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담 여울랑 2권
18. 팔 년 후
달님조차 숨어 버린 깊은 밤.
어둠은 죽음의 그림자처럼 숲 전체를 덮어 버렸다.
‘나타나라. 나타나라.’
눈 쌓인 은행나무 가지에 걸터앉은 여울의 숨결이 하얗게 흩어진다.
‘우라질! 얼어 뒈지겠네.’
유시를 알리는 징 소리를 듣고 입산하여 벌써 세 시진.
‘나타나라. 나타나라. 이러다 날 새겠다.’
결계를 펴 추위를 피했던 여울은 반 시진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 때문에 결계를 거둬야 했다. 결계 밖으로 미끄러지던 눈들이 이제 그녀의 머리와 어깨 위로 쌓이기 시작했다.
‘계집 쫓아 여기까지 왔을 것 아니냐. 응? 나타나라. 아, 춰춰, 추어. 망할 색귀 자식.’
욕설을 염불처럼 읊어 대곤 있지만 폐가를 향한 번뜩이는 눈동자만큼은 흔들림이 없다.
나흘 전, 반야가 물어 온 일거리는 구주 제일상단의 무남독녀 귀태 사건이었다.
“귀신 하나 잡는 거 일도 아니잖아.”
“반야, 소리가 너무 크다.”
여울의 일행이 구주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 곳은 제일상단에서 운영하는 여각이었다. 여각 전체가 일주일 내내 단주의 무남독녀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보아하니 단주의 하나뿐인 여식이 색귀에게 농락당하여 귀신의 아이까지 가진 듯한데.
“대륙 오대 상단 중 하나라고. 대륙 전체에 소유 여각이 어마어마하다는데?”
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여울이 시큰둥하게 술만 마셔 대자 반야가 가자미눈을 뜨고 다가앉았다.
“천 냥 준대. 천 냥!”
“쌀 한 섬에 닷 냥이니 흐음, 이백 섬이라…. 기와집이 세 채로군.”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여울의 눈동자로 한 줄기 섬광이 스쳐 간다.
“한데 나서는 사람이 없다?”
“유명한 무녀며 도사들까지 줄을 잇고 있는데.”
“그런데?”
“천도식도, 축객령도 아무 소용없다네. 하루 이틀 지나면 다시 나타난다는 거야.”
“돈만 날렸겠군.”
여울의 말에 반야가 고개를 저었다.
“장사꾼이 손해 보는 것 봤어? 목숨을 내놓은 이가 한둘이 아니라는데?”
“그런데, 넌 나보고 목을 걸고 그 일을 하라는 거냐. 지금?”
여울의 작은 상처에도 호들갑을 떨며 어미 새처럼 잔소리를 쏟아 대던 반야는 어디로 간 건지. 요즘은 여울보다 더 돈독이 오르셨다.
“왜 이러실까. 울주 금돼지 요괴를 퇴치한 게 누군데. 천명대사의 제자로 대륙 최고의 퇴마사! 여울랑 아니신가!”
‘사부님….’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천명의 죽음 이후 팔 년이 흘렀다. 친부와도 같은 그의 죽음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여울은 아직도 입이 쓰다.
‘흐르는 세월은 대하의 물살보다 빠르다던데, 나의 시간은 그날에 멈추어 있으니 괴로움이 파도와 같구나.’
스물두 살의 여울은 ‘퇴마사’라는 거창한 이름보다 ‘요괴 사냥꾼’으로 불리길 원했다.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요괴 사냥꾼이 되었으나 정작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지 못했다.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무술로 단련된 근육이 사내 못지않고 풍만한 가슴을 변형술로 가려 버렸다.
사슴 같은 눈동자를 빼고는 어느 모로 보아도 계집 같은 구석이 없다. 게다가 이름에 떡하니 사내 랑(郞) 자를 붙이니 아마 계집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소문이 대륙 널리 퍼지면 그가 먼저 날 찾아 주지 않을까.’
술병의 주둥이를 움켜쥔 여울은 그날 이후 사라져 버린 묵을 떠올렸다.
그를 찾아야 사부님의 죽음에 대한 의문이 풀리리라.
“안 해.”
“왜! 안 해. 귀신 하나 처리하는 데, 천 냥이라고. 천 냥이면 서너 해쯤은 일 안 하고 놀아도 되는데!”
“한겨울이잖아. 추워. 싫어.”
“여울아!”
여울이 일어서자 침상 밑에 누워 있던 이랑군이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문가에 누워 버렸다.
“왜 안 해? 금돼지보다 열 배를 쳐준다는데.”
“피곤해.”
침상에 벌러덩 누워 버린 여울이 눈을 감았다.
‘어디에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사라져 버린 거지? 사부님의 죽음과 연관이 있는 걸까? 나처럼 자책하고 있는 걸까?’
지난 팔 년, 여울은 묵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시간이 흐르는 사이 물음 또한 겹겹이 쌓여만 갔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알까? 사부님을 죽인 요괴의 정체는…. 할머니가 모르는 요괴가 있단 말인가?’
요괴와 악귀들과 싸우며 죽음에 가까울수록 의문은 더욱 선명하게 그녀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아니야. 할머니는 분명 무언가 알고 있어. 왜 말해 주지 않는 걸까.’
“여울아~.”
“돼지 잡느라 한겨울 바닷물에 빠져 얼어 뒈질 뻔한 게 한 달 전이야. 아직도 뼈마디가 쑤신다고.”
한숨처럼 흐트러지는 여울의 목소리에 반야가 불붙은 참새처럼 바싹 다가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울주에서부터 놀고먹으며 지낸 지가 벌써 보름이셔.”
“끄으응.”
잔소리를 피해 돌아누워 버리니 반야가 문조로 변해 여울의 이마를 쪼아 댄다.
“구주에 온 지 벌써 일주일이라고. 돈도 다 떨어졌어. 술값은 다 어쩔 건데!”
“돼지 잡고 받은 돈 있잖아.”
“어머머머! 그건 홍주성 굴 구렁이 잡은 값이랑 합쳐서 송이 기루 사 줬잖아! 자그마치 사백오십 냥이라고!”
그간 요괴며 악귀들을 퇴치하여 받은 금전들은 모두 개천 아이들의 주름진 인생을 펴 주는 데 쓰였다.
대장간 노비가 된 먹쇠에게는 대장간을, 한집으로 팔려 가 종살이하고 있던 칠석과 분례는 혼인시켜 집과 농사지을 땅을 사 주었다. 숯가마에서 일하던 돌석은 숯 장사를 하고 싶다 하여 한밑천 뚝 떼어 주었다.
‘사람이 소 한 마리 값도 안 되는 빌어먹을 세상이라니.’
그 마지막이 유곽에 팔려 간 송이였다. 천명의 월광석을 삼키고 명줄 늘렸던 지독하게 운 좋은 개천의 막둥이.
“유곽에서 빼 줬으면 됐지. 기루는 뭐하러 사 준대.”
“덕분에 팔이 없어 구걸하던 개똥이와 첩으로 팔려 갔던 순이를 데려올 수 있었잖아.”
“췟!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 하는 걸 몰라? 정말 몰라서 그래?”
“아우! 문조가 아니라 까치였던가. 시끄러워 죽겠네.”
“왜! 애꾸눈 개수한테도 떡하니 기와집 하나 지어 주지 그랬어?”
“사부님이 날 사 오시며 치른 값이 소 다섯 마리야. 노름으로 다 날리고 아이들 다 팔아먹고, 풍년이까지 팔아먹었는데, 뭘 해 줘.”
돈벼락을 맞아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성품이 포악하니 살을 피할 수 없고, 탐욕에 눈이 어두우니 결국에는 제 살마저 깎아 먹을 위인이야.”
“세상 이치에 그리 빠삭한 여울랑께서 어찌 그리 오지랖은 하해와 같이 넓으실까. 응?”
바가지 긁는 마누라처럼 일각도 쉬지 않고 쪼아 대는 반야 때문에 여울은 머리가 아프다.
“그래도 한 스무 냥쯤 남지 않았나?”
“네가 지금까지 마신 술값만 해도 서른 냥이셔.”
개천 아이들을 구제한 뒤로도 묵이 나무 팔아 하던 구휼을 대신하느라 주머니 두둑한 날이 없다.
“흥! 송이한테 어음 하나 끊어 보내라 하든가!”
“안 돼.”
“그럼 어쩔 거야. 이제 한 푼도 안 남았네요.”
벌어들이는 금전은 모두를 구휼에 쓰는 여울이었으나 그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는 법이 없었다.
“그러게 돈도 안 되는 화전민들 장산범은 뭐하러 잡아 줬대?”
“와호 때문에 농사를 못 짓는다잖아.”
“흥! 그러게 겨울은 수정궁에서 보내자니까. 굳이 우겨서 여기까지 와 놓고는! 말도 더럽게 안 들어.”
반야의 등쌀에 밤새 시달린 여울은 결국 아침 일찍 술도 깨기 전에 제일상단 대문 앞에 섰다.
제일상단은 구주를 본거지로 대륙 전체에 만여 개의 지점을 운영하는 거대 상단인지라 본가의 위엄이 황궁 못지않았다.
“어마어마하구나.”
“어우! 술 냄새. 냄새 장난 아니야.”
반야의 타박에 여울은 얼굴을 가렸던 천을 끌어 올렸다.
‘크아, 할머니가 만든 화주는 이렇지 않은데. 하아, 마시고 싶다.’
한겨울에도 푸른빛을 띠는 정원수들은 요신각을 연상케 했으며, 본관인 삼 층의 목조 건물이 나오기까지 기와를 얹은 건물들만 여섯 채를 지나쳤다.
곳곳에 배치된 무사들의 날카로운 시선이 못마땅한 듯 반야가 투덜거렸다.
“무슨 무사들이 이리 많아. 귀신 하나 잡지 못하면서!”
긴 망토로 온몸을 가린 채 두 눈만 드러낸 여울, 백면서생 차림의 반야와 호랑이만 한 늑대의 조합은 아무리 보아도 불협화음이다.
“반야, 내가 한 말들 잘 기억하고 있지?”
“알아서 할 테니까 입 좀 다물어. 말할 때마다 술이 쏟아지셔.”
“이리 오시지요. 단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울 일행을 안내하던 노인이 난처한 듯 그녀의 곁에 선 이랑군을 쳐다봤다.
“송구하오나. 개는 함께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여울이 입을 떼기도 전에 반야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개가 아니라 이랑군입니다. 늑대지요.”
“아! 엄청난 크기가. 역시! 늑대였군요.”
신기한 듯 이랑군을 쳐다보던 노인이 해맑게 웃었다.
“늑대도 아니 됩니다. 주군의 천식이 심한 탓에 털 달린 것들을 피하라는 의원의 말이 있은지라.”
‘망할!’
난처해진 여울의 시선이 반야에게로 향했다.
반야가 어깨를 으쓱이며 이랑군을 턱으로 가리켰다.
‘둔갑을 못 하니 어쩔 수 없잖아. 여기서 기다리라 해.’
어쩔 수 없이 여울이 이랑군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이랑군, 여기서 기다려. 금방 올게.”
술 냄새가 고약했던지 후다닥 머리를 뺀 이랑군이 킁킁거리며 고개를 흔든다.
“저…. 묶어 두지 않아도 될는지.”
빠드드드드득.
여울의 이 가는 소리에 반야가 노인의 팔을 붙잡았다.
“하, 하, 하. 묶어 두실 필요는 없습니다. 겁이 많아 쥐도 못 잡는걸요. 그렇지?”
반야가 머리를 쓰다듬자 이랑군이 털을 세우며 이빨을 드러냈다. 치켜 올라간 이랑군의 볼살을 잡아 살포시 이빨을 덮어 주며 반야가 천연덕스레 웃었다.
“천치야, 개처럼 목줄 달고 싶어? 이마에 주름 펴라고.”
휙 머리를 채어 반야의 손에서 벗어난 이랑군이 기둥 옆에 엎드려 바닥에 머리를 댔다.
“얌전히 있을 겁니다. 걱정 마십시오. 자, 주군께서는 안으로.”
반야가 기분 상한 여울의 등을 접견실로 떠밀었다.
서역의 비단 휘장에 남주의 가구들로 채워진 접견실의 웅장함에 입이 떡 벌어졌다.
“어서 오십시오. 여울랑.”
단주라기보다 산적에 가까워 보이는 거구의 사내가 책상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섰다.
“저는 구주 제일상단주 ‘마석우이’라고 합니다.”
이미 기분이 상해 버린 여울은 단주의 인사는 들은 척도 않고 의자에 털썩 앉아 버렸다.
‘털 달린 것에 기침이 심하시다더니 양털로 만든 양탄자는 어찌 깔고 계신가. 췟!’
당황한 반야가 여울을 대신하여 인사를 건네곤 바싹 다가앉았다.
‘뭐 하는 짓이야. 예의 없게.’
‘예의는 저쪽이 먼저 씹어 드셨어.’
‘사람들은 원래 개를 집 안에 들이지 않는다고.’
‘아…. 진짜! 개 아니라니까.’
살벌하게 오가는 반야와 여울의 눈싸움에 단주가 헛기침을 했다.
“혹, 오시는 길에 불편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저의 종복들이 무슨 실수라도….”
“아, 아닙니다. 주군께서 조식을 드신 것이 체하셔서.”
“아…. 그러합니까.”
반야의 말에 여울이 보란 듯이 헛구역질을 시작했다.
“우웨에에에에. 에엑! 우에에에엑, 우에에에에에!”
“의, 의원을 부를까요.”
당황스러운 단주의 표정에 여울이 손을 들어 올렸다.
“주, 주군께서 괜찮으시답니다.”
주먹을 쥐었다 펴며 까닥이자 반야가 헛기침을 했다.
“거래를 마치고 돌아가 쉬고 싶으시다네요. 하, 하, 하.”
“그, 러시지요.”
미치광이 같은 행동에 의심 가득한 단주의 시선이 여울을 훑어 내린다.
“한데, 그 유명한 여울 님이라는 증좌가 혹여 있으신지.”
“하하하, 울주성주에게 받은 증서가 여기.”
“문서들은 워낙에 가짜들이 많은지라. 며칠 전 다녀갔던 도사 하나도 울주 금돼지를 잡았다 하던데.”
‘췟! 장사치라 의심이 쇠 벼룩만큼이나 많구나.’
입을 꾹 다문 채 단주를 째려보던 여울이 허리춤에서 허리띠를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촤르르르르륵.
신기한 듯 허리띠를 바라보는 단주의 눈동자 속에 의심은 사라지고 존경심이 들어찬다.
“오…. 이것이 정녕.”
가죽을 꼬아 만든 허리띠에는 얼마 전 잡은 금돼지 요괴의 송곳니부터 시작하여 와호의 발톱, 누룩치의 뿔 등 그간 잡은 요괴들의 일부가 줄에 연결되어 있었다.
“잡은 것들은 모두 이리 소장하고 계신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악귀들은 소멸하면 그뿐이나, 요괴들은 신체의 일부가 다른 요괴를 잡는 데 긴요하게 쓰이는 경우가 종종 있지요. 그 때문에 주군께서 필요한 부위들을 모아 놓은 거랍니다.”
“의심을 한 것에 대하여 정중히 사죄드립니다.”
단주의 사과에도 여울은 거만하게 손을 들어 올릴 뿐.
‘한 마디라도 뱉었다가는 정말 토할 것 같다.’
토하는 척이 척이 아니었으니, 새벽까지 마신 술이 목까지 차올랐다.
‘아…. 울렁거려.’
여울의 안색이 파리해지자 반야가 허리띠를 그녀에게로 밀어내며 웃었다.
“하하하, 주군께서 따님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십니다.”
“아, 그래야죠. 말씀을 드려야죠. 그것이.”
갓 열일곱이 된 단주의 무남독녀 마해아영은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온실 속의 꽃처럼 길러졌다.
“아내를 꼭 닮은 딸아이가 타박받을까 재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비의 마음을 알았는지 딸아이는 악기와 서예 그리고 요리까지 못 하는 것 없는 팔방미인으로 자라 주었지요. 이 옷도 딸아이가 손수 지어 준 것이랍니다.”
열다섯 되던 해에 일품상단의 장자 타무와 약혼하였으나 넉 달 전, 상단이 역모에 휩싸이며 파혼하게 되었다.
“일이 시작된 것은 석 달 전부터였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잠이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깊은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습니다. 의원들도 원인을 모른다 하고.”
섭식에 장애가 생기니 나날이 말라 가는 해아영은 깨어날 때마다 자살을 시도하였다.
“한 도사의 말에 터를 옮겨야 낫는다 하여 온천이 있는 별장에 한동안 묵었으나 그곳에서도. 허어, 망측하여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한 달 전부터 배가 불러 오기 시작한 것이다.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굿을 해도 소용없고.”
잠자코 듣고 있던 여울이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자 반야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식솔들은 어찌 되었는지, 주군께서 물으십니다.”
“식솔이라면….”
“일품상단 말입니다.”
“아, 역풍에 할 수 없이 파혼은 하였으나 오랜 지기인지라. 식솔들의 시신은 수습하여 조용히 장례를 치렀습니다. 하니 제게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약혼자였던 장자의 시신도 수습하였습니까?”
“타무의 시신은 찾지 못하였습니다. 용케 살아 도망쳤는가. 사람을 풀어 찾고 있습니다.”
단주의 말에 반야의 시선이 여울에게로 향했다.
“타무란 자의 사주를 달라 하십니다. 사주단자가 오갔을 터이니 알고 계시겠지요.”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녀석인지라 보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단주가 불러 주는 생년월일시를 들은 여울이 손가락을 세며 그의 운명을 읽어 냈다.
‘모든 화복이 열여덟을 기점으로 흩어진다.’
여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반야가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이만 가 보겠다 하시네요.”
“아니, 딸아이도 보지 않으시고 그냥 가십니까.”
여울이 고개를 저으며 반야에게 손짓했다. 곧 반야가 단주에게 말을 전했다.
“셈은. 일이 정리된 후에 하자 하십니다.”
“예…. 에, 그리하시지요.”
낮도깨비 같은 여울이 후다닥 사라지고 나자 접견실에 남은 것은 온통 술 냄새뿐이다.
귀신과 통정을 하는 귀접 사건의 경우 대부분이 처녀 총각으로 죽은 손각시나 몽달귀신 같은 지박령의 짓일 가능성이 높다.
지박령의 경우는 그저 주거지를 옮기면 끝이 나지만 온천까지 따라왔다 하니 지박령이 아닌 추적령.
‘상대의 기를 빨아먹는 단순 색귀들은 아이를 만들지 않는다.’
내내 잠에 빠져 있던 여인이 깨어나면 죽으려 했다니, 그럼 귀신을 따라가겠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역시 죽은 일품상단의 장자?’
천도에 실패한 이유는 분명 시신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일 테고.
‘파혼. 역모. 신의를 저버린 것에 대한 복수였다면 여인은 진즉에 죽었을 것이다. 정을 통하는 것이야 총각 귀신이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왜 굳이 귀태를….’
요괴나 악귀나 어쩌면 저리도 구구절절 사연들이 많은지. 인간들보다 더해.
“숨겨진 이야기는 직접 듣지 뭐!”
사건을 접할 때마다 여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 내기 위해 머리가 깨져 나간다.
“일단 붙어 보자!”
여울은 반야에게 일러 제일상단에 요구 사항을 통보했다. 또한 이랑군을 시켜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 큰 나무를 가까이 둔 폐가를 알아보라 일렀다.
은행나무 위에 눈사람처럼 앉아 있던 여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얼어 버린 콧물을 훔치는 그녀의 시선은 허물어져 가는 폐가에 또렷이 박혀 있다.
드드득. 드득. 득득.
쉴 새 없이 이를 부딪치며 속눈썹이 하얗게 얼어붙고서야 색귀는 모습을 드러냈다.
“와, 다다다, 드득, 구구, 나!”
이랑군이 뚫어 놓은 지붕 아래 비단 이불에 싸인 제일단주 여식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사방으로 뿌려 놓은 잿가루에 발자국이 찍히는가 싶더니 이내 사르륵 이불이 벗겨졌다.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빌어먹을 색귀야!’
만삭의 몸을 드러내며 허벅지를 벌리는 해아영의 얼굴에는 기쁨에 찬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하아, 아아아. 서방님….”
드물게 귀접을 즐기는 사내들이 있지만, 여인의 경우는 대부분이 강간의 형태를 띠기에 고통스럽기 마련인데.
‘뭐가 저리 좋은 거지?’
민망할 정도로 교성을 내지르는 해아영은 더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교접은 분명하나 그 대상의 형태가 불분명하니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미친년이 혼자 다리 벌리고 지랄하는 꼴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이고 싶은데, 이렇게 날 이승에 묶어 두어야 했나요? 하아, 아아아.”
달뜬 신음 소리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뜨끈하게 한다.
‘누굴까. 대체 어떤 인연이었기에 삶을 버리면서까지 붙잡으려 한 것일까.’
이상하게도 여울은 묵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락.
발치에 있던 눈덩이가 떨어져 내리자 여울이 묵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렸다. 다행히도 폐가 안의 연인들은 눈치채지 못한 듯 해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아아. 보아요. 당신의 아이가 이리 자라고 있어요. 타무.”
옳거니! 수복이 끊겨 버렸던 그자로구나!
여울은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올무에서 풀려난 짐승은 두 번 다시 같은 올무를 밟지 않는다. 이대로 놓쳐 버린다면 그녀로서도 색귀를 잡을 방도가 없다.
“금이 나라 가라 수니 아르사.”
주문을 외우니 화살이 금빛으로 부서져 내렸다.
‘기회는 단 한 번.’
단궁의 줌통을 밀어 깍짓손을 비틀자 부서져 내렸던 화살이 희미한 형체를 띤다.
‘지금이닷!’
피슝!
“이랑군!!!”
단발의 외침과 함께 여울은 서른 자 높이의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크르르르르.
앞발을 치켜든 이랑군이 문을 부수는 동시에 날아간 부적들이 폐가의 곳곳에 박혀 들었다.
“화라사!!!”
폐가는 순식간에 노을처럼 붉은 기운으로 휩싸여 흡사 불에 타오르는 듯 보인다.
“끼아아아아아아악!”
크르르르르르.
살기를 띠며 이를 드러낸 이랑군의 시선이 머무는 곳.
비명을 질러 대는 해아영을 가로막은 이는 마치 물과 같은 형질의 일렁임을 가진 그림자였다.
“무, 무슨 짓을 하는 건가요! 다, 당신. 아버지가 보낸 퇴마사인가요? 그를 해치지 말아요. 제발.”
여울에게 다가서는 해아영을 막아선 형체가 비단 이불을 들어 그녀의 나체를 가려 주었다.
“에취! 킁킁. 우라질, 얼어 뒈질 뻔했네.”
뜬금없는 욕설에 해아영의 눈물이 멎어 버렸다.
“누, 누구세요. 돈이라면 제가 더 많이 드릴 터이니. 그를, 놓아주세요.”
“흠흠, 어우, 추워.”
스승님이 살아 계셨다면 무언가 가슴에 콕 박힐 만한 명언을 하였을 텐데. 뒤늦게 멋있는 척을 하기엔 쏟아지는 콧물을 막을 재간이 없다.
“훌쩍. 이보오, 낭자.”
“그를, 살려 주세요.”
“이미 죽은 자가 아니오. 안 그렇소. 타무 도령?”
분명하게 이름을 명명하니, 물그림자처럼 일렁이던 투명한 형체가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얼굴과 팔다리가 나뉘고 죽기 직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니 꽤나 보아 줄 만한 미남자로다.
“죽음이 그리 참담하진 않았는가 보오. 천도할 때나 보일 모습을 갖추고 있으니.”
“내게 쏜 살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아…. 화살? 해아영 낭자에게 쏜 것을 그대가 가로막은 것이지.”
타무가 알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잡으러 온 것일 터인데, 어찌 그녀를 해하려 한단 말입니까.”
“글쎄, 왠지…. 그대가 막아 줄 것 같아 그리했지.”
“어째서.”
“보통의 색귀라면 기운을 빨아들이는 데에 만족할 터인데, 아이까지 갖게 하였으니 연유가 있지 않을까, 해서.”
“색귀라…. 사람들은 그리 부르는군요.”
슬픈 듯이 해아영을 품어 안는 타무의 모습이 어찌나 애틋해 보이는지 코끝이 짠하다.
“흠흠, 듣기 거북하다면 잘생긴 몽달이라 해 줄까.”
“되었습니다. 누가 어찌 부르든 상관치 않습니다. 제가 맞은 활이 무엇입니까. 이대로 소멸되는 겁니까.”
“본체를 찾지 못한다면 또다시 나타날 터이니 지금 잠시 사라진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면….”
“화살은 금돼지 요괴의 털을 태워 만든 것이니, 인간의 몸에 박히면 한 달 보름 복통으로 끝이 나겠지만. 화성을 띠는 요괴에게는 독이 될 것이요. 또한 은형귀들에게는 그 형태를 숨길 수 없는 표식이 될 테지.”
“흑흑흑, 그를 해치지 말아요. 하나뿐인 낭군입니다. 귀신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게는 타무 님뿐입니다.”
해아영이 다시 울음을 터트리자 타무가 그녀를 품에 안아 달랬다. 그 모습에 여울은 그녀를 대신하여 벌을 서던 묵의 모습을 떠올렸다. 한숨이 나온다.
“파혼을 하였다 들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가시버시로 내정되어 있던 여인이었습니다.”
“혼세라. 세상이 어지럽고 난폭하여 지옥과 다름없다 한들 아직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벽이 완고하다오. 이렇게…. 얼마나 더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었소.”
추위를 느끼는지 타무가 몸을 떨자 해아영이 안간힘을 쓰며 끌어안았다.
“어찌 된 것입니까. 그의 몸이 너무나 차갑습니다.”
몸과 달리 그의 입술에서는 뜨거운 김이 흩어져 나온다.
“금돼지는 수성을 띠는 요괴이기에 몸이 차게 느껴지는 것이고, 도주를 막기 위해 불의 결계를 편지라. 극과 극이 충돌하는 것이오.”
“아이는, 우리의 아이는 어찌 되는 것입니까.”
타무의 물음에 여울은 망설였다. 색귀와 정이 쌓여 어쩌다 귀태를 한다 하여도 제대로 태어나기가 어렵다.
“태중에 죽임을 당하거나 혹여 운이 좋아 태어난다 한들 귀신도 인간도 아닌 아이의 삶은 비참할 뿐이오.”
깊은 숨을 들이켠 여울이 덤덤하게 물었다.
“본체는 어디에 두었소.”
“말하지 말아요. 타무! 제발요. 함께 데려갈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라도, 이렇게라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요.”
“해아영, 이리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오. 구천을 떠돌 귀신이 되었을 나를 당신이 받아 주었으니 이제 떠나도 여한이 없다오. 다만….”
타무의 시선이 여울에게로 향했다.
“도사님….”
아픈 사랑 베어 내고 떠나야 할 가여운 영에게 이름 한 자락 내어 준들 어떠할까. 하여 여울은 그에게 이름을 허락한다.
“여울랑이라 하오.”
“순순히 떠나겠다 약조한다면, 아이가 세상에 나오도록 지켜 줄 수 있으십니까, 여울랑.”
“안 됩니다. 싫습니다. 타무! 제발 날 버리지 말아요. 흑흑흑, 당신이 없으면 아이도 필요치 않습니다.”
울부짖는 해아영의 이마에 타무가 입맞춤했다.
“내가 떠나면 내게 나누어 주었던 당신의 기운도 충만해질 터이니.”
“싫습니다. 흑흑흑, 가지 마시어요.”
“다시 태어나도 난 당신의 낭군이 되려 하니.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우리의 아이를 잘 부탁하오.”
“정말, 정말. 기다리면, 그리하면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요?”
‘환생을 한다 한들 전생의 기억이 없는데 서로를 찾아낼 수 있을까.’
눈물로 가득한 해아영의 물음에 여울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리마라 가시리.”
불의 결계를 거두고 밖으로 나오자 소식을 들은 상단의 보표들이 폐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가!!!”
비단 이불을 두르고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해아영의 모습에 단주 마석우이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그놈은! 귀신은 잡은 것이오?”
“아버지, 흑흑흑, 제발. 그만하시어요.”
아비의 가슴을 두드리다 기어이 혼절해 버린 딸을 품어 안은 마석우이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찌 되었소. 잡아 없앤 것이 분명하오?”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 따님과 돌아가 기다리십시오.”
“하나, 내 눈으로 직접.”
“모든 것이! 그리 선명하게 보인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평탄하겠습니까!”
벼락같은 여울의 목소리에 마석우이가 입을 다물었다.
‘당신의 딸은 심장을 도려내고 돌아서는데, 어찌 그 슬픔을 보지 못하는 겁니까!’
멀찍이 선 채로 조용히 기다리고 선 타무를 향해 여울은 걸음을 옮겼다. 이랑군도 소리 없이 움직였다.
산을 벗어난 그들이 멈춰 선 곳은 구주에서 반나절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에서 뒷산으로 갈라지는 길목에 당산목이 서 있었다.
한 사오백여 년쯤 되었을까?
풍년을 바라거나, 역병이 피해 가기를 바라는 마을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수호목이었다. 물론 여인네들이 아들을 바라며 정(情)을 쌓아 가는 곳이기도 하다.
“당산목이 아닌가.”
“그녀의 어머니와 제 어머니가 다니던 사찰이 이 위에 있습니다. 그녀와 저는 이곳에서 자주 놀곤 했지요.”
“어른이 되어서는 밀회를 나누는 장소가 되었겠군.”
뜻밖에도 타무가 얼굴을 붉혔다.
“뒤에 작은 사당이 있는데, 저는 그곳에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당산목 뒤쪽으로 작은 사당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타무의 시신이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가을 낙엽처럼 바싹 말라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묵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가슴이 아려 온다.
“이곳으로 숨어들어 그녀를 기다렸습니다.”
“소식을 알 길 없는 해아영은 병석에 누웠을 테고, 결국은 굶어 죽었군.”
“행여나 그녀가 오지 않을까 한시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습니다.”
“미련하다. 참으로 미련한 사랑이로구나.”
여울의 한탄에 타무가 피식 웃는다.
“굶어 죽으면 아귀가 된다 들었는데,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닌가 봅니다.”
“그대는 배보다 사랑이 고팠던가 보오.”
내 사람도 아닌데, 보내는 것이 이리 안타까울 수가 없다. 천명을 죽인 요괴를 찾아, 그리고 오라비 묵을 찾아 대륙을 헤매고 다니는 동안 너무나 앞만 보고 달려왔는가.
“흐음, 흐음. 이리 인사도 없이 가려 하오?”
칼칼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돌아서니 문가에 낯선 노인 하나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흐이고, 젊은 처자가 어찌 이리 깊고 차가운 기운을 가지고 있누. 아이고, 살벌해라.”
단박에 ‘여인’이라 부르는 것을 보니 사람은 아니로구나.
“당산목주 되시나 보오.”
“에헴, 에헤헤엠.”
“꽤나 한가하셨던가. 귀동까지 점지해 주시고.”
여울의 기운이 두려운지 노인은 다가서지 못한 채 타무를 보며 딴전을 부린다.
“결국 이리 잡혀가는가?”
“그간 돌봐 주시어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얼. 아이 때부터 봐 온 얼굴이라 돌봐 주려 했지. 내 힘이 미약하여 크게 돕지 못해 미안하구먼.”
“하면, 어르신도 함께 가시렵니까?”
여울의 말 한마디에 당산목주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쯧쯧쯧, 어찌하여 아이까지 만들었는지 이제야 알겠군.”
“아이를 만들면 내세에 그녀를 찾아갈 연줄이 되어 줄 거라 들었습니다.”
아무튼 노인네들 애라면 무조건 좋다 하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신경을 안 쓴다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여울이 양손을 움켜쥐었다.
“이제 가실 시간이오.”
“감사합니다.”
“감사라니. 뭐, 그다지.”
“이미 오래전에 떠나려 하였으나 울며 붙잡는 그녀를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리 좋은 도사님 만나 천도하게 되었으니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잊으시오. 어차피 한바탕 놀다 가는 세상살이. 이생의 모든 화복을 잊으면 그제야 새로운 생이 열릴 것이니.”
타무의 시신 앞에 가부좌를 튼 여울이 결계를 펴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수물 수래 가우평야 토우 토래 가우평이”
물은 물로 돌아가고 흙은 흙으로 돌아가니.
“사우명이 가우사라.”
죽음은 삶으로 거듭나리라.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우며 여울은 투명한 결계 안에서 아름다운 불꽃을 일으키는 타무를 바라보았다. 타무는 더없이 평온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사리 마라 타우가라. 이라진.”
부드러운 여울의 목소리에 사그라져 가는 불꽃이 하나로 뭉쳐졌다. 타무는 그의 사랑만큼이나 투명하고 아름다운 사리 하나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사당을 나왔을 때에는 이미 먼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랑군, 힘들게 요괴 잡으러 다닐 것이 아니라, 화장터나 할까?”
시답잖은 말이 어이가 없는지 이랑군조차 대꾸가 없다.
터덜터덜.
당산목을 지나친 여울이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휙 돌아선 여울이 물끄러미 당산목을 바라본다.
‘저 노인네 온갖 귀신들한테 아이들 점지해 주는 건 아니겠지?’
여울의 시선을 눈치챘는가 당산목의 그늘이 더욱 어두워졌다. 천천히 나무로 다가선 여울이 투박한 나뭇결을 따라 손을 얹었다.
파르르르르.
나무의 떨림이 손바닥으로 느껴진다.
“이보오. 당산 영감. 앞으로는 아이를 점지해 줄 때에는 조금 신중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오, 응?”
당산목의 갈라진 틈들이 살며시 오그라들었다.
풉, 겁은 많아 가지고.
다시 걷기 시작하여 열 보 정도 걸어갔으려나.
등 뒤로 칼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도 아닌 것이 귀동을 점지했다 탓하다니, 췟.”
순간 부아가 치밀어 오른 여울이 다시 돌아섰다.
“망할 영감이 누구보고! 확! 그냥 불 질러 버릴까 보다!”
영감, 귀청은 멀쩡한지 멀리서 보아도 마른 가지들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
‘어휴…. 하긴 이렇게 요기를 쫓아 떠도는 삶이 인간이라 말할 수 있으려나.’
천명이 죽지 않았다면, 묵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사부님을 아비 삼아 묵의 아내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가 보지 못한 길은 늘 아쉬움과 미련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