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알면 알수록 알파는 존재 자체가 반칙이나 다름없었다. 좋게 말하면 경이였고, 직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재수 없었다.
절대다수인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그악스럽게 한계치에 달한 자들, 날 때부터 천재인 자들은 더러 있었고 최윤도 회장의 늦둥이로 세상에 나면서 받은 우려에 비해 지나치게 잘났다는 평을 먹고 자랐었다. 그러고도 자라면서 몸으로 뛰어들고 머리를 굴리며 치열하게 임해야 승자 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중간 보고서를 통해 알파―오메가라는 종이 타고남으로 얼마나 많은 순간에 쉽게 남을 꺾었을지 보았다. 기가 찼다. 언젠가 윤설에게 보여주었던 알파의 영상도 그가 윤설보다 수치가 낮다뿐 우수한 개체, 고된 훈련을 강행해 탄생한 초인이라고 치부했건만 착각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신체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고 해서 머리가 평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환경과 성격, 원하는 방향의 차이는 있겠으나 마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찬란한 원석처럼 보였다.
이들의 번식 성공률이 희박하고 자손까지 2차 성별자를 얻고 싶다면 반드시 상대가 알파나 오메가여야 한다는 점이 인류에게 다행일 정도였다.
이러니 모질지도 못하고 보호자도 없는 알파 하나 휘둘러서 장사하겠다는 발상이 나오지.
인간의 흉한 생각에 불가능은 없어서 옛 자료에도 알파나 오메가가 신변이 구속된 채 이용된 사례가 간간이 있었다. 수만 많았다면 누구보다 강력한 집단이 될 수 있었을 그들을 두고 인권 보호 협회가 설립됐다는 게 웃지 못할 사실인 마당에.
“재능이라는 게 참, 이렇게 치사해지는 것인 줄 몰랐는데.”
심지어 자신의 곁에 두고 다니는 알파도 점점 그런 면모를 보인다.
승마는 본인도 좋아하는 편이고 금방 잘했지만 촬영에 들어가는 입장에서 부상을 입으면 안 되기 때문에 빨리 달려보지는 못했었다. 대신 사격은 움직이는 표적을 맞히는 단계까지 도달했다.
제대로 배운 것은 기초뿐이고 나머지는 재미있어하는 최윤을 따라다니다 같이 해준다는 식으로 연습한 시간이 다였다.
“그래도 대표님처럼 하지는 못합니다.”
“글쎄. 나처럼 총 잡은 지 십 년쯤 되면 뭘 맞힐지 걱정됩니다.”
“…설마요.”
“…속 좁게 굴었습니다. 칭찬이에요.”
굳이 살아있는 것을 잡는 일이 내키지 않아 그렇지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리겠다. 달려드는 전문가들도 침착하기만 하면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쯤 되자 인력 모집을 할 때 낮은 수치라도 알파나 오메가 인자 판정을 받은 자들을 적극 모집해 둬야 하나 싶다. 위험하지만 그만큼 불법적인 일에 상당히 유용해 보인다.
전직 국가 대표였던 사격장 주인이 최근 들어 윤설을 바라보는 눈이 변했음에도 그냥 어이가 없고 말지 이해가 안 되는 바는 없었다. 정작 본인은 칭찬을 듣고 잠깐 얼굴이 환해졌다 더 어려운 단계를 권하면 슬슬 뒤로 빼는 것이 마음에도 없어 보여 더 그랬다.
“조만간 하나 구해줄게요.”
“그런 이야기를 밖에서 해도 됩니까?”
“다 우리 ‘직원’입니다.”
“만약 제가 사고로 발포하면, 사람들 앞에서 누군가를 쏘게 되면 어떡합니까.”
“그 사고에서 윤설 씨가 안 다치고, 납치도 안 당하면 됩니다.”
참 깜찍한 걱정이었다. 마침 직업이 배우겠다 현장 좀 만져서 없는 말 지어내는 것쯤 일도 아니다.
내심 스파링 상대가 거기서 거기인 것도 지겨워 체술이나 칼 쓰는 법을 구렁이 담 넘듯 어물쩍 가르쳐보려고 하고 있는데 영 반응이 시원찮았다. 하면 잘할 폼이 보이는데 소극적이고 자꾸 피한다.
안전을 위해서야 파고들어서 치명타를 한 방 날리는 것보다는 잘 피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기야 하지만, 본인 입으로도 회복력이 우수하다 하고 습득이 저렇게나 빠른데.
최윤은 어느새 사격장 주인과 같은 눈으로 윤설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꺾으면 성장하고, 눕혀도 곧 일어나는 영원한 경쟁자를 잠시 상상했다가 흩어버린다.
무슨 생각에 빠졌는지 조심스레 장총의 안전장치가 잠기는 부분까지 세심하게 살피며 말이 없다. 눈이 마주치면 피하다가 의식적으로라도 돌리지 않는 데까지 거진 일주일이 걸렸다. 윤설이 하도 죄지은 것처럼 구는 탓에 남이 보면 웃다 자빠질 일이래도 컨디션 안 좋은 척 엄살을 부리려다 그만두었다.
볼 때마다 떠오르는 희롱을 깨물고 기다리자 여느 때처럼 돌아왔으나 침대 위로 끌어들이는 일은 더 달래야 할 성싶다.
나중에 또 사과하기를 소파랑 바닥에서 뒹군 것도 마음에 걸린다고 했던가.
간이 테이블 곁에 앉아 찬 음료를 마시는 낯에서 눈치 보는 기색이 사라져 여간 시원한 게 아니었다.
“시나리오 들어온 게 있는데, 언제 같이 봐주실 수 있을까요?”
“내 의견이 도움은 되겠어요?”
“네. 제작이나 출연자 아닌 시각도 중요합니다.”
“윤설 씨 출연작을 많이 본 사람이면 오히려 안 좋을 수도 있겠네요.”
“그건.”
첫 섹스의 충격은 충격이고, 확실히 같이 보낸 시간이 길어졌다고 꺼내는 이야기도 다양해졌다.
자신의 기호나 사소한 제안을 두고 선뜻 최윤에게 의사를 묻거나 밖에 보이지도 욕구를 해소하는 것도 아닌 시간을 기꺼이 함께하는 일은… 거래 관계 이상의 친근함을 담고 있다. 혹은 그런 척을 잘해내고 있다.
통 국내 연예계 사정에 관심이 없었다던 최윤이 필모그래피를 꿰고 있는지 모른다는 짐작으로 귀가 붉어진 윤설, 사적 관계에 요령 없어 보이는 윤설도 그럴 수는 있다. 괜스레 신발 끝으로 앞코를 툭 치니 아직 의도를 모르고 둥글어지는 눈매로도 속내는 다를 수 있다.
최윤은 턱을 괴고 발을 까닥여 발목께를 찾았다. 가볍게 톡 닿으니 그제야 이것저것 떠오르는 눈치다.
고요한 순간이었고, 바람 지나는 소리만 들려야 마땅했다.
탕─
“움직이지 마요.”
입을 열려던 이 대신 사격장 경계 너머에서 총성이 울렸다. 멀리서나마 혼란이 끓고 사람 몇이 우왕좌왕하는 소리가 둔하게 울렸다.
반응은 빨랐으나 총을 든 채 방향을 잡지 못하는 윤설의 어깨가 힘에 눌렸다. 최윤이 근처에 서있던 남자들에게 손짓하기도 전에 이미 있는 줄도 몰랐던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잔디를 짓밟으며 뛰어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명오야, 여기.”
“네.”
말리고 싶었으나 최윤이 윤설의 앞을 가로막았다. 명오라는 남자가 그 뒤편에서 단단히 버티고 있었다.
“직접 안 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앞서 움직인 자들과 교신한 남자가 짧게 상황을 전하자 최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주먹을 쥐었다 펴며 얼마간 더 기다렸다. 이후로는 거짓말처럼 적막했다.
* * *
규칙적으로 과녁을 맞히던 총소리도 없고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장단을 맞추다 되묻는 목소리도 곁을 떠났다.
명오라는 남자가 최윤더러 굳이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전했지만, 최윤은 데이트를 방해받았으니 얼굴이라도 봐야겠다며 윤설을 맡기고 자리를 비웠다. 뜨겁게 열이 오른 손을 윤설의 손등 위로 겹쳐 꾹 깍지 끼는 시늉을 하고는 웃어주었지만 눈이 여느 때와 달리 선득했다.
하여 윤설은 하릴없이,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잔디 따위를 보며 최윤의 수하와 함께 있었다. 미처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오늘 대동한 남자는 훤칠하고 반듯한 인상이 그린 듯한 경호원 상이다.
“금방 오실 겁니다.”
“…그럴까요?”
“…오래 걸릴 일이면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을 겁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십중팔구 묘하게 느슨해 보이는 외양의 최윤보다는 이 남자를 경호로 택할 터다.
그러나 윤설은 어쩐지 조금 불안했다. 저도 모르게 실례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흘끔대는 것을 뒤늦게 알고 멀리 시선을 돌린다. 아마 이 눈치 때문에 묻지 않은 이야기를 먼저 해준 듯했다.
총격 소리에 이 사달이 난 만큼 혼자 사격을 하고 있을 마음도 안 난다. 그냥, 최윤의 말대로 방해받은 느낌인 모양이다.
재능이라는 게 무시할 부분이 못 된다고 했던가. 윤설이 보기에는 다양한 종목을 두루 즐기고 아마추어 이상으로 하고 있는 최윤이야말로 소질 있는 편이다. 아마 몸으로 하는 일은 다 잘하지 않을까.
옛날처럼 몸으로 치고받아서 사업할 세상이 아니라 하면서 시나리오를 짜고 있지만 그 시대에 태어났다면 고루한 조직 항쟁을 누구보다 잘해냈을 사람이다.
최윤을 따라다니는 ‘경호원’이나 ‘직원’들의 태도에서 묻어나는 은근한 선망도 비슷한 종류였다. 늘 비슷비슷한 반응임에도 뭐가 재미있는지 꼬박꼬박 놀리거나 칭찬하며 천재성을 아쉬워하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충분하다.
“…한 번뿐이었습니다.”
“네?”
한참 회상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곁을 지키고 서있던 남자가 앞만 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제가 처음 뭣도 모를 때 도련, 대표님께 덤볐다 져서 그런 겁니다.”
“…….”
“그때 말고는 절대로 관계나 다른 감정 가진 적 없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이 무슨 뜬금없는 고백인가.
윤설은 난데없이 치고 들어온 말에 남자를 올려다봤으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입을 다물고 목석처럼 서있기만 했다. 뭔가를 해명하는 듯한 투와 수상쩍은 내용이 쉽게 와닿지 않았다.
한참 말을 잊고 나란히 최윤을 기다리기만을 한참, 뒤늦게 열이 확 올랐다.
이 남자도 최윤과 잔 적이 있다.
* * *
“파파라치랑 날 타깃으로 잡은 스나이퍼가 꼬여서 생긴 일입니다.”
“대표님을요?”
“유학 전의 원한도 좀 있고, 경고 사격 같은 거죠.”
다행입니다.
윤설을 목표로 한 위협이 아니라 시원하다는 의미였다.
“…괜히 나랑 다니다 불똥 튄다고 생각하는 얼굴인데.”
“그런 게 아닙니다.”
“압니다. 기자는 걱정 말아요. 개죽음될 뻔한 걸 살렸으니 좋게 써줄 겁니다.”
“그것도, 아니, 잘됐네요.”
돌아온 최윤이 윤설의 손을 끌어다 제 손목을 쥐게 했다. 아직도 놀랐을 거라 여기는지 이동하는 내내 그 모양으로 걸음을 맞춰준다. 보호받는 입장이라지만 가끔 성인 남자에게 베풀 법한 호의로는 과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아무래도 경험이 많아 능숙한 것이겠거니 하다가도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만 서툴다는 사실에 대한 민망함인지 최윤을 향한 부러움인지, 종종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그의 진짜 연애를 상상하고 만다.
사격은 그른 참이니 기분을 풀자며 옮겨 간 곳은 뜻밖에도 백화점이었다.
집에 좋아하는 컬렉션을 모아두는 건 봤어도 쇼핑 자체를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필요한 게 생겼냐고 물으니 데이트의 연장선이라 답할 뿐이다.
두 사람은 바로 프라이빗 쇼핑을 요구하는 대신 한산한 층을 천천히 돌았다. 자연스레 선호하는 브랜드가 있냐고 묻는 결에 돌아보니 선선히 웃고 있는 최윤과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경호원 두엇이 보였다.
윤설은 조금 앞서 걷다가 윤설이 가는 대로 따르겠다는 듯 반보 정도 뒤에 있는 최윤을 기다려 어깨를 가까이 붙였다.
“대표님.”
“네, 이쪽 라인이 취향입니까? 의외로.”
“직원분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음.”
“그러니까, 우리 계약에 대해서요. 정말 교제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까?”
“그렇죠?”
최윤의 긍정에 지난 일들이 스쳐 갔다. 어쩐지 최윤의 수하들은 윤설이 고용해 왔던 숱한 업계 사람들에 비해 정중한 면이 있었다. 부탁하지 않은 편의를 돌봐주거나, 무심결에 상사에 대한 질문을 하면 거절하는 법 없이 대답해 주고는 했었던 기억이 있다.
박 대표야 내막을 아는 사람이고 원래 어린것들을 기특하게 여기는 성격이라지만 그렇게까지 나이 든 사람들도 아니고, 시키니 한다기보다는 호의적인 태도가 다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태연하게 긍정하는 최윤을 보니 거의 확실했다.
“윤설 씨가 그런 질문을 하는 건 누군가 괜한 주접을 떨어서겠죠. 안 봐도 알겠습니다.”
“…단순 경호치고는 상당히 잘해주셨습니다, 다들.”
“아무래도 집안에서는 어르신의 늦된 자식이고 요란하게 연애한 적이 없으니까요. 불편합니까?”
“아니요, 아닙니다. 그래도 괜찮은가 싶어서 물었습니다.”
“직원들이 그러고 다니는 게 웃기긴 해도 남들은 더 잘 속을 겁니다.”
“대표님 만나는 분이 있을 때마다 이랬다면… 적응해야죠.”
“응?”
“네?”
느릿하던 걸음을 아예 멈추고 섰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복도 위에 구두 두 쌍이 나란히 멈춰있자 뒤따르던 사람들도 어중띤 거리에서 더 다가오지 않고 기다렸다.
최윤이 손을 내민다. 머뭇대며 손을 올리자 엄지로 손등을 쓸며 잠시 무슨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 그러다 문득 지분대듯 문지르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내 지난 연애가 궁금한가 봐요.
엉겁결에 아니라고 말한다는 게 왈칵 큰 소리가 나서 멀찍이 서있던 경호원들이 목을 빼고 이쪽을 살핀다. 최윤이 고개를 젓자 거짓말처럼 바른 자세로 돌아갔지만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가만 보니 서운한 사람처럼 말하거든요, 윤설 씨가.”
“그럴 리가요.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그냥 들은 걸로 판단했을 뿐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요?”
윤설은 이 목소리를 안다. 주로 윤설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끌어낼 때나 잠자리에서 주저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달래기 위해 나오는 자상한 목소리와 더디고 분명한 발음. 그것은 아첨이나 유혹을 건네는 사람들의 간드러짐도 없으면서 쉽게 속을 털어놓도록 만들었다.
어울렸던 사람이 제법 많았다는 뉘앙스의 풍문들과 오늘 들은 한 번뿐인 관계 등 윤설의 추측을 자아낸 단서까지 낯 붉히며 말하게 되는 지금처럼.
차분히 듣고 있던 최윤이 짧게 수긍하더니 그대로 손을 맞잡은 채 걸음을 떼었다.
“이해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나를 바람둥이에 호색한으로 보는 줄 알고 섭섭할 뻔했네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합니다.”
“그랬나요. 잠자리가 잦은 건 누구보다 잘 알 테고, 명오 그 미련한 놈 같은 경우는, 글쎄요.”
“…다릅니까?”
“마운팅 같은 겁니다. 조직 일만 보고 들어온 놈들은 동물적 서열에 쉽게 감화되거든요.”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제가 들어야 하는 이야기인지도 잘…….”
“마초적 조직 문화의 잔재인 셈입니다. 때려눕혀서 내 걸로 만든 직원들이 꽤 되고, 그래도 기가 안 꺾이면 가끔 명오 같은 일이 생기기도 해요. 나라고 그게 꼭 취향인 건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고용주는 어차피 운조, 아니면 대표님인데.”
“네. 칼로 쓸 놈들은 그렇게까지 꺾여야 배신을 ‘덜’ 합니다.”
“…….”
“딴에는 윤설 씨가 나를 무척 사랑한다고 생각했나 보죠. 직원 입이 경솔해서 신경 쓰이게 한 점 미안합니다.”
“둘만 남으니 저도 모르게 자꾸 쳐다보게 돼서, 그래서 그랬을 겁니다.”
그러니까 윤설이 바랐던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두 사람을 오붓한 연인으로 알아 생기는 일들이고, 이런 일이 짐작처럼 흔하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정확히 무어라 짚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오해했던 부분이 있는 듯했다.
사과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어물쩍 틈을 노렸으나 최윤은 보란 듯이 윤설의 귀에 입을 붙이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를테면 시계가 좋은지, 구두가 좋은지. 스타일리스트가 자주 입히는 옷은 모 브랜드의 것이 많던데 개인 취향에도 맞는지.
쇼윈도 너머로 호기심 섞인 시선들이 꽂히는 줄 모르지 않을 사람이 일부러 이런 행동을 한다면 장단을 맞춰야 한다.
이 이야기도 새어 나가서 좋은 기삿거리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일 텐데, 알고는 있는데.
윤설은 연인을 가장하는 표정만큼은 저기 서있는 백화점 직원들의 응대용 미소보다도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볼수록 효과적일 장면에서 벗어나 잠시 숨고 싶다.
“애인이 서운하면 안 되니까요. 겸사겸사 고르는 겁니다.”
“대표님이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걸로, 그것만 하겠습니다.”
“쇼핑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할 줄은.”
그 시간으로 충분했는지 자연스럽게 프라이빗 룸으로 안내받았다. 보여주기 위함이니 최윤이 쇼핑하는 김에 자잘한 소품 한두 가지 선물하는 그림이 될 줄 알았건만 아예 상하의, 구두, 시계나 장신구가 제각각 카트째로 들어오는 모습에 살짝 질려버렸다.
최윤은 아무렇지 않게 내주는 차를 홀짝이면서 반가워했다. 재차 고르는 걸로 하겠다고 하지 않았냐며 확인하는 순간 말실수였다는 후회가 밀려온다.
“시계랑 구두는 남들 보라고 사주는 거고.”
“…네.”
“옷은 망친 데이트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해요.”
“대표님 것은 안 하십니까?”
“다음에 윤설 씨가 골라줘요.”
빙글빙글 웃는 폼이 조금 들뜬 기색이다. 심각하게 날 섰던 장소에서 벗어난 지 두어 시간 만에 이렇게 될 수도 있나.
윤설이라면 하루 내내 이 일의 배후를 따지고 경계하느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꿈꾸는 듯 어지러운 느낌도 들었으나 고개를 끄덕이고 집중하려 애썼다. 원래 예쁜 걸 좋다 하는 사람이니까.
최윤은 직원들이 반듯하게 앉은 동행의 손목 위로 시곗줄을 대어볼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았다. 미사여구를 빼면 간결해질 제품 설명을 들으면서도 놓치지 않고 어울릴 만한 옷을 빼다 놓으라 지시하는 손이 바쁘고 눈이 바쁘다.
이런 식으로라도 재미있다면 다행이고, 이렇게라도 기운을 빼야 윤설을 덜 괴롭힐 사람이다. 인형 놀이 비슷하게 받아들이면 될 일일까.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피곤하면 내가 도와줄게요.”
“아니요, 다른 분들이 듣습니다.”
“아니라는 말만 다섯 번은 했습니다.”
구매 목록에 오른 셋업 수보다 입고 벗는 횟수가 배는 커졌다 싶자 그도 점점 힘들었다. 칸막이 뒤까지 따라온 최윤이 등 뒤에서 손을 뻗어 셔츠 단추를 마저 채워주고 가볍게 턱을 기대 온다.
남자는 모든 일을 너무나 쉽게 한다. 회유하는 목소리도 낼 줄 알고, 더없이 다정한 몸짓을 날 때부터 그랬던 양 베풀고, 어리광마저 그럴듯하게 섞으면 당해낼 수가 없었다.
“대표님이 놀려서 아니라고 하는 것뿐이지 거절한 적은 없습니다.”
“응. 들으니 좋네요.”
마지막으로 가죽이 부드러운 구두를 꿰신으며 은밀하고 정다운 쇼핑도 끝이 났다. 나올 때는 퇴근 시간에 가까워져 숱한 사람들의 눈빛과 소곤거림이 쏟아지다시피 했다. 기운이 쭉 빠져 차 안에서 잠들었는데 웬일인지 최윤이 깨우지 않고 그대로 우형이 기다리는 집으로 보냈다. 매일 안 좋은 일은 없었는지 돌려 묻는 우형을 알면서도 윤설은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한참 끙끙 앓기만 했다.
“야아, 무슨 일인데. 너 그 사람 변태인데 다 맞춰주는 거 아니냐? 그러다 큰일 나.”
“…아니야, 그런 거.”
* * *
윤설이 깔끔하고 개인 기호를 많이 반영한 것 같다고 부드럽게 칭찬했던 이층집에는, 그가 둘러보지 못한 지하가 한 층 더 있다.
그는 무슨 상상을 했었는지 은근히 부드러운 아이보리 톤의 벽지와 같은 값의 사치가 대리석 아닌 마루로 깔려있는 바닥의 색감에 놀라면서도 편안해했다.
추상화 대신 수련이 뜬 연못 그림이 벽면을 메운 계단 옆에서 걸음이 느려졌고, 한 톤 낮게 깔린 색감의 일관성 위에 게임 콘솔이 놓인 방을 보고는 웃었다. 아주 잠깐 스쳐 간 웃음이라 본인 스스로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지하의 어두움은 반기지 않을 테고 묵은 나무 냄새 사이로 빽빽한 와인병에 잠시 호기심은 가질지 몰라도 눈치를 살피며 돌아 나가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기꺼이 난잡함을 받아들이는 성향이었다면 셀러로 이루어진 벽을 지나 트인 자리에 놓인 카펫 위에 벗겨놓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찬 공기에 움츠러들 어깨 위로 값비싼 와인을 철철 부은 다음 아주 푹 취하도록 핥고 비빌 거라고.
황홀한 상상이었다.
[…기업가 2세와 공개 데이트, 백화점에서…….]
[유수 기업 간의 정략혼 가능성을…….]
[…운조의 편법적인 인수 합병 전략… 지분 관건, 합법적인 수단인지…….]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조간신문을 펼쳤다. 주요 신문사 연예란과 가십 위주 채널에 윤설과 나돌아 다닌 일들이 상세히 실려있었다.
반은 사실이고 반은 추측 혹은 달콤한 소설인 기사들을 보고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좀 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마음에 드는 얼굴을 떠올리며 훌훌 넘겨 보았다. 확실히 눈에 띄게 하고 다닌 보람이 있다.
부유층 자제끼리의 만남에 대한 선망, 스캔들이라고는 일절 없던 연예인에 대한 호기심에 백화점에서 누가 뭘 샀더라는 이야기까지 흘러나와 있는 글자들의 외침 속에 윤설의 유산 이야기가 슬쩍 발을 걸치고는 있지만 예상한 일이다.
최윤이 신문이며 패드를 차례로 내려두자 의자 뒤에 서있던 수하들이 엉망으로 구겨져 잠든 사내 둘을 깨웠다.
“그러다 아주 잠들겠다.”
“조심하겠습니다.”
살 부딪는 소리가 요란하기에 해본 농담에 넙죽 조심하겠다고 주억거린다. 폼을 보니 최윤이 그렇게 싫어하는 조폭 티가 안 벗겨진 모양이었다. 이내 이런 일을 하는데 허허실실 웃고 다닐 것도 아니지, 생각을 고쳐먹으려고 해본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으나 기력을 모조리 빨린 듯 헐떡이는 두 남자 모두 어제의 방해꾼들이다. 정신이 좀 든다 싶자마자 최윤을 향해 엉거주춤 무릎을 꿇고 각자 이만 보내달라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혹여나 달려들어 귀찮게 굴까 뒷덜미를 잡고 있는 수하들이 바투 당겨 목을 죄고 나서야 조용해진다.
“이미 다, 듣지 않으셨습니까…….”
“기, 기사도 말한 대로, 아니 원하시면 그냥 안 쓰겠습니다.”
“그랬죠. 그런데 벌써 좋은 기사가 많이 나왔지 뭡니까.”
하나는 허술해 보여도 제법 경력이 있는 청부업자였고, 하나는 이런 일에 처음 끼어든 기자였다. 재수 없게 같은 장소에 진을 치고 있다 꼬이는 바람에 발각되었다고 했지만 거슬러 가보니 결국 같은 의뢰인에게 이어질 듯했다.
기자는 둘의 사진 중 대충 우길 만한 장면을 골라, 윤설이 모종의 압박에 의해 끌려다니고 있다는 조의 기사를 내기로 했다 실토했다. 반면 업자는 최윤을 협박하라는 요구로 사전 조사를 하는 중이었다는 뻔한 고백을 했다.
아무리 몰라도 그렇지 국내에서 살인 청부 받으며 이쪽으로 이름난 집안들을 모르고 살았을 리가.
최윤은 그의 직업 정신만 인정해 주기로 했다.
“다른 기사를 쓰게 될 겁니다.”
“네, 네?”
“사회면을 쓴 적이 있던데요.”
기자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떨어대는 꼴에 가까웠지만 뜻은 분명해 보였다.
최윤의 신호에 나란히 꿇려 앉아있던 업자가 등을 차여 쓰러진다. 그 서슬에 지레 놀란 기자에게 천천히 설명해 주었다.
청부업자가 입을 열 때까지 험한 걸 볼 거다. 눈이 없다 여기고 작은 단어 하나 흘리지 말 것. 은성의 2세대들이 얼마나 무능했고 기회를 거저 날렸는지 되짚을 내용도 준비해야 한다.
“기자님한테 이런 일 맡길 때부터 구린 게 있다는 직감은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그냥 둬도 이렇게 인기 배우 연애사 미주알고주알 떠들려고 난리들인데 굳이 운조 일가 심기만 불편하게요.
물 한 모금 못 마신 기자는 최윤이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충 아무것이나 골라 딴 와인을 물 잔에 채워주자 그게 이 상황에서 구해줄 약인 것처럼 마신다.
나중에 목 찢어지는 갈증으로 돌아올 텐데.
최윤과 같은 생각인지 옆으로 쓰러진 청부업자의 눈에도 어이없다는 빛이 스쳤다.
“어디 가서 못 들을 이야기들일 테니 나 없을 때 이쪽 인터뷰 따로 하셔도 좋겠네요.”
돈깨나 있는 치들이 하잘것없는 치정사나 앙갚음에 사람 쓰는 사정 얼마나 재미있겠나.
바로 앉았던 최윤이 무심코 방만하게 기대어 앉으려다 딱딱한 의자를 밀어두고 아예 바닥에 앉았다. 제법 푹신한 카펫이 아직 잘 마른 그대로였다.
이제는 기자를 잡고 있던 수하까지 업자를 두고 작업할 태세다. 은퇴하기에는 너무 이르니 버티겠지만 며칠을 굶주리고, 자지 못한 채 손끝부터 깎이다 보면 생각을 고쳐먹게 될 터였다. 마음 편히 먹으라고 약도 하나 놔주었다.
최윤은 업자의 눈에서 풀려가는 이성을 붙잡느라 애쓰는 처절함을 보았다. 그 혼자서 사람 몰아보고 잡아본 운조의 개들을 뚫고 최윤에게 해를 입히려 했다는 농담보다야 무슨 말이든 그럴듯하게 들릴 것이다.
“악! 으아, 아… 아아악!!”
꼭두새벽부터 힘쓰는 직원들 나왔으니 아침이든 점심이든 넉넉히 먹으라고 카드나 들려줘야겠다.
맞는 사람, 우는 사람 따로인 광경에 시끄러울 것 같아 와인병을 근처 아무 곳에나 세워두고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역시나 제대로 된 소득 없이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직원들도 손을 털었고 최윤도 자리를 떴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안고 자던 몸이 없는 탓인지 잠이 부족하고 개운치가 않았다.
* * *
이번 촬영은 대본 리딩부터 분위기가 좋다. 캐스팅도, 제작 지원도 막히는 데 하나 없었다며 작가와 감독부터가 웃는 낯이니 자연스레 다른 사람들도 긴장이 풀려있는 모양이다.
나만 잘하면 다 잘된다.
윤설도 한결 마음이 편했다. 상대역을 맡은 배우는 조연 시절에 같은 작품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 대하기 어려울 일도 없고, 서로 연기가 안 돼서 혼자 끌고 가야 할 불상사도 없다.
오히려 낯선 것은 최근 꾸준히 나오고 있는 윤설의 열애사에 대한 반응들이었다.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아는 척은 안 하려고 하지만 웃고 있는 기색이 단순히 연예인을 두고 보이는 호불호와는 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다. 거기에 더해 잘 아는 사람들은 언제나 들을 준비가 된 사람처럼 불쑥 최윤에 대해 묻고는 한다.
“연애한다고 몸 관리 더 열심히 했구나?”
“아닌 거 알면서요, 선배.”
“알지, 수영 선순데. 그래도 뭔가 얼굴이 반질반질한 게 다르단 말이야.”
“관리실 궁금하신 거면 이따 알려드릴게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연애 이야기는 칼같이 자르네. 미안해. 자기 시계 이야기까지 기사에 다 난 판이라 괜찮은 줄 알았어.”
“아, 이거요…….”
합을 맞추다 쉴 타이밍이 되자마자 골리는 선배와 하필 붙는 신이 많았다. 근 10여 년 중 가장 많이 놀림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말마따나 차고 있는 시계가 최윤의 선물은 맞다. 그래도 기사가 나간 지도 보름은 지났고 우형이 그거 모셔둬서 뭐 할 거냐며 은근히 군침을 흘리기에 생각 없이 집어 든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
최윤을 만날 때나 성의 표시로 할까 했었는데, 팬이 준 선물 인증도 잘 하면서 이걸 안 하고 다니면 정말 눈치가 없는 거라고 얼마나 구박이었는지… 정말 그것뿐인데.
결혼한 지 이 년밖에 안 된 선배가 실실 웃으며 좋을 때라고 말하니 어이가 없었다.
남의 연애가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일까.
윤설은 그간 남의 연애를 보며 크게 궁금하거나 부럽다 느낀 적이 드물었다. 오히려 저렇게 일상 같고, 흔한 호감과 얕은 애정을 가볍게 소비하는 것보다는 더 깊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랑을 좋은 일로 여겼던 탓도 있다. 그도 변명이라 하면, 그냥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없었다.
말을 아끼는 윤설을 두고 어떻게들 생각했는지 이번 작품 연기가 잘 나오겠다고까지 한다. 정작 윤설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데 남들은 다 스토리 속 주인공처럼 막 사랑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남자와 같다고 박수 치니 꼭 다른 세상에 떨어진 듯했다.
“…그래도 애인이 잘해주는 사람은 맞지?”
“그럼요.”
최윤이야 언제나 계약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해주고 있다. 윤설이 생각하는 사랑을 했는지의 여부쯤 논외로 쳐도 여유 있고 좋은 매너를 발휘하는 시간에 녹아들다 보면 낯선 기분들을 마주하게 된다.
작은 일에 쉽게 민망하고 제 허술함이 부끄럽다.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다짐과 미리 그려둔 ‘연인 역할’ 대신 어쩔 줄 몰라 하는 윤설만 남는다.
그럼에도 나쁜 것은 없어 계약을 마치고 모든 일이 무사히 뜻대로 된 다음의 겨울이면 성공에 도취되어 더더욱 미화하겠지. 괜찮지 않을까?
오히려 떠도는 말 가운데 최윤이 은성을 손쉽게 먹어 치우려고 윤설을 낚아챘을 거란 가설이 끈질기다는 사실이 거슬렸다. 그 뒤에 숨어 안전하고자 꾸민 일이라지만 소문 속의 최윤은 윤설이 아는 바와 딴판의 무뢰한이었고, 저는 미련해서든 무서워서든 홀랑 넘어간 미련한 작자였기 때문에.
모 채널은 벌써 두 사람이 결혼한 뒤 부부 자격으로 합산했을 때 행사할 수 있는 은성 주가를 계산해 들먹이기까지 했다.
윤설의 일생 내내 그 대단한 유산을 놓고 사람을 굴려댄 쪽은 생판 모르는 남이 아니라 일가친척이다. 정작 당사자인 최윤은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틀린 말은 아니라며 웃어댔으나…….
“윤설, 차 바뀌었어.”
“…또?”
“어어. 박 대표님이 차 새로 보내줄 테니까 놀고 있으래.”
그런 소문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쪽이 있고 거기 편승하는 이해관계자가 있으니 이런 일도 생기는 것이다.
촬영이 끝나기 전 잠시 사라졌던 우형이 돌아와 윤설을 가로막았다. 또 누군가 차에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차바퀴에 문제가 생기는 건 우습고, 팬레터를 가장한 위험한 봉투들이 앞 유리를 가득 덮고 있기도 했다. 그걸 섣불리 치우려다 우형이 손을 되게 베인 적이 있었다.
차 안까지 작은 상자나 편지 봉투들이 굴러 들어와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어지러웠다. 막상 수거해 조사해 보면 별것 아니어서 신고하기에도 애매하고, 무시하자면 한 번씩 누군가 다치는 치사한 수법이다.
한동안 끊기다시피 했었는데 열애설과 함께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계속 겪는 일이면 무뎌질 법도 한데 지겹다는 표정을 짓는 우형보다 윤설 본인이 더 적응을 못 한다.
꼭 차 안에 들어있지 않아도 이런저런 경로로 들어오는 것들을 죄 내다 버렸다가 따로 전했다는 대본 수정본이나 집안에서의 연락, 오래된 팬이 보낸 수집품 따위가 끼어있어 민망했던 경험이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이다.
“이거는 네 전화 죽었을 때 쓰라고 받은 거.”
“고마워.”
“아까 알람 울려서 봤는데 최 대표 집으로 바래다준다더라. 나 그것만 봤다?”
“어, 괜찮아. 별 얘기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셔?”
모르는 새 핸드폰으로 발신 불명의 전화도 쏟아졌었나 보다. 이건 무섭다기보다는, 불편했다.
더 어릴 때에는 잠들기 시작할 즈음에 한 시간도 채 못 자고 깨워대서 아예 신호를 다 죽이거나 꺼두고 자버렸는데 그러고 나니 스케줄 연락에 혼선이 생겼다. 매니저들한테도 엉뚱한 연락이 가거나 해서 골탕을 먹다 보니 나중에는 같이 이동하는 팀 전원이 노이로제에 시달렸던가.
자꾸만 옛 기억을 상기시키고 싶어 하는 신호가 쏟아졌다.
참자.
윤설은 잠자코 기다리며 크게 호흡했다. 최윤을 끌어들인 것이 방해되고 당장 어쩌지 못하니 이런 낡은 기억으로 자극하는 게 분명하다.
견디면 된다. 인생 반을 버텼는데 일 년도 안 되는 남은 시간을 어쩌지 못하겠나.
조금 기분이 처져도 목적지가 자연스레 최윤의 집으로 결정되자 한결 나아졌다.
“너도 가?”
“아, 나한테도 알려줄 거 있대서.”
이런 ‘사소한 일’이 생길 때마다 거들어줄 경호 인력이나 차종을 일러줄 거라고 한다. 당연히 최윤과 둘이 본다고 생각했던 속내를 들킨 것도 아닌데 괜히 목 뒤가 뜨겁다.
요 근래 촬영 때문에 데이트도 약간 텀이 생겼고, 배려인지 바쁜 건지 섹스만 하려고 잠깐 데려가는 일도 없어서 자연스레 그쪽일 거라 짚었나 보다. 순 그것만 기다리는 사람도 아닌데.
윤설과 김우형을 직접 맞아준 최윤이 음료 몇 병을 꺼내 주었다. 아침 운동이라도 했는지 편한 차림에 씻은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 보이는 말간 빛이 돈다.
김우형은 집 감상보다 의외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금세 적응해 윤설에게 음료를 내밀었다. 어디에서나 어색함 없이 태연해지는 게 한결같아 픽 웃고 보니 최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
“좋은 건 뻔해요. 윤설 씨가 원하는 대로 되고 있다는 겁니다. 지라시에서 지면 기사까지도 얼마 안 걸렸고, 터지자마자 결혼이 어떻니 하는 걸 보면 다들 관심이 대단한 거죠.”
“나쁜 건 얼마나 나쁜 건가요?”
우형이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초조하게 물었다. 하긴, 최근에는 모든 게 잘되고만 있다고 자주 말했었다.
“…은성에서 윤설 씨 상해, 혹은 제거로 목표를 바꾼 것 같습니다.”
“그런…….”
“그래서 김우형 씨한테도 말해둘 필요가 생겼네요. 경호 팀 촬영장까지 붙일 겁니다. 얼굴 빠짐없이 익히시고, 교체 차량도 미리 목록 줄 테니 아무거나 받지 마세요.”
“네, 네. 그것만 하면 됩니까……?”
“다음은 제 일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 우형이 윤설을 돌아보는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일전에 마주친 적 있는 최윤의 직원이 굳은 낯으로 개를 병원에 보내야겠다 전했다.
최윤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침 잘되었다는 듯 우형을 그에게 맡겼다. 따라가면 필요한 사항을 안내해 줄 것이라고. 와중에 고양이에 이어 개도 주워다 입양 보내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좀 더 할까요.”
“왜.”
운을 떼었지만 생각이 뒤엉켜 혀에 감겼다. 최윤은 어떻게 알았는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왜 이제 와서 죽으라는 걸까요.”
“…윤설 씨는 이미 답을 압니다.”
안다 뿐인가. 이용 가치보다 손실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더하고 빼면 딱 떨어지는 결과처럼 분명하게, 윤설이 필요 없는 경쟁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명석한 두뇌는 여러 가능성으로 막힘 없이 뻗어 나갔지만 치미는 감정이 그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 이렇게 쉽게 손바닥 뒤집듯 할 거였으면 차라리 일찍……. 그런 마음인가 싶다.
“계약금으로 나한테 20퍼센트를 양도했죠. 그러고 나니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봐도 내가 유리해 보입니다.”
“그러라고 양도했습니다.”
“네. 남은 35억 정도까지 다 내가 받으면 그쪽은 보기 싫은 남매끼리 뭉쳐야 합니다. 얄궂게도 사 남매라 잡음도 많던데요. 각자 가진 거에 4분할로 가져봤자 주도권을 잡기는 어렵겠고.”
“…오 남매였다 줄어서 그 정도죠.”
“윤설 씨가 적극적으로 협상하며 누구 손을 들어줄 작자였으면 여기까지 끌고 오지도 않았을 테고요. 진작 서로 쏴 죽이든지 해서 둘쯤 남았으면 모를까, 괜히 어린 조카 휘둘러서 다 같이 외부 자금 끌어들일 작당이나 하다 이 꼴 난 셈입니다.”
윤설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어디에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살아왔는데 이 마당에 보이고 안 보이고가 무슨 소용인가. 최윤처럼 다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하기야 누가 보더라도 이미 상속분이 다 넘어간 뒤에 최윤을 상대하느니 윤설을 치우는 편이 쉬울 것이다. 만약 결혼한다면 둘 다 죽어야 둘 사이의, 혹은 최윤 가족으로 넘어가는 상속 관계를 끊을 수 있는데 어찌저찌 일을 맡겠다는 업자가 있어도 대가를 주고 나면 남는 게 얼마나 될까.
대상이 운조 일가다. 최윤의 외가 또한 지금도 지역 유지고 운조와 연을 맺은 만큼 뒷세계에 발이 넓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 뜻과는 상관없이 오가는 목숨이군요.”
“매 순간 괜찮은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가요.”
“그럭저럭. 나랑 거래도 텄고요?”
아주 해탈한 심정인 건지 더 충격받을 데가 있었던 건지 최윤의 말에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최윤도 마지막 말은 부러 장난스럽게 했다.
옆으로 자리를 옮기려 하기에 조금 비켜주고 무게감 있게 기대는 그의 허리에 가볍게 손을 두른다. 의지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따뜻한 체온을 붙들고 있다는 점이 윤설을 수렁에서 건져 올렸다.
“…이제 어떻게 될까요.”
“하던 일이 더 빡빡해지는 것뿐이에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은요?”
“옛날이야기를 해줘요.”
그 탓에 줄곧 얼버무리던 지난날들을 조르는 말에도 바로 거절하지 못했다.
옛날이야기.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만 끔벅이는 게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최윤은 눈가를 살살 쓸어주며 채근했다. 사귄 지는 오래지 않았어도 공유한 게 많은 것처럼 떠들고 다녀야 하지 않겠느냐며.
지금은 윤설이 마지못해 한두 가지 대답하고 다니는 질문이 전부라지만, 모이다 보면 어디선가 말 안 맞는 부분이 나올 수도 있다…고.
사실 그건 현재의 일이지 옛날 일을 꺼낼 일은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도 그럴싸하게 듣는 귀가 문제다.
“대신 대표님 이야기도 해주시는 겁니까?”
“그럼요.”
세간에 떠도는 것보다 자신이 더 많이 알아야 마땅하다는 이상한 논리가 당연한 전제처럼 가슴 밑에 깔려있기도 했다. 윤설이 겉핥기로 아는 바는 최윤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운조 일가 자체에 대한 무성한 소문뿐이라 직접 겪은 일을 제외하면 남이나 다를 바 없다.
그 아버지가 한 흉흉한 일들, 모친의 집안이 전근대 지주처럼 한 지방을 호령하던 실질적 권력이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회사를 설립하면서 보통의 방법대로 했을 리 없다는 추측과 작은 실화 몇 가지들이 집채만큼 불어나 있어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모를 그런 것들.
“먼저 물어볼래요?”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 집 이야기는 좀 지루합니다.
덧붙이는 말에도 윤설은 고개를 저었다.
아시다시피 제 이야기는 우울하잖아요.
그렇게 시작된 기억은 최윤이 학교에 들어갈 무렵으로 돌아간다.
“윤설 씨는 안 믿을지도 모르겠지만 사춘기 전에는 예쁜 아이였답니다.”
“…네. 박 대표님이 자랑하셨습니다.”
박 대표는 썩 객관적인 편이 아니니 논외로 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다 머리 한번 쓰다듬어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물론 박 대표나 달리 붙어 다니는 사람들이 눈을 부라려 아무도 그런 짓은 못 했다.
중년에 기대도 않던 자식이 똑 떨어졌는데 그렇게 말쑥하게 생겨 부친이나 그를 모셔온 소위 조직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고, 웃기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아주 어렸을 때는 납치 따위의 일이 생길까 봐 사립 유치원도 안 보냈고 놀이 친구라는 게 순 재미없고 칙칙한 삼촌들, 커다란 개였는데 그 탓인지 어린애가 좀 맹랑하고 깔끔떠는 구석이 있었다. 지금에 와 보면 그냥 타고난 성질이 그래먹은 것이다.
직원들 중에 가정을 꾸린 치들도 꽤 있었으나 다들 애들이 제법 커서 이렇게 어린아이를 좋은 시절에 키우려면 어떤 방법이 적당한지 잘 몰랐다. 아무튼 부와 인력을 동원해 여러 가지로 해주려고 노력은 했던 것 같다는 게 최윤의 회상이다.
“그래서 대충… 열둘인지 열셋까지는 예쁘고 작은 도련님, 험한 일은 보이지도 않고 곱게 키워도 조숙한 말깨나 잘해서 기특한 자식으로 있었는데요.”
“네.”
다 고만고만한 어린 생각들로 가득한 초등학생 시절을 평범하게 보내고 중학교로 넘어가면서부터 안팎으로 무언가 달라지는 걸 알았다고 한다.
그냥 삼촌들 일한다는 걸 넘어서 키만 껑충하게 자라기 시작한 최윤이 납치당하는 일도 있었다. 당연히 눈앞에서 바짝 쫓아온 ‘삼촌들’과 납치범들 사이의 주먹질이며 칼질을 목도하게 되었다.
집안이 발칵 뒤집히며 하나뿐인 도련님이 못 볼 꼴을 보고 얼마나 무서웠겠나 절절매었지만, 그때 저는 멀뚱멀뚱 실려 와 밥 한 그릇 싹 비우고 곤히 잤더란다. 사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내심 무섭기는 했었다.
“무서웠지만 곧 나한테 믿을 구석이 많다는 것도 알게 됐죠.”
“보통 그 나이 애들은 울었을 겁니다.”
“보통은, 네.”
다른 무엇도 아닌 생생한 폭력들이 자신을 지키는 걸 몇 번이나 보았다. 불공평하게도 폭력은 최윤에게 거의 항상 도움이 되는 수단이었다. 폭력의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는 일은 누구도 가정하지 않았으며 겪을 일도 별로 없었다.
당연히 아버지와 따르는 사람들의 힘 때문이었지만 그 자신도 마찬가지임을 알게 된 게 또… 대강 몸이 자라기 시작한 중학교 끝물 정도였던 듯하다.
“예쁜 아이인 것도 참 좋았는데 그 시절이 끝났지 뭔가요.”
“잘 상상이 안 돼요.”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본가에 가서 생각나거든 훔쳐볼까요.”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에는 사진이나 영상이 도는 것으로 외모가 특정되던 때였다. 최윤은 어디를 다녔든 단체 활동 사진에서 빠져있었다. 가족들과 찍은 것도 다 부모님 손에나 있지 꽁꽁 싸매 숨겨두었다. 그래봐야 24시간 마크해서 경호받는 어린애라면 신분이 뻔한데도 유별난 보호였다.
그러다 최윤이 급작스레 키도 몸집도 커지기 시작한 때부터는 어쩔 수 없이 범상치 않은 소문이 돌았다. 남들보다 월등히 크고, 또래답지도 않고, 부유한 듯하면서 정작 알려진 게 없는 튀는 놈이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제법 집안 괜찮다는 놈들이나 주먹 쓴다는 놈들이나 삼삼오오 모여있다가 최윤을 걸고넘어졌다. 지금보다 조금 더 성질이 홧홧했던 최윤은 숨 쉬듯 익숙한 폭력을 흉내 내어 응수했다.
“말하고 보니 내 학창 시절이 너무 질 나쁜 것처럼 들려서 하는 말인데, 먼저 건드린 놈들만요.”
“괜찮습니다.”
나중에는 건드리는 놈은 없었지만 그런 집 자식이라더라, 그래서 저렇다더라는 소문이 짜했다. 그때부터 짜증이 붙어서 담배를 태웠다고 심드렁하게 말하며 담뱃갑 모서리를 톡톡 건드린다.
수습 가능한 선에서 신나게 치고받고 다니는 한편으로 이제 운조의 길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박혔으니 나름 좋은 계기였다고 포장도 한다.
큰 선물을 받았던 어린 날의 욕망은 그냥 몸을 따라 커지기만 했을 뿐 갈 길을 몰랐는데, 머리 굵어질수록 날것의 폭력으로 헤쳐 갈 수 있는 길과 그것만으로는 발 들이기 어려운 길이 따로 있더라. 최윤은 소위 양지의 인간들이 바르게 살아가는 척하며 흔드는 권력도 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외를 붙여달라고 졸라서 좋은 대학에 갔고 평범하거나 잘사는 집 아이들의 관심사, 그 애들을 둘러싸고 흥행하는 사업들이 무엇인지 보았다. 2세, 3세들의 인맥 반, 개인적 협박 반으로 대면하며 입만 털어대는 사기꾼 가운데 전문가를 골라 사업 방향을 틀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고루한 방식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양친이나 오래된 간부들도 시대가 바뀌는 물살을 느끼고는 있었다. 알고 있었으나 과감하게 따라가기에는 미지의 영역이었고, 밟아온 길의 향수와 문화를 사랑했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아직도 불만인 쪽이 있기는 합니다. 아주 우아한 방식으로만 법인 전환을 한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집안싸움 같은 일은 없었던 모양이네요. 다행입니다.”
“비슷한 건 있었는데, 이겼습니다.”
이겼으면 그만이라는 듯 웃는 얼굴이 약간은 자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극상 비슷한 거라고 설명해 준다. 다리에 길게 난 흉은 그때 생긴 것이라고.
윤설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던지 콧대를 건드리는 손가락이 여러 번 닿았다.
최윤의 몸을 어루만지고 핥을 때 오래 머무는 곳이었는데 정말 그런 이유로 남았을 줄은.
몰랐다기보다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최윤은 그걸 두고 상처 핥아주는 커다란 개 같다고 귀여워했지만 누가 봐도 아파 보이는 흉이다.
“말했잖아요. 재미없는 이야기만 있다고.”
“그래도 말해주시는 게 좋습니다.”
“사업 초반까지 같이 하고 유학 갔습니다. 필요하기도 했고, 여기저기 들쑤시다 보니 얼굴 팔리는 게 순식간이라.”
“그러면 일 말고… 다른 일은 없었나요?”
다른 일.
윤설이 묻고 싶은 건 그가 내려놓은 대학 생활을 최윤이 하려고 했을까 같은 사소한 것이었다. 일만 했다기에는 자유분방한 면이 보이고 하니 낯선 이국 거리를 한쪽 주머니에 손 찔러 넣은 채 휘적휘적 돌아다니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가 사귀어야 하는 사람들과 술도 마시고 여흥을 즐기는 그런 막연한 모양들. 어쩌면 방탕한 유흥과 조금쯤 길게 사귄 여자 혹은 남자로 채워졌을 청년기의 앞부분.
또다. 윤설과 관계없는 과거 최윤을 스쳐 간 사람들을 멋대로 생각하고 속이 울렁인다. 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살가웠을 최윤과 그들에게도 주어졌을지 모르는 그의 이야기들.
윤설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최윤이 드물게 눈을 크게 뜨며 짓궂게 물었다.
“거기서는 칼 안 맞았냐고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총 맞을 뻔한 적은 있습니다. 약 사고팔고 하는 사람들 생리도 보았고, 미술관이나 경매장에도 많이 갔고……. 가끔 밀수품 들이고 싶어서 손쓰다 눈에 띄는 짓 하지 말라고 혼났고.”
“잘 상상이 안 돼요.”
“어르신은 그냥 한두 번 말씀하시는데 형이나 누나한테 걸리면 되게 귀찮아요.”
떠올리기만 해도 질린다는 얼굴이다. 그러면서도 윤설이 조금이나마 웃으니 자연스레 목 안쪽으로 입술을 대며 옷 안으로 슬며시 손을 밀어 넣었다.
배를 쓸다가 손톱만큼씩 가슴께로 기어오르는 작은 움직임에 아주 거절하지도 못했다. 소심하게 운을 떼봐야 ‘그래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는 좀…….’ 하는 게 다였다.
이제는 이야기보다 살냄새에 더 집중하는 듯한 최윤의 기색에 뒷말을 재촉하기도 애매해 잠시 침묵만이 남았다. 윤설은 과민하게 굴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경고했다. 스킨십은 삽입을 피하는 중에도 해왔고, 지금도 싫지 않다.
오히려 조금…….
“윤설 씨는 어땠나요, 어렸을 때?”
“평범했습, 으음, 생긴 건 많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최윤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다.
“지금이랑 비슷한데 평범했다고?”
“자라기 전이니까요.”
채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들 이목구비는 구분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투다. 이번 것은 내심 억울한지 입술 끝을 물고 있다.
최윤은 그 모양을 보고 웃음기를 거두었다. 손길도 따뜻하게 맞닿은 데서 더 나아가지 않고 그친다. 윤설은 이를 아쉬움보다는 배려로 생각하려 했다.
“…가족들 다들 인물이 좋은 데다, 버릇 나빠지기 쉬운 건 삼가는 분위기였습니다.”
윤설은 둘째 딸 부부에게서 난 자식으로, 유달리 자녀 소식이 없던 은성 오 남매 가운데 가장 처음 난 손주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다들 젊었고 무엇보다 조부의 자리가 굳건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집안 인물 잘 빼닮았고 숫기는 좀 없지만 의젓한 부잣집 아들. 은성을 알든 모르든 대강 그렇게들 알고 있었을 것이다. 윤설이 그렇게 말해도 최윤은 남들 생각은 달랐을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튼, 나쁜 게 없는 어린 시절이었다. 어른들은 엄하고 지켜야만 착한 아이인 것들이 많아 질문도 많았다. 좋은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양친의 소망과 어린 윤설의 바람은 같았으나 어디까지나 어린애한테 어디까지 좋은 사람이어도 되는지, 어떤 태도여야 하는지는 어려웠던 탓이다. 똑똑하니 금방 외웠지만 이해는 문장 그대로 새기는 것과 다른 일이다.
최윤의 어린 시절이 그랬듯 주변을 지키는 사람들도 꽤 있었고 친구들도 양친이 만나는 가족, 인원이 고만고만한 교육 시설 비슷한 형편의 아이들이었는데 왠지 남의 일처럼 무감했다.
“그러니까 정말로 별난 점 없이 환경이 좋았던 것뿐입니다.”
“그러면 재미있었던 때나 남들과 다르다 싶었던 건 언제부터입니까?”
사실 얼굴을 가장 잘 가리는 건 어린아이들이니 그때부터 인기가 많지 않았나. 누구라도 남들이 호감을 갖고 대하는 태도는 금방 알아챈다. 특히 어린아이라면 그런 관심과 애정에 더 돋보이고 싶었을 나이다.
틀에 박힌 교육을 받아 겉으로는 반듯한 부잣집 자제들 사이라 몰랐다 해도 의무 교육 과정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최윤은 콩알만 한 꼬마들도 주관이 생기면 무슨 데이니 하는 기념일에 초콜릿이니, 빼빼로니 챙기는 세상에서 윤설의 책상과 사물함이 터질 듯 꽉 차있었을 거라는 데 피어싱 하나쯤은 걸 수 있었다. 하이틴 로맨스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들이 윤설의 십 대에는 더러 있을 수 있는 일이었을 터다.
최윤은 일찌감치 커버리는 바람에 겪었던 적 없지만, 외모가 반듯하거나 호감 상인 놈들이 학년 올라가면 신입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구경을 왔다가 다람쥐처럼 도망간다든지 농구나 축구라도 한다 치면 학처럼 두드러지는 그 애가 속한 팀이 이겨야 하는 소란쯤 곧잘 구경했다.
덜 자란 윤설과 셔츠 위로 타이가 반듯했을 교복 차림, 들뜬 듯한 공기 속에서 혼자 눈만 껌벅였을 장면이 절로 떠오른다.
“…아무래도 2차 성별자 판정이 나온 이후였죠.”
“…왜, 어린 친구들은 남들한테 없는 특별한 점에 쉽게 감탄해서요?”
“그렇다기보다는, 특별하다기보다… 뭐라고 해야 할지.”
그러나 그런 장면들이야말로 최윤이 상상하는 평범하게 행복한 청소년기인 것이다. 윤설이 말을 고르는 동안 가만히 배를 토닥여 주니 손 안으로 꽉 쥐고 누를 기세였던 손톱 끝이 도로 밀려 나왔다.
오늘도 손톱을 바짝 잘라 둥글게 다듬은 모양 그대로였다. 힘주어 잡아끈 다음 동그란 가장자리를 매만지자 새삼 윤설이 쑥스러워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살살 눈치 봤으면서 손끝은 꼬박꼬박 다듬는 이상한 성실함에 웃으려다 참는다. 때가 때만 아니라면 놀렸을 텐데.
“부모님은 알파라는 걸 기뻐하셨지만, 알려지는 건 원치 않으셨어요.”
“이해합니다. 번잡스러울 일이 더 많잖아요.”
“그래서 제가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는데 특별한 애들 틈에 끼어있어야 한다는 게 좀, 이상한 기분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냥 똑똑한 정도, 몇 가지 선행 학습이 빠른 정도에 그쳤던 교육이 영재와 천재들의 영역으로 옮겨졌다. 그들만의 평범이라고는 해도 비슷한 애들끼리 집안 자랑이나 새로운 장난감을 자랑하던 가운데서 윤설만 똑 떨어져 오로지 뛰어남이 지표인 곳으로 갔던 때에는 조금 투정도 했었다. 그냥 다니던 곳 다니고 싶다고.
천재들은 나이를 따지지 않아 윤설과 비슷한 어린애들도 있었고 이미 사춘기 지난 티가 나는 애어른들도 있어 더 그랬다.
“윤설 씨 부모님은 자식이 다방면으로 뛰어난 이유가 ‘알파’이기 때문이라고 본 거네요.”
“네. 알파들이 가진 속성이 그렇다고들 했어요.”
“그냥 윤설 씨가 똑똑하고 다재다능한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최윤의 상식으로는 2차 형질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하게 천재니 뭐니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통계가 의미 있는 건 수많은 표본에서 얻어낸 확률로 결과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인 줄 알지만 알파와 오메가의 세계는 성질 하나가 정의하는 바가 너무나 많았다.
양친이 미남, 미녀면 자식도 어여쁠 확률이 높겠지. 하지만 꼭 그러라는 법 있던가.
작게 웃기까지 하며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 윤설을 보자 왠지 짜증이 치밀었다.
“여러 분야를 배우는 건 좋은 경험이었어요. 솔직히 내용은 흥미로웠는데, 분위기가 버거웠던 것 같네요. 지금 말하다 보니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좋아했다는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나라면 좀이 쑤셨을 것 같거든요.”
“그런가요?”
“지금도 그렇잖아요?”
쭉 과속이 허용된 영재 교육의 틈에서 주는 건 모조리 꾸역꾸역 삼키며 자랐을까.
다니던 학교와 어울리던 친구들 말고 또 무엇이 달라졌냐 물으니 윤설이 곰곰 생각한다. 먼 기억도 아닌데 말을 골라내는 듯 사이사이 짧은 침묵이 자리하곤 한다.
“주기적으로 약을 먹게 됐다는 점도 다르네요. 러트나 호르몬 과잉을 제어할 수 있도록 먹는 건데, 장기 복용해야 안정적입니다.”
“거르면 느낄 수 있을 만큼 불편합니까?”
“…네. 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 제일 힘듭니다.”
“부작용이 없는 것이면 좋겠는데.”
“모든 2차 성별자가 먹는 거니까요. 아마도… 아, 그리고.”
“응. 계속해요.”
손톱 끝에서 그 아래 살, 파고들 듯이 미끄러져 손바닥 안을 살살 긁는 행위에 그제야 의식한 듯 내려다본다. 그래도 허리에 두른 팔을 풀지 않아 살갑게 웃어주니 눈꺼풀이 내려가고 속눈썹이 팔랑대었다.
최윤은 윤설이 이럴 때면 언제까지고 어설퍼도 가르칠 수 있겠다는 기분이 된다. 보기에 즐거운 아름다움은 무엇이고 그를 관대하게 만들었다.
윤설은 손바닥 안을 긁는 최윤의 손가락을 살며시 잡고 한층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는 교육이 있는데 다른 애들이 배우는 것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혼란스러웠군요.”
“네. 수가 적어 자손을 보기 어렵다는 사실에 실망하는 알파나 오메가도 있었고요.”
“윤설 씨는 어땠어요?”
“남의 일처럼 머릿속에 넣었던 것 같습니다.”
페로몬이라는 게 있고 알파나 오메가들 사이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 형질의 강도에 따라서는 상대에게 무형의 쇼크를 줄 수도 있고, 성적으로 어필하거나 러트―히트 때 굉장히 유리할 수 있다.
그런 지식들을 우주처럼 먼 이야기로 대충 욱여넣고 이해한 것처럼 끄덕였다. 하지만 끝끝내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어떻게 생존과 연결되지 않는 본능이 나를 지배할 수 있지? 어떻게 그것만으로 호감이 결정되지?
윤설은 그 이론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티 낼 수는 없었다.
절로 심각하고 불퉁해진 얼굴에 가벼운 입맞춤이 쏟아졌다. 볼이며 입가, 콧잔등 위로 뜨겁고 마른 입술이 닿아 도장처럼 온기를 남긴다.
윤설의 짐작에는 최윤이 저를 위로하거나 귀여워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성적인 의도도 없다면 더더욱 겪을 일 없던 접촉에 얼굴이 풀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 중 하나인 것 같다.
잠시 멈추었던 손이 범위를 훌쩍 건너뛰어 팔꿈치 안쪽에 닿았다. 무른 살이 있는지 가늠하듯 지그시 눌러보는데 전보다 근육이 붙어 다행이다.
“…혹시 그 성교육에 실습도 포함됩니까?”
“설마요. 아닙니다, 절대.”
“비슷한 부류를 만날 일이 극히 드물지 않습니까. 자연스럽게 알 기회가 희박하니 혹시나 했어요.”
“그런 만큼 조심스럽죠. 같이 수업을 듣는 것도 계속 돌아가며 다른 애들과 들었어요.”
“친해지면 덧나나.”
“위험해요. 러트나 히트가 온 이상 애들로 쳐주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한마디로 사고 칠까 봐 잘 붙여놓지 않았다는 말이다.
2차 성별자들의 세계란 머릿속에 그 생각뿐이었던 고교 시절 남학생 반처럼 묘하게 들썩거리고 눅눅한 열기를 갖고 있었을까. 아무리 애들이 발랑 까진 세상이래도 그렇지, 무슨 열대여섯들 가지고.
다 윤리관이나 상식이 어떻든 애가 애를 가질 수 있는 탓이다. 페로몬이 절대적인 어떤 인류에게는 그걸 잘 다루지 못하고 몸만 커가는 때 잘 잡아놔야 사회적 인간이 되니 그랬을 거라는 등 합리적인 이유는 넘쳤다. 드문드문 받은 조사 자료와도 다르지 않다. 그냥 이해하든 말든 그런 세계가 있는 것이다.
최윤은 사전 조사한 것과 일치하는 부분을 넘기며 윤설의 가슴 위로 머리를 기대었다. 억지로라도 숙여 붙으면 끙끙대며 받아주는 사람이니까.
“피곤하세요?”
“요 며칠은 윤설 씨가 더 바빴죠. 그런 것보다…….”
“네. 혹시 운동하다 다치셨어요?”
“윤설 씨는 자꾸 내가 다치는 생각만 하네요.”
“직원분들이 유능하신 줄은 알지만… 너무, 다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시잖아요.”
“내가?”
“네. 아무리 건강해도 처음부터 안 다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최윤은 차마 윤설을 올려다보지 못하고 두 눈을 끔벅이다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윤설이 제 정수리만 보고 있기에 망정이지 표정 관리 할 자신이 없다. 금이야 옥이야 길러졌던 십 대 이전에나 들었던 말이지 누가 최윤더러 몸 사리란 말을 할 수 있나.
행적도 안 알리고 다니는 버릇을 고치라고나 했지, 아무도 일방적으로 당해서 다칠 걱정 따위 하지 않았다. 사뭇 진지한 게 주야장천 곱씹던 멍든 손목을 다시 떠올리는 모양인데 그런 건 ‘다친다’의 축에 끼워주지도 않을 생채기다. 윤설의 상식은 확실히 좀 이상하다.
“…주의하겠습니다.”
“아픈 건 누구나 같으니까요.”
“알겠어요. 내가 멀쩡해야 윤설 씨를 무사히 돌봐주죠.”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알죠. 내가 궁금한 건, 윤설 씨가 배운 걸 어떻게 써먹는지 같은 건데.”
“…….”
“해봐요. 지금.”
“아는 거 없습니다. 대표님이 다 알려주셨으니까…….”
“나는 막 배웠거든요. 정말 궁금해서 그래.”
잔소리를 피하고 싶을 때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게 빠른 길이다. 난데없이 십 대 때 들은 성교육을 실행에 옮기자는 요구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기색이 가늘게 떨리는 눈가에 그대로 비친다. 이런 사람이 배역만 주면 연기를 한다.
최윤은 구겼던 몸을 일으켜 윤설의 턱에 입 맞추었다. 사뭇 단호해 보일 만치 굳게 닫힌 입에 군더더기 없이 떨어지는 선임에도 귀염성 있는 남자다.
너무 몰아세우지 않으려 차분히 보고 있자니 조심스레 저를 가둔 팔을 그러쥔다.
“소파는 안 돼요.”
“하하하.”
어차피 승낙 아니면 거절인데 과감함의 이유가 의외다. 이제는 집 구조를 제법 안다고 반걸음 정도 앞서 침실로 이끄는 행동을 본인이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개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그랬죠. 지금은 병원에 보냈습니다.”
그러니 정말 둘뿐이라 재차 답해주었다.
최윤은 윤설이 이끌어주는 대로 침대에 앉았다가,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 천천히 넘어가 주었다. 등을 대기 전에 상의를 벗어 침대 밖으로 툭 던지자 윤설의 눈썹이 위로 들렸다. 벗은 몸을 수없이 봤는데 새삼스레 놀란 것처럼.
일부러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올리고 최대한 무해해 보이는 얼굴을 해보지만 언제나 입이 문제다.
“벗겨주는 것도 포함인가요?”
“…아니요.”
이쯤이면 윤설의 기호가 벗겨주는 쪽에 있는지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던데.
기억을 되짚으며 긴장한 볼을 살살 매만져 주었다. 어차피 관계의 끝까지 주도할 거란 기대를 하는 것도 아니니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다.
“어떻게 시작합니까?”
“…보통의 알파와 오메가라면 서로의 페로몬으로 상대와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듭니다.”
“분위기 잡는 커플들이 향초 피우는 것처럼 생각할까요?”
“아마도요. 조금 더 직관적이고 강한…….”
“마약?”
“안 해봐서 모르겠습니다.”
“안 하는 게 나아요. 그리고?”
“만지고, 닿는 건 대표님이 알려준 것과 다르지 않을 거예요.”
그간의 관계에서는.
윤설이 다소 긴장한 듯 순종적이고 떨리는 목소리를 냈을 때조차 문장이 분명했고 크기는 작지 않았다. 언제나 감정을 명확히 전달하는 배우의 직업병 혹은 본인의 상태를 알려야 하는 사명인 양, 나중에 흐느껴 애원할지라도 흐렸던 적은 없다. 그 목소리가 낮게 잦아들며 최윤을 안심시키려 조곤조곤 순서를 전하고 있다.
어깨를 어루만지고 얼굴 곳곳에서 뼈와 근육의 도드라지는 곳을 건너며 내려가는 시선 역시 나름의 절제 안에 있다. 완급 조절을 해줄 사람이 없으니 애쓰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가슴 위로 오르는 손바닥에는 열이 올라있다. 다른 손은 아랫배 위를 배회하며 하의 속을 헤치고 싶은 듯 허리께에 걸렸다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아시다시피 아이를 가질 기회가 드물어서, 마음에 드는 페로몬이라면 상당히 쉽게 흥분하고.”
“또 윤설 씨는 예쁘니까요.”
“…외모도, 네. 호감의 조건이고.”
내리까는 눈을 따라 올올이 드리운 속눈썹을 보고 예쁘다, 여긴 순간에 데워진 숨이 배꼽 아래로 고였다. 부드럽게 가슴을 주무르는 손 위에 파르라니 돋은 핏줄과 머리카락이 배 위로 닿는 것만이 보인다.
코를 묻고 숨을 쉬는 간지러움에 아랫배로 힘이 들어갔다. 감질나는 순간이었으나 최윤은 인내했다. 처음을 떠올리면 배우는 속도가 빠른 편이라 칭찬이라도 해야 맞다.
잠자코 있으니 윤설이 한 손으로 더디게 버클을 풀고 반쯤 내려간 옷 사이로 볼을 댄 채 외운 것을 풀어놓는다.
“성적으로 흥분하면 신체 특성상 남성체든 여성체든 오메가는 몸이 쉽게 젖고 열려요. 그런데 2차 성별자가 아니라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일은 없으니까… 조심하는 게 맞아요.”
“아아, 그래서.”
“당연하지만, 체격 차이가 크게 나면 알파와 오메가 관계여도 다치기 쉽고요.”
새삼스레 불경한 말을 외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가 붉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최윤의 다리에 젖은 입술을 문지르고 안쪽 살을 머금어간다.
바지런히 움직이는 덕에 흥분은 멀어도 차츰 나른해져 가는 감각에 몸을 맡기며 답을 찾았다. 긴장과 쾌감 사이에서도 신체적 차이를 크게 의식해서 시키는 것보다 오래도록, 공들여 애무했다면 말이 된다.
고개를 들고 흘끔 눈치를 살피는 윤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안심한 듯 고개를 박고 애초부터 버릇을 그렇게 들여놓은 사람처럼 혀를 내어 회음부를 길게 핥는다.
그러고 보니 이 짓도 처음 두어 번만 놀라서 호흡이 짧았지 잘한다 잘한다 하니 흐무러지도록 빨아댔다. 아는 게 그뿐이고 최윤의 만족이 즉각적이라 매달리는 줄로만 알았다.
“손으로, 해요. 나한테 말하고 있잖아.”
“조금만……. 조금만 풀리면요.”
하게 해주세요.
한숨처럼 속삭이는 말에 아래로 열이 확 몰렸다.
시팔,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나.
입 안을 물었다 놓으며 신음했다. 그걸 또 칭찬으로 들은 것처럼 다리 사이에서 핥는 소리가 질척했다.
뭘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는데 방법은 최윤에게 겨우 배웠고 정도는 아직도 모른다. 괘씸죄라도 묻듯이 다리 사이를 조이자 코와 입에서 뜨거운 숨이 가빠졌다. 놓아주자마자 등이 부풀게 산소를 채우면서도 억울한 눈을 하고 본다.
“윤설 씨가 내 밑을 핥는 이유의 반은 세이프 섹스를 위한 노력이다, 이건 알겠고.”
“후으, 후욱, 네…….”
“반은 내가 그걸 좋아하고요.”
“네, 아, 좋아요…….”
본인이 좋다는 건지 모호한 말을 하면서 눈가가 촉촉해져 있다. 마음 약해지게 하는 미인계가 따로 없다.
최윤은 상체를 반쯤 일으켜 윤설을 끌어당겼다. 뭐라고 웅얼대면서 끌려오는 몸이 품에 가득 차고도 조금 빠듯했다.
올라붙은 성기끼리 맞닿아 제풀에 더 크기를 키우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놓아주지 않고 집요하게 윤설의 입술을 물며 답을 재촉한다.
“…쾌감이 크거나, 착상을 원하면 노팅이라는 걸 해요.”
“음, 그래서요?”
“그러면 평소보다 끝이, 여기요, 여기가 커져서 안 빠지는데.”
“…끝내주네.”
“히트 기간의 오메가…도, 받기 버거우니까, 으음, 흑…….”
“여기만 그렇게 커진다고요?”
“모릅니다, 아, 자꾸 만지면.”
짐승의 발정기에 비슷한 현상이 있다고 들었다. 최대한 많은 씨를 퍼붓기 위해 입구에 걸리고 쉬이 빠지지도 않게끔 흉하고 끈덕지게 들러붙는 좆이라니 윤설의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그 부조화가 문란한 상상을 부추기기도 했다. 지금도 손안 가득 찬 좆 머리가 더 커진다고. 벅찰 것 같기는 했다.
“나한테, 그럴까 봐 무서워요?”
“아, 하, 아아, 네, 네. 안 돼요.”
“왜. 아무리 싸도 무슨 일 안 생겨요.”
해봤잖아요.
윤설을 흉내 내어 조근조근 일러주듯 말해보았다. 어째서인지 얼굴까지 붉어져서 벗어나려 끙끙대길래 손톱 끝으로 귀두 끝 틈을 쓱 긁자 숨 쉬는 것도 멈추고 허리를 떨었다.
손바닥과 배 위를 적시고 색색거릴 미인을 상상하니 즐겁기만 했다. 최윤을 찾아내자마자 명운을 건 과감함이 일생 마지막이었다는 것처럼 구니.
“나랑 할 때 그렇게 좋아요?”
좋겠지.
동정이었는데 경험 많은 상대를 만나 어지간한 건 다 하고 있는 참이다. 눈동자가 큼직하니 시선이 떨리는 것도 훤히 보인다.
윤설이 일정치 못한 호흡을 뱉으며 품 안에서 버둥대었다. 그럴수록 틈 없이 들러붙어 비비는 일밖에 안 되니 최윤도 기분이 퍽 좋았다.
한참 놀리고 싶은데 타고난 기운이 좋은 데다 최근에 운동까지 해서 정작 중요한 데 쓸 체력만 까먹을 것 같다. 오래 끌지 않고 재미 볼 궁리에 말이 없다가 몸을 굴려 윤설을 아래 두었다.
“후우, 근육도 빨리 붙나 봐요. 살짝 무거워졌네.”
“그만, 놔주, 흐으으, 세요, 아아…….”
“대답, 안 했잖아요. 구멍에 그렇게 꽉, 처박고 싶어서 무서워요?”
“흑, 흐, 아니, 아니야, 안 돼…….”
“좋은 방법이 있는데.”
아니라는 사람치고는 아랫배에 피 몰려 힘 들어가는 게 눈으로도 보인다. 성벽이 독특하다면 독특할 수도 있겠다.
최윤은 방 안을 훑다가 마땅한 게 없어 협탁 위를 뒹구는 케이블 몇 개를 한꺼번에 쥐고 둘둘 감았다. 윤설의 양 손목을 침대 헤드에 걸어 묶고, 사람 잡을 때처럼 빡빡한 매듭을 정성으로 지었다.
빠르게 눈이 깜박이는 윤설의 배를 토닥이며 안심시킨 뒤 살짝 손을 잡고 당겨보니 흡족할 만큼 단단했다.
“이러면 윤설 씨가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당신 위에 앉아서, 할 테니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겨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최윤은 윤설의 배 위로 쿵 내려앉으며 엉덩이를 앞뒤로 문질렀다. 제대로 싼 것도 아닌데 꽤 척척했다.
입술을 문지르자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입을 헤벌리고 불쑥 침범하는 손가락을 빠는 모양에 나쁜 짓을 한다는 기분이 든다.
이러면서 누가 누굴.
어찌 보면 가소로운 생각이다. 입에 뭘 물려주든 타액을 흘려가며 머금는 순종적인 미인이 얼마나 배덕감을 주는가. 최윤은 종교가 없어 다행이었다.
“잘 봐요. 내가 구멍 쑤시고 벌리는 거 봐도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더 힘든 줄 알아야지.”
곤혹스러워하는 얼굴에 애처롭게 호소하는 눈빛이 더 보고 있으면 마음만 약해질 성싶었다. 최윤은 일찍이 자비와 동정이란 쓸모없다 배웠으나, 그도 윤설도 몸을 섞으며 들인 습관이 있었다.
닿는 것이 급할 때, 처음의 망설임은 잊은 듯 다리 사이로 혀를 미끄러트리고 싶을 때, 덜렁거리는 무게가 묵직해서 아프겠다 싶을 만큼 흥분한 좆을 주체 못 할 때 윤설이 이런 눈을 하면 최윤은 기꺼이 몸을 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 좋은 버릇을 도려내는 게 더 중요하니까.
목을 가다듬으며 허리를 말고 구멍 주변을 슬슬 문질렀다. 흠뻑 젖은 손가락이 다 저 반들반들해진 입술에서 묻어 나온 타액 때문이라 반찬으로 썩 좋았다.
입구 옆을 지그시 눌러보다 하나를 쓱 밀어 넣고 안에서 원을 그려본다. 확실히 일정 기간 이상 두고 보는 파트너라 그런지 윤설의 흥분한 얼굴, 꿈틀대는 몸을 보기만 해도 아래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듯 반응이 빠르다.
시선을 맞춘 채 어렵지 않게 두 번째 손가락을 넣고 느리게 쑤석거리자 윤설이 저가 삽입당한 사람인 양 미간을 구겼다.
“그렇게, 막 하면…….”
“안 아픕니다.”
내 몸인데 내가 모를까.
윤설은 입술을 물면서도 고개를 돌리지는 못한다. 최윤은 윤설이 무의식중에 드러내는 욕망 그대로 음담패설을 뱉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물론 어울리지 않았지만 흥분을 부추기기에는 좋아 내벽이 손가락을 꽉 물었다가, 움찔대는 결에 끝이 자극점에 닿았다.
목 안으로 삼키는 신음과 절로 문질러지는 하반신에 윤설이 묶인 팔을 움직였다. 움직이려다 실패해서 또 촉촉한 눈으로 바라본다.
최윤은 잠시 손가락을 빼고 상체를 숙여 붉어진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색색 새어 나오는 숨이 꼭 엎치락뒤치락한 끝에 패배해 쓰러진 사람의 씨근거림과 닮았다.
볼을 비비다 입 맞추고 일어나는 손에 협탁에서 찾아낸 젤이 들려있었다. 어차피 남지도 않을 거, 뚜껑은 대충 던지고 다리 사이로 듬뿍 짜냈다.
“대…표님, 차가워요…….”
“…금방 따뜻해져요.”
다리 사이를 빠르게 흘러 구멍 위로 고이고, 남은 것은 최윤이 깔고 앉은 윤설의 배 위를 흥건히 적셨다. 그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회음 주변의 젤을 긁어 손가락과 함께 깊게 밀어 넣는다.
손목을 돌려가며 살짝 넓혀가다 세 개째, 최윤으로서도 살짝 버거워 숨을 끊어 뱉으며 넣고 나니 주름이 팽팽해진 듯했다. 엉덩이에 닿은 좆의 부피감을 보면 한껏 벌리고 하나쯤 더 넣어야 할 것도 같지만 이 정도가 최선이다.
“으음, 읏, 윤설, 여기 봐.”
“아, 흐윽, 대표님, 저 이거, 흑…….”
“봐. 이렇게, 벌리고, 후으, 흔들어야… 들어가…죠.”
“제가요?”
“그러면 매번 내가, 할까요?”
젤이 녹아 물처럼 번들거리는 회음부와 한껏 벌어진 구멍 사이로 손가락이 푹푹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찌걱대는 소리 사이 흐느끼듯 신음하는 윤설을 아래 두고 있자니 덩달아 열이 올라서 보란 듯이 넓히기만 하던 걸 그만두고 자극점을 참아 거침없이 찔렀다.
윤설은 최윤이 느끼며 소리 낼수록 부끄러워함과 동시에 흥분하는 편이었다. 엉덩이 밑에 가엾게 눌려있으면서도 마찰과 신음성에 질금대는 좆을 보면 분명 그랬다.
끊어지는 숨 사이로 쉼 없이 일러주었다. 물고 빨고 혀를 넣는 건 전희나 후희로 아주 좋지만, 그다음 당신 좆을 넣었다가는 피를 볼 거라고.
섹스 중 상대가 어떻게 될까 전전긍긍하는 윤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 모양이다.
그 물건 가지고 그런 생각을 왜 못 하나. 그러니 무서워 말고 잘 배워야지.
연이어 속삭이는 말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 착해요……. 아…….”
“큭, 하, 아, 아아, 대표님, 저.”
“아, 하아, 아, 흑.”
뒤로 손을 뻗어 윤설의 허벅지를 짚고, 딜도라도 잡고 있는 것처럼 빠르게 손목을 터는데 성에 차지 않았다. 당연히, 팔딱거리는 아름다운 몸과 넣고 숨만 쉬어도 뿌듯하게 차던 물건을 두고 제 손으로 교육 영상이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침대 헤드를 당기며 버둥대는 탓에 윤설의 살갗에 자국이 남을 것 같다. 언젠가 말했듯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깔고 뭉개면서 쾌감을 느끼는 수거 못 할 변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윤설은 그만큼이나 크고 잘 빚어져 적당히 단단했고 들이받을 힘도 있는 상대라 그런지 굴복시킬 때마다 즐거웠다. 전에는 다 알아서 맞춰주는 상대만 만나서 새삼스러운 걸까.
미지근한 쾌감에 어느덧 젖은 구멍에 드나드는 소리와 윤설의 앓는 소리만 남는다. 어차피 그나 최윤이나 제대로 맞대면서 뺄 일이니까 개운찮아도 될 일이다.
“아……!”
“이런 걸로 쌌어요?”
그래서 제대로 쓸어준 적도 없는 윤설의 좆이 왈칵 정액을 쏟자 당황스러웠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경험상 최윤의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것은 또 울상 짓겠다는 안타까운 예감이다. 지난 세월 자신의 자제력을 철석같이 믿고 살아왔는데 와르르 무너져 버린 걸 보고 만 사람처럼 눈썹이 처진다.
“…아무튼, 봐요.”
“대표님.”
“피하지 말고.”
이런저런 액체로 젖은 손을 윤설의 가슴에 문지르며 다리 사이를 가리킨다.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도 시키는 대로 제 배 위에 얹힌 최윤의 몸, 붉어진 채 벌름이는 구멍을 보고 입이 벌어진다.
“내 느낌에는 상한 데가 없는데.”
“네, 그거는 대표님이 요령이 있으시니까.”
“그냥 쑤시기만 했는데. 봤잖아요, 못 간 거.”
“…….”
이 마당에도 자기가 뭘 하면 어떻게 될까 봐.
최윤은 윤설의 사정으로 젖은 엉덩이를 살짝 들어 대충 위치를 잡았다. 살면서 이렇게 불면 날아갈 몸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어 대놓고 묻고 싶다가도 이왕 경험을 택한 것, 끝까지 괜한 말은 말아야지 다짐한다.
“말 탔던 거 기억해요?”
“네, 기억해요, 으음.”
윤설이 묶인 손을 활짝 폈다가 쥘 곳이 없자 허공에서 꾹 말아 쥐는 걸 보며 끄트머리를 맞추었다. 부드럽게 빨려 들어갈 듯하다 귀두 끝에서 멈추고 한 번 깊게 숨을 내쉰다. 언제 사정했나 싶게 다시 발딱 일어난 좆이 턱 걸려서였다.
“…큿…….”
“읏, 좁아, 안 들어가요.”
“그럴 리가, 가만히, 흑, 후우…….”
철제 헤드가 덜거덕대며 흔들린다. 발로 시트를 긁는 소리가 들리고, 쾌감과 괴로움 사이를 오가는 윤설의 얼굴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했으나 끝까지 닿도록 내려앉을 때는 절로 고개가 넘어갔다.
그대로 둘이서 숨이 모자란 사람들처럼 가슴이 들썩인 채 말을 잃었다. 좀 버거웠지만 남김없이 들어찬 느낌이 좋았다.
윤설은 감당을 못 하고 있었지만 허리가 뒤틀렸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데 참느라 애쓰는 게 분명했다.
시험 삼아 아래를 살짝 조이자 입술을 물고 고개를 돌리는 모양이 열 살쯤 어린 애를 잡아 나쁜 짓 하는 기분에 빠트린다. 최윤에게도 이런 식의 정복욕은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되짚을 새도 없이 반쯤 쾌감에 들떠 가볍게 들썩이고는 윤설에게 주문했다. 말이 빠르게 걸을 때를 떠올리라고. 통통 튀며 흔들리는 등 위에서 허벅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던 날, 그 눈썹 길고 잘생긴 말처럼 태워달라 했다.
“대표님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배우는 사람 눈높이에 맞추느라요.”
말은 그렇게 해도 제대로 된 비유였는지 윤설의 허리가 적당한 속도로 툭툭 치고 올라왔다. 자기 흥분에 못 이겨 앞으로만 밀어붙이지 말라고 했던 건 기억하나 보다.
최윤은 이성의 불이 깜박이며 흐려지는 눈을 집요하게 마주한 채 녹아내리는 신음 소리를 냈다. 언제나 절박하고 숨이 가빠 매달리는 윤설의 울음에 비하면 무척 느긋하고 달았다.
“헉, 대표님, 하, 으, 너무 좁은데, 흑, 흐으으…….”
“좋다고요, 알아, 아, 아아…….”
“더, 더 들어가고 싶, 헉, 더요…….”
이미 내려앉고 쳐올리는 박자가 얼추 맞아 끝까지 들어갔는데도 조르는 말이다. 최윤은 그걸 좋아 죽겠다는 표현으로 알아들었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아슬아슬하게 숨이 깔딱 넘어갈 것처럼 전신으로 퍼지는 자극이 절정을 예고하고 있었다. 혼자 하지 말라고 얼러놓았기 때문에 한계까지 참고 있을 뿐이다. 꽉 물면 극점에 닿아 문지르고 있던 좆이 한 번 더 깊게 들어오는 감각이 흔한 것은 아니었다.
“좋아, 아, 아, 대표님, 저어, 싸고 싶 ,큭, 어…….”
“참아요, 아직, 아, 아……!”
“후우, 후으, 저, 그만, 그만.”
눈앞이 희부옇게 흐려졌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윤설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최윤이 앞뒤로 흔들어댔고, 둘 다 어느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음이 느껴졌다. 발가락이 곱아들고 팔뚝 위로 힘줄이 도드라지더니 마침내 문이 열린 것처럼 서로의 배와 가슴 위로 말간 액이 흩뿌려졌다.
오르내리는 가슴이나 떨리는 허벅지 사이로 구르는 정액을 보며 간신히 마른 입술을 비볐다. 잠시 흥분이 한풀 가시기를 기다려야 하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최윤의 엉덩이 사이로 물이 줄줄 샜다.
“…지금 계속 싸는 거예요?”
“아니, 아니에요. 아닌데, 너무, 흣.”
넣고 있는 채 남은 떨림을 어쩌지 못해 몸을 조금씩 치댔을 뿐이다.
반면 윤설의 몸은 아직도 근육이 떨리며 연신 구멍 안에 분출하는 액체가, 흐르다 못해 시트를 적시고 있었다. 최윤마저 그 순간 영문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아래를 보다가 이내 픽 웃었다.
“윤설 씨 분수 터졌네.”
“이상, 안 멈춰요, 빼주세요.”
“손, 위로 들어서 힘줘요.”
당황해서 버둥대는 윤설의 팔을 잡고 수직으로 들어 올리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헤드 일부가 들렸다. 설마했는데 기운 하나는 남부럽지 않다.
“앞으로만 당겨서 그렇지 윤설 씨 힘이면 진작 빠지고도 남았어요.”
“…….”
“억울해요?”
“아니요, 대표님 이거 닦아드려야 하는데…….”
“후희라는 게 있다니까요.”
“아, 네, 네.”
“윤설 씨가 언젠가 이상적인 사랑을 한다고 쳐요. 그래도 너무 정직하게 힘으로 밀고, 끝나자마자 정리해 버리는 남자면 뺨 맞지 않겠어요?”
“…맞습니다. 죄송해요.”
하얗게 질렸다 터질 듯이 붉었다 하는 것이 감정을 알리는 신호등 모양이다. 덜렁거리는 케이블과 침대 부품을 질질 끄는 손을 추스르지도 않고 최윤의 낯빛을 살피더니 또 제풀에 귀가 붉어지기도 했다.
더 두고 보고 싶었으나 천천히 손목을 풀어주고 살갗을 쓸었다. 벌건 자국은 있지만 까지지는 않았다.
“잘 참았어요.”
“…….”
“날 다치게 할 기회는 많았는데 어쨌든 안 했고.”
“제가 어떻게요.”
“안 한 거고, 둘 다 기분 좋게 해도 안 다치는 거 확실하게 알겠어요?”
“…네.”
“당신이 좀 많이 튼튼하고 힘이 좋긴 한데, 보통 사람이라고 설탕 인형 같은 것도 아닙니다.”
“…네.”
“질문 있어요?”
얼떨떨한 눈치지만 금방 알아들은 눈이었다.
명석함과 똑똑함, 총명함은 다 같은 말이면서도 조금씩 엇나가게 다른데 최윤이 보는 눈에는 이따금 채 죽지 않은 총명함이 스쳐 가곤 했다. 나쁜 일일지언정 가르치는 보람이 있게.
“한 번만, 더 해봐도 될까요?”
“원하는 만큼도 괜찮은데.”
“안아주세요, 대표님.”
당장 뿌리까지 뜯어 들어낼 수 없는 게 인식이고 습관인데도 금방 팔을 벌려 엉겨 오는 몸과 또렷해진 발음에서 느꼈다. 적어도 최윤은 그가 욕망한다 해서 망가뜨릴 수 없는 상대임을 알았을 터다.
꽉 안은 채 모든 생김을 알아야겠다는 듯 어루만지는 손길이 묶여있던 서러움의 토로 같아 잘게 웃었다.
아래가 뭉근하고 느린 박자로 오르내리며 잔물결로 오는 쾌감을 전해준다. 최근을 생각하면 드물게 적극적인 태도가 귀엽게 보여 가슴팍에 이를 박았다.
마주 앉은 채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깊이 파고드는 아래와 신음 대신 입 안을 채우는 혀를 얽어 ‘한 번 더.’를 말하지 않을 때까지 한 몸처럼 붙어있었다.
* * *
“냄새 봐. 질식하겠다.”
“씻었는데요.”
“대표님 말고.”
창문이 반틈 열려있고 청정기도 돌아가고 있었지만 방에 들어선 이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표정 관리를 잊을 만큼 강한 정사의 흔적이라기에는 최윤의 차림이 그럭저럭 멀끔한 한량 같았다.
시트는 갈아야 하고, 지쳐 잠든 남자의 몸도 닦아야겠지만 그보다 먼저 방문객을 불러야 했다.
“어떻습니까?”
“알파 냄새가 진동을 해요. 대표님 몸에서도 아주…….”
“아. 페로몬인가, 그거.”
“운조 빌딩 입구에 있으면 1층 모든 사람들이 다 알 만큼 쏟아부었거든요.”
“그런 게 가능합니까?”
“강한 인자, 강한 의지, 충분한 접촉과… 쉽게 말하면 영역 표시 같은 걸 했다는 거예요.”
“자기 의지로?”
“보통은요. 너무 경험이 없어서 조절을 못 했다면 몰라도.”
문간에 기대 더 들어오려고 하지도 않는다.
최윤은 남자에게 다가가려다 멀찍이서 손수건만 던져주었다. 그가 냉큼 낚아채 코와 입을 가렸다.
페로몬이니 뭐니 보지도 맡지도 못하는 최윤의 입장에서는 둘이 짜고 치는 사기라고 하면 차라리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질색을 하는 모습을 보니 생리적으로 거북하단 말이 거짓은 아니었으나, 최윤은 부를 때 미리 양해를 구했으니 더 미안해하지 않았다.
그저 쉬지 않고 의문을 던져 남자의 혼을 쏙 빼놓을 작정인 양 군다.
“데이터도 확실하고, 본인도 약을 먹고 조절해야 할 만큼 확실한 신체 반응도 있고, 그를 통해 알파나 오메가를 낳고 싶은 치들이 줄을 섰다면서요? 뭘 더 확인해.”
“다 기록과 정황이니까요. 내가 물었던 것에 대한 답은 어떻습니까.”
“…알파―오메가 인자가 약한 상대라면 이 사람 페로몬으로 충분히 강제할 수 있겠네요.”
“정신적으로나 성적으로?”
“네.”
“오메가는 보통 어떻습니까. 페로몬을 빼고 봐도 알파랑 붙어먹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거나… 뭐 그럴 만큼 약한가요? 그런 자료는 없던데.”
“무슨. 억지로 하는 게 아닌 이상 그럴 일 없어요. 그건 오메가여서가 아니라 원래 작고 약하게 태어난 거겠지.”
“음.”
“…나가서 이야기하면 안 됩니까?”
“그래요.”
전에 없이 예민한 반응이라 문을 닫아두고 나섰다. 부른 건 툴툴대는 남자뿐인데 아래층 응접실에 주인처럼 앉은 불청객이 하나 더 있었다.
흘끔 옆을 보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자기가 무슨 힘이 있냐 웅얼거렸다. 운조 일가의 검은돈을 쥐고 있는 누님이 팔짱 끼고 버틴 모습을 어여쁜 미인과 질펀하게 뒹군 다음 보기에는 좀 편치 않았다. 반쯤은 남자의 방문을 청한 시점에서 예고된 방문이었대도 그렇다.
“윤이 잘 지냈니.”
“예에.”
“경이는 표정이 왜 그렇고.”
“봐달라는 사람이 보기 드문 종자더라.”
“그게 그렇게 중요하던?”
“죄송합니다.”
누님, 최영이 부드러운 놀림처럼 말하지만 그 아래 힐난이 담긴 것을 알고 바로 사과했다.
“네 정보원들이 부족한 탓에 내 사람이 고생을 했구나.”
“그렇다고 일면식 없는 2차 성별자를 잡아 올 수는 없잖아요.”
“말은 잘한다.”
“나한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는데 애인을 모르는 놈 앞에 돌립니까.”
“…그럴 수야 없지.”
더군다나 최영은 어쩌면 최윤보다 더 자기 사람을 보호하는 데 열성인 사람이었다. 과거야 어쨌든 알파니 오메가니 하는 일 잊고 편히 사는 누님의 애인을 불러다 한바탕 뒹군 알파의 향을 감별해 달라 했으니 실례는 실례다.
윤설의 입장이나 2차 성별자 납치가 아주 민감한 건이라는 부분을 감안하면 달리 수가 없어 누님이 접어주는 것도 맞다. 최윤은 누님 대신 그의 남자에게 성의 없이 윙크하는 시늉을 하며 누님 몰래 한몫 챙기라 권했다.
“어때?”
“경의 말로는 자기 의지가 있으면 2차 성별자를 상하게 할 수는 있다네.”
“그것도 판단이 흐려지거나 속수무책으로 발정하는 거지, 상해까지 될 리가 없습니다.”
“결론은 똑같잖아? 뭐 하러 오라고까지 해.”
“하도 발발 떠니 확실하게 찍으려고 그랬지.”
계속 추가되고 있는 자료로는 윤설의 강박을 이해할 만한 보편성이 발견되지 않았다. 알파나 오메가의 일반적인 생리, 행동 양식으로 자기 짝을 다치게 하는 관계란 매우 드물었다.
원치 않는 상대와 관계하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최윤과는 어쨌든 자의로 섹스에 응했고 어쩔 줄 몰라 그렇지 반응도 충분했다. 자기 욕망을 주체 못 한다는 사실에 심하게 부끄러워하기는 하지만.
엄살, 앙탈이 심한 거지 만족스러운 성생활인데 딱 하나 못 넘기는 게 설탕 인형 공포증이다. 백 날 천 날 역사를 거스르고 세계를 뒤지라 해도 모자랄 것 같아 오메가를 만나 듣는 편이 빠르겠다는 판단이었다.
오메가인 경도 판정 인자 100퍼센트 수준의 강한 알파를 본 적은 없으니 반신반의하고 응했으나, 결론은 없다.
“왜 입질도 제대로 못 하면서 남 다칠까 걱정이지.”
“은성이 애를 잡아가면서 키웠나 보지. 많이 예뻐해라.”
“그거야 누님이 말 안 해도 잘하고 있네.”
“퍽이나.”
최영의 눈빛에는 막냇동생을 향한 애정과 더불어 약간의 한심함,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렇게 노래를 불러도 애인이라고 칭한 적 한 번 없다가 요란하길래 다들 궁금해했단다.
까고 보니 은성 잡아먹으려는 작정이라 잘 키운 독한 자식이라 했고, 그래도 제법 살뜰하다길래 다시 보는데 하자 있는 알파라니 영 마음에 안 찼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경은 옆에서 차로 입가심을 하고 나서야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무슨 생각인지 가라앉은 그를 본 최영의 눈길이 더 매서워졌다.
빨리 쫓아내야지 윤설이 깨면 뭐라 할 말도 없겠다.
“내가 짚이는 건 하나야.”
“뭔데.”
“애인은 다치게 해도 싸우고 마음 아플 일이지만, 손님은 다치게 하면 벌이 돌아오지.”
“…….”
“…….”
담담하게 말하고 있으나 표정이 사라진 얼굴을 영이 쓰다듬다 이내 어깨를 안았다. 내 앞에서 무슨 유난이냐고 하려다 최윤 역시 말을 잃고 곰곰 생각에 잠긴다.
손님을 다치게 하면, 벌을 받는다.
그 옛날 조직들이 빚으로 묶어 억지로 주저앉힌 남녀 접대원들이 텅 빈 눈으로 늘어서 있던 주홍빛 거리 사이에 경도 있었다. 없었던 것으로 치는 기억이 손등을 타고 기어오르며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래. 거기 귀한 출생을 감당하지 못하는 가난한 집 알파나 오메가도 간혹 있었지.
윤설의 강박이 길들여진 그들과 닮았다고 하는 것이다.
모욕이라 해야 할까? 화를 내야 하나.
누구한테.
“나는 대표님 덕에 영을 만나 잘 살고 있으니까 까놓고 말하는 거야.”
“…그으래. 고마워.”
“듣고 잊어줘. 별거는 아니니까.”
“약속할게.”
최윤은 경을 두 번 보았다. 한 번은 열댓쯤 되는 어울리지 않는 나이였고, 그다음은 새파란 스물이 좀 넘어서였다.
그가 싫어하는 눅눅한 공기와 질척한 분위기가 365일 안개처럼 깔려있는 주홍빛 거리를 몇 번 가지 않은 탓도 있지만 그때 경은 이미 나이가 제법 됐다. 누가 겨우 서른 될까 말까인 젊은이를 두고 나이가 됐다고 하겠느냐마는 거리 안의 상품들 중에는 많았으니 저도 그런 줄 알고 있었다.
운조가 다른 조직에게서 업장을 통째로 빼앗아 새로운 주인이 됐을 때였다. 회장이나 터울 많이 지는 손위 남매들, 따라다니고 보살피고 지키는 인력 모두가 막내 도련님에게 그런 곳을 굳이 보이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하필 최윤을 보필하던 조의 중간 머리가 거리를 책임지게 됐기 때문에 생긴 불상사였다.
다른 일을 맡고도 남을 자들을 최윤 곁에 많이 붙였기 때문에 언젠가는 있을 일이었지만, 최윤은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래, 살뜰한 내 손발이 맡은 중요한 일이 뭔지 구경이나 하자 그렇게 박박 우겨서 가고 말았던 것이다.
긴 거리가 온통 등 아래 늘어선 영업장 아니면 그네들 숙소다. 앳되거나 과하게 성숙해 보이는, 날씨에 맞지도 않는 차림 위에 대충 겉옷을 걸친 ‘직원’들이 가지각색의 가게 앞에 늘어서서 숨죽이고 있었다.
새로운 주인이 관대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불안이 그득그득 깔려있거나 아예 아무것도 없거나. 최윤은 그런 눈빛들을 몇 차례 보았지만 다글다글하게 모인 것들이 다 그 모양인 광경은 처음 보았다.
박 대표, 그때는 박 실장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빼앗긴 수족이 재미도 없이 힘들기만 한 일이나 맡게 된 것 아니냐고 툴툴댈 정도였다.
‘도련님은 들어가시래도요.’
‘보고.’
‘우리 도련님이 이런 거에 눈길 갈 나이가 되기는 하셨어도…….’
‘관심 없어. 저기는 뭔데 따로야?’
거리의 사람들은 어두운 빛 슈트를 입은 까마귀들 눈치를 보았고, 까마귀들은 뒤에 세운 도련님이 뭐라 할까 귀를 젖히고 있을 때였다. 눈썰미 좋은 최윤이 영업장 한군데를 콕 찍어 뭐가 다르냐고 묻는다. 나름 다양한 취향에 맞춰 제각각 꾸려진 곳들 사이에 거기만은 직원들 생김이든 나이든 일관성이 없었다.
‘저기는, 알파나 오메가만 받는 뎁니다.’
‘완전 불법이네.’
‘예? 예.’
‘돈이 더 된대?’
‘워낙 찾기 힘드니 값은 더 받는답니다.’
그것으로 운조 이전에 거리를 휘어잡고 쥐어짜던 조직의 계산이 설명되었다.
최윤은 그냥 관심을 껐다. 보통 사람의 윤리관은 운조에서 자란 그에게 무용했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사업은 최 회장 손짓에 달린 것이라 당장 제 곁을 떠나는 수족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다.
2차 성별자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조차 구하지 않고 홀랑 팔아넘길 정도로 박복하거나 짐승 같은 부모를 만나 여기까지 흘러왔나, 신변 가지고 귀찮은 일 생길 수도 있으니 관리에 신경 써야겠다, 그런 감상이었다.
하여, 경의 삶은 몇 년간 크게 달라질 게 없이 흘러갔다. 그 안에 있는 알파나 오메가는 페로몬 조절을 위한 약을 먹을 수 없었다. 오히려 러트나 히트를 비정기적으로 자주 불러오곤 해서 특별한 맛을 찾는 손님이나 주기를 맞은 2차 성별자의 수요를 채워줘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발정하거나 각성 상태인 만큼 자연히 페로몬에 과민하거나 둔해졌다. 페로몬 조절하는 법은 배웠다가도 잊을 판이었다.
모두가 과하게 페로몬에 노출되어 있고 쉴 새 없이 손에 쥐고 있어야 할 페로몬을 아무렇게나 흘렸다. 그런 상태를 두고 업자들은 팔팔하다는 말로 포장해 팔았다.
낮에는 죽은 거리에서 몸을 추스르고 밤에는 웃을 일 없어도 웃는 모양을 하고, 어떤 날은 손이 매서운 손님을 만나기도 한다.
그보다 더한 괴로움은 반강제로 들쭉날쭉한 신체 반응으로 곧잘 충동적인 행동이 튀어나오는데도 얌전하고 순종적으로 굴어야 한다는 모순에서 온다.
어쩌다 적극적인 상대를 선호하는 고객이 든 게 아니라면 계산 없이 저지른 행동들이 하나의 장부가 되어 빚을 받으러 오곤 했다. 보통 장사가 파한 뒤 모두가 듣는 거리 가운데서, 정도가 심한 날에는 숙소에 자던 비번도 매 맞는 소리에 깨게끔.
그런 아슬아슬한 균형은 한쪽으로 기울어 쓰러지기를 택하기 마련이다. 견딜 수 없어 괴로운 감정과 폭력이 밖으로 향하면 맞거나 약에 취해 널브러졌고 안으로 향하면 자해였다. 멋대로 신체에 흠을 내는 일이라 들키면 또 같은 처분이 반복된다.
가까스로 거기까지 가지 않고 버텨도 늘 머릿속 요란한 줄다리기에 온갖 생각이 뒤섞여 녹아내리는 상태로 깨어있다.
깨어있으되 맨정신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타고난 본성이 있는데 아무것도 순리대로 되지 않고, 지나치게 자극돼 있는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면 또 맞게 될 거야. 약을 맞고 좀비처럼 텅 빈 눈깔로 비척대게 될 거야.’
‘벌써 몇 번째야? 쟤 잘 감시해. 또 저딴 자국 남기면 너랑 같이 묶어서 두들겨 패기 좋아하는 변태 새끼 받을 테니까!’
그 거리에 있는 자들 모두 그러하듯이 몇 안 되는 알파와 오메가들은 조용히 망가져 갔다. 누군가는 자신의 형질 자체를 혐오했다.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오히려 페로몬에 휘둘려야 한다니 얼마나 비참한가.
왜 멸종하다시피 했는지 알겠어. 이건 희귀한 체질이 아니야!
경도 조금쯤 공감했다. 한편으로는 정신 못 차리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다른 사람들과 한데 묶여 벌받는 날도 많아져 다 같이 죽어버렸으면, 아무에게나 기도했다.
최윤이 성인이 될 즈음, 전부터 말이 나왔었지만 정말로 거리를 밀어버리고 추접한 욕망을 돈줄로 모시는 너저분한 일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새것들이 들어설 거라는 신호가 곳곳에서 보였다. 빚이 없는데 묶여있던 자들은 적당히 다른 곳으로 나가 불안한 사회 적응을 하게 될 거라 했고, 빚이 남은 자들은 무엇이든 쓸모를 찾아 재배치됐다.
경이 생각하기에 최윤의 의외로운 점은 낡은 접대원들의 쓸모를 한정 짓지 않는다는 거였다. 체격이 괜찮은 자들은 비루먹었어도 먹이고 굴려서 운전수로라도 부리게 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영업장이 망하면 ‘직원’들은 다른 영업장으로 팔리거나 더러 마음에 들어 하는 고객에게 넘겨지기 마련이었다. 그도 그런 방법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다.
‘운조는 그쪽 일에 손 뗄 거라서.’
다만 2차 성별자들에 한해서는, 본인 밑으로는 안 들이고 상관없다는 형제들 밑으로 넘겼다. 어디에서든 부릴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 했고, 심약하고 더 안 좋은 미래만 상상할 줄 알던 알파와 오메가들은 나아진 처우에 쉽게 순응했다.
어차피 일자리는 또 필요하고, 나가도 정 붙일 데 없으니까.
주홍빛 거리는 쉽게 허물어지고 쓰레기 치우듯 약간의 재고도 없이 싹싹 닦였다.
‘그쪽은 장부 볼 줄 안다던데.’
쓸모를 가늠하던 최윤과 눈이 마주친 두 번째 조우. 그로 인해 남은 삶이 바뀌었다.
최윤은 호의도, 배려도 없이 냉정하게 판단했을 뿐이지만 순간의 처분으로 자신은 시체가 될 수도, 아예 기능을 못 하는 오메가로 2차 성별자의 사형 선고를 받기까지 더 질 나쁜 곳에 넘겨질 수도 있었다.
새로운 삶에는 진창으로 빠지는 길도 없고 시종 진동하던 페로몬의 영향도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듯했다. 애초에 아주 희소한 체질이니까 안 보이는 게 당연하고, 자신처럼 운 나쁘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부모가 잘 보살펴서 기관의 도움을 받고 있을 게 당연했다.
그래, 그게 보통이지. 당연히.
“…정략혼도 고려했으면 페로몬 조절제를 끊지는 않았을 거야. 때려서 길들이지는 않았겠지. 아니, 회복력이 보통 이상이면 또 몰라.”
“약은 잘 먹고 있다고 하던데. 맞은 건, 글쎄.”
“자의로 페로몬을 조절할 수도 있고 일상생활에도 무리 없고, 폭력에 민감한 것도 아니면 정신적 압박이나 성적 트라우마를 남기겠지.”
“그게 쉬운가?”
“고립돼 있고 불안정한 2차 성별자에게는 쉬워.”
“…어렸을 때 교육을 받았고 정체성을 인지하고 있다면? 그래도?”
“그러니까… 굳이 옛날 일을 꺼낸 이유가 뭐겠어. 무조건 상대를 더 우선하는 상황을 주입한 게 아닐까 싶은 거야. 결과가 비슷하니까.”
“멋진 종마와 그 씨를 산 손님 말이지?”
“영.”
어느덧 과거사로 빠졌던 이야기에서 하나하나 윤설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지 따지는 최윤의 말을 최영이 가로챘다. 경이 과거를 떠올려가며 나쁜 가설을 늘어놓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후딱 답을 찾고 끝내자는 뉘앙스도 담겨있다.
최윤이 생각해도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한쪽으로만 치우친 강박에 마땅한 이유가 몇 없기는 했다. 경은 왠지 모르게 윤설을 안타까워하는 기색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최영의 눈에는 별로인 모양이다.
“나는 괜찮고, 상대는 절대 다치면 안 되는 이유?”
“…….”
“지극한 사랑이거나 인이 박인 두려움밖에 없을걸.”
“차마 내 양심에도 사랑이라고는 못 하겠네.”
“하하하.”
“하하하하.”
농담 반 진담 반으로들 웃었다.
누구도 진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집안에서도 궁금해하기는 한, 그런 연애. 몸을 두고 하는 거래에 결벽하면서도 먼저 손 내밀었기 때문에 최윤의 욕심을 채워주고 있는 잠자리와 그럼에도 드러나는 윤설의 족쇄.
뻔뻔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있기 때문에 최윤도 인정하며 웃었다.
그럴듯한 개연성은 더해졌어도 답은 비어있다. 윤설이 입을 열어야 알 일이다.
…꼭 알아야 할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다. 문제가 없다면 덮어도 그만인데 거기서 일을 그르치거나 반대로 은성의 꼬리를 밟을 단서가 나올까 해서 파헤쳤었다. 버릇 고치는 건 겸사겸사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고.
그냥 좋은 것만 타고난 윤설을 되레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일련의 사건들을 짐작할 때 지저분한 적을 꼭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느끼던 짜증이 올라온다.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 아는데 기분이 찝찝하고 불쾌할 따름이다. 취향만큼은 고상한 데 발 걸친 탓인지도 모른다.
“누님 가, 이제.”
“불러놓고 이렇게 가라고?”
“나는 경을 불렀지. 나중에 갈게요.”
“애들이 너랑 네 애인까지 해서 밥 먹자고 하더라.”
“싫수다.”
“…….”
“진짜 싫어요. 가요, 누님.”
아직 잠들어 있는 윤설도 있고 다른 이야기 할 것도 없다. 이 기분을 곱씹는데 뭐라도 얹는다면 괜한 성질만 나오지 싶어 등을 떠밀었다.
실컷 웃어놓고 형 둘, 누나 둘 사이에 막내 커플 두고 밥 먹자는 꿈은 또 왜 전해주나. 다 컸으니 그만할 때도 되었다 싶은데 가끔 이렇게들 안 맞는 주접을 떤다.
일 때문에라도 자리 만들기는 해야겠는데, 이래서야 삼천포 빠져 헤엄이나 치겠지.
드물게 질린 표정으로 마중 나가는 최윤의 발꿈치에 가라앉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대표님?”
가운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윤설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가 찾는 사람이 없자 부르는 소리다.
경은 현관 앞에 서있었음에도 문을 열고 뛰어나갔고 최영만 몸을 돌렸다. 순식간에 화색이 도는 것이 심상찮았다.
“윤이랑 내 새끼 다음으로 예쁘구나?”
“누님, 좀.”
미남이라면 섭섭잖게 만나본 최영의 입에서 나온 말 중 최고의 칭찬이라 할 만했다.
최영은 말리는 최윤의 손을 걷어내고 기어코 당황한 윤설의 볼을 실컷 쓰다듬어준 뒤 다음에 꼭 보자는 말로 사라져버렸다. 막냇동생이 진짜로 성질내기 전에 훌쩍 가버리는 게, 형제들 훤히 꿰고 있는 큰누님다웠다.
“…우리 누님입니다. 갑자기 들러서 어쩔 수 없었네요.”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이런 모양이라…….”
“누님한테는 윤설 씨나 나나 어린애예요. 신경 쓰지 맙시다.”
“네. 그런데 혹시, 대표님.”
“응.”
“손님 중에 알파나 오메가가 있었을까요? 말도 안 되지만.”
“아니요. 어디가 안 좋습니까?”
“향수 같지는 않은데. 꼭, 페로몬 같은데……. 아니에요.”
“나는 아무것도 못 맡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경은 흔적 같은 거 안 남길 거라고 했는데 참 기가 막힌 코들이다. 속으로 혀를 차며 윤설의 어깨를 감싸 거실로 이끌었다.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를 피해 나란히 앉아있자니 윤설이 흘끔, 그러다 숨기지 않고 최윤을 살핀다. 최윤은 느긋하게 기대며 시선을 받아내었다.
“좀 뻐근하기만 해요.”
“네.”
“어때, 기분이 전이랑은 다릅니까?”
“네. 그냥, 좋았어요.”
다소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나지막이 좋았다고 전한다.
불안을 반쯤 내려놓자 훨씬 더 일렁이는 눈으로 보는 윤설을 알아챘지만 그대로 두었다. 호감 정도야 일 진행하기에 도움이 되면 됐지, 마이너스는 아니다.
앞으로는 하나하나 일러주며 질질 끄는 시간이 많이 줄 것 같아 엉뚱한 기대가 피어오르는 것도 좋다. 열렬한 맹목의 기운이 비치는 눈빛도 거북하지 않다.
그러니.
“그래요. 윤설 씨가 무서워해야 할 일은 따로 있으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달라지는 게 있으면 뭐든 나한테 말해줘야 해요.”
“그럴게요.”
윤설이 어쩐지 자꾸 코를 찡그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옷을 갈아입고 집 뒤편의 테라스에 앉아 차가운 것을 마시고서야 코끝에 맴돌던 성가신 향이 사라졌다. 무언가 불쾌하고 가슴을 죄는 향이었으나 조금 들뜬 채 최윤을 보느라 깊이 고민할 틈도 없었다.
두 사람은 그대로 함께 잠들 수도 있을 듯 친밀한 분위기에 푹 젖어있다, 윤설의 촬영 때문에 헤어져야 했다. 최윤은 또 언제 골랐는지 모를 옷을 선물이라며 곁에 끼워주었다.
해가 지는 때라 얼굴이 온통 붉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