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5)

9.

윤설의 걱정과 달리 수소문 없이도 현지 유명 클리닉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호텔 노트북으로 검색 몇 번 했을 뿐인데 차로 멀지 않은 곳, 그것도 대로변에 2차 성별자를 전문으로 보는 클리닉 정보가 나왔다. 알파―오메가 부부가 공동으로 진료를 보고 현지 방송에 출연하거나 각종 자문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이력이 심적 부담감을 덜어주었다.

혹시 몰라 연락하니 박 대표나 최윤이나 몸이 불편하면 응당 진료를 받아봐야 한다고 흔쾌히 허락했고, 으레 그렇듯이 우형과 함께 다녀올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윤설은 경호 팀 직원이 권하는 대로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혼자 빠져나왔다.

근래 사람들 시선도 적고 촬영도 순조로운 초입 단계인데 이상하게 컨디션이 들쭉날쭉했다.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했던 미미한 불편함, 이질감, 가끔은 몸살이나 두통 같기도 했다.

주변에서는 음식도 안 가리고 식수에 적응을 못 한 것도 아닌데 뒤늦게 고생인 윤설을 두고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간 언론에 노출되어 스트레스가 컸던 모양이다, 내심 이번 영화에 대한 부담감이 큰가 보다, 그 외에는 마땅한 이유를 대지 못했다. 윤설이 호르몬 문제라고 하면 더더욱 말을 보태기 조심스러울 테니 뭐든 확실해진 다음 밝히는 편이 낫다.

“이전에도 비슷한 증상을 겪은 적 있나요?”

형질을 비롯해 간단한 인적 사항을 작성하고 현재 불편한 증상이 무엇인지, 복용하는 약 이름, 복용 기간, 파트너의 유무 등에 답했다. 의사는 상당 기간 약으로만 러트를 보냈다는 부분에서 눈썹을 들어 올렸지만 곧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뜻인 듯 중매를 통하지 않고 오메가인 짝을 만나 무탈히 가정을 꾸린 자신이 행운아일 뿐 아직까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검사는 하겠지만 자세한 결과가 나오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예요.”

“네. 체류 기간이 긴 편이니 괜찮습니다.”

“좋아요, 좋아. 파트너의 페로몬도 불편합니까?”

“…그 사람은 2차 성별자가 아니라서요.”

“그렇군요. 그러면 제삼자의 페로몬 비교군은 안 되겠지만… 괜찮아요.”

첫 진료이니만큼 비교적 결괏값이 빨리 나오는 검사 몇 가지만 두고 가능성을 나열해야 했다. 스쳐 가는 감기나 속에 탈이 난 게 아닌데도 지속되는 불쾌감, 개운찮은 느낌과 몸이 완벽하게 마음대로 잘 기능하지 않는 듯한 불안, 간헐적인 두통, 오심.

의사는 윤설이 몇 년간 들어본 적 없는 요구를 했다. 자신은 알파고 의사이니 걱정하지 말고 페로몬을 방출해 보라는 것이었다.

한껏 감추는 데 능숙하던 윤설이 다 했다고 답할 만큼 페로몬을 풀어내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다시 갈무리해 보라는 주문이 오히려 쉬웠다.

“판정 수치에 비해 약해진 상태예요. 알고 있었어요?”

“아니요, 전혀.”

아주 만약 페로몬을 흘렸다 한들 그걸 알아챌 만한 상대도 없었다.

“잠시 실례할게요. 제 페로몬은 어떻게 느껴지는지 말해주세요.”

의사는 호불호를 떠나 향의 종류나 세기, 신체적인 반응이 있는지 등을 상세하게 말해보라 격려했다. 저도 모르게 긴장한 티가 많이 났나 보다.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준비됐다 한 다음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두 손 깍지를 끼고, 잠시 후 망설이며 책상 위로 올라가며 상체를 약간 기울였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같은 알파 페로몬이 좋지는 않죠?”

“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천천히 말씀하세요.”

“…잘 못 느끼겠습니다.”

“으음.”

의사는 잠시 차트를 작성하고는 다시 한번 양해를 구했다. 내선 전화로 누군가를 호출했는데, 마찬가지로 가운을 입은 사람이 들어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내 파트너이자 오메가 진료를 보고 있는 의사입니다. 저분도 우리 병원 직원이고, 오메가예요.”

“네. 페로몬이 남았을 텐데…….”

“괜찮아요.”

의사는 동료 의사와 뒤따라온 조수에게 차례로 방 안에 남은 페로몬의 묘사를 부탁했다. 파트너라는 의사는 밝은 목소리로 당연히 당신 것밖에 모른다며 웃는다. 대신 다른 알파의 향과 섞인 건지 농도가 옅다고 했다.

이어 조수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태도로 두 알파의 페로몬을 구분해 냈다. 감사 인사로 두 사람을 얼른 쫓아 보낸 윤설의 의사가 상황 파악이 안 된 듯한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두 사람 차이는 각인 상대가 있느냐 정도입니다.”

“각인한 파트너끼리는 서로의 페로몬만 인지한다는 이야기가 맞나 봐요.”

“그럼요. 허위 정보가 아니에요.”

단서는 있는데 윤설로서는 쉽게 유의미한 가정으로 잇기 어려운 조각들뿐이었다.

처음으로 근심스러운 얼굴이 된 의사가 차분히 이어간 설명은, 당연히 결과를 기다리는 검사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유보적인 것이었으나, 윤설도 일종의 각인 반응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윤설은 어쩐지 황당한 가설을 들은 기분이 들어 의사의 말을 한참 곱씹었다. 이해도 인정도 더디게 다가왔다.

“제 러트 상대는 분명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물론 확실하지 않아요. 검사 결괏값 중에 페로몬 기관 이상이라 나올 수도 있지요.”

“…그렇겠죠?”

“다만 환자분이 말씀하신 내용만 보면 애착이나 의존도가 굉장히 높거든요. 함께한 시간에 비해, 다른 환자 차트에 비해서요. 노팅도 시도했다면 무의식적으로는 더 깊은 관계를 희망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안심시키는 말이 중간중간 추임새처럼 쉼 없이 들렸지만, 이미 충격받은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원하는 마음이 있다 해서 그렇게 저지르고 봤을 줄은 몰랐다. 여기서 얼마나 더 멋대로일 수 있을까.

“상대가 2차 성별자도 아닌데, 나와 함께 각인을 원할 조건이 안 되는데 환자분만 일방 각인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는 사실이 상처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일방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네. 하지만 사람 몸이 심리 상태에 크게 좌우되는 사례가 많아요.”

의사는 여러 가지 흔한 이야기를 예로 꼽았다. 상상 임신, 플라세보 효과, 우울증의 신체화 증상, 불안이나 공황, 트라우마에 엉뚱하게 호흡 곤란이 오는 경우나 특정 조건하에서만 환각을 보는 각종 의학적 사례들.

윤설도 몇 가지쯤은 들어본 적 있었고 충분히 가능하다 여겼었다. 자신의 일이 되기 전까지만 그랬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각인 착각이든 페로몬 기관 이상이든 다 치료법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다음 방문일을 잡아주며 복용 중인 약 외에 증상을 가라앉힐 만한 처방을 주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이 진료 편히 보았느냐 물었는데도 바로 알아듣지 못해 괜찮냐는 말까지 들었다. 윤설은 최대한 태연해 보이도록 동요를 감추고 그를 안심시켰다.

다만 무뚝뚝하게 진단명을 묻는 순간 최윤이 떠올라 검사할 게 많아 오래 걸린 게 전부이니 한국에 전할 때는 그냥 잘 다녀왔다고만 해달라는 말로 넘겼다.

* * *

한국에서 출발하는 비행편은 매일 있었지만 최윤이 몸을 싣고 출발할 날짜는 전날 겨우 알았다. 통화하며 예상했던 것보다 시일이 더 걸린 셈이다.

뭐든 물어도 된다던 허락을 떠올리고 명오에게 묻자, 자세한 사정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경쟁사 때문에 경계가 삼엄한 상황이라 알려주었다. 눈치로 볼 때 평범한 회사 간의 문제를 떠난 상황인 듯했다. 그래서 비행편을 잡았다가도 취소하거나 미루는 일이 수시로 있었다고.

바쁜 일 끝나면 온다더니 어쩌면 윤설이 1차 촬영을 마치고 한국에 갈 때까지 계속 바쁠 수도 있는 거였다. 한편으로는 그 와중에 시간 내서 장거리 비행을 감수하고 자신을 만나러 온다 싶어 가슴속이 술렁이기도 했다.

“잘 먹고 잘 잔다더니 얼굴이 왜 이래요?”

“보기 안 좋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요.”

햇빛 아래 만나자마자 안색이 안 좋다기에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데다 남몰래 심신이 서러웠으니 아무래도 외모로 드러나는가 걱정스러웠다.

괜스레 제 볼을 쓰는 윤설의 손을 가만히 잡아 내린 최윤이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누가 걱정하는 말에 못났냐고 되묻느냐고. 그간 낯선 땅의 미추 기준이 달라 시큰둥한 사람들을 보기라도 했는지 묻기에 곰곰 생각하니 와르르 무너지듯 냉정한 얼굴을 허물어뜨리며 웃었다.

그에 울컥 서운해지면서도 안심되는 기분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의사를 만날 때마다 듣는 말이었는데 들을수록 이상하게 느껴졌다.

“짐은 직원한테 맡기지 그랬어요.”

“아, 이거요. 짐 아닙니다.”

“쇼핑 곧잘 나간대서 누구랑 놀다 온 줄 알았습니다.”

한쪽 어깨에 가방끈을 걸고 트렁크를 끄는 최윤 뒤에서 함께 나온 직원이 따라와 손잡이를 넘겨받았다. 배낭까지는 맡기지 않고 느긋하게 걷는 모양을 곁눈질하다 종이 가방을 최윤의 빈손으로 넘겼다.

“선물은 항상 저만 받은 것 같아서요.”

“그랬나. 그래서 윤설 씨가 나 주는 거예요?”

“네.”

애들처럼 감탄사를 뱉고는 지금 살짝 봐도 되냐고 묻길래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보고 있기 민망스러웠다.

촬영 시작 전에 우형과 들러 사둔 선물이었다. 사놓고 보니 최윤의 취향에 맞다면 이미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윤설답지 않게 홍보 모델이었다는 연을 앞세워 한 번 더 찾아가기도 했다.

“사이즈 잘 구했네요. 여기는 딱 윤설 씨 정도까지 봐주던데.”

“운이 좋았어요.”

다행히 기성품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밝지 않았더라면 계속 엉뚱한 곳을 바라보며 걸었을지 모른다. 봄버 재킷류는 윤설에게는 어색한 디자인이었고 취향 밖이었지만, 평소 최윤의 가벼운 차림에는 매치하기 쉬우리란 짐작이 그럭저럭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재킷과 드라이빙 슈즈 사이에 손바닥만 한 작은 상자가 끼어 있는 것까지 발견한 최윤이 가볍게 흔들어 보았다. 완충재 때문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며 기대하는 눈으로 윤설을 바라본다.

“그건 그냥… 같이 일했던 디자이너가 아직도 현직이라 만났습니다.”

“원래 당신 건데 나 주는 거 아닙니까?”

“아닙니다. 처음부터 대표님 드리려고 골랐어요.”

“그래요?”

작은 상자가 윤설의 손으로 넘어온다. 가방도 멨고 쇼핑백도 걸고 있어서 자잘한 움직임이 불편하다는 핑계였다. 할 수 없이 윤설이 틈 없이 물린 상자를 힘주어 열고 안이 보이게 기울였다.

“초기 디자인이 귀걸이나 반지에 올리려던 거라고는 하는데, 대표님 하시는 그…….”

“피어싱이요.”

“네. 거기에도 어울릴 것 같아서요.”

“좋네요. 거슬릴 사이즈도 아니고.”

옆에서 바라보기에도 확연히 드러나는 미소였다. 깐깐한 백화점에 감히 자기 매장을 꾸며도 된다고 허락받은 듯한 기분이 든다.

선물을 흡족하게 받아준다고 성취감까지 느낄 일인가 하면서도 상자를 곱게 닫아 쇼핑백에 밀어 넣는 손놀림이 경쾌했다.

“고마워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간 제가 너무 둔했습니다.”

“아뇨. 윤설 씨가 보고 싶다고 하길래 나는 또.”

배낭만 트렁크와 함께 짐칸에 싣게 하고 나란히 차 뒷좌석에 앉았다.

벨트를 매며 잠시 가까이 몸을 기울인 최윤이 귓가에 속삭인다. 보자마자 끌어안고 놓지 않을 줄 알았다고. 어느 날 이후로 편히 주무시란 말보다 더 끝인사처럼 말하기에 울지도 모른다 마음의 준비까지 했다고.

윤설은 조금 웃으며 부정했으나 자신도 그게 걱정돼서 몇 번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고는 했다.

“아니면, 물건보다는 호텔 키나 콘돔 같은 준비물을 주지 않을까 했죠.”

“…네?”

“농담입니다. 돈 많은 애인한테 서프라이즈 하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그런 뜻에서.”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최윤은 가방 안을 뒤적여 포장 리본을 건져냈다. 길이를 가늠하듯 양손에 넉넉히 늘여 쥐더니 윤설의 목에 타이처럼 걸어 나비 리본으로 마무리했다.

답지 않은 장난이다 싶어 작게 웃다 문득 눈이 마주친다. 시선이 뜨끈해진 귀 언저리, 눈에서 목 위의 리본과 흘러내린 끝이 달랑이는 가슴께로 내려갔다.

시종일관 짓궂게 미소 지은 채였다. 한발 늦게 목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든다.

“고작 이런 걸로 선물이라 하면 누가 봐도 양심 없다 할 거예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언론 효과를 위해서라고 하나 최윤에게 받은 선물이 적지 않았다. 가끔은 그의 수집품 사이에서 사용감이 없는 옷을 받기도 했고, 만나러 오가는 김에 구색을 맞추는 듯 내미는 물건들이 보잘것없던 적이 없다. 겨우 한 번의 선물, 한 번의 장난으로 답했다 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의해 놓고도 손가락 끝에 둘둘 말린 끈을 잡아당겨 매듭을 끌러낼라 치면 웃고, 대화하다 무심결에 끄트머리를 쥐면 또 웃기에 도착할 때까지 우스운 모양으로 매고 있었다.

* * *

도시의 역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학교들도 제각기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라 대학가며 명문 사립고는 대체로 구시가지에 위치했다.

구시가지라 해도 인구가 몰리는 수도인 데다 기숙사 기준에 탈락한 학생들이 군데군데 지낼 곳을 마련하는 다양한 형태의 주거 건물이 있고 그를 따라 마켓이나 식당가가 형성된 지 오래다. 계획도시의 단면처럼 잘 재단된 신시가지 거리의 깔끔함에는 못 미쳐도 아쉬울 게 없는 동네였다.

최윤의 수행원과 운전사는 그 거리 한편에 두 사람을 내려놓고 호텔로 차를 돌렸다. 윤설의 목에서 풀어낸 리본이 손잡이에 돌돌 말린 종이 가방도 차에 실려 떠났다.

“혹시나 해서 말해두는데, 같은 숙소 아닙니다.”

“더 위층으로 스위트룸도 몇 개 있다고 하던걸요.”

“그래도 투자자 가족이 돌아다니면 좀 껄끄러울 테니까요. 얼굴도 다 아는 마당에.”

윤설 씨 만나러 온 개인으로 생각해 주면 좀 낫겠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고민거리가 될 거라고.

책임자 입장에서는 모든 일에 끼우자니 외부인이고 빼자니 귀한 손님처럼 모호한 골칫덩이가 없다. 그럼 어디에 묵느냐는 질문과 함께 자연스레 방향을 정하고 걷는 최윤을 따라 걷는다. 크리스마스 전후로 방학 비슷한 기간이 있다고 하니 아직은 학생으로 보이는 인파가 넘실대는 때다.

“나가고 싶으면 이 동네는 무조건 벗어났지만, 아무튼 자주 가는 데가 있었어요.”

“여기서 쭉 학교 다니신 건가요?”

“네. 귀찮아서 기숙사 들어갔습니다.”

“…불편하셨을 텐데.”

“처음에는요. 보름 정도 지나면 룸메이트가 대충 패턴 맞는 놈들끼리 맞춰지게 돼 있어요.”

희망하는 룸메이트로 배정을 다시 받을 수 있다니 생각보다 자유로운가 싶었다. 그러나 잠자코 듣다 보니 어느 데건 기숙사 규칙은 나름 엄한데 자체적으로, 알아서, 저들 편의대로 방을 바꾸고 짐을 옮기거나 남의 물건을 대충 아쉬운 대로 빌려 쓰며 지냈다는 말이었다.

최윤을 비롯해 전혀 기숙사 생활이 안 맞아 보이는 놈들이 군말 없이 기숙사에 들어간 이유는 대강 그런 점을 노려 한 학기쯤 어울리다 보면 동류를 파악하기 쉽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이 도시가 나고 자란 연고지인 엘리트들이야 수업이 겹치고 사교 클럽 따위에 나가면 간 보는 시간만 길지, 닿기는 어렵지 않다.

“마피아의 자식들이나 정계 인물의 둘째, 셋째 이런 친구들은 와서 별개의 인맥을 쌓거든요.”

“대표님이 만나고 싶었던 건 어느 쪽이에요?”

“중남미에서 온 친구들, 해상 무역이 갑자기 잘되는 집들요?”

정처 없이 걷는 듯 길을 따라 걷다가 길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의미 없는 가게 물건에 잠시 시선이 머무르기도 했다. 그래도 걸음은 멈추는 일 없이 이어지다 캠퍼스 정문이 비스듬히 보이는 카페의 야외석 부근에서 끊겼다.

최윤은 거기서 신 앞머리로 돌바닥을 툭툭 치다 시야가 더 좋은 쪽 자리를 가늠해 윤설에게 권했다.

“보고 배운 게 얼마나 치사하고 무서운지 알 겁니다, 윤설 씨도.”

“…….”

“그런 놈들은 자기 부를 과시하기도 하고 유서 깊은 가문이 어쩌고 하는 어린애들 자존심도 살살 간질여 주면서 귀신같이 현지 사람들 갖고 노는 걸 흡수해요.”

이따금 건조하고 차가운 바람이 손등을 잡았다 놓으며 지나갔다. 아직은 기분 좋은 서늘함에 가까워 옹송그리는 사람이 없었다.

최윤은 바람 부는 방향을 피해 의자를 비뚤게 놓고 앉아 작은 담배 케이스를 흔들었다. 라이터가 함께 들었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금방 알아본 윤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가락 두 개 두께의 도톰한 궐련이 나온다. 순식간에 어떤 시선들이 모였다 윤설이 불을 붙이려 몸을 내미니 후다닥 흩어졌다.

“방금 쳐다본 애들, 언감생심 약인가 한 겁니다.”

하다못해 그 흔한 위드라도 되는 줄 알고. 흔해도 대놓고 대학 코앞의 대낮 노천카페에서 피워재끼는 문화일 리 없지만 이미 버릇 든 학생들이 반사적으로 게걸스레 쳐다보고 아차 싶었던 것이라 한다.

저도 모르게 학생들이 많은 카페 안쪽을 돌아보려다 가까스로 고개를 튼 윤설 앞으로 손바닥만 한 메뉴판이 다가왔다. 최윤이 그들을 기다리는 종업원에게 닿지 않게 연기를 가리고 있다가 두 사람분을 함께 주문했다.

“그거 맛있어요.”

“대표님이 주문하신 거랑 비슷해요?”

“약간 더 달아요. 지금 윤설 씨한테 필요할 것 같은데요.”

잠시 말이 없었다. 뭐라도 나오기를 기다리며 정신없이 학교 안으로 달려가는 학생이 발을 삐끗했을 때 약속한 것처럼 어어, 하는 소리를 낸 게 전부였다.

그러다 끝이 타서 떨어지는 시가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줄 알았는지 느린 움직임으로 입에 문 쪽을 잡아 윤설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준다. 낯설고 매운 냄새임은 분명했지만 걱정했던 것만큼 수상쩍은 향은 아니었다.

“최근에 담배 많이 피우신다고 들었어요.”

“조금요.”

“신경 써야 하는 일…이 계속 있었다고도 하고요.”

“그것도 맞습니다. 커피나 술 줄여야 머리가 잘 돌아가잖아요.”

최윤이 고개를 까딱이며 지켜보고 있어도 윤설이 궐련을 입에 대보는 일은 없었다. 돌려주지도 않은 채 그저 알아서 다 타 재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음료와 샌드위치가 나오자마자 상체를 기울여 숙이는 최윤의 입에 도로 물려줘야 했다.

대신 윤설 쪽으로 밀어준 접시 위, 모양은 다소 투박하지만 재료가 풍성하게 들어간 샌드위치는 반씩 잘라 유산지로 꽁꽁 싸맨 것이 공부하면서 먹기 편해 보였다. 한 입 먹어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최윤의 눈이 걀쭉해지며 호를 그렸다.

“미 대륙이나 서유럽권에 약 문제가 많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흔할 줄 몰랐습니다.”

“나름 수요 공급의 이해가 잘 맞으니까요. 한국도 요즘 양지화돼서 수급하기 바쁠 지경입니다.”

“저, 대표님.”

“네.”

“전에 러트 때, 대표님도 하셨다고 그랬었죠.”

“그랬죠.”

“꼭 하셔야 하는 겁니까?”

“애매합니다. 파는 사람이 구분도 못 하면 통수 맞기 좋아서. 그렇다고 앞장서서 절어 살다가는 망가지기 쉽고요.”

“…걱정돼서 물었어요. 좋다 나쁘다 하는 이야기 아닙니다.”

“알아요.”

윤설이 흘리지 않도록 천천히 샌드위치를 베어 물고 단 음료를 마시는 동안 궐련에 붙은 불도 거진 다 꺼졌다. 휴대용 재떨이에 남은 잔해를 뭉개 넣는 손이 빨라 홀린 듯 보는 눈 앞으로 물수건 올린 손바닥이 불쑥 끼쳐들었다.

눈만 끔벅이다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물수건을 들었는데, 손가락 끝에 남은 검은 재가 보인다. 손을 받쳐 들고 가만가만 문질러 닦으며 이런 뜻이었을 거라 멋대로 짐작했다.

“우리 별장 산책로에서 본 잡초, 생각납니까?”

“…못 먹는 거라고 하셨던 거지요? 직접 치우신 풀 더미요.”

“웃기는 종자예요.”

말끔해진 제 손가락끼리 한두 번 비벼본 최윤이 음료부터 들이켰다.

윤설은 아름다운 산책로와 어울리지 않던, 그야말로 잡초 같은 식물을 기억해 내려 애쓴다. 그때는 술렁이는 마음과 요란한 이끌림을 붙잡기에도 벅찼었다.

“치명적인 피해 같은 건 없지만 의존성이 강합니다. 배고픔도 피로도 잊고 낮도깨비처럼 시간만 보내게 되거든요.”

“그런 게 왜 별장에…….”

최윤이 짜증스레 방해물을 집어 던진 풀숲 너머, 팻말과 사슬로 구분된 비탈 너머의 경작지가 있다던 말이 빠르게 달려갔다. 어찌나 빠르던지 윤설의 어깨를 밀고도 돌아보기 전에 사라지는 무뢰한이나 마찬가지였다.

“거두면 사흘 안에 성분이 죽는다는 단점이 있어서 바다는커녕 국경도 못 넘는 점이 오랜 고민거리였습니다.”

“…….”

그런 걸 그쪽 부호 자식들이 유학 와 사가로 마련한 집에서 좀 키워다 대학생들한테 나눠주었다. 정제되지도 않은 풀떼기를 준다며 호기심 반 비웃음 반으로 물고 다니던 대학생들은 몰아치는 과제와 시험의 연속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천연 각성제라며 열광하게 됐다. 물론 놈들의 몸은 안 자고 안 먹은 값을 착실하게 받아 가 몰골이 점점 말도 아니었지만, 최윤이 대학을 다니는 내내 인기를 유지했다.

“생각해 봤는데 마침 그쪽에 빈 땅도 넓고 사유지라 물 대는 게 어렵지도 않더라고요.”

“그러면 대체 얼마나, 그것 하나만요?”

“진지하게 들어요. 나 지금 사업 기밀 말해주는 건데.”

“…저 때문에 그런 걸 드셨어요?”

“시판용 테스트 겸, 몸 사리는 겸 해서요. 사흘을 내리 뒹군다는데 어디까지 사실인지 가늠도 안 됐고요. 덕분에 잘 버텼죠.”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진담인지 모르겠다. 입에 맞게 달던 음료의 뒷맛이 무겁고 끈적하게 느껴진다. 말만 들으면 피로 회복제나 숙취 해소용 드링크 이상 해롭지 않은 듯해 마음이 놓이는 한편 어딘지 답답한 응어리가 진다.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진 둘 사이의 거래 조건 뒤에 수년간 계획된 다른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은성이 이용된다 해서 새삼 안타까울 만한 애정은 없었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바쁜 일’ 궁금해했잖아요. 내가 뭘 주워 먹었는지 신경 썼고. 그래서 말하는 거니 잊어도 됩니다.”

윤설은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말대로 모르면 몰라서 안달했을 자신이 쉽게 그려진다. 아니, 이곳에 온 뒤 매일 그런 마음이었다.

간단한 요기를 마친 뒤 최윤의 학교 생활 이야기를 더 듣는다. 스포츠 클럽이 많아서 좋았다는 말이 그다운 소감이라 조금 웃을 수 있었다.

성적에 매달리는 건 또 별개의 문제로 건강미에 집착하는 분위기상 클럽에서 눈에 띄는 학생들은 성별을 불문하고 인기가 좋다고도 한다. 평균적으로 술, 클럽, 연애를 미루지 않는 전투적 생활이 흔해 심심할 틈은 없었지만 가끔은 귀찮았다는 감상이다.

그 틈에 어울리는 최윤을 상상해 보면 어색함이라고는 없이 자연스러웠으리란 확신이 든다. 궁금했다. 입 밖에 내지 않은 건 고상한 심미안이 너저분한 거리를 벗어나 탐할 만한 경관과 미술품을 찾아다니게 했다는 과거 이야기를 가까스로 기억해 낸 탓이다. 아마 필요에 의해서, 때로는 심심풀이 삼아 발 들였겠지만 그렇게 자주는 아니었을 거라고.

“한잔하면서 교수 욕하고 싶으면 꼭 이런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었죠.”

“교수님들도 인근에서 식사 자주 하나 봐요.”

“만만한 게 회사 근처고 학생 상대 장사라 가격 대비 먹을 만하거든요.”

“대표님도 싫어하는 교수가 있었어요?”

“그럼요.”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온 방향과 반대로 구시가지를 돌았다. 최윤은 머릿속에 구시가지 전부가 들어있는 사람처럼 지나치는 블록마다 볼 만한 것, 개인적으로 얽힌 일화를 설명해 주었다.

이른 저녁을 찾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그만이 모국어를 읊고 있었기 때문인지 유독 또렷하게 박혔다. 윤설에게는 없고, 있었어도 판이하게 달랐을 최윤의 20대 어느 날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던 최윤이 잠시 목을 가다듬으며 방향을 고민했다. 어느 쪽이 더 볼 게 많았더라 중얼거리며 일순 시선만 옆으로 돌아갔다.

“대표님?”

“이쪽으로.”

그가 애초에 쳐다보지도 않던 골목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황급히 따라가니 열지 않은 상점 문에 처박힌 남자와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최윤의 다리부터 눈에 들어왔다.

윤설은 뒤를 돌아 누군가 지나가지 않는지 확인한 후 가까이 다가갔다.

“카페에서부터 쭉 따라온 놈이에요.”

한마디로 설명하더니 공용어가 아닌 현지어로 남자를 을러댔다. 윤설은 거기까지 알아들을 재주는 없어 골목 입구 쪽을 흘끔대며 최윤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든 추격자의 얼굴은 뜻밖에도 적당히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의 그것이었고, 눈빛도 평범했다. 최윤이 붙여준 직원들만큼의 비범함도 없었다.

몇 번 몸부림치는 남자를 거칠게 압박한 채 질문만 하더니 기어이 남자에게서 핸드폰과 작은 비닐 백을 받아낸다.

최윤이 비닐 백 안의 알록달록한 비타민 같은 것들을 꺼내 굴리며 질문을 더 했고 끝내는 바닥에 던져 남은 발로 꾹 짓밟았다. 순식간에 가루만 남았다.

최윤은 핸드폰은 윤설에게 던져주고 자신의 담배 케이스에서 납작한 사탕을 털어 넣은 뒤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교내에서 장사하는 놈이라 따라붙었답니다.”

“…핸드폰은 어떻게 할까요?”

“글쎄, 윤설 씨 사진은 그냥 SNS에 자랑하려고 찍었다는데 어쩔까요.”

잠금이 걸려있지 않은 핸드폰 앨범을 눌렀다. 배경에 함께 걸린 듯한 각도지만 사진마다 윤설의 옆얼굴이 잘 보이게 찍혔다.

황당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남자가 무어라 다급하게 변명했으나 최윤의 짜증만 돋운 듯했다.

“사진 지우고 돌려보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요즘 핸드폰 좋아서 복구됩니다.”

“촬영 때문에 와서 찍힌 사진은 문제 안 될 거예요.”

“그렇기야 합니다만. 관광객들 상대로 이렇게 사진 찍어서 인신매매단에 넘기는 수법이 유행했었습니다.”

지금처럼 얼뜨기 하나, 혹은 작정한 무리 여럿이 소수로 여행하는 사람의 얼굴을 찍어 넘기거나 인적이 드물면 아예 협박해서 여권 사진을 찍고 보내준다. 지역을 잡고 있는 패거리가 사진들을 보고 사줄 사람이 있겠다 싶은 인물을 고르면 그들의 숙소를 추적해 납치한다는 괴담이 있었다.

독특하게도 유럽권 여행객들 사이에 퍼진 괴담이었는데 허무맹랑한 소설은 아니었다는 것이 최윤의 주장이다. 윤설처럼 멀쩡한 남자라도 모르는 일 아니냐며 이대로 보낸다면 머무르는 내내 생각날 텐데 너스레를 잘도 떨었다.

“…핸드폰을 부수는 편이 안전하겠네요.”

“핸드폰만?”

“…네. 핸드폰만.”

“윤설 씨가 그렇게 말하면 할 수 없죠.”

비로소 남자의 어깨를 짓누르던 발이 떨어졌다. 최윤이 핸드폰값을 치르는 듯 지폐 뭉치를 꺼내 남자의 재킷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무슨 말을 들었을지 모르지만 당장 쓰던 핸드폰을 가져간다는데 군소리는커녕 아무 말도 없었다.

“갑시다. 이리 줘요.”

골목을 벗어나 다시 큰길로 접어들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길 안내를 이어간다. 윤설은 익숙지 않은 사나움을 뒤집어쓴 옆얼굴이 제게도 향할까 두려운 사람처럼 최윤이 가리키는 곳보다 그 얼굴을 더 자주 흘깃댔다.

졸업 논문 담당 교수와 하도 맞지 않아 잘근잘근 씹으며 새벽을 보내곤 했다는 블록 끝 작은 펍을 마지막으로 구시가지를 벗어나 택시에 올랐다. 지내는 호텔 주변에 마음에 드는 곳이 있는지 묻기에 재빨리 부정했다. 다른 호텔명을 댄 최윤이 입 모양으로 ‘왜?’ 하며 영문을 모르는 윤설을 자세히 살핀다.

“근처에서 누구 만날까 봐요?”

“아닙니다.”

바래다주고 얼마 머무르지 않다 자기 숙소로 가버릴까 더럭 겁이 났다. 이제야 땅거미 지는 저녁 무렵이지만 피로할 테니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같은 땅 위에서, 겨우 하루 차이지만 떨어지면 안 될 것만 같다.

그에게 의지한 나머지 실컷 착각하고 있다는 페로몬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도 딱 잘라 구분하기 어려웠다. 미처 몰랐었는데 약으로 증상을 누르는 대신 미미하게 둔하던 감각이 활발하게 깨어 모든 순간을 새기고 있는 듯했다. 그럼에도 지나친 각성 상태로 곤두섰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한잔할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윤설 씨 컨디션이 안 좋다고 했네요.”

“가벼운 건 괜찮습니다.”

“방금 표정이 안 좋길래 혹시나 하고.”

“대표님 드신다면 옆에 있을게요.”

“그게 뭡니까. 어른 모시는 것처럼 말해.”

싱겁게 웃을 때 흩어지는 숨을 안다. 함께 누워 코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 보면 문득 재미있는 말을 들은 양 뜻밖의 웃음이 샐 때가 있었다.

제 무릎을 두드리던 최윤의 손가락이 예고 없이 다가와 윤설의 이마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넘겨준다. 그 손을 잡고 싶다고 생각하다 아직 택시 안임을 의식해 옷자락만 그러쥐었다.

택시가 멈춘 호텔은 우형과 관광 책자를 훑어볼 때 추천 리스트 상단에서 본 곳 중 하나였다. 배치 가구가 클래식하기보다는 현대 미술 전시관에 어울릴 법한 특이한 조형이라 만족도가 높고 루프톱과 지하에 콘셉트를 달리한 바가 있다. 최윤과 왔다면 그는 이런 데 관심 있지 않을까 하며 눈에 담아두었던 곳 로비에 있다는 우연이 새삼 신기했다.

“객실로 가나요?”

“네. 칵테일 정도는 룸서비스로도 된다니 아쉬워도 그걸로 만족해요.”

넓고 층고가 높은 구조였다. 침대 옆에 짐이 먼저 와있는 것만 확인한 최윤이 배낭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구경하기 바쁜 윤설에게 내밀었다.

컵라면 두 개가 종이컵 쌓기처럼 포개진 그대로 받자마자 욕실 쪽으로 가 옷을 벗는 등을 멍하니 보고 선 채로 문이 닫히고, 이어 물소리가 들렸다. 며칠 외국에 머무른다고 라면 생각이 간절할 입맛도 아닌 사람 가방에서 나온 컵라면은 엉뚱하게만 보였다.

“여태 서 있었어요? 앉지, 왜.”

가운을 걸치고 나온 최윤이 윤설을 부른다. 뒤늦게 정신이 들어 멋쩍게 웃으니 차가운 이마로 윤설의 이마를 꾹 밀듯 붙여 왔다. 없던 열이 간지럽게 피어오를 것만 같아 살짝 물러나고 말았다.

“안 좋으면 말해요. 나야 오늘 와서 어디 갈 것도 아닌데.”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당장이라도 돌려보낼 듯한 말이 나오면 서운하고 싫었다. 매끈하게 앞뒤를 잇는 평소의 화법과 다르게 튀어나온 답에 최윤의 입매가 굳는다.

걱정해 준 건데 다짜고짜 무슨 말을 했나.

윤설은 괜히 어색한 몸짓으로 테이블을 보았다가 룸서비스가 오면 술이 올라갈 자리다 싶어 그 아래 내려두고 앉았다. 신경이 온통 최윤을 향해 기능하는 듯한 감각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몸의 일부처럼 자유자재로 다스리고 숨 쉬듯 익숙해지기 전에 차라리 페로몬의 착오를 깨는 편이 빠를 터다.

“윤설 씨 졸업까지는 안 했었죠. 프로필상 그랬던 것 같은데.”

“네? 네.”

최윤이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달리 무슨 일이 있었나 묻지 않아 다행이었다.

“해외 일정 끝나고 다시 다녀봐도 괜찮을 겁니다.”

“이미 제적 상태 아닐까요?”

“학비 내고 홍보 몇 번 나서 주면 무기한 휴학이어도 살려줄걸요.”

그때는 되는 대로 급하게 골랐고 지금은 딱히 흥미 없어졌다면 굳이 번거로운 일 만들 필요도 없지만, 마음만 있으면 복학은 생각보다 간단하다는 말이다.

다 같이 어리고 고만고만할 때처럼 어울리는 식은 아닐지 몰라도 만학도 대하듯 어려워하지는 않으리란 확신까지 덧붙이며 윤설을 잔뜩 찔러놓고 지나가는 김에 말해본 듯한 얼굴이다. 최윤의 생각은 짐작도 안 되지만, 그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스스로에게조차 약간의 설움이 들었다.

“꼭 일과 관련 없는 곳에서 만나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친구도 여럿 사귀고요.”

“친구요.”

“이제 뭐 어때요. 그 사람들이 감시받을 일도, 잘못될 일도 없잖아요.”

“그렇네요. 저 때문에 누가 위험한 제안을 받거나 다칠 일 같은 거… 없겠네요.”

“영화가 잘되면 캠페인 돌 수도 있고요.”

“설마요.”

“왜? 윤설 씨도 알잖습니까. 감독 스타일 영화제에서 환장하는 거.”

‘할 수 있는 일’들이 윤설의 마음 이곳저곳을 툭툭 건드렸다. 탄산 기포가 가슴속에서 돌아다니는 듯 따끔한 자극이 남는 말들. 해도 되는 일들. 보통이라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망설임들이 걷힌 단순한 선택지.

벨이 울리자 최윤이 나서서 사람은 돌려보내고 술만 받아 왔다. 연둣빛이 고운 칵테일 잔에 꽂힌 과일 조각이 비뚤어진 모양을 바로잡아 윤설의 앞에 밀어 주고 자신은 와인을 잔에 들이붓듯 양껏 따른다. 화이트와인의 진하고 독한 향은 아니지만 가볍지는 않을 텐데, 금주 기간이 괴로웠던가 보다.

“…그리고 윤설 씨가 2차 성별자라는 소수성을 지나치지 못해서라도 뭐 하나 주고 싶을 겁니다.”

“다양성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데 열심이기는 하죠.”

“그런 이유로 받았다는 말 안 들을 만큼 잘할 테고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네. ‘좋아서 하는 일’이라고 했으니까.”

칵테일의 맛까지 새콤달콤해 속에서 별들이 톡톡 튀어 다니고 있었다. 오래도록 바라왔는데 오래된 나머지 떠올리기 어려웠던 일들이 밀려와 가슴 아래 고여있던 희망을 부추기듯이.

눈에 생기가 도는 탓인지 뺨이 상기된 탓인지 묘하게 들떠 보이는 윤설을 마주한 최윤이 느슨하게 기댄 자세로 입술을 축였다. 조금 이르고 상당히 약소했지만 축하주를 나누는 자리라고 해도 좋았다.

완연한 겨울로 접어들면 어떤 달에는 대략 어떤 절차가 있겠고 그사이 윤설은 촬영 일정에 따라 남는 시간을 여기에서 보내거나 한국을 오가며 편한 대로 겨울을 나면 된다.

이곳은 갑자기 추워지는 경향이 있으나 한국보다 덜 추워 근교나 돌아다니며 지내도 편안하다.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연말까지 여기고 한국이고 공연이 많은데, 누가 알아볼 걱정 없이 새로 사귄 스태프들과 다녀오면 남들 보기에도 좋을 거다.

최윤은 바깥 거리를 안내해 줄 때보다 느긋한 투로 한 해의 끝을 보내는 방법도 가지가지라 몸이 두 개이길 바라며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간간이 술맛이 좋은지 알코올 섭취 자체가 즐거운지 기분 좋은 듯 목을 울리기도 했다. 윤설은 이런 모습이 보고 싶어 밤마다 소원처럼 외었던 것이다.

“왜 그렇게 봅니까.”

“…네?”

“겨우 준벅으로 취했을 리도 없는데 어째 점점.”

“다른 생각 한 건 아니에요. 말씀하시는 일들이 잘, 실감이 안 났습니다.”

“겪어보면 막상 별것 아닐지도 모릅니다. 기대하는 시간이 더 즐겁다고도 하고요.”

최윤이 자작하던 와인 병은 3분의 2가 비었다. 긴장을 아주 놓아 눈꺼풀 닫히는 속도도 차츰 느려진다.

침대에서 주무세요, 낮게 부르자 설핏 미간이 구겨졌다. 그러겠다 답해놓고도 께느른한 피로감이 몰려오면 저항하지 않고 몸을 실어버릴 듯했다.

“…나 자면 윤설 씨는 그거 어떻게 할 겁니까.”

무슨 말인가 하니 최윤이 고개 까닥이는 시늉을 하며 시선을 떨구었다.

“섰잖아요.”

“씻어야 하니까, 혼자 해결하겠습니다.”

“오늘은 꼬셔도 안 되는데.”

“그, 런 거 아닙니다. 먼저 주무세요.”

여기서 불편하게 대충 눕지 말라고 속삭이며 황급히 욕실로 도망쳤다.

약간 더운 몸인 줄은 알았다. 아무래도 보고 싶었던 데다 약으로 눌러놓은 페로몬이 익숙한 향수 냄새며 특유의 체향을 반기기 때문에 일어난 불상사이리라.

문을 닫고 기대서 바지춤부터 내려다보는데, 옷 위로 티가 날 정도는 돼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밖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평소보다 낮은 온도로 물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며 아래를 쥐었다가 포기한다. 잔소름이 돋아도 꾹 참으며 부러 몸을 박박 문질러 씻었다.

지금은 러트에 가깝지도 않고 약도 시간까지 맞춰서 먹고 있는데 무슨 추태인지 싶어 울적해진다. 그놈의 알파. 마음 기우는 줄 알자마자 고작 한 번 불가피한 상황으로 허락했을 뿐인 러트에 짝을 짓겠다고 온몸으로 매달린 결과다.

윤설은 열기와 함께 잡생각까지 떠내려가기를 기다리며 한참을 씻고 나왔다. 자괴감이나 울적함은 물 얼룩처럼 남아있었으나 다리 사이가 얌전하게 죽어 그럭저럭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갈 수 있었다.

최윤은 거듭 깨운 보람이 있게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침대 가운데 가로로 길게 누워 이불을 어떻게 덮어주어야 하나 난감했지만 방 온도를 올리면 춥지는 않을 터였다.

“잠들 뻔했어요. 아니, 조금 잤나.”

“잘하셨어요.”

“해결했어요?”

“네.”

“말해봐요. 무슨 생각이었는지.”

침대에 앉자마자 팔을 벌리는 최윤을 보고 저도 모르게 상체를 숙여 안아주었다. 윤설이 편한 자세를 찾도록 놓아주지도 않으면서 대충 엉기는 몸이 따뜻하다. 안은 김에 바로 눕혀보려고 애쓰다 결국은 어떻게든 곁에 누웠다.

“생각은요. 피곤하실 줄 알아요.”

“…정말로?”

“네.”

“자요, 그럼.”

웬일로 머뭇대는 말끝을 잡지 않고 선선히 놓아준다. 다만 다리를 얽어 베개 끼고 자듯 몸을 단단히 묶을 뿐이다.

불을 먼저 끌 걸 그랬다. 침대 옆에 조작 패널이 있을 테니 최윤이 아주 잠들면 움직여 봐야겠다. 그 곁에서 조용히 평화롭게 잠들면 그만이다.

정말로?

“전에 했던 거, 하고 싶어요. 대표님이 제 얼굴 위에 앉는… 그거요.”

한숨 비슷한 숨소리만 들린다. 제풀에 놀라 입을 막는 윤설의 몸이 기우뚱 돌아가며 아직 눈이 덜 뜨인 최윤의 몸이 위로 올라왔다. 반 바퀴 함께 구른 것만으로 무게감과 조밀하게 달라붙는 피부가 잦아들던 숨을 멎게 했다.

배스 가운은 쉽게 벌어져 맨가슴이 맞닿았다. 윤설 자신의 심장만 비정상적으로 빠르고 거세게 박동한다는 착각이 일었다. 차마 떠올리기도 어려워했던 일이 뱉고 보니 스스로 원하는 바였음을 깨달은 충격도 한몫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함께 있었으면 했고, 보고 싶다는 말을 해도 아쉬움이 남아 잠들 때까지 끌어안고 있던 생생한 온기를 바랐다. 그러다 보면 기억을 따라 살결이 어떤 감촉으로 다가왔는지 선명해지며 제 몸보다 더 샅샅이 알고 있는 생김을 두 손으로 덧그리고 싶었다. 불안정한 알파 탓으로 돌리지 않아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곤란한데, 정말.”

“죄송합니다. 불 꺼드릴게요.”

“아니.”

거듭 손사래 친 최윤이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짓눌린 아랫배 쪽으로 저린 듯한 감각이 되살아난다. 피로를 쫓아내듯 고개를 좌우로 털더니 윤설을 다리 사이에 두고 맞비비던 아랫배 위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다.

최윤이 물끄러미 보자 줄곧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윤설의 손이 가운 밑으로 드러난 허벅다리를 쓰다듬었다. 계산적인 움직임은 하나도 없는 듯 작게 벌어진 입술에 최윤이 작게 웃었다.

드러난 다리 위를 어루만지다가 가운 아래로 드나들기 시작하는 손길에 호응하듯 엉덩이를 움직여 조금씩 윤설의 상체 쪽으로 올라간다.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 가슴께에 이르러서는 윤설의 손이 풀어 헤쳐진 가운 안의 둔부를 부드럽게 쥐고 있었다.

“…삽입은 안 해요.”

“네, 그럴게요.”

홀린 듯 코앞으로 가까워진 다리 사이를 보다가 겨우 눈을 깜박이며 대답하는 모양에 제대로 들은 건가 의심하면서도, 몸은 착실하게 순서를 밟아갔다.

양 무릎이 기대로 젖은 윤설의 얼굴을 사이에 두고 하체를 들어 올리자 쉼 없이 살갗에 달라붙어 있던 손이 따라와 최윤의 다리를 받쳤다.

있으나 마나 하게 헐거워진 매듭을 아예 풀고 등 뒤로 가운을 벗어 흘러내리게 두었다. 속살을 벌려 잘생긴 콧대에 스치기에 앞서 살짝 힘이 들어간 좆을 얼굴 곳곳에 슬슬 문질렀다. 윤설은 볼 위로 툭 떨어지기도 하고 입술을 꾹 눌렀다 콧대 옆으로 비껴가는 살덩이를 피해 한쪽 눈을 감으면서도 얼굴이 발갰다.

“대표님…….”

“기다려요.”

흐린 목소리로 안타깝게 조르기도 한다. 최윤이 남몰래 혀를 차며 벽을 짚고 한 손으로 제 것을 쥐었다.

그 아래로 드러난 회음부가 가까워지자 윤설이 받치고 있던 허벅다리를 안으며 입술을 댔다. 더운 숨이 간지럽고 코끝이 둔하게 깔려 도톰한 살을 찌르다 살짝 틀어 주니 곧 호흡을 되찾은 듯 따라와 비벼댔다.

입술로 감쳐물듯 애무하고 깊이 들이쉬고, 짓뭉개지 않아도 바짝 붙은 채 다리 사이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샅샅이 헤치고 있었다. 처음에는 숨 쉬는 요령을 찾는 줄 알았는데 두고 보니 체취를 쫓아 허겁지겁 갈증을 채우는 모양새였다.

“…윤설 씨 취향도 참, 의외예요.”

“으움, 네?”

아닌 게 아니라 윤설은 반쯤 본능적으로 행위에 몰두하고 있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 채우지 못했던 성적 욕망과 더불어 최윤이 입고 썼던 향 사이에서 고유의 살내음을 골라내 음미했다.

그는 부지런히 공들여 애무하고 눈물이 떨어질 정도의 쾌감을 이끌어주어도 윤설의 것과 상응하는 페로몬을 낼 리 없는 별세계의 사람이었지만, 그래야 했다.

당혹스러워하던 최윤도 아래를 충분히 자극하고 이어 구멍 주변을 녹진하게 풀 즈음에는 윤설의 적극적인 태도에 흥분한 듯했다. 구멍이 물리면 옴폭 빨아들일 듯 수축과 이완을 반복한다. 끙끙 앓는 듯한 신음과 숨소리를 목 안으로 삼키는 도중 최윤이 허리를 비틀어 공간이 생기면 두 눈으로 붉어진 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윤설은 어느새 쥐고 있는 자지에 슥슥 손을 스치며 앞쪽의 사정을 함께 유도하는 최윤을 보고 말릴까 하다, 혀를 길게 내어 구멍 안을 파고들었다. 흡족해하면서도 자꾸 뜨는 허리가 도망가는 것 같아 두 팔 안에 가두고 더 깊이 찔러 넣는다.

“흣, 후, 넣지 말라고 했, 으음.”

말은 그렇게 해도 기립근에 힘이 들어가며 구멍이 오물거리듯 움직였다.

윤설도 최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잘 들었지만 지금은 물러날 때가 아니었다. 더 깊이, 마디가 불툭한 손가락을 걸거나 두툼한데 반해 예쁘다는 말을 듣는 성기를 넣어 꼼짝없이 묶이는 아찔함은 포기하더라도.

원래대로라면 약을 먹었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윤설의 몸 구석구석 활기가 돌았다. 답답하고 불편하게 틀어막혔다가 끝내 예고 없이 터져버릴 것처럼 갈무리하기 사납던 페로몬이 부드럽게 주변을 배회했다.

얼마나 호의와 애정 어린 신호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최윤의 보편성이 다행스러운 한편 아쉬워 애가 달았다. 이렇게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고, 노골적인 향으로 알리게 된다면 그를 만족시키는 데에만 몰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대표님, 안이 좁아요.”

아쉬움과는 별개로 거친 숨 사이로 삼키는 최윤의 목울음이 흥분을 부추겼다. 신음을 굳이 참는 편도 아닌데 절정 전에는 얕게 그릉대며 입 안에서 사라지는 소리가 나기도 한다는 걸 여러 번 몸 섞고야 알았다.

혀로 구멍 입구부터 회음까지 느리게 삭 핥아 올리자 비로소 밖으로 터지는 신음이 들려왔다. 아래의 자극과 함께 최윤의 손안에서 한참 쓸린 기둥이 이미 젖어 번들거린다. 보는 것만으로 아랫배가 또 당겨 크게 숨을 골랐다.

“아, 좋아. 조금 더…….”

곧 사정하려는지 최윤이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기둥뿌리부터 위까지 마찰하며 젖은 소리가 나고 윤설이 그 아래 고환부터 회음 가운데를 집요하게 문질러 핥았다. 절정에 가까운 타이밍을 두 사람 다 직감했기에 주춤하는 대신 더 빨리, 아픔이 되지 않는 한 세게 자극하는 데 열중했다.

“읏…….”

“…아직이요. 가지, 마세요.”

사정과 동시에 뒤로 물러나려는 최윤을 끌어당긴 윤설이 아래로 흐르는 뿌연 액체를 받아 마셨다. 끈적하게 타고 내려오는 것을 아래를 물고 빠는 김에 함께 입 안에 머금는다는 쪽에 가까웠으나, 내려다보는 최윤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상대가 봉사하는 섹스를 즐기는 입장에서도 사출한 정액을 굳이 삼키라고 한 적은 드물었다. 잘 안 꺾이는 상대에게 일부러 구음을 요구하고 삼키라고 누른 일은 있었지만, 윤설에게는 애초에 그런 필요를 느낄 일이 없다.

“윤설 씨, 그만.”

“싫으세요?”

살짝 뭉그러지는 발음이 이상하게 선정적이었다.

최윤은 뒤로 물러나며 윤설의 입가를 닦았다. 당황해서 두고 있던 사이에 실컷 핥아 먹었으면서 미련이 남은 눈치였다.

“맛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요. 안 그래도 됩니다.”

“조금 진한 것 같아요.”

“그런 거 몰라도 되고요.”

“네.”

혹시 몰라 속눈썹 팔랑이는 눈을 자세히 살폈다. 러트 때처럼 먼 곳을 보고 꿈꾸듯 몽롱한 상태인가 싶어서.

반응이 빠른 걸 보면 멀쩡한데 무슨 생각인가 하며 무심코 뒤쪽으로 손을 짚었다가 재차 놀라 뒤를 돌아본다. 아랫배를 슬슬 쓰다듬어주고 윤설도 한 발 빼주려는 생각이었는데 손에 잡히는 느낌이 낯설었던 탓이다.

“…러트?”

“아, 아니에요.”

화들짝 놀라 다리를 오므린 윤설이 반쯤 몸을 돌린 최윤의 등에서 어떤 흔적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등에 상처가 있어요.”

“별거 아니에요. 왜 자꾸 숨겨요?”

“그거는, 좋아서 그런 거니까 금방 가라앉아요.”

“나한테 넣었을 때 이랬단 말이죠.”

“제발요. 그것보다 등이…….”

버둥대며 시트를 긁는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허벅지만 짚으며 놓친 최윤이 집요하게 채근했다. 윤설은 윤설대로 눈앞에 어른대는 등 위의 붉은 줄이 더 중요하다며 대답하지 않고 버텼다.

실랑이 끝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몸을 뒤집어 최윤을 아래 둔 뒤에야 소란이 멈추었다.

“나 이 자세 싫어합니다.”

“죄송해요.”

휙 넘어가며 엎드린 자세에 윤설이 팔 안에 가두고 있으니 본능적인 거부감이 이는 듯 말투가 엄했다. 그래도 덕분에 등이 한눈에 보여 꼼꼼히 살피기 쉬웠다.

어깨뼈 옆, 복사근이 허리를 돌아 감는 아래 등에 잔생채기처럼 딱지 앉은 상처가 몇 있다.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쓰다듬으니 최윤이 몸을 뒤틀어 윤설의 품을 벗어났다.

“별거 아니죠?”

“그래도 아팠을 것 같아요.”

“…마음대로 봤으니 윤설 씨도 보여줘요.”

“…….”

“얼른.”

그대로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팔짱을 낀다. 놀리려고 짓궂게 굴 때와는 다른 표정이라 마지못해 손을 거두었다.

잔뜩 흥분한 채 시간이 흐르고도 제 짝의 안을 허락받지 못한 성기는 그대로 노팅할 때처럼 부풀어버렸다. 빛 아래 드러내기에는 뭐로 보나 지나친 감이 있는 생김이다.

최윤이 보기에도 예상 밖인지 허, 감탄사와 신음 사이 모호한 소리가 들린다.

“다리 벌려요.”

“대표님…….”

“러트가 아니어도 이렇게 될 수 있는 겁니까?”

“아주, 흥분하거나… 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답에 살풋 구겨졌던 미간을 펴고 발을 뻗는다. 윤설이 뒤로 물러나려 하자 발끝이 핏줄 선 기둥을 짚고 도톰해진 귀두를 엉망으로 문질렀다. 아랫배에 감질나게 뭉쳐있던 쾌감이 위로 훅 치고 올라와 등을 말자, 또 한 번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제발요, 제가, 할게요.”

“혼자 하는 거 보여줄 거예요?”

“그건.”

망설이는 사이 발 안쪽 날로 살살 쓸며 간질인다. 언뜻 호기심도 섞인 듯한 눈치였다.

기둥 위를 타고 올라가 배에 올라붙은 좆을 자근자근 밟듯 문지르고, 선액이 울컥울컥 새는 끄트머리를 발가락이 쥐어짜듯 움켰다가 살짝 잡아당겼다. 쾌감이 너무 선명해 아팠다. 원래대로라면 상대의 안에 가득 쏟아내고 내벽에 물 샐 틈 없이 달라붙어 번식을 꾀했어야 할 성기가 배 위에서 이리저리 쓸리며 어설픈 사정만 하고 있으니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다.

윤설은 수치를 잊고 기둥 아래를 잡아 위아래로 쓸었다. 찔걱이는 소리가 점점 물기에 질척이는 소리로 변했다.

한번 이성을 잃자 다음은 쉬웠다. 최윤이 바라보는 가운데, 최윤의 발을 잡고 부푼 끝을 치대며 얕게 허릿짓하며 신음했다. 그가 다가와 사정을 도와주지도, 다리 사이로 기어드는 걸 허락하지도 않고 방관하는데도 눈을 떼지 않는다는 사실이 윤설의 흥분에 불을 붙였다.

“아, 아, 흐, 대표님, 흑, 후으, 윽.”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물이 많네요, 오늘도.”

허리를 떨며 남은 정액을 모조리 분출해 내자 최윤의 발이며 시트가 점점이 젖었다. 최윤은 색색 숨을 고르는 윤설의 자지가 비로소 말랑해졌다며 조금 더 발 장난을 치고는 노팅을 마친 물건이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 씻지도 못하게 붙들어 놓았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내내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윤설을 솜씨 좋게 달래며 지식욕을 해소한 뒤에야 예의 나른한 피로감을 업은 얼굴로 욕조에 몸 담그러 가자 말했다.

* * *

함께 보낸 밤의 예기치 못한 사태는 두고두고 부끄러울 일이었건만 클리닉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상대를 각인 파트너로 인식한 상태에서 사랑을 나누고 의식적으로 페로몬과 비슷한 안정감을 찾았다면 컨디션이 한결 나은 것도 당연한 결과라 한다.

그렇다더라는 이론을 실제로 겪고서야 정확히 이해하는 기분이었다. 각인의 놀라움, 신체로 이어지는 정서적 의존과 페로몬의 변화 등 신비로운 현상은 제대로 된 알파―오메가를 만날 확률 자체가 희박한 현대 2차 성별자들에게는 때때로 전설과도 같아 더 그랬는지 모른다.

“당장 환자분의 상황에는 최선이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네요.”

“안 그래도 상의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요.”

의사가 걱정하는 바는 윤설도 안다. 일방 각인이나 마찬가지라 어떤 방법이 가장 무리 없는 처방일지 가늠하기 어렵다. 착각과 상상일지라도 결국 상대를 각별히 여기는 마음에 종지부를 찍어야 각인이 깨진다는 이론이 맞다면, 사랑의 종말만이 답이다. 혹은 그토록 아끼는 상대와 오래도록 행복하여 굳이 각인이니 아니니 보이는 현상을 따지지 않고도 안정될 때까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려야 할 텐데 어느 쪽도 쉽사리 권할 일이 아니었다.

윤설과 의사만 작정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이러나저러나 보조제를 더 써서 몸이 편하기를 기도하는 방법이 최선인 셈이었다.

“…형질 제거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일정까지 확정됐나요?”

“네. 1월에 예약이 돼있었는데 지금 같은 상태로 괜찮을지…….”

지금 받는 처방은 그간 복용해 온 약의 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의 끝이 될 수단이자 거래의 목적이었던 형질 제거도 각인 여부로 좌우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의사는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이 없다가 신중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수술과 함께 페로몬 기관이 ‘없다’는 사실 명제로 기울어 각인 반응까지 사라지는 최상의 결과를 희망한다고. 하지만 팔다리를 잃어도 환상통을 겪는 이들처럼 여전히 이상 증상을 앓을까 우려된다는 게 본론이다. 의사는 늘 최악의 경우와 그로 인한 피해를 가정하지 않을 수 없으니 미안하다는 얼굴이었다.

“현재 담당의는 저니까 기관에 진료 기록과 함께 문의해 봐야겠어요. 괜찮겠습니까?”

“네. 부탁드립니다.”

일정을 미루는 게 어떻겠느냐 넌지시 묻기도 했으나 안 될 말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은성에 남은 친척이라 해봐야 일전의 사 남매만큼 권리를 주장하고 윤설을 압박할 인사가 없지 않냐는 물음이 떠올랐지만 앞으로도 윤설은 혼자일 터였다. 안전하리란 보장 같은 건 없다. 다소 위험―부작용―을 감수하더라도 예정대로 진행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다음에 파트너와 함께 방문해도 좋아요. 다른 건 몰라도 오늘 수치가 아주 양호하니까 그 부분만 상의해도 크게 효과 있을 거예요.”

“말씀 감사합니다.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당분간은 이대로 지내볼게요.”

안 그래도 최윤이 외출하는 김에 바래다준다고 하는 걸 극구 사양해서 겨우 끝나고 와달라 했었다. 타지에서 아파 설운데 뭐 어떠냐는 무던함이 다정해 깜박 넘어갈 뻔했다.

윤설이 함께 밤을 보낸 날 뜬금없이 노팅을 일으킨 부분에 대해서 말해야 하니 민망하다, 절대 보이고 싶지 않다고 쩔쩔매며 둘러대자 금방 수긍해 다행이었다. ‘너무 좋아서 그랬다면서요?’ 하고 지나는 말로 끝까지 놀리기는 했어도 윤설의 페로몬 이상을 미심쩍게 여기지는 않는 눈치였다. 차마 최윤은 공감하기 어려운 체질이 그로 인해 흔들리고, 저가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진료를 마치고 보니 애매하게 점심때를 넘긴 시간이다. 차 대기 좋은 곳까지 걸어 나가 최윤을 기다리는 동안 간만에 상사를 만나게 된 직원이 긴장한 듯 길 너머로 여러 번 목을 빼 남몰래 웃었다.

대체로들 과묵한 편인데 이 직원은 명오보다는 직급상 한참 아래인지 수더분하게 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직원들에게 엄하게 구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운조 가업 특성상 위계질서가 무척 중요한가 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몇 번이나 윤설을 수행했음에도 무심코 차 조수석을 열었다가, 운전석에 탈 생각이 없는 듯 윤설의 곁에 선 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는 최윤의 눈치에 이어 뒷좌석까지 활짝 열어두고 어쩔 줄을 몰랐다. 윤설이 보기에는 평범하게 셔츠와 테이퍼드 팬츠 차림새를 하고 현지 젊은이들처럼 손으로 빗어 넘긴 듯한 머리 모양에 심드렁한 표정까지, 어려운 데가 없어 희한한 광경이다.

물끄러미 바라보자 도리어 최윤이 잊은 일 있냐며 물어 왔다.

“그냥, 오늘 잘생겨 보여서 그런가 봐요.”

누가 들어도 뻔한 대사치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인데도 최윤이 거짓말처럼 웃어 분위기가 풀렸다. 죄 없는 직원이 운전대 잡기도 전에 허옇게 질릴까 싶어 윤설이 먼저 차에 타버리고 최윤이 시답잖은 농담을 걸며 따라 들어갔다.

“어디가 보기 좋던가요? 드문 칭찬이라 참고 좀 해야겠는데.”

“…멋진 부잣집 고양이 같을 때가 있어요.”

그렇다고 없는 말을 되는대로 주워섬긴 건 아니었다. 최윤이 고양이를 아껴 집에 들였다 가족을 구해주는 일련의 과정이 퍽 어울렸다. 일견 고집 세 보이는 사냥개를 떠올렸다가도 고양이랑 붙이면 그 시큰둥하고 무관심한 듯한 태가 더 그다웠던 것이다. 곁에 지내다 보니 환경이나 취향 기준이 섬세하고, 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주 미세한 습관으로 은근하게 드러나는 성질도 그럴듯했다.

혼자 유사성을 엮어 제 감상을 굳히는 윤설의 옆모습을 바라만 보던 최윤이 헛웃음 새는 소리와 함께 등을 기댔다.

“왠지 졌다는 생각이 드네.”

“칭찬 맞습니다.”

“알아요.”

엉뚱한 대답에 외려 부드럽고 말랑한 분위기가 익어간다. 바짝 긴장한 듯 속도를 내 운전하던 직원도 지적받기 전에 한결 완만한 주행으로 접어들어 가는 길이 편안했다.

둘은 오늘 촬영지 인근에서 식사를 하고 소일하다 함께 감독을 만나기로 했다. 최윤이야 그 현장에서 중요하지 않을 외부인이지만 로맨스 영화 특성상 전후 잡담에 자주 등장한 연인이 찾아왔다 하자 흔쾌히 들여보내 준다는 답이 왔다. 최윤의 핑계에 따르면 일일 매니저였고, 남들이 보기에는 살가운 애인일 터였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말씀하세요?”

“뭘요?”

“대표님에 대해서요.”

“음.”

그러고 보니 물밑에서, 업계 뒤에서 도는 소문 외에 최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당연히 언론 쪽으로나 관련자들이나 단속하고 있겠지만, 여태껏 윤설과의 스캔들로 각종 연예면과 가십지에 등장한 것치고는 수식어가 전무했다. 키워드 붙이기 좋아하는 온라인 커뮤니티나 연예계 인사들을 생각해 보면 드문 일이다.

“글쎄요. 일찍 한국을 떠나있어서 누구 입 탈 일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유학 시절에도요?”

“…말레이곰?”

“곰이요?”

어딜 봐서?

체격이 훌륭하다지만 서구권에는 비등하거나 더 큰 골격들이 없지 않았다. 날렵하면 몰라도 둔한 이미지도 아니다.

캐릭터화된 곰보다는 물고기를 낚아채고 달려서 차를 쫓는다는 야생의 동물에 비유함일까. 애들끼리의 우악스러운 별명이었을까?

최윤은 좀체 감을 잡지 못하는 윤설의 접시에 제 몫의 식사를 큼직하게 나누어 덜어주며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찾아보면 놀랄 겁니다. 어쩐지 소름 돋게 생겼거든요.”

“왜 하필 그런 걸……. 너무 많아요.”

“천천히 먹어요. 촬영 시간이 꽤 된다고 들었습니다.”

두어 입 요리를 고루 맛본 다음 지나가는 말로 회상하기를 험한 일 배우고 자란 치들끼리는 더러 끔찍한 비유가 두려움과 멸시를 모두 아우르는 표현이었다 한다. 지난번 마주친 얼뜨기 학생이 시제품 돌리는 심부름을 아주 잘해주었는데 오늘 그를 보고 발발 기면서도 볼드모트의 내기니 같다는 소리를 했다나. 그런 말도 웃으며 덧붙인다.

“윤설 씨야말로 그런 별명 많잖아요.”

“그건, 네. 방송이니까요.”

“그래도 나이 찼다고 예쁘다는 말은 잘 안 쓰던데.”

어지간한 호들갑에는 이력이 났는데도 입에 올리는 사람이 다르니 화들짝 놀라고 만다.

윤설이 식기를 꽉 쥔 채 말하지 말아달라 버벅대다 입 안을 씹자 최윤도 입을 다물기는 했다. 대신 숟가락을 들고 윤설이 든 나이프 날을 지그시 눌러 손에 힘을 빼게 한다.

“그러게 칼 쓰는 법 배워보라니까요.”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고는 원하는 만큼 실컷 놀려 배가 찬 듯 씩 웃었다.

억울하거나 얄밉지도 않았다. 그저 자꾸 명치께로 들이쉬는 숨을 잡아챈 것처럼 모든 흐름이 멈추었다.

중증이다. 두 손으로 입을 가려 가벼운 한숨을 가두는 모습에 맞은편에서는 웃음소리만 나는 점까지, 기쁘다.

주연 배우가 사랑에 허우적대면서도 행복에 젖어있었기 때문에 촬영이 무척 순조로웠다. 바다가 보이는 집을 빌려 찍는 날이라 짬이 나면 삼삼오오 바닷가를 구경하고 오기도 했다.

따로 와있던 우형과 몇 스태프들이 알아보고 슬슬 피하거나 말거나, 감독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현장 모두에게 최윤을 간단히 소개해 주었다. 외국인에 대한 호기심, 해외 촬영 중인 애인을 만나러 올 정도로 좋을 때라는 데에 대한 짓궂은 시선들이 스칠 뿐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편했다.

최윤은 카메라 안팎에서 윤설이 ‘하고 싶은 일’이자 온전한 자기 재능으로 여기는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떤 감상도 주관도 없이 현장에 녹아있는 윤설을 집요하게 좇다가 가끔 돌아서 먼바다를 보고 시간이 길어진다 싶으면 멀찍이 나가 궐련을 태웠다. 감독이 시간을 맞추려고 따로 빼놓은 일몰 앞의 장면이 시작될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타는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해가 바다에 잠기는 장관을 뒤로하고, 자리를 벗어나 찾기 쉬운 카페에서 기다리겠다는 말만 남겼다.

완전히 어두워지고서는 급한 장면도 없고 다들 지쳐있어 현장을 정리하기 바빴다. 윤설은 감독과 상대역을 포함해 여럿에게서 이번 주 내내 NG 없이 완벽한 상태였던 이유를 알겠노라는 장난기 어린 찬사를 들었다. 최윤이 방문한 뒤로 컨디션이 확연히 달라진 것도 사실이라 부정하지 않고 빙그레 웃기만 했다.

우형이 살짝 서운한 시늉을 하며 붙잡는 말을 하다 이내 가야 할 곳을 귀띔해 주자, 걸음도 가볍게 느껴졌다. 한 번씩 들뜨고 술렁이는 스스로를 다잡아야 한다는 자각도 들었지만 마음처럼 순탄치 않았다. 움켜쥔다고 잡혀주는 감정이 아니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흐르는 강이었다.

“춥지 않아요?”

“우형이가 옷을 챙겨 왔어요. 다행이죠.”

“네. 나도 따뜻한 것 마셔서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여기, 전해달라던데요.”

찾던 사람은 서늘한 저녁임에도 테라스 자리에 앉아 금방 눈에 들어왔다. 카페에서 야외 조명을 켜고 막 들어와 테라스보다 안쪽에 앉은 커플이 너 나 할 것 없이 담요를 덮는 때였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테이블 위로 쓱 밀어 주는 작은 쇼핑백을 보자 잊고 있던 약속이 떠올랐다. 의사를 만나는 일에만 신경 쓰느라 놓친 줄도 몰랐는데 직원이 대신 찾아온 모양이다.

“뭐예요? 살이 빠진 것도 아닌데 주문까지 맡기고.”

“아, 이거요.”

빳빳한 손잡이만 쥐고 만지작거리게 된다. 안에 흠 하나 없는 상자가 든 걸 보면서 머뭇대는 사이 최윤이 메뉴판을 가방 옆으로 밀었다.

“일단 따뜻한 것부터 달라고 합시다.”

“잠시만요. 보여드릴게요.”

이런 타이밍에 꺼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기왕 눈에 보였으니 나중에 때를 고르기도 우스울 것 같았다.

윤설은 곱게 묶인 매듭을 죽죽 잡아당겨 빠르게 풀고 상자를 꺼냈다. 최윤은 크기를 보고 시계나 가죽 소품이라 장담했다. 그런 것이라면 협찬사나 브랜드, 눈앞의 연인에게서 받은 것만 해도 손목이 바쁠 만큼 넘쳤다.

“이건 한 번도 생각 못 했던 것 같아서요.”

“…….”

최윤 쪽으로 열린 뚜껑 안에는 이제껏 주고받아 본 적 없는 물건이 있다.

단순하지만 투박하지 않게 다듬어진 태가 나는, 디자인이 같은 한 쌍인 반지. 누가 보아도 같은 의미를 떠올릴 만한 공공연한 사인.

최윤은 언뜻 놀란 듯한 얼굴로 침묵했다.

“…그렇네요. 남들 보라고 요란하게 티 내자는 계획이었는데 정작 이걸 놓쳤네.”

마음에 안 드나 했다가 금세 쾌활한 투로 돌아간 목소리에 안심했다. 윤설이 먼저 조심스레 손을 잡아 끼워주도록 두는 걸 보면 그런대로 안목이 나쁘지 않았나 보다.

최윤은 반지 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더니 불편함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남은 반지를 들었다.

“일 끝나도 반년 정도는 계속 만나는 사이로 할 테니까요.”

윤설 몫의 반지가 미끄러지듯이 끼워지고, 맞잡은 손이 그대로 머물렀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돼요?”

“바라던 대로 자유예요.”

“대표님, 저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압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빼려 했지만 손가락이 얽혔다. 지나는 누군가의 눈에는 테이블 위 깍지 낀 손이 정다운 한 쌍일 텐데 다른 이유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두근거리다 아프게 방망이질하며 폐를 누를 것 같다.

“저만 마음에 담은 거군요.”

“아뇨. 나도 윤설 씨 좋아합니다.”

설령 다른 의미일지라도.

덧붙이는 말로 더 이해하기 어려웠다. 최윤은 그들을 흥미롭게 곁눈질하던 종업원을 불러 따뜻한 차를 주문하고 손을 거두었다.

윤설에게는 그 손을 채 되잡을 정신이 없었다. 혼자 착각에 빠져 저지른 추태라기에는 나눈 것들이 많지 않았던가. 아무리 필요해도 그처럼 연기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들 사이에 오간 거래는 사랑하는 척으로 더 얻을 조건도 없이 처음부터 깔끔했다.

“제가 싫은 게 아닌데, 왜 끝을 정해두세요.”

최윤은 입을 다물었다. 말해주지 않는 건가 싶어 마냥 기다리기 버거웠다. 그러나 단지 차가 나온 뒤 윤설의 두 손으로 찻잔 옆을 감싸기 위해 미룬 것뿐이었다.

“윤설 씨는 내게 좋은 상대예요. 성격으로 부딪쳐 서로를 깎을 일도 없고 잠자리에서 괜한 오기도 안 부리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요, 좋죠. 지나치게 좋습니다.”

그리고 시작이었다. 건조한 목소리와 준비되어 있던 대본처럼 막힘이라곤 없는 논조였다. 그의 자세부터 입으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윤설의 고백이 아닌 토론장에서 도전적인 화두를 받은 사람 같았다.

“그것도 우리가 주고받을 대가를 명확하게 한 동안은 괜찮았겠지만, 앞으로는 아닙니다. 윤설 씨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어요. 여러 번 말했습니다. 윤설 씨의 바람 중 바뀌지 않은 주요점이 있잖아요. 자유, 원활한 배우 생활, 헌신적인 사랑. 자유를 도왔고 배우 생활 알아서 잘할 겁니다. 그것도 원조할 수 있겠지만 윤설 씨의 사랑은 나로 이룰 수 없는 거예요.”

“다를 수 있어요. 당연합니다. …그동안 대표님이 배려해 주신 부분이 더 많은 것도 알고요.”

“나는 헌신을 모릅니다.”

“대단한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지금처럼, 그걸로도 충분하니까.”

“희생해도 괜찮은 사랑은 모르고, 모르는 편이 나은 자리로만 갈 거예요.”

그래도 괜찮다고 하겠지요. 곧 원망스러운 점이 보일 텐데 어떻게 하겠어요?

최윤은 반지 낀 손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의미를 부정할지언정 반지는 그의 손에 어울려 움직임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윤설의 눈에 상상하던 그대로를 보여주었다.

“십 년 가까이 갈망하던 삶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사소한 평화와 대수롭지 않은 즐거움을 영위하는 삶. 운조 일가 주축인 최윤의 누구로 수식되는 삶은 배우라는 직업의 특수성보다 더 큰 제약을 요구할지 모른다.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닌데 막상 최윤이 지난 시간과 더불어 포기를 언급하자 막다른 길에 놓인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 윤설 씨는 직접 사람을 해치지 못해서 여기까지 온 사람입니다. 그럴 수 있는 나를 수단으로 마지막 기회를 걸었고요.”

그 말도 맞았다. 까만 밤 아래 무섭게 타오르던 컨테이너의 불길로 증명된 사실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도피도 무엇도 아니라 그들이 아끼는 피붙이에게 잔인함을 돌려주는 것이었다고. 납치와 살해 위협을 피해 경호원을 고용하기보다 같은 공포를 느끼게 할 살수를 써야 했다고.

사람을 쓸 재력이 부족해서 손쓰지 못한 게 아니라 윤설이 공격은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 사람이 잘못될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려도 같은 아픔을 주리라 다짐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피하고 단절되는 삶이었다. 최윤은 성정의 나약함이라 탓하지 않았다.

그러나.

“윤설 씨는 자기 목숨을 구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나는 오로지 내 이득, 딸린 직원들 보호를 위해 ‘나쁜 일’을 저지를 테고요. 내 삶을 함께하며, 내가 주는 것마다 다 검은돈으로 산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편히 살 수 있겠어요?”

지나가며 하는 이야기만으로도 그가 밟고 선 경계의 땅은 불법과 폭력의 세계임이 여실히 느껴졌다. 오늘만 해도 구시가지에 도는 약 사이로 운조에서 상당히 공들였을 신약을 끼워 넣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래도록 남아 안타까운 흉터도 누가 무엇을 얼마나 갖느냐의 끝없는 싸움 사이에서 얻은 흔적이다.

최윤은 보통 사람들은 등지고 사는 세계를 구태여 코앞에 둔 채, 그러면서도 검은 불티는 피하려고 애써 얻은 자유를 반만 누리며 사는 삶이 기껍겠냐고 묻는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

“좋아한다고 느낄 만한 사람을 그런 길 위에 두겠어요?”

해서 지난날 권하던 앞으로 해볼 만한 일들, 해도 되는 일들에 그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를 쌓고 평범한 일상을 다시 배우는 모든 곳에 윤설은 자연히 최윤과 함께를 그렸고 최윤은 그러지 않았다.

이제 최윤은 팔짱을 끼고 등을 기댄 채였다. 여전히 표정은 냉랭했고 망설임도 유보도 허락하지 않는 단언을 영원히 변치 않을 판결문으로 남겼다.

“안 됩니다. 나도 사람이라 당신에게서는 원망 듣기 싫어요.”

“대표님 원망 안 할 겁니다.”

“모르죠. 지금 윤설 씨가 아는 연애 비슷한 일을 한 건 모조리 나로 유일했고 처음이니까 나만 보일 수밖에요.”

“…제가 어떻게 해야 해요? 뭐든, 뭐라도요.”

“아무것도요. 실컷 누린 다음에도 굳이 나를 원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차라리 진지하게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거나 거래 관계였을 뿐이라 하면 나았을까. 그런 답이라면 바로 붙잡아 시간을 구했을 터였다.

좋아하기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는 말은 이제 드라마에서도 상투적이고 낡은 이유가 됐다. 시청자들은 주인공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이기를 마음껏 부려 찰나의 행복이라도 보여주기를 바란다.

최윤은 재고의 여지도 없이 그래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삶이 영화의 아름다운 장면에서 끝나지 않는데 그 뒤에 무엇이 남겠냐고.

“윤설 씨 삶을 내게 버리지 마요. 스스로 돌보지 않을 삶을 주는 건 버리는 것밖에 안 됩니다.”

한편으로는 최윤의 욕망이 거기까지여서인지도 모른다. 입에 올리기 가장 두려운 이유다.

원하는 것은 쟁취하고 더러 빼앗으며 살아온 최윤이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으면 그만이다. 아니, 그런 말은 안 했는데 이미 서운한 마음이 구름처럼 몰려와 인정하기 싫은 말을 지어냈다.

고개 숙이는 윤설의 귀로 끝맺는 문장들이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가 되어 내려앉았다.

“…나 같은 사람에게 대가 없는 헌신을 주면 안 되죠. 버릇이 되고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당신의 원망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다리를 부러뜨린다고나 할 텐데요.”

“…….”

“윤설 씨는 이미 나 대신 총도 맞아줬고. 그래서.”

마지막은 지극히 감정적인 이유라고 말하며 연신 마른세수를 하다가 끝내 얼굴을 가리는 최윤에게서도 숨기기 어려운 부끄러움의 흔적이 보였다. 얼핏 붉어진 손바닥이 드러났다 얼굴을 덮으며 달아난다.

한바탕 안 된다, 안 되는 이유로 열 손가락을 채울 듯하던 차가운 말이 지나간 자리가 썰렁했다. 밍밍하게 식어버린 차 반을 단번에 마시고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었다가, 곱씹을수록 허무맹랑하지도 않아서 속상하고 말았다. 먼저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 게 전부였다.

“…가요. 추워지고 있어요.”

“기다려요. 차 대고 퇴근하라고 했으니까요.”

윤설이 여기서 갑자기 반지를 건넬 생각은 없었듯 최윤도 여기에서 이렇게 긴 이야기를 할 줄은 몰랐다. 둘은 빠르게 자리를 정리했다. 다른 날 다른 조용한 곳에서 말했더라면 하는 가정은 소용없지만, 주변의 다른 테이블들이 즐겁거나 정다워 잘못 들어온 기분이 들기 전에 호텔로 돌아가고자.

어색하고 서먹한 가운데 행선지를 묻자 윤설은 큰 망설임 없이 최윤의 호텔을 선택했다. 그답지 않은 시위든 아니든 최윤이 감당할 만했다.

“면허 있다고 했던가요?”

“말소됐을 겁니다. 따놓고 운전할 일이 없었어요.”

“할 일이 늘었네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은 아니더라도 여상히 흐르는 대화가 꿈속인 양 간지러웠다. 막상 직접 몰게 되면 원하는 차의 조건이 늘기 마련이라거나 귀찮은 눈 따돌리고 훌쩍 나다니기 좋을 거라는 등 장점 위주였다.

윤설은 가만히 듣고 있다 맞장구를 치거나 질문을 더하며 의자를 조금 젖히고 깊이 숨 쉬었다. 어쩐지 긴장을 풀고 피로를 닦아내는 욕조 속인 것처럼 노곤해진다. 착각에 불과하다고 아무리 되뇐들 최윤의 곁에 있으니 페로몬이 잠잠해 편안했다. 꼬박꼬박 맞추던 약 시간이 지난 줄도 몰랐다.

“바뀐 처방은 잘 듣나 봐요.”

“네. 처음보다 나아졌다고 했어요.”

“다행입니다. 약 먹기도 지겨웠을 텐데 얼마 안 남았네요.”

“수술에는 수술에 따르는 약이 있지 않을까요?”

“무섭습니까?”

알파는 튼튼한 편이라고 했으면서요.

너른 객실이라지만 욕실이 두 개나 있을 필요가 있나 의문이었던 구조가 오늘은 다행이었다. 각자 빠르게 씻고 나와 한 침대 위에 다시 앉더라도 좁은 테이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윤설은 뒤늦게 약을 삼키느라 답하지 못한 척 미적댔다. 걱정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남의 손에 끌려다닐 신세보다 무서울까. 제대로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최윤은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따뜻한 물을 한 잔 더 가져다주었다.

둘은 너른 방 안 부산스럽게 뒤채는 소리도 없이 누워 잠들기를 기다렸다. 바로 누운 최윤이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확인하고 답 보내는 일을 십여 분쯤 하고 나서는 바로 눈을 감아버렸고, 대본을 끼고 돌아누운 윤설도 같은 자리만 몇 번째 읽다 머리맡에 밀어두었다.

어제만 해도 방 안이 따뜻하고 어깨까지 덮은 이불의 무게면 바로 수면 아래까지 가라앉을 것만 같더니, 오늘은 피곤한 가운데 도깨비마냥 눈이 말똥하다.

“…주무세요?”

슬그머니 돌아보니 한참 전 누운 자세 그대로 고요하다. 그야말로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우면 애정이라 하던데. 그간 매일같이 싸운다던 십 년 살이 부부도 속 썩이는 자식도 자는 모습만은 애틋하다는 말뜻을 알 길이 없었다가 생각지도 않던 때 이해하게 된다.

지금은 그를 무슨 말로 설득할 수 있을지 생각나지 않는다. 차라리 감정적 호소나 애원을 하면 동정심을 끌어낼 수 있을까.

윤설은 최윤을 향해 누웠던 몸을 움직여 기어코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불과 하루 사이에 온몸으로 끌어안고 더러는 다리까지 감아 자던 습관대로 하면 안 되는 선이 그어졌다.

기분이 낯설다. 그래도, 아직 이 정도의 태연함은 그도 윤설도 괜찮을 것이다.

그날 새벽 어스름에 목이 타 일어난 최윤은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에 몸을 뒤틀었다. 말을 많이 했고 술도 때 없이 마신 탓에 목구멍 안이 바짝 오그라들 듯 말라있는데 당장 물 마시러 가지 못하니 짜증스러웠다.

옆자리를 더듬자 익히 아는 체구의 도드라지는 뼈, 근육의 굴곡 따위가 스쳤다. 윤설이 제 허리를 틈 없이 붙들어 매고 가슴 위로 아예 상체를 기대놓은 불편한 모양으로 정신없이 자고 있다.

서운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이며 늘어지는 말씨 갈무리가 안 돼서 아예 등 보인다 싶었는데 습관이 무서웠다.

“으음.”

떼어내려면 떼어낼 수 있기야 하겠는데 분명히 깨겠지 싶어 팔이나 어깨를 툭툭 건드리다 앓는 소리만 냈다. 그 성질에 한 대 치라고 해도 안 그러겠거니 했지만 이럴 줄도 몰랐다. 아무래도 햇살이 커튼을 가르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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