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야차의 부활
역변이 일어난 지 엿새째 되는 날.
청운제의 죽음이 알려지지 않은 가운데, 황성은 조용하기만 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역변의 피 내음을 덮으며 눈은 소리 없이 쌓여 갔다.
악몽은 오늘도 어김없이 은령의 새벽을 깨웠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끝나지 않는 슬픔은 점점 더 처절하여 더욱 선명해졌으니 오늘은 기어이 백원후를 보았다.
“달이야, 세안수 준비하여라.”
“하아아암, 마님, 아직 해님도 뜨지 않았는데요.”
“곧 손님이 찾아올 터이니 칠성 아비에게 대문 앞을 쓸라 이르고.”
“손님이요? 이 시각에요? 아직 파루도 치지 않았는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비비며 투덜대던 달이가 침상 위로 옷 보따리를 풀어내는 은령을 쳐다봤다.
“우아아아! 세상에 이리 고운 옷은 처음 봅니다.”
‘그렇구나. 내가 입고 갈 상복이라. 언니가 그리 마음 써서 만들어 두었구나.’
붉은 비단 위에 하얀 천화가 셀 수 없이 수놓아져 있는 옷은 소맷자락이며 복대까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꽃잎조차 살아 숨 쉬는 듯 얼마나 마음을 써 가며 만들었는지 은령의 가슴이 미어져 온다.
‘나의 죽음이 이처럼 아름다웠으면 좋겠습니다.’
세안을 마친 은령은 겹겹이 속곳을 갖추어 입고 붉은 도포를 둘러 복대를 매었다. 소매와 치마 길이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치맛자락은 넉넉한 배까지 포근하게 감겨들었다.
‘품이 이리 넉넉한 것을 보니, 아가…. 결국 너 또한 이 어미와 함께 가겠구나.’
긴 머리 곱게 빗어 촘촘히 땋아 올리고 금과 은으로 조각된 대천화의 비녀를 꽂았다.
‘언니가 보았던 이 동생의 마지막은 어떠하던가요? 흩날리는 꽃잎처럼 그리 아름다웠으면 합니다.’
은령의 모습을 바라보는 달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아아아, 마님. 천녀 같아요.”
‘천녀라….’
달이의 말처럼 천화관 족자 속에서 걸어 나온 듯, 은령은 은가의 시조 천화후가 되어 서 있다.
“마님, 이 시간에 정말 손님이 올까요? 도대체 누가 오시는데요? 나리가 돌아오시나요?”
밖으로 나온 은령은 달이의 물음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폐부 깊숙이 찬 공기를 가득 채웠다. 신경 줄을 타고 오르는 긴장감에 배 속의 아이가 몸을 틀었다.
“형수님!”
묵의 음성과 닮아 있는 따뜻한 저음에 은령이 고개를 돌리니 호영이 그녀에게로 한걸음에 달려왔다.
‘시집올 때에 아기였던 도련님이 언제 이리 성장하셨을까. 아…. 행복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짧단 말인가!’
시간이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간다는 것, 그것은 지금 행복하다는 증거이다.
뒤늦은 깨달음에 은령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도련님.”
“이른 아침 문밖 걸음 하신다 하여 이리 달려왔습니다.”
항상 검소하였던 은령의 화려한 모습에 호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하하하, 죄송하기는요. 형님이 국경으로 떠나며 꼭 함께 있으라 당부하셨다지요.”
터져 나오는 뜨거운 숨을 삼키며 은령은 호영의 손을 붙잡았다.
‘함께 걸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하나 마지막 걸음은 홀로 보내 주셔야 합니다, 도련님….’
한 걸음, 또 한 걸음.
통증으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복중 아이 또한 어미의 결심을 아는 듯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가야, 미안하다. 아가야.’
떨리는 손으로 치맛자락을 꼭 부여잡고 두 눈을 크게 떠 보지만 밀려오는 두려움을 떨쳐 낼 수가 없다.
묵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우며 은령은 처연하게 대문을 향해 다가섰다.
‘서방님,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대문 앞에는 현가의 식솔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은령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 당황한 듯 그녀를 바라본다.
“이제 홀로 가야 합니다.”
손을 놓는 은령의 모습에 호영이 당황한 듯 다가서자 그녀가 대문을 등지고 물러섰다.
“보내 주셔야 합니다.”
“형수님, 손님이 오신다 들었습니다. 제가.”
“안 됩니다!”
은령은 호영의 뒤로 웅성이는 식솔들을 향해 소리쳤다.
“어느 누구도 이 문밖을 넘어서서는 아니 될 것이다.”
“마, 마님. 하지만 몸도 불편하신 마님을 어찌 홀로 걷게 한답니까.”
“내가 나서면 문은 다시 닫거라. 무슨 소리가 들려도 절대 문을 다시 열어서는 아니 된다.”
“하지만 마님….”
“아니 된다 하였다.”
달이가 주저앉자 근심 어린 호영의 시선이 은령에게로 향했다.
“형수님….”
삭막했던 무장 집안에 꽃이 되었던 형수였으며, 어머니에겐 벗이 되어 주고, 어린 그에게는 미래의 아내를 꿈꾸게 했던 여인이었다.
검소하고 단아하여 아름다웠으며, 아랫사람에게 엄격하였던 어머니와 달리 상냥하기가 위아래를 구별하지 않았다.
“정녕 그리하셔야 하겠습니까.”
‘도련님, 마지막 길에 이들을 동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형수님, 저는, 지금 너무나 불안합니다. 이것이 형수의 마지막 모습이 될까 너무나 무섭습니다.’
“부탁입니다.”
“그리하겠습니다.”
대문이 열리는 순간, 기가 막히게도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파루가 울려 퍼졌다.
땡, 땡, 땡, 때….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
새까만 어둠으로 들어찬 문턱을 넘어서는 은령이 고개를 들어 머리를 세웠다.
‘서방님…. 오늘 죽어 당신과의 인연이 내세에 이어질 수 있다면 슬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렵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 기묘한 향기가 흘러들었다. 구름이 가리듯 운무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타닥. 타닥. 처걱! 처걱! 척! 척! 척! 척!
군무를 추듯 일정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하나둘씩 형체를 드러내는 이들은 황실 소속의 무사들이었다.
“백•원•후•.”
은령의 부름에 답하듯 무사들 사이로 하얀 백마를 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의복을 갖춰 입은 그녀의 모습은 이미 황후의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백원후? 백원후라! 입에 착착 붙는 것이 참으로 정겹구나, 호호호호!”
백원후의 웃음소리에 순간 낭랑의 말이 은령의 뇌리를 스쳐 간다.
“하늘이 그대들에게 보여 주는 내일은 인간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미래입니다. 전란도 태평성대도 모두가 그대들이 만들어 낸 오늘이란 말입니다.”
그녀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은령은 처절하게 깨달아야 했다. 그녀가 보았던 내일은 결국 은령 스스로가 만들어 버린 미래였다.
‘내가 그녀에게 이름을 주었구나.’
함박웃음 짓던 백원후가 무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들었느냐. 너희들의 천화가 나를 이 율국의 황후로 인정하였다.”
초점 없는 무사들의 눈동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밀랍 인형처럼 줄지어 서 있을 뿐이니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후후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겠지? 앞으로는 나를 백원후라 칭하리라.”
제비꽃색 눈동자를 반짝이던 백원후가 은령의 핏빛 의복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솔직히 네가 싫지 않다. 그와 닮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거든. 참으로 안타깝구나. 그가 너를 그리 바라보지만 않았어도, 내 너를 귀애하였을지 모르는데.”
달콤한 그녀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부유한다.
“하나…. 나는 나의 수컷을 다른 암컷과 공유하지 않는다.”
요신조차 황후들이 이어 온 천화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없다니.
은령은 좌절감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같은 피를 가진 이들이 서로를 귀애하는 것은 천륜이 아니던가.”
“훗, 천륜? 그래서 황자들은 서로를 독살하고, 황제는 제 피가 섞인 딸을 그리도 귀애하여 교미를 하였더냐. 그 더러운 핏줄이 내게 천륜을 논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군.”
백원후의 말에 남아 있던 희망의 불꽃마저 사그라진다. 결국 모든 것이 우리네가 만들어 온 원인이며 결과일 뿐이구나.
“인간의 황후가 될 요신이여. 그대가 원하는 것은 정녕 율국 마지막 천화의 죽음인가.”
“참으로 영특하구나. 더 이상의 천화 따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네가 마지막 천화가 되겠구나. 내세에 다시 만난다면 내 오늘의 죽음을 보상하지.”
“보상 따윈 필요 없다. 나는, 그대가 온화한 황후가 되기를, 율국을…. 명 오라버니를.”
“그만!”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백원후의 소맷자락이 휘날렸다. 그 파장을 따라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형수님!”
대문에서 뛰어나온 호영이 은령의 몸을 감싸자 둔탁한 충격이 그녀에게로 전해졌다.
“도련님!”
“으으윽, 형수님, 괜찮으십니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형수님을 지키라는 형님과의 약속이 먼저였습니다.”
무릎이 꺾인 호영이 은령의 어깨를 부여잡으니 그의 뒤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그래. 이것이 천륜이로구나. 형의 처를 대신하여 살을 받는 것. 흐음…. 얼마나 버티나 볼까?”
춤을 추듯 백원후의 금빛 소매가 나비처럼 펄럭였다.
슉, 슉, 슉.
날아드는 화살은 그들을 둘러싼 현가의 식솔들에게 속절없이 박혀 들었다. 한솥밥을 먹던 이들이 죽어 간다.
“안 돼에에에에!!!”
달이의 작은 몸이 그녀의 앞에 풀썩 떨어져 내렸다.
호영이 달이에게로 달려가는 은령을 부둥켜안았다.
슉. 슉슉슉, 슉. 슉슉.
온몸으로 화살을 막으며 움켜쥔 그녀를 놓지 않는 호영에게 은령이 울부짖었다.
“흑흑흑! 비켜 주셔요. 제발! 물러, 서셔요.”
“형수님! 흐윽, 형수님을 지키겠다 형과….”
“도련님, 그, 만, 하셔요.”
붉은 선혈을 쏟으며 무너져 내리는 호영과 함께 주저앉은 그녀가 울음을 터트렸다. 온몸에 화살이 박혀 어디 하나 부여잡을 곳조차 없다.
“형, 수… 님.”
“괜찮아요. 나는, 괜, 찮, 아요.”
살고자 발버둥 치는 태아의 움직임에 은령의 눈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도, 련님?”
장대비같이 쏟아지는 화살들.
슉! 슈슈슉! 슉! 슉! 슈슈슈슈!
은령의 가슴과 옆구리 그리고 다리 위로 박혀 들었으나 그녀는 소리 내지 않았다. 깊은 숨을 들이쉬며 호영의 눈을 감겨 주었다.
“백원후여, 그는, 네가 선택한 사내가 유일하게 등을 내주었던 친우의 가족들.”
은령은 호영을 놓아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왈칵.
뜨거운 무언가가 다리 사이로 흠뻑 젖어 들었다.
“네게 품었던 오라비의 마음도.”
“이런, 이런, 이런. 지금, 내게 예언을 하는 게냐.”
“너의 잔혹함에 그는 등을 돌릴 것이며.”
은령은 어깨에 박힌 화살을 뽑아냈다.
“감당할 수 없는 상실을 알게 될 것이다.”
혈관이 터진 듯 은령이 화살을 뽑는 자리마다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그 모습을 즐기듯 아름답게 미소 짓고 있는 백원후에게로 은령은 힘겨운 걸음을 옮겼다.
“상실이라. 나는 요신이 되어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순혈로서 요신으로 태어났으니 내 손에 쥐어진 것 중 무엇 하나도 잃어 본 적이 없다.”
“백•원•후•.”
“너는 오늘 선황의 잔당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백원후에게로 다가서는 은령의 걸음걸음, 하얀 눈 위로 붉은 꽃이 피어났다.
“피로 물든 천화라….”
붉은 의장에 수놓인 천화는 붉은 꽃으로 바뀌어 갔다.
“명색이 율국의 마지막 천화인데, 저승길을 밝혀 줄 호위 무사 정도는 있어야지?”
백원후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렬로 줄지어 섰던 무사들의 눈으로 시커먼 어둠이 들어찼다.
“후후후, 맥없이 쓰러진 너의 식솔들보단 나을 테지. 이들이 너의 저승길을 안내할 것이다.”
무사들은 아무런 소리 없이 서로가 서로의 몸에 칼을 박아 넣었다.
그 처참한 광경에 은령은 결국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어찌하여 죄 없는 이들을….”
“그들의 황제를 지키지 못하였고, 그들의 천화 또한 지키지 못하였다. 배반의 역사를 써 온 인간들 중 누가 그들의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은령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를 탓해야 하는 걸까? 누구의 잘못이며 누구를 원망하여야 하는 것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긋나 버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창자가 끊어져 나가는 원망이, 억울하고 분하여 삼킬 수 없는 피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그•대•는•….”
바람조차 숨죽인 침묵 속에 지독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울려왔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그대의 죄는.”
백원후의 반짝이던 눈동자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눈에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오 황자 명의 모습이 보였다.
“명…. 당신이 어떻게….”
뚜벅뚜벅, 뚜벅.
어둠 속에서 나타난 명이 높이 뛰어오르는가 싶더니 백원후가 타고 있던 백마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끼야아아아아아악!”
쿵!!!
바닥으로 나뒹군 백원후가 하얀 말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황금빛 비단옷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백야! 오오오, 아가. 눈을 떠 보렴. 내가 금세 목을 붙여 줄 터이니 눈을 떠 보아, 응?”
“요망한 술법으로 다시 살려 내어 보아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다시 베어 낼 것이다!”
명은 죽은 무사의 허리춤에서 빼어 낸 담배 가루를 피가 뿜어져 나오는 백야의 목에 뿌려 댔다.
“뭐 하는 거야! 이리하면 다시 살려 낼 수 없어! 하지 마! 저리 치워!”
백야의 목에 뿌려진 담배 가루를 소매로 닦아 내며 백원후는 울부짖었다.
“왜! 왜에에에에에!”
처음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을 때에, 고집이 센 것이 그녀와 꼭 닮았다며 명이 백원후에게 선물한 말이었다.
어미 말에게서 직접 손으로 받아 정성껏 길러 내었다던 백야, 언제 어디서든 그에게로 데려다줄 것이라. 그리 말하였는데.
“어째서! 어째서 백야를 죽이는 거지?”
“어찌하여 그들을 죽였느냐! 어찌하여 내 누이를 죽이려 하였느냐!”
“명….”
“요괴야! 함부로. 함부로 나의 이름을 담지 말라!”
‘요괴’라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짙은 보랏빛이었던 백원후의 눈동자가 삽시간에 옅은 물꽃색으로 변하였다.
“그들을 살려 내라.”
“그리 할, 수 없어.”
“할, 수, 없다?”
명이 불같이 성을 내며 백원후의 목을 움켜쥐었다.
“할 수 없는 것이더냐, 아니 하는 것이냐.”
“없어. 이미 명계에 이름이 넘어가 버렸어.”
내가 눈이 멀었구나.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었구나. 이토록 아프고 아픈 것이었구나.
백원후의 목에 칼을 겨눈 명이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너를 마음에 담았다. 인간이 아님을 알면서도 기꺼이 품어 안았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으로 명의 눈동자가 짙게 물든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황자의 자리에 있는 나이기에. 그 누구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은 가슴을 열어 품어 안았다.”
“나, 나는…. 네게 대륙을.”
“버릴 것이다. 대륙을 잃을지언정 두 번 다시 요괴 따위에게 마음 주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제비꽃 눈동자에 맑게 차오른 눈물이 보석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이게, 뭐지?’
백원후는 볼을 뜨겁게 적시는 눈물을 만지며 바닥으로 톡톡 떨어지는 보석들을 내려다봤다.
‘뜨겁다가 차가워지며 반짝이는 것….’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는 명의 가슴은 이미 갈가리 찢겨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죽여야 해. 이 원한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손에 쥔 검이 천 근의 무게로 무겁다. 명은 알고 있었다. 품에 안겨 웃음 짓던 그녀를 결코 베어 낼 수 없음을.
“내가 베어 낸 것은 백야가 아닌 설이었으니.”
백원후의 목을 베지 못한 명이 검을 거두었다.
“떠나라.”
돌아서는 명을 바라보는 백원후의 눈에서 끝도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내가, 내가 눈물이란 것을 흘리고 있어. 당신 때문에.”
“떠나라 하였다.”
“명…. 당신은, 내가 마음에 담은 유일한 사내.”
“요괴에게 마음 따위 없다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으니 당장 사라져! 눈앞에서 꺼져 버리란 말이다!”
“명!”
“기어이! 그 목을 쳐야 말을 들으련가!”
명에게로 다가서던 백원후가 뒷걸음질 쳤다.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두• 번• 다•시•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리라.”
용암처럼 뜨거운 그의 분노가 그녀의 가슴을 태우고 있었다. 아프다. 지독히도 아파서 가슴을 움켜쥐었다.
‘잘못을 하였구나. 실수를 하였어.’
눈물은 영롱한 보석이 되어 쉼 없이 떨어져 내렸다.
‘물러서야 해. 돌아서야 한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의 분노에 등골이 서늘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아. 그 누구도 주지 않았던 희로애락을 선물한 너인걸. 처음으로 육체를 나눈 수컷이야.’
처음으로 느껴 보는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꾸역꾸역 삼켜 가며 백원후는 결계를 폈다.
‘인간이라도 상관없어. 명…. 절대로 놓지 않아. 너의 품에 안겨 다시 웃게 될 그날을, 난 기다릴 거야.’
하얗게 서리가 내리는 듯 백원후를 감싸는 반짝임 속에 그녀의 형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 곧 다시 태어나겠지? 수천 번. 수만 번 다시 태어나도 너의 가시버시는 나밖에 없어. 명, 너도 곧 깨닫게 될 거야.’
돌아가야 한다. 그녀가 처음 그를 만났던 곳, 화산으로.
‘깊은 잠을 잘 거야. 당신의 첫 울음소리가 들리면 나는 깨어나겠지. 기다릴 거야. 네게 나는 숙명이 될 테니.’
은령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흥건하게 치마를 적시고 있었다.
“오•라•버•니•.”
“은령아! 죽으면 아니 된다. 은령아!”
“어찌, 알고, 오셨, 어요.”
“은령아, 눈을 떠 보거라! 이리 죽으면 나의 벗을 어찌 본단 말이더냐!”
“오라버니, 그는.”
은령은 그리운 임의 이름에 온 힘을 다하여 눈을 떴다.
“파옥하였다. 이리로 올 것이라 예상하여 왔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어찌, 하여, 그리하셨습니, 까. 황위 따위, 필요 없다 하지 않, 으셨습니까.”
“은후를 제거하려 하는 청운제를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를, 버릴 수가 없었다.”
“언니는, 오라, 버니가, 우리를, 천화를, 미워한다. 크윽.”
명을 낳은 황후는 대천화 은설에게 빠져 버린 황제의 냉대 속에 독약을 삼켜 가며 하루하루 죽어 갔다.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삶이었으나 장차 황제가 될 아들의 걸림돌이 될 수 없기에 병사를 가장하여 자살한 것이다.
그런 모후의 원망 속에 자란 명은 운명처럼 이복 누이 은후에게 빠져들었다. 하늘이 허락지 않는 연모로 자괴감에 물들어 갈 즈음, 그녀는 아비의 침실에 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명은 그의 천화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내 너를 이리하려 한 것이 아니다! 은령아! 제발, 죽지 마라. 내 무엇이든 간에 모두 네게 줄 테니, 제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꼭 닮은 누이였기에 더욱더 어여삐 여기었다. 은후의 몫까지 행복해지기를 기도했다.
“죽지 마라! 제발 죽지 마라! 으흐으으윽, 은령아!”
이 작은 몸에서 어찌도 그리 많은 피를 쏟아 내는지.
명이 은령을 꼭 부여잡고 몸을 일으켰다.
명분 없이 죽어 간 이들의 시체를 넘어 그녀를 품어 주었던 현가의 대문을 향해 가던 명이 걸음을 멈추었다.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선 묵의 모습이 보였다.
“…묵.”
말을 타고 온 명과 달리 맨몸으로 달려온 묵의 발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도 그리워했던 아내의 처참한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말없이 손을 내미는 묵에게 은령을 안겨 주었다. 무너지듯 주저앉은 친우의 음성에 명의 가슴이 다시 한번 뜯겨져 나간다.
“령아…. 눈, 좀 떠 보려무나.”
피로 물든 몸을 어루만지던 묵의 손이 그녀의 복부에 멈췄다.
“아이 울음소리 들으러 왔는데, 아직 늦지 않았는가 보오.”
힘겹게 입술을 열었으나 은령의 목소리는 붉은 피가 되어 하얀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 내가 왔다오. 너무 늦은 것은 아니오?”
‘늦지, 않, 았, 답니다.’
“내가 그대를, 우리 령을 참으로 귀애하고 그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말, 했던가.”
‘말씀 않으셔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여 소녀는 다음 생에도 당신의 각시가 되려 마음먹었다지요.’
소리 내지 못하는 그녀의 이마로 뜨거운 입술이 내려앉았다.
“내게는 더없는 축복이었음을, 이야기했던가.”
그의 숨결이 타오르는 지옥 불처럼 뜨겁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눈을 떠 보오.”
‘미안해요. 미안해요. 너무나 미안해요. 내가 시집오지 않았다면 현씨 가문은 멸문을 피하였을 터인데. 미안해요.’
“령아, 령아…. 크윽, 하나, 뿐, 인, 나의, 천화야.”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리 큰 슬픔 주지 않을 터인데, 소녀는 너무나도 이기적인가 봅니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찾을 터이니. 그 또한 미안해요.’
“령아, 흐으윽, 윽윽윽. 려… 아.”
‘다시, 당신을 만나게 되면 그때는 무장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으니, 칼을 쓰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당신 아이 등에 업고 밭일하며 그리 살아가고 싶습니다.’
마지막 숨결에 치맛자락 끝으로 하얗게 빛나던 마지막 천화가 붉게 물들었다.
‘강녕하소서, 나의 낭군님.’
순백색의 천화를 마지막 하나까지 모두 붉게 물들이고서야 율국 마지막 대천화 은령은 비로소 무거운 육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우리 령은 추운 것을 싫어하는데….”
시간이 멈춰 버린 듯 은령을 놓을 줄 모르던 묵이 그녀를 바닥에 눕히곤 윗옷을 벗어 덮어 주었다.
“알고 있었다. 파멸의 꽃이기에 호국선인 내게로 보내졌다는 것을.”
아직도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는 아내의 머리카락을 부드러이 넘겨 주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싸워야 했다. 율국을 지켜 내야만이 널 내 품에 가둘 수 있을 테니.”
입맞춤한 그녀의 입술에서 피 내음이 난다.
“황제도, 나라도 그 무엇도 중요치 않더구나. 령아.”
혈 향조차도 가슴 저미게 향기로운 나의 아내.
“너를 잃고 나는…. 어찌 살아갈까.”
묵의 물음은 은령이 아닌 명에게로 향해 있었다.
“어찌 살아가야 하는 것이냐.”
묵이 바닥에 쓰러진 무사의 검을 손에 쥐었다.
퍽!
묵이 죽은 무사의 목을 내리쳤다.
순간 그를 바라보던 명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퍽!
또다시 누워 있는 시신의 목을 내리친다.
둘, 셋, 넷, 다섯….
명에게로 향하는 그의 걸음걸음마다 죽은 무사들의 머리가 나뒹굴었다.
열둘, 열셋, 열넷….
“안돼에에에에에! 묵! 멈춰라!”
피 끓는 절규가 명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무인의 나라 율국의 법은 시신의 훼손을 용납지 않는다. 이는 천녀의 자손에게 주어진 하늘의 율법이었으며, 단 하나의 면죄부였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호국선에게 지켜야 할 율법도 섬겨야 할 하늘도 없었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
그는 죽은 시신의 목을 서슴없이 베어 버렸다.
마흔여덟, 마흔아홉….
모두가 그에게 훈련을 받았던 형제와도 같은 이들이었으니 그 원망은 사무친 한이 되리라.
아흔일곱, 아흔여덟, 아흔아홉….
단 한 명도 남겨 두지 않고 모조리 목을 베어 낸 묵이 명에게로 검을 겨누었다.
“내가… 찬역에 동조하였다면, 달라졌을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라 변명한들 무엇하겠는가.
운명은 은후를 사모하게 하였고, 숙명은 그에게 백설을 안겨 주었다. 인간이 아님을 알고도 뜨겁게 사랑하였다. 그의 사랑이 은령을 죽였으니, 결국 원죄는 명에게로 돌아온다.
“현가의 자손은 대를 이어 율국을 위해 검을 들었다. 그러나 나의 벗은 반역의 검을 들고 그 칼날 아래 나의 아내와 아이가 붉은 꽃으로 피어났으니.”
살기를 피워 내는 호국선 앞에 명은 뜨거운 숨을 내어 쉴 뿐이다.
“이제… 이 나라 율국에 호국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끓는 슬픔으로 타오르는 분노는 삽시간에 묵의 전신을 휘어 감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천지를 울리는 묵의 기합이 하늘을 가른다.
“모•조•리• 베어 버릴 것이다.”
비장함으로 날을 세우는 묵의 검에 섬광이 번뜩였다.
“돌 한 조각….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베어 낼 것이다!”
“반역자를 죽여라! 폐하를 지켜라!”
뒤늦게 도착한 황실 수호대가 명과 묵의 사이를 갈랐다.
“물러서라! 물러서라 하였다. 그를.”
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호대의 창이 묵에게로 장대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하셔야 합니다. 그의 광기가 도를 넘어섰습니다.”
“비켜! 죽이면 안 된다!”
그에게로 날아드는 창들이 바람을 가르는 묵의 검에 깨끗하게 베어져 고목처럼 떨어져 나갔다. 명을 둘러싼 수호대와 묵을 에워싼 수호대가 밀물과 썰물처럼 좁아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했다.
수만 병사를 거느리고 전장을 누비던 호국선의 검에는 살기가 가득하여 닿는 이마다 피를 뿌리며 스러져 갔다.
“생포하라! 황명이다! 황제의 명이란 말이다!”
야차처럼 싸우는 묵의 몸으로 창 하나가 파고들었다.
“심장은 이미 죽어 없어졌는데, 이까짓 창이 날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을까, 후후후.”
감당할 수 없는 원망과 분노가 초점 잃은 그의 눈동자를 새까맣게 덮어 버렸다.
“죽여라! 폐하를 지켜라!”
“삼진! 앞으로!!”
수호대를 향해 거침없이 검을 놀리는 묵의 몸을 검은 창들이 화살처럼 꿰뚫었다. 묵직한 창끝으로 피가 타고 흘렀으나 그의 걸음을 멈추지는 못했다.
‘똑똑히 보아라. 명! 네가 잃은 것이 무엇인지를.’
피눈물을 흘리며 묵묵히 다가서는 묵의 모습에 명의 눈동자가 뜨겁게 젖어 들었다.
‘묵, 그만하여라. 나는 이미 많은 것을 잃었다.’
제 몸을 방패 삼아 수호대의 몸을 가르는 묵을 보며 명은 오열했다. 부모도, 형제도 모두 버린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한검이었던 친우뿐이었다.
“멈춰라! 묵! 나는 그대를 잃고 싶지 않다.”
그렇게 율국의 호국선은 형제보다 가까웠던 벗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단일 사건으로는 건국 이후 최대의 참사였다.
목이 잘린 사체가 백 구, 죽어 간 무사가 이 백이라.
그렇게 율국의 호국선은 하늘의 율법을 어긴 죄로 염라대왕 앞에 섰다.
“현씨 가문의 37대 장손 묵, 호국선이 마계에 든 것은 처음이로군.”
하늘과 땅의 시작부터 존재했던 염라대왕은 흰 수염을 길게 드리운 옥황상제와는 달리 수려한 외모의 미남자였다.
“대라천에서 그대를 삼계로 올리라는 명이 내려왔다.”
염라대왕은 자못 흥미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은가! 모든 장수가 살상의 죄를 물어 이곳으로 오는데. 그대는 천선의 자손이라 하여 이리 불러올리라 닦달을 하니 말이지.”
“천선?”
“천태천화후, 율국의 어미가 바로 낭랑 천선이다.”
“그녀가 누구이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 나는 삼계에 들지 않을 것이며 환생 또한 거부한다.”
수많은 무장들이 이곳을 거쳐 갔으나 어느 누구도 이리 담대한 시선으로 염라대왕을 마주한 이는 없었다.
‘참으로 아깝고 아쉬워 견딜 수가 없구나. 무신으로 타고난 이들은 모두 천계로 보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떠나온 그 시간의 율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어째서?”
“머리 둘을 베어 내지 못하고 왔다.”
“하나는 율국의 마지막 황제 명, 다른 하나는 누구지?”
“마지막… 이라 하였는가.”
천신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율국을 주시하고 있었다.
인간의 사내를 선택한 천선, 전례 없는 이종 간의 사랑은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천녀의 자손이라 하여 그들의 오만함이 하늘에 닿았으니.
어미가 아들을 죽이고, 아비는 딸을 범하였으며, 그 딸은 또다시 아비를 살해했다.
모든 허물을 덮기에는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이로써 율국은 천 년을 채우지 못하게 되었구나.”
“상관없어. 황제의 목은 내가 벨 것이다.”
“둘이라 하였는데, 다른 하나는 누구더냐.”
“명의 요신.”
“제천대성의 손녀 말이로군. 어째서 그녀를 적으로 두려 하는가.”
요신이 아니었다면 명은 찬역을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요신이 아니었다면 은령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재앙의 중심에 그녀가 서 있다.”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걸. 나 또한 그녀에게 갚아 주어야 할 빚이 있지.”
염라대왕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천무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무장. 이대로 천계로 보내기는 아쉽다. 아쉬워서 손을 놓을 수가 없구나.’
마음 같아서는 태무신으로 만들고 싶으나 그 또한 천존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 되어 버리니. 어찌한다?
“정녕 인계로 가고자 하는가.”
“보내 줄 수 있는 것인가.”
“네가 어떠한 답을 하느냐에 달렸지.”
“원하는 답이 무엇인가.”
“후후후, 아주 오래전에 하얀 원숭이가 염라국에 침입하여 내가 아끼던 화묘를 훔쳐 갔다.”
“요신은 염라대왕도 함부로 못 할 존재였던가.”
“만 년도 채우지 못한 요신이야 손가락으로 목을 비틀 수 있지. 하나 태상노군의 단약과 서왕모의 반도를 훔쳐 먹은 제천대성은 소멸이 불가하여 이미 천신의 반열에 올랐다.”
대라천의 천존은 천신 간의 불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요신의 뒷배가 두려운 게로군.”
마계의 지배자에게 두려움을 묻다니, 하나 그 불손함조차도 염라대왕의 마음을 움켜쥐었다.
“염라의 영역에 침범한 대가로 요신의 소멸을 원한다.”
염라대왕이 손을 뻗으니 붉은빛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인간 황제의 목을 벨 수는 있으나 요신은 그대의 힘으로는 소멸 불가. 요신은 마계에서 파생된 종족이니 같은 기운을 지닌다면 가능하다. 삼켜라.”
모든 것을 잃은 무장의 분노와 원망이 그 빛을 삼켰다.
“제천대성이 태상노군의 단약을 훔쳤듯, 그대는 염라의 염화를 훔쳐 삼킨 것이다.”
뜨거운 화기가 혈관을 태우고 심장을 삼켜 버렸다. 타오르는 고통으로 손톱이 부러지고 핏물이 대리석 바닥을 긁어내린다.
“염라는 대라천의 뜻을 받아 그대를 삼계로 보내었으나 율국의 호국선은 인계로 탈주하였다.”
“후후후, 하하하하하! 천신들이란. 그 무엇 하나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구나.”
“가거라. 인계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니.”
피를 토하며 웃는 모습조차 염라대왕은 흡족하였다.
“꺼지지 않는 원망과 분노가 인계를 뒤덮을 때에 율국의 호국선은 야차로 거듭날 것이며, 천무신 대라선조차 감당치 못할 전쟁의 신이 되리라.”
염라대왕의 저주를 뒤로하고 야차는 인계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서른세 개의 산을 넘고, 서른세 개의 황량한 벌판을 지나 또다시 서른세 개의 강을 건너는 동안 아홉 개의 문을 지났다.
염라대왕의 영토를 벗어나는 데 백 년의 시간이 흘렀음을 그는 알지 못했다. 야차가 인계에 도착하였을 때에, 율국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갈라진 부족 국가들은 저마다의 깃발을 세워 대륙 전체가 곧 전쟁터였으니 마계와 인계의 구분이 분명치 않았다.
야차는 그 멀고 험난한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그대는 나와의 약조를 어겼다.”
“나는 그대를 인계로 돌려보내 주겠다 하였다. 그리고 그대는 인계로 되돌아갔다. 어긋남이 있었던가.”
순간 뇌우를 맞은 듯 야차가 휘청였다.
‘천신의 말장난에 놀아났구나.’
율국이 아닌 인계로 보내 주겠다 했다.
“시간을 거슬러 되돌리는 것은 그 어떤 천신도 침범할 수 없는 천존의 영역.”
“나는, 복수를 하여야 한다.”
“그리될 것이다. 율국의 황제는 다시 태어날 것이고 너는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의 목을 벨 수 있다. 하나 요신을 처리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야.”
그렇게 야차는 복수의 일념 하나만으로 마계의 무신, 요괴들의 수장이 되었다.
***
“으아아아아아아아!!!”
하늘을 가르고 땅을 흔드는 폭주에 회오리처럼 휩쓸려 다니던 서책들이 폭음을 내며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모조리 없애 버릴 것이다! 으아아아아!”
삼만여 권이 넘는 율국의 서가 삽시간에 모조리 불태워졌다. 잿더미 위에 우뚝 선 그의 전신은 삼천 년의 살기로 휩싸였으며 그 손을 뚫고 뻗어 나온 푸른빛은 이내 기다란 창의 형태로 변하였다.
설창을 움켜쥔 태무신의 입술이 지독하게 낮은 음성을 뱉어 냈다.
“가리무라 토르사니 여르사라!”
짙은 어둠의 결계가 영산을 향해 열렸다.
***
시커먼 연무와 함께 결계를 넘는 어둠.
천명의 눈동자는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난 아직도 널 잃고 싶지 않구나, 친우여.”
가슴이 저릿한 서러움, 깊은 수렁 같은 슬픔이 천명의 몸으로 서늘하게 밀려왔다. 서슬 퍼런 한기로도 꺼트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긴 세월 응집된 분노와 원망으로 타오르는 것.
“염화가 깨어났구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그의 몸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창상이 가득했다.
“명….”
서로를 마주하여 선 이들은 사부인 천명도 제자인 묵도 아니었다.
삼천 년 전, 무인의 나라 ‘율국의 한검’이라 불리던 친우. 명에게는 부모보다 형제보다 가까웠던 유일한 벗이다.
“나의 심장을 도륙하여 너는, 무엇을 얻었는가.”
하나는 지독한 분노와 원망으로, 다른 하나는 지울 수 없는 회한과 그리움으로 서로를 마주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내게 무엇을 얻었는가를 묻는가.”
호국선의 죽음 이후 천명제는 중랑장 열락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전대미문으로 두 명의 황제를 시해한 열락은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후사 없는 천명제의 죽음으로 황족들은 분열되었고 이는 곧 황자의 난으로 이어졌다.
신심으로 나라를 지켜 온 대천화의 몰락.
대대로 나라를 지켜 왔던 호국선의 부재.
그리고 명분을 잃어버린 천명제의 죽음.
정세는 아비규환의 혼란에 빠지고 강도와 살인으로 흉흉해진 민심이 앞다투어 국경을 이탈하자, 북국을 선두로 한 제후국들의 도발에 율국은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대륙을 통일했던 무인의 나라 율국은 999년 패망하였다.
53대 천명제는 요녀에게 홀려 역변을 일으킨 최악의 황제로 율국의 서 마지막 장에 기록되었다.
서른두 개의 나라로 분리된 대륙은 통합과 분열을 반복하며 지금에 이르렀으니 오늘, 삼천 년을 돌고 돌아 운명과 숙명이 서로를 마주한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