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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각성 (28/34)

28. 각성

하루하루가 바람처럼 흩어져 갔다. 사막 한가운데 지어진 밀궁에도 겨울이 왔다. 눈이 없는 겨울도, 그와 함께하는 겨울도 여울은 마냥 좋기만 했다. 그렇게 여울은 스물다섯이 되었다.

밀궁이 지어진 후 처음으로 방진을 거둔 하늘이 열렸다. 야차는 한 번도 걸음 않던 화원에 여울과 나란히 섰다. 그에게 선물받은 방패연을 품에 꼭 안고 신나 하던 여울이 야차를 올려다본다.

“뭐야, 꽃도, 나무도, 아무것도 없잖아. 여기가 화원이라고?”

휑하니 너른 공터일 뿐인 화원을 본 여울이 입술을 삐죽이니 야차가 시큰둥하게 답을 한다.

“꽃과 나무가 있다 하진 않았다.”

“그랬지. 그건 그러네.”

“꽃이나 나무에 관심이 있었던가.”

“내 관심사는 여전히 고기지. 풀이 아니고.”

“하면 어찌하여.”

내내 쫑알거리던 여울이 입을 다물고 허공을 응시했다. 멍하니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좇던 그녀의 시선이 야차에게로 돌아왔다.

“그냥. 화원이라니까. 그런 것들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거지.”

‘무언가를 심어야 하는 것인가? 흐음, 전쟁의 신이 지난 자리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법인데, 밀궁에 꽃나무라. 흐으음, 벚나무를 하나 심어 볼까.’

연회장에 불을 피운 것이 처음이었던 것처럼 그녀가 이곳에 온 이후 야차의 행보는 늘 새로웠다.

“바람이 없어서 연이 날까?”

“바람을 일으키는 것쯤은 네게 일도 아닐 텐데.”

“사부님이 말씀하시길. 편리함은 정도를 갖지 않으니, 그 안락함은 오장육부를 녹이는 독이 되리라. 항시 경계하고 또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 그리 말을 잘 들었을까.”

손가락에 침을 묻혀 가며 바람을 기다리는 여울의 얼굴이 실망으로 물들 무렵.

“자하미푼!”

야차의 속삭임에 휘리릭, 바람이 방패연을 업고 하늘을 오른다.

“우아아아아! 바람이닷! 오라버니! 연이 떴어!”

팽팽하게 당겨진 실이 끊어질 듯 방패연은 파란 하늘 위로 거침없이 날아올랐다. 신이 나 어쩔 줄 모르는 그녀를 보며 미소 짓던 것도 잠시.

“이쪽, 이쪼오오옥! 그렇지!”

두 시진이 넘도록 여울은 팔을 저으며 연줄을 당겼다 풀기를 반복했다.

“힘들지 않느냐.”

“그럼! 나 영산의 여울이야.”

그녀에게는 ‘적당히’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가 보다.

해가 저물고서야 끝이 난 연 놀이에도 방패연을 품에 안은 여울은 아쉬움으로 한숨 쉰다.

“생각보다 재미진데? 그지?”

“재밋거리가 생겼다니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인 걸까?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연 날리고, 자고 연 날리고, 또 먹고 연 날리고.

여울의 연날리기 놀이는 쉬지 않고 사흘째 이어졌다.

“이제 되었다 싶은데.”

“더. 어! 내려온다. 오라버니! 바람! 빨리빨리! 오라버니이이이이!”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고 나니 아주 입에 달고 사신다. 정작 자신은 천명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으며 야차에게 바람을 일으키라 독촉한다.

“뭐. 어때? 사부님이 그리 가르친 것도 아닌데 이미 태무신이 돼 버렸잖아. 그냥 바람 좀 불어 봐, 응?”

‘괜히 연 따위를 선물하였군. 차라리 수정궁으로 마실을 보내는 것이 나았으려나.’

그녀의 짧은 나들이로 인해 백원후에게 위치가 노출되었으나 굳이 거론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육신을 온전히 되찾은 지금, 그에게 백원후는 위협이 되지 않았다.

“반야랑 이랑군 데려오면 안 돼?”

“나만 보아야 한다 하였다.”

“보고 있잖아.”

“곁에 머물겠다 한 것은 너의 선택이었다.”

“그렇긴 한데.”

“떠나고자 한다면 잡지 않을 것이다.”

놓아줄 것이었다면 처음부터 데려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어떠한 마음으로 그녀를 데려왔는지 알지 못하는 여울은 실망이 컸던지 저녁을 굶었다.

단 한 끼뿐이었다.

그녀가 적적하지 않도록 소소한 재미를 만들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늘의 새보다 더 자유로이 살던 그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날개라도 부러트리시렵니까.”

“필요하다면.”

빙요의 말이 발에 박힌 가시처럼 그의 신경을 건드린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다짐을 하였건만 야차의 침실에 들었던 그날 이후, 여울은 하루가 멀다 하고 그의 곁으로 숨어들었다.

“네 방으로 돌아가.”

“응.”

대답을 하고 돌아서면 또다시 기어든다.

“헤헤헤, 안 잤어?”

“난 잠들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게. 진짜 그러네.”

“무서운 꿈을 꿔서.”

꿈이란 말에 야차의 신경이 곤두선다.

반야와 이랑군을 들이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던가.

“무슨 꿈?”

“몰라. 눈뜨면 기억이 안 나.”

“무서웠다 하지 않았느냐. 한데 기억이 안 난다?”

“무서우니까 울었겠지.”

“울었더냐.”

“응. 베개가 흠뻑 젖었어. 그러니까 나 여기서 잘게.”

“안 돼. 어서 돌아가.”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나흘이 되어도 실랑이는 이어졌다. 달라진 것이라곤 요즘은 방패연도 함께 들고 온다. 무슨 부적이라도 되는 양 여울은 방패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냥 여기서 자면 안 돼?”

“안 된다 하였다.”

“어차피 잠도 안 잔다며, 무서운 꿈 안 꾸게 지켜보라고. 나 쳐다보는 거 좋아하잖아. 응?”

송아지 같은 눈망울을 굴리는 애처로운 모습에 삼천 년을 이어 온 강인한 정신과 불패의 의지가 뿌리째 흔들렸다.

“너무 무서워서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얼마나 소리를 지르는지 목이 너무 아프다고. 아흑. 잠드는 게 무서워.”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 않았더냐.”

“그렇지. 그래도 일어나면 코가 먹먹한 게 여기저기 막 아파. 가슴도 아프고 기운도 하나도 없어, 흐응.”

고기를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울을 알고 있었다. 안 본 사이 더욱 영악하고 교묘해졌다.

그녀는 가장 짧은 시간에, 정확하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삼천 년의 시간을 되돌리고 있었다.

행여 방심이라는 것을 하였던가. 야차는 그녀의 표정 하나 움직임 하나에 속절없이 무너져 갔다.

“너를. 어찌하여야 할까.”

가슴뼈를 부순 대라선이 심장을 도려낼 때조차 웃음을 멈추지 않았던 그가 생애 처음, 낯선 감정을 마주했다.

‘또다시 너를 잃을까 두렵다.’

그녀에게로 흐르는 마음을 다잡을 수가 없으니 두려움은 더욱 짙어져만 갔다.

‘너를 잃고도 이생이 끝나지 않을 것이 두려워 숨을 쉴 수가 없어.’

야차의 두려움을 밀어내듯 여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깔깔깔깔! 반야보다 더 높이 나네!”

야차의 시선이 하늘 높이 떠 있는 방패연으로 향했다. 틈만 나면 엉겨 붙는 여울을 떼어 내려 준비한 것인데, 정작 방패연만 쳐다보는 그녀 때문에 심기가 불편하다.

“타이푼.”

야차의 낮은 음성에 강한 바람이 일었다. 줄이 끊어진 방패연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으아앗! 안 돼!”

방패연이 사라진 하늘을 향해 발을 구르는 여울의 모습에 야차는 웃음이 나왔다.

‘여울아, 무얼 그리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냐. 후후후.’

어쩐 일인지 여울은 작별 인사라도 하듯 두 손을 모아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도 잠시, 휙 돌아선 여울이 사납게 노려보자 야차는 연회장을 향해 느긋하게 걸음을 뗐다.

“뭐 하자는 거야?”

“무엇이 말이냐.”

어느새 옆에 붙어 팔을 잡아당기는 여울의 볼이 심통으로 부풀어 있었다.

“내 연! 줬다가 뺏는 게 어딨어! 내놔!”

“허허, 바람이 실어 간 연을 어이 내게서 찾는가.”

“오라버니가 날려 버렸잖아. 훅! 하고!”

“나는 모르는 일이다.”

“전쟁의 신이 어쩜 그렇게 치사한 짓을!”

“놓아라.”

“내 연 내놔!”

밀어내면 다칠까 싶어 소매가 잡힌 채로 걷다 보니 여울이 용을 쓰고 야차를 잡아당겼다.

“내놓으라고!”

“사나흘 뒤에 또 하나 만들어 주마.”

“누가 새것 만들어 달래! 날아가 버린 그 연 찾아오라고!”

“한낱 종잇조각에 어찌 그리 연연하느냐!”

“종잇조각?”

성이 났는지 야차의 소매에 매달려 질질 끌려오던 여울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라버니가 처음으로 준 선물이란 말이야.”

“그 오라비가 다른 것을 준다 하지 않더냐.”

“싫다 하지 않더냐!”

병아리처럼 입술을 내밀고 그를 흉내 내는 여울이 귀여워 야차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성정 또한 은령과는 지극히도 다르니 한없이 받아만 주어서는 안 되겠구나.’

애써 웃음을 지우며 야차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처음이라니, 첫 선물은 가락지가 아니던가.”

뼈를 도려내어 준 귀한 것은 고맙단 소리도 않더니, 고작 방패연 하나에 이리도 성을 낸다.

“흥! 그거는 오라버니가 할머니 가락지를 버리고 대신 준 거니까 선물이라 할 수 없지!”

“하면 백원후의 가락지를 찾았으니 내 건 돌려주려무나.”

야차의 말에 여울이 냉큼 오른손을 뒤로 감춘다.

“무슨 소리! 한번 줬으면 끝난 거지.”

“한번 떠나간 연도 그것으로 끝이다. 그만하여라.”

“뭘 그만해.”

“새로 만들어 준다 하지 않더냐.”

“새것 싫다니까! 다른 문조 말고 반야가 좋고! 다른 늑대 말고 이랑군이 좋고! 다른 사내 말고 내 오라비가 좋다고! 그니까. 다른 연 말고 내 구름이 내놓으라고!”

“구름이?”

한낱 종이 쪼가리에 이름까지 붙였던가.

“그래! 구름이! 구름이 찾아와.”

“연에 이름을 주었더냐.”

“췟, 줬으면 그만이지. 부적을 붙이든 이름을 붙이든 무슨 상관이람!”

“정말 당해 낼 수가 없구나.”

잊고 있었다. 스쳐 간 인연 하나에도 잊지 않고 훗날을 기약하던 그녀를.

이름까지 지어 붙였다 하니 정말 찾아 주어야 할 듯싶다.

“내 오늘 출타할 예정이니 돌아오는 길에 찾아다 주마.”

“꼭 구름이어야 해. 내가 딱 보면 알 수 있어.”

“연에 이름이라도 써 놓은 것이더냐.”

“그런 게 있어.”

“알았다. 돌아오는 길에 꼭 찾아오마.”

약조를 하고서야 그는 여울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어디 가는데?”

“다문국에.”

“왜에?”

“둘러볼 곳이 있어. 함께 가고 싶으냐?”

생각이란 것을 하는지 여울은 대꾸가 없다.

‘후후후, 고민이 되겠지. 나를 따라 다문국에 갈 건지, 몰래 수정궁으로 친구들을 보러 갈지.’

하지만 야차는 답을 알고 있다.

“흐음, 아니 나는 그냥 여기 있을래.”

“답답할 터인데 같이 가지?”

“으으응, 아니야.”

반야와 이랑군을 보러 갈 테지. 가지 말라 하여도 기어이 갈 것이다.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태무신이었으나 그녀는 개귀신. 기어이 그의 말을 어길 것이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얌전히 있도록 해.”

“으으음.”

이도 저도 아닌 옹알이에 야차는 웃음이 나왔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딴전을 피우는 모습이 환장하게 귀엽다.

“언제 오는데.”

“내일 오후에나 환궁할 듯하구나.”

마음 편히 놀다 오거라.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야차는 걸음을 옮겼다.

‘그럼 나는 구름이나 찾으러 가 볼까….’

“하여 방패연을 찾으러 갔다는 말이더냐.”

백원후의 물음에 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차가 출타하기가 무섭게 결계를 열어 수정궁에 들었다. 반야와 이랑군과 실컷 뒹굴며 뛰논 여울은 술상을 사이에 두고 백원후와 마주 앉았다.

“천하에 대적할 이가 없는 야차가 날아가 버린 연을 주우러 갔다니. 하하하하.”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백원후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후후후, 천하의 태무신이 그깟 연 하나 못 찾을까.”

‘그는 연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방패연은 은령으로 깨어난 여울이 율국 마지막 대천화로서 하늘을 향해 올린 첫 번째 기도였다.

삼천 년 전, 율국의 대천화가 기도문과 신체의 일부를 제단에 태웠던 것처럼 여울은 머리카락의 일부를 잘라 내어 함께 올려 보냈다.

‘만약, 그가 연을 되찾아 온다면 모든 것을 알게 되리라. 나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왔다는 사실도….’

칠흑 같은 어둠이었으며 형용할 수 없는 통한의 슬픔이었다. 돌아설 곳도 빠져나올 구멍조차 없는 그런 덫과 같은 꿈이었다.

“무슨 꿈?”

“몰라. 눈뜨면 기억이 안 나.”

“무서웠다 하지 않았느냐. 한데 기억이 안 난다?”

“무서우니까 울었겠지.”

때를 보아 줄을 끊어 내려 하였는데, 망설이는 사이 야차가 먼저 끊어 버렸다.

“할머니, 전에 말했던 그 꿈이요.”

“꿈? 환영을 보았더냐.”

“환영이었을까요?”

백원후의 제비꽃색 홍채가 섬뜩하게 붉어졌다.

“무, 엇을, 보았느냐.”

‘내가, 너를. 그의 아이를 품은 네게, 살을 날리는 나를 보았더냐.’

바싹 말라붙은 입술을 핥으며 백원후가 술잔을 들었다.

‘아니야. 모든 것을 보았다면, 천화로 깨어났다면 이리 태평스레 마주하여 있을 리가 없다.’

그녀라면, 정인의 아이를 가진 채 그리 죽어 갔다면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도 원수를 찾아 살을 가르고 뼈를 끊어 냈을 터였다.

“이제는 눈을 떠도 보여요. 하얗게 내린 눈에 혈류화가 피어 있어요.”

‘천화란다. 핏빛으로 피어나야 했던 파멸의 꽃.’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뒤엉켜 혼란스럽습니다.”

“누가 보이더냐. 그 안에 누가 있어.”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녀가 야차의 곁으로 돌아간 순간, 멈춰 있던 파멸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멈추지 않은 채 흐르고 있었을지도.

“피투성이가 된 내가 보이고, 나를 위해 죽어 가는 이들을 보았어요. 그는. 오라버니는 온통 피를 뒤집어쓴 채로 죽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는 보이지 않더냐.”

여울의 눈동자가 백원후의 눈동자를 마주한다.

“없었어요. 할머니는 없어요.”

“하면.”

“나는 죽고, 또 죽어요. 끝도 없이 그의 손에 죽어요.”

그렇게 은령은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 사랑했던 연인의 손에 의해 아흔여섯 번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것이 너의 운명이라면. 또다시 반복된다 하여도 그의 곁에 머물려 하느냐.”

“할머, 니.”

“두렵지 않으냐.”

“두려워해야 할까요?”

요신의 연인은 무인의 나라 율국의 황자였다. 탐욕과 배반으로 얼룩진 인계의 황실에서 그는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가슴을 열어 뜨겁게 그녀를 품었지만, 그 뜨거운 사랑은 용암 같은 분노가 되어 요신의 가슴을 태우고 말았다.

‘버릴 것이다. 대륙을 잃을지언정 두 번 다시 요괴 따위에게 마음 주지 않을 것이다.’

“죽고 또다시 죽어도 두렵지 않을 것이야.”

“하면…. 무엇이 두렵습니까.”

상실이다. 공허한 마음은 무엇으로도 채울 길이 없다.

“나는, 버림받는 것이 두렵다.”

홀로 남아 끝나지 않을 영원을 살아가는 것이 두렵다.

“결국, 또다시 홀로 남게 되겠군요. 쓸쓸하게….”

여울의 눈동자가 새까만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즐거워하는 것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너무나 쉬이 감정을 드러내었던 여울이었기에 백원후는 혼란스러웠다.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이는 정녕 누구인가.’

자수정같이 반짝이던 백원후의 홍채가 확장됐다.

‘네게 품었던 오라비의 마음도. 너의 잔혹함에 등을 돌릴 것이며.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삼천 년 전 그녀의 손에 죽어 가던 율국 마지막 대천화의 예언은 이미 이루어졌다.

밀궁의 유황천.

유황천이 자욱한 연기로 휩싸여 있다. 사방으로 피어오른 천유초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쾨쾨하게 들어찼다.

미약의 일종으로 집중력 약했던 여울이 명상을 배우던 초창기에 사용하던 천유초 연기가 치사량을 넘어섰다.

찰랑, 찰랑. 차르르르.

뜨거운 물속으로 잠겨 든 여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이어지지 않는 기억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손에 얼마나 처절하게 죽어 가야 했는지를.’

밀궁을 향해 열린 결계 앞에서 백원후는 품에 안은 여울을 한참 동안이나 놓지 못했다.

‘다시 만난 당신이 내게 얼마나 따뜻한 것들을 베풀어 주었는지 또한 기억합니다.’

하여 시리도록 아픈 그녀의 기억 속에 할머니는 없었노라 답하였다.

‘할머니…. 후회란 것을 하고 계신 겁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반복되고 있다면 이 생 또한 이미 정해진 답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천명은 인간이 생을 거듭하며 전생의 업보를 갚아 나아간다 하였다. 그 업보가 끝을 다할 때에 비로소 인간은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 선계에 이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망각의 강을 건너며 업보마저 잊어버렸고, 죗값을 치르는 대신에 전생과 같은 삶을 반복하여 끝끝내 업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처음 그를 따라나설 때에 천명이 했던 말을 여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운명은 네가 스스로 풀어 나가야 할 숙제, 그 숙제를 풀어 갈 기술을 내가 가르쳐 주마.”

“사부님…. 윤회 또한 운명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면 이 또한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 소녀는 생각합니다.”

답을 얻은 여울은 정면 돌파를 감행하기로 했다.

“다람쥐 쳇바퀴는 충분히 돌았으니 말입니다.”

어차피 물러서거나 돌아가는 법을 모르는 그녀였다. 부드러이 휘어지는 법을 배우기 전에 천명은 여울의 곁을 떠나 버렸다.

결심을 하였으나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이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울은 뜬구름처럼 그녀를 맴도는 기억들을 하나씩 분류하기 시작했다.

“천륜조차 넘어서는 인연이 있다. 하늘도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억겁을 다시 태어나서라도 끌어안아야 하는 그런 인연 말이다.”

“내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좋아. 내게서 떨어져. 멀리 도망가라고.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후후후, 그럼, 나와 이곳에서 살까? 모든 걸 다 잊고 그리 살자꾸나. 매일 좋은 옷 입고, 맛난 고기 먹으면서.”

천명도, 야차 이전의 묵도 그리고 백원후도 모두가 그녀가 아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울의 망각 속에 잠들어 있는 그 누구를.

“꿈은 초경을 시작한 열한 살 겨울에 시작되었다.”

유황천 위로 머리를 들어 올린 여울의 눈이 열렸다. 폐부로 스며드는 천유초가 그녀의 전신으로 퍼져 나가니 온몸이 붕 떠오르는 듯 착각이 일었다.

두근, 두근, 두근.

“나는 무인의 나라 율국에서 태어났다.”

천유초를 한껏 품고 다시 물속으로 잠겨 든 여울은 몸 안의 기운을 최대한 잠재우며 숨을 멈추었다.

전장의 북소리처럼 귓가를 울리던 심장이 잦아든다. 맥박이 느려질수록 정신은 몽롱하게 흐려졌다.

‘아버지는 황제이며 어머니는 천화라 불리는 신녀.’

오른손을 왼쪽으로 밀어내니 유황천 위로 물결이 인다.

차르르. 차르르륵.

‘황가의 씨로 천화가 피어났으니, 파멸의 꽃이라.’

아비도 어미도 외면하였던 그 꽃을 더없이 귀애하여 품어 주었던 사내가 있다.

“다시는. 다시는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합시다. 우리 모든 걸 내려놓고 깊은 산속에 초가집 하나 지어 둘이서. 그리 삽시다.”

그리 나쁜 기억만은 아니었다.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여인이 보였고 더없이 애틋하게 바라보는 사내가 있었다.

“우리는, 저리도 어여쁘게 사랑을 하였구나.”

여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들었다.

그녀의 손이 다시 머리 위로 물결을 만들며 또 다른 환영을 잡아당긴다.

“우리 누이. 잘 지내었느냐. 회임 소식은 들었다만 이제야 찾아보게 되는구나.”

“오 황자님께 은령 인사 올립니다. 후후후, 선물은 잘 받아 보았습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조랑말을 보내시다니 정말 성정도 급하십니다.”

“오라비라 부르라 하였거늘.”

오라비가 있었구나.

순간 깊숙이 잠재웠던 기운이 요동을 치며 여울이 몸을 일으켰다. 숨을 너무 오랫동안 멈춘 탓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아. 요신의 연인!”

천유화의 향기가 또다시 폐부로 들어찼으나 여울은 멈출 수가 없었다.

“사부님은 야차의 벗이었다.”

역류하는 혈관을 다스리며 숨을 들이켠 여울은 유황천 아래, 역모의 그날로 잠겨 들었다.

동풍을 따라 동남쪽으로 이동한 야차는 어느새 인계의 경계에 이르렀다. 야차 몰래 수정궁으로 친구들을 보러 갈 여울에게 시간을 벌어 주고자 늑장을 부린 것이 생각보다 꽤나 지체되었다.

‘알 수가 없구나.’

금세 찾으리라 생각하였던 방패연이 보이지 않자 야차는 결국 동풍을 소환했다.

“오신산?”

동풍은 오신산 방향으로 날아갔다 했지만, 산을 넘어 선계의 경계에 다다를 때까지 방패연은 보이지 않았다.

‘꽤나 멀리 갔군.’

갑작스러운 태무신의 등장에 놀라 자빠진 도선들과 엎드려 예를 갖추는 신선들의 움직임이 부산하다. 인요대전을 직접 겪었던 그들에게 야차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이미 많은 시간을 지체한 야차는 쏜살같이 그들을 지나쳐 동쪽으로 향했다.

“삼계에 다다른 것인가.”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다.

“희고 넓적한 것이 욕계를 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새는 아닌 듯한데 색계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지요.”

“무색계를 넘어가더이다.”

천계 최하층에 속하는 삼계를 넘어 버린 방패연.

‘이해할 수 없구나. 고작 방패연 따위가 삼계를 넘다니.’

오묘한 빛으로 고고하게 흐르는 상사천 앞에 선 야차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이제부터는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신의 영역, 천무신 대라선과 대적하였던 태무신 야차가 상사천을 넘는 순간 성전의 포고가 울릴 것이다.

“약조를 하였으니 어쩔 수 없지.”

손 아래 뻗어 나온 섬광이 이내 설창의 모습으로 변했다.

“구름아, 널 데려가는 값은 꽤나 비싸게 치르겠구나.”

용마의 발굽이 상사천에 닿는 찰나 짙은 연무가 몰려와 삽시간에 그를 에워쌌다.

‘방진인가.’

설창이 주저 없이 허공을 가르자 연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낯익은 향기가 코끝으로 감겨든다.

딸랑, 딸랑. 또르르르.

청아한 방울 소리와 함께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입니다, 태무신.”

따르는 신동도 없이 홀로 서 있는 천선의 모습에 야차의 오른쪽 눈썹이 휘어 올라간다.

“내가 올 것을 알았던 모양이군.”

“상사천을 건너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지요. 서두르느라 신동까지 내팽개치고 왔답니다.”

천선의 시선이 그의 손에 쥐어진 설창으로 향했다.

“하면 내가 온 이유 또한 알고 계신가.”

“이곳은 대화를 나누기에 적합하지 않으니 오신산으로 걸음 하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초조함이 묻어나는 천선의 음성을 들으니 아직 그의 방문이 천계에 알려지지 않은 듯했다.

“나는 대화를 나누고자 온 것이 아니다.”

“원하시는 것,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내놓아라.”

“제게로 보내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여울이 아닌 그의 손으로 끊어 버린 연이 어찌하여 천선에게 보내졌단 말인가.

‘연이 낭랑이 거주하는 옥청까지 날아갔단 말인가.’

천선을 바라보는 야차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일렁였다.

“대화를 않으시겠다면 빈손으로 돌아가셔야 할 겁니다.”

단순히 방패연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야차는 알 수 있었다. 설창을 거둔 야차가 그녀를 따라 오신산으로 열린 결계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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