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성장통 (13/34)

13. 성장통

어슴푸레 달그림자가 기우는 시간.

모두가 깊게 잠든 어둠 속에 묵은 명상에 잠겨 있다. 상사굴이 아닌 마당에 앉아 동쪽을 향해 가부좌를 튼 묵의 몸에서 옅은 땀방울이 배어 나왔다.

“은… 령.”

낯설지 않은 이름이 주문처럼 새어 나오자 묵의 주변으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긴 시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야차가 허물을 벗듯 묵의 등 뒤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잊어버리면…. 염화의 불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깊은 명상에 잠긴 묵을 내려다보던 야차가 조용히 그의 앞에 가부좌를 틀어 마주 앉았다.

“아니면, 같은 길을 걷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할까.”

야차의 물음에 답을 하듯 묵의 눈꺼풀이 열렸다.

“진실이 풀려나면 길은 내가 찾는다.”

“왜…. 너는 그저 내 몸뚱이만 찾아 주면 되는데.”

“울고 있는 여인이 보여.”

“나의 연인이다.”

늘 투구에 가려 있던 야차의 눈동자가 묵의 것과 마주쳤다. 분노와 원망이 아닌 슬픔으로 가득한 눈동자.

“령이란 여인인가.”

“죽어서도 놓을 수 없던 사랑, 지켜 주지 못하여 산산이 부서져 버린 내 연인을. 그리 불렀지.”

무겁게 가라앉는 야차의 목소리에 묵이 고개를 저었다. 수정궁으로 떠나던 날, 령이라는 여인은 분명 여울의 몸에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다. 지금 그의 몸에서 야차가 깨어난 것처럼.

“그녀가 나의 누이 뒤에 서 있다.”

“누이라…. 크크크, 나 또한 령을 그리 부르던 때가 있었지.”

“봉인을 풀어.”

알아야 했다. 끝도 없는 이 의문의 늪에서 벗어나야 했다. 여울에게서 ‘령’이란 여인을 본 후로, 아니 여울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시시각각 숨통을 조여 오는 이 불안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네가 묶어 놓은 전생의 기억.”

“전생이라. 어리석구나. 전생 따위는 없어. 지독한 절망으로 반복되는 오늘이 있을 뿐이지.”

“전생이 없다면 나는 어째서 널 기억하는 것인가.”

“누가, 너를, 나의 환생이라 하던가.”

쿵!

바위가 떨어져 내린 듯 묵은 머리를 후려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환생이 아니다?

야차의 심장을 삼켜 태어난 아이가 환생이 아니라면.

‘나는!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묵은 눈앞에 마주 앉아 있는 야차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너의 환생이 아니라면 지금의 이 상황은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설명은 필요 없어. 스스로 알게 될 테니까.”

“하지만.”

“봉인 따윈 없다. 그저 기억해 내면 돼. 네가 원하는 것이 정녕 진실이라면. 똑같이 반복되는 이 절망을 감당할 수 있다면….”

“야차!”

“태무신 야차 그리고 무인의 나라 율국의 호국선.”

호국선이라면 나라를 지키는 무신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잔혹한 야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율국 현씨 가문의 37대 장손 묵이다.”

지국 태사 현각의 아들 묵.

그 또한 현씨 가문의 서른일곱 번째 장자였다.

‘어찌하여…. 이름까지.’

혼란으로 물들어 가는 묵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야차의 눈동자로 불꽃같은 파장이 인다.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찾게 될 것이니.”

떠오르는 햇살에 야차의 몸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모든 답은 네 안에 있다.”

***

살금살금.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묵에게로 여울은 소리 없이 다가갔다.

‘오라버니이, 이 여울을 홀로 두고, 이른 아침부터 무슨 명상을 그리 깊이 한답니까.’

화들짝 놀랄 묵의 모습을 기대하며 여울은 쥐를 사냥하는 고양이처럼 발끝을 세우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흐흐흐, 사부님께 배운 은형술이 정말 먹히네.’

묵의 뒤에 선 여울이 폴짝 뛰어 달려드는 순간.

“어어어어어!”

무엇이 어찌 된 일인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땅으로 곤두박질친 여울은 등뼈가 부서지는 듯 둔탁한 통증을 느꼈다. 눈 깜짝할 사이 묵의 몸 아래 납작하게 깔려 버린 여울의 입술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오, 오오오. 오, 라, 컥.”

강인한 팔뚝이 여울의 목을 조이며 정확하게 급소를 내리누르고 있다. 목뼈가 부서져 나갈 것 같다.

“커억, 오, 버니.”

초점 없던 묵의 눈동자가 버둥거리는 여울의 움직임에 점점 선명해졌다.

“은… 령?”

“오, 오오.”

팔뚝으로 여울의 목을 내리누르던 묵이 불에 덴 듯 몸을 일으켰다.

“여울아!”

“컥, 하아, 하. 콜록, 콜록.”

시뻘건 얼굴로 기침을 해 대는 여울의 모습에 묵이 목을 움켜쥔 그녀의 손을 떼어 냈다.

“괜찮아? 여울아!”

순간, 철퇴를 맞은 듯 묵의 사타구니로 격렬한 통증이 일었다. 여울의 앙증맞은 무릎이 그의 급소를 정확하게 가격한 것이다.

“으욱, 여, 우우우.”

“흥! 콜록. 날 죽일 셈이야!”

후다닥 일어난 여울이 바닥을 뒹구는 그의 허리로 올라타자 묵이 순식간에 몸을 틀어 그녀를 잡아당겼다. 단단한 가슴 아래 갇혀 버린 여울의 자세는 다시 원위치가 되어 버렸다.

“비켜! 쿨럭! 안 비켜? 에잇!”

버둥거리던 여울의 발이 묵의 민감한 부분을 또다시 걷어차 버렸다.

“하읍, 하아. 아, 여, 아아.”

“뭐! 뭐! 비켜!”

여울의 손발을 제압해 버린 묵은 통증으로 숨도 쉬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내리눌렀다.

“으으으, 아. 여•울•아•.”

끙끙거리는 묵을 올려다보던 여울은 핏대가 선 그의 얼굴로 맺혀 드는 땀방울에 덜컥 겁이 났다.

뭐가…. 잘못된 건가?

“오라버니, 다쳤어?”

“으, 으으, 여울아. 가만, 가만있어.”

불에 덴 듯 사타구니에서 퍼져 가는 통증에 묵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오라버니가 내 목을 조르니까. 내가, 놀라서.”

“응. 으으, 알았어. 가만.”

더 이상 공격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묵은 그대로 여울의 몸 위로 엎어져 버렸다. 얌전해진 여울의 허벅지와 겹쳐진 사타구니가 욱신욱신 죽을 만큼 아프다.

“오라버니, 많이 아파?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끄으응, 응.”

그녀의 전신을 덮은 채 헐떡이는 묵의 몸이 무거웠지만 여울은 조용히 숨만 내쉬었다.

엄살은 여울의 전문이지 묵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피가 철철 나도 아픈 내색 없는 묵이 식은땀을 흘려 가며 숨을 몰아쉬니 여울은 심장이 콩닥 거렸다.

‘어딘가, 무언가를 잘못 건드렸나 봐. 어쩌지?’

묵의 단단한 몸 아래 깔려 죽은 듯이 누워 있자니 그의 향기가 그녀의 몸으로 풋풋하게 내려앉았다.

“오라버니.”

묵이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근심 어린 여울의 눈동자를 내려다보자니 통증이 사라진다.

“많이 아파?”

“…….”

“그러게…. 왜 목을 조르고 그래.”

빨갛게 자국이 남은 여울의 목을 보니 마음이 쓰리다.

“반사 신경이라고 하는 거야. 무를 다루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곳을 더욱 경계하니까.”

반사 신경?

여울은 말똥말똥 묵을 올려다보았다. 검술 배울 때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나랑 사부님밖에 없는데, 예민하기는.”

“깊은 명상에 빠져 있을 때는 더 위험하다고.”

“위험해? 오라버니가?”

귀여운 물음에 묵은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은 개귀신으로 소문난 영산의 은여울이 아닐까.

피식 웃는 묵의 시선이 흐트러진 여울의 가슴으로 향했다. 드잡이를 하는 동안 벌어진 옷깃 사이로 젖무덤이 탐스럽게 살집을 드러내고 있었다. 꽁꽁 감싼 천 위로 더욱 도드라지게 튀어 올라 있다.

“오라버니?”

화락! 묵의 얼굴로 불길이 치솟으며 아랫도리가 또다시 열기에 휩싸였다. 얻어맞았을 때와는 다른 묘한 기운이 순식간에 단전으로 모여들었다.

“엄마낫! 나한테 맞아서 부었나 봐. 딱딱해진다. 어디 봐!”

당황한 묵을 밀어낸 여울이 몸을 일으키며 그의 허리춤을 잡아당겼다.

“정말 다쳤나 봐! 오라버니! 어디 봐! 봐!”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안 다쳤어. 놔! 여울아!”

허리춤을 부여잡은 묵이 몸을 뒤로 뺐지만 옴팡지게 움켜쥔 여울 또한 기를 쓰고 놓지를 않는다.

“놔. 여울아! 놓으라고.”

“미안해. 오라버니. 어디 한번 봐. 피 나는 거 아니야?”

그간 파벽을 뛰어오르며 무술 단련을 얼마나 열심히 했던지 여울의 손아귀 힘이 보통이 아니다.

“어서 놓지 못해! 여울아아아아!”

“잠깐만! 잠깐만. 한 번만 보자! 응?”

벌어진 옷가지 틈새로 출렁이는 가슴과 그의 허리춤을 움켜쥔 여울의 상기된 얼굴에 묵은 지금 폭발 직전이다.

“흠흠! 쿨럭!”

익숙한 기침 소리에 허리춤을 부여잡은 묵이 고개를 돌렸다.

“사부님!”

때 아닌 소동에 집 밖으로 나온 천명은 옷깃을 풀어 헤친 여울이 묵의 바지를 벗기려는 모습을 보고 있다.

“흠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아, 사부님. 제가.”

얼굴이 온통 시뻘겋게 달아오른 묵이 여울의 옷깃을 잽싸게 여미어 묶어 버렸다.

“오라버니가!”

묵의 허리춤을 움켜쥔 여울이 숨을 들이켤 새도 없이 봇물 터지듯 말을 쏟아 냈다.

“사부님! 제가 오라버니 명상을 방해하고 덮쳤는데, 놀란 오라버니가 절 깔아뭉개고. 저도 놀라서 발길질을 한다는 게 어딜 잘못 맞았나 봐요. 물컹했던 것 같기는 한데! 사타구니를 맞았거든요. 근데. 부러졌나. 딱딱하게 부었어요. 어쩌죠?”

“쿨럭! 쿨럭, 컥.”

“흠, 흠. 허어.”

이번엔 묵과 천명이 동시에 기침을 해 대기 시작했다.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여울만이 알 수 없다는 듯 두 사내를 번갈아 쳐다본다.

“흠흠, 여울이는 여기 있고, 묵은 날 따라오너라.”

“저도 보면 안 돼요? 제가 때려서 그런 건데.”

“여기서 기다리려무나.”

옳다구나! 여울의 손에서 허리춤을 빼낸 묵이 어기적거리며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문을 닫고 들어선 천명은 한숨이 나왔다.

“흐음, 흠흠.”

천명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묵의 모습에 무어라 설명을 해 주어야 할지 난감했다. 여울이야 계집아이이니 백원후에게 보냈지만, 묵은 직접 설명을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흠, 거참. 음….”

천문과 역수, 박물에 두루두루 조예가 깊은 천명이 유일하게 깨우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운우지정이란 말이다. 구름 또는 비….”

남녀 간의 육체적인 정을… 음… 너무 직설적이지 않은가. 음, 무어라 설명을 할꼬.

언젠가 백원후가 선물했던 춘화집을 망측하다 그 자리에서 불 질러 버린 것이 처음으로 후회가 되었다.

“송구합니다. 사부님.”

말을 잇지 못하고 방 안을 서성이는 천명의 모습에 묵은 죽을죄를 지은 듯 더욱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습니다. 자꾸만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 예전에 앓던 열병은 아닌 듯하고.”

순간 천명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창문에 붙어 있던 여울의 머리통이 쏙 아래로 내려간다.

창가로 걸음 한 천명이 한숨을 내쉬었다.

“여울이는 잠시 상사굴에 가 있거라.”

“예! 알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사부님! 정말 일부러 그리한 것은 아닙니다!”

묵이 들으라는 듯 여울이 목소리를 높인다.

“콜록, 콜록. 진짜 아프게 하려고 한 것은 정말정말 아닙니다.”

“알았으니 어서 가거라.”

“진짜입니다. 콜록, 여울이는 묵 오라버니가 세상에서 가장 좋습니다. 고기보다 더 좋습니다.”

소리를 지르자니 묵에게 눌렸던 목이 아픈지, 연신 기침을 해 대면서도 여울은 기세 좋게 소리쳤다.

덕분에 묵은 이제 목덜미까지 빨갛게 물이 들어 버렸다. 고기보다 좋다니. 잠시 사그라지는가 싶었던 바지가 불뚝 치솟아 올랐다.

“어서 가지 못할까!”

“예.”

다다다다.

달려간 여울이 파벽에서 폴짝 뛰어내리자 돌아선 천명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흐음,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돌아선 천명은 사타구니를 움켜쥐고 선 묵의 모습에 또다시 헛기침을 한다.

“흠흠, 그래. 병은 아니고.”

“도대체 어찌해야 할지. 여울이가 백원후에게 가기 전에는 안 그랬는데.”

“그랬구나. 많이 자랐구나 여울이 생각만 했거늘.”

여울이 초경을 하듯 건강한 몸을 가진 묵 또한 변화는 당연했다. 아니, 그의 나이 벌써 열일곱이니 사가의 사내아이라면 장가를 들 나이였다.

“여울이는 전과 같이 달려들고 자꾸 품으로 기어들어 오는데, 이제는 냄새만 맡아도 식은땀이 나서. 정말 어찌해야 할지.”

묵은 난감해하고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땔감을 하여 마을에 드나들면서도 흠모의 눈길로 바라보는 곱디고운 처자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묵이었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자라 버린 것일까. 천년만년 오누이처럼 지낼 것이라 생각하다니. 어리석었구나. 참으로 어리석었어.’

천명 또한 같은 사내이니 묵만큼은 잘 타이르고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건만, 막상 닥치고 보니 무엇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긴 마찬가지.

“무어라 설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예? 사부님, 뭐라 하셨습니까.”

“아니다.”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던 천명의 시선이 송화령 곁에 자리한 돌배나무로 향했다. 달빛이 좋은 날이면 인간의 모습으로 나란히 앉아 달구경을 하던 또 한 쌍의 연인들.

소나무를 향해 한껏 몸을 틀고 있는 돌배나무는 몇 년만 지나면 연리지처럼 하나가 될 것 같다. 흐음….

‘옳거니!’

천명은 묵에게 잠시 기다리라 이르곤 도포 자락을 휘어잡고 돌배나무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돌배나무를 향해 소환의 주문을 외우니 돌배 도령이 훤훤 장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돌배목령 재우, 도선님께 인사 올립니다.”

“그래. 평안하신가.”

“볕 좋은 자리 내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허허, 감사하기는. 내 자네에게 부탁이 있는데.”

무슨 일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재우가 목소리를 낮춘 천명의 이야기를 듣자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이. 저희 목령들은 상대가 인간일 경우를 제외하고는 정을 통하는 방법이 아주 많이 다른지라.”

아차차! 나무나 꽃들은 몸을 섞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기운을 섞어 열매를 맺지!

“하면 자네는.”

인간의 여인과는. 차마 묻기 민망했던 천명이 말꼬리를 늘이니 눈치 빠른 재우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송화령이 첫 여인인지라 그쪽으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어쩌죠?”

괜한 소리를 했다 싶어 민망한 천명이 하얀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낭패로군.

“묵 도련님을 가르치실 요량이시라면, 운몽산 열락 님께서 잘 설명해 주지 않으실까요? 인간의 처가 있었다 들은 적이 있는데.”

재우의 말대로 도깨비 열락은 운몽산을 비우고 술과 미녀를 쫓아 나비처럼 인계를 떠돌았다. 지금이야 백원후에게 목을 매고 있다지만, 예전에는 내로라할 만큼 유명한 풍류랑이었다.

“그리하면 되겠군. 고맙네.”

“도움이 되었다니 한없이 기쁩니다. 도선님.”

재우가 돌배나무로 들어가 버리자 천명은 다시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운몽산에 드나들며 창검술을 익혔던 묵이니 열락에게 잠시 맡겨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

“망할! 늑대가 돌아왔어!”

미친 듯이 날개를 퍼덕이는 반야의 말에 여울이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자라처럼 목을 빼고 상사굴 안을 들여다보니 정말 어둠 속에 두 개의 금별이 반짝인다.

“이랑군!”

월광석을 삼킨 뒤로 사라졌던 이랑군이 이십여 일 만에 돌아온 것이다.

“여울아! 조심해! 굶주려 있을지도 모른다고!”

반야의 비명에도 아랑곳없이 여울은 앞뒤 가리지 않고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곤 이랑군의 목을 한 아름 끌어안았다.

“이그으으으! 엄청나게 걱정했다고.”

온몸을 흔들어 대며 얼굴을 묻으니 이랑군의 꼬리가 바닥을 두어 번 친다. 기대했던 격렬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으르렁대며 물지 않는 게 어디야!

“바보야! 얼마나 걱정했었다고!”

여울은 이랑군이 돌아온 것이 더없이 반가웠다. 털빛도 좋아지고 부드러워진 것이 담갈색 눈동자가 여울을 향해 한결 다정히 빛나고 있다.

“도대체 어디 갔었어! 응?”

“어딜 가긴! 쏘다니며 실컷 살생이나 하고 다녔겠지.”

동굴 입구에서 날갯짓하는 반야의 뾰족한 목소리에 여울이 눈을 흘겼다.

“좀 다정하게 대하면 안 되니?”

여울의 목소리에 날이 서자 말리는 듯 이랑군이 주둥이를 들이댔다. 촉촉한 코를 여울의 얼굴에 대며 이랑군이 그녀의 얼굴을 죽죽 핥아 대기 시작했다.

“까르르르, 아우. 그만, 그만해. 간지러워.”

“아우, 더럽게. 아무튼 맘에 안 들어, 췟!”

둘 사이가 눈꼴시어 못 보겠다는 듯 반야가 파드득 날아가 버렸다.

“반야! 어휴, 성질하고는. 누굴 닮아 저러지.”

한숨도 잠시, 긴 꼬리털을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이랑군이 여울은 더없이 정겹다. 이랑군의 볼을 잡아 두 눈을 마주쳤다.

“어휴, 얼굴이 반쪽이 됐네. 굶고 다닌 거야?”

여울의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이랑군이 상사굴 깊은 곳으로 들어가더니만 무언가를 물고 나타났다.

“어? 고기!”

냄새를 맡아 보니 노루 고기인 듯싶은데, 날것이 아닌 말린 고기? 이랑군이 육포가 어디서 났을까?

“반야가 네게서 강한 요기가 느껴진다 하던데. 정말 요괴인 거야? 늑대 모습으로 사냥해서 인간으로 변해 육포를 말려 온 거야? 그런 거야?”

이랑군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울이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요괴였다면 내가 못 알아볼 리 없어. 개천에서도 수많은 요괴나 귀신들을 보았는걸!

“아우, 너도 할머니께 부탁해서 언문 좀 터 달라고 해야겠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백원후의 이름이 나오자 이랑군의 털이 곤두섰으나 여울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를 베고 벌러덩 누워 버렸다. 그러곤 이랑군이 가져온 육포를 뜯었다.

“흐음! 맛있어. 아우, 구수해. 냄새도 좋다.”

열락에게 무술 훈련 받으러 가는 묵이 가져다주는 육포보다 훨씬 맛이 좋다.

“쩝쩝쩝. 아우 맛나, 아우우우우. 맛나.”

인간의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간사하다. 그저 벌을 받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상사굴이 이랑군 하나만으로 너무나도 안락하여 편안해지니 말이다.

툭, 투둑. 툭, 툭.

벌떡 일어나 동굴의 입구로 다가선 여울은 이내 쏴아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반야!”

비를 싫어하는 반야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다.

‘집으로 들어갔으려나?’

집이 있는 위쪽을 올려다보던 여울은 고민이 되었다.

‘오라버니는 많이 다친 걸까? 오늘은 돌아오라 하시지 않겠지?’

별다른 기별이 없으니 오늘은 꼼짝없이 상사굴에 머물러야 했다. 여울은 기운을 내어 커다란 돌을 밀어 입구를 닫았다. 물론 반야가 들어올 틈을 남겨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사굴에서 벌을 받을 때는 반야가 늘 함께였는데, 네가 있어서 반야가 들어올지 모르겠다.”

주문을 외워 나무에 불을 만들까 하던 여울은 그냥 이랑군의 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의 온기만으로도 충분했다.

“둘이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될까? 내 욕심이겠지?”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앞발에 턱을 대고 있던 이랑군의 꼬리가 바닥을 툭툭 친다.

“반야도 엄청 좋은 아이야. 이랑군은 사내니까 응? 묵 오라버니가 내게 하는 것처럼. 반야가 쌀쌀맞게 굴어도 아껴 주어야 해, 응?”

이번에도 이랑군은 꼬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래. 그래야 사내장부지.”

앉으니 눕고 싶고 푹신한 이랑군을 베고 누우니 잠이 솔솔 스며든다.

가물가물 잠이 들락 말락.

“여울아.”

“오라버니?”

여울이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닫아 두었던 입구의 큰 돌이 밀려나며 묵이 나타났다.

“오라버니, 괜찮아?”

여울이 한걸음에 다가서자 묵이 살짝 물러서며 웃었다.

뭐야. 설마 또 얻어맞을까 봐 겁먹은 거야?

오라버니이자 선배이며 여울이 넘어서고 싶은 유일한 산이지만, 막상 물러서는 묵을 보니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섭섭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랑군 왔구나?”

“어? 응.”

분명한 거부의 몸짓에 여울은 주춤거리며 멈춰 섰다.

“몸은 좀 괜찮아?”

“그럼. 나 잠시 운몽산에 다녀오려고.”

“운몽산에?”

“금방 다녀올게.”

“어, 응.”

“사부님이 올라오라 하셔. 그 말 전하러 왔어.”

“오라버니!”

도망치듯 돌아서려는 묵을 불러 세운 여울이 두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나한테 화났어?”

부모에게 버림받은 여울은 비렁뱅이로 자라 영주 사람 모두가 그녀를 더럽다 피해 다녔다. 세상 모두가 그녀를 싫어하고 미워해도 묵에게만은, 그에게만은 미움받고 싶지 않다.

“오라버니, 미안해.”

그녀답지 않게 여울이 고개를 숙여 버렸다.

조용히 바라보던 묵이 여울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오라버니.”

“여울아, 여울아아.”

“오라버니, 나 숨, 막혀.”

“너 때문에 죽겠어.”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여울에게 둘러진 묵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간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오라버니.”

“너만 보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기분이 너무 이상해.”

왜일까. 여울은 기분이 좋아졌다. 늘 예쁘다 예쁘다만 했지 얼마큼 예쁜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내색 않던 묵이었다.

“보고 있어도 무언가 아쉽고 허전해.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

“응.”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묵에게 팔을 둘러 마주 안고 싶었다. 그러나 줄에 묶인 것처럼 그에게 안겨 있는 여울은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다.

“오, 오라버니.”

“답답한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아, 여울아.”

“나도 오라버니가 좋아. 너무너무 좋아. 고기보다 술보다 훨씬 좋다고.”

“술?”

‘술’이란 소리에 묵이 갑작스레 여울에게서 몸을 뗐다.

“너 술이 뭔지 알아?”

“어…. 내가 술이라고 했어?”

데굴데굴 눈알을 굴리던 여울이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자 묵이 다시 와락 끌어안았다.

“금방 다녀올게.”

“응.”

“이랑군 왔다고 너무 돌아다니지 말고.”

“응.”

“다녀오고 나면 가슴이 조금 덜 두근거렸으면 좋겠다.”

“알았어. 빨리 와야 해.”

“그리고…. 너무 세게 묶지 마.”

“뭐?”

미어터지게 여울을 끌어안았던 묵이 그녀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입맞춤을 했다.

“가슴. 아주 예뻐. 만져 보고 싶을 만큼.”

붉게 달아오른 얼굴 들킬세라 묵은 순식간에 빗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헤에에에….”

헤벌쭉 입이 벌어진 여울이 그녀의 몸에 남아 있는 묵의 온기를 붙잡듯 제 몸을 감싸 안았다.

사르르륵.

“어?”

무언가 허전하다 싶어 숨을 들이켜니 도복 속으로 젖가슴을 동여매었던 천 조각이 배꼽까지 흘러내렸다. 도대체 매듭은 어떻게 찾아냈는지.

‘감쪽같이 풀어 버렸네. 재주도 좋아.’

내일부터는 조금 느슨하게 매어도 되겠다. 안 그래도 답답하고 간지러웠는데. 오라버니가 좋다니까. 뭐.

‘정말 힘도 세지. 꼭 끌어안아 줄 때는 정말 온몸이 터져 나가는 것 같다니까. 헤헤헤.’

여울은 동굴 벽에 기대어 묵처럼 투박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