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5)

5.

“두 번째가 좋네. 반했다, 반했어.”

“그러게. 완전 잘 나왔다.”

벌써 3회차 분량에 접어들었다. 주연 둘이 다시 한번 마주치는 장면이었고, 첫 만남과 달리 남자는 여자의 말에 넋을 잃은 듯 바라본다. 평소처럼 물에 잠겨있다 나왔는데 누구도 하지 않은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놀라움이 서서히 저 사람과 얽혀야 한다는 직감으로 바뀌는 얼굴을 담으며 장면이 끝나야 했다.

“연애를 하니까 달라∼ 응?”

그것은 윤설로 하여금 최윤과의 마주침을 떠올리게 했다. 그로 인해서만 앞으로가 달라질 것을 알고 있었던 때.

거기에 드라마 줄거리보다 낭만적이고, 풋사랑은 달콤쌉쌀하다는 말을 그린 듯하며 깊어지는 관계는 윤설의 이상 속 사랑과 닮은 데가 있었다. 열심히 분석해 간 덕도 있겠지만 가슴이 묘하게 울렁거렸다.

처음부터 너무 몰입하면 안 좋을 거라는 예감이 드는데 감독이나 상대 배우는 무척 자연스럽다며 칭찬 일색이다.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든다.

다음 컷 들어가기 전에 한 템포 쉬고 메이크업을 다시 받기로 했다. 물에서 나오는 길이라 우형이 챙겨준 수건을 어깨에 두르고 느리게 걷는데, 누군가 아예 배스 타월을 가져다주었다. 익숙해질 리 없는 최윤의 사람들이다.

스태프들은 단순히 로드 매니저라고 생각하거나 단단한 체격을 보고도 의아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윤설은 그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주고 우형을 찾았다. 차에 별별 일이 다 있었던 탓에 수시로 뒤적거리는 게 요즘 우형의 일이었다.

“뭐 있어?”

“서리 왔냐. 지금 별거 없어. 타도 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윤설의 불안을 들쑤시던 사소한 테러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지금은 언뜻 봐도 우형을 통해 전하는 선물이나 편지 따위가 들어오는 정도다.

아주 마음을 놓기에는 애매하게도 윤설만 알아들을 경고가 불쑥 끼어 들어오고는 했지만 눈에 보이는 피해는 없어졌으니까. 그것만으로도 한숨 돌릴 수 있다.

오랜 팬이 갑자기 은성에서 지낸 이야기를 적어 보내는 때가 있다. 방송에 내비친 적 없는 이야기, 암시가 짙은 문구. 이 사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겠거니 넘어가기로 한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겠지. 윤설의 눈에도 익숙할 만큼 모든 출연작을 보고, 감상을 적고, 동경을 전하는 것만 수년을 그냥 할 리가 없지 않나. 평범한 사람 하나 집어 협박하거나 큰돈을 주며 ‘한 번만.’이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이렇게 할 것이다.

상대에게 섭섭하거나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대놓고 말하기에는 특별히 학대당한 것도 아닌 답답한 성장기를 상기시키고 성인 이후의 갖은 실패를 들먹이는 수에 매번 휩쓸리는 자신이 싫을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조용하고 은밀한 신호는 혼자 마음을 다잡으면 되는 일이다. 주변이나 촬영 현장에 일이 생겨 찰나라도 나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숨통이 죄어들지 않을 일이라면, 언제나 그랬듯 감내해 봄직하다.

모든 게 다 괜찮게 진행되고 있다. 크게 심호흡하며 차 안에 기대 누웠다.

“그냥 자면 감기 걸린다.”

“조금만.”

“핸드폰 내려놓고.”

“응.”

우형은 헤엄치는 시늉일 뿐이라도 물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체력이 훅훅 깎이는 거라고 했다. 윤설이 한숨을 쉬듯 크게 가슴을 부풀렸다 늘어뜨리면 기민하게 컨디션을 살피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냥 그런 잔소리 따갑게 들으면서 정신 차리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면 된다.

네가다치는것보다좋은거야 이번에큰일이난다면너일거라고생각해 또 나, 때문에그런것보다, 낫지.

[물에 들어가는 신 마쳤습니다.]

[아무 일 없었어요. 괜찮습니다.]

최윤에게 문자까지 보내고 나니 좀 나은 것 같다. 두근거림은 여전하지만 불안으로 두 발을 잡아채 깊은 심해로, 아래로만 내려가는 아찔한 방망이질과는 달랐다.

비로소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감는다. 우형이 말 안 듣는다고 툴툴대며 무언가 부스럭대는 소리를 낸다. 갈아입을 옷을 챙기는 모양이다.

최윤은 답장 간격이 굉장히 들쭉날쭉한 사람이라 일과를 짐작하기 어렵다. 어떨 때는 그답지 않게 심드렁한 투로 게임하던 중이라고 할 때도 있다. 푹 쉬는 개인적인 시간이었던 거라고 짐작한다.

가끔은 윤설이 잘 모르는 게임 이야기를 하면서 미션에 실패해 성질이 바짝 올랐다는 불평도 하는데 그게 재미있었다.

[옆에서 주는 대로 잘 챙겨 입어요.]

[네?]

[윤설 씨 말 잘 듣잖아요.]

가물가물한 시야에 들어오는 답장을 보자마자 상체를 일으켰다. 우형이 멀뚱히 바라보다 무슨 일이라도 있냐고 하는 걸 보면 다른 사람이 전해주는 모양이다. 명오라는 남자나, 그의 지시를 철석같이 따르는 교대 조거나.

수건을 건네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게 가장 그럴듯하겠다. 좋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 하나.

언제나 나를 지켜보는 시선.

너를지켜보고있어너는계속실패할거야… 항상감시속에사는 기분.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최윤의 철저함은 보살핌에 가깝다. 윤설이 원했던 촘촘하고 섬세한 보호이고…….

그와의 일은 다른 사건 사고에 비할 대상이 아니다. 완전히 다르다.

[뒷머리 잘랐던데.]

그가 어디까지 관심 있어 할지 몰라 막상 얼굴을 보고 있을 때 하는 말이 단조롭지 않은가.

지금처럼 언급하고 지나간 말들은 윤설에게 단서가 되어주었다. 괜스레 어색한 듯해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싫고, 그렇다고 최윤에게 남들 대하듯 하기도 싫을 때 ‘지난번에 물어보셨던 건데.’ 하면서 슬그머니 먼저 대화를 걸 만한 힌트들을 모아두는 것이다.

[윤설 씨 집에서 봅시다.]

남들이 알아챌 때와 다른 느낌. 새삼스럽고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은 착각.

윤설은 이 느낌이 알맞을 법한 신에 메모를 해두었다. 옷을 갈아입고도 훤히 드러나는 뒷목을 괜히 쓰다듬고 있으니 메이크업 담당이 파우더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실외 촬영도 있어 장소를 두 번인가 이동했다. 차 안에 늘 우형과 둘이, 혹은 급할 때 스타일리스트가 같이 타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이제는 경호로 붙는 인원 둘쯤 더한 넷이 최소 인원이다.

처음에는 운전 중에 다른 차량이 사고를 유도할 수 있으니 운전도 그쪽에서 하겠다고 했다가 우형이 과하게 겁을 먹어 그만두었다. 내심 죽인다고 작정하면 멀리 있는 세트장 갈 때 큰 사고 내는 것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경호 팀을 가만히 보면 최윤에게는 이동할 때의 상황 하나하나 보고하는지 문자를 꽤 길게 보낸다. 우형은 겁먹으니까 그렇다 치고 윤설에게도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스트레스받을까 봐 그러나. 모르면 몰라서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다.

…….

바쁜 일정 잘 소화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사이사이 지루하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이 기분도 낯설다.

[촬영 길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세트장 같이 쓰는 드라마가 있어요. 날씨도 오늘이 좋아서 감독님이 의욕적이신 것 같습니다.]

[그림 잘 나오는 것도 중요하니까. 늦게 끝나면 그냥 쉬어요.]

그럼 오늘 안 오시나요?

[그럼]

“…….”

그냥 얼굴 보자거나 잠자리를 원할 뿐일 때에도 잠깐 나는 시간에 보러 갔었는데. 장시간 촬영이 끝나면 피곤하리란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반가워야 할 말임에도 부쩍 아쉽다.

계속 핸드폰만 볼 것 같아 주머니에 넣고 목을 기울여 가며 스트레칭했다.

오늘 아무래도 불안한가. 그래서 너무 의지하는지도 모른다.

긴장감 없을 정도로 편하게 굴 상대는 아니고, 오히려 성적으로 자극되는 바람에 진이 빠질 때도 있다지만, 그래도.

어떻게 자꾸 이유를 찾고 있지.

아무도 모르건만 제풀에 민망했다. 윤설은 괜히 앞좌석의 경호 팀에게 말을 건넸다.

“팀장님?”

“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대표님 오늘 일정이 어떤가요?”

“회사 일 보십니다. 주로 내부 일이고 대외 관계자 미팅 두 건 있습니다.”

“그렇군요. 촬영장 이야기는 전부 말씀드리기로 돼있습니까?”

“…네. 불편하셨습니까.”

“아니요, 아뇨. 그냥 궁금해서요.”

바쁜 게 맞구나. 아니면 또 어때서.

보고 내용을 물으니 잘 답해주던 경호 팀 직원이 잠시 망설였다. 좀 친해졌다고 우형이 말을 거든다.

뭐 있겠어. 스케줄, 촬영 장소, 만난 사람 수상한 사람 그런 거 아니겠냐고 제법 이력이 난 투로 늘어놓았는데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남자가 그 뒤를 이었다.

“드신 것, 싫어하는 식재료, 알레르기 유무, 스태프나 일일 용역, 장비 점검 유무 확인합니다. 선물도 가급적 촬영장에서 직접 전하는 건 돌려보내고 회사로 받으려고 하는데 괜찮으실지 모르겠다고…….”

“아. 네, 괜찮아요.”

“…아마 개인 용병이나 경호가 아니면 다 이 정도는 체크할 겁니다. 특히 주의 수준이 지금 같은 상황이면 안전 가옥으로 옮깁니다.”

“대강은 압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경호 팀에 문의하시거나 말씀하신 건은 다 보고됩니다.”

“네?”

“네.”

얼떨떨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우형이 갑자기 웃음을 힘껏 참는 얼굴을 하고 핸들을 꽉 쥔다. 한참 그러고 있더니 윤설더러 들으란 듯 ‘대표님 뭐 하나 궁금해했다고 전한다 그 말이야.’ 느물대며 말한다.

또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산 것 같지만, 사이좋은 커플로 알겠지 싶어 모르는 척했다. 모두가 그렇게 알수록 좋다고 늘 최윤과 함께 궁리했었다. 정말 푹 빠진 것처럼. 충분히 진지한 상대인 것처럼.

창문에 쿠션을 대고 기대어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루 종일 무얼 해도 싱숭생숭한 게 이래서 로맨스는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장르물에 몰입하는 시기보다 사람이 감성적이기 쉽다. 배역은 배역이고, 배우 본인은 이미지와 딴판이든 아니든 그 자신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해야 하는데 경력과 상관없이 스위치 끄기가 어렵다.

윤설만 겪는 곤란함도 아니었다. 윤설에게는 스릴러보다 더 비일상적인 장르가 로맨스이기 때문이다. 동경하지만 현실은 애정이 아닌 필요, 성애가 아닌 교미, 헌신이 아닌 대가 따위였기에.

미련하게도 어떤 인물이 되어 사랑을 가장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쉽게 소란스러워진다. 하필 흉내를 아주 잘 내는 남자와 연애하는 시늉을 보이며 돌아다니고, 사람들이 그를 궁금해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게 연예 기사 한편을 꾸준히 차지하고 있다.

이제는 촬영장에 와서도 익히 아는 얼굴이 윤설이 뒤집어쓴 남자를 향해 순수한 관심과 이해를 보이는 이야기를 걷는다. 그토록 바라면서도 엄두조차 못 내본 사랑 이야기가 윤설의 하루하루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중에 진짜는 없는데도 이렇게나.

“…….”

“머리 눌린다. 아니, 가서 또 해야 하니까 자라. 푹 자.”

“도착하면 깨워줘.”

실내 촬영만 있는 날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도착한 날이었다.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어수선하고 다들 말을 하려다 마는 듯한 어색함을 물고 있는 공기가 답답했다. 감독이나 조연출 등 위에서 말싸움이라도 벌였나 싶었다.

사전 지시나 필요한 말 외에는 쥐 죽은 듯 조용한 촬영장을 지나 대기실로 들어가니, 상대역인 선배가 먼저 와 있다 알은체를 했다.

“혹시 대본 수정되는 거 아니죠?”

“초반이라 살짝은 괜찮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괜찮아?”

“저요?”

“다 윤설 씨 눈치인지, 애인 눈치인지 보느라 싸하잖아.”

“…….”

선배가 소탈한 사람이라 다행이었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묻는 건 자신 없는 마당에 끝까지 저만 모를 뻔했다.

윤설이 무언가 찜찜해하면서 짚이는 것은 없는 사람처럼 입술을 말자 선배가 패드를 건네주었다.

축약본인 듯한 인터넷 뉴스 사회 경제면.

이게 왜?

선배가 재촉하며 잘 보라고 아예 손을 끌어 들려준다.

[은성 기업 위기와 상속 분쟁의 역사…….]

[5남매 중 이른 나이 사망한 부부, 사고에 제기된 의문.]

[승계권 다툼으로 무분별한 실적 경쟁… 불공정 계약 및 담합 의혹……. 조사 당시 혐의 없음으로 판정되었으나…….]

“…윤설 씨가 알았든 몰랐든, 기사가 이렇게 나고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가설 세우고 소설 쓰고 그러나 봐.”

“아침에요?”

최윤이 따로 언질을 준 적은 없다. 여타 다른 ‘작업’에 대해서도 그에게 일임한 이상 말해주는 것 이상으로 묻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 기사는 최윤의 손이 닿지 않은 일이거나, 윤설이 대답을 준비해야 하는 종류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일단은.

은성 일가 내의 사건 사고에 대한 추측이 상당수 사실이다. 실제로 정보의 원천이 있었다거나, 조사를 꽤 해서 나온 내용보다 알 만큼 알 사람들이 기사 싣는 걸 허락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정말 몰라서 못 썼다기보다는 돈이나 협박으로, 영향력으로 묻히는 게 있는 집안들 역사다.

“이거 가지고 윤설이가 어떻게 될 건 하나도 없는데, 좋은 내용은 아니니까.”

“압니다. 그냥 지나치기에도 스케일이 큰 이야기가 많죠.”

“괜찮겠어?”

“저야, 네. 괜찮아요.”

“감독이 워낙 새가슴이라 머리 싸매고 동동거리긴 했는데 뭐 어쩔 거야? 가야지.”

“하하.”

“웃기는. 난 준비 다 했으니까 자기 써.”

감사합니다.

널찍한 대기실인데 굳이 시간 되기도 전에 나서는 뒷모습에 대고 인사했다. 약간 피로감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다시 기사를 천천히 처음부터 읽어 내려갔다.

창시자의 카리스마가 강하고 임원진이 대부분 회장 인맥이었을 때, 한참 번성해서 평사원들까지 자부심이 넘쳤을 때는 문제가 없었으나 자리 잡고 나서 자식들이 장성하자 오히려 문제가 생긴 회사 분위기. 오 남매 다 회장에 못 미치는 반면 합심해서 일가족이 회사를 경영한다는 방향성도 이루지 못한 상황.

와중에 일찍 결혼해 총명한 자식을 본 부부는 가장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옛 역사의 왕처럼 자식과 뜻이 맞지 않자 일찌감치 포기하고 3세대에게 자리를 넘기려는 뜻을 우려해서든 상속분 경쟁을 염두에 두어서든 사고를 ‘당할’ 이유가 충분했다.

윤설도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지는 않았지만, 남의 눈으로 되새김질하자니 입 안이 썼다. 당일 급작스레 바뀐 운전기사나 하필 유류 이송 중이던 차량이 근처에 있어 불이 삽시간에 옮겨붙은 점 등 우연에 우연이 겹친 듯 보였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어이없이 차 사고로 이어질 요소가 없었다.

당시에는 불에 탄 시신의 부검으로 지금처럼 많은 정보를 얻지 못했고 장례가 급히 치뤄졌다. 그걸로 끝났다.

사고에 대해서는 꽤 상세히 다룬 반면, 윤설이 알파군 판정을 받은 것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현시점에서는 다행이다.

짤막하게 경쟁의 주축이 되는 남매들에 대해 다룬 것처럼 배우로 전향하기 전 윤설의 가능성, 위치, 회장의 태도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더해 추론을 덧댄 부분이 있을 뿐이다. 영재의 가능성도 있었는데 유학도 없이 일찌감치 데뷔해 버렸기에 스토리에서 빠지는 조연처럼 보인다.

그러다 윤설의 고모, 삼촌들이 벌인 사업들과 실패의 연대기가 표로 드러나고 그 과정에서 공중분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상속분에 대한 파이가 나오면서 윤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언급된다.

남은 형제들이 똘똘 뭉치지 않는 한 윤설이 누구 하나를 지지한다면 꽤 유리해진다. 일반 주주를 제외하고 타사로 넘어간 추정치를 그래프로 그려놓기까지 해서 더 두드러졌다.

이거야 재계 안에서나 다들 쉬쉬하는 이야기지, 이 타이밍에…….

가족 간 분쟁, 소설에 가깝다지만 형제 살해 의혹, 회사가 누구 손에 떨어질지 몰라 내부 직원들이 술렁인다는 익명 인터뷰가 골고루니 은성 주가가 휘청이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패드 가장자리를 톡톡 두드려가며 마지막에 이르렀다. 다소 과격하고 저돌적인 2세대의 행보를 볼 때, 윤설이 안정된 본인 삶을 꾸리는 입장에서는 최윤과의 결혼설이 차라리 본인에게 이득인 행보일 거라는 흐름은 거의 사실에 근접했다.

그나마 연예 가십 면과 달리 최윤이 계산적으로 접근했을지 모른단 의혹은 제기하지 않으니 윤설의 처지가 아주 딱해 보이지는 않는 정도였다.

“나쁘지는 않은데.”

물론 좋지도 않다. 감독이나 스태프들이 술렁일 만했다.

최윤에게 무어라 말을 걸어보려다가 마땅한 말이 없어 두고 촬영이 잘 끝나기만을 바랐다.

* * *

“시간 맞춰서 잘 올라갔습니다.”

“수고했습니다.”

“기자는 어떻게 할까요?”

“후속 기사 쓰셔야죠. 그때까지 우리가 신변 보호도 해드려야 하고.”

“…알겠습니다.”

기자가 신문 양면을 다 채울 만큼 내용을 뽑고 최종 사인이 떨어질 때까지 얼마나 진을 뺐는지 모른다. 그러게 남의 돈 받는다고 아무 일에나 머리 들이밀면 안 되는 법이다. 일에 비해 값이 후하면 더 그렇다.

와인 창고에서 내내 고생했으니 후속 기사 쓸 때는 주거 공간으로 옮겨주라는 말로 당근을 던진 최윤이 선물을 확인했다. 포장에 이렇게 힘을 줄 필요는 없었는데 주문받은 쪽에서 너무 호들갑을 떤 것 같다.

광택 없는 검은 상자에 부드러운 천을 깔아 물건 다치지 않게 고이 담아 보낸 모양이 보기에 나쁘지는 않다. 윤설을 좀 뜸하게 봤던 탓에 간만에 본다 생각하면 기분이 좋기도 했다.

허구한 날 남의 회사 먹을 궁리로 안광이 시퍼런 머리싸움판에 앉아있는 게 반, 까마귀들 불러다 은성 돌아가는 꼴 보고받고 이것저것 지시하면 또 반. 예쁜 것이라고는 볼 틈이 없어 눈이 다 피곤하지 않았나.

[촬영 끝나면 볼까요.]

[기분 전환하러 가도 좋고, 피곤하면 내가 가죠.]

윤설에게 붙인 치들이 알아서 꼬박꼬박 근황을 물어다 주기는 해도 실물 상태와는 다르다. 영상이나 사진에는 실물보다 약간 차가운 인물로 담긴다.

살아 움직이는 실제를 마주하고 있자면―윤설의 태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부드럽고 양순해 보인다. 그냥 입도 잘 안 열고 숫기가 없으니까 차갑게 비치는 거지.

혀를 차면서도 얼굴이나 드러난 몸이 무얼 하는지는 다 알아두었다. 아무래도 약간 생각이 많아 보이고 스트레스가 있는 듯하지만 곧잘 소화하며 다닌다고. 경호 팀에도 데면데면한 것치고는 필요한 요구를 잘 전달하는 편이란다.

영 맹탕은 아닌데 만나보면 또 물렁한 것이, 불현듯 제 사람 싸고돌던 최영의 얼굴이 지나간다. 산전수전 겪고 살아 생기도 없어 보이는 경을 데려다 왜 물고 빠나 했는데, 아마 그런 차이를 맛보는 모양이지 싶다. 눈앞에서 유난 떠는 꼴을 봐서 그런가.

[…외출한다면 어디가 좋으십니까.]

[차 타는 것도 신물 났을 거고. 가까운 곳 캠핑장 쓸 수 있는데 어때요.]

아무튼 일이 순조로워 좋다. 미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이나 모호한 감정을 파악하는 것은 언제까지고 미뤄도 좋을 것 같다.

[가본 적은 없는데 좋을 것 같아요.]

[해 다 지면 어렵지는 않나요?]

그 미인도 당장은 이런 궁리나 하는걸.

최윤은 한 손으로 들고 있던 핸드폰을 기울여 답을 보냈다. 집안 시커먼 놈들도 최윤이 이런 일로 바쁜 걸 더 좋아하니 늘어지고 싶은 마음은 접어두었다.

[불 피우는 걸로 시작해서 구경을 내일 낮부터 하면 됩니다.]

* * *

윤설의 우려대로 집안의 우여곡절이 전 국민에게 공개된 장본인보다 감독이 더 얼이 빠져 보였다. 당사자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니 감독도 간접적으로 ‘무슨 일 나는 건 아니지?’ 한마디로 그쳤으나 속으로 생각이 많은 눈치다. 작품 할 때 내부는 완벽해도 외부 사정이나 투자자 변심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일에 학을 뗀 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 경기할 때 와주시면 안 돼요?”

“…….”

“와주세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컷!

그래도 주연들 컨디션이 좋고 지원도 운조 계열사에서 많이 하는데 엎어질까 하는 것은 다 기우고 걱정 안 해도 된다, 우형이 윤설에게 수건을 둘러주며 넉살 좋은 척 희망적인 말로 달래자 그런 기운이 잦아든 편이다. 주연 투 샷 뜰 때부터 얼마나 반응이 좋았는데 등등 업계에 흔한 공치사여도 그만한 게 없나 보다.

“박 대표님이 악플 달리면 고소해 준대. 할래?”

“어?”

멍하니 캠핑 가면 뭘 하는지, 보고 들은 방송 따위나 떠올리던 윤설이 뒤늦게 머리를 털었다. 물 튄다고 한 소리 들었지만 다른 생각 중이었다고 할 수가 없었다.

“거기 악플 달릴 게 뭐가 있어.”

“야, 악플이 논리로 달리냐. 없어도 트집 잡는 거고 옛날 일 끌어오는 거지. 하자.”

“회사에서 잘해주시면 나야 좋지.”

“그래. 안 그래도 대표님 이거 해보고 싶으셨대.”

박 대표의 소속사는 중견 연기자 위주로 시작해 평탄하게 운영 중이었으니, 나름 든든한 사장이 되겠다는 다짐에 비해 계기가 없었던 모양이다.

신인 발굴은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나중에 윤설 이름에 슬쩍 얹혀도 잘 봐줘야 한다며 웃었던가. 그는 최윤을 아직도 어린 도련님으로 보듯 자기 아래 사람들을 고슴도치 부모처럼 끼고도는 성질이 있었다.

―우리 집 애들 가지고 얼토당토않은 삼류 소설이나 써대는 거, 그거! 다 잡아다 경찰서에서 진술하게 하고 합의도 안 해줄 거야! 고소가 얼마나 후하고 부드러운 대응인지 알아?

스피커폰도 아닌데 걸걸한 목소리가 언뜻 들리는 게, 화가 난 건지 신이 난 건지 모르게 흥분해 있다. 덕분에 웃어넘기고, 또.

쉬는 참에 틈틈이 검색해 보니 캠핑 후기는 낭만이 반, 날벌레와 불편함에 엉망으로 고생한 후기 반이었다. 둘 다 깔끔한 장소를 선호해서 이런 곳은 생전 말 안 나올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의외로 촬영 후 경호 팀이 그대로 윤설을 싣고 가는 길은 은근히 외지고 스산했다. 길이 닦여있기는 한데 어느 순간부터 지나는 차가 별로 없었다.

캠핑족 유치를 위해 근교 접근성이 좋은 곳에 우후죽순 생겼다는 리뷰를 보고 대충 비슷한 위치겠거니 했지만 길 주변이 이상했다. 도로에서 빠지면 금방 정리되지 않은 풀숲이라 길을 잃기 쉽게 생겼다.

표지판도 없이 곧고, 가끔 굽이지는 길. 경호 팀은 내비게이션도 안 켜고 차를 몰았다.

“산속에 있는 건가요?”

“네. 운조 회장님 별장 근처라 주로 가족분들이 다니십니다.”

운전자고 따라오는 차량이고 다 얼굴 익힌 사람만 타고 있는데 지난 기억에 빨려들 뻔했다. 사유지라면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긴장이 풀리자 저도 모르게 깜박 졸았다 깨기를 반복했다. 너무 멀게 느껴지는 어느 결에 볼 위로 닿은 손길이 깨울 때까지.

이미 거진 해가 지고 있는 때였다. 윤설은 최윤의 손을 잡고 하늘의 푸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는 풀밭 가운데를 걸었다. 딱히 조경이나 건축물로 용도를 표시해 두지 않은 빈 땅이었다.

걷는 동안 숲 너머로 낮은 산 그림자가 몇 겹으로 겹쳐있다 어두워지며 원래 하늘과 하나인 양 섞여들었다.

“다른 분들은 어디서 자고요?”

“근처에 있을 겁니다. 상사 데이트를 위해 이슬 맞고 노숙하게 할 정도로 뭐가 없지는 않아요.”

“오는 길이 외딴길이라 정말 산속인가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저런 것도 몇 대 더 있고. 알고 보면 사람 지낼 데 있습니다.”

하긴 관리하는 사람이 있을 법한 규모다. 인터넷 서핑할 때 봤던 사진들처럼 커다란 캠핑카가 있고, 불이 피워진 자리 근처에 등 댈 간이 의자가 나란히 두 개, 작은 테이블 위에 뭐가 그리 많이 필요한지 빼곡하게 올라가 있는 것들이 보였다. 그럴듯한 자리에 그럴듯한 구색이다.

윤설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오히려 웃을 수 있었다. 적막하고 고요한 외지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새삼스러웠다.

“원래 이렇게 잘, 다니셨나요?”

“나보다는 형님들이 좋아합니다. 자주 하면 재미없어요.”

“그런가요?”

“윤설 씨나 나나 일 아니면 집이었을 테니 지금은 좋죠. 어땠습니까?”

“촬영이 빡빡할 때는 항상 그렇습니다. 나쁠 것도 없고, 그럴 시간도 빠듯해서.”

“그런가요. 그게 십 년쯤 돼도 같습니까?”

최윤은 두서없이 늘어선 것들 가운데에서 금방 간식거리를 찾아 나눠 주었다. 질문을 해놓고 바로 먹을 것을 주니, 받아먹으며 멍하니 하늘 보며 생각할 시간을 번 셈이다.

어땠더라.

하루하루를 살고 때로는 프로젝트 단위로 시간을 헤아리다 보면 아무런 생각 없이도 몇 달이, 반년이, 한 해가 우습게 지나간다.

어떤 주기마다 사람들 제각기 인생 계획이라는 걸 갖기 마련이라는데. 윤설이 세운 목표는 단 하나였고,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의 시간은 모두 버티는 날들이었다.

“생각 안 나면 맙시다. 워크홀릭 타입이었나 보죠.”

“…네. 일이 재미있었습니다.”

“음.”

“대표님도 일 즐겁게 하시는 거 아닌가요?”

“정확히 말하면 경쟁하고 얻는 과정이 그런 편이고 유지 관리는 재미없습니다.”

모호한 대답이라고는 없다.

윤설이 대답의 의미를 되짚는 사이, 최윤은 캠핑카 안쪽에서 뚜껑 덮인 접시들을 들고 나왔다. 더 이상 둘 데가 없어 보여 두리번대다 뒤쪽에 세워진 테이블 하나를 더 펼쳐놓자 최윤이 두 번쯤 더 날라주었다.

안이 보이지 않는 돔형의 뚜껑에 슬쩍 손가락을 대보아도 그렇게 차갑지 않았다. 의아해하며 바라보니, 엉뚱하게도 데우기만 하면 된다고 알려준다.

윤설은 최윤 대신 차례로 뚜껑을 열고 무엇이 들었는지 살펴보았다. 다시 데워야 할 건 고기 종류뿐인 듯하다.

“언제부터 와계셨던 겁니까?”

“윤설 씨보다 두어 시간 먼저 왔나?”

“그럼 이건 다…….”

“회장님 직원분 옆구리 찔러서 받았습니다. 저기 별장 근처에 사셔서요.”

“아, 네. 손이 가는 것들이라 놀랐어요.”

“요리도 해요?”

“조금은 합니다. 말씀대로 일하고 집에 있거나, 편히 다닐 만한 데도 없었고… 그래서요.”

드물게 최윤보다 앞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알았다.

최윤은 그저 턱을 괴고 앉아 불 위에 다시 익힐 것들을 얹고, 행여나 태울까 눈을 떼지 않는 윤설의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신경이 쏠린 사이 그래서 보통 뭘 해 먹었냐, 다른 사람 해준 적도 있냐는 둥 질문을 툭툭 던지는 걸 보면 그에게 흥미로운 주제인 듯했다.

윤설은 돌아보지 않은 채 집게로 살짝 뒤집어 가며 떠오르는 대로 답했다. 안에서 시간 들여 할 일이란 뻔하기도 하고, 밖에서 들인 사람이 해준 음식 먹고 탈이 나 경황없을 때 그대로 여기저기 채여 갈 위기도 겪었기에 차라리 해 먹자 싶었다고. 막상 해보니 계량을 잘하면 아주 어렵지도 않고 시간이 잘 가서 좋다고.

“꽤 여러 가지 해봤나 봐요.”

“…생각해 보면 정작 저는 체중 유지하느라 늘 해 먹는 것만 먹은 것 같아요.”

“가끔 덕 좀 볼까요.”

“네?”

“잘 먹을게요.”

한 것이라고는 알맞게 데워서 보기 좋게 덜어준 것이 다인데 이미 한 달쯤 끼니를 챙겨 받은 사람처럼 인사한다. 뻔뻔한 말을 서슴없이 하는데 경박하지 않은 이유도 그의 자리에서, 단단함에서 나왔겠지.

온종일 팔랑대며 여기까지 온 윤설에게는 부러운 성격이었다. 처한 환경이나 도와줄 사람의 유무에서 이미 차이가 났다지만, 무탈하게 자랐어도 저렇게 변죽 좋게 말하는 사람이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최윤처럼 말을 하는 자신을 떠올리자 차라리 로맨스 연기를 잘하는 자신이 낫겠지 싶어 헛웃음이 난다.

“별거 없죠. 이런 데 나오면 그냥 이렇게 먹고, 시간 지나면 한 잔씩 하고. 더 해봐야 노래 부르거나 간단한 내기 게임 하는 게 다인데.”

“그게 좋은 것 아닐까요?”

“일상을 떠나는 기분 내기에는 여행이 낫습니다.”

“이렇게 조용하고 평화롭기는 어려우니까요?”

“으음, 듣고 보니 그도 그렇네요.”

“아마 만나야 하는 사람 수도 적고요?”

적어도 윤설은 그랬다. 속세를 떠나는 해방감, 번잡함과 소음을 벗어난 고요. 최소한의 낯선 이를 꼭 필요한 만큼만 만나고 나면 가족이든 친구든 연인이든 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끼리 남아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 시간을 채우고 누리는 것. 도시에서 생업을 꾸리고 원치 않는 인간관계 틈에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잠깐의 일탈이 낭만적일 터다.

최윤도 그래서 권한 것 아니었나 하며 흘끔 살펴보니, 덤덤한 건지 심드렁하니 별 감흥이 없는 건지 구분이 안 되었다. 하긴 최윤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따라오는 사람이 있어도 직원들이 해결해 줄 테니 쉬어요.”

“네? 네. 대표님도… 바쁘셨다고 들었습니다.”

“나한테 묻는 게 나을 걸 왜 애들한테 묻고 그래요.”

“매번 묻기에는 바쁘시니까요?”

“윤설 씨도 말이 많아지는 주제가 따로 있나 봐요.”

뭐가 웃겼는지 킥킥 웃는다. 그러자 한결 더 편안해졌다.

최윤의 선택은 적절했다. 그는 최근 촬영 중 무슨 일이 생길까 예민해진 상태를 염두에 두고 고른 장소겠지만, 쉼 없이 들썩이는 감정에 피로했던 윤설에게 도심 속의 휴식보다는 정적이 더 도움 된다.

둘은 빈 그릇을 한데 모아 치워두고도 시시한 이야기나 올리며 불가에 앉아있었다. 구름이 걷히고 깨끗해진 밤하늘에 별이 조금 더 잘 보인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꺾고 바라보기도 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조금 쌀쌀한 듯한 공기에도 들어가자 말하는 이도 없다. 머릿속이 말끔하게 비워져 가는 때가 드물었기에 마냥 편안하고 나른했다.

이래서 먼 사막, 끝없는 평원을 보러 간 사람들은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당연하게들 썼구나.

경험이 없는 윤설에게 관용어로만 이해되던 타인의 여행기가 아주 살짝은 피부로 와닿았다.

“…그런데 대표님, 오늘 기사 혹시 보셨을까요?”

“윤설 씨, 분위기 없어요.”

“네?”

“농담입니다. 알아요. 우리 쪽도, 은성 쪽도 아닙니다.”

“꽤 많이 알던데요. 그래도 걱정할 내용은 아니었어요.”

“본인이 그렇다면 나도 걱정 안 합니다.”

마지막에는 기어코 마음에 둔 일을 꺼내고야 만다. 아직 끝난 건 없고, 이 시간에 녹아든 지도 얼마 안 되어 그렇다고 스스로 변명했다. 생각보다 빠르게 졸음이 몰려와서 자기 전에 말하고 싶기도 했다.

최윤은 낮은 의자가 뒤로 넘어갈 둥 말 둥 하는데도 계속 의자를 기울였다 바로 세우며 대수롭잖은 듯 들었다. 괜스레 민망스럽다가도 속에 안고 있기보다는 묻기를 잘했지 싶었다.

“어느 쪽이 좋아요. 차 안? 텐트?”

“둘이 많이 다릅니까?”

“캠핑카 안은 간이침대 느낌이고 텐트는 실내 같은 느낌은 없는데, 기분이죠.”

“이따 한번 보고 편하신 대로 할게요.”

“…지금 눈 좀 감겼는데.”

“아닙니다.”

“아니기는.”

최윤이 팔을 뻗어 윤설의 눈가를 쓸었다. 반사적으로 약간 바로 뜨이는 게, 저도 모르게 살짝 풀려있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당겨 보니 자정이 다 돼있었다. 얼마 안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고 지금 곧장 자라고 하면 왠지 싫은 기분이었다. 그냥 이대로 있다가 딱 잘 것 같을 순간에 누우면 좋겠다.

대답은 않고 눈만 깜박이고 있자, 최윤이 몸을 낮추고 멍한 얼굴을 들여다본다. 윤설은 안 자겠다 버티기는 쑥스러워 어설픈 미소만 지었다.

“잡시다. 쉬고 나서 천천히 물어볼 것도 있거든요.”

“지금 물으셔도 되는데.”

“잠은 편하게 자야죠. 졸음 올 때 자야 안 설치는 것 알잖아요.”

“네. 그럴게요.”

“말만.”

이번에는 둘 다 픽 웃어버렸다.

결국은 얼마쯤 더 있다가 최윤이 먼저 일어나 불을 죽이기 시작했다. 윤설은 어떻게 하는지 자세히 본다고 눈을 크게 떴다가, 뒤늦게 거들어 치울 것이 없는지 자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 맞은편에 둘이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 큼직한 텐트 문과 없는 게 없어 보이는 캠핑카를 번갈아 보며 잠시 둔한 머리를 굴려보는데, 특별히 뭐가 나쁠 이유가 없었다. 불씨가 사그라드는 동안 내내 그러고 있자 최윤이 다가와 어깨를 톡 두드린다. 많이 졸린 모양이라고.

윤설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차 안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뒤처리하기에도 텐트는, 아무래도.”

“응?”

입속말처럼 나지막이 내뱉는 소리를 듣던 최윤이 등 뒤에서 허리를 숙여 어깨 위를 눌렀다. 제법 무게가 실렸는데도 윤설은 조금 휘청이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반문했다. 자기 말이 맞지 않느냐는 투에 최윤이 어깨 아래 팔을 쓸어내리며 웃음을 참는 듯 눌린 목소리를 낸다.

“윤설 씨, 지금 나랑 뭐 할 생각 한 거예요?”

“아, 그게, 아니요. 네.”

“나만 보면 이제…….”

“그런 게 아니라, 오랜만이라 저도 모르게…….”

“오랜만이니까, 뭘요.”

누가 봐도 놀리는 게 분명했다. 사위가 어두워 드문드문 놓인 간이 램프의 빛과 검푸른 하늘에 별이 있어 착각을 일으키는 대비가 다인데 발끝까지 드러난 기분이 들곤 한다.

최윤이 귓가에 입술을 대고 있다가 잇새로 물고 당겼다. 아프지는 않지만 재촉하는데 돌려줄 답이 없어 곤란했다.

거침없이 팔을 건너 배 위, 배에서 바지춤으로 건너가는 손을 잡아 슬며시 밀어내자 묘한 힘겨루기가 되었다.

“새삼스럽게 뭘 숨겨요.”

“밖이잖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선 것 같은데.”

“아니, 만지셔서, 자러 가요.”

“손잡은 것 말고는 지금이 처음인데요.”

“그래도 여기서는, 안 됩니다.”

“…아.”

얽힌 손으로 몸을 밀듯 엎치락뒤치락하다 그만 힘을 과하게 준 모양이었다. 무심결에 신음하는 최윤의 목소리에 퍼뜩 놀라 두 손으로 쥐고 살폈다.

희미한 빛에 비추어 볼 때 멍이 들거나 손자국이 나지는 않은 것 같지만 윤설이 그 부분에 민감했다. 최윤도 웃음기를 거두고 달래는 투로 낮게 속삭였다.

윤설 씨가 먼저 원하는 것처럼 보여서 기분 좋았을 뿐이에요.

그 말에 목덜미로 불이 번지는 듯 홧홧한 느낌이 올랐다. 이제 윤설은 다 살핀 손을 조심스레 지분대면서 놓아주지도 못했다.

그의 말이 틀렸다고 하기에는 얕은 기대라도 한 게 사실이다. 습관이 무섭다는 핑계라도 붙여서. 연인이라 공언하는 대신 다른 이는 만나지 말라고 했던 책임으로. 꼭 그렇지 않더라도 최윤과 몸을 맞대고 흥분에 잠기는 일은 불안하지 않다는 걸 배웠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상대로 만족했으면…….

“맞아요, 대표님.”

“하고 싶어요?”

“끝…까지는 말고, 그건 안 돼요.”

“음. 그러면.”

붙잡힌 손을 거둬 가지 않고 윤설에게 내준 최윤이 더 따지지 않고 섭섭하다는 둥 빤빤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래도 정말 불이 붙어 못 견딜 날은 아니었던지 퍽 다정스레 알겠다고 답해주었다.

깊은 숨을 내쉬며 그의 손에 볼을 대는데 최윤이 여전히 다리 사이에 눈길을 두고 있다.

“윤설 씨는 섰으니까, 해결해야죠.”

“아, 네.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손대면 나도 못 참을 것 같으니까요.”

“네. 그러니까 먼저 들어가 계시면…….”

“해요. 내가 망봐줄게요.”

저도 모르게 올려 보았는데 콧잔등에 입맞춤만 닿았다. 그것도 자극이라고 바지가 터질 것 같았다. 최윤의 손을 잡고 매달려 봐야 볼만 살살 긁어줄 뿐이고, 그가 농담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만 분명해지고 있었다.

윤설은 결국 마른침을 삼키며 지퍼를 내리고 속옷 안에 갇힌 좆을 꺼냈다. 언제 그렇게 돼있었는지 반쯤 선 것이 쌀쌀한 공기에 노출되자 등으로 소름이 돋는 듯했다.

최윤이 여전히 한 손을 잡혀준 채 등 뒤에 서서 보고 있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야외에서 성기를 드러내 놓고 혼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니 말도 안 됐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있지도 않았다. 빨리 해결할 작정으로 밑동부터 위까지 힘주어 쓸기만 하자 최윤이 귀 끝을 깨물었다. 그 바람에 또 열이 몰렸다.

“내 거 만질 때처럼 해요. 달래줘야죠.”

“으…읏, 대표님, 아파요. 살살…….”

“커졌어요. 응, 그렇게 해요.”

귀를 혀로 핥았다 잘게 깨무는 통에 자꾸 감각이 곤두섰다. 최윤의 숨소리까지 흘러들어 올 것만 같아 한결 부드럽게 기둥을 쓸고 끝머리를 문지르면서도, 고개를 돌려 피하려 애썼다. 그래봐야 손바닥이 젖어들면서 살이 치대어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일 뿐이었다.

아래가 흉흉하게 부풀어 손안에서 젖은 소리를 낼수록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떨어지는 주기가 빨라져 간다. 윤설은 이 조용한 곳에 자신의 신음 소리와 탁탁대는 마찰음만 울린다는 사실이 더 창피스러웠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두 사람과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는 직원들의 눈에 추태가 보이지 않을까, 만에 하나라도 그럴까 걱정돼 더 정신이 없었다.

최윤은 쉼 없이 손을 움직이는 한편 자신의 손을 꼭 붙잡은 한 손의 힘에 웃었다. 그 성격에 밝은 곳이었다면 얼굴이나 목이 터질 듯 붉어진 모양이 다 보였을 것이다.

“흑, 흐, 으응, 흐으으…….”

“잘하고 있어요. 조금 더 아래까지 잡고 흔들어요, 그렇게.”

“후으, 대표, 님, 아아, 하, 하아…….”

프리컴으로 젖어 퉁퉁 튕기는 좆은 흐린 빛에 보기만 해도 시뻘겋게 달아올랐음을 알겠다. 윤설이 주춤대거나 자신의 손에 매달릴 때마다 최윤은 귓불이며 어깨를 살살 물어주며 칭찬해 주었다.

둘이 같이 엉겨 엉망진창으로 밭은 숨을 몰아쉬기 급급할 때와 다르게 윤설의 거친 호흡과 사이사이 떨리는 신음이 선명하게 들린다. 야외에서 뭘 하는 취미는 없었는데 지금은 보기 좋다.

“아. 최근에 은성에서 왔었어요.”

“흑, 거기서, 누가 왔… 왜요?”

“쉬지 말고. 다 같이는 아니고 따로 날 낚으려고 온 것 같은데 재미있는 말을 하더라고요.”

“하아, 잠시만, 아, 물지 마세, 아아!”

“응. 짧게 말하면 자기랑 손잡자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어차피 윤설 씨 상속분이 나한테 넘어가는 건 기정사실이니, 합리적으로 판단하겠다고요.”

“…누구였, 후으, 흐, 누구였어요?”

“집중해요. 또 말해줄게요.”

“금방, 쌀 것 같, 헉, 못 참겠어요, 대표님.”

“싸도 돼요. 아무튼, 거기서 되게 재미있는 질문을 했는데.”

좆을 그러쥔 윤설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흘러나온 양도 적지 않았으나 이제 한계에 이르러 분출을 앞둔 귀두 끝이 손안에 감춰졌다 드러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평소 물이 많았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애원하듯 가늘어졌다 사정에 가까워 낮게 긁히는 목울림을 생생히 듣자니 더욱 그랬다. 잠시 하려던 말을 잊을 뻔했다.

“…나한테 임신했냐고 묻더군요. 혹시 오메가냐고.”

“무슨, 헉, 흐으, 후, 으, 읏… 그게, 아.”

“잘했어요.”

윤설은 뜻밖의 말에 놀라 조금 느리게, 막혔던 욕구가 터진 것처럼 사정했다. 솟구친 희멀건 정액이 최윤의 얼굴이며 윤설의 배, 발치의 풀까지 고루 튀었다.

색색 숨을 몰아쉬는 윤설의 손을 놓은 최윤이 닦을 만한 수건을 꺼내 오는 동안 사정의 여운인지 어처구니없는 말의 충격인지 모를 떨림이 남아 등을 긁었다.

“제가, 할게요.”

“그게 낫겠어요?”

“네. 그런데 누가, 대표님께 그런 걸 물었습니까.”

“중요한 문제인데 아무리 찔러봐도 나오는 건 없고, 그래서 물은 것 같던데요.”

“…말도 안 되는 짓을 했네요.”

“편견 없는 사고라 좀 감탄했어요. ‘절대’라는 건 없는 세상이니까.”

물론 오메가라고 특정 외모나 체형에 치우친 생김새일 거라 하면 편견이고 고정 관념이었다. 워낙 드물고 밝히기를 꺼리는 특성이라 드라마 등 좋을 대로 각색한 이미지가 퍼져있기도 했지만, 하다 하다 최윤을 두고 윤설을 붙잡으려 아이까지 가진 오메가냐고 묻다니.

욕심에 눈이 뒤집힌 삼촌이나 고모 중 누구라도 최윤에게 그럴 작자들이라 더 농담 같지 않았다. 윤설은 아래를 대충 닦아내자마자 얼굴을 가리고 신음했다.

“…윤설 씨가 안에 싼 양만 생각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조건이 안 되잖습니까.”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술 더 뜨며 웃어대는 최윤까지 한데 섞이자 윤설은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다른 형제들에 앞서 아예 최윤과 손잡고 자기 몫을 챙긴다는 발상은 그럴듯하다. 남매들 중 누구였을까. 무슨 조건을 걸었을까.

“정확히 어떤 제안이었나요?”

“적당히 계산 잘하는 사람이 할 법한, 뻔한 제안이요. 내일 더 이야기해요. 피곤할 텐데.”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최윤이 어떤 대답을 했는지도 궁금했고, 만약 그들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고 하면 다 죽이기로 했을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좀처럼 생각을 끊지 못하던 윤설은 자신을 캠핑카 안으로 데려간 최윤이 숙이고 있던 고개가 아프다며 주물러달라고 한 뒤에야 억지로 손을 움직이다 서서히 눈을 감았다. 비로소 다시 고요해졌다.

* * *

피로가 깊어 한 번 깨는 일도 없이 내리 잘 줄로만 알았는데, 꿈인 듯 생시인 듯 눈을 떴다 감은 기억이 있다. 곁에 누운 이와 번갈아 뒤척이거나 기대었다가 끌어안았다 하며 끈질기게 잠을 다시 청하고 꿈결인가 하면 아직 어두운 바깥에 안도하며 눈감았었다.

이번에는 희미하게나마 창밖에서 들어오는 아침 햇빛이 커튼 자락에 노랗게 테를 두르고 있어 더 피할 수도 없이 아침이구나 했다. 함께 덮은 담요 아래 더운 몸을 안고 있어 움직이기도 싫고 나른하기만 하다.

얼굴을 보면 더 좋겠는데.

어떻게 잤는지 최윤의 등을 안고 뒷모습만 보는 자세다.

밖에서 만날 때는 간혹 향수 냄새도 났었지.

지금은 건조한 이불에서 나는 잘 마른 것들의 냄새와 본인은 모를 살냄새, 생활의 흔적뿐이다. 윤설은 조심스레 숨을 고르며 낯설지만은 않은 향을 들이마셨다.

자는 이에게 이러는 건 변태적인 행동인가?

잠시 스쳐 가는 생각에 숨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어간다. 페로몬이라는 게 제3의 영역이라고들 하지만 꼭 알파―오메가가 아니더라도 사람마다 고유한 향을 몸에 감고 다닌다. 윤설은 조금 더 잘 잡아낼 수 있을 뿐이다.

사실 페로몬처럼 즉각적이고 본능적으로 감지되는 신호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자주 새겨서 머리로 하는 판단보다 빨리 잡아챌 수만 있다면. 지금 담아둬야 한다는 충동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아침부터 열렬하네.”

“깨셨어요?”

“배 만지면서 목 뒤에 바람 불면 얼른 일어나라는 거 아닙니까.”

“배를 언제… 알고 한 건 아니에요.”

“네. 계속해도 괜찮아요.”

잠긴 목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잠에서 깨어나는 속도가 빠른 사람이다.

윤설은 최윤이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날까 싶어 돌아눕는 몸을 고쳐 안았다. 슬그머니 다리가 얽혀 오자 빠짐없이 맞닿는 게 느껴져 잠자코 있었다.

“더 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음. 피곤할 만한 일을 한 게 없어서요.”

“그러면 조금만 쉬다 일어날게요.”

“이제 잘 피하네요.”

“…방금은 그냥 놀리신 거니까…….”

“네에.”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리기에 같이 웃었다.

최윤은 언제든 스킨십이나 섹스를 마다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희롱 섞인 농담도 습관이라 매번 걸려들면 윤설만 곤란해졌다. 그러다 자연스레 어떤 일이 생겨도 좋겠지만, 아침이라 빈속이다. 일어나자마자 그럴 수는 없었다.

무감한 손길로 가슴을 문지르는 최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할 말이 있었는데, 기억을 더듬던 윤설의 목 끝에 수많은 질문이 앞다투어 걸렸다.

“대표님.”

“네.”

“어제 제게 물을 게 있다고 하셨어요.”

“그랬죠.”

“지금도 괜찮습니다.”

“윤설 씨 계획을 알아야겠습니다.”

“…제가 따로 할 일 말하는 거지요?”

“계산이 안 맞아서 묻는 것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

채 떨치지 못한 졸음과 나른함이 군데군데 묻어있던 얼굴이 심각해진다. 머릿속에 생각 많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윤설이 최윤에게 세간의 관심과 일신의 안녕을 걸었을 뿐 구체적인 방법을 묻지 않았듯, 최윤도 처음에 내건 기간 안에 정리될 사정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은성은 은성대로 무너져도 윤설은 남아야 했다. 차라리 해외로 빼돌려 주면 조용히 살겠다는 작정도 아니고, 윤서리로 배우 일을 하며 여기 살아야 한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하겠다는 생각은 곤란하지 않겠나.

계열사를 줄줄이 물고 있는 은성 지분 적잖은 양을 거저 얻은 덕에 머리 굴리며 지지부진하게 기다려야 하는 시간을 던 만큼의 값은 치르려는 것이다. 최윤은 비열할 순 있지만 사기꾼은 아니다.

“…확실한 계획 맞습니까?”

“네. 그건 분명해요.”

해서 물었는데 돌아오는 답이 없다. 침묵이 길어졌다. 갑자기 날 선 이성이 깨어나며 답답해졌다.

윤설은 코앞에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말 대신 망설임에 떨리는 눈동자를 보인다. 애처로운 빛을 띤 얼굴. 그를 마음에 들어 했는데 울컥, 불쾌하고 미미한 거슬림이 올라와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해한다. 변죽 좋게 둘러대지는 못했어도 물어보는 것마다 넙죽 대답하느니 이 편이 영리했다.

아는데 분명치 않아서 거슬리는 것이다. 결국 눈을 내리깔고 말 텐데 두 손 가득 힘주어 자신의 등이며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모양은 또 뭔가 하고.

“대표님.”

“그래요. 확실하면 됐습니다.”

“…….”

“일어날까요?”

부득불 답을 얻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주려던 것도 있었고, 해가 뜨겁지 않을 때 한 바퀴 돌며 소일이라도 같이 하려 했었다.

그런 말로 끝맺자 영영 매달려 있을 것 같던 손이 쉬이 떨어졌다. 무어라 다그친 것도 아닌데 손마디가 불그스름해 담요 밑에 넣어주었다.

아직 희미하게나마 달이 보이는 찬 새벽이다. 그래도 햇빛을 받기 시작하자 땅과 숲의 경계가 눈에 보였다. 나무들 다 키가 크고 울창해 지난밤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던 것도 이해가 된다.

두 사람 다 자다 나온 차림에 상의만 갈아입고, 씻어낸 얼굴만 멀끔한 채 어제처럼 캠핑 테이블을 두고 나란히 앉았다. 그래도 아침은 차다고 겉옷을 꿰입는데 상자 하나가 불쑥 끼어든다.

최윤이 손가락으로 두드리자 가볍게 울리는 소리가 난다. 검게 칠해진 목함에 헐겁게나마 잠금쇠도 달려있어 뭐가 들었을지 가늠도 안 됐다.

“선물이에요.”

“그냥 주시는 건가요?”

“네. 아무런 날도 아니고 그냥.”

남들 앞에 보이기 좋은 잡화 따위인가 했다가, 크기를 보면 그것도 아닌 듯했다.

최윤은 알려줄 생각은 없는지 빙글빙글 웃고만 있었다. 장난기는 좀 있지만 말로 스칠 뿐 윤설을 하대한 적은 없으니 짓궂은 물건이 튀어나올 리는 없다.

걸쇠를 젖히고 두 손으로 뚜껑이 떨어질까 조심스레 들었다. 부드러운 천 위에 곱게 놓인 반질반질한 표면. 어림잡아 큼직한 어른 손보다도 조금 더 길어 보였다. 보기에 새것이고 정교해 보이는 물건이었음에도 선뜻 들어 올리지 못했다.

“제 겁니까?”

“선물이잖아요. 윤설 씨 겁니다.”

“이런 선물…은 분위기 없습니다.”

“하하. 어제 들었다고 갚는 거예요? 받아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가지고 다닐 수도 없습니다.”

“소품이라고 해요.”

“무슨.”

말도 안 된다. 드레스 룸 한편을 채울 만큼 늘어나서 우형이 날마다 바꿔주어도 모자람 없는 시계나 구두가 어색했던 때가 언제인가 싶게 그리워졌다.

총 자체의 무게감은 있지만 어디까지나 윤설이 긴장했을 때의 아귀힘이나 사고 위험 생각해서 가늠한 거고, 방아쇠 당길 때 힘이 걸리는 것도 같은 이유라든지 총탄은 상자 밑에 넉넉하게 깔아뒀다든지 하는 설명이 퍽 자상했으나 죄 한 귀로 새어 나갔다.

좀 익숙하게 군다 싶더니 처음처럼 당황한 윤설을 본 최윤이 그것을 직접 꺼내 손에 들려주었다. 차가웠다.

“당연히 당신이 뭘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사양하겠습니다.”

“지키는 것, 필요하면 다치는 것 다 내 쪽의 일이니 들 일이 없어야 하는 게 맞습니다.”

“…….”

“그래도 만약의 경우가 생기면 윤설 씨가 다치지 않는 게 우선이잖아요?”

그게 윤설의 계획이고, 거래의 목적이기에.

좀처럼 총을 꽉 잡지 않고 금방이라도 놓아버릴 것처럼 걸고 있는 손가락 위치를 제대로 잡아준다. 여간해서는 불만스러워도 참을 줄 아는 것 같더니 총 앞에서 자꾸 빼느라 미간에 힘 들어간 얼굴이 새삼 신기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윤설이 눈을 돌렸다. 최윤은 전에 말했듯 피할 수 없는 순간 한 번만, 그 한 번만 모면하라 말했다. 목숨이 걸렸다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총 다루는 법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듣고 싶지 않아도 적막한 가운데 두 귀가 최윤을 향해 열려있는 데다 기억력도 좋아 금방 외웠다. 정 안 되겠으면 제일 가까운 데 있는 직원한테 들려주고 방패 삼으라는 말까지 들으니 조금 질리는 느낌이었다. 지긋지긋한 실랑이를 넘어 이제 사선에 있다.

“윤설 씨가 필요해서 다치게 하지 않으려던 때랑은 다를 겁니다.”

“…네.”

“태생만 아니면 날 먼저 죽이려고 했겠죠.”

“그럼 대표님은 앞으로도 안전한 겁니까?”

“아니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싶으면 나도 찌르지 않겠어요?”

한데 사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있어 어깨만 들썩이고 마니 맥이 풀렸다. 가깝고도 먼 죽음이라는 말이 그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최윤은 윤설의 손에 들린 총이 흡족한지 계속 두고 보았다. 더 어쩌지도 않을 텐데 싶어 도로 상자에 넣으려던 것을 말리고 손 닿기 편한 자리를 찾아보라며 몇 군데를 짚어주었다. 품 안, 오른손이 닿는 허리 뒤춤 등 어디에 밀어 넣어도 딱딱한 총신이 걸리는 느낌이 이상했다.

그대로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셨다. 최윤은 아침에 잠시 냉랭한 기색이 스쳤던 순간은 착각인가 싶게 산뜻했다. 해가 너무 뜨겁기 전에 움직이자며, 길이라곤 없어 보이는 숲으로 윤설을 이끌었다.

평소 걸음이 다소 빨랐던 윤설이 품에 끼고 있는 총 때문인지 조금 느리게 걸었다. 그에 맞추어 천천히 걸으며 가려진 길을 헤치고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외부인이 들어올 일은 드물지만 길은 언제나 닦여있다고, 운조 회장이 찾을 때마다 새벽바람으로 산책하러 오기 때문에 신경 쓰는 것이라 최윤이 투덜대며 설명했다.

온통 키가 커단 나무들 사이로 길 따라 햇살이 비집고 들어오는 길, 오로지 한 방향으로 끝까지 가서 돌아오는 길을 찾아야 하는 기이한 산책로였다.

그래도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니 길 주변에 제법 키가 작은 꽃이나 풀숲이 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은 촬영할 때 주로 와봤지, 경호원을 고용했을 때에도 도심을 벗어나는 건 엄두도 못 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팔자가 좋은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울적함은 괜한 것이고 걱정에 불안이 따름은 당연하다. 윤설은 그렇게 정리했다.

“원래는 쉬게 하려고 고른 곳인데 말이에요.”

“덕분에 푹 잤습니다.”

“일 생각은 안 들던가요?”

“네? 네. 그러고 보니 다음 대본을 좀 봐야 했는데.”

“나중에요. 준비를 많이 해야 하는 인물입니까?”

“음, 아무래도, 네. 모든 배역이 그렇지만 경험에 빗댈 게 하나도 없습니다.”

“전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형사 역도 있던데요.”

“인터뷰 많이 하고, 소설 제외한 현장 보고서나 관련 서적 놓고 앞뒤를 맞춰요.”

“확실히 이해하기 쉬워지겠네요.”

“그 위에 스토리 때문에 생기는 특이한 상황을 겹치고, 성격 때문에 달라지는 부분을 얹고, 그런 식으로 했습니다.”

“작가가 설정한 것보다 오버해서 쌓는 불상사는 없었고요?”

“덜어내는 게 나중에 부족한 부분 채우는 것보다 나아요. 사람마다 방법은 다르지만, 저라면요.”

일 생각과 피로를 덜어주려고 했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캠핑 안 해봤다는 말에 준비한 거라고 생각하면 괜스레 어둑한 산책로가 비밀의 단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이 서른 넘은 성인이 어쩌면 이렇게 금방 기분이 이리저리 휘는지, 갈대 나부끼는 모양 보고 사람 마음 같다고 말 지어낸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옳았던 것이다. 최윤이 문외한인 분야에 대해 관심 있게 듣는 눈치라 인터뷰마다 자주 해온 답인데도 따분하지 않았다.

“사랑은 가장 비이성적인 감정이라 그 방법으로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럴 수도 있겠어요.”

때로는 문외한인 사람이 더 정확하게 짚어내는 부분도 있으니까.

사랑을 가장 비이성인 감정이라 표현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런 사랑이야말로 윤설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형태였지만, 겹겹이 지식과 해석을 쌓아 올려서 완성되는 이해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떤 사고처럼 들이닥치고 내가 속절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 자체가 사랑이라 여겼는데. 존재 자체가 목적이 되고 애정의 대상인 것만으로 충분해 기꺼이 헌신하게 하는, 모든 이해관계와 이기를 벗어나 그 곁에 머물게 하는 감정.

하면, 연기하는 순간 상대역을 사랑해 버려야 연기할 수 있을까.

“발 조심해요.”

최윤이 비틀거리는 윤설의 팔을 잡아주었다. 대화가 끊긴 줄도 모르고 자못 진지하게 고민하기에 구경했는데 몰입도가 너무 높다. 뒤늦게 민망한 듯 웃지만 어딘지 멍해 보이는 것이, 아침에 막 눈뜬 때처럼 보인다.

“상대 배우가 선배던데. 힌트 좀 구해봐요.”

“네. 그게 뭐예요?”

최윤이 산책로 가장자리로 넘어온 덩굴을 발로 짓이겨 밀어내다 아예 덩어리째 들어 풀숲으로 던졌다. 오는 길에 물으면 대충은 무슨 꽃이니 무슨 나무니 알려주던 사람치고는 질색하고 던져버리기에 더 다가가지는 않았다.

“못 먹는 겁니다.”

“그런 것까지 아세요?”

“노인네, 흠, 어르신이 어디 산으로 끌려가도 못 먹을 거 먹어서 죽으면 안 된다고 알려줬거든요.”

웃네요. 정말인데.

산책로는 끝나고 헐거운 사슬이 둘린 사유지 팻말이 꽂힌 자리까지 가서야 멈추었다. 애초에 진입로 자체부터가 운조 회장의 가족들이나 다닐 곳인데 생뚱맞고 분위기와는 영 맞지 않았다.

건너편에 주말농장이나 온실 같은 걸 꾸려놓은 평지가 있지만 가로질러 가면 굴러떨어지기 딱 좋아 쇠줄을 쳤다고 최윤이 옛이야기를 한다. 누가 그런 데를 그냥 질러갈 생각을 하겠냐 하니, 왔던 길을 돌아 나오던 그가 씨익 웃었다. 그러면서 윤설이 손을 다시 붙들자 마주 잡아주었다. 아침 일로 수없이 망설였던 시간이 우습게도.

“가고 싶은 데 있어요? 별장이나 농장, 뭐든.”

새로 들어간 드라마의 촬영 내내 그랬듯 마음이 쉽게 팔랑댔다.

* * *

자리를 걷어치우는 일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이 무거운 캠핑카 대신 다른 차를 탔다. 근처라는 별장을 구경하고 그길로 내려가면 좋겠다 하니 최윤이 사람들을 불러 키를 받았다.

길이 고르고 평탄해도 흙길이고 산지인데 이런 차가 다녀도 될까 싶었다. 안정성이나 엔진이 받쳐주고 말고를 떠나, 그가 소유물을 함부로 다루는 편은 아닌데 고가일 차를……. 혹 그에게는 적당한 가격일까?

따르던 경호 팀은 어디로 붙였는지 모르나 운전도 최윤이 직접 했다. 윤설은 어쩐지 명치 밑에 응어리진 듯한 느낌이 시종 권총을 끼고 다녀서이거나, 온통 낯선 경험의 연속이라 그런가 하며 가만히 최윤이 늘어놓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가장 믿을 만한 보호자와 함께인데도 미미한 두근거림이 따라다닌다. 불안이라기에는 거침없고 긴장이라기에는 가벼운 떨림. 이걸 말해야 할지. 잠자코 있으면 나아질 증상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에─아마 최윤이 어리고 예쁜 도련님일 적에─ 본가에 큰일이 있는 분위기거나, 납치 시도한 범인을 찾는 데 시간이 걸리면 박 대표를 포함한 ‘삼촌들’과 함께 덜렁 여기 실려 와있기도 했었단다. 집에 있을 때보다는 경계가 느슨했지만 그래도 또래 없이 휘젓고 다녀야 하는 건 매한가지라 나중에는 ‘별장’ 운만 떼도 좀 싫은 기분이었다 한다.

해외여행도 꽤 좋아했는데 제 손으로 싸움질 좀 하기 전까지는 가본 일이 손에 꼽았다고도 한다. 윤설과는 다른 이유로 자유롭지 못한 유년기였다.

중간중간 스쳐 가는 풍경을 설명해 주는 말을 빼고 하나로 이어보면 별장은 운조 일가의 휴양지요, 어린 최윤을 숨기는 사적인 보루였고, 최윤에게는 추억이자 심심찮게 혼자 시간을 보낸 장소였다.

“저 위입니다.”

“주변은 돌아봐도 되나요?”

“안까지 들어가도 상관없습니다.”

차를 대고 가로로 긴 구조의 이 층 건물의 집합을 눈에 담는다. 대청이 있는 한옥 배치와 비슷하게 트여있으면서 목재는 들어가지 않은 철저하게 현대식 건물이었다.

관리를 해도 피할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지낸 세월이 기니 한 번쯤 걷어내고 손을 보았거나 새로 지었을 수도 있다.

최윤을 따라 마당을 가로지르며 생각보다 너른 부지에 혀를 내두르다 멈춘 곳, 안쪽 작은 정원 작은 연못과 키 작은 나무 몇 그루는 어울리지 않는 듯 어색하기도 했다.

언뜻 물고기 헤엄치는 모습도 보이는 물가에 가까운 자리를 발로 다진 최윤이 말했다. 어릴 때 시간을 보낸 재미없는 삼촌들은 이제 한몫 잘 챙겨 편히 살거나 최 회장의 잔일을 도우며 은퇴를 준비하고 커다란 개는 여기 묻혔다고. 어린 시절은 그렇게 뒤로 사라져가는 것이다.

“여기 오면 물고기 한번 잡아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었죠.”

“많이 아끼셨나 봅니다.”

“그럼요.”

눈가를 찡그리며 웃는다. 최윤이 추억에 잠겨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표정인 것만은 확실했다.

박 대표 정도의 존재일까. 커다랗고 잘생긴 개. 그럭저럭 어린 도련님과 비슷한 나이처럼 굴며 이리저리 뛰었고, 나이 들어서는 어린 손에 보살핌을 받았을 충직한 친구.

윤설은 그런 그림을 막연히 상상했다. 저가 그렇듯 현재 최윤의 상황이 안정적이지 않으니 개든, 고양이든 기르지 않고 잠시 맡았다 다른 집을 찾아준다는 걸 안다.

“동물은 정 주고 먹여준 사람 배신 안 합니다.”

끝없이 가지고 싶은 게 생긴다는 사람이 언제쯤 다시 그런 친구를 두고 지낼 수 있나. 금방 돌아서서 다른 방향 눈길 닿는 곳을 설명해 주는 뒷모습을 보며 답답한 가슴을 꾹 눌렀다.

안온한 일상과 따뜻한 가족을 한참 뒤로 미루고 자신 있게 다른 목표를 가지는 최윤이 부러운지도 모른다. 겨우 자유와 제 편인 사람 몇을 바라는 자신과는 다르다는 게 시시각각 드러나니 새삼 속 좁게 질시하느라 설명할 길 없는 감정이 더해지는 것이다.

“어르신이야 맨날 물러나면 여기 와서 소일이나 하신다고 하지만, 글쎄요.”

“대표님 생각은 다른가요?”

“나야 늘 지척에서 들볶느니 그 편이 좋은데 사람 성질이 쉽게 변하나요.”

“정정하신 건 좋은 일인걸요.”

이러니 역시 로맨스는 개인사가 다 해결된 다음에 한다고 할 일이었다.

오랫동안 묶여있던 족쇄를 끊는 시도만으로 신경이 곤두서고 불안하기 마련인데 거기에 낯선 경험, 낯선 감정에 대한 이해로 수런대는 속을 끌어안고 버티자니 스스로 닳아 남아나질 않는다.

쉬라고 마련해 준 곳에 와 사람들 틈을 벗어나고 나서야 인정했다. 널뛰는 감정이 참, 버거웠다. 다루는 법을 모른다.

“…늦지 않게 돌아가야겠습니다.”

“하루걸러 또 촬영 있다고 했죠. 그럽시다.”

캠핑 장소까지 내려오자 차는 물론이고 집기까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올 때 이후로 나타난 적 없던 직원들이 같은 종의 차를 줄 세워놓고 있다가 두 사람을 보고 반색하며 안내해 주었다.

이래저래 손 가는 일이 많았을 듯한데 늘 무던하거나 기꺼운 눈치라 이따금 필요 이상으로 보고 있기도 했었다. 그러면 몇 번인가 윤설과 마주친 적 있는 이들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돌려주고는 한다. 최윤에게서 비롯된 호의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도심으로 돌아가는 길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랐다. 명치께의 불편한 응어리가 가슴 위로 타고 와 두근거림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른 돌아가 우형과 함께 빈집에 쓰러져 일정 이야기를 하고, 씻고, 대본을 한 번 더 보고. 그러다 보면 해 기우는 것도 금방이니 일찌감치 기절하듯 잠들면 좋겠다.

“올 때 멀미했습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좀 빌릴게요.”

“네? 네.”

실체 없는 불편함을 최윤에게 말해도 달리 방법이 나올 리 없어서 가슴만 내리누르고 있자니 오히려 최윤이 윤설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고 느슨하게 앉았다. 눈을 붙이려나 싶어 지켜보자, 피로한 기색 하나 없이 운전자가 보는 대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그렇다고 말을 붙이지도 않으니 조용히 가야겠다.

차라리 잘됐다. 최윤이 지금의 윤설을 궁금해해도 무어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계약 상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인상만 더하고 말 일이지.

자연스레 다리 위로 얹힌 손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음악조차 틀지 않고 굽은 길을 가며, 두근대는 가슴과 고르지 못한 호흡을 감추는 일에만 열중하다 차츰 의식이 멀어졌다.

…끼이이익.

탕!

* * *

탕!

멀리 지나던 소리들이 갑자기 또렷해지며 윤설을 깨운다. 도로 위 차가 길게 미끄러지는 소리, 차바퀴가 헛도는 공회전 소리 사이로 굉음을 들었다.

“대표님?”

“숙여요.”

앞쪽 경호 차량이 도로 선을 비껴 서 옆으로 돌고 있었다. 타이어가 나가 뒤집어질 뻔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탄 차 앞을 넓게 질러 막고 선 앞쪽 차에서 직원들이 뛰어내렸다.

“저격 있습니다!”

얼핏 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으로는 운조 일가에서 따로 낸 길에서 도심으로 건너는 터널 부근인 듯했다. 조금 더 넘어가면 단속 카메라나 통행 차량과 만날 터였다. 하필, 이 아니라 그렇기에 여기서 발을 묶었을 것이다.

최윤은 이 거리에서 차량 상대로 같잖은 수라며 혀를 찼으면서도 피해를 따졌다.

─1호 운전석 뚫었습니다. 경상입니다.

─1호 뒷바퀴 스쳤고 운행 가능합니다.

─저격 찾겠습니다.

앞차와 먼저 행동한 이들로부터 연달아 통신이 들어왔다.

최윤은 윤설의 등을 내리누른 팔에 힘을 실은 그대로 짧게 대답하며, 저격은 미끼니 인원 많이 빼지 말라는 지시를 덧붙였다. 앞좌석에서 장총 꺼내는 소리가 난다.

─내리지 마십시오.

“안 내리게 잘 해.”

도로변과 터널을 둘러싼 비탈과 산자락 틈에 달리는 차를 세우려고 기다린 자가 있다. 최윤이 함께한 뒤로 집이며 촬영장까지 경비가 삼엄해졌으니 차라리 외지에 있을 때를 노린 것이다.

생각에 따라 최윤도 해칠 수 있다던 가정이 어지러운 윤설의 머릿속에 스쳤다.

상대도 이쪽도 거리낌 없이 살의를 드러낼 수 있는 곳.

가슴이 세차게 뛰며 줄곧 메스껍게 하던 불편함의 근원을 찾는다. 전부 불길한 예감은 아니었을까.

위쪽에서 몇 번 더 총소리가 났다. 저격수를 쫓아간 쪽에서 나는 소리임에도 평지에 남은 자들은 위를 보지 않았다.

─1호 차량과 거리를 두고 이동합니다.

─2호 차는 간격 좁혀서 엄호하겠습니다.

“바로 통과합니다. 진입로 넘어가면 추격 힘든 거 저쪽도 알 거고.”

엄폐물처럼 앞을 가리고 있던 차에 마지막까지 주변을 살피던 직원이 타자마자 처음과 같은 대열로 돌아간다. 언제 놓아주었는지 움직임이 자유로워져 윤설도 구겨진 몸을 세웠다.

운전하는 직원과 최윤 모두 턱이 굳어 표정 없는 동상처럼 보였다. 달리 돌아갈 길이 없어 지나야만 하는 터널의 주홍빛 등이 가까워진다.

“괜찮을 겁니다.”

“…네.”

먼저 어둠 속으로 뛰어든 차에서 아무런 보고가 없다. 뒤이어 터널 안으로 들어서자 주홍빛, 어둠, 다시 주홍빛이 어룽대며 스친다.

저 멀리 앞쪽에 긴 장대 같은 것을 들고 선 사람의 형상이 나타나 팔을 크게 휘두른다. 차창이 쇠 파이프질을 했대도 한 번에 깨질 리가…….

그러나 다음 순간, 사람은 터널 벽으로 물러나고 바닥에 묵직한 쇠줄이 불티를 튀며 부딪혔다.

카가가가각!

앞차에 끌려가다 어느 지점에서 걸렸는지 팽팽해지며 단단한 차체 겉을 함께 긁어내고 있었다.

옆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차가 잘 버틴다 싶었는데 빠른 속도에 제동이 걸려서인지 터널 앞에서처럼 방향이 틀어지고, 그대로라면 이쪽과 충돌할 상황이었다.

회전하는 차에서 몸을 내민 최윤의 사람 두엇이 쇠사슬을 잡고 돌아가는 힘을 이용해 차 위로 올라섰다. 튕겨 나갈까 봐 걸린 것을 떼어내는 대신 탈출하기로 한 모양이다.

탕!

그사이 반대 차선으로 나타난 차에서 연달아 총성이 울린다. 아수라장이었다. 두 사람이 탄 차가 그에 가까워지며 창 앞으로 총알이 스쳤다.

기운 채로 멈춘 차를 엄폐물 삼아 반대편의 차를 세우려는 최윤의 사람들, 앞쪽 차를 비껴갈 수 있을지 가늠하지 않고 속도만 줄어든 차, 뒤차에서는 엄호 사격, 총소리, 누군가의 외침, 총알이 차에 그대로 박혀버리는 둔한 흔들림.

운전자가 최윤의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로 밟아.”

“예.”

“내가 윤설 씨 쪽으로 먼저 나갈게요.”

“차 달리는데, 내립니까?”

“타이밍 잘 보고요. 뒤차로 바꿀 겁니다.”

윤설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어물대는 건 도움이 안 된다.

앞차를 조금 들이받고 그 반동으로 차가 세워지기 직전에 터널 벽 쪽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속도가 계속 줄어 큰 충격은 없었으나 미끄러지며 도로 면에 긁힌 곳들이 얼얼했다.

앞서 차 밖으로 나와있던 사람 몇의 검은 옷 위로 얼룩이 져있었다. 운전석에 있던 직원이 마저 앞차를 밀어내고 뒤차가 멈출 때까지 두 사람 앞을 막았다.

“하나 더 옵니다!”

“제정신이 아니네.”

터널 안으로 정체 모를 차 두 대가 더 들어왔다. 처음 비껴갔던 차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아 수월하겠다 싶었던 순간 다시 시작된 대치에 빈 차로 쉽게 옮길 수 없었다.

운전대를 잡은 이들 외 모두가 밖으로 나와 총을 잡았고, 지척에서 빈 총이 재장전되는 소리와 가장 먼저 죽여야 할 표적을 지명하는 외침이 수시로 대상을 달리했다. 최윤과 윤설이 선 자리로도 총탄이 몇 차례 스쳤다.

엄폐물 노릇을 하는 차 두 대도 탈출로를 위해 각도를 더 틀 수 없었고, 앞을 막은 직원들은 이제 터널 밖에도 가로막은 자가 있을지를 의심했다.

“다 처리하기보다 지금 나가시는 게 낫습니다.”

“차는.”

“하나는 바퀴가 나갔습니다.”

최윤은 마지막으로 선 차에 윤설을 태웠다. 운전자와 조수석의 둘을 뺀 직원들은 남았다. 돌아보는 건 윤설 단 한 명뿐이었다. 다시 주홍빛 불빛이 길게 꼬리를 그리는 속도로 달리는 차 뒤로 총성이 끊이지 않는다.

터널의 끝, 햇빛이 보일 때 바이크 한 대가 전속으로 역주행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망설임은 없었고, 운전자는 뛰어내려 자세를 바로잡는 찰나에 운전석을 향해 총을 쐈다.

“피해!!”

“뒤가 위험합니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앞쪽으로 충돌한다. 측면으로 틀다 바이크가 뒷좌석에 있는 최윤이나 윤설 쪽 유리를 깨고 들어갈 것을 염두에 두고 그대로 받아낸 것이다.

최윤이 무어라 짓씹었는데 얼핏 들어도 욕설이었다. 조수석 차 문이 열린 채 총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최윤이 윤설에게 앞쪽을 보지 말라며 어깨를 안고 끌었다. 뒷좌석 문이 열리고 최윤의 몸이 일정한 간격으로 반동을 받아 흔들렸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죽었다. 죽지 않았어도 싸울 수는 없을 터였다. 엄호 중인 남자, 최윤, 윤설뿐이다.

터널 안에서 앞쪽으로 직원들이 이동할 거라는 무전음을 들은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하지 않다. 아무도 안 남았는지도 모른다.

가까운 죽음. 타인의 희생. 어쩌면 그런 일을 수락한 최윤까지. 윤설은 몸에 닿아있는 딱딱한 총구를 비로소 생각해 냈다.

최윤의 너머 총알이 날아오는 쪽으로 아무렇게나 한 번 돌아본 그가 윤설의 몸을 안아 벽 쪽으로 이끄는 동안 또 한 번 방아쇠를 당겼다. 최윤의 장담대로 사격장의 연습용 총보다 무거웠다. 무게부터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까지 윤설이 힘을 조절할 필요가 없었다.

“2분만 버티면 됩니다. 내 말 들려요?”

제 얼굴을 잡은 양손이 뜨거웠다. 숨이 거친 최윤의 목소리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또렷하다.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의 걷어 올려진 소매 위아래가 모두 검붉은 얼룩이었다.

시선이 뚝 떨어지고 나니 이제 둘 남았다는 사실만이 보인다. 조수석의 남자가 들었던 총이 저만치에 홀로 떨어져 있었다.

“대표님…….”

그럼 저쪽은?

상대는? 적은 이제 없어?

한 손으로 최윤의 팔뚝을 쥐어본다. 뜨겁고 단단한 몸도 결국 거죽은 살갗, 단단하다 한들 근육에 불과해 그의 가슴 아래에는 흉이 있다. 벗은 몸을 어루만질 때마다 선명해 손끝으로도 그려낼 수 있는 그 흉터는, 무엇을 맞아 생긴 거였다 했나.

숨이 거칠었다. 가슴이 너무 세차게 뛰어 욱신거리기까지 한다.

윤설은 이런 종류의 감정을 다룰 줄 몰랐다. 자신에게 팔을 잡히고도 몸을 돌려 총을 든 최윤의 말대로 이 분만 더 버티면 끝이 날 거라 믿고 싶었다. 이런 순간을 위해 최윤에게 제 미래를 걸었다.

“윤설!”

그러니 그만큼도 못 참고, 그를 향해 다가오는 죽음이 보인다 해서 윤설 자신이 나서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