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5)

2.

스케줄은 비수기답게 힘들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무슨 생각을 하든 사진은 우수에 찬 미남자로 나왔을 터였다. 인터뷰도 틀에서 벗어난 질문을 던져 난감하게 만드는 채널이 아니었기 때문에 웃으면서 하하 호호 마칠 줄로 알았다.

▷차기작 타이틀이 바로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 소식도 없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팬클럽 조사에서 차기작으로 로맨스를 기다리는 분들이 많다고 나왔는데 고려하고 있는지…….

스스로 보기에는 까칠해진 얼굴이어도 숍에서는 발린 말인지 진심인지 붓는 날이 없다며 곱게 단장해 주었다. 하지만 촬영에서는 약간 심각해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고 휴식기에 대한 질문, 예상했었으나 ‘로맨스’라는 단어가 나오자 저도 모르게 턱이 굳었다.

조금만 연기하면 금방 눈에 물기 가득 어린 ‘사연 있는 남자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데다 이제 삼십 대에 들어선 만큼 로맨스 하나 들어갔으면 하는 의견이 많은 줄은 안다.

소속사에서도 왜 안 권해봤겠나. 꼭 연기가 그럴듯하지 않아서 고사한 것도 아니고, 어릴 때에는 농담 반 진담 반 연기 별로여도 얼굴이면 됐다며 캐스팅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었다.

▷필모에 장르물이 많아서 새로운 모습도 보고 싶다는 염원으로 보이는데 이번에는 어떠신가요?

그런데도 왜 미루고 미뤘냐 하면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쌓인 대본을 읽다 보면 장르물이 더 잘 빠진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수사물이나 심리극, 약간의 판타지를 가미한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긴장시키는 분위기가 대본에서도 묻어나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마다 푹 빠져서 하겠다고 했더니 자연스레 필모가 장르물 위주로 쌓였다.

로맨스도 극적으로 잘 쓰는 유명 작가들이 많았지만, 묘하게 아쉬운 구석이 있었을 뿐이다. 설정이 괜찮아서 스스로 이 대사를 하는 이런 남자가 된다고 생각해 보면 갑자기 좀 마뜩잖아졌다.

▶항상 다양한 작품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 부분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상대 배우께 폐가 되지 않을 때, 더 나이 들기 전에 좋은 작품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말이 아쉽다는 거지 윤설이 출연한 장르물 다 시청률이 잘 나왔다. 연기도 호평이었고 수출도 꽤 됐다. 윤설이 장르물을 한다고 하면 날아간 로맨스의 꿈에 아쉬워하는 동시에 믿고 본다는 반응이 있으니, 여태껏 마음대로 했던 것이다.

차기작에 대한 답은 그렇게 얼버무리고, 휴식기의 자기 관리 방법이나 시간을 보내는 법 등을 차분히 대답했다.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스스로 기억할 수 있는 선에서는 약간 전과 다른 답을 지어내기도 했다. 너무 같은 답만 하는 사람은 재미없으니까.

“프로필이야 이미 충분하고, 좀 더 개인적인 것 알아둡시다.”

묘하게 진 빠지는 인터뷰 다음으로 느지막이 나타난 우형과 함께 운조 쪽 기획사에 들렀다. 그날 냅다 계약서에 서명했다는 윤설의 말에 질겁한 우형이 정신을 차리고 신분증이나 기타 필요한 서류를 전달할 겸, 본인 이직 조건도 들어볼 겸 순순히 따라왔다.

일과 관련된 부분 먼저 정리할 줄 알았는데 여기서도 오전에 했던 것과 비슷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가족사? 이미 들었고. 필모그래피도 설명해 줄 사람이 넘친다.

“생활 패턴, 습관, 음식 기호, 취향, 취미로 뭘 하는지 다요.”

“오늘은 일 관련해서 조율하는 자리인 줄 알았습니다만…….”

“맞습니다. 일 얘기 하는 겁니다.”

“…저,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몇 시에 일어나고 몇 시에 자는지, 대체로 선호하는 식재료는 무엇인지 차분히 대답하는데 우형이 불쑥 끼어들었다. 맞은편에서 비즈니스용 미소를 짓고 있던 박 대표가 최윤이 뭐라 할세라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맞춰야 하는 상황인 건 아는데, 이런 건 같이 시간 보내면서 아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하긴 그도 그래. 두 사람 만난 이야기야 뭐, 우리 회사 방문했다가 첫눈에 반했다고 해도 토 달 사람 없어요.”

“아.”

그런가?

마주 앉은 최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

“보, 보통 사귀는 사이가 다 그렇잖아요?”

“아무렴, 윤설 씨도 연애 몇 번 해봤으면 알잖아. 그런 거 알아가는 게 또 재미지.”

그 침묵에 우형과 박 대표가 서로 맞장구를 쳐주며, 면접 보듯 달달 외워봐야 어딘가에서는 부자연스럽기 마련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윤설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했다.

이런 건 남성이든 여성이든 꽤 편력이 있을 듯한 최윤이 더 잘 알지 않나.

우형이 입을 다물자 박 대표도 입을 다물었다. 혹시라도 기분 상하게 했나 싶었던지 슬그머니 긴 활동 기간 동안 스캔들 없었던 건 안다고, 믿고 있다고 덧붙인다.

“새벽에 놀랄 일이 있었잖습니까. 미리 조심할 수 있는 부분은 다 확인해야죠.”

“하하, 그렇구나. 우리 서리, 연애 한 번 안 해본 애가 맞선처럼 대답하고 있으니 놀랐지 뭐예요.”

“…….”

“그래도 최 대표님이 경험이 많으시니까 어떻게든 자연스러워 보일 거라 생각합니다.”

윤설은 우형의 걱정 섞인 주접을 황급히 차단했다.

박 대표가 무어라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처럼 심란한 얼굴을 했다가 고개를 숙였다. 무언가 자신만 모르는 암묵적인 비밀이 있는 듯한 분위기라 불편했다.

목은 별로 안 마른데 괜히 앞에 놓인 커피를 들어 홀짝댔다. 주말 아침 시간대에 하는 드라마 속 사람은 좋지만 주책인 양가 친척들과 함께 만난 커플이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허, 아이, 둘이 따로 만난 거면 말씀 안 하셔도.”

“…윤설 씨 자택을 습격한 치들이 있습니다. 단순 협박 목적이라고는 하던데, 모르죠.”

“야, 너는 그것부터 말했어야지!”

그리고 윤설 자신은 그 앞에서 갑자기 큰 사고를 쳤다고 고백하는 철없는 자식 역할을 맡고 있다.

우형은 최윤을 만난다는 말에 긴장했던 모습이 무색하게 큰소리를 내며 윤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모양을 본 최윤의 눈썹이 실그러졌다.

“새벽에 벨을 눌러서 놀라기는 했습니다. 금방 해결…해 주셔서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네. 지난번처럼 외인 의뢰 넣은 것까지는 아니고, 은성 일가에서 부리는 사람 썼더군요.”

실제로 신체적 위협이 있었다거나 윽박지르는 말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래도 막상 최윤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단언하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지난밤을 떠올리고 보니 자주 가는 동선이나 손대기 쉬운 기호 식품을 미리 알려달라는 요구가 지극히 상식적으로 들린다. 최윤이 윤설의 안전을 책임지는 게 거래의 핵심이니까. 윤설은 나중에 우형과 함께 서면으로라도 작성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네? 네. 감사합니다.”

최윤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마치 얼굴에 흥건한 정액을 닦아주며 웃던 때처럼.

윤설은 화들짝 놀란 속을 감추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은성이나 덜떨어진 우생학 신봉자 말고도 주의해야 할 쪽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건 컨트롤이 쉬운 문제니까 겁먹지는 말고 알아만 두세요.

두려움에도 선을 그어주는 남자였다.

“일전에 윤설 씨가 나더러 운조 하나뿐인 후계라고 했는데, 그 말이 참 재미있는 부분이거든요.”

그러고 보니 우형은 얼핏 최윤을 두고 ‘막내’라고 했다.

“위로 누님과 형님이 둘씩 있습니다. 전부 친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석적으로야 내가 어르신의 정실부인 하나뿐인 외동자식인데.”

한창때 자식이 없어 양자를 들여 키우고 부렸다는 얘기다. 그리고 다 늦어서 정처에게서 얻은 아들 하나가 최윤이다.

별로 웃을 만한 사정이 아닌 듯한데 정작 최윤은 방만한 자세로 늘어져 앉으며 씩 웃었다.

“옛날 방식 고수하는 분들은 그분들 중 하나 부채질하고 싶은 눈치기도 하고 가끔 어린 막내 놀려주고 싶어 하니까 우리 쪽이라고 무턱대고 믿지 말고 내 입에서 나온 말만 믿으라는 겁니다.”

“도련, 대표님 안전은 총회장님도 신경 쓰시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예에.

윤설과 우형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이직 조건이 좋아 들떠있던 우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뻔했다.

승냥이 피하려다 늑대 소굴로 들어온 거 아닌가. 좆 된 거 아니지?

늘 불안에 떨며 사느니 하나의 돌파구를 찾기 위함인 줄은 알지만 직업적 측면에서 볼 때 배우 윤설의 이적, 스캔들, 의혹 말고 진짜라고 해야 하는 스캔들이 하필 조폭으로 시작한 2세 사업가와의 교제라니. 해일이 몰아칠 마당에 뗏목에 노 하나 들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남이야 어떻든 기분이 썩 좋아 보이는 최윤이 고갯짓을 하자 박 대표가 뒤에서 서류 몇 부를 꺼내 왔다. 하나는 매니지먼트사 직원 계약서, 김우형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빈 부분이 군데군데 있었다.

“다 큰 어른이니 구두 계약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알죠.”

“법적 효력을 기대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잖습니까.”

“계약서가 있으면 법적 효력을 주장할 구실은 생겨요.”

윤설은 법적 주장 뒤에 그 같은 사람들이나 쓸 수 있는 검은 칼이 있음을 짐작하고 최윤의 손가락을 따라 눈을 돌렸다. 없어도 만들겠다는 뉘앙스의 말을 자신 있게 내뱉는, 일종의 오만이 부럽다.

우형이 곁눈질로 빈 공간에 채워지는 내용을 보고 있었지만 특별히 토를 달지는 않았다.

[윤설(본명 윤서리)은 최윤에게 신변 보호 및 교제 사실 공표를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보호의 범위는 공사 활동 구분 없이, 신체 및 정신적 위협을 차단하며 이는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수행한다. 주/야 경호 인력의 선정과 배치는 최윤이 직접 하며 외부에 다시 위탁하지 않는다.

―교제 관계의 공표는 공식, 비공식적 루트로 유출될 시 부인하지 않으며 계약 기간 내 기타 교제 관계(일시적 성관계를 포함한다)를 맺지 않는다.

―신변 보호를 위해 필요한 양측 사적 정보를 요구할 수 있고, 응할 의무가 있다.

―계약서 날인 후 개시 2주 뒤에 윤설의 법정 상속분 중 20퍼센트를 양도하고, 그 외 90퍼센트는 계약의 종료일에 양도 처리한다.

―계약 기간은 다음과 같다.]

“필요한 시간 생각해 봤습니까?”

“9개월로 하겠습니다.”

“새해 명절을 앞두고 끝나겠군요.”

최윤은 윤설에게 직접 기간을 써넣게 했다.

다른 사람들은 숨만 쉬는 가운데 박 대표가 직접 작성한 부분에 위조 방지 씰을 차례로 붙였다. 차례로 서명하고, 우형에게서 계약서 작성할 때마다 사용해 온 도장을 받아 꾹 눌렀다.

이제 끝났다 싶어 숨을 몰아쉬는 찰나, 최윤이 손바닥을 뒤집어 내밀었다.

“손가락이 가는데… 마디는 꽤 굵네요.”

바로 윤설의 손을 잡고 끌어다 엄지에 인주를 묻히고 도장과 비스듬히 겹치게 지그시 누른다. 2부 모두 간인까지 살뜰하게 찍더니 직접 손가락 끝까지 꼼꼼하게 닦아준다.

지장까지 찍는 일은 없었기에 적잖게 당황했다. 손톱 아래까지 닦아주고 지나간 최윤의 손가락이 뜨거웠던 것도 같다.

최윤은 이유를 한마디로 설명했다.

서로 도장 위조당하기 쉬운 처지 아닙니까.

“김우형 씨 회사 직원들하고 인사시켜 주세요.”

“아, 예. 그럽시다. 홍보팀이나 배우 관리하는 매니저들하고는 알아두는 게 좋죠.”

“윤설 씨는 저랑 데이트할까요.”

“데이트요……?”

박 대표가 끝끝내 불안한 기색을 지우지 못하는 우형을 억지로 잡아끌다시피 해서 데리고 나갔다. 보기보다 힘이 좋은 듯해 멀거니 보고 있자니 최윤이 일어나 윤설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데이트’라는 단어를 곱씹기도 전에 윤설의 다리를 베고 눕더니 태블릿을 건넨다. 꺼진 화면을 톡 두드리자 화면이 돌아오며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늘진 건물 안 다수의 인원과 대치한 남자 쪽으로 당겨 찍은 구도였다.

“나는 사격 좋아합니다.”

“…….”

절대적으로 불리해 보였으나 화면 속 남자는 진입로가 하나뿐인 구조를 이용해 순식간에 몇을 해치웠고, 앞서 들이닥친 동료가 실패하자 경계하던 이들이 안으로 작은 폭발물을 던지자마자 뛰쳐나갔다. 시야가 한동안 뿌옇게 흔들리는 가운데 총소리와 타격음이 계속되었다.

연기가 조금 걷힌 뒤에 카메라에 다시 남자가 잡히고 남자는 들고 있던 총을 내던진 후 죽인 자에게서 뺏어 쏘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연사한 뒤 다시 버리고, 이동하며 다른 것을 낚아채고, 쏜다. 기계적인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훈련받은 특수 요원임이 분명했다.

“제대로 훈련받은 알파입니다. 꽤 된 자료이기는 한데, 훈련 기록에 비해 터무니없는 무력이고.”

배경이 바뀌었다. 트인 공간이 나오면서 남자의 몸으로 사방에서 조준경이 닿았다. 그리고 일시에 총탄 소리가 빗발치는 순간, 남자가 위로 뛰어올랐다. 거의 허공으로 사라진 듯 화면에서 벗어난 순간 영상이 끝났다.

윤설은 그와 자신이 같은 알파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완전히 다른 종 같다.

“그 사람 결국 살았습니다. 그리고 윤설 씨보다 열성입니다.”

최윤은 얼떨떨해하는 윤설의 팔을 손가락으로 살살 두드렸다. 등을 토닥이듯 가볍고 상냥한 움직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윤설 씨한테 저런 훈련을 받으라는 건 아니에요, 당연히.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을 오롯이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계속 그 모양이었다.

최윤은 윤설의 손에서 태블릿을 받아 테이블에 올려두고 그 손을 끌어 제 손에 포개었다. 윤설은 우형이 폭로한 대로 연애 경험이라고는 없었으나,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손을 마주 잡았다.

“같이 사격장 가는 것도 데이트라고 합시다.”

“대표님께서 재미있게 하신다면 같이 가겠습니다.”

“…총이 싫으면 칼을 가르쳐줄게요.”

“꼭 그래야 합니까?”

“딱 한 번 할 수 있을 만큼만.”

최윤은 저도 모르게 찌푸려진 윤설의 눈매를 보고도 모르는 척했다. 대신 다른 한 손을 마저 잡아 제 뺨 위에 얹었다. 애교에 가까운 몸짓이었는데 받는 사람이 아직 요령이 없어 정다운 그림이 되지는 못했다.

“나를 함부로 상하게 할 수 없는 상대에게 한 방 먹이는 거 생각보다 시원하거든요.”

어제처럼 불손한 손님이 오면 딱 한 번 그렇게 해요. 그러면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가 너무나 다정해서 터무니없는 일을 시키는데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여기예요.”

회사 근처에는 대로변에 늘어선 프랜차이즈 카페 말고도 개인 카페가 서넛 있었다. 고작 한두 블록 뒤편에 위치해 있지만 덕분에 조금이나마 한적해서 회사 사람들이 애용한다고 한다. 윤설은 최윤을 만나느라 돌아가며 한 곳씩 방문하게 됐다.

“박 대표랑 할 말이 아직도 남았어요?”

“그래도 여기까지 온걸요.”

“기다리는 사람은 나인데.”

“죄송합니다.”

먼저 열애설을 부탁한 사람은 윤설인데 정작 연애 거는 시늉과 아쉬운 소리를 그럴듯하게 하는 쪽은 매번 최윤이었다. 더 아쉬운 사람, 명색이 배우인 만큼 연습 삼아서라도 잘하자고 다짐했는데 막상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떻게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그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엉망으로 휩쓸려 있곤 한다.

“조금만 더 왼쪽으로 앉아볼래요?”

“네?”

뜬금없는 요구에 반문하면서도 손가락이 짚은 방향을 따라 의자를 옮겨 앉자 최윤이 빙그레 웃는다. 그리고 아주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 몸을 앞으로 내밀기에 따라서 거리를 좁혔다.

“찍고 있어요.”

갑작스레 너무 가까워진 기분이 든다. 단지 사실을 알려주는 것뿐인데 속삭이는 소리가 마치 밀어처럼 들려 목덜미가 홧홧해졌다.

굳어있는 윤설을 두고 최윤이 금방 물러나 자세를 바로 하자 괜히 과민 반응 한 것 같아 괜히 멀쩡한 셔츠 깃을 가다듬었다.

“그 정도는 돼야 윤설 씨 얼굴이 잘 나오겠더라고요.”

“빠르네요.”

“얼마 전에 소속사 옮길 것 같다는 추측 기사 몇 개 떴던데, 그거 쫓아온 겸 찍었다고 하면 좋겠죠.”

어디까지가 최윤이 꾸미는 부분이고 어디까지가 우연인지 짐작이 안 되는 것 하며 다른 꿍꿍이 없이도 전부 알려주지는 않아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윤설은 자신만 허둥대다 끝나는 듯한 몇 번의 만남 끝에 겨우 이유를 주워 붙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이럴 거라고.

“그간 출연 같이 한 사람들하고 따로 이렇게 있어본 적 없나 봅니다.”

“네. 없습니다.”

“진짜로?”

“둘이서라면, 네.”

“말도 안 돼요.”

“엮이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구체적인 이상형 한 번 말한 적 없고요.”

“인터뷰… 보셨습니까?”

“대강요. 최근 몇 년간은 아무리 유도해도 철벽 쳐서 눈이 엄청 높을 거란 말도 돌던데.”

윤설은 절로 눈이 창밖이나 천장의 조명 등을 향해 돌아가려는 걸 참으려 애썼다. 그래도 결국은 열없이 커피 잔만 바라보며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당시의 윤설에게는 생각할 여지 없이 당연한 행동이었다. 이유도 있다.

괜히 이상형을 언급했다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는 것도 싫었고, 그러다 은성에서 상대 연예인을 쥐 잡듯 쫓아다니는 불상사라도 터진다면 죄다…….

“그래서 말인데.”

“…말씀하세요.”

“내 얼굴은 마음에 들어요?”

“네. 그, 아니요, 네.”

“연기할 기분이 날 정도는 되면 좋겠습니다.”

“…….”

“얼굴이 잘 빨개지네요.”

또 말려들었다. 남자는 사람을 놀리고 흔들기도 즐긴다.

한 모금이나 마셨을까, 내내 바라만 보던 아이스커피로 화끈한 열기를 식히고 고개를 들어도 최윤은 여전히 윤설을 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찍고 있을 카메라 렌즈에 불그스름한 살갗까지 담길까.

“마음에 안 들면 좀 섭섭하겠지만 윤설 씨가 배우니까 어떻게든 잘될 겁니다.”

“아닙니다, 그런 뜻은.”

“네. 천천히 마셔요. 이것도 들고.”

더 놀리는 말이나 짓궂은 물음이 없어 다행이었다.

키도 큰 남자 둘이 한 접시에 케이크를 두고 잘게 조각내는 모양에 갑자기 남사스러운 기분마저 든다. 별게 다 별일이 된다.

“그렇게 쑥스러움을 타서 로맨스는 어떻게 해요.”

“…안 그래도 요즘 고민하고 있습니다.”

“실례했어요.”

“아니에요. 너무 편한 대로만 했는데 마냥 그럴 수도 없겠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그럼 이참에 연습 많이 해봐요.”

감히 바랄 수 없어 외적인 이상형을 꼽아본 적도 없지만, 최윤의 여유가 묻어나는 말씨나 웃을 때 시원스러운 분위기는 굳이 생각할 필요조차 없이 인상적이었다. 시선이 머물고 기억에도 쉽게 남을 것을 이미 안다.

대놓고 외모를 칭찬할 수 없어 그렇지 되짚어 보면 이런 느낌을 두고 상대에게 매력을 느꼈다고들 한다. 남들 이야기나 드라마에서는 너무 뻔해 잘 와닿지도 않던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밖에서는 뭐 먹을 때도 예민해진다면서요.”

“…….”

“윤설 씨가 말 안 해줄 것 같은 부분만 김우형 씨한테 부탁했습니다.”

“네. 그러셔도 됩니다.”

“잘 먹어요. 대신 걸러줄 사람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최윤이 먼저 한 입 먹은 케이크의 단면을 깔끔하게 잘라 내밀었을 때 어렴풋이 그 흔한 클리셰들이 반복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동요를 느꼈다.

오늘도 태연히 잘, 능숙하게 연인을 연기하겠다는 각오는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입 안에서 녹는 케이크와 함께 달콤한 맛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 * *

곁에서 보기에 윤설은 부쩍 멍하고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도 밤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다니는 탓에 늘 전날의 피로가 씻기지 못한 채로 다니기는 했다. 그럴 때마다 어찌저찌 졸음기를 우수에 젖은 분위기로 좋게 포장해서 넘기고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휴식기에마저 저렇게 풀린 얼굴로 돌아다니면 보는 매니저 입장에서는 걱정스러운 일이다. 찌르면 찌르는 대로 푹 들어갈 것 같은 데다 사람이 드물수록 더 불안해하는 묘한 경계심도 제대로 못 세울 만큼 맹하게 군다. 걱정돼서 무어라 할라치면 그때나 미간에 주름을 잡으면서 너 그냥 집에 가라고 성화다.

“고르고 골라서 이 집 사는데도 위험할 뻔했다며. 어떻게 가냐?”

“최 대표가 붙인 사람 있잖아. 진짜 무슨 일 또 생기면 괜히 너만 다치지.”

와중에 친구이자 오랜 동업자라고 걱정은 한다. 표정은 영락없이 귀찮고 거슬리니 가달라는 거였지만 말마따나 무슨 일 생기면 민간인에 불과한 김우형은 아무런 도움도 못 된다.

절대 죽이면 안 되고 사지 멀쩡하게 데려가야 하는 건 윤설에 한한 이야기라는 것을 우형도 안다. 그래도 그게 아니지.

우형도 계약서 쓴 이튿날 옷만 쑤셔 넣은 트렁크를 끌고 와 드러누울 때부터 그 생각은 했었다. 어차피 그 모양이면 입맛도 없고 잠도 편히 못 잘 텐데 그거라도 봐줄 작정으로 밀고 들어온 거다.

걱정한 것치고는 꼬박꼬박 식탁 앞에 앉고, 졸리지 않아도 제때 자리에 눕는 생활을 하지만 그냥 사람이 맥아리가 없으니 못 봐줄 지경이라 부러 차기작 소식도 많이 물어다 주고 실없는 소리도 하고. 윤설도 휴식기 때마다 큰 사정 없으면 우형이 끼어들어 일상을 환기시켜 주는 데에 큰 불만을 가진 적이 없었다.

“나 나가니까 너도 일 있으면 나갔다 오고 그래.”

“나 참, 누가 누굴 걱정하냐. 어디 가는데?”

“…….”

“아, 어. 데이트?”

그랬는데 그 최윤이라는 작자랑 쿵짝이 맞아 거래를 하고 나더니 종종 나가서 만나고 오고, 늦게 들어오기도 한다. 다녀오자마자 뻗는 날도 종종 있고, 사람이 점점 멍하더니 이제는 윤설이 저더러 바깥에 나가 산책하라는 말을 다 한다.

둘의 거래 내용이 있으니까 같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연출하나 보다, 그래도 그치랑 다니니 밤손님 뚝 끊기고 자신이나 윤설이나 간 졸아드는 날이 없어 앞뒤 안 보고 저지른 일치고는 잘한 결정이다 생각했었는데 뭔가 점점 아닌 기분이다.

우형은 한 몸처럼 붙어있던 윤설의 카우치 위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래, 너 그 사람이랑 데이트하면 뭘 하냐?”

“…별거 있나, 그냥.”

“밥 먹고 영화 보고 카페 가고 드라이브도 하고 교외 산책하고 호텔, 이거는 아니지, 아무튼 그런 거 다 해?”

“보통 그런가?”

“보통 그렇지. 뻔하기는 한데 그냥 그런 거 하면서 같이 있으면 좋은 거니까.”

하긴 너랑 최윤은 사람들 눈에 보이려고 하는 거니까 지루할 수도 있겠네.

뭐가 좀 다를까 싶어서 호기심이 치솟았던 것이 무색하게 심드렁해졌다. 뻔한 레퍼토리든 아니든 얼굴만 봐도 좋고 그래야 기분이 나지, 저게 일하는 거랑 다른 게 뭔가 싶어서였다.

우형은 안 물어봐도 알겠다는 듯 손을 휘휘 저어 윤설을 몰아냈다. 그래도 새빠지게 데리고 다닐 게 아니라 적당히 하지, 그냥 그런 투였다.

* * *

윤설은 최윤이 붙여준 사람이 자처해 모는 차 안에 앉아 재킷 자락을 매만졌다. 우형이 알아볼까 긴장했었는데 다른 주제에 정신이 팔려있어 다행이었다. 평소 윤설의 취향과 맞는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윤설에게 잘 어울리는 것만큼은 분명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옷은 최윤이 데리고 다니며 사준 것도 아니고, 그의 집 드레스 룸에서 몇 번 벗고 입는 사이 건네준 것이다. 관리해 주는 사람이 있겠거니 하면서도 곱게 일렬로 걸린 옷들을 보고 순간 놀랐다. 반대편 벽을 채우고 있는 옷들과 달리 입은 티가 잘 나지 않고 칸칸이 디자인상의 일관성 아래 정돈되어 수집품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잘 어울리네요.’

결정적으로, 입어보라며 내미는 옷들은 평소 최윤 스타일도 아니었고 어울린다 하기에도 애매했다. 사이즈는 윤설에게 잘 맞거나 약간 넉넉하다.

하마터면 윤설은 집에 자주 들르는 애인이 따로 있냐고 물을 뻔했다. 그러나 최윤은 윤설과의 계약 때문에 파트너를 둘 수 없어 늘 욕구 불만에 시달릴지 모른다고 주장하는 남자였고, 그런 남자답게 재킷이며 셔츠를 벗었다 입었다 하는 동안에도 은근히 접촉이 잦았다.

마지막으로 이 옷을 입어볼 때에는 조금 크게 들썩이는 가슴 위를 손끝으로 천천히 훑어 내리며 옷태를 감상했다. 사소한 놀이에 푹 빠진 사람처럼 만족스러워하는 표정과 느리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온도.

떠올리자 괜히 열 오르는 기분이 들어 손등으로 볼을 꾹 눌러보았다. 생각만큼 뜨끈하지는 않다.

자꾸 옷에 묻은 기억을 떠올리는 데에는 한 번도 입은 적 없다는 옷 두어 벌을 그대로 주었으니 만나는 자리에 입고 가는 게 마땅하겠지 싶으면서도 어색한 느낌이 한몫했다. 나중에 무심코 소매 안쪽을 보니 하이패션 브랜드여서 심란하기도 했다.

“옷, 입고 왔네요.”

“아, 네. 마음에 드셨던 것 같아서요.”

안전을 위해 직접 차를 몰아 데려와 준 최윤의 사람이 정중하게 차 문까지 열어주었다. 개인이 받는 호사로는 좀 과분하다.

“윤설 씨 성격에 집에 잘 모셔둘 줄 알았습니다.”

“선물해 주신 거니까요.”

“선물하는 보람이 있겠네요.”

최윤의 입이 웃었다. 대체로 기분 좋을 때 티가 나게 웃는 거라고 들었지만 윤설에게는 어쩐지 불안한 신호이기도 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셔츠 아래로 손을 밀어 넣을 때나 한참 버겁게 따라가는 중에 윤설을 골리고 싶으면 나오는 표정이니 또 무슨 궁리를 하고 있을지 몰랐다.

데이트의 실상이 대개 그렇다. 7할은 윤설이 최윤의 속도를 맞추기 위해 바빠지고, 최윤이 윤설을 놀리며 재미를 챙기다 마지막에 후하게 칭찬해 주는 것으로 함께 있는 시간이 끝나는 것.

누구를 사귀는 처음은 다 이런가.

“천천히, 많이 들어요.”

“네. 대표님도 오늘… 잘 어울립니다.”

식사 자리이기 때문인지 정장 재킷의 단추를 풀던 최윤의 눈썹이 들썩였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끝까지 단추를 풀어내고 크게 숨을 고른다.

대답 없이 수저를 들기에 윤설도 가까이 놓인 타락죽을 입에 댔다. 자그마한 그릇에 잣 두어 개 동동 떠있는 게 앙증맞지만 두 사람에게는 입맛 돋우기도 민망한 한 입 거리였다. 그래도 윤설은 반 수저씩 천천히 씹어가며 먹었다.

오늘 차림이 잘 어울린다는 말은 의례상 한 말이 아니었는데.

최윤의 몸은 탄탄하고 비슷한 부피의 근육이라도 더 조밀하게 짜여있어 슈트가 늘 입는 옷처럼 어울렸다. 머리를 아주 넘기고 보니 잿빛인 부분이 조금 눈에 띌 뿐 제법 엄격하고 신뢰감 있는 사업가 느낌이 난다.

영화적 구도에 갖다 대기 좋은 훤칠하고 매끈한 남성미 나름, 그러니까 단순히 표현을 빌리자면, 색다른 매력이었다.

“역시 이 차림은 불편하네요.”

그 보기 좋은 그림을 최윤은 조각조각 찢어 던지고 있었다. 식사가 진행될수록 재킷은 물론이고 소매도 걷어 한참 느슨한 모양이 됐다.

“자리가 중요해도 그렇지, 고루하고 노티 나잖습니까.”

“…어두운 정장이 좀 딱딱한 느낌이기는 하죠.”

“다 똑같이 입고 서있으면 순, 옛날 깍두기도 아니고.”

위치가 좋아서 고른 거지만 하필 한식당이기도 했다.

윤설은 뒤늦게 최윤이 투덜대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묻지 않는데 불호를 나타내는 일은 많지 않아서 계속 듣고 있었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그대로 입고 약속 장소까지 온 걸 보면 시간이 여의치 않았던가 보다.

하지만 평소의 세미 캐주얼이나 무슨 운동을 하고 온 건지 모를 테크 웨어 비슷한 옷보다는 어쩐지 이쪽이 좀 더…….

적당하게 잘 잡힌 근육이 실루엣으로 보이는데, 팔을 걷고 목을 죄는 단추를 푼 채 씨근대면 억지로 금욕적인 거죽을 쓰고 있는 짐승처럼 느껴진다.

수저를 내려놓고 목을 축인 최윤의 손이 윤설의 자리 쪽을 톡톡 두드렸다.

“취향인가 봐요?”

“아니요. 그런 거 아닙니다.”

“빤히 보던데. 취향이면 어떻습니까.”

“대표님은 취향이 어떻게 됩니까?”

답하기 싫으면 같은 질문을 한다. 최윤에게 배운 것이다.

“제 취향은 단순합니다. 예쁜 거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 좋아해요.”

보통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러나 이다음은 남들과 다르다는 걸 한번 들어 기억하고 있다.

그의 집 거실에서 이 층으로 이어지는 복도 면을 문외한도 알 법한 유명 화가의 연작 중 한 조각이 덮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발이 멈춘 윤설에게 최윤은 아름다워서 갖고 싶었던 첫 번째라고 말해주었다.

‘저걸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주는 것에 좋다 싫다 의사 표현만 하면 알아서 맞춰주니 구태여 뭘 조르지 않던 최윤이 처음으로 뜨겁게 매달리는 걸 본 총회장은 크게 웃으며 그림을 구해 오라 명했다. 당시 가격은 부유하게 자란 최윤에게도, 십여 년이 훌쩍 지나 그 이야기를 듣는 윤설에게도 상상 이상이었다.

그때 최윤은 저런 걸 더 많이 가지려면 닥치는 대로 성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보니 경쟁하고 집어삼키고 욕망하는 성질은 최윤에게 아주 잘 맞는 옷이어서 일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사람에게도 같은 기준이 적용된다고 말하는 것일까?

“…생각해 보니 대표님이랑 간 곳은 음식까지 다 보기 좋았네요.”

“자주 가는 곳은 아무래도 그렇죠.”

“유학 가 계셨던 동안 지낸 곳은 어땠습니까?”

“아주 깔끔을 떨고 다녀서 좋은 것만 눈에 담았습니다.”

유럽 쪽이지만 학교나 사사할 교수 자체보다는 지낼 도시가 중요했다고 인정한다. 도회적인 깔끔함과 계획도시도, 오래된 곳이 사랑받아 풍광의 일부가 된 곳도 좋지만 오만 인간 군상으로 추저분해진 거리를 걷고 싶지는 않았다는 말에서 드물게 강한 불호가 느껴진다. 오늘은 별스럽게 그의 이야기를 많이 얻어 듣는 날인 모양이다.

“…윤설 씨는 어디로 가고 싶어요?”

“네?”

“유학 말입니다. 전에 지원했던 곳이 몇 군데 있는 걸로 아는데.”

“미국에 있는 대학들이었습니다.”

“지금 간다면 같은 곳을 고를 겁니까?”

“지금은, 지금이라면 유학은 안 갈 것 같습니다.”

“안 좋은 기억 생각날 것 같아서요?”

“아니요, 공백이 길면 어려워지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그쪽 계획은 없던 걸로 해야겠네요.”

윤설은 한 박자 뒤에 고개를 끄덕인다.

갓 성인이 되자마자 해외 대학에 원서를 넣고 도피성 유학 계획을 세웠던 것은 사실이다. 공권력이 강한 나라, 유명한 엘리트 코스의 일환이라 정재계 인사들의 자녀가 학생으로 왕왕 들어가는 대학들로 고르되 희망 전공은 철저하게 학문적인 쪽이었다.

경영과는 무관한 공부를 하고 한발 물러서서 살고 싶다는 신호나 다름없어 몇 년의 유예 기간을 벌 수 있을 줄로 알았다.

그러나 공항에 도착해 보니 비행기 표는 취소되었고, 카드며 계좌의 한도가 얼마든 잔여 좌석이 없다는 말만 반복해서 들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생각했을 때 전화를 받았고, 저편에서는 말 한마디 없이 윤설을 위해 자기 명의로 입학 경로를 알아보고 숙소를 구한 사람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혹시 몰라 제3국을 신분을 거쳐 가명 및 차명 계좌를 터주려던 브로커에게 연락했지만 자연히 연결이 끊겼다.

너른 공항 한가운데에서 막막함을 느끼다 제 발로 돌아왔고 그 사람은 남은 삶을 후유증과 함께 괴로워하게 되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지.

그러려고 최윤과 만났다.

…그런데도 정작 제안을 가리고 있다니.

윤설은 무엇이든 덧붙이려 입을 열었다. 최윤은 신경 쓰지 않고 디저트를 받아 자리로 밀어준다. 그리고 제 몫을 뜨기에 다시 한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따로 준비하시던 일이 틀어진 거라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때도.”

“압니다. 자.”

불쑥 코앞으로 작은 숟가락이 다가왔다. 다른 손님은 없는 식당이라지만 퍽 민망스러웠다.

“얼굴이 안 좋아졌어요.”

어디까지 뒷조사를 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같았다. 고개를 내밀어 받아먹자 최윤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조랑말 구경이라도 갈까요. 꽤 힘이 드는 일이니 더 잘 먹어야 할 텐데.”

“승마장에 갑니까?”

“방금 생각났는데 괜찮은 것 같네요.”

“예에…….”

묘하게 말끝이 늘어진다.

같이 식사할 때 최윤이 몇 번인가 윤설더러 잘 먹어야 한다고 한 적이 있다. 키도 체격도 본인과 비슷한데 먹는 양이 너무 적다면서.

굳이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반복되자 의문이 들었다.

체중 관리 할 필요가 없는 동년배 남자는 다 저 정도로 먹나?

당장 친구인 우형을 생각해 봤지만 그래도 많았다.

최윤은 운동량이 문제였다. 할 줄 아는 스포츠가 많은 것 같았고, 좋아했고, 그러고도 대략 일주일에 나흘씩은 윤설과 몸을 부대꼈다. 윤설은 비로소 알파가 튼튼한 것 같아서 마음에 든다는 괴상한 칭찬의 의미를 깨달았다.

“안 내키면 다른 것도 좋으니까 말해봐요.”

“실은, 처음부터 보기 좋은 걸 좋아한다고 하셔서 뭘 보러 다니는 일이 많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야외 활동이면 수행원 붙일 구실이 많아지기도 하고. 싫었습니까?”

“아무래도 잦아지니 피곤한 것 같아서요.”

그러니 어지간하면 최윤이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 실려 다니던 윤설도 결국은 못 당하겠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잘 자지도 못하면서 스케줄을 소화해 내고 밤샘 촬영도 마다하지 않기로 이름났던 것이 무색하게 나른한 기운을 떨치기 어렵다.

최윤은 손가락으로 둥근 고리를 만들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직 구멍에는 넣어본 적도 없으면서 그래서야 되나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대표님 표현대로라면…….”

거기에 더해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잘 안 들린다는 듯 군다. 이럴 때의 최윤은 상대하기가 버겁다. 익숙해질 것 같지도 않다.

“…여러 번 싸고, 갔잖습니까.”

“아. 이제 알아들었어요.”

배우라 발음이 분명하고 또렷하네요.

외모나 운동을 곧잘 배운다는 말 외에 새로운 칭찬이었는데 어쩐지 음담패설을 할 때와 같은 울림이라 눈을 가리고 말았다. 마른세수하는 시늉으로 잠시 열을 식히고 나니 잔에 물이 가득 차있었다.

“원래 사귀는 분들하고 다 이렇게, 하십니까?”

“음.”

내뱉고 보니 불퉁한 느낌이다. 윤설은 또 한발 늦게 정정하려다 그만두었다.

최윤은 딱히 기분 나빠 하지 않고 윤설의 손바닥을 살살 긁으며 웃기만 했다. 기대하지 않은 요령이나 애무를 받았을 때도 이런 표정이었다. 어쩐지 최윤의 예외적인 표정은 모조리 침대 위에서 먼저 배운 것 같아 자괴감이 들었다.

“솔직히 윤설 씨가 잘 따라오는 편입니다.”

“저보다 능숙하실 분이 너무하세요.”

“밖으로 데리고 다녀본 일은 별로 없어서요.”

그러면 뭘 하고 사귀었다는 건지.

이상하게 자꾸 궁금하다. 그럼에도 윤설은 다음부터 실내에서 만나자는 말에 넘어가 조랑말을 보러 갔다.

달래듯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질겁했다가도, 눈썹이 길고 순한 말을 쓰다듬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가 어설프게나마 말을 타고 걷는 데 성공했다. 최윤이 또 지치고 피곤한 윤설 씨가 못하는 게 없다며 실컷 놀렸는데도 잠자코 듣기만 할 만큼 털 있는 짐승과의 만남이 괜찮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피로가 쌓여있었는데 낯선 경험을 하고 긴장까지 풀리자 최윤의 차 안에서 졸고 말았다. 그의 집 근처에 이르러 볼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겨우 깼으니 졸았다기보다도 푹 잔 셈이다.

이럴 정도면 확실히 컨디션 조절이 필요하다는 신호다. 오늘은 뭘 하자고 해도 안 되겠다고 사정해 봐야겠다 다짐하는 윤설의 등 뒤로 최윤이 팔을 둘렀다.

“안아줄까요?”

“다치십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차에서 집을 못 건널까. 낮에 툴툴대는 모습 좀 보였다고 부러 윤설을 더 놀리는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아도 만날 때마다 민망할 일은 차고 넘쳤다. 놀리는 재미가 좋다고 허리라도 삐끗하면, 글쎄, 정력은 덜 소진해도 신변이 걱정되니 결국 자기만 손해다.

몇 번 드나들었다고 익숙한 현관에서 자연스레 위층 층계 쪽으로 향하는데 최윤이 불렀다. 1층 구조는 스치듯 지나가며 봤을 뿐 최윤이 보여주거나 윤설 혼자 내려보내지 않아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왜인지 욕실 쪽으로 들어가 손만 씻고 나오고도 걸음이 빨라 바삐 따르고 보니 간이 문이 달린 방 한 칸이 나왔다.

“…고양이가 있었네요.”

“윤설 씨보다 먼저 들어오긴 했죠.”

아직 어린 듯한 줄무늬 고양이가 둘, 조금 더 크고 검은 몸에 발만 하얀 고양이가 하나. 꼬리를 살랑이며 최윤을 피해 물러나지만 아주 질색하고 달아나지도 않는다.

망설이며 다가가 너른 방 겨우 입구 쪽에 기대앉자 최윤이 작은 상자를 밀어주고 구석에서 낚싯대를 꺼내 들려주었다. 꽤 여러 가지였는데 하나는 시범용으로 흔들어 보이고는 동작 패턴을 두어 개쯤 더 보였다.

“한 번에 한 놈씩만 놀아주고, 끝나면 안에 있는 간식 조금만 줘요. 이 옷 좀 어떻게 해야겠습니다.”

“네. 전부 대표님이 키우시는 건가요?”

“마땅한 주인이 생길 때까지만.”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너무 바쁜 가족은 사람에게도 별로니까요. 책임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면 처음부터 안 들이는 게 맞습니다.”

“하긴 저도… 맞는 말이네요.”

윤설은 최윤이 나가고 나서야 낚싯대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가까이서 작은 동물들과 어울리는 건 잘해봐야 길에서 마주친 떠돌이나 촬영장에 나온 ‘배우’들이 전부라 좀 들뜬 것 같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이런데 최윤의 눈에는 아주 훤했겠지.

아마 말을 봤을 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긴장하고 경계해 봐야 사람 상대하는 데 능수능란한 쪽과 동등한 계약 상대가 되기 어려운 줄은 안다. 알지만 너무 알기 쉬운 사람이 되는 것도 기껍지는 않고, 그냥.

윤설은 모호한 감정과 피로 속에서도 부지런히 고양이들과 놀아주었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꽤 오래 움직였는데도 좋다고 풀쩍 뛰어오르는 걸 보고 있으니 심란한 채로도 그럭저럭 좋았다. 윤설에게는 냄새가 이상한 간식을 맛있게들 받아먹는 걸 보며 나중에 반려동물쯤은 함께해 주는 삶을 가질 수 있겠지, 막연히 기대해 본다.

이유 모르게 가슴 뛰는 박자가 들쭉날쭉한 느낌이 다 그 기대 때문인 모양이다.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어떤 일상의 가능성.

“자고 가요.”

“오늘은 제가 좀…….”

“그냥 자는 겁니다.”

자고 가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어땠더라.

집에 우형이 들이닥친 마당에 외박하는 모습만은 보이기 싫어 어떻게든 돌아가고는 했다. 윤설 입장에서는 ‘구멍’에 넣든 안 넣든 섹스를 한 것이나 다름없는 일 다음에 최윤을 한참 보고 있기가 두렵기도 했다.

“김우형 씨에게는 연락했습니다.”

우형이 무슨 오해를 어떻게 더 할지 짐작도 안 된다. 그러다 문득 더럭 겁이 났다.

“우형이 혼자 그 집에 있으면 위험합니다.”

“같은 라인 샀습니다. 거기서 봐줄 거예요.”

“집을 사셨다고요?”

“안 되면 말자는 식으로 하는 일 아니래도.”

한 층에 두 집뿐인 설계에 이웃을 몇 번 보지도 못했지만 설마하니 내보냈을 줄은.

더 고집부릴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최윤의 집이 넓고 방은 넉넉하지만 침실에서 자게 될 거란 건 묻지 않아도 알았다.

어린 날의 최윤이 처음으로 탐냈다던 그림에 비하면 자그마한 캔버스가 보인다. 누가 보아도 같은 작가, 아니라면 모작일 그림은 침대에 앉아있으면 정면을 조금 비껴가는 방향에 걸려있었다.

저것도 그의 부친이 늦둥이 아들을 귀애해 사준 것일까. 성장한 최윤이 제 손으로 얻은 힘의 전리품으로 걸어둔 건지도 모르겠다. 침실은 누구에게나 가장 편안하고 내밀한 공간이니까.

어느 순간 온 집 안의 불이 일시에 사그라들며 온통 새카맣게 되는 바람에 두루뭉술한 생각의 끄트머리만 물고 뒤로 누웠다. 마지막으로 아래층 고양이를 살피고 온 최윤이 침대로 들어왔다. 이토록 어두운데 어떻게 찾아왔나 싶을 정도였다.

주변이 조용하고 도시의 불빛이 새어들지 않는 곳이면 어디라도 이럴 수 있겠지만 왠지 낯선 어둠이다.

“그냥 잔다고, 하셨는데요.”

“이불 나눠 덮고 이 정도는 그냥이에요.”

“주무셔야 하는데 가슴을 왜 만지십니까.”

“만지기 좋게 생겨서요. 잠이 잘 올 것 같아서 해보고 싶었습니다.”

나른하게 잠겨가는 목소리와 영 딴판으로 뻔뻔한 소리였다. 모로 누워 귀 뒤로 닿는 일정한 숨과 감아 오는 팔만으로도 충분히 잠을 설쳤을 터다.

윤설은 만지기 좋게 생겼다는 표현이 선뜻 와닿지 않는 데다 부드럽게 매만지며 기분 좋은 듯 숨소리가 잦아드는 최윤도 이해가 안 갔다. 금방 잠들겠거니 하는 대로 두다 보니 어쩌면 마사지받을 때의 약한 압력과 비슷한가 싶고, 최윤이 자면 손을 내려두고 자신도 잠들 것처럼 나른해져 갔다.

“…아, 아파요.”

스치듯 지나기만 하던 유두를 잡아당기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최윤은 윤설이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여 심이 선 돌기를 문질렀다.

윤설은 전에 없이 몸을 뒤로 빼며 최윤을 살짝 밀어냈다. 미는 시늉에 가깝지만 아무튼 싫어하는 티를 크게 낸 적이 없던 걸 감안하면 확실한 거부였다.

“그, 거의 아무 느낌도 안 듭니다. 아파요…….”

“미안해요. 물고 빠는 건 나쁘지 않아 했던 것 같아서.”

“다른 것 같습니다. 만지기 좋지도 않고, 저보다는 대표님 가슴이…….”

“…그렇게 생각했나요? 마침 손 올리고 있네요.”

어둠이 눈에 익고 나서도 이목구비가 보일 정도로 구분되지는 않지만 그는 분명 웃고 있다.

윤설은 행동을 저지한답시고 짚은 게 하필 가슴팍이라는 데 당황했다가, 키가 비슷하고 체격도 비슷하니 몸을 돌리면 당연히 가슴에 닿을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슬그머니 손을 떼려는 순간 최윤의 손가락이 손등 위로 기어 올라왔다. 엉뚱하게도 헛숨처럼 마른침을 삼키게 된다.

“글쎄, 나도 큰 가슴 밝히는 기준에 들 정도는 아닌데. 어떤 점이 좋아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긴.”

살짝 누르고 있을 뿐 손의 움직임까지 그의 마음대로 하는 건 아닌데도 옴짝달싹을 못 했다. 눌린 손바닥이나 손가락을 바르작댈수록 최윤의 가슴을 자극하는 행동에 가까워지기 때문이었다.

골격 위로 근육을 틈 없이 붙여놓고 매끄러운 겉피를 씌워 굴곡처럼 보인다 생각했는데 막상 만져보니 적당히 말랑한 것 같기도 하다.

최윤의 말마따나 상체를 핥고 빨아들이는 식의 애무를 배울 때는 훨씬 단단한 느낌이었는데.

멍하니 지난 기억을 떠올리던 윤설은 유두가 손가락 사이로 걸려 흠칫 놀랐다.

그때 여기를, 공갈 젖꼭지 문 갓난애처럼 허겁지겁…….

무심결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최윤이 숨을 들이켜며 신음 소리를 낸다.

“그러려던 게 아니라… 죄송합니다.”

“아아, 아니었어요?”

“네. 정말로… 주무세요.”

그제야 윤설과 겹쳐있던 손이 허리로 옮겨 갔다. 아무런 함의 없이 느슨하게 안고 잠들 태세길래 안심하고 편한 자세를 찾아 뒤채자 스치는 결에 또 낮고 달아지는 신음 소리가 흘렀다.

조금 뒤에야 장난이라고 말해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번에는 정말 침대에서 달아났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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