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15)

8.

일주일 남짓 지난 아침, 아직 새벽 어스름 기운이 남은 시각 공항에 도착한 윤설은 명오 편에 작은 상자를 하나 받았다.

“대표님이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고 있기에 선 자리에서 뚜껑만 살짝 기울여 안을 본다. 그간 선물해 주던 매끈하게 잘빠진 구두나 광택 없이 심플한 스니커즈와 달리 편의성을 위해 맞춰진 듯한 운동화가 한 켤레, 신발 끈 끄트머리에 빳빳한 카드가 꿰어져 있다.

상자 너머로 흘끔 명오를 보니 여전히 주변을 살필 뿐 움직일 생각이 없는 폼이었다. 다시 시선을 떨구고 비밀문서라도 받은 사람처럼 상자 안에 둔 그대로 내용을 훑었다.

[그곳 길은 반듯한 한국 보도랑 달라 유용할 겁니다.

아직 다리 조심해야 하니 신고 다녀요.

동행하는 직원들에게 뭐든 물어도 좋습니다.

시차 생각하지 말고, 전화해요.]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물어도 된다.

조건 없는 허락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윤설은 정작 궁금했던 최윤의 일정이나 기분은 입에 대지도 못하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하기에 바빴다. 온통 처음인 경험인데다 우형도 스태프도 한발 늦게 출발하기로 돼 있으니 의지할 데라고는 무뚝뚝한 수행원들뿐이었던 것이다.

이른 시각이고, 여느 여행객보다 간소한 절차로 수속을 밟게 도움받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그저 수화물이며 반입 금지 물품에 대한 스캔, 본인 확인, 또 확인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얼이 빠져 라운지가 있다는 말도 흘려들었다.

옆에서 일러줄 때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프랜차이즈 카페 앞에 앉아 멍하니 커피를 들이켜며 대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앉아있는 자리가 탑승 게이트랑 가깝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긴장이 풀렸다. 다들 대수롭잖게 오가는 이 단계까지 발도 들이지 못했던 스물 이전의 기억 탓에 스치는 통증이 지나가도록 담담히 기다린다.

“…가시면 술은 자제해 주시고, 최소한 저랑 동행하셔야 합니다.”

“우형이랑 회사 사람들이 같이 다니는데도요?”

“예.”

우두커니 앉은 윤설에게 비로소 한가해진 명오가 다가와 몇 가지 부탁하는 말을 꺼냈다. 어디를 가든 명오는 바로 곁에 있어야 하고 다른 팀원들도 근거리에서 늘 따를 거라고. 일이 잘되어 영화 제작 팀 사람들과 늦게까지 어울리더라도 술은 금하고, 호르몬제를 비롯한 처방약은 여분이 있으니 거르지 말아야 한다고. 최윤이 읊은 말을 그대로 재생하는 듯했다.

윤설은 전보다 더 구체적이고 자잘한 부분까지 따라붙는 주의 사항에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혹시 이번에 난 기사 때문에 그런 건가요?”

“아닙니다. 수술까지 한 환자시니까요.”

아닌 게 아닌 것 같다.

빈틈없이 보호한다는 점은 전과 다를 바가 없고 그때는 윤설 스스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적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때로는 은성에서 받았던 감시만큼이나 촘촘하게 짜인 안배 속에서 크고 작은 위험을 넘긴 일이 대부분이다.

새삼 해외 출국이라 그렇다기보다는 임신했을지도 모르는 오메가라는 발표에 맞추어 유난스럽게 군다는 쪽이 그럴듯했다. 대중 노출과 언론 플레이로 기회를 노린 일이니 따라야 맞겠지.

납득하는 표정을 지어 명오를 안심시키면서도 기분이 이상했다. 그토록 전전긍긍하며 살았는데 아무렇지 않게 밝혀지고도 그를 떨어지면 깨지는 도자기처럼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어색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만 돌려주는 게 전부인 상황에 현실감이 없다.

최윤이 이걸 어떻게 수습해서 연예계 활동에 차질 없도록 만들어준다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 * *

“왜 이 사람을 사랑하게 됐을까요?”

“제가 생각하는 이유를 말씀드리면 됩니까?”

“이유가 될 만한 신 넘버를 말해줘도 좋아요.”

“그런……. 이유를 꼽을 필요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상황이 끝나고도 윤설이 태연히, 활발하게 스크린에 얼굴을 비치면 알아서 사그라들 이야기란 말이었을까. 힌트를 주지 않는 최윤의 심중은 짐작하기 어렵다.

비상한 머리라 해도 가장 있을 법한 일들을 추려내 한 아름 안고 있다 뿐이지 확신할 단서가 없다. 생각을 해도 같은 자리로만 돌아갔다.

다리를 펴고도 남는 일등석에 승무원보다도 앞서 담요를 덮어준 명오를 뒤편에 두고 졸다가 뒤채다, 이미 끄트머리가 닳은 시나리오 출력본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긴 비행을 마쳤다.

“조금 더 말해볼까요?”

“‘나’는 그런 이유를 되짚은 적이나 이래도 되나 망설이지 않습니다.”

“…….”

“이미 현재와 미래만 생각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의문을 가지지 않아요.”

비행기 안은 춥고 건조했다. 잠에서 깨며 눈을 비비는 횟수가 늘자 개중 앳돼 보이는 직원이 인공 누액이며 보습제가 든 주머니를 주었다. 누구 것을 뺏어 온 건 아닌가 싶게 안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구름 속을 빤히 내려다보는 낯선 설렘도 한번 어두운 밤을 지나고 나자 막막하게 펼쳐진 바다처럼 보였다.

길고 긴 시간에 식사도 간식도 여러 차례 주었는데, 나중에는 사양하고 맥없이 면세품 카탈로그를 뒤적이며 보냈다. 주변을 살폈을 때 최윤의 직원들이 돌아가며 모자란 잠을 채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조용히 있어야겠다 싶기도 했다.

난생처음인 비행이 지겨워지고도 한참을 지나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공기부터 다른 먼 타국의 날씨, 귀에 쏟아지는 외국어들, 어지러이 흩어지는 공항 내 방송과 트렁크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명오가 일러주는 대로 인터뷰를 하고 입국 도장을 찍었다. 어쩐지 자꾸 일행을 놓쳐 민망하게도 앞뒤로 직원들이 서서 윤설을 사이에 두고 이동해야 했다.

비행의 후유증에 시차 적응이 겹쳐서인지 호텔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마치자마자 정신없이 잠들었다. 하루쯤 더 쉬고 머리를 비운 다음 감독과 만날 여유가 된다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나의 내일, 다음 주, 나중의 언젠가를 생각할 때 그 사람이 당연히 곁에 있을 것처럼 말하죠.”

“다른 관계와 구별할 필요도, 다른 설명도 필요 없을까요?”

“저라면 그럴 겁니다. 다른 사람이 연기한다 해도, 어떤 종류의 애정이어도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었어요.”

호불호를 드러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곧잘 웃음 띤 표정 그대로 질문을 던지는 감독 앞에서도 여전히 아쉬움을 느낀다. 충분히 생각했고 여러 번 되풀이했지만 빼놓고 못 한 말이 뒤돌아 나간 뒤 떠오를까 봐.

시나리오나 캐릭터에 대한 소감 또는 해석이 정확하게 감독의 의도와 일치하거나 조금 다른 방향이더라도 오히려 납득할 만한 시각이 있어야 배역을 따내기 마련이었다. 때로는 외형이 그린 듯 인물과 닮아서, 투자자나 소속사의 입김이 있어서, 그날 심사를 맡은 사람의 기분이 어때서, 수많은 요소를 배제하고 보면 그랬다.

때로는 너무 솔직해도 안 된다. 경력이 길고 흠잡을 데 없이 반듯한 외모를 갖췄음에도 선택을 기다리는 순간이면 별수 없이 뱉은 말을 곱씹게 된다.

“일리 있는 말이에요. 사랑을 표현하는 말들은 이유보다 현상일 때가 많거든요.”

‘사랑은 비이성적인 감정이라.’

팔짱을 풀고 빙그레 웃는 감독의 답에 최윤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랑은 화학 작용과 기나긴 착각이라는 표현보다도 마법과 기적으로 불린다며 이어지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아침에 신고 나온 운동화로 시선이 떨어졌다. 과연 옛 도로와 건축물이 남은 구역에는 딱딱한 돌들이 벽돌 대신 깔려있어 밑창이 얇은 구두는 남아나지 않을 성싶었다.

비행시간에 꼬박 잔 날을 더하면 이틀은 연락도 못 했는데.

전화해요.

카드에 남은 말이 불현듯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좋은 연기가 될 것 같은데요?”

“아, 네. 감사합니다.”

다른 생각에 빠진 티가 났을까 황급히 표정을 정리하고 감독의 칭찬에 답했다. 캐스팅을 기대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다.

대화가 길어지는 바람에 다 식은 차를 홀짝이며 감독만 의중을 알 한담을 더 나누었다. 윤설이 좋아하는 작품을 여럿 만든 사람이고 수년 전이라지만 짧은 작업을 함께하기도 했는데, 왠지 예전보다 대하기 어려운 관록이 생겨있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경호원을 대동한 채 걸어서 호텔까지 돌아왔다. 운동 겸 산책으로 적당한 거리라 선뜻 따라주는 듯했다.

열없이 거리에 있는 상점들이나 버스 정류장을 구경하고 아무런 경계 없이 아이스크림을 사서 광장을 한 바퀴 도는 동안 그 많던 생각이 씻겨 나갔다.

살짝 비스듬하게 비껴 서서 뒤를 따르는 최윤의 직원들에게도 아이스크림콘을 내밀자 셋이 다니는 모습이 꽤 희한해졌다. 윤설도 그들도 같은 생각이 든 탓에 멋쩍게 맛이 괜찮다는 말만 나눈 채로 걸음이 느려졌다.

관광지나 맛집 리스트가 든 책자를 꺼내 주고 방문 앞까지 데려다준 명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나니 그대로 일정이 끝났다. 윤설은 건성으로 하나둘 넘겨보던 가이드북을 꼼꼼히 읽으며 후발대가 도착하면 몇 군데 가자고 해볼까 궁리하다 깜박 잠들었다.

그러다 알람 소리에 퍼뜩 놀란 채 일어나 다시 세수를 하고 머리를 살살 빗어 눌린 흔적을 감추느라 부산스러워졌다.

혹시 모르니까.

얼마 자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얼굴에 졸음기가 남았다. 11시가 되도록 꿈도 불편함도 모르고 있었으니.

침대에 앉아 등을 바르게 기대고 핸드폰을 든 뒤에도 조금 망설이다가, 대강 계산해 봤을 때 한국 시간으로 이른 아침인 걸 재차 확인하고 통화를 걸었다.

─오랜만입니다.

“…주무셨어요?”

─막 눈만 떴어요. 윤설 씨가 시간을 잘 맞췄네.

“다행입니다. 연락이 늦어서 죄송해요.”

─뭐가 잘못돼서 그런 거 아니니 괜찮습니다. 들떠 보인다고 하던데요. 재미있었어요?

나른하고 기분이 좋은 듯한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놓이다가도 태연한 투에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든다.

연락이 늦은 건 윤설만이 아니었다. 최윤의 허락이 전해지기까지 수일이 걸려 아예 심기가 불편해진 줄로만 알았던 때가 있다.

무어라 달아놓은 말도 단서도 없이 돌아간 뒤로 그의 사람들만 부지런히 오가며 윤설에게 아마도 최윤이 지시했을 일, 주의할 상황을 날라주는 게 전부였지 않은가.

윤설이 말없이 입술만 물고 있자 최윤이 핸드폰 너머로 노크 소리 비슷한 소음을 냈다.

방문일까. 거실 테이블?

여전히 건너편의 소리에 귀를 바짝 세우고 낮에 있었던 일들을 두서없이 풀어놓았다. 유학 생활이 몇 년이고 해외를 다녀도 윤설보다 수없이 더 다녔을 최윤에게 대단할 것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눈길 두었던 곳들을 떠올리며 되짚자 최윤이 추임새를 넣으며 들어준다. 얼굴 마주하고 있을 때에도 이런 대화를 자주 했었다.

─직원들이 윤설 씨를 보호 대상으로 알아서 퍽 귀엽게 본다 했는데, 정말 신나서 다녔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들리나요?”

─네. 말은 걱정이라 해도, 그 감독도 윤설 씨랑 작업하고 싶어 해서 오라고 한 거 아닙니까. 연기해 보라고 하던가요?

“아니요. 그냥 작품 이야기 했습니다. 어떤 제작자들은 사소한 질문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선호하는 데이트 장소가 있는지, 어디가 괜찮은데, 그런 이야기도 했으니까요.”

─그런 거 잘 모르겠더라.

“…….”

─많이 피곤합니까? 졸고 있나 본데요.

“아닙니다. 그냥, 대표님.”

─말해요.

무슨 말을 하는 게 맞나. 하고 싶은 말은 많은 기분인데 머릿속에서 한데 엉켜 딱히 나은 하나를 골라낼 수 없었다.

그냥 덩어리째 다 쏟아낼 수 있다면. 묻어둔 말들 전부 한꺼번에 눈으로 보이는 일이 가능하다면 목소리를 내는 대신 그렇게 전하고 싶었다.

“많이 바쁘십니까?”

─하하.

윤설 씨는 맨날 바쁘냐고 묻네요.

최윤이 낮게 웃어 퍼뜩 정신이 들었다. 좋지 않은 말을 고른 기분에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고 결국 수긍했다.

다시 똑똑 가볍게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듣고 있다는 티를 내자 바로 질문이 치고 들어온다. 명오나 다른 애들한테 뭐든 물어도 된다고 하지 않았냐고.

“…그분들은 대표님과 제가 정말 교제 중이라 생각하니 어디까지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음. 그 부분은 내가 잘못했네요.

“잘못까지는, 그런 말은 아니에요.”

─압니다. 어떤 게 궁금했어요?

“기사 올린 이유가, 제 것이라 속이고 알파 인자를 거래한 건이 있어서라고 들었습니다.”

─네.

“어떤 알파를 데려다 그런 일을 벌인 겁니까. 아니, 이제 상대도 거짓이었단 걸 알았을 텐데요.”

─그렇죠. 윤설 씨가 오메가일 거라고 밝혔으니 참 난감한 상황이 됐겠네요.

“…….”

─막대한 보상을 요구했으니 알아서 지분이니 경영권이니 손에서 놓게 될 겁니다. 이제 돈이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렇게, 끝나는 겁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윤설 씨한테 괜한 누명 씌워지지 않게 뒤처리를 좀 해야 하고, 대내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물갈이도 절차가 필요하니 ‘조금’ 바쁠 겁니다.

“아, 네.”

─…그래서 박 대표한테 맡기고 출국 일정 잡아달라고 한 거니까 왜 연락 안 했냐는 질문은 안 하기로 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아니에요? 꼭 연락 없으면 나 바쁘냐고 엄청 물어보던데.

“지난번 일 때문에 불쾌하셨던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길어지는 대화에 긴장이 풀리는지 어느새 윤설의 목소리도 잠겨있었다. 눈치 빠르게 속내를 짚는 최윤의 말에 한데 뭉쳐 어떻게 물을까 고민했던 질문들을 삼키며 목이 메는 듯한 착각도 든다.

이번에는 최윤이 잠시 침묵하다 아아, 뒤늦은 탄성을 냈다. 러트 기간을 뜻하는 게 맞냐고 되묻더니 그로서는 드물게 난처한 듯 침음을 내기도 했다.

─이런 말 하기 싫은데, 힘들었던 건 맞아요. 일하다 드러눕고 싶어서 혼났습니다.

“네. 아무래도, 그… 죄송해요.”

─정말로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요?

“대표님 입장에서는 불쾌한 경험이었을 수 있고, 거북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발정 난 짐승 같고, 노팅을 못 참고 여러 번 했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징그러울 것 같다. 끝으로 갈수록 자신 없이 사그라드는 목소리로도 끝까지 할 말은 했다.

최윤이 지금껏 그랬듯 상당한 호의로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계약을 이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단 생각도 했다.

윤설이 알기로는 상황이 잘 풀리고 있으니 굳이 번잡스럽게 비정기 이사회다 뭐다 억지 절차를 졸속으로 진행할 필요도 없이 경영권을 잡을 수 있을 터다. 몇 달이면 겨울이 성큼 다가올 텐데 윤설에게 굳이 친절하지 않아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태도나 만남은 주관적인 부분일 뿐 사람 붙여주는 규모며 편의 제공만 봐도 한껏 예의 차린 대접이라 윤설이 새삼 불만을 가질 입장조차 못 된다. 기분 좋게 간지럽던 고양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 그거……. 윤설 씨랑 안 어울리는 모양이긴 했어요. 꽉 찬 느낌 좋아하기는 하는데 그날은 배앓이도 한 것 같고.

“네? 네.”

─뭐 어쩌다 있는 일 아닙니까, 러트라는 거.

“…….”

─그래서 나랑 섹스 못 한다는 거예요?

설마 또?

윤설이 말을 잇지 못하자 최윤의 툴툴대는 소리가 넘어왔다.

처음도 아니고 매번 좋았다 나빴다 평가해야 하느냐, 매너를 넘어서 굉장히 분위기 없는 짓이니 더 묻지 않기로 하자, 혹시 몰라 아직 출시 전인 제품의 시험까지 자처하며 굳이 건드린 건 제 책임이기도 하다, 따위의 장황한 설명이 빠르게 이어졌다. 윤설이 부정하는 듯한 운을 뗄 틈조차 주지 않았다.

마침내 윤설이 한결 또렷해진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하고 나서야 불평이 멈추었다.

“…저 때문에 몸 상할 일을 하셨어요?”

─…윤설 씨 하는 거라도 보여달라고 할까 했는데.

“네?”

─화상 통화 되잖습니까. 평소에는 예뻐요, 윤설 씨 거.

“그래도 어떻게 그런, 안 될 것 같아요.”

─안 해봐서 모르잖아요.

다소 뻔뻔하게 따지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 소리를 냈다.

잠시 후 최윤도 웃었다. 시원하게 웃던 그가 해 떠올라 밝아질 참이라며 작별을 고했다. 끊기 전 마지막으로 궁금한 건 다 풀었느냐 묻기에 웃음소리에 빠져있던 윤설이 황급히 덧붙였다.

또 전화드릴게요.

알겠다는 말을 듣고 나자 끊긴 전화를 그대로 붙잡고 등이 미끄러져 침대 위에 어정쩡하게 누운 자세가 되었는데 불편한 줄도 모르고 금방 잠이 들었다.

* * *

윤설답지 않게 늦잠을 잤다. 침입자에 대한 공포가 걷힌 뒤로는 그날의 피로를 남김없이 해소해야 한다는 사명이라도 가진 사람마냥 깨는 시간이 들쭉날쭉해졌다. 본의 아니게 타국에 온 뒤로 계속 밖에서 깨워주면 눈을 뜨고, 식사를 하러 내려가서야 얼추 잠이 깨는 게으름뱅이가 돼버렸다.

오늘은 우형과 다른 스태프들이 도착하기로 한 날이니 멀끔한 모습으로 맞아야지. 우형이 한잠 자고 나면 같이 가고 싶은 곳들이 있는데 어떨까.

들뜬 생각들로 푹 젖은 상태가 스스로도 느껴졌다. 일행이 생긴 다음으로 외출을 미루고 나니 또 버릇처럼 협탁 위 시나리오와 제작 스케줄에 손이 간다.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최윤과의 통화 후 해가 중천일 때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카드와 가제본한 책자가 놓여있었다. 감독으로부터 온 합격 통지서였다.

낯선 도시와 휴식을 충분히 즐긴 다음 사랑에 빠질 준비를 하자고.

책자를 넘겨 보니 도시 안의 세트장이나 시가지, 교외 촬영 예정지 하며 거리가 있는 듯한 인근 도시까지 섭외 목록이 길었는데, 설명을 봐도 당장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예상 스케줄 사이사이 틈이 없다시피 해 미리 휴식을 언급한 문구가 오히려 최후통첩처럼 다가왔다.

그래도 좋다.

쫓기듯 한 화보 촬영이나 간단한 클립 영상 정도 이상으로 해외 체류가 허락된 적은 없었고 그래서 뻔히 보고도 놓친 기회들이 있었다. 차라리 윤설이 동양계라서, 경력이 충분치 않아서, 외모가 전혀 어울리지 않아서 탈락했더라면 미련도 없었을 텐데.

지금도 단순히 국내의 소란을 피하기 위한 도피에 지나지 않았다면 다음, 그다음을 상상하며 낙담했을 것이다.

“…우리는 너 캐스팅 확정인 줄 알고 비행기 안에서 와인 땄는데?”

“어?”

“그러니까 다 보따리 이고 지고 왔지. 너 돌아다니면서 오디션 보는 거였으면 반만 와도 되잖아.”

“그거는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기쁜 소식을 전할 생각에 부푼 마음으로 서성이고 있던 윤설에게 다짜고짜 달려들어 포옹한 우형이 엉뚱한 소리를 뱉었다. 우형의 뒤로 트렁크를 끌고 느릿느릿 호텔로 들어서는 면면들이 과연 묘하게 들뜬 한편 축 늘어져 보인다.

본인은 입도 떼지 못했는데 저들끼리 비행기 안에서 축하주를 마셨다니 아무리 윤설이라도 허탈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나 엊그제 감독이랑 미팅했어. 결과는 어제나 받았고.”

“그래? 이상하다. 아무튼… 너 후보 0순위라고 보내준 거라더라. 안 되면… 안 되면 회사가 호강시켜 준다 치고 실컷 놀다가 저가 항공 타고 다른 오디션까지 다 돌고 오라고.”

“…누가?”

“…우리 사장님?”

서로 눈만 끔벅이고 있다 아무튼 잘된 거 맞지 않냐며 등을 팍팍 두드리는 우형 때문에 같이 웃었다.

폭탄 같은 기사가 터질 때 겨우 얼굴만 봤던 회사 사람들이 취기를 보태 용감해진 건지 쑥스러움이라곤 없는 낯으로 인사하며 줄줄이 사라졌다. 그 광경이 마치 코미디 영화의 시작처럼 보여 우형과 둘만 남을 때까지 인사를 해 주었다. 그러고는 방으로 함께 올라가 짐 푸는 데 손을 보태주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번에 준 카드로 부모님께 안마기를 사드렸는데 최윤이나 박 대표가 뭐라 하지는 않더라. 윤설이 러트 뒤로 피부 반질반질한 모양에 홀로 뼈 빠지게 스케줄 준비하는 동안 배가 아팠다. 나 없이도 잘 지내는 듯해 서운하더라.

쏟아지는 우형의 말 속에서 미리 가고 싶은 곳을 골라 왔다는 문장을 집어 오후에 시작해 저녁으로 끝나는 산책 코스를 합의한다. 둘 다 가고 싶은 곳이 많은 방향부터 시작해 우형이 가고 싶다는 식당에 들르고, 윤설이 골라둔 브랜드 스토어로 방향을 튼 다음 빠져나오는 길로 선을 긋자 그럭저럭 적당히 바쁘고 돌아오는 길은 한가한 코스가 된다.

“여기는 왜? 너 모델 했던 브랜드라 궁금해서?”

“어, 그런 것도 있고…….”

“어어. 있고.”

“선물할 만한 게 있을까 해서. 같이 봐줘.”

우형이 차마 말은 안 한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짓하며 쫓아냈다.

여독이 있는데 쉬었다 나가는 편이 낫지 않냐는 말에도 호기롭게 바로 튀어나온 발걸음이 무척 신나있었다. 아무리 붙어 다니느라 활동 범위가 변변찮았대도 윤설보다는 여행 경험이 있는데 뭘 해도 처음인 양 신기해한다.

그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면서 경호원들이 본 자신도 저랬을까 싶어 뒤늦게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응.”

“이게 뭐라고 그렇게 고생했냐.”

“그러게.”

“윤서리 고생했다. 잘 버텼네.”

“너도, 나 때문에 고생했어. 고맙다.”

이후로도 뒤편에서 따르는 경호 팀이 속으로 어떻게 볼까 싶을 만치 촌스럽게 굴었다.

한참 신나게 구경 잘 하다가 나란히 앉아 식후 디저트를 뭉개며 울컥 치미는 감정을 다스리는 못난 얼굴들이며, 진부하기 짝이 없는 대사를 주고받으며 괜히 코 푸는 시늉을 하고들 있었으니 얼마나 얼뜬 모양일까.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언젠가, 나중에, 몇 번이나 실패한 도피가 성공하면, 내년에는 꼭’ 그런 기약 없는 말들로 미뤄졌던 그 언젠가가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이 절대적이었다.

제각기 일상에 바쁜 사람들이 틈을 내 환담을 나누고, 식사를 하는 틈에서 기우는 해와 벌겋게 타는 노을을 보고 있다는 것. 푸르스름한 어둠이 지기 시작해도 서둘러 집에 돌아가 웅크리고 있어야 안전하다는 불안이 쫓아오지 않는 평범함.

윤설은 마지막으로 들른 브랜드 스토어에서 ‘그래, 나 너무 고생했어!’를 외치며 정신없이 물건을 고르는 우형을 말려 대신 카드를 긁었다. 이번 쇼핑은 모두 선물용이라 최윤의 카드를 모르는 척하고 간만에 제 것을 썼다.

“아, 맞다. 나 출국 직전에 너 주라고 받은 게 있거든. 기다려.”

쇼핑백을 문간에 내팽개치고 방에 들어간 우형이 곧 돌아와 태블릿을 내밀었다. 딱히 선물이라 할 만한 신형도 아니고 사용감이 있는 물건이었다.

일단 받아 들고 설명을 요구하는 듯 빤히 바라봐도 어깨만 으쓱인다. 최 대표가 전하는 거라고 하니까 좋아할 만한 영화나 음악이라도 들어있지 않겠냐는 추측이 다였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다. 흘끔 뒤따르는 명오를 봐도 고개를 젓기에 아주 씻고 난 다음 누운 자리에서 천천히 열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날 윤설은 최윤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긴 대화 끝에 망설이며 다시 전화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던 적 없는 것처럼 태블릿을 쥐고 뒤척이기만 했다.

잠들면 꿈을 꾸리라. 스스로 예언하듯 불길한 말로 앓으며 괴로워했다.

덜 마른 머리를 하고 비교적 자그마한 크기의 태블릿 전원을 켜자 빈 화면에 플레이어 아이콘 하나만 떠있었다. 정말로 윤설 취향의 영화나 들을 만한 음악 따위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최윤이 즐기던 리스트를 그대로 옮겨 담기만 했을지도 몰랐다.

첫 화면은 어두운 암막으로 소리조차 없다 차츰 작은 소음이 깔리기 시작하며 기대감을 부추겼다. 이어 두 손이 뒤로 묶여 의자에 앉은 인형이 보이고 불규칙적으로 소리가 반복된다. 귀에 거슬리는 타인의 소리.

여전히 어두운 실내에 비해 턱없이 작은 조명이 차츰 뚜렷해졌다. 원치 않는 스포트라이트 속에 고개 숙인 사람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카메라와 가까운 쪽에서 몇몇의 목소리가 오가도 그는 방치된 채 두려워했다.

대리인으로 올 분들은 다 모였으니 원하는 처분을 말해봅시다.

윤설이 익히 아는 남자가 어수선한 대화를 끊어냈다.

─유전자 대조할 샘플을 보냈습니다. 확인해 봤습니까?

‘대리인’으로 그 자리에 모인 여자, 남자, 나이대는 불분명한 목소리들이 차례로 답했다. 긍정이었다.

─그리고 여기 윤주현의 진짜 형질 판정 기록도 확인하셨겠지요. 판정 기관을 매수할 수 없다는 건 우리 쪽보다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아쉽게도 애초에 윤씨 손에 우성 알파는 없었다고 봐야겠죠.

윤주현. 형질. 2차 성별자.

빠르게 스치는 정보들 속에서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윤설이 몇 번 보지도 못했던 사촌의 얼굴. 그마저도 나이 터울이 있어 어릴 적의 모습이었다.

─전후 사정이 어떻든 윤주현은 여러분이 원한 기준에 한참 못 미치는 알파임에도 불구하고 윤씨 남매가 결과를 조작했습니다. 또한 어릴 때부터 대외 노출된 배우 윤설을 이용해 윤씨 집안에서 알파를 여럿 데리고 있는 것처럼 떠벌려 시장을 교란시켰죠.

─…심지어 윤설은 알파도 아니라면서? 오메가라고 밝혔잖습니까. 형질 검사 결과를 몇 건이나 조작했다는 건가요?

─워낙 희귀하니 2차 성별자가 있는 집안에서도 속았지 않습니까. 저야 피해는 없고 성가시게 군 일들이 있어서 모르는 척하고 싶었는데 여러분께서 굳이 제 약혼자를 거론하시니… 이 자리에서 여러분 걱정거리를 처리하고 좋게 합의하고 싶습니다. 물론 사적인 보복이나 배상은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어둠 속의 대화가 진행됨에 따라 윤주현에게 집중된 조명이 밝아졌다. 이미 군데군데 피로 얼룩진 옷에 새로 흘리는 식은땀이 더해져 오랜 시간 맞고 찢어진 자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을 둘러싼 자들의 합의가 결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공포에 질려 호흡도 고르지 않았다. 입에 물린 재갈도 없는데 구걸 한 마디, 흐느끼는 소리 한 번 없이 떨고만 있지만 함께 울어줄 사람은 거기 없었다. 보는 사람 등으로 소름이 올랐다.

─불량 인자로 수정된 걸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미 출생 신고가 되었거나 3개월 안에 태어날 예정이라 곤란합니다.

─제가 그쪽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어디서 또 알파를 구하기도 어려우니 발현 때까지 처분을 미뤄야 하고… 결과가 어떻든 여러분 모시는 집안에 자손이 부족한 인자를 가졌다, 심지어 유전적으로 친부 쪽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안 된다, 난처한 상황이라는 점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 자리에서 확실하게 처리하고 시신이 남지 않게 소각하길 바랍니다.

─모두 동의합니까.

누가 억지로 머리를 붙잡고 화면에 들이민 채 강요하기라도 하듯 눈을 뗄 수 없었다.

프레임 안 어둡고 음습한 공간은 공개 처형장이고 최윤은 집행자였다. 비록 사기극에 넘어갔다고는 하나 기꺼이 알파를 사들인 자들이 제 핏줄에 금테를 두르는 데 감히 출생의 비밀 따위가 끼어들지 않도록.

그들은 억지로 윤설까지 거론했고, 최윤은 알면서도 응해주었다. 서로 더 선을 넘지 말자는 합의의 증거로 윤주현의 숨을 끊어놓았다.

촬영자를 포함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오고 난 뒤 최윤도 어딘가의 문을 열고 나왔다. 온통 어두운 가운데 손이 여럿 동원된 듯 불길이 확 치솟아 바닥부터 무서운 속도로 타고 올라갔다.

한참을 타서 불길 속에 자재가 허물어지고 무너지기 시작할 즈음 재생이 끝났다. 윤설을 얽매던 집안과 알파라는 딱지, 그의 피로 얼마든지 새로운 우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맹신 모두 재 가루로 남을 터였다.

영상으로 남은 끔찍한 증거 역시 그 과정이었다. 윤설도 진작 알고 있던 바다. 누구의 손도 더럽히지 않고 벗어날 방법 따위 보이지 않아 최윤의 발치에 무릎을 대고 간청했지 않은가.

알면서도 뒤숭숭해진 속으로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좀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최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막상 들으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참고 기절처럼 의식이 끊기기를 기다렸다.

─자고 있었습니까.

최윤의 전화가 그를 기어코 건져 올렸을 때는 새벽 세 시가 조금 지나있었다.

늦은 시각에 묻기에는 답이 뻔한 질문이었다. 윤설은 전화가 끊기기 전에 가까스로 대답하고 침대 옆 조명 스위치를 눌렀다. 조도가 낮은 수면 등인데도 갑자기 빛이 들이치자 눈이 시렸다.

윤설이 움직이며 내는 부산스러운 소리를 전부 듣고 있는 사람처럼 숨소리만 넘어온다.

─시차를 보면 잘 시간이어야 맞죠. 알면서 걸었네요.

“여기 와서 잘 잡니다. 괜찮아요.”

─다행이에요.

“덕분에…….”

─김우형 씨가 준 선물은 받았어요?

“…….”

머리맡에 고이 놓여있는 태블릿을 말함이다. 바로 알아듣고도 조금 망설였다.

최윤은 아직 못 봤냐며 침묵의 뜻을 다시 묻지 않았다. 그저 약간 피로한 듯한 목소리에 신경이 쏠려있는 윤설에게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새삼 내가 무서워졌어요?

“아니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윤설 씨는 쉽게 결정했잖아요. 이런 내가 끔찍하냐고.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못 할 일이라 대표님께 부탁, 도와달라 한 겁니다.”

당신과 나는 다르다.

물론 영상은 끔찍했다. 왕래 없이 살던 사촌이라 해도 얼굴 아는 사람이 피 흘리며 묶인 채 자신의 처분을 두고 계산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죽었다.

“…그렇게 하는 대신 저까지 공범으로 몰지 않겠다고, 그러기로 한 거잖아요.”

─맞아요. 그쪽도 거기까지는 억지인 줄 알았을 겁니다. 한번 떠보자는 식으로 보상을 크게 불러서 나도 건드려본 거 아니까 좋게 좋게 손 빌려줬고요.

“갑자기 대표님을 그렇게, 다르게 생각할 일은 없어요.”

─그런가요.

따지자면 불타 무너지는 컨테이너 속에서 안도감을 건진 자신이 가장 끔찍하지 않은가. 처지가 나아진 뒤에야 가질 수 있는 알량한 양심임을 알면서도 되묻고 싶었다.

“…그때 한 말로 기분 상하셨어요?”

─기분 상한 건 아닌데.

“…….”

─윤설 씨는 상식적이지 않은 면을 무서워하길래. 그냥 궁금했습니다.

웃음기라고는 없어 화가 난 줄 알았다. 되짚어 보면 최윤이 윤설에게 장난을 자주 걸어 그렇지 원래부터 말투가 경쾌하고 가벼운 사람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너무 민감했나 보다.

“그렇다기보다는…….”

─네.

“저번에 너무 제 말만 늘어놨나, 답답했나 해서요.”

가시지 못한 졸음에 기대 담아두었던 말들이 더디게 흘러나왔다.

─…하긴 윤설 씨가 조오금 소심하기는 해요.

어지간하면 받아넘기던 최윤이 부정하지 않는다.

역시 하는 말마다 엉터리 같다. 자다 깨서 제대로 대화가 안 될 테니 다시 전화한다 할 걸 그랬나 보다.

─이제 와서 물어봤자지만, 친했습니까?

“누구, 주현이요? 어릴 때 본 게 전부였어요.”

─그래요. 그 부친이 막내아들이었나, 자식 죽는다니까 가진 거 다 내려놓는다고 매달렸다는군요.

“…….”

─자식이 귀했으면 처음부터 안 될 일에 쓰지 말았어야지. 가장 먼저 나가떨어진 셈입니다. 운이 좋든 나쁘든 그들 지분 일부는 매각해서 보상으로 날아갈 거예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저를 묶어뒀으면서.”

혼잣말처럼 속삭인 말도 잡아챘는지 최윤이 잠시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엉뚱한 감상이었지만 윤설은 그 잠깐의 망설임 섞인 소리가 좋았다. 둥글게 뭉개지며 뜸 들이고 끌리는 소리가 듣기 좋다 하면 이상하다 하겠지만 평소 최윤의 말은 발성도 박자도 무른 구석이 없다. 드러내지 않아야 할 상대라면 한 번도 듣지 못했을 터였다.

으음, 음.

작은 소리가 몇 번 되지 않아 머릿속을 정리한 듯 어떤 이야기를 한다. ‘만약에’로 시작하는 가정이었다.

은성그룹은 윤설로부터는 3대 위 증조 대에서 첫발을 뗐다. 당연히 고생이 따랐고 운이 따라도 자수성가라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자본을 끌어들이거나 수요자의 폭발적인 반응이 있지 않은 한, 성장은 더디고 때로는 유지만으로도 벅찼다.

윤설에게 유산을 남겨준 조부모, 작고한 회장 대에서도 한동안 이어지는 지지부진함은 좀처럼 뛰어넘기 힘든 벽이었다. 이미 선두 주자가 있는 사업은 새로 뛰어들기 어렵고 미개척지에 깃발을 꽂아도 시장의 큰손에 의해 이리저리 휩쓸리는 업계 상황이 보였다.

자연히 어린 남매들도 어정쩡하게 사장님 자식들 소리는 들었으나 속사정으로는 그다지 부유함을 느낄 틈 없이 성장했다.

어느 시점에선가 회장 부부는 인맥과 약간의 비정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뒤늦게나마 그 방향으로 부단히 노력했다. 턱걸이로 기준을 충족한 그들이나 동원된 남매들이나 끝없이 위로 늘어선 ‘진짜’ 부자들의 계단과 권력자들이 누릴 수 있는 파격 앞에 나름의 설움도 겪었다.

은성이 이름만 들어도 알겠다, 그럭저럭 손에 꼽을 기업 중 하나다 하게 됐을 때 남매들은 성인에 가까웠다. 그네들끼리의 눈에 눈물 나는 고생이었고 이제는 젊은 날 누리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한동안은 실제로도 그랬는데― 둘째 딸의 이른 결혼과 더불어 집안 분위기가 바뀌었다.

─남의 눈치 보고, 남의 부와 권력부터 재고, 강하면 엎드리고, 줄을 대고 한 계단 올라갈 때 온 가족의 가치가 올라가는 삶에 목매고 지낸 사람들 정신으로 태어날 때부터 무한한 가능성이 수치로 증명된 타인을 목격하면 어떤 기분일 것 같습니까?

성인의 가치관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늘 획기적인 기회, 천운, 큰 한 방을 노렸고, 간절히 바라는 삶으로 평생을 보낸 회장 부부는 이르게 찾아온 손주에게 붙은 또 하나의 이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족한 성공에 만족하고 취해있는 자식들보다 훨씬 나은 미래를 보장할 것만 같았다.

─임종을 앞둔 몇 년 사이가 아니라 십 년은 일찍부터 손주에게 더 많은 몫을 달아놓은 줄 알게 됐다면요?

애석하게도 윤설의 부모 역시 이 유혹을 떨쳐내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겠으나 윤설이 받은 교육과 성년을 향한 카운트다운은 모두 한 가지 목적을 향해있었다.

윤설의 다음으로 태어난 윤씨 집안 핏줄 누구도 윤설보다 우수함을 증명하거나 2차 성별자로 발현하지 못했기에 어쩌면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는 미래였다.

─여전히 한심하지만 납득은 되는 사정이죠. 남들이 들으면 그런 이야기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고요.

“…네.”

─그렇다고 하면 용서할 수 있겠어요?

“…….”

─이해할 만한 사정이 있으면 끊은 듯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니요. 저는 아직도… 아마 지금도 한국에 있었더라면.”

─그러면 잊어요. 이럴 수도 있겠지만 모르는 일이고, 윤설 씨가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살인자도 남의 삶을 깡그리 말아먹고 온 밤에 자기 가족의 안녕을 기도합니다. 죄를 저질렀어도 당연하게 자신과 사랑하는 것들은 무사 행복하라고 빌 만큼 뻔뻔하고요.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한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감히 제 식구 잘 살라는 말을 대가도 안 내놓고 신에게 들이대는… 그래서 결국 가족으로 발목 잡히기도 하지만요.

“대표님.”

─네. 이제 자야죠. 깨워서 별 좋지 못한 이야기만 했는데.

“대표님.”

최윤치고 긴 위로였다. 틀린 데가 없었다. 일찍이 은성 어른들의 역사를 알았다 하더라도 윤설은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벗어날 방법은 없을까. 얄팍한 동정을 실컷 하고 나면 자유인 윤설은 아무렇지 않게 잘 살 수 있나.

잘났다는 머리로는 완전히 잊지도 못할 것이다. 언제고 불안의 단서에 무뎌지지 않으면 기억은 생생하게 재생될 준비를 하고 있어 그와 함께 잠들어야 하고, 완치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사람인 양 자기 연민에 빠질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오래도록 괜찮지 않을 것이다.

“보고 싶어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상상하고 생각하고 사실을 파헤쳐도 변함은 없으리라.

최윤의 말로 새삼 자신이 무슨 착각을 했던가 싶어 입술을 물었다가 끝내 나온 말은 사과도 감사도 아닌 그리움이었다. 최윤은 또 낮게 잠겨들며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가 어딘가를 똑똑 두드려 윤설이 듣고 있는지 확인했다.

─바쁜 일 끝나면 그쪽 갈 겁니다.

내가 거기서 유학했다고 말했던가요. 얼마 안 됐으니 기억나는 대로 소개해 줄 만한 곳이 있겠지요.

태연히 이어지는 말과 낯선 장소 몇 군데를 꼽는 소리를 들었다. 결국 다시 잠들지는 못했으나 꿈속에 불길이 영영 타오를 듯한 두려움은 사그라들었다.

* * *

은성그룹 집중 취재 기사가 네 편째 실린 날, 신문사로 문의가 쏟아졌다. 안 그래도 단독으로 싣는 순간 은성이나 주요 경쟁사로부터 떠보는 듯한 문의가 적지 않았는데 배우 윤설의 사고와 그의 희귀 체질을 암시하는 발표가 있자 난리도 아니었다.

기자 단독으로 준비했고, 극비라 원고만 받아낸다는 답변으로 일관해도 소문의 덩치가 불어남에 따라 믿는 사람이 더 적은 판이다.

기자 이름을 검색해 예전 사회부 취재자라는 걸 알아낸 인터넷 추론에 살이 붙었고 혹자는 팀으로 움직여 따낸 스토리가 아니면 말이 안 된다, 하나의 필명 뒤에 단단히 별러온 전담 취재원들이 있을 거라 주장했다.

뜨겁다 못해 과열된 관심 속에 처음에는 벌벌 떨던 신문사도 이런 흐름이면 차라리 노를 젓자는 쪽으로 기울었고 안락하게 감금돼 울고불고하던 기자도 불만이 쏙 들어갔다. 적어도 최윤과 운조에 항의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

와중에 은성의 요란한 사두마차가 삐걱대는 소리가 나니 슬그머니 정계도 대기업 비리가 어쩌고 하며 입을 댔다. 거기다 잘 버티던 사 남매 중 막내가 돌연 지분을 매각하고 신변 핑계 운운하며 출국 편 비행기에 오르고 나니 무슨 비리를 붙여도 그럴듯해 보였다.

“속사정 뻔히 보이는데 눈알 굴리면서 재고들 있더니. 아주 꼴좋다.”

그런 마당이니 주주 중 의결권이 있는 큰손을 모아 의견 청취니 뭐니 혼비백산한 경영 실무진과 뒷전에서 관망하던 이사들이 모인 자리에도 이미 기 꺾인 면면들이 그득했다. 일찍부터 유통업계 사전 작업에 열심이던 최진만 신이 나서 펄펄 날아다니고, 최윤은 가급적 회사 살리는 방향으로 너희를 인도하겠노라 말이나 얹어가며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남 죽상으로 만들면서 이권 착실히 쓸어 담은 뒤 얼굴에 발그레한 꽃이 피는 모양이 최 회장네 자식들답다 싶어 다 큰 남매 사이에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살아온 궤적이 있는데 승리와 약탈의 맛이 질릴 리 없다.

“혹시 딴생각이나 뒷주머니 찰 생각 못 하게 감시나 세우면 될 일이고.”

“응. 누님 고생했네.”

“말만.”

“뭐 드릴까.”

“술 창고 좀 열어봐.”

“나도 못 마시는 걸 얼마나 털어 가시게?”

물론 축하주는 한 잔이 아니라 통으로 돌려도 과하지 않다. 분위기 깨고 싶지는 않았지만 본의 아니게 금주 중인 최윤으로는 약간 눈이 시어서 괜히 툴툴댔다.

양지의 경쟁사는 대강 정리해 놨는데 이제 약 팔던 놈들이 똘똘 뭉쳐 기회만 보고 있다더란 소리가 하루 멀다 하고 꽂히는 판이다. 최윤이 운신을 못 하면 지지부진해질 사업이라 목표도 뚜렷했다.

“너도 마셔라? 그 조금 마신다고 연장 못 잡아?”

이쪽도 간만에 까마귀 패싸움한답시고 성마르고 긴장한 분위기가 감돈다고 하지마는 최윤만큼 몸 관리 중인 사람이 없었다. 최진이 빙글빙글 놀리는 투로 옆구리를 찔러보더니 새삼 감탄하며 물러날 정도였다. 언제 시작돼도 무겁지 않게, 둔하지 않게.

“나도 앞자리가 바뀌었는데요.”

“웃겨.”

술 줄이고 담배 늘리면 몸에 안 좋기는 똑같지 않냐는 잔소리와 함께 지하 와인 셀러 한 줄을 몽땅 털렸다.

귀한 막냇동생 입국 후 처음으로 얼굴 본 날보다도 싱글벙글한 낯에 조금 더 툴툴대려다 손만 흔든다. 사석에서 그래봐야 나이 차 나는 막내의 어리광으로나 알아듣지 싶다. 아니, 분명히 그럴 테다.

[청람을 비롯해 메인 품목 팔던 조직들이 수량을 조이고 있답니다.]

[원래 중간상한테 떼 주는 양이 적었는데 운조 핑계 대면서 더 줄이고 있습니다.]

[시장 얘기 하자고 합시다. 자리 만들어요.]

머릿속에서 지난 단계의 계획에 빗금 치듯 세부 사항을 지우려 애쓴다. 와중에 박 대표나 해외로 딸려 보낸 명오 쪽에서 영 딴판으로 잘 지내는 윤설의 행적을 듣고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 자잘한 일 몇 가지를 더 뺐다.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기분이 드니 살 만했다.

회사 일 쫓아다니고 시험 삼아 돌린 약 판매할 궁리 끝에 훌쩍 저녁이 다가오면 기다렸다는 듯 걸려 오는 전화. 이미 아는 이야기지만 자기 감상이 붙은 윤설의 일과를 듣고 있다 보면, 이쪽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걱정을 하고 있을 때가 왕왕 있었다.

그는 마치 최윤의 시선이나 호오 자체가 중요한 사람처럼 군다. 뒷간도 들어갔다 나올 때는 마음이 바뀐다는데 거래의 완성도 머지않은 참에 태도가 느슨해짐은 당연하다. 정도를 넘지만 않으면 눈감을 텐데 더 하면 더 했지 도통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다.

그런 점까지 마음에 들어 호의가 차고 넘쳤던 것도 맞지만. 피로하고 예민한 정신으로도 부드럽게 달래는 말을 건네고는 있지만.

“바쁜 일 끝나면 가겠습니다.”

예정에 없던 말을 뱉고 뒤늦게 입 안을 씹는다. 뒤지게 바쁜데 가기는 어딜 가냐고 핀잔을 줘봤자 이미 주워 담기에 늦었다.

건너편의 윤설 목소리가 묘하게 밝아졌다. 일 잘 풀렸다는데 생뚱맞게 보고 싶다는 말을 할 게 뭔가. 영화 속 주인공처럼 애틋함 어린 목 울림이 너무 잘 들렸음에도 현실감이 없었다.

* * *

사소한 일거리를 여럿 지운 보람 없게도 금방 한 줄이 늘었다. 실체 없는 목록 중 몇몇은 이미지로 구체화된 채 머릿속에서 기능하는 반면, 어떤 일들은 몸으로 겪어도 흑백 영화처럼 흘러간다.

방만하게도 저들이 가진 사무실 중 규모로 두 번째쯤 되는 건물을 약속 장소로 전한 청람과의 대면일 아침 스쳐 가는 뉴스도 숫제 팍팍하고 단조로운 소식들로 차있었다. 날씨, 사건, 사고, 규제, 물가 상승.

대화를 하자고 제안한 운조나 선뜻 사업장을 연 상대나 문 여는 순간부터 입은 열지 않았다. 무채색에 선팅이 짙게 된 차량들이 줄지어 건물 주위를 둘러싸고 차에서 내린 까마귀들도 희면 살이고 검으면 옷이다.

최윤의 눈에는 그나마 사옥이라도 멀끔해 위안이 되었다. 그 자신도 어차피 버릴 옷이라 어두운색을 골랐지만 깊이 뿌리 내린 미의식이 괴로웠다.

불러서 왔고, 너희 유 이사 나오라고 해라 건들댈 준비가 만만이던 간부가 시비조 트기도 전에 로비에 죽치고 있던 덩치들 눈빛에 앞선 이들끼리 주먹부터 오갔다.

혀를 차면서도 말리지는 않았다. 이쪽은 나름 진짜 대화로 성취하고픈 내용이 있다지만 본질적으로야 너 죽고 나 살자는 마인드가 어디 가지 않는 사정은 마찬가지라 언제고 있을 일이었다.

품에서 칼 빼 들고 휘두르는 팔이나 앞으로 끼어드는 치들을 걷어치우는 발길질 사이로 걸음을 옮기며 휘 둘러보니 여기 눙치고 있던 놈들은 실속 없이 몸집만 키운 듯했다. 영 헛물은 아니어도 상대에게 치명타를 날리거나 빠르게 현장을 정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칼에 찔리면 살집이며 되다 만 근육이 비대해 뽑아낼 때 날에 다 엉겨 붙고 내장은 별로 상하지도 않을 성가심, 그러니까 소위 총알받이들이었다. 설마하니 꼭대기까지 층마다 이 모양으로 진 빼자는 수작은 아닐 거다.

싸움질에 이력깨나 있다는 간부들이 칼질 몇 번에 상황 파악을 마쳤는지 칼을 넣고 둔기를 뺏었다. 둔탁하게 맞아 터지고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면서 한결 정리가 빨라졌다.

최윤은 몇 번 발로 거치적거리는 몸뚱어리만 밀어내며 휘휘 걸었다. 엘리베이터에 가까워졌을 즈음, 앞서가던 직원이 쓰러진 놈 멱살을 잡고 일으켜 유 이사의 행방을 물었다. 쇳소리 내면서도 대답은 곧잘 하기에 그대로 내팽개치고 땡 하는 도착음이 들릴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한참 파이프고 곤봉이고 휘둘러 밀고 온 놈들, 문을 요란하게 밀고 들어온 놈들이 알아서 계단참으로 올라갔다. 제 식구들이니 예쁘게 보려고 해봐야 까마귀 떼가 따로 없고 벌써부터 사내들 땀 냄새 나는 듯 코가 시큰해 미간을 찌푸렸다.

“조심.”

빨간 숫자가 5층에서 끝났다. 문 열리기 무섭게 훅 끼쳐드는 칼을 숙여 피한 직원이 그대로 밀고 나가 복도 벽에 상대를 메치고 머리채를 쥐어 처박았다. 쿵쿵 벽 울리는 소리 뒤로 엘리베이터 두어 대에서 차례로 뛰쳐나간 구둣발들이 먼저 도착한 까마귀 떼와 함께 좁은 복도를 갈랐다.

아까보다 물이 좋았다. 적당한 체격에 단단한 몸, 동작들이 깔끔하고 재빠르다.

선발대가 아래 남고 뒤따르던 직원들을 먼저 올려보냈는지 이쪽에 깨지고 찔린 직원들이 덜해 보인다.

아래쪽을 굳이 다 치울 필요는 없는데 꾸역꾸역 어디선가 달려드는 놈들이 이어지는 걸 보면, 청람 규모도 용병으로만 채운 게 아니라 나름 목 걸고 따르는 수하들이 제법 되지 싶었다. 그러면 팔다리 멀쩡한 새끼들은 계단을 기어올라 등 뒤가 성가실 테니 간부들 판단대로 혹은 성질대로 하게 두는 편이 낫다.

“유 이사는?”

뻑, 소리가 크게 울리도록 맞은 상대는 머리가 심하게 울렸는지 대답이 없었다. 손이 먼저였던 탓이다.

멋쩍어 손을 털고 돌아보니 바로 뒤를 엄호하던 까마귀가 피를 닦으며 세 번째 복도, 정면 사무실에 있답니다 대신 답해주었다. 최근 몇 년 사이 교체된 인물이라 직접 대면은 처음일 텐데 듣기로는 낯짝이 뺀들하다고 했나.

직접 몸을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질색하는 훈기와 땀이 배기 시작했다. 앞뒤로 붙은 직원이 있는데도 아주 손 놓고 보기 답답해서, 때로는 상대 일격이 제법 괜찮아서 반사적으로 움직인 지 얼마나 됐다고 구두며 손등 뒤가 번들번들했다.

남의 더운 피 굳기 전에 흘려내고 떨쳐낸들 닦을 새 없이 다음 걸음이 가로막히면 최윤의 옆을 지키던 까마귀든 상대에게서든 또 피가 울컥 솟구쳤다. 어쩌면 잔생채기에서 흐르다 만 피 몇 줄기는 제 것일지도 몰랐다.

너무 길었다. 이날을 위해 꼼꼼히 일깨운 오감과 근육에 새긴 반사 속도가 아까웠다. 오래된 영화처럼 보이도록 조명과 필터를 덧씌운 가장 최신의 누아르 영화처럼 붕 뜬 자극만 가득하다.

“…좀 너무하네.”

세 번째 모퉁이를 돌자 그곳에도 최윤 일행이 다 지나기 빠듯할 만치 가로막은 이들 머릿수가 꽤 됐다.

오늘 지부 사활을 걸자는 것도 아니고, 전부 잃으면 조직 힘이 빠질 텐데 이걸 허세로 봐야 할지 어떨지. 이쯤에는 그냥 짜증이 나기도 했다.

최윤이 들고 있던 칼을 발치에 던지고 품에 손을 넣었다. 찰나의 동작 끝에 밖으로 나온 손을 따라 총구가 삐죽 비어져 나왔다.

탕!

그대로 천장에 한 발 당겼다. 소음기도 공포탄도 없이 대뜸 갈겨버린 탓에 총알이 튀어 청람 조직원들 사이로 떨어졌다.

팽팽한 긴장감이 무너졌다. 암묵적으로 도심에서 총격전을 벌이지 않게 돼있는 상황에 함께 총을 꺼내 들 것인지의 여부까지는 지시받지 못한 표정들이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하여간 치사했다. 최윤은 이미 찝찝해질 대로 찝찝해져 후딱 본론만 통보하고 떠나고픈 성질을 누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낮은 테이블 위에 잔을 여럿 놓고 앉은 유 이사란 놈이 양손에 양주와 와인병 모가지를 하나씩 잡고 맞아주었다.

“총기 불법 국가에서 벌어먹고 사는 서러움 다 아시면서.”

“글쎄요. 오늘 다 뒈지면 장사 접으려고 작정한 사람 같던데.”

최윤도 그가 건네는 잔은 받아 앉았다. 짧은 금주 끝에 원흉이 주는 단 술은 아무래도 좋았다.

“기껏 뚫어놓은 시장 접고 꺼지라고 하면 죽기 살기 아니겠습니까?”

“내가 그런 시답잖은 거 돌리려고 개고생한 줄 압니까.”

“신상? 유행 좋죠. 좋은데 스테디는 거기서 거기잖아. 그걸로 밥 먹고 사는 거지.”

“그래서 별 허섭스레기까지 편 붙여서 운조 걸치면 다 죽는다고 난리를 쳐요?”

다행히도 술은 하품이 아니었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태우고 지나며 남기는 향이 나쁘지 않다.

조폭이라기보다는 번지르르한 사기꾼스럽고, 개중에도 질 나쁜 분야를 다룰 법한 인상에 반해 안목은 있는 작자였다. 그러니 약도 폐급은 변두리로 돌리고 돈을 긁어모으고 있었을 것이다.

“떨, 클럽 캔디, 아이스. 계속 가져가세요.”

“…어. 이거는 얘기가 다른데.”

“그런 거 안 돌린다니까.”

“새거가 더 죽이나 봅니다? 저게 안 아까워?”

반신반의하면서도 소위 메인 품목 유통에 터치하지 않겠다 하니 바로 운조 신상품에 관심 가지는 것만 해도 돈에 환장한 줄 알 법했다. 모르는 척 곱게 키웠다는 최윤에게 발 뻗고 칼질할 기회나 노리던 때가 언제인가 싶게 새로운 시장에 숟가락 대고 싶은 듯한 호기심이 넘쳤다.

“요컨대 하던 것만 하고 서로 상도덕 지키자는 말입니다.”

“…….”

“이 좋은 이야기를 하려고 왔는데 쓸데없이 직원만 많이 버려서 어째.”

“…결론이 좋으면 직원들한테도 좋은 거지요.”

물론 최윤이나 유 이사나 서로의 존재가 거슬렸다.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를 완전히 신뢰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얄팍한 합의라도 선을 분명히 할 필요는 있었다. 어차피 신경 안 쓸 취급품이나 애초에 구할 수도 없는 물건으로 구분하면 고객층도 갈리고 유통망도 조금은 비껴갈 수 있어 보인다.

그래 보인다는 게 중요했다. 일단은 각자가 시간 벌 구실로 충분하다.

“한 잔 더 받읍시다. 우리 직원들이야 실전 뛴 걸로 치고, 운조 아드님이야 뭐, 이름 날리면 좋은 거니까.”

이 바닥이 아직 그렇잖아. 사업이니 뭐니 하나씩 끼고 있어도 칼 맞고 총 맞으면 나가떨어지는 몸 똑같은데 날아다닌다 소문나면 허투루 안 보고 설설 기는 거. 운조가 뼈 빠지게 세운 거 다 늦둥이한테 거저 줬다 소리도 안 듣고 면이 서지요.

까내리는 말 반, 치켜세우는 말 반인 것쯤 귓등으로 흘리며 목을 축였다.

* * *

모 직장인 커뮤니티에 은성그룹을 두고 벌이는 온갖 ‘썰’들이 난무했다. 익명성을 빌어 하루하루 하소연을 뱉기 바쁘던 사람들이라 해도 대규모 구조 조정이나 경영진이 갈린다는 소식에는 자기 이야기보다 더 관심 가지기 마련이다.

얼마 전 정점을 찍은 창업주 자식들의 비위 의혹 등 가십에는 다 같이 웃고 떠들기 바빴지만, 누군가 불쑥 ‘은성 관리자급은 다 물갈이되나?’ 질문을 던지자마자 후폭풍이 어느 선까지 내려올지 몰라 긴장하는 분위기가 돌았다. 월급 받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막연한 해고와 재취업의 위기감이 실제가 될 수 있다는 예감 탓이었다.

은성을 장악할 실질적 모회사 운조의 전신이 유명 조직이라더라 하는 이야기는 쉬쉬하며 알음알음 퍼져있어서인지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반쯤은 편법으로라도 대대적인 피바람이 불지 모른다, 거의 기정사실이나 다름없는 차기 대표 최윤이나 그 측근들이 경영진에 들어앉을 텐데 그간 언론에 노출된 이력만 보면 깔끔하고 외양도 번듯하니 또 모른다, 어차피 해야 할 조정이면 얼렁뚱땅 해이하게 직원들만 부려먹던 모 부서 결재선이나 날아갔으면 좋겠다… 사람 아니면 주가 그래프 출렁이는 이야기뿐이었다.

그 가운데 비운의 대기업 3세 윤설에 대한 관심은 의외로 평범한 수준이다. 부상으로 촬영에 돌입한 드라마는 몇 회분을 전부 폐기한 뒤 새로운 주인공을 물색하여 재촬영에 들어갔으며, 제작진도 심심한 유감을 표하기는 했으나 제작비 및 인건비에 손해는 없다며 계속해 관심 가져주기를 요청했다. 깔끔한 안녕이었다.

복귀작을 날린 윤설 개인의 인터뷰는 없었지만 스치듯 해외 유명 감독과 함께 있는 사진이 올라오면서 팬들의 희망을 부채질했다. 국지성 호우처럼 간헐적으로 최윤과 윤설의 관계 혹은 회복된 윤설의 모습 따위가 기사화되며 인터넷이 잠시 소란했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동안 소속사 직원들이 가슴을 수차례 쓸어내렸다.

적당히 좋게, 적당한 관심으로 은성 사태에 묻어가는 듯 분위기가 유했다. 무엇보다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수상쩍은 질문에 학창 시절 성교육 정도 상식을 쥐어짜 답변할 일이 줄어서 안도했다.

최윤은 그런저런 일련의 동향들이 요약된 종잇장을 훌훌 넘겨 보았다. 청람 지사를 휘젓고 나온 뒤 일단 늘어지게 잤고 깨서는 작은 아이스크림 통을 들고 소파에 눌어붙었다.

영화제가 선호하는 감독 작품이니만큼 윤설이 출연한 첫 해외 작품인 동시에 소소한 수상 결과가 따를 수도 있겠다. 안 돼도 어떻게든 여론을 조성해 줄 생각이었는데 영화가 잘되면 윤설이 2차 성별자인지 아닌지 알 게 뭔가. 업계 성격이 그렇듯 특이함은 특별함으로 변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바라던 대로 드라마든 영화든 실컷 찍으면서 살 수 있겠다는 감상과 함께 초콜릿 퍼지를 가득 떠서 입에 문다. 진하고 달콤한 맛이 물리지도 않았다.

현장 몇 번 뛰었다고 스트레스가 과할 이유까지는 없는데 부쩍 당겼다. 만사 귀찮고, 가졌다 싶으면 좀 느슨해지는 성질답게 슬렁슬렁 일하고 싶기도 했다.

─도련님, 윤 배우가 현지 클리닉 알아봐도 되겠냐고 하던데요.

“어디가 안 좋아서요.”

─일반의는 아니고 호르몬 문제라고 하던데, 저도 반만 알아들었습니다.

약이 더 필요할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고… 해외 체류 중인데 괜찮지 않을까요? 파파라치는 국내만큼 많지도 않고 애들이 정리 잘합니다.

이어지는 박 대표의 설명을 들으며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가득 떴다. 무슨 일 없으면 부재중 통화라도 남기는 윤설이니 저녁 무렵 말하겠다 싶어 더 묻지 않는다.

“불편하면 가야지. 가릴 여유가 없으면 괜찮은 곳 알아봐서 가라고 해요.”

─예에. 도련님도 주치의 들르면 만나보세요.

“안 불렀어. 자고 나니 괜찮은데.”

─제가 불렀거든요.

허허허, 뿌듯하게 웃는 박 대표의 웃음소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잔소리처럼 들린다.

진짜 괜찮은데, 사람 만나기 귀찮은데 하면서도 어릴 때부터 도련님 곱게 키웠다는 게 자랑인 박 대표 상대로 거절하기가 애매했다. 이러니 나이 들면 사업 초기 멤버가 회삿돈을 횡령해도 손모가지밖에 못 자르는구나 실없는 생각도 들었다.

─…도련님 식사하십니까? 설마 또 일어나자마자 찬 거 드세요? 그거 몸에 안 좋…….

“예에, 끊습니다. 오늘도 고생해요.”

사는 동안 몸이 제 말 잘 듣고 이상 없이 기능하면 다지 별 오래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무심코 내려다보니 아이스크림 통이 반쯤 비었길래 잠시 미적대다 한 숟갈만 더 떴다. 그때가 이미 남들은 점심 먹을 무렵이었다.

뻐근한 몸을 늘이고 카펫 깔린 바닥에 드러누워 벽에 걸린 그림을 생각 없이 바라본다. 가끔 몸을 뒤집어 집 안의 소품에 눈길을 두기도 했다.

어릴 적 이런 최윤의 모습이 눈에 띄면 쥐콩만 한 애한테 큰 시름이라도 있는 줄 알았던 가족들이 유심히 지켜보곤 했다. 저녁에 좋아하는 반찬이 자주 나온다든지 질문들이 늘어 아무 생각 안 할 작정으로 구르던 최윤이 팩 짜증 내기 일쑤였다. 그대로도 편안했는데.

한참 그러고 나니 집에 좋아하는 작품을 걸어두길 잘했다는 개운함이 차올랐다. 인테리어니 오브제니 다 이러려고 고심해서 놓는 것 아닌가. 미안하지만 못나고 툽툽한 덩치들, 짙은 감색 아니면 검정 일색인 양복들과 검게 굳는 피만 보느라 피곤해진 눈에 휴식을 줄 필요가 있었다.

늘어지게 쉬었으니 저녁은 두툼한 스테이크에 버터 바른 고구마구이를 포함해서 가니시 풍성하게 차려달라고 해야겠다.

최윤을 칼로 쑤시겠다는 원대한 계획이 어제 일로 사라진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람 몇 데리고 가볍게 뛰다 오는 정도는 무탈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더운물로 샤워까지 하고 나면 한동안 놓고 지낸 게임 뒷부분을 마저 클리어할 작정이다. 나름 게으르고 완벽한 휴일 일정이었다.

─식사하셨습니까?

“지금요. 그냥 말해도 됩니다.”

─…기분 좋으신 것 같아요.

“일이 잘 풀리고 있어서요. 거기는 어땠습니까?”

─좋습니다. 다.

이른 저녁이면 그랬듯 어김없이 전화가 왔다. 시차와 잠들지 않고 컨디션 조절하기 적당한 시각 사이에서 타협한 시간대가 이쯤인 모양이다.

어쩌다 못 받으면 지레짐작과 더불어 포기하고 자는지 부재중 통화는 딱 한 줄만 남는다. 받으면, 지금처럼 졸음기 묻은 목소리로 하루 일과니 뭐니 사소한 이야기를 조근조근 늘어놓다 미적대며 끊는 행동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최윤에게 있어 긴 통화란 윤설의 말에서 보고에 빠진 내용이 있는지, 일정 중 튀는 부분은 무엇 때문인지를 짚는 시간이기도 했으나 윤설의 이유는 아마 다를 터였다.

─호르몬제 잊은 적이 없는데 평소랑 다른 것 같아서 병원 다녀왔습니다. 여기서는 누가 알아보지 않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안 그래도 박 대표가 낮에 전해줬습니다. 뭐라고 하던가요?”

─…약을 바꿔줬어요. 수술 때문에 갑자기 끊었다가 러트까지 겪어서 불균형 상태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이네요.”

─네. 클리닉 자체가 별로 없으니 믿어봐야죠.

감정적인 의존도가 높다는 사실이야 일찍이 알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부대끼는 모든 일이 처음이니 크게 받아들여질 게 분명하다. 더군다나 몸도 안 좋다니 의외의 어리광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김우형 씨 같이 갔지요? 아프면 서러운 법인데.”

─아, 네. 촬영 쉬어야 할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에요.

“무리하지 말고요.”

─네.

“다른 좋은 이야기도 있어요?”

─음.

“벌써 질리면 지내기 힘들걸요.”

─아닙니다. 여기는 공원이 많아서 좋아요.

“그건 확실히 장점이죠. 또?”

─대표님이 신발 사주셔서 다행이에요.

감독이 권하기도 했고, 스태프들과 친해진 우형이 앞장서서 자주 산책이나 쇼핑을 가는데 관광지든 아니든 가릴 것 없이 돌바닥이라 운동화부터 산 사람들이 많았단다.

그러고 보니 인사가 늦었다는 새삼스러운 말도 따라붙는다. 베개 밑에 명오가 전해준 총을 놓고 자는데 늦게 잔 다음 날 자루를 쥔 채로 일어나 깜짝 놀랐다고도 한다. 이제는 잘 보관해 두었다가 기념으로 삼아도 되지 싶은데 그러면 안 되느냐 묻기도 했다.

글쎄, 잠금장치만 잘 확인하면 자다 당겨도 되니까 트렁크 안에 처박지 말라고 엄살을 떨었더니 얼떨떨한 목소리로 안 그럴게요, 수굿하게 답한다.

―…….

“자요?”

식기를 내려놓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도 붙잡는 말이 없다. 말이 느려지기 전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리는 편이었던 사람이 별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싱거운 웃음만 소리 죽여 물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보니 통화 시간도 얼마 되지 않는다. 틈틈이 직원들이 보내오는 사진 속 윤설은 낯빛도 좋고 음식도 가리지 않아 살 내린 흔적이 없었는데 정말 컨디션이 안 좋기는 한가 보다.

어차피 다음 주면 직접 볼 테니 그사이 한국 음식이 먹고 싶어지기라도 했는지나 물어볼까. 유학 시절에도 아프고 나면 꼭 먹던 음식 찾는 놈들이 있었다.

거기서도 따라붙은 명오나 더 아래 직원한테 언질만 주면 구색 맞춰줄 텐데, 최윤의 사람을 그리 편히 부리지는 못하니 별수 없다. 건드리면 부서지는 무엇도 아닌데 은근히 손이 많이 간다.

정작 당장 손이 필요한 일은 산발적으로 널려있어 때늦은 러닝에 따라나서 함께 뛰고 있는 간부 입에서 숨소리 대신 질문이 나왔다. 못 들은 척하고 속도 높일까 하다 오히려 약간 늦추어 뛰었다. 가만있어도 칼 맞을 판에 원한 살 일 있나.

청람에 사상자가 다수 발생해 충원 중이다. 먼저 자리 잡은 직원이 알선처럼 꾸며 운조 사람들 더 심어놓고 있다…….

여기에는 꼬리 잡히는 간격을 체크하라는 단서만 달았다. 되든 안 되든 경계 대상끼리 비슷한 시도를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테스트 돌리는 일에 초짜 끼우지 말고.”

저들끼리 산업 스파이라 부르는 동종 업계 밀정이나 잠복 수사로 던져 넣는 거야 다반사였다. 다만 유통업을 타고 수도권에 뿌려질 신약 테스트에 괜히 얼굴 안 팔리고 꼬리 자르기 좋은 놈 고른다고 아무나 골랐다가 물건만 넘어가면 귀찮아진다.

“아직 출국 안 한 은성 어른들도 드립시다.”

특집 기사는 슬슬 빠져도 된다. 죽을 뻔한 처지였다가 비록 감금 생활이었으나 안전 가옥에서 보호 아닌 보호를 누리며 화려한 이력을 보탠 기자를 두고 고민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풀어주기로 했다. 만약을 대비해 수고비도 보태주고.

은성 둘째 부부의 사망 의혹을 다룬 시사 프로도 재미란 재미는 다 봤다. 시간이 흐르며 정계가 재계 비리 척결 따위의 표어를 내세울 때 단물을 좀 더 빼겠고 그마저도 연말이면 방향을 달리하게 만들 것이다.

“이틀 간격으로 항공편 끊어놔요.”

그러다 보면 뭇사람들의 관심은 예정된 인물이 은성을 갖는지, 그래서 뭐가 달라진다는 건지 정도로 잠잠해지고 곧 각자의 삶에 또 한 번 돌아오는 새해를 준비할 테다. 더 자질구레하고 사소한 다짐과 계획들로. 뻔하다 해도 각종 시상식과 크리스마스, 연말 공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약간의 공허함을 주워다 버리면서.

최윤은 자기 사업을 단숨에 위로 끌어올리고 윤설은 마침내 자유로운 삶을 얻는다.

더 남은 일들도 있지만 대강 그런 끝이 준비돼 있다. 잘 들어맞아서 좋다고 하려니 모두가 토 달지 않는 흐름 속에 가끔 툭 건드리는 듯한 불편함은, 개중 뭐가 성가셔 그러는지 모른다.

터닝 포인트에서 멈춘 최윤이 무릎을 짚고 헉헉대는 직원 등을 퍽퍽 두드렸다. 묻지 않아도 알아서 최윤의 답을 복기하기에 손수 캔 음료를 뽑아 주었다. 돌아갈 때는 슬슬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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