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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혼례 (30/34)

30. 혼례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지금, 서쪽 끝 타라 사막에 위치한 밀궁은 계절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무더웠다.

“하아아, 덥다. 염화 때문인가?”

“오라버니도 염화의 열기가 느껴지는 거야?”

“혹시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 막 더워지고 그래?”

“이봐요, 태무신.”

정자에 앉아 서책을 읽던 야차가 그의 다리를 베고 누워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여울의 머리를 살며시 밀어냈다.

“안 그래도 염화 때문에 열이 뻗칠 텐데 맞불 작전인가? 왜 하필 사막에 집을 지었대? 뭐.”

속없이 들러붙은 여울은 떨어질 생각이 없는지 천연덕스레 그의 허벅지에 다시 머리를 얹었다.

“응? 말해 봐. 왜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냐고?”

‘눈이 내리는 그날에 네가 내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모든 기억을 되찾았음에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여전히 그에게 엿가락처럼 들러붙어 치근덕거렸고, 한 끼도 거르는 법 없이 고기를 즐겼으며 술은 더 늘었다.

“더우면 가서 물놀이나 하려무나.”

벌떡 일어난 여울이 두 눈을 반짝였다.

“물놀이? 같이할까?”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하구나.”

“무슨 말만 하면 좋은 생각이 아니래.”

여울이 깨어난 뒤, 밀궁에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사신들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고, 황량하던 화원에는 파벽과 닮은 절벽과 폭포가 생겼으며 시들지 않는 벚꽃이 만발했다. 가장 큰 변화는 야차였다.

“오라버니이.”

그윽한 부름에도 그의 시선이 서책에 콕 박혀 있다.

“그 또한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하구나.”

“뭐가?”

“입맞춤.”

마음을 들켜 버린 여울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부름에 얼굴을 돌리면 쪽 소리 나게 입맞춤이라도 하려 했건만!

“누가! 췟! 떡 줄 사람 생각도 않는데. 웃겨!”

“고맙다. 진정 마다하고 싶은 유일한 떡이 그 떡이니.”

“뭐야?”

“후후후, 말한 그대로다.”

정겹게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엔 더 이상 열정이라곤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하루를 온통 함께하여도 멀게만 느껴지니 여울은 더욱 섭섭하고 약이 올라 죽을 것 같다.

‘염화에 타 죽기 전에 약이 올라 뒈지겠네!’

어찌나 마음이 상하고 심통이 나는지 그녀의 입술이 삐죽이 튀어나왔다.

“내가 그동안 당신을 찾아 헤매며 어찌 살아왔는지 이야기했잖아.”

“나 또한 네가 어찌 죽었는지 말해 주었다.”

“아, 그니까. 서른셋은 염화에 타 죽었지만, 뒤로는 환생이 아니라 그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옮겨 다닌 거라.”

은령처럼 품어 주지 않아 여울은 화가 나고, 속도 없이 안겨 드는 그녀 때문에 야차는 답답하다.

“귀녀라 하여 다를 것이라 어찌 장담하지?”

“아흔아홉 번을 살아 보면 알아.”

‘아흔아홉이라….’

처음 깨어난 그녀는 아흔아홉 개의 꿈을 보았다고 했다. 정신이 혼미하여 착각을 한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아흔, 아홉, 을 살았더냐.”

야차의 시선이 여울에게 칼처럼 박혀 들었다.

“아…. 여, 섯, 이었던가? 다섯?”

‘내게는 단 하나의 생도 잊을 수 없는 고통이었거늘, 모든 것을 기억하는 지금. 너는 어찌하여 그리도 태평한 게냐.’

예쁜 눈알을 굴리는 여울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번 겪은 것을 잊은 적이 없다. 한 번이 두 번이 되면, 더 이상 그것은 실수라 할 수 없다. 어째서… 아흔여섯이 아닌 아홉이라 말하는가.’

천유화의 해독이 완전하지 않은 것인가. 무리한 각성으로 인한 후유증인가.

곰곰이 생각하던 야차는 온전하지 않아도 이리 돌아와 준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아흔여섯이었다.”

“어쨌든 간에, 염화에 타 죽은 건 인간이었던 서른셋뿐이야. 귀녀는 단 한 번도 당신에게 안기지 못했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더냐.”

“쉽게 죽지 않을 거라, 했….”

야차가 여울의 말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그만! 네가 살아난 것은….”

“내가 귀녀이기 때문이지.”

‘요신이 생명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말하고 싶지 않다. 지금 여울에게 더없는 애정을 갖고 있는 백원후였으나 야차는 그녀를 믿지 않았다.

‘반드시 제거한다.’

“췟! 알았어! 더 이상 귀찮게 안 할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여울이 문을 향해 내달렸다.

야차는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의 평온함은 폭풍 전야의 바다가 갖는 고요함과 닮아 있다는 것을.

‘밀어내지 않을 것이니 그 자리에 있어. 더 이상은 나를 흔들지 말거라.’

이리 바라보며 말라 죽는 한이 있어도 이번만큼은 정말 그녀를 잃고 싶지 않다.

‘제발…. 나를 자극하지 마.’

귀찮게 하지 않겠다던 여울은 해가 지기가 무섭게 야차의 침실에 잠입했다. 번번이 실패하면서도 포기를 모르는 그녀의 집념에 이제는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정말 한시도 숨을 돌릴 수가 없구나.”

“가만히 있을게, 응?”

“그리될 것이다. 사리마라.”

주문이 야차의 입술을 벗어나는 순간, 그의 침상에 놓여 있던 비단 이불이 휘리릭 그녀의 몸으로 감겨들었다.

옴짝달싹할 수 없이 온몸을 감아 버린 이불을 어깨에 둘러멘 야차가 그녀를 침상에 눕혔다.

“자거라. 더 이상 나쁜 꿈은 없을 터이니.”

여울의 투정에도 아랑곳없이 곁에 누운 야차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 알 수가 없구나.”

야차의 말에 애벌레처럼 꿈틀거리던 여울이 잠잠해졌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평생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네가, 귀녀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야차가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이 생이 마지막이라 생각했었다. 더 이상의 내세는 없을 것이라 그리 믿었다.”

“그렇게 될 거야.”

“하늘에 닿았다 하여 모든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 어떻게 알았어?”

그녀의 속눈썹이 야차의 볼을 간질였다.

‘천선이 너의 기도를 들어줄지 알 수 없으나, 백원후를 소멸시키면 나는 염라를 찾을 것이다.’

약조를 지켰으니 그의 불멸을 거두어 달라 청할 것이다. 그녀에겐 마지막 기도이며 야차에게는 영원한 안식이 될 터였다.

‘사랑하였다. 나의 영혼을 태울 만큼, 내 모든 것을 버릴 만큼. 너를 은애하고 연모하였으며 더없이, 더없이 사랑하였다.’

천명은 다시 태어날 것이다. 누이도, 벗도 연인도 없는 세상이 그에게는 더없는 천형이 되리라.

“아흔여섯 번의 생을 마주하였으나 우린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구나.”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었지.”

“삼천 년이다. 충분하지 않던가.”

지쳐 버린 음성이 여울을 아프게 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녀를 죽인 요신과 단 하나뿐인 사랑을 죽인 오라비도 용서하였다. 그러나 죽어서도 놓을 수 없었던 낭군은, 그의 아이는 여전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난, 잃어버린 아이를 되찾고 싶어.”

단 한 번도 아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던 그녀였다.

은령이 잃어버린 아이를 처음으로 입에 올린 날, 삼 년 만에 황도를 찾아 명이 그들을 방문했던 그날이었다.

“아들입니다.”

“후후후, 어찌 그리 장담하오.”

“떠나 버린 그 아이가 다시 온 거랍니다. 돌아오기를 얼마나 기다렸게요. 분명합니다.”

첫아이를 가졌을 때와 꼭 같은 꿈을 꾸었다며 해맑게 웃던 그녀였다.

그 짙은 슬픔에 야차의 입에서 염화보다 더 뜨거운 통곡이 터져 나온다.

“아아아아, 천화여. 나의 천화여, 그대는 내가 줄 수 없는 유일한 것을 달라 하는구나.”

가질 수 없다는 절망을 넘어서는 깊은 그리움.

서로에게 독이 되는 이 사랑을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아흔아홉입니다.”

확고한 여울의 음성에 빙요의 푸른색 홍채가 놀라움으로 확장됐다.

“분명, 세 번의 삶이 더 있었습니다.”

“그, 것이 사실입니까. 주군께서 모르는 생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 세 번의 생에는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혼자였습니다.”

“그가 찾지 못했다 하여도 천선 낭랑이 놓쳤을 리가 없습니다. 천계로 데려가지 못하여 안달이었는데. 진정 낭랑 또한 보지 못하였습니까.”

“분명합니다.”

“여울 님이 착각하는 것 아닌가요?”

“낭랑도, 오라버니도, 백원후도 없었습니다.”

돌아온 그녀의 기억 속에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세 번의 생이 또렷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설창을 피해 갔던 유일한 세 번이었지요.”

각성으로 수많은 물음에 대한 답을 얻었으나, 여울은 야차와의 사이에 새로이 생겨난 벽과 마주해야 했다.

“또다시 널 잃고 싶지 않아.”

그 벽은 여울이 겪어 왔던 그 어떤 장벽보다 견고했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저 이렇게, 모든 것을 잊고 이렇게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싶구나.”

단 하나뿐인 사랑이 괴로워 그 사랑을 놓으려 한다.

“연인이 아니어도 이렇게 바라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미련 갖지 않을 것이다.”

돌아온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묵이 아닌 명을 닮아 있었다. 그 눈빛이 여울을 더욱 초조하게 하였다.

“바다를 향해 가는 강물과도 같다. 아무리 물길을 틀어도 묵묵히 흐른다. 결국 바꿀 수 없는 것인가.”

이번 생마저 전과 같은 수순을 밟게 되리란 불안감에 휩싸였다.

깊은 생각의 끝에 여울은 빙요를 찾았다. 그녀가 계획하는 내일에 요신의 힘이 필요했다.

“주군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빙요의 물음에 여울이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아도 나의 생은 스물다섯 겨울에 멈춰 버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세 번의 생에서도 나는, 스물다섯을 넘기지 못하였습니다.”

하늘은 모든 것을 계획하고 물 흐르듯 소리 없이 이룬다. 실수나 실패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믿을 수가 없구나. 어떻게 그런 일이.’

자리에서 일어난 빙요가 정자를 내려섰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물음이 회오리쳤다.

“삼천 년을 돌고 돌아 완전의 수로 태어난다.”

백 년을 살지 못하는 인계에서는 백은 영원함을 뜻한다. 하여 인간들은 백년해로를 꿈꾸고 백전백승을 기원해 왔다.

그러나 천계에서의 백은 완전함을 뜻한다. 모든 것이 온전히 채워져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숫자.

“백 번째 생.”

‘사내도 계집도 아닌 것이라. 그저 수많은 껍데기 중 하나라. 그리 생각하였는데.’

빙요는 조용히 시선을 맞추는 여울을 바라보았다. 죽음에서 돌아온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삶과 죽음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너는, 누, 구, 인가.’

말갛게 웃음 짓는 여울을 바라보는 빙요의 푸른 눈동자는 혼란으로 일렁였다.

“내게 말하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부탁이 있습니다.”

“무, 무엇입니까.”

“어찌하면 염화를 품을 수 있겠습니까.”

빙요의 입에서 새된 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세월을 거쳐 백 번째의 생을 산다고 한들, 인계에 속한 너 따위가 감히 요신인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서슬 퍼런 살기에 여울의 얼굴로 새하얀 살얼음이 내려앉았다. 그럼에도 여울은 여전히 웃고 있다.

“그대가 야차를 마음에 품고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면! 어찌 내게 그따위 소리를! 나를 조롱하는 것이냐. 인간도 귀신도 아닌 너 따위가?”

“하여 부탁이라 하지 않더이까.”

“후후후, 하하하하하! 죽다 살아나더니 미친 게로구나.”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삶을 어찌 유지하겠습니까.”

“그와 관계를 가지면 너는 죽는다.”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내가 죽여 줄까?”

빠드득. 빙요가 이를 간다. 성이 나서 가슴속에 눈보라가 치고 심장은 점점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대체 요망한 년이 나와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곧 염화에 타 죽을 것이라 하루하루 기다리기만 하였는데, 그녀의 머리카락 한 올 바람에 날아갈까 전전긍긍하는 야차를 보니 기다림의 끝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어차피 죽을 날은 정해졌고 그 방법의 차이라면 당신은 무엇을 택하시렵니까.”

“서른세 번은 염화에 타 죽고, 예순세 번은 설창에 죽었다. 다른 세 번은, 그 세 번은 어찌 죽었느냐.”

“한 번은 아비에게 맞아 죽고, 다른 하나는 우물에 빠져 죽었으며, 마지막은 들짐승에게 찢겨 죽었습니다.”

참혹한 죽음을 논하며 웃음 짓는 그녀의 모습에 빙요는 기가 질려 버렸다.

“이대로 거리를 유지하며 오누이처럼 산다면 스물다섯의 겨울을 넘길지 그 또한 알 수 없지 않느냐.”

“그 또한 모험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미 선택을 하였습니다. 이리 앉아 죽음을 기다리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귀녀의 몸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그와의 꽃잠을 계획하지만 어찌 될지는 여울 또한 알 수 없었다.

“야차가 당신을 곁에 두는 이유는 당신이 북주설국의 빙요이기 때문이라 들었습니다. 염화의 화기에 죽지 않기 때문이라 들었는데, 아니 그러합니까.”

“염화가 나의 한기를 잠재울지, 내가 그 염화를 삼켜 버릴지. 나 또한 알 수 없다.”

“만약. 내가 그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한다면.”

역시나 빙요의 얼굴로 푸른 핏줄이 타고 오른다.

“염화에 휩싸이는 그 순간.”

“얼려 버리면 되겠구나.”

생각지도 않은 말을 뱉은 빙요가 스스로에게 놀라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역시 만년설의 요신다우십니다.”

‘서, 설계를 펴란 말인가!’

여울의 모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진심인가.”

“그리해 주시렵니까.”

요신은 천 년 고목처럼 세월의 지혜를 차곡차곡 쌓으며 시간을 넘어선다. 부족함 없이 살아온 탓에 이기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으나 아이 같은 면이 많아 더없이 순수하여 솔직한 이들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이더냐.”

“살아 있는 것에 설계를 편 적이 있으십니까.”

“일각도 버티지 못하였다.”

“하면 저는 어찌 될까요.”

“모를 일이지.”

“그렇죠. 모를 일이죠. 하나 운이 좋다면 당신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하는 것?”

“요신은 그 수컷을 다른 암컷과 공유하지 않는다 들었습니다.”

“요신? 아, 백원후였군. 그녀가 네게 한 말이었어.”

고개를 끄덕이던 빙요가 생각난 듯 물었다.

“백원후가 아닌 내게 그런 부탁을 하는 연유가 무얼까.”

“나의 죽음은 그녀에게 또한 가혹한 형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그녀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하면 나는? 천계와 인계, 마계까지 얽혀 있는 질긴 너의 운명에 왜 들어서야 하는 것이지?”

“같은 수컷을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그 또한 공유할 수 없지 않습니까.”

여울의 말에 빙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나를 어찌 믿고 그러한 부탁을 할까.”

“이천 년을 야차의 곁을 지켰다 들었습니다.”

“그는 날 믿지 않아.”

“요신을 증오하는 그에게, 긴 시간을 함께한 유일한 벗 또한 요신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짐까지 떠안을 수밖에 없는 족쇄일 테니.

“지나치게 위험한 무리수를 두려 하는구나.”

“더없이 소중한 이를 지키고 싶을 뿐입니다.”

빙요는 야차를 떠올리겠지만 그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진정 여울이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혹시 모를 우리의 내일이 뜨거운 불길과 차가운 만년설을 이겨 내고 살아남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이백 일입니다. 첫눈이 내리고 이백 일만 염화에서 살아남도록 지켜 주세요.”

“나는 너를 죽일 수도 있다.”

섬뜩하게 노려보는 빙요의 시선에도 여울은 변함없이 따뜻한 미소로 마주했다.

“그 정도는 시간을 내 주시어야 야차의 분노를 피해 가시지 않겠습니까.”

“흐음, 그도 그렇구나.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제게는 기대라는 것을 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운명과 싸우느라 고전 중이니까요.”

아흔아홉 중, 그 누구도 여울만큼 긴 시간을 야차와 함께했던 이가 없었다. 아흔아홉의 전부를 기억해 낸 이 또한 없었으며, 하늘로 기도를 올렸던 이도 없었다.

‘또한 단 한 번도 아이를 가진 여인이 없다.’

하늘이 정한 운명은 이미 큰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아무리 물길을 틀어도 어쩔 수 없이 흘러야 한다면, 나는 내 이름처럼 큰 여울을 만들어 보려 합니다.’

흐르는 물이 바다가 아닌 강으로 역류한다면….

어쩌면 그들의 내일에 작은 희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밀궁의 서고.

마시지도 않는 송유차를 사이에 두고 빙요와 야차는 말이 없다. 긴 침묵은 이미 반 시진을 넘어서고 있었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빙요였다.

“어찌하시렵니까.”

“무엇을….”

“그녀에게 설계를 펴는 것을 허하시겠습니까.”

은령의 환생 모두가 운명을 이겨 내지 못하고 스물다섯에 죽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세 번의 생을 합하여 그 숫자가 아흔아홉이라 한다.

‘내가 품지 않는다 해도 오는 겨울을 넘기지 못한다.’

여울이 깨어난 이후 염화와 귀녀에 대한 서책을 모조리 뒤지고 있었으나 뾰족한 묘안을 찾지 못했다.

“모든 사실을 듣고도 어찌 이리 조용하십니까.”

“화를 내어 무엇할까. 처음부터 내 손에 쥐어지는 여인이 아니었는걸.”

죽음에서 돌아온 지 겨우 한 달, 또다시 죽음과 맞서려 하는 여울에게 이제 야차는 화도 나지 않았다.

연인이기를 포기하고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려 하였건만, 하늘은 그조차 허락지 않았다. 더 이상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으니 그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하늘이라 하여 개귀신의 행보를 예측할 수 있을까.’

처음 만났던 파벽에서부터 지금까지 여울은 야차의 가슴에 끝도 없는 소용돌이를 만들며 그를 흔들어 왔다.

‘내일 내 가슴에 칼을 꽂는다 하여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그 예측할 수 없는 행동들이 그녀가 가진 유일한 무기일 테니.’

고개를 든 야차가 처음으로 빙요를 향해 미소 지었다.

“너를 찾은 것을 보니, 둘 사이에 내가 알지 못하는 친분이 쌓였는가 보구나.”

“그럴 리가요. 요신은….”

“수컷을 공유하지 않는 법이지.”

푸른빛이 감돌 정도로 백색을 띠던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른다.

“얼굴이 붉어졌다.”

“설마요. 저는 만년설의 빙요입니다.”

“후후후, 그래.”

삐죽이 입술을 내미는 빙요의 모습에 야차의 눈가로 웃음이 번졌다.

‘반만년을 살아온 요신이 어찌 점점 그녀를 닮아 갈까.’

이기적이기 짝이 없던 백원후가 생명을 나누어 주고, 피마저도 차갑게 얼어붙은 빙요가 새치름하게 얼굴을 붉힌다. 인계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두 요신을 이리 변하게 만든 여울의 능력이 새삼 감탄스럽다.

“그녀를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싫습니다.”

“굳이 내게 사실을 고하는 연유가 무엇일까.”

“설계를 펴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뒷감당을 어찌하겠습니까. 정녕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십니까.”

“어찌 여인들은 하나같이 제가 원하는 것만 물을까.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궁금치 않은가.”

“그건 이미 알고 있으니 묻지 않는 게지요.”

“빙요….”

휙 돌아선 빙요가 걸음을 멈추자 그녀의 등 뒤로 한숨처럼 야차의 음성이 닿는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어라.”

“저를, 믿으십니까.”

“그에 대한 답은 이미 한 것으로 아는데.”

한결같은 사내였다. 언령 또한 한결같다.

“나는, 그녀의 선택을 믿는다.”

지나침도 어긋남도 없는 기상과 절개에 빙요는 설렌다. 북주설국의 주인이며 만년설의 요신이 그를 가슴에 담은 이유였다.

“후회 않으시겠습니까.”

“후회는 삼천 년 전 이미 시작되었다.”

이천 년 동안 곁을 지켰던 빙요였으나 단 한 번도 이리 온화한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없다.

“그, 리하겠습니다.”

“고맙구나.”

만년설 위로 쏟아지는 햇살처럼 빙요의 가슴에 따뜻한 일렁임이 밀려들었다.

***

천계의 시간이 멈추고 인계의 시간이 열린다.

“가거라! 천계와 인계 그리고 마계에 전해라. 염화와 천화의 혼례식이 있음을!”

수백 수천의 산비둘기가 저마다 초대장을 발에 묶고 수정궁을 떠나 천지 사방으로 흩어져 새까맣게 날아오른다.

먹구름 같던 산비둘기가 사라진 파란 하늘에는 오색 비단이 펄럭였다. 수정궁의 단주들마다 화려한 꽃과 향초가 걸리고, 연회장 곳곳에 커다란 화로가 지펴졌다.

대리석 바닥에는 두툼한 비단 양탄자가 길을 만들었다. 그 위를 오가는 식신들의 표정은 더없이 상기되어 속닥거리는 소리마저 분주했다.

“아우, 추워! 진짜 태무신이 혼례를 올리는 거야?”

“그렇다잖아.”

“어후! 무서워라. 전쟁의 신이 다녀가면 여기도 폐허가 되어 버리는 것 아닐까?”

“그러게나 말이야. 왜 하필 수정궁이래?”

“여울 님이 그러자고 했다는데?”

“백원후 님의 화주 때문 아닐까?”

“맞아. 각시가 술고래잖아, 큭큭큭.”

“쉿! 들으시겠다.”

바지런히 오가는 식신들은 혼인식 준비에 여념이 없건만, 정작 주인공은 건넛마을 불구경하듯 계단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

“그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느냐?”

“올 거예요.”

“어찌 그리 장담하누?”

“제 옆이 바로 그의 자리니까요. 삼천 년 전부터.”

곁으로 다가앉은 백원후가 오른손 중지를 만지작거리는 여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야차의 가락지가 없구나.”

“초대장이 필요했어요.”

“참으로 알 수가 없어. 그가 널 내게 보내다니.”

“보낸 것이 아니라 제가 제 발로 걸어왔어요. 참!”

여울이 왼손에 끼고 있던 자수정 가락지를 내밀었다.

“돌려 드릴게요.”

“섭섭하구나.”

“섭섭다 마셔요. 우리 인연이 가락지 하나에 이어지고 끊어지는 그런 시시한 연이 아니니.”

환하게 웃는 여울을 보니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손에 놓인 가락지는 흔적도 없이 그녀에게 흡수되었다.

“신기하네.”

“나는 널 만나기 전까지 신기한 것이 없었다.”

“있었어요.”

“그런가? 뭐가 신기했던고?”

“눈물.”

“후후후, 잊은 게냐. 요신은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아.”

“눈물 따위 흘리던데요. 삼천 년 전에.”

“아….”

죽어 가면서도 요신의 눈물이 마음 쓰였던 것일까.

“그 옛날에도 내가 할머니에게 바랐던 것은 내 오라비의 온화한 아내가 되어 주는 것뿐이었어요.”

“기억한다.”

“처음 봤을 때부터 절 아주 싫어하셨어요.”

“그때는 암수의 구분 없이 그의 곁에 있는 모두가 싫었다. 지금은 암컷들만 싫어하지.”

“후후후, 오라비를 잘 부탁한다고, 그의 곁을 지켜 달라 하였던 것도 기억하십니까.”

“삼천 년 동안 그의 곁을 지켰다.”

“풉! 그러니까요. 그 긴 세월 동안 덮치지도 않고 무얼 하셨답니까.”

할 말을 잃은 백원후의 팔이 묵직해졌다. 여울이 그녀에게 머리를 기댄 것이다.

“너는 어찌 그리 용서가 쉬운 것이냐.”

“쉽지 않았어요.”

“하면….”

“요신의 시간을 보았어요. 삼천 년 이전의 시간도.”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백원후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할머니의 생명이 내 안으로 흘러들 때 기억들도 함께 건너왔나 봐요.”

생명을 나눈다는 것은 가진 것 모두를 공유한다는 사실을 요신은 만 년에 다다른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천방지축 망나니였던데요. 지독하게 외롭고 쓸쓸한 기억이었어요. 그래서 그리도 사고를 치셨나 싶네요.”

“나를… 동정하는 게냐.”

“우라질! 또 시작이야. 삼천 년 전에도 그리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더니.”

“아니면 말고.”

“췟!”

오가는 식신들을 바라보는 여울의 발이 흥겨운 듯 까닥인다. 내색은 않지만 혼인식을 올릴 생각에 아무래도 들뜬 듯했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백원후가 묻는다.

“왜 하필 첫눈 오는 날에 혼례를 올리고 싶은 게냐. 네게는 더없이 아픈 기억일 텐데.”

“그에게도 지울 수 없는 악몽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더더욱 피해야지.”

“아니요. 상처는 치유되었다 하여도 그 흔적을 남겨요. 지울 수 없다면 다른 것으로라도 덮어야죠. 보이지 않게. 생각나지 않게.”

백원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어 냈다.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으니 좋은 기억으로 덮는다.”

“헤헤헤, 그에게도 저에게도 첫눈은 더 이상 슬픈 기억이 되지는 않을 거예요. 우리가 혼인한 날이니까.”

“그래. 그리되겠구나.”

“할머니.”

“으응?”

“이 시간이 지나고, 벚꽃 휘날리는 봄이 되면 그때는 나랑은 잊고 살아요.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흥! 그러자꾸나. 전생의 빚도 다 갚았겠다.”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상한다. 마치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아, 명에게서 버림받던 그날처럼 가슴으로 통증이 일었다.

“내 너와 얽혀 삼천 년을 눈물로 보냈으니. 서로 뚝 떨어져 남처럼 살자꾸나.”

심통이 났는지 쌀쌀맞은 백원후의 대꾸에 여울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웃음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린다.

모두가 기다리던 첫눈은 먼동이 트기도 전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둠 속으로 별빛처럼 반짝이는 첫눈을 맞으며 손님들이 찾아들었다. 화산의 수정궁은 문이란 문을 모두 열어 손님들을 맞이했다.

제일 먼저 찾아든 이들은 마계에서 초대된 파천왕 열락이었다. 수정궁 북쪽 땅을 열고 나타난 열락은 산군으로 데리고 있던 열두 신장과 함께였다.

열두 신장의 뒤로는 야차와 함께 도주한 요괴를 잡았던 요마단의 무사 백여 명이 줄지어 따르고 있었다.

각각 오신산과 요신각에서 열린 결계로 신선들이 들어섰다. 인요대전 이후로 처음 만나게 된 요선들과 반선들도 어색한 인사를 나누며 각자의 자리에 찾아들었다.

가장 긴 행렬을 이은 것은 인계의 손님들이었다. 천계에 적을 두고 있으나 인계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은 남두성군과 북두성군이 가장 먼저 수정궁에 도착했다.

그 뒤로 구주 제일상단주와 그의 딸이 귀동인 아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비단옷을 갖춰 입은 개천의 아이들과 여울에게 신세를 졌던 모든 인계의 인연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꾸역꾸역 서쪽 결계에서 쏟아져 나왔다.

가장 늦게 도착한 이들은 가장 화려한 행렬로 하늘을 수놓았으니 바로 천계의 천신들이었다. 천무신 대라선을 제외하고 인계의 복구에 나섰던 모든 천신들이 속속들이 수정궁의 정원으로 내려섰다.

삼관대제와 서왕모를 비롯해 구천현녀와 관음이 모습을 드러냈으며, 천계에서도 두문불출하는 천후마조까지 시동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그렇게 제 주인을 등에 실은 극락조와 봉황 등의 신수들이 수정궁의 정원으로 내려앉았다. 마지막으로 오색구름에서 내려서는 천선 낭랑의 모습도 보인다. 다른 천신들과 달리 단아한 선녀 하나만을 대동한 조용한 행차였다.

태양이 떠오르자 열두 선녀가 풍악을 울리기 시작하며 비로소 혼례식의 모든 준비가 끝이 났다.

새까만 머리카락을 구름처럼 올려 천화 장식으로 마무리한 여울은 초조한 듯 은경을 바라본다.

새하얀 얼굴에 짙은 눈썹 사이로 새까만 눈동자가 밤하늘 별처럼 반짝인다. 초승달 같은 콧날 아래 자리한 도톰한 입술은 유난히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붉은 비단옷에는 새하얀 천화가 수놓아져 있었고 금실 은실 엮어 만든 옷깃과 복대는 더없이 고귀한 듯 그녀를 감쌌다.

“이리 아름다운 천화는 본 적이 없습니다.”

문가에는 천선과 동행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영산의 여울랑, 천선 낭랑께 인사 올립니다.”

“인사는 무슨, 되었습니다.”

예를 갖추려던 여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천선의 곁에 선 여인에게로 향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제자입니다.”

“출산을 관장하는 후, 여울 님께 인사 올립니다.”

‘32대 대천화 은후!’

이름만으로도 심장을 쥐어짜는 통증이 일었다. 이생에서는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으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가슴이 소리 없이 운다.

“은설은 죽음 이후 바로 천계에 들었으나. 은후는 천기를 누설한 죄로 천형이 끝나는 두 해 전에서야 태안마을에서 발견하여 데려왔습니다.”

‘태안마을! 설마….’

결계가 잘못 열려 망향선 위로 떨어졌을 때, 산 제물로 바쳐진 이들 속에 낭랑의 노래를 부르던 아이가 있었다.

“그 노래, 어디서, 누구에게 들은 거니?”

“모르겠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들은 것 같은데.”

“그래. 그렇구나. 넌. 이름이 뭐지?”

“후요. 그냥 후.”

“예쁜 이름이구나.”

모든 것이 소름 돋을 만큼 치밀하게 얽혀 있으며 같은 방향을 향해 서 있다.

“보고 싶을 거예요.”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나 잊어버리면 안 돼요? 네?”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 잊혀질 것을 더 두려워하던 그 아이.

‘지척에 두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인연은 그렇게 돌고 돌아 또다시 스쳐 간다.

“혹. 살곶이다리…. 장님 노파도 그녀였던가요.”

천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울의 가슴으로 터질 듯 타오르는 무언가가 밀물처럼 들이쳤다.

“늘…. 내 곁에 있었군요.”

“그녀의 뜻이었습니다.”

은후에게로 향하는 천선의 시선을 따라 여울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물이 차올라 뿌옇게 흐려진 기억 속에 그녀를 본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생각했던 그 세 번의 삶에도 그녀가 있었어!’

아비에게 맞아 죽기 이전에 그녀를 대신하여 기루에 팔려 갔던 언니가 있었고, 들짐승에게 찢겨 죽기 전에 그 앞을 막아서던 동생이 있었다. 그렇게 은후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여전히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언니이이이이!”

참을 수 없는 회한으로 여울이 은후를 끌어안았다.

“새 신부가 어찌 이리 눈물을 흘리십니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너무나 고맙습니다. 어흐윽.”

당황한 은후가 통곡하는 여울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만 우시어요. 좋은 날이 아닙니까.”

“흑흑흑흑, 알아보지 못하여 미안해요. 미안해요.”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난감해하는 은후의 모습에 여울의 시선이 천선에게로 향했다.

“어째서….”

“마지막으로 그대를 만난 후, 이제는 더 이상 지켜 주지 않을 만큼 강건해졌다는 것을 느꼈나 봅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여울을 바라보는 은후는 그저 고요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운명에 순응했던 은설과 달리 담대하게 싸우고 당당하게 천형을 받아들였던 대천화 은후.

아흔아홉 번의 생 모두, 각기 다른 모습으로 그녀는 여울의 곁에 자리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천형을 모두 마치고 천계에 든 은후의 모습은 더없이 평안해 보였다. 너무나 늦은 지금에서야 제자리를 찾아간 은후를 여울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이제는 놓아주어야 하겠지요?”

“후후후, 그대의 대답은 아직도 변함없겠지요?”

또다시 천계에 들 것을 권하는 천선의 모습에 여울이 눈물을 닦아 내며 고개를 저었다.

“천선께서도 참으로 고집이 쇠심줄이십니다. 천년만년 물어 보세요. 저의 답은 늘 같을 것입니다.”

“후후후, 자식을 포기하는 어미도 있답니까.”

“그 자식에게는 그만의 길이 있을 테니, 하나 정도는 예외를 두심이 어떠할까요.”

“그 또한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이럽니다.”

“포기하세요. 그 자식이 아주 고마워할 겁니다.”

“후후후,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 자식, 저 자식 하며 한마디도 지지 않고 천선과 말씨름하는 여울의 모습에 은후가 웃는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리면 나 또한 언니처럼 웃게 될까.’

이 생은 아니라도 혈연으로 얽혔던 인연이었다. 천륜이라는 이름 아래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언니였기에, 여울은 그녀가 벗어나지 못한 그 굴레에서 해방된 은후를 아낌없이 축복한다.

그녀의 평온이 영원을 이어 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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