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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열락의 금서 (14/34)

14. 열락의 금서

“묵 도련님이다. 묵 도련님이 왔어.”

“왜. 매번 주인님하고 작대기 들고 싸우던.”

“왜 왔지? 주인님도 안 계신데. 혹시 날 보러 오셨나?”

“영산의 천명 선생님 서신 가지고 왔다잖아.”

“설마, 못난이 개살구를 보러 오셨겠어. 호호호.”

“하지만 주인님 출타 중이신데. 화산에 가셨잖아.”

“쉿! 조용히 해. 주인님이 어디 가시는 건 막 이야기하면 안 돼.”

“그나저나 어쩌지? 문 열어?”

아득한 운무 속에 선 묵은 식령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중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운무 속에선 계집아이 목소리들이 꽁알꽁알 쉴 새 없이 들려온다.

“열자. 묵 도련님이잖아.”

“그래. 잘생긴 얼굴 보고 싶다.”

“하지만 흑호 님도 같이 가셔서 아무도 없는데.”

“왜. 소백접 님 있잖아. 무슨 일이 생기겠어.”

도깨비 열락은 아끼는 흑호가 식신들을 잡아먹는 통에 부리는 영이라곤 전부 겁 많은 화목령들뿐.

“아가씨들, 날 들여보내 준다고 해도 열락 님은 무어라 하지 않을 거예요. 서재에 서신만 놓고 가면 되니까.”

차분한 묵의 목소리에 식신들이 계집아이들처럼 호들갑을 떤다.

“어머, 아가씨래. 어쩜 좋아.”

“너한테 한 거 아니야. 그전에 내가 말했으니 나에게 아가씨라고 한 거지. 어서 문 열어.”

“안 돼. 혼나면 어떡해?”

“뭘 혼나. 오늘 처음 온 이도 아니고. 묵 도련님인데.”

“그래. 묵 도련님이야. 잘생기고 싸움 잘하는 묵 도련님.”

“열자.”

“난 몰라.”

민들레 씨앗처럼 사방을 떠다니던 목소리가 뚝 끊기는가 싶더니 운무가 걷히며 장엄한 돌담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이의 나무 문이 소리 없이 열리자 그 안에서 좌우로 늘어선 식령들이 보였다. 고민하던 목소리들의 주인이었다.

개나리, 진달래, 수국, 개살구, 모두가 나무나 꽃을 본체로 둔 식령이나 화령들이다.

“운몽산 허주 열락 님의 식령 매요 인사 올립니다.”

내내 속닥거릴 때는 언제고. 치맛자락을 붙잡고 머리 숙여 예를 갖추는 매화령을 보니 묵은 웃음이 나왔다.

“평안하십니까. 영산의 묵이라 합니다.”

“예. 이미 알고 있죠. 사흘 전에도 다녀가셨잖아요.”

속닥거리며 문 열기를 주저했던 것이 부끄러웠는지 곱게 화장을 한 매요의 얼굴이 붉게 물이 들었다.

“문 열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니 서재로 안내 부탁합니다.”

“저는 나리라 합니다. 묵 도련님. 제가 안내해 드릴 터이니 저를 따르시지요.”

노란 저고리에 짙은 초록 치마를 입은 개나리령이 툭 튀어나와 앞장섰다. 수줍음에 얼굴도 들지 못하던 다른 화령들이 속닥이기 시작했지만, 묵은 나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쩜 늠름도 하시지.”

“뭘, 우리 주인님도 마계에 계실 때는 저보다 더 장대하셨다고.”

자갈들로 길이 놓인 정원을 지나 청색 기와가 얹힌 열락의 본가에 들어섰다. 두 줄로 늘어서 묵의 뒤를 따르는 식신들의 속삭임에 묵은 귀가 간지럽다.

“주인님은 털이 너무 많아.”

“도깨비랑 인간이랑 같은가. 호호호, 난 인간 사내에게 시집갔으면 좋겠다.”

“인간 사내는 털이 많지 않다면서?”

“넌 잘생긴 보리수 도령이 좋다며. 새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다는 것을 보면 밤새 안고 놓아주질 않을 테니.”

점점 짙어지는 농담에 나리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거니는 묵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처음 걸음 하는 것이 아닌지라 낯이 익은 식령들이나 이렇게 말이 많을 줄이야.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며 숨어들던 그녀들의 목소리가 하루살이처럼 귓가에 윙윙거렸다.

붉은 단주가 늘어선 복도 끝으로 간 나리가 열락의 서재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차라도 가져올까요?”

“당연한 걸 묻고 그래. 솔잎차를 즐겨 하셨지?”

누구와 이야기를 하는 건지.

와르르 모여든 식신들의 모습에 묵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같이 어여쁜 얼굴들이었으나 묵은 그녀들에게서 나는 진한 향기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는 되었습니다. 잠시만 쉬어 가겠습니다.”

“그럼 문 앞에서 기다릴 터이니 필요하신 것이 있으시면 부르셔요.”

“네. 그러셔요.”

“네. 그러셔요.”

한마디를 하면 열댓 명의 식신들이 대답을 하니 묵이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그럼, 소백접 님을 불러 드릴까요?”

“소백접 님을 부르자.”

“그래. 안주인이 따로 없으시니 소백접 님이 손님 대접을 해야지. 그런데, 어디 가셨지?”

“어디 가셨지?”

“여기 잠시만 계세요.”

대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로 식령들은 날듯이 줄지어 복도를 달려가 버렸다.

“휴우우, 여인들이란.”

문을 닫고 돌아선 묵이 햇살이 드리운 서재 중앙의 은행나무를 베어 만든 탁자로 다가섰다. 천명이 적어 준 서신을 곱게 내려놓은 묵이 벽면 가득 빼곡히 차 있는 서책들로 시선을 옮겼다.

‘열락 님이 책을 읽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참으로 많구나.’

열 척이 넘는 체구에 털로 뒤덮인 열락이 철퇴가 아닌 서책을 든 모습은 보지도 못했을뿐더러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대라천 천존, 반고신화. 사부님께도 있는 거고…. 인요대전. 이것도 읽어 보았고. 요망록이라. 여울이가 좋아하겠군.”

오래된 서책들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걷자니 어디선가 서글픈 속삭임이 들려왔다.

“저리도 서로 귀애하였구나.”

여인의 목소리? 열락의 애첩을 찾으러 간 식령들이 벌써 돌아온 건가?

문가를 바라보던 묵은 이내 그 소리가 문이 아닌 책장에서 나오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귀를 기울이며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통째로 잘라 낸 거목의 속을 파내어 만든 무거운 책장 틈으로 여인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저런 사랑을 받았다면 나도 이리 시들어 가진 않을 터인데.”

묵의 손이 멈춰 서니 두 개의 책장이 맞물린 사이로 선선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다.

‘안에 또 다른 통로가 있는 것일까?’

한 걸음 물러선 묵이 태산처럼 서로에게 기울어 있는 무거운 책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조심스레 옆으로 밀어냈다.

사르륵.

기름이라도 바른 양, 무거운 책장이 미닫이문처럼 밀려났다. 아래로 향해 가지런히 놓인 돌계단 끝으로 어둠이 가득 들어차 있다.

‘어디로 향하는 계단이지?’

문으로 향했던 묵의 시선이 다시 돌계단을 내려다본다.

‘내려가 보아도 될까? 요기는 느껴지지 않는데?’

하긴, 마계의 열두 신장 중 하나였던 열락의 집에 어떤 요괴가 침입을 할까.

“화라사!”

불꽃을 일으킨 묵은 붉은 꽃잎처럼 떠 있는 불빛을 따라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계단 위를 떠다니는 불꽃이 뒤따르는 묵에게로 꼬리를 드리운다.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걸까.’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속삭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아닌 듯 혼잣말을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방치되는 것은 버림받는 것보다 더 서러운걸요. 어쩌면 당신은 나보다는 행복할지도 몰라요.”

불꽃이 필요 없을 만큼 환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곳.

‘세상에….’

멈춰 선 묵은 눈앞에 보이는 환영을 믿을 수가 없었다. 피투성이 여인을 끌어안은 무장을 둘러싼 무사들은 진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선명했다. 하지만 그들을 만들어 내는 빛은 바닥에 놓인 한 권의 서책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귀서로구나.’

서책에 적혀 있을 내용들이 그대로 환영으로 만들어져 진짜처럼 움직이고 있다. 오열하는 무장의 몸으로 창이 꽂혀 드는 순간, 묵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아 올랐다.

“죽음조차 당신들을 갈라놓지 못할 거예요.”

창을 내리꽂는 무사들을 통과하여 걸어간 여인이 피 철갑을 두른 무장의 몸을 감싸 안았다.

저 무장이 낯설지가 않다.

“도대체….”

낯선 기운을 느꼈는지 그들 사이에 서 있던 여인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누구예욧!”

환영들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였다.

“화라사! 가라 사무라!”

파밧, 팟, 팟, 팟. 화르르.

묵의 외침에 곳곳에서 불꽃이 피어오르자 겁에 질린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소백접?”

“무, 묵 도련님?”

겁에 질린 열락의 애첩이 서 있는 곳은 뜻밖에도 오래된 서고였다. 동굴처럼 둥그런 형태의 지붕까지 층층이 오래된 서책들이 탑처럼 벽을 둘러싸고 있다.

“도, 도대체 여긴 어찌 들어오셨어요.”

“여긴 무엇 하는 곳이며, 내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소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두려움이 사라진 소백접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바닥에 놓인 서책을 품에 안은 소백접이 서둘러 책을 제자리에 꽂고는 묵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가시지요. 여기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주인님이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대체 내가 본 것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제발, 아무것도 묻지 말아 주세요.”

묵은 그의 팔을 잡아당기는 소백접의 손을 뿌리쳤다.

‘그자다! 그자가 분명해! 그렇다면 품에 안고 있던 여인은….’

깊은 명상에서 보았던 그 환영이 눈앞에 벌어진 것과 너무나도 흡사하여 묵은 발길을 뗄 수가 없었다.

“말해 주시오. 도대체 무엇입니까.”

“안 돼요. 여기는 주인님의 금서고예요. 이곳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저는 소멸당할 거예요. 제발, 제발 모르는 척해 주세요.”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애원하는 소백접의 손을 움켜쥔 묵의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묵 도련님! 제발!”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면.”

“도, 도련님.”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어. 나도, 당신도….”

창백한 소백접의 얼굴이 핏줄이 비칠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묵에게 잡힌 손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빠져나갈 수 없어.’

소백접은 눈물을 흘리며 주저앉아 버렸다.

열락을 위해 외모를 백원후와 흡사하게 꾸미며 사랑받을 날만 기다렸던 하얀 배추 나비.

‘이러다 죽겠구나. 아…. 이대로 끝이란 말인가.’

아무리 기다려도 열락의 마음은 그녀에게로 돌아서지 않았다. 너무나 외로웠던 하얀 나비는 우연히 발견한 금기의 구역에서 금서에 빠져 버렸다.

불꽃 주변을 맴도는 불나비처럼 그녀는 금서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말해. 내가 본 것이 무엇인가.”

“묵 도련님께서 보신 것은….”

소백접은 포기한 듯 고개를 숙여 버렸다.

“율국의 서입니다.”

“율국?”

태무신 야차 그리고 무인의 나라 율국의 호국선.

“나는 율국 현씨 가문의 37대 장손 묵이다.”

하아….

뜨거운 숨을 들이켜는 묵의 심장이 미친 듯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율국 역사가 적힌 삼만여 권의 고서 중 마지막입니다.”

“어째서 사라진 나라의 국서가 이곳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소녀 또한 모릅니다. 아는 것은 모두 말씀드렸어요. 흑흑흑, 읽으시겠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놓아주시어요. 제발 부탁입니다.”

소백접은 죽을 듯 몸을 떨며 놓아 달라 애원했다.

“제발…. 제발 부탁입니다. 저는 소멸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발. 흑흑흑, 제발 놓아주셔요.”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자 소백접은 하얀 나비로 변하여 계단 위로 날아가 버렸다.

묵은 벽을 둘러싸고 거대한 탑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고서들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의 무게가 처절하게 느껴졌다.

삼천 년 전 서른여섯 개의 부족을 통일했던 무인의 나라.

율국의 역사 따윈 관심 없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태무신 야차와 율국 현묵과의 관계뿐이야.”

천년왕국의 역사가 담긴 서책들을 바라보며 묵은 심호흡을 했다. 서늘한 공기를 단전 깊은 곳까지 끌어당겼다. 양손을 날개처럼 펼쳐 공기의 흐름을 다스리며 천지의 기운을 불러들였다.

“천하 무리 지리 가라 사요라 미루.”

어두운 서고를 맴돌던 기운들이 몸으로 스며들기 시작하자 묵은 펼쳤던 손을 당겨 중지를 구부려 맞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파장을 모으니 그의 몸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풍의 바라 바라 사리 가루 나다.”

주문을 외우자 벽을 둘러쌌던 서책들이 들썩였다.

타닥, 탁탁. 탁, 타르륵. 타락.

흔들리던 서책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내리며 회오리가 되어 그의 몸을 중심으로 원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공중으로 떠다니는 서책에서 흩어져 나온 종이들이 낙엽처럼 날리기 시작했다.

“무국을 쳐라. 한 뼘의 땅도 내어 줄 수 없다!”

“하하하하, 열다섯 개 부족을 통합하였으니 이제 스무 개 남았구나.”

가부좌를 튼 채로 서고 중앙에 떠 있는 묵의 오감이 열리자 삽시간에 수많은 이야기들이 화살처럼 박혀 들었다. 환영들이 쏟아 내는 수천수만 개의 목소리가 얽히고설켜 혼란스럽다.

“12대 율국의 천황. 서우제 만세!”

“태평성대란 오로지 힘에 의해 얻는 것! 출군하라!”

“북쪽 야인들이 침범하였습니다.”

때론 전쟁터가, 때론 무예를 연마하는 소년과 소녀들의 환영이 서고 안을 가득 채웠다.

“하잇! 핫! 좌로 열 보! 격검!”

“어머니! 제가 무화단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를 둘러싼 수많은 환영들이 각기 제 이야기를 쏟아 놓으며 율국의 역사를 보여 주었다.

“이보게, 서향에 홍수가 났다는데 이야기 들었는가?”

“하하하하! 올해는 풍년이로구나. 대천화에게 일러 풍수제를 치르라 이르라!”

금빛 물결로 끝이 보이지 않는 영토, 그 안에 성벽을 쌓고 풍작을 기원하는 신녀들의 모습도 보였다.

“마님께서 아들을 생산하셨답니다.”

“요즘 같으면 우리 같은 이들도 살 만하다 하지 않을까, 허허허.”

“남쪽에서는 괴어가 잡혔다는데. 불길해요.”

순식간에 생성되어 모래처럼 흩어지는 환영들 속에서 묵의 가슴은 태풍을 품은 바다처럼 고요해졌다.

“인사해야지? 묵아. 은령이라 한단다.”

찾았다! 감았던 묵의 눈이 서서히 열렸다.

‘령이라 불리던 여인. 령. 은령. 율국의 천화가문. 은…. 여울…. 은여울!’

소리를 따라 바닥으로 내려선 묵은 낯선 정원을 둘러보았다.

단아한 정자와 아름답게 조각된 석등, 오래된 은행나무 아래 연못에는 비단잉어들이 헤엄쳐 다니고 있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은령아, 인사해야지. 배운 대로 해 보렴.”

귀족으로 보이는 여인 둘이 각자의 아이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 여인이다!’

겹쳐 드는 다른 환영들을 하나둘씩 밀어내며 묵은 정신을 집중하였다. 그림처럼 펼쳐진 환영들이 더욱 또렷해진다.

“은령이 부끄러운가 봅니다.”

“낯을 많이 가리는데 아직도 울음보가 터지지 않은 것을 보면 정녕 인연이 아닐까요, 호호호.”

웃음 짓던 귀족 여인이 치맛자락을 움켜쥔 계집아이를 앞으로 살며시 밀어내며 웃었다.

“자, 인사해야지? 해 봐. 어제 대천화 님께 한 것처럼, 응?”

“펴안 하시오니까.”

이제 겨우 다섯 살쯤 되었을까? 어눌한 말투로 배에 손을 얹어 머리 숙이는 계집아이를 쳐다보던 사내아이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안녕, 난 묵이라고 해.”

“소여는 은, 려엉. 으음.”

생각이 나지 않는 듯 병아리처럼 입을 오물거리던 은령이 올려다보자 치맛자락을 움켜쥔 귀족 여인이 몸을 낮춰 일곱 살 묵의 손을 잡았다.

“은령은 은씨 가문 28대 손이랍니다. 잘 부탁드려요.”

통통한 은령의 손을 당겨 주니 묵이 답삭 움켜쥐었다. 말간 눈동자를 반짝이는 은령을 쳐다보던 묵이 그녀의 곁에 선 여인을 올려다본다.

“저는 현씨 가문의 37대 장손 현묵입니다.”

“묵 도련님, 은령은 천화로 태어났으나 천화로는 살아갈 수 없는 아이입니다. 잘 보살펴 주시렵니까.”

“최고의 무장이 되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잘 보살피겠습니다.”

“정녕, 그리해 주시렵니까.”

“예. 저만의 천화이니까요.”

***

982년 율국의 봄.

율국의 개국과 함께 시작된 무화관에는 백 일 동계 훈련을 끝낸 오십여 명의 소년 소녀들이 집결해 있었다.

백 명이 함께 떠나 절반이 돌아온 고된 훈련이었다. 백 일의 시간 동안 눈 쌓인 산을 넘어 천 리 행군을 한 이들의 얼굴은 별처럼 반짝였다.

“모든 단원들은 닷새 뒤에 다시 집결한다!”

와아아아아아아!!!

“해산!”

32대 무화단주 묵의 외침에 단원들의 환호성이 천지에 진동한다.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흩어지는 단원들을 지켜보던 묵의 곁에 서 있던 명이 친우의 어깨를 툭 쳤다.

“좋겠다. 황족에게도 금지된 천화를 얻다니.”

짓궂게 웃는 명의 시선 끝으로 붉은 기둥 뒤에 선 은령의 모습이 보였다.

“령아!”

단상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묵이 한걸음에 달려갔다. 환하게 웃으며 달려온 묵이 덥석 손을 잡으니 화들짝 놀란 은령이 냉큼 손을 뺀다.

“훈련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서….”

수줍고 부끄럼 많은 은령이 이곳까지 직접 오려니 얼마나 고심이 많았을까.

“와 주어 기쁘구나.”

기쁜 마음을 감출 길 없어 묵이 다시 은령을 끌어당긴다.

“놓아주시어요. 사람들이 봅니다.”

“우리의 약혼은 황도 사람들이 다 아는데 뭘.”

열일곱 살 풋풋한 소년의 속삭임에 열네 살 소녀의 얼굴로 곱게 단풍이 들었다.

“혼인도 올리기 전에 금슬 자랑이라니.”

갑작스레 달려든 명이 두 사람에게 팔을 둘러 안으니 묵이 그의 팔을 밀어내며 은령을 놓아주었다.

“명 오라, 아니, 황자님도 계셨군요.”

은령이 인사를 건넬 새도 없이 묵에게 달려든 명이 그의 목을 졸라 머리에 주먹을 문질렀다.

“으으으으! 백 일 훈련은 나도 같이 했는데, 은령은 나는 빼고 묵만 보고 싶었던 게야!”

은령의 앞인지라 머리를 쥐어 맞은 묵의 얼굴이 삽시간에 달아올랐다. 내년이면 혼례를 올려야 할 몸이거늘 장대한 모습만 보여 줘도 모자랄 판에!

“그만하지!”

명의 손목을 낚아챈 묵의 목소리가 땅으로 가라앉았다.

“어? 놓지 못할까!”

“황자님!”

“오냐! 장차 이 율국의 52대 천황이 될 주군의 몸에 손을 대다니! 참형감이다! 아니 그러한가. 무화단주우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의 어깨를 움켜쥔 명이 그의 뒤꿈치를 걷어찼다.

순식간에 뒤로 넘어가는가 싶었던 묵의 손이 바닥을 짚어 균형을 잡으며 발로 명의 무릎을 휘감았다.

“어, 어어어! 묵!”

먼지투성이가 되어 흙바닥을 뒹구는 두 소년을 바라보는 은령은 애꿎은 치맛자락만 움켜쥐고 발을 동동 구른다.

“그만하시어요. 황자님! 오라버니!”

율국 51대 천황, 선문제의 다섯 번째 아들 명과 허물없이 함께 뒹구는 이는 호국선이라 불리는 현씨 가문의 37대 손 현묵.

외모만큼이나 문무에 출중한 두 소년은 어디를 가나 늘 함께였다. 그 모습이 양날의 검과 같다 하여 사람들은 이 둘을 ‘율국의 한검’이라 불렀다.

“와아아아아! 황자님이 단주와 판을 벌였다!”

삽시간에 모여든 무화단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그들을 에워쌌다.

“난 단주에게 염소 한 마리 걸지.”

“난 황자님께 비단 한 필!”

긴긴 겨울 훈련을 끝낸 무화단원들은 봄바람에 초목을 싹 틔우는 대지처럼 신이 나 있었다.

딸랑, 딸랑.

청명한 방울 소리에 화들짝 놀란 은령이 물러서자 등 뒤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천화관 대천화 입관!”

싸움판에서 물러선 무화단원들은 삽시간에 복장을 단장하여 허리를 곧추세웠다.

“무화단 정렬!”

입 모아 하늘을 울리는 어린 단원들의 목소리에 묵과 명도 몸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매로 콧등을 훔치는 두 소년의 얼굴에도 낭패한 기색이 역력하다.

딸랑, 딸랑, 또르르.

종소리가 가까워지니 백색의 복장에 가슴엔 붉은색 복대를 두른 신녀들의 무리가 나타났다. 이내 신녀들이 물길처럼 갈라지며 천화관 대천화 은후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화 307기! 서른셋! 309기! 스물둘! 총관 무화단주 현묵! 천화관 대천화 은후 님께 인사 올립니다!”

“인사 올립니다!”

묵의 외침을 제창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모두가 대천화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열두 살에서 열일곱까지의 소년 소녀들이었으나 군기 못지않은 무화단의 기강이 칼로 베어 낸 듯 날이 선다.

“고된 훈련 마치셨다 들었는데, 다들 강녕하십니까.”

“예!!!”

우렁찬 대답에 근엄한 신녀들조차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흐뭇하게 단원들을 바라보던 시선이 황자 명에게 이르자 은후는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오 황자께서도 계셨군요. 입궁하신 줄 알았는데.”

“황자 명 대천화께 인사 전합니다.”

명을 바라보던 은후의 시선이 잠시 은령에게 머무는가 싶더니 이내 묵에게로 향했다.

“무화단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천화 별관에 만찬을 준비하였으니 그리로 가시지요.”

우와아아아아아아!

우렁찬 함성과 함께 무화단원들이 황자 명의 뒤를 따라 붉은 문을 향해 걸어가자 은후가 은령과 묵을 불러 세웠다.

“두 분께는 제가 따로 드릴 말씀이 있으니 따르시지요.”

은령은 말도 없이 무화관을 찾은 것 때문인가 싶어 울상이 되었다.

“언니!”

은령의 부름에 은후의 눈동자로 서늘한 한기가 돌았다.

“무, 어라 하셨습니까.”

“저, 그것이.”

겁에 질린 은령의 손을 살며시 잡아당긴 묵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무화단주 묵. 훈련을 마친 뒤라 몰골이 사나우니 의관 정제하여 반 식경 안에 찾아뵙겠습니다.”

물끄러미 묵을 바라보던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십시오.”

서른여섯 개의 부족을 통일한 율국은 열두 개의 제후국을 거느린 대륙의 중심이었다.

시조 천무태황은 영산에서 천녀를 얻어 아내로 삼으니 천하를 통일하고 율국의 개국을 선포한다.

“천녀를 아내로 얻었으니, 나는 대라천의 아들로서 하늘의 계율로 인계를 다스림에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고대 국가가 그러하듯 왕은 하늘의 아들이었으며, 곧 제사장으로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통합된 체제를 유지하였다.

27대 천황 해우제에 이르러서야 제사장의 일을 신관에 일임하며 종교는 정치에서 분리되었다.

“하늘의 가르침이 날로 퇴색하여 백성의 심신이 궁핍하니 은씨 일가는 신관을 열어 하늘의 가르침을 널리 퍼트리도록 하라!”

가부장적인 율국에서 유일하게 모계 혈통으로 이어지는 가문이 있었으니 대신녀를 배출하였던 은씨 가문이었다. 앞날을 보고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들은 율국의 시작에서부터 대대로 황가를 모셔 왔다.

그렇게 은씨 가문은 해우제에 이르러서야 양지로 나와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며 나날이 번성하였다.

황권에서 떨어져 나간 신권은 천황의 분신과도 같아라.

황후들을 배출하였던 여러 가문들의 질시와 배척은 예고된 불행이었다.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신녀 은율이 태자의 아이를 가졌다 하던데.”

“어디 하루 이틀 일이랍니까. 천황이 되기도 전에 신녀를 저리 가까이 두시니 앞으로 어찌할지….”

황후의 가문에서는 황족을 출산하는 대신녀들을 천황가의 창녀라 비난하였고, 제후들은 분리되었던 신권의 귀속이라 칭송하였다.

“하하하하! 대신녀가 황가의 피를 이어받은 차기 신녀를 낳았으니 경축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천무태황의 천화후께서도 하늘에서 내려온 천녀가 아니더이까.”

“옳소이다. 이는 율국이 하늘의 선택을 받은 나라임을 온 천하에 명백히 하는 일입니다.”

“공주들조차 제후국과의 혼인으로 군신 관계를 이어 가는데, 신녀들이 황자들을 배출하여 하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다져 가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아들에게서 하늘의 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42대 천황 율민제는 대신녀들의 명예를 위해 관행을 깨고 신녀와 황족의 교합을 금지하였다.

“은씨 가문의 시조는 천무태황의 황후, 천태천화후에서 시작되었으니 그 이름을 빌려 신녀를 천화라 이를 것이니 이는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하늘의 꽃이라!”

또한 차기 대신녀로 하여금 미리 태자의 곁에 머물게 하였던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으니, 황제가 아닌 다음에는 그 누구도 신녀를 가까이 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로소 천황가의 창녀라는 오명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름을 얻은 대천화는 그 대가로 평생을 출산 없이 독신으로 보내야 했다.

다음 대의 대천화는 가장 가까운 미혼의 직계가 물려받았으며 그녀 또한 같은 길을 걸어야 했다.

권력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나도 잔인한 삶이었다.

이 지독한 저주를 은씨 가문의 여인들은 숙명으로 짊어지고 대를 이어 갔다. 그러나 값비싼 대가를 치르며 지켜온 대천화의 명예는 오래가지 못했다.

51대 천황 선문제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태자 시절부터 흠모하던 31대 대천화 은설을 탐하였다.

“선황의 명을 어기고 어찌 하늘의 꽃을 꺾으려 하십니까, 폐하.”

“시조 천무태황은 하늘에서 내려온 천녀를 아내로 얻어 은씨 성을 부여하고 ‘천화후’라 부르셨지. 그 자손인 내가 천화를 얻음에 무엇이 그릇되다 할 것인가.”

선문제는 대를 이어 지켜 오던 황가의 법도를 어기고 천화를 품었다. 비밀리에 출산한 은설은 아이를 동생에게 입적시켰으나 선문제의 탐욕은 그치지 않았다.

“천화가 될 계집 말고 사내아이를 낳아라. 내 은가의 핏줄로 천년왕국을 완성하리라.”

선문제의 집착은 은설의 몸 안에 또 다른 싹을 틔웠으니, 손대지 말아야 할 꽃을 꺾은 대가는 파란의 시작이 되었다.

선문제의 염원대로 황자를 출산한 은설은 천황가에 피바람을 몰고 올 아이의 명을 제 손으로 끊어 냈다.

“독하구나. 제 손으로 제 핏줄을 끊어 내다니. 하나, 그 독기마저도 나의 것이라.”

“어미가 자식을 죽였습니다. 천륜을 버린 대천화는 더 이상 천화가 아니니 소녀의 출궁을 허락하여 주소서.”

“내게서 벗어날 길은 오직 죽음뿐이니, 그마저도 네게는 기회가 없겠구나.”

“폐하아아아!”

그녀의 죽음조차 소유하려 하는 황제의 지독한 집착에 은설은 치를 떨었다.

“후후후. 나는 너를 놓을 수가 없다.”

선문제와 은설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 은후가 32대 대천화에 오른 이듬해 겨울.

은설은 또다시 출산을 하였다.

“여아입니다.”

“황가의 씨로 천화가 피어났으니, 파멸의 꽃이라.”

대천화로 제 손으로 혈육의 생을 끊어 내면서까지 황가를 지키고자 하였건만 황제는 철저하게 그녀를 농락했다. 그 피맺힌 원한에 결국 은설은 무엇보다 사랑하였던 어머니의 나라 율국을 버린다.

“이 아이는 율국의 마지막 대천화가 되리라.”

저주와도 같은 유언을 남긴 채 32대 천화 은설은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역대 대천화들의 시신이 안치된 천화관 지하 묘 돌문 앞에 선 은후의 가슴으로 파도가 인다.

어머니….

“아이에게 ‘은령’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은후는 아이를 개국 공신 현씨 가문 장남과 약혼시켰다. 대천화는 직계에 가까운 미혼에게 이어진다. 태어나자마자 은령의 혼인을 정해 버린 것은 그녀를 대천화로 삼지 않겠다는 은후의 강력한 의지였다.

“어머니의 예언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은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멸망의 시초라 하시었습니까. 하면 창이 될 이 아이가 그 앞을 막아서는 방패를 만난다면 어찌 될까요.”

평생을 원망과 회한 속에 살아갔던 비운의 대천화 은설.

‘어머니, 두 아이의 만남으로 운명이 어떻게 비틀어질지 하늘에서 지켜봐 주세요.’

마지막 대천화, 파멸의 씨앗은 대대로 율국을 지켜 온 호국선의 품에 안기게 된다.

“과연 하늘은…. 운명은 어디로 흐를 것인가.”

하늘에 역행하는 율국의 대천화 은후의 외로운 전쟁은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983년 가을, 천황성의 금와전.

“전하, 북국의 제후가 공물 상납을 줄여 달라 청하였습니다. 워낙에 겨울이 길어 척박한 땅이긴 하온데.”

“땅이 척박하면 넘치는 짐승들을 팔아 조공을 마련하면 될 것 아닌가.”

“천황폐하! 오 황자 명께서 드시었습니다.”

황자의 등청 소식에 상소를 읽던 선문제가 긴 한숨을 내어 쉬었다.

“나머지는 재상이 살피어 석강에 보고토록 하라.”

너른 대청으로 명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예를 갖추며 길을 트는 재상은 본척만척, 명은 선문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 황자 명! 천황께 문안 올립니다.”

“황자가 이 시간에 어인 일이더냐.”

지친 기색이 역력한 선문제의 물음에 명은 딴전이라도 부리듯 휙휙 주위를 살폈다. 황자답지 못한 행동이었으나 선문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기둥마다 자리를 지키고 선 수호 무사와 시녀들을 물리었다.

단둘이 남게 되니 명은 선문제의 허락도 없이 단상 아래 계단에 풀썩 앉아 버렸다.

“아버님은 누이의 혼례에 아니 가십니까?”

“누이라…. 술이라도 한 게냐.”

근엄한 선문제의 말에 명이 고개를 까닥인다.

“이복 누이도 누이는 누이죠. 은령 말입니다.”

“황자가 열둘이요, 공주가 열넷이다.”

날이 선 목소리에 명이 피식 웃었다.

“적자라고는 단 형님과 소자뿐이었사온데, 형님과 다른 황자 둘은 병으로 죽고. 남은 아홉 중 또 하나가 물에 빠져 죽었으니 황자는 여덟이죠. 공주 또한 열넷 중에 열하나를 제후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으니 셋 남았습니다.”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이더냐.”

“제후국도 아닌 율국에서 치르는 누이의 혼례에 어찌 걸음 않으시는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쾅!

선문제의 손이 책상을 내리쳤다.

“적자가…. 너 하나라 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라 이리 방자하게 구는 게냐.”

“후후후, 글쎄요. 차기 천황은 북국의 반란을 잠재우는 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북국? 북국의 제후에 대해 무언가 들은 것이냐.”

표정이 굳어 버린 선문제의 물음에 뜻밖에도 명은 피식 웃었다.

“같은 피가 흐르는 천화가 베갯머리에 피어나니 보고 또 보아도 살가우신가 봅니다. 곧 몰아칠 눈보라도 보이지 않으시니 말입니다.”

“무, 무어라! 네, 네놈이 감히! 무슨 망발을!”

“북국의 반역도. 어미와 같은 얼굴의 누이를 침상으로 끌어들이시는 것도…. 모두가! 진정! 이 소자의 망발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봐라아아아! 중랑장!”

선문제의 음성이 벼락처럼 내전에 울려 퍼졌다.

“중랑장! 밖에 있느냐!!!”

서슬 퍼런 노염을 토해 내는 선문제의 호령에 문이 열리며 무사들이 와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저놈을! 당장 파궁에 유폐하라!”

두 눈을 번득이며 소리치는 선문제와 달리 고요하게 서 있는 황자 명의 모습에 수호 무사들이 ‘전하’를 외쳐 댄다.

“무엇 하느냐! 당장 저 입을 틀어막아 파궁에 가두란 말이다! 물 한 모금 소금 한 줌 들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황자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중랑장의 손을 뿌리친 명은 꿋꿋하게 내전을 걸어 나갔다.

‘썩어 버린 왕조를 갈아엎고 새 천년을 열리라!’

명은 파궁을 향해 담대하게 걸어갔다.

호국선 현씨 가문의 묵과 대천화 은씨 가문 은령의 혼인식이 있던 날, 오 황자 명은 파궁에 유폐되었다.

그해 겨울.

제후국이었던 북국이 반란의 깃발을 올리니 그 깃발 아래 세 개의 제후국이 모여들었다.

“겨울에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 법이거늘, 법도를 모르는 천하의 반역자들을 처단하라!”

천황 선문제는 감금하였던 명을 비롯한 황자 다섯과 여섯 상장군의 지휘 아래 십만 대군의 출병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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