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15)

1.

눈을 뜨니 흔들리는 어둠 속이었다. 의식이 돌아온 순간부터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살려……!”

“벌써 깼어?”

“입 막아, 조금만 더 가면 돼.”

촬영이 끝난 후 현장을 방문한 VJ와 인터뷰까지 했다. 늦은 것을 지나 아예 새벽이었기에 로드 매니저가 올 때까지 잠깐 차에서 눈이라도 붙이고 있으면 되겠거니 했었다.

교대 시간인 것도 알고 있었고, 팀으로 일한 지 오래된 매니저들은 교대해도 늦는 법이 없었다.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정신 들고 보니 웃기지도 않다. 차 문 닫고 밖에서 안 보이게 처리해 뒀으니 잠깐은 안전할 거라고…….

“더 넣으면 위험한데요.”

“괜찮을 거랬어. 얼른 찔러!”

“죽이라는 거 아니었잖습니까?!”

지금쯤이면 차량 도난 신고라도 했을까. 스튜디오는 불이 꺼졌고, 차도 자신도 없으니 어디에라도 연락을 넣었을 것이다.

정체 모를 차량 납치범들이 마취제인지 수면제인지를 더 쓸지 말지로 다투는 동안 남자는 죽을힘을 다해 앞좌석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결에 주사기를 들고 있는 쪽이 허둥거리고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똑바로 하라느니 잡으라느니 대충 그런 소리 같았다.

“씨, 평소에 약이라도 하고 사나. 얌전히 갔으면 좋았을 일을.”

거기다 그냥 투덜거림이라기에는 선득한 소리가 더해지자 머리를 굴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작정 다리를 움직여 앞좌석 쪽으로 꾸역꾸역 넘어가 머리에 뭐가 부딪히든 운전대 쪽을 들이받았다.

머리 위에서 욕지거리가 들리며 힘이 잔뜩 들어간 손이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고 떼어내려 애썼다. 남자는 애벌레처럼 몸부림치다 손목을 죄던 뭔가가 뚝, 끊어지는 느낌이 들자마자 나무토막처럼 굳은 팔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끼이이익.

“야, 앞에! 앞에 차!!”

“잡아!!”

“이 새끼 미친 거 아니야! 팔! 팔 잘려!”

차바퀴가 미끄러지면서 차체가 크게 돌아갔다. 방향이 바뀌자 노란빛이 차 안을 훑고 지나갔다.

주차장의 형광등이 아니다. 어딘가 도로로 빠진 것이다.

남자는 지금 달리는 차를 멈추고 빠져나가야 했다. 한패가 더 많은 곳까지 가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덜 끊어진 케이블 타이 가닥이 달랑이는 왼팔을 뻗어 반쯤 열린 창을 붙잡고 매달리자 아우성이 더 커졌다.

잠긴 문, 도어 록 여는 키가 이쪽에. 이쪽이 아닌가.

약 기운이 남아있어 빛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고, 창문이 흘러내리는 듯 윤곽이 흐렸다.

끼이이익!

헛손질 여러 번에 운 좋게 뭐가 눌렸는지 창문이 내려갔다. 남자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헤드라이트 빛에 눈을 꼭 감고서도 물에 빠진 사람인 양 허우적대며 창밖으로 상체를 빼냈다.

탕, 탕.

“저기요.”

“저기요, 눈 뜨고 나 좀 봅시다.”

누군가 차 앞인지 트렁크인지를 두드렸다. 이어 차를 두드린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일행인지, 반대편에서 온 사람이 축 늘어진 상체 아래로 몸을 숙여 볼을 쥐고 눈꺼풀을 억지로 벌렸다. 너무 눈이 시려서 도리질 치자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빨리 도망가야 하는데.

“아이고. 도련님, 그 사람 살아있는 거죠? 그 사람부터 건집시다.”

“살아있어요. 그림이 이상하네.”

“살려, 도와…….”

늘어지듯 창밖으로 상체만 걸린 꼴에, 다리 아래로는 운전대를 잡고 있던 납치범에게 부대껴 엉망으로 구겨져 있자니 불편하고 몸이 다 아팠다.

말을 건 사람, 남자, 모르는 이가 몸을 일으키자 그림자가 어지러운 시야를 조금이나마 가려주었다. 그가 팔 아래 손을 넣어 쑥 잡아 뽑듯이 건져내고, 다른 사람이 거드는지 창틀에 부딪혀 가며 나오는 다리를 받아주는 손이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과 어떤 사이예요?”

“어떻게 할까요?”

“음.”

남자는 잘 가누지도 못하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살려달라, 도와달라, 아는 사이도 아니다.

누가 보아도 수상해 새벽에 주취 차량인가 싶었는데 다시 보니 모양이 뻔했다.

“데리러 올 사람은…….”

“얼굴이… 맞네, 배우 윤설…….”

“한국 치안 좋아져서 조심해야 한다더니.”

윤설은 두 사람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엉겁결에라도 도움을 받은 셈인데 이 사람들은 지나치게 태연했다.

그냥 신고만 해주면, 매니저나 회사에 전화만 해주면 된다. 그 이상은 저쪽에게도 위험할 수 있었다. 경고하려 하는데 목에서 자꾸 쉰 소리만 나왔다.

공포 영화에서나 들어봤음 직한 소리로 쇳소리 섞어 무어라 팩 지르고 기침하는 설을 두 사람이 도롯가에 바로 눕혔다.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 할 말만을 나누었다.

“태워.”

* * *

한 달이 조금 더 지났다. 윤설은 새벽 귀갓길의 사고를 이유로 보름을 쉬고, 무리가 가지 않을 만한 스케줄 위주로 활동을 재개했다.

기사와 인터뷰 장면은 여러 번 방송을 탔지만 사고 현장은 어느 경로로도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운전자였어야 했던 매니저는 다치지도 않았는데 윤설보다 오래 병원에 갇혀있었고, 시퍼런 멍으로 여기저기 물들었던 윤설 본인은 무엇에 홀린 듯이 그날 밤의 사고만을 쫓아다녔다.

주차장에 있던 윤설의 차를 강탈한 자들이 빠진 곳은 공항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청사 진입 전 너른 공지에 드문드문 공사 현장으로 파헤쳐진 곳의 가건물들을 이용해 쉽게 옮기려는 계획으로 보였다.

고용인을 포함하여 어릴 때부터 설의 일을 봐준 측근은 걱정했으나, 윤설은 본인을 통해 이득을 볼 사람을 기준으로 배후를 찾자면 끝이 없다는 생각으로 추적 조사를 멈추었다.

대신 사고 당일 매니저에게 연락해 준 사람들의 행방을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그 자신도 매일 아침, 잠들기 전 지면 혹은 인터넷 뉴스를 뒤져가며 사고사나 신원 미상 사망자 기사가 없는지 확인했다.

이렇게까지 손을 대는 자들은 꼭 윤설에게 도움을 준 사람에게 불행을 안겨주고 조롱하듯 그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다. 운 좋게 빠져나갔을지 몰라도 네가 운명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가진 삶들이 있다고.

윤설은 익명의 후원으로 알량한 보상이나마 돌려주거나, 그마저도 할 수 없을 때에는 애써 외면했다. 사지 멀쩡하게 살아남아 원하는 대로 살고자.

대외적으로 차 사고를 수습하고, 뒤로는 흔적도 없이 증발한 목격자와 불에 타고도 기사에서는 쏙 빠져있는 차량에 대해 파헤치는 정신 없는 날 가운데 소속사 대표가 재계약은 어렵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윤설만을 두고 보면 아쉬워 죽겠다는 심정이지만, 윤설을 둘러싼 사건 사고가 일개 기획사에서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 곤란하다는 거였다. 길게 좋은 말로 돌아갔지만 결론은 그랬다.

뿐만 아니라 소리가 샌 다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집안에서 온갖 성화가 빗발쳤다. 걱정으로 시작해서 그러니 집에서 붙여주는 사람 달고 다녀라, 일을 쉬어라 등 순전히 저들만 좋은 말이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윤설은 기다렸다는 듯이 겹치는 재앙에 안정은커녕 바짝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대표님 뵙기로 약속돼 있습니다.”

윤설의 차량 사고가 있던 시각 해당 도로로 접어든 차량 중 번호를 확인할 수 있는 차는 모두 소유주를 확인했다. 전후 동선이나 거주지, 직업까지 샅샅이 뒤져 조금이라도 이 일과 연관이 있을 법하면 사람을 보내 확인했다.

전부 찾는 사람이 아니어서 다음으로 그 시간대 입국편 항공 탑승자 명단을 뒤졌다. 대중교통, 택시 이용자, 다른 노선을 이용한 사람을 제하고 나니 몇 안 되는 대상자가 새로 나왔다.

“안쪽에서 기다려달라고 하시네요. 바로 오신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윤설은 지금 그중 한 명을 직접 만나러 온 참이다. 이제 짚이는 곳이 얼마 없기도 했고, 겸사겸사 새로 옮길 기획사와 이야기도 나눠봐야 하는 상황이라 남 보내느니 자신이 오는 편이 나았다.

러브 콜은 많이 들어왔다지만 인기 있고 자리 잘 잡힌 배우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신생 기획사거나, 집안 입김이 들어가 있거나,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중역으로 들어가 있거나… 결격 사유가 가지가지다.

이곳도 뒤로 도는 소문은 약간 찜찜한 감이 없잖아 있다. 그래도 그나마 규모나 운영상 흑자 전환된 시기가 적당했고, 적어도 통화상으로는 대표와의 대화가 편안했다. 이럴 거면 1인 기획사를 차릴까 하다가도 남의 회사에서 받아준다 할 때 일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걸어 다니는 신 포도를 자처한 것이다.

“…….”

사무실이라기에는 좀 넓고 어두운 방 안에 오도카니 앉아있자니 새삼 제 처지가 다 뭔가 싶다.

“나 누구 부른 적 없는데.”

“반갑습니다. 오전에 통화한…….”

그래서 절실하게 찾았으되 까맣게 잊고 있던 남자의 목소리를 다시 들었을 때 숨이 턱 막혔다. 놓칠 수 없다는 필사의 일념으로 보낸 시간들이 등을 거칠게 타고 내려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뚜름하게 선 긴 다리와 품이 넉넉한 셔츠 차림, 피어싱이 서넛씩은 달린 귀 밑으로 턱선이 보기 좋을 만큼만 단단했다. 전반적으로 낮은 목소리보다 산뜻한―혹은 불량한― 인상이었다.

대표의 목소리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 착각했을 리가 없다. 남자는 서슴없이 다가와 윤설을 보았다. 키가 비슷해 망정이지, 저쪽이 더 컸으면 내리깔아 보는 듯한 시선에 기분 상하지 않으려 무진 애를 써야 할 뻔했다. 꼴사납게.

남자의 정수리 부근부터 귀 언저리까지 어두운 잿빛에 가까운 탈색 흔적이 있고 외꺼풀이지만 시원하게 트인 눈을 가졌다. 유행을 타는 생김새는 아니었지만, 고전적인 미남이라기보다는 약간 변칙의 영역에 있는 남성미를 가지고 있었다.

윤설이 저도 모르게 훑어봤듯 남자도 윤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품평하는 듯한 시선쯤이야 연예인으로 살면서 지겹도록 많이 받아봤는데도 어쩐지 노골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안 불렀지만… 되게 예쁘네.”

“…윤설 씨 왔다면서요? 천천히 오셨어도 되는데. 자자, 우리 표준 계약서 하나 줘봐.”

“이쪽이 대표님…….”

“아이고, 네. 그쪽도 대표님이고 저도 대표입니다. 앉아요.”

오히려 윤설을 당황스럽게 만든 건 태연하게 대표가 둘이라는 소리를 하는 ‘대표님’과 부정도 긍정도 없이 상석에 걸터앉는 남자의 태도였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약과 폭력에 절은 흐린 기억 속에서도 의심 없이 바로 확신할 수 있는 단 하나였다.

그날 밤 윤설을 차 밖으로 건져내고 홀연 사라진 목격자.

차가 불타고 납치를 시도했던 패거리는 시신이 전소된 후 정식 신고 절차 없이 처리됐다는데, 우연히 마주쳐 윤설을 건져낸 목격자는 멀쩡히 살아 돌아다닌다. 윤설이 신변의 위협을 겪을 때 얽힌 인물 중 최초였다.

“우리 윤설 씨가 소속사랑 계약이 3개월 정도 남았고, 이적할 곳을 찾는다고 하니 잘됐죠.”

“…네. 들어오는 제안서 다 확인해 보고 미팅 말씀드린 겁니다.”

“잘 생각했어요. 오늘 당장 도장 찍자는 건 아니고, 조건을 최대한 맞춰줄 의향이 있으니까 터놓고 이야기 나누다 가세요. 그다음에 결정하면 됩니다.”

매니저, 윤설과 각각 통화한 대표는 다 나이가 있는 쪽이었다. 대표가 소속 배우 중 중견급 모 배우의 계약서와 같은 거라며 내민 서류를 손에 쥐고도 뜻밖의 상황에 글자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읽을 수는 있는데 이해가 안 되는 전문 서적을 보는 것처럼 집중이 안 됐다.

저만치에서 남의 일인 양 듣고 있던 남자가 불쑥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저 친구 유명해요?

다소 무례한 질문에도 윤설이 멍하니 보고만 있자, 나이 든 대표가 기가 막힌다는 듯 왈칵 성을 냈다.

“유학 가시기 전에도 유명했거든요!”

“…외국에 계셨으면 모르는 게 당연하죠.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셔서 그런 거니까.”

어느새 얼음물이 든 잔과 테이크아웃 커피 컵이 설의 자리까지 대령돼 있었다.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정신을 붙잡고 두 번씩 읽고 나서야 계약서에는 별문제 없다는 걸 이해했다. 업계 평균이나 최근 동향을 생각하면 오히려 조건이 괜찮은 편이었다.

윤설을 꼭 데려오고 싶은지 연신 싱글벙글인 대표를 멀뚱히 바라봐도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냐는 물음뿐이다. 윤설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일하는 매니저랑 같이 옮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몇 번 말고 바뀐 적 없죠, 아마?”

“네. 적응도 빠르고 저랑 잘 맞아요.”

“그게 뭐 어려울 일인가. 다음에 같이 봅시다.”

“네. 그것보다, 따로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어, 말해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윤설은 대표라는 두 사람 중 자신에게 딱히 관심 없어 보이는 젊은 쪽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땀이 배어 나올 것 같다.

남자는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보내는지 손가락을 바삐 놀리면서 윤설 쪽을 흘끔 보고 무시했다. 나이 든 대표가 무안한지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그를 나무라지 않는 것을 보면, 윤설이 ‘부탁’할 상대를 잘못 짚지는 않은 듯했다.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소속사 이적 계약서 쓰러 온 거 아닙니까?”

“…도와주신 것에 대한 인사도 제대로 못 한 마당에 불쾌하실 줄 알지만, 저는 이 문제가 더 급합니다.”

“그것 봐요. 깡패질하던 집안이란 소리 안 들으려면 삼대는 뼈 빠지게 해야 한다니까.”

여전히 남자는 윤설을 무시하고, 허허롭게 웃으며 손수건을 꺼내 든 사내에게만 심드렁하게 말을 건넸다.

윤설은 기분 나쁘다거나 실망한 티를 내지 않았다. 목숨 달린 일을 말하러 온 데다 직업이 연기자였다. 이 정도로 자존심이 긁힐 리가 없다.

“윤설 씨?”

“예.”

“그래요. 사고가 꽤 심하게 났던 거 알고, 이왕 소속사 옮기는 김에 경호도 확실하게 해줄 곳 찾는 것도 이해합니다.”

“맞습니다.”

“공공연하게 이 회사가 조폭 집안 돈세탁하려고 세운 회사 중 하나다 뭐다, 소문나 있으니 그런 말 하는 것도 이해해요.”

“아닙니다. 제가 이런 부탁을 드리는 이유는…….”

“경호는 알선해 줄 수 있습니다. 그걸로 하죠.”

“어지간한 경호 업체라면 저도 의뢰해 봤습니다.”

국내외 유명한 기업형 경호 서비스나 용병 출신의 개인, 소수 인맥을 통해 알선하는 식의 국제단체까지 안 알아본 곳이 드물었다.

그러나 스케줄이 들쭉날쭉하고 노출이 잦은 데다 여기저기 더럽게 이권이 꼬인 윤설의 사정에 오래 못 가 나가떨어지거나 상대에 의해 정리당하기 일쑤였다.

길면 육 개월이어서, 또 습관처럼 아직 계약 안 해본 곳을 찾고 있자면 자신이 연예인인지 철천지원수를 향한 복수에 삶을 던지는 비운의 주인공인지 구분이 안 됐다.

윤설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 겨우 시선을 마주하는 젊은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눈에 귀찮게 됐다는 기색이 스쳐도 흔들리지 말자고 거듭 다짐한다.

“무턱대고 도와만 달라는 게 아닙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상응하는 대가로 명시하겠습니다.”

“나한테 돈을 제시할 겁니까? 다 알아보고 온 것 같은데, 설마.”

“운조그룹 일가 하나뿐인 후계가 대표님…과 비슷하게 장성했을 걸로 압니다.”

“적당히 잘 짚었습니다. 그런데 윤설 씨, 이 회사 봐요.”

남자가 상체를 숙여 무릎에 기대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코앞에서 보니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새카맣다.

“집안 어른들 다 그런 일 접고 번듯한 사업 하려고 애쓴 결과 아닙니까. 기운도 예전만 못하고, 소위 연장 들고 다니던 사람들 거의 없어요. 무슨 원한을 샀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소속 배우한테 신경 쓰는 정도 이상은 어렵습니다.”

민망스럽게 이렇게 부탁하셔도 들어드릴 수가 없으니 안타깝네요. 일어나시죠.

마지막 말에 뒤편에 앉아 어쩔 줄 모르던 사내도 맞장구쳤다.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찬 바닥에 그렇게 있으면 쓰나, 몸이 재산인 사람이.

“저와 공식적으로 교제하는 사이라 해주세요.”

“응?”

“아니, 윤설 씨!”

윤설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다 이내 웃기 시작하는 남자의 모습에도 꽉 쥔 주먹을 풀지 않았다. 아무리 모르는 척하고 미친 사람 취급을 하더라도 물고 늘어져야 한다.

시치미 떼고 있지만 이들은 그날 ‘단순 사고’가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윤설을 꺼내놓은 뒤 뒷정리를 한 장본인들이 분명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119든 경찰이든 신고부터 하고 봤을 테지만 나중에 덮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신고 이력 자체가 없다고 했다.

“은성 주식 45억 양도하는 조건으로, 교제한다는 명분하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이런 유의 일을 처리할 줄 알고, 부와 권력에 가까운 사람이며, 윤설이 가진 것에 관심이 없을 사람.

일상적인 공격에 쉽게 당하지 않을 사람으로 그 같은 사람이 다시 없을 거란 직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조부가 상속분으로 배정한 주식 전부를 걸어봐도 괜찮다.

“은성. 의뭉스러운 데가 있더라니.”

장사하는 사람들 따라가려면 멀었어요.

남자는 박수 치는 시늉까지 하며 감탄했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윤설은 고개를 떨구고 답을 기다렸다. 저도 모르게 목이 빠져라 올려다본 것인지 목덜미가 뻐근했다.

남자는 윤설에게 일어나라거나 갑자기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은 명함 하나를 무릎 위로 툭 던져주고 걸어 나갔다.

“소속사도 당연히 여기로 옮길 겁니다.”

“그거야 뭐… 좋을 대로 하세요.”

남자의 명함일까 싶어 뒤집어 보았으나,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바 로고와 약도뿐이었다.

윤설은 머쓱해하는 사내, 나이 든 쪽 대표를 두고 이름이 빈 계약서 두 부에 서명을 휘갈긴 다음 가볍게 목례했다.

* * *

무슨 정신으로 집에 왔는지 기억이 안 났다. 윤설은 곧 여러 매니저 중 더 자기 사람에 가까운 우형을 불렀다.

전화를 걸어 옮길 곳 정했다 하니 1차로 좋아했다가, 그게 운조 계열사라는 말을 듣고는 펄쩍 뛰며 곧 갈 테니 기다리라는 말로 한바탕 굿을 했다.

시간이 좀 걸릴 줄 알고 소파에 늘어져 멍하니 누워만 있던 윤설의 귀에 도어 록을 부술 듯 버튼을 눌러대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니 30분도 채 안 됐다.

“윤서리!!”

“조용히 말해.”

“너 운조 모르냐? 나한테 알아봐 달라고 해놓고, 거길 왜 가?”

“그런 데니까 들어가지…….”

윤설은 나름 귀한 자산인 배우 몸이 구겨지든 말든 자신을 밀고 끼어 앉는 우형에게 말없이 시계를 벗어 채워주었다. 딱 봐도 비싼 시계, 패션 마니아까지는 아닌 우형이 봐도 유명한 로고를 초침이 스쳐 가고 있었다.

제 손목에 맞게 채워진 시계를 내려다본 우형이 잠시 말을 잃고 침을 삼켰다가 아니이, 하며 앓는 소리를 낸다.

운조는 급성장했고 지금도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기업이나, 대대로 부유한 양지 사업가들 사이에서는 ‘천박하게 돈놀이하던 건달’, ‘손에 피 묻히던 조폭의 집안 놀음’이라고 비아냥대는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이제는 대놓고 비웃기에는 규모가 제법 커졌고, 기업 이미지에도 상당히 신경 쓰는 듯 광고나 캠페인을 잘 뽑아내서 잊어버리지도 못하게 끊임없이 송출해 대고 있다. 분위기가 바뀌자 언제 면전에서 무시했냐는 듯 수군대는 뒷말뿐이라지만 어쨌든 공공연하게 다 아는 이야기다.

건축 회사를 중심으로 시작해서 사채와 주먹으로 재개발 사업 먹고 컸다는 흉흉한 소문도 있고, 수주 잘 받고 쭉쭉 커가나 싶더니 엔터 계열로 소속사를 꾸린 것도 정재계에 줄 대기 위해 스폰십을 꾸리는 거라는 말이 있었다. 소속 연예인들이 잘되면 잘돼서 또 그런 말이 돌았다.

거기에 이제는 유통업 쪽을 인수하려고 움직인다는 게 업계 동향인데, 하필 먹잇감으로 낙점된 곳이…….

“거기 너네 회사 먹으려고 난리라던데, 네가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면 어쩌게.”

“그러니까 적어도 집안사람들은 함부로 못 덤비지 않을까?”

“은성 주식 지분만 더 갖춰지면 작업 가능하니까?”

“내가 운조 계열사에 들어가 있으면 다들 잠도 안 올 거 아니야. 너무 좋네.”

“이 또라이가, 강 건너 불구경처럼 말하고 있어…….”

윤설이 구시렁대는 우형의 팔을 턱 잡았다. 시계 쪽으로 손가락이 구물대며 뻗어 가자 우형이 진저리 치며 팔을 흔들어댔다. 그래도 어찌나 악력이 좋은지 기어이 시곗줄에 손가락을 걸고 잡아 뜯을 것처럼 굴었다.

“아, 아아, 내 손목! 알았어, 알았다니까.”

“아무튼, 그래서 내 상속분 줄 테니까 나랑 사귀는 척하자고 했어.”

“누구. 소속사 사장?”

“아니.”

“…운조 총회장?”

“아니?”

“아니다. 누구라도 문제다. 다 중늙은이잖아. 아무리 급해도 이미지가 있는데.”

“계열사 대표 취임할 사람이야. 젊어.”

젊은 사람? 대표 취임?

운조 일가에 젊은 축이라고는 2세대인데, 그들도 사십은 넘겼다. 우형은 벌겋게 자국이 남은 팔을 주무르며 운조 기업 최씨 집안의 계보를 되짚어 갔다.

본인 입으로 뒷방 늙은이라고 하고 다니지만 등이 꼿꼿한 총회장 부부. 밑으로 3남 2녀.

맏아들은 건설 쪽에 들어가 보좌 중이고, 맏딸은 예전 사금융업을 정리하는 척 주무르고 있다. 차남은 개중 조금 젊은 편이라 제작사 업무 위주로 얼굴을 비치며 행동 대장처럼 굴었고 차녀는 현재 유통업 활로를 뚫는 계획을 실제 수행하는 역할이었다.

몇 가지 상세한 사정을 빼면 비밀이랄 것도 없다. 막내아들은…….

막내아들?

곰곰 생각하던 우형이 누운 윤설의 다리를 철썩 내리치며 외쳤다.

“야, 서리야. 너 그 사람 말하는 거지? 한참 전에 유학을 보냈네, 죽었네, 하던 최윤?”

“멀쩡해. 유학 다녀왔다더라.”

‘그날’이 남자의 입국일이었다. 얼굴은 알려지지 않아 혹시라도 우스운 꼴이 될까 걱정했었는데 막상 마주치고 보니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 붙잡고 봤다. 운조 회장이 귀애하는 늦둥이 막내아들쯤 되니, 멀쩡히 회사 운영하는 기획사 대표가 ‘이쪽도 대표’라고 한 건 일도 아니었던 셈이다.

윤설은 슬그머니 다리를 모아 우형의 방정맞은 손을 피했다. 우형은 흥분에 젖어서 자기 손이 소파고 윤설이고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는 줄 모르는 눈치였다.

“최윤이면 적당히 그림도 괜찮겠다, 이미지 상하지는 않겠다마는…….”

“그래. 잘 생각해 보면 시간 벌기 괜찮대도.”

“그런데 걔 완전 여리여리하고 곱상했잖아. 집에서 너 오메가 만나는 줄 알고 더 날뛰면 어떡해.”

“어?”

“눈이 벌겋게 된 노친네들이 운조 막내까지 건드리면……. 왜?”

* * *

[B]

명함에는 주소와 알파벳 B를 형상화한 로고뿐 흔한 약도나 연락처 하나 없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도 업종과 운영 시간이 간략하게 소개돼 있지, 내부 사진이나 메뉴판 등 으레 있을 법한 홍보용 소스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깜박이는 GPS 표시와 가까운 큰 건물들로 미루어 짐작해 가야 할 듯했다.

윤설은 그 애매한 위치를 본 우형이 데려다주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하고 길을 더듬어 갔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된 탓에 한산하고 조명이 은은한 실내였지만 습관처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긴장했다.

바에 앉아서도 술은 미루고 얼음물부터 청한 뒤 혼나러 온 사람처럼 등을 세우고 있었다. 너무 의식하는 티가 나면 그것도 웃기니 긴장을 풀자고 스스로를 닦아댄 뒤에나 겨우 어깨가 느슨하게 풀린다.

반 이상 줄어든 물 위에 잘게 부수어진 얼음이 동동 떠있는 모양을 빨려 들어갈 듯 바라보고 있자니 가벼운 재즈 팝이 부드럽게 깔려 점차 소리를 키웠다. 이러다 시간이 지나면 웃음소리도 간간이 나오는, 평범한 저녁들을 즐길 만한 곳일 거라고 생각하자 긴장이 풀리는 듯도 했다.

“술은 입에도 못 댑니까.”

“아뇨, 언제 오실지 모르니 기다렸습니다.”

“하긴 취하면 뭐에 지장 찍을지 모르죠.”

눈을 감고 있는다는 게 조금 졸기라도 했는지 최윤이 뒤로 다가와 옆으로 앉는 줄도 몰랐다.

최윤은 낮과 달리 이마 위로 머리를 반쯤 넘기고 겉옷을 걸친 차림이었다. 그 나이 또래가 살짝 멋을 내고 편안한 자리에 나온 듯한 스타일이 생뚱맞다 싶으면서도 어울렸다.

거기다 어깨가 넓고, 흐린 빛에 드러나는 팔의 선이 단단해서인지 이상하게 눈길을 끈다. 아마 더 화려하거나 딱딱한 차림이었으면 대놓고 흘끔거리는 사람이 있었을지 모른다.

윤설은 새삼 누가 알아볼까 모자를 눌러쓰거나 칙칙하니 무조건 눈에 안 띌 옷을 입지 않은 자신을 창찬했다. 이 남자 옆에서 앞으로 꺼낼 이야기의 두 배는 더 부끄러울 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윤은 당연하다는 듯 같은 술을 두 잔 주문한 뒤 턱을 괴고 윤설을 눈에 담았다.

비스듬히 보아도 예쁜가?

마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처럼 샅샅이.

“내게 설명할 게 많잖습니까.”

“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나, 자세한 내용은 다 말씀드릴 겁니다.”

“이유부터.”

윤설은 잠시 머뭇거렸다. 조용하다고는 해도 오픈된 장소에서 불행의 원천을 고백해야 할 줄 몰랐다.

그러나 최윤이 잠자코 술만 마시며 빤히 바라보니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들었다. 심기를 거슬렀다가 남자가 가버리고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현재로는 대안이 없다.

“저는 작고하신 은성그룹 창업주의 첫 손주로 직계 혈육 중 하나지만 가내에서 곤란한 입장에 처해있습니다. 유언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2차 성별자인 게 더 큽니다.”

“2차 성별자?”

“…네. 판정 소수인 알파군 100퍼센트입니다.”

“정말로 있기는 있네요. 알파니, 오메가니.”

“요즘에야 반드시 2차 성별자끼리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관념도 사라졌고, 그냥 신체적 특징에 가깝지요. 문제는 아직 우성의 환상을 맹신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우성은 뭐가 다릅니까?”

최윤은 벌써 손짓으로 두 번째 잔을 주문했다. 미동도 없이 듣고 있다고 느꼈는데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빨랐다.

윤설은 상대가 흔한 드라마 속 클리셰로도 2차 성별자라는 개념을 접해보지 않은 것처럼 되묻는 바람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대체로 널리 알려진 상식 같은 부분이라 설명하는 게 더 민망했다.

“…말 그대로 신체적으로나 지능, 예술 계통으로 천재에 가까울 거란 기대가 크죠. 통계만 보면 그럴 확률이 높다고 하던데요.”

“본인은 어땠습니까?”

“배우는 건 다 곧잘 했습니다만…….”

아무리 잘 말해도 우성 알파에 어릴 때부터 뛰어났다는 자기 자랑이라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최윤은 이렇다 할 반응 없이 규칙적으로 잔을 기울여 술을 머금었다가 마시며 윤설이 한 말을 생각하는 듯했고, 생각이 끝나면 다시 이야기를 재촉했다.

“알 만하군요. 다 적당히 했으니 지금처럼 된 거 아닙니까.”

“눈에 띄면 견제당하는 법이니까요. 결정적으로 경영권 싸움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배우는, 하고 싶어서 합니까?”

“네.”

하고 싶어서 하는 일입니다.

최윤은 반듯한 이마를 살짝 찌푸리고는 세 번째 잔을 받았다.

“저는 남들보다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는 걸로 만족하고 제 삶을 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할아버님이 유언장에 아주 신경을 많이 써서 특정인이 회사를 장악하기 어렵도록 지분을 분배해 두었고요. 평생에 걸친 경쟁 관계, 친분, 배우자들까지 고려해서 임시 동맹 같은 걸로는 결정적인 의사권을 갖지 못하도록. 당연히 조건을 받아들이는 게 유류분 소송보다 유리하고, 거부하면 손해 보게 돼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됐습니다.”

“…할아버님 뜻을 옳다 그르다 하지는 못하겠네요. 제가 성인이 되기 전부터 부모님, 삼촌과 고모, 그분들의 가족 등등 이사들을 회유하거나 지분 매수, 서로를 설득하거나 제 살 깎기로라도 상대 실적을 쳐내는 등… 온갖 경우를 보기 지겨웠던 건 사실입니다.”

그래도 언젠가 더 유능한 자가 두각을 드러내고 오랜 회사 중역들의 지지를 얻으면 끝날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뛰어난 창업주와 모자란 자식들은 쉽게 비교당했고, 그래도 혈육이라고 고루 균형을 맞춰 분배한 지분은 오히려 남의 손에 넘어가기까지 했다. 우습게도 아무것도 안 한 윤설의 지분 45억이 중요한 방향키가 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여기저기 애매하게 모자란 수준으로 쪼개진 지분은 ‘은성 일가가 필사적으로 붙잡은 덩어리’와 ‘무능한 자식의 실패로 기회를 얻은 경쟁사가 움켜쥔 조각’으로 나뉘었다. 눈앞의 최윤이 유통업 활로를 뚫겠다고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은성의 경영권이 창업주 일가의 손을 떠날 판이었다.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하고 윤설이 대학에 들어간 때부터 일가친척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외부로 더 지분이 빠지면 의미가 없으니 제게 상속분을 덜어내라는 게 점점 협박이 됐고, 알파 인자로 자금을 끌어들이려는 계획까지 나오더군요.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지만 혼담이라든지, 스캔들로 가장해서…….”

윤설이 가장 말하고 싶지 않았던 사정이다.

갑자기 목이 타 얼음이 녹기 시작한 잔을 한 번에 비웠다. 약간 도수가 센 종류였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선했다.

최윤의 비뚤어진 입매가 비웃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다른 게 치욕일까.

“정자은행에서도 조건을 철저히 가려서 판매하는 법이니 제법 좋은 아이템을 고른 셈이네요. 그런 것치고 스트레스를 너무 준 게 탈이지.”

지분 양도로 협박이나 사람을 매수해 위협하는 동시에 적당히 타협하고 우수한 알파 인자를 원하는 소수의 오메가나 흥미가 더해진 유력 인사에게 공급하여 종마 노릇을 하라는 압박이 계속되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경영권 싸움에 뛰어들어 사내 권력을 갖거나, 알파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게끔 훈련받아 누구도 쉽게 건드릴 생각 따위 하지 못할 존재가 됐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윤설의 주변에는 제대로 된 어른이 없었다.

그나마 황급히 연예계로 빠져 대중에 얼굴이 알려져 있으니 사적인 시간에 한하여 위협받는다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제삼자에게 지분을 팔거나, 집안에서 쓰는 수처럼 약혼이라도 해서 제 힘이 될 만한 곳을 찾아봤는데, 꼭 상대에게 탈이 나니… 사람이 포기하게 되더라고요.”

“해서, 쉽게 안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방패로 써보겠다는 거고.”

“그렇게 들리신다면 죄송합니다.”

“뭐라고 해도 당신 상속 지분이 적당한 대가라 수락하는 겁니다. 운조 쪽으로 적을 옮기고 나랑 붙어 다니는 걸로 충분한가요.”

“일단은… 네. 만약 사정이 정리되기 전에 혼사를 결정하신다면 대외비로 해주십시오.”

“그 사정이 정리될 때까지가 문제인데.”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정말로…….”

“터무니없는 계획은 아니길 바랍니다. 은성, 1년 안에 정리하는 걸로 돼있습니다. 그리고.”

“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윤설 씨 때문에 내가 섹스도 못 하고 살아야 됩니까?”

독한 술을 너덧 잔이나 한 건 최윤이지 자신이 아니었다. 윤설은 한창 진지하고 무겁게 나누던 주제에 끼어든 ‘섹스’라는 말을 의심하듯 눈을 굴리다 다시 최윤을 보았으나, 그는 정정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윤설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의 이야기와 최윤의 금욕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선뜻 이해가, 아니, 인정이 안 됐다.

“뻔히 보여도 그쪽은 목숨 걸고 사기 치겠다는 건데 내가 오입질하고 다니는 것까지 연기로 해결할 수 있겠냐, 이 말이에요.”

“…이해했습니다. 사생활까지 제가 어떻게.”

“윤설 씨의 이용 가치 두 가지 말했잖아요. 지분 45억, 우성 알파군이라는 유전자. 값 받은 만큼 해줄 생각입니다.”

“가급적 진지한 관계로 보였으면 합니다. 파파라치도 있고, 법적 관계를 염두에 둔다 하면 섣불리 행동하지 못할 테니까요.”

“좋습니다.”

윤설은 녹아버린 얼음물을 마시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해야 하는 이야기도, 자신의 약점도, 은성그룹 내의 진탕 같은 사정도 다 털어놓았고 다행히도 최윤의 구미에 맞는 거래인 듯했다.

최윤은 빈 잔을 굴리며 잠시 망설이더니 바텐더를 부르지 않고 상체를 돌렸다. 그가 쫓아내듯 크게 손짓하자 갑자기 음악 소리가 훅 줄어들며 즐거운 한때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시던 술도 간지러운 웃음소리도 막 내린 무대 소품처럼 그대로 남겨둔 채 모두 바에서 사라진다. 입술이 살짝 벌어진 윤설을 보고 최윤이 처음으로 웃었다.

“하도 걱정하길래 경호원 깔았습니다.”

“그랬군요…….”

바 위로 잔 바닥이 부딪히며 딱 소리가 났다. 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 안쪽으로 난 아치형 복도로 향했다.

자신은 돌아가면 되는가 하며 천천히 따라 일어나 겉옷을 집어 드는데 최윤이 윤설을 향해 돌아서서 고개를 까닥인다. 굉장히 불안하게 만들면서도 위험한 기대감이 드는 몸짓이었다.

화장실로 빠지는 길 같은데 칸 안에서 다리 사이에 고개라도 처박을 작정인가.

반쯤 체념한 상태였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심란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앞선 등만 바라보며 걸어가다 보니 복도는 안쪽으로 더 길게 나있었고, 소위 백 룸인 듯한 문이 두어 개 있었다.

최윤은 제집인 양 문을 열고 들어가 휘 둘러보았다. 관리는 잘되어 있으나 닫혀있던 곳 특유의 미미하게 답답한 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숨을 깊이 들이마시다 말았다.

“윤설 씨가 날 상대해 줘야죠.”

“…마음에 안 드실 겁니다.”

침대에 느슨하게 앉아 발목을 까닥이는데 우연찮게도 다리 사이 공간이 충분해 보였다. 윤설은 설마가 진짜가 되어가는 상황에 눈을 질끈 감고 싶은 충동을 꾹꾹 내리누르며 천천히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둘 곳 없는 시선을 돌리다 결국 어색하게 올려다보는 윤설에게 최윤이 물었다.

“설마 안 해봤습니까?”

“자의로는요.”

“음.”

“알파에 대한 교육…으로만 했습니다.”

“그래요. 그중 남자랑 한 건.”

“…방법은 압니다.”

“해봐요.”

진심으로?

그렇게 묻는 듯 크게 뜬 눈을 보고도 고개를 끄덕인다.

윤설은 조심스레 최윤의 무릎에 손바닥을 대었다가 차츰 허벅지 안쪽으로 옮겨 가며 가만가만 쥐어보았다. 겉으로 맵시가 나쁠 만큼 부피가 크지 않아도 근육이 단단히 들어찬 다리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육감적일 선인데, 긴장한 윤설에게는 그 단단함이 당장의 고비만큼 두려웠다.

윤설은 알파다. 꽃미남이나 예쁘장하다는 말보다는 아름답다는 찬사가 붙었고, 타고난 골격도 첫눈에 보통 사람은 위축될 정도로 큼직했다. 눈앞의 남자처럼 잘 짜인 근육을 갖추면 화면에 부담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늘 약간 늘씬한 몸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얼굴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지만, 벗겨놓고 보면 섹스어필보다는 같은 남자끼리의 묘한 경쟁심을 부추기기 좋을 터였다.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도 최윤의 벌어진 다리 가운데까지 착실하게 손을 옮겨 지퍼를 내리고 속옷 위로 불거진 윤곽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잘해 내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표정을 가다듬고 손으로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며 옷 위로 혀를 내밀어 머금었다. 나름 크게 물었는데 어설프게 베어 문 것 같은 모양이 되었다.

다른 손으로 귀두 쪽을 더듬어 문지르며 기둥을 혀로 척척히 적실 듯 빨아댔다. 속옷이 젖고, 무진 애쓰는 윤설의 입가에 침이 흥건해지자 최윤이 다리를 들었다.

“아, 저기…….”

“…계속해요.”

마음에 안 든다고 할까 싶었는데 대뜸 윤설의 샅 위로 발을 올려놓고 꾹 누른다. 헛숨을 들이켜는 윤설을 달래듯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계속 발로 지분대는 바람에 정신이 나갈 뻔했다.

윤설은 허둥대며 최윤의 속옷을 끌어 내려 좆을 꺼냈다. 뭐라도 해서 최윤의 발놀림이 멈췄으면 했다.

반쯤 서서 자신의 손에 잡힌 것의 크기를 보니 망설여졌지만 눈을 감으며 귀두 끝부터 살살 핥기 시작했다. 간혹 입술을 작게 문지르거나 뿌리 쪽을 손으로 살살 흔들면 최윤의 숨이 거칠어지며 발끝에 실린 힘이 누그러지는 듯해 쉴 새 없이 혀를 놀렸다.

축축한 소리가 나며 턱으로 침이 흐르고, 잡고 있는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작은 긴장까지 느껴진다. 오늘 만난 남자의 다리 사이를 정성스레 핥으며 정작 자기 것은 아프게 문질리는데 웅얼대듯 신음이 새고 열이 올랐다. 아마 힘겨워서일 것이다.

살짝 눈을 떴을 때 최윤의 얼굴이 나른한 흥분에 젖어있어서 빨리 끝내자, 그 생각만으로 기둥이며 뿌리 쪽 고환을 핥던 고개를 틀어 귀두 끝을 물고 힘주어 빨았다.

“아, 잘하고 있어요.”

정답이었는지 머리 위에 얹힌 손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낮고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리고, 허벅지가 움찔 튀려고 들었다.

윤설은 혀를 굴려 끝을 핥고 갈라진 틈을 문지르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몸을 앞으로 더 묻으며 기둥 쪽까지 입에 담았다. 익숙할 리 없는 침범에 구역감이 들었지만 참아야 했다.

순간 다리 사이가 꾹 밟히며 뒤로 밀려났다.

“…….”

“거기까지는, 됐어요.”

“…알겠…습니다.”

모자란 숨을 후욱 들이쉬느라 윤설의 어깨가 오르내렸다. 어깨를 쥐고 거리를 벌렸던 최윤이 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윤설의 셔츠 깃을 잡아당겼다. 그 결에 이끌려 가면서 다시 귀두 끝을 입에 담은 채로 단추를 풀고 흰 살을 드러내었다.

최윤이 목덜미를 쥐고 있었고, 윤설은 밟히고 눌린 자국이 난 앞섶이 팽팽하게 당겨진 불편함에 살짝 엉덩이를 들고 최윤의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다시피 했다.

다시 점점 숨이 거칠어지고 귀에 들리는 신음 소리에 따라 윤설도 목 안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다 들썩이는 허릿짓에 너무 깊이 삼키지 않으려 고개를 살짝 물린 순간, 쏟아진 정액이 입가에 흥건히 묻고 말았다.

“아, 하아, 후으.”

끝났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조심스레 입가를 훔치는데, 신음하던 최윤이 윤설의 팔을 잡고 일으켜 침대로 밀었다. 밀리는 대로 누워있다가 주저 없이 바지와 속옷을 함께 잡고 끌어 내리는 결에 발딱 선 좆이 튕겨 나왔다. 옷에 쓸리는 게 아파 뒤로 물러난다는 몸짓이 아주 벗기는 행위를 도와준 꼴이었다.

최윤이 윤설의 나신을 훑어 내렸다. 눈으로, 뜨겁지만 윤설과 달리 젖지 않은 손으로.

윤설은 얼굴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나 하면서 멍하니 있다가 저도 남자의 탈의를 도왔다. 한 발 빼고 난 것인데도 크기가 크기인지라 덜렁이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왼쪽 허벅다리 바깥쪽에 손바닥 길이만 한 흉터.

무심코 흉터 위에 손을 얹자 최윤이 몸을 겹쳐 왔다. 아직 싸지 못하고 질금질금 선액만 묻은 윤설의 것 위로 아랫배부터 자지까지 비비며 움직이는데,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하아, 아, 잠깐, 잠깐만…….”

“무작정 허리 흔들지 말고, 읏, 손 써요.”

상황이 흘러가는 걸 보면, 알파―오메가가 흔한 형질이었다면, 누가 봐도 더 알파의 전형성에 가까운 최윤의 심신을 보면 아무래도 삽입 섹스까지 갈 때 자신이 받아들이는 쪽이 돼야 하는 건가.

그게 오늘인가 싶어 뒤숭숭한 이성과는 별개로 윤설의 좆은 자극받는 족족 반응했다.

최윤도 다시 세우자 질척이는 마찰음이 나면서 배까지 맞닿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번쩍이며 더 이어가고 싶다는 욕구 외 심각한 고민이 남기란 힘들었다.

어느새 상대가 지시하지 않아도 양손으로 빠듯하게 자지 둘을 잡고 정신없이 위아래로 흔들었다가, 급기야는 타이밍을 맞출 때까지 참지도 못하고 먼저 사정해 버렸다.

“후으, 흐, 읏, 미안, 저는…….”

“응, 잘 빼지도 않고 살았나 봐요.”

그러나 최윤은 딱히 나무라지 않았다.

사정감과 아직 배에 올라붙은 채인 최윤의 성기를 보며 묘한 아쉬움, 해결해야 한다는 막막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 그가 몸을 일으켰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호흡이 거칠어져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있으니 최윤이 몸체에 감긴 상의를 벗어 던졌다.

가슴 아래에도 흉터가 있다.

고개를 들어 살피려 하는데 최윤이 윤설의 어깨를 잡아 누르며 하체를 움직였다.

“…….”

꼿꼿하게 선 좆이 턱을 쿡 찌를 만큼 가까워졌다. 당황스러웠다.

그래, 사정을 못 했으니 다시 입으로 하라는 거겠지.

다시 고개를 올리고 기둥을 잡으려 손을 올리는데, 이번에는 이마를 지그시 밀어낸다.

“왜…….”

“음, 거기 말고.”

윤설의 큰 눈이 더 커지지도 못하겠다 싶게 휘둥그레졌다.

최윤은 벽을 짚고 무릎을 밀어 윤설에게 불긋한 속살을 보였다. 고개를 숙여 눈만 껌벅이는 얼굴을 보더니 킥킥 웃어대면서도 농담이라 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가깝고, 자칫하다가는 깔릴 것 같다는 두려움에 저도 모르게 최윤의 다리를 단단히 받쳤다. 분명히 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그건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혹은 이성과의 관계 위주였고 자신처럼 큼직하고 두꺼운 좆 아래 회음이나 탄탄한 엉덩이 사이를 이렇게 자세히 한참이나 볼 일은 없었다.

실컷 웃은 최윤이 하체에 힘을 풀고 얼굴 위로 앉을 듯한 시늉을 하자 숨이 모자란 것처럼 윤설의 볼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여기, 윤설 씨 자지 들어가서 좆 끊어진다고 울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제 것을요…….?”

“별로면 내 거 받을래요?”

난 여기로도 충분히 느끼고, 보통 나보다 작은 사람 깔고 낑낑대는 데 흥분하는 편은 아니라서요. 하지만 윤설 씨는 튼튼해 보이니까 괜찮을 것 같네요.

윤설은 더 망설이지 않고 혀를 내밀었다. 처음에는 조심스레 회음부에 닿았다가, 조금 도톰할 뿐인 부위를 톡 튀어나온 젖꼭지라도 빠는 것처럼 첩첩대는 소리가 나게 빨았다. 머리 위에서 낮은 신음이 울리는 걸 보면 맞게 하고 있는 듯했다.

손에 힘을 주어 엉덩이 살을 잡고 고개를 젖히며 오므라진 구멍에까지 혀를 내밀었다.

“으음, 흐, 읏, 아, 아아.”

혀를 길게 올려 주변을 핥다가 입구를 집요하게 문지르며 혀끝에 힘을 주길 반복하자 신음 소리가 가팔라졌다.

자신만큼 큰 남자의 가장 안쪽 살을 찌걱이는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빨고 있다는 사실과 그로 인해 최윤이 뭉개진 신음 소리를 내며 만족해한다는 상황이 윤설을 이상한 흥분으로 이끌었다.

숨이 조금 차면 살짝 고개를 틀어 호흡을 고르고 다시 코를 묻은 채 흐무러진 구멍 안쪽까지 살살 혀를 넣었다 문지르며 빼자 속살이 발름거렸다. 사실 충격적으로 외설스러웠다.

“흣, 후으, 아, 아아, 하… 윽.”

쾌감을 통제하기 힘든지 살짝 흔들리는 허리를 부여잡듯 끌어당겨 집요하게 구멍을 핥았다.

최윤이 등을 부풀리며 고개를 숙일 때 틀어쥔 주먹과 눈에 오른 열기를 두 눈으로 낱낱이 보자 외설스러움은 극에 달했다. 쾌락을 위해 파트너를 구할 생각조차 못 하고 살았던 윤설에게는 모든 것이 폭죽처럼 터지는 자극이었다.

“아아, 아, 아!”

그리고 최윤은 윤설이 신음을 참을 때마다 인상을 썼던 사람답게 본인이 느낄 때마다 스스럼없이 소리를 내었다.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하면 추접스럽게 뒹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쩐지 그런 기분이 들게 했다. 낮은 목소리로 비음을 흘리며 목을 긁듯이 우는 탓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찰나였고, 이제 말랑해진 구멍으로 손가락이라도 찔러 넣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얼굴 위로 정액이 후두둑 떨어졌다.

세상에.

최윤이 괜찮냐며 손으로 눈가를 닦아주는데 대답도 못 하고 색색대며 숨만 몰아쉬었다. 윤설은 다시 반쯤 선 다리 사이를 슬그머니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파가 튼튼하기는 하네요.”

그 점이 썩 마음에 든다는 듯한 최윤의 웃음에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 * *

남자와 헤어지고 난 다음 날까지는 언제 그런 일이 있기나 했냐는 듯 멀쩡했다. 기운이 쪽 빠졌을 뿐 잘 자고 일어나서 스케줄 없는 날의 일과를 무리 없이 소화했다.

가벼운 식사, 운동, 완벽하게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도 누가 들이닥칠까 묘하게 곤두선 채로 현관 쪽을 응시했다가 스스로 진절머리 내는 동안 다른 이상한 무엇이 끼어들 기미는 없었다.

그러나 하루를 무사히 넘기고 나자, 사는 내내 그런 짓만 생각하고 산 사람처럼 어둔 방 안에서 보았던 최윤의 몸과 단단한 사람에게도 응당 무른 곳이 있다는 증거로 말랑했던 혀의 감촉과 다리 사이의… 잔상치고는 뚜렷한 형태가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윤설은 누운 자리에서 괜히 다리 사이를 얽매듯 꽉 모으고 옆으로 굴렀다.

하필 자기 전에 그런 생각을.

원래 욕구가 넘치거나 정력적인 편이 아니었다. 알파―오메가가 멸종 위기종이나 마찬가지인 지경에 이르렀어도 기술은 발전한 덕에 약으로 러트를 그럭저럭 잘 넘겼으며 기간이 지나면 부드러운 남의 살결이 떠오르는 일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 그게 보통의 윤설이다.

너무 뜻밖에, 준비 없이 그런 행위를 한 탓이다. 최윤이 하라는 대로 끌려다니며 헐떡일 만큼 흥분했던 게 충격적인 경험이라서.

윤설은 이불을 귀밑까지 끌어 올리고 머릿속을 환기하려 애썼다.

타액과 흐른 정액이 섞여 다리 사이 여린 살로 고여 뚝 떨어지고……. 젖어서 반질반질해 보이던… 발갛게 된 구멍에…….

넣고 싶었다.

“뭘?”

뭘 넣어?

알파란 번식 욕구가 강하게 남아있어 오메가만 있으면 발정하는 족속이라는 오명이 싫었다. 일부러 까내리는소리인 줄 알면서도 조금이나마 그렇게 보일까 봐 더 반듯하게 행동했고, 성적으로는 결백한 것처럼 굴었는데.

자동 재생되는 기억의 문을 닫기는커녕 고개를 디밀고 빠진 게 있었나 곱씹는 자신을 어떻게 하고 싶었다.

낮에 근력 운동을 해서 종일 피로감이 있었는데. 분명 누우면 빨려 들어가듯 잠들 거라고, 구멍이 조여들면 혀가 쏙 들어갔던 것처럼, 아.

윤설은 대자로 누워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다시 반대쪽으로 굴렀다. 최윤이 거래를 받아줬다고 모든 일이 해결된 것도 아닌데 팔자 좋게 야한 생각이나 하고, 컨디션도 못 챙기고.

내일 숍에 가면 얼굴이 푸석하다고 하겠다. 더군다나 내일 일정이 끝나면 우형을 먼저 데리고 최윤과 만날 약속이 있다. 이대로라면 얼굴만 봐도 어수룩하게 구는 티가 날 거다.

띵동─

“…….”

초인종이 울렸다. 외부 공동 현관에서 호출하는 소리와 다르다.

윤설의 집은 말이 아파트지 한 층에 단 두 집만 있었고 주차장 쪽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더라도 인증을 거쳐야 건물에 들어올 수 있는 구조다.

윤설이 그렇듯 마주치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고, 보안이나 안전에 얼마든지 돈을 더 써도 좋은 사람들이 이런 집에 산다. 시간이 자정을 넘었으므로 취해서, 혹시 헷갈려서 잘못 찾아올 리 없다.

띵동, 벨이 한 번 더 울리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해도 불길한 예감이 앞섰다.

누가 보냈을까? 납치? 단순히 겁을 주려는 걸까.

윤설은 침실에서 벗어나지 않고 숨만 쉬었다.

이럴 때 덕 보자고 최윤을 끌어들인 건데.

윤설은 핸드폰을 집어 들다가 이를 물었다. 번호를 주고받을 정신도 없었던 게 다시 떠올랐다.

경찰, 아니, 그들은 오지 않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파트 경비실 쪽에 전화하는 게 낫겠다.

마른침을 삼키며 사무실 번호를 찾았다. 그러는 동안에 벨 소리가 잠시 끊기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귀가 바짝 서서 잘 들리지 않는 말에 신경이 쏠린다. 팀 교대이니 누군가는 전화를 받아야 하는데 신호음만 길어질 뿐 아무도 받지 않는다.

“…….”

정말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 앞에 이르렀다. 침입자가 현관 벨을 누르는 법은 없다고 필사적으로 부정하면서도 한껏 소리를 죽였다.

이제 웅웅대던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적막했다.

그냥 사람 돌아버리게 만들 심산으로 이런 짓을 하는 거라면─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적당히 감내할 수 있다. 밖에서 뭘 하든 집 안에서 닫아걸고 있으면 안전하니 차라리 그 편이 낫다.

천천히 굳어있던 어깨를 늘어뜨리는 윤설의 귀에 무엇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복도 바닥에 거칠게 쓸리는 소리. 무게감이 있는 물체와 천이 미끄러져 나는, 까끌하고 고르지 않은 소음.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귀를 대어보아도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없었다. 섬뜩한 예감이 들어 살피면 대개 맞아들었던 인기척조차도.

가끔 스토킹에 시달리는 연예인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활자로 묘사된 행태를 보기만 해도 등이 뻣뻣하게 굳을 만큼 잘 알았다.

신고하기에도, 누구더러 알아달라기에도 애매하고 교묘하게 일정 시간이면 문을 두드리는 소리 방안을찍은사진 냉장고안의베어문사과포도주대신피 알수없는번호로끈질기게울리다받으면아무말도하지않는거친숨소리어느날은도피유학을도우려던사람의고통에찬흐느낌, 내잘못…….

똑똑.

똑, 똑.

…내 잘못, 이던가?

멍하니 문 앞에 서 있다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누군가 정중하게 천천히, 그리고 인내심 있게 노크하고 있었다.

윤설이 망설이고 있자 노크 소리가 끊기더니 감정이라곤 한 점 없이 건조한 투의 목소리가 문을 지나 귀에 꽂혔다.

“도련님 지시로 가택 주변에 사람 배치돼 있습니다.”

“아.”

“출입구 쪽은 다 뚫려서 부득이하게 나섰습니다. 따로 뵐 일은 없으니 편히 주무십시오.”

“…….”

그리고 대답할 새도 없이 구두 소리가 멀어졌다.

처음 신경질적으로 벨을 내리치며 위협했던 자나 방금 말을 건 사람이나 발소리를 낸 적은 없었다. 일부러 귀에 들리게 멀어지고 있다고 티를 내는 것만 같았다.

윤설은 뜬눈으로 소파에 앉아 뜨겁게 데운 우유를 마시며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새벽 두 시쯤 되었다. 나가야 하는 시간은 아침 일곱 시.

지금 자야 다섯 시간은 잘 텐데.

가볍게 한숨을 쉬고 잠자리로 돌아갔으나 한참을 멍하니 있기만 했지 좀체 잠들 것 같은 느낌이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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