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빙요
빌어먹을 돌무더기 속에 도착한 지 사흘이 지났다. 붙어 버린 입술은 저녁 늦게 도착한 식사와 함께 제 모습을 되찾았다.
먹고 자고 싸고, 사흘이 지났건만 여울은 야차의 그림자조차 볼 수가 없었다. 작은 도자기 인형 같은 식신 아이 하나만 부지런히 여울의 시중을 들 뿐이다.
“야차는 어디에 있지?”
“주인님이 어디 계신지는 아무도 몰라요.”
반야를 떠올리게 하는 꼬마 식신의 본체는 눈토끼로 이름은 ‘토로’라 하였다.
“토로, 그러니까 여기가 야차의 궁이란 말이지.”
“예.”
“어디에 있는 건지는 모르고.”
“예.”
“그럼 여기 야차랑 나랑 너만 있는 거야?”
여울의 물음에 토로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반야처럼 귀엽고 앙증맞지만, 생긴 것답지 않게 입이 무겁다.
“목욕하실래요?”
“아니.”
“주인님은 더러운 것을 싫어하세요.”
여울이 침상에서 뛰어내렸다.
“가자. 씻으러.”
방 안에서 갑갑했던 여울은 토로와 함께 유황천을 향해 복도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다 왔어요.”
“알았어. 이제 그만 가 봐.”
“시중들게요.”
“됐어. 혼자가 편해.”
훌훌 옷가지를 벗어 던진 여울은 하얀 대리석 바닥을 내달려 순식간에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푸아아아아! 좋다.”
우렁찬 목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며 유황천 가득히 울려 퍼졌다. 뜨거운 물속에서 한껏 기지개를 켜며 개구리처럼 팔다리를 쫙쫙 펴니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뜨겁던 물이 식어 가는 줄도 모른 채, 그 위로 살얼음이 어는 줄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라, 무슨 유황천이 이렇게 식어 버린대?’
이미 늦었다. 여울은 물 위로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꽝꽝 얼어 버린 강물 아래 갇혀 버린 것처럼 살갗을 에는 냉기가 혈관으로 파고들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주먹으로 수면을 두드렸으나 단단한 얼음은 깨지지 않고 냉기는 여울에게로 점점 더 차갑게 내려앉았다.
‘우으읍! 숨을, 숨을 쉴 수가 없어!’
발버둥 치던 여울은 마지막 남은 숨을 터트렸다.
“파지이이인!”
툭, 투둑. 우직근. 펑! 펑!
하얀 얼음이 바위처럼 갈라지며 몸을 일으켰다.
“하아, 하아아! 하아, 얼어 뒈질 뻔했네!”
시퍼렇게 변해 버린 입술에서 거침없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온몸에 가시가 돋은 듯 살이 에인다.
“하아, 하아. 으아아아! 화라사!”
양손에 불꽃을 일으킨 여울이 단전에서부터 강한 화기를 끌어 올렸다. 두 팔을 벌려 원형을 그리며 기를 순환한다. 응축되었던 혈관이 확장되며 차갑게 식었던 피가 열기와 함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하아, 으아앗. 빌어먹을.”
허리를 편 여울의 눈에 흐릿한 물체가 일렁였다.
‘뭐지?’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
가을 하늘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지닌 얼굴은 도자기처럼 깨끗하여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묘하고도 아름다우며 낯설면서도 친근하다.
‘할머니?’
아니다. 무척이나 닮은 듯한 기운을 가졌으나 더 차갑고 예리하다. 누구지?
“후후후, 그리 쉬이 끊길 명줄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었지.”
요괴? 아니야. 이곳은 밀궁. 전쟁의 신인 야차의 신전에 드는 멍청한 요괴는 없어. 누구지. 도대체 누구야!
“담이 좋구나. 나를 보고 놀라지도 않으니.”
‘얼음을 다루는 요괴. 이 강렬한 요기는 상급이다. 뭘까. 마괴인가?’
다가서는 여인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 주문을 외운다.
‘마리하라 타무. 모습을 드러내라.’
감았던 눈을 뜨니 뾰족한 귀와 머리 위로 희미하게 뿔의 형태가 보였으나 선명하지가 않다. 여울의 힘이 상대의 요력보다 강하지 못한 탓이다.
‘뿔? 염소? 얼음을 다루는 염소?’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에라, 모르겠다. 일단 던지고 보자!
“북주설국 빙요.”
“재주만 비상한 줄 알았더니 영특하기까지. 어떻게 알았지?”
때려서 맞혔다.
답을 알았으니 나머지야 둘러대기 나름.
“할머니가 그랬거든. 인계에 내려와 있는 요신은 둘밖에 없다고, 화산의 백원후. 그리고 북주설국 빙요.”
“할머니?”
“들어 봤을걸? 화산의 백원후라고.”
‘아하. 눈치 빠른 원숭이가 야차를 견제하기 위해 염화의 주인을 손녀로 삼았구나.’
아무리 요신을 뒷배로 두었다 한들, 이다지도 당당하게 마주 선 여울의 모습에 빙요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주춤함을 눈치챈 여울이 반격에 나섰다.
“좋아. 인사는 그 정도로 된 것 같고, 뜬금없는 공격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환영 인사치곤 너무 과격해서 말이지.”
“물이 너무 뜨겁지 않을까 조금 식혀 준 것을 그리 말하니 섭섭하군.”
“오호, 그러신가?”
상대는 백원후와 대적했던 요신이었다.
‘또다시 부딪치면 승산은 없다. 한기를 다루는 요신이니 물에서 벗어나야 해.’
또바기 박혀 드는 빙요의 시선을 느끼며 여울은 욕조 밖으로 나와 옷을 걸쳤다.
“야차에게도 그리 말해 주지.”
“그가 네 편을 들 것이라 생각하는가 보군.”
“내게 너를 소개하지 않은 것을 보면 너 또한 그에게 그리 대단한 비중을 차지하지는 않을 듯한데. 아닌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존재 따위가 감히 빙요를 농락한다.’
여울의 비아냥거림에 빙요는 새빨간 입술을 깨물었다.
“후후후, 거침없이 내어 뱉는 것을 보니 이생 또한 큰 미련을 두지 않는구나.”
“살아온 시간들이 워낙에 자갈밭인지라, 헤헤헤.”
빠드득. 깨끗한 도자기에 금이 가듯 빙요의 얼굴에 파란 핏줄이 드러났다.
‘너무 건드렸나 보네, 망할.’
후회도 잠시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어 버린 빙요가 새빨간 입술을 말아 올렸다.
“후후후, 그래. 말장난은 그만하지.”
대리석 욕조를 빙 돌아 다가서는 그녀를 보며 여울은 손끝이 떨려 왔다.
“네가 이곳에 오게 된 연유를 알고 있느냐.”
“인연이 닿았으니 여기까지 왔겠지?”
“그 연이 얼마나 지독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는 알고?”
“여덟 살에 만나 내 나이 스물넷이니 그렇게 지독하게 오래된 건 아닌데.”
여울의 답에 빙요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삼천 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저리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순 없겠지.
“후후후, 그래. 그렇구나.”
“뭐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리 따라왔던 게야.”
“뭘 알아야 하는데?”
“내가 여기 있는 이유, 그리고 네가 여기 온 이유.”
“이유?”
빙요의 말은 뜻밖에도 여울의 가슴을 강타해 버렸다.
끊임없이 그녀를 밀어내는 야차를 따라온 이유.
따뜻이 품어 주었던 오라비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부님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
그 꿈들은 무엇일까. 지나치게 친숙한 그 꿈들은 아니, 그 기억들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왜 그는 날 데려와서 이렇게 방치하는 걸까?’
그동안 생각지도 않은 수많은 물음이 여울에게로 순식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혼돈의 시작이었다.
“너는 알고 있어? 그 이유를?”
“야차.”
선뜻 답을 주는 빙요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울의 눈동자가 또 다른 의문으로 짙어진다.
“인간도 귀신도 아닌 너와 북주설국의 요신인 내가 한 사내를 두고 이렇게 마주 보고 있다. 그럼 답이 되지 않을까?”
“난.”
“아마도 이생에서는 전과 달리 그와 함께 살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하고 있겠지.”
“이생에서?”
또 다른 생이 있었단 말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래. 모든 것을 알게 되면 네가 아는 이 모든 세상이 뒤집어지겠지.”
또다시 너를 잃은 야차는 폭주할 테고, 천계와 마계는 성전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후후후, 기억해 보려무나. 네가 그에게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대리석 기둥이 늘어선 연회실은 밀궁이 지어진 이후 처음으로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다. 삼단 높이의 단상 좌우로 불을 지핀 향로에서 향기로운 나무 내음이 은근하게 피어올랐다. 두툼한 양탄자 위로 커다란 상에 산해진미로 가득한 요리들이 빼곡히 자리했다.
“입에 맞지 않는가?”
“그냥 뭐…. 배가 안 고프네.”
나흘 만에 여울과 마주 앉아 있는 야차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홀로 두었다 하여 화가 난 것인가.’
그녀에게서는 노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아파도 입에 들어가는 것은 마다하는 법이 없었거늘.
뿔이 나도 단단히 났는가 보다. 뿔? 아하!
“빙요를 만났더군.”
“흥! 얼음 염소 말이군.”
북방민족의 추앙을 받는 만년설의 백록을 염소라니, 빙요가 들었다면 혀를 도려냈을 것이다.
“잘려 나간 뿔은 영영 자라지 않나 보지? 쌤통이다.”
“뿔이 잘렸다고는 하나 그래도 요신이다. 말을 가려 하는 것이 좋아.”
“췟! 왜. 또 입을 봉해 버리려고?”
나흘을 참고 또 참다 자리하였거늘, 심통이 난 여울은 그 헤픈 웃음 한 조각 보여 주지 않았다.
“마음 쓰고 있었다는 말이 듣고 싶은 건가?”
“흥! 하지도 않을 거면서.”
“잘 아는구나.”
“췟! 그 염소는 여기 왜 있는 거야?”
“백순록이다.”
“췟, 췟! 순록이나 염소나.”
“어째서 이리 예민하게 구는지 알 수가 없구나.”
“췟! 췟, 췟! 집에 다른 여인이 있을 줄 몰랐지!”
“알았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에 더욱 신경질이 났다. 태평스러운 야차의 얼굴을 확 긁어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조차 구질구질하여 개천에서 빌어먹을 때보다 더욱 마음이 상했다. 더럽고 치사했다.
“흥! 나는 사내를 다른 여인과 공유하지 않아!”
“무•어•라•.”
“싫다고!”
성질에 못 이긴 여울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나의 사내를 다른 여인과 나누어 갖지 않을 거라고! 먹는 것도 아닌데! 당연하잖아! 바보 천치야!”
무어라 대꾸할 새도 없이 여울이 뛰어가 버렸다.
‘나의 사내….’
야릇하게 감겨들며 묘하게 가슴을 간질인다. 감미롭게 입 안에 구르는 소리를 안으로 삼키며 자꾸만, 자꾸만 혀로 굴려 본다.
“나의 사내를 다른 여인과 나누어 갖지 않을 것이라.”
무언가 천박하면서도 소유에 대한 지독한 열망이 가슴으로 박혀 드는 말이었다.
“크크크킄, 네 것이라 말하고 싶었더냐.”
야차의 손이 한쪽에 밀려나 있던 술잔으로 향했다.
“크크크큭큭, 이 야차가 네 것이라 세상에 소리치고 싶었느냔 말이다.”
술을 즐기지 않는 야차는 잊고 있던 솔 향을 들이켰다. 솔방울처럼 담백한 여울의 향기에 푹 빠져 버렸다.
“이제 정말 여인이 된 것인가.”
화산에서 돌아온 열네 살의 여울이 떠올랐다. 열일곱 살 소년을 자극하던 그때와 참으로 변함이 없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을 흔들어 대며 자꾸 커진다고 바보처럼 웃었다. 백원후의 춘화첩에 그려진 사내들 모두 여인의 젖가슴을 만지고 있었다며 한번 만져 보라 손을 잡아당겼다.
순수했던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반편이처럼 설레어하던 그 시절이 떠올라 야차의 심장이 몽글몽글 구름처럼 말랑해졌다.
“그 투박한 유혹에 나는 이리도 흔들리는구나.”
야차는 또다시 술잔을 들었다. 기대란 것을 해 보기로 하였으나, 망설임은 여전히 그의 발목을 잡는다. 나흘 내내 수계를 통해 그녀를 지켜보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한 이유였다.
“나 여울이야. 개천에서 나고 영산에서 자란 은여울. 절대 놓지 않아. 한번 물면 놓지 않는 것이 나 여울이니까. 알지? 개귀신 은여울.”
바닷물을 삼키면서도 흑사의 이빨을 잡고 놓지 않던 그녀였다. 영산의 폭포 아래서는 닷새나 발이 묶였다. 그런 여울의 기질을 알기에 앞에 나서기가 쉽지 않다.
“나흘의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 더디었다. 이제 너를 보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지 않아.”
잠들지 않는 야차는 수계를 통해 여울을 지켜보며 하루의 전부를 보냈다. 잠든 그녀의 얼굴로 향하던 손을 거두었던 것이 어디 한두 번이랴.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를 가까이하면 할수록 지난 기억들이 꿈처럼 멀어진다. 은령의 환생이 분명할진대, 오히려 은령의 기억을 지우고 있었다.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천화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은령은 겁이 많은 여인이었다. 언니인 은후와는 달리 수줍음 많고 내성적인 성품을 지녔다. 늘 조용하고, 북적이는 곳을 피했으며, 동물들을 무서워하였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고, 고기보다는 채소와 과일을 즐겨 했으며 단것을 피했다.
‘어느 하나 닮은 구석이 없어.’
풀 씹는 여울을 본 기억이 없다. 천명이 나물을 데쳐 소금 간을 해 놓아도 맨밥만 씹던 아이였다.
“수마진.”
야차가 손에 든 술을 허공에 뿌렸다. 방울방울 흩어져 내리던 술이 물기둥을 만들어 두루마리처럼 펼쳐졌다.
향기로운 수계가 여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방으로 돌아간 여울의 뒷모습이 보였다. 어깨를 들썩이는 모습에 한숨이 나온다.
“울고 있는 것인가.”
야차가 손가락을 빙빙 돌리자 수계가 위치를 바꾸어 여울의 정면을 비추었다. 그녀는 침상에 기대어 앉아 노루 다리를 뜯고 있다.
“후후후, 저건 또 언제 들고 갔을까.”
엄청나게 섭섭한 것처럼 돌아서더니 상 위에서 가장 큰 노루 뒷다리 하나를 챙겨 갔다.
수많은 전생 중에 그가 놓친 어느 하나에 호랑이로 태어났던 적이 있던가. 아니라면 어찌 저리 고기에 집착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하하하하, 그래. 그래야지.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아무리 섭섭하여 마음이 부서져도. 먹을 건 먹어야지, 그럼. 하하하하!”
한번 터져 버린 웃음에 술기운까지 오르니 야차는 홀로 남은 잔칫상이 흥겨웠다.
얼마 만에 이리 웃어 보는가.
“이런, 이런, 이런…. 웃음소리가 밀궁에 울리기에 걸음 하였더니.”
도자기 인형 같은 얼굴을 하고 선 빙요는 늘 그렇듯 흐트러짐 없이 아름답다.
“어찌하여 홀로 계십니까.”
“후후후, 왔느냐.”
빙요를 ‘얼음 염소’라 부르던 여울이 생각나니 야차는 또다시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가 웃는 것을 처음 보는지라 빙요의 고운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술을, 하신 겁니까.”
“마셨다.”
“보면 닳을까 만지면 부서질까 애지중지하는 그 아이는 어쩌시고요.”
“심통이 나 가 버렸다.”
“먹는 것에 목숨을 거는 아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알 수 없다는 듯 빙요가 상 위를 훑어보았다.
“심통이 날 게 무어가 있답니까.”
“후후후, 내 집에 네가 있는 것이 못마땅했던 게지.”
살얼음이 피어나며 아름다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흘러내리는 요기를 감출 생각도 없이 빙요가 날을 세운다.
“사내도 계집도 아닌 것이 투기라도 하더란 말입니까. 그 아이가 무어라 말하더이까.”
“후후후, 뭐라 하였더라?”
“무어라 하였습니까.”
“하하하하!”
여울의 말을 옮기자니 온몸이 간지러워 야차는 웃음이 나왔고 그 모습이 낯선 빙요는 소름이 돋아 올랐다.
“나의 사내를 다른 여인과 나누어 갖지 않을 것이라, 하였던가? 후후후후.”
“나의 사내?”
오매불망 야차만을 바라보는 빙요였으나 여울의 도발에 화조차 나지 않았다. 계집이라고는 하나 온전하지 못한 반편이가 아니던가.
“어차피 품을 수 없는 계집 아니더이까.”
“또다시 그리될 수는 없지. 손대지 않을 것이다.”
“손도 대지 못할 물건을 어이 들이셨답니까.”
야차의 시선은 수계에 비친 여울에게 꼼작 없이 붙들려 있었다.
“후후후, 그냥 이리 보아도 나쁘지 않다.”
“정녕 그러합니까.”
“품지 않고 두고두고 눈에 담을 것이다.”
“야생의 매는 새장에 머무르지 않는 법입니다.”
굳이 여울을 새에 비하자면 아름다운 관상조보다는 사납기 그지없는 맹금류에 가깝다.
“아니면 날개라도 부러트리시렵니까.”
“필요하다면.”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리 보기만 하여도 텅 빈 가슴이 채워지더이까.”
보고픈 마음에 마주하였으나, 정작 야차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송아지 같은 눈동자 흔들림이 없고 그 안에는 늘 야차가 있다.
‘저리 두어도 괜찮을까.’
야차의 시선이 다시 여울에게로 향하니 그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피어오른다.
“다 먹은 뼈다귀가 뭐가 아쉬워 그리 쥐고 있느냐.”
노루 다리 하나를 다 뜯어 먹은 여울은 뼈다귀를 손에 쥔 채 잠들어 있었다. 먹을 것이 차고 넘치는데도 뼈다귀를 놓지 않는 것을 보니 그녀의 천성은 정말 한결같다.
“놓아라. 옳지.”
야차의 손짓에 여울의 뼈다귀가 공중으로 들리는가 싶더니 꼭 움켜쥔 그녀의 손이 달려 올라온다.
“후후후후, 참으로 변함이 없다.”
야차가 웃고 있다.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저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낯설다. 빙요는 당황스러웠다.
‘내 앞에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인요대전에 패하여 봉인되었으나 여섯 신장의 개입이 없었다면 절대 대라선 따위에게 지지 않았을 것이다.
천무신 대라선이 아무리 천계의 수호장이라 하여도 태무신은 말 그대로 전쟁의 신이었다.
천계와 인계, 마계를 통틀어 대라천의 천존을 제외하면 최상위 포식자라 생각했다. 진정한 수컷 중에 수컷이라 여겼는데, 눈앞에 웃고 있는 이는 흔하디흔한 인간의 사내일 뿐이다.
그 눈빛에 서리는 경멸을 읽었던가.
서늘한 야차의 음색이 그녀를 찾는다.
“빙요.”
여울에게서 뼈다귀를 빼앗는 것을 포기한 야차가 다시 술잔을 들었다.
“전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는가.”
“무슨.”
“너의 자리, 말이다.”
나지막한 물음에 꼿꼿이 서 있던 빙요가 허리를 숙이고 소매를 접어 바닥에 대며 몸을 낮추었다.
“주군의 발아래 가장 먼저 닿는 곳이, 소신의 자리입니다.”
바짝 엎드린 빙요를 향한 야차의 시선에 웃음이라곤 찾아 볼 수 없다.
“눈에 뜨이지 마라.”
“그리하겠습니다.”
“또다시 너의 이름이 거론되면 그 자리조차 잃게 될 것이다.”
밀궁에 온 지 엿새.
여울은 ‘무료함’이란 글자의 의미를 깨달았다. 글을 알되, 경험하지 못하였으므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마침내 깨우친 것이다.
“으아아아아아! 심심해 죽겠네!”
방문을 등지고 오른쪽 벽을 따라 달려도 그녀의 방이 나왔다. 그 반대편도 마찬가지였다. 갈림길이 수도 없어 길을 잃을까 침을 뱉어 가며 방향을 잡고 실을 풀어 가는 길에 놓아도 보고 하여도 항상 방으로 되돌아온다.
‘도깨비 집도 아니고 왜 이따위로 지어 놓은 거야!’
열락의 운몽산도 이리 복잡하지는 않았는데, 우라질!
온몸이 흠뻑 젖을 만큼 대차게 달렸으나 여울은 늘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래서 ‘밀궁’이라 부르는구나.
“으아아아, 성질나!”
창문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휘장을 거두어도 온통 벽뿐이다. 방 어디에도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없었다.
“창문도 없는데 천은 뭐하러 둘렀대?”
자신이 감금되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여울은 당연하게 결계를 연다.
“개천 하우여.”
“파진 가라가.”
“토우 해바라.”
하늘로 결계를 열면 연회장으로 올라서고, 벽을 열면 유황천이 나왔다. 바닥을 열면 그녀의 침상 위로 떨어지니 그 어떤 결계도 제대로 열리질 않는다.
“뭐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거야.”
결계가 잘못 열린 것이 처음이 아닌지라 여울은 당황하지 않았다. 다문국으로 향할 때도 동하마을 대신 태안으로 결계가 열렸었다. 영노를 처치하고도 결계는 제대로 열리지 않았기에 동하마을까지 발품을 팔아야 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방 가운데 가부좌를 틀어 앉은 여울은 온몸의 기를 끌어 올려 단전으로부터 기운을 응집했다. 눈과 귀를 닫아 예리한 촉을 세운다.
“천지 토우 명리 천야 가시이라.”
두 손바닥을 대어 오른손으로 하늘을 받치고 왼손으로 땅을 밀어내듯 합장을 한다.
‘혼돈의 어둠으로, 평안은 빛으로. 열려라. 육신의 눈을 닫고 마음의 눈이 열리라.’
깊은 명상 속으로 빠져든 여울은 환영을 보듯 사방의 벽이 느릿하게 밀려나는 것을 느꼈다.
‘기이한 괴석들. 뜨겁고 건조한 바람. 서걱서걱 모래알.’
더 이상 진척이 없다. 왜….
재차 시도해 보아도 두꺼운 벽을 뚫을 수가 없다.
“하아, 하아아.”
숨이 막혀 버린 여울은 땀만 한 바가지 흘린 채 바닥에 뻗어 버렸다. 일각도 안 되는 명상에 너무 많은 기운을 소진했다.
“아, 배고파아아.”
자랑스러운 체력도, 유명세를 떨치던 술법도 아무 소용 없다.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무기력함이 당황스러웠다.
“도대체가 되는 것이 없으니 애들을 어찌 만나지?”
반야와 이랑군을 떠올리니 생각은 다시 야차에게로 그리고 빙요에게로 흐른다.
“후후후, 기억해 보려무나. 네가 그에게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아, 도대체 뭘 기억하라는 거야. 염병할!”
노루 다리 하나 건졌던 저녁 만찬 이후 야차는 또다시 잠적해 버렸다. 빙요와의 살벌했던 첫 만남에 기분이 상해 투정 좀 부렸기로서니.
“췟! 태무신이라 이름만 거창하지 속은 밴댕이라니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갖 재주를 다 부려 보아도 제자리걸음이니 야차를 찾아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하다.’
바닥에 누워 허우적거리고 있으려니 백원후가 선물한 반지가 눈에 띄었다.
“네가 어디에 있든 이 반지가 수정궁으로 향하는 길을 열어 줄 게다.”
“수정궁으로 튀어 버릴까?”
아니지. 결계도 불안정한데 이대로 수정궁으로 가 버리면 다신 돌아올 수 없을지 몰라.
“우선 위치부터 정확하게 파악해야지.”
그런데 어떻게 파악하냐고, 어•떻•게•!
침상을 두드리며 성질을 피우고 있으려니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잽싸게 일어나 냉큼 문을 열었다.
“토로! 왜 이제야 와.”
“식후라 노곤하실 터이니 쉬시라 자리 비켜 드렸지요.”
“너무 쉬어서 몸이 썩어 가고 있어.”
“예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토로의 양 볼을 감싼 여울이 이마를 맞대곤 두 눈을 크게 떴다.
“야차는 어디에 있지?”
“주인님이 어디 계신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래. 아무도 몰라. 그리 대답할 줄 알았지.”
“아시면서 왜 물어요.”
천진하게 되묻는 토로의 손을 여울이 낚아챈다.
“가자! 넌 밖에 나갈 수 있지? 보아하니 밀궁에서도 길을 헤매고 다니진 않는 듯한데, 맞지?”
“밖에 어디요?”
“그냥 이 벽 넘어 어디든지.”
여울이 벽을 두드려 대니 토로가 눈알을 굴린다.
“저도 나가 본 적이 없는걸요?”
“아하, 아하, 하, 하. 그렇구나. 나가 본 적이 없구나.”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어색한 날숨을 뱉어 내던 여울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맞다! 염소! 얼음 염소에게 가자!”
토로를 옆구리에 끼고 내달린 여울은 커다란 문 앞에 도착했다.
“여울 님, 잠, 잠깐만요. 기다….”
토로가 말릴 새도 없이 여울의 어깨가 커다란 문을 밀어붙였다.
‘이런, 우라질!’
열린 문에서 폭풍우처럼 눈보라가 쏟아져 나왔다. 콧구멍으로 고드름이 꽂혀 드는 것 같아 여울은 놀란 숨조차 뱉어 낼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북주설국까지 끌려온 거였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강한 눈발이 여울의 얼굴로 들이치고 있다. 고작 방문 하나 열었을 뿐인데!
“제가 기다리시라 했잖아요.”
“바, 방에 있다 하지 않았어?”
“빙요 님 방이에요.”
‘방’이라 함은 모름지기 일을 하거나 쉬기 위해 만들어진 네 개의 벽을 가진 공간이어야 한다. 아닌가? 잘못 알고 있나?
‘망할! 뜨거운 유황천을 얼려 버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제기랄! 얼어 뒈지는 거 아니야?’
버둥거리며 여울의 품에서 벗어난 토로가 앙증맞은 두 손을 모아 머리를 숙여 엎드렸다.
“엎드려요.”
“됐어. 하던 거나 마저 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토로가 그들의 도착을 알렸다.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멈추고 빙요가 나타났다.
‘추운 데서 보니 더 오싹하군!’
온통 허연 것이 색이 들어간 것이라곤 더더욱 추워 보이는 파란 눈동자뿐이다. 빨갛던 입술조차 오늘은 퍼런 것이 딱 얼어 죽은 귀신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고고하여 아름다운 것이 여울은 못내 아쉽다.
‘요신은 다 그러한 것인가. 할머니도 그렇고 한없이 눈길을 잡아당긴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여울을 바라보던 빙요가 뜻밖에도 몸을 낮추었다.
“어? 어어어어. 왜, 왜 이래!”
두 손을 바닥에 대어 머리를 숙인다.
“뭐야! 왜 이래!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여울과 나란히 섰던 토로마저 빙요의 행동에 기절할 듯 머리털을 곤두세우며 옆으로 자빠져 엎드렸다. 당황한 여울은 그대로 얼어 버렸다.
서슬 퍼렇게 살기를 피우며 유황천을 얼려 버릴 때는 언제고, 얼굴 본 것이 엊그제인데 그사이 무슨 일이람!
“북주설국 빙요. 여울 님께 문안드립니다.”
“하지 마. 그런 거 하지 말라고. 왜 이래! 무섭게.”
무서워?
서슬 퍼런 살기에도 지지 않고 노려보던 것이 새삼 무섭다니. 엎드려 있던 빙요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참으로 별나구나. 참으로 별나.’
당황하는 여울의 모습이 빙요는 재미있다. 그 무엇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묘한 감정이었다.
‘오호, 요런 맛이었군. 백원후가 너를 가까이 두는 이유가 또 있었던 거야, 후후후.’
“빨리 일어나. 나 이런 거 싫어.”
발까지 동동 구르며 정색을 하니 빙요가 더욱 몸을 낮춰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하지 말라, 싫다 하니 더 하고 싶다.
“오천 년을 살아왔으나, 세상 보는 눈이 얕아 주군의 반려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용서하소서.”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나도 어어엄청, 미안해.”
참다못한 여울이 빙요를 잡아당겼으나 아무리 일으키려 애써도 그녀는 얼음덩이처럼 꿈쩍을 않는다.
“왜 이래.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여울 님께 무례를 범해 주군의 심기를 불편케 하였습니다. 하여 이리 방에서 근신 중이었습니다.”
“뭐라는 거야. 누가, 야차가 그래?”
빙요는 마괴조차 피해 간다는 요신이었다. 얼마나 무섭게 굴었으면 빙요가 이리 순한 염소가 되었나 하는 생각도 잠시, 여울은 야차를 떠올렸다.
“너는, 내가 무섭지 않은가 보구나.”
납작 엎드린 빙요를 보니 새삼 태무신의 위엄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막 무섭고 그런 건 아니고.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일어나. 응?”
“주군께서 두 번 다시 여울 님의 눈에 뜨이지 말라 하셨는데, 이 누추한 곳까지 어인 걸음이십니까.”
“망할 야차가 그랬어? 아니야. 어떻게 눈에 안 띄어. 내가 그런 거 진짜 아니야. 일어나 봐, 쫌!”
사부님이 그리도 입조심하라 하셨는데, 뒤늦은 후회에 여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빙요를 잡아당긴다.
“눈에 띄지 말라 하셔서 이리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우라질! 뭘 어찌했길래 이래.’
미안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안 그래도 물러 터진 여울의 심성을 사정없이 두드려 댔다.
“일어나. 일어나야 여기 온 이유를 이야기하지. 네가 눈에 띈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온 거잖아.”
‘흐음, 그렇지. 내가 찾은 것이 아니었지.’
그간 여울을 어찌 처리할지 궁리하느라 바빴던 빙요였다. 힐끗 올려다보니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조금은 귀엽다.
“정녕 몸을 일으켜도 되겠습니까?”
“응, 으응. 그만 일어나.”
“정히 원하신다면.”
티끌 하나 묻지 않은 빙요의 비단 치마를 괜스레 여기저기 털어 대는 여울의 손이 분주하다.
“안으로 드시겠습니까.”
“어? 아, 그럴까?”
어색하게 따라 걷는 여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이 없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빙요는 뜻하지 않게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인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어? 아, 밀궁은 북주설국에 있는 건가 봐.”
“아닙니다.”
“아, 말투가 왜 그래. 부담스럽게.”
저도 모르게 생각이 툭 튀어나오자 여울이 입술을 깨문다.
“불편하십니까?”
“예. 엄청.”
참으로 종잡을 수가 없다. 강하게 나아갔을 때는 한없이 거칠게 부딪치더니만, 약한 모습을 보이니 더없이 순하고 다정하게 군다. 따뜻하다.
‘따뜻해? 설국의 빙요가 온기를 느끼다니!’
스스로에게 놀란 빙요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어색한 침묵에 주위를 살피던 여울의 눈에 아름다운 설경이 들어찼다. 빙요의 공간은 방이라기보단 화원에 가까웠다.
그것도 일반적인 화원이 아닌 설화원이다. 나무가 있되, 눈꽃이 가득하고 투명하게 살얼음이 언 연못 아래 반짝이는 빙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설국이 아니면 여긴… 어•디•일까? 요.”
풋! 어울리지 않게 주저하며 말꼬리를 흐리는 여울의 높임말에 빙요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쪽 끝에 위치한 타라 사막입니다.”
“사막?”
“예.”
뭐가 그리도 궁금한지 두 눈을 크게 뜬 여울이 도톰한 입술로 쫑알거린다.
“사막이라 하기엔 뭐랄까. 좀 그렇지 않은가, 요? 내가 보고 있는 게?”
“만년설에서 살아온 저인지라 이곳에서도 편히 쉴 만한 공간을 꾸며 보았지요.”
“빙요가 살던 곳은 이리 생겼나 봐, 요.”
“예. 그러합니다. 혹여 냉기가 불편하십니까.”
“아니. 견딜 만해, 요.”
빙요의 시선이 여울의 왼손에 끼워진 보라색 가락지로 향했다. 냉기 탓인지 더욱 선명한 기운이 여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백원후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없애기 쉽지 않겠어.’
새하얀 얼음 정자에 도착한 빙요가 여울에게 예쁜 눈 방석을 내밀었다.
“설화주 한잔하시렵니까.”
“설화주?”
“술을 즐기신다 들었습니다.”
적적하여 퍼마신 술동이가 닷새 동안 꽤나 쌓였을 터, 소문이 돌았을 법도 하다.
“아니. 술은 되었고요. 내가 온 이유는! 내 잠시 다녀올 곳이 있는데.”
무어라 말을 해야 하나 고심하는 사이 차분히 기다리던 빙요가 입술을 뗐다.
“결계가 열리지 않는다. 뭐, 그런 말씀이십니까.”
“으하! 어찌 알았을까, 요.”
“후후후, 이곳은 전쟁의 신이 사는 밀궁입니다. 수많은 미로와 결계로 얽혀 있지요. 병법에 능한 태무신의 방진은 대라천의 천군도 뚫을 수 없습니다.”
“그럼 오도 가도 못 한다는.”
“예. 주군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나아가지도 들어서지도 못합니다.”
“잠시 나갔다 온다 하면 그가 허락해 줄까요.”
빙요의 표정을 보니 듣지 않고도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난 이곳에 갇힌 건가요?”
“글쎄요.”
“망했다! 그 말이 그 뜻이었구나! 이런, 우라질!”
밀궁에 오기 전 나누었던 야차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함께 가면 넌 나만을 보아야 할 것이다.”
“알았어. 나 그런 거 잘해. 하나만 주야장천 들고파는 거. 아주 잘해.”
“어느 누구도 만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다. 오로지 나 하나뿐이다.”
그는 후회하지 않겠느냐 물었었다.
“후회 따위 개나 줘 버리라지!”
개에게 줘 버린 후회를 어디 가서 되찾아야 하나.
“으아아아, 어떡해!”
절망적인 여울의 비명에 빙요가 두 눈을 반짝였다.
‘뭐 이런 물건이 다 있지? 어찌 생각이 저리 여실하게 얼굴로 드러난단 말인가.’
오색찬란한 표정에 빙요는 결국 웃음이 터져 버렸다.
“하하하하하, 도대체 어디가 가고 싶으신 겁니까.”
“친구들도 어찌 되었나 궁금하고, 어휴.”
점점 늘어지는 여울의 숨쉬기 운동은 끝이 없다.
“여울 님.”
빙요의 부름에도 답이 없다.
“제가 보내 드릴까요?”
“결계가 열리지 않아, 요.”
“제가 열 수 있습니다.”
“야차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못 나간다면서요.”
“다문국으로 출타 중이시라 밀궁에 안 계십니다.”
“언제?”
“여울 님께서 이곳에 들어서시기 바로 전에요.”
“진짜? 그럼 잠시 다녀와도 모를까, 요?”
“아마도요.”
새파란 눈동자로 웃고 있는 빙요가 여울은 참 낯설다. 며칠 전만 해도 잡아먹을 것처럼 굴었는데 절 한 번 했다고 덥석 믿을 수는 없지.
“날 어찌어찌해 보려는 심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요.”
“후후후, 화산의 백원후를 할머니로 둔 여울 님은 하늘도 두려워 않는 태무신이 선택한 분입니다. 제가 어찌 감당하려고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하면 왜….”
“첫 만남의 무례함에 대한 사과라고 해 두지요.”
사실 그녀는 빙요의 도움 없이도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른손에 끼워진 가락지는 야차의 뼈를 깎아 만든 것으로 같은 성질을 지닌다.
야차가 있을 때는 그의 강기 때문에 방진을 깰 수 없으나 자리를 비운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방진은 그와 같은 성질을 지닌 여울을 야차로 인식하여 거스름 없이 통과시킬 터였다.
‘가락지를 선물한 야차 또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듯하니 굳이 내가 나서 말해 줄 필요는 없지.’
빙요는 두 눈을 반짝이는 여울에게 미소 지었다.
“후후후, 방진은 주군의 것이나 이 밀궁은 제가 손수 지어 바친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불가하나, 이곳은 주군의 힘이 미치지 않는 저만의 공간입니다. 확실하게 길을 열어 드릴 수 있습니다.”
여울이 빙요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제가 믿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나요?”
“흠…. 비밀 하나를 더 알려 드리면 믿으시렵니까.”
“비밀?”
“고백이라 할까요?”
귀를 바짝 세우고 듣던 여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럼 결계가 잘못 열릴 때마다 냉기가 돌던 것이!”
엉뚱한 곳으로 결계가 열린 것이 빙요의 짓이란 사실을 알게 된 여울은 그간 발품 판 것이 억울하여 괜찮다는 말이 안 나온다.
“송구합니다.”
“아, 됐고!”
미안하다는데 어쩌겠는가!
다시 자리에 앉은 여울이 애써 화를 삼켰다.
“여기서는 안 그랬다니 믿을게요. 화산의 수정궁으로 결계나 열어 줘요.”
“주군께서 도착하시면 바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알았어요.”
화산으로 보내 준다는 말에 여울은 분한 마음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