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허주 열락 (12/34)

12. 허주 열락

수정궁에서 돌아온 지 열흘째 되던 날.

“도대체 어디를 간 거지?”

상사굴에 숨겨 두었던 이랑군이 사라졌다. 천명의 묵인하에 틈만 나면 상사굴로 달려가던 여울은 낙담하고 말았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이랑군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반야한테 찾아보라 하니.

“내가 왜? 제 발로 나간걸.”

“열락 님의 산군들은 영역에 민감하잖아. 공격하면 어떻게 해.”

“걔 보통 늑대가 아니라니까. 걱정하지 마. 호랑이도 잡을걸!”

“반야! 네가 말하는 것처럼 요괴라면 그렇게 덫에 걸려 있었겠어?”

“모르지. 상급 요괴에게 당했는지. 정말 늑대는 맞나 몰라. 이무기나 뭐 호랑이 같은 게 둔갑한 건 아닐까?”

“어휴, 의리라고는 쥐방울만큼도 없어.”

“쥐한테 고양이를 찾아오라니! 그런 말 하는 여울이 더 의리 없어! 흥! 흥! 흥!”

반야는 태풍 같은 콧방귀를 뀌어 대며 둥지로 들어가 버렸다.

‘하아…. 도대체 어디를 간 거지?’

밤이 되어도 여울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상처가 나아 핏물이 빠지니 털은 잿빛으로 눈동자는 적색이 아닌 부드러운 담갈색으로 제 색을 되찾았다.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따뜻한 호박색…. 어디선가 본 듯한데….’

정말 잘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피라면 질색하는 묵 대신 함께 사냥도 하고 잔소리꾼 반야보다 조용하니 정말 좋은 동무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라고, 저를 업고 오느라 아픈 허리가 아직도 쑤시는구먼. 도망을 가?’

눈에 불을 켜고 도망간 아이들 잡으러 다니던 개수 생각이 났다. 하긴, 그녀 또한 행여나 이랑군 덕에 고기 한 조각 얻어먹지 않을까 기대를 했으니 개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어휴~.”

툭, 투둑. 후드득, 후드득.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점점 거세어지더니 이내 폭포수처럼 쏟아붓기 시작했다. 덩달아 여울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억수같이 비가 오는데, 어디서 헤매고 있으려나. 설마 장마철 돼지처럼 물에 떠내려가진 않겠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자꾸만 새어 나오는 여울의 한숨 소리에 답이라도 하듯 휘장 너머로 묵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뜨끔하여 입을 다물고 있자니 침묵을 깨고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온다.

“여울아.”

“응.”

“잠이 안 와?”

“응.”

“눈 감고 네가 좋아하는 주문 외워 봐.”

수물 수래 가우평야 토우 토래 가우평이 사우명이 가우사라.

수물 수래 가우평야 토우 토래 가우평이 사우명이 가우사라.

수물 수래 가우평야….

“그래도 안 와.”

“다시 해 봐. 천천히.”

“나 오라버니랑 같이 자면 안 돼?”

예전에는 그의 품에 안겨 잠든 시간들이 더 많았는데, 수정궁에서 돌아온 뒤로 묵은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꺼려 했다.

“안 돼?”

묵묵부답. 섭섭함에 이랑군도 잊고 심통이 나 누워 있자니 그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와.”

냉큼 일어나 휘장 사이로 고개를 내밀자 한쪽 팔을 괴고 누운 묵이 옆자리를 두드린다. 후다닥 그의 곁으로 달려가 벌러덩 누웠다.

“이랑군 때문에 그러는구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너무나 다정하여 여울이 묵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그의 향기는 언제나처럼 그윽하고 포근했다. 세상이 무너져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너무나 안전하게 느껴진다.

“돌아가겠다 하면 놓아주기로 했잖아.”

“아직 몸도 성하지 않은데.”

“괜찮을걸?”

“정말?”

“월광석도 훔쳐다 먹였잖아. 천 년은 더 살 거야.”

“그럴까?”

사부님의 옷장에서 훔쳐다 이랑군에게 먹인 월광석은 천 년에 한 번 떨어질까 말까 한 별똥별로 만든 귀한 물건이었다.

열두 개 중 송이가 하나, 여우 주막에서 하나, 이랑군에게 하나 먹여 버렸으니 남은 것은 아홉 개뿐이다.

“사부님이 눈치채면 어쩌지?”

“도력이 높으셔서 월광석 쓰실 일이 거의 없으셔. 그래서 비슷한 돌로 똑같이 깎아다 섞어 놨어.”

“하아아아, 비라도 그쳤으면 좋겠는데.”

“비가 와야 나무도 풀도 살지. 요즘 너무 가물었다고.”

점점 더 사부님을 닮아 가는 묵의 말투에 여울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요즘은 꿈 안 꿔?”

“꾸는데 기억이 잘 안 나.”

“그렇구나.”

그는 날이 갈수록 조용해지고 묵직해지는 것이 점점 바위로 변해 가고 있는 것 같다. 묵이 잠들까 싶어 여울은 다시 이랑군 이야기를 꺼낸다.

“이랑군이 비를 맞고 있으면 어쩌지?”

“원래가 그리 살아온 짐승인데 뭐. 괜찮을 거야.”

“내가 안 괜찮다고.”

“비 멈추는 주문 외울까?”

“됐어! 풀도 나무도 먹고 살아야지.”

여울을 품어 안은 묵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웃고 있는지 그의 몸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신경질이 모락모락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어휴, 망할 놈. 도대체 어디를 헤매고 다니는 거야!’

데려온 날부터 죽은 듯이 누워 있기만 했던 이랑군이었다. 먹어야 기운을 차리지 싶어 개구리를 잡아다 주었는데 영 먹지를 않았다.

다음 날 가 보니 여울에게 보란 듯이 개구리를 상사굴 벽에 던져 붙여 놓았다.

“늑대는 개구리 안 먹나?”

“흐음, 맹수의 자존심인가?”

불쌍한 개구리는 차마 버릴 수가 없어 여울이 먹긴 했지만, 한 시진 가까이 기도를 해야 했던 그녀는 이랑군이 괘씸했다.

“자존심은 개뿔! 췟! 먹어야 살지.”

순간 여울은 머릿속으로 별똥별이 떨어졌다. 천명의 옷장 속에 들어 있는 재주 많은 월광석이 생각난 것이다.

‘괜히 먹였나? 괜히 먹였나 봐, 히잉.’

월광석 먹고 기운이 뻗쳤는지 이랑군은 그날 밤 사라져 버렸다. 닷새 동안 정이 들었던 여울만이 잠 못 이루며 쓰린 마음 달랠 길이 없다.

“너무 마음 쓰지 마. 돌아다닐 만하다는 증거니.”

“정말? 안 돌아오려나?”

“모르지. 은혜 갚으려 사냥 나갔는지도.”

“훗!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마에 닿는 묵의 입술을 느끼며 여울은 잠에 빠져들었다.

***

중단되었던 도술 공부가 다시 시작되었지만, 여울은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수이 수야 가로 시네 에도 에베베베베.”

수령을 다스리는 주문서를 읽는 여울의 혀에 쥐가 난다. 도대체가 말이 말 같아야 입에 붙어 읽지.

각설이 타령을 불러 대던 개천이 그립다고 하면 한 대 얻어맞겠지?

“수이 수야 가로 시네 에도 화평 가니 에라이?”

비슷비슷한 말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니 외워야 할 주문들이 만 개가 넘었다. 작은 초가집 벽을 빼곡하게 매우고 있는 서책들 모두 그녀의 차지가 될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고기 고기 노래하듯 그리 자연스레 입에 붙어야 비로소 도술은 완성이 될 것이니. 게을리 말거라.”

곁에 앉아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는 천명의 하얀 수염이 하늘하늘 바람에 날렸다.

“수이 수야 가로 시네 에도 화평 가니….”

“수라 수사 우로 우에.”

조금이라도 늘어지는가 싶으면 눈 감고 있던 천명이 주문을 이어 붙인다. 주무시는 것이 아니었구나.

“물의 령에게 이르노니. 음, 내가. 음….”

“내가 너의 뿌리로 화평을 이루노라.”

뿌리박은 나무처럼 곁에 앉은 천명 때문에 여울은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목욕을 한 지 얼마나 된 게냐.”

“엊그제 했는데요.”

“그런데 왜 자꾸 긁어.”

가슴을 동여맨 천이 너무 세게 묶였나 자꾸 간지럽다. 묵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 순간, 가슴은 그녀에게 불필요한 살덩이로 전락했다.

“사부님!”

“오냐.”

“주문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얼마나 많은 것을 행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어찌 사용해야 하는가가 중요하지 않겠느냐.”

“모두가 도술을 배우면 놀고먹을 수 있지 않나요?”

“도술이라는 것이 얼핏 보면 환영이나 눈 속임수 같아 보이지만.”

“아닌가요?”

“껄껄껄, 그건 골패꾼들이나 하는 짓이고.”

진정한 도술이란, 도를 닦는 이의 심신을 정갈하게 단련하여 그 투명한 그릇에 자연의 기운을 조합하여 운용하는 기술이다.

“세상의 근본은 음양이요. 만물은 모두 음양을 갖추었으니 도술을 부린다는 것은 만물의 기운을 다스린다는 것을 뜻한다.”

“어렵네요.”

“농부가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수확을 하여 사람들을 먹이듯이, 도선들은 정갈한 그들의 몸을 중개로 만물의 기운을 이용하여 널리 인간들을 이롭게 하지.”

풀 한 조각 돌멩이 하나도 삶에 이유가 있듯, 모두가 도선이 될 수는 없다. 주문을 외운다는 것은 필요로 하는 기운을 가진 자연과의 소통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네가 축지법을 쓰려 한다면 지맥을 축소하여 먼 거리를 가깝게 하여야 하는데, 그리하려면 땅의 기운을 먼저 읽어 내야 하지 않겠느냐.”

예전에 묵의 머리 위로 떨어졌던 생각을 하니 여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땅의 기운은 읽을 생각도 없이 어설픈 주문만 외워 댔으니 높낮이의 차이가 생겨 뚝 떨어져 내릴 수밖에.

“또한 물의 기운을 운용함에 있어 불을 끄고자 비를 내리려 한다면, 가까이 있는 강이나 개울에서 물의 기운을 불러들이는 소환의 주문을 외워야 할 것이다. 이는 인간들이 기우제를 지내는 것과 같은 이치란다.”

“하면 도선이란 자연의 기운을 부리는 이가 아니라 자연과 소통하여 그 기운을 운용하는 재주를 가진 이라 할 수 있겠네요.”

“그렇지.”

“그럼, 신녀나 무녀나 도선은 같은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소통하는 것은 같다 할 수 있으나 그 근본이 다르니. 신녀는 하늘을 섬기고, 무녀는 귀신을 섬긴다.”

“그럼 도선은 누구를 섬기는 건가요?”

“도선의 술법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사용이 되니, 결국 도선이 섬기는 것은 인간이라 할 수 있겠구나, 껄껄껄.”

강한 힘을 통해 누군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약한 이들을 섬긴다는 말에 여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착하네요. 암요. 착하게 살아야죠. 할머니도 그랬어요. 모든 것은 행하는 이에게로 돌아오는 법이라고.”

“껄껄, 그렇지.”

“나쁜 도선은 없나요?”

“도선은 인간으로 태어나 득도하여 신선에 오른 이들로 득도의 길이 스스로를 계속 깎아내리는 과정이라. 내 아직, 사술을 행하는 이는 들어 보지 못하였다.”

“하면 모두가 사부님처럼 이리 산속에 숨어 제자를 길러 내며 살아가나요?”

“제자들을 길러 도리를 펼치든가, 혹은 전국을 떠돌며 의술을 행하든가. 때로는 인간의 왕을 보필하기도 하고, 드물게 요괴들을 잡는 이들도 있지.”

“요괴를 잡아요?”

“퇴마사라 하여 인계에 해악을 끼치는 요괴나 악령들을 퇴치하는 도선들이 있다.”

“우앗! 멋진데요?”

여울은 언젠가 요선각에서 이무기 영노를 말 한마디에 쫓아 버렸던 천명을 떠올리며 손뼉을 쳤다.

“저도 그리되고 싶습니다.”

“퇴마사가 되고 싶은 게냐?”

천명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어째서 퇴마사가 되고 싶을까. 계집아이들은 대부분 의선이 되기를 원하는데.”

“개천에 살 때도 제가 대장이었는걸요? 그저 그렇게 다른 계집아이들처럼 살고 싶지는 않아요.”

“하긴 계집이라 하여 모두 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지.”

“개천에 살 때 요괴나 귀신이 붙은 이들을 많이 보았어요. 그들을 해방시켜 주고 싶어요. 사부님이 제 어깨에서 환이란 요괴를 떼어 주신 것처럼.”

“껄껄껄, 퇴마사가 되려면 공부를 더욱 열심히 해야겠구나. 의술도, 무술도, 도술도 최고가 되어야 할 테니.”

웃음 짓는 천명을 향해 여울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몸 쓰는 일에는 자신 있는 여울인지라 도술이나 의술보단 무술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도술의 기본은 지금 네가 외우고 있는 자연과의 소통이 될 것이니 그 중점은 소환에 관한 주술이다.”

“뱀 요괴를 만났을 때 천적인 조수를 소환하는 것처럼요?”

“그렇지. 해가 있으면 달이 있듯, 그 어떤 것에도 극이 되는 것이 존재하니 양은 음으로 다스리고 또한 음은 양의 기운으로 눌러 주는 것과 같다.”

“물과 불은 상극인데도 어째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처럼 느껴지네요.”

“후후후, 극과 극은 통하게 되어 있지. 음양의 조화는 태초의 혼돈과 같은 평온이며 곧 화평과도 같다.”

혼돈과 화평이 같은 것이라.

처음 천계의 족보와 마계의 요괴들을 외울 때도 머리가 터져 나갔는데, 다시 시작된 도술 수업은 여울의 머리를 송두리째 태워 버릴 것 같았다.

“자,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자. 내일은 술법들이 어찌 통용되는지 눈으로 보여 줄 터이니.”

“아녜요. 퇴마사가 되려면 더욱 열심히 해야 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하면 조금 더 해 볼까?”

짐짓 말꼬리를 늘이는 천명을 보며 여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퇴마사가 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 주고 싶었을 뿐인데.

괜한 공치사에 발목만 잡혔구나!

“껄껄껄, 그만하자꾸나.”

“예, 사부님.”

아싸!

여울은 천명이 다른 서책을 꺼내어 자리에 앉자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반야가 날아들었다.

“이제 끝났어? 완전 기다렸어. 어? 여울아. 어디 가게?”

“오늘은 운몽산 쪽으로 가 볼까 해.”

“뭐야, 또 이랑군 찾으러? 췟, 난 안 갈래.”

“그러든가.”

“은여울!”

심통이 난 반야가 여울의 머리통을 쪼아 댔지만 그녀는 피식 웃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반야가 끝도 없이 투덜거리며 여울을 쫓아 부지런히 날갯짓했다.

이랑군을 찾아 헤맨 지 벌써 열흘, 포기를 모르는 여울은 아직도 인근 산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결계는 아직이지만, 새로 배운 축지법을 쓰면 반나절에 백오십 리까지는 너끈하니까!’

영산으로 올 때 구름다리를 놓았던 운몽산은 봉우리 다섯 개를 넘어야 하는 거리다. 여덟 살 나이에는 까마득하게만 보이더니 열네 살이 된 지금은 옆집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큭큭큭, 무술을 좀 더 열심히 연마하면 조만간에 묵 오라버니처럼 맨손으로 나무를 아작 낼 수 있겠지?’

구름 사이를 나르듯 달려 정상에 다다른 여울이 유난히 짙은 운무로 덮인 바위산을 향해 소리쳤다.

“운몽산 허주 열락 님께 영산의 은여울 인사 올립니다.”

거하게 소리를 지르고 나니 몸이 날아갈 것처럼 거센 바람이 메아리로 그녀의 목소리를 되돌린다.

“없나 봐. 그냥 가자.”

“잠시만 기다려 봐. 흠흠, 운몽산 허주 열락 님께 영산의 여울이 인사 올립니다.”

산울림이 다섯 번을 돌아도 답이 없자 여울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귀를 막고 선 반야가 오만 인상을 다 썼다.

“어우, 고막 터지겠다.”

열 번이 넘게 불러 대도 열락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혈질 여울 양 슬슬 열이 올라오신다. 여울은 깊게 숨을 들이켜며 단전으로 온몸의 기운을 불러들였다.

“운몽사아아안! 허주우우우! 열라아아악!”

“됐다. 한 번만 하자!”

그녀의 말을 싹둑 베어 먹으며 운무 속에서 푸르스름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은 무슨 열 번도 넘게 불렀구먼!’

씩씩거리는 여울과 달리 검은빛을 띤 흑호 위에 올라앉은 거대한 털북숭이는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이미 흑호에 놀란 반야는 여울의 등에 발톱을 박고 들러붙어 있다.

“영산의 개귀신이 어쩐 일인고?”

“푸웁! 개귀신이래, 깔깔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웃어 대는 반야의 웃음소리에 여울의 이마로 핏대가 섰다.

개귀신은 욕 같지도 않은 욕으로 머리에 배꽃을 꽂은 송화령이 처음 했던 말이다.

“등짝에 무얼 달고 온 거지?”

“운몽산 허주 열락 님께 영산의 반야 인사 올립니다.”

“오냐, 오냐. 개귀신하고 같이 온 게로군.”

“저는 개귀신이 아니라 영산의.”

“그래, 그래. 천둥벌거숭이 여울이. 개여울이었던가?”

이런! 우라질! 튀어나오는 욕설을 삼키며 여울은 눈앞의 털북숭이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그저 너저분한 산도깨비 같은데, 정말 마계의 열두 수장 중 하나였단 말이야?

뱀처럼 목을 쭈욱 늘린 열락의 얼굴이 여울의 코앞으로 등불처럼 떠다녔다. 해괴한 모습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던 여울의 얼굴이 삽시간에 차분해졌다.

“흠흠, 은여울입니다.”

“그래, 영산의 천명 선생 밑에 있는.”

“예.”

“맞네. 천둥벌거숭이 개귀신 개여울.”

망할 털들 죄다 뽑아 줄까 보다.

빠드득 이를 갈던 여울은 이곳에 찾아온 목적을 떠올리곤 애써 웃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천둥벌거숭이 개귀신은 맞는데, 은여울입니다.”

“웃지 마라. 웃고 싶지 않은데 웃으니 무섭다.”

“얼굴은 열락 님이 더 무섭거든요.”

온통 털로 뒤덮인 얼굴에 멧돼지만큼이나 커다란 송곳니가 영 험악해 보이는 건 사실이다.

“아, 봐라. 말대답하는 꼴이 영락없이 개귀신이네.”

“푸하하하하! 맞습니다. 우리 여울이가 개귀신 같긴 하죠? 깔깔깔.”

“반야, 조용히 안 해!”

아, 진짜!

여울은 약이 올라 두 볼이 부풀어 오른다.

마계의 열두 신장 중 하나이며, 이제는 영산 주변의 열두 봉우리를 다스리는 열락이 다섯 살배기 같은 말질을 할 줄이야. 게다가 좋아 죽는 반야는 또 어떻고!

“큭큭큭, 알았다. 그만하지. 백원후에게 다녀갔다지?”

“다녀온 지 좀 되었습니다.”

“그래. 네가 왔다고 해서 난 문전 박대 당했지. 원래가 백원후의 술친구는 나, 이 열락 님이었거든.”

아하! 그래서 이리 심통이로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할머니는 사부님을 좋아하는데, 옆집 사는 도깨비는 할머니를 못 만났다 심통이니. 삼각관계인가?

“그래, 백원후께서는 잘 지내시던가?”

“예, 평안하십니다.”

“흠, 천둥벌거숭이 개귀신이 백원후에게 다녀오더니 예의를 다 차리고. 한데, 여긴 웬일이지? 내 산군들의 수염도 모자라 이제는 우리 흑호 수염마저 뽑아 가려 왔는가?”

언제 적 이야기를! 삼천 년을 살아온 도깨비 속이 이리도 좁을 줄이야.

‘어휴! 이렇게 능청스러운 농지거리를 듣고 있자니 열불이 나고, 그냥 가자니 여기 어딘가에 이랑군이 있을지 모르고. 어휴! 망할 도깨비 같으니라고!’

산군들이 있는 다른 산들은 크게 무리 없이 헤집고 다녔지만 운몽산은 경우가 달랐다. 산군들을 다스리는 도깨비의 집이기에 허락을 받아야 했다.

만약 이랑군이 이곳 어딘가에 있다면 운몽산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열락이 단박에 찾아 줄 수도 있는 문제긴 한데….

“할머니께서 따로 사례를 하신다고 하셨는데, 아직 기별을 받지 못하셨나 봅니다.”

“할머니?”

“네, 백원후 님이 저를 손녀 삼겠다 하셨거든요.”

“아, 그래?”

‘할머니’라는 소리에 길게 늘어져 흉측하게 주위를 맴돌던 열락의 얼굴이 제자리로 쏙 돌아가 버렸다. 흑호에서 내려선 열락이 휘적휘적 여울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디 보자.”

열 척이 넘는 높이에 백 년 먹은 느릅나무만큼이나 뚱뚱한 열락의 얼굴을 가렸던 머리털이 위로 곧추섰다.

부리부리하게 치켜뜬 샛노란 눈동자가 드러나니 열락의 모습은 털에 싸여 있을 때보다 더욱 기괴하다.

“백원후가 손녀 삼겠다 했다고?”

“예, 고운 옷에 노리개에 반야도 사람으로 변하게 해 주시고.”

증명이라도 하듯 반야가 퐁!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옳지. 잘한다.

시큰둥하던 열락이 관심을 보이자 여울은 헛손질하던 낚싯대에 물고기가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믿을 수 없는걸! 천신들도 함부로 못 하는 제천대성의 증손녀가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의 아이를 손녀 삼다니.”

“정말이어요!”

“네, 여울이 말이 맞습니다.”

반야가 여울의 손을 들어 올리자 자동으로 손가락이 쫙, 백원후의 보라색 가락지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언제든지 놀러 오라 이것도 주셨어요.”

“오!”

부러운 듯 여울의 손을 감싸 쥔 열락의 눈이 더욱 커졌다.

“할망구, 나는 번번이 결계 앞에서 기다리게 하더니, 네게는 열쇠를 내어 주었구나. 쩝쩝.”

“이제 믿으시겠어요?”

휙 돌아선 열락이 발을 구르자 희뿌옇던 운무가 순식간에 걷히며 아담한 정자가 나왔다.

“이리 오너라.”

정자 아래로 내려서던 여인이 질색을 하며 열락의 뒤로 숨어 버렸다.

“저, 저저. 새가 아닙니까.”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 반야가 입맛을 다시고 있다.

“제 친구입니다. 해치지 않아요.”

“소녀는 열락 님의 애첩 소백접이라 합니다.”

창백한 얼굴에 동그란 점 네 개가 찍힌 듯 눈썹과 눈만 새까만 모습이 영락없이 흰나비의 영(靈)이다.

“저 봐. 저런 반응이 보통이라고. 늑대는 날 잡아먹고, 나는 나비 잡아먹고.”

“누가 누굴 잡아먹어. 친구끼리.”

정자에 오르며 반야와 속닥거리자니 이미 자리에 앉은 열락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니, 얼굴이 완전히 돌아가 열락의 입이 머리 위로 올라가 있다.

환장하겠네. 제발 좀. 얼굴 좀 제자리에 두라고요.

“백원후의 손녀가 이 열락에게는 웬일이지?”

“제 친구가 혹시나 이곳을 헤매고 다니는 것은 아닌가 해서요.”

“친구?”

시큰둥한 여울의 반응에 재미가 없어졌는지 돌아갔던 얼굴이 제자리를 찾았다. 눈은 위에 입은 아래로.

“네, 늑대요.”

“늑대라면 이리를 말하는 건가?”

“이리든 늑대든, 개처럼 생긴 이만한.”

여울이 양손을 쫙 뻗자 열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개라.”

“아니. 개가 아니고 늑대.”

“이리를 말하는 건가?”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열락의 물음에 여울은 숨이 턱 막혔다. 오래 산다고 다 똑똑한 줄 알았더니.

어이없어하는 여울의 표정에 차를 따르던 소백접이 열락의 귀를 수북이 덮고 있는 털 뭉치를 들어 속삭인다.

“집 나간 늑대를 찾아 왔다 합니다. 이리나 늑대나 같은 동물입니다.”

“아,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열락을 보니 여울은 그제야 숨통이 트인 듯 날숨을 뱉어 냈다.

“혹시 보셨나요?”

“제대로 된 늑대라면 도깨비가 사는 곳에는 들지 않을 터인데.”

“아, 그렇겠죠?”

“그럴걸? 내가 기르는 흑호는 산군들 중에서도 가장 포악한지라. 식신들도 마구 잡아먹어 버려서 이렇게 나비나 나무 같은 식령들만 부리고 있지.”

역시나 하는 생각에 여울은 어깨가 축 늘어져 버렸다.

“하지만 내가 잡아다 줄 순 있는데. 어째, 잡아다 줄까? 백원후의 손녀라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예까지 와서는 아니 찾아 주어도 된다니. 속을 알 수가 없군.”

여울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잘 있나 궁금했을 뿐인걸요.”

“제 발로 나갔다면 굳이 찾을 필요 있나. 내가 어미 잃은 호랑이 하나 기르고 있는데, 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개보다는 호랑이가 나을 텐데?”

아 정말…. 개가 아니라니까 끝까지!

백원후의 손녀가 되었다는 말에 부쩍 친절해진 열락은 굳이 새끼 호랑이를 선물하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데리고 다니면 어지간한 수호령보다 든든할 테고.”

“제가 찾고 있는 것은 호랑이가 아닌걸요.”

호랑이가 아닌 봉황을 준다 하여도 싫다.

반야도 이랑군도 특별하고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여울에게는 개천의 친우들과 같은 벗인 것이다.

“사부님이 찾으실지 몰라 이만 가 봐야 할 듯합니다.”

“혹여라도 마주치게 되면 영산으로 보내마.”

“아, 아닙니다. 그저 잘 살라고. 아프지 말고 잘 지내라 전해 주세요.”

“흐음, 그리하마.”

“차 맛있게 잘 마셨습니다.”

“오냐. 또 다니러 오니라.”

친히 구름다리까지 놓아 준 열락에게 여울은 공손하게 절을 했다.

“이상한 도깨비야.”

“널 만난 뒤로 나는 세상에 이상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뭐야?”

“메에에에~.”

혀를 내민 반야가 후다닥 새로 변해 날아올랐다.

“어휴! 너 잡히기만 해 봐!”

말은 그리하여도 여울의 입가에는 웃음이 그득하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코딱지처럼 붙어 있는 벗이 있다는 것이 세상에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비록 그 친구가 열 받게 해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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