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요신의 눈물 (32/34)

32. 요신의 눈물

새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전례 없이 눈 벼락을 맞은 화산은 하얗게 쌓인 눈으로 북주설국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호호호호, 화산이 아니라 제 고향을 보는 듯합니다.”

수정궁에 남은 유일한 손님인 빙요를 바라보는 백원후의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흥! 안 본 사이 말이 많아졌구나, 빙요.”

두 요신의 팽팽한 기 싸움에 혼례가 준비되었던 연회실을 정리하던 식신들이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안 본 사이 백원후 님의 요력도 전과 같이 느껴지지 않으니 참으로 이상합니다. 겨우 귀녀 하나 살려 놓은 것치고는….”

천명의 영혼을 대가로 그녀가 무엇을 지불했는지 알 리 없는 빙요의 미심쩍은 눈초리에 백원후가 발끈했다.

“내 모든 요력을 잃어도 남아 있는 뿔 하나는 충분히 분지를 수 있으니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후후후, 물러나 보겠습니다.”

꼬리를 내린 빙요가 물러나고서야 식신들의 움직임이 다시 부산해졌다.

‘여울만 아니었으면, 아주 아작을 내어 놓을 터인데.’

텅 비어 버린 화합주를 바라보던 백원후의 시선이 분주하게 오가는 식신들에게로 향했다.

“새로운 내일이 오고 있음이야.”

무언가 섭섭하면서도 가슴 벅찬 뭉클함이 그녀의 가슴으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후후후, 부럽다. 부러워.’

늦은 밤 야차가 수정궁에 들었음을 알고 있다. 궁금하여 미칠 지경이었으나 방문 앞을 지키고 선 반야와 이랑군 때문에 차마 다가서지 못했다.

명색이 요신인데, 한낱 미물들과 함께 문짝에 귀를 붙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방으로 돌아와 수계를 폈지만 얍삽하기 짝이 없는 야차가 방진을 펴 놓은 탓에 어여쁜 신부도, 재수 없는 신랑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백원후는 쓸쓸하게 애화랑으로 향했다. 늘 그녀를 반기던 화묘가 백원후를 보더니만 질겁하며 청동화로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극성맞은 천화 때문에 적이 여럿 생기는군.’

잠든 천명의 곁을 지키며 온 밤을 애화랑에서 보냈건만, 소식을 알려 준다던 반야는 말이 없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백원후는 결국 신방으로 걸음 하였다. 그녀의 기운을 느꼈는지 방문 양쪽에 앉아 있던 반야와 이랑군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인 게야?”

“그러게요. 인간들의 교접은 우리네와 다른가 봐요.”

순박한 반야의 대답에 백원후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기다림에 지쳤는지 반야가 날아가 버렸다.

야차가 방진을 쳐 놓은 탓에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백원후의 손이 문에 닿자 이랑군이 이를 드러낸다.

“크르르르르르, 르르.”

“어리석긴.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음을.”

백원후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이랑군은 문 앞에 버티고 앉아 귀를 세웠다.

“하아아, 사내들이란!”

***

밤은 끝나지 않았으나 첫눈은 멈춰 있었다.

‘잠, 이 들었던 건가.’

첫 환생을 만났던 그날 이후, 이천오백 년 동안 야차는 잠들지 않았다.

‘향기가 옅어졌다.’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여울이 깰까 조심스레 머리에 입술을 누르는 야차의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축축하다. 서로의 허벅지를 교차하고 있는 여울의 몸이 흥건하게 땀으로 젖어 있었다.

뜨겁다. 지나치게 뜨겁다.

“화라사!”

벼락 치듯 튀어 오른 그의 외침에 화로에 불이 붙었다. 환하게 밝혀진 방 안에서 야차는 침상에 누운 여울에게 다가섰다. 그에게서 떨어져 나간 여울은 갓난아이처럼 한껏 몸을 말아 웅크리고 있었다.

“여울아! 여울아!”

죽은 듯 잠들어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는 야차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선홍색 빛이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염화가 여울을 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현실은 참을 수 없는 공포로 그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죽을 때까지 용납할 수 없음이라.’

더없이 황홀하여 아름다웠던 첫날밤이었다. 이제 야차는 극락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모든 것을 알고, 완벽한 계획을 세웠으나 그래도. 아프다. 지독하게 아프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거친 수컷의 포효가 뇌우처럼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절대 놓지 않는다!’

그녀와의 약조를 떠올리니 태풍처럼 회오리치던 감정들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죽음의 강을 깡그리 말려 버리는 한이 있어도! 되찾을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 어떤 천형을 받더라도 절대, 놓지 않으리라.’

창문을 연 야차는 달의 위치를 보며 하룻밤과 낮이 지나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여울에게로 향한다.

‘머리카락 한 올 남김없이 산화하였어야 했을 시간. 어째서…. 귀녀이기 때문인가.’

침상에 드리워진 휘장을 뜯어 허리에 두른 야차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앉았다. 송골송골 맺혔던 땀방울이 고여 든 복부를 중심으로 수포가 번지기 시작했다.

“힘겹게 싸우고 있는 것이냐. 못난 낭군을 위해서?”

그녀의 머리를 쓸어 넘기니 여울의 몸을 휘감은 염화가 그의 손길에 반응하며 푸른 불꽃을 일으켰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칼을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이다.”

“정말?”

그의 품에 안겨 두 눈을 반짝이던 여울이 떠올랐다.

“아이 하나 등에 업고 밭뙈기 하나 일구며 그리 살아가게 해 주마. 약조한다.”

“후후후, 누가 그리 바란다고 하던가?”

“너의 꿈이 아니던가?”

“그건 은령의 꿈이지. 풀뿌리 캐 먹던 시절 이야기를 아직도 하셔.”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스스로를 은령과 분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닌 그녀라, 혹은 은령이라 또바기 부른다.

“다시 깨어났을 때도 분명 그리 말했다. 왜 아직도 그대로이냐고.”

“헤헤헤,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나 보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무장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인가.”

“삼천 년 동안 부숴 먹은 세상한테 빚을 갚아야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떠도는 사이 꽤나 많은 사고를 치셨던데.”

인요대전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스스로도 그 참혹함을 알기에 야차는 침묵했다.

“세상을 파괴하는 대신 널리 인계를 이롭게 할 활검이 되어야지.”

“활검.”

“나랑 같이 요괴 잡으러 다니자. 벌이가 아주 쏠쏠해.”

“전쟁의 신에게 요괴잡이 하러 다니자니, 후후후후.”

하도 물고 빨아 새빨개진 여울의 입술이 툭 튀어나오니 야차가 그 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리하자. 너의 뜻이라면 비럭질도 마다하지 않을 터이니.”

“비럭질은 무슨! 좋은 기술 두고, 헤헤헤. 그리고 아이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야. 도망간 둘, 다시 잡아 와야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녀석이 그 녀석이 아닌 것 같아. 일단 낳아 봐야 알겠어.”

불확실한 내일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또다시 짙어지는 천화의 향기에 취해 야차는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그녀에게 몸을 묻었다.

“모든 것이 네 뜻대로 이루어지리라.”

침상에서 물러선 야차가 여울을 향해 두 팔을 뻗었다.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두둥실 떠오른 여울의 나체가 그의 눈높이에서 멈춘다.

한 손으로 하늘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땅을 누르자 여울을 핵으로 둥근 원형의 결계가 생겨났다.

“화라사 가리마라.”

쿵! 쿠궁, 쿵. 파직, 파지지지.

염화의 기운이 충돌하듯 결계 안으로 천둥 번개가 몰아쳤다. 사방으로 섬광이 번쩍이며 결계를 뒤흔든다.

“수마라 두이라 설이 하라.”

결계 안에 잠든 여울의 숨결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밑에서부터 물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설빙하라 야차라 설진!”

야차의 주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팔팔 끓던 결계의 물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결계는 한기로 인해 뿌옇게 흐려졌다.

‘그녀가 빙요에게 요구한 시간은 이백 일.’

야차에게는 영원과도 같은 시간이 될 터였다.

뼛속까지 얼려 버릴 한기를 뿜어내는 결계에 야차가 이마를 댔다. 여울의 머리가 있는 쪽으로 손을 얹었다.

“아름다운 나의 천화에게 하늘의 평온이 함께하기를.”

단 한 번도 하늘을 찾지 않던 야차가 그 이름을 빌어 여울을 축원한다.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이미 호국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환한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설 무렵.

결계에 이마를 대고 있던 야차가 눈을 떴다. 야차가 몸을 떼자 결계는 그 투명함을 잃고 금세 뿌옇게 여울의 모습을 가려 버렸다.

“그곳에 있음을 안다.”

조용한 부름에 방문이 열리며 백원후가 들어섰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는 것이 좋겠구나. 알몸의 형수를 보고픈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백원후의 속삭임에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던 이랑군이 순순히 물러선다.

소리 없이 다가선 백원후는 결계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으니 허망한 듯한 숨을 내쉬었다.

“마지막 얼굴이라도 보아 둘 걸 그랬구나.”

뿌옇게 얼어 버린 원형의 결계는 더 이상 여울의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애달파하는 백원후를 지켜보던 야차가 결계로 다가가 손을 얹었다. 그의 손길에 반응하듯 결계가 물방울처럼 투명해졌다.

“평온해 보이는구나.”

찰나의 시간만을 허락한 야차가 손을 떼니 결계는 여울의 모습을 뿌옇게 가려 버렸다.

“설계는 빙요가 펴기로 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녀의 삶도 죽음도 온전히 나의 것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

“후후후, 그렇지. 나라도 그리했을 거야.”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아니면 이마저도 운명을 거스르는 계획의 일부일까.

야차도 백원후도 여울의 마음을 알 길이 없다.

달덩이처럼 하얗게 빛을 발하는 결계를 바라보며 나란히 선 야차와 백원후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섬뜩하기 짝이 없는 낯섦에 서로가 눈을 맞춘다.

“예상보다 오래 버티었다. 요신의 생명을 나누었기 때문인가.”

“모두가 염원하는 생명이니 잘 버틸 거야.”

꺼지지 않는 염화는 천계의 단약과도 같은 것.

요신과 생명을 나누었다 한들 여울의 삶을 보장할 수 없었다. 하여 백원후는 화기에 강한 불고양이의 털을 태워 화합주에 섞어 넣었다.

불을 먹고 사는 화묘 털은 본능적으로 열기에 들러붙는 성질을 가진다. 결국에는 염화에 타 버리고 말겠지만 일각의 시간도 아쉬울 여울에게 잠시의 틈을 만들어 주기를 바랐다.

“제때에 맞춰서 왔으면 좋으련만, 개념 없는 누구 때문에 내 고양이만 죽어 나갔군.”

“약을 탔다면 내가 모를 리 없다.”

“흥! 술맛도 모르는 이가 그 이치를 어찌 알까.”

그러고 보니 술의 향이 참으로 오묘했다. 과일주인가 하다가도 은근히 퍼지는 잔향은 분명 꽃이다.

“술도 제조법에 따라 무게를 달리하니, 당도가 높은 과일주에 약을 타 가라앉히고 그 위로 화주를 부었다. 화합주는 사내가 먼저 마시니 야차는 화주를 마시고. 술 욕심 많은 여울은 남은 잔을 탈탈 털어 넣었을 게야. 아니 그런가?”

시공을 넘어서는 요신의 영악함은 당할 수가 없구나.

가슴이 탁 트이는 숨이 터져 나왔다. 어쩐지 입술이 그리도 달더라.

“요란한 첫날밤이 끝났으니 자리를 옮겨야지.”

“그녀는 나와 밀궁으로 간다.”

백원후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의 앞에 결계를 열었다. 허리춤에 휘장 하나 두른 채 어찌나 장대하게 서 있는지, 야차의 모습에 백원후의 미간으로 주름이 잡힌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길 셈인가?”

“밀궁에 고양이는 없어.”

“이런, 이러언! 극락을 열어 준 뜨거운 밤이 머리마저 하얗게 태워 버렸는가?”

“닥•쳐•라•.”

“뿔 잘린 얼음 순록에게 천화를 먹이로 줄 셈인가.”

야차는 멍하니 백원후를 바라보았다. 빙요를 잊고 있었다. 호시탐탐 여울의 명줄을 끊어 놓을 궁리를 하던 그녀를 잊다니.

‘깨어 있는 상태라면 모를까 이대로는 위험하겠구나.’

그렇다 하여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빙요를 잡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찌한다?

“어찌하시겠는가.”

침묵하던 야차가 걸음을 떼자 둥근 달처럼 여울을 품은 결계가 그의 뒤를 따른다.

오랜 시간 제 색을 잃지 않은 목간들이 좌우로 밀려나며 바다를 가르듯 길을 연다. 한 줄이 사르륵 물러나면 그 뒷줄이 또다시 사르륵 길을 열었다.

늘어선 병사들과 같이 가지런한 열을 만들고 있는 목간들을 바라보는 야차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과거에 묶여 있는 이가 나뿐은 아니었군.”

“후후후, 영원을 사는 요신에겐 과거도 미래도 없다. 그저 오늘이 있을 뿐.”

백원후를 따라 화로를 지나려니 무언가 툭 튀어나와 야차의 다리로 감겨들었다.

“화묘?”

“고얀 것! 털 좀 뽑았기로서니 제 주인을 미워해.”

백원후의 말처럼 화묘의 등에는 털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염화의 향기에 본능적으로 감겨드는 화묘를 보고 있자니 야차는 진정 한탄스럽다.

“고작 고양이 하나 때문에 염라대왕과 척진단 말인가.”

“고작이라니. 지금은 털이 빠져 그러하지만 얼마나 어여쁜 불꽃을 가진 화묘인데.”

“여인네들이란!”

“후후후, 그런 여인네를 품지 못해 안달하는 사내들은 또 어떻고!”

꽃잠을 치르고 난 야차는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그런 야차의 모습이 낯설어 백원후는 웃는다.

‘그래. 이렇게…. 염화는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산화하는구나.’

기다란 비단 소매가 휘리릭 목간들을 물려 낸다.

드르륵, 드르륵.

화로를 지나 제단으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그 끝에 태양을 마주하는 듯 적자색의 빛을 뿜어내는 원형의 결계로 야차의 시선이 박혀 들었다. 자수정에서 친근한 기운이 느껴졌다.

‘명!’

붉은빛으로 걸음 한 백원후가 결계에 손을 얹으니 그 안에 잠든 명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그가… 살아 있다!’

자수정으로 향하는 야차의 발걸음이 천근만근으로 내려앉는다.

“믿을 수, 가 없, 어. 분명. 내 손으로 심장을 들어냈다.”

“그리도 미웠던가. 한검이라 불리던 친우가, 아내의 혈육이었던 이를, 그리 잔인하게 죽였어야만 했는가 말이다.”

원망 어린 목소리였으나 정작 백원후의 가슴엔 아무런 회한도 남아 있지 않다.

“이럴 수가.”

떨리는 야차의 손이 명이 잠든 자수정에 닿았다.

두근, 두근두근, 두근.

이전보다 더욱 강건하게 뛰고 있는 그의 심장이 느껴진다.

야차는 그의 손에 죽었던 친우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평온하게 잠든 친우는 하얀 백발로 죽어 간 천명이 아닌 삼천 년 전 그 시작에 선 명을 닮아 있었다.

“네가… 살려 낸, 것이냐.”

다시 만난 백원후의 요력이 전과 달리 미약해진 사실을 야차는 간과하였다. 여울에게 미쳐 있었고, 그녀로 충만한 그의 가슴에 다른 이를 위한 자리는 없었던 것이다.

“이제 모두가 한자리에 모였구나.”

붉은빛으로 빛나는 백원후의 결계 옆으로 새하얀 야차의 결계가 나란히 자리했다. 야차의 손이 닿지 않았음에도 결계가 투명하게 변해 버렸다.

해와 달처럼 각각의 영역 속에서 명과 여울은 나란히 머리를 맞대어 누워 있다. 천계에서 우애 좋기로 소문난 일천자와 일천녀처럼 그렇게 서로에게로 향했다.

“긴긴 세월을 돌아, 돌아,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아픔을 쌓아 가며. 이렇게 모였구나.”

지극히도 서로를 귀애하였던 오누이의 만남은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 속에 서로를 마주한다.

“그는… 왜, 깨어나지 않는가.”

“자신이 없었다. 그가 마주해야 할 세상이, 또다시 반복되는 지독한 저주가. 영영 끝나지 않을 나의 천형이.”

깊은 숨을 들이켠 백원후가 야차에게로 돌아섰다.

“그는… 나의 연인은 그대에게 어떠한 존재인가.”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야차가 뜨거운 숨을 토해 낸다.

“혈육과도 같은 벗이었으며, 유일하게 등을 내어 주었던 한검이었다. 더없이 자애로운 스승이었으며, 단 하나뿐인…. 하나뿐인 나의, 나라, 였다.”

그랬다. 은행나무 잎이 금비처럼 쏟아지던 그날에, 형제와도 같았던 황자 명은 물었었다.

“자네의 황제는 누구인가.”

율국의 황제가 아닌 묵의 황제가 누구인지 묻는다.

“천황은, 청운제입니다.”

천화의 죽음 후에 같은 물음이 명에게로 향했다.

“내가… 찬역에 동조하였다면, 달라졌을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변명은 없었다. 명은 천화의 죽음을 요신의 탓으로 미루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사랑이 혈육을 끊어 냈음에 명은 그 원죄를 품어 안은 것이다.

뒤늦은 깨달음은 야차의 심장을 관통해 버렸다.

“호국선의 나라가 그대의 것이었다. 나의 황제여!”

뜨거운 눈물을 삼키는 야차의 머리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닿았다. 원망과 분노에 눈이 멀어, 사랑도 우정도 잔인하게 베어 버렸다.

그 잔혹함에 죽고 또 죽으면서도 그를 놓지 않았던 것은 형제와도 같은 벗이었으며 단 하나뿐인 아내였다.

“요신이여, 벗의 연인이여. 나… 야차는 그대에게 진심을 다하여 고마움을 전한다.”

야차는 삼천 년을 움켜쥐었던 원망과 분노를 내려놓았다.

“율국의 호국선이여, 우리는 지독히도 닮아 있구나.”

더없이 사랑하였고, 그리워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잊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버렸으며, 돌아온 연인에게 심장을 내어 준다. 그렇게 삼천 년의 고통을 기꺼이 품어 안았다.

‘어째서, 나는 그리도 잔인했던가.’

잠든 명과 여울의 모습이 백원후의 가슴을 후벼 판다.

‘그의 마음이 나의 잔혹함에 등을 돌리면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리라 하였지.’

백원후의 볼을 타고 맑디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의 예언은… 내게, 얼마나 무서운 천형이었던가.”

턱에 고인 눈물이 투명한 결정을 맺으며 톡, 톡.

“삼천 년이 지나고서야 나는 깨닫는구나.”

백원후는 야차의 곁을 지나 명에게로 다가섰다.

‘이제 그대에게 빼앗았던 친우와 누이를 돌려주려 하니.’

너른 소매를 나비처럼 펼쳐 그가 잠든 자수정을 품었다.

‘내가 없는 세상이 너무 슬프지 않기를….’

투명한 자수정에 그녀의 입김이 서렸다.

마지막 입맞춤을 뒤로한 백원후가 야차의 앞에 섰다.

“긴긴 인연의 끝이 다가왔구나!”

아득한 슬픔 뒤로 찾아온 기쁨처럼.

폭우를 쏟아 낸 하늘이 만들어 내는 천궁처럼.

백원후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말릴 새도 없이 그녀가 자신의 명치에 손을 박았다.

“도대체, 무, 슨 짓을!”

야차가 백원후의 가슴으로 말뚝처럼 박혀 있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백원후우우우우우!”

아무리 잡아당겨도 가슴에 박힌 손이 빠지지 않는다.

“놓아라. 백원후! 무모한 짓 하지 마.”

“그대가, 염라와 했던 거래를 알고 있다.”

순간, 야차는 깨달아야 했다. 가슴 속에 박힌 그녀의 손이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빼앗은 것을 모두 돌려주었으니 그로 되었다.”

“나의 삼천 년은 나의 죄로 인한 것, 명의 삼천 년은 요신을 사랑한 죄. 그러나 그대와 여울의 삼천 년은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구나. 하여.”

“그만! 그녀는 너의 죽음을 원치 않으며 나 또한 이미 보상을 받았다. 그러니 움켜쥔 것을 놓아!”

“후후후후, 슬퍼하는 것인가. 그대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나를 위해.”

“그만, 부, 탁, 한다.”

심장을 꺼내려는 그녀의 손목을 쥐고 놓지 않는 야차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잃어버린 나라 율국의 호국선이 보인다.

“대라선에게 심장을 내어 줄 때에 그랬다지. 오래전에 죽어 굳어 버린 돌덩이 개나 주어 버리라고.”

“그만, 나는 너의 소멸을 원치 않는다.”

“내가… 원, 해.”

쿠궁!

영생을 사는 요신은 소멸의 뜻을 알지 못한다.

야차의 동공이 충격으로 확장되었다.

‘인간을 사랑한 요신은 결국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인가.’

통증을 느끼는 것인가.

미간을 찌푸리는 백원후의 모습에 손목을 움켜쥐었던 야차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후후후, 후회하지 않아. 나는 모든 것을 얻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인간들은 사랑이라 부른다지.”

하루살이 같은 인간들, 짧기에 더없이 화려하고 거침없이 타오르는 그네들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기쁨만은 아니었다. 하나 그 슬픔마저도 품어야 하는 것이 사랑이었다. 기쁨과 슬픔이 얽히고설켜서 더욱 짙은 향을 뿜어내는,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모든 것을 버려야 비로소 얻어지는 것.

“천화라 불리던 인간의 여인에게 요신은 더없이 값진 것을 배웠다, 후후후.”

그녀가 끝끝내 넘지 못했던 상실의 고통. 그 막막한 절망을 넘어 또다시 사랑하기를 주저 않는 인간들은 요신의 눈에 더없이 찬란하여 아름다운 존재였다.

“나의 마지막, 선물이다.”

백원후가 그에게 내민 것은 요신의 심장이었다.

칼로 베어 낸 듯 잘려진 반쪽짜리 심장.

명의 영혼을 돌려받는 대가로 절반을 잘라 내야 했던 심장이 아름다운 보석처럼 반짝인다.

스스로 심장을 뜯어낸 백원후는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야차여, 꺼지지 않는 불꽃이여, 나의 연인을 부탁한다.”

그 무엇에도 흔들림 없던 순혈의 요신이 스러진다.

가을날의 꽃잎처럼, 흩어지는 눈꽃처럼.

“안 돼에에에에에에에!!!”

무너져 내리는 백원후를 품에 안은 야차가 딱딱하게 굳어 버린 핏빛 보석을 그녀의 가슴에 쑤셔 넣었다.

“이리 가면 안 된다!”

제천대성의 피를 이은 순혈 요신, 그 이기심조차 당당하여 아름다웠던 백원후의 허망한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삼천 년 전 은령을 부여잡고 오열하던 명과도 같이 야차가 목이 터져라 소리친다.

“이리 죽으면 깨어날 명을 어찌 본단 말인가!”

아름다운 제비꽃색의 눈동자가 짙은 적색으로 변해 갔다. 마지막 남은 빛이 사라진다.

쿵! 쿵! 쿵!

“숨을 쉬어! 백원후!”

전장에서 하듯 굳어 버린 보석을 품은 백원후의 가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

“지하에 이런 곳을 숨겨 두었을 줄이야. 밀궁으로 돌아가면 나도 하나 만들어야겠는걸!”

염화의 요동을 느끼고 수정궁을 헤매고 다녔던 빙요가 끝끝내 백원후의 애화랑을 찾아냈다.

백원후의 요력 때문인지 꿈쩍 않던 목간들을 밀어내는 데에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목간들 사이로 너른 공간이 나오는가 싶더니 청동화로에서 화묘가 튀어나왔다.

“뭐야, 너로구나. 염라국에서 훔쳐 갔다는 불고양이가.”

크아아아아아. 캬아아아아.

화르륵. 불꽃을 피워 올리며 적대감을 드러내는 화묘의 모습이 가소롭다.

“건방진 것도 주인을 닮았어.”

백원후에게는 못 미치나 그녀 또한 요신이었다.

휘리릭. 부우우웅.

서릿발 같은 손짓에 비단 소매가 펄럭인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화묘가 벽에 부딪혀 수십 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붉은 살점들이 돌멩이처럼 굴러다녔다.

“후후후, 기다리거라. 네 주인도 곧 너를 따를 테니.”

수정궁에 머무는 이레 동안 빙요는 잔뜩 몸을 사리며 기회를 살폈다. 생각지도 못하게 백원후의 요력이 쇠한 것이 이상했다.

하지만 원숭이 자체가 이곳저곳 먹이를 숨겨 놓는 습성이 있기에 빙요로서는 섣불리 움직일 수 없음이라.

‘어딘가에 요력을 봉해 놓았을지 어찌 알아.’

부러 도발을 해 보아도 백원후는 표독한 말만 내뱉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상하단 말이지. 다혈질이던 그 성정이 하루아침에 변할 리가 없는데.’

생각의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사이 야차의 포효가 들려왔다.

옳거니!

‘결국 죽어 버렸는가? 쯧쯧쯧. 내게 맡겼으면 사나흘 정도의 작별의 시간은 벌어 주었을 것인데.’

앞을 가로막은 목간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로구나. 후후후, 한데 도대체 뭐가 있기에 이리도 겹겹이.’

드르르륵. 드르르르. 드르륵.

마지막 목간이 밀려났다.

‘대체 저게….’

허리 높이의 제단 위로 해와 달이 마주한 듯, 두 개의 결계가 보였다. 붉은빛의 결계 앞에는 뜻밖에도 백원후가 누워 있었다.

‘설마. 아니야. 아직은 이렇게 몸에 닿게 느껴지는데?’

빙요는 백원후의 기운이 본신이 아닌 붉은빛의 결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야차가 염라와의 약속을 지켰구나!’

제단의 계단 아래 무릎 꿇은 야차의 모습이 보였다.

“물•러•서•라•! 빙요!”

섬뜩한 음성에 다가서던 빙요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진정 요신을 죽인 겁니까.”

“나는, 무엇도, 답해 줄 수 없다.”

“하오나.”

“밀궁으로 돌아가라.”

“주군!”

“돌아가. 나는 두 번 다시 밀궁에 들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빙요는 도대체가 알 수 없습니다.”

다시 걸음을 떼는 빙요를 향해 야차의 뇌성이 울렸다.

“물러서라. 더 이상은 참지 않으리라.”

마치 새끼를 지키는 어미와도 같은 포악함.

빙요의 시선이 그의 뒤로 향했다.

월천녀의 월궁처럼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결계.

“설마, 설•계•를 펴신 겁니까.”

야차는 답이 없었으나 빙요는 알 수 있었다. 손을 뻗은 빙요의 손끝이 야차에게서 하얀 결계로 향했다.

‘이런, 이럴 수가….’

백원후의 요기가 붉은빛에서 나오듯, 염화의 기운 또한 야차가 아닌 백색의 빛에서 나오고 있었다.

“염화로 염화를 봉인하였구나.”

불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일정한 규칙을 갖는 물과는 달리 높낮이를 따지지 않는다. 하여 화마는 모든 것을 산화시킨 후에야 스스로 소멸하는 것이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이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

기괴한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애화랑에 울려 퍼졌다.

“흐흐흐흐, 하늘 꽃이 지옥 불을 품는다.”

새파란 눈동자를 번뜩이던 빙요의 얼굴에 균열이 가듯 핏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가지런히 올렸던 머리카락이 사르륵 공기 중으로 살아 움직이며 그 사이로 거대한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깟 계집 하나 때문에 염화를 잃다니….”

서슬 퍼런 한기를 피워 올리는 빙요가 걸음을 옮겼다.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시선이 여울이 잠든 결계에 칼처럼 박혀 있었다.

“영혼조차 남지 않도록… 산•산•이• 부숴 주마.”

염화를 잃은 전쟁의 신에게 요신은 분노했다.

애초부터 그녀를 위해 설계를 펼 생각조차 없었다. 그저 그녀가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거늘, 야차가 여울을 봉인해 버렸다.

그의 힘의 근원은 염화, 스스로에게 갇혀 버린 염화는 주인에게로 돌아오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 야차가 아닌 그녀를, 새로운 주인을 보호하려 할 것이다.

‘그와 함께 영원을 살아가려 하였는데. 천화가 야차의 염화를 삼켜 버렸다. 모든 것을 망쳐 버렸어!’

휘이이잉. 휘이이이. 타, 타탁, 타탓.

사방으로 얼음 꽃이 피어나고 서리가 내리며 얼어붙기 시작했다. 빙요가 뿜어 대는 한기는 순식간에 애화랑 전체를 얼려 버렸다.

“하아아아아, 빙요.”

움직임이 없던 야차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여울에게로 향하는 빙요의 시선을 가로막은 야차의 모습에 그녀가 웃는다.

“후후후후, 염화를 잃은 네가 나의 적수가 되리라 생각하는가.”

“태무 천무장!”

발끝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그의 몸을 휘감는가 싶더니, 무소뿔 투구에 철갑을 두른 야차가 전신을 드러냈다.

“어리석구나. 그 어리석음이 바로 네가 화산의 요신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다.”

“너의 목숨은 더 이상 불멸이 아니다. 한낱 인간인 주제에 무슨 소릴 지껄이는 것이냐.”

시퍼렇게 두 눈을 치켜뜬 빙요에게로 야차는 서슴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천 년의 봉인이 풀리기 전, 나는 이미 인간의 몸으로 반선의 경지에 올랐다.”

처걱. 처걱. 처걱.

갑옷 부딪치는 소리가 그의 걸음걸음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 이전에, 인요대전을 일으킨 태무신이었으며, 염화를 삼킨 야차였으니.”

빙요에게로 다가서는 야차의 오른손이 바닥을 향해 손가락을 편다.

“나는 무인의 나라 율국의 십만 대군을 통솔하던 호국선이었다.”

염화를 잃은 지금, 비록 인간의 몸으로 되돌아갔을지는 모르나 삼천 년의 전투 경력을 가진 그는 여전히 최고의 무장이었다.

파지지짓, 파짓.

마치 손바닥을 뚫고 나오듯 아홉 자 길이로 뻗어 나간 섬광이 번득이는 창의 형태로 바뀌었다.

“잊었는가. 너는 내게 너의 심장을 가를 무기를 선물했다.”

부우웅, 붕붕, 붕.

‘어리석었구나. 그에게 설창을 선물하다니!’

설창은 백원후에게 부러진 뿔을 깎아 만든 것으로 유일하게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무기였다. 그녀의 반려가 되어 주리라 믿었기에 주저하지 않고 건네주었었다.

‘설창을 가졌다 한들 인간이다. 한낱 인간일 뿐인 그가 요신을 이겨 낼 순 없어.’

백원후도 죽고 없는 지금, 빙요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

“가질 수 없다면 부숴 버릴 수밖에.”

“멈춰라!”

바람을 가르던 설창을 사선으로 그어 내렸다.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네가 속한 곳으로 돌아가라.”

경고에도 불구하고 빙요는 공기 중으로 날아올랐다.

타타타타타. 타타, 타. 타타타타타타. 타타타.

눈보라가 휘몰아치듯 그 수를 셀 수 없는 빙화접이 떼 지어 날기 시작했다. 퍼덕이는 날개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는 핏물이 배어 나왔다.

‘얼음 꽃나비!’

삽시간에 휘몰아치는 빙화접들을 밀어내기 위해 야차가 방어진을 폈다.

“공파지이이이인!”

태무신의 방진보다는 약한 결계가 버티지 못하고 그의 몸을 밀어낸다.

후두둑, 후두두둑. 후두둑, 후두둑.

맹렬하게 결계를 들이치는 빙화접의 기세에 결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꾸나!”

윙윙거리는 소음과 함께 들려온 빙요의 목소리에 야차의 뇌성이 터져 나왔다.

“사무라 공파!”

순식간에 확장된 공기의 파장에 눈보라에 감싸여 있던 빙요의 위치가 드러났다.

부우웅, 붕붕.

설창을 휘둘러 빙요를 베어 내려 했으나 순식간에 사라진 그녀는 야차의 등으로 살을 날린다.

“파란!”

바닥이 밀려나며 야차의 몸이 빙요의 옆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살은 피했으나 이번에는 얼어붙은 대리석 바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콰르르르. 콰르르르.

“화라사!”

사방으로 뻗어 나간 불기둥이 바닥을 녹이고 하늘로 튀어 오른 불꽃들이 얼음과 부딪치며 파열음을 냈다.

‘물러서지 않는다!’

명과 여울이 잠들어 있는 제단으로 향하는 빙요의 앞을 막아선 야차가 허리로 돌려 회전한 설창을 그어 올렸다.

휘리리릭!

썰물처럼 빠져나간 빙요의 입술이 비틀어진다.

‘무장은 죽어서 무신이 된다더니.’

거침없이 대항하는 야차의 강기에 빙요는 당황했다.

“하아, 하아, 하아.”

뜨거운 숨결을 토해 내는 야차가 들썩이는 어깨 너머로 여울을 바라봤다.

“개귀신! 푹 자고 있으라고. 내가 지켜 줄 테니!”

이를 드러내고 웃는 야차의 등 뒤로 잠든 벗과 아내는 그에게 배수진이 되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앗!”

설창을 높이 들어 뛰어오른 야차가 설창을 내리 그었다.

쉬이이이이이.

바람을 가르며 번뜩이는 날을 세웠으나 물러선 빙요의 머리카락만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으아아아아아!”

또다시 물러서는 빙요를 향해 야차가 설창을 던졌다.

“풍진 바라 사마타!”

동시에 야차의 손에서 뻗어 나간 강풍이 애화랑의 벽에 튕겨 그에게로 빙요의 등을 떠밀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맞았다!’

고통에 찬 비명 소리에 야차의 시선을 가렸던 한기가 사그라졌다. 비명을 내지르던 빙요가 가슴에 설창을 꽂은 채로 야차에게 달려들었다.

‘빌어먹을!’

물러서는 그의 발꿈치가 제단의 계단에 닿는 순간.

시커먼 그림자가 빙요의 머리를 덮쳤다.

“이랑군!”

빙요의 뿔을 입에 문 이랑군이 머리를 틀자 우직근, 뿌리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를 토하며 맥없이 주저앉은 빙요의 몸이 순백색의 백록으로 변해 간다. 긴 다리를 늘어트린 빙요의 갈비뼈 사이로 부러진 뿔이 박혀 있다.

“이랑군… 그녀를 놓아줘.”

야차의 말에도 이랑군은 뿔을 물고 놓지 않았다.

“이랑군.”

크르르르르르.

다가서는 야차에게 털을 세우며 경고한다.

야차를 바라보던 황금빛 홍채가 수축되는 순간, 이랑군의 이빨에 요신의 뿔이 끊겨 나갔다.

“꺄아아아아아아꺄아아.”

뼛속 깊이 새겨질 고통의 몸부림에 야차가 이랑군과 빙요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마아아아아아안!”

이전의 야차였다면 과감하게 숨을 끊어 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원망도, 분노도 존재하지 않았다.

“빙요… 어찌하여 멈추지 않고.”

정신을 잃었는지 고개를 떨어뜨리는 백록을 품에 안은 야차가 부러진 뿔에 손을 얹었다.

“반이다라 진.”

피가 멈추자 백록이 눈을 떴다.

공포에 질린 푸른 눈동자로 핏물이 고여 든다.

‘그래. 너는 백원후와는 다르다. 독하고 모질게 살려 노력하여도 두려움 많은 천성은 숨길 수가 없는 법이다.’

갈빗대 사이에 박힌 뿔로 손이 가자 백록이 미친 듯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심장을 피했으니 죽지 않을 것이다.”

뿔을 뽑아내지 못한 채 그녀를 놓아주어야 했다.

“흐으, 흐으, 흐으으으.”

거친 숨을 몰아쉬던 백록은 옆구리에 뿔을 박은 채로 달려 나갔다.

‘잘, 가거라. 포악한 수컷은 네게 어울리지 않아, 빙요. 네 상처를 핥아 줄 다정한 수컷을 만나기를 바란다.’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야차의 시선이 이랑군에게 향했다. 황금색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나무색으로 변해 있었다.

“낯이 익구나. 너의 눈동자.”

야차의 말을 알아들었는가. 잔뜩 곤두섰던 이랑군의 털이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고맙다.”

자칫 큰 부상을 입을 수 있었던 야차는 여울이 그토록 마음 쓰여 하던 벗에게 손을 내밀었다.

늑대는 묵묵히 야차의 얼굴을 응시했다.

“후후후, 예로부터 늑대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하였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선 이랑군은 다가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슬퍼하는 것인가.’

아련하고 씁쓸한 표정으로 야차를 바라보던 이랑군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떠나려 하느냐.”

물음에 답하듯 다시 한 번 눈을 맞춘 이랑군이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댄 야차가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사이 정이라도 들었던가. 어째서… 잃어버린 느낌이 드는 걸까.”

이랑군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야차의 가슴으로 알 수 없는 뭉클함이 밀려든다.

“염화를 잃으니 사라졌던 감성이 되돌아오는가.”

야차는 한참 동안이나 이랑군이 사라진 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알지 못했다. 떠나간 늑대가 마지막까지 천화를 지키던 바보 같은 아우였음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