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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깨어난 천화 (29/34)

29. 깨어난 천화

화창한 햇살이 드리워졌던 오신산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결계를 통해 천선과 야차가 들어선 탓이었다. 신수들이 자취를 감추고 바둑을 두며 시화를 읊던 신선들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산 정상에 있는 청루에 자리한 천선이 야차에게 화로차를 건넸다.

“말하라.”

야차의 음성이 지나치리만큼 무겁게 가라앉았다.

“삼천 년 만에 처음으로 천계에 기도문이 올라왔습니다.”

“기도문이라?”

“예.”

“천화는 그대가 모두 거두어 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직, 하나가 남아 있지요.”

‘은령!’

순간 찻잔이 야차의 손에서 부서져 나갔다.

전생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여울이 기도문을 올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각성을 했다 한들 지금껏 그 누구도 하늘에 기도문 따위를 올리지 않았다.

“서쪽 타라에서 올라왔습니다.”

타라! 야차의 밀궁이 있는 곳.

믿을 수 없다. 모든 기억이 돌아왔다면 그리 태평하게 야차를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분명 천화의 기도문이었습니다.”

‘정녕 천화가 깨어난 것인가.’

“천화의 기도가 제게 이르기까지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스물여덟 층의 삼계를 지나야 닿을 수 있는 상사천, 그 너머는 신선들조차 초대 없이는 들어설 수 없는 신들의 세계였다. 상사천을 건넌다 해도 태청과 상청을 넘어야만 천선 낭랑의 옥청에 다다를 수 있었다.

“지난날, 대천화들은 기도문과 함께 신체 일부를 태워 왔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상사천을 넘기 위해선 천신의 자손임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천선이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손가락 길이로 잘려진 머리카락이 붉은 색실에 묶여 있었다.

“누구의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머리카락을 집어 든 야차의 손끝으로 그녀의 향기가 묻어난다. 가슴으로 밀려들어 파도처럼 일렁이는 이 감정이 화기인지 슬픔인지 야차는 알 수가 없었다.

“하늘에, 기도를 올렸더냐.”

“췟, 줬으면 그만이지. 부적을 붙이든 이름을 붙이든 무슨 상관이람!”

“내 오늘 출타할 예정이니 돌아오는 길에 찾아다 주마.”

“꼭 구름이어야 해. 내가 딱 보면 알 수 있어.”

“연에 이름이라도 써 놓은 것이더냐.”

“그런 게 있어.”

야차는 여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몸에서 선홍색의 살기가 피어올랐다.

“무엇을, 무엇을 빌었더냐. 자신을 버린 하늘에게 무엇을 빌었느냔 말이다.”

두 손을 모았던 천선의 비단 소매가 펼쳐지자 상 위로 그가 찾던 방패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뼈대를 이루던 나무 대가 사라진 종이에는 선명한 천언령이 적혀 있었다.

파진 가이라 천화지 염화 하나 시에 사 다이라.

천화와 염화가 하나 되어 한날한시에 죽음에 닿기를.

마지나 하나이 여우이 생 소이 기우다라.

마지막 생, 하나 되어 영원한 소멸을 기원합니다.

“크크크크, 크큭. 하하핫핫핫. 겨우, 겨우. 크크크.”

오랜 시간 돌고 돌아 이리 만났으니 행복하게 살게 해 달라 기도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여울은 함께 죽기를 기원하고 또다시 태어나지 않기를 기도했다.

‘어찌하여 그녀는 자그마한 욕심조차 부리지 않는가!’

“그녀로 인하여 또다시 닥쳐올 재앙을, 수많은 죽음을 보았던 게지요.”

“그 재앙이 그녀 때문이라 누가 감히 말하는가.”

“그녀의 연인이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파멸의 꽃을 기꺼이 품어 안았던 호국선이기 때문이다.

연인을 잃고 하늘과 땅을 뒤엎은 야차이기 때문이다.

오늘 태무신은 그녀를 위해 또다시 금역을 넘어섰다.

“그대가 야차이기 전에 천선은 그녀를 만났습니다.”

만신창이가 되어 망각의 강 앞에 선 은령을 천계로 데려오려 하였다.

“이대로 천계에 들면 그이는, 그이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겠죠.”

“한낱 스쳐 가는 인연인 것을, 어찌 그리 집착하십니까.”

“한겨울 담장 아래 사그라질 들풀에게 더없이 따뜻한 볕이었답니다. 어찌 스쳐 가면 그뿐이라 하겠습니까.”

낙원으로 드는 대신 은령은 망각의 강을 건넜다.

“다시 태어나도 그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단 하루일지언정 그의 꽃으로 그 품 안에 피어나고 싶습니다.”

하여 그녀는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은령의 선택은 재앙을 불러들였다. 어머니 은설과 언니인 은후 그리고 천선까지. 모두가 경고하였으나 사랑에 미친 은령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작은 율국의 멸망이었으며, 두 번째가 인요대전이니 마지막은 천계와 마계의 성전이 될 것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 하였습니다.”

“서른세 번째 환생이었다.”

“후로 그대가 봉인되기 전까지 천 년간 예순셋이 죽었습니다.”

하나하나 어떠한 마음으로 베어 냈는지 야차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대가 잠든 천 년간 그녀의 환생 또한 없었습니다.”

“…….”

“천 년 만에 다시 태어난 그녀는 지금, 죽을힘을 다하여 운명에 맞서고 있습니다.”

깨어난 기억들을 홀로 품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백원후를 원망하고 싶지 않았기에 기억을 외면했고, 자신의 사랑을 지워 가는 야차를 서슴없이 끌어안았다. 그 혼란과 숨 막히는 두려움을 홀로 견뎌 내고 있는 것이다.

“그대 또한 기대라는 것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늦. 었. 다. 나는 또다시 명을 죽였다.”

“늦지 않았습니다.”

단호한 천선의 음성에 야차가 숨을 들이켰다.

“천명을 죽인 것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분명 내게 칼을 들 것이다.”

“두고 보아야겠지요. 수많은 고비를 넘어왔던 그대들의 사랑이 분노와 원망을 이겨 낼 수 있을지.”

야차는 여울의 기도문을 손에 쥐고 일어섰다.

“왜, 그녀는 방패연을 찾아오라 하였을까.”

“후후후,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확인을 하고 싶었던 게지요.”

“무엇을?”

“반인반귀의 몸으로 천신인 낭랑을 불러낼 수는 없을 테니, 그대의 힘을 빌려 기도문이 내게 닿았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웃집에 서신이 전달되었는지 확인하러 온 개똥이가 되었구나. 천하의 태무신이 그녀의 장단에 이리 놀아날 줄이야.

“오늘의 만남 또한 그녀의 의도였겠군.”

“아닐 겁니다. 그저 빈손으로 돌아가면 기도가 하늘에 닿았으려니 생각했겠지요. 그대가 상사천까지 넘으리란 것은 예상치 못했을 겁니다.”

“어째서?”

“야차가 아니라면 어느 누가 방패연 하나에 전쟁을 불사하겠습니까. 이리 망설임 없이 천계에 침입하리라곤 저 또한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랬군.”

“그녀는 담대하여 지혜로우며 호기롭고 강인합니다.”

“그러한가.”

“그 어떤 천화도 갖지 못했던 성품과 기량입니다.”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진 야차가 청루의 계단을 내려섰다. 배웅을 하려는 듯 천선이 나란히 계단을 내려섰다.

“천명 선생께서 그녀를 봉인하려던 제게 했던 말들이 떠오르는군요.”

천선의 새까만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맑은 눈과 강인한 심장이 그녀를 꼭 닮았다 하더군요.”

“닮은 구석을 전혀 찾을 수 없거늘, 어찌 그리 말하였을까.”

“번민과 욕망이 들끓는 마계에서 살아온 염라대왕이 태초의 모습 그대로인 천신들 같다 할까요.”

천선의 의중을 깨달은 야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개귀신이 되어 버린 이유를 알겠군.”

곱게 자라난 은령과는 아주 다른 삶이었을 것이다.

‘내가 묶여 있던 것은 대라선의 봉인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이구나.’

그 기억에 묶여 있는 동안, 그녀는 아흔여섯 번의 환생을 통해 수많은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하였다. 그 마지막이 거지 패의 꼬마 두목이니 그전의 생들은 어떠하였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껍데기라 생각하였던 모든 것이 결국 하나가 되었군.”

“돌아가 보세요. 지금도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을 겁니다.”

“그럴 것이다. 꿈속에서조차 현가의 막내를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던 그녀였으니.”

용마에 오른 야차가 천선을 돌아보았다.

“낭랑.”

“예.”

“그녀의 기도를 받아 주시려는가.”

“깊이… 생각하여 보겠습니다.”

“후후후, 너무나도 기나긴 방황이었다.”

***

뜨거운 유황천 아래 잠겨 든 여울의 몸으로 수천 개의 기포들이 포도송이처럼 들러붙어 있다. 얼마나 긴 시간 잠겨 있었는지 확장된 그녀의 동공은 더 이상 수축하지 않았다.

‘처음도, 마지막도 아니야. 망각의 강을 건너지 않은 채 원귀처럼 죽은 태아를 찾아다녔다.’

개천의 개수가 여울을 발견한 것이 무덤이라 하였다.

깊은 어둠 속에서 여울은 보았다.

염마장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채로 어미의 배 속에서 죽어 버린 수많은 아이들, 모두가 계집아이였다.

‘환생이 아니었어! 귀동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귀녀로 만들어진 것이다.’

환생은 서른세 번으로 끝났다. 그녀의 영혼은 망각의 강을 건너는 대신 어미의 배 속에서 죽은 태아의 몸으로 숨어들어 생을 이어 왔다.

때로는 장군의 여식으로, 때로는 어부의 여식으로 태어났다. 어느 생은 무녀의 딸로, 어느 생은 이름 없는 기녀가 되어 떠돌았다. 시간에 묻혀 흐려져 가는 기억을 움켜쥐고 죽은 자의 몸으로 정인을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의 손에 죽어 가면서도 바꿀 수 있으리라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깊은 명상을 현실로 끌어내는 사이 꿈은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은 꿈처럼 몽롱해졌다. 천유화의 향기조차 느낄 수 없을 만큼 온몸의 감각들이 마비되어 버렸다.

‘하아아, 오라버니. 나의 서방님. 야차….’

방울져 떨어져 나간 눈물이 민들레 꽃씨처럼 떠오른다.

점점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후후, 그대는 언제나 나의 부름에 답하는군요.’

여울의 몸이 순식간에 유황천 밖으로 끌어당겨졌다.

“령아! 령아아아아아아!”

야차는 축 늘어진 여울을 끌어안았다. 사방으로 벽을 부숴 버린 탓에 천유화 향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령아아아!”

뜨겁게 쏟아지는 열기에 풀려 버린 동공이 초점을 맞추려 애쓴다.

“령아! 어찌 이리 무모한 짓을 하는 것이냐.”

“난, 령, 이 아니야.”

목이 메어 왔다. 상처 입은 그 눈동자가 그녀를 울린다.

‘왜, 나는, 그를 이리되도록 방치하였을까.’

서른세 번의 은령은 그의 품 안에서 염화의 열기에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나머지 예순셋은 무엇을 하였는가.

‘왜 그의 눈에서 아픈 기억들을 지워 주지 못했을까.’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여울을 품어 안은 야차가 그의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죽으려 하였더냐!”

“아, 니.”

“죽을 요량이 아니었다면 무슨 연유로 독한 천유화를 피워 댔단 말인가.”

“알, 아야, 할 것이 있어.”

“무엇을 알고자 생사의 갈림길까지 갔느냔 말이다.”

여울을 침상 위에 눕힌 야차가 그녀의 옷가지를 벗겨 냈다. 하얗게 드러난 알몸을 이불로 감싸 다시 품에 안았다. 여울의 머리가 그의 가슴에 기대어졌다.

“왜…. 당신은, 아직도, 손에 칼을 쥐고….”

“세상을 뒤엎으려 하였다.”

“누, 굴, 위해.”

여울이 그녀를 감싼 야차의 손등에 입술을 댄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해 줘. 나 때문이 아니라고.’

뜨거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야차가 그녀의 젖은 머리에 입맞춤했다.

‘령아. 너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아.’

독한 천유화의 향기만이 가득하던 여울은 그의 품 안에서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녀는 나흘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밀궁을 비운 것이 닷새, 내가 떠난 뒤 바로 명상에 들어갔다면 오늘이 아흐레.’

수정궁에서 친구들과 잘 놀고 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꼭 움켜쥔 여울의 손에 이마를 댄 야차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내가 모르는 것이 있는 것인가.’

핏기를 잃은 여울은 그 숨결조차 죽은 듯 고요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야차의 가슴이 타들어 간다.

“령아, 울지 마라. 너의 눈물이 내 가슴을 울린다.”

여울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내는 손이 떨려 왔다.

또다시 사흘의 시간이 흘러갔다. 끼니를 거르지 않던 여울의 몸이 말라 가고 있었다.

‘이제 싸울 기력조차 없는 것이냐.’

꿈에서조차 율국 황실 수호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여울이었다. 한 번도 이리 조용한 적이 없었던 그녀의 모습을 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여울아, 눈을 떠. 두 번 다시 령이라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하니 어여쁜 눈을 열어 나를 보아 줘.”

염화를 가진 몸이라 그녀에게 그의 기운조차 나누어 줄 수 없는 현실에 야차는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머리카락 한 올 상하지 않게 하리라 다짐하였거늘…. 어째서 너는 이리 누워 있는 것이냐.’

보름째 되는 날, 야차는 한계에 다다랐다.

죽은 듯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대로 영영 그를 떠나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의 이성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눈을 떠! 눈을 뜨란 말이닷!”

여울의 몸을 흔들며 벼락 치듯 소리를 질렀다. 종잇장처럼 흔들리는 그녀를 품에 안은 야차의 눈동자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수물 수래 가우평야 토우 토래 주이 환이라.”

물은 물로 돌아가고 흙은 흙으로 돌아가니 주인에게로 돌아갈지어다.

스르륵. 사르르르.

천선에게 받아 온 여울의 머리카락이 그의 손에서 그녀의 머리로 물이 흐르듯 흡수되었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야차의 침실로 낯익은 한기가 찾아드는가 싶더니 빙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좀 보아도 되겠습니까.”

“나, 가.”

“이대로 두면 그녀는….”

“빙요, 나는, 너를, 믿지 않는다.”

섬뜩한 야차의 기운에 빙요는 조용히 물러섰다.

‘한검이라 불리었던 명은 내게 검을 겨누었고, 그의 요신은 내가 마음 두었던 모든 것을 죽였다.’

복수를 약조하였던 염라대왕 또한 그에게 복수가 아닌 저주받은 불멸을 선물하였다.

‘제천대성이 태상노군의 단약을 훔쳤듯, 그대는 염라의 염화를 훔쳐 삼킨 것이다.’

두 눈을 감은 야차는 염라와의 거래를 떠올렸다.

‘염라는 대라천의 뜻을 받아 그대를 삼계로 보내었으나 율국의 호국선은 인계로 탈주하였다.’

뜨거운 화기가 혈관을 태우고 심장을 삼켜 버렸다.

‘꺼지지 않는 원망과 분노가 인계를 뒤덮을 때에 율국의 호국선은 태무신 야차로 거듭날 것이며, 천무신 대라선조차 감당치 못할 전쟁의 신이 되리라.’

처음 염화를 삼켰던 그날의 고통이 야차의 전신을 뒤흔들었다.

“나는 그 무엇도 믿지 않는다.”

두, 근. 두, 둑, 둥.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댄 야차가 뜨거운 숨을 내어 쉰다.

‘내게로 돌아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더냐.’

날이 갈수록 생명이 빠져나가는 여울은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야위었다.

손발은 차가워졌으며 숨결은 느낄 수 없을 만큼 미약해졌다. 말라 버린 눈가에 짙은 그림자가 생겨났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

사신들은 태무신의 방진을 넘지 못한 채 밀궁의 하늘 전체를 먹구름처럼 덮고 있었다.

“놓지 않겠다 약조하였으니, 나는, 너를 보낼 수 없다.”

야차는 비단 이불로 감싼 여울을 품에 안아 들었다.

“하라 이라 토진 화사라 수진계.”

원형으로 열린 결계 안으로 시커멓게 어둠이 들어찼다.

화산의 수정궁.

아름다운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들이 빛을 잃어 갈 만큼 무거운 기운이 수정궁 화원으로 퍼져 나갔다.

야차의 등장에 놀라는 것도 잠시, 한걸음에 다가선 백원후의 눈동자가 초조함으로 번득인다.

“보여 줘. 내게 그녀를 보여 다오.”

야차는 품에 안은 여울을 더욱 깊숙이 감싸며 백원후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서로를 죽여야 하는 운명임에도 그들은 서로 같은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죽어 가고 있다.”

“내게 다오. 살릴 수 있어.”

“빙요도 그리 말했다.”

그녀를 선택한 것에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가.

백원후의 가슴으로 원망이 밀려왔다.

“나는, 요신을 믿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거래는 없어. 너는 내 손에 죽는다.”

이상하게도 백원후는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래야지. 하여 나의 낭군은 그대를 단 하나의 벗으로 삼은 것일 테니.’

이미 야차와 염라의 거래를 알고 있었다. 그때는 왜 그리도 화묘가 탐이 났던지. 망나니 조부의 손녀이기에 마계의 경계를 서슴없이 넘었다.

“나의 죽음을 장담할 수 없으나 하나만은 약조하마. 그녀의 생명을 담보한 어떤 대가도 논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손을 내밀었으나 야차는 여울을 건네는 대신 백원후의 곁을 지나 앞서 걸었다.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오행의 기운 중에 모든 것을 어우르는 것은 물뿐이니. 치유력 또한 으뜸이라.”

거대한 수정 욕조에는 용천의 폭포수보다 더 차갑고 투명한 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묵묵히 백원후를 바라보던 야차가 그녀의 손짓에 따라 욕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화라사 마르.”

나지막한 음성에 그들을 감쌌던 젖은 옷가지들이 순식간에 타올라 연기로 사라진다. 야차는 그녀의 몸을 그의 위로 눕혔다.

그녀의 등은 그의 가슴과 맞닿고, 머리는 야차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앙상한 갈비뼈에 닿은 손이 떨려 왔다. 그녀의 두 손을 단전으로 포개어 잡았다.

“무리라 하여 가라 소리아라 다니 마사.”

머리 장식 하나를 빼낸 백원후가 새하얀 손목을 그었다. 짙푸른 요신의 생명이 별처럼 반짝이며 물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요신 명이 가라사니 하리 도리 도라.”

투명한 물속으로 그녀의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푸른색으로 다시 청록색으로, 이내 노란빛이 여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시간이 걸릴 것이야.”

끝도 없이 흐르는 백원후의 생명이 여울의 몸을 감싸며 온기를 불어넣었다. 야차의 손 아래 그녀의 심장이 느껴진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꺼져 가던 불꽃이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파리했던 입술로 붉은 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로구나.’

생보다는 죽음에 가까웠던 전쟁의 신이기에, 강인한 생명력으로 빛나는 요신의 힘은 놀라운 기적이었다.

“다시 만나니 어떠하던가.”

멀리 욕조 끝에 기대어 앉은 백원후가 팔을 욕조에 담그며 덤덤하게 묻는다.

“참으로 좋았겠지. 내 낭군은 그리도 갈가리 찢어 놓고 말이야.”

“그 시작이 누구로 인함인지 잊었는가.”

“하여 삼천 년을 후회로 살아왔다.”

뜻하지 않은 고백에 야차가 고개를 들었다.

“후회라. 요신에게 후회를 담을 가슴이 있었던가.”

“후후후, 그를 만나 없던 것이 생겼지. 눈물도 생기고, 아파할 가슴도 생기고. 새끼도 없이 손녀가 생겼다.”

“깨어난 그녀가 너를 돌아보리라 생각하는 것인가.”

쉴 새 없이 빠져나가는 백원후의 피가 호전되어 가는 여울의 상태에 반응하며 다시 연녹색으로 변했다.

“사내들은 참으로 바보 같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이리 죽어 갈 이유가 무얼까.”

“허튼소리!”

반복되는 그녀의 삶은 복수가 아닌 화해와 평안을 추구하였거늘. 그 누구도 원망하고 싶지 않았기에 스스로를 죽이고 있었던 여울을 그대는 왜 알지 못하는가.

“정말 바보 같다니까. 그 긴 세월을 살고도 몰라. 모른다고. 후후후.”

생명이 빠져나간 자리에 스며드는 이 따뜻함은 무엇일까. 백원후의 눈이 사르륵 감겨 들었다.

‘요신이여, 너의 죽음은 잔혹했던 천명의 것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삼천 년의 원한이 한 번에 눈 녹듯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더없이 소중한 연인에게 생명을 나누어 준 요신을 향한 야차의 시선은 봄날의 햇살을 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든 백원후를 바라보던 야차의 가슴이 흔들렸다. 아니, 그의 가슴에 안겨 있던 여울이 꿈틀거린다.

“내가 함께 있다.”

야차가 선명하게 팔딱이는 그녀의 맥박에 입맞춤했다.

“하아아아.”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서 옅은 숨결이 흩어져 나왔다.

“깨어났느냐.”

“흐으응, 왜 이리 뿌옇지?”

“화독으로 인한 것이니 회복될 거야.”

초점을 찾지 못한 눈동자가 욕조 끝에 기대어 누운 백원후를 향한다. 야차의 손이 그녀의 눈을 덮었다.

“시력이 돌아올 때까지 이대로 있어.”

“으응.”

“말해 보아. 무엇 때문에 그리 위험한 짓을 하였는지.”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른 그녀는 분명 많은 기억을 되찾았을 것이다.

“령아….”

“나는, 은령이 아니야.”

“크크크, 무엇이든 상관없구나.”

“그리 부르지 마. 나약하고 미련했던 그녀가 싫어.”

“만나는 그날부터 숨 쉴 틈도 없이 속을 태우는구나.”

“흐으응, 너무 오래 잠들었어.”

“무엇을 보았느냐.”

“아흔아홉 개의 꿈.”

“나를 보았느냐.”

“흐으응, 보았지.”

모두가 알고 싶어 한다. 그녀의 삶 속에서 그들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오라비의 연인도, 나의 낭군도. 그곳에 있어.”

“요신의 손에 죽은 너를, 내가, 또다시.”

“응.”

죽음을 떠올리는 그녀는 꽃밭을 거닐듯 웃고 있다.

“그런데 당신이 모르는 게 있어.”

“내가 모르는 것이라.”

“나를 송두리째 태워 버린 염화조차도 싫지 않아.”

참을 수 없는 후회가 야차의 눈동자를 적셨다.

“뜨거운 열기가 살을 태우고 뼈를 녹였다.”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어. 하지만.”

그의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나를 태우는 염화보다 당신의 무표정한 얼굴이 더 무섭고 싫어. 정말, 정말 힘겹게 찾아갔는데.”

“미안하다. 미안하다. 너무나 미안하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그리 도살하는 대신에…. 뜨겁게 안아 주었으면 좋았잖아. 어차피 죽을 것이었다면 말이야.”

그의 고통이 여울에게로 전해지자 눈을 가린 야차의 손이 젖어 들었다. 그녀가 울고 있다.

“토로가 찾겠다. 방으로 돌아갈래. 장마철에 떠내려가는 돼지처럼 퉁퉁 불었어.”

‘토로? 밀궁에 있는 식신을 찾는 것인가.’

밀궁에서 잠들어 수정궁에서 깨어났으니 그리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굳이 수정궁이란 사실을 밝힐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다시 눈을 떴을 때에 그녀는 밀궁에 있을 터였다.

“그래. 방으로 가자.”

야차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 눈 감은 그녀를 품에 안고 몸을 일으켰다. 백원후의 원기를 받았다고는 하나 여울의 몸은 여전히 지쳐 있었다.

“이리 안아 주니 정말 좋아.”

“쉬, 그만.”

그녀의 이마에 입맞춤하던 야차의 시선이 욕조로 향했다. 연녹색을 띠던 물이 거짓말처럼 새빨간 핏물로 변해 있었다. 그 끝에 오른팔을 물에 담근 채 욕조에 기대어 잠든 백원후의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 소멸할 그대가 아님을 안다.’

돌아선 야차는 밀궁을 향한 결계를 열었다. 결계의 바람이 얼굴에 닿자 여울이 그의 가슴으로 더욱 파고든다.

순식간에 밀궁에 도착한 야차가 그녀를 침상에 눕혔다. 여울이 이불을 덮는 야차의 손을 붙잡았다.

“가지 마.”

야차는 손을 밀어내는 대신 그 곁에 몸을 눕혔다.

“다시 만나면 그때는 무장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했잖아.”

단단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여울이 중얼거렸다.

“무엇이라도 상관없으니, 칼을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했는데. 어째서 아직도 그대로인 거야.”

“천지를 뒤엎으려 하였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다.”

‘왜…. 누굴 위해서.’

여울은 차마 묻지 못했다. 그녀를 위해 그리하였다면, 그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죽어야 했다면.

여울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 더 이상의 죽음 또한 허락지 않아.’

대천녀 은설과 은후 그리고 천선 낭랑까지.

모두가 재앙을 예고하고 있었으며 삼천 년이 지난 지금도 예언은 여전히 운명을 향해 다가서고 있었다.

그 사실이 여울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같은 시각, 백원후는 애화랑으로 걸음 하고 있다. 그 걸음걸음마다 선명한 핏자국이 똑, 똑, 떨어져 내렸다. 넋이 나간 이처럼 홀로 기나긴 복도를 걸었다.

“열려라.”

거대한 문이 밀려나니 빼곡하게 들어찼던 목간들이 좌우로 길을 열었다. 높은 단상 위로 걸음 한 백원후가 천장까지 닿은 거대한 자수정에 이마를 대었다.

“하아아, 명….”

답이라도 하듯, 커다란 자수정이 더욱 붉은빛을 발한다. 그 빛 속에 천명이 있었다. 죽기 이전보다 더 젊고 아름다운 사내의 모습으로 잠들어 있다.

“오늘, 그 아이가 다녀갔어.”

피곤한 듯 그녀의 음성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 아이는 괜찮을 거야. 당신이 궁금한 것이 그것이라면 말이야.”

백원후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내세에 다시 만난다면 그날의 죽음을 후하게 보상하리라 하였는데. 명…. 나 이제 충분하지 않을까.”

평온하게 잠든 천명의 얼굴을 바라보는 백원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명…. 난 말이오. 그대가 일부러 그 개귀신을 내게 들이민 것을 알고 있단 말이지, 후후후. 당신, 조급해하는 천선에게서 아이를 데려왔지만, 행여나 그녀가 봉인하여 데려갈까 염려하였지. 하니, 대라천의 말도 소똥으로 듣는 내게 그 아이를 부탁한 것이 아닌가, 응?”

자수정에 기대어 앉은 백원후가 마치 술상에 마주 앉은 듯 천명에게 속삭인다.

“하아아, 명. 나는 모르겠어. 당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또다시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까.”

백원후는 차가운 수정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비볐다.

“아니야. 그리하길 바랐다면 그 아이를 내게 남기지 말았어야지. 내게 준 그 이름을 다시 부르지 말았어야지.”

봉인된 기억이 풀려나면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천명은 묵을 거두어 키워 냈다. 또 여울을 데려왔을 때에는 백원후마저 이 생은 다르리라 기대라는 것을 하였다.

“명…. 여울을 보면 왜 이리 마음이 아픈지 모르겠어. 그 아이, 내가 죽였던 당신의 누이와 그리도 닮았던가.”

질기게 얽힌 매듭 풀고 풀어 모두가 함께 웃는 꿈같은 나날들이 오리라 그리 생각하였다.

화초를 키우듯 애틋하게 지켜보던 그들의 사랑이 피어나기도 전에, 전생의 원망과 회한을 녹일 만큼 뜨거워지기 전에 염화가 깨어나 버렸다.

하여 그날이 왔을 때에 지금까지 그래 왔듯 천명은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아무리 죽고 또 죽어 수천수만 번을 죽는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사지가 찢겨진 천명의 시신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녀의 가슴을 참혹하게 난도질했다.

“결국…. 내가 소멸되어야 모든 것이 끝이 나려나.”

천명은 그녀가 오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야차로 깨어난 묵에게 갈가리 찢겨 버린 천명의 시신을 수습하며 백원후는 또다시 오열했다.

그리고 마지막 선물처럼 항아리에 봉인된 여울을 발견했다.

‘백설 이루 수아라 천화 기사화라.’

“백설의 눈물이 하늘 꽃을 깨우리라.”

끝끝내 그녀를 거부했던 천명, 봉인문에는 삼천 년 전 율국의 황자 명이 두 번 다시 부르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던 요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버려야만 가질 수 있는 사랑.’

백원후는 삼천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명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긴긴 세월 거듭 환생을 하여도 명의 곁을 맴도는 죽음의 그림자, 하여 다가설 수 없었던 그 가혹한 운명에 백원후는 울었다.

“요신으로 태어난 내가 아니던가. 암수가 만나면 짝짓기만 하는 줄 알았지. 오라비의 정이 다른 것이라 어찌 알았을까.”

연인의 혈육을 죽인 요신과 그녀를 버릴지언정 잊을 수는 없었던 율국의 마지막 황제 명.

백원후는 부러 여울에게 천명의 시신을 보여 주었다.

“기억하거라. 네게 삶을 열어 준 천명을 이토록 처참하게 도륙한 이를. 반드시. 반드시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하늘이라 하여도! 결단코 용서해서는 아니 되니!”

처참한 시신 앞에 여울은 피를 토하며 오열하다 실신하였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에는 악몽 같았던 모든 것이 사라진 뒤였다.

“사부님은….”

“천도식을 치렀다.”

아니.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백원후는 수정궁 깊은 곳으로 천명의 시신을 가져왔다.

자신의 심장의 일부를 찢겨진 천명의 심장에 이어 생명을 연장하였다. 천신들에게조차 금지된 대라천의 계율을 깨고 부서진 뼈를 복구하고 찢겨진 살을 재생했다. 그렇게 천명은 요신 백원후의 피와 살로 죽음 이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문제는 육신을 떠난 영혼이었다. 늘 죽음을 준비하였던 천명은 꽤나 멀리 떠나 있었다.

그의 영혼을 되찾기 위해 백원후는 남두성군과 북두성군을 대면해야 했다.

“백원후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닌 것을 어찌 이곳까지 찾아오시었소.”

“아니 될 일이오. 돌려줄 수 없소이다.”

천계와 인계 그리고 마계, 서로 다른 세상에 살아가는 이들의 경계를 넘은 사랑 이야기가 만연하던 시대였다.

요신 백원후와 율국 황자의 사랑 또한 천계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기에 두 성군은 영혼의 반환을 거부하였다.

“애초에 염마장에 없던 아이가 아니었소. 죽여 버리면 그만인 것을! 그 재앙덩어리를 천명에게 가져다준 것이 그대들 아닌가!”

서릿발처럼 매서운 호통에 두 성군은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해 댔다. 거듭되는 완강한 거부에도 백원후는 물러서지 않았다.

“창자가 끊어지는 이별을 반복하며 그의 환생만을 기다린 것이 삼천 년. 긴 세월을 그의 죽음을 지키며 피눈물을 쏟았소. 하나 단 한 번도 이곳에 걸음 한 적 없었소이다.”

“한데 지금에 와서 어찌 이리 고집을.”

“내어 주지 않겠다면 난 내 모든 식솔들은 물론, 열두 요선과 천만 요괴들을 이끌고 야차의 편에 설 것이오!”

“이보오! 백원후! 제천대성이 아시면 어찌하시려고 이리 날뛰는 게요.”

북두성군이 그녀의 조부를 들먹이자 백원후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언성을 높였다.

“말 잘하시었소! 유일무이하게 천계를 뒤엎은 조부의 단 하나뿐인 핏줄인데 오죽할까! 할아버지도 날 막지 못할 것이며! 야차의 깃발이 천계를 향할 때에 가장 선두에 서서 하늘 문을 열 것이오!”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그녀의 기세에 두 성군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돌려주겠소. 하나 그대는 우리에게 약조를 하여야 할 거요.”

“무슨 약조를 바라시오.”

“영혼을 돌려주는 것은 우리 또한 천계의 계율을 어기는 것이니.”

계율 따위 개나 줘 버리라지!

독기가 오른 백원후의 눈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그대의 심장 일부를 내주시오. 정녕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길 바라오.”

백원후는 절반의 심장을 주저 없이 두 성군에게 건넸다.

천명의 영혼이 담긴 호리병을 품고 돌아온 백원후는 그의 육체에 영혼을 부어 넣었다.

‘명, 그대가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대가 사랑하였던 요신인가 아니면 피를 나눈 어여쁜 누이인가. 그도 아니라면 형제와도 같았던 야차인가.’

백원후는 망설였다.

“이대로 깨어나면 그대는 또다시 야차의 앞에 서겠지? 베이고 또 베여도 물러서지 않을 거야.”

그를 깨우는 대신 백원후는 그 누구도 천명을 깨울 수 없도록 결계를 폈다.

“나는 두 번 다시 찢겨진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

투명한 수정 안에 잠든 천명은 오랜 벗과 뛰놀던 율국의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그가 깨어나면 맞이하게 될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기다리며 천명은 그렇게 잠이 들었다.

그가 잠든 자수정을 쓰다듬는 백원후의 손길이 더없이 애처롭다.

“나는 믿지 않아. 천화가 깨어난다 하여도, 영산의 개귀신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 그리 믿지 않아.”

백원후는 피곤함을 느꼈다. 요신으로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으나, 반쪽짜리 심장으로 여울과 생명을 나누었다. 또한 되살린 천명의 생을 유지하는 데는 너무나도 많은 기운이 소진되었으니 지금도 이 순간에도 그녀의 생명은 천명을 감싼 결계로 흘러들고 있었다.

소요산에서 야차를 꺾을 수 없었던 이유였다.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이 상태로라면 백원후는 야차의 손에 죽게 된다. 그리되면 힘의 원천을 잃은 결계는 자연스레 깨지고, 천명은 처음으로 그녀 없는 세상에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그 아이가 염화를 품어 안지 못한다면….”

천방지축 여울이 야차의 심장을 어찌 녹일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백원후는 천명을 죽인 이가 누구인지 밝힐 것이다.

아비와도 같은 사부를 죽인 이가 야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여울의 검은 주저 없이 그에게로 향하리라.

“당신의 죽음은 그녀의 사랑을 부수고 날카로운 검이 되어 야차의 심장에 박히게 될 게야.”

그마저도 실패로 돌아간다면 인계라는 경계가 허물어진 천계와 마계는 성전에 돌입할 것이다. 천계와 마계 어느 쪽이 이기든 백원후에게 내일은 없다.

“당신이 홀로 걷던 그 길을 내가 먼저 걷게 될지도 모르겠군.”

천명이 갇혀 있는 자수정 곁으로 나란히 누운 백원후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후회하지 않아, 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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