 말하기를 착각에 빠진 몸은 각인 대상이 있다는 사실에 열정적으로 다량의 페로몬을 쏟는데, 받아줄 상대가 모르니 멈추지를 못하고 탈진할 때까지 신호를 보내고 있을 거란다. 익숙한 감각으로 제어할 수 없어 계속 피로하고 상대로부터 달래줄 만한 페로몬을 받지도 못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듯하던 알파 인자는 최윤과 함께 있을 때의 정서적 안정감에 쌍방 각인인가 하며 수그러들었다가 떨어져 속앓이하면 다시 무언가 이상하다고 외치는 멍청한 시스템을 가졌다.
“혈색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열이 있네요.”
사실 윤설도 제 몸 상태에 둔해져 마냥 페로몬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최윤의 손등이 닿았다 떨어지기 전까지는 주체하기 어려운 감정과 약간의 피로로 착각하고 있었다. 시간상으로는 약을 먹을 때가 가까워졌는데도 아예 떠올리지 못하고 그런가 보다 했다.
“일찍 자야겠어요.”
“잠들면 가실 건가요?”
“…있을 겁니다.”
우선순위는 수술 일자까지 체력을 최대한 보전하는 것인데 입이 멋대로 움직여 순서를 바꿨다. 윤설의 줄지어 선 과제들 중 가장 어쩔 수 없는 일부터 해결하라며 아우성이다.
자연히 내일 간다는 최윤의 확답을 듣고도 갈아입을 옷까지 찾아준 다음에야 욕실에 들어갔다. 언뜻 저럴 때가 아닌데 싶은 눈빛을 읽었지만 그래야만 마음이 놓였다.
“대표님.”
“네.”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너무 크다는 것 말고 다른 이유도 있을까요?”
“음. 우리 집 노인 양반들 반대요.”
각자 베개나 팔을 대고 누운 자리에서였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춥지는 않은지 오가던 대화 사이를 비집고 기어이 되묻는다.
“어찌 보면 편협한 사고지만, 그분들은 2차 성별자 칠순 넘도록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극과 극의 처지인 몇몇이 전부였다. 경처럼 불운한 처지로 팔리던 자들 아니면 어느 지체 높은 집에서 숨겨 기르다시피 하는 소문의 주인공들이 그 시절 사람들이 알 법한 알파―오메가였다.
“형질은, 제거하잖아요.”
“그렇죠. 다른 이유가 마땅찮으면 포기하는 쪽으로 하려고요?”
“…일 년에 한 작품만 하면 괜찮나 생각한 적은 있습니다.”
“윤설 씨 직업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했으면서요.”
거짓말이 아니라 실제로도 회장 부부가 반대할 이유는 뻔할 뻔 자인데 써먹지도 못하게 됐다. 그러나 거절하는 사람이 구태여 변명 많을 필요는 없어서 최윤이 선선히 대답하고 발을 까닥이는 모양이 가벼웠다. 윤설이 무어라 하든 나중에 책잡힐까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람처럼 군데군데 짚고 넘어가는 점이 얄미운 한편 서운해 죽을 지경이다.
“다른 이유는 없고요?”
“이유야 만들자면 끝도 없죠.”
“그러면 말해주세요.”
속상하니 그만 알아도 될 일을 계속 입에 올리는 이유를 스스로도 설명할 길이 없다. 마음이 튀어 오를 때마다 순서를 매겨 포기시키려고. 혹은 더더욱 속상하고 서운해서 정떨어지기라도 할까 싶어서. 실은 더없이 완벽한 논리임을 알면서도 이해 못 하겠다고 고개를 쳐드는 윤설의 알파, 애정, 미련, 그에게 향하는 모든 부분 때문일지 모른다.
“윤설 씨는 은성에 대해서도, 운조에 대해서도 남들보다 많이 압니다.”
“…….”
“그게 당연한 위치에 있었고, 불가피했어요. 하지만 더 아는 건 곤란합니다.”
“제가 위험해져서요?”
“그렇기도 하고 정보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아요.”
불신이 당연한 사람이다. 가족도 아니고 그들처럼 살 것도 아니면서 ‘너무 많이 아는’ 윤설은 알파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위험해진다. 전에 말한 바랑 같지 않냐고 하려다 너조차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함의가 더해진 바람에 베개만 움키고 말았다.
언제나 사람의 배신을 전제로 사는 삶은 그야말로 불신 지옥임을 안다. 윤설도 우형이 아니면 누구든 자의로 또는 타의로 윤설을 내거는 사례를 숱하게 겪었다. 하지만 사랑을 구하는 이조차도 그래야 하나.
“윤설 씨가 그럴 생각 없어도 윤설 씨를 통해서 말 한마디, 작은 증거를 얻는 사람들이 분명히 생겨요.”
“지금까지는 그런 주의 준 적 없으십니다.”
“지금까지는 윤설 씨가 최소한의 활동만 하고 과한 경호를 받을 당위가 있었잖습니까.”
“앞으로는.”
“같은 이야기로 돌아가겠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마음 편히 사는 삶이 아니게 된다고.”
“제가 정하는 것도 안 되나요?”
“안 됩니다.”
그런 게 어딨어.
최윤은 윤설의 신뢰와 애정을 돌려주지 못하니 부당한 관계라 싫다, 윤설이 고대하던 삶을 포기하고 묶여야 하는 것도 싫다,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싫고 그를 따라올 크고 작은 변수 따위 마음에 두기도 싫다고 하는 것일까.
윤설은 불현듯 치미는 억울함에 손을 뻗었다. 본인이 뭘 한다는 자각도 없이 움직이고 보니 최윤을 두 팔 아래 두고 무게로 누르고 있었다.
실수다. 아니, 실수라 하기 아까운 갈증이 있었다. 아무것도 그를 납득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또 내 손목에 멍을 남기고 싶습니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쉽게 망가지지 않으니 억지로 가져보고 싶어요?”
“아니, 저는…….”
“그것도 아니면 때려도 좋아요.”
사실 늦었지.
혼잣말처럼 권유하면서도 여유로운 얼굴에 잠시나마 안타까움이 스쳤다. 조금 덜 좋아했다면 조롱이거나 동정이라 피가 차갑게 식었을 텐데.
윤설은 무너지듯 최윤 위로 쓰러져 짐이 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게 그런 말을 하세요.
볼품없게 떨리는 자신의 목소리보다 최윤의 숨소리와 심장 소리를 더 귀 기울여 들었다. 씨근대고 있자 뜻밖에도 등을 토닥여 준다. 윤설은 그런 걸로 잠들지 않겠다는 듯 끊임없이 호소했다.
저한테는 그런 말 하시면 안 돼요. 알잖아요. 원하지 않는 관계를 얼마나 끔찍해하면서 살았는데.
대표님이 나한테 그래도 나는 대표님한테 못 그래요. 아니까 그러시는 거 압니다.
너무해요.
나한테 하는 말 전부.
좀 불공평하면 어때서요. 항상 그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대표님은 평생 아무도 곁에 안 두실 거예요?”
* * *
결과적으로 윤설의 수술은 절반만 성공했다.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로 윤설은 여전히 페로몬의 영향을 받는 존재였다.
각인을 억지로 깰 엄두조차 못 내는 수많은 일방통행이 절박하지 않아 그러겠는가. 평생 달리 자라온 타인에게 장기를 하나 내주었으면 더 오랜 시간을 들여 원만한 이별로밖에는 풀 수 없어 그렇다. 섣불리 시도했다가 영구 장애나 후유증을 앓느니 다시는 사랑에 목매지 않는 편이 낫다 체념해 버리는 것이다.
기관에서 배정해 준 집도의는 일반적인 이론 외에도 데이터가 남은 갖가지 이유로 완전 제거를 거부했다. 2차 성별자들의 인권 보호와 신체적 고통을 해소한다는 목적 아래 시행한다는 규정이 있고, 윤설도 동의서에 사인한 내용이었다.
진짜가 아닌데도 위험합니까?
못내 아쉬워 자신의 각인이 명백한 페로몬의 착각이요, 심리 상태에 의한 오류라 인정해도 답은 같았다. 위험하지 않으면 애초에 처방전도 필요 없었을 거라고. 원점이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의사가 정한 범위 내에서라면 깔끔하게 처리돼 앞으로 윤설이 겪을 불편은 눈에 띄게 줄었다. 열성에 가깝게 희박해진 알파 인자는 더 이상 급격한 통증이나 현기증 따위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다소 불편하고 존재감이 남아 찜찜할지 몰라도 이전에 비하면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수술을 두 번 할 수는 없어도 지속적으로 시술받아 남은 페로몬까지 말려버리는 방법도 있다. ‘각인이 사라지면’ 다시 요청해도 좋다는 조건이 달려있을 뿐이다. 이게 최선의 결과였다.
허탈했다가도 한편으로는 하루빨리 돌아가라는 듯 난폭하게 굴던 페로몬이 우스울 만큼 약해져 홀가분했다.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지만 이렇게 약한 알파 인자를 노리는 자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빛난다고 다 금이 아니듯 주웠다가도 도로 버릴 미미한 수치, 보통 사람들과 엄청나게 다른 무엇도 아니다.
최윤이 말한 대로 그와 떨어져 별개의 삶을 꾸려도 앓아누울 일은 없겠다. 하지만 그를 완전히 남처럼 생각할 수 없는 한은 곧잘 불편하고 무거운 기운이, 따끔한 감각이 불쑥 윤설을 건드리며 물을 터였다.
그래서 괜찮으냐고.
* * *
최윤은 윤설의 비밀을 모르는 채로도 자주 골이 아팠다. 단순히 당장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산재해 있어서라거나 사건이 연이어 터지며 4중 추돌 현장 한복판으로 몰아넣는 듯한 아수라장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유형의 문제가 뿌리 뽑히지 않아서였다.
한시적 연인 딱지가 붙은 윤설이 거슬리는 방향으로 튀어댔다. 아니, 가끔은 가만히 버티고 있어서 탈을 냈다.
고대하던 수술을 잘 받고 와 정양했고 확실히 먹는 약이 줄었다. 고작해야 두세 알에 아침이나 저녁 한 번. 올해 처음 입국했던 때와 달리 혈색도 뚜렷하고 장시간 운동이나 격한 운동을 삼가라는 주의 사항을 빼면 오히려 사무실에 처박힌 최윤보다 팔팔했다. 묘하게 서운한 듯한 태도, 가끔 새침하게 비뚤어지는 말이야 어느 쌀쌀한 밤 이후로 익숙한 것이었고 그럼에도 거리 두지 않는 끈질김도 그대로다.
은성으로부터의 해방. 타고난 체질로 겪을 위험의 제거.
자기 목적을 다 달성해 놓고 되레 최윤을 욕심내는 것이다.
곰곰 생각하다 이제 좀 정이 떨어졌을까 하고 보면 아직 아니라는 듯 녹진한 시선이 늘 같은 결론으로 최윤을 떨어트렸다. 기가 막혀 웃다가도 골치가 아팠다. 치러야 할 대가가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닳도록 일러줬는데. 겁먹으라 과장한 게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래서 윤설이 회복된 이후로 먼저 찾지 않았다. 매일 보지 않는 데다 눈에서 멀어진 사이 여러 사람과 어울리다 보면 달리 생각하려니. 마주 앉아있으면 박대할 수도 없는데 고집스러운 속내를 감추고 반들반들 고운 얼굴 보고 있기도 그랬다.
굳이 따지자면 욕심을 죽이는 쪽이 더 어렵지, 누구는 쉬운 줄 아나. 가끔 부아가 치미는 마당에.
마침 처음인 만큼 세부적인 부분은 다시 배워야 하는 회사 일도 그랬고 너무 잘 알아서 벌인 까트난 사업도 수시로 건드리는 놈들 천지라 한가할 틈이 없어 망정이었다. 자신도 바쁘고 윤설도 영화 마무리하느라 바빴다.
와중에 윤설이 연초부터 출국했다 들어와서도 병원이나 다니며 틀어박혀 있던 걸 가지고 유산이니 뭐니 하는 기사가 날 뻔했다. 일부러 알파인지 오메가인지 불명으로 두었더니 한 번씩 추측이 도는 모양이다.
미리 안 덕분에 풀 데 없는 성질까지 더해 그야말로 작신작신 밟아 조져놓았다. 아무리 남성 오메가라 해도 지난 가을에 영화 찍으러 갔으면 촬영 기간 안에 배가 불렀겠다. 하여간 쓸데없는 생각들은 기상천외한 방향으로 잘들 했다.
그러는 내내 다소 불편하게 입고 다니며 출근하고 업무 보고, 자연히 거리 있는 곳까지 가야 하는 야외 운동은 횟수가 줄었다. 대신 밤마다 누구를 만나 질펀하게 뒹구는 것도 아니다.
하려면 하겠는데 대외적으로 임자 있는 몸인 데다 뭣보다 그럴듯해 보이는 남자도 없었다. 그냥 ‘괜찮네, 잘생겼네, 볼만하네’가 전부로 죄다 싱겁고 시큰둥했다. 욕구 불만은 맞는데 짜증 폭폭 내며 죽이는 중인 연애 감정 따라 몸이 제법 순정파처럼 구나 싶었다.
전체적으로 다 답답했다. 몇 달 사이 신제품이 ‘죽여주는 그거’로 통하며 값이 꾸준히 뛰었다. 의도한 호재에 빼돌려서 카피 만들어보려고 따라붙는 작자들을 두더지 게임처럼 때마다 쳐내려니 다 같이 먼지 나게 바쁘다.
처음에는 잔챙이 조직에서 운반책을 건드렸고 그러다 잡도리하니 고객으로 가장하고, 집안깨나 알아준다는 젊은이들 위주로 소개받은 사람한테나 다리 놔준다 하니 주춤하다 연예인들 낀 자리로 샜다.
어차피 원재료를 못 대서 못 만들 텐데 환장을 하고 쫓으니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어떨지. 다 독점 공급이 자리 잡는 과정이기는 했다. 시간이 약이다.
다만 걸리는 것은 친구가 늘었다는 윤설이 혹여나.
─대표님, 손님 오셨습니다. 지금 올라가고 계셔요.
“…손님?”
예정 없는 방문객은 철저히 가려 퇴짜 놓던 직원들이 엘리베이터 태운 뒤에야 연락을 넣는다. 십중팔구 감당 안 되는 나리들이나 동생 보러 왔다고 간식 찔러주며 쳐들어온 손위 형제들인 경우다. 하필 머리 굴려야 할 타이밍에 누군가 싶었다.
“잘 지내셨어요.”
“연락도 없이 무슨 일입니까.”
“일이 있어야만 오나요.”
뭐가 잘못돼서 급히 찾아온 건 아니라는 소리다.
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낮은 소파로 향했다. 윤설이 코트를 벗어 곱게 접어두고 마주 앉는 짧은 사이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비서실 직원이 잽싸게 차와 다과를 올려놓고 인사한다. 윤설이 감사하다고 대외적인 미소를 지어주자 절로 얼굴에 웃음이 피는 것이, 귀엽고 괘씸한 신참내기들다웠다.
허락도 없이 들여보내, 쫓을 사람인지 아닌지도 안 묻고 먹을거리를 아주 수북하게 쌓아 대령해, 상사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끼리 신났다.
뭐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이성적으로야 당연했다. 윤설은 요란한 스캔들의 주인공이었고 누구나 얼굴을 아는 연예인, 대표의 정다운 애인이니까 겸사겸사 가까이 보고 싶고 짹짹대며 지루한 회사 생활 중에 이야깃거리 삼고 싶겠지. 참아야 한다.
“…영화 잘됐더군요. 벌써 수상 이력이 생겼다고.”
“네. 덕분에요.”
“윤설 씨가 잘하고 싶어 했고 잘된 거죠. 하반기에 메이저 영화제에도 후보군까지 가겠던데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해외 캠페인 일정이 생기지만 않으면요.”
“부르면 가야지, 왜요. 몸도 다 나았잖습니까.”
“국내 스케줄 잡는 중이라… 그보다 우형이 챙겨주셨더라고요.”
“내가 한 건가요, 어디. 박 대표가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경력도 충분하잖아요?”
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그나마 할 이야기가 없지 않아 다행이었다.
윤설이 출연한 영화가 규모는 덜해도 명성은 있는 국제 영화제에서 상을 탔다. 인디 영화나 예술영화, 다양한 주제의 저예산 작품에 두루 관심 있는 쪽에서 수상했으니 국내 개봉에도 힘을 실어줄 것이다.
드라마가 엎어진 대신 영화로 첫 로맨스를 성공하면 다음 작품 고르기에도 더 좋다. 박 대표가 이미 실컷 자랑하고 가서 궁금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안다.
와중에 윤설의 불안과 신체적 제약도 해소됐으니 우형을 전담에서 빼면서 직급을 올려준다고도 했었다. 연차 낮은 직원에게 인수인계하면서 실장 달면 윤설도 괜찮고 모양새도 그럴듯하겠지.
“맞습니다. 언제까지 제 매니저만 하기에는 아까우니까요.”
“각자 자기 커리어 다시 설계하는 시기가 옵니다. 적당한 때네요.”
“…….”
일과 관련된 얘깃거리도 떨어지니 잠시 침묵이 흐른다. 두 사람은 차가 식기 전에 조금씩 마시며 서로를 살피고 의미 없이 너른 사무실과 창밖을 둘러보았다.
“대표님.”
“네.”
“일부러 저를 피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대표님 마음도 변한 게 없고요.”
“…네.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잔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는 모양이 차분했다. 최윤은 내심 또 포기를 모르는 말이 나오겠다 싶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몇 달 내내 같은 물음, 같은 답을 하고 있지 않냐고 따질 수도 없고.
“그럼 다른 거래를 해주세요.”
“‘거래’요.”
“제 마음을 받아주는 건 너무 기우는 관계라 안 된다고 하셨으니까, 몸만 받아주시는 걸로.”
“…….”
“그건 누구 하나가 손해 보는 일이 아니잖아요.”
기가 막혔다. 윤설은 단정한 말씨에 또렷한 발음으로 골 때리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전에도 몇 번 그랬는데 새삼 최윤에게 못 할 이유가 없었다.
어떤 사고로 나온 결론인지도 짐작이 간다. 그렇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가는요.”
“언제 원하시든 응하겠습니다.”
“아직도 불공평하네요.”
“원하는 바가 큰 쪽이 감수하는 건 당연해요.”
“몸을 두고 하는 거래가 쉬워요?”
“…그것도 싫으신가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까. 저렇게 덥석 감당하겠노라 자신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는데.
“사실 내가 더 난잡하고 나쁜 버릇을 가졌으면, 그것도 감수할 겁니까.”
“네.”
뒷골이 아프다, 속에서 불이 난다 하던 느낌이 모조리 사그라들고 피가 차게 식는 듯했다. 최윤은 주워 담을 생각이라곤 없어 보이는 윤설의 눈을 바라보다 테이블 아래 바닥을 향해 손짓했다.
윤설이 눈길 닿은 자리로 테이블을 돌아와 무릎을 꿇고 최윤의 무릎을 잡았다. 서로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듯 물러섬이 없는 사이에 무지근한 답답함이 훅 끼쳤다.
“벗고.”
“네?”
“벗고 해요. 전부.”
여기서 한 수 접어주면 상대가 내린 결론에 따라야 한다는 사실이 훤히 보여 선 주위를 맴돌고 있을 터였다. 최윤은 내도록 하던 생각을 반복했다.
누구는, 쉬운 줄 아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면 모를까 인정한 부분이 있는데.
윤설은 잠시 속눈썹이 떨더니 곧 옷을 벗기 시작했다. 코트 아래 한 꺼풀 더 겹쳤던 카디건 단추를 풀어 내리고 긴 목을 반쯤 덮은 니트도 단숨에 벗어 떨구었다. 훈기가 돌아도 맨몸으로는 금방 소름이 일 어깨가 오르내리더니 벨트, 하의의 지퍼, 속옷이 거추장스러운 사람처럼 성의 없이 끌어 내리고 꿇은 무릎에 걸리도록 내버려 뒀다.
“신도 벗을까요?”
“…됐습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바깥 전경이 보이는 유리창이 훤한데 사무실 바닥에 나신으로 꿇어앉아 있는 완벽한 조형의 남자. 이런 상황이 성적 판타지로 흔한 축에 속한다 해도, 지금의 최윤에게는 현실에 있으면 안 되는 무엇을 목격한 것처럼 위화감이 들 뿐이었다.
귀가 붉고 이따금 긴장한 눈가가 떨리는데도 망설임 없이 하의 안의 발목을 문지르고 흰 등이 내려다보이는 상체가 무릎 안으로 파고들어 온다.
무엇을 자처하는지 알고 있나. 알고도 이러는 걸까.
허벅지에 닿은 어깨와 아랫배에 비비는 볼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으면서 일순 비참해진다.
“윤설 씨, 거래라는 건.”
그가 올려다보지 못하게 머리칼을 쥐고 샅에 처박았다. 잠시 긴장하던 어깨가 몇 번 크게 숨을 고르더니 잠잠해진다.
멈출 생각이 없는지 최윤의 하의를 끌러놓고 혀를 내 무겁게 핥는다. 오랜만의 감각에 금세 달아오를 것 같아 허벅지를 둔하게 밟았다. 안쪽으로 발을 옮길수록 페이스를 잃으면서도 몸을 물리거나 잠깐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 그 고집이 괴로웠다.
─대표님, 채주호 님이라고 방문객이 오셨습니다.
“…오 분 뒤에 올려 보내요.”
그래서 약속 시간을 벗어난 방문객을 물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까지는 예상에 없었던지 물러나려는 몸을 계속 누르고 있다 놓아주었다. 붉은 얼굴과 젖은 입술을 보고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는 걸 화와 함께 삭였다.
“거래라는 건 이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윤설은 말없이 옷을 주워 입었다. 최윤은 다리를 꼬고 앉아 동했다는 사실 자체를 덮었다.
모멸감이면 다시 생각해 볼 계기로 충분하지. 심한 감이 있어도 잘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 보세요. 나중에 봅시다.”
“…또 뵙겠습니다.”
끝까지 고집하고는.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정돈하며 나서는 윤설과 채주호가 마주친 듯 작게 사과하는 말이 오갔다.
대표님 벌써 재미 좀 보셨나 보다. 내가 늦었네.
목소리를 낮추기는커녕 시시덕대는 말이 최윤과 윤설, 모두에게 들렸다.
* * *
윤설이 뒤를 돌아봤을 때에는 이미 문이 닫혀있었다. 어쩐지 평범한 목적으로 방문한 사람이 아닐 것 같아 신경 쓰였다.
“벌써 가세요?”
“잠깐 얼굴 보려고 들렀어요. 차 잘 마셨습니다.”
비서실 직원들이 호감을 갖고 대하니 넌지시 물어보면 알려줄 듯했지만, 일단은 빠르게 회사를 벗어났다. 차를 타고 앉아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는 동안 경호 팀 직원이 다음 행선지를 묻는다. 소속사에 들렀다 집으로 가자고 하니 내심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아까 그 남자. 윤설을 알아보고 최윤을 놀리듯 이죽대는 무례한 말투를 떠올린다. 정확한 근거도 없으면서 왜인지 제 친척이나 데리고 있는 직원 중 어린애들을 맞지 않는 자리에 끼워 넣은 유의 연예계 인사들과 비슷한 느낌이다.
국내 작품 고르면서 토크 쇼나 예능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더니 밥 한 끼, 술 한잔하면서 의논하자는 사람들이 꽤 됐다. 윤설은 인지도나 경력, 최윤을 의식하는 분위기로 자연히 그 자리의 주최자 편이나 상석에 끼어있었지만 출연 여부나 같은 회사 다른 후보를 놓고 확언을 받지 못한 무리도 함께하다 보면 꼭 저런 뉘앙스를 풍기는 치가 있었다.
입에 발린 말이나 시청률에 어필할 요소를 띄우는 것은 물론 은근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떠보는 성적 암시. 아주 모르는 일도 아니고 자기가 불쾌하다고 자리를 정리할 입장도 아니라서 잠자코 있었다. 그래도 누군가 최윤에게 비슷한 제안을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실은 최윤과 동반 참석한 몇몇 행사에서 이미 목격했다. 그런 식의 접대를 유도하는 쪽은 하나같이 상식이 없는지 옆에 윤설이 있어도 누구의 딸, 조카, 아들 등으로 자리에 맞지 않는 손님을 소개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비교적 빠르게 발전한 사이랍시고 참고는 했던지 열에 여덟 여자는 윤설과 비슷한 분위기였고 남자는 이목구비부터 곱상했다. 물론 최윤이 죄 사무적인 태도로 대꾸나 겨우 해줄까 말까 하며 쳐냈으나 적잖게 위기감을 느꼈다. 그중에 최윤의 취향에 맞는 타입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으레 돈 많고 큰 자리 얻은 남자면 그렇듯 여성을 만나 자식을 보려 하지 않겠냐는 은근한 무시를 읽었고, 남자를 들이미는 쪽도 그런 전제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꼭 그렇게까지 안 가도 어떻든 최윤의 흥미가 옮겨 가면 덩달아 이득을 보겠다는 야심들이 만만이었다.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 일은 아니라서 속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윤설이 모르는 곳에서 그런 꼴이 반복될까 봐 황당무계한 제안을 한 것은 아니다. 윤설은 최윤과의 연락이 없는 시간 내내 생각했다. 더 이상 그에게 감정의 깊이를 설명하며 호소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고.
한바탕 가슴앓이가 지나자 조금은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됐다. 그는 판단을 내리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고, 결정을 번복하면 따르는 사람들까지 휩쓸리는 상황에 익숙하다. 최윤의 판단이 그르다거나 허황된 기우가 아니기에 생각을 돌리기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윤설이 최윤의 곁에 있으면 위험해진다’, ‘윤설의 직업과 사생활 모두 제한된다’는 명제가 바뀌면 또 몰라도.
그럴 수 있을까?
한때 자주 머물렀던 최윤의 집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찾아갔다. 생각보다 더 많은 부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현관에서 머리 위를 비추던 실내등, 거실의 소파와 테이블 위에 놓인 것 자체가 쓸모인 오브제, 계단을 향할 때마다 발길을 붙잡는 아름다운 그림, 그의 침대에 앉아있을 때 보이는 벽의 액자들과 고양이들이 먹고 자다 집이 되어줄 가정으로 떠나는 커다란 방.
최윤이 쓸모를 따지지 않는 것들. 대가를 헤아리지 않고도 거기 있어도 된다 허락받은 존재들.
윤설과 무엇이 다른가.
최윤에게 영원히 아름다울 그림들과 아무런 죄 없이 아프고 혼자인 어린것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잡힐 듯 말 듯 한 가정에 불과하나 윤설은 망설임 없이 길을 내기로 했다. 적어도 오늘 그에게 익숙할 언어로, 터무니없이 비싸고 무거운 선물을 안겨주는 대신 그럭저럭 합당한 거래처럼 말했을 때 ‘됐다’는 신호를 받았기 때문에 만족했다.
부적절한 장소에서 경우 없이 굴어도 윤설은 여전히 그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보기 좋은 무엇이었고, 부러 사납게 굴었을지 몰라도 재고의 여지를 남겼다.
희미한 미소가 올라온 뺨을 보고 운전에만 몰두하던 직원이 대표님 만나 좋으셨던 모양이라며 도착을 알렸다.
“인사해. 앞으로 같이 다닐 매니저.”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우형은 직급이 올라가면 해야 하는 일과 올해 윤설의 국내 스케줄 사이에서 허덕대고 있었지만 얼굴이 폈다. 한동안은 윤설이 정말 괜찮은지 오가며 살피더니 남들 나갈 때 못 나가서 아쉬웠다는 인기 예능 섭외하며 신이 났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추려진 프로그램 리스트를 가지고 이리저리 날짜를 맞추며 인수인계를 한다고 바쁘다.
어릴 적 마음의 빚이 있다는 이유로 시작해 순전히 애정과 우정만으로 함께해 줬으니 더 붙잡을 생각도 안 들었다. 가끔 이제야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한 삶을 두고 너무 빨리 멀어지나 싶은 허전함이 있을 뿐이다.
소속사에서는 우형을 승진시켰다 하더라도 윤설에게 새파란 신입을 붙이기 민망했던지, 경력이 제법 있는 사람을 뽑아 붙였다. 우형은 오랜 버릇을 버리지 못하겠다며 내심 수상한 구석은 없는지 살피고 있다고 했다.
남들이라면 굳이 그럴 일이냐 하겠는데 윤설은 저도 마찬가지라 우형을 위로했다. 어찌 보면 최윤을 보며 불신 지옥을 떠올렸던 찰나가 무색하게 둘에게도 불신은 트라우마의 흔적으로 오래오래 남아있을지 모르니까.
“제가 면허 다시 따는 중이라서요. 가끔 운전대 잡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스케줄 이동할 때는 다 제가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알아보고 시비 거는 사람 있을지 몰라요.”
“그럴게요. 고마워요.”
“고맙기는. 너 면허 다시 따면 차도 사겠네?”
“아마 그래야겠지.”
“최 대표가 사주려나. 고를 때 나도 같이 가. 구경 좀 하게.”
“무슨.”
다만 우형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놈이 오리 새끼처럼 처음 본 사람만 쫓아다니기 바쁘다며 윤설의 짝사랑에 한해 엄청난 반대와 타박을 멈추지 않았다. 고백을 못 했다가 아니라 차였다는 대목에서는 뒤로 넘어가서도 씩씩대며 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후로 이렇게 매사 걸고넘어지곤 한다. 윤설이 흰 눈을 뜨든 말든 옆구리 찔러가며 돈 잘 버는 애인 둬서 뭐 하냐고 바람을 넣는 폼이 그렇게라도 해야 덜 억울한 모양이다. 제 편 들어주는 걸 뭐라 할 수 없어 면허도 한참 남았다 얼버무린다.
새 매니저까지 셋이 잠깐 앉아 빈 스케줄표에 듬성듬성한 자리를 채웠다. 꽤 느슨해 보였는데 윤설이 어울리기 시작한 동료들과의 약속, 누구의 생일 등을 넣고 우형이 섭외 희망 들어온 광고 몇을 늘어놓았다.
일정이 너무 촉박한 것 빼고 논란이 있거나 이미지와 영 안 맞는 것도 빼다 보면 동종 업계 경쟁사들이 앞다투어 제안한 몇 가지가 남는다. 나머지는 집에 가서 생각하겠다고 추려서 나왔다.
P모 배우 생일. 같은 회사 후배인 배우가 최근 대인 관계를 넓히는 듯한 윤설에게 와주면 좋겠다며 초대했다.
일주일 정도 같이 예능 사전 촬영 중인 아이돌 J가 제안한 모임 식사 자리.
윤설과 몇 번 작업했던 드라마 피디가 신인 배우 뽑을 때 참석해 달라 부른 비공개 오디션.
“…….”
간다고 해서 생각보다 대단한 재미는 없었다. 몇 번 다니다 보니 비슷비슷했는데 그래도 은성 입김 들어간 사람이 섞여있을까 봐 문을 닫고 지냈던 때보다 후련하고, 지나는 이야기들 들어둬서 나쁠 건 없겠지 싶어 웬만하면 사양하지 않고 응했다.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서로의 회사가 어떤지, 무슨 광고나 배역은 내정이 됐니 안 됐니 편성 엎어진 프로그램의 속사정 같은 가십을 나누며 친근감을 느끼는 속성은 십 대 애들이나 치열한 연예계에서 이름 좀 알리고 돈 번다는 성인이나 같았던 것이다. 반쯤 흘려들을 소문일지라도 어떤 것은 출처도 불분명하면서 귀신같이 맞아떨어지곤 했다.
일찍이 일가친척의 끝간 데 없는 탐욕과 끈질기고 집요한 수를 겪어온 윤설로는 별스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가끔 유흥의 방식이 비위에 거슬리거나 했을 뿐이다.
그것도 몇 번 흐름을 타고 만나다 헤어지다 하는 사이 자연스레 걸러지고는 했다. 막상 친하다고 할 만한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고 나서 보니 진짜 사적이라 할 만한 자리는 이렇게 누가 데려온 누구, 두 다리 거쳐서 이 사람과 저 사람이 한데 모이게 되는 식도 아니었다.
아마 이렇게 바쁘고 시시한 일들에 열 올리며 살아보라는 말이었겠지.
아닌 게 아니라 소화해야 할 일이 추가될수록 혼자 남는 시간이 줄었고, 집에 돌아오면 쉬어야 할 때였다.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애절해도 바쁜 몸과 지친 정신 속에 소원해질 거라고.
윤설은 아니었다. 사람 마음 간사하다 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 혹은 아직 일의 연장에 놓인 사람들과의 관계뿐이라 실감하지 못하는지도 모르지만 윤설은 피로와 혼란을 비집고 떠오르는 최윤의 존재감을 또렷하게 느꼈다.
찬사받는 영화 속 주인공으로 분해 소망했던 것처럼 미래의 어떤 일, 어떤 장소를 그릴 때 자연스레 그가 함께함을 가정했다. 의사의 조심스러운 해석이나 우형이 말한 새끼 오리의 미련함이라 해도 이미 그렇게 된 일이다. 되돌리고 싶지 않다.
“…….”
형편없는 열성에 가까워졌어도 여전히 윤설은 보통 사람보다는 쓸 만한 체력을 가져 꿈에 최윤을 실컷 봐도 다음 날 때맞춰 일어날 수 있다. 연기는 윤설에게 익숙한 언어라 온통 그를 궁금해하는 생각뿐이어도 다른 이들과 정담을 나눌 수 있다. 긴긴 생각과 낮의 일을 되새김질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뜨거워지는데 어디가 멀어졌다 할까.
잠시 쥐었던 발목과 바짓단 안의 정강이뼈 위로 손바닥을 붙여 낭비 없이 체온을 느꼈던 감촉, 본인이 잘 인식하지 못할 맨 살갗의 부드러운 향, 다리 사이로 숨을 토할 때 단단해지던 아랫배의 근육을 모조리 기억하고 헐떡이는 자신에 대해 뭐라고 한들 다 틀린 말이다.
최윤이 그럴 의도가 없었던 줄 알아도 그 말만큼은 거짓말이 될 터다. 윤설은 처음으로 특정한 하나를 지목해 탐냈다던 어린 날의 최윤처럼 묻고 싶은 열망으로만 그득했다.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어요?
* * *
윤 배우, 사람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모임 많을 거야. 스케줄 아닌 거는 거의 알아서 가기는 할 텐데……. 자기가 옆에서 봐서 영 아니다 싶은 사람 있으면 귀띔 좀 해줘라. 내가 하면 잔소리라고 하거든. 짜식이, 형 마음도 모르고 말이야.
나름 망아지 같은 아이돌 매니저 경력으로 다져진 중고 신입은 걱정 가득한 김우형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럼요. 제가 아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두 번 세 번 강조하고 나서도 두 손 붙잡고 한숨을 쉬는 모습에 사석에서의 윤설은 좀 무른 구석이 있나 어림짐작했다. 연예계 생활 길게 해서 이것저것 시중받은 사람들이 물정을 잘 모르긴 하지, 그런 의미로 이해했다.
그러나 막상 다녀보니 윤설은 업계 평균 이상으로 손이 덜 가는 편이었다.
어디 가서 투자 사기 훌렁 당해 오고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긴가민가하면서도 내심 걱정했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 참이었다.
“형, 그으, 오늘 가는 호텔 있잖아요.”
“네?”
“거기가 워낙 업계 사람들 파티 이런 거 많이 하는 데라 별별 사람 다 다닌대요.”
“그래요? 층 전체가 클럽이나 파티 룸 용도라 반만 빌렸다고는 했어요.”
“놀다 보면 취해가지고 넘어 다니고 약 같은 거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진짜 진짜 조심하셔야 돼요.”
“친구랑 잘 붙어있을게요. 고마워요.”
와중에 좀 마음에 걸리는 자리가 간혹 있어 우는소리로 당부할 뿐이다.
참석자 리스트까지야 언뜻 누가 주최했다는 걸로 대충 견적이 나온다는 정도지 거기서 얼마나 더 가지가 뻗어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마당발로 소문난 아이돌 몇이 주축인 모임이라고 하니 괜히 엉덩이 붙이고 있기가 불안했다.
이래저래 친구의 친구 하다 보면 멀쩡해 보이는 놈이랑 오만 진상 다 떨며 노는 놈이랑도 어느새 같이 놀고 있는 게 그런 자리인데. 분야가 다른 쪽 인사들이 궁금했던지 윤설은 호기심이 더 커 보였다. 그래도 곁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험상궂게 생긴 경호원들을 보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재밌게 놀다 오세요, 하고 보냈는데 새벽녘 잠을 깨고 그 윤설과 모 레이블 모델이 주먹다짐까지 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현장 정리는 이쪽에서 하니 매니저님은 소속사에서 미리 대비할 수 있게 준비해 주십시오.
“예? 예에. 혹시 그쪽이나 윤 배우님 다치셨나요?”
─…괜찮으실 겁니다.
윤설을 수행해 간 경호원 전화였다. 취해서 싸움이라도 붙었나 싶은데 와중에도 주변은 음악 소리다 뭐다 소란스러운 듯했다.
찬물 세수로 잠을 깨고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도 설마 윤설의 잘못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런 성격도 아닌데.
* * *
J가 초대한 모임은 본인을 포함해 유명 아이돌, 신인배우, 팬덤이 큰 모델이나 싱어송라이터 등 특별한 구분 없이 대충 친하고 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울리는 자리였다.
적당히 그루브 타는 음악과 칵테일, 알록달록한 소품들로 꾸며진 세트장 안에 마찬가지로 머리 색이고 스타일이고 각양각색인 젊은이들이 아무렇게나 모여 깔깔댔다. 한쪽에서는 조금 심각한 주제로 대화에 열 올리며 위스키 따위를 보탰으나 전반적으로 산뜻한 분위기다.
윤설은 그 모양들을 흥미롭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곳에 초대된 것 아닌가 하는 기분에 J가 하는 말을 들어주고만 있었다.
“…귀엽다고요? 에에이, 하고 다니는 거 차이지 까고 보면 형이랑 나이 비슷한 사람도 많아요. 저기 토론 대회 중인 애들은 완전 폼 잡고 있고 시커멓게 해서 그렇지, 저랑 동갑이고요. 그냥 시끄럽게 해도 되고 누가 사진 찍고 그럴 일 없으니까 싹 모여서 노는 거예요.”
저기 같은 그룹 멤버 옆에 있는 애가 이번에 북미 투어 돈 대서 한턱 쏘라고 했고요. 저기 둘은 같은 회사 아닌데 웹 드라마? 그거 하다 친해져서. 형도 봤어요? 20대한테 엄청 인기 있어서 쟤들이 좀 떴잖아요.
J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고개 돌리고 눈길을 두는 사람마다 톡 치면 프로필이며 근황이 쏟아져 나온다. 윤설은 대강 기억하고 넘기는데, 하도 열심이라 마실 거리를 챙겨주니 뭐에 꽂혔는지 형은 진짜 사람이 다정하고 어쩌고 하면서 살살거린다.
가식이나 윤설로부터 뭘 얻으려는 게 아니라 원래가 방정맞은 촉새요 온몸으로 사교성을 어필하는 성격이었다. 주변에 비슷한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장단 맞춰주기는 어려웠지만 같이 있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있는 친구였다.
와중에 윤설에게 관심을 보이는 무리가 말을 붙여 오면 맞아주며 인사와 겉도는 이야기, 질문 등이 오가기도 했다. 드라마 팬인 경우도 있었고 잘 보여 친분을 쌓아놓고 싶어 하는 신인 배우들도 왕왕 있었다.
누가 다가올 때마다 J가 옆구리를 찌르며 누구라고 수선을 떨어서 요즈음 가수고 SNS 화제고 모르는 맹꽁이처럼 ‘네, 네’만 하는 신세는 면할 수 있었다. 가끔 웃기도 하고 춤을 추며 덩실거리는 무리에 박수를 쳐주다 끌려 나갈 뻔한 걸 J가 다 쫓아내 줘서 살았다.
“벌써 취하는 사람 나오네. 형, 저 잠깐 담배 피울 겸 바람 쐴 건데 나가실래요?”
“그래. 테라스가 있어?”
“여기랑 건너편 룸 사이에요. 복도 넓고 그 밖에가 뚫렸어요.”
이유는 몰라도 J가 윤설을 착하지만 숫기 없는 선배쯤으로 여겨서 좀체 혼자 두지 않으려 드는데 그마저도 편했다. 빤히 보이는 데서 흘끔대고 눈이 마주치면 웃으면서도 쉬이 다가오지 못하는 몇몇이 J 앞에서는 차마 꺼내지 못하는 무슨 말을 담고 있는지 상상도 안 됐기 때문이다.
윤설의 주관일 뿐이지만 요즈음 20대 초반쯤 되는 애들의 농담은 폭탄 같았다. 농담인가 싶은 말이 진담이기도 해서 어렵다.
“어우, 아직 춥네요.”
“꽃 피어야 봄이래.”
과연 너른 복도, 차라리 홀에 가까운 공간 끝에 유리문이 있었다. J가 멀찍이 가서 담배를 꺼내려는 걸 두고 괜찮다며 근처에 서서 함께 조명이 반짝이는 건물들을 내려다보았다. 난간을 손가락으로 실없이 건드리다 반지가 부딪히는 바람에 손을 거둔다.
그냥 이런 날도 있는 거구나.
나쁘지 않다. J는 쉬러 나왔다면서도 중간중간 무슨 이야기를 했고, 윤설은 바람 소리처럼 흘려듣고 있을 때였다.
“아무리 돈 많대도 그렇지, 존나 다 늙어빠져서 드럽게.”
“어?”
누군가 비틀거리며 테라스로 들어섰다. J가 얼빠진 소리를 내는 걸 보면 반대편 룸에서 나온 사람인 듯했다.
둘 다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는데 그쪽에서 먼저 알은체를 해 왔다. 취한 건지 뭔지 약간 느슨한 말투라 건성으로 인사를 받아넘겼는데, 어째 인사로 끝낼 기미가 안 보였다.
J가 슬쩍 옆구리 뒤를 찌르며 속삭였다.
저쪽 방 그거 같아요. 스폰서 받는 자리? 투자자한테 잘 보이고… 아,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러면서 다 피우지 못한 담배를 얼른 비벼 끄고 있었다.
“…저기요.”
“저요?”
“아니, 옆에요. 그쪽은 뭐 스폰 구하는 애들 필요 없대요?”
“무슨 말씀인지.”
“아니, 왜에. 스폰이니 애인 흉내니 이왕 할 거면 젊고 잘생긴 사람이랑 하는 게 백번 낫잖아요. 배우님은 받을 만큼 받은 것 같은데 슬슬 빠질 거면 연결 좀 시켜줘요?”
“아, 형. 듣지 마요. 무슨 소리야. 취했어요?”
별안간 윤설을 걸고넘어지며 시비를 거는 건지, 조르는 건지, 태도가 시시각각 변했다. 차게 굳은 윤설을 대신해 J가 대거리하며 문 쪽으로 이끌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어 눈에 띄는 누구든 붙잡고 화풀이하는 거겠지, 좋게 생각하려고 하는데 상대의 말이 계속 거슬렸다. 윤설이 최윤의 지원을 받으며 애인 놀음이나 해주고 단물 다 빼 먹었을 때 되지 않았냐는 듯한 말이나 당연히 새로운 상대가 필요할 거라는 예측이 전부 얼토당토않은 헛소리 아닌가.
최윤은 오히려 까다롭고 어려운 사람이다. 윤설에게 물질적으로 지원해 준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대가로 뭘 요구한 적도 없었다. 그렇게 계산이 분명하면서 퍽 귀찮아진 상황에서도 한번 언급하지를 않는다.
화가 나서 떠올린 사실인데 문득 당연했던 것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단순한 호의 이상의, 값이 넘치는 배려는 어디에서 왔을까.
곁에 남는 일은 불공평해 안 된다던 사람의 모순을 발견하고 입술이 떨릴 때 J와 이름 모를 불청객이 목청껏 소리 질러 혼자 생각에 빠진 윤설을 끌어냈다.
“내가 못 할 말 했어? 못 하면 말지, 왜 소리를 질러?!”
“저기요, 가만있었는데 어디서 맞고 와서 시비 튼 거는 그쪽이거든?”
“존나 이 바닥에서 몸 안 굴리고 투자받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척이야. 혼자만 먹고살지 말고 좀 알려달라는데─”
“어어, 형, 형!”
그리고 찬 바람 부는 테라스로 돌아온 윤설의 이성은 펄펄 뛰며 명령했다. 어쩌면 미약하게나마 남은 알파의 집착이 종용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 사람 곁이 그렇게 쉬운가?
그 사람과 거래라는 말을 올리는 것조차 숱한 의심과 기준을 넘어야 한다는 걸 안다면 저런 소리를 담을 수 없다. 무엇보다 최윤이 지원을 빌미로 사람을 사서 쾌락을 좇는 구석이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몰라도.
내 것을 깎아내리고 있어. 아무나 그 품에 들여줄 것처럼 모욕하면서도 탐내고 있다.
윤설은 최윤을 향한 모멸에 기민하게 반응했고 이어 파랗게 타는 불처럼 성냈다. 허리를 끌어안고 말리려던 J가 끌려가면서 뜻밖의 기운에 놀란 참이었다.
“어딜 갔나 했더니… 이게 무슨 소란이야.”
“채 사장님! 여기, 여기 봐요. 다짜고짜 사람을 쳤다니까!”
“아니, 그건 그쪽에서 먼저 스폰이니 뭐니 해서… 일행이세요?”
양주 병을 든 채주호가 유리문 틈으로 상체만 비죽 내밀고 눈을 굴렸다. 잠시 상황을 살피는 듯 나서지 않다가 J가 랩처럼 속사포로 뱉는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눈치를 챘는지 복도 쪽에서 누군가를 불러왔다.
순간 J나 윤설 모두 긴장했는데 채주호는 지나가는 서버였다며 느물댔다. 어깨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의 한 손에는 양주 병이요, 다른 한 손에는 유리잔 몇 개가 들려있다.
“이 친구가 술도 약하고 한데 너무 빨리 마시더라고. 한잔하고 잊어버립시다. 좋은 술이니까 사양하지 말고.”
“사장님…네 직원이에요?”
“우리 직원은 아니고 다리 좀 놔달래서. 알지? 응? 다들 알죠?”
연한 호박색 액체가 3분의 1쯤 담긴 잔이 하나씩 돌았다. 윤설에게 되게 얻어맞고 저도 한 번 밀쳤던 문제의 원인에게는 채주호가 직접 잔도 쥐여주고 마시는 것도 도운 다음 어깨를 맵게 쳤다. J도 머뭇대며 한 모금 하더니 감탄사를 뱉었다.
채주호는 향 좋지 않냐며 유들유들하게 구는 한편 잔을 들고만 있는 윤설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저 사람을 자주 마주치는 이유가 무엇이든 우연은 아닐 터였다. 윤설은 눈을 감고 제 몫의 술을 단숨에 비워냈다.
“이제 이 친구를 어쩐다. 아, 잠깐만. 여기 좀 도와주지 그래요!”
그리고 채주호를 마주친 김에 최윤과의 친분을 물어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채주호가 문 너머로 손짓을 하며 사람을 부르는 바람에 J의 부축을 받고 일어나야 했다. 황급히 문을 밀고 들어오는 검은 정장 차림의 사내들 사이로 윤설이 아는 얼굴도 보였다.
“큰일은 아니고, 여기 좀 취해서 옆방이랑 기분이 상했나 봐. 옮깁시다.”
“괜찮으십니까?”
호텔 쪽인지 채주호 쪽인지 모를 이들은 재빨리 늘어진 상대를 들고 사라졌다. 짐짝 옮기듯 빠르고 조심성 없는 퇴장이었다.
채주호는 술 한잔에 눈을 끔벅거리며 주저앉은 J를 보고 허허실실 웃다 윤설을 보고는 잠시 의아한 듯 입맛을 다시기만 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 같다가도 경호원이 상처 유무를 살피는 모습에 대충 손을 흔들며 사라져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기분이 엉망진창인 탓인지 윤설도 힘이 죽 빠져 움직이고 싶지가 않았다. 곧 털고 일어났지만 J가 뻗어버려 경호원이 업어주어야 했다.
─형, 전화받으시네요! 괜찮으세요? 다쳤어요? 누구인지 기억나세요?
따뜻한 차 안으로 들어간 뒤에야 계속 웅웅대는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신참내기 매니저가 윤설에게는 추호도 잘못이 없을 거라 믿는 목소리로, 정신없겠지만 누가 뭘 물어도 대답하지 말라며 회사로 가는 중이라 했다. 윤설은 피로가 눈까지 몰려오는 듯해 눈썹 뼈 주변을 꾹꾹 누르며 안 그래도 됐는데, 뒤늦게 민망함을 억누른다.
자신이 주먹질하면서 힘을 얼마나 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덜어낸 형질만큼 평균을 웃도는 힘도 약해졌을까? 만약 아니라면.
─기사 뜨는 거 확인하면 바로 대응 기사 낼 수 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기사. 그런 기사가 나면 곤란해지겠지.
알고 있지만 그에 앞서 최윤의 귀에 들어갈 일이 걱정됐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얼굴을 감싸고 웅크리자 막 운전대를 잡은 직원이 병원으로 가야 하는지 묻는다.
“…네. 병원으로 가주세요.”
* * *
지독히 피로할 뿐이었으나 윤설은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닫힌 눈꺼풀 너머로 밝은 형광등 빛이 어룽거리다 커튼 레일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어두워졌다.
바깥쪽에서 윤설을 데려온 경호원과 간호사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한껏 낮추어 주고받는 말을 들으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누워서 눈을 감고 정신을 놓지 않은 채로 기다렸다.
“어디 봅시다.”
매일 그리는 사람이 와줄 것인가. 그것만이 중요했다.
커튼이 열린 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밝은 빛이 살갗을 열고 들어올 것처럼 불편해 찡그리자, 그가 몸을 숙여 빛을 가려주었다. 그 뒤로 차르륵 커튼 닫는 소리가 났다.
“윤설 씨.”
흔하다면 흔한 소란이었음에도 최윤이 여기 있다. 윤설은 상황을 까맣게 잊고 웃고 싶었다. 수없이 묻고 되새겨 건진 최윤의 언행들과 촘촘히 세운 가정들 속에서 간혹 포기할 수 없는 빛이 반짝이곤 했다. 지금처럼.
의미 없는 다정으로 보이는 순간들도 단서가 되고, 숨죽여 기다리는 윤설의 눈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빛무리가 침엽수만 그득한 숲에서 멀리 반짝이며 가야 할 길을 제시했다.
“…대표님.”
“약을 했습니까?”
“아니요. 그런 사람도 없었어요.”
대답을 듣고 난 최윤이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집에 있다 나왔는지 윤설이 잘 아는 차림이었다.
느른하게 풀린 눈을 하고서도 가만히 얼굴을 올려다보는 윤설의 표정이 평온해 가벼운 한숨을 쉰다.
두드러지는 외상은 없는데 병원에 가야겠다 해서 급히 연락한 경호원이 J의 상태를 언급했다. 술 한 잔에 온순해지고 금방 축 늘어진 것을 목격한지라 조심스레 약물의 가능성을 떠올렸다고 한다.
최윤은 마지막으로 술을 건넨 사람이 채주호라는 답을 듣고 이번에는 한숨을 삼키듯 어깨를 들썩였다.
“왜 그랬습니까.”
“…….”
“윤설 씨라면 피할 줄 알았는데.”
“…대표님 이야기를 해서 조금.”
“네.”
“화가 났습니다.”
그때는 그랬어요. 참기가 어려웠습니다.
최윤은 다소 이상한 표정이 된다. 픽 웃으려다 만 사람처럼 어색하게 입매가 굳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감고 윤설이 모르는 감정을 한참 삭였다. 손을 뻗어 뺨을 쓸어도 나무라지 않아 마음껏 다독일 수 있었다.
“사실도 아닌 일에 일일이 흔들릴 필요 없어요.”
“네.”
“대답만 잘하지 말고.”
“안 그럴게요.”
“그래요.”
그리고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됐다. 답을 맞힌 듯 강렬한 직감이 또 한 번 속삭였다.
윤설은 밀쳐지면서 손바닥이 쓸린 상처 말고는 멀쩡했음에도 가만 누워있었다. 병원 내에서 말이 돌다 새기 전에 돌아가자 하는 최윤에게 힘이 안 들어간다며 소매를 잡고 늘어져만 있었다. 할 수 없이 최윤이 윤설을 업고 차에 실어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가는 길 최윤은 채주호가 자리를 덮으려 건넨 술에 약이 있었다며 귀찮을 정도로 이상 여부를 따져 물었다. 윤설의 상태로 보나 질문의 답으로 보나 약효가 거의 없다시피 했음에도 비실대는 모양을 거슬려 했다.
윤설은 그 기색을 놓치지 않고 애처롭게 굴었다. 영문을 모르지만 몸이 이상하고, 험한 일이 지난 뒤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같이 있어달라고.
최윤은 옆에 누워주지 않았지만 붙들린 손을 빼지 않고 윤설이 잠드는 순간을 지켜봐 주었다.
* * *
J는 그때 일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말다툼이 있었다는 것까지만 기억난다며 윤설이 자신을 수습해 준 줄 알고 고마워했다.
나중에 보니 모 에이전시의 대표 모델 중 하나였다던 상대는 이미 술과 약을 한 상태로, 얼마 안 가 마약 복용이 적발돼 수사받게 되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날 누군가의 눈 밖에 난 탓인지 모르지만 J도 윤설도 기사를 보고 이상하다 생각했다. 물론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날 밤 윤설과 J를 비롯해 가볍게 웃고 떠들며 사진이나 실컷 찍어댄 방과 복도 너머의 방 사이는 천지 차이 수준으로 달랐으며 음습하고 위험한 일이 벌어졌으리란 확신 아닌 확신만이 남았다.
채주호가 술에 탄 약이 무엇이든 간에 가벼운 흥분제나 환각제 이상이었다.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복용하고 누군가의 꿈과 아름다움을 사서 마음대로 주무르는 부유하고 힘 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목격한 것은 비교도 안 되게 다른 일이었다.
상품의 용도는 권장 사항일 뿐, 산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는 판매자가 결정할 일이 아니다. 당연히 최윤이 은밀히 유통망에 끼워 넣은 약도 그런 자리에 돌고 있을지 모른다.
윤설이 익숙해졌던 폭력과 다른 유의 추악함, 다른 욕망이 지배하는 악의 군상을 예기치 못한 곳에서 마주치게 될지 모른다. 최윤은 이런 장면들에서 윤설을 멀리 떼놓고 싶었던 것이다. 정작 윤설은 딴생각을 할 정신적 여유가 있었건만 최윤은 모른다.
새로이 주어진 신호들은 윤설을 희비의 경계에 걸쳐두고 내키는 대로 시소를 기울였다. 최윤이 자신을 미욱한 존재로 알지언정 아낀다. 애틋한 나머지 어디로도 말려들지 않았으면 하고 두려움까지 느낀다. 그의 유능한 직원들과 돈으로 해결 가능한 일의 끄트머리에 표표히 나타나고야 만다.
위태로움으로 확인하는 애정, 기이한 희열에서 고개를 돌리면 그 애틋함을 외면하기 위해 냉랭하게 굴고 관계의 종언을 고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란히 보인다. 윤설은 그가 딱 한 번만 눈감고 비열해질 수 있기를 바랐다가 부끄러워져 혼자 얼굴을 붉혔다.
길에서 마주친 짐승을 외면하지 못해 돌보다가도 끝내 더 좋은 환경, 더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 보내는 것은 어디까지나 욕심이 아주 조금 부족해서이다. 아니면 제 눈에 적당히 가련하고 예쁜 것이라 거둘 이도 많고 어디서든 더 나은 삶을 보내리란 판단 때문이다.
윤설이 최윤의 눈에 도저히 포기 못 할 만큼 아름답고 탐나는 존재까지는 될 수 없다면, 아주 조금 모자란 그 부분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다른 방법은 하나뿐일 것이다.
이제 완전하게 이해했다.
* * *
꽃이 완연히 피고서야 밤바람이 차지 않았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간질이는 짧은 계절을 무난하게 지냈다. 대중은 지난해 불운하게 사망한 부모, 탐욕스러운 친척들로 울적했을 어린 시절과 가문의 비리에서 홀로 도망쳐 나와 훌륭하게 성장한 배우의 희소식을 환영했다.
드라마 하차는 대체한 배우가 그럭저럭 무난하게 마쳐 큰 피해가 없었어도 잠시 연말 연초의 화려함에 잊힌다 싶었던 윤설은 해외 유명 감독의 영화에 발탁되어 영화 팬과 홍보사가 좋아할 만한 타이틀을 달고 돌아왔다.
그는 불우한 가정사를 씻어낸 듯 편안한 미소로 자주 친숙한 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어 대중의 입맛에 맞을 법한 행복을 말하고 다녔다. 그가 힘들 때 크게 의지가 되어준 연인에 대한 애정을 물으면 부끄러움 없이 담담하게, 몇 번이고 답했다. 아마 은성도 그 덕을 조금은 봤을 것이다.
떠나기 전보다 더 이미지가 좋아지면서 친해졌다 할 만한 동료들이 생기고, 여전히 많은 사모임에서 초대가 들어왔다. 겉보기로는 완벽하게 평화로운 이면의 사생활에서 윤설은 곧잘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사람이었다.
똑똑한데 어째 사람은 잘 못 보는 친구야.
사심 없이 친해진 친구들이 받은 인상을 축약하자면 그랬다. 머리 회전도 제법 빠르고 분야가 다른 친구들의 작업 방식도 자주 들으면 금방 외워 곧잘 대화에 끼는데 방심하면 겉만 멀쩡한 사람 넘치는 연예계 종사자들 모임에서 요상한 종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었다.
슬슬 이 사실을 받아들인 신입 매니저도 이제는 알아서 미리 뒷소문을 부지런히 모아다 ‘무슨 말을 해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사람 목록’을 주입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도대체 윤설의 문제가 뭘까. 날 잡고 심층적인 토론을 벌인 지인들은 몇 가지 추측을 손에 꼽았다.
하나, 일단 사람 안 가리고 태도가 나긋하다. 딱 봐도 수상한 놈들은 초장에 떼놔야 하는데 윤설처럼 하다가는 ‘인상이 좋으시네요.’가 주 멘트인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잡혀 3절 이상 듣게 돼있다.
둘, 편견이 너무 없다. 조심스레 윤설이 그 드물다는 2차 성별자라 어지간한 문제에 오픈 마인드일 것이라 쳐도 보통은 ‘아, 좀 그렇네.’ 할 일에 무뎠다. 조상님의 신호도 무시하고 일단 공평한 마음가짐으로 대하는 묘한 회로가 있었다.
셋, 임자 있는 사람도 건드리는 부나방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방송계에서 공개 연애 중이고 반지까지 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윤설은 그 효과를 너무 믿은 나머지 그러거나 말거나 어떻게 해보자는 또라이들이 무수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종종 잊었다.
지인들의 열띤 발언을 다 경청하고 나서 깔끔하게 인정했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는 말에 모두가 들고 있던 커피를 원샷하고 알아서 윤설을 건져내자는 도원결의로 그날의 대화를 마쳤다.
…참 좋은 사람들이다.
윤설은 내심 미안해하면서도 그들에게 다른 애정으로 보답하면 했지 어리숙해 보이는 행동을 고치려 하지는 않았다. 그럴 때마다 채주호 또는 채주호와 한두 다리로 연결된 인물들을 더 자주 마주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멀쩡한 사람들 속 어딘지 눈빛이 공허한 중독자들이 ‘좋은 거’ 해볼 테냐고 맴도는 주변에, 공공연한 연인이 있음에도 하룻밤의 환상쯤은 어떠냐며 윤설을 탐내는 치기 어린 육체들이 엉긴 자리를 간발의 차로 벗어날 때, 보통의 운반책이나 구매자가 아닌 듯한 날 선 눈빛의 수상한 사람들이 윤설을 알아보고도 비껴가는 길목에.
“또 뵙네요, 채 사장님.”
“그러게요. 윤 배우도 은근히 재밌는 자리 안 놓친단 말이야.”
“친구들이 워낙 소식 밝은 사람들이라 저도 덕 보는 거죠.”
“그래요. 재밌게 놀고……. 몸조심하고. 응?”
“채 사장님,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왜요. 윤 배우도 이거 관심 있습니까? 아니면 바람 한번 피워볼 건가?”
“대표님께 리본 거래 따는 대가로 뭘 드렸습니까?”
“어?”
“다른 뜻은 없습니다. 친분이 깊어 보여서 궁금했어요.”
“어어, 재미있는 질문을 하네?”
통칭 ‘채 사장’, 채주호는 스폰서와 출세욕 강한 이들을 이어주기도 했고 투자금이 애매하게 부족한 프로젝트나 회사 사이에 끼어 갑자기 돈을 불려주는 등 발 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다 각자의 영역을 재가며 활동하기 마련인 가운데 채주호 혼자 경계를 넘어 날아다닐 수 있게 하는 마법의 수단은 언제나 가장 최신의 마약을 살 수 있는, 아직까지 잡힌 적 없는 유능한 공급책이라는 점이었다. 모두가 채 사장을 알았고 생뚱맞은 자리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웃으며 어슬렁대도 못 볼 척할지언정 이상하게 여기는 자가 없었다.
윤설 입장에서는 무척 수상한 인물이다. 한 번씩 크고 작은 일에 휘말린 윤설 때문에 걸음 하던 최윤이 돌연 화를 냈을 때 곁에서 들은 말로 운조의 약을 훔쳐 내돌린 자가 있다고 했다. 미성년자까지 구매 혹은 운반책으로 이용해 9시 뉴스에 보도된 조직으로는 흘러가지 않았다지만 ‘리본’으로 불리는 운조의 약을 노리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뜻밖의 장소에 흘러 그날의 윤설이 억지로 먹을 뻔한 것이다. 최윤은 신약의 등장과 독점 유통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임을 인지하고 있었고 시간을 들여 해결하는 거라 했었지만, 결과가 윤설에게 큰 사고였을지 모른다는 데서 평정을 잃었다.
현장에 고성이 오갔다. 윤설은 바짝 얼어붙은 직원들의 침묵 속에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었다.
‘뿌리칠 수 있으면서 왜.’
‘아닙니다. 잊어요.’
급기야는 남들보다 센 힘으로 일반인들에게 꼼짝없이 구속당해 있던 윤설에게도 질책하는 듯 화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딱 한 차례 윤설이 상대를 공격했을 때 상대가 적잖게 다쳤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금방 말을 돌렸으나 근래 가장 큰 일이었다.
채주호가 그 원흉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붉어진 얼굴을 감추던 윤설과 마주쳤던 은성 건물에서 보였던 태도로 짐작하자면 최윤에게도 심심찮게 싱그러운 육체를 자랑하는 남자 혹은 여자를 소개하려 들었을지 모른다. 후자의 심증에 약간의 사심까지 더해, 윤설은 채주호를 상당히 거슬려 하던 참이었다.
“내가 최 대표한테 값을 후하게 쳐줬거든요.”
“…그렇군요.”
“옛날부터 남들은 못 해주는 일도 곧잘 해드렸고, 우리 사이가 제법 오래됐습니다.”
“또 뵐지도 모르겠네요.”
“그럼요. 그러니까 윤 배우도 너무 경계하지 말고 잘 지내봐요.”
거기다 채주호도 자신의 위치를 굳이 낮추거나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윤설이 묻기를 기다렸다는 듯 퍽 친근하게 굴었다.
어느덧 가까워진 그를 피해 거리를 벌리자 한 걸음 다가오고, 적당히 고개를 까닥이며 지나치려 하는데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마침 나도 윤 배우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이제야 기회가 되네.
그리고 다른 손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윤설의 감으로는 평소 그가 쉽게 꺼내 보이던 약 포장지, 알약 따위와는 다른 부피감이었다.
“윤 배우! 윤설!”
윤설은 막다른 곳에 몰리기 전에 몸을 돌려 힘껏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