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대표님은 다른 일 하고 싶었던 적 없었나요?”
“사업 말고요?”
“네.”
최윤은 자주 들렀다. 그래야 우형도 쉬고 다른 일 볼 것 아니냐는 핑계 반, 본인이 볼일 있어서 반으로 낮밤을 가리지 않고 불쑥 나타나곤 한다.
병원 밥이 아무리 좋아도 먹던 것보다는 맛없기 마련이라며 먹을거리를 갖다주거나 반대로 윤설이 채 해치우지 못한 병문안 선물들을 홀랑 털어 먹고 가기도 했다.
지금도 벌써 사과를 몇 개째 깎고 있는지 모른다. 우형이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모양의 사과 토끼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 윤설이 야금야금 집어 먹어도 금방 도로 채워졌다.
“음, 있었죠. 어릴 때는 꿈이 많기 마련이니까.”
“운동선수는 생각해 보셨을 것 같기도 해요.”
“글쎄, 성적이 괜찮게 나오길래 검사가 될까 한 적은 있었습니다.”
“검사요?”
“사회적으로 ‘나쁘다’고 정해놓은 놈들을 합법적으로 때려 넣을 권한이 있잖습니까.”
“특이한 이유네요.”
요즘 같은 세상에야 어느 직업이건 순수하게 직업의식이나 사명으로만 들어서는 사람이 드문 판이라는 건 안다. 그러나 굳이 출세나 부가 아쉽지 않은 입장에서 흔히들 명예가 크다는 직업을 염두에 둔 이유로는 특이하게 느껴졌다. 가까스로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윤이 운조 사람인 줄 누구나 알고 털면 자기 집 일이 약점이 될 수도 있는데.
앞뒤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사과를 갉작이고 있자니 최윤이 보란 듯이 토끼 하나를 입 안으로 털어 넣었다.
“왜 정재계 사람들은 일부러 판검사 사위를 두거나 후원해서 유리하게 부리기도 하니 그런 방향으로도 생각했고요.”
“집안에서 허락하시던가요?”
“아니요. 제발 살던 대로 살라고들 말려서 금방 접었습니다.”
별나기도 하지. 어릴 적부터 함께한 사람들도 종종 그런 생각을 했을 게 눈에 훤했다.
순 농담 따 먹기 같은 대화 사이사이에 잊지 않고 의사가 묻는 질문을 되풀이하고 윤설도 비슷한 답을 되풀이했다. 컨디션은, 잠은, 입맛은 어떻고, 통증이나 약 기운이 부담스럽지는 않은지 등. 보호자로 되어있으니 매번 다 듣고 있을 텐데도 다른 것 하나 없는지 대조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저, 대표님.”
“네. 나머지는 그냥 둡시다.”
“네. 그… 다음 주쯤에는 퇴원하고 싶습니다.”
“아직 삼 주 안 됐어요.”
“다시 입원해야 한다면 할 겁니다. 그냥, 그때는 집에 있는 편이 나을 거예요.”
그러나 아무리 앞뒤를 잘 맞춰도 의사는 예측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었다.
알파 환자 자체도 매우 드문 데다 그가 거의 빠짐없이 약을 복용해 페로몬과 주기를 조절한 사람일 때, 지금 같은 상태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정확히 짚을 수 있겠는가. 사례와 평균치에 준한 가정뿐이다. 아마도, 어쩌면 같은 것들.
윤설은 성년 이후 처음으로 외적인 영향보다 자기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민감해진 채로 병원 생활을 했다. 사실 지금 말하는 시기도 왠지 그럴 것 같다는 예감, 미열이 오래가는 증상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바이고 스스로도 확신은 없다.
다만 언제든 약 없이 러트를 넘겨야 하는 때가 온다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보내고 싶었다. 견디는 수밖에 없기도 하거니와 절대로 보이고 싶지 않다.
“윤설 씨 집이 낫겠어요? 아니면 우리 집도 괜찮은데.”
“아닙니다. 저 혼자 있는 편이 나아요.”
“위험한데요. 누가 윤설 씨 곁에 숨어 들어가거나 덜렁 들고 나오기만 하면 일을 치기 좋은 조건이고요.”
“주변은, 부탁드립니다.”
“으음.”
“특별히 약도 없고… 누가 돌봐준다고 나아지는 일도 아니에요.”
병원도 최윤과 운조 일가에 연이 있다지만 어쨌든 외부인이 드나드는 일부터가 부담이고 러트가 시작되면 해열제 정도나 조금 쓸 수 있지, 증상을 완화할 방법이 없다. 어차피 겪을 곤란과 고통이라면 수치라도 덜고 싶다. 윤설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단지 그 하나였다.
2차 성별자에 대해 무지했던 최윤이 이럴 때는 장본인인 윤설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점을 포함해서 강경하게 말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사자는 윤설뿐이니까.
그런데 최윤은 사과 접시를 잘 덮어 치우고 손을 닦는 동안에도 이렇다 하는 답 없이 곰곰 생각만 했다. 주변 경계가 까다로워지는지 계산하려는 줄 알면서도 마음이 급했다. 답은 하나뿐이니 일단 알겠다고 해줬으면 좋겠다.
“외부인은 드나들지 않는다 치고, 윤설 씨 방에도 함부로 출입하지 않고, 대신 우형 씨나 내가 집 안에는 머무는 게 나을 텐데요.”
“아닙니다. 미리 준비만 해두면 아주 혼자인 편이 나아요.”
“무슨 일이 생기면 의사라도 불러야죠.”
“그게, 그래도 별 소용 없습니다. 부탁이에요.”
“…알겠습니다. 며칠이나 갑니까?”
“사흘 정도로 기억합니다.”
사흘이나 앓는다고.
최윤의 눈은 그렇게 묻는 듯했다.
“솔직히 이해는 안 됩니다. 아플 때 병원을 벗어나는 거나, 아무도 없었으면 한다는 거.”
“…보기 좋은 모습도 아니고, 누구에게든 폐 끼칠 게 분명해서.”
“최대한 맞춰보죠.”
약 없이 보내는 러트가 어땠더라.
혼자 견디자면 최윤의 말대로 서럽고 괴로울 거란 것쯤 윤설도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발정기가 있는 인간이라는 점이 절절히 느껴지는 시간에 윤설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 비참한 자괴감을 어떻게 이겨야 할지 모르겠다.
윤설은 티 나게 울적해 보이는 줄도 모르고 감사하다 말했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마음에 듭니까?”
“아, 네. 읽어봤습니다.”
다른 문제는 신기할 정도로 잘 풀리고 있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윤설과 직접 연락을 취하려 해서 성가시긴 했으나 은성이 폭로 기사 때문에 정신없는 것도 잘된 일이다. 주가가 출렁이면서 시장이 어수선할 때 최윤이 따로 손을 쓰는 쪽도 수월해진 눈치였다.
윤설의 부모가 당한 사고를 재조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소속사나 우형을 통해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는데 부상 중이라는 핑계로 시간을 벌었다.
대중의 마음이란 어느 때는 관대하고 어느 때는 잔인해서 대기업의 비리, 형제간의 아귀다툼이라는 소재가 등장하자 윤설을 비운의 왕자처럼 바라보았다. 그간은 탈 없이 자라 역경이라고는 없는 탄탄대로의 주인공처럼 여겼는데 동정할 사연이 숨어있었다는 점이 무언가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사연 있는 아름다움이란 참 지겹고도 마음이 끌리는 클리셰였다.
“70%가 해외 촬영이라고 조건 달아놓았던데요.”
“하면 되지요. 하고 싶습니까?”
“붙어야지요. 하고 싶은 것보다는…….”
“엄살이 많아요, 윤설 씨 보면.”
종일 그런 이야기들만 보고 듣고 하는 것보다 최윤의 말대로 일거리를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차기작을 고대하던 감독의 시나리오를 포함해서 윤설이 같이 일해본 감독의 대본 두엇이 더 전해졌다. 넋 놓고 다른 고민 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듯 하나같이 오디션부터 촬영 시작일까지 틈이 없는 일정들이다.
그러니 빨리 나아도 몸 쓰는 역할은 포기해야 하고, 촬영지가 너무 험지면 또 민폐인데 아슬아슬하게 소화할 수 있을 듯한 내용들이 윤설을 자꾸 꼬드겼다. 떠나간 작품, 지나친 기회는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업계의 명언 아닌 명언이 떠오른다.
“내가 돈줄 쥐고 있는 사람인 것도 맞지만 대지도 못할 배우 언급했으면 안 한다고 자빠질 성격 아닙니까. 얘기해 보니 그런 사람이던데요.”
“하하…….”
최윤이 은근히 부추기는 걸 알면서도 잠자코 받아들이는 이유였다.
하고 싶다고 늘 기회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조금 억지로 윤설에게까지 닿은 것이라 해도 좋았다. 그렇게까지 마음 쓰는 성격이 아니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최윤이 꽤 특별한 배려를 하고 있다고 여기게 된다.
“잘 넘겨봅시다. 컨디션 문제나, 캐스팅이나.”
“걱정 안 하시게 할게요.”
“좋아요. 그럼.”
차마 묻지는 못하지만 윤설이 바른 답을 하면 빙글 웃는 모습마저 윤설이 최윤의 마음에 흡족한 무엇이라는 신호처럼 보인다.
윤설은 큰일을 겪고 난 뒤의 들쭉날쭉한 페로몬 상태까지 더해 자신이 최윤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음을 안다.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새로 들인 습관인 것처럼 최윤의 손을 잡아끌고 간질이자 그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꼬셔봐야 아무것도 못 한다는 말도 수차례라 그냥 두고 본다는 식이다. 혹은 어여쁘니 봐준다는 듯이.
그런 사람이라 하염없이 붙들어 놓고 싶었다. 캠핑장을 벗어난 이후 멈추었나 싶던 불편한 두근거림이 이제는 멈추지 않았으면, 최윤이 곁에 있어 겪어야 하는 파도라면 떨치려 하지 않을 테니 계속 매달려 의지할 수 있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 * *
다리는 수술 후 일주일 정도나 아팠을까. 밤에 잠들까 하면 미미한 통증에 뒤척이다가도 진통제 한두 알이면 금방 가라앉았다.
우형과 최윤의 지시를 받은 명오가 돌아가며 병실에 상주해서 혼자 남겨진 사이 불행이 문을 열고 들이닥치리란 불안도 없었다.
갑자기 윤설을 단단히 둘러싼 몇 겹의 경계와 과민하다 싶은 검문이 모조리 걷히고, 무방비한 윤설에게 구운몽은 끝났다며 누군가 다가와 거칠게 끌고 갈 것만 같은 불길한 상상. 그도 상상일 뿐이었다. 오래도록 고삐를 매고 있던 자의 굴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끔 윤설을 시름시름 앓게 하는 증상은 팔다리를 기어 다니는 미열이었다. 처음에는 몸이 회복하느라 나오는 반응인 줄로만 알았는데 우형이 약을 타다 줘도 그때뿐이었고 해가 뜬 뒤 염증이나 알레르기 반응을 검사해 보아도 나오는 게 없었다.
윤설은 혼자서 부정하는 시간을 얼마쯤 보내다 ‘제대로’ 러트를 맞을 거란 예고임을 받아들였다. 그간은 늘 스스로 싫어서, 아무나 붙잡고 씨를 뿌리면 곤란하다는 이유로 은성에서 종용해서 약을 끊어본 일이 없다. 심한 몸살처럼 앓다 보면 러트가 끝나있었다.
만약 약이 없다면, 얼마나 괴롭고 어떻게 행동할까. 겨우 퇴원하겠다고 해놓으니 한시름 던 기분이었다. 물론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최윤이 들어주면 거취를 옮길 수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진통제랑 해열제 받아 왔어. 물도 그냥 방 앞에 쌓아놨다?”
“고마워.”
“아무래도 걱정되는데……. 현관에 캠이라도 달아놓으면 안 돼?”
“왜?”
“너 도저히 안 되겠어서 기어 나오다 쓰러지면 누구라도 들어가야지.”
“별걱정을 다 해.”
우형에게 본가에 가서 얼굴이라도 비추고 집밥도 얻어먹으면서 효도나 하랬더니 외려 윤설이 굶을까 뭘 바리바리 쟁여놓았다. 그러고도 영 찜찜한 얼굴로 ‘진짜 가? 진짜로?’ 같은 말을 백 번은 한 것 같다.
고마우면서도 더더욱 추한 모습 보이기 싫었다. 윤설은 우형의 등을 떠밀며 최윤에게 받았던 카드를 떠넘겼다. 누가 볼세라 손을 내젓는 걸 붙잡고 주머니에 넣은 뒤, 잃어버리면 체면 상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야. 애인 호강하라고 준 거를 왜 날 줘? 잘 두면 되지.”
“원래 휴가 가면 어머님 뭐라도 해드리고 싶었는데 갑자기라. 나 병원에 있는 동안 쓰지도 못했으니까 내가 사준 거라고 쳐.”
“와. 와아아. 윤서리 이러니까 그 사람이 진짜 애인 같다. 뭐 카드를 대신 긁으래.”
“좀.”
“봐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결국 우형이 아주 떠나기까지 십오 분쯤 더 걸렸다. 가볍게 한숨을 쉬고 병원에서 입었던 옷가지 등이 든 트렁크를 대충 정리하다 겨우 씻고 느적느적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제 긴장할 필요도 신경 쓸 사람도 없으니 아프면 아픈 대로 굴러다니며 앓을 작정이다. 사흘 밤낮은 정신없이 지나갈 것이다.
밤이 되니 열과 몸살이 더 심해져 물을 실컷 마시고 잠들었다가, 시름시름 앓으며 깼다가, 나중에는 그냥 시계를 내던지고 이불을 칭칭 감은 채 웅크리고 선잠을 잤다. 열도 통증도 너무 생생하고, 인간이 덜 된 듯한 기분이 끔찍하고, 사람의 체온에 안기고 싶은 충동이 무서웠다.
누가 알파와 오메가를 희소하고 귀하다 했나. 윤설은 누군가는 당연시할 체질을 아직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성과 존엄이 있어 인간이 고등 생물이라 했는데 자신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열이 꽤 있네요.
“…대표님.”
발에 선득하게 차가운 것이 스쳤다. 이불을 둘러쓴 머리 위로 환청이 들렸다. 아주 옛날 약 없이 러트를 보낼 때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도 같다.
―이러고 어떻게 버팁니까.
“그냥, 그냥 있으면…….”
시간은 어떻게든 흘러가요.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 가라앉은 목소리가 뚝뚝 끊긴다. 말하는 것도 힘이 드는데 윤설은 혼잣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적막함 속 홀로 버티는 괴로움에만 몰두하고 싶지 않다.
미련하게요.
“그럼 어떻게 해요.”
침대 시트를 부여잡고 무릎으로 기다 보니 머리가 헤드에 닿았다. 그냥 그대로 머리를 박은 채 웅크려있으니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며 윤설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괴롭다.
와중에 성적으로 접촉했던 사람을 떠올리자 아래로도 열이 몰리는 느낌이 소름 끼치게 싫다. 그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것들 중 하나였지만, 하필 지금.
윤설은 목 긁는 신음으로 짜증스러움을 토했다. 스스로가 정말 싫다.
그 소리에 웃음소리가 쫓겨 갔다. 지쳐서 또 잠시 잠들 수 있을 듯했다. 혼곤한 와중에 다행이라 여길 점이 그것뿐이었다.
“안 되겠는데.”
“…….”
* * *
몇 번째 눈을 뜬 건지도 몰랐다. 커튼 사이로 빛이 밝으면 아직 낮이구나 하고 어둑하면 시간이 흐른 걸로 생각한다. 하염없이 시간만 잴까 봐 핸드폰도 거실에 두고 방에 틀어박혔었다.
이제 조금 어둡고, 수면 등이 가장 밝은 단계로 켜져있다. 옆으로 등을 말고 누운 윤설의 이마와 목, 손바닥으로 차가운 감촉이 스쳤다. 가볍게 문질러 열기 스민 몸을 닦아내는 모양이었다.
“해열제를 먹여봤는데 얼마 못 가네요.”
“…….”
윤설은 눈만 끔벅이며 침대 위에 앉은 남자의 손짓을 좇았다. 손등, 안쪽을 닦고 손목 위를 쥐어보더니 아래팔을 다 닦아주었다.
이게 꿈인가, 하고 곰곰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여기 있으면 안 됐다. 특히 최윤이라면 더욱 없어야 했다.
“그래도 아픈 사람이고 내 책임이니까 좀 알아봤거든요.”
“…대표님.”
“아주 아프든지, 아주 화끈하게 보내면 된다고 하던데.”
“아파요…….”
“그래 보여요. 꼭 오메가가 아니어도 적당한 상대를 몇 찾아 붙여주면 낫다고도 들었습니다.”
결국 마땅한 짝이 없거든 견뎌내거나 시간이 다할 때까지 상대와 그 열기를 해소하는 것이 다다.
최윤은 정말로 그럴 의사가 있는 오메가가 있다면 불러들일까 생각하기도 했다. 다만 수소문할 범위가 형제들의 직원들 정도라 한정적이었고 윤설이 나중에 경기하며 애가 생겼을지 안절부절못할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바로 포기했다.
입이 무거운 일반인을 여럿 붙여 젊고 알파인 몸이 지쳐 잠들 때까지 고통을 잊게 해줄 수도 있는데 또 당신하고 사귄다는 거짓 공표 때문에 상대가 없어졌다며 윤설에게 독점적 관계를 요구한 양심이 찔린다.
그대로 두기에는 신경 쓰였고, 다른 방법은 찜찜하고, 마침 평소의 윤설과는 엄두도 못 낼 거친 섹스가 당기기도 했다. 마땅한 이유를 찾으니 행동은 쉬웠다.
여기저기 치받으며 뭐라도 부서지거나 했을 줄 알았더니 머리만 숨으면 몸이 안 보이는 줄 아는 짐승처럼 이불을 둘러쓰고 앓고만 있는 모습에 헛꿈이 컸다고 남몰래 웃었다. 그런 사정을 내리 읊어주지는 않은 채 안색을 살피는데, 열로 달떠 불그스름한 낯을 하고 눈 굴리는 게 꼭.
“…필요 없습니다. 어떻든 사흘은 있어야 하는걸요.”
“그렇게 질색할 것 같아서 나만 왔잖아요.”
“보기 좋은 모습도 아니고…… 나중에 연락드리겠습니다.”
“내가 좀 아쉬운 상황이라서요.”
뱉고 본 말이지만, 정말로 더운 몸을 끌어안고 맨살을 비빈 지 오래되었다. 캠핑카 안에서 부대껴 잔 것이나 희롱하는 무뢰한처럼 툭 건드리고 빠진 일은 댈 것도 아니었다.
나쁜 짓을 하는 기분, 아니, 나쁜 짓이지만 나름 제 몸 축날 각오도 하고 왔으니 퉁칠 만하다. 최윤이 혼자 계산하기로는 그랬다.
“뿔이 나거나 달린 게 두 개 된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감춥니까.”
“그냥, 아무도 안 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자다 깬 걸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잠투정하는 애 달래는 꼴이지 보기 나쁘고 추한 데라곤 없었다.
구겨봐야 큰 체구고 둘러봤자 이불인 구체를 죽 끌어다 놓고 삐죽 나온 발바닥 가운데를 간질였다. 어쩔 수 없이 오므라드는 발가락에 실실 웃으며 발등을 문지르고, 슬금슬금 다리 위를 따라 손이 비집고 들어갔다.
몸이 뜨끈하고 색색대는 숨이 유난히 크다. 별것 아닌 손길에 발가락을 주먹 쥐듯 꾹 접었다 꿈틀대는 모양새가, 어디건 민감해진 모양이다.
“윤설 씨도 싫으면 발로 찰 겁니까?”
“…아니요. 그러니까 그만…….”
“조금만 해줘요.”
저번에 봤잖아요. 난 다치지 않는다니까.
다소 거칠게 이불 틈을 비집고 들어간 손이 무릎까지 닿았다. 꽉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며 뼈가 도드라진 윤곽을 더듬자 희미하게 끙끙대는 소리가 들린다.
아예 들어서 한번 굴려버릴까, 이불 말고 있는 것쯤.
그러다가 겁먹을까 싶어 손을 빼고 팔을 교차해 상의부터 벗어 던졌다. 이불자락과 부스스한 머리카락 사이로 빠끔한 눈이 금방 쫓아왔다.
웃음을 참고 아래도 훌훌 벗고 서는데 알고도 보지 않을 재간은 없는 것이다. 이미 아는 몸인데.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를 만져야 하는지, 어떻게 좋았는지 처음 느껴본 윤설이 계속 머리 처박고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추울 것 같지 않아요?”
“…….”
“윤설 씨는 땀도 배어나겠더라.”
침대 위에서 한참 구물대는 것만 보고 있은 지 얼마나 됐는지 몰라도 최윤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자찬했다. 이상하게 자기가 가장 튼튼하고 남들은 고만고만한 줄 아는 윤설이 이불째 다가와 벗은 몸을 감싸 안았다. 언제부터 뭘 떠올렸는지 익숙한 부피감이 느껴졌다.
“보기만 해도 발딱 세우면서 거절을 다 하고.”
“하지만, 대표님.”
“네. 많이 서운하네요.”
두근대는 박동이나 홧홧한 체온, 서운하단 말을 붙여 무릎을 끼워 넣으니 떨리는 속눈썹 따위가 선연했다. 엄살에도 약하고 유혹에도 약해서 최윤을 밀어내지 않는다. 그가 아는 고분고분한 미인이었다.
“으, 흑, 잠깐만요.”
“왜?”
품에 머리를 비비며 자극을 견디는 듯 허리가 움찔거리는 흔들림이 작다.
옴짝달싹 못 하는 동안 잘됐다 싶어 속옷까지 끌어 내리고 엉덩이를 양손 가득 쥐었더니, 숨을 들이쉬던 그대로 호흡이 멎었다. 무어라 웅얼대는 소리가 억울한 투에 뜨거운 입술이 연신 움직이니 자잘한 입맞춤 같다.
최윤은 쥐고 있던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윤설이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그대로 몸을 뒤집어 그 위에 몸을 겹쳤다. 종종 그랬듯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르다 콧대로, 그 위 찌푸린 미간을 그리며 살살 펴놓는다.
이왕 고생을 감내하려면 예쁜 얼굴이 곱게 펴진 걸 보며 해야지.
“윤설 씨가 급할 것 같아서…….”
“아, 아, 잠깐, 아… 헉, 좁, 아.”
“…미리 풀고 왔는데, 또 서운한 소리 하네요.”
그럴 정신도 없어 보였지만 익숙한 순서를 밟아 몸이 녹아나게 애무하다가는 윤설이 깔딱 뒤로 넘어가지 않겠나. 미리 가볍게 푼다는 생각으로 시작해서 근래 팔자에 없던 뒷자위까지 했다.
이런 얼굴을 상상했다. 짧은 숨을 훅훅 뱉으며 복근에 힘이 한껏 들어가고 턱선이 도드라지게 이를 무는 순간. 삽입이 쉬운 크기가 아님에도 눈을 감지 않고 샅샅이 훑어봐야 하는, 아까운 찰나였다.
수시로 붙어먹다 간만에 덥석 기승위로 넣고 보니 잠시 거북하기도 했으나 아래 누워 들썩이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함께 호흡을 안정시켰다. 꽉 차서 내벽에 빠짐없이 붙어있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 쾌감을 준다.
잠시 굳었던 뒷목을 젖혔다 다시 내려다보니 멍하니 최윤을 바라보는 윤설의 눈이 살짝 풀려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늘 실례하지 않을 정신은 붙잡고 있던 무른 성정과 굳은 의지마저 없이.
천천히 각도를 맞추느라 앞뒤로 조금 움직인 최윤이 바로 위아래로 하체를 들었다 내리박으며 삽입 전부터 배에 올라붙은 좆을 물었다 뱉었다. 반쯤 드러났다 틈 없이 처박히도록 체중을 싣는데도 윤설은 허리를 꽉 부여잡고 함께 올려 칠 뿐 버거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따금 귀두에 걸릴 만큼 쭉 빠져나가면 오싹한 아쉬움에 허리가 따라왔고, 최윤은 그대로 신음하며 뒤를 조였다. 조금씩 힘을 풀었다 우물대며 다시 깊게 들어가도록 미끄러지는 것을 끝까지 참지 못한 윤설이 아래에서 허리를 쳐올려 댔다.
“후욱, 후, 흐으, 대표, 님, 너무 좋아요.”
“그래도 사람을 알아는, 보네요. 아, 더…….”
세게 해도 된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채 끝나기도 전에 윤설이 높아지는 신음과 함께 최윤의 허리를 잡고 아래로 바짝 당겼다.
안 그래도 턱턱 두툼한 몸끼리 맞부딪는 소리만큼 요란하게 움직이던 아래에 쿵 울리는 듯한 둔통과 쾌감이 함께 터졌다.
이를 물고 목을 울리는 최윤의 구멍이 힘껏 조이며 들러붙자 윤설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으로 상체를 더듬어 올라가며 몸을 일으켰다. 숨 막히게 끌어안은 채로 어깨를 떨며 신음하더니 낯선 쾌감을 견디기 고통스러운 것처럼 가슴이며 목에 볼을 비비며 흐느꼈다.
“힉, 아프… 아아, 너무, 좁아요, 흑, 뜨겁고 좁, 으응…….”
“으음, 흣, 좋아 죽겠다면서, 뭘 자꾸, 더, 움직여…….”
“너무, 씹어요, 아파요.”
“좋아, 요? 아, 아아!”
아무래도 버거운 쾌감을 무조건 아프다고 외고 있는 듯했다. 아프다고 하면서도 헉헉대며 숨이 거칠어졌고, 최윤이 박자를 맞춰주지 않아도 반쯤 제힘으로 들었다 놓으며 허리를 쳐올리는데 등을 둘러 안은 팔 때문에 피할 틈도 없었다.
전에 없이 다급하고 배와 아래를 맞부딪는 데 정신이 팔려 다른 행동을 떠올릴 수도 없었다. 반쯤 제정신이 아니라 새는 혼잣말인지 그렇게 자주 넣게 해줬는데도 구멍이 너무 작다고 묻는 말이 들리자 문득 윤설과의 섹스가 아닌 것 같아 픽 웃었다.
웃음소리에 사정은커녕 안이 더 빠듯해진다. 윤설이 턱 끝에 입술을 붙이다 자꾸 흔들리며 뒤로 넘어가려는 고개를 받치고 쫓아와 키스했다.
“하아, 하, 하하…….”
“좋은 냄새 나요.”
“…응?”
되물을 새 없이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갔다. 어디 달아날세라 한 팔로 허리를 안고, 목덜미를 잡았던 손이 최윤의 손을 얽어맨 채 내리눌렀다.
접합부가 떨어진 적 없이 계속 찌걱거리고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이어져 있다. 둘 다 프리컴은 충분히 흘리고도 남아서 그 소리만 유난히 요란스러운 듯 들렸다.
최윤은 배 안에서 끓는 쾌감에 거리낌 없이 신음하고 헐떡이며 두 다리를 윤설의 허리에 감았다. 힘주어 끌어당기자 앉았을 때와 다른 지점이 꾹 눌리며 목 긁히는 소리가 흘렀다.
윤설은 쉽게 사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평소의 그에 비하면 거침없이, 온 힘을 다해 깊숙한 곳을 찾으면서 한편으로는 괴로운 듯 입술을 물기도 했다.
와중에 좋은 냄새가 난다는 둥 최윤에게 좀체 하지 않던 말을 하면서도 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이성을 잃으면 퍽 솔직해지고 저도 모르는 음담패설을 하는 모양인데 술에 취하는 몸도 아니라 아마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터였다.
쉼 없이 몰아치는 삽입에 여유가 없음에도 최윤이 가끔 헛웃음처럼 입매를 일그러뜨린 건 그 때문이었다.
“계속, 하고 싶어요, 안에 계속, 나만…….”
밤낮으로 며칠을 이렇게 뒹굴고 나면 이 중에 얼마나 기억에 남을지 최윤도 자신할 수 없겠다.
사정이 가까워져 허리를 비틀자 윤설의 팔이 무섭게 끌어당겼다. 누가 내는 신음인지 구분도 안 가게 밭은 호흡, 앓는 소리가 뒤섞였다.
“멈추지 말고, 더, 세게…….!”
“하아, 하, 쌀 것 같…….”
“빼지 마요, 안에 싸, 흣, 아, 아…….”
잠시 허릿짓이 멈추고 뜨거운 숨만이 오갔다. 배에 묻은 최윤의 정액을 훔쳐 닦은 윤설이 손바닥을 그대로 회음 주변에 문질러 빠듯하게 열린 구멍을 적셨다. 안에 쏟아낸 양이 적지 않았지만, 겉까지 줄줄 흘러 추삽질을 돕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오르내리는 가슴 위로 입맞춤이 몇 번, 그러다 탄탄한 둔덕을 살짝 물며 솟은 유두를 입 안에 머금었다. 최윤이 낮게 신음하며 무어라 군소리를 했으나 지금 윤설에게는 잘 들리지 않았다. 러트를 겪는 알파의 예민한 후각이 익숙한 체향을 기쁘게 받아들여 그것을 페로몬 찾듯 끊임없이 들이켜기에 바빴다.
혀와 이가 닿는 자리에 여린 살로 덮였으면서도 바짝 서서 단단하게 느껴지는 성감대가 있어 타박 대신 얕고 나른한 목 울림이 머리 위에 앉는 것도, 좋았다.
사정 후의 나른함이 도는 몸에서 윤설이 물고 빠는 가슴 위로만 둔한 자극이 두드러졌다. 최윤은 다른 주문 없이 제 몸을 핥는 데 열중하는 윤설의 콧대나 정수리를 흘끔 내려다보고 목덜미를 지분댔다. 아래는 급하게 삽입해서 정신 놓고 움직인 탓에 얼얼한 감이 있었지만, 괜찮았다.
한 번 빼고 나니 눈곱만큼의 여유라도 생겼는지 윤설의 손가락이 구멍 주변을 마사지하듯 부드럽게 문지르다 천천히, 얕게 들어갔다. 안쪽을 꼼꼼히 더듬어가며 내벽을 전부 짚는다. 상처가 있을까 확인하는 것인지 다시 들어갈 자리를 가늠하느라 넓히고 있는 것인지 모호한 행위였으나 자잘한 쾌감이 나쁘지 않다.
금방 다시 올라붙은 좆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웃은 최윤의 것도 얼마쯤 세워질 때까지 잠깐의 유예와 전희를 누렸다.
“으음, 좋아요. 다 들어가겠는데.”
살짝 부은 젖꼭지며 유륜 주변이 타액으로 반들반들했다.
저만 당할까 싶은 마음으로 윤설의 엉덩이를 실컷 주무르다 자연스레 제 쪽으로 당기며 유도하니 보기에 흉흉한 크기가 제법 부드럽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단번에 깊은 곳까지 삽입하는 느낌이 자극적인지 윤설의 입이 벌어진다.
입술이 젖다 못해 약간 부어있는 듯 보여 엉뚱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남의 몸을 탐하다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를 붙잡아 입술을 열게 하고 오래도록 희롱한 것처럼.
불순한 생각에 아랫배를 조인 최윤이 누운 채 골반을 움직여 뻐근함을 덜었다.
멍하니 그 모양을 바라보던 윤설이 무릎을 움직여 맞닿은 부분을 더 바짝 붙였다. 둥그런 고환까지 뭉그러지며 닿도록, 아예 최윤의 하체를 들어 꿇어앉은 허벅지 위에 올린다.
이런 것도 가르쳐준 적 있었나. 있었을지도 모른다.
장단을 맞추어 다리를 윤설의 어깨 위로 걸었다. 깊다. 고개를 돌리니 최윤의 발에 볼을 비비다 왼 다리를 잡아 복사뼈를 무는 윤설과 좆이 구멍을 천천히 드나드는 모양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오른발을 까닥이다 미끄러뜨리며 윤설의 상체를 쓸었다. 무너지려는 자세에 잠시 미간을 찌푸린 윤설이 두 발목을 잡고 최윤의 다리를 벌렸다가, 힘 있게 치고 들어가면서 무릎을 접게 했다.
“흣, 으읏, 윤설, 씨.”
“…이게 더 좋아요, 대표님 것도, 잘 보여요, 아!”
이런 건 시켜본 기억이 없다. 기승위면 몰라도 윤설이 선호할 만한 과감함은 아니다.
수직으로 콱콱 내리박히는 감각이 삽입 전에 보았던 물건의 크기를 자꾸 떠올리게 만들었다. 오늘은 핏줄까지 잔뜩 서서 저 얼굴과 몸에는 안 어울린다는 생각도 스쳤더랬다.
“하아, 아, 윽, 대표님 거, 커서 빨면 아픈데…….”
“…뭐요?”
“잘생, 겼어요, 손에 겨우 잡, 흑…….”
몽롱하게 풀린 눈과 쾌감에 젖어 미미한 웃음기가 있는 얼굴 하며 평소라면 시켜야 겨우 할 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 하며 모두 최윤이 데리고 있는 윤설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최윤에게는 그 의외성이 자극이 되어 무의식적으로 뒤를 끊을 듯 조였다.
척척하게 살 부딪는 소리가 멎을 때마다 윤설이 크게 신음하며 허리를 떨었다. 이윽고 떨림이 가시면 살짝 물러났다 더 거센 움직임으로 밀어붙이며 구멍을 드나들었다.
진작에 자극점을 뭉개고 더 안까지 바라는 듯 퍽퍽 치대는 바람에, 최윤의 머릿속에서 눈앞이 하얗게 타는 듯한 아찔한 감각이 일었다.
짐승처럼 신음하는 소리 사이사이 달뜬 목소리가 좋아요, 속삭임에 열중하고 흘리는 말들이 끝없이 섞여들었다.
절정이 가까워졌다 다시 선명한 쾌감으로 뚝 떨어지기를 몇 번, 최윤이 팔을 벌려 윤설을 끌어안았다. 가슴까지 맞닿은 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물고 혀를 얽으며 추삽질에 속도가 더해졌다.
그에 맞추어 허리를 흔들고 있자니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한 몸인 양 붙어 끝이 올 때까지 계속 행위에 열중하는 것은 섹스를 즐긴다기보다는 붙어먹는다는 말에 어울렸다. 속눈썹에 눈물이 맺혔다 떨어지는 것은 윤설도 마찬가지라 일순 괴로워 보이기도 했다.
“아아……!”
“후으, 흐… 읏!”
사정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높이 매달려 있는 듯한 쾌감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그러고도 몸이 잘게 경련했고 채 빠져나가지 못한 감각들이 목을 울리게 만들었다.
처음과는 달리 나른함보다 진한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호흡이 잦아드는 동안에도 울컥이며 쏟아지는 정액의 양에 내심 당황해 전처럼 분수 싼 것 아니냐고 물었으나, 윤설은 멍하니 눈만 깜박인다.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아아.”
번식 기회가 드문 종족의 유전 본능은 얼마나 끈질긴가. 계속 접고 있었던 다리를 쭉 뻗자 비로소 개운해졌다.
“잠시, 물 좀.”
“제가 할게요.”
대답은 넙죽 해놓고 통 일어날 기미가 없어 무릎을 세우자 무슨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팔을 둘러 안는다.
알았으니까 목도 축이고 한숨 자자고 얼러보았다. 러트에 푹 젖은 윤설은 한 가지 일에만 온 신경이 쏠려있는 탓인지 말 안 듣는 개 같았다. 최윤의 딴에는 그래도 어리고 무는 힘을 조절하는 데 서툰 리트리버에 비교하니 굉장히 너그러운 평이다.
어린 것이나 순진한 동물들은 먹을거리와 다정한 칭찬으로 달래는 법인데, 지금의 윤설은 주면 착하게 받아먹고 말은 안 듣는 게 문제다. 곤란한 한편 남의 일 같기도 해서 잠시 멀거니 천장을 보고 누워있었다.
“나 정말 목 아픕니다.”
“아파요?”
“음, 네.”
‘좋다, 싫다’랑 ‘아프다’는 개중 잘 들리나 보다. 어처구니가 없어 성격 나빠 보이는 코웃음이 나오고 말았는데 윤설은 괘념치 않는 듯한 얼굴로 일어나 앉았다.
등을 받쳐주기에 사양하지 않고 기대었더니 갑자기 힘주어 안고 침대 밖으로 휙 나섰다.
“이 씹… 좀.”
디딘 발이 기우뚱하나 싶더니 곧 바로 서서 고쳐 안는다.
삽입한 채가 아니었다면, 들썩이는 찰나 아래로 흘러나온 정액의 끈적함만 아니었다면 귀여운 장난이라 쳤을 것이다. 상대가 상대라 생각도 않던 돌발 행동에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하고, 다리가 윤설의 허리에 바짝 매달렸다.
최윤이 험한 소리 운을 떼자 입속말로 사과를 하기는 하는데 뭘 알고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약은 내가 했는데 왜 저치가 눈이 풀렸나 싶어 기가 막히거나 말거나 윤설은 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통통 튀는 움직임에 약 오른 최윤이 줄어들 줄도 모르는 좆을 뒤로 잘근잘근 씹어댔다.
“드세요.”
“아, 이것 좀.”
“그러다 흘릴 수도 있으니까…….”
“지금 그걸 핑계라고.”
분명 눈가를 찡그리며 참는 걸 다 봤는데 딴소리였다. 최윤은 기꺼이 윤설의 안쓰러운 러트를 함께하고 이성 잃은 알파를 감내하기로 했던 다짐을 잊은 채 발칵 성을 낼 뻔했다.
참자.
부드럽게 밀어내고 바닥에 발을 디디려 하니 또 허리를 안고 들러붙었지만 아무튼 팔팔한 좆은 최윤에게서 빠져나갔다. 저게 보기에 흡족하기만 했던 건 역시 최윤이 아는 윤설이 얌전하고 뻔뻔한 구석이라고는 없이, 자신과 영 딴판으로 섹스하는 남자였기 때문인가 보다.
작은 생수병 하나를 다 비우고 연이어 하나를 집어 들며 노골적으로 바라보아도 시드는 기색이 없다. 이런 모양으로 사흘을 내리……. 윤설이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퇴원을 빌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빈 페트병을 우그러뜨리고 들어올 때 담뱃갑을 어디에 두었나 생각한다. 한 대 태우고 또 엉기더라도 당장은 씻은 뒤에 하고 싶은 기분이 돼서 탁자 위를 뒤지는데 없다.
윤설이 소파 위에 던져진 걸 찾아 건네주었다. 벌써부터 같이 넋 빠지면 곤란하다. 케이스를 열어 삼각형 알약 두엇을 입 안에 털어 넣고 불을 붙였다.
“기다려요. 잠깐 씻고 있어도 좋겠다.”
“씻어요?”
“담배 안 하잖습니까.”
윤설이 얼굴을 살풋 찌푸리는 듯하다 고개를 끄덕인다.
창을 열러 가는 뒷모습을 보며 깊이 빨아들였다 천천히 뱉었다. 숨이 깔딱 넘어갈 듯한 지점까지 올랐던 쾌감으로 곤두선 감각의 잔재와 약 기운으로 깨워진 이성이 뾰족하게 서서 쉽게 짜증스러울 법한데도, 그 모습을 두 눈에 담으려니 호강은 호강이었다.
언제나 무엇에든 그랬듯이 보기에 아름답고 예쁜 것은 최윤의 욕망을 돋우었다. 그런 걸 가지려고 부가 필요해졌고, 부만으로는 안 되겠기에 권력도 넘봤다.
반쯤 태울 때까지 당연하게 고수했던 삶의 기준을 되새김질하다 문득 내가 사람을 갖고 싶은가 자문한다.
사람은 영원할 수 없는데.
최윤의 집 계단참 옆에 걸린 그림보다도 더 빨리 낡고 빛을 잃어 수명을 비교하는 것조차 우스워진다. 그러니 사람은 아름다운들 소유하고 오래도록 즐길 대상이 아니다.
“…벌써 끝났어요?”
“대표님은 그거 다 피우신 건가요?”
“음, 뭐.”
고작 한 대 가지고.
윤설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보니 서너 개비가 죽어있다. 웃기지도 않다. 잠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씻고 나온 윤설에게서는 함께 나뒹굴었던 때가 언제냐는 듯 보드라운 냄새가 난다. 저한테는 온몸에 발라놓고 안에 부어놓은 게 얼마인데, 퍽 산뜻하기도 하다.
“나는 좀 걸립니다. 알죠? 윤설 씨 많이 싸는 거.”
“…….”
새삼스레 귀가 붉어져서 뒤늦은 사과를 한다. 본능적인 번식욕을 해소할수록 이성이 뚜렷해지는 건가 의문을 더하는데 막 일어나려던 최윤의 다리에 불쑥 끼어든 덩치가 챘다.
좀.
나무랄 새도 없이 윤설의 손이 다리를 타고 오른다. 일단 힘주는 대로 다시 앉으니, 구물대며 다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와 허벅다리에 턱을 누르고 기대어 버틴다. 평소 최윤의 성욕과 체력을 감당해 내서 마음에 들었던 알파의 튼튼함이 말 안 듣기 시작하자 성가신 요소가 된다.
“제가 닦고 싶어요.”
“기다리라고 했는데요.”
“혼자 하면 힘들다고 하셔서…….”
그거는 씨발, 어쩔 줄 모르니까 가르치고 놀리려고 한 소리였다. 하고 싶다는 대로 두면 안 그래도 풀려서 빠끔대는 구멍 물고 빨고 하며 끝이 없을 기세일 때와는 다르다.
군소리가 많아진 윤설을 떼어내 앉혀두고 휘적휘적 걷는데 이번에는 뒤에서 덮친 무게에 눌려 카펫 위에 사이좋게 엎어지고 굴렀다.
이쯤 되니 성질이 올라서 다리를 붙잡고 엉덩이를 맵게 쳤는데, 놀라기는커녕 덜렁이는 좆에서 선액이 묻어 나왔다. 감히 시도한 자가 없건만 마운팅하듯 등을 감싸고 안는 걸 뒤집어 놓고 주먹으로도 가볍게 쳐줬다.
일도 해야 하고, 불화설도 없어야 하고… 아니, 그냥 내키지도 않으니 얼굴은 피했는데 쓸데없이 튼튼해서 금방 붙잡고 늘어진다.
“후우, 좀, 어디 안 가니까, 윤서리.”
“아파요, 대표님.”
“아프라고 때렸으니까.”
“긁어내는 것보다 그냥 계속, 흐르게 두는 게 빨라요.”
“말이 되는, 아, 흡, 흣……!”
기어이 최윤의 엉덩이 위며 카펫에 한바탕 쏟아낸 윤설이 뒤에서 골반을 단단히 잡고 몸을 가까이 했다. 최윤이 선호하지도 않는 후배위에 체급도 비슷한 놈이 뒤에서 덮쳐 삽입하고 있었다.
이게 기어이 눈이 돌아서.
책임감이니 뭐니 이유 붙여가며 몇 번 참던 거슬림이 터져 씨근대는 숨으로 불붙었다. 그가 뒤트는 힘이나 팔꿈치로 찍어 미는 공격이 아프지 않을 리 없는데도 윤설의 신음이 떨어져 나갈 줄 모르고 귓가에 감겨 왔다.
“헉, 대표, 흣, 으, 님… 너무 조여요, 잠깐, 아…….”
“후욱, 후, 누가 누구한테, 읏, 지그, 음.”
엉망진창이었다.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결합보다 더 다급했다.
성질은 올라도 서로 잘 아는 몸에 맞게 아래는 금방 적응해 불이 튀었고, 윤설의 말마따나 구멍 밖으로 정액이 밀려나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만은 느리고 선하게 느껴져 이를 물었다.
흐느끼듯 신음하던 윤설의 목에서 낮은 울림이 일더니 순식간에 배 속이 뭉개지는 듯한 낯선 고통이 밀려왔다. 등을 말고 주먹을 틀어쥔 채 신음하는 최윤의 뒤에서 윤설이 무어라 하는 것 같았다.
“빼, 지금… 이상, 흐으, 윽, 큿… 놔…….”
“안, 돼요, 지금은, 아, 아아, 아!”
더 밀고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안에서 최윤의 상식에 닿지 않는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한참을 땀 흘리며 버티고 나서도 움직이지 않으면 괜찮다 뿐이지 거북한 건 매한가지였다. 진이 빠진 최윤을 옆으로 돌려 누인 윤설이 다리를 벌려 잡고 잘게 움직였다.
삽입으로 배 속이 거북해 목으로 욕지기가 치밀 것 같은 부담은 처음이었다. 방금 전은 정말로 멈췄어야 했다.
퍼렇게 선 최윤의 눈빛에도 사정을 기다리던 윤설이 마지막으로 깊게 파고들며 안으로 정액이 계속 흘렀다. 나중에는 윤설이 뒤로 천천히 몸을 물리는 도중에도 질질 흘러 카펫이 젖어들었다.
“바로는 못 빼요……. 노팅이에요.”
버거운 크기가 빠져나가면서 소름 끼치는 허전함이 배 속에 남았다. 떨리는 근육을 가만가만 문지르며 구멍 입구에서 멈춘 윤설이 노팅이 뭐라고 대강 설명하는 듯한데, 최윤의 귀에는 반은 들리고 반은 새는 수준이었다.
외마디 욕이 반, 그 좆 대가리가 부풀어서 남김없이 씨 뿌리는 데 최적화돼 있다는 현상의 정의가 반으로 어지럽게 돌아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노팅이 끝난 뒤의 알파는 조금 정신이 맑아졌는지 온갖 짜증이 다 서린 걸 겨우 눌러 참는 최윤을 들어다 씻기고 다른 수작 없이 곱게 마른 이불 위에 내려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라도 대강 사흘이라는 시간에는 댈 수 없이 부족하단 것은 둘 다 알고 있었다.
* * *
“윤 배우, 괜찮아요?”
“예. 저는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박 대표와 앉아 일 이야기를 한다. 윤설의 입원 기간 동안 몇 차례 오가면서도 알아서 잘 마무리될 테니까 쉬어라쉬어라 하던 박 대표가 드디어 상대를 해주기로 한 모양이다.
사고의 전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 일 관련으로는 운도 못 떼게 한 것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최윤의 눈치를 무지 봤을 터다. 윤설은 멋쩍게 웃으며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넓게 붙인 의료용 반창고 끄트머리가 상의 네크라인 위로 비죽 나와있다.
“대표님은 어떠세요?”
“도련님 말이지. 담배를 무진 피워대셔서 한 말씀 드렸더니 등짝 치는 게 멀쩡하시더만.”
“…다행입니다.”
측근들은 대강 알다시피 최윤이 윤설의 러트를 함께해 주었다. 그도 그런 상황은 처음이었던 듯했고 윤설에게도 발현 후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주 이성이 없었다든지 기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기나긴 꿈을 꾼 듯 아득했다.
모처럼 개운한 몸에 또렷하게 잠이 깨고 보니 최윤이 약간 질린 듯한 기색으로 윤설의 엉덩이를 맵게 때리고 아예 침대 밖으로 굴려버렸다.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 서러웠다가, 올려다본 최윤의 몸에 남은 흔적이 난장이라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한량처럼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누운 폼에도 그답지 않게 피로한 티가 났다. 입술이 까칠하게 일어난 모습이 낯설기까지했다. 다 윤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얼떨떨한 와중에도 약을 먹거나 무식하게 앓은 것보다 가뿐하다는 사실에 신기한 발견이라도 한 기분이었는데 차마 제 상태를 알릴 수도 없었다.
‘내가 살면서 이럴 줄은 몰랐는데 그 짓 하다 진이 다 빠지고.’
중얼대는 최윤의 표정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호했기 때문에 잠자코 떨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최윤은 멀쩡해 보이는 윤설을 훑으면서 노팅인지 뭔지 그거 어떻게 좀 해보라는 둥 그 예쁜 자지가 발갛게 달았는데 막막할 줄 몰랐다는 둥 한탄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만 늘어놓고 말았다. 딱히 윤설의 사죄를 바라지도 않았다.
‘힘들어서 경황이 없었으니까 잘 가려달라고 해요.’
욕실에 가 한 번 더 씻으며 보니 목 바로 옆과 등에 오래갈 법한 생채기들이 있었다.
어차피 수영 선수 역은 끝난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씁쓸하면서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늘어져 내리 이틀 쉬기만 하던 최윤이 밀린 일을 봐야겠다 한 후로 보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천천히 단편적인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사흘로 온전히 이어지는 사이 덜컥 겁이 났다.
역시 러트 기간에는 거부했어야 했는데. 노팅을 한 번만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발정 난 짐승 들러붙듯이 해댔으니 얼마나 질렸을까.
아무리 욕구가 왕성하고 긴 정사를 즐기는 최윤이라 해도 여유 없고 그 마음대로 되지 않는 관계는 싫었을지 모른다.
앞으로는 됐다고 하면 어떻게 답해야 하나.
“…현지에서 보자고 하던데, 어때요?”
“네?”
“윤 배우가 고른 시나리오 말이야. 촬영지도 볼 겸 미팅을 그쪽에서 하고 싶다네요.”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 출국이 가능하기만 하면요.”
“그간 해외 작품 많이 놓쳤다면서요. 우형 씨가 이번에는 꼭 갔으면 좋겠다고 하더라니까.”
“저도 이번에는 하고 싶습니다.”
“좋아! 그런 마음이어야지. 드라마 때문에 속상한 건 새 일로 잊어요. 더 잘될 거야. 아무렴.”
박 대표에게 중요한 일은 최윤이 하는 일이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단연 윤설보다는 최윤이었다. 그럼에도 이 순간에는 최윤이 언질을 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 직원이라 진지하게 방향을 고민해 주는 듯한 말에 온정을 느꼈다. 사고 전부터 그랬지만, 마음이 약해진 상태이기는 한 모양이다.
“저, 그리고…….”
“네?”
“바로 가지 말고, 간만에 회사 나왔으니 윤설 씨 지원 팀하고 밥이나 한 끼 합시다. 이번 영화 나갈 때도 처리해 주고 따라갈 스태프들이니까. 우형 씨까지 다 얼굴 알고 있어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경호 팀이 알아서 붙을 거니까 괜찮다고 하셨고, 아무래도 혼자 두기가 그렇네요.”
갑작스러운 회식을 사람들이 반길까 했는데 윤설이 아니더라도 미리 약속이 된 듯 식당이 붐볐다. 테이블 몇 개를 붙여 스무 명가량이 앉은 자리에서 인사만 하기에도 바빴다.
적어도 은성 건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불특정 다수와 마주치는 상황을 피하며 갈 줄 알았는데. 어색하기도 했고, 박 대표는 원래 이런 자리를 좋아하나 의아하기도 했다. 회사에서 조금 늦게 나올 거라던 우형이 얼른 왔으면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밑반찬이 나오고, 사소한 주제들이 긴 탁자 위에서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튀었다. 입이 많아 소란스럽기도 했지만 은근한 활기가 돌아 나쁘지 않았다.
팀 분위기가 좋다는 인상과 함께 잡담을 가만히 듣고 있는데 그중 삐죽 튀어나온 외마디 탄성에 다들 인터넷 뉴스를 열었다.
“저어, 대표님. 기사가 떴는데요.”
“어? 무슨 기사?”
“우리 회사 건이야?”
“서 배우 팀 홍보 말고 뭐 없댔는데.”
“…이거 좀 이상한데요.”
“배우 윤설 2차 성별자임이 밝혀져…….”
“임신 가능성이 있어 사고 후 치료에 어려움을…….”
“의료 정보를 누가 유출해요? 이거 내보낸 데가 어디야?”
모두가 더듬더듬 기사를 읽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또 서로의 얼굴을, 마지막에는 혼란이 가득한 눈으로 윤설과 박 대표를 번갈아 보았다.
윤설 역시 남의 일인 양 멍하니 듣고 있다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박 대표를 돌아보았다. 금시초문이라면 진작 헛소리들 말라며 소란을 잠재우고 밥이나 먹으라 했을 사람이 조용하다.
“알고 계셨습니까?”
“다들 조용히. 말조심하고 먼저들 들고 있어요.”
혼자 두기 그렇다던 말이 이런 의미였다.
윤설은 박 대표를 따라 일어났다. 그제야 등골 위로 오싹한 소름이 달린다.
박 대표는 복도를 건너 비어있는 방에 멋대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미안해, 윤 배우. 도련님이 알아서 한다는 말만 하셔서 미리 알려줄 수 없었어요.”
“그러니까… 최 대표님이 따로 섭외해서 낸 기사란 말씀인데, 왜 오메가로 밝혔습니까?”
“별장 일 벌인 게 한 놈이 아니고 여럿이에요. 은성도 은성인데 돈 받고 뛰어주는 놈들은 그렇게 못 하고 전문가가 낀 겁니다. 도련님 사업이 계획대로 가면 시장에서 빠져야 되는 놈들, 은성에게 사기당한 거물들 몇이 작당을 했더라고.”
“천천히 설명해 주세요. 제가 잘 따라갈 수가…….”
박 대표도 그간 겨우 참았다는 듯 말이 빨랐다. 몇 개의 이야기를 한 번에 구겨 넣어서 털어놓는 듯 앞뒤가 듬성듬성한 흐름을 쫓아가기 어렵다.
은성에게 의뢰를 받은 폭력배나 청부업자가 아니다. 박 대표 같은 이들이 말하는 전문가는 결국 조직이 있는 자들이다.
어떤 조직은 운조처럼 크게 굴리는 사업이 있을 것이고, 최윤이 하려는 일이 그들에게 치명적 손실이거나 방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최윤을 노리거나 윤설을 인질 삼을 동기가 있다.
은성에 사기를 당한……. 원래도 금전 문제라면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윤설 씨 유전자라고 속여서 해먹은 건이 이미 있는 모양이에요. 글쎄, 그게 어떻게 알파를 구해서 사기 친 것 같은데, 거기다 도련님이 슬쩍 소문을 흘리니까 난리가 난 게지요.”
“…….”
이미 팔렸다고.
귀가 먹먹했다. 캠핑장에서 헐떡이던 윤설의 귀에 대고 최윤이 들려줬던 일화가 떠오른다.
자기랑 손잡자며 찾아온 은성 일원이 했다던 우스꽝스러운 의심. 최윤이 오메가라 새로운 은성의 핏줄을 가진 것 아니냐던 황당무계한 헛소리.
그래서였다. 진짜 윤설이 자식을 봐서 형질을 물려주게 된다면 거짓으로 팔아넘긴 유전자보다 월등한 수치로 판정받을 테니 손쓸 도리가 없다. 더군다나 최윤에게 은성그룹이 넘어가면 속아서 수준 미달의 알파를 사고 만 상대에게 보상이랍시고 내줄 게 없어진다.
꼼짝없이 보복당하든지 일찍이 윤설을 되찾아 내주든지 해야 모면이 되는 일이다.
“어쩌자고 그런.”
지독하고 미련한 작자들.
앞으로 벌어들일 이익 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미 책임질 수 없는 일에 윤설의 이름을 붙여놓았던 것이다.
더 이상 부와 권력을 누리지 못할까 안달인 추태에도 질렸다. 더 무어라 할 말도 없이 회피하고 싶어진다.
알파 인자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으니 눌러 참는다지만 핏줄이 같은 건 생이 끝나야만 거둬지는 벌이다. 피가 섞인 것만으로 누리는 영화가 있다면 반대로 핏줄 하나만으로 얽혀야 하는 천형도 있다.
“윤 배우가 같이 뒤집어쓸 수 있으니까 거꾸로 흘린 거라고 하더군요. 누가 감히 도련님께 알파인지 아닌지 해명하라고 하겠어요?”
조급하게 굴다 오히려 최윤에게 좋은 반격의 실마리만 주고 간 고모, 삼촌, 혹은 그 배우자, 누구든 오늘 난 기사를 보고 까무러치게 놀랐으리라.
윤설의 생각에도 최윤의 계산이 타당했다. 최윤이 늘 사람을 붙여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목격돼도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이유다.
검은돈을 먹고 자란 조폭과 사기꾼의 자식이라 연인이 칼 맞을 걱정을 한다더라는 말 대신 온정적이고 쉬운 이해를 받겠지.
누구나 푹 찔러볼 수 있는 길거리의 무른 과실처럼 드러난 알파라 까발려지느니 짝이 있는 오메가로 보이는 상황이 견딜 만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이미지니 뭐니 신경 쓸 것도 없고. 배우 생활에 지장 없게 처리할 테니 걱정 말고 일해요.’
헤어질 때 최윤이 일러준 말 중 가장 다정했던 문장을 속으로 되뇐다.
제작 중 드라마 하차에 대한 말이라 여겼다.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고 흘리기만 했다는 데 서운해할 입장도 아니면서 속이 느껍다. 고작 반 시간 전만 해도 사람들 틈에서 딴생각에 빠져 미움받을지 모른단 걱정이나 하지 않았던가.
“아이, 요즘 세상에 전과도 아니고, 이런 걸로 어디 출연 못 할 일도 없어! 윤 배우 마음 상하지 말고, 걱정도 말아요.”
“…네. 알고 있어요.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신 마른세수를 하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모양을 본 박 대표가 등을 턱턱 두드려주었다. 두꺼운 손치고 투박하지 않은 손길이었다.
두 사람이 돌아가 보니 팀원들은 언제 싸늘하게 식었던가 싶게 풀린 분위기 속에서 음식을 덜어 먹고 있었다. 그나마 술은 대표님 오면 시작하기로 했다며 붙임성 좋게 말 꺼내는 직원의 어색한 미소를 본 박 대표가 그거야말로 진짜 의리라고 받아치며 회식다워졌다.
어쨌거나 이 자리를 즐기기로 한 사람들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윤설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 * *
경호 팀이 충원되고 사람이 바뀌었어도 보고는 전과 다름없이 날아왔다.
기획사 사무실에서 박 대표를 만나고 차로 이동해서 관련 직원들과 회식. 식당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가 뜨기 시작했다.
박 대표가 대강 설명해 주고 밥도 먹여 보내겠지 싶어 핸드폰을 품에 넣고 뻐근한 목 근육을 푼다. 석 달은 됐음직한 시간 동안 밟은 적 없던 정원석에 맞추어 걸음을 옮기는 사이 가볍게 훅 숨을 들이쉬기도 했다.
오랜만이라며 반기는 고용인들이며 오늘 번인 듯한 까마귀 떼를 지나는 길에 익숙하고 묵직한 향을 맡으니 본가에 왔다는 실감이 난다. 가족들의 선호와 습관이 오래도록 묵어 집안 곳곳을 메운 흔적.
“저 왔습니다.”
“들어와라.”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돌아섰다. 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무언가 휙 날아와 고개를 틀었다. 묵직한 문진이 문을 찍고 떨어져 굴러가다 멈추고 나서야 부친을 바로 보았다.
이럴 줄은 알았지만 이마를 깨지도 못하고 비껴 던질 만큼 자식이 아까운 양반이, 그러고도 표정은 추상(秋霜) 같았다. 못마땅한 듯한 노성은 부친보다 옆에서 팔짱 끼고 서있는 모친에게서 먼저 터져 나온다.
“하지 말랬는데 기어이 기사 올리더라!”
“필요했습니다.”
“좋지. 은성 엿도 먹이고 좋아. 그래도 그냥 파혼이랑 애 가졌다 소문난 파혼이 같으냐?!”
“…저한테 손주 보실 생각도 없으면서 그러세요.”
“놈, 하는 말 보게.”
“나중에 더 요긴하게 쓸 패를 굳이 거기다 버리니 하는 말 아니야!”
아. 나이 서른 먹고도 양친 앞에서 큰소리 듣고 혼나는 자리는 싫다. 차 대는 순간에도 오지 말걸 하는 생각을 하고 문간에 고개 들이밀면서도 가기 싫다 하던 이유가 따로 있었겠나.
어머니 말마따나 최윤이 가정을 이룰 생각 따위 없다 해도, 사업하다 경쟁 구도의 해결이 요원하거나 정계와 얽히고 보려면 혼맥으로 빠지는 방법이 가장 쉽고 편할 터다. 은성그룹을 삼키고 소화하는 게 최종 목표도 아닌데 괜히 남의 집 자식 희귀 체질인 줄 알고도 건드려 애를 가졌네 아니네 꼬리 붙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마음에 안 들지 안다.
혹여나 내내 낌새라곤 없던 놈이 갑자기 불장난에 진짜 끼고 살 마음이라도 드나 싶을 판에 당장 본가에 오라고 부르지 않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일은 오히려 쉽게 풀리는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장성한 자식 놓고 잔걱정 늘면 늙었다 소리 나옵니다.
습관처럼 한마디 덧붙이려다 주먹 안으로 손톱을 세워 꾹 참았다. 아직 아버지고 어머니고 표정이 좋지 않다.
“쓸모만 취하는 거야. 네가 모르는 바닥 일에 손대지 마라.”
“네. 주고받을 뿐입니다.”
“말이나 못 하면. 네가 사람 욕심낸 적 없으니 망정이다.”
그래도 침묵 끝에 누그러진 투로 마무리하는 어른 말씀에 최윤이 씨익 웃었다. 하고 다니는 꼴은 집안 식구들과 딴판이어도 훤칠하니 키운 보람 있는 자식이 어릴 때처럼 웃자 양친 모두 혀만 찬다. 애지중지하며 키우기를 잘못했다고 버릇처럼 말하면 뭐 하나.
최윤은 간만에 저 좋아하는 음식이 가득 올려진 식탁에 앉아 바지런히 아들 노릇을 해야 했다. 사업 이야기나 근황은 한두 마디 풀었으나, 자식 궁금해하는 양친 듣고 싶어 할 이야기라면 대부분 건강은 어떻고 요즈음 재미 보는 취미는 뭐고 하는 사생활이다.
실컷 있는 얘기 없는 얘기 털어다 잘 지낸다 해도 또 위장 연애라지만 덜 시끄럽게 하라는 말로 새서 고역이었다. 하기사 운조 회장 부부는 양자인 최영이 ‘멀쩡한 남자’ 여럿을 거느리고 살면 몰라도, 2차 성별자인 경을 들인 때에도 한참 성화였었다.
“잊지 마라. 그네들은 결국 태어난 성질을 못 이겨.”
기회만 충분하면 알파와 오메가가 짝을 맺게 되는 이치. 번성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하나의 짝에 무섭게 집착하는 속성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식사가 끝났다.
입에 익은 솜씨로 차린 상이라 불편한 주제가 오가도 양을 다 채워 먹었는데 어째 기력 보충됐다는 기분이 안 난다. 호기롭게 알파의 러트라는 걸 색다른 체험쯤으로 여기고―그래도 나름 각오한답시고 각성제도 몇 번 먹었는데― 욕심부렸다가 뻗은 뒤로 컨디션 회복에 시간이 좀 걸렸다.
제 죄를 아는 윤설이 손가락 하나 까닥이면 알아서 다 해주는 정성을 보였지만 몸이 아프고 안 아프고와는 별개로 느른한 피로감이 등에 납작 붙어있는 듯했다. 떠올릴 때마다 기가 차는 경험이었다.
그런 이유에 더해 한동안 나설 일이 없었던 ‘현장 업무’가 생길 판이라 운동량을 늘리기도 했다. 장례식 이후로 자리가 바뀐 까마귀들의 훈련 핑계 겸 스파링도 빼놓지 않고 해서 다들 혀를 내둘렀는데, 그를 채울 만한 식욕이 안 당겨서 예민해진 참이었다.
본가 식사면 그래도 잘 먹은 편이다. 심적으로 기가 빨린 거지.
현장 생긴다니까 좋아라 입이 벌어지는 ‘구식 깡패’ 고참들을 물리고 홀로 차 옆에 기대 담배를 꺼낸다. 혼난 건 혼난 거고 일은 일이라 심심해하는 주먹 좀 빌려다 구색 더 갖추겠다 하니 최 회장도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빨갛게 불이 타는 담배 끄트머리를 보고 툭툭 털어내며 그간 쌓인 연락을 건성으로 훑었다.
[은성 내부 분위기 좋지 않음. ‘고객’으로부터 추궁당하는 상황.]
[상대측 요구는 최소 2배 이상의 금전 보상 및 대체 알파의 알선 비용.]
[윤설의 자세한 형질 여부에 대한 의문 있으나 확인 원하지 않음.]
[청람 잠입 보고. 기사 내용 의심하나 은성의 의뢰에 회의적.]
[운조 유통망 확보 전 사업 철수하게 만들 것. 최근 캔디 물량 증가.]
망설이다 한 개비 더 불을 붙인다. 많이 줄였었는데 전보다 더 피워대고 있다.
각자 꿍꿍이대로 흩어져 자기 몫 챙길 계산에 들어갔다. 어떤 방향으로 튈지 놓치지 않아야 한다. 지시 사항을 달아놓고 입에 문 담배를 까닥거리며 운전대를 잡는다.
소위 조폭형 기업 출신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데 억울하다 할 수만은 없는 것이 다들 뒤로는 딴 주머니 차고 있기 마련이다. 운조는 양지 산업에도 적극적이지만 재건축 로비와 약물 유통을 눈 가리고 아웅 속에 품고 갈 계획이다.
일찍 엔터 산업 잡아먹고 옛날 버릇 아주 못 버린 조직은 인신매매나 신분 세탁, 성매매 업종을 끌고 가는데 이미 뒤엎기 까다로운 덩치의 기득 세력이 있고 물 위로 정보가 샐 때마다 두들겨 맞기 좋은 아이템이라 아예 신경도 안 썼다. 애초에 최윤이 사람 장사는 다 정리하고 시작하기도 했다.
문제는 약물 시장이 전보다 호황이라 어중간하게 자리 튼 놈들이 운조처럼 자원 많은 데서 밥그릇 놓겠다 선언해도 발 뺄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죽자 사자 버티는 데 있다.
뭘 갖다 팔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직감만으로도 운조가 유통업 인프라를 확보해 속도 붙이면 좆 된다는 냄새를 맡아서 서로 손도 잡고 대기업 청탁도 받고 애들을 쓴다.
─박 실장님 회식 끝났습니다. 차량 마크해서 집까지 가시는 길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래.”
─반주 조금 하셨고 생각이 많으십니다.
“알겠어요. 요구 사항 있으면 되도록 들어주고.”
─알겠습니다.
기사도 살살 간 보며 몇 건 더 터트릴 요량이니 아예 윤설이 해외에 가있는 사이 너저분한 현장 일을 싹 정리하면 되겠다. 앞뒤로 시간 계획이 딱딱 들어맞을 듯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직업적 결정권을 침범하지 말라는 소리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자기가 잘못한 바가 있으니 순순히 듣는 태도 하며 결정이 깔끔하다.
최윤은 불퉁하게 혼잣말로 헤아렸다.
시키지도 않았건만 최윤 앞에 뛰어들어 저가 대신 총 맞은 거, 러트라고는 해도 말 안 듣고 끈덕지게 들러붙은 거, 또 뭐야.
응당 감수해야 할 독단이다. 윤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묻지 않기로 한다. 이 정도면 의뢰 수행을 넘어서 배려에 끝이 없다고 봐야 마땅하다.
보기에 아름다워 그런가. 소유주 명의만 달면 그때부터 변하지 않고 내 것인 최윤의 여러 컬렉션처럼 두고두고 즐거울 대상인가.
식사 때 사양한 반주 대신 집에 이르러서야 얼음 위로 부은 술을 마시며 그림을 본다. 이렇게 마음이 흡족하고 관리도 까다롭지만 잘못될 일은 없는, 그런 건 아닌데.
어머니의 날카로운 지적이 잔 안에서 얼음과 함께 둥둥 떠다닌다. 사람 욕심낸 적이 없다.
이유 없는 자비와 호의는 사욕을 채우기 위함인가. 대가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 그동안 상하지만 않으면 됐지. 더 나가고 있나?
자문해 보는데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도 깜찍한 소식은 없었다. 어디선가 한 번쯤 성급한 짓을 해서 튀어나오는 가지가 있을까 기대했는데 몸을 사리고 있나 보다.
은성은 함량 미달의 약을 거물에게 팔아먹는 짓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고, 돈 주고 받은 호구 취급을 참을 큰손이란 없다. 가진 자들의 분노는 때로 끝 간 데 없는 자존심에서 오는 데다 이미 자라고 있을 불행한 씨앗은 증거로 남아 두고두고 그들의 속을 긁을 일만 남을 게 뻔하다.
눈이 뒤집혀 은성 사 남매를 바닥에 패대기치고 목이며 팔이며 외따로 나누어 동네방네 걸고 싶어 죽겠지.
여기서 괜히 불똥 튀는 데 말려 귀찮아지고 싶지도 않고, 은근슬쩍 뒤로 손을 돌려 떠보는 경우도 싫고, 괘씸죄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를 헤아려가며 까마귀 조를 나눈다.
“보따리 하나 빼돌립시다. 이름이 윤주현. 프로필 위치 이번 조 머리가 들고 가니까 숙지하고.”
“청람 쪽에서 보고 들어오는 건 바로 올려요.”
“은성 의사권 있는 이사회 자리 한번 만들어서 일정 나오는 대로……. 누님, 최진도 이름 넣어서.”
적당한 사람을 머리로, 손으로 두고 할당하되 전부 지켜보고 있어야 상황이 틀어져도 빠르게 결정할 수 있다.
하나씩 까마귀 무리를 묶고 물어 올 목표를 던져주는 과정이 반복되며 다섯 손가락을 넘기자 많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결과를 위해.
그러고 나서 잠시 시간을 가늠하다 걸음걸음 옷을 벗어 던지고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다시 돌아오는 걸음마다 옷을 쓱 밀어 한데 모아두고 보니 시간 쪼개 훈련 뛰러 가는 사람 흔적이라기엔 게으르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