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5년을 함께 일한 회사와의 계약이 끝났다. 그동안 서로 섭섭하지 않게 거래에 충실했고 좋게 끝났다는 사실이 그대로 기사화되었다. 대형 기획사라 해도 은성의 등쌀을 빌미 삼아 윤설에게 부당한 요구를 한 적 없다는 것만으로도 잘 버텨준 것이다.
그런 기획사와 이별을 한다 하니 전에는 1인 기획사를 꾸릴 것이다, 아예 은성에서 회사를 차려 밀어줄 것이다, 하는 추측이 돌았었다. 그러다 한 달 전부터는 지라시로나마 최윤과의 만남이 돌았고, 계약 종료 당일에는 어느 기사에나 기다린 듯 그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새삼스레 가족 불화설을 언급하며 스폰서를 암시하는 문구는 아예 다 잘려 나갔다. 박 대표가 그간 회사를 꾸준히 성장시킨 점, 최윤과의 교제 및 소개가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점 위주로만 언급되게끔 손을 쓴 것에 내심 한시름 놓았다.
윤설이 커리어가 있고 모은 돈이며 상속 재산이 얼마인데 스폰서가 필요하냐, 운조 계열사가 구멍가게도 아니고 뭐가 모자란가 따위의 변론을 누가 대신 해주더라도 공연히 기사화되는 것 자체가 신경 쓰이는 일이니까.
최윤을 만났을 때 지나가는 말로나마 감사 인사를 하자 최윤은 기사를 몇 개 넘겨 보고는 하필 노티 나는 정장 차림인 날 사진이 나갔다며 시큰둥하게 반응할 뿐이었다.
“가진 걸 포기하고 님과 함께 인생을 다시 계획하는 사랑이 어른의 사랑이지.”
“처음이니까 부와 명예를 버리고 너만 있으면 된다는 캐릭터 괜찮죠.”
“이번에는 장르물 섞인 거 빼고 멜로만 볼 생각도 있댔지? 고른 대본 좀 봅시다.”
“아, 네. 제가 챙겨 왔습니다.”
해서, 아직까지는 활동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박 대표와 김우형이 주거니 받거니 신이 나서 윤설의 차기작을 놓고 이야기하며, 결정만 되면 금방이라도 인력 동원을 할 것처럼 들썩이는 모습을 보니 실감이 난다.
차기작 후보로 나름 로맨스나 로맨스 코미디 흥행작을 몇 개나 낸 작가진 대본도 있고, 신인 작가 팀 대본도 있었는데, 어쨌든 사랑 이야기가 메인이라 그런지 소재 어필이 중요해 보였다.
전형적인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로 자기밖에 모르는 남자, 초임 시절 열정이 과해 주변 사람을 다치게 하고 그 일로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검사, 스포츠 스타로 유명한 수영 선수지만 연애에는 숙맥인 남자가 주 캐릭터였다.
“윤 배우는 뭐가 가장 마음에 들던가요?”
“…마지막이 나을 것 같습니다.”
“훤∼칠하고 커리어 승승장구하는데 순진한 남자, 이거? 요즘은 오히려 이런 캐릭터가 더 반응 좋긴 하더라고요. 연하남이랬나.”
“네, 윤설이야 다른 거는 또 들어올 이미지고요. 사연 있는 검사, 이거 조금 아깝기는 한데…….”
“제가 멜로는 처음이라 그렇게 깊은 사연은 좀, 걱정이 되네요.”
“그렇답니다. 말도 안 되지만요.”
“그래, 윤 배우 다 잘하면서 엄살은.”
다른 것보다 모두가 좋게 보는 대본 둘을 위주로 연락 돌리고 오디션이든 비공개 미팅이든 일정 잡아보자 하는 일의 흐름에 주저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메인 촬영작 잡히면 사이사이 영화, 티브이 일정을 앞뒤로 짜 맞춰야 하는데 김우형은 물론이고 회사 직원들 경험이 충분하다니 그냥 믿고 가도 된다는 분위기였다.
윤설은 분위기가 좋은 틈을 타 살짝 운을 떼보았다.
“저, 박 대표님께서 사모님과 사이가 아주 좋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어어, 그런 이야기를 다 해요? 도련님이?”
“어쩌다 보니… 기분 나쁘지 않으시면 가끔 두 분 만나신 이야기도 부탁드립니다. 우형이 말대로 주변에 연애하고 결혼까지 한 사람들이 없거든요.”
“윤 배우가 주변 사정이 복잡해서 그렇지, 앞으로 실컷 하게 될 겁니다. 우리 미연 씨하고는 글쎄, 만나기는 한참 전에 만났는데. 몇 년을 만나도 뭐 언제 결혼하자 할 거냐느니 헤어지자느니 한마디도 없던 미연이가 막상 반지 사서 들고 간 날에 딱 잘라 말하는 거예요.”
옛날을 회상하는 박 대표의 얼굴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잠시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이면서도 그랬고,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하는 한 결혼은 안 된다.’라는 말에 벼락 맞은 듯 놀랐다는 회상을 하면서도 더없이 온화해 보였다. 윤설은 바로 저 표정을 연기해 낼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내 무슨 일을 한다고 다 말한 것은 아니지마는 건달이든 사채업자든, 아무리 돈 많고 씀씀이 넉넉해도 부모님한테 댈 직업은 아닌 줄 알았던 거지요.”
“와… 사모님 멋있네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와, 우와, 감탄하는 우형 옆에서 듣고 있는 윤설도 다음 일이 궁금해 몸을 내밀고 있었다.
“사귈 때 진작 말해주지 그랬냐 하니까는 그러면 자기 안 만났을 거냐며 화를 냅디다. 이제는 꼭 미연 씨랑 살아야겠고 저쪽도 그런 눈치가 빤한데 일을 그만두라니 어쩌나 싶었지요.”
“그래서 회사 차리게 되신 겁니까? 사모님 위해서요?”
“그이 직업은 나랏밥 먹는 일이고 자기도 싫다는데, 이해는 되지만서도 우리 도련님이 마음에 걸리지 뭡니까. 어릴 때부터 곁을 떠난 적이 없는데.”
“그때 최 대표님이 아직 어렸을 땐가 봅니다.”
“겨우 스물 됐나, 그랬습니다. 말하기도 참 그래서 끙끙 앓고 있었더니 부르시더군요.”
그 사람이 스물이었다고 걱정될 만큼 지금이랑 달랐을 것 같지는 않다. 무어라 말하려는 우형의 옷을 잡아당겨 말리고 듣자 하니 당시 총회장의 비호 아래 사업의 양지화를 계획하던 최윤이 마침 연예계로도 일을 터놓을 생각이었다고, 박 실장이 맡아서 하라고 툭 뱉었단다.
그렇다고 해서 최윤을 수행하는 일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직업이 생긴 것이다. 일 년 동안은 눈 돌아가게 바빠 그 덩치에 살이 내릴 정도였다고 고개를 젓지만, 아무튼 덕분에 미연과 결혼했다.
“대표님 스토리가 더 드라마 같은데요?”
“그렇네요. 음, 진짜 그만둘 생각도 하신 거고요.”
“다행히 죽어도 나랑 못 산다는 건 아닌데 어떡합니까. 하라는 대로 해야지.”
호탕하게 웃던 박 대표가 지갑을 펼쳐 사진을 하나 꺼냈다. 사모님 고운 사진이야 핸드폰으로도 본 것 같은데 무슨 사진인가 하고 보니 젖살이 볼에 붙은 어린아이 사진이다.
머리가 애매하게 길어 윤설과 우형 모두 실눈을 뜨고 긴가민가해하며 한참을 보았다.
사모님 어렸을 때인가? 무슨 반응을 해야 하나?
“…우리 도련님이 그렇게 작고 예쁠 때부터 모시고 다녔는데 그 도련님이 어른이 됐다고 나를 다 챙기고, 참… 내 기분이 어땠는지. 주책이 길었습니다. 지금이랑 비슷하지요?”
“아아, 네. 어릴 때부터 이목구비가 또렷하니 아주.”
“표정 보니 알겠어요.”
어릴 적의 최윤은 박 대표의 애정 어린 칭찬을 빼고 보아도 예쁜 아이였다. 저만한 아이가 눈을 빛내며 처음으로 뭘 졸랐다면 자신이라도 뭐든 들어주고 싶었을 것이다.
시큰둥한 건지 부루퉁한 건지 약간 고집스러운 입 모양을 하고 있다는 점을 빼면 정말 놀랄 만큼 많이 자랐다. 남자아이의 성장에 그런 일 흔하다 해도 누가 상상했을까. 박 대표 말로는 그때 하도 예쁘다는 말을 자주 들어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 하니 귀한 사진이었다.
“어때 좀, 도움이 됐습니까?”
“그럼요. 부러운 이야기였습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대표님!”
* * *
그사이 최윤의 집에서 돌보던 고양이 중 한 마리가 입양을 갔다. 작가 혹은 작가와 감독 모두 함께하는 자리에서 따로 만나기로 약속이 잡힌 뒤 줄곧 대본만 봤더니 말수 적은 최윤에게 할 만한 이야기가 딱히 없어 궁리 끝에 그 기억을 떠올렸다.
한편으로는 정말 궁금하기도 했다. 작고 어린것들이 다 소중한 느낌이 들고, 좋은 곳에서 사랑받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으로 가득했던 시간은 단 한 번뿐이었는데도 눈에 밟혔다.
최윤이 말없이 핸드폰을 건네주기에 들여다보니 그때와 다른 방에서 뒹굴고 있는 모습이 있었다. 짐작하기로 평범한 집, 더 작은 방 안에서 다른 고양이와 함께 지내는 모양이지만 충분히 편안해 보였다.
“잘됐네요.”
“부쩍 호텔보다 집이 낫겠다고 하더니.”
고양이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라고.
최윤이 놀리는 것이야 시도 때도 없었지만 속수무책으로 입이 벌어졌다. 고작해야 한두 번이었던 말을 잘도 기억한다. 짧은 휴식기가 끝나면서 복귀작을 놓고 기사가 자주 나는데 호텔 가는 사진이 너무 찍혀도 곤란해서 스치듯 속삭인 말, 그 한 번이 다였다.
“대표님이야말로 결혼하시고 바쁜 일이 정리되면 꼭 키우실 것 같은데요.”
“글쎄, 식구를 둔다면요. 동물은 배신하지 않는 편이니까요.”
“의외네요. 아직 생각 없으신가 봅니다.”
“내가 봉건 사회 군주도 아니고, 꼭 배우자와 자식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실례지만, 그러면 지금 확장 중인 사업을 나중에 다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한 번쯤은 최윤의 장난을 되돌려 주고 싶은데 아무래도 그른 일 같다. 화제를 튼 것까지만 좋았다.
남자 둘 데이트인데 최윤이 스테이크를 썰어주고는 더 큼지막한 자기 몫을 썰기 시작하면서 심드렁하니 남의 일처럼 대답하는 바람에 오히려 윤설이 당황해 버렸다. 우리가 진짜 사귀는 것도 아닌데 과한 질문이었다고 후회하며 손을 테이블 아래로 내린다.
아닌 게 아니라 윤설의 집만 봐도 작고한 조부에게서 사 남매에게로, 그리고 그 아래 사촌과 윤설에 이르기까지 경영진 일가가 회사의 일부라도 손에 넣고 굴리는 미래가 당연한데.
이 나라 재벌이 왜 재벌인가. 사람들이 무엇 하러 부를 쌓고 윤설의 유전자를 탐내는가.
자기 피를 이어가는 부와 명예에서 영원히 살고자 함이다.
“인재가 있으면 주는 거고, 아니면 망하라지요.”
“네?”
“진심인데요. 식습니다, 부지런히 먹어요.”
“네. 그만, 저는 곧 촬영이니까요. 충분합니다.”
바짝 긴장한 윤설의 접시 위로 고깃덩이가 더 올려졌다. 최윤의 먹는 모습만 보면 급하거나 식탐이 느껴지는 데라고는 없는데, 윤설에게 덜어준 양을 제하고도 꽤 되는 양이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다.
윤설도 만성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치고는 꼬박 잘 먹는, 그것도 체격이며 체력이 남다른 알파인데 늘 이런 취급이었다.
그 마르지 않는 정력 못 따라간 적도 없건만.
한동안 말없이 식기 움직이는 소리만 작게 오갔다.
“아, 수영 선수는 안 됩니다.”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들어보니 수영복 입은 신이나 레인 촬영이 많은 것 같던데.”
“야외 촬영보다 경호가 어려운가요?”
“아마도요. 그리고 애인의 노출이 잦은 촬영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놀리기 좋아하시는 줄은 알지만,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해요?”
“…네. 사실 그런 부분까지 관여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신변을 일임하면서 감수한 것들이 있잖아요. 스폰서라든가, 정략혼이라든가 하는 추문이며 과거와 사생활을 까발려도 이해하는 일처럼요.”
“그 정도는 저도 생각하고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작품을 고르는 건 다른 문제예요.”
“뭐가 다릅니까? 살려고 한 일이잖습니까.”
어느새 둘 다 식기를 내려놓고 목을 축이기만 했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 윤설만 느끼는 불편함인지도 모르지만 의견 차이가 있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기던 여느 때와 달리 최윤이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원하던 대학은 아니더라도 조용히 다닐 수 있었는데 어떻게든 눈에 띄어 데뷔했을 때 그런 계산이 깔려있었음은 분명하다. 대중의 눈이 늘 따라다니도록. 자신이 죽거나 실종되면 며칠 동안 화제로라도 은성을 귀찮게 하기를 바랐다.
그렇다 해서 그때그때 화제가 될 만한 곳에만 이름을 끼워 팔며 배우 생활을 십 년 가까이 했을 리 없다. 윤설은 이 일에 빠지고 말았다.
“누구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될 필요는 있었죠.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그런 윤설 씨 상황에서 최선이라면 방법이 뭐든 해야 하는데, 작품이 포기 못 할 부분인 이유는요?”
“…….”
“통제나 강요가 거북한 성미면 좆 빠는 일로 버티지, 이런 걸로 고집부릴 줄은 몰랐는데.”
“대표님.”
“내가 활동에 손대고, 그래서 사람들 관심이 멀어지면 배신당할 것 같습니까?”
“…제가 자유롭게 살게 된다면, 평범하게 직업을 갖고 집안이니 알파니 하는 조건들을 떠나 누군가와 함께할 수 있는 삶을 바랄 겁니다.”
“…이해합니다. 안정적인 삶이 꿈인 사람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저는 그때 여전히 배우 생활을 하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그냥 그게 다예요.”
서로 자기 할 말만 하는 식의 대화도 처음이었다. 감정이 실린 목소리가 조금이나마 커진 것도 처음이라 뒤늦게 목을 가다듬었다.
혼자 격양돼 불그죽죽한 얼굴일까 싶어 잔을 들어 올리는데, 얼마나 꼭 쥐고 있었는지 표면에 맺힌 물이 조르르 흘렀다.
최윤은 꼭 맞는 정장을 입었던 날처럼 겉옷을 벗어두었다. 그러다 윤설의 뒤편에서 어쩌지도 못하고 있는 종업원을 봤는지 무어라 눈짓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시원했던 물은 얼음물로 다시 채워지고, 남은 스테이크 접시 자리에 샐러드와 파스타가 놓였다. 과일과 치즈가 알록달록한 색으로 어우러지고 파스타도 소스가 진하지 않은 가벼운 것으로 나온 듯했다.
윤설은 망설이다 블루베리 알을 쿡 찍어 먹었다. 최윤도 처음처럼 담담하게 씹고 삼키는 행위를 반복했다.
최윤의 질문은 안 그래도 아픈 곳을 골라 푹 눌렀다. 윤설도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어설프게 엮이는 사람들을 걱정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욕심보다 빨리 이 굴레에서 벗어나는 쪽이 낫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일부러 죄책감을 자극하려는 듯 보복하는 상대에게 차라리 회유를 내밀라는 신호가 되려면 그래야 마땅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고 다 그대로 행할 수도 없는 게 평균적으로 무르고 약한 사람의 마음 아닌가. 수년을 시달리고, 사람을 미치게 하려고 작정한 상대에 피붙이들도 있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 같을 수 있나.
괜한 억하심정마저 든다.
“그거 시위입니까?”
“네?”
“과일 다 터졌어요.”
“아, 죄송합니다.”
과일을 세어 먹는 것처럼 속도가 더디더니 어느 순간부터 잘게 쪼개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건 유치하고 무례한 짓이었다. 최윤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손을 닦으며 테이블에서 몸을 물렸다.
“윤설 씨 상황으로만 보면 어렵지는 않은데, 알수록 손이 많이 갑니다.”
“다른 부분은 제가 더 수용하겠습니다.”
“말 나온 김에 물읍시다. 윤설 씨 한계가 어디까지입니까.”
“어떤 의미인지…….”
“취급의 문제가 있다고는 해도 윤설 씨는 남자고, 오메가가 아닌 알파 입장이라면 사실 신체적 부담은 매우 적어요. 한두 세대만 거슬러 갔어도 돈푼이나 권력 꽤 있다는 치들은 마초적 자존심이 대단해서 자기 씨 여기저기 남긴다는 걸 오히려 자랑으로 알았을 겁니다. 모두 거느리고 살면 더했겠죠. 윤설 씨가 거부하는 건 유전자나 관계를 거래한다는 것 자체입니까, 아니면 본인 손으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전자인 것 같습니다.”
“그거군요, 윤리적 거부감.”
“아무리 잘 포장해도 결국 종마 아니면 탕아밖에 안 될 일이에요. 보지도, 키우지도 못할 애를 만들기 위해 대가를 받는다뇨.”
“하나 더. 윤설 씨 자유를 위해 기망, 사기, 상해… 살인까지 동원될 수 있다는 거 압니까?”
“네.”
“당신 손으로 하지 않으면 감당이 되나요?”
“…제가 할 수 없는 일이라 요청한 거니까요.”
최윤의 손이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내리다 그대로 떨어져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윤설은 더 비겁해질 수 없었다. 애써 최윤의 눈을 마주 보며 더한 말이 떨어질 것에 대해 각오했다.
그러나 최윤은 거슬리는 화제가 올라오기 전처럼 무감한 낯으로 돌아와 디저트가 필요하냐고 묻기만 했다.
* * *
우형이 못내 찜찜해했던 시간이 무색하게도 윤설은 사랑에 서툰 인기 수영 선수 역을 맡게 되었다. 예민하고 피로 서린 듯한 낯빛을 걷어내고, 장르물 특성상 유지에서 감소만 오가던 체중을 늘릴 필요는 있겠지만 준비 기간이 충분히 남아있었다.
거기다 요즈음은 잠을 제대로 자다 못해 늦잠도 더러 잔다. 하던 대로 곁에서 챙기기만 해도 순조롭게 운동선수다운 분위기로 만들어놓을 수 있겠다.
일주일 전쯤이었나, 대본 연습과 일정 조율, 최윤 만나기만 줄기차게 반복하던 윤설이 슬쩍 흘린 말을 듣고 이 역할은 물 건너갔다고 생각했었다. 뭐 그런 것까지 상관하냐 싶다가도 안전상 문제라는데 이쪽이 아쉽지 어쩌겠나. 은근히 검사 역을 더 어필해 보자고 조언하기도 했었다.
한데 예상외로 미팅도 잘하고 왔고, 캐스팅 확정 콜도 받은 데다 감독이 통화 중 흥분을 숨기지 못하고 우형에게 윤설 대체 뭐냐 묻기까지 했다. 윤설이 주연이라는 기사 나가자마자 운조 쪽 제작사에서 제작비 지원할 거라는 통보를 날렸다고. 얼마가 필요하냐고도 안 묻고 사용할 수 있는 목적, 총금액만 말하고는 끊었다고 한다. 수익률 흥정 같은 것도 없다.
‘살면서 그렇게 화끈한 지원 처음 봤어!’
감독이 포효할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이리저리 끌고 다녀, 눈치로 보자니 물고 빨고 호색한이 따로 없어, 9개월 동안 얼마나 뽑아 먹나 했더니 그래도 그렇게 꽉 막힌 작자는 아니구만.
우형은 최윤에 대한 편견을 조금 수정했다. 정작 윤설도 금시초문인지 눈만 껌벅이다 되묻기까지 하는 걸 보면 상의한 이야기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왕 스캔들이 나는 거 이런 것만 안겨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은성 쪽에서 광고니 뭐니 슬그머니 손을 대서 훼방 놓을 걱정도 없고. 이렇게 시원한 마음으로 차기작 진입한 적이 있었나.
사무실과 방송가를 오가는 우형과 마주치는 사람 누구나 좋은 일 있냐고 묻는다. 우형은 그럴 때마다 두고 보면 알 거라며 씩 웃고 다녔다.
* * *
“그게 뭡니까?”
“고양이 줄 인형이요. 향을 좋아한대서 샀습니다.”
“다 입양 가면 내 집에 볼일 없겠네요. 서운해라.”
말은 그렇게 해도 윤설이 들고 온 인형을 손에 쥐고 살살 흔드는 폼은 기분 좋아 보였다. 캣닢 향이 난다는 인형 몇 개를 사서, 그걸 약속 당일에 고이 가져오는 내내 스스로도 이해가 안 됐지만 결과가 좋으니 됐다.
최윤은 오늘 별다른 일이 없었는지 느슨한 차림이었다. 조금 자란 채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눈썹에 걸려있다. 그 불편해 보이는 것이 윤설이 소파에 앉자마자 냉큼 무릎을 베고 누워버리니 딱 눈꺼풀을 비껴간다. 스킨십이 있다면 살짝 걷어주려 했건만 알아서 넘어가는 길이가 게으름 피우기에는 기가 막히게 적당했다.
최윤이 누운 채로 손을 뻗었다. 윤설이 고개를 숙여 내밀자 살살 뺨을 쓰다듬는다. 아주 미세한 흠이라도 찾아낼 것처럼 손끝이 가볍게 닿아 움직인다. 과하게 간지러운 느낌이라 저도 모르게 살짝 긁적이니 최윤이 웃었다.
이럴 때면 사뭇 다정한 연인 같은 기분이 든다. 남들 보라는 식의 외출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은밀한 시간 외의 사소한 사생활에 들어서는 틈과 아무렇지 않은 대화들.
“드라마도 잘될 것 같고, 그간 내 눈을 벗어난 수작도 없었고. 윤설 씨 얼굴이 폈네요.”
“덕분입니다. 배역에 맞추려고 식사랑 운동량 늘리는 게 어렵지만… 보기 괜찮은가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보이거든요. 좋습니다.”
최윤이 은근하게 말하며 손을 툭 떨궜다. 스치는 손등이 가슴과 배를 빠르게 그으며 지나갔다. 윤설은 뒤늦게 저가 왜 최윤 눈에 보기 좋은지를 물었는지 몰라 황당했다.
굳이 찾아보는 편은 아니지만 눈과 귀가 있는 한 떠도는 말을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스폰서, 정략혼 이야기에 키도 훤칠하게 크고 몸피도 작지 않은 윤설을 고른 취향에 대한 호기심이 한두 마디씩 따라붙는다. 정작 최윤은 처음부터 저를 보고 예쁘다고 했었는데.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한다는 남자가 잠자리에서 윤설을 보며 심미적 욕구를 가득 채우듯 눈으로 좇기도 한다. 떠도는 말이 거슬리고 최윤이 보기에 좋았으면 한다는 건… 꼭 나쁘지는 않았던가 보다.
“최 대표님은 어떠셨습니까? 많이 바쁘셨겠지요.”
“그런 걸 다 묻네요. 내 일에 관심이 다 있고.”
“그게…….”
“뭐라 하는 거 아닙니다. 정말 일도 바쁘고, 윤설 씨가 원하는 대로 처리해 주려고 신경 쓰다 보니 제대로 쉬지도 못했어요.”
“조금 주무세요. 보고 있다가 알아서 돌아가겠습니다.”
배역에 맞춘 모습도 마음에 들면 이렇게 흡족한 미소를 띠고 곁을 붙인 채 나태함을 즐길 터다.
윤설은 통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최윤의 머리를 조심스레 쓸었다. 아주 잠이 든 모습을 본 적은 거의 없어 불현듯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최윤이 몸을 돌려 허리를 안고 배에 얼굴을 묻었다.
“위로해 주지는 않나요?”
“…알려주시는 대로 해보겠습니다.”
윤설 스스로 들어도 멋없는 대답이었다. 배에 웃음과 함께 뱉는 숨이 닿든 말든 최윤이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답지 않게 어리광 흉내를 낸 이유가 따로 있었구나. 그래서 무릎을 내어주고 재워주려 한 거였지만 어림도 없었나 보다.
손이 셔츠를 밀어 올리고 들어와 척추를 따라 길을 더듬는 줄 모른다는 듯 윤설의 아랫배에 볼을 비벼대는 폼은 영락없는 투정이었다. 손발 따로 말 따로. 앞뒤 다르게 굴 때마다 한참 놀림당하고는 하던 윤설도 이제는 떨림과 쾌감을 먼저 떠올리며 길게 숨을 골랐다.
몸이 빠르게 긴장한다. 최윤이 느리고 끈적한 손길로 척추 마디 있을 자리를 더듬고 아래로, 아래로 가는 것처럼 윤설도 손을 뻗어 쇄골, 그 아래 가슴으로 천천히 미끄러트렸다. 얇고 부드러운 니트 위로 손바닥까지 넓게 닿아 문지르면 어느새 손에 익은 얕은 굴곡이 눈으로 보듯 그려진다.
최윤처럼 느리고 부드럽게 문지르다 무심코 힘주어 쥐자 나른한 숨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사이로 스치곤 하던 유두를 찾아 조금 더 바짝 붙여 쓸기를 반복하니 살짝 섰는지 쉽게 닿았다.
“내가 만지는 건 별로라고 해놓고.”
남자가 웃으며 윤설의 셔츠 안에서 손을 빼자마자 상체를 숙여 니트 위에 혀를 댔다. 눈으로 수차례 보았던, 이만큼 솟아서 단단해졌을 때의 유두를 떠올리며 입술로 물었다가 가볍게 빨아올린다.
다소 불편한 자세가 되었지만 최윤이 기분 좋은 신음을 흘리기 시작한 데다 이제는 윤설의 다리 사이를 주무르고 있었다.
옷이 척척하게 젖어들도록 정신없이 핥고 혀끝으로 밀며 팔을 길게 뻗어 최윤의 것을 어떻게든 꺼냈다. 반쯤 선 자지를 감으로 더듬어 손안에 담고 위아래로 슥슥 마찰시킨다. 이런 것마저 하나씩 말해줘야 겨우 하던 때가 언제였나 싶게 정신이 아득했다.
“으음, 좋아요, 계속 빨아……. 윤설 씨 자지 보여줘요.”
“잠시만, 머리 조심해요. 잠깐만…….”
마음 급한 대로 일어났다가 최윤의 머리가 부딪힐까 싶어 조심스레 받쳤다. 처음은 아니었지만 얼굴을 보기 힘든 가운데 다리 사이를 상대 코앞에 훤히 보이는 자세라 제대로 자리를 잡을 때가 가장 민망하다.
최윤은 기다리기 싫은지 버클 풀린 윤설의 바지와 속옷을 마구잡이로 끌어 내리며 엉덩이를 쥐었다. 윤설도 더 주저하지 않고 최윤의 몸 위로 제 몸을 겹친 채 가랑이 사이에 코를 묻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하다고, 종종 흥분하면 목구멍에 닿을 만큼 깊이 빨려고 들다가 혼이 났었다. 아쉬운 대신 주변을 더 샅샅이 애무하게 되었다. 윤설의 기준에서는 그다지 구역감이 올라오거나 목이 상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도 펠라로 끝까지 넣지 못하게 하니 회음부나 구멍에 집요해졌다.
“읏, 대표님, 천천히, 아.”
윤설이 샅에 입술을 문지르며 기둥을 잡아 흔드는 한편, 도톰하고 말랑한 회음을 찾았다.
최윤이 방해하듯 윤설의 좆 끝을 물고 쭉쭉 빨아들여 순간 아랫배에 힘이 확 들어갔다. 부드럽고 느리게 전희를 이어서 최윤이 불편하지 않도록 애쓰는 것과 달리 그는 이따금 부추기듯 강한 자극으로 정신을 빼놓고는 했다.
지금도 끙끙 앓으며 매달리듯 고환을 핥고 기둥에 코를 비비는 윤설의 귀두 끝을 파고드는 혀가 당장 사정을 유도하는 것 같았다. 몸을 물려 혹 목구멍까지 닿을까 곤란한 기색을 보여도 오늘따라 고개를 움직여 가며 더 깊숙이, 세게 삼켰다.
“아, 안, 대표님, 읏, 안 돼요, 쌀지도…….”
급기야 애원하기도 했지만 최윤은 거의 다 집어삼킬 것처럼 굴며 부러 음란하고 버거운 듯한 신음까지 흘렸다. 윤설은 어쩌지 못하고 최윤의 아랫배에 이마를 마구 비비며 아무렇게나 허리를 흔들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속절없이 흔들리기만 할 게 아니라 차라리 최윤을 같이 애무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가 내는 신음이 정말로 가빠져서 단단히 엉덩이를 붙잡은 아귀힘이 풀리도록.
“대표, 님, 최, 윤… 큿, 흑, 으, 흐으.”
“하아, 크기가 좀, 버겁네요.”
결국 그의 입 안인지 얼굴인지에 그대로 사정해 버렸다.
몸을 들어 최윤의 상태를 살펴야 한다는 생각과 그러기에도 민망할 만큼 큰 쾌감 사이에서 밭은 숨을 쉬고 있자니 최윤이 쏟아진 정액을 기둥 위로 살살 바르는 것이 느껴졌다. 질척거리는 정액으로 흥건한 손이 윤설의 것을 정성스레 쓰다듬다가 장난치듯 엉덩이 위에도 남은 것을 문질렀다.
이대로 엉덩이를 벌려 골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면, 그래도 원하는 대로 해줘야 하겠지만.
윤설은 순간 아찔해져 고개를 들고 제대로 애무하지 못한 최윤의 좆 끝에 입술을 문질렀다. 혀를 내어 소심하게 핥자 웃는 소리가 들렸다. 모르는 척 아래로 내려가며 입을 맞추고 훑는 동안 머리가 허벅다리에 닿는다.
윤설이 점점 열중하기 시작하니 최윤이 다리를 활짝 벌려주었다. 소파 등받이 위에 걸린 발목과 아래로 떨어진 다리 사이가 훤히 드러나며 둥그런 고환과 아래 회음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첫날의 페이스시팅을 비롯해 그의 아래를 직접 보며 입으로 만족시키는 데 익숙해진 탓인지 반사적으로 옅은 흥분이 일었다.
누구도 감히 궁금해하지 못할 무른 살이 축축하게 젖어 침이고 정액 따위가 흐를 때까지 충실히 목마름을 채우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최윤의 얼굴까지 자동으로 연상되는 탓이다.
“자세 바꿔요. 윤설 씨 자지도 예쁘게 생겼지만 얼굴을 봐야겠어요.”
“…….”
그래서 아직 사정까지 이끌지도 못했는데 정상위를 요구하는 말이 조금은 야속했다.
저라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최윤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저 최윤도 입으로 해주는 것들을 더 좋아했고, 아직도 손으로 만지고 쓰다듬는 일은 영 서툰 것 같아 민망했다. 몸을 비비면 기분 좋은 편안함은 느끼는 듯했으나 최윤의 만족은 윤설이 최윤의 다리 사이에서 헐떡이고 있을 때 가장 두드러졌다.
“아까 많이 놀랐어요?”
“조금, 네.”
“잘 참던데.”
윤설의 만족은, 아무리 익숙해져도 그가 하는 모든 움직임에 민감해 따질 필요가 없다.
예민하고 잘 느끼는 편이랬나.
최윤은 꼭 지금처럼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부드럽게 헤집었었다. 배와 손등에 입맞춤을 남기며 자연스럽게 다리 사이로 내려가고 있을 때 아래로 늘어졌던 발이 윤설의 어깨 위로 올라왔다.
“손.”
영문을 모른 채 얌전히 손을 내어주자 최윤이 검지와 중지를 모아 쥐었다. 톡 튀어나온 마디를 매만지며 무슨 생각을 하나 싶었는데 잡힌 손가락을 구부렸다 펴며 윤설의 표정을 감상한다.
“깊이 넣고, 이 정도로 접는 거예요.”
“손가락…을 다요?”
“충분히 풀면서 하나 더 넣고.”
손가락 세 개가 잡혔다.
이걸 한꺼번에 다 넣는다고.
그는 삽입 섹스를 할 거라고 암시하는 말을 자주 했지만 온갖 방법으로 함께 사정하는 동안 진짜 준비를 시킨 적은 없었다.
콘돔도 필요하고, 오메가가 아니니까 충분히 젖으려면 혀가 드나드는 편이 낫지 않을까.
최윤은 윤설의 혼란을 알면서도 팔을 목에 감아 입 맞추었다.
안 봐도 어디 있는지 알죠. 내가 하는 말을 들으려면 가까이서 들어야 하고요.
달래듯 자상하게 하는 말에 머뭇대면서도 손을 내려 구멍 주변을 찾았다. 윤설의 정액이 그곳에도 약간 묻었는지 손가락이 쉽게 미끄러졌다.
그래도 무턱대고 집어넣으면 아플 것 같아 입구를 몇 번이나 문지르고 누르다 두 손가락을 넣었다. 혀가 들어갈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좁은 느낌이 들었다.
망설이면 최윤이 기분 좋다며 달래서 두 번째 마디, 거의 뿌리까지 넣고 이리저리 구부려보았다.
“아, 거기…….”
시키는 대로 어느 지점을 죽 긁어내리고 문지르다가, 원을 그리며 손가락이 휘젓는 영역을 넓혀갔다. 입술을 물어 오는 최윤의 목소리에 점점 열기가 섞여들었다.
하나 더.
배에 닿아있는 성기 끝에서 미끈한 액체가 조금씩 새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더 하면 최윤도 쾌감 끝에 사정할 수 있다는 신호 같아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이미 들어찬 손가락 때문인지 이번에는 마디가 살짝 걸렸다. 흣, 작은 신음을 낸 최윤이 다음을 알려주었다.
쑤셔요.
“후으, 흣, 더, 거기, 더 빠르게… 아아.”
“더는, 대표님, 좁아요. 다칩니다.”
“웃…기는 소리 말고, 더!”
자꾸만 정점에서 모자라는 자극만 오가자 최윤이 드물게 그르렁대듯 목 울리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낯선데도 순간 아랫배가 확 조여들어 저도 모르게 깊이 파고들었다.
어느새 다시 발기해서 꺼덕이는 윤설의 것과 허리를 뒤트는 최윤의 것 모두 쿠퍼액이 흐른다. 끝까지 쑤셨다 물러나기를 반복하자 회음부에 손바닥이 턱턱 부딪혔다.
“아, 멈추지, 후으, 읏, 큭.”
“대표님, 저 또, 아…….”
손가락을 물고 꽉 조이는 내벽에 놀라 멈춘 순간 아랫배 쪽이 질척하게 젖었다. 최윤이 절정에 이르기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을 보며 그를 흥분시키는 건 윤설에게도 큰 자극이었다.
잠시 숨 고르기를 기다리며 턱에 입 맞추고, 긴장이 풀린 듯해 안에 든 손가락을 조심스레 움직였다.
“대표님, 놔주셔야 뺄 수 있어요…….”
그러나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최윤은 다시 구멍을 조였다 풀며 빠져나가는 윤설의 손가락 마디를 붙잡았다. 순전히 장난이었지만 귀가 붉어졌을 것이다.
윤설은 손을 뺀 뒤 아래를 살폈다. 구멍 주위가 새붉어서 아프지 않을까 싶었다.
약간 젖어 빠끔하게 벌름대는 모양을 보니 아예 배에 올라붙은 좆으로 피가 쏠리는 듯했지만 안 될 말이었다.
굵직한 손가락을 세 개나 넣고 손목을 흔들어댔는데.
홀린 듯이 보면서도 어딘지 울적해 보이는 윤설의 어깨 위에 걸린 최윤의 발이 슬그머니 내려와 자지를 툭툭 건드렸다.
“그거 넣으려고 푼 건데……. 더 커졌네.”
“안, 됩니다. 지금도 부은 것 같아요.”
“…안 넣고 싶어요?”
다시 다리가 벌어지며 구멍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방금 뿜어낸 정액이 엉겨있는 아랫배며 번들대는 사타구니, 느리게 움직이며 안을 보여주는 속살.
윤설은 울 것 같은 눈을 하고 인정했다.
“넣고 싶어요.”
좁고 따뜻하고, 다른 의미로 부드러웠다.
윤설은 콘돔을 찾다가 한 번, 힘들게 진입한 후 거의 뿌리까지 밀어 넣는 동안 자지를 우물대듯 물어 오는 내벽에 또 한 번 바로 싸버려 최윤의 타박 아닌 타박을 들었다. 움직여도 된다기에 허리를 앞뒤로 흔들었지만 반쯤 넋이 나가있었다.
“잠깐, 윽, 윤설 씨… 아, 윤설…….”
“하아, 아, 흑, 대표님, 아아, 안 돼, 안…….”
콘돔 없이 정액을 분출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머릿속이 하얘진 것 같은데 여전히 최윤의 안이 따뜻하고, 그 안에서 움직일 때마다 내벽이 달라붙어 오는 느낌이 황홀했다. 최윤이 여유를 잃고 가쁜 숨을 쉬며 애틋한 비음을 흘리고 있다.
그가 만족할 수 있게 기다렸다 하라는 대로 하고 싶다가도 허릿짓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윤설은 어느 순간 긴장한 채 허리를 뒤로 빼는 최윤을 다급하게 붙잡고 있었다. 손목을 잡고 당기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가슴팍에 둔한 충격이 일었다.
“후, 후욱, 기다리라고, 했잖습니까.”
“윽…….”
“버릇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죄송해요, 제가, 저…….”
발뒤꿈치에 차여 밀려난 거였다. 벌겋게 자국 남은 가슴팍은 그렇다 치고, 이마를 짚고 숨을 몰아쉬는 최윤을 보니 더럭 겁이 났다.
멈추라고 하는데 미친 사람처럼 그를 잡고……. 손목에 손자국까지 남았다.
윤설은 황급히 몸을 빼냈다. 사정하기 무섭게 또 심이 선 좆이 퉁 튕겨 나오는 꼴이 부끄럽다 못해 흉했다. 더 맞아도 할 말이 없을 터다.
최윤이 잡혔던 손목을 돌리며 다시 윤설을 보더니 옆으로 살짝 몸을 틀었다.
“정상위가 가장 쉬운데 그렇게 한 방향으로만 박아댈 줄, 몰랐죠.”
“손목… 손목도 어떻게 해야…….”
“옆으로 누워서 넣어요. 이게 더 쉬울 테니까.”
윤설은 거의 눈이 젖은 채 비스듬히 누웠다. 옆으로 틀어 누워 벌린 최윤의 허벅다리 한쪽을 팔로 감아 지탱하고, 다시 삽입하는 내내 어떻게 될까 걱정이었다. 최윤이 가볍게 신음하다 천천히 허리를 들썩이며 움직였다.
아까와는 다른 곳에 닿으며 내벽 여러 방향이 고루 닿았다. 살짝 왼쪽, 넣은 그대로보다는 약간 비스듬히 쳐올려야 하는 지점에 닿자 다시 단 신음이 더해진다. 그리고 다시 찌걱거리며 젖은 틈을 오가는 소리가 요란해졌다.
윤설은 비로소 굳어있던 고개를 파묻으며 최윤의 목과 어깨를 물었다. 약한 어리광에 가까워 그런지 흥분에 들떠서인지 최윤이 밀어내지 않고 받아주었다.
엉덩이가 뭉근하게 허리를 돌릴 때마다 함께 쳐올리고 정신없이 입술을 찾아 부비며 흐느낌 같은 신음을 내었다.
조용한 집 안에 다시 떠올리기 두려울 만큼 난잡하고 참지도 않는 신음 소리, 질펀하게 젖은 살 부딪는 소리에 더해 몇 번이나 최윤의 안에 사정했다.
* * *
본명이 윤서리. 의미를 추측할 수도 없는 이름. 어쩐지 예명인 윤설이 더 잘 어울린다.
갓 스무 살에 데뷔해 단역을 몇 번 했는데 외모가 외모인지라 화제에 올랐고 비중 있는 조연에 금방 캐스팅되었다. 드라마, 영화 비중이 고른 편이며 대체로 필모그래피가 탄탄한 편이다.
입담이 좋거나 유머러스한 편은 아니지만 팬들과의 소통 이벤트, 생활 공유형 파일럿 프로그램은 곧잘 나서서 대중과 팬덤에게 두루 이미지가 좋다. 십여 년 가까이 관리를 아주 잘해온 케이스다.
아쉬운 점이라면 장르물에 편중된 캐릭터로 그 면면은 다양하지만 슬슬 식상해질 때가 됐다는 것이다. 화제가 된 사생활 부분도 은성 경영자의 직계 가족이라는 것 외에 상대 배우와의 스캔들조차 없다. 기획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탐이 날 만하다.
이 부분은 표지나 다름없어 대충 훑어봤었다. 다시 봐도 별다른 감흥은 없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연예인이 되기로 한 건 나름 영리한 선택이었지만, 아예 화제성을 끝까지 밀고 가려면 본업은 잘하는 개망나니, 스캔들을 몰고 다니는 서구형 셀러브리티가 되는 편이 나았을 텐데.
최윤은 ‘우둔하지는 않지만 특별히 요령 부리고 싶어 하지도 않는 태도와 연기가 좋다’는 말을 떠올리고 혀를 찼다. 주로 조사하라고 했던 건 프로필이 아니라 필모그래피를 쌓는 동안 엮인 사람들과의 관계, 은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도한 흔적 따위라 주요 활동 연보는 시간의 흐름을 보여줄 뿐이겠지만 지나치다 싶을 만치 성실했다.
해외로의 유학 시도 실패.
당시 유학 알선 및 현지 숙소와 주거지를 제공하려던 친지는 은성에 발각된 후 경고성 보복을 당해 영구 장애를 입었다. 윤설에 대한 경고를 위해 그 정도에서 그쳤을 수도 있고, 당사자가 유명 교수의 가족이라 적당한 선에서 물러난 것일 수도 있다.
그해 대학 입학 포기, 연예계 데뷔.
은성이 배송업이나 소비자 직접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이라 광고를 미끼로 출연작에 개입하는 상황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년간 소속사를 한 번 옮겼는데, 모두 급성장한 중대형 회사를 위주로 하여 계약했다.
자본 투입이 급하면 은성에게 돈을 받고 윤설의 정보를 빼돌리거나 활동에 제약을 걸 수 있었을 텐데. 체크.
데뷔 후 3년 차에 본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김우형이 매니저로 동행.
김우형도 따로 조사했지만 특이점이 적다. 윤설의 가정사를 어느 정도 알고도 곁에 있는 듯하니 머리가 굵어지기 전에 만난 인연이라는 부분은 신뢰할 만하다.
주연 및 해외 영화 출연이 시작되면서 빡빡한 스케줄을 강행.
체력보다는 본인 의지로 밀어붙이는 경향이 강하다는 평이 제작진과 스태프 위주로 퍼져있다. 호평이지만 완전히 납득하기는 어렵다.
이름이 알려지기 전 개인 경호를 상당히 자주 구했었다.
어떨 때는 성공하고, 간혹 실패하기도 하면서 사생활을 대폭 줄인 듯한 패턴이 있다. 체크.
해외 촬영에서 돌아오면서 알선자를 구했는지 국제 활동 가능한 경비 업체, 개인 활동하는 용병을 소개받은 이력이 있다. 짧게는 3개월, 길면 1년 정도 윤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처리해 주었다.
그들을 계속 써먹지 못한 이유는 뻔했다. 대금을 주지 못할 정도로 개인 자산이 부족하지는 않다. 은성과 서로 대리전을 감행해 줄 인력 고용 게임에서 밀렸거나 제삼자 개입이 있었다.
은성은 실랑이가 길어질수록 심부름꾼이나 경호보다는 킬러에 가까운 전문가들을 썼고, 방어하는 쪽에서는 당연히 사상자가 끊임없이 나왔다. 은성 2세대의 무능으로 상속 지분이 오히려 감소했으며 윤설이 유명해질수록 상대 쪽의 행동이 과감해진다.
20대 초반에는 조붓한 재벌가 자녀들의 맞선처럼 오메가나 알파에 흥미가 있는 ‘고객’과의 약속 자리에 반강요로 참석한 일이 두어 번 있다.
당시 상황 보고에 따르면 나름 강단 있게 거절하기도 했고, 호텔까지 가서 도망친 적도 있으며─여기서 최윤은 웃었다─ 약물에 취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무슨 말로 협박해도 버티게 된 모양이다.
팬덤을 가장한 스토킹, 협박, 수차례의 약물 강간 시도.
중후반에는 원나잇 파트너나 연인처럼 접근해 말 안 듣는 종마의 씨를 갈취해 보려는 시도도 있었는데, 그때는 고용인들이 일을 꽤 잘해주어 피해 갔다.
최윤으로서는 상상이 잘 안 되지만 그런 사정으로 이성적 관심을 표하는 상대에게 상당히 결벽적, 적대적으로 군다는 코멘트가 있다. 최윤과의 대화에서 숨기지 못한 ‘평범한 삶’을 향한 열망에는 연인이나 배우자를 포함한 뉘앙스가 다분했다는 게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모순이다.
현재의 거주지도 철저히 외부인의 방문을 차단하는 기능 위주로 골랐고, 한때는 개인 방공호가 딸린 해외 주택을 알아보기도 했다니 본인의 스트레스가 한계에 달한 줄은 알겠다.
좀 더 자산이 모이기 전, 그러니까 친부모의 사망과 20대 초반 활동기에는 김우형이나 이전 매니저 명의로 이 집 저 집 계약해서 돌아다니고는 했다. 우습게도 당시에는 본가가 부유함에도 개인 부동산에 관심이 많다는 정도로만 소문이 돌았다.
온통 불법적인 수단을 잘 모르는 어린 청년치고는 고군분투한 흔적들이다.
최윤은 ‘세상에 그런 종이 있다’ 정도로 흘려들었던 2차 성별자의 세계에 대해서도 조사하도록 추가로 연락을 넣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질척거릴 정도로 알파의 유전자가 쓸모 있고 열렬한 수요가 있다는 그들의 세계도 어느 정도 알아야겠다.
오늘은 거기에 더해 딱히 고려하지 않았던 항목을 추가했다.
알파, 오메가의 번식 습성. ‘교육’의 내용.
뭐든 쉽게 배우는 데 반해 느려터진 윤설의 성적 행위에 고루한 윤리관이나 결벽 외의 다른 원인이 있을지 모른다.
“깼습니까.”
“…대표님?”
“잘 자길래 안 깨웠습니다.”
“네. 시간이……. 아니, 대표님 손.”
쾌락에 약하면서 몸을 내던지기는 두려워하고, 상대를 다치게 하면 안 된다는 강박이 있으면서 휩쓸리면 거칠게 구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으로 길들이는 재미가 있는 데다 뭐든 처음이라 그런다고 여겼는데 눈 뜨자마자 푸른 멍이 든 손목을 쥐고 눈이 울망해지는 모습에 다른 생각이 든다.
최윤은 슬며시 손을 빼며 잠긴 목을 가다듬었다. 딱히, 석연찮다고 해서 고쳐야겠다거나 하는 판단을 한 건 아니다. 귀여운 면이니까.
“이런 건 금방 나아요. 다른 곳은 걱정 안 됩니까?”
“다른… 아, 그러고 보니 괜찮으신가요?”
윤설을 성적인 부분으로 놀리면 금방 걸려 넘어진다. 웃음기 없이 아래를 향해 걱정 어린 시선을 두길래 보란 듯이 가운을 걷고 다리를 열어주었다. 모처럼 진이 빠질 만큼 붙어먹었으면서 내외하는 것도 우습고, 그러면서도 살핀답시고 가만히 쓸어보는 것도 우스웠다.
그사이 윤설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소 심각한 얼굴로 최윤에게 사과했다.
“왜요. 남들은 못 훔쳐서 안달인 거 줄줄 흐를 때까지 싸질러서요?”
“…네. 과했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뒤처리 배우면서 또 세우던데.”
“씻어내는데 계속 흐르니까 좀…….”
“꼴, 음… 당황했어요?”
“네, 네.”
“당황하면 세운다고요.”
“…….”
“울겠네.”
그렇다고 윤설이 정말 툭하면 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만 전에 없이 침울한 낯에 혼잣말처럼 늘어놓는 사과의 이유가 길었다.
너무 급하게 굴었고, 아마 삽입할 때 아파했던 것 같은데 말도 안 듣고 제 욕심만 채웠으면서 폭압적으로 굴었다. 손목을 짓누르며 허릿짓을 하다니 최악이다. 일러주는 대로 해서 편안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아무리 좋아도 네 번, 다섯 번? 설마 더? 그렇게나 한 건 너무했다. 처음은 그렇다 치고 중간부터는 콘돔을 찾아서 했어야 했다. 지금도 아파 보이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떨리는 목소리로 제 죄를 읊는 소리가 마치 윤설이 최윤을 기절할 때까지 범하기라도 했다는 듯 들렸다. 직업 탓인지 호소력까지 더해 최윤도 미약하게나마 그랬던가,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일단 내가 소리를 지른 건 맞아요.”
“네…….”
“윤설 씨가 잘해서 그런 거니까 넘어갑시다.”
“하지만 지금도 목이 잠기셨는데요.”
“당연하죠. 좋다고 소리 내고 윤설 씨 헤매면 알려주기도 했는데.”
“그래도 그러면 안 됐습니다.”
“누가 그래요?”
“…멋대로 흥분해서 날뛰면 상대가 다치니까요. 당연히 그러면 안 됩니다.”
“다치게 할까 봐 무섭다고요. 윤설 씨가, 나를?”
“네. 자칫 잘못해서 인대가 다치거나, 그, 안에 피가 날 수도 있고…….”
“윤설 씨도 맞았습니다. 아직 벌겋네요.”
최윤이 발을 들어 섹스 도중 걷어찼던 자리를 툭 밀었다. 호되게 맞은 자리였는데 생각보다 멀쩡하기는 했다.
윤설은 발로 더 밀든 치대든 다 감수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제에 꽤 단호하게 답했다. 알파는 회복력이 일반인에 비해 높아 괜찮다고. 문제는 최윤의 시퍼렇게 멍든 손목이라고 거듭 주장한다.
한동안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중에는 약간 성가실 정도였다. 최윤은 뒤로 누우며 윤설의 무릎 위로 다리를 올렸다.
“집에 의사라도 부를까요. 내가 밑구멍 보여가면서 이상 없다는 말 들으면 믿을 겁니까?”
“아니요, 그런 말은 아니었습니다.”
“네에. 나도 고통을 즐기는 취향은 없습니다.”
굳이 뭘 해주고 싶다면 뻐근한 다리 안쪽이나 주물러주면 좋겠다 덧붙였다. 농담처럼 던진 말인데 정말로 더운 손이 다리를 감싸고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여러모로 잠은 참 달게 자겠다고 최윤 혼자만 웃음을 삼킨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누구를 다치게 한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러 번 몸을 맞대며 겪은 윤설의 체격이나 들이받는 힘이 평범한 여성이나 타고나기를 마른 남성의 몸에는 꽤 버거웠을 거라는 객관적인 예감도 든다. 상대가 튼튼해서 다행인 쪽은 최윤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까보다는 혈색이 나아진 채 괜찮냐고 묻는 윤설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이렇게 정신이 쏙 빠져있을 때 물으면 한두 가지라도 끄집어낼 수 있을 텐데 서슴없이 들쑤시자니 방금 보인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사실 누구보다 알파라는 점을 크게 의식하고 있지 않은가. 좀 과장된 형태로.
한번 엮이니 묘하게 고분고분한 태도도 거기에서 오는 것인지 기억을 헤집어가며 시선으로 윤설의 눈꺼풀과 속눈썹을 덧그렸다. 최윤으로서는 드물게 무방비한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