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대천화 (16/34)

16. 대천화

북국대전의 출병의 그날과 꼭 같은 꿈.

시커먼 창들이 몸을 꿰뚫고 묵의 고통이 그녀의 이름이 되어 메아리쳤다.

‘다 끝난 것이라 생각하였는데….’

황제의 명으로 국경을 살피러 떠난 묵은 출산 전에 돌아오겠노라 약조하며 배냇저고리를 품에 넣었다.

“북국대전에서도 살아 돌아온 내가 아니오. 아이의 첫 울음소리는 함께 들을 터이니 걱정 마시구려.”

꿈속에 그가 쥐고 있던 하얀 천은 태어날 아이를 위해 만들어 두었던 배냇저고리였다. 그렇다면.

‘북국대전이 아니야.’

잠에서 깨어난 은령은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머리가 깨질 듯 아파 왔다. 방 안 공기가 더없이 무거워 심장을 내리누른다.

‘설마! 국경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일까.’

침상 밑에 잠든 몸종 달이가 깰까 은령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섰다.

차가운 공기가 답답한 가슴을 시원스레 뚫어 주었다.

“은령….”

그녀를 부르는 소리,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부름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은령아….”

어둠 속으로 빨려 들듯 은령은 앞으로 걸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을 향해 뻗은 손끝으로 무언가 딱딱한 것이 닿았다.

‘벽?’

손에 닿는 벽을 더듬으며 은령은 소리를 쫓아 조심스레 몸을 옮겼다.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여실히 느껴지는 차가운 돌들은 분명한 실체였다.

‘분명 마당으로 내려섰는데….’

어둠에 익숙해진 두 눈은 그녀가 있는 곳이 겹겹이 큰 암석들로 이루어진 둥근 원형의 굴속임을 알려 주었다.

‘이곳은 어디일까.’

암석들을 더듬는 은령의 손끝으로 오목하게 파인 일정한 문양들이 느껴졌다.

‘천화! 돌마다 천화가 새겨져 있다. 도대체 여긴….’

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제단처럼 쌓여 있는 반원의 돌 틈으로 둥글고 하얀 돌들이 보였다.

‘헉! 해…. 해, 골!’

배를 움켜쥐며 주저앉은 은령은 심하게 요동치는 배 속의 아이를 달래듯 깊게 심호흡했다.

“하아, 하아. 괜찮아. 놀라지 마렴. 그저 꿈일 뿐이야.”

꿈에서 깨어 방을 나섰다 생각하였는데, 분명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리라.

한참이나 숨을 고르며 앉아 있던 은령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은령아….”

빛 한 줄기 없는 어둠 속에서 물그림자 같은 희미한 물체가 보였다.

‘언니?’

선문제의 죽음 이후 사라졌던 은후는 바싹 말라 뼈를 드러낸 채 처연하게 은령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많이 부풀어 올랐구나.”

‘어째서 그리 슬픈 눈으로 바라보십니까.’

전과 달리 다정한 음성에 은령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은령…. 하나뿐인 나의 아우야.”

“어, 언니….”

늘 냉랭하기만 했던 은후가, 단 한 번도 ‘아우’라 칭하지 않았던 그녀가 은령을 부른다. 더없이 슬픈 목소리가 산울림처럼 퍼졌다.

“언니! 흑흑흑.”

은후의 품 안으로 뛰어들자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손이 은령의 등을 감싸 안았다.

“벌써 삼 년입니다. 천화관에서 언니의 모습을 보았다는 이가 없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황가의 씨로 천화가 피어났으니, 파멸의 꽃이라. 이 아이는 율국의 마지막 대천화가 되리라.”

알 수 없는 속삭임에 은령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어머니는 율국의 국운이 다 되었음을 알고 계셨다. 썩을 대로 썩은 고목은 더 이상 새잎을 열지 못한다.”

죄책감으로 미쳐 가는 선문제를 말려 죽인 은후는 명이 아닌 운을 황위에 올렸다. 그렇게 은후는 율국 마지막 대천화가 될 동생의 숙명을 대신 짊어지고 살아서 무덤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하면 이곳은…. 천화관 밀실!”

“네게로 찾아가려 하였으나 남은 기력이 여의치가 않았다. 이리로 불러들여 미안하구나.”

“언니가 왜, 여기 있는 거예요!”

역대 대천화들의 시신이 안치된 천화관 지하 묘에서 은후는 식음을 전폐한 채 삼 년을 버티어 냈다.

“어머니의 예언을 깨려 그리하셨단 말인가요. 저 때문에! 안 돼요. 이리 죽으면 안 된다고요! 가요. 저와 함께 나가요!”

은후가 은령의 손을 꼭 움켜쥐었다.

“나가는 길은 없다. 나의 숨이 끊기면 그들이 시신을 수습하려 들어올 거야.”

앙상하게 메말라 있었으나 그윽한 향기와 따뜻한 온기는 분명 살아 있는 자의 것이었다.

“율국의 태양이, 두 개의 태양이 충돌한다.”

“그만! 그만하셔요. 듣고 싶지 않습니다. 흑흑흑.”

“은령아….”

“흑흑, 잔인하기 그지없는 하늘의 뜻 따위 알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열리지 않는 하늘의 뜻을 읽으려 마지막 남은 숨마저 태워 가고 있었으나. 더 이상은 역부족.”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은령은 숨이 막혀 왔다.

“흑흑흑, 어째서. 어째서…. 그리하셨습니까. 이미 혼인하여 아이를 가진 제가 어찌 대천화가 된단 말씀입니까.”

대천화는 직계에 가까운 미혼에게 이어진다. 태어나자마자 은령의 혼인을 정해 버린 것 또한 그녀를 대천화로 삼지 않겠다는 은후의 강력한 의지였다.

“지킬 수 있으리라. 모든 걸 바꿀 수 있을 거라 그리 생각하였는데. 나는 너무나 오만하였던가.”

“언니, 흑흑흑.”

아비의 침실에 들면서까지 그리도 처절하게 몸부림쳤음에도 은후는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청운제는 법을 바꾸어서라도 널 대천화로 삼으려 할 것이다. 그래야 자리를 지킬 수 있을 테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묵이 은령을 지켜 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오히려 그녀를 이용하여 황위를 지키려 한다.

“율국의 병권은 호국선의 호령 아래 움직인다. 오 황자 명이 군사를 일으킨다면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호국선뿐이야.”

“하면 그가 있는 곳은 지금…. 국경이 아닌 황궁!”

호국선의 심장을 쥐고 있는 파멸의 꽃, 은령은 결국 마지막 대천화가 되는 것인가!

“오 황자의 신수 극락조는 천화와는 상극, 모든 것이 예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은령은 천화관 금서고에서 읽었던 예언서를 떠올렸다. 예언서에는 극락조의 출현과 천화의 몰락 그리고 율국의 마지막 날이 예고되어 있었다.

“뜨고 지는 태양처럼 멸망은 이미 피할 수 없는 하늘의 뜻이란다. 차라리 청운제로 율국이 끝난다면….”

“오라버니가 그리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황제로 태어난 이였다. 명을 낳은 황후는 황제에게서 처절하게 외면당하고 방치된 채 시들어 갔다. 그런 모후의 원망 속에 자란 명이 황위에 오르면 은가의 멸문은 피할 수 없다. 너 또한 살아남지 못해.”

“저 하나 살리고자 태양을 바꾸신 겁니까.”

“후세에 이를 재앙을 막으려 하는 것이다.”

은령은 은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니, 오라버니가 저를 해하실 리 없습니다. 제게는 처음부터 오라비로 다가서신 분입니다.”

“지금도 그가 어린 시절 너와 놀아 주던 그 오라비로 보이더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그의 곁에 있는 요신을 보았다.”

순간, 은령은 명의 품에 안겨 있던 백설이 떠올랐다.

“설마. 전장에서 데려왔다던 흰 원숭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황좌에 앉은 명도 보이더구나. 하얀 머리카락을 구름처럼 말아 올린 제비꽃 눈동자를 가진 여인과 함께였다. 모두가 그녀를 백원후라 불렀다.”

멸망의 예언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비의 침실에 들어 죄책감으로 그를 말려 죽이고 명이 아닌 운을 황위에 올렸건만, 하늘은 거짓 태양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무리 물길을 틀어도 바다를 향해 가는 거대한 운명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언니, 그녀가 정녕 설화에 나오는 그 요신이라면 그 힘으로 율국의 멸망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령아….”

“오라버니와 함께 있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만약 둘의 사이가 저와 서방님같이 그리 다정한 인연이라면.”

“황제의 여인들은 한결같이 천화들을 질시하였다.”

그럼에도 함부로 천화를 제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시조가 천태천화후로 불리었던 천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은가를 함부로 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황후는 요신, 천녀의 핏줄 따위 두려워하지 않아. 인간의 황후들이 해내지 못한 것들을 하려 할 것이다. 은가의 씨를 말리려 하겠지.”

태어나면서부터 하늘의 뜻을 읽었던 은후는 너무나도 확고히 고개를 저었다.

“어찌 그리 장담하십니까, 언니.”

“요신은 지금 명이란 장난감을 손에 쥔 것뿐이니 결국 그 즐거움이 다하는 날, 명은 죽게 될 것이다.”

“하오나….”

“너 또한 보지 않았느냐.”

은령은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죽으면 그의 심장도 죽는다.”

죽는다. 날카로운 창들이 묵의 몸을 관통한다. 피 흘려 지켜 온 이 율국 땅에서 그는 죽는 것이다.

“태무신이 된다. 율국의 호국선이 요괴와 악귀들을 이끄는 지옥의 야차가 된단 말이다.”

“어찌해야 합니까. 어찌하여야 그를, 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거대한 운명 앞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은령은 솟구쳐 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맞서지 말거라. 은령아! 피해야 해. 도망쳐야 한다.”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그는, 서방님은 지금, 황궁에 있습니다. 사지에 계신 서방님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흑흑흑.”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낭군과 단 하나 핏줄이라 품어 주었던 오라비가 서로에게 칼날을 겨눈다.

“하윽, 으으윽.”

배 속의 아이가 그녀의 절망을 공명하며 요동을 쳤다.

“도망치면. 제가 살아남는다면. 그리하면…. 서방님을 만날 수 있는 건가요? 그는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건가요? 네? 언니, 흑흑흑. 답을, 답을 해 주시어요.”

흐느끼는 은령의 앞에 마주 앉은 은후는 몸을 지탱할 수 없을 만큼 기운을 잃어 갔다.

“나의 힘은 이리도 미약하니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가거라, 은령아.”

“언니! 같이 가요. 언니!”

“곧 모든 기운을 소진하게 될 거야. 그리되면 너를 보내 줄 기운도 없을 테니 어서 가려무나.”

물안개가 피어오르듯 어둠이 흩어지고 있었다.

“하얀 그림자를 따라가거라. 큰사람을 만나면 묶여 있던 운명이 풀려나리라.”

***

운명은 무언가를 준비할 사이도 없이 빠르게 찾아왔다. 대천화 직속 천관의 예고 없는 방문.

정식 예관을 차려입고 나타난 늙은 여인의 모습에 은령은 사신을 본 듯 굳어 버렸다.

“은령 님을 34대 대천화로 삼으라는 교지가 내려왔습니다.”

“은후 님께서 살아 계신데, 어찌 차기 대천화를 입에 담으신단 말입니까.”

“대천화께서는….”

“언니가 나를 천화관의 주인으로 삼으라 하였을 리 없습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은령 님….”

“살아 계시지 않습니까. 천화관 지하에!”

천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리라 생각하셨습니까. 나는 은가의 사람입니다!”

“하오나. 유폐되신 지가 이미 삼 년이니 살아 계실….”

“천관!”

대천화를 섬기는 이들이 그녀를 버렸다. 나무라는 은령의 호령에 천관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대들이 손수 닫아 버린 문을! 그 지옥문을! 열어 보면 알 것 아닙니까!”

“은령 님…. 소신들은. 그저 폐하의 명으로.”

“폐하라 하였습니까!”

그녀에게는 한없이 차가웠으나 율국 모두에게 햇살처럼 자애로웠던 언니였다. 그런 주인을 외로이 죽어 가게 만든 그들을, 대천화에게 최후의 보루가 되어 주어야 했을 천화관을 용서할 수 없다.

“도대체 언제부터 폐하의 교지로 율국 대천화의 교체가 이루어졌단 말입니까!”

살기까지 피어오르는 은령의 모습에 천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간다.

“살아 있는 대천화를 밀실에 가두고 차기 대천화를 거론하다니!”

은령이 본 것이 아마도 은후의 마지막 모습이리라.

“돌아가세요. 대천화의 천도식 후에 거론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천화관 내에 이미 산실이 꾸려졌습니다.”

‘산실! 율국 호국선의 아이를 천화관에서 낳으라는 말인가!’

딸이라면 천화로 살아갈 것이나, 아들을 낳는다면 목숨을 보장받을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숙명.

‘서방님…. 그래서 당신은 그리도 환하게 웃으며 금빛 사지로 들어가신 건가요.’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 운명.

‘다 알면서도 그리 묵묵히 가신 겁니까.’

그들은 지금 태풍의 눈이 되어 서 있었다.

‘오라버니, 그래서, 그래서 찾아드셨던 겝니까.’

묵과 명의 짧은 만남, 율국의 호국선인 묵이 아무리 친우라고는 하나 찬역에 동조할 리 없다.

‘첫눈 오는 날은 바깥 걸음 말라는 오라버니의 말씀…. 결국 멀지 않은 오늘을 예고하신 거로군요.’

은령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돌아가세요. 모든 격식을 차려 대천화의 시신을 천도한 후에 천화관으로 들 것입니다.”

“하오나.”

“이것이 34대 대천화의 뜻이라 전하십시오.”

천관이 돌아간 후, 은후가 남긴 말들을 되뇌며 은령은 늦은 밤까지 마당을 서성였다.

‘어머니도, 언니도, 그리고 서방님과 오라버니까지. 정녕 나는 모든 이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파멸의 꽃이란 말인가! 정말 이대로 떠나야 하는 것일까.’

은령은 애타는 마음을 가다듬을 수가 없었다.

‘하얀 그림자…. 큰사람. 묶여 있던 운명….’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없이 은령은 안개 속을 헤매는 듯 답답했다.

***

천관이 돌아간 지 나흘째 되는 날.

요란한 발소리가 마루를 두드리는가 싶더니 문짝이 부서질 듯 열리며 달이가 문턱에 걸려 엎어졌다.

“달이야!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헤헤헤, 괜찮습니다. 마님!”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서방님께 소식이 왔더냐?”

손으로 무릎을 문지르던 달이가 씩 웃으며 한층 무거워진 은령의 몸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으응? 왜? 어디를 가려고?”

“한번 가 보셔요. 집 앞마당에 길조가 나타났어요.”

“무어라?”

“한겨울에 목련이 피었다니까요.”

첫눈이 내릴 듯 하늘이 희뿌연데 경칩이나 되어야 봉오리가 솟을 목련이 피었다니.

“진짜라니까요. 모두들 나와서 구경하고 있다고요.”

달이에게 이끌려 마당으로 내려서니 정말 목련 나무에 하얀 꽃들이 만개하여 있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이제 좀 웃으셔요.”

천관이 다녀간 후 한없이 우울해하던 은령을 위로하고 싶었던 달이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아기씨 태어날 때 되니 이렇게 하늘에서 하얀 꽃도 내려 주잖아요.”

“자목련이다.”

“예에?”

“저 나무는 붉은 목련을 피워야 할 자목련 나무란 말이다.”

“무슨 상관이래요. 한겨울에 꽃이 핀 것 자체가 신기한데. 좀 웃으셔요. 네? 헤헤헤, 마님! 실컷 보시고요. 너무 오래 서 계시면 고뿔 드십니다. 알았죠?”

“그래, 그리하마.”

“다들 뭐 해요. 가서 일들 보라고요.”

손사래 치는 달이의 말에 구경하던 종복들이 제 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춘분을 알리며 붉은 꽃을 피우던 자목련이 때아닌 겨울에 제 색을 잃은 백목련을 피워 냈다. 어째서….’

다른 이들은 그저 신기한 일이라 생각할 뿐이지만, 은령은 천기를 읽는 은가의 핏줄이었다.

“이루지 못할 사랑….”

상제의 딸 중 하나가 북해의 바다지기를 사랑하였으나 유부남임을 알고 북해에 몸을 던졌다. 죽은 시신을 묻어 그 위에 피어난 꽃이 북향화, 바로 백목련이다.

“결국. 천화는 사랑을 이루지 못, 한, 다.”

은령의 손이 나무에 닿자 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떨어진 꽃잎들이 바람에 날리듯 줄지어 쓸려 갔다. 그 모습이 마치.

“하얀 그림자!”

은령은 생각할 틈도 없이 바닥을 구르는 꽃잎들을 쫓기 시작했다. 만삭의 몸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퉁퉁 부어오른 발을 부지런히 옮겼다.

마당을 가로질러 정자를 지나 하인들이 드나드는 북문 앞에 다다르니 꽃잎들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모든 풍파를 비켜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은령은 굳은 결심으로 힘차게 문을 열었다.

대낮인데도 문밖은 한밤중처럼 캄캄했다.

두려움에 망설이는 은령의 앞으로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환한 빛과 함께한 여인이 나타났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은 묘한 광채를 띠는 백색의 의복을 걸치고 있었다.

“누구신가요? 당신은. 당신이 큰사람인가요?”

“나는 천선 낭랑이라 합니다.”

이름만으로도 은령은 서책에 적힌 수많은 천신들 중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기억해 냈다.

“출생과 혼인을 관장하는 천선 낭랑께 은씨 가문 28대 손, 령 인사 올립니다.”

“역시 율국의 대천화답군요. 한 번에 알아보시다니.”

“대천화라니요.”

“이미 그대의 이름과 신체의 일부가 대천화의 계율에 싸여 하늘로 올라왔습니다.”

천관이 다녀간 지가 이제 겨우 나흘, 어찌 그사이에 당사자도 없이 대천의례가 치러졌단 말인가.

“그럴 리가…. 저를 데리러 오신 것이 아니었나요?”

“율국의 마지막 대천화를 거두러 왔습니다.”

대천화가 되었다는 뜻은 알 수 없으나 온화한 천선의 모습에 은령의 가슴에는 평온한 기운이 찾아들었다.

그러나 불안함은 평온함의 끝에 악착같이 매달려 있다.

“그이는, 서방님은?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건가요?”

“생사의 가름은 나의 소임이 아니니 말하여 줄 수 없습니다.”

“서방님의 안위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낭랑님을 따라나설 수는 없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단호함에 천선이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살 것이라. 혹은 죽을 것이라 답은 할 수 없지만 마군의 수장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군의 수장이 되려면 우선 죽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살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천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포근한 기운에 맞서듯 은령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두려움이 일렁였다.

“그대는 호국선의 일만 걱정하는군요.”

“저는, 어찌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배 속의 아이도 그러합니까.”

조용한 물음에 은령은 왈칵 눈물이 났다.

“나와 함께 가면 인계에는 더 이상의 천화가 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관음의 제자가 되어 부모 없는 아이들을 보살피는 선녀로 살게 되겠지요.”

“서방님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안타까운 듯 천선이 고개를 저었다.

“천계에 오르는 순간, 인계의 모든 기억은 영원히 사라질 겁니다. 당신은 그를 영원히 만날 수 없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그의 아내가 되겠노라 약조하였는데, 죽어서도 살아서도 만날 수 없다니.

은령의 가슴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것이 대라천 곧 하늘의 법도입니다.”

무너져 내린 가슴, 죽어 버린 듯 소리 없던 심장에서 활화산 같은 용암이 끓어올랐다.

“하늘의 뜻이라. 어찌하여…. 하늘은 그리도 이기적입니까.”

뜨거운 가슴과 달리 은령의 음성은 북풍한설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어 어미도, 언니도 그리고 저까지…. 이리도 지독하게 피를 말린단 말입니까.”

“대천화여.”

“하늘의 뜻이라 은가의 여인들은 하늘의 제를 모시며 황제의 노리개로 전락하기까지! 그 또한 하늘의 뜻이라 감수하며 살아왔습니다. 한데, 어째서!! 어찌하여!!!”

피맺힌 절규가 천선의 가슴을 울린다.

“하늘은 우리에게 이토록 잔인하단 말입니까.”

“하늘이 그대들에게 보여 주는 내일은 인간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미래입니다. 전란도 태평성대도 모두가 그대들이 만들어 낸 오늘이란 말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 인간들의 화복이라면, 정녕 그러한 것이라면. 낭랑께서는 어찌하여 인간사에 개입하려 하십니까.”

“대대로 하늘을 섬긴 은가의 자손은 천녀의 핏줄, 대라천께서 그들이 천계에 드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모계로 혈통을 잇는 은가의 문장을 목에 새긴 이들은 모두 여아뿐, 아비와 오라비를 혹은 남편과 자식을 두고 어느 누가 하늘로 가려 하겠는가.

“대천화여, 대라천께서 하늘 문을 연 까닭은 다가올 재앙을 막고자 하는 겁니다.”

“너, 무…. 늦었습니다.”

나의 어미도, 언니도 그 재앙을 막고자 발버둥 쳤다지요. 어미는 오라비를 죽였고, 언니는 아비의 침실에 들어 그를 죽이고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이보다 더한 재앙이 있을까요?

“재앙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대천화여….”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하늘이 슬퍼하니 어둠이 울부짖는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만나지 못한다면.”

슬픔은 하얀 눈꽃이 되어 흩날렸다.

“그것이 나의 숙명이라면.”

처절하여 아름다운 서글픔은 미소로 피어났다.

“마지막은 그와 함께하겠습니다.”

***

수북이 쌓인 눈이 북문의 계단을 덮어 버린 그곳에 천관이 의아한 듯 은령을 바라본다.

“은령 님? 제가 오리라 어찌 알고 이리 서 계십니까?”

옷 보따리를 품에 안은 천관은 지난번 방문 때의 정갈한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와 풀려 버린 옷고름이 마치 도망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천관…. 다녀가신 것이 나흘 전인데, 어찌 걸음 하시었습니까.”

“나흘이라뇨. 소신 이곳에 다녀간 것이 아흐레 전입니다.”

“아흐레….”

은령의 코끝으로 하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뻗어 올린 손끝으로 차가운 물의 기운이 녹아들었다.

“눈이…. 내리는 겁니까.”

“사흘째 내리고 있습니다.”

천선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첫눈이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엿새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첫눈! 오라버니가 말한 찬역의 날이다. 그렇다면.’

“두 개의 태양.”

“역시 알고 계셨군요. 사흘 전 황궁을 둘러싼 오 황자의 반란군이 대전 앞까지 들이쳤습니다.”

“반란군이 대전까지 진군할 동안 성 밖의 군사들은 무엇을 하였단 말입니까!”

“들은 바에 의하면 그날 밤 묘한 향기를 뿜어내는 상무 속에서 반란군들이 홀연히 나타났다 합니다.”

심장의 울림이 전장의 북소리처럼 귓가를 후려쳤다.

“호국선을 필두로 황실 수비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열락이란 자에게 폐하께서 시해되면서….”

“열락! 중랑장 열락을 말하는 것입니까.”

“은령 님도 아시는군요. 호국선의 오른팔이라 불리던 자라 하더이다.”

피가 섞인 황제를 직접 죽일 수는 없던 명은 호국선에 대한 열락의 충정을 이용하여 황제를 시해했다. 목적을 잃은 황실 수비대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버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오 황자께는 그 어떤 칼과 창도 닿지 않았다 하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꿈에 보았던 것이 모두 현실이 되었다.

은령은 피투성이가 된 묵의 모습을 떠올렸다.

“호국선은… 어찌… 되, 셨습니까.”

“생포하라는 오 황자의 명이 있어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들었습니다.”

“살아, 있단 말이지요.”

“예. 황자님과는 한검이라 불리던 친우가 아니더이까. 지금 옥에 갇혀 계십니다.”

살아 있다. 그렇다면 꿈은 어찌 된 걸까? 운명이 비껴간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번 유혈 사태를 끝으로 황권이 교체되고 물 흐르듯 지나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율국의 멸망을 예언하였고, 언니 또한.’

은령이 숨이 넘어갈 듯 소리쳤다.

“언니는! 언니는 어찌 되었습니까.”

“돌아간 즉시 밀실 문을 열었으나. 은령 님의 말씀대로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는 듯 온기가. 흐윽, 흑흑.”

쓰러지듯 주저앉은 천관이 끝내 울음을 토했다.

“흑흑흑, 다행히 찬역이 있기 전 천도식을 치렀습니다. 천화관의 모두가 모여 비밀리에 제를 올리고 밀실에 모시었지요.”

“감사합니다.”

은후의 장례를 치렀다는 말에 은령이 엎드려 우는 천관을 일으켜 세웠다.

“날이 밝는 대로 천화관으로 입관할 것입니다.”

“안 됩니다.”

“아니 되다니요.”

“오 황자와 함께 입궁한 여인이 있사온데….”

절망에 감싸인 은령이 휘청이며 문기둥을 움켜쥐었다.

“제비꽃, 눈동자를 지닌, 여인, 이, 더이까.”

“보석같이 반짝이더이다. 천녀와도 같은 아름다움이었으나 짙은 요기를 뿜어내던 묘한 여인이었습니다.”

쿠궁!

심장이 내려앉듯 은령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요신의 존재를 인정하고서야 흩어져 부유하던 조각들이 선명하게 제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그녀가 오라버니를 위해 결계를 폈구나.’

반란군의 침입을 도운 향기로운 안개는 환각을 일으키는 몽환계요, 그녀의 방어계는 명에게로 향한 수호대의 창칼을 무력화시켰을 것이다.

‘언니가 갇혀 있지만 않았더라도 몽환계쯤은 쉽사리 파계할 수 있었을 터인데. 아, 아…. 하늘은 정녕 율국을 버리는 것인가!’

“요녀가 천화관을 천화궁으로 바꾸어 그곳에 기거할 것이라 하더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입관은 무리인 듯합니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집을 떠나 피해 계심이….”

씨실과 날실로 천을 짜듯, 운명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원래의 그림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찬역이 일어난 날을 기점으로 천화관내 은씨 성을 가진 선관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들이 천계에 드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천선 낭랑의 말을 떠올린 은령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그들은 은령과는 다른 선택을 했으리라.

“호국선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계실 듯하여, 소식을 전하고자 목숨 걸고 황궁을 벗어난 것입니다.”

“천관….”

“오는 길에 알아보니 도성 내의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늘의 뜻을 읽어 온 은씨 가문이니 이미 역변의 조짐을 알고 떠난 것 아닐까요? 이제 호국선의 생사를 알려 드렸으니 은령 님도 피하셔야 합니다.”

율국의 멸망을 앞둔 지금, 하늘이 천녀의 자손을 거두어 간 것을 모르는 천관은 그들이 역변을 피하여 도망하였다 굳게 믿고 있었다.

아니라 변명한 듯 무엇할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을….

“어디로…. 피한단 말입니까.”

“어디로든 피해 계시면 호국선께서 반드시 찾아가실 것입니다.”

안타까운 듯 발을 구르는 천관의 모습에 은령은 망연히 웃음 지었다.

“후후후, 나는, 율국의 대천화가 아니더이까.”

“은령 님….”

“이 대천화가 갈 곳은 율국 땅, 어디에도 없습니다.”

흩날리는 눈꽃 아래 선 은령의 모습은 너무나도 담대하여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대, 대천화 님. 흐윽윽,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나의 이름과 신체의 일부가 계율에 싸여 하늘로 올려졌습니다. 결국 나는 율국의 마지막 대천화로 남게 될 겁니다.”

예언 중에 단 하나만 틀어져도 이 환란을 비켜 갈 수 있을 터인데, 아무리 노력하여도 벗어날 수가 없다. 왜!

“흑흑흑, 모두가 소신의 잘못입니다. 지난 방문에 달이라는 아이에게서 은령 님의 머리카락을 받아 갔습니다.”

“달이가….”

“그 아이 또한 소신과 같이 겁박에 못 이겨 그리한 것입니다.”

“탓하여 무엇하겠습니까. 그저 살고자 하였을 뿐일진대.”

미처 몰랐던 한기가 살갗을 파고들었다.

“제발! 피하셔야 합니다.”

“천관.”

“소신은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녀가 천화관에 들던 날, 그 앞을 막아섰던 관녀 다섯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습니다.”

“하면….”

“황궁의 최고 어른이신 태황태후마마께서도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합니다. 황궁의 정비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순식간에 내명부를 장악한 그녀가 대대로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은가를 그냥 둘 리 없지 않습니까.”

“하아아….”

뜨거운 은령의 숨결이 하늘 위로 연기처럼 흩어졌다.

“후후후, 이제야 모든 것이 선명합니다. 어찌나 선명하게 보이는지. 눈이 시려 눈물이 나려 합니다.”

“흑흑흑, 어찌하려 하십니까.”

“물러서지도 도망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대천화 님….”

“이리 찾아 주어 고맙습니다. 황궁 경계가 삼엄할 터인데, 천관께서는 어찌하려 하십니까.”

죽음과 맞서겠다는 대천화가 자신의 안위를 물으니 천관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신은…. 소신은.”

말을 잇지 못하는 천관의 모습을 바라보던 은령의 시선이 그녀가 품에 안고 있던 보따리로 향했다.

은령의 시선을 눈치챈 듯 천관이 보따리를 내밀었다.

“은후 님께서 마지막까지 품에 안고 계시던 것입니다.”

“무엇이기에….”

“옷입니다.”

“옷이요?”

“예. 백색 의장만 갖추시는 대천화께서 붉은 비단옷을 안고 계셔 몰래 숨겨 두었다 가지고 나왔습니다.”

“붉은 옷이라.”

“의장단에서 만들어진 것은 분명 아니옵고, 살펴보니 대천화의 의복과 같은 것이나 색이….”

“입지도 못할 옷을 언니가 만들었단 말입니까.”

“소신이 살펴보니 수놓임새가 대천화께서 직접 만드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은후 님의 체형보다 작게 만들어졌으나, 복대와 배 부분이….”

부풀어 오른 그녀의 배를 바라보는 천관의 시선에 은령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옷 보따리를 품에 안았다.

“천관, 부탁을 하나 하여도 되겠습니까.”

“천언 내리소서.”

“화룡사에 어머니가 계십니다. 이 몸을 대신하여 지켜 주시렵니까.”

“목숨을 바쳐 중양 부인을 모실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33대 대천화 은령 님께 대라천의 영요와 자비가 함께하기를 축언하나이다!”

‘대라천의 영요와 자비라….’

천관의 축언을 뒤로하고 은령은 걸음을 옮겼다.

‘천관, 이제 내게 섬겨야 할 하늘 따위는 없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