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 개귀신 (27/34)

27. 개귀신

수계 앞에 들러붙어 대륙의 곳곳을 살피는 백원후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다. 대륙을 이 잡듯 뒤져도 그 어디에서도 여울의 기운이 읽혀지지 않았다.

야차가 데려간 것은 분명한데.

‘도대체 어디로 데려간 것이냐.’

전전긍긍하고 있던 터에 수정궁에 침범한 낯익은 기운은 날이 설 대로 서 버린 백원후의 신경을 폭발시켰다.

“미친 게야. 미치지 않고서는 어딜 감히!”

이 망할 것의 뿔을 모조리 잘라 버릴 테다!

찰나의 시간도 참지 못하여 마당으로 결계를 연 백원후가 바람을 일으키며 멈춰 섰다.

“여울아!”

오매불망 찾아 헤매던 여울이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환하게 웃으며 두 팔 벌려 달려온 여울이 백원후의 품에 안겼다.

“우라질, 여울아! 어딜 갔던 게야. 가락지를 잃어버렸느냐. 아무리 둘러보아도 널 찾을 수가 없더구나. 너의 기운을 읽을 수가 없었어! 반야도 홀로 돌아오고. 어찌 이리 속을 썩이누.”

“으으으, 하, 할머니.”

“어디가 아픈 게야, 으응?”

신음 소리에도 백원후는 파랗게 질려 가는 그녀를 안고 놓을 줄을 모른다.

“숨 막혀요. 여울이 죽겠, 어.”

“으응?”

화들짝 여울을 놓아 버린 백원후가 그녀를 살핀다.

“내 새끼가 왜 이리 말랐누. 야차가 밥도 주지 않더냐.”

“어? 야차랑 있는 건 어찌 알았대?”

“그 재앙덩어리가 아니라면 내가 어찌 널 못 찾아!”

인계와 선계를 이 잡듯 뒤졌으나 그 어디에서도 야차의 본거지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염라국을 뒤지려 했지. 그간 어디에 있었누? 응? 어찌 그리 꽁꽁 숨었어!”

대라천에게 찢겨 대륙 끝으로 봉인된 육신을 되찾는 동안,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꽁꽁 숨을 것이라 예상은 했다. 하나 온전해진 지금도 야차가 머무는 곳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한데, 어째서 빙요의 문을 열고 나와?”

“얘기가 길어요. 반야랑 이랑군 여기 있죠?”

여울은 백원후의 손을 잡아끌며 수정궁으로 들어섰다.

“반야! 반야아아아! 이랑구우우우운!”

“여울아!”

눈물을 가득 머금은 반야, 여전히 묵직하게 다가서는 이랑군을 품에 안은 여울은 눈물이 맺혔다.

“왜 이렇게 말랐어! 할머니가 밥도 안 줬어?”

헤어졌던 친구들과 요란한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백원후는 반야와 이랑군을 밀어내고 여울과 마주 앉았다.

“시간이 별로 없어요. 야차가 다문국에 출타한 사이 잠시 다니러 왔어요.”

수정궁을 감싸고 있는 천계의 시간을 거두어 낸 백원후가 인계의 시간을 펼친다.

“시집간 것도 아닌데, 그리 눈치가 보이나? 개여울이 다 죽었군!”

샘을 부리듯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에 여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그렇게 됐어요. 야차만 쳐다본다고 약조하였거든요.”

“차라리 눈알을 뽑아 준다 하지 그랬냐! 어째 그런 약조를 해. 어찌 될 줄 알고!”

“입이 방정이지요. 그쵸?”

능글맞은 대꾸에 백원후는 화도 내지 못하겠다.

“말해 보거라.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야.”

“타라 사막이요.”

“타라…. 서쪽 끝에 있는 사막 말이더냐.”

부산스레 소매를 펄럭이며 술상을 들이라 외치던 백원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리가. 내 그곳은 이미 여러 차례 둘러보았어.”

“결계를 어마어마하게 쳐 놨대요. 천군도 뚫지 못할 방진이라던데요?”

“그렇지. 전쟁의 신이 병법의 주인인데, 그의 방진을 누가 파하겠어. 한데 어떻게 그런 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 너의 도력으로는 계를 파할 수 없을 터인데.”

“빙요가 도와줬어요. 그녀의 방은 밀궁에서 유일하게 야차의 기운이 닿지 않는 곳이래요.”

“빙요?”

아하! 타라 사막을 살피던 중 뜨거운 사막 한가운데에 한기가 모인 곳이 있어 이상타 하였는데.

“아차차!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여울을 찾기 위해 야차의 기운을 읽으려 했으나 그마저도 묘연하여 난감하였다. 차라리 야차의 곁에 붙어 있을 빙요를 찾았으면 이리 고심하지 않았을 것을!

“빙요는 누군가를 돕는 종자가 아닌데.”

“그간 결계가 엉뚱한 곳으로 열렸던 것도 빙요 짓이었더라고요.”

“그랬구나. 한데, 널 위해 길을 열었다고?”

“무슨 꿍꿍인지는 두고 봐야겠죠.”

“그래. 어찌 지냈느냐. 야차가 잘 대하여 주더냐.”

“네! 엄청이나요. 첫날에는 입을 붙여 버렸고요. 또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거지 같은 궁전에서 얼마나 뺑뺑이를 돌리는지.”

그간 있었던 일들이 옆구리 터진 쌀부대처럼 와르르 쏟아졌다.

“나쁜 놈이네.”

“안 본 사이 엄청 예민하고 고약해졌어요. 자기가 무섭지 않냐고 겁박하고, 췟!”

“내가 가서 혼내 주랴?”

백원후와 태무신의 격돌을 생각하니 여울은 소름이 돋아 올랐다.

둘이 싸우면 세상이 망하지 않을까.

“흐응, 아녜요. 저는 그냥 조금 답답했을 뿐인걸요.”

“이런! 이런. 호랑이 수염 뽑던 개여울을 그리 잡아 두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꼬.”

“아주 재수 없어 죽겠어요.”

“쯔즈쯔, 내 뭐라더냐. 재앙덩어리가 그렇다니까.”

주거니 받거니 장단을 맞추는 사이 화주가 열 동이나 비워졌다. 벌컥벌컥 끝도 없이 들이켰던 술기운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뭐 특별히 떠오르는 생각 같은 것은 없고?”

“무슨 생각이요?”

“내가 아닌데 나 같은. 겪지 않은 일이 겪은 것처럼, 꿈처럼….”

“에에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딸꾹, 내가 아닌데 뭐가 어떻다구요?”

백원후가 물끄러미 여울을 쳐다봤다.

‘이상하네. 이상해. 분명 기억들이 돌아올 텐데.’

“왜 그렇게 쳐다보셔요, 딸꾹!”

“예뻐서 그런다.”

“하아, 그러니까요. 이렇게 예쁜데, 왜 야차는 소 닭 보듯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가 널 닭 보듯 하더냐?”

“닭은 알이라도 낳죠. 전 정말 그냥 뭐랄까. 맞다! 병풍에 그려진 그림 보듯이 그냥 빤히 쳐다봐요.”

“쳐다만 본다?”

“눈으로 내 얼굴을 뚫어 버리려나 봐요. 그냥. 쳐다봐요. 딸꾹, 헤헤헤. 재수는 없는데 참 잘생겼어요. 웃으면요.”

“하여 아직 손도 못 잡은 게야?”

“손이야 잡았죠. 궁으로 갈 때 한 번 잡고, 그 뒤로는. 흐흐흐흐, 영산에서는 입맞춤도 해 줬는데.”

“입맞춤?”

“흐흐흐, 네. 사실 처음도 아니었어요.”

입 안을 가득 채우던 그의 숨결을 떠올리니 여울은 얼굴이 달아오른다.

“태안에서 딸꾹, 뱀 요괴 잡다가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딸꾹, 그때도 나타나서 입을 맞췄다지요, 홍홍홍.”

“그리 좋더냐?”

“흐응, 좋았죠. 영산에선 더 좋았어요. 딸꾹, 혀가 막 들어왔다 나갔다. 큭큭, 딸꾹. 그 뒤로 입술만 봐도 가슴이 콩닥콩닥, 딸꾹, 딸꾹.”

‘일부러 멀리하고 있는 것이로군. 기억이 돌아오는 것이 두려운 게야. 기억과 함께 천화가 깨어날 테니.’

야차의 의중을 파악한 백원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그냥 덮쳐 버리지 그러냐!”

“어후! 할머니이이! 취하셨어요? 딸꾹.”

“무에야?”

“야차가 가만있겠어요. 인호 덮쳤다가도 죽을 뻔했는데, 딸꾹. 명색이 전쟁의 신인데, 뼈도 못 추린다고요.”

“전쟁의 신은 사내가 아니라더냐. 계집이 덮치는데 어느 사내가 마다할까.”

“췟!”

거나한 콧방귀에 백원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이 할미 말이 못 미더우냐?”

“딸꾹, 네.”

“어째서?”

“제가요. 딸꾹, 이런 말은요. 정말 안 하고 싶었는데요.”

늘어져라 한숨을 쉬는 여울을 바라보던 백원후가 술상을 두드리며 독촉한다.

“말해, 말.”

“그러는 할머니는 매번 꽃단장하고 왜 쳐다만 보셨어요. 확! 덮쳐 버리지. 사부님은 전쟁의 신도 아닌데.”

순간 백원후는 벼락을 맞은 듯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삼천 년이란 긴 시간, 꽃단장하고 술주정만 해 댔지 정작 천명을 덮칠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짧은 탄성을 끝으로 연회장에는 여울의 딸꾹질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타닥, 타닥, 타닥.

황량한 사막에 검은 용마를 탄 태무신이 홀로 걷고 있다. 바람이 모래 산의 형태를 바꾸고, 모래 바다의 물길이 흩어졌다.

‘삼천 년이 지나도 인간들은 변하지 않아.’

전쟁 준비로 한창인 다문국의 제례를 받고 돌아오는 길, 야차는 그의 백성이라 일컫는 이들을 보았다. 야차의 석상을 향해 절하지만 그에게 속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피의 제물을 원치 않았으며, 탐욕을 명분으로 한 전쟁 또한 내 뜻이 아니었다.’

천추가 말했던 다문국 천황이 처녀들을 산 제물로 바친다는 소식에 친히 걸음 하였다. 사실 누가 죽든지 상관할 야차가 아니었으나 하루 종일 여울만 쳐다보고 있는 자신의 꼴이 우스워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크크크, 형제의 피로 물든 비사문천이여. 나를 위한 제를 지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야차는 용마의 발굽으로 새로 지어진 신전을 허물고, 설창으로 제상을 두 동강 냈다.

“내가 다시 걸음 하는 날이 곧 다문국의 마지막 날이 될지니. 내 나라 율국의 마지막이 그러하였다.”

태무신의 뇌성에 다문국의 왕과 신하들은 고래를 만난 치어 떼처럼 바짝 엎드려 몸을 떨었다. 그림과 석상으로만 보던 태무신의 현신이 나타나 신전을 부숴 버렸으니 왕권은 흔들리고 대국은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으니 당분간은 조용하겠군.”

자신을 섬기는 다문국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정작 야차의 마음은 밀궁에 가 있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용마건만 집으로 가는 길이 왜 이리 멀기만 한지.

‘잘 있으려나.’

포기를 모르고 줄기차게 복도를 내달리는 여울의 모습에 웃음 짓던 것이 겨우 이틀 전이다.

한데, 어찌 이토록 애가 닳는가 말이다.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인가.’

아주 조금, 놓아 버린 틈으로 파고든 여울의 존재는 커다란 나무가 되어 그의 가슴에 뿌리를 내려 버렸다.

타라의 모래처럼 야차는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분노도 원망도 삼천 년의 기억조차도 흩어진다.’

그저 곁에 두고 지켜보려 한 것이 어느새 야차의 심장에 파고들어 염화를 잠재운다. 때때로 찾아드는 염화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조차 알 수가 없다.

“용마야, 산책은 다음에 마저 하자꾸나.”

야차가 용마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결계를 열었다.

텅 빈 침상 앞에 선 야차의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수계를 폈지만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울에게 허용한 공간이라곤 그녀의 방과 연회실과 유황천뿐이다. 세 곳을 모두 돌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자 야차는 시종으로 붙여 두었던 토로를 불러들였다.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송구합니다. 잠드신 것을 분명 확인하였사온데.”

“물러가라.”

공기를 움켜쥔 손등으로 허공을 가로지른 야차가 손가락을 펴며 바람을 일으켰다.

“찾아라. 나와 같은 기운을 가진 이를 찾아.”

웅, 우우우웅. 웅, 웅.

공기 중으로 진동이 일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여울의 방을 빠져나갔다.

‘나의 일부를 지니고 있으니 어디든 찾을 수 있다.’

바람의 영이 천오백 개의 방을 뒤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침실?”

귓가로 들려오는 풍령의 속삭임에 야차는 자신의 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침실에는 어찌 들어갔는가!’

그녀의 출입을 막기 위해 수계까지 둘러놓았거늘.

“가락지 때문이로군.”

가슴뼈를 도려내어 만든 가락지는 결국 야차와 같은 성질을 지닌다.

“자물쇠 채우며 열쇠를 쥐여 주었구나.”

아무리 많은 방어막을 쳐도 그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결국 뚫릴 수밖에 없다.

“멍청한 선물을 해 버렸군.”

침실로 들어선 야차는 발에 걸리는 비단 조각을 집었다. 코끝에 가져다 대니 달달하면서도 시원한 향기가 배어 나왔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이곳에 든 것이냐.’

침상의 휘장을 걷어 내니 아이처럼 웅크려 있는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머리 장식도 떼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어여쁜 얼굴 위로 짙은 속눈썹이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발그레한 볼은 손대면 녹을 듯 매끄럽고, 살며시 열린 입술은 고혹적으로 반짝였다.

“려, 령아.”

“우으으응.”

그의 음성에 반응하듯 여울이 몸을 편다. 벌어진 비단 옷깃 사이로 한껏 밀려 올라간 젖가슴에 시선이 이르자 야차의 목덜미로 핏줄이 섰다.

무엇을 하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야차의 입술이 여울의 것에 닿았다. 달달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화주?’

향기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 여울의 눈꺼풀이 열렸다.

“서방… 님.”

잠투정하듯 야차의 목에 팔을 둘러 얼굴을 묻는 여울 때문에 두근대던 그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방•님•이라, 하였느냐.”

기억이 돌아온 것인가.

“령아, 눈을 떠 보아, 령아.”

“으우웅, 아파.”

“어디가 어떻게 아픈 것이야.”

염화가 그녀를 태울까 야차는 입술이 바싹 말랐다. 아무리 흔들어도 깨어날 기미는 없고 무거운 머리채를 감당 못 한 여울이 야차의 가슴으로 고꾸라졌다.

“그마아, 그만 흔드러, 토할 거, 같다구.”

“령아.”

무거운 머리를 지탱할 수 없었던지 여울의 손이 머리 장신구를 떼어 내기 시작했다.

짤랑! 짤그락. 팅, 탁, 타닥.

금이며 옥이며 반짝이는 장신구들이 여기저기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말아 올린 머리채가 물결치듯 흘러내린다.

“흐아아.”

두 팔을 들어 올린 여울이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개구리처럼 뻗어 버렸다. 얼굴을 가로지른 머리카락을 훅 불어 날려 버린 여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녕 천화가 깨어난 것인가. 아니면.’

서릿발 같은 냉철함으로 전쟁의 판세를 좌우하던 야차는 지금,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곱게 치장을 한 모습은 분명 은령인데 하는 짓은 여울이다.

“령아, 네가 날 불렀다. 분명하게 서방님이라 하였다.”

야차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물들었다. 그의 손끝은 더없이 부드럽게 여울의 뺨을 두드린다. 설마….

“여울아?”

“으응, 오라버니.”

여울이 그의 품 안으로 기어들었다. 한결 편해진 머리를 그의 허벅지에 답삭 얹고는 고양이처럼 볼을 비볐다.

“졸려. 나 좀 잘게.”

분노인지 욕망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오른다. 그런 야차는 아랑곳없이 잠에 취해 꼬물꼬물 자리를 다진다.

치마를 휙 들쳐 다리를 긁더니만 이내 허리를 튼다. 하얀 허벅지와 튼실한 둔부를 바라보던 야차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정뱅이 개귀신 같으니라고.”

와르르, 와르르.

정수리에서 뒷덜미까지 떼 지어 머릿속을 굴러다니는 돌덩이 탓에 여울은 눈을 떴다.

꿈을 꾸는 건가?

속눈썹을 팔랑이며 두 눈을 깜박이던 여울이 손을 뻗었다. 팔을 괴고 누운 야차의 이마를 그녀의 손가락이 꾹 찌른다.

“진, 짜네.”

“나도 꿈이었으면 하였다.”

볼에 와 닿는 그의 숨결이 미풍처럼 보드랍다.

“끄으응,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이로구나.”

“으으으응.”

“아파야지. 고통은 반성과 동행하는 현자이니.”

머리카락을 움켜쥔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천장이 낯설었다. 이불도, 기둥도 그윽한 향기를 제외한 모든 것이 낯설다.

‘망할!’

이대로 눈을 감고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다.

‘우라질, 여울아. 너 무슨 짓을 한 거니.’

수정궁에서 거나하게 취하여 백원후와 꽃단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한껏 신이 난 백원후가 여울의 목이 꺾일 때까지 주렁주렁 머리 장식을 달았다.

겹겹이 올린 머리 양손으로 받쳐 들고 밀궁으로 향하는 결계 앞에서 목청 높여 소리를 질렀었지.

“불타는 밤을 위하여!”

물오리 이마처럼 젖가슴을 바짝 밀어 올린 비단옷을 입고 개선장군처럼 씩씩하게 돌아왔다.

기다리고 있던 빙요를 만났던 것 같은데….

“비켜! 비켜. 야차를 만나야겠어.”

“아직 환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 방에서 기다릴 테니 빙요는 가서 자요.”

“요신은 잠들지 않습니다.”

“하여튼 간에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무엇을 잘하시려 합니까.”

“오늘 밤! 내가 야차를 덮칠 거야.”

으와아앗!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인 거야!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여울의 입에서 젖먹이 강아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후후후, 무언가 기억이 나는가 보군.”

“아니, 아니야. 생각나지 않아.”

와르르, 와르르.

기억이 선명해질수록 머릿속 돌들도 격렬한 두통을 일으켰다. 속까지 울렁거린다.

“주군은 절대 당신을 안지 않을 것입니다.”

“왜에! 전쟁의 신도 사내가 아니던가? 계집이 덮치는데 어느 사내가 마다하겠어.”

실패할 것이다 단정 짓는 빙요로 인해 여울의 오기와 패기가 하늘을 치솟았다.

‘왜 그랬어. 빙요오오! 왜 약을 올려. 왜 망나니 칼에 물을 뿌려, 뿌리기르으을.’

천명의 가르침에 남 탓하는 법이 없던 여울은 빙요가 원망스럽다. 원래대로라면 웃다 울다 기절했을 터였다.

차라리 수정궁에서 돌아오지 말 것을!

“하아아….”

집주인처럼 지랄맞게 꼬여 있던 미로를 헤매던 것까지 분명하게 기억하는데.

“내가 왜, 여기 있을까?”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던 야차가 한숨을 쉰다.

“다시 제자리로군.”

“음,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지? 내가?”

“후후후, 그만하자.”

담백한 야차의 음성에 천계의 열쇠를 쥔 듯, 여울이 후다닥 이불을 박차고 일어섰다.

“아얏!”

발바닥을 들어 보니 금으로 된 장신구가 콕 박혀 있다. 이런! 향기로운 춘몽에서 돌아온 여울을 기다리는 것은 참으로 비루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었다.

하늘의 별처럼 여기저기 바닥으로 뿌려진 장신구들이 보였다. 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얄궂은 비단 쪼가리는 그마저도 누가 풀어 헤쳤는지 풍만한 젖가슴 한쪽이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내가 벗어젖힌 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

비명이 터져 나오는 입술을 깨물며 눈치를 보던 여울의 눈동자가 야차의 시선과 마주쳤다.

“헤헤헤.”

“술이 덜 깨었는가. 아직도 웃음이 나오니.”

눈을 가늘게 뜨고 훑어 내리는 야차의 뜨거운 시선에 여울은 온몸이 화끈거려 걸음을 뗄 수가 없다.

“그래도 어제는 꽤나 보아 줄 만하였는데 말이다.”

“거, 미안하게 됐네. 아침부터 못 볼 꼴 보여서.”

슬금슬금 이불을 당겨 몸을 감싸는 그녀를 지켜보던 야차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부끄러워하는 게냐.’

부끄럼이라곤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을 수 없었던 여울이었다. 지난 팔 년 사이 변한 것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부끄러워하는 색다른 모습에 가슴이 설렜다.

‘저 망나니를 어찌하면 좋을까.’

죽여 버릴까 고민하던 어제의 분노가 소리 없이 녹아 버렸다.

“해가 중천에 올랐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

곧 죽어도 입은 살아남을 개여울, 조용히 사라지고픈 마음과 달리 생각은 말이 되어 튀어나왔다.

“연회장에서 기다리마.”

여울이 입을 열려는 순간, 야차의 손가락이 그녀의 입술을 쭉 잡아당겼다.

“한 번만이라도 그냥 네, 해.”

“에에에엥”

입술이 잡혀 있으니 요상한 소리가 새어 나온다.

“옳지. 놓아줄까?”

끄덕끄덕.

얼굴이 새빨개진 여울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야차가 입술을 붙잡은 손가락을 폈다.

“아니, 왜 입.”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야차가 손을 들어 올리자 잽싸게 입을 가린 여울이 그에게서 돌아섰다.

“네에.”

한껏 웅크린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소심한 목소리에 야차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후후후, 하나서부터 열까지 일일이 먹어 보아야 알지.’

심통이 나서 나타나지 않으리라 생각하였던 여울은 예상과 달리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 챙겨 보낸 비단옷으로 갈아입고 긴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여울은 귀족의 여식처럼 단아해 보였다. 물론 감겨드는 치맛자락을 걷어차며 걷는 걸음새는 어느 장부 못지않게 씩씩하다.

‘바지를 보낼 것을 그랬구나. 후후후.’

야차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배가 고프겠구나.”

“응.”

털썩 주저앉은 여울이 역시나 제일 큰 오리 다리 하나를 손에 쥐었다.

“여울아?”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 씹어 대던 그녀가 뒤늦게 야차의 부름에 응답한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거지?”

“어?”

요즘 들어 그녀는 가끔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는 듯하다. 태무신의 밀궁에 요괴나 귀신 따위가 들 리 없거늘 멍하니 한곳을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이 거슬린다.

“집에서도 늘 무장을 하고 있는 거야?”

“잠이 덜 깨었나 보구나, 나는….”

갑옷이 아닌 비단옷을 두르고 있건만, 여울의 엉뚱한 물음에 야차는 심장이 덜컥거렸다.

‘각성하는 것인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여울이 씩 웃었다.

“풋! 놀라기는.”

오리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쪽쪽 빨며 묻는다.

“야차는 안 먹어?”

“섭식이 필요치 않은 몸이니 신경 쓰지 말고 먹어.”

“응.”

쫑알쫑알 말문이 터질 때도 되었는데, 여울은 입을 꼭 다물고 고기 씹기에 바쁘다.

‘역시 모든 고기는 다리가 맛나.’

행복한 표정으로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핥아 대던 여울의 눈이 야차와 마주쳤다.

‘밥도 안 먹을 거면서 왜 저러고 앉아 있대.’

행여나 화산에 다녀온 것이 들통이 날까 여울은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입만 열면 사달이 나니 조심해야지.’

여전히 두통이 심했지만, 식사를 거를 순 없다. 모든 병은 먹는 것으로 치유할 수 있다고 사부님이 그랬다.

“지나치게 조용하군.”

“응.”

“화가 났느냐.”

“아니.”

그녀답지 않은 짧은 대답에 야차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무언가 답답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한 것이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아닌지라. 흐음, 무어라 해야 할까.

“말이 없으니 이상하구나.”

“응.”

“답 또한 맞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일까.”

“흐응.”

늘 쩝쩝거리며 맛나게 먹었는데, 소리가 사라지니 먹는 것도 시원찮아 보여 보는 이도 즐겁지 않다.

어디가 아픈 것은 아닌지 야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몸 안에 염화를 품고 사는 야차였다. 언제 폭주하여 불기운이 여울을 덮칠지 알 수 없었다. 하여 그녀를 향한 그의 눈동자는 창공을 가르는 매와도 같이 날이 선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

“아니.”

“다시는 네 입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래 주면 고맙고.”

원하는 답을 얻었는지 그녀가 살갑게 웃는다.

“맛있네! 이것 좀 먹어 봐, 응?”

여울이 손에 쥔 오리 다리를 야차에게 내밀었다. 되었다 괜찮다 하여도 굳이 그의 입에 오리를 물려 주었다.

향긋한 사향 내음이 그리 나쁘지 않다.

“입 짧은 건 여전하네.”

‘음식을 입에 담았던 것이 언제였던가.’

문득 여울과 처음 마을로 향했을 때가 떠올랐다.

“오라버니는 안 먹어?”

“단것 안 좋아 해.”

“안 좋아 해도 한번 먹어 봐. 맛나.”

엿가락 하나에 뛸 뜻 기뻐하고 식탐이 많아도 제 것 나누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참으로 닮았다. 또한 참으로 다르다.’

어느새 야차는 상 위에 턱을 괴고 여울을 바라본다.

“거 참으로 부담스럽네.”

“후후후.”

“웃지 마.”

“하하하하.”

“왜 이래? 가슴 설레게.”

퉁명스러운 음색이었으나 오랜 시간 자극이 없었던 야차의 심장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가슴이 설렜더냐.”

“응.”

“어째서?”

“웃으니까. 잘나 보여서.”

화르륵. 야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내도 계집도 아닌 것이라. 빙요. 네가 틀렸다.’

한입에 삼키고 싶을 만큼 어여쁘고 그의 피를 들끓게 하는 유일한 여인이었다.

“내가 네게 잘난 사내였더냐.”

“당연하지. 사내답게 아주 자알생기셨어.”

야차는 그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평범한 여인네들은 낭군에게 그리 말할 수도 있겠구나. 체면 차리는 귀족이 아닌, 발길에 차이는 들풀처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말이다.’

깨달음은 때론 피할 수 없는 통증을 수반한다.

천화로 태어나 율국 최고의 명문가에 시집을 와서도 늘 주저하고 물러서며 평범함을 꿈꾸던 아내.

“무엇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칼을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당신 아이 등에 업고 밭뙈기 하나 일구며 그리 살아가고 싶습니다.”

늪과도 같은 어둠 속에 잠겨드는 야차를 여울의 음성이 단박에 빛으로 끌어당겼다.

“왜? 누가 못난이래? 빙요가? 아니야. 정말 사내답게 잘났어.”

“무엇이 그리 잘났더냐.”

여린 아내조차 지키지 못하여 삼천 년을 울고 있는 이 사내가. 무엇이. 무엇이 그리 잘나 보이더냔 말이다.

“나무도 잘하고, 호랑이도 때려잡고. 바닷속까지 달려와 주고. 세상에 그런 사내가 또 있을까.”

나무야 염화가 깨어나기 전이고, 인호를 잡은 것은 그가 야차의 오른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달려간 것 또한.

“네가 불렀기에 소환된 것이지. 어느 것 하나 나의 의지는 아니었다.”

“아무튼, 좋아. 시집가고 싶을 만큼.”

“청혼을 하는 건가?”

“누가! 췟!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되어 봐라. 여인이 사내에게 혼인을 청하는 날이 오나.”

그랬다. 그런 개벽이 있어야 이 모진 인연이 끊어져 나갈 것이기에 야차는 하늘과 땅을 뒤엎으려 하였다.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들풀 같은 운명을 부숴 버리기 위해서.

“그만 쳐다봐. 심장 터진다고.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크크크킄, 계집아이가 부끄럼도 없이.”

“췟! 사내답지 못하게 턱 받치고 쳐다보는 꼴이라니.”

“너는, 내가.”

“무섭지 않아. 하는 짓을 봐! 무서워하게 생겼나.”

“어허!”

“전쟁의 신이라며 엄청나게 한가하네. 이 넓은 대륙에 전쟁 터진 데가 하나도 없나 봐? 췟!”

“입을 봉해 버려야겠군.”

“약조하였으니 지켜야지. 내 입은 내버려 둬. 먹는 것 말고도 바쁘….”

조잘대는 입술이 어여뻐 덥석, 물어 버렸다.

꿀꺽!

씹던 오리가 덩어리째 목구멍으로 넘어가 버렸다. 단단하고 향기로운 그의 혀가 여울의 것을 감아올린다.

“으읍, 읍, 으응.”

도톰한 아랫입술을 혀로 잘근거리며 숨결마저 모조리 삼켜 버릴 듯 빨아 당겼다. 그의 향기가 순식간에 여울의 몸으로 퍼져 나갔다. 핏줄이 물고기처럼 팔딱인다.

뜨거운 여름날의 소나기 같은 입맞춤이었다.

“하아, 하아아.”

“좋, 구나.”

그윽한 속삭임에 여울이 야차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민들레 씨앗처럼 몽롱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섬광이 번뜩였다. 오리 다리를 집어 던진 여울이 야차의 무릎 위로 폴짝 올라앉았다.

“더 해 줘.”

“먹던 것은 마저 먹어야지.”

“다 먹었어. 또 해, 응?”

입맞춤의 여운으로 무방비 상태인 야차의 몸이 그녀의 기세에 밀려 넘어가 버렸다.

앙칼지게 야차를 움켜쥔 여울의 몸이 꽃잎처럼 그를 덮었다. 풋풋한 향기가 이슬처럼 그를 적신다.

“여, 여울아.”

“흐응. 웅, 웅.”

아기 고양이 같은 신음 소리에 야차의 단전으로부터 시작된 열기가 가슴까지 치솟았다.

“그만. 그만해야 해.”

“아니야. 더 해도 돼.”

“여울아.”

“싫어, 싫어. 더 해 줘.”

여울은 앙탈을 부리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향기가 너무 좋아 눈물이 날 것 같다.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좋아.”

새근거리는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타고 흐르니 혈관이 팽창한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들썩이는 심장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나는 오라버니가 좋아. 너무 좋아. 고기보다 술보다 훨씬 좋아.”

여울이 고개를 들어 야차를 내려다본다.

“오라버니라 불러서 화났어?”

“무어라 부르든 상관없어.”

“오라버니라 부를래. 태무신은 좀 거창하고. 야차는 무슨 개 이름 같잖아, 응?”

깊은 숨을 들이켠 야차가 살며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손대지 않으리라 다짐하였건만, 어찌 이다지도 쉬이 무너져 버린단 말인가. 아무것도 통제할 수가 없다.

두근, 두근두근, 두근두근.

짝을 만난 비익조가 그러할까. 비목어가 그러할까. 심장과 심장이 맞닿아 연리지가 된 듯이 공명한다.

“그리 보기만 하여도 텅 빈 가슴이 채워지더이까.”

야차의 머리에 빙요의 음성이 섬광처럼 스쳐 갔다.

‘채워지지 않는다. 더 큰 욕심이, 가질 수 없다는 절망을 넘어서는 더 깊은 그리움이 생겨난다.’

얌전하게 그의 가슴 위에 엎드려 있던 여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손을 뻗어 그의 이마에 얹었다.

“열이 나? 몸이 왜 이리 뜨거워?”

염화가 깨어난다. 아주 작은 자극만으로도 염화는 뜨거운 불길이 되어 치솟았다.

뜨거운 숨결이 공기 중으로 피어올랐다.

“아파?”

아무런 답도 없이 누워 있는 야차를 내려다보던 여울이 그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심장 소리는 멀쩡한데, 아니 조금 빠른가?

“예전처럼 열병이 도진 거야?”

“…….”

“왜 그러지? 오리 때문인가?”

심각한 목소리에 야차는 웃음이 나왔다.

“크크크, 오리라. 그렇지. 저돌적인 먹보 오리 때문에 가슴에 불길이 치솟는다.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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