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귀신의 아이 (19/34)

19. 귀신의 아이

요란한 하루를 마치고 제일단주의 본가로 찾아든 여울은 그녀의 명으로 대기 중이던 반야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됐어? 잘 해결된 거지?”

반야의 물음에 여울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매 속에 숨겨 둔 타무의 사리를 보여 주었다.

“꽤나 마음 쓰셨네. 사리까지 만들어 주고?”

“아직 뒤처리를 더 해야 해.”

“뒤처리?”

“응. 타무와 약조한 것이 있거든.”

“약조? 오지랖도. 귀신이랑 또 무슨 약조를 한 거야!”

“단주는?”

“어? 아, 딸 방에 있지. 아가씨 상태 괜찮아 보이던데?”

접견실로 향하던 여울은 반야의 안내를 받으며 해아영의 처소로 향했다.

“근데, 무슨 약조를 한 거야, 응?”

“반야, 너는 가서 해아영의 시중을 들던 이를 불러와.”

“유모?”

“유모든 누구든 간에.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사람.”

“알았어.”

반야가 앞서 뛰어가자 별채의 문이 열리며 단주가 계단을 내려섰다. 그의 얼굴은 한층 편안해 보였다.

“잠시 깨어났다 다시 잠들었습니다. 한번 보시렵니까.”

“아가씨와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단주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하하하하, 그러하십니까. 딸아이가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니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사례를 받고 하는 일에 인사라니 가당치 않습니다.”

“하하하, 누구도 고치지 못한 병을 고쳐 주셨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병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예에?”

“귀신의 정체는 일품상단의 장자였습니다.”

“어허, 어찌 그런 일이. 원수를 진 것도 아닌데, 우리 아이에게 그런 해코지를 하다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단주의 뒤로 해아영의 어린 여종이 계단을 내려왔다.

무슨 잘못을 하였는지 새파랗게 질린 여종은 계단을 내려서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머리를 땅에 댔다.

“살려 주십시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소녀는 그저 아기씨가 시키는 대로 하였을 뿐입니다.”

“청아, 아기씨가 무얼 시켰단 말이냐.”

“그, 그것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는 단주가 여울을 쳐다본다.

“해아영 낭자의 부탁으로 매일 수면제를 구해다 주었을 것입니다.”

“수, 수면제?”

“건강한 몸으로는 긴 잠을 자는 것이 한계가 있었을 터. 약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내성이 생기자 약의 양이 치사량까지 늘었을 테지요.”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멀쩡한 딸아이가 무엇하여 잠자는 약을 그리 먹어 댔단 말이오!”

“잠이 들어야 그를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러했겠죠.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일부러 색귀를 만나고자 하였다는 말이오!”

경악스러운 단주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여울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죽은 타무 도령을 불러들인 것도 해아영 낭자이며, 그와의 잠자리 또한 낭자가 원하여 그리된 것이니 도령을 ‘색귀’라 부름은 옳지 않습니다.”

진노한 단주가 주먹을 쥐며 온몸을 떨었다.

“그, 그게 무슨 망발인가! 내 딸이 음귀가 씌어 귀신과 통정을 하였단 말이오!”

“죽었다고는 하나, 약혼자였습니다.”

“파혼하였소이다!”

“인연이라는 것이 그리 쉬이 끊기는 것이 아니지요.”

“여울라아아아아앙!!!”

목에 핏대가 선 단주의 고함에 경계를 서던 보표들이 몰려들었다. 그럼에도 여울의 음성은 차분하기 그지없다.

“두 가문의 어미가 함께 불공을 드리고, 함께 자라나 당연하게 서로 가시버시의 연을 맺었습니다. 오라비가 되고 낭군이 되는 것이지요.”

“하, 하지만.”

“그녀에게서 죽었다던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불같은 당신 성정 받아 내며 참고, 또 참으며 속으로 삭이는 여인이었겠지요? 결국엔 속이 썩어 피 토하며 죽지 않았던가요.”

아내의 이야기가 나오자 온통 붉은빛이던 단주의 눈동자로 일렁임이 찾아들었다.

“낭자 또한 그러했습니다. 아버지의 선택이었기에 묵묵히 받아들였으나, 그 속이 썩어 가고 있으니. 사는 것이 지옥이었겠지요.”

“나, 나는 그 아이를 위해서.”

“두 사람의 인연! 끊어 놓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소! 아무리 많은 재물이 있다 한들! 반역이란 명분의 덫에 걸리면 빠져나갈 틈이 없단 말이오!”

“역모라 하였습니까. 당신은 딸아이 대신에 상단을 택한 것입니다. 그 많은 배들 중 하나라도 내어 주었다면! 깊은 산속 땅 한 뼘 만들어 주었다면! 도령은 죽지 않았을 것이고, 두 사람 가난해도 웃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느릿한 여울의 목소리에 파리하게 혈색이 식어 버린 단주가 천천히 계단에 주저앉았다.

“…타무는, 떠난 것이오?”

“그는 떠났으나 아이는 남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피곤한 듯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단주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남다니. 의원의 말로는 맥도 뛰지 않는다던데, 헛배가 부른 것이 아니란 말이오?”

“살아 있습니다.”

“그럴 리가! 여봐라! 의원을 불러라! 당장 불러왓!”

단주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 대자 허겁지겁 의원이 달려왔다.

“가서 맥을 짚으시오.”

“좀 전에 짚었을 때에도 맥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살아 있다지 않느냐! 가서 짚으라면 짚을 것이지 무슨 말이 그리 많아! 죽고 싶은 것이냐!”

새파랗게 질린 의원이 바지춤을 움켜쥐며 해아영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잠시 뒤.

“매, 맥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맥이 두 개입니다!”

의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계단에 주저앉았던 단주가 몸을 일으켰다.

“무어라! 없던 맥이 다시 생겨나!”

충격으로 휘청거리는 단주의 몸을 시종이 부축하였다.

“귀신의 아이를 갖다니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드물게 그러한 일이 있다 고서에서 읽었습니다. 율국 천무태황의 아내가 천녀라고는 하나 인간이 아니니 귀신과 다를 바 없고. 북국의 유명한 재상 파진 또한 도화산의 귀녀를 아내로 아들을 두었습니다.”

“그만! 그만하시오. 모두가 사실인지 알 수 없는 설화들뿐이지 않소.”

“하면 지금 단주께서는 그 설화를 보고 계신 거네요.”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 버릴 듯 살벌한 단주의 시선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또한 천명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가슴을 펴고 머리를 세웠다.

“내 입에서 나간 모든 것은 언령이라. 뱉어 내는 순간 족쇄와도 같은 약조가 되는 것이다.”

타무, 약조대로 그대의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줄 터이니 편히 가시구려.

“아이가 죽으면 해아영도 죽습니다.”

소매 속에 든 사리의 무게를 느끼며 여울이 깊은 숨을 들이켰다.

“선택을 하셔야 할 겁니다.”

부드럽고 차분한 여울의 음성이 단주의 숨통을 조이며 쉬지 않고 압박한다.

“자식이라 하여 그 인생을 당신의 뜻대로 쥐고 흔들었으니 명줄을 끊어 놓을 요량이 아니라면, 그녀에게 그 아이 하나만큼은 허락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 그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사람이오? 아니면.”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단주의 깊은 한숨이 안타깝다.

“모든 아이가 자신의 화복을 손안에 쥐고 태어나나 반은 인간, 반은 귀신인 아이는 그렇지 못합니다. 팔자나 운명 자체가 없습니다.”

“하면….”

“타고난 식복이 없으니 굶을 것이요, 재복 또한 마찬가지, 인복이 없으니 도움을 구할 곳 없고, 명예가 따르지 않으니 관복 또한 없습니다. 타고난 수명이 정해지지 않아 수복조차 내다볼 수 없습니다.”

“비렁뱅이도 식복은 타고난다는데. 식복조차 없는 아이라면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것 아니오.”

“화복이라 하였습니다. 왜 그리 부르는지 아십니까.”

“…….”

“화와 복은 늘 함께하는 상생이기 때문입니다.”

“상생이라. 함께하는 양날의 칼!”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단주가 손뼉을 쳤다.

“복이 없이 태어난 아이니 화 또한 없을 터. 타고난 식복이 없다 한들 굶어 죽지 않을 것이요, 재복이 없으니 재물에 치여 괴롭지 아니하고, 인복이 없어 도움을 구할 데는 없으나 그로 인한 인재가 없고, 명예가 따르지 않는다 하니 역적으로 몰릴 일 또한 없다. 타고난 수명이 정해지지 않아 수복 또한 내다볼 수 없다! 하니.”

“후후후, 천수를 넘어설지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하나를 건네니 열을 넘어 백을 얻어 내는 단주의 모습에 여울은 거상의 면모를 발견하였다.

“하나가 더 있습니다.”

“하하하하하! 무엇이 더 있단 말이오! 이로도 충분한데.”

갑작스레 기운이 뻗친 단주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달려 나와 여울의 손을 부여잡았다.

“말해 주시오. 아이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 주시구려.”

“인간의 어미와 귀를 아비로 둔 아이이니. 그 세상도 둘로 나뉠 것입니다.”

“흐음, 귀신이 보일 것이라. 그런 뜻이오?”

여울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주가 호탕하게 웃음 지었다.

“하하하하, 안 보이는 것이 두려움을 만들지. 담이 크고 배포가 좋다면 장사치로는 최고가 아니겠소. 가십시다. 내 거하게 한 상 보라 이를 터이니 술이나 하십시다.”

“술은 되었습니다.”

“하하하, 거절 마시구려. 내 알아보니 밀린 술값이 여각비의 서른 배가 넘던데, 하하하.”

아, 망신살.

천으로 가린 얼굴이 화끈거려 여울은 숨이 턱턱 막혔다.

“흠흠, 술은 되었고 낭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 셈을 치르러 가겠습니다.”

“하하하, 그러시구려. 내 술상을 보아 놓을 터이니.”

안 마신다는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제 말만 하니 새삼 여울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인물이로다.

갑작스레 기세등등해진 단주가 별채를 벗어나자 여울이 계단으로 올라섰다.

해아영의 방문이 열리자 뜻밖에도 그녀가 무릎을 꿇은 채 여울을 향해 절을 한다.

“아니, 몸도 불편한데 그만하시지요.”

“감사합니다. 모두 들었습니다. 정말, 감, 사, 흑흑흑.”

“언제부터 깨어 있었습니까.”

“의원이 맥을 짚으러 들어오며 깨어났습니다.”

여울이 그녀의 몸을 일으켜 침상에 앉히자 해아영이 손을 잡아끌어 배에 얹었다.

“느껴지십니까. 아이가 놀고 있습니다.”

배 속에 잉어가 든 것처럼 꾸물꾸물 힘차게 움직이는 태동이 느껴졌다.

“아직도 아이를 포기하고 싶으십니까.”

조용한 물음에 해아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를 잃는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였습니다. 너무나 미련한 여인이지요.”

“후후후, 그대를 기다리며 굶어 죽은 이와는 천생연분이구려.”

웃고 있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조용히 지켜보던 여울이 그녀의 손에 타무의 사리를 쥐여 주었다.

“천도 후에 남은 것입니다.”

“흑, 흐윽, 윽윽윽.”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시면 후에 아이가 아비를 보러 갈 곳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흑흑, 감사합니다. 흑흑흑흑.”

사리를 안고 우는 그녀의 모습이 더없이 애처롭다.

긴긴 눈물 바람이 잦아들도록 해아영은 말이 없다.

침묵을 깬 것은 어이없게도 이랑군이었다.

불쑥 머리를 내민 이랑군이 해아영의 배를 쿡쿡 누르자 태아가 그의 코를 냅다 걷어찼다. 요괴 앞에서도 물러서는 법이 없는 이랑군이 기겁을 하니 여울은 웃음이 터져 버렸다.

“하하하, 요괴 잡는 이랑군을 걷어차다니. 아이의 기개가 대단합니다.”

“호호호, 이리 어여쁜 개가 요괴를 잡았나요?”

“개가 아니라 늑대랍니다.”

“아…. 개가 아니라 늑대. 참으로 장대합니다.”

해아영이 두려움 없이 이랑군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자 그가 머리를 뒤로 뺀다.

기분이 나쁠 만도 하건만 해아영은 해맑게 웃었다.

“절개 있는 짐승이로군요.”

“짐승이 아니라 벗이라지요.”

“벗이라. 낭군만큼이나 참으로 정겨운 말입니다. 우리 아이 태어나면 좋은 동무가 되겠다 싶은데,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 얻을 수 있을까요?”

쿠당, 탕탕!

소리에 돌아보니 부서진 문짝 너머로 달려가는 이랑군의 모습이 보였다.

“흠흠, 수놈이랍니다.”

귀신에도 놀라지 않던 해아영이 여울에게 속삭였다.

“혹여 제가 한 말 때문에.”

“흠흠, 문짝값은 사례비에서 제하는 걸로.”

“후후후, 걱정 마시어요.”

술렁이며 들이닥친 보표(保票)들을 에둘러 보낸 두 여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랑군이 여울랑을 닮았네요.”

“제가 그러하던가요?”

“후후후, 제 아비의 별명이 적귀랍니다.”

“적귀? 붉은 도깨비?”

흐음, 성을 낼 때에 얼굴이 시뻘겋게 붉어지는 것을 보니 그럴듯하다. 운몽산 열락을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나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돌아가신 조부 외에는 아비에게 호통 치는 이를 여태 보지 못하였으니. 제 세상이 좁다 하면 어쩔 수 없겠으나 소녀의 눈에는 그리 보였습니다.”

“그를, 원망하십니까.”

여울의 물음에 해아영이 고개를 젓는다.

“상단을 택하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딸린 식구가 한둘이 아니니까요.”

“섭섭지 않으십니까.”

“후후후, 여울랑께서도 아버지가 있으실 테지요.”

“저 또한 타고난 복이 없어 아비의 얼굴은 모른답니다.”

“쓸데없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아비보다 더 아비처럼 살뜰히 품어 주었던 스승이 계셨다지요.”

천명을 떠올리니 여울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개귀신’이라 불릴 만큼 지랄맞은 여울이었건만, 그 알맹이는 한없이 부드러워 순하기만 한 여인이로다.

“아이가 언제쯤 태어날까요?”

“글쎄요. 보통은 육삭둥이나 칠삭둥이으로 태어난다 들었는데 알 수 없지요.”

“열 달을 채워 나오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네요. 참으로 아는 것이 많으십니다.”

“세상이 넓으니 알아야 할 것도 많아 피곤합니다.”

“후후후.”

“요괴나 악귀들에게 귀동은 탐나는 먹잇감입니다.”

보통의 여인이라면 새파랗게 질릴 일이었으나 뜻밖에도 해아영은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죽은 연인을 붙잡고 사랑을 이어 갈 만큼 기개 있는 여인이니 그리 쉬이 놀라진 않을 터. 여울은 속 편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본가 전체에 결계를 치고 별채에 이중으로 결계를 만들어 두었으니 쉬이 들어서지는 못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혹, 달리 조심하여야 할 것이 있을까요?”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탯줄과 이불 등 출산에 쓰인 모든 것을 태워야 합니다. 아이의 향이 강하니 요괴들이 절로 꼬여 들게 될 겁니다. 요괴나 악귀들이 싫어하는 향들을 적어 드릴 터이니 향낭을 만들어 채우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여섯 살까지만 잘 버티면, 그들이 함부로 할 수 없을 만큼 강성하게 자라날 겁니다.”

“알겠습니다.”

“또한 인간의 아이와 달리 타고난 천성이 없으니 이는 훈육으로 만들어 주셔야 할 겁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유명한 도선들에게 맡겨 기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고려하여 보겠습니다.”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해아영의 모습에 여울은 천명을 떠올린다.

‘말끝마다 토 달고 따지던 나를 가르치시느라 무던히도 힘이 드셨겠구나.’

사부님이 떠난 자리는 모두 후회와 미련뿐이다.

“출산을 할 때까지 머물러 달라 청하면 누가 되겠지요?”

“후후후, 기다리시는 할머니가 있어 가 봐야 하지만 이랑군을 두고 가겠습니다. 문짝 부순 값은 해야지요.”

“이랑군을요? 그리 아끼시는 벗을 두고 가시겠다고요?”

“네.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액막이가 되어 줄 겁니다.”

화산으로 갈 건데, 백원후라면 질색을 하는 이랑군인지라 데려갈 수도 없으니 차라리 잘되었다.

“감사합니다.”

“후후후, 그럼 저는 단주님과 할 이야기가 남아서.”

해아영이 일어서는 여울의 손을 붙잡았다.

“아버지를 만나시면 청옥패를 받아 가시어요.”

“옥패요?”

“아버지의 책사들이 쓰는 통행패가 있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숙식에 긴요하게 쓰일 겁니다.”

아하! 대륙에 퍼져 있다는 여각들의 무료 숙박권이로구나. 생각지도 못했던 횡재에 여울이 활짝 웃었다.

“그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후후후, 숙박은 물론 술과 요리에 말까지 무료라지요.”

거상의 여식은 마음 씀씀이부터가 남다르구나.

신이 난 여울이 인사를 마치고 별채를 나섰다.

“이랑구우우우운!”

별채 담을 뛰어넘은 이랑군이 여울 앞에 나타났다.

“난 화산으로 갈 건데 너도 갈래?”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이랑군이 이빨을 드러냈다.

“어쩌나, 난 할머니 보러 화산에 꼭 가야 하는데….”

크르르르르르르.

“싫다고? 그럼 여기서 아이가 잘 태어나도록 좀 지켜 줘. 할머니 잠시 보고 나면 반야를 보낼 테니까.”

크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잇몸까지 드러내는 이랑군의 볼을 쭉 잡아 늘인 여울이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그러게 남의 집 문짝은 왜 부수고 지랄이셔!”

크르르르르르.

“문짝값 내 줄 테니 화산 갈래?”

미움은 좋음보다 강하다. 여울과 떨어지는 것이 못마땅한 이랑군이지만 백원후의 올무에 걸렸던 기억이 끔찍한 탓에 결국은 물러섰다.

이랑군에게 해아영을 지키라 명하고 여울은 나비처럼 가볍게 단주가 기다리고 있을 접견실로 향했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 길어 이리 늦으셨소!”

문을 열기가 무섭게 단주가 그녀를 답삭 안아 들었다. 허리뼈를 부술 듯이 숨통이 막혀 왔다.

이런 우라질!

“어허, 사내 몸이 이리 야리야리하여 요괴들을 어찌 때려잡았을까.”

“내, 내려 주시지요.”

화기가 치밀어 저도 모르게 손에서 도력이 피어오른다.

다행히도 단주는 이내 여울을 놓아주었다.

“내 기다리다 목이 빠져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었소.”

“아…. 예.”

너른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은 설마, 반야?

“하하하하, 딱 한 잔만 하라 권하였더니 한 모금 마시고 저리 되었지 뭐요.”

“아, 그러한가요.”

“하하하, 자 이리 앉으시오.”

탁자에 앉은 여울이 코를 고는 반야를 쳐다보았다. 수정궁에서도 단 한 모금 마시지 않던 반야가 어찌 이리 떡이 되었을까.

‘본체가 작은 문조이니 한 방울에 뻗었겠지.’

“자, 자자. 한 잔 받으시구려.”

가득히 술을 부어 준 단주가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자, 쭈욱 드시고. 또 한 잔!”

돌림 노래처럼 ‘또 한 잔’을 외치기 시작하니 시종들이 술동이를 들어 나르느라 문지방이 닳는다. 그렇게 퍼마신 것이 어느새 열 동이가 넘어섰다.

“계집도 없이 술값만 오십 냥이라기에 왜 그리 많이 나왔는가 하였더니, 하하하하.”

단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거참, 술을 잘하시는구려. 이 몸도 어지간해선 밀리지 않는데, 커억.”

“자, 그럼 미루었던 셈을 치러 볼까요?”

얼큰하게 술에 취한 여울이 허리춤에서 주판을 꺼내 들었다.

“하하하, 장사치도 아니고 그 유명하신 도사님이 주판도 들고 다니시오?”

“하하하, 셈을 치를 일이 워낙에 많아서 말이지요.”

주판알을 튕기는 여울을 보며 신기한 듯 단주가 턱을 괴고 구경한다.

“자, 우선 사건 접수비 닷 냥 일곱 전에.”

“상담비 열닷 냥 세 푼”

“금돼지 털 아흔아홉 냥, 아홉 전, 아홉 푼.”

“결계는…. 깔끔하네. 백오십 냥.”

촤르륵! 촤르륵!

주판알 구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천도식이 쉰네 냥 여섯 전.”

“출산용 보호계가 이백 냥.”

“부적이 하나, 둘, 서이…. 총 열다섯. 합이 칠십 냥.”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는 액수는 이미 약조했던 천 냥을 훌쩍 넘어서 버렸으나 단주는 그저 웃고 있을 뿐이다.

“겨울 출장비는 두 배니까. 삼백 냥. 이랑군이 부순 문값은 몸으로 때울 테고….”

주판알을 튕기던 여울이 단주의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낚아챘다.

“이건 개평!”

꾸우, 꾸우우, 꾸우우우우.

주먹만 한 회색 뭉치가 금세 호박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팔다리가 쑥쑥 뻗어 나왔다.

“대체 이건 무엇이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둘씩은 달고 살지요.”

“그, 그게 대체 뭐란 말이오.”

답을 하면서도 주판알을 튕기는 여울의 손은 쉼이 없다.

“환이라 하는 요괴라오. 인간의 근심과 같은 안 좋은 감정을 먹고 살지요.”

소멸문을 외우자 회색 뭉치가 푸른 불꽃에 휩싸여 타오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환의 비명이 요란하다.

끼이이, 끼이, 끼이이이.

천명이 여울의 환을 떼어 주었을 때처럼 벌떡 일어선 단주가 접견실을 뛰어다니며 몸을 털어 대기 시작했다.

“잘 보아 주오. 어딘가에 또 붙은 건 아닌지.”

“다 떼어 냈습니다. 자, 계산 마저 하실까요?”

“어찌 저리 망측한 것이 붙었을꼬.”

“따님 걱정이 크셨던 게지요. 자, 총 이천삼백오십 냥 팔 전 칠 푼에서. 에누리 떼고 이천삼백 냥!”

멍하니 쳐다보던 단주가 여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에누리에 개평에 가격 후려치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구려. 흥정을 이리 잘하니 상단 하나 떼어 줘도 무리가 없겠어. 나와 함께 일해 보지 않으시련가!”

“사양하겠습니다. 오십 냥은 여각의 외상값으로 제하셔도 무방합니다.”

“술까지 잘 마시니 상인으로 제격인데.”

“술 좋아하는 요괴도 많은지라. 흠흠, 아무튼 이리저리 가격을 맞추어 봐도 이천 냥입니다.”

어딜 가나 그녀의 재주에 붙잡아 두려는 수작들이 화려하다. 그러나 여울에게는 가야 할 길이 있고 지켜야 할 도리가 있었다.

“장사치가 싫다면 우리 아이 스승이 되어 주어도.”

“유모는 사양입니다. 자! 이천 냥.”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단주가 다시금 턱을 괴고는 여울을 쳐다봤다.

“현금으로 원하는가. 아니면 은이나 금괴? 장거리 여행을 하려 한다면 어음도 나쁘지 않네만.”

“오백 냥짜리 한 장, 백 냥짜리 석 장, 오십 냥짜리 넉 장. 하여 천 냥은 어음으로 주시고.”

“그리고?”

서랍에서 종이와 인장을 꺼내어 부지런히 어음을 써 내려가던 단주가 고개를 든다.

“나머지는 무엇으로 원하는가.”

“남은 천 냥은 옥패로 받고 싶습니다.”

“옥패? 청옥패를 말하는 겐가?”

“예. 객지로 움직이는 일이 많은지라.”

“푸하하하하하하! 그렇지. 그래, 그래야지.”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린 단주가 서랍에서 무언가 꺼내어 내밀었다.

“내 사례는 천 냥이면 족할 테고, 이 홍옥패는 딸아이의 사례일세.”

분명 ‘청옥패’라 들었는데, 설마 숙식만 되고 술과 요리는 제외되는 건가?

“아내의 것이었다네. 유목민으로 자유로이 살다 내게 시집와 꽤나 답답했겠지. 내 욕심에 집 안에만 가두어 놔서 딱히 쓸 일도 없었지.”

“어…. 저는 청옥패를 달라 했습니다만.”

“나와 딸아이 것도 같은 것이라네. 숙식 숙박만 치르는 청옥패와 달리 제일상단의 문양이 있는 모든 상점의 물건이 무료로 지급될 것이네.”

가족들만 쓰는 것이라니 평범한 이였다면 감사한 마음이 앞설 것이다. 하나 천명의 제자로, 요신 백원후를 할머니로 둔 여울의 셈법은 조금 다르다.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고 마시든, 또 어떠한 물건을 사든 단주께선 알게 되시겠네요.”

“하하하하, 뭘 그렇게까지. 그저 잘 지내고 있다 마시고 먹어 주면 될 것을.”

“제 주량은 익히 보셨지요? 무르기 없깁니다.”

“하하하하하하하, 열심히 벌어 둘 것이니, 양껏 든든하게 드시게나.”

많이 먹으라 웃는 모습을 보니 백원후가 떠오른다.

‘할머니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구나. 한 번은 다니러 가야겠지?’

여울은 홍옥패를 받아 소매 속에 넣었다.

“호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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