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랑군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들이 여울을 반기듯 아름다운 꽃눈을 내리고 있었다. 신이 나서 날아오르는 반야가 여울의 주위로 춤을 추듯 맴돈다.
“하아, 하아. 왜 이리 숨이 차.”
“삼 년 동안 먹고 자고 놀기만 했으니 그렇지!”
“에잇! 꼭 그렇게 말해야겠어!”
“메에에에에~.”
반야를 쫓아 달리기를 포기한 여울의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여울은 달리기를 멈추고 걷기 시작했다.
“췟! 없던 게 생겨서 그런 거라고!”
집에 가자마자 동여매야지. 출렁거리는 젖무덤이 영 불편하여 여울은 들어가지도 않는 가슴을 꾹꾹 누른다.
‘열네 살. 풍년이가 개수에게 시집온 나이가 열넷이라 했는데. 그럼 이제 어른인가?’
개천에서는 꿈적도 않던 시간이 사부님을 만난 후로는 참으로 빠르다. 천명을 만난 것이 여덟 살 청명절이었으니, 영산에서 삼 년 그리고 수정궁에서 사흘. 아니 삼 년. 여울은 열네 살이 되었다.
“오라버니는 어찌 변했을까? 나보다 세 살 많았으니 이제 열일곱 됐겠네. 설마 나처럼 보기 흉한 가슴이 생겨난 건 아니겠지, 큭큭.”
봉긋한 가슴이 달린 묵을 상상하니 실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정궁에 오기 전에도 여울보다 머리 두 개는 더 컸었는데. 묵을 만날 생각에 여울의 가슴이 더욱더 부풀어 올랐다.
“하아아아아! 공주님처럼 사는 것도 나름대로 좋지만 지금이 훨씬 편하네.”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백원후 때문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열매 달린 나무처럼 주렁주렁 매달았던 장신구들을 풀어내니 몸이 너무나 가볍다.
“자! 다시 달려 볼까?”
두 주먹을 불끈 쥐려니 어디선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었나?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니 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응? 반야! 무슨 소리 안 들려?”
“안 들려. 절대 안 들려.”
사실 아까부터 들려오던 소리였으나 반야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제발 사고 치지 말고 그냥 가자.
“가자! 묵 도련님이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풋,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도련님이 되었대?”
“서책에 보니 혼전 사내는 그리 부른다던데. 아, 됐고. 얼른 가.”
“아냐, 잠깐. 무슨 소리가 들리는데? 누가 다쳤나 봐.”
“이런 숲에 누가 있겠어. 그냥 가. 제발 좀!”
반야는 불안했다. 그 소리가 인간도 맹수도 아닌 요괴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여 잡아당겨 보아도 고집 센 여울은 기어이 반야의 손을 뿌리쳤다.
“가만 좀 있어 봐.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어휴, 오지랖!”
여울은 수풀을 헤치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나무가 보이자 그 아래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털 뭉치가 보였다.
‘고, 곰인가?’
덩치가 큰 털 뭉치에서 위협적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크르르르, 흐으, 흐으.
“여울아, 그냥 가자.”
“가만있어 봐.”
조심스레 다가서니 뜻밖에도 털 뭉치의 정체는.
“개?”
“어휴, 바보. 개가 아니라 회색 늑대잖아.”
개치고는 너무 크다 했다. 귓바퀴는 작지만 곧게 일어섰으며, 꼬리가 술 모양으로 늘어져 있었다.
“개하고 똑같이 생겼는데.”
“뭐, 개나 늑대나 다 비슷한 종자니까. 그런데 늑대치고도 너무 큰데?”
반야가 잘난 척을 하며 늑대란 동물에 대해 줄줄이 읊어 대는 동안 여울은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늑대가 조상이니까, 개라고 할 수 있으려나? 어? 여울아! 어디 가!”
가까이 다가서는 여울의 냄새를 맡았는지 피투성이 늑대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다친 것 같아. 왜 저러고 있지?”
“가지 마! 물리면 어쩌려고 그래.”
“물 것 같지 않은데?”
“미쳤어! 이빨 달린 것 중에 안 무는 게 어디 있어!”
“난 안 물잖아.”
“그걸 말이라고!”
“그만 좀 해. 나 여울이야. 산군 수염 뽑던 여울이라고.”
말은 그리해도 한껏 몸을 낮추고 늑대에게 다가서는 여울은 한없이 조심스럽다.
‘이상하네.’
꿈틀거리는 늑대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보이지 않는 실에 매인 것처럼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채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다쳤나 봐.”
“가지 마! 제발 말 좀 들어!”
잡아당기는 반야를 뿌리치고 여울은 기어이 늑대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무언가에 묶여 있다.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실이 주둥이에서부터 네발까지 온몸에 칭칭 감겨 살갗에 파고들어 있었다.
“이렇게 가는 실인데 왜 풀어내지 못하지?”
이빨을 드러내는 늑대의 다리 쪽에 엉켜진 실을 잡아당겼다. 굵기가 가늘어 우습게보았는데 생각보다 질기다.
크르르르, 으르르르르.
“쉬이, 성질부리지 말라고. 널 구해 주려는 거니까.”
나무를 하며 사냥꾼들이 놓은 덫에 걸린 짐승들을 보긴 했지만 이렇게 교활하고 잔인한 올무는 보지 못했다.
“누구 짓일까?”
“사냥꾼 짓이겠지.”
“사냥꾼들의 올무는 이렇게 전신을 휘감지 않아. 가죽이 상할 테니까.”
“뭐든 간에. 두고 가면 주인이 나타나겠지.”
가는 실은 살갗을 파고들어 근육을 가르고 뼈까지 닿아 피가 맺혀 있었다. 이리도 잔인한 올무를 쓰는 자라면 이 가여운 생명은 죽음으로도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풀어 주자.”
“미쳤어! 풀어 주는 순간 너한테 달려들걸?”
“내가 더 빠를걸?”
“여울아.”
반야는 미친 듯이 고개를 저어 댔다.
불길해! 불길하다고. 마을에서 가까운 곳도 아니고 초산에 덫에 걸린 늑대라니.
“반야. 너도 할머니와 거래를 했잖아. 그 대가로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며.”
“그, 그게.”
백원후와의 거래가 내내 마음에 걸렸던 반야는 여울이 눈을 뜨자마자 사실을 고했다.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여울은 반야를 품에 안고 오래 사는 것이 장땡이라며 더없이 기뻐해 주었다.
“하지만 나는 알에서 깨면서부터 너만 보고 살아왔지만 쟤는 다 컸잖아. 구해 줘도 고마운 줄 모를 거라고! 나는 기껏해야 머리털 쥐어뜯는 수준이지만! 쟤는 네 머리통을 통째로 삼켜 버릴걸!”
“이 아이도 살고 싶을 거야.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을 거라고.”
줄만 풀어 주면 여울은 잽싸게 달음박질칠 것이다. 낮잠 자는 산군들의 수염을 뽑았을 때에도 바람처럼 달렸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반야. 호랑이가 빠를까. 늑대가 빠를까?”
“모르지! 그걸 내가 어찌 알아.”
“수정궁에서 책 많이 읽었다며.”
“어유! 누가 달리기 잘하는지 알려 주는 책은 없었어.”
“흐음…. 한번 해 보지 뭐.”
“관둬! 곰만 한 늑대도 못 끊는 실을 네가 어떻게 끊어?”
“내가 아니라 네가 끊어야지.”
여울의 말에 반야가 기겁을 하며 물러섰다.
“뭐, 뭐야!”
“어떤 결계도 장애가 되지 않으리라 하셨다며. 할머니가.”
“그건 그렇긴 한데….”
역시나 반야가 고개를 젓는다.
“이게 결계라고 생각해?”
“이렇게 가늘고 반짝이는 실은 영주에서도 본 적이 없어. 분명 결계의 종류 중에 하나일 거야.”
“정말?”
“응. 결계는 문을 만들기도 하지만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방패가 되기도 한다 했어. 반대로 생각하면 누군가를 묶어 두는 올무도 되겠지?”
“아…. 그렇긴 한데.”
“한번 해 보자. 응? 잽싸게 날아가 버리면 되잖아. 늑대는 날개가 없으니까 하늘은 못 날아.”
“날지는 못하지만 뛰어올라 한입에 물어 버릴걸?”
“다리를 봐. 어지간히도 뛰어오르겠다.”
반야의 시선이 피투성이 다리로 향했다.
이내 결심한 듯 반야가 문조의 모습으로 변하자 여울이 슬금슬금 물러섰다.
“자, 그럼 나는 저만치 가 있을게.”
“나만 혼자 남겨 두고?”
“넌 날아오르면 되지만 나는 좀 거리를 둬야 유리하지 않겠어?”
“췟! 아까는 호랑이보다 빠르다고 자신만만하더니!”
“안전제일!”
여울이 멀찍이 자리를 옮기자 계획대로 반야의 부리가 실을 잡아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실이 끊어지며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났다.
핑, 피빙, 핑핑핑.
줄을 끊어 내기가 무섭게 빛과 같은 속도로 뛰어오른 늑대의 앞발이 날아오르는 반야의 몸을 낚아챘다.
크르르르르르.
피 흘리는 늑대의 발아래 깔려 버린 반야는 두려움에 휩싸여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반야!”
크르르르르.
섬뜩한 눈빛으로 노려보는 늑대의 모습에 여울은 몸이 굳어 버렸다. 산군들이야 여울이 천명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런 해를 가할 수 없지만, 어디서 굴러들어 온지 모르는 맹수는 상황이 달랐다.
‘도망가야 해.’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공포와 두려움이 삽시간에 여울을 덮쳤다.
도망가야 해.
‘안 돼. 반야를 두고 갈 수 없어.’
반야의 경고를 무시했던 여울은 후회했다. 백원후의 요력으로 생명을 연장하였다 한들, 늑대 배 속으로 들어가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크르르르, 으르르르르르.
“도•망•가•….”
파들파들 떠는 반야의 단 한마디는 여울의 가슴에 묵직한 용기를 심어 주었다.
‘바보야, 이럴 때는 살려 달라고 해야 하는 거야.’
깊게 숨을 들이켠 여울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사부님이, 그랬어.”
크으르르르르르르르.
“굶주린 개를 데려다 기르면 절대 물지 않을 거라고.”
위협적으로 이빨을 드러낸 늑대의 입에서 붉은 피가 흐른다. 온몸으로 소름이 돋아 올랐지만 여울은 늑대의 시선을 마주한 채 걸음을 뗐다.
“난 널 해치지 않아.”
피가 흘러 붉게 물든 늑대의 눈동자를 노려보며 여울은 그 앞에 몸을 낮추었다.
“내 벗을 놓아줘. 너를 자유롭게 해 준 것처럼.”
으르르르르르.
늑대의 발밑에 깔린 반야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냥 다른 동물로 변해 버릴까. 인간 말고는 변해 본 적이 없는데. 아…. 어쩌지.’
늑대의 피가 반야의 몸을 뜨겁게 적시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요기가 반야의 몸을 태산처럼 압박하고 있었다.
‘평범한 늑대가 아니야. 호랑이로 둔갑해도 여울을 지켜 낼 수 없을 거야. 아, 정말 죽겠네.’
반야는 늑대가 여울을 물까 걱정이 되어 죽을 지경이다. 바보 같은 여울은 아직도 늑대가 요괴인 줄 모르고 개처럼 대화를 하고 있다.
정말 환장하겠네!
“놓아줘. 부탁이야, 응?”
간곡한 부탁에 늑대의 위협적인 소리가 줄어들었다.
“제발 놓아줘.”
조용히 여울을 응시하던 늑대가 천천히 앞발을 들었다. 화살같이 튀어나온 반야는 하늘을 날아오르는 대신 인간으로 변했다.
“달려!”
반야는 여울의 손을 잡고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반야야!”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온 건지! 그녀보다 머리통 하나 작은 반야에게 붙들려 정신없이 내달리던 여울은 순식간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하아, 하아. 잠깐만. 하아, 세상에. 반야. 세상에서 제일 빠른 건 인간으로 변한 문조인가 보다. 하아, 하아.”
더 이상 달릴 수 없어 멈춰 선 여울이 뒤를 돌아보았다. 다친 늑대가 설마 쫓아오려나 했건만, 이런 우라질!
“반야! 달려!”
이번에는 여울이 반야를 낚아채 달리기 시작했다. 피투성이 늑대가 그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하아, 하아. 아직도야?”
영산으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쉬지 않고 달렸으나 늑대는 절뚝거리며 그들의 뒤에 있다.
“반야! 날개를 펴! 가서. 오라버니 불러와!”
“싫어. 널 두고 어떻게 가!”
“가! 이렇게 가단 잡힌단 말이야. 하아하아!”
“망할 개새끼! 왜 쫓아오고 지랄이야.”
큭큭큭, 역시나 여울의 반야다.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찰진 욕설에 여울은 웃음이 나왔다.
“깔깔깔, 어서 가! 오라버니한테 가.”
여울의 독촉에 내달리던 반야가 하늘 높이 뛰어오르며 손을 뻗었다.
“하아, 하아. 빨리 가.”
반야가 푸른 하늘을 가르며 높이 날아오르자 여울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상처가 심한 탓인지 아까보다 더 거리가 벌어진 늑대는 곧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하아, 하아. 힘드냐? 아우우, 나도 힘들어 죽겠다.”
살려 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란다고. 도대체 왜 쫓아오는 거야. 피로 떡칠을 해 가지고서.
“오지 마. 그냥 거기 있으라고.”
한시름 놓은 여울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조금만 있으면 묵이 달려올 것이다. 오라버니만 오면 저런 늑대쯤이야 한주먹감이지.
‘어?’
점점 거리가 벌어지던 늑대가 주저앉았다. 잘됐다 싶어 여울은 늑대를 힐끔거리며 더욱 빨리 걸음을 옮겼다.
‘제기랄! 저리 주저앉아 버릴 줄 알았으면 오라버니는 부르지 말걸. 창피하게.’
슬그머니 돌아보니 이제는 아예 드러누우셨다.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서 늑대를 지켜봐도 움직임이 없다.
‘왜 저러고 있지?’
호기심도 지나치면 오지랖에 속한다.
여울은 발길을 돌려 늑대에게로 향했다.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아까보다 더욱 조심스레 다가서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늑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게 뭐하러 죽기 살기로 쫓아와.”
올려다보는 늑대의 눈빛에 공격성은 보이지 않았다.
“많이 아픈 거야?”
여울이 할딱이는 늑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반야의 말처럼 처음부터 널 풀어 주지 말았어야 한 거니?”
물음에 답하듯 늑대의 주둥이가 여울의 손에 닿았다. 고통스러운 숨결이 차갑고도 따뜻하다. 늑대의 혀가 여울의 손을 핥았다.
흥건하게 피가 묻어나는 손을 내려다보던 여울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얘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처음부터 이렇게 순하게 굴었으면 좋았잖아.”
여울은 망연하게 늑대를 쳐다봤다.
데려가자니 늘어져 버린 늑대를 업고 가기엔 너무 크고, 두고 가자니 이대로 죽을 것 같고.
‘게다가 죽을 뻔한 반야가 알면 생난리를 칠 텐데.’
생각 끝에 여울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미안해. 사부님이 그러셨거든. 마음 주는 모든 것들이 나의 족쇄가 된다고.”
사부님, 묵, 반야, 할머니와 개천의 아이들까지. 마음 준 데가 너무 많아서 족쇄 장사해도 될 정도라고.
“그러니까 원망하지 마. 너까지 데려가면 난 정말….”
여울은 늑대를 뒤로하고 영산을 향해 걸음을 뗐다.
“망할!”
다섯 걸음도 걷지 못한 여울이 다시 돌아본다. 여전히 그녀를 향해 있는 담갈색 눈동자.
느릿하게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한다. 이대로 눈을 감아 버리는 건 아니겠지?
후다닥 달려간 여울이 늑대 앞에 주저앉았다.
‘오라버니가 보면 피 때문에 기절하겠어.’
주문을 외워 출혈을 막고 털을 흥건히 적신 피들을 말려 버렸다. 어찌해야 하나. 두고 가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데려가자니 사부님 불호령이 걱정이다. 고민하며 바라보던 여울은 결국 늑대의 앞발을 잡아 어깨 위로 잡아당겼다.
“끄으응차! 더럽게 무겁네.”
목도리를 두르듯 어깨 위로 늑대를 짊어지니 다리가 후들거려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실랑이를 한 뒤에야 여울은 걸음을 옮길 수가 있었다.
“또 그렇게 이빨 보이기만 해 봐. 모조리 뽑아 버릴 테니까.”
늑대는 죽은 듯 답이 없었다. 여울은 앞발과 뒷발을 가슴 위로 교차하여 봇짐을 메듯 꼭 부여잡고 걷기 시작했다. 덥고 무거운 데다 진동하는 피비린내까지, 숨이 차오른다.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 그녀를 향해 뛰어오는 묵의 모습이 보였다. 꿈에서도 보고팠던 묵이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여울아아아아아아!”
여울은 둘러멨던 늑대를 조심스레 내려놓고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오라버니이이이이!”
묵은 품 안으로 안겨 든 여울을 꼭 끌어안았다.
뭉클한 것이 가슴에 맞닿자 묵의 심장이 미친 듯이 팔딱이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삼 년 전보다 더욱 짙어진 그녀의 향기에 정신이 아찔하다.
“하아, 하아. 여울아, 아아. 여울아.”
“오라버니. 너무 보고 싶었어. 나 안 보고 싶었어?”
“올해도 안 오면 데리러 가려 했다.”
“정말?”
그에게서 몸을 뗀 여울이 한참이나 더 커진 묵을 올려다보았다. 안 본 사이 어찌나 늠름하고 장대해졌는지.
“우아아아아, 오라버니 몸이 왜 이리 딱딱해졌어?”
서글서글한 눈동자 위로 수리의 날개 같은 눈썹에 딱 어울리는 굵직한 턱 선, 쫙 벌어진 어깨가 한없이 듬직하다. 게다가 알 수 없는 야릇한 냄새까지.
“여울아….”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묵도 마찬가지였다. 갸름해진 여울의 얼굴은 도자기처럼 맑아 빨간 입술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동그랗기만 하던 눈도 살짝 가늘게 꼬리를 내린 것이 가슴 설레는 웃음이 달려 있다.
“예, 뻐졌네.”
“새삼스럽게.”
여울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올려다보니 묵의 얼굴은 더 짙은 노을로 물들어 있다.
“정말?”
“많이 변한 것 같다. 머리카락도 많이 길어지고.”
묵의 말에 여울이 양손으로 가슴을 쥐고 흔들었다.
“가슴만 커졌어.”
“어? 아…. 음.”
눈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외면하는 묵의 반응이 여울은 섭섭했다.
‘이상하네. 할머니가 보여 준 춘화첩에는 사내들이 죄다 여인네 가슴 주무르고 있던데. 오라버니는 싫은가?’
안 그래도 부풀어 오른 가슴이 못마땅하던 판에, 그나마 사내들이 좋아한다 하여 묵도 좋아하겠거니 위로하고 있었건만.
“싫어?”
“뭐가?”
“나 가슴 커진 거. 마음에 안 들어?”
“아, 그게. 뭐, 마음에 들고 안 들고가 어디 있어. 여울이는 여울인 거지.”
“가슴도 내 가슴이니까 좋아해야지. 만져 볼래? 물컹거려 보이지만 생각보다 딱딱해. 진짜야.”
꿀렁, 꿀렁. 묵의 단전이 뻐근해지는가 싶더니 얼굴의 핏줄이 터져 나간다.
“어, 그게….”
난감해진 묵을 구해 준 것은 반야였다.
“끼야아아아! 미친 것 아냐! 저 짐승은 왜 여기 있어!”
순간 둘의 시선이 쓰러져 있는 늑대에게로 향했다.
초주검이 되어 있는 늑대의 모습에 묵이 여울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네가 그런 거야?”
“설마. 올무에 걸린 걸 풀어 주니 쫓아오잖아.”
“정말! 너란 아이는!”
나무를 하고 있던 묵은 여울이 위험하다는 반야의 말에 결계를 열어 초산을 헤집고 다니던 중이었다.
“다친 데 없어?”
“응, 괜찮아.”
여울의 말에도 바닥에 무릎을 댄 채로 그녀의 몸을 구석구석 살피던 묵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미쳤어! 정말! 말도 너무 안 들어! 어쩌자고 저걸 여기까지 끌고 왔어! 우릴 죽이려고 했다고.”
미친 듯 날갯짓하는 반야의 모습에 묵이 여울을 올려다봤다.
“넌 여기 있어.”
“오라버니.”
순식간에 살기를 드리우는 묵의 눈빛에 여울이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잡았다.
“뭐, 뭐 하려고.”
“가만히 있어.”
뼈를 부수고 오장육부를 터트려 주겠어!
여울의 손을 밀어낸 묵이 늑대에게 다가섰다.
“오라버니!”
늑대의 목덜미를 움켜쥔 묵이 거대한 늑대의 몸을 집어 올리자 여울이 그에게로 달려왔다.
“하지 마! 오라버니! 그러지 마!”
“비켜.”
“죽이지 마. 오라버니이!”
“널 해치려 했어.”
“아니야. 그런 것 아니야.”
“뭐가 아니야. 얼른 죽여 버려요.”
앙칼진 반야의 목소리에 여울이 늑대를 끌어안았다.
“오라버니, 그런 것 아니야. 무서워서 그랬을 거야. 죽을까 봐. 그래서 그런 거야, 오라버니이!”
여울은 죽기 살기로 묵에게 매달렸다. 개미 한 마리 죽이지 못하던 묵의 손에 힘줄이 섰다. 언젠가 상사굴에서 묵을 따라 나온 귀신이 여울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에도 그는 이렇게 섬뜩한 살기를 피워 올렸었다.
“오, 라, 버니.”
아니, 절벽에서 그녀의 손을 놓았던 묵을 보는 것 같아 여울의 두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제발…. 그러지 마.”
여울의 눈동자로 말간 눈물이 차오르자 늑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던 묵의 손이 힘을 잃었다.
“울, 지 마.”
묵은 여울을 품에 안았다. 그녀의 눈물이 왜 이리도 그의 가슴을 찢어 놓는지. 숨을 쉴 수가 없다.
“울지 마. 죽이지 않을게.”
“흑흑, 무섭게 왜 그래.”
“울지 마.”
난, 난 네가 울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
“오라버니…. 흑흑흑.”
“알았어. 그러니까 그만 울어.”
사납게 달려들던 계집아이가 어느새 달콤한 향기 품고 눈물짓는 여인네가 되었던가.
“집에 가자.”
“늑대는?”
어느새 늑대를 끌어안고 두 눈을 깜박이는 여울의 눈망울에 묵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 물건을 가져가자고?
“안 돼. 사부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왜에.”
“늑대는 육식 동물이야. 식구들 모두 채식인데 어떻게 기르려고 해.”
육식이라 더 좋은 거지. 이 여울에게도 고기 좋아하는 동무가 생길 테니까.
“데려갈래.”
“안 돼.”
“하으응, 오라아버니.”
헉! 뭐, 뭐야. 도대체 수정궁에서 무얼 삼킨 거야.
“으응, 아흐응.”
요상한 콧소리를 내는 여울의 모습에 그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오글오글한 것이 묵은 심장이 벌렁거리며 온몸이 간질간질하다.
“뭐, 뭐 하는 거야.”
여울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비처럼 눈썹을 팔랑거렸다.
사내에겐 애교와 눈물이 최고의 무기라던데. 제발 먹혀라!
“오라아아아버니이이이, 아으응.”
“아, 아아, 안 된다고 했잖아.”
“진짜?”
“안• 돼•!”
“몸만 나으면 끼니 정도는 혼자서도 알아서 해결할 거야. 그렇지?”
대답이라도 하는 양 늑대 머리털을 움켜쥔 여울이 위아래로 흔들었다.
‘덕분에 나도 좀 얻어먹고.’
늑대 머리를 흔들어 대는 그녀의 모습에 묵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안 돼! 절대 안 돼!”
“싫어. 데려갈 거야.”
“안 돼.”
“됐어. 안 된다고 하면 나랑 반야랑 얘랑 셋이서 상사굴에서 살 거야.”
“누가! 늑대랑 산대! 싫어!”
반야가 비명을 질러 대자 여울이 매섭게 눈을 흘겼다.
“췟! 그래라. 그럼 난 이랑군이랑 상사굴에서 둘이 살 거야.”
“이랑군?”
“응, 얘 이름이야.”
묵은 어이없는 이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여인이 되어 돌아왔지만 몸만 커서 왔는지 속에 든 알맹이는 그대로다.
“이랑군이라 부르겠어. 손오공과 용감하게 싸웠던 이랑진군의 이름을 따서.”
늑대에게 옥황상제의 조카 이름을 붙이다니. 벼락 맞을 짓을 하고도 해맑게 웃는 여울이 묵은 무섭다. 하지만 그래도.
“안 돼! 안 된다면 안 되는 줄 알아.”
짙은 눈썹을 한껏 치켜세운 묵이 팔짱을 끼곤 고개를 저었다.
“췟! 맘대로 해. 삼 년 만에 만나서 구박이나 하고, 흥!”
“삼 년 만에 만난 누이가 이렇게 떼쟁이가 됐을 줄 누가 알았겠어.”
더 이상 말씨름하고 싶지 않다. 여울은 늑대를 다시 어깨에 짊어졌다.
오라버니가 오면 대신 들어 줄 줄 알았는데, 망했다!
“여울아.”
“됐어.”
“데려간다 해도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살릴 거야. 꼭 살려서 같이 사냥도 다니고.”
“사냥?”
“아 몰라.”
속내를 들켜 버린 여울이 앞서 걷기 시작했지만 얼마 걷지 않아 삐질삐질 땀이 흘러내린다.
뜨거운 여름날 땡볕 아래 털북숭이를 어깨에 두르고 가려니 죽을 둥 살 둥 여울은 목으로 핏대가 선다.
“걱정하지 마. 이랑군!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목덜미로 전해지는 이랑군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여울은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걸어갔다.
결심은 실로 단호하였으나 영산의 초입은 보이지 않고, 호랑이만 한 이랑군은 점점 무거워지니 허리가 끊어져 나갈 것 같았다.
“여울아.”
“흐응.”
흥! 이라고 짧고 강렬하게 콧바람을 쏴 줘야 하는데, 힘이 들다 보니 바람이 샌다.
“말 시키지 마. 힘들어.”
묵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늑대의 숨통을 끊어 내려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으나 보통 무게가 아니었다. 힘이 들면 버리고 가겠거니 내버려 두었지만, 역시나 그녀는 무엇 하나 포기하는 법이 없다.
“후회하지 않겠어?”
묵의 물음에 여울은 호영과 작별을 하고 사부님을 따라나서던 그날을 떠올렸다.
버리지 않아. 끝까지 함께 갈 거야.
“선택에 아픔은 있어도 후회는 없어.”
“상처가 나으면 숲으로 돌아갈지도 몰라.”
“괜찮아. 말했잖아. 아파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순간, 그녀의 어깨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어?”
떡하니 오른쪽 어깨에 이랑군을 걸친 묵이 여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오, 라버니.”
“너의 것이라면. 후회도 아픔도 내가 안고 가마.”
묵은 여울의 손을 꼭 잡고 영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응?”
“고마워.”
“대신! 이랑군이 돌아가겠다 하면 풀어 주는 거다.”
“응!”
“아주 오지랖이 쌍으로 풍년이야!”
뒤따르는 반야의 투덜거림이 가락도 없이 노래처럼 이어진다.
“내가 제명에 못 살아. 못 산다고. 내가 왜! 천적인 늑대랑 한 지붕 아래 살아야 하냐고. 왜! 왜에에에에!”