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기억의 늪
“사르마. 사르마 다르탓.”
여울이 두 팔을 휘두르며 주문을 뱉어 내자 사방으로 폭음이 일었다. 결계 안으로 뿌연 연기가 들어찼다.
“으웅, 피해요! 도련님! 사르마다 하라!”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꾸려는 듯 여울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도 맹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두 눈을 꼭 감은 그녀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진다. 장렬하게 전투에 임하고 있는 모습에 이상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이리도 잠버릇이 고약한 연인이라니. 보통의 사내라면 침상에서 그녀의 살에 맞아 죽을 것이다.
“비켜! 비키라고! 화라사!”
불꽃을 일으키던 여울이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렸다.
“우라질! 다 죽여 버릴 테다! 하아, 하아.”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 대던 여울이 느긋이 나무에 기대어 앉은 야차와 눈이 마주쳤다.
“어디 갔지?”
이내 꿈이라는 것을 깨달은 여울이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입이 마르고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이 굉장히 기분이 나쁘다.
“망할! 어마 무시한 개꿈이었어.”
씩씩거리는 여울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망할 황실 수비대가 나한테 살을 쐈어. 그런데 도련님이 막 달려드는 거야. 멍청하게 몸으로 막아서 어쩌겠다는 거야. 비켜야 내가 장풍을 날리지. 코앞에서 알짱거려서 방어진도 못 펴고. 우라질!”
“도련님?”
“도련님? 내가 도련님이라고 했어?”
현실과 꿈이 온통 뒤죽박죽되어 버렸다. 혼란스러운 머리를 쓸어 넘기던 여울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어 쉰다.
“뭐든 간에, 그 사내가 내게로 날아오는 화살을 몸으로 막았다고. 바보처럼.”
반역의 오명을 쓸 수 없었던 현가의 막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형수에게로 쏟아지는 화살을 몸으로 막아 내는 방법밖에 없었으리라.
“그래. 바보같이 착하기만 했던 아우였지.”
쪽 째져 있던 야차의 눈매가 선하게 휘어진다.
‘모두가 바보 같아. 아우도 그리고 령도.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조금만, 조금만 모진 성정을 가졌었더라면.’
여울과 같은 기질이 조금만이라도 있었다면 그리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토록 애잔하고 안쓰럽지는 않을 것이다.
“아…. 개꿈 꾸느라 용을 썼더니 배가 고프네.”
‘그래 꿈이라 생각하고 잊거라. 나와 같은 절망은 네게 필요치 않으니.’
야차가 몸을 일으키니 잔망스레 부산을 떨던 여울이 냉큼 따라 일어선다.
“어디 가.”
“고기 구하러.”
“같이 가.”
“금방 올 테니까. 가만히 있어.”
고집이 쇠심줄인 여울이었으나 이상하게도 그의 말에는 어느새 얌전한 누렁이가 된다.
“빨리 와야 돼, 응?”
야차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돌아섰다.
“어휴! 무슨 꿈을 그리 요란하게 꾼담?”
여울은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결계 밖으로 쉴 새 없이 부딪혀 미끄러지는 빗줄기가 보였다. 소리와 공기의 흐름이 차단된 결계 안은 더없이 쾌적하여 비 오는 날의 눅눅함이라곤 찾아 볼 수 없었다.
“설마, 개구리 잡아 오는 건 아니겠지?”
야차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여울의 얼굴로 그늘이 드리운다. 개꿈이라 치부하기에는 검에 베인 자상처럼 너무나 선명하여 소름이 돋아 올랐다.
‘개꿈이야. 개꿈이어야 해.’
낯설면서도 친숙한 이들, 그중에는 여울이 할머니라 부르는 백원후도 있었다.
“백•원•후•.”
“백원후라! 백원후. 입에 착착 붙는 것이 참으로 정겹구나. 호호호호! 들었느냐. 너희들의 천화가 나를 이 율국의 황후로 인정하였다.”
“인간의 황후가 될 요신이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정녕 율국 마지막 천화의 죽음인가.”
“참으로 영특하구나. 더 이상의 천화 따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마지막 천화로구나. 내세에 다시 만난다면 내 오늘의 죽음을 보상하지.”
지금과 달리 조금은 표독해 보이긴 했지만, 그 웃음소리며 말투까지 분명 수정궁 백원후였다. 꿈인 듯 꿈같지 않은 이상한 환영들이 불길하다.
“아니야. 할머니가 내게 살을 날릴 리 없잖아.”
꿈이라면 지독하게 잔혹한 흉몽이다.
여울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이 되어 있었다. 큼직한 멧돼지가 모닥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타닥거리는 소리와 그을음 묻어나는 향기가 여름밤, 치명적인 유혹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우아아앗, 고기!”
“기다려.”
“얼마나?”
모닥불 앞에 발을 모아 쪼그려 앉은 여울은 자꾸만 고기 쪽으로 꼬물꼬물 다가앉는다.
“화라사!”
“마로!”
여울의 조급함에 화르륵 치솟았던 불길이 야차의 음성에 잔잔히 내려앉았다.
“불이 너무 약한 것 같아서.”
“기다리라 했다.”
“헤헤헤, 개구리 잡아 올 줄 알았더니만.”
“개구리 싫어하지 않았던가.”
어느새 야차는 그토록 부정했던 지난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면서 위혼문 꽤나 외워 댔겠네.”
“위혼문 따위…. 이제, 외우지 않아.”
“왜.”
“무의미하니까.”
“무의미해?”
“천족들에게 하늘 아래 모든 것이 그들의 발밑에 스러지는 들풀과도 같아.”
“그래도 난 해야쥐~.”
보란 듯이 고개 숙여 위혼문을 중얼거리는 여울을 바라보던 야차가 큼직한 다리 하나를 그녀의 코앞에 살랑살랑 흔들었다. 덕분에 위혼문은 반 토막이 나 버렸다.
“풋.”
야차의 웃음 새는 소리에도 여울은 그가 내미는 큼직한 다리를 날름 받아 입에 가져간다.
“뜨겁다.”
“앗, 뜨뜨드. 아우우, 뜨거, 뜨거, 뜨것.”
“참으로 변함이 없구나.”
“췟! 귀동으로 태어난지라 식복이 없어 그러합니다.”
그저 가벼운 농일 뿐인데, 야차의 얼굴은 굳어 버렸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식사를 마친 여울이 멀찍이 바위에 걸터앉은 야차에게로 다가섰다. 그는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보시오. 태무신! 오랜만에 파벽이나 올라 볼까?”
야차를 향해 장난스레 반짝이던 여울의 시선이 파벽으로 향했다.
“배가 부른가 보군.”
“풋, 태무신이라니 이름이 너무 거창한 것 아냐?”
“이름이라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여도 모두가 그리 부르면 그리되어 버리지.”
“그래서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싫고 좋음의 문제가 아니다.”
“쳇, 심각하기는.”
여울은 입을 삐죽거리며 멀리 구름에 싸인 파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저 위에 그들이 살던 집이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올라가 보지 않을래? 이젠 지지 않을 자신 있는데.”
“아니.”
보통 인간으로서는 오를 수 없는 파벽이지만, 경공술을 익힌 그들에게는 일다경이면 충분했다. 아니 결계를 열면 일각인데 굳이 싫다는 야차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난 두 번 다시 저곳에 오르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선 야차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췟! 싫으면 말라지!”
야차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던 여울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곤 높은 파벽으로 날아올랐다. 절벽이 그녀의 발아래 소리 없이 밀려 내려간다.
“하아, 하아아아.”
하늘과 맞닿은 밤공기를 한껏 들이켜니 별빛까지 폐부로 스며드는 듯하다.
‘오라버니를 찾으면 이곳에 돌아와 함께 살 거라 생각했는데….’
부서진 집은 여울이 이미 수리해 놓은지라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다. 놀란 적송령과 돌배목령은 더 이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여울은 알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들이 그곳에 있음을.
야차는 동이 트고 나서야 돌아왔다. 풀 뜯는 토끼처럼 엎드려 뛰어다니는 여울에게로 다가섰다.
“뭐 하는 거지?”
고개를 발딱 치켜든 여울이 손가락을 쫙 펴 보였다.
“가락지가 없어졌어. 빌어먹을!”
그러곤 이내 다시 풀숲을 헤집기 시작했다.
“여기도 없고, 도대체 어디에서 흘린 거지? 아우! 분명히 손가락에 끼고 있었는데! 도대체 언제 없어진 거지?”
똥강아지처럼 바닥을 훑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에 야차가 입을 열었다.
“버렸다.”
“뭐?”
툭 하고 돌을 던지듯 내뱉고는 벚나무 아래로 걸어가는 야차의 모습에 여울이 후다닥 일어나 달려갔다.
“뭐라…. 내 가락지 봤어?”
“버렸다.”
“왜? 어디에?”
발을 구르며 성을 내던 여울이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폭포? 물속에 던져 버렸다고?”
야차가 고개를 끄덕이자 여울은 부아가 치밀었다.
“왜에에에에에! 그거 내 건데에에에! 할머니가 나한테 준 건데! 도대체 왜 버렸어!”
“할머니라. 설마 백원후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처음부터 백원후를 싫어했던 그인지라, 여울은 뜨끈하게 화기가 치솟는 가슴을 부여잡고 폭포로 뛰어갔다.
“수라하! 마리 하라!”
사방에서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그녀의 머리 위로 물풀들만 처덕처덕 내려앉을 뿐 가락지는 보이지 않는다.
“파라장!”
물기둥을 올리는 대신 여울은 장력을 펴서 물을 좌우로 밀어냈다. 그러곤 열 자 깊이의 바닥을 훑기 시작했다. 천 길 낭떠러지 같은 파벽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수력이 어마어마한지라 물을 밀어내던 여울은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으이구! 가락지야, 가락지야, 어디에 있누.”
반야가 있다면 금방 찾을 터인데, 우라질!
“으아아아아아! 신경질 나아아!”
도술을 연마하며 악귀나 요괴 때려잡는 법만 배웠지, 잃어버린 물건 찾는 것은 배우지 못했다.
“망했다!”
물가에 주저앉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화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야차는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전생의 기억이 온전하지 못한 게로군. 어찌 죽었는지 알게 되어도 그리 애틋할까.’
물음에 답하듯 고개를 휙 돌린 여울이 야차를 노려봤다.
‘오라비가 오라비 같아야 대접을 하지! 자기 입으로 오라비 아니라 했으니 진정! 거침없이 막 굴려 주겠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여울이 야차에게로 다가섰다.
“이봐.”
장승처럼 버티고 선 여울은 어깨에 한껏 힘을 주곤 야차를 내려다봤다.
“당신이 찾아와. 버린 사람이 찾는 게 빠르겠어.”
왜일까. ‘오라버니’라 부르지 말라 말했고, 그녀는 그의 말을 따르고 있을 뿐인데 가슴 한편이 서늘하다.
“다시 찾을 것이었다면 버리지도 않았다.”
“문제는 당신이 버린 가락지가 내 것이라는 거지.”
“너는 가락지의 주인 손에 죽임을 당했다.”
“아…. 개꿈 좀 꿨다고 개풀 뜯는 소리 하지 말고. 일단 내 가락지 찾아와.”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는 여울의 모습에 야차는 쉬이 끝나지 않을 말씨름이 피곤해졌다.
야차의 손에서 파란 불꽃이 일어나 작은 가락지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푸르스름한 기운이 사라진 그의 손에는 눈처럼 새하얀 가락지가 놓여 있었다.
“별걸 다 할 줄 아네.”
태무신이 되었다더니 기술이 참으로 장하다. 이런 기술만 있다면 나라님도 구제 못 한다는 가난도 한 방에….
“됐어!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싫어.”
야차가 내미는 백옥 가락지를 움켜쥔 여울이 보란 듯이 폭포를 향해 집어 던졌다.
“원래 여기 이 자리에 끼워져 있던 것 찾아오라고.”
가슴뼈를 태워 만든 가락지가 용천폭포 아래 가라앉았다. 그 차가운 기운이 가슴 속의 잘려진 뼈와 공명한다.
“무언가를 잃어 본 적 없으니 귀한 것도 모르지!”
혀를 빼어 문 여울이 그의 설창을 움켜쥐고 파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귀한 물건 같은데! 꼭꼭 숨겨 둘 테니 어디 한번 찾아봐!”
파벽을 올려다보는 야차의 가슴이 들썩였다.
처녀의 치맛자락에 스며드는 봄비처럼 찾아드는 망설임.
‘두 번 다시 걸음 하지 않으리라 하였다.’
여울은 곁에 있으나 없으나 텅 빈 그의 가슴에 소용돌이를 만든다.
빙요의 뿔로 만들어진 설창은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며, 그것을 야차에게 선물하였다는 것은 빙요가 그녀의 삶을 그에게 선물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야차에게 설창은 최강의 무기였으나 미궁 무기고에 있는 수많은 것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바다 깊숙이 가라앉은 모래가 일어나는 것 같다. 잊어버린 감정들을 헤집어 놓는다. 왜….’
분명하게 말했어야 했다. 아비와도 같은 천명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냈다. 그의 손에 처절하게 죽어 간 천명의 마지막을 분명하게 말해 주어야 했다. 그리했다면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으리라. 아니, 백원후의 말처럼 야차를 향해 검을 들 것이다.
‘혈육과도 같은 벗에게, 죽어도 놓을 수 없었던 아내에게 검을 겨눈다. 나는 무슨 죄를 지었던 것일까.’
야차는 다시 한 번 높디높은 파벽을 올려다봤다.
“나를 흔드는 네가 싫다.”
은령의 환생들을 베어 낼 때마다 그 사랑 또한 죽어 갔다. 지금 남은 것은 단 하나, 그것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 주문이 되어 혈관을 타고 뼛속까지 새겨져 버렸다.
‘천지를 뒤엎어 모든 천족들의 씨를 말리고 가장 높은 그곳, 대라천을 부숴 버릴 것이다.’
지친 그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꺼지지 않는 염화의 원망과 분노였다. 하지만 더욱 거세게 타올라야 할 염화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사고가 흐려지고 이성이 모래처럼 흩어진다.’
백원후의 가락지 따위를 대신하려 가슴뼈를 도려냈다.
“제거해야 한다.”
통증이 인다. 염화가 요동을 치고 있었다. 전신으로 타오르는 혈관들이 미친 듯이 팔딱였다.
다시 환생을 하게 될지 알 수 없어 그리하였던가.
마지막일지 모르니 혹여 애틋한 마음이 들었던가.
알 수 없다. 아무것도 명확한 것이 없었다.
너무 긴 시간을 땅속 깊숙이 봉인되었던 탓이라 다잡아 보아도 이리저리 널뛰는 가슴에 평정을 찾을 수 없었다.
눈을 뜨니 세상이 노랗다. 야차는 손을 들어 얼굴에 붙은 종잇조각을 떼어 냈다. 노오란 부적이 손안에서 순식간에 타올랐다.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천언령이 새겨진 봉인도 부숴 버린 태무신에게 닥종이 부적이라니.
“잠이…. 들었던가.”
삼천 년을 살아오며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잠이 든 적이 없었거늘, 하물며 땅속에 봉인되어 있을 때조차도 그의 의식은 분명하게 깨어 있었다.
“어? 일어났네.”
물에 흠뻑 젖은 여울이 야차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벚나무 아래 햇살을 등진 그녀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시간이 멈춘 듯 야차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상해. 아주 이상해.”
“뭐가.”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잖아. 지금 내가.”
그의 짙은 눈썹이 살며시 밀려 올라갔다.
“전에도 이랬던 것 같아. 영산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내가 먼저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지? 그럴 리가 없는데. 진짜 그랬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상해.”
‘아주 오래전에. 그리 보아 주던 이가 있었다.’
북국대전에서 돌아온 후로 은령은 잠든 그를 늘 이렇게 지켜보았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전쟁터, 잠들지 못하는 호국선이 아내의 곁에 비로소 잠을 이루었기에 그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늘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만!”
뜻하지 않게 훅 밀려들어 오는 추억에 야차가 몸을 일으켰다. 먼지 같은 추억일 뿐이다.
“쓸데없는 짓을 하였더구나.”
“뭐가.”
“부적.”
“풋, 왜 쓸데없어.”
“부적 따위로 날 묶어 둘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느냐.”
“아니.”
“그럼. 왜.”
“눈떴을 때 옆에 있으려고. 헤헤헤. 안 본 사이 잠이 많이 늘었네.”
잠이 늘었다는 말에 야차는 괜스레 겸연쩍어졌다.
“잠들지 않았다.”
“거짓말!”
“태무신은 잠들지 않아.”
“웃기시네. 여울아, 여울아, 하던데.”
순간 야차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럴 리가 없다.”
“어찌나 애타게 찾던지. 반지 찾는 데 집중을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여울이 야차의 눈앞에 손가락을 쫙 펴 보였다. 왼손엔 백원후의 반지가 오른손엔 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흥, 못 찾을 줄 알았지?”
질긴 근성을 모르는 야차가 아니었기에 놀랍지도 않다.
“우아앗! 뭐 하는 거얏!”
파란 불꽃에 휩싸인 여울의 몸이 하늘로 떠올랐다. 따뜻한 기운이 그녀의 몸에서 물의 기운을 밀어냈다.
‘뭐야. 옷 말려 주는 거야?’
순간, 여울의 몸이 기우뚱 뒤집어졌다. 공중에 뜬 채로 빙글빙글 돌아간다. 야차는 젖은 빨래 털어 내듯 위아래로 손가락을 까닥이며 그녀를 흔들어 댔다.
“뭐 하는 거야아아아아아! 내려 줘!”
은행잎처럼 우수수 떨어진 노란 부적들이 나비처럼 팔랑팔랑 바람을 타는가 싶더니 여기저기 불꽃을 일으킨다.
“내 부적! 내 부적! 태우지 마!”
삽시간에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안 돼!”
“사용 전에 생각했어야지.”
다른 이였다면 손목을 잘라 냈을 터였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쥐가 있다면 말이다.
“그게 돈이 얼만데! 일 년 치 써 놓은 거란 말이야! 아우!”
비통해하는 여울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야차는 그녀를 탈탈 털어 부적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
“그만해. 토할 것 같아. 으어어억.”
얼마나 흔들어 댔는지, 허리춤에 찼던 복 주머니까지 열려 그녀의 머리 아래로 산더미 같은 물건들이 쌓였다.
“한 번만 더 부적을 썼다가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네.”
얌전하게 답을 하고서야 여울은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흥! 온몸을 부적으로 덮어 버릴 테다.’
분신술로 천 명쯤 불러내어 부적을 쓰게 할 요량으로 여울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한테 이리 험하게 해도 되겠어? 그 멋진 창은 어찌 찾으시려고.”
“무슨 창.”
“있잖아. 그 허옇고 긴 거. 꽤나 비싸 보이던데.”
“설창 말이로군.”
시큰둥한 반응에 여울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까닥였다.
“나야 타고난 영특함으로 반지를 찾았지만, 그 창을 찾기란 쉽지 않을….”
야차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쫙 펴는 순간, 번쩍하며 뇌우가 치더니 이내 그의 손에 설창이 쥐어졌다.
‘우물 속에 던져 버린 창이 어떻게….’
영산의 우물은 파벽의 높이와 더불어 용천호 바닥까지 닿을 만큼 깊었다. 여울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위잉. 윙, 윙. 붕붕붕.
바람을 가르며 손안에 놀던 설창이 그간 야차가 펴 놓았던 결계를 거둔다.
“가자!”
“어디로?”
여울은 그녀의 앞에 열린 또 다른 결계를 바라보았다. 시커먼 어둠으로 가득 찬 결계 속에서 뜨거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 앞에 태무신 야차가 손을 내밀고 서 있었다.
“대륙 끝까지 쫓겠다 하지 않았던가?”
당신이 가는 곳은 대륙의 끝이 아니라며.
“염라국으로 가는 거야?”
“싫은가?”
“아니.”
답은 그리하였으나 여울의 가슴에는 파도가 친다. 반야와 이랑군 그리고 할머니와 개천의 아이들까지. 그간 맺어 왔던 인연들이 바람처럼 스쳐 갔다.
“생각이 바뀌었다면.”
야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울이 그의 손을 잡았다.
“놓지 않는다고 약조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전에도 내 손 놨잖아. 또 놓지 말라는 법 있어?”
함께 자라는 동안, 파벽에서 손을 놓았던 일을 꺼낸 적이 없기에 잊었으리라 생각했었다. 야차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혹여 상처가 되었던 것일까.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려 온다.
“기억력이 좋구나.”
“약조해.”
죽을 결심이라도 하듯 다짐하는 모습에 야차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너라는 아이에게 기대라는 것을 해도 되는 것이냐. 허망하게 죽지 않을 것이라. 날 다시 혼자 두지 않을 것이라 믿어도 되는가 말이다.’
“왜 대답이 없어?”
“약조한다.”
야차가 여울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함께 가면 넌 나만을 보아야 할 것이다.”
“알았어. 나 그런 거 잘해. 하나만 주야장천 들고파는 거. 아주 잘해.”
“어느 누구도 만날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다. 오로지 나 하나뿐이다.”
맞잡은 손끝으로 일렁이는 감정의 파도 앞에 야차는 여전히 망설인다.
“정녕, 후회하지 않겠는가.”
“후회 따위 개나 줘 버리라지!”
어쩌면, 어쩌면 그녀는 이전과는 다를지 모른다. 귀녀인 탓에 늘 죽음과 동행하겠지만, 쉬이 죽지 않을 것이다.
질기고 거친 그녀의 성정을 알기에 야차는 기대라는 것을 가져 보기로 했다.
희망이란 죽음과도 같은 유혹이다.
‘또다시 너를 베어 내지 않기를. 적어도.’
삼천 년을 끓어올랐던 염화로 천지를 뒤엎는 대신.
‘네 손에 죽을 수 있기를. 나는 희망한다.’
뜨거운 열기도 잠시, 이내 차가운 찬기가 여울의 폐부 가득히 들어찼다. 커다란 돌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복도를 따라 걷는 야차의 걸음마다 하얗게 얼어 있던 기둥들이 녹았다 얼기를 반복했다.
‘참으로 요상한 곳일세. 더웠다 추웠다.’
낯선 곳에 도착하면 주위를 살피는 것이 순서, 요괴 사냥꾼이었던 여울은 냄새 하나 소리 하나 놓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돌벽뿐이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희미하게 건조하고 낯선 흙냄새가 느껴질 뿐, 식물 냄새도 없으니 아무것도 추측할 수가 없다.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정말 염라국인가?’
아니지. 염라국이라면 분명 유황 내음이 날 터인데. 그도 서책으로만 읽고 가 본 적이 없으니 알 수가 있나.
“혼자 살아?”
“누군가가 살고 있다면 곧 마주치겠지.”
명색이 태무신인데 식신 하나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여울은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우선 주변을 살피고 반야나 이랑군에게 연락을 취해 보자.’
대처 능력 좋은 여울이 머리 굴려 대는 소리에 앞에 걷는 야차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슨 생각을 그리할까.’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을 빙요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이상할 법도 하건만, 야차의 머릿속은 여울의 생각으로 가득하다.
“네가 묵을 곳이다.”
“방은 그냥 같이 써도 되는데.”
“누구와?”
눈동자를 반짝이며 올려다보는 그녀의 모습에 야차가 저도 모르게 콧방귀를 뀌었다.
“좋지 않은 생각이다.”
“그런가? 헤헤헤.”
수정궁에 있는 그녀의 방보다는 칙칙하고 무거운 분위기였지만, 일단은 넓다. 두꺼운 휘장이 둘러진 벽은 창문이 있을 테고 그 옆에 장정 열 명은 누워도 될 만한 침상이 있었다. 흔한 반닫이 장조차 없다. 탁자도 없고, 침상 하나 덜렁 있는 것이 엄청나게 휑하다.
“당신은 어디서 자는데?”
“별게 다 궁금하군.”
“아니, 나는 따로 방 필요 없고, 그냥 그 옆에 천 하나 두르고 자면 되는데.”
역시나 포기할 줄을 모른다.
“내 침상으로 기어들 생각은 않는 게 좋아.”
“그거야 두고 보면 알 테고.”
“하아….”
계집애가 부끄럼도 없이 발뺌도 않으니 어쩌면 좋을지.
“나랑 자는 거 싫어? 전에는 좋아했는데.”
“그런 적 없어.”
“무슨 소리야. 매일매일 꼭 끌어안고 잤으면서.”
“여울아.”
다시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가 이름을 불러 주었다. 너무나도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려 한다.
“응? 왜에?”
“무섭지 않은가 보구나.”
“뭐가?”
“내가.”
그녀를 향해 뻗은 야차의 손에 여울이 답삭 얼굴을 가져다 대며 강아지처럼 비볐다. 엄지손가락이 도톰한 그녀의 입술을 쓰다듬는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우우, 읍읍. 으으으므믐흐흐흐.”
이. 입술이, 입술이 붙어 버렸다.
“하하하하하하!”
“으으으, 느는으으, 우우우.”
우라질! 입이 사라졌다. 살가죽이 붙어 버린 것이다. 입맞춤을 기대하며 살포시 감았던 눈이 번쩍 떠졌다.
‘밥시간 다 됐는데, 어쩌나! 망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이리 눈알을 굴리나. 오호라! 밥을 어찌 먹나 그 생각을 하겠군! 큭큭큭.”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바라보던 야차가 그녀를 들어 침상에 던져 버렸다. 그의 손짓 하나에 두껍고 무거운 비단 이불이 여울의 몸을 천 근 무게로 내리눌렀다.
“널 데려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얌전히 있도록!”
야차의 웃음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멀어졌다.
‘우라질! 안 본 사이에 성질만 더러워졌네. 왜 저렇게 삐딱해진 거야. 태무신이면 신답게 쫌! 응? 묵직하니, 뭐. 남들 없는 능력을 이따위로 써도 되는 거야!’
빌어먹을! 이마에 부적 붙였다가 당한 걸 기억했어야 했는데! 어쩌면 저렇게 지랄맞아졌지?
욕을 주문처럼 외우며 그녀를 내리누르는 이불과 씨름하던 여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사지를 뻗어 버렸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이불은 꿈쩍 않고, 붙어 버린 입도 떨어지지 않았다.
‘흐어어엉. 할머니이이이이.’
염병할 이불, 입만 떨어지면 불태워 버릴 테다!
여울의 방으로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잠든 그녀를 바라보는 파아란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가 감돈다.
“내게는 머리카락 한 올 내어 주지 않던 이가 네게는 귀한 선물을 하였구나.”
여울의 오른손에 염화의 화기를 그대로 간직한 새하얀 가락지가 달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런 못난이한테 삼천 년 동안 목을 맸단 말인가.”
빙요가 야차를 위하여 손수 지은 이 밀궁에 그녀가 무던히도 지우려 애썼던 과거를 데려왔다.
‘오묘하구나. 맑고 투명한 것이 인간이라 할 수 없고, 따뜻한 온기는 귀신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들이 미궁에 들었을 때에 이미 알고 있었으나 마중을 하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유일한 암컷이 못 견디게 미웠다.
“여울이라 부른다지?”
“으아아아!”
순간 답이라도 하듯 대차게 이불을 걷어차는 발길질에 빙요가 한 걸음 물러섰다.
“깜짝이야!”
망아지 같은 발길질이라니.
제풀에 놀란 빙요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침상으로 다가섰다.
“고기, 고기, 고기. 스으으흡.”
입가에 흐른 침을 닦아 내는 모습에 빙요는 기가 찬다.
“어디서 이런 계집도 사내도 아닌 것을 주워 온 걸까. 정녕 이 망아지가 그이의 연인이란 말인가.”
여울에게로 손을 뻗던 빙요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파지지지짓.
흠칫 놀란 빙요의 손이 여울의 왼손으로 향했다. 손이 닿자 자수정 가락지가 불꽃을 일으켰다.
“백원후.”
요신은 누군가에게 특별한 정표를 선물하지 않는다. 특히나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면.
“오른손엔 야차의 심장을, 왼손엔 요신의 마음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넌 누구지?”
그저 껍데기 중의 하나일 뿐이라 생각하였는데, 그 껍데기가 강력한 요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
빙요는 혼란스러웠다. 야차를 적으로 두는 것도 피가 마르는 판에 화산의 백원후를 대적할 생각을 하니 솜털이 곤두섰다.
‘우선은 백원후와의 관계를 알아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